최근 수정 시각 : 2025-08-25 16:25:31

울주 천전리 암각화


{{{#!wiki style="margin:-12px -0px"<tablebordercolor=#221e1f,#fff>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 화이트.svg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svg
}}}
{{{#!wiki style="color:#fff; margin:-0px -10px -5px; min-height:26px" dark-style="color:#221e1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대곡리 암각화

천전리 암각화
}}}}}}}}}
천전리 암각화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120deg, #fff 5%, #000 5.1% 9%, #fff 9.1% 10%, #000 10.1% 14%, #fff 14.1% 15%, #000 15.1% 19%, #fff 19.1% 81%, #cd313a 81.1% 90%, #0047a0 90.1%)"
{{{#!wiki style="margin: -12px -0px"
<tablebordercolor=#fff,#fff>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svg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문화유산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창덕궁

수원화성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조선왕릉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양동

남한산성

백제역사유적지구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한국의 서원

가야고분군

반구천의 암각화
자연유산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한국의 갯벌
}}}}}}}}}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國寶
{{{#!wiki style="margin: 0 -10px -5px"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12%;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1~50호]
{{{#!wiki style="margin: -10px 0"
1.#26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1.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2.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3. 성덕대왕신종
  4.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5. 경주 첨성대
  6.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7. 창녕 진흥왕 척경비
  8.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9.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10. 상원사 동종
  11.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12.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13.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14.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15.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16.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17. 혜심고신제서
  18. 장흥 보림사 남 · 북 삼층석탑 및 석등
  19.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20. 부석사 조사당 벽화
  21.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22.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23. 예산 수덕사 대웅전
  24. 영암 도갑사 해탈문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12%;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51~1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transparent><tablebgcolor=transparent>
1.#76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1.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2.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1)
  3.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
  4.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5.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6.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
  8.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9.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10.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11.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12. 금관총 금제 허리띠
  13.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
  14.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
  15.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16.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
  17.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
  18. 청자 참외모양 병
  19. 청자 투각칠보문뚜껑 향로
  20. 청자 구룡형 주전자
  21. 청자 음각연화당초문 매병
  22. 청자 상감모란문 항아리
  23. 김천 갈항사지 동 · 서 삼층석탑
  24.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12%;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101~15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transparent><tablebgcolor=transparent>
1.#101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1.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
  2.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3.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4.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5.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6.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7. 계유명삼존천불비상
  8.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9. 이제현 초상
  10. 안향 초상
  11.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12. 청자 철화양류문 통형 병
  13. 청자 상감모란국화문 참외모양 병
  14. 청자 상감당초문 완
  15. 청자 상감모란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16.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1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4)
  18.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19. 용주사 동종
  20.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
  21.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22.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23.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24. 녹유골호(부석제외함)
1.#126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1.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
  2. 금동관음보살입상
  3. 금동보살입상(1968)
  4.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
  5. 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고문서
  6. 징비록
  7.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8. 금동보살삼존상
  9.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10. 금동 용두보당
  11.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검 및 칼집 부속 / 투겁창 및 꺾창
  12.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13. 김홍도필 군선도 병풍
  14. 나전 화문 동경
  15. 정문경
  16. 동국정운
  17.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18.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19. 귀면 청동로
  20. 전 논산 청동방울 일괄
  21.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22.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6 /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7
  23.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4, 5 /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6
  24. 송조표전총류 권7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12%;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151~2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transparent><tablebgcolor=transparent>
1.#151 조선왕조실록
  1. 비변사등록
  2. 일성록
  3. 무령왕 금제 관식
  4. 무령왕비 금제 관식
  5. 무령왕 금귀걸이
  6. 무령왕비 금귀걸이
  7. 무령왕비 금목걸이
  8. 무령왕 금제 뒤꽂이
  9. 무령왕비 은팔찌
  10. 무령왕릉 청동거울 일괄
  11. 무령왕릉 석수
  12. 무령왕릉 지석
  13. 무령왕비 베개
  14. 무령왕 발받침
  15.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
  16. 청자 인물형 주전자
  17.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text-align:center; padding: 5px 10px; margin: -5px -10px; width:min(100%, 410px); background: #ddd" dark-style="background: #383b40"
백자 동화매국문 병}}}
  1. 청자 양각죽절문 병
  2. 백자 청화매조죽문 유개항아리
  3. 청동 은입사 봉황문 합
  4. 진양군 영인정씨 묘 출토유물
  5. 청자 퇴화점문 나한좌상
  6. 금동 수정 장식 촛대
  7. 백자 상감연화당초문 대접
1.#176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
  1.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2. 분청사기 음각어문 편병
  3. 분청사기 박지연화어문 편병
  4. 김정희필 세한도
  5. 장양수 홍패
  6.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7.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1)
  8.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2)
  9. 상지은니묘법연화경
  10. 양평 신화리 금동여래입상
  11.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12. 천마총 금관
  13. 천마총 관모
  14. 천마총 금제 허리띠
  15. 황남대총 북분 금관
  16.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17.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18.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19. 토우장식 장경호
  20.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
  21.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22. 단양 신라 적성비
  23.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24. 금동보살입상(1979)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12%;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201~25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transparent><tablebgcolor=transparent>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12%;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251~3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transparent><tablebgcolor=transparent>
1.#251 초조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14
  1. 청자 음각'효문'명 연화문 매병
  2. 청자 양각연화당초상감모란문 은테 발
  3. 청자 음각연화문 유개매병
  4. 전 덕산 청동방울 일괄
  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
  6.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
  7. 백자 청화죽문 각병
  8.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9. 분청사기 박지철채모란문 자라병
  10. 백자 유개항아리
  11. 백자 달항아리(1991)
  12. 백자 청화산수화조문 항아리
  13. 포항 냉수리 신라비
  14.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3
  1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 75
  16. 초조본 아비달마식신족론 권12
  17. 초조본 아비담비파사론 권11, 17
  18. 초조본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 권6
  19.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20. 초조본 현양성교론 권12
  21.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32
  22.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15
  23.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text-align:center; padding: 5px 10px; margin: -5px -10px; width:min(100%, 410px); background: #ddd" dark-style="background: #383b40"
귀함별황자총통(1596년조)}}}
  1.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1.#276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53
  1.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2.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text-align:center; padding: 5px 10px; margin: -5px -10px; width:min(100%, 410px); background: #ddd" dark-style="background: #383b40"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1.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4
  2.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3. 백자 병형 주전자
  4.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5. 통감속편
  6.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7.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8. 백자 ‘천’ ‘지’ ‘현’ ‘황’명 발
  9. 백제 금동대향로
  10.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11.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12.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13. 용감수경 권3~4
  14.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15.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16.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
  17. 나주 신촌리 금동관
  18. 칠장사 오불회 괘불탱
  19.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20. 갑사 삼신불 괘불탱
  21.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22.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12%;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301~336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transparent><tablebgcolor=transparent>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12%;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번호폐지 이후(번호없음)]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transparent><tablebgcolor=transparent>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틀:대한민국의 국보 1~30호, version=27, uuid=b16ef97f-b363-494a-ab2a-e95ccd5f503f,
title2=틀:대한민국의 국보 31~60호, version2=23, uuid2=979147df-3a26-481f-b049-2bed6c206bdc,
title3=틀:대한민국의 국보 61~90호, version3=18, uuid3=a651288c-6ac5-4be6-aabd-d4ff8ce28b2d,
title4=틀:대한민국의 국보 91~120호, version4=16, uuid4=47b78863-c197-4fb3-8fa6-911be58d2f63,
title5=틀:대한민국의 국보 121~150호, version5=18, uuid5=38233d15-3cf9-4c93-833c-94c06a6fbf8b,
title6=틀:대한민국의 국보 151~180호, version6=15, uuid6=edf3cf60-9adb-4a8f-8ee0-0b7fbc07c52f,
title7=틀:대한민국의 국보 181~210호, version7=13, uuid7=dc5f6abf-c5c1-4679-b79e-a752e027eb8b,
title8=틀:대한민국의 국보 211~240호, version8=15, uuid8=0da4ae8e-4b56-4578-9135-01ed7dddf02a,
title9=틀:대한민국의 국보 241~270호, version9=13, uuid9=98999a90-809a-452b-9fd0-6721c558ff35,
title10=틀:대한민국의 국보 271~300호, version10=12, uuid10=d3cf8eb4-7dea-45c4-8db8-f764102672c0,
title11=틀:대한민국의 국보 301~330호, version11=21, uuid11=654db38a-ea8b-426b-a33e-245918ddd995,
title12=틀:대한민국의 국보 331~360호, version12=14, uuid12=6bc2ec27-8f76-40cf-9ef0-c2d80032b65e)]
파일:한반도아이콘.svg 한반도 선사 유적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구석기시대상원 검은모루동굴 유적, 덕천 승리산동굴 유적[1], 만달리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2], 공주 석장리 유적[3], 두루봉동굴 유적[4]
신석기시대서울 암사동 유적, 반구천의 암각화 (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울주 천전리 암각화 ), 제주 고산리 유적[5], 양양 오산리 유적[6]
청동기시대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 화순 효산리와 대신리 지석묘군, 강화 부근리 지석묘 ), 부여 송국리 유적[7], 대구 진천동 입석, 사월동지석묘군, 속초 조양동 유적
초기 철기시대광주 신창동 유적
연속적 시대 대전 둔산 선사유적지구석기~청동기, 하남 미사리 유적신석기~철기, 굴포리 서포항 유적구석기~청동기[8]
기타 패총 유적 목록
※ 문서가 있는 경우만 서술. 밑줄은 세계유산.
[ 각주 펼치기 · 접기 ]

[1] 문서에 나오듯 산 이름이 우상화 지명이라서 통일 후 개명 가능성이 높다.[2] 사적 지정, 학설을 뒤집은 유적[3] 남한 최초로 발견된 구석기 유적이며 한강 이남에도 구석기 문화가 있었음을 밝혀냈다.[4] 유적지는 멸실되고 유물만 충북대학교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5] 한반도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이며 구석기에서 넘어온 과도기 모습을 가졌다.[6] 층서가 형성됐고 토기 종류가 다양해 한국 신석기 문화의 변천, 흐름을 잘 보여준다.[7] 한반도 남부 최초 발견된 초기 청동기 유적[8] 해방후 한반도 최초 발견 구석기 유적 포함
}}}}}}}}}

{{{#!wiki style="margin:-10px -10px"<tablebordercolor=#008b95>
파일:울산광역시 휘장_White.svg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f5f5f5,#2d2f34> 중구 태화강 국가정원 십리대숲
남구 울산대공원 장생포 고래문화마을
동구 대왕암공원 울산대교 야경
북구 강동·주전 몽돌해변
울주군 간절곶 일출 가지산 사계
신불산 억새평원 반구대 암각화천전리 각석
외고산 옹기마을 대운산 내원암 계곡
}}}}}}}}} ||

<colbgcolor=#009a44> {{{#!wiki style="margin:-10px -10px"<tablebordercolor=#009a44>
파일:울주군 CI_White.svg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언양읍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온양읍 대운산 내원암 계곡 외고산 옹기마을
삼남읍 작괘천 계곡
두동면 울주 천전리 각석
상북면 파래소 폭포 내원사 계곡 억새평원 자수정 동굴나라 가지산
서생면 간절곶
}}}}}}}}} ||
{{{#!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국보
<colbgcolor=#315288>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蔚州 川前里 銘文과 岩刻畫
Petroglyphs of Cheonjeon-ri, Ulju
소재지 <colbgcolor=#fff,#1f2023>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2
분류 유물 / 일반조각 / 암벽조각 / 각석
수량/면적 1기
지정일 1973년 5월 4일
시대 선사시대 이후
소유단체 국유
관리단체 울주군 }}}
파일:external/crm.usgne.go.kr/IMG_2377_1327658330.jpg
<colbgcolor=#315288>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파일:external/blog.joins.com/4e5f38248bcee.jpg
암각화의 탁본

1. 개요2. 명칭3. 내용
3.1. 선사시대3.2. 신라시대
4. 관람5. 기타6. 2011년 훼손 사건7. 외부 링크8. 국보 제147호

1. 개요



이름 그대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위치한 길이 9.5m, 높이 2.7m의 암각화금석문. 청동기 시대~신라 시기에 기록되었고 태화강 지류 대곡천에 위치한다. 1970년 12월 24일, 황수영·문명대 교수가 이끄는 '동국대학교 울산지구 불적 조사대'가 반고사 터를 조사하다가 근처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147호이며, 근처 반구대 암각화[1]와 함께《반구천의 암각화》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2025년 7월 12일 등재됐다.

이 곳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언양읍양산시를 거쳐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암각화는 이 대로에서 살짝 비켜난 서늘한 계곡에 자리잡고 있어서 한여름 피서를 즐기기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바위는 주변의 흔한 화강암 바위와 달리 셰일(shale) 재질로 단단하지 않고 조각하기 쉬운데다, 칠판처럼 평평하면서도 15도 가량 살짝 기울어져 있어서 윗부분에도 손이 쉽게 닿는다. 그런 점에서 수 천년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새겨넣었다.

2. 명칭

명칭은 원래는 각석(刻石: 새긴 돌)이라고 이름붙여졌으나, 이후 서석(書石: 글을 쓴 돌)이라고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서석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당장 신라인이 당시에 이 곳을 서석곡(書石谷)이라고 불렀다고 여기에 씐 만큼 서석이라고 부름이 과거 명칭에도 부합하기도 한다. 다만 학계에서는 엄연히 신라대 이전에 새겨진 것이 많이 있고 글로 새겨진 금석문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암각화[2]라고 부르는 것을 권한다.

물론 울산광역시는 각석이라는 명칭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여 각석, 서석, 암각화가 통용되고, 현지 안내표기도 각석이고 현지인들도 각석이라는 명칭에 익숙하다. 이 항목에서는 금석문 외의 가치도 고려하는 역사학계의 주장을 고려하여 암각화로 표기한다.

3. 내용

파일:천전리 명문과 암각화.jpg

3.1. 선사시대

주로 바위의 위쪽 부분에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대거 새겨져 있다. 여기에는 근처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도 그렇고 다른 여러 선사시대 암각화들이 주로 고래 같은 동물이나 일상생활, 기원 등을 묘사한 것과 다르게 천전리 암각화는 마름모 혹은 정사각형, , 꽈배기 모양 등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기 힘든 기하학적인 도형 등이 다양하게 새겨져 있으며, 대부분의 도형을 이중선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것들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천전리 암각화의 선사시대 그림들은 유형에 따라 크게 두 가지의 분류로 나누어지며, 이 다른 두 유형의 그림들은 그림을 그린 연대는 물론 그림을 그린 민족의 주체까지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것은 반구대 암각화문서의 누가 그렸는가?부분을 참조.

선사시대의 그림이 바위 위쪽 부분에만 몰려 있고 반대로 신라시대의 글과 그림이 바위 아래에만 있는 이유는 주변 지형의 변화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바위는 15도 정도로 기울어져 위쪽 부분에 손이 닿는다 해도 높이가 2.7m나 되므로 받침대 같은 것이 없는 이상 안정적으로 바위 위쪽 부분에 그림을 새기기는 어렵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비어 있는 아래 부분을 놔두고 일부러 바위 위쪽에만 그림을 새길 이유는 없으므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이 바위에 그림을 새길 당시에는 바위 아래 상당 부분이 토사에 묻혀있어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현재의 위쪽 부분에만 그림을 새긴 것인데 그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나며 대곡천의 흐름이 변하고 홍수가 나는 등의 이유로 토사들이 쓸려 나가 바위의 아래 부분도 드러난 것이다. 지금은 대곡천의 양 끝에 대곡호와 사연호가 있어 수위 조절이 되지만 과거에 대곡천에 홍수가 일어날 경우 이 바위 아래 부분까지 잠길 정도였다고 한다.

어쨌든 신라시대 사람들이 바위를 발견했을 때에는 바위의 아래 부분이 다 드러난 상태였을 텐데 과거 누군가의 그림이 있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빈 공간에 글과 그림을 새겼다고 볼 수 있다.

3.2. 신라시대

주로 바위의 아래쪽 부분에 있으며, 위쪽의 선사시대 암각화보다 훨씬 이후 시대인 신라시대에 신라인들이 새긴 명문과 그림들이 남아있다.

그림 중에 선사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림들이 신라시대의 그림이다. 을 단 선박, , , 기마행렬도 같은 그림들이 있다.

그리고 선사시대엔 글자가 없었으므로 여기 있는 글씨는 모두 신라시대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선사시대의 기록은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이런 글씨는 한문이라는 문자로 써 있으므로 정확한 의미 해독이 가능하다. 여기에 남아있는 여러 인명은 삼국사기 등 기존 기록에 등장하는 인명과 교차검증되는 것도 많아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신라시대의 명문은 몇 백년에 걸친 광범위한 시기에 여러 가지가 새겨졌는데, 연호나 간지 등이 있어 그 시기를 대강이라도 알 수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글은 453년(눌지 마립간 37) 혹은 513년(지증왕 14)에 작성된 계사명(癸巳銘)이다. 계사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癸巳六月卄二日 喙壹奮 王夫 … 奈 夫人輩衆大等 … 部書人小 … 思郞女□作 鄒?呑越?釋? 尒小知大兄加 豆篤知大兄加 宮頭辭 … 老岑邽?婁?
癸巳年(453년, 눌지 마립간 37년) 6월 22일 닭(부)의 일분 왕부…나(마) 부인배중대등…부서인소…사랑녀□작 추?탄월?석? 일소지 대형가와 두독지 대형가 궁두사…노잠규?루?

해당 내용은 선이 가늘고 글자가 큰 탓에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이 명문에 개의치 않고 후대에 새겨진 명문으로 훼손되거나 삭제된 부분이 많으며 내용을 알기 힘들고, 이후에 나올 원명에서 입종갈문왕이 525년에 방문했을 때 이름 없고 알려지지 않은 계곡이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그 이전의 계사년인 513년 혹은 453년으로 비정할 뿐이다. 구체적으로는 525년과 시간상 좀 더 떨어져 있는 453년으로 비정하며, 중간에 등장하는 대형가(大兄加)를 고구려 관등 대형大兄으로 받아들인다면 456년 장수왕의 백제 공격때 신라가 백제를 도운 것으로 고-신 사이가 틀어졌으므로[3] 고구려 관등을 가진 사람이 이곳을 방문하려면 453년이어야 한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다만 일반적으로 대형(大兄)으로 알려져 있는 고구려 관등이 대형가(大兄加)로 적힌 것은 이 명문에서만 발견된다는 가치가 있다.[4]

천전리 명문들 중 시기도 특정되면서 내용상으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위 아래 중간 부분에 빽빽하게 글씨를 새긴 원명(原銘, 을사명)과 추명(追銘, 기미명)이다. 이 두 글은 각각 사각형의 테두리를 치고[5] 그 안에 글씨를 새겨 넣었다. 두 글은 물리적으로도 붙어 있는데다 내용상으로도 연결되므로 먼저 쓴 글을 원명이라 하고 그 다음에 쓴 글을 추명이라고 한다. 원명은 오른쪽에, 추명은 왼쪽에 있다.

그 중 원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乙巳… 沙喙部葛… 文王覓遊來始得見谷 十 乙 十二道 之古來?无名谷善石得造書? 記?以下爲名書石谷字作之? 幷遊友妹聖德光妙於史 鄒女郞王之 食?多煞作功?人尒利夫智大奈[6]… 悉得斯智大舍帝智▨作食… ▨▨智壹?吉干支妻居?知尸奚夫?… 眞?宍智沙干支妻阿丂?牟弘夫人 作書人慕 : 尒智大舍帝智
을사년(乙巳年)에 사탁부(沙喙部)의 갈문왕(葛文王)이 찾아 놀러와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 오래된 골짜기인데, 이름없는 골짜기이므로,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이로 말미암아) 서석곡(書石谷)으로 이름을 삼아 명문을 새겼다. 더불어 놀러온 이는 (갈문왕과) 우매(友妹)인 여덕광묘(麗德光妙)한 어사추안랑왕(於史鄒安郞王)[7]이다. 식다살작공인(食多煞作功人)[8]은 이리부지(尒利夫智) 대나(마)와 실득사지(悉淂斯智) 대사제지이며, 밥을 지은 이는 영지지(榮知智) 일길간지의 아내 거지시해부인(居知尸奚夫人)과 진육지(眞宍智) 사간지의 아내 아혜모홍부인(阿兮牟弘夫人)이고, 글을 적은 이는 모모이지(慕慕尒智) 대사제지이다.

525년(법흥왕 12)에 사탁부를 다스리던 사부지 갈문왕과 그 누이 및 어사추안랑왕[9]을 비롯한 여럿이서 놀러왔는데 이름도 모르는 이곳에 글 새기기도 좋은 돌이 있어서 이 장소를 서석곡이라 짓고 여기다 방명록 새기고 갔다라는 내용이다. 이외에도 같이 온 사람들과 사냥을 즐긴 사람, 음식을 한 사람과 명문을 새긴 사람까지 모두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상의 내용이 원래 새긴 것이라 하여 원명(原銘)이라고 한다.

그 후 새긴 추명(追銘)은 1차 내용, 즉 원명을 새긴 것이 525년(법흥왕 12) 6월 18일 새벽이었으며 그 후 세월이 흘러 사부지 갈문왕과 당시 같이 놀러왔던 누이와 어사추안랑왕은 죽었고, 법흥왕비 보도부인(保刀夫人), 사부지 갈문왕이 어린 삼맥종[10] 등을 539년(법흥왕 26) 7월 3일에 데리고 왔다. 역시 이번에도 총책임자, 예를 드리러 온 사람, 음식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추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過去乙巳年六月十八日昧沙喙」部徙夫知葛文王妹於史鄒安郎」三共遊來以後▨年八巳年過去妹王考」妹王過人丁巳年王過去其王妃只沒尸兮妃」愛自思己未年七月三日其王与妹共見書石」叱見來谷此時共三來 另卽知太王妃夫乞」支妃徙夫知王予郎深▨夫知共來 此?時▨」作功臣喙部知礼夫知沙干支▨泊六知」居伐干支礼臣丁乙尒知奈麻作食人眞」宍智波珎干支婦阿兮牟呼夫人尒夫知居伐干支婦」一利等次夫人居礼次▨干支婦沙爻功夫人分共作之
지난 을사년 6월 18일 새벽 사탁부 사부지 갈문왕과 누이와 어사추안랑 셋[11] 이 함께 놀러온 이후 ▨년이 지났다. 팔사년 지난 날 누이의 모습, 왕은 누이를 생각했다. 왕은 회상했다. 왕은 지난 정사년에 있었던 왕비 지몰시혜비를 사랑하여 스스로 생각했다. 기미년 7월 3일에 왕과 누이는 함께 서석을 보러 왔다. 계곡을 보러왔을 때 함께 셋이 왔는데, 모즉지태왕비 부걸지비[12], 사부지왕자랑심맥부지가 함께 왔다. 이 때 ▨작공신(▨作功臣)[13]은 탁부(喙部) 지례부지(知礼夫知) 사간지와 ▨박육지(▨泊六知) 거벌간지이며, 예신(禮臣)[14]은 정을이지(丁乙尒知) 나마이다. 밥을 지은 이는 진육지(眞宍知) 파진간지의 아내인 아혜모호부인(阿兮牟呼夫人)과 이부지(尒夫知) 거벌간지의 아내인 일리등차부인(一利等次夫人)과 거례차(居礼次) ▨간지(▨干支)의 아내인 사효공부인(沙爻功夫人)으로 나누어 함께 지었다.

이름을 단순히 나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디의 누구, 누구의 부인 누구 라는 식으로 꽤 정확히 적어놓았는데, 다른 사료에 나오는 인명과 겹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중에 누구인지 확인이 안 되는 사람도 있다. 일단 사부지 갈문왕의 누이와 어사추안랑이 누구인지, 동일인물인지조차 알 수 없다.[15] 다만 법흥왕의 왕비, 갈문왕의 왕비인 지소태후가 추명에서 언급되기 때문에 법흥왕과 사부지 갈문왕에게 여자형제가 있었던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이 원명과 추명은 단순한 내용이지만 상당히 많은 정보를 함축한다. 예를 들어 추명에서 법흥왕을 '모즉지태왕'으로 칭하는데 15년 전인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는 '모즉지 매금왕'이었던 것이 태왕으로 표기가 바뀐 것이다. 이를 두고 법흥왕대의 왕권 강화책이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다만, 아래는 2019년 대곡천 암각화군 종합연구보고서에서 밝힌 울산대학교 전호태 교수의 판독 및 해석이다. 내용이 조금 다르다.
아래는 을사명(원명)이다.
乙巳…沙喙部葛…文王覓遊來始得見谷 十 乙 十二道 之古來?无名谷善石得造書? 記?以下爲名書石谷字作之? 幷遊友妹聖德光妙於史 鄒女郞王之 □多煞作功?人尒利夫智奈… 悉得斯智大舍帝智□作食… □□智壹?吉干支妻居?知尸奚夫?… 眞?宍智沙干支妻阿丂?牟弘夫人 作書人慕 : 尒智大舍帝智
乙巳年(525년, 법흥왕 12년)~에 사닭부의 갈(문왕이신 사부지 갈)문왕께서 찾아 놀러 오셔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시게 되었다. 옛날부터 이름이 없던 골짜기였는데, 좋은 돌을 얻어 쓸[書記] 수 있게 되니 이름 짓기를 書石谷이라 하시고 글자를 적게 하셨다. 함께 놀러온 友妹는 성스런 덕이 빛처럼 오묘하신[聖德光妙:여덕광묘] 於史鄒女郞王(어사추여랑왕)이시다. □多煞作□(功?)人은 尒利夫智奈(이리부지나)(麻와)悉得斯智大舍帝智이며, □作食(人은) □□智 壹?吉干支의 妻인 □(居?)知尸奚 夫(人과) □(眞?)宍智 沙干支의 妻인 阿丂?牟弘 夫人이다. 글을 쓴 사람[作書人]은 慕慕尒智 大舍帝智이다.

아래는 기미명(추명)이다.
過去乙巳年六月十八日昧沙喙 善 部徙夫知葛文王王妹於史鄒女郞 王共遊來以後□□十八□□過□妹王考 妹王過人丁巳年王過去其王妃只沒尸兮妃 天 愛自思己未年七月三日其王与妹共見書石 叱見來谷此時共王來 另卽知太王妃夫乞? 夫 支妃徙夫知王子郞深□夫知共來此?時□ 作□□喙部□礼夫知□干支 □六知 仇良 居伐干支□乙□□知奈麻□食人眞 宍智波珎干支婦何□牟呼夫人□夫知居伐干支婦 □利等□夫人□□□□干支□沙□□夫人分共作之
지나간[過去] 乙巳年(525년) 6월 18일 새벽에 사닭부(사탁부)의 徙夫知 葛文王(사부지 갈문왕)과 王妹(왕의 누이)인 於史鄒 女郞王(어사추 여랑왕)께서 함께 놀러 오신 이후 □□十八□□이 지나갔다 . 妹王(누이)을 생각하니 妹王(누이)는 돌아간 사람이라, 丁巳年(정사년,537, 법흥왕 24년)에는 王께서도 돌아가시니[過去] , 그 왕비인 只沒尸兮妃(지소태후)가 애달프게 그리워하시다가 己未年(기미년,539, 법흥왕 26년) 7월 3일에 그 왕과 누이가 함께 보고 글을 써놓은 돌을 보려고 골짜기에 오시었다. 이때 함께 여러 왕 오시니, 另卽知 太王(모즉지태왕)의 妃(비)인 夫乞?支妃(부걸지비)와 徙夫知王(사부지왕)의 子郞(자낭:아들)이신 深□夫知(심맥부지)께서 함께 오셨다. 이때 □作□□은 닭부의 □礼夫知 □干支와 □六知 居伐干支, □乙□□知 奈麻이며, □食人은 眞宍智 波珎干支의 婦인 何□牟呼 夫人과 □夫知 居伐干支의 婦인 □利等□ 夫人, □□□□干支의 □(婦)인 沙□□ 夫人이 나누어 함께 지었다.

위의 해석에 따르면 539년 기미년의 계곡에 다시 방문한 사람은 사부지 갈문왕이 아닌 그 아내 지소태은이고, 어사추안랑은 왕의 친한 여동생이자 약혼녀가 아니라 왕의 누이로 이름이 '어사추여랑왕'인 사람이다. 또 위의 해석처럼 입종 갈문왕이 이미 죽었다는 누이 거기에 더해 같이 온 사람이 보도부인, 사부지왕자, 심맥부지(진흥왕)의 별개 세 사람이 아니라, 三을 王으로 읽어 여러 왕들이 함께 왔는데 지소태후와 함께 온 왕들이 보도부인과 사부지왕자(=심맥부지=진흥왕) 두 사람인 것이다. [16] 또한 입종갈문왕의 아내 지소태후는 입종갈문왕의 형의 딸, 그러니까 조카인데, 입종갈문왕은 법흥왕의 동생이고 보도부인은 법흥왕의 아내이니 지소태후는 보도부인의 딸이다. 또한 후대의 진흥왕은 사부지왕자로 입종갈문왕의 아들이니, 이는 지소태후의 아들이다. 즉 입종갈문왕이 (누나는 죽었다고 해도) 뜬금없이 자기 아들 그리고 형수랑 같이 오는 것보다는, 입종갈문왕의 아내 지소태후가 자기 남편 옛날에 놀러온 곳 둘러볼 겸 자기 아들와 어머니를 데리고 왔다는 쪽이 더 이치에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어느 쪽이던 우매어사추안랑왕지[17] 인지 우매 어사추여랑삼지[18] 인지는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전호태 교수 외에도 강종훈 교수가 전자를 지지하고 이 경우 말이 통하는 부분이 많고 왕과 왕의 누이의 근친 로맨스까지 망상하게 되는(위의 다큐도 그러한 해석을 기반으로 한다) 해석이 있는 데 반해 여전히 사내 랑(郞) 자가 어째서 여자인 왕의 누이에게 붙었는지는 해석할 수 없다.

원명과 추명은 사각형의 테두리를 그어놓고 매우 공들여 조각했는데 특히 추명은 글씨 아래에 어떤 인물 그림의 하반신 부분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추명을 새긴 자리에 원래는 어떤 인물 그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상반신 부분을 갈아내버리고 추명을 새긴 것이다. 추명은 539년에 새겼으므로 즉 그림은 그 이전에 새긴 것이 되는데 이 원명, 추명만 하더라도 천전리 명문 전체의 관점에서는 꽤 이른 시기에 쓴 것이므로 신라 시대만 하더라도 꽤 광범위한 기간에 걸쳐 여러 글과 그림들이 새겨졌음을 알 수 있다.

위의 계사명, 원명, 추명 외에도 바위 이곳저곳에 신라인들이 새겨놓은 명문이 많이 있는데 연도나 간지와 함께 내용이 새겨진 글, 단순히 이름만 새겨놓은 글, 글씨가 부분적으로 마멸돼 파편화된 글로 나눠 보면 연도나 간지가 새겨진 글 들 중 중요한 글들이 몇 개 더 있다.

그 중 을묘명(乙卯銘)은 내용이 다음과 같다.
乙卯年八月四日聖法興大王節 道人比丘僧安及以沙彌 僧首乃至居智伐村衆士 □人等見記
을묘년(乙卯年) 8월 4일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때에 도인 비구승 안급이(安及以), 사미승 수내지(首乃至)와 거지벌촌(居智伐村)의 중사□인 등이 보고 새기다.

법흥왕을 성법흥대왕이라고 칭해 눈길을 끄는 명문으로 법흥왕 재위 중의 을묘년이면 535년(법흥왕 22)에 해당하며 당시의 신라인들이 이미 법흥왕으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시호가 아닌 살아있을 때의 왕호임을 알 수 있다. 그냥 법흥왕이 아닌 성법흥대왕으로 높여 부르고 있는데 4년 뒤에 새겨지는 추명에서도 법흥왕을 모즉지태왕, 태왕이라 높여 부르기 때문에 이 무렵 법흥왕의 왕권이 강해져 사회적, 종교적 위상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거지벌촌은 언양의 옛 지명이다.

원명과 추명 다음으로 가장 글의 양이 많은 을축명(乙丑銘)도 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乙丑年九月中沙喙部干西□ 夫智佊珎干支妻夫人阿刀郞女 谷見來時前立人閑□氣? 乙□居……………悉工栽? ……次□… …心靑夫智在 …杪?有?夫智世□ …春夫之世□□背三竹… …□丈夫………三人共?耒?
을축년(乙丑年) 9월 중 사훼부(沙喙部)의 간서□부지(于西□夫智) 피진간지(佊珎干支)의 아내인 부인(夫人) 아도랑녀가 계곡을 보러 왔을 때에, 앞에 선 사람은…… (해석 불가)

고위 관등 중 하나인 피진간지(파진찬)가 등장해서 눈길을 끄는 명문이다. 간지명만 있어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6세기 이후에는 사라지는, 이름 뒤에 붙이는 존칭인 '智'가 보이고 관등명에 붙은 '支' 역시 단양 신라 적성비 이후에는 사라지기 때문에 시점을 고려해본다면 545년(진흥왕 6년)으로 추정한다.

위의 계사명(453or513), 원명(525), 을묘명(535), 추명(539), 을축명(545) 외에도 바위 이곳저곳에 새겨놓은 명문이 많이 있다. 이들 중 연도나 간지로 연대가 확인되면서 관등명, 인명 같은 것이 등장하고 내용상 어떤 의미가 있어 보이는 것으로 갑인명(534), 계해명(543), 상원2년명(675), 상원4년명(677), 개원12년명(724), 병신명(756), 개성3년명(838) 등이 있다.

이름만 쓰여 있는 것은 대부분 화랑, 승려 등이 놀러와서 자기들 이름이나 메시지를 새겨놓고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무오유월이일 영랑성업(戊午六月二日 永郞成業)으로 추정되는 기타명의 경우 무오년[19] 6월 2일 영랑이 업적을 달성하다 라는 의미로 '영랑'이라는 화랑이 어떤 목표를 달성한 것을 기념하여 새긴 것으로 보인다.

당시를 살았던 화랑들이 본인의 이름을 여럿 적어놓고 간 덕분에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작이라는 것의 한 가지 증거가 된다. 삼국사기 등 다른 데서 나오지 않고 오직 화랑세기에만 나오는 화랑들의 명단과 암각화에 적힌 화랑들의 이름 중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

4. 관람

울산광역시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울산 버스 348을 이용하면 갈 수 있는데 하루에 몇 번 안 다니기 때문에 시간표를 맞춰야 하며, 울산역이나 언양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면 환승도 해야 한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계곡 안쪽에 있어 자가용을 이용하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어느 정도는 걸어야 한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까지 산책로로 이어져 있고 일정이 촉박하지 않다면 이 길을 통해 둘 다 보는 것도 괜찮다. 이 근처 계곡 자체가 석기시대 사람들부터 신라 진흥왕, 고려 정몽주, 조선 정선까지 많은 유명인들이 찾아 흔적을 남길 정도로 기본적으로 경치가 좋은 곳이라서 꼭 암각화가 아니라도 충분히 걸어서 둘러볼 가치가 있다.

바위 위치와 관람객 위치가 너무 멀어서 육안으로 보기 힘든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달리 바위에서 훨씬 가까운 위치에서 볼 수 있다. 반구대가 더 유명하긴 하지만 선사시대 암각화를 실제로 보는 게 목적이라면 여기로 가는 게 낫다.

근처에 울주대곡박물관이 있는데, 천전리 암각화와 직접적 관련은 없고 인근에 대곡을 만들면서 수몰된 지역의 문화재를 주로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5. 기타

과거 기록에 이후의 사람들이 낙서를 했으나 그 낙서 역시 유물로 인정받는 예시로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 순수비에 낙서한 것은 추사 김정희로, 역시 자신의 방문 기록을 비석에 남겼다.

천전리 암각화 바로 맞은편에는 공룡 발자국 화석이 있다.

6. 2011년 훼손 사건

2011년 8월 30일 ‘이상현’이란 낙서가 발견된다. 문화재해설사가 이미 한 달 전인 7월에 관리인에게 알렸지만 관리인은 큰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가 울주군에 뒷북으로 보고하게 된다. 그러다가 뒤늦게 사태파악을 한 군청에선 경찰에 이상현이라는 이름을 새긴 사람을 수사의뢰 한다. 한달 뒤 경찰은 고교 2년생인 A군을 이상현 사건의 범인으로 특정하고 입건하였다. A군은 범행동기에 대해 단지 “친구를 놀려주고 싶었다” 란 이유로 저질렀다고 한다. 바위가 시간을 뛰어넘어 현 시대에도 방명록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지만 동시에 한 고등학생의 교양 없는 행동으로 벌어진 국보 훼손 사건이기도 했다.

7. 외부 링크

8. 국보 제147호

태화강 물줄기인 대곡천 중류의 기슭에 각종 도형과 글, 그림이 새겨진 암석으로, 아래 · 위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 사실성이 떨어지는 단순화된 형태인데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半人半獸:머리는 사람, 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눈에 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 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기마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배그림은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글자는 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 6부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 사상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어느 특정 시대를 대표한다기보다 여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1] 바로 옆은 아니지만 그리 멀지 않다. 같은 계곡에 있어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둘을 세트로 묶어서 둘러본다. 자가용으로 갈 수도 있고, 걸어서 간다면 약간의 계곡 산책길 정도를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2] 다만 엄밀히는 암각화라기보다는 새겨진 게 전부 그림이 아니라 글도 있으므로 암각(돌에 새김)이라는 명칭만으로 충분하지만, 근처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 등의 명칭과 통일성을 고려하였다고 한다.[3] 1차 나제동맹은 433년 맺어졌으나, 충주고구려비의 추정건립연도인 449년까지 고구려와 신라가 우호관계이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충주고구려비 건립연도가 449년이 맞을 경우의 이야기이다.[4] 당 고종 현경 5년 장초금이 저술한 한원(翰苑)에는 대형(大兄)이 아닌 대형가(大兄加)가 고구려 관등명으로 기록되었다.[5] 원명은 사각형의 오른쪽 부분과 아래쪽이 약간 떨어져 나간 상태다.[6] 각석에서는 '大'와 '奈'가 위아래로 합자된 형태로 새겨져 있다. 이를 그냥 '奈'로 판독하는 학자들도 꽤 있는 편이다.[7] 또는 어사추여랑 셋[8] 갈문왕 일행의 행차를 준비하고 주관했던 직책으로 추정된다.[9] 왕이 꼭 군주를 말하는 게 아니라 고귀한 사람, 혹은 신라 안에서도 한 내부 집단의 수장급 인물에게 붙이는 경칭으로 본다.[10] 훗날의 진흥왕. 여기에는 심맥부(深□夫, 가운데 글자는 판독불가)로 써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삼맥종 혹은 심맥부라고도 한다고 써 있으니 곧 진흥왕이다.[11] 安을 女로 읽어 '어사추여랑'으로 해독하고 앞서 언급된 누이와 동일인이라고 보는 해석과 서로 다른 인물이라고 보는 해석이 있다. 전자의 경우 뒤의 '셋'은 '왕'이 되어 어사추안랑왕이 된다. 후자의 경우 郎 자체가 "사내"라는 뜻이라서 다른 인물일 가능성을 제시하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女라는 글자를 포함해 여성임을 강조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신라는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 옆 나라에서 적계여랑(適稽女郞)이라는 표기를 쓴 사례도 있다.[12] 보도부인(保刀夫人)[13] 원명의 '작공인'과 마찬가지로 행차를 준비한 직책으로 보인다.[14] 행차 이후 일종의 의례를 맡은 직책으로 추정된다.[15] 가령 서울시립대 이우태 교수는 1994년 발간한 논문에서 이를 여덕, 광묘, 어사추안랑의 세 사람으로 보고, 이를 友妹가 각기 수식하는 방법으로 여덕과 광묘를 친구, 어사추안랑을 여동생으로 비정했다. 여덕, 광묘는 당대 신라 이름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이 교수 자신도 중국에서 들여온 세련된 불교식 이름이 아닌가 추정었다. 그러나 이후 울산대 전호태 교수가 '여덕광묘'가 어사추여랑을 수식하는, '성스런 덕이 빛처럼 오묘하다'라는 뜻의 불교식 찬양용어라고 해석하여 부정되었다.[16] 다만 문맥상 三을 王으로 읽기만이 아니라 三으로 읽어 지소태후, 보도부인, 사부지왕자 셋이 함께 왔다고 보는 것 역시 말이 된다. 집권 중인 법흥왕의 남동생, 여동생인 입종갈문왕과 어사추여랑왕은 王일 수 있으나, 법흥왕의 아내와 딸이자 제수가 王이라면 조금 이상하다.[17] 어사추안랑왕은 입종갈문왕의 누이이며, 두 사람의 왕이 왔다.[18] 어사추여랑은 입종갈문왕 누이와 별개인물이며, 세 사람이 왔다.[19] 위 원명 추명이 새겨진 시기(법흥왕~진흥왕 재위기) 비슷한 시기의 무오년은 538년, 598년, 658년, 718년, 838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