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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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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寶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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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제308호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전주 풍남문
全州 豐南門 | Pungnammun Gate, Jeonju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로3길 1(전동 83-4)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시설 1동
건축시기 조선 시대 후기, 1768년(영조 44년)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관리 전주시
1. 개요2. 역사3. 구조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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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로3길 1(전동 83-4)에 있는 조선 시대성문이다. 전주부성의 남문으로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의 흔적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308호로 지정되어 있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은 전주의 별호인 풍패(豊沛)[1]에서 유래한 것으로, 풍패의 남문이라는 뜻이다.
파일:전주남문.jpg파일:풍남문.jpg
일제강점기,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2015년, 바깥쪽에서 바라본 모습

2. 역사

1388년(고려 공양왕 원년)에 전주부성이 처음 축조된 이듬해인 1389년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며, 처음 축조한 전주부성 남문의 문루는 단층이었다고 한다. 이때의 성문은 1597년(조선 선조 30년)에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전주부성의 다른 성문들과 함께 파괴되었다.

1734년(조선 영조 10년)에 당시 전라도관찰사 조현명이 재건하면서 문루를 2층으로 높였으며, 문루를 명견루라 명명했다. 이전에는 옹성이 있었으나 이때 옹성을 없애고 치성(포루)를 세웠다. 1767년(조선 영조 43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1768년(조선 영조 44년)에 재건됐다. 이때 전라도관찰사였던 홍낙인[2]이 풍남문이라 명명하였다.

1907년에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전주부성이 철거될 때에도 풍남문은 사라지지 않고 남았으나, 종각포루가 헐리고 지면이 120㎝ 정도나 묻히는 등의 훼손을 겪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복원공사가 진행됐다.

3. 구조

  • 문루: 1층이 3×3칸, 2층이 3×1칸이다.
    • 지붕: 팔작지붕으로, 마루에는 양상도회[3]를 했고 취두와 용두가 올라가 있다.[4] 현존하는 한국의 옛 성문들은 서울 숭례문이나 경복궁 광화문처럼 대개 우진각지붕을 올린 형태가 많이 보이는데, 본래 성문에도 팔작지붕을 올린 경우가 많았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읍성과 읍성의 성문들이 대거 헐리면서 팔작지붕을 올린 성문은 지금으로서는 찾아보기가 힘들고, 지금으로서는 풍남문이나 대동문 등 드물게나 찾아볼 수 있다.
    • 기둥: 공포는 주심포이다. 1층 건물 너비에 비해 2층 너비가 갑자기 줄어들어 좁아 보이는 것은 1층 안쪽에 있는 기둥(고주)을 2층의 모서리기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수법은 우리나라 문루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다. 부재에 사용된 조각 모양과 1층 가운데칸 기둥 위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은 점들은 장식과 기교를 많이 사용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현판: 2층 전면에 걸려 있는 '豊南門(풍남문)' 현판의 글씨는 1842년(조선 헌종 8년)에 전라도관찰사 서기순이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후면에는 '湖南第一城(호남제일성)' 현판이 걸려 있다.[5]
  • 옹성: 1734년의 개축공사 전에는 4개 문에 모두 옹성이 있었으나, 개축하면서 북문 외 나머지 3개 문의 옹성을 없애고 대신 문 옆에 치성(포루)을 세웠다.[유재춘,2006] 이는 18세기 전주지도, 19세기 완산부지도 병풍, 1872년 전주지도에서도 확인된다. 즉 1978-1980년에 옹성을 복원한 것은 오류이다.
파일:한국전주부남문의측면.jpg
1900년대[7] 추정, 남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왼쪽에 종각, 오른쪽에 포루가 보인다.
  • 종각: 문루의 서쪽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성벽이 헐린 후에도 한동안은 남아있다가 1922년 물산진열소(객사)로 이전되었다. 나중에 종만 문루에 걸어 놓았다. 이후 태평양 전쟁 시기에 종이 공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종각은 1980년에 복원되었다. 종은 '완산종'이라고 부르며, 1977년 제작되어 1980년 전국체육대회의 전주 개최를 기념해 타종한 이후 현재까지 전주시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타종이 진행되고 있다. 매년 12월 31일 밤 제야의 종 전북 타종 행사도 이곳에서 열린다.
  • 포루: 문루의 동쪽에 있다. 18세기 전주지도에는 성벽에서 튀어나온 치성 위에 그려져 있고(다른 포루도 마찬가지), 1900년대 사진에서도 그렇게 나타나지만, 현재 복원된 것은 그냥 성벽 위에 있으며 모양도 다르다.

4. 기타

서울숭례문, 평양 대동문과 마찬가지로 명실상부 전주를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전동성당과 같은 관광지가 인접해 있고, 경기전에서 남부시장 가려면 풍남문을 거치는 것이 정석이라, 전주 관광 코스에 거의 필수적으로 포함되곤 한다. 풍남문 일대가 전주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면서 각종 행사나 집회도 많이 열리고 있으며, 지역 연고구단인 전북 현대가 우승을 하면 이곳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한다.

풍남문광장 조성 전에는 남부시장쪽에 파묻혀 있는 모습이라 전주에 처음 놀러온 사람이라면 경기전과 전동성당만 보고 가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주변 건물을 전주시가 매입해 허물고 풍남문광장이 조성되면서 시인성이 아주 좋아졌다.


[1] 풍패라는 별호는 한나라태조유방의 고향인 패현 풍읍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선왕조의 본관이었던 전주를 유방의 고향에 빗댄 것이다.[2]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장남이자, 조선의 제22대 국왕인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큰오빠이다.[3] 지붕 마루에 하얀 석회를 발라 마감한 것[4] 현재 복원된 모습과 달리 일제강점기 사진에는 취두와 용두가 보이지 않는다.[5] 참고로 호남제일루 현판은 남원 광한루에 있으며, 호남제일정 현판은 정읍 피향정과 제주읍성 관덕정에 있다. 한편 경상감영이 있었던 대구읍성의 남문에는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유재춘,2006] 유재춘. (2006). 18세기 全州府城 축성기록 '築城啓草' 硏究. 사학연구, 81, pp. 39-85.[7] 명치 40년(1907년) 이전에 찍은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