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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과 현재 중국, 러시아가 다스리는 만주 지역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2. 역사적 관계
한국사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이다.2.1. 고대
비록 예맥계 주민들만 살았던 건 아니고 말갈(퉁구스)과 동호(몽골계 민족) 등 다른 민족들도 어느 정도 비중이 있었지만 예맥인들의 영향력이 제일 강하게 미쳤던 지역이었다.[1]고조선은 요서와 요동을 주 근거지로 삼아 인근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던 나라로, 연나라에게 요동지역을 빼앗기고 평양을 중심으로 하기 이전까지 만주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조상국가로 여겨지는 부여도 만주 송화강 지역에 위치해 있었을 만큼 한민족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고구려, 발해도 마찬가지로 만주지역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고, 고구려의 초기 수도인 졸본성-국내성이나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를 비롯한 동모산, 서경압록부, 동경용원부, 중경현덕부가 만주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고구려-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말갈족들 중 일부가 신라에 정착해서 군인이 되거나, 신라 말의 이민자가 만주 지역 국가의 조상이 되는 등, 예맥한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2]
2.2. 고대 이후
발해 멸망 이후 만주를 지배한 요나라, 금나라 때 들어서 그들이 여전히 만주에 남아있던 소수 예맥계 주민들을 지배하던 와중에 유목민족들[3]로 인해서 죽거나, 강제 이주를 당하거나, 고려로 귀순하거나, 한족이나 유목민들에게 차츰 동화되면서 수가 줄어들었다. 비록 그들과 싸워 이기거나 세력들을 약화시켜 한반도의 한민족 세력들이 완전히 복속화시키진 않았으나, 만주에서 한반도의 국가들이 만주에 완전히 세력을 뻗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발해 유민들의 발해부흥운동 집단 및 국가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해준 적도 동시에 있었으며, 심왕 작위에 고려왕족들이 임명되었던 것이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당시 요동정벌을 추진했던 것을 보면 의외로 생각보다 오랜 기간 동안 예맥계 주민들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요동 지역을 명나라가 차지한 이래로 시간이 차자 흐르며 이들은 한족 및 북방 제민족에게 동화되어갔으며, 결정적으로 청나라가 들어서며 봉금령이 선언되고, 다른 민족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만주족만의 땅으로 설정되어버렸다.[4] 그 이후로 만주지역의 인구가 만주족들이 더 살기 좋은 중원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희박해졌고[5], 조선인들이 대대적으로 이주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청나라가 서구열강의 침입과 내부 혼란으로 무너져가던 1897년, 봉금령이 해체되면서 산둥성과 허베이성 일대의 한족들이 틈관동으로 대거 만주로 이주하면서 지금은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한족이 차지하게 되었다.[6]2.3. 근현대
일제강점기에는 한국 독립운동의 산실로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 및 독립군들이 만주에서 활동했다. 1920년대에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있었던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 등의 교전도 만주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한편, 현대 남북한의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지도자들인 박정희와 김일성이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각각 만주군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군인으로 활동했다. 이들의 만주체험은 각각 만주파와 만군인맥이라는 세력기반을 형성시켜 지도자 자리에 오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그들이 펼친 국가주의, 권위주의적인 통치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는 오늘날까지 영향이 남아 있다. 고려 말기 이후 직접 통치 영역에서는 벗어난지 오래였지만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역이었던 셈.러시아 지역의 외만주(연해주 포함)에서도 자유시 참변 등의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곳에 거주하던 한민족들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한 경우가 흔했다.
일제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했으나, 일제의 압력을 피해 만주로 이민온 한인들은 일제가 패배했다고 쉽게 한국(조선)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이는 남하할 계획을 가진 소련과 이를 반대한 미국에 의해 한반도에서 각각 소련과 미국이 개입하여 한반도에서 군정기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내, 외만주의 한인 동포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시기는 냉전이 한참 지난 이후였다. 이후 남북분단으로 갈라졌으며, 한반도 남부에 세워진 한국(남한)은 냉전시기만 해도 만주를 차지한 중국과 소련이 공산권이었기에 방문할 수 없었지만 냉전과 소련 해체, 한중수교로 현재는 중국과 러시아의 영토이기에 중국, 러시아를 통해서 방문이 가능하다. 과거 고구려, 발해의 유적들, 독립군 관련 유적지, 한인 타운들, 백두산을 많이 방문한다. 지리적으로 가깝기에 프리모리예 지방, 동북 3성에서 온 러시아인과 중국인들도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가깝긴 하지만 현재 북한에 의해 막혀서, 비행기나 배를 타고 방문해야 한다. 상술했듯이 만주로 갔던 한인들 중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소수민족인 조선족, 고려인으로 자리잡는 사람들도 있고, 자신의 정체성이 한국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한국으로 귀국하여 한국에 귀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반대로 서로간의 갈등으로 마찰을 일으키거가 한국을 떠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으며, 이러한 해결해야 될 문제점들도 현재진행형이다.
3. 영토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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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민족 관계
4.1. 만주족과의 관계
일단 만주족과 한국인은, 계통은 만주-요동에서 발현한 북방계 민족. 부자 유전인 Y염색체 하플로그룹과 모계 유전인 미토콘드리아 하플로그룹 모두 한민족과 유전적으로 가장 비슷한 종족이다.[7] 사실 고대부터 거의 붙어 있다시피 했고 양 민족이 섞이는 일도 제법 있었으니까 당연한 것이긴 하다. 그래서인지 환단고기류의 위서 애호가 재야 사가들, 소위 환빠 등 사이비 역사학이나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만주족 및 북방 유목민족은 우리의 갈래 형제라고 생각하고 굉장히 친근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물론 민족이란 유전적 근친성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문화적 근친성을 따진다고 해도 이미 원삼국시대부터 언어가 다른 별종이라고 삼국지 위지와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다.[8] 그러니까 만주족과 현대 한국인은 적어도 2000년도 넘는 오래 전에 갈라진 별개 민족이란 의미.[9]한국인과 만주인은 고조선과 숙신이라는 역사상 최초의 부족 공동체가 형성될 때부터 이미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이후 고조선은 부여와 함께 고구려로 이어지고 숙신은 숙신이 잔존하는 상태에서 물길, 읍루, 말갈 등을 이루다가 흑수말갈을 중심으로 여진이 되고 만주족이 된다. 고조선과 숙신의 구체적인 관계는 알기 어렵다.[10] 읍루는 정치적으로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고구려와 언어가 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의 말갈은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당이 고구려-당 전쟁에서 말갈병만 골라서 따로 죽였을 만큼, 고구려와는 구분되는 모습을 보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등장한 발해는 한민족과 말갈족이 연합된 국가라고 보면 된다. 다만 좀더 순수한 말갈족은 아무르 강 쪽에 있었던 흑수말갈에 몰려 있었고 말갈계 발해인은 예맥화가 상당히 진행된 말갈족이었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이웃하며 살아서 그런지 은근히 옆동네 친척 정도로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우리가 만주를 상실한 발해 멸망 이후에도 여진족은 고려를 부모급으로 취급했고, 사실 여부는 제쳐 두고서라도 여진족의 역사서인 금서에서는 아골타를 고려인 함보의 후손이라고 했으며, 송막기문 등 다른 기록에서는 신라인을 시조라고 하고 있다. 조선도 여진족과 상당히 유착되어 있었다. 조선의 시조인 이성계가 여진족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이 여진족 추장이었음을 봐도 그렇다. 또한 조선 초기에 4군 6진, 함경도에서 일어난 반란들, 조사의나 이징옥의 난 등은 모두 여진족을 끌어들이려고 했다는 점도 근거가 될 수 있다.
서양인이 조선에 대해서 쓴 기록에는 "친척 민족에게 공격당했기 때문에(병자호란) 조선인들은 어떤 외국인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라는 구절도 있다. 그러나 이는 혈통적, 문화적인 실질적인 연결점보다 한때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모두 석권하고 지배했던 고구려와 발해라는 정치적 집단의 패권과 이데올로기적 접점을 공유한다는 면에서 접근하는 게 맞는다. 사실 아시아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부모의 나라니 형제의 나라니 하는 명칭들은 은근 아부를 하거나 비위를 맞추려 친해지려고 할 때 많이 쓰였다.[11]
조선인들이 만주족을 보는 시선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여러 기록들에 나와있다. 당연하게도 호란 이후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서는 청나라를 안 좋게 보는 기사가 많지만 개인의 기록에서는 다양한 관점이 서술되어 있다. 가령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만주족 여자와 한족 여자를 구분해서 서술해놓고 있고, 대개 한족 여자보다 만주족 여자를 예쁘게 표현하고 있다. 그 예로 9일 기사를 보면 '한족 여자는 여기서 처음 보는데, 모두 발을 감고 궁혜를 신었으며, 얼굴은 만주 여자만 못하다. 만주 여자 중에는 얼굴이 예쁘고 자태가 고운 이가 많았다.'고 서술되어 있다. 박지원 개인의 호불호인지 실제로 당시 현재 한족 여자들이 못생기고 만주족 여자들이 예뻤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만주족에게 다양한 감정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관계가 안 좋았다고 보는 측에서는 여진족이나 만주족이나 당시에는 민족성의 차이로 봤을 때 별로 영 좋은 이웃은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사실 전근대시대에 한민족을 대상으로 약탈과 침략, 학살을 가장 많이 저지른 집단은 중국 한족이나 일본인이 아니라 이들 만주족을 비롯한 퉁구스계와 몽골계[12]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북방 유목민족들이었다. 거란족을 보면 알겠지만 거란 등 북방 유목민족들도 발해인들을 방패로 쓰다가 필요성이 없어지자 강제 이주를 시키는 등 자신들이 획득한 영토에서 한민족을 배제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인들을 이용한 뒤 버린 나라는 요나라다. 이는 여진의 금나라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나타나게 될 금나라 때의 여진족들도 역시 발해인들을 나중에 중국 대륙으로 이주시키고 여진 또는 한족에 동화시켰다. 한 때 여진 정벌, 동북 9성으로 여진과 치열한 전투를 하기도 했었던 고려처럼 조선 역시 여진족을 경계해서 야인이라 부르며 토벌의 대상으로 여겨 여진족은 상당히 토벌되었고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침공해 강제적으로 굴복시켰다. 병자호란 때 숭덕제가 인조에게 보냈던 편지에는 "너희 조선이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세 나라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대대로 신하를 일컬었지 옛날부터 언제 남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편안히 지냄을 얻은 일이 있느냐?" 하며 조롱하기도 했다.[13]
청나라가 건국된 후 조선을 굉장히 수탈했다. 청은 자신들이 준 것의 10배 이상으로 조선의 부귀를 가져갔다.[14] 저런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면, 조선이 후기에 개막장이 된 게 수치적으로 이해가 될 정도다. 조선이 청나라와 한 조공 무역은 진짜 막장 그 이상으로, 청나라는 조선의 국력을 빨아먹으면서 성장했다.[15] 물론 강희제 때부터는 조선이 완전히 자신들의 질서에 편입된 것으로 판정돼, 조공 요구량이 합리적으로 감소하였고 경신대기근 등 조선에 흉악한 기근이 들었을 때 유무상으로 쌀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명나라가 멸망해서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한 이후에도 조선의 반청감정은 19세기까지 간다.
반청감정은 대한제국까지 이어져서 고종과 신하가 만주족이 점령한 청나라에 복수하고자 1901년 만주족의 근원지 간도 수복에 나서고 성공한다. 이후 을사늑약 이전까지 간도를 점령한 걸 보면 호란의 복수는 성공하였다. 더불어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가 쇠퇴하자 고종은 청나라에게 조공 관계 청산과 함께 황제국 건국을 준비하기 위해 청나라 사람이 조선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명했다.# 바치다는 표현은 조공과 같은 의미니 결국 만주족은 조선에게 조공했다.
신해혁명에는 신규식, 김규흥, 유동열 등 몇몇 조선인들이 가담하기도 했다. 이것은 일부에서 지적하는 것과는 달리, 모화사상에 의한 북벌론과는 무관하고, 민주공화국을 열망하는 독립지사들이 일단 옆나라에 공화국이 생기면 조선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참여한 것에 가깝다. 물론 이건 해당 조선인들의 입장이고,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조선인들에게 북벌을 당한 거나 다름없었지만 말이다.
청나라 멸망 후 일부 만주족이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도망치기도 했으며[16], 이들은 남명 멸망 이후 조선으로 도망친 명나라 유민들과 마찬가지로 한민족에 동화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조선인들에게 명나라 유민들보다도 더한 푸대접을 받았다. 명나라의 경우 비록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파병된 명군이 조선에서 각종 행패를 부리기도 했지만 이는 명나라에 복속된 몽골족 및 여진족과 북방계 한족으로 구성된 북병들이 주로 저질렀으며, 산해관 이남 중국 대륙 출신 한족들로 구성된 남병들은 약탈을 저지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임진왜란 당시 명군은 일본의 한반도 및 대륙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파병되었다. 반면 만주족의 청나라는 상술한 것처럼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을 학살하거나 포로로 끌고 갔으며, 병자호란 종전 이후에는 조공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을 엄청나게 수탈했다. 이러한 한민족과 만주족의 역사적 악연 탓에, 조선으로 도망친 명나라 유민들이 처음에 차이나타운 비슷한 공동체를 만들어 지낸 것과 달리(세금 납부 문제 때문에 숙종 때 이후로 조선 사회에 강제로 동화되었지만) 만주족은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도망친 후 조선인 주인 밑에서 종살이를 하거나 조선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 종사하는 등 조선에서 형식상의 좋은 대접도 처음부터 전혀 받지 못하고 화교 같은 자신들만의 제대로 된 공동체를 형성하지도 못한 채 힘겨운 삶을 살며 서서히 조선인에 동화되어 사라져갔다.[17] 물론 남명 멸망 당시 조선 왕조가 건재했던 것과 달리 청나라 멸망 당시에는 조선이 일본 제국 치하에 놓인 상태였던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설령 청나라 멸망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당하지 않고 계속 독립국으로 남았다 해도 한반도로 도망쳐온 만주족은 한민족과의 역사적 악연 탓에 동화되지 않는 한 결코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만주국 치하에서는 일본 제국이 조선인들을 만주로 대거 이주시킨 후 만주족이나 한족으로부터 땅을 빼앗아 조선인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일본 제국은 조선인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사실 어찌보면 당시 만주족은 조상이 조선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한 역지사지격 경험을 한 셈이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었을 때는 조선인들이 과거에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만주족)에게 역으로 조공하게 되는 굴욕을 당했는데, 만주국 치하 만주족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나라였던 청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던 조선인들이 일본 제국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고향인 만주 땅을 빼앗은 셈이기 때문이다.
6.25 전쟁 때는 중공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남한군과 싸우다 전사한 만주족이 많았다.[18]
현대 만주족의 경우 조선족과 통혼하는 경우도 있으며, 한중수교 이후에는 남한 사람과 국제결혼을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남한과 중국 동북 3성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조선족과 동북 3성 한족의 남한 진출이 증가하면서 만주족이나 몽골족 같은 동북 3성의 다른 민족들 또한 남한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중국의 청나라 관련 역사기록들이 소실된 것 때문에 중국의 만주족 역사학자들이 조상들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기 위해 남한을 방문하여 남한에 남아있는 청나라 관련 역사기록을 접하는 경우도 있다. 북한의 경우 중국의 동북 지역(만주)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만주족과의 교류가 남한보다도 더욱 활발하다.
현재 만주족의 거의 대부분은 중국어에 능통하며,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갖고 있는 중국인이다. 오죽했으면 중국 정부에서 만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당연히 만주족이 중국 공민이라는 의식을 가진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가능한 사업이긴 하지만. 반중이나 분리독립주의 그리고 범퉁구스주의 만주족들도 있을 것이지만 이들은 극소수이며 눈에 띄는 수준은 아니다.
한국의 사이비 역사, 식민사학 만선사관론자들이 퉁구스계 민족(만주족도 해당)과 몽골계 민족을 한민족의 형제 또는 친척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별개로 20세기 이전까지 역사적으로 퉁구스계 민족들은 몽골계 민족[19], 중국 한족, 일본의 야마토 민족과 함께 한민족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민족이었다. 다시 언급하자면 한국의 사이비 역사와 만선사관론자들의 논리대로 퉁구스인과 한민족이 형제 관계였다면 병자호란을 비롯한 만주족 등 퉁구스계의 침공, 거란에 의한 발해 멸망과 고려 침공, 고려의 대몽항쟁은 없었던 일이 되어야 하는 자가당착의 오류가 생긴다. 혈통 및 언어상 진짜로 형제 또는 친척 민족이라고 볼 수 있는 외몽골(독립국가)의 할하인, 내몽골의 차하르인, 시베리아의 부랴트인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니, 단순히 혈통 내지는 언어적으로 비슷하다고 무작정 형제 또는 친척 민족이라는 표현을 남발하는 것은 내선일체의 한국판으로 부적절하며 무의미하다. 진짜 갈라져나온 친척민족 또는 혈통적 동질성이 강한 민족이라 하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원수지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20]
만주족이 독자적인 민족국가를 세울 수 있었어도 청나라의 적통임을 내세우는 만주족 국가와 한민족 국가는 마치 현재의 한일관계, 한중관계처럼 교류와 더불어 정통성, 역사, 영토분쟁 등 대립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4.2. 기타 퉁구스, 몽골계 소수민족 간의 관계
퉁구스계와 몽골계의 경우는 반면 침략을 많이 했어도 옛날 일이었다는 이유와 근대에는 일본이 청나라나 러시아보다 더 길게 간섭하고 훗날 경술국치와 일제강점기로 이어진 것 때문에 이런 이유로 같은 시기 일본과의 갈등과 반일감정이 있었던 청나라 및 러시아가 더 나아보이게 될 정도로 더욱 강경해진 반일감정[21][22], 청이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유지시킬 계획이 일본에 의해 저지되어 실패 및 조선으로부터의 간섭을 멈춘 것과 서양 열강 식민제국 국가들에게도 털린 점 때문에 일부 또는 반 정도는 동시에 이런 암울한 청 후기를 동정하는 경우도 있는데다가 몇번 언급했듯이 특히 만주족과 만주-연해주의 여러 제족들은 청 멸망 이후 나라를 잃은 유민들이 되기도 했고 만주의 일부는 러시아령 외만주가 되어 만주족을 비롯한 퉁구스계 제족들의 옛 고향조차 분할되어 버렸고, 외몽골 지역의 몽골족을 제외한 다른 몽골계 민족들도 몹시 쇠약해져 러시아 및 청[23]에게 자신들의 옛 영역들을 잃고, 운좋았던 외몽골도 매우 약한 국가로 변하다 보니 이러한 역사적 이유로 북방민족들 후손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옅어져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게 되었다.[24][25]그러나 21세기 기준으로 퉁구스계는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한 데다가 몽골계의 경우 외몽골 한정으로 주권국가를 형성했지만 전근대와 달리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 한국에 비해 국력이 강한 편이 아니다보니 퉁구스계와 몽골계는 전근대 시대와 달리 한국을 대상으로 각각 원나라와 청나라 당시에 한국이 그들의 속국이었다는 것을 거론하거나 국익을 추구한답시고 한국과 마찰을 일으킬 여건이 안 되는 상황인 동시에 한국과 대립하려는 계획 자체가 없는 상황이라 한국인들이 비교적 최근의 역사인 일제강점기와 일본 정부의 정치적 도발, 일본 내 극우들의 역사왜곡, 반한, 혐한주의로 인한 반일, 혐일감정과 6.25 전쟁 당시 북한 정권을 돕고 중공군의 개입과 중국공산당의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과 동북공정, 문화 침탈을 비롯한 패권주의적 외교정책, 지금도 북한 정권을 탈출하려는 탈북자들을 강제로 붙잡아 북한 정권이 유린하는 데 방조 및 간접적으로 돕는 거나 다름없는 중국의 행동들(거의 한족들인데다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행하는 중국 공산당 역시 한족 출신이 대부분이다.)[26],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중국 당국의 무능한 대응으로 인한 반중, 혐중감정 등 근대 말에서 현대까지 폐해를 끼쳤고, 이러한 현대 주권국가로 존재하고 마찰하고 있는 현대 중국과 일본과의 갈등과 악감정들이 지금까지 번지는 현상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인식이 나쁜 것과는 달리 현대 한국사회에서의 몽골계와 퉁구스계에 대한 악감정이 해당 민족들이 약소국가·소수민족으로 전락해버린 탓에 전근대에 비해 없어졌다.
5. 관련 문서
- 대한민국/외교
- 한중관계, 한러관계[27]
- 중국/외교, 러시아/외교
- 만주
- 만주/역사
- 여요관계
- 고려-금나라 관계, 조선-여진 관계
- 조청관계
- 솔빈부(우수리스크)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동아시아 국가
- 만주회복, 간도회복
[1] 사실 이건 근대에 들어 만주 지역을 싸잡아서 하나의 지리적 개념으로 넓혀서 그런거다. 내몽골 동부나 외만주 일대는 기존의 요동을 포함한 남만주 일대의 식생하고는 다르고 거기를 근거지로 둔 세력도 역사적으로 달랐다. 고대에만 해도 오늘날 만주 서부 일대인 요서와 내몽골 동부는 동호계 민족이, 요하 동쪽과 송화강 이남에서는 고대 한민족인 예맥계가, 그 밖에 동북부 일대에서는 퉁구스 계통이 주된 세력으로 성장했고 서로의 문화와 지리, 풍습도 많이 달랐다. 오늘날과 같이 만주라는 하나의 권역으로 싸잡아 말하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 시기 동삼성을 설치한 이후라고 볼 수 있다.[2] 고조선, 고구려, 부여는 예맥계로서 금나라 여진족인 숙신계와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삼한 역시도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고조선에서 유입된 계층이 다수이자 주류였기 때문에 이 역시 결국에는 예맥계에 해당한다.[3] 여진족 문서 참고[4] 그렇지만 만주족에 속하지 않은 상당수 퉁구스족이나 북시베리아계통의 시베리아 원주민들 그리고 몽골계 민족들도 쭉 주거하기는 했다. 청나라가 만주를 신성시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만주족들은 인구가 별로 많지가 않아서 그대로 주거해도 영향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한족이나 조선인의 유입만 막는 정도였다.[5] 다만 청나라 건국 이전 만주는 명나라의 요동을 포함해도 100만도 안되는 적은 인구였다.[6] 다만 산둥성과 허베이성 일대의 한족들 같은 경우 과거 발해유민들이 요금시대 때 대량으로 강제이주된 지역이기 때문에 한족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동화된 발해인들의 후손도 상당수 섞여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한국의 화교들 또한 조상이 해당 지역 출신인 경우가 대다수다.[7] 일본인이 2번째이고 3번째가 북방 중국인. 편견과는 다르게 몽골인과는 유전적 관계가 꽤 먼 편이다. 몽골인 중에서도 그나마 중국 동북3성의 일부 몽골계 주민들이 한민족과 유전적 관계가 가까운 편이며 다른 지역에 사는 몽골인 대다수는 한민족과 유전적 관계가 멀다. 오히려 후술할 투바 및 카자흐, 키르기스, 야쿠트인 등 원시 튀르크계가 몽골인과 유전적 관계가 가까운 편이다. 몽골인 중에서도 한민족과 유전적 관계가 그나마 가까운 이들은 동북 3성의 몽골인이다.[8] 해당 기록에서는 부여(한국인의 조상)와 읍루(만주족의 조상)가 서로 외모가 비슷했지만 언어와 문화가 달랐으며, 부여의 경우 읍루를 종속시키고 착취하는 등 계통 자체는 비슷해도 정체성의 차이는 극명했다.[9] "19C 초반까지는 함경도 주민과 만주족 주민이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했다"는 썰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외국어로서 만주어/중국어/한국어를 배우지 않는 이상 세 언어 사이에서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구한말~일제강점기 한국의 문학 작품을 보면 그때까지도 함경도에 만주족이 거주했거나, 함경도가 만주족의 거주지라는 인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재가승이라는 여진족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집단들이 함경도에 널리 살고 있었다[28].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의 발상지가 두만강 유역이다 보니 그럴 만도 하다. 사실 유물을 통해 보면 의외로 한국인이 두만강 유역에 지배권을 행사하던 고구려 시대에도 말갈족이 두만강에서 함경도에 걸쳐 넓게 살았다는 흔적이 발견된다. 이게 당연한 게, 말갈족들도 사람이니만큼 동장군을 피해 계속 남하해서 그렇다. 그리고 삼국시대 후기부터 고려와 조선시대 초기까지 동해안을 따라 말갈이 침입하거나, 여진족들이 배를 통해 동해안 일대들을 약탈하기도 했다. 그리고 통일왕조 시대 이후에 가장 늦게 편입된 지역이 함경도이기도 하다.(평안도는 고려 초중기에, 함경도는 조선 초기에 한국 왕조에 흡수되었다. 황해도~경기도는 아예 고려의 발상지였고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는 후백제 및 통일신라에게서 계승.)[10] 어떤 사람들은 고조선과 숙신이 발음만 다를 뿐 같은 나라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 중국 사서들은 분명히 조선과 숙신을 구분하고 있다.[11] 중앙아시아의 몽골제국 후예인 킵차크 칸국 및 티무르 제국이나 터키의 오스만 제국 등 튀르크계의 황제들이 몽골 제국과의 연결점을 주장하며 칭호 중에 칸을 사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목민들이 중심이 되는 변경사에서 이렇게 일전에 그 지방을 지배했던 정치체에 혈통과 상관 없이 그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물론 오스만 제국은 실제로 크림 칸국을 번국으로 거느리고, 현대 터키인의 혈통에는 이 크림 칸국의 후예인 타타르인들도 10% 이상을 차지하며 튀르크 또한 몽골 고원에서 출발한 종족이었음은 감안해야 한다. 지금도 투바 및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사하 공화국 등 원시 튀르크계는 전형적인 북방 동양인이고 관습도 몽골적이며, 몽골인들과 같이 있으면 각자의 언어로 말을 하거나 각자의 전통의상을 입는 경우가 아닌 이상 누가 원시 튀르크계이고 누가 몽골인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다.[12] 고구려를 침공하여 위기에 빠뜨렸다가 훗날 광개토대왕에 의해 역관광당한 후연은 선비족 왕조이고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살수대첩으로 대표되는 역관광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멸망한 수나라 및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대로 멸망시키고 신라를 침략한 당나라는 한족과 선비족의 혼혈 왕조인데, 선비족 또한 몽골계 민족이다. 수, 당의 경우 이미 오호십육국시대 침투 왕조의 세대가 오래 지나면서 한화 또한 상당히 되었기 때문에 대체로 한족 왕조에 가깝게 여겨지고는 있다지만 근래에는 서울대 박한제 교수의 호한체제론 등 기존의 대체로 유목민족이 한족 문화에 동화되기만 했다는 침투 왕조설을 비판하여 유목민족의 영향 또한 만만치 않았다는 새로운 주장 또한 거센 편이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침공한 요나라의 거란족 역시 몽골 계통이다.[13] 조선 입장에선 기도 안찰 헛웃음만 나오는 상황. 당장 만주족 본인들부터 이전 여진족까지만 해도 조선에 조공하거나 아부하며 벼슬을 얻거나 했었으며, 심지어 숭덕제의 윗세대 건주여진족들은 조선왕들에게 칭신하며 꼬박꼬박 조공을 바치러 왔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국력이 엄청나게 쇠퇴한 상황에서 힘 좀 세졌다고 갑을관계가 바뀐 이런 적반하장 개드립까지 치니 어이가 없는 것.[14] 조공 문서 참조.[15] 농담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건 재화든 기술이든 다 가져가서 은근 이익을 많이 봤다.[16] 만주족 중 일부가 조선으로 피신한 것은 청나라 당시 피지배층이었던 한족들의 보복과 학살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외에도 같은 이유로 몽골, 신강 등 여러 지역으로 피신했다.[17] 설령 한민족에 동화되지 않고 지금까지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왔다 해도 러시아와 2014년 이전 우크라이나의 크림 타타르인, 미얀마의 로힝야족, 불가리아의 포마크인과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 튀르키예의 쿠르드족,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베트남의 참족, 일본에서의 한국계, 중국에서의 위구르인을 비롯한 무슬림 소수민족들 및 티베트인, 아프가니스탄(주로 파슈툰인) 및 이란의 하자라인, 방글라데시의 비하르인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크림 타타르인들은 크림 한국 시절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의 변방을 지속적으로 약탈했고 러시아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들을 납치하여 오스만 제국, 크림 칸국 및 다른 튀르크족들, 동유럽을 제외한 유럽 지역, 아랍 지역에 인신매매를 했던 역사적 악연 때문에, 훗날 러시아에 복속된 뒤에는 러시아인들에게 영 좋지 못한 대우(스탈린 집권 당시의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거나 인종청소를 당했음에도 1980년대 후반 소련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한 것과 2014년 크림 반도가 러시아에 합병되면서 러시아인들에게 사적제재를 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은 크림 타타르족이 러시아와의 역사적 악연 때문에 영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함을 보여주는 예시다.)를 받고 있다. 로힝야족은 영국인들이 토착 미얀마인들에게서 빼앗은 미얀마의 농경지를 영국인들에게 받은 것 때문에 토착 미얀마인들에게 영국인들과 똑같은 침략자로 취급당하고 있다. 포마크인과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은 정교회를 믿는 불가리아 대다수 국민들에게 각각 매국노의 후손과 침략자의 후손으로 취급받고 있다. 쿠르드족, 팔레스타인인, 참족, 하자라인은 각 문서 참고. 한국계의 경우 재일 한국인, 한일관계, 혐한/일본, 넷 우익/성향,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신라구, 왜구, 일제강점기, 일본/과거사 청산 문제, 관동대지진 학살 참고.[18] 물론 당시 중공군 중에는 한족들이 가장 많긴 했다. 정확히는 만주에 거주하는 한족들이 많았지만. 그 외에 조선족, 몽골족, 후이족 등 만주에 살던 다른 민족들도 중공군 소속으로 대거 참전했다.[19] 선비족(전연, 후연)의 고구려 침공, 거란에 의한 발해 멸망, 거란의 고려 침공, 대몽항쟁이 여기에 해당된다. 사실 병자호란도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데, 병자호란 당시 청군 몽골팔기 소속으로 참전한 내몽골 차하르인들이 숭덕제의 경고를 무시하면서까지 조선인들을 약탈하였기 때문이다.[20] 세계사에서 가장 극적으로 터진 사례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있다. 참전국들이 모두 민족적으로는 친척임에도 사상 이념,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굉장히 잔인하게 서로를 죽이고 죽인 사례이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또한 러시아군이 같은 루스민족 계통의 친척 국가인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초토화시키고 있는 상황이다.[21] 명성황후(민비)를 생각하면 딱 이해가 더 쉽다. 일본과의 대립, 견제하려던 점 때문에 나중에 반일감정이 엄청 심했을 때는 명성황후가 미화는 물론 재평가도 잠시나마 나왔으니 말이다. 물론 나중에는 다시 부정적 의미로서의 재평가가 이뤄지게 되었다. 이는 민비 뿐 아니라 당시 청나라, 제정 러시아도 비슷했는데, 더욱이 청과 러시아는 실패했으니 이들에 대한 반감은 현재는 덜하게 되었다(하지만 구한말 시기에는 전부 다 안 좋게 보았다).[22] 다만 당시가 아닌 현대 시점에서 청러일 삼국의 침략 의도가 비슷하다는 주장은 일제를 옹호하는 물타기에 가깝다. 청 조정의 의도는 전통적 조공관계의 유지, 즉 현상유지였고 조공국의 본격적 종속국화 혹은 식민지화는 극소수의 의견일 뿐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경우 한술 더 떠 니콜라이 2세 황제가 독일 카이저와의 대담에서 일본은 물론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고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물론 조선을 가만히 두겠다는 소리는 아니었겠지만, 이권과 부동항을 뜯기는 것과 병탄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결국 이는 일제가 아니었어도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억지에 가까우며, 해당 주장이 맞는 말이라 해도 그걸 가지고 일제의 조선 병탄을 정당화하는 것은 일본 극우세력에게 명분을 제공하는 꼴이 되는 위험한 발상이다.[23] 제정 러시아, 청나라 이후 소련과 중화민국, 현재 중국과 러시아도 현재까지 부랴트, 칼미크, 내몽골의 차하르 몽골인과 다우르족, 신강 동부의 몽골계 거주 지역을 통치하고 있다.[24] 다만 만주족에 대한 악감정이 희석된 건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이 자신들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병자호란 당시의 청나라를 관대하게 평가하는 역사관을 조선인들에게 주입한 면도 있다. 실제로 일본 제국은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 본토까지 침공하면서 자신들의 이러한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청나라의 중원 입관을 높이 평가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한국인들 사이에서 만선사관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는 상태이며 이러한 영향으로 청나라와 그 나라의 지배층이었던 만주족에 대한 부정적인 재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25] 만주족은 아니지만 외몽골 및 그 외 몽골계 민족들의 옛 국가들(요, 원 - 요나라는 그래도 금, 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정책을 많이 펼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금, 원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을 뿐이고, 요나라도 한족과 발해인, 여진족 중 반대세력들에게는 훗날 몽골의 몽골 제국처럼 무차별적이고 잔혹한 처형과 학살도 저질러서 비판적으로 보기도 하며, 오대십국시대의 중국대륙을 잠깐 점령했었을 때는 많은 한족들 및 한화된 민족들이 거란에게 피해를 받았고, 나중에 점령지에서 대규모 민중들의 불만으로 인한 저항으로 거란은 연운 16주를 제외한 중국 대륙에서 철수했을 정도였다. 몽골 제국은 알려졌다시피 항복하거나 저항하지 않은 세력에게만 한정이지만, 어쨌든 자비도 베풀어주기도 했으나 동시에 잔혹한 학살로도 악명이 높았고, 긍정적 재평가로 인해 잠시 묻히기도 했으나 몽골 제국의 일부 업적들이 과장되었다는 것도 알려지면서 다시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역시 비슷하게 최근에는 부정적인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다.[26] 소수민족들도 있지만 주요 민족인 한족이 거의 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우위를 차지한다고 봐도 무방해서 주로 한족계 중국인들이 많이 비판을 많이 받는다.[27] 정확히는 러시아 극동 일대이다.
[28] 일단 재가승이 고려시대의 스님을 칭하는 단어이기도 해서 여진의 영향을 받되 여진족이 아니었을 확룰이 높다. 또한 거주지역과 생활모습이 여진족의 옛 영역이나 풍습과 비슷하기도 해서 여진족으로 잘못 알려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많이 나온다. 물론 재가승이 여진족이 아니라고 해도 일제 강점기 때 이미 일부 만주족 및 만주인들이 넘어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