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7:23:40

무장친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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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소속 부대3. 역사
3.1. 창설3.2. 확대와 질 저하3.3. 전쟁범죄3.4. 몰락
4. 전후의 무장친위대
4.1. 무장친위대 상조협회4.2. 대중문화에의 영향
5. 둘러보기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innish_SS_volunteers_in_Gross_Born.jpg
무장친위대 소속의 핀란드인

Waffen-Schutzstaffel(바펜슈츠슈타펠). 나치 독일 친위대의 전투병과다.

행정적으로는 친위대 소속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무장SS만은 국방군최고사령부(OKW)의 전투 지휘를 받도록 조치하였다. 독일 국방군(특히 육군)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전투 효율을 높인다는 명목이었다. SA 시절처럼 SS가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즉, 하인리히 힘러 SS 장관은 무장친위대에 대해선 군정권만 행사 가능했고, 군령권은 없었다. 무장친위대가 친위대와 분리되어 국방군사령부의 통제를 받았다는 사실은, 훗날 이들이 과거를 세탁하는 데 요긴하게 써먹힌다.

2. 소속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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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

3.1. 창설

1933년 집권한 아돌프 히틀러는 전통적인 우익의 본산이었던 독일 국방군의 육군 장교단을 항상 경계하였다. 특히 육군의 주류였던 프로이센 융커 귀족 출신 장교들의 쿠데타[1]를 우려해서, 유사시에 오직 히틀러 자신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군사집단을 만들고자 하였다.[2]

이에 따라 자신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SS를 키워 독일 국방군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SS 조직 산하에 전투부대인 "슈츠슈타펠 페어퓨궁슈트루펜(Schutzstaffel Verfügungstruppen, 약칭 SS-VT)"을 창설했다. 그리고 1935년부터 도이칠란트/게르마니아/데어 퓌러 연대를 창설했고[3]하고 SS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친위대 장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4] 이때부터 이전의 전통적인 친위대들은 일반SS(Algemeine-SS/알게마이네-SS)라고 구분되었다. 흔히 알려진 무장SS(Waffen-SS/바펜-SS)의 호칭은 1940년 프랑스 침공 이후에 통용되기 시작한 명칭이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SS 전투부대가 만들어지는 이념적 배경이 독일 좌파지식인들이 찬양하던 "민중을 탄압하는 상비군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한 인민군" 개념이라는 것이다. SA가 국방군을 흡수하려는 것도 바로 이 인민군 개념에서 나온 것이고, 한때 SA에 소속되어 있던 하인리히 힘러도 당연히 이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SS전투부대를 만든 것이다. SS전투부대의 초기 주임무는 바로 국방군의 쿠데타를 진압하는 것이다. 이는 육군의 엘리트 부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도 마찬가지였다.[5]

3.2. 확대와 질 저하

무장SS 부대는 전쟁이 장기화 됨에 따라 급속도로 확충되었는데 초창기에는 전투경험이나 육군 같은 훈련교육 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전선에서 도망친다든가 규모가 작은 적과 싸우면서도 졸전을 벌인다든가 하여 욕을 먹기도 했다. 라이프슈탄다르테(LSSAH)는 피해를 많이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졸전에 실망한 히틀러가 베를린으로 돌아와야 할 부대를 프라하로 보내는 바람에 분위기가 나빠져서 1939년 성탄절에는 히틀러가 직접 프라하로 달려가서 성탄절 연회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SS전투부대 시절부터 편성된 고참이자 비킹에서 전설적인 전공을 올린 게르마니아 연대는 폴란드전 당시 시가전에서 폴란드군의 역습에 밀리는 등 기대에 영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힘러의 적극 지원하에 최신장비와 전투경험이 있는 인원들이 계속 배속됨에 따라 점점 전투력이 강해졌다. 특히, 초창기 3개 무장SS 사단인 '라이프슈탄다르테',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사단들은 최고의 인력, 장비 지원과 사망자가 속출하는 혹독한 실전훈련을 거듭하여 막강한 전투력을 쌓은 덕택에 전쟁 중후반쯤 되면 거의 전략예비대 성격으로 운용되기도 한다. 또한 이들의 전과를 다른 SS 사단들도 거두었다고 여기기 쉬운데, 문제는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졌다는 데 있었다.

병력소모가 급속도로 올라가고 전장은 날이 갈수록 넓어지자 무장SS도 꾸준히 확장된다. 그러나 갈수록 병력부족이 심각해져 결국 SS의 인종적 우월성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점령지인 프랑스동유럽 등지에서도 독일인가 조금 섞였으면 징집하고, 일반 육군부대도 전속요청으로 SS로 입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독소전쟁 개전 후에는 그마저도 극심하게 소모가 올라가, 나중에는 영국 등의 식민지배에 반발하는 아프리카인, 영국군 포로, 심지어는 소련군 포로조차 원하기만 한다면 SS로 받아들였다. 영화 레지스탕스에서도 SS영국의용군에 속한 중사가 꽤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한다.

게다가 중요한 무장SS의 부대이기도 했던 제12 SS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는 말 그대로 '히틀러 소년단' 출신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전투부대였던 등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다. 말기에는 사단이나 군단이라고 이름 붙여놓고 실제 규모는 수백명인 부대도 많아서 실제로 꾸준히 제대로 전투를 치른 사단은 초창기 3개 사단, 잘 봐줘야 히틀러유겐트사단까지 11개 사단 정도이다.[6] 대전 초 프랑스 전선에서 잡힌 영국군 포로로만 이루어진 부대, 영국 자유군단의 병력 수는 백여 명을 간신히 넘겼다.

한편 독소전 발발 전 지원한 참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SS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이념적으로 숭상하던 "순수한" 독일인 다수는 물론이고 이질적인 무슬림들까지 받아들였다. 이런 식으로 급하게 징집한 병력이 점점 상당한 비율을 차지한다.[7][8]

이때 다민족 부대들을 만들게 된 공식적인 이유에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적인 믿음의 영향도 있었는데, 이 자는 유럽에 퍼져있는 여러 민족들 피에 사실 아리안 핏줄이 어느 정도 있다는 우생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들은 소위 하위 아리안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이 영혼을 끄집어내 다시 순수 아리안 영혼으로 만들기 위해선 이 하위 아리안 핏줄들을 끌여들여 전쟁에 싸워 죽도록 해야 된다고 믿었다. 즉,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어느 정도 기반을 두고 만든 부대들이긴 하다. 물론 현실은 이러한 비과학적인 우생학 궤변을 붙이든 말든 초창기의 숙련된 병력에 비해 낮은 기준의 병력을 마구 모으기 시작해 전투력 저하를 초래했다.

전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명성과는 달리 다른 국방군과 별반 다를 바 없거나 이름뿐인 사단들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힘러 자신도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 공공연히 충성을 밝혔지만, 사실 전쟁 말기에는 히틀러에게 총통 자리를 넘기라고 뒤통수를 치는가 하면 요제프 디트리히가 자신보다 히틀러에 대해서 더 충성함을 알고 멀찌감치 전선으로 쫓아보내기는 등 정치적 권력에 집착했다. 이는 전쟁 지도에서 여러 무리수를 범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무장SS 사단들은 애시당초 히틀러와 힘러 등 SS 고위 인사들의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무장 당군 집단이다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육군 사단에 비해 각 부대 지휘관들의 사병집단적 요소가 강해졌다. 한때 초창기부터 편성되어 높은 전과를 올렸던 3대 사단들도 최초 사단장요제프 디트리히/파울 하우서/테오도어 아이케 장군영지쯤으로 통했다.

여기에 더해서 전쟁 초반에는 나름대로 육군 같은 타군의 눈치를 보던 SS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기점으로 전쟁 말기에 이르면서 제멋대로 행동해서 국방군과 갈등이 더 깊어졌다. 원래 SS가 창설된 초창기에는 히틀러가 SS를 SA같이 비대한 크기로 만들지 않으려고 했고, 국방군의 반발 때문에 각종 중장비 공급에서 SS가 육군에 우선권이 밀려서 노획장비를 적지 않게 운용해야 했다. 초창기 3개 사단 중에서도 토텐코프는 T-34-76을 후반기인 1943년 시점에도 20대 이상 운용했으며 다스 라이히는 아예 대대급을 보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독일 국방군 육군에 비해선 장비 지급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그러나 1943년 후반기에 이르면 독일 육군의 위상 하락과 함께 히틀러와 힘러의 지원으로 무장SS는 최신예 무기를 육군보다 더 먼저, 더 많이 지급받는데다가 이들이 아돌프 히틀러를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면서 육군은 이들을 '건방진데다가 인간 같지 않은 양아치들이 총통만 믿고 잘난 체한다.' 정도로 평하였다. 전쟁 당시 무장SS와 육군 사이에서는 항상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곤 했다고 한다. 그나마 전쟁이 잘 풀리던 초중반에는 조용한 편이지만 서로 상대방을 깔보는 경향은 현저했다. 전 무장SS 중사였던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회고에 의하면, 데미얀스크 포위전과 하르코프 전투에서 무장SS와 육군이 서로 욕을 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래도 소련이라는 공통의 적을 상대로 싸우는 것에 대해서는 서로 한마음이었는데 대독일사단 복부자였던 기 사예르의 회고에 따르면 게릴라 토벌 작전에 참여한 자신의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수장을 보고 상당한 신뢰를 보냈다고 적었으며 육군 병사들도 무장 친위대 사단이 있는 곳이면 전선이 안전된다고 평가했다고 한다.물론 그러면서 왜 그 장비를 우리한테 안주고 힘러 따까리한테 주냐고 툴툴거리거나 전쟁의 환상에 젖어있는 것을 보고 기가막혀 하지만 재밌는 사실 중 하나로 이 둘 모두 극혐하는 SS 부대가 있었으니 바로 범죄자들로 구성된 디를레방어 여단이었다. 학살에 있어서 공평하게 관여한 무장 친위대와 국방군이지만 디를레방어 여단은 문자 그대로 구성원 자체부터 범죄자들이었고 행동 하나하나가 인간 말종급이었기에 서로 극혐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945년 전쟁이 후반으로 치닫으면서 독일 국력 자체가 누구에게 특별대우를 해줄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전투가 지속됨에 따라 부대를 해체하고 소속에 상관 없이 재편성하는 과정이 지속되면서 앞서 말한 분위기도 사라졌다.

전쟁 중반에도 무장SS가 받는 특별대우에 많은 장병들이 불만을 품기에 이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고, 히틀러도 이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으나 힘러 때문에 흐지부지되어버렸다. 나중에 힘러와 만난 오토 카리우스 육군 기갑중위도 이러한 문제에 불만을 품고 이의를 제기할 정도였다.

3.3. 전쟁범죄

동부전선 초기에도 SS는 학살에 빠짐없이 끼어들었고, 이는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에 중부집단군이 싸그리 갈려나가며 여유가 없어질 때까지 행해졌다. 토텐코프의 경우 프랑스 침공 당시부터 포로학살을 밥 먹듯 했으며 상기된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은 여러 무장SS 사단 중에서도 메이커 사단이라 불리던 다스 라이히가 저지른 범죄이다.[9]

그나마 독일군의 병력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기존 사단들이 전방에 있는 새 전장으로 가고 그 자리를 중앙에서 파견나온 자들이 차지하며 디를레방어 여단, 카민스키 여단 같은 놈들이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벨라루스 초토화, 바르샤바 봉기에서의 폴란드인 학살 등의 만행들을 저지르면서 지옥도를 그리게 된다.

SS의 전쟁 범죄 행각은 동부 전선에서만 그치지 않았고 서부 전선, 특히 프랑스에서 연합군 포로 및 민간인 학살, 무차별 약탈, 강간, 방화 등의 만행을 서슴치 않고 거의 즐기듯이 저질렀으며 나치 독일이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처분한 미영 연합군 포로들도 국방군이 아닌[10] SS에게 잡히면 르 파라디 학살, 그래뉴 학살, 말메디 학살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이유 없이 학살 당하거나 고문 당하는 등 잔혹 행위에 노출될 확률이 매우 높았기에 미영 연합군도 부득이하게 항복하게 될 경우 SS에게 항복하는 것은 극구 피해왔으며, 반대로 이들을 포로로 잡았을 경우 똑같은 잔혹 행위로 보복하는 것으로 앙값음을 했다.

제4 SS 경찰 기갑척탄병사단의 경우 1944년에 그리스에서 파르티잔을 소탕하기 위해 무참히 보복학살을 하는 것으로 악명높았으며, 죄없는 아기와 임산부들까지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마을 사람의 내장을 뽑거나 사지를 절단해 길거리에 걸어놓는 잔혹한 행위도 태연히 일삼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디스토모 마을을 습격하여 무고한 민간인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강간한 디스토모 학살 사건 이었다.

제5 SS 비킹 기갑사단은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했으며 1945년 헝가리에서도 숨어있는 유대인들을 색출해내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3.4. 몰락

이렇게 아돌프 히틀러를 위해서 충성을 다했지만 1945년 3월 봄의 새싹 작전이 실패하자 분노한 히틀러[11]는 무장SS에게 사단 이름이 적힌 소매 띠를[12] 떼라고 명령했고 이는 히틀러를 따르던 무장SS 대원들에게 적잖은 치욕을 가져왔다. 요제프 디트리히 같은 이들은 이에 분노해서 반납한 수장을 요강에 담아서 보내는 식으로 항의를 하기도 했다.[13]

그러나 이미 기운 전황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고 막장으로 치닫던 상황이었기에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게다가 이미 무장SS에 대해 널리 알게 된 연합군에게는 설령 투항하거나 포로가 되더라도 어떻게 될지 그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었기에 종전이 된 5월 9일 이후에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련군과 전투를 벌인 사단들도 있었을 정도로 악착같이 싸웠다. 예시로 베를린 전투 당시 노르트란트 소속 1개 소대의 무장SS 대원들은 제국의사당을 향한 소련군 1개 연대의 진격을 막아보려고 12시간이 넘도록 저지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4. 전후의 무장친위대

무장친위대 및 해당 관련자는 범죄조직, 혹은 군벌로 취급되고 있다.

무장SS를 포함한 친위대는 국방군과 함께 나치군 전력으로서 기능하여 수많은 전투 속에 발을 걸친 것이 무색하게 지휘체계와 운용되는 편제부터가 애시당초 국방군과 사실상 완전히 별개이므로, 국제법상으로는 무장SS는 군대가 아니라 '나치당 소속을 한 이들이 군복과 계급장 등의 독자적인 지휘계통만 그럴싸하게 갖추고 실탄병기로 불법 무장한 민간인이자 동시에 국제적인 교전권을 인정받지 않는 테러조직'이다.

그런데 나치 독일의 그 어떤 법률도 나치당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정의해두지 않았고, 당연히 당의 일부인 친위대나 무장친위대도 군대와는 달리 명확한 법률적 지위가 없었다. 그래서 법리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러시아 국가근위대 같은 신분부터가 제대로 법제화된 엄연한 군사조직으로서 기능하면서 국가의 치안의 높은 레벨을 담당하는 내무부대와 달리 무장친위대는 제대로 된 준군사조직으로 보기도 정말 부적합하고 법률상으로는 히틀러의 나치당 산하 당군인 군벌단체이자 사병단체 및 극우 백색테러 단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이들을 모욕하려는 의미도 강하다. 독일 정부의 지원 하에 위계질서, 지휘체계와 제식까지 충실히 갖추고, 세계대전 내내 독일의 최정예군으로 선전되었고 독일인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단지 법적 지위가 제대로 명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독일의 군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억지인 면이 있다. 당연히 이것은 독일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정통성있는 독일의 군사집단이 아닌 히틀러와 나치 수뇌부의 사설 군사조직에 불과한 패거리들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군대의 체계를 모두 갖춘 준군사조직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에 비준 여부와 관계없이 관습법으로 적용되는 제네바 협약에 따라 교전권이 있는 의용병 대접 정도는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SS 본인들이 바로 그 제네바 협약에서 규정하는 중대한 위반 행위(grave breaches)를 횟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로 자주 위반한 덕분에 제네바 협약의 적용을 받지 않는 단순 전쟁범죄 조직+테러리스트로 분류되었다. 게다가 전쟁에 나선 사유도 방어전이 아니라 타국을 침략하기 위한 것이고, 이들이 한 각종 만행으로 인하여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무장SS를 범죄단체로 정의하고 실제 전쟁 범죄에 가담하여 적극 임무를 수행한 장병들을 단죄하였다.

따라서 소련군, 미군과 점령지인들로부터 보복성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SS 포로 수용소에서 테러사보타주가 만연했는데도 연합군은 이걸 상당히 오랜 기간 무시하다가 너무 심각하다 싶자 그제서야 관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전후 SS 포로들의 기록에 따르면 히틀러유겐트 사단 출신 소년병들이 이불 1장이 없어서 얼어죽어가는데도 연합군 헌병들은 비웃으며 지나갈 정도라고 했다.[14] 그나마 미군이나 영국군에게 잡힌 SS 포로들은 그래도 공정하게 재판하고 나서 처벌해야 한다고 봤는지 포로 대우 자체는 해줬지만[15] 소련군에게 잡힌 SS 포로들은 전후 NKVD군인들의 복수 행각을 막고자 군을 직접 통제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살아남아도 얼마 안 가서 NKVD가 그들을 물색하여 처형했다.[16] 말 그대로 자신들의 손으로 인해 만들어진 악마들 사이로 떨어진 셈이다.[17]

당시 참전자들의 회고에 의하면 그렇지 않아도 독일군이라면 치를 떨었는데 SS라면 더욱 험한 꼴을 봤다는 증언들이 많다. 한 소련군 출신 참전자의 수기를 보면 전투가 끝난 후 SS 포로들만 모아둔 뒤 쏴 죽였다는 기록도 있으며 미군 조차도 SS 포로들만 따로 모아서 만든 포로수용소를 운영하며 유난히 더 가혹하게 대했다고 한다.

소련군 못지않게 연합군 측에서는 특히 자유 프랑스군과 자유 폴란드군이 이들을 심하게 대우했는데, 심지어 독일군으로 전향한 프랑스 식민지 출신 병사들에게도 죽는 게 더 나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막장으로 대하고 갖은 수모와 모욕을 주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자유 프랑스군의 르끌레르 장군이 프랑스인들로 구성된 SS 사단이 있다는 것을 듣고 이들을 심문하러 갔을때 이들이 왜 독일군에 입대했냐는 질문에 '그럼 님은 왜 미국 군복입고 있음?' 이라고 답하자 노발대발하며 이들을 재판없이 처형해버린 후 길거리에 그냥 방치해두어 이를 미군들이 뒤늦게 수습해주었던 것이 있다. 물론 전후 프랑스는 이를 부정하며 독일의 선전이라 주장한다.

오토 카리우스도 자신이 미군 부대와 항복교섭을 하러 갔는데 이때 오토 카리우스는 서부전선 독일 B집단군이 포위되어 항복했던 그 루르 지역에 있었고 그의 부대도 결국 항복했다. SS는 모두 피에 굶주린 살인마들이라고 생각하던 미군들이 육군 전차 승무원복 칼라의 해골 마크[18]를 보고 경계하는 태도를 보여서 '우리 육군 기갑 병과는 SS가 등장하기 한참 전부터 해골 마크를 부대 표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라고 진땀을 빼며 해명해야 했다.[19] 말메디 학살 이후 SS에 대한 증오감정은 서부전선에서 극도로 팽배했기 때문에 SS로 판단되면 협상이고 뭐고 사살당하거나 험한 꼴 볼 가능성이 높았다. 이 때문에 항복하고자 한 SS 대원들은 무장 친위대 마크를 떼어버리고 국방군 행세를 하며 항복하여 목숨을 부지했거나[20] 마지막까지 죽기살기로 저항했다.[21] 무장SS 부대원들이 괜히 전쟁 끝나고 나서야 대거 항복한 것이 아니다.[22]

독일 정부로부터도 국방군과 똑같이 군인연금을 납부했지만 SS에 복무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범죄가 없었는데도 전후에 일시적으로나마 연금수혜를 받지 못하는 등 불이익들을 받았다. 그나마 나중에 연금혜택은 전범이 아니라는 것만 증명되면[23] 인정되긴 했지만 그래봐야 사실상 국방군이나 SS나 다를 거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동정론이 일어난 결과일 뿐.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들이 전쟁 중에 세운 전공은 국방군의 기록과 달리 독일군의 전공으로 인정되지 않는다.[24] 예를 들면 미하엘 비트만은 소속이 SS인 관계로 국방군 출신이던 오토 카리우스의 기록과 달리 그의 전공은 공식적으로는 없는 것 취급받는다. 물론, 이는 비트만이란 사람이 역사에 없었다고 간주하는 식의 기록말살형이 아니다. 독일 연방군은 비록 국방군의 후신임을 부정할지언정 독일 역사에 존재했던 군사 조직들의 존재를 모두 인정하므로, 국방군의 전사는 독일 내 군사사로 국방부가 공인해 다루지만, SS는 국방부 기준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비트만이든 디트리히든 SS의 역사는 군사사, 전사에 편입해 다루지 않으므로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다.

예외가 있다면 강제로 SS에 편입된 전 국방군 출신이나 전쟁 말기 강제 징집된 자들인데, 즉 자의에 따라 SS에 들어가지 않은 군인들인데 이들은 전공이 인정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소속만 SS지 사실상 독일 국방군이나 다름없는 자들이거나 아니면 강제 징집되어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끌려간 이들이기 때문에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

사실상 흑역사 취급이며, 이런 것을 인정하면 독일 정부도 이들을 군인으로 인정하는 셈이 되는데 한마디로 나치 정권의 사병들이 독일군의 일원이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것. 즉 군대가 국민이 아닌 정권을 위해 충성하는 게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어쨌건 정상적인 국민국가를 자부하는 독일 입장에서는 과거사 부정 여부와는 무관하게 절대 인정할 수 없다. 독일이 과거사 청산을 철저히 한다는 근거로 쓰이지만 사실 독일의 후대 정권이 일본처럼 구 기득권층으로 구성되었더라도 SS에 대한 태도는 동일했을 거라는 게 중론. 전후에 파울 하우서, 요제프 디트리히, 빌헬름 비트리히 등이 만든 무장SS의 전우회인 HIAG가 서독 정부의 지속적 감시에 의해 해체된 것을 본다면 이는 당연히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독일에서 아직까지 살아있는 SS 참전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 당시 그들이 여러 만행을 저질렀음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반대로 히틀러와 당에 대해선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드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도 히틀러를 미화하거나 추종하는 것은 아니긴 하다. SS 출신자들이 모두 전쟁범죄자는 아니었고, 그냥 좀 더 특별한 엘리트 처우를 기대하고 입대한 자들도 많았다.[25] 뒤늦은 연금 수혜도 실제로는 후자의 SS대원들에게 동정의 여론이 일었기 때문이다.[26]

사실 이러한 미온적인 태도는 SS 참전자들 뿐만 아니라 육군, 해군, 공군의 국방군 출신들도 이와 비슷한 성향을 보였다. 그들이 아직도 히틀러에 대해서 향수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보단 전후에 참전자들과 그 시대 자체를 부정하는 독일 사회에 대한 반발심에서 촉발된 현상이란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 이건 붙잡혀 오는 고령의 전범들 대부분이 해당된다. 오히려 주요 전범 중 1명이었던 한스 프랑크는 사형당하기 전 용서를 빌었지만 정작 직접 학살을 담당한 전범들은 잡혀온 뒤에도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거나 유대인 학살은 당대에는 당연한 일이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한때 소련이 '미국이 일부러 무장 SS를 살려서 써먹고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미국한국 전쟁에 급하게 참전하느라 켈로부대에게 따로 군복을 만들어 줄 상황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뭔가 주긴 줘야겠다 싶어서 노획한 피복들을 쟁여둔 창고를 뒤적이다 발견한, 무장SS 위장전투복 더미를 발견하고 꺼내서 지급한 것이다.

북한군중공군은 모르는 군복을 봤으니 자료를 수집해서 소련에 문의를 했는데, 소련군은 단박에 이 물건이 지난 동부전선의 무장SS 군복임을 알아챘다. 상당수의 피복은 부착물까지 일부 그대로 달려 있었다. 당연히 미국이 독일군을 한국 전선에 동원했다고 항의가 들어갔으나, 나중에 켈로부대라는 게 밝혀진 뒤에는 문제삼지 않았다.[27]

4.1. 무장친위대 상조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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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대중문화에의 영향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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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1940년 프랑스 침공 직전까지 여러번 쿠데타 모의가 있었다. 그리고 대전 말기 패색이 짙어지자 쿠데타를 준비했던 멤버들이 다시 결집해서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일으킨다.[2] 동시에 육군 내부에서 융커 출신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평민 출신 장교들을 고속진급 시켜서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인맥을 형성하려 애썼다. 이 계열의 1번주자가 바로 에르빈 롬멜이다. 같은 국방군이라도 해군은 워낙 수가 적어 정치적인 영향력이 미비한데다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라 우려할 필요가 없었고, 공군은 그 총수가 히틀러 다음 가는 2인자 헤르만 괴링이니만큼 충성심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3]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 3개 연대를 모아서 제2SS기갑사단을 창설했다.[4] 나치당이 정치활동을 시작한 바이에른 출신 장교들이 정규군과는 대조적으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5] 무장SS와 그로스도이칠란트의 훈련은 매 기수마다 사망자가 1~4명에 부상자가 수십명이 나올만큼 혹독했다. 하지만 안전 불감증 문제 아닌가 할 수도 있는데, 같은 시기 미국의 경우에도 레인저 코스나 공수부대와 같은 정예부대의 훈련 과정에서 부상자들이 발생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안전에 대해서는 각별하게 신경 썼다. 나치 독일의 인명경시 사상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6] 제1 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제2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제3 기갑사단 토텐코프, 제5 기갑사단 비킹. 이쪽 4개는 그로스도이칠란트와 더불어 대전기간 최고의 사단이며 제4 경찰척탄병사단 폴리짜이, 제6 산악사단 노르트, 제7 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 제8 기병사단 플로리안 가이어, 제9 기갑사단 호엔슈타우펜, 제10 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 제11 의용척탄병사단 노르트란드, 제12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정도가 정예 SS 라 부를 만하다.[7] 이들은 정예라는 부심에 가득하던 당시의 기존 무장SS 병력들이 불만을 품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전후에 상황이 바뀌어 하우서 등 무장친위대 장성들은 무장SS 무오설을 주장하는 회고록들을 간행하면서 이걸 '무장SS는 다민족 반공의용군'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써먹었다.[8] 히틀러와 당대의 나치스는 후대의 추종자인 네오나치들과는 대조적으로 기독교 혐오증과 극한의 반유대, 반슬라브주의, 이슬람교에 호기심에 가까운 약간의 호의를 가진 자들이 많았다. 일단은 당대 독일인 다수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긴 해도 하등한 인종으로 간주하던 슬라브인을 더 혐오하고 배척하면 배척했지 무슬림과는 악연이 크지 않았다. 히틀러의 고국이자 제국 체제 하에서 수십 민족들이 얽혀 성장하면서 인종관 형성에 영향을 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보스니아 등의 무슬림 다수 지역에서 잘만 지역 기반 연대들 뽑아내서 쓴 과거도 있다. 실제로 나치스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 아민 알 후세이니와 협력관계를 구축하기도 했는지라 1세대 나치들은 무슬림계도 받아들이고 무장시키는 데 거부감이 크진 않았다.[9] 당시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의 주범이자 다스 라이히의 사단장인 하인츠 라머딩은 토텐코프 사단의 툴레 연대를 지위했던 전력이 있으며 이들 부대는 항복한 소련군들을 자주 학살했다. 이랬던 그는 전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편히 여생을 마감했다.이로 미루어보건데 초기 SS의 악명과 전과에 기여한 장교 및 장성들은 대부분 처벌을 받지 않거나 구금당하는 정도의 형량으로 끝났을것이며 유명한 SS 장교, 장성들의 이름들을 검색해보면 대부분 천수를 누린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영국군 포로를 학살했던 프리츠 크뇌힐라인 SS중령 같은 경우는 학살 상대가 상대라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무장SS 뿐만이 아니라 동부전선에서 학살을 행한 국방군들은 아예 처벌을 안받은 이들이 거의 99%이고 아인자츠크루펜도 4명만 사형당했다.[10] 물론 국방군도 서방 연합군 포로를 가혹하게 대우하거나 즉결 처형해버린 기록도 엄연히 다수 존재한다.[11] 사실 현지 사수명령을 씹었다는 것에 더 분노했다.[12] 프로이센 왕국 시기부터 부대 이름이 적힌 소매 띠는 정예 사단임을 상징하는 영예였다. 국방군 전체에서도 이 소매 띠를 고정적으로 착용할 수 있던 부대원들은 대독일사단 병사들과 크레타 섬 전투에서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생존한 공수부대원들 등 극소수였다.[13] 사실 이는 요식행위였으므로 디트리히 등 일부만 대표로 수장을 떼어 반납했고 나머지 장병들은 대개 그냥 수장을 달고 다녔으며 반납한 이들도 히틀러 눈 밖에선 잘만 달고 다녔다.[14] 영국군과 미군 중엔 히틀러유겐트 소속이거나 나이가 어린 포로들은 '범죄자'라기보다는 잘못된 길에 들어선 교정해야할 청소년으로 보아 가혹하게 처우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15] 다만 이것도 부대에 따라 달랐다. 말메디 학살 이후로 복수심에 불탄 일부 미군 부대는 SS를 포로로 잡지 않고 항복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사살했으며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발견하고 목격한 영국군 부대 중 일부는 그 이후로 무장SS 포로를 받지 않았다. 또한 다하우 절멸 수용소를 해방한 미군은 처참한 그 실태를 보고 수용소 대원들을 상부에서 급히 제지하기 전까지 거의 다 총살해버렸는데 이들은 수용소 해방 몇 주전 교체된 신입 대원들이었다. 수용소 운영 및 방관이라는 행위에서는 범죄를 벗을 수 없지만 정작 대규모 학살을 저지른 이들은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처형당한 대원들 입장에선 해명할 기회도 없이 죽었으니 억울할 수 밖에. 물론 가장 극렬하게 처형을 했던 시기 대원들은 전선에 차출되어 싸우다 죽거나 살아남아도 나치 사냥꾼들에 의해 기소되었다.[16] 이러한 소련군의 보복 행위를 극도로 두려워한 (또는 소련군에게 항복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 무장 친위대원들이 소련군의 항복 권고에도 불구하고 단체로 자살을 택했다는 극단적인 기록도 존재한다. 물론 서방 연합군에게도 SS는 좀처럼 항복하지 않았으나 소련군을 상대로는 항복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으며 전후 통계에서도 소련군이 포획한 독일군의 포로 비율의 절대 다수는 국방군이 차지한다.[17] 장성급 장교들은 대부분 천수를 누렸다. 구글에 유명한 엘리트 대원들 검색해 보면 대부분 잘 살다갔다.[18] SS 전차병 승무원복은 해골 마크 대신 SS 문장을 달았고, 육군 전차병과 같은 검은색 군복이지만 카라 형태가 조금 달랐다.[19] 마켄젠원수의 복장에서 알 수 있듯이 프로이센 왕국군후사르가 해골마크와 검정 제복으로 유명했고, 이를 기병의 임무를 승계한 병과인 독일의 전차승무원들이 그대로 계승했었다.[20] 물론 항복 이후에도 팔에 새긴 혈액형 문신이나 모종의 이유로 SS 신분이 드러나 그 자리에서 처형당하거나 죽기 직전까지 구타당하고 목숨만 건지는 등 험한 꼴을 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21] 일반적으로 무장 친위대는 국방군에 비해 항복하는 빈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들은 항복 이후에 상술된 보복행위를 염려하여 쉽사리 항복하지 않았고 또는 이데올로기에 찌들어 항복을 거부하고 최후까지 저항하였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SS 포로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던 동부 전선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으며 서부 전선에서도 SS 포로는 국방군 포로에 비해 그 수가 현저히 적었다.[22] 최정예사단인 라이프슈탄다르테, 다스 라이히를 포함한 대부분의 정예사단들은 오스트리아에서 미군에게 항복하였고 외인부대는 대부분 베를린 전투나 할베 포켓에서 소멸하거나 탈출하여 독일 북부 에서 함부르크를 탈출한 제9 공수군 소속 병사들과 함께 미군에게 항복했다. 일부 극소수의 사단만이 소련군에게 항복하였다.[23] 무장SS 가입 자체만으로는 전범 취급을 받지 않았다.[24] 다만 국방군의 전공도 단순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인정할 뿐 명예 같은 것으로 인정해주진 않는다. 받았던 훈장들을 계속 소지나 패용하는 정도는 인정됐는데, 하켄크로이츠가 들어간 훈장은 1957년부터 제정된 법령에 따라 반납한 인원에 한해 하켄크로이츠를 제거한 동일한 형태의 훈장으로 바꿔 주었다.[25] 이는 비판 SS 참전자들만의 태도는 아닌데 국방군 참전용사들도 그러하였으며 68혁명 이전 독일인들의 적지 않은 수가 히틀러에 대해 그리 비판적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 히틀러 유켄트에 강제로 입대하여 자신의 친구들이 토끼처럼 사냥당하는 것을 지켜봐야했던 세대와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 속 태어나 힘들게 살아가야 했던 젊은 세대들이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를 지지하고 자신들을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장년 세대를을 비판하고 나서야 진정한 의미로 독일은 탈 나치화 될 수 있었다.[26] SS는 당 가입이 의무가 아니었다. 물론 SS 연대지도자인 대령급 이상의 계급, 즉 장성급 계급들은 대부분 가입되어있다.[27] 반대로 한국 측에서는 독일 육군 원수인 페르디난트 쇠르너가 소련 편에 서서 북한군을 지휘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 적이 있다. 다행히 둘 다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사실 패전한 추축국의 재무장, 전쟁참여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몹시 민감한 사안이다. 무장친위대 출신 군인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우도 존재한다. 제5SS기갑사단 비킹 출신 네덜란드인들의 사례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