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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FFFF00> 카를 슈미트 Carl Schmitt | |
출생 | 1888년 7월 11일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스트팔렌 플레텐베르크 | |
사망 | 1985년 4월 7일 (향년 96세) |
독일연방공화국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플레텐베르크 | |
국적 | 독일국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베를린 대학교 (법학) 뮌헨 대학교 (법학)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법학 / 박사) |
경력 | 그라이프스발트(1921), 본(독일)(1922), 베를린 상과대학(1928), 쾰른(1933), 베를린(1933~1945) 대학 교수 역임. |
종교 | 가톨릭 |
소속 | |
주요개념 | 예외상태, 오적구별(吾敵區別), 주권자, 결단주의, 정치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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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슈미트는 독일의 변호사였으며 정치철학자로서 20세기 독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이 큰 헌법 및 국제법 전문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된다. 그의 작품들은 큰 학문적 명성을 안겨주었고, 그의 이론과 견해는 오랫동안 독일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서구 세계 전체로 퍼졌다.슈미트는 정치적 권력의 효과적인 행사에 대해 광범위한 글을 썼으며, 의회주의·자유주의·세계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가로서 그의 연구는 정치이론, 법이론, 대륙철학, 정치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 가치와 중요성은 매우 크다. 그의 출판물은 정치학, 사회학, 신학, 독일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으며, 법적·정치적 작품 외에도 그의 광범위한 작품에는 풍자, 여행 기록, 사상사에 대한 조사 또는 게르만 텍스트 해석과 같은 장르가 포함된다.
슈미트는 1933년부터 국가사회주의를 옹호했으며, 1933년 5월 1일 NSDAP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총통은 법을 보호한다」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총통 명령”이라는 법적 원칙을 통해 장검의 밤 사건을 정당화했다. 그는 1935년의 반유대주의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자유 헌법”이라고 불렀다. 그는 헤르만 괴링과 한스 프랑크의 보호를 받았다. 그는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나치 정권 하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았지만, 그를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한 나치 친위대(SS)의 위협으로 공적 생활의 최전선에서 제외되었다.
슈미트의 영향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초기 독일연방공화국의 헌법과 법학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의 사상이 국제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정치 사상의 고전”으로 불린다. 슈미트는 아리스토텔레스, 토머스 홉스, 니콜로 마키아벨리, 장 자크 루소, 후안 도노소 코르테스, 조르주 소렐 및 빌프레도 파레토와 같은 정치 사상가로부터 자신의 사고에 대한 형성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의 반유대주의 세계관은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에 의해 형성되었다.
슈미트의 작업은 독일의 사상가 발터 벤야민, 정치 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 위르겐 하버마스, 에릭 푀겔린(Eric Voegelin), 한나 아렌트, 법학자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푀르데(Ernst-Wolfgang Böckenförde), 에른스트 루돌프 후버(Ernst Rudolf Huber), 종교 사회학자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사회학자 줄리앙 프룬드(Julian Freund), 이탈리아 정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 안토니오 네그리, 지안프랑코 밀리오(Gianfranco Miglio), 파올로 비르노(Paolo Virno), 슬로베니아 정신 분석가 슬라보예 지젝, 벨기에 정치외교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 등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2. 생애
그는 베스트팔렌(Westfalen)의 플레텐베르크(Plettenberg) 지역의 가톨릭 가문에서 태어나 그 가문의 장남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슈미트는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인문학, 문학, 종교 및 그리스어에 대한 읽고 쓰는 능력을 키웠다. 1907년 아텐도른의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베를린, 뮌헨,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등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191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학위논문 「책임과 책임의 종류─하나의 술어적 고찰」을 제출하였다(지도교수는 프리츠 판 칼커). 1912년 『법률과 판결』을 출판하고, 1914년 교수자격논문 「국가의 가치와 개인의 의의」를 출판한다.1915년 2차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리판사(심사원) 자격을 취득하고 뮌헨 참모부의 전시 상황에 돌입했다. 같은 해, 스페인의 무용수로 활동하던 파울라 도로티아(Pawla Dorotić)와 결혼을 하지만, 1924년에 이혼하게 된다.[1] 1916년 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슈트라스부르크 대학교 사강사가 되어 1918년 11월까지 근무한다.
슈미트는 일찍부터 예술적 행보를 보였다. 1916년 유명한 현대 시인 테오도어 도이블러(Theodor Däubler)에 대한 연구 『테오도어 도이블러의 극광』을 발표한다. 그는 다다이즘(Dadaism)의 창시자 중 한 명인 후고 볼(Hugo Ball) 뿐만 아니라 시인이자 편집자인 프란츠 블레이(Franz Blei),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l) 및 프란츠 카프카의 지지자이기도 했다. 미학적인 변호사로서의 슈미트는 정기적으로 문학작가들과 아이디어를 교환하며 상호 영향을 받았다. 이때 슈미트는 정치적 가톨릭 시인 콘라트 바이스(Konrad Weiß) 와 같은 시인들과 특히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다. 슈미트는 나중에 에른스트 윙어 및 화가이자 작가인 Richard Seewald와 친구가 되었다.
그는 예술적 독자성으로 변호사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채로운 표현으로 빠르게 유명해졌다. 그의 스타일은 새롭고 과학적 환경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변호사처럼 글을 쓰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텍스트를 시적이고 극적인 방식으로 연출하고 신화적인 이미지와 암시를 제공했다. 그의 글은 주로 논쟁을 강요하는 논문과 같은 작은 브로슈어였다. 슈미트는 첫 번째 문장이 출판의 운명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확신했다. 그의 출판물에는 많은 시작 문장이 있다. 예를 들어 "반로마적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 "국가 개념은 정치적 개념을 전제로 한다", 또는 "주권자는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등. 그는 빠르게 유명해졌다.
1919년 본(M.J. Bonn)의 주선으로 뮌헨 상과대학의 사강사가 된다. 같은 해 『정치적 낭만주의』를 출판한다. 1921년 그라이프스발트 대학의 정교수가 된다. 같은 해 『독재론』을 출판한다. 1922년 4월에 에리히 카우프만(Erich Kaufmann)의 도움으로 루돌프 스멘트(Rudolf Smend)의 후임으로 본 대학 정교수가 된다. 같은 해 『정치신학』을 출판한다. 1923년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지위』, 『로마 가톨릭주의와 정치형태』를 출판한다. 본에서 헌법 변호사인 슈미트는 젊은 가톨릭 신자들과 접촉을 유지했고 교회법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24년 그는 개신교 신학자이자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에릭 페테르존(Erik Peterson)과 만나게 되었으며, 1933년까지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교회법에 대한 집착은 『정치신학』(1922)과 『로마 가톨릭주의와 정치형태』(1923, 교회 승인이 있는 제2판)와 같은 저작물에 반영되었다. 이 기간 동안 슈미트는 수많은 가톨릭 신학자들, 특히 칼 에슈바일러(Karl Eschweiler, 1886-1936)와 친분을 쌓았다. 1925년 『국제정치의 대상으로서의 라인란트』를 발표한다. 1926년 세르비아인 두슈카 토도로비치(Duška Todorović)와 재혼을 하며, 이 때문에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다.[2]
1927년 『정치적인 것의 개념』 제1판을 발표한다. 1928년 4월 바이마르 헌법의 기초자인 후고 프로이스의 후임으로 베를린 상과대학의 정교수가 된다. 같은해 『헌법이론』을 발표한다. 1930-32년 저술과 감정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제도를 정당화한다. 이는 후에 나치 친위대(SS)로부터의 공격 빌미로 작용한다. 1931년 『헌법의 수호자』를 출판한다. 슈미트는 한스 켈젠(Hans Kelsen)과 함께 헌법의 수호자가 헌법재판소인지 대통령인지에 대한 문제를 두고 널리 알려진 논쟁에 참여한다. 동시에 그는 의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반동적 흐름에 접근했다. 1932년 『합법성과 정당성』, 『정치적인 것의 개념』(제2판)을 출판하고, 이른바 파펜 쿠데타 사건에서 정부 측 대리인으로서 라이프치히의 국사재판소 법정에 선다. 1933년까지 슈미트는 헤르만 헬러(Hermann Heller), 에리히 카우프만(Erich Kaufmann), 한스 켈젠(Hans Kelsen)과 같은 유대인 동료들과 작가 프란츠 블레이(Franz Blei), 정치경제학자 모리츠 율리우스 본(Moritz Julius Bonn)과 같은 다른 분야의 동료들과 부분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자신의 『헌법이론』(1928)을 1914년에 사망한 유대인 친구 프리츠 아이슬러에게 헌정했다. 여기에서 그는 지배적인 견해에 맞서 헌법의 "불가침적 본질" 이론을 발전시켰다. 규제 정책 측면에서, 경제적으로 정통한 슈미트는 “자유 경제”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 강력한 국가를 옹호했다. 여기서 슈미트의 사상은 여러 면에서 질서자유주의나 후기 신자유주의와 만났는데, 그는 당시─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서독 경제를 형성한 "사회적 시작 경제"의 아버지라고 불리는─알렉산더 뤼스토우(Alexander Rüstow)와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다.
1933년 3월 24일의 수권법 이후 슈미트는 자신을 히틀러의 확고한 지지자로 소개했다. 그가 기회주의자로서 이 일을 했는지 혹은 내면의 신념에서 이 일을 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3]
일부 관찰자들은 슈미트가 1930년 헤르만 뮐러 이후 모든 정부의 고문으로 활동하게 된 “인정에 대한 무한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슈미트를 자유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자로 본다. 그의 사고는 본질적으로 모든 합리적 추론에 앞서는 국가 사회주의를 위한 정치적 선택을 제시했다. 요컨대 문제는 슈미트의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헌신이 이론의 문제인지 성격의 문제인지이다. 이 해결되지 않은 연구 문제는 이제 1933년이 슈미트 이론의 단절을 나타내는지 아니면 연속성을 나타내는지에 대한 문제에서 주로 논의된다. 이러한 모순된 논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 것은 슈미트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모호하게 공식화하고 “정의에 대한 변화하는 요구에 적응한 회고적 자기해석의 거장”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단절 대 연속성)의 대표자는 슈미트의 자체 보고에 의존하여 자신의 논제를 뒷받침할 수 있다. 헤닝 오트만(Henning Ottmann)은 모든 슈미트 해석의 근본적인 질문으로 “간헐적 사고 또는 연속성”이라는 대조를 설명한다. 따라서 슈미트의 사고가 내부 논리(연속성)를 따랐는지, 아니면 순수하게 내부 일관성과 일관성이 희생된 외부 사건에 의해 추진되었는지 불분명하다. 오트만에 따르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단순한 우연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나 슈미트적 사고의 핵심을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결정주의로 증발시켜야 한다. 반면에 순수한 연속성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은 반자유주의나 반마르크스주의에서 국가사회주의의 불의한 국가로 이어지는 짧은 길을 건설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의 이론과 가톨릭의 사회적 기능에서 숨겨진 연속성을 인식한다. 1933년 2월의 갑작스러운 편파 변화를 고려한다면,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가정은 명백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자유주의나 파시즘에 대한 찬미 등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연관성이 있었기 때문에 슈미트의 국가사회주의로의 전환은 단순히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이론의 문제로 이해되어야 한다라고 카를 발레스트렘(Karl Graf Ballestrem)은 강조한다.
그 이유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더라도 슈미트가 완전히 새로운 노선으로 전환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수권법을 "신독일의 임시 헌법"이라고 불렀고, 1933년 5월 1일 회원 번호 2,098,860으로 NSDAP에 가입했다. 1933년 5월 31일 서독 옵서버(West German Observer)에서 그는 나치 테러의 시작을 피해 도망친 독일 지식인을 "그들은 영원히 독일에서 쫓겨났다"고 저주했다. 그는 이전에 그의 빠른 학문적 경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유대인 동료들과 수많은 개인적 접촉을 유지했지만 1933년 이후에는 유대인 교수 동료들을 비난하고 반유대주의 팜플렛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슈미트는 이전에 자신을 쾰른 대학교에 임명되도록 옹호했던 한스 켈젠의 퇴임을 반대하는 동료들의 결의안 초안을 거부했다. 슈미트는 1945년 이후에도 켈젠에 대해 반유대주의적 욕설을 공식화했다. 나치 시대에 그는 항상 그를 "유대인 켈젠"이라고 불렀다.
1933년 7월 11일, 그의 후원자인 프로이센 총리 헤르만 괴링은 그를 프로이센 국무원에 임명했는데, 이는 그가 평생 동안 특히 자랑스러워했던 직함이다. 1972년까지만 해도 그는 노벨상 수상자가 아니라 프로이센 국무위원이 된 것을 감사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슈미트는 1933년 자신의 소책자 『국가·운동·민족』에서 독일 혁명의 합법성을 강조했다. 슈미트는 국가사회주의 혁명의 합법성을 강조함으로써 NSDAP의 리더십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NSDAP 국가에 대한 그의 법적, 구두적 헌신으로 인해 그는 동시대 사람들, 특히 정치 이민자(학생 및 지인 포함)에 의해 "제3제국의 왕실 변호사"로 묘사되었다. 1933년 가을, 슈미트는 국가 정책상의 이유로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에 임명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구체적인 질서 사고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무류성을 주장하는 기관, 이러한 공식-카리스마적 주권 이론은 지도자의 의지와 법의 동일성("지도자의 뜻은 법이다")이라는 명제를 전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식으로 슈미트는 통치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명성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체제에 대한 슈미트의 헌신은 무조건적이었다. 나치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헌법사를 도구화한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그의 진술 중 상당수는 충성스러운 변호사에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1934년 6월 30일 장검의 밤 당시의 살해 사건에 대응하여 (사망자 중에는 정치적으로 가까운 전 독일 총리 쿠르트 폰 슐라이허도 포함)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히틀러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총통은, 위험에 직면하여 그의 총통으로서의 지위에 힘입어 최상위의 재판권자로서 직접적인 법을 창설하는 경우, 법이 극히 사악하게 오용되는 것으로부터 법을 보호하는 것이다."
진정한 영도는 언제나 또한 재판관이기도 하다. 총통의 지위로부터 재판관으로서의 지위가 나온다. 슈미트에 따르면 두 직위를 분리하거나 대립시키려는 사람은 재판관을 총통에 대한 적대자로 만들려고 하거나 총통에 대한 적대자의 수단으로 만들려고 하는 자이며, 사법의 힘을 빌어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자이다. 슈미트는 지지자들의 법적 맹목의 권력 분리를 비난했다. "리더십"과 "판단력" 사이의 이러한 주장된 일치는 법적 사고의 특정 왜곡의 증거로 간주된다. 슈미트는 정치적 호소로 다음과 같은 글을 마무리한다.
"우리들의 정치적인 전체적 상황의 배후에 존재하는 가혹한 상황을 직시하는 사람은 총통이 발하는 주의와 경고를 이해할 것이며 저 위대한 정신적 투쟁을 위하여 무장할 것이며 그러한 투쟁 속에서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수호해야 할 것이다."
슈미트는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국가사회주의적 조건에도 기괴한 양식의 자유 헌법으로 묘사하면서 다시 한 번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로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소위 독일 혈통 및 독일 명예 보호법을 통해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정의한 유대인과 독일혈통 간의 관계를 범죄화하면서 슈미트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원칙의 출현을 보았다. 슈미트에 따르면, 이러한 인종 개념에 기초한 법률은 근본적으로 인종 차별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거부하는 다른 나라의 법률에 위배된다. 슈미트에게는 이러한 서로 다른 이념적 원칙의 충돌이 국제법의 주제였다. 슈미트 당 선전의 하이라이트는 1936년 10월 그의 지도 하에 개최된 법학 분야의 유대인 회의였다. 여기서 그는 「유대 정신과 투쟁하는 독일 법학」을 발표하고, 국가사회주의 반유대주의를 명시적으로 인정하며, 유대인 작가들이 더 이상 법률 문헌에서 인용되지 않거나 적어도 유대인으로 분류될 것을 요구했다.
"우리는 새로운 위장과 속임수의 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총통이 유대 변증법에 관해 말한 내용을 우리 자신과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야 한다. 감정적인 반유대주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식 기반 보안이 필요하다. 우리는 유대인 이민자들이 대관원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의 위대한 투쟁을 비영적인 것으로 묘사할 수 있게 했던 모든 위조, 즉 정신이라는 용어의 위조로부터 독일 정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비슷한 시기에 슈미트에 대한 국가사회주의 캠페인이 있었는데, 이는 슈미트의 광범위한 무력화를 가져왔고 그 중심에는 오토 쾰로이터(Otto Koellreutter), 카를 아우구스트 에크하르트(Karl August Eckhardt), 라인하르트 혼(Reinhard Höhn)이 있었다. SS 소속 흑군단당 신문에서 슈미트는 "기회주의"와 "국가 사회주의적 정서"가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슐라이허 정부에 대한 지원과 유대인과의 친분에 대한 비난을 받았다. 1936년부터 국가사회주의 기관들은 슈미트의 권력 지위를 박탈하고 그에게서 국가사회주의적 감정을 부인하며 그가 기회주의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NSDAP 회원 슈미트는 1936년에 당 조직의 모든 직위를 잃었지만 같은 해 괴링이 마지막으로 소집한 프로이센 국무원에 남아있었다. 슈미트는 국가사회주의가 끝날 때까지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에서 주로 국제법 분야의 교수로 일했지만 여기서도 그는 정권의 핵심 대변인이 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이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개발된 대규모 국제 질서 개념에서 나타나며, 그는 이를 독일의 먼로 독트린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나중에 히틀러의 국제법 확장 정책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간주된다.
1938년 『홉스 국가론에서의 리바이어던』을 출판한다. 1939년 『국제법상의 광역질서』를 발표한다. 1940년 논문집 『입장과 개념들』을 발표한다. 1942년 『땅과 바다』를 발표한다. 베를린에서 유럽 전선의 종전을 경험한 슈미트는 1945년 4월 30일 소련군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후 석방되었다. 1945년 9월 26일 미국인들은 그를 체포하여 1946년 10월 10일까지 베를린의 교외 뤼덴샤이트에 있는 포로·정치범수용소에 구금했다. 6개월 후 그는 다시 체포되어 바거제의 감옥을 거쳐 뉘른베르크로 이송되었으나 불기소처분을 받고 5월에는 고향 플레텐베르크로 돌아간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침략 전쟁, 전쟁 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 계획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혐의로 로버트 켐프너(Robert MW Kempner) 차장 검사로부터 피고인으로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법적인 의미에서 범죄가 성립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소되지 않았다. 캠프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 사람을 무엇으로 기소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인류에 반하는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고, 전쟁 포로를 죽이지도 않았으며 침략 전쟁을 준비하지도 않았습니다.“
1950년 옥중기 『구원은 옥중에서』와 『대지의 노모스』를 출판한다. 같은 해, 부인 두슈카가 사망하여 파문이 풀려 가톨릭 교회로 복귀한다. 그는 더 이상 교수직에 지원하지 않았다. 대신 고향인 플레텐베르크로 물러나 Eisenbahnerzeitung 에 게재된 "Walter Haustein"이라는 본 기본법에 대한 검토와 같이 처음에는 가명으로 추가 출판물을 준비했다. 1954년 7월 19일, 슈미트의 기사가 주간 신문인 Die Zeit 에 "권력의 대기실에서"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슈미트는 때때로 가명으로 출판된 편집자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정치적 또는 법적 문제에 대해 논평하기도 했다.
슈미트는 고립으로 고통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법률 이론가인 테오도어 마우츠나 오토 쾨엘로이터처럼 나치 독일에서의 활동과 거리를 두고 탈나치화를 추구했다면 가능했을 재활을 포기했다. 1949년 10월 1일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당신은 왜 자신을 거부당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까? 첫째로, 나는 장악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로 협력을 통한 저항은 나치의 방법이지만 내 취향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후 슈미트에 대한 공개 비난의 중심 주제는 장검의 밤에 대한 그의 변호와 그가 베를린에서 이끌었던 유대인 회의의 반유대주의 저서였다. 예를 들어 1959년 튀빙겐 변호사 아돌프 슐레는 이 때문에 슈미트를 폭력적으로 공격했다. 나치 정권이 끝난 후에도 슈미트는 사후에 출판된 일기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홀로코스트를 비판하기보다는 홀로코스트 범죄를 상대화하는 것을 선택했다.
"진정한 범죄자, 히틀러주의의 창시자는 누구인가? 이 캐릭터를 누가 발명했는가? 잔혹한 사건을 세상에 가져온 사람은 누구인가? 1,200만 명의 죽은 유대인들은 누구에 빚을 지고 있는가? 나는 여러분에게 매우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 히틀러는 스스로를 발명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무명용사라는 신화적인 인물을 만들어 낸 진정한 민주적 두뇌를 알고 있다."
1945년 이후에도 슈미트는 반유대주의를 고수했다. 이에 대한 증거는 1947년 9월 25일자 그의 주석집 항목에서 그가 "동화된 유대인"을 "진정한 적"으로 묘사한 항목이다.
"유대인은 항상 유대인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는 개선하고 변화할 수 있다. 이는 북유럽 인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동화된 유대인이 진짜 적이다. 시온 장로들의 슬로건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1956년 『햄릿이냐 헤쿠바냐』를 출판한다. 1958년 『헌법 논집 1924-1954』을 출판한다. 1963년 『파르티잔의 이론』을 출판한다. 1967년 논문 「가치들의 전제」 발표. 1970년 『정치신학II』 출판. 1978년 마지막 논문 「합법적 세계 혁명」을 『국가』지에 발표. 1985년 4월 7일 플레텐베르크의 병원에서 사망.
슈미트는 97세까지 장수하였다. 그의 질병인 뇌경화증은 점점 더 오래 지속되는 망상 에피소드를 가져왔다. 이전에도 편집증적인 성향을 보였던 슈미트는 이제 자신이 음파와 목소리에 쫓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나는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사람이 주권자다'라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는 죽음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주권자는 우주의 파도를 통제하시는 분이다.'" 그는 정신적 혼란으로인해 전자 벌레와 보이지 않는 추적자가 도처에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1985년 4월 7일 부활절 일요일에 슈미트는 플레텐베르크의 복음주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1986년 10월 슈파이어에서 카를 슈미트 추모 특별세미나 개최. 1988년 논문집 『반대물의 복합체』 발간. 1991년 『주석집』 출판.
3. 상세
카를 슈미트는 나치의 법학자로 사상적 측면에서 전체주의자이며,정치학에서는 주로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의 양면성을 지닌다는 것을 이야기 할 때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학자이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와의 관계를 탐구한 것으로 유명하며, 민주주의가 스스로 독재를 선택하는 경우에 대해 언급할 때, 슈미트의 이론은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
슈미트가 극우 사상가들에게 거론되는 것을 유독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그는 반동이 아니며,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칭하는데[4], 이는 "극우"라는 단어에 대한 상당한 오용이다. 다른 면에서 사려 깊고 적절한 고찰이 풍부한 정치적 작품을 하나의 말 표현으로 확립시켜보려는 것은 가장 어리석고 현학적인 일일 것이다. 더구나 그것도 일반 어원론에 의해서 무제한적 확장해석이 가능한 말을 가지고 그러는 것 말이다.
도리어 현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가 18세기의 계몽주의와 공산주의를 다소간 비판의 정도를 높이며 공격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실제적이며 실존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문제들과 연관하여서, 현대의 미국이 공간질서의 수호자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 곧 그러한 점에서 슈미트에 의해서 미국의 공간질서가 수호된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5]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민족국가의 동질성을 파괴하려는 세력에 대하여 자신의 고유한 존재의 권리를 주장할 정치적 통일체로서의 국가의 정치적 능력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카를 슈미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국제법적 질서는,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으려면, 그것의 다수의 개별성에 있어 다소간 우연적인, 특정의 역사적 시점에 있어서의 그때마다 영토적 현상을 수호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기초가 되는 노모스, 그것의 공간구조, 질서와 장소확정의 통일성을 수호해야만 하는 것이다, 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미트가 좌익 세력에게 자주 인용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6] 왜냐하면 슈미트 스스로가 자신의 정치신학이 그들에게 이용되는 것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표현을 하자면, 예컨대 슈미트의 적과 동지는 헤겔의 변증법을 문제시하고 헤겔과 함께 마르크스까지 자신 속에 포함시킨 일종의 상급의 이론 구성이라고 하겠다.[7] 물론 이와 관련하여 좌익 쪽에서는 죽어도 인정하기 싫겠지만, 이것도 정치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J. H. 맥코르믹(McCormick)은 슈미트를 현대의 미국의 다양한 보수주의의 흐름의 “대부”(godfather)로 규정한다.[8] R. 메링(Mehring)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보수주의를 주도했던 인물들 중에서 슈미트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9]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를 좌파, 심지어는 극좌로 규정하고 싶어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매우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반공주의자이며, 경우에 따라서는―공산주의자들에게 인용되기는 하지만―나치에 가담한 파시즘적인 성향을 가졌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가 정치적으로 현대의 "자유민주주의"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유주의적 예외와 민주주의적 예외가 부각되며, 이와 같은 <예외상태>에 관한 학문은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다시 연구되어, 재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감벤의 『예외상태』라는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슈미트는 수권법을 통하여 위임적 독재와 주권적 독재를 구성한다. 여기서 슈미트가 어떤 식으로 역사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적어내려가며, 독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이 부분은 부연설명은 하진 않겠지만 『독재론』을 참고하는 것을 추천한다. 「프랑스 혁명기 동안의 인민위원의 실제」라는 챕터는 과연 타당하며, 타당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다.
베르나르 페이(Bernard Faÿ)는 문명이라는 단어가 19세기 초에 나온 것이며, 오로지 고대 유럽을 프랑스와 미국과 결합시키고 있는 계속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증하였다.[10] 1796년의 워싱턴 대통령의 고별 교서도, 1923년의 먼로 교서도, 유럽 외부적인 국제법의 기초를 세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미국은 처음부터 스스로를 유럽 문명과 유럽 국제법의 담지자로 느끼고 있었다.[11] 당시 수립되고 있었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역시 스스로를 자명하게 <유럽 국가군>과 그들의 국제법공동체에 속하는 것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19세기에 나온 아메리카 국제법의 모든 교과서들은, 유럽 국제법 옆에 나란히 놓이는 특별한 아메리카 국제법에 대하여 말하는 경우에도, 더욱 더 자명하게 그러한 주장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12] 따라서 서반구와 더불어 주어진 전세계적 경계선은 비록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구(舊)유럽을 염두에 둔 것이며, 유럽을 배제시킨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특정 의미에서만 반(反)유럽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즉 이러한 점에 한정해서만 오늘날 "좌익들의 칼슈미트 이용"이 이루어진다고 하겠다.다른 의미에서 아메리카의 서반구 경계선은 반대로 자유롭고 진정하며 고유한 유럽이고자 하는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요구를 포함하고 있다.
영미권을 기반으로 한 보수주의자들은 카를 슈미트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사상적 배경 자체가 완전히 이질적이라서, "근대의 이원주의적인 사고 방식"[13]을 보지하는 특정 인물들에게 있어서는 슈미트가 구유럽과 현대의 '극우파' 자유주의자들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장 근대의 이원주의에 기반한 정치체제와 이론을 몸으로 체험하며 살고 있는 "좌익"들은 독일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이 사람의 문헌을 읽으면 단 한 페이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걸 깨닫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가톨릭적인 기초를 보유하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 즉 이러한 근대의 이원주의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슈미트가 어떤식으로 구유럽과 영미권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의 보수주의자들을 연결시키고 있는 지를 확실하게 인지시켜줄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한 풍부한 설명은 최재훈이 번역한 『대지의 노모스』에서 그 효과를 확실히 발하고 있다고 말하겠다.
이른바 제퍼슨 라인으로 표현되어 있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명확하고 일관된 공식화에 의지해 논의를 풀어가 보자.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14]은 1812년 초에 <영국의 운명은 거의 결정되어 있으며 현재의 영국의 존재 형태는 몰락으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들이 지닌 강력함으로 인해 우리들은 반구(半球)에 대하여 법률을 부과하는 것이 우리에게 허용된다면, 그러한 법률은, 대서양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경선(經線)이 전쟁과 평화의 분리선을 이루고, 그러한 분리선 이 편에서는 어떠한 적대행위도 행해지지 않으며 사자와 양이 평화 속에서 나란히 쉴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야만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1823년 12월 2일의 제임스 먼로(James Monroe)[15] 대통령의 교서는 반구(半球)라는 말을 완전히 의식적으로 그리고 특별히 강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교서는 자신의 고유한 공간을 아메리카로, 그리고 또한 이 대륙이나 이 반구(this hemisphere)로 부르고 있다. 먼로주의와 서반구는 둘이 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 둘은 미국의 특별이익의 영역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국가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공간, 즉 광역(廣域, Groβraum)[16]이라는 말이 지닌 국제법적 의미에서의 광역을 나타내고 있다. 전통적인 미국의 국제법이론은 그것을 법적으로 자위지역으로 이론구성을 하고 있었다. 1939년 10월 3일의 파나마 선언에서 우선 서반구라는 표현이 정착된 것으로 보였다. 이 선언에 의해 확정된 아메리카 국가들의 중립성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보장지대(安全保障地帶)의 내부에서는 전쟁 수행 당사국은 어떠한 적대행위도 취해서는 안 된다. 중립적인 안전보장지대의 경계선은 아메리카대륙의 양쪽 해안선에서 대서양 쪽으로도 태평양 쪽으로도 300해리에 이르고 있다. 그 경계선은 브라질 해안에서는 그리니치 자오선(子午線)의 서경(西經) 24도에 도달하고 있으며, 따라서 통상적으로 지도제작법상(地圖製作法上)의 동방과 서방의 분할선을 나타내고 있는 서경 20도에 접근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슈미트가 "전세계적인 경계선사고(Globales Liniendenken)"라고 부르고 있는 "전세계적(global)"이라는 말은 이러한 사고방식의 평면적이며 표면적인 성격과 더불어 대지포괄적-혹성적인(erdumfassend-planertarisch) 성격을 나타낸다.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세계적 경계선사상은 고유의 발전과정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사상은 1492년의 아메리카 발견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아메리카의 선언에 이르기까지의 서로 관련되고 통일적인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초의" "전세계적인" 경계선은 처음에는 아메리카 발견 수개월 후인 1494년 5월 4일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Ⅵ)의 교서,『Inter Caetera』속에서 등장한다.
그러한 종류의 것인 미국의 고립선은, 즉 그러한 선민의식은 정신사적으로는 칼뱅주의적이며 청교도적인 태도로부터 유래한다. 그러한 의식은 이성론적이고 세속화된 형태로 계속되며, 또한 흔히 그러한 형태에로 고양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오로지 신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감정이 함께 세속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 즉 1775년의 독립선언 이래 미국적인 선민의식은 프랑스로부터 순수하게 세속적·현세적 성질을 지닌 새로운 도덕적 힘을 공급받는다. 계몽주의 철학자들, 그 중에서도 레이날(Raynal)과 콩도르세(Condorcet)와 같은 위대한 사람들은 인류 역사의 새로운 상(象)을 창조한다. 이제까지는 가톨릭의 정복자들과 프로테스탄트의 정복자들에 의해 기독교 신앙의 선교로서 정당화되어 있었던 16세기의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의 정복, 아메리카 토지에 대한 대규모적인 육지취득은 이제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비인간적인 잔혹행위로 나타난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17]에게서 이러한 견해에 대한 자료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에 반해 미국의 인권선언은 일종의 인간성의 부활로 이해된다. 17세기 철학자인 토머스 홉스에 있어 아메리카는 이기적인 충동과 이익을 위한 국가 이전의 자유로운 투쟁이라는 의미에서 자연상태의 영역이었다. 존 로크에 있어서는 아메리카는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출발의 상태에 있었고 자연상태에 있었다. 18세기 말경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북아메리카를 재차 또 다른 종류의 자연상태의 영역, 즉 루소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자연상태, 다시 말해 지나치게 문명화된 유럽의 타락에 물들지 않은 자연상태로 간주하는 것에로 옮아갔다. 이를 위해서는, 프랑스가 미국과 체결한 동맹(1778년) 때문에,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신적 우의(友誼) 때문에도, 벤저민 프랭클린[18]의 프랑스 체재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아메리카는 유럽의 의식에 있어 두 번째로 자유와 자연성의 공간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전세계적인 투쟁선이라는 옛날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고 고립에 적극적인 내용을 부여하는 하나의 긍정적인 내용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한 기본적인 고립은 그것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에 따라 대지의 새로운 하나의 공간질서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러한 고립은 보장된 평화와 보장된 자유의 영역을 전체주의와 타락의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방식에 의해 새로운 공간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을 완성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아메리카적인 고립의 사고는 널리 알려져 있으며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헤겔은 이러한 신세계의 구조에 관하여 백 년이 넘는 시간 전에, 1848년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에, 역사철학에 대한 그의 강의의 서문에서 주목할 만한 진단을 제시하였다. 최초의 먼로주의의 시대인 당시, 그는 순진함과 박식함을 천재적으로 혼합시켜, 미국이 아직 결코 국가(Staat)가 아니라는 사실, 미국이 아직도 시민사회의 단계에 있다는 사실, 즉 개인주의적 자유에 대한 변증법적 극복이라고 하는 국가적 상태에 선행하는 이해관계의 자유라고 하는 국가 이전적 상태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증하였다.
카를 슈미트의 이런 묘한 스탠스는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이식된 체제가 독일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보여준다. 사회민주당, 가톨릭 중앙당, 민주당이라는 세개의 독일 정당들이 많은 학자들에게 헌법 초안을 의뢰해 만들어낸 결과 프랑스식 대통령제, 영국의 의회제,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가 모두 들어있었다. 이를 수권법으로 무력화시킨 후 폭주한 나치당 때문에 이것을 이상적인 헌법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많으나 실상 이 법안 자체가 수권법으로의 전환을 내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점 때문에 슈미트의 이론은 독일 전통의 정치적 방법론으로 영미권의 법률 이론과 논의를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다만 그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논의가 너무나도 정교했기에 정치적 의의가 있어 헌법학에 반면교사로서 그의 이름이 남게 되었다. 물론 슈미트의 저작들은 이런 것들 중에서도 상당히 고전적인 것이고 영미권의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데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지식인들에게 구미가 잘 들어맞아 대중적으로도 크게 알려진다. 그의 독특한 법학, 정치학적 사유가 나치당의 집권을 정당화하는데 기여하기는 하였으나, 완전히 나치즘에 기초해 있다고 보는 것은 어폐가 있는데, 그의 이론의 가치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것의 가능성을 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슈미트에 의하여 영미식 자유민주주의가 정치적으로 정당화되고, 이것이 오늘날의 의회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라는 표현이 실제적이며 실존적으로 타당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슈미트가 나치의 집권 이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 시절에 주장한 표현법은 상당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를 어지럽히는 독일 공산당과 나치당의 폭동을 비상대권을 이용하여 제압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슈미트는 나치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는다. <그의 국가론에 인종, 민족적 기반은 전적으로 정치적 입지를 위한 허구이며 실상은 가톨릭에 기반한 헤겔주의적 국가론이다>라고. 더불어 슈미트가 3년만에 당에서 축출었다는 점은 오늘날의 슈미트 연구를 위한 중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실제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렇게 사상적으론 나치즘의 인종주의에 빠지지 않을 만큼 명석하고, 실제로 유대인 지식인들과도 많이 교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혐오하던 바이마르 자유민주정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선 나치와 결탁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석에선 나치의 인종주의를 멍청하고 저급한 발상이라 비웃으면서도 나치가 가져올 반민주주의적, 반자유주의적 국가를 위해서는 동료 유대인 교수들을 강단에서 쫓아내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본인의 사상과 차이점을 이미 파악했던 나치 지도자들에겐 그냥 권력에 빌붙은 지식인으로 취급 당하고 제대로 된 대접도 받지 못했다. 어쨋든 반민주주의, 반자유주의적 일관성을 위해 계속 충성했고, 종전 이후엔 이게파르벤 전범기업가들을 비롯한 전범들 변호에 적극적으로 나서기까지도 했다. 이렇게 나치즘과 사상적 독립성을 유지할 지성을 가지고도, 딱히 대접도 못받았으면서 적극 부역했다는 점에서 슈미트의 사상과 삶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선 나치보다 더 악질이라 보지만, 어쨌든 이런 특유의 카리스마를 지닌 통찰력이 전후 현대 정치학, 법학계에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4. 배경
근원적으로 근세 영미권에서는, 어쩌다보니 거대 제국이 된 대영제국의 미래상을 두고 제국을 유지해서 얻는 이익 때문에 도덕적 딜레마를 등한시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식민지인과 본국인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사상이 전개되었다. 그래서 근대 자유론의 거의 대부분이 영국에서 나오게 된다(존 스튜어트 밀, 존 로크, 토머스 홉스, 존 오스틴,[19] 제러미 벤담 등).반대로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중앙정부가 사실상 명목만 남은 채로 영방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래서 일찍이 민족국가 체제를 갖춘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둘러싸여 이권과 영토를 차근차근 무력하게 빼앗기고 있었다. 독일계 지식인들은 '어떻게 하면 독일인이 단결할까, 독일인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중권력을 어떻게 구현할까'에 관심이 쏠려 있었고, 근대 전체주의의 대부분이 이러한 고민들에서 나오게 된다(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프리드리히 니체, 마르틴 하이데거, 카를 마르크스 등). 이 중 법철학 부분을 담당하는 게 카를 슈미트이다.
부연하자면, 이론의 여지가 거의 없는 영미권 철학자들과 다르게 독일 철학자의 전체주의적 성향에 대해서 그 후계자와 해설자들은 매우 강경하게 부인한다. 그러나 독일철학의 옹호자들이 그들의 선학을 존중하는 측면에서 양보한 표현으로 전체주의자들이 이들의 사상을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해 동원했다라고 말한다면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반면 독일어권 철학에 대한 어떤 존중도 없는 까칠한 영미권 철학자들의 경우 배경 상황부터 봐도 애초에 그놈들은 그럴 목적이었고 동료, 후학, 대중의 인식도 딱 그랬으며 본인들도 그렇게 해석하던 놈들에게 교수직, 연구기금, 관료 자리를 받아먹던 놈들이라고 표현하는걸 감안하면 이들이 총체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는지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전체주의적 성향이 있다고 해서 이들의 철학이 가치없는 것이 아니고 영미권 철학이 독일철학과 완전히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사상의 전개 결과 전체주의를 옹호나는 결론이 나온다고 해서 이들 철학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는 영미권 철학자 대다수도 동의한다.
정리하자면 독일과 영국의 상반된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타개하고자 하는 지식인들의 요구가 이런 상반된 전통으로 나타난 것이다.[20]
역사적으로 ‘사회권’ 개념을 처음으로 헌법에 도입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조화시키고자 한 바이마르 체제에 슈미트는 근본적인 모순이 있음을 간파하고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들을 파고들었다.
고대의 공화제에 바탕한 독재론, 가톨릭계 보수주의자들의 정치신학, 프랑스혁명 이후의 헌법제정권력론, 마르크스주의의 혁명론 등을 연구하면서 그는 ‘법제도’와 ‘정치’ 에는 ‘친구’와 ‘적’ 사이에 선을 긋고 ‘보통(nomal)상태=규범성’을 창출하는 ‘결단’이라는 행위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슈미트와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되는 혁명적 좌파들도 그의 ‘결단법론', 친구/적’이론을 깊게 탐구한다. 1990년대 부터는 데리다, 아감벤, 무페 등 포스트모던 좌파 논객들이 슈미트의 이론을 논하였다.
5. 내용
5.1. 독재론
1920년대 초 슈미트의 저술은 바이마르 법에 내재된 법적 문제를 다루었다. 이러한 법적 관점은 극도로 불안정한 사회상황을 배경으로 발전되었다. 1918년 11월 9일 필리프 하인리히 샤이데만(Philipp Heinrich Scheidemann)이 공화국을 선포하기 전부터 독일을 괴롭혔던 이러한 문제들은 1918년 베를린에서 일어난 인민해군사단(Volksmarinedivision)의 반란과 1919년 1월 11일 베를린의 포어베르츠(Vorwärts) 독일사회민주당의 잡지사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의 서막이었다. 독일 전역에서 발생한 이 사건과 이와 유사한 많은 사건들이 독일을 내전 직전까지 몰고 간 광범위한 무질서의 주요 원인이었다. 1919년 8월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된 후에도 이러한 위기 상황은 종식되지 않았다. 1920년 3월의 카프 폭동(Kapp Putsch), 튀링겐과 작센의 공산주의 봉기, 1923년 11월의 뮌헨 폭동(Beer Hall Putsch), 그리고 증가하는 실업자 수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초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독재의 본질에 대한 슈미트의 중요한 저서 『독재론 : 근대 주권사상의 기원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까지』(1921)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발표되었다. 독재를 정의할 때 슈미트의 출발점은 주권과 독재의 구분이다. 장 보댕(Jean Bodin)에 따르면 <주권이란 국가의 절대적이며 영속적인 권력이며 라틴 민족이 마에스타라고 부르는 것>이며 <인민 또는 군주에 의해서 행사된다>고 한다. 그러나 독재자는 군주가 아니며, 최고 권력을 가진 집정관(Konsul)도 아니지만, 최고 통치자에게 특정임무(전쟁 수행, 국가 개혁)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는다. 독재자의 권력은 절대적이지도 영구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독재자는 폭군이 아니며, 독재는 절대적 지배의 한 형태도 아니며, 공화체제에 특유한, 자유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댕의 정의에 따르면 권한이 있는 사람이 모두 독재자일 필요는 없다. 그는 권한을 위임받는 정무관(Magistrate)을 관리와 위원이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관리란 일반적인 직책을 짊어진 공직자이다. 위원은 특별한 직책을 가진 공직자이다. 둘의 본질적인 차이는 전자는 법률에 구속을 받는 반면, 후자는 최고 통치자로부터 특정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특별 명령을 받는다는 것이다. 후자만이 본 연구의 목적상 주목할 만한데, 이는 보댕이 독재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바로 후자이기 때문이다. 보댕은 위원을 특정 권한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분류하지만, 이 분류가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슈미트는 독재자를 다른 유형의 위원과 구별하기 위해 보댕 체제에서의 독재자를 <행동위원>(Aktionskommissar)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보댕은 주권과 독재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유지하면서도 호민관의 항의권이 여전히 존속되었기 때문에 술라(Sulla)와 카이사르(Caesar)의 독재는 본질적으로 독립적이고 주권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민중>이 시한적 권력보유자의 의지에 의하지 않거나 또는 나아가 의지에 반하여 회합할 수 있다면, 이 권력보유자는 군주는 아니며 단지 <민중의 최고 봉사자>(primus populi minister)일 뿐이다. 보댕의 해석에 따르면 진정한 주권자는 하느님 외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위에 있는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
슈미트는 또한 고대 공화정 초기의 독재와 후기의 술라와 카이사르의 독재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올바르게 지적한다. 로마 시대의 독재자는 보통 원로원의 요청에 따라 집정관이 임명했다. 슈미트에 따르면 독재자의 임무에는 전쟁의 수행(군사독재)과 내란의 진압(치안독재)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종교상의 이유에서 제1인자에 의해서 행사될 필요가 있었던 못박음을 위한 독재, 조사의 지휘, 제일의 결정 등이 포함된다. 독재자의 임무는 그 임명이유인 위기적 상황을 제거하는 것, 즉 중단된 헌법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위기 상황을 제거하려는 즉각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대 공화국의 독재자는 6개월 동안 재임했으며, 대부분 그 임기가 만료 전에 독재를 포기했으며, 물론 <상황에 따라서> 행동하였다. 술라와 카이사르의 독재는 고대 공화정의 독재 관행과는 상당히 달랐다. 술라는 무기한 독재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하고 <그라쿠스 헌법>(Gracchan constitution)을 폐지한 후 사임했다. 카이사르의 독재는 그의 남은 생애 동안 지속되었다. 그는 4년간의 독재후에 살해되었다. 또한 월트 휘트먼 로스토(Walt Whitman Rostow)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모든 행동은 기존 헌법이 무의미하고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한다. 슈미트는 독재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독재와 관련된 시간적 요소와 독재가 기존 헌법 질서의 유지 또는 폐지를 목적으로 했는지 여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17세기의 30년 전쟁(Dreißigjähriger Krieg) 중 소위 독재관이라고 불렸던 발렌슈타인(Wallenstein)의 통치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이를 독재의 사례로 취급해왔다. 하지만 슈미트는 절대적인 통치처럼 보이는 것이 본질적으로 항상 독재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특히 발렌슈타인의 경우에는 1625년과 1631년에 그가 받은 두 가지 명령과 관련된 법적 의미에 주목할 만하다. 슈미트는 두 가지 위임장을 분석하고 그 어느 것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독재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슈미트에 따르면 1625년 신성 로마 제국의 왕실 군대를 지휘하도록 발렌슈타인이 처음 임명된 것은 단지 군사 위원에 불과했다. 이 임무는 전적으로 군사적 성격의 것이었기 때문에 발렌슈타인은 사회 계층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슈미트는 그가 총사령관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163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의해 해임된 발렌슈타인은 이후 1631년 복직했다. 이로써 1634년 살해당할 때까지 지속된 그의 군통수권 2기가 시작되었다. 슈미트에 따르면, 이 두 번째 명령으로 발렌슈타인은 순수 형식적인(absolutissima forma) 최고 지휘권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발렌슈타인의 권력 복귀는 신성 로마 제국 왕실 군대의 총사령관 역할로 복귀한 것에 불과했다. 슈미트에 따르면 독재자는 현행 법질서를 넘어서는 권한을 가져야 하므로, 발렌슈타인의 명령을 독재라고 부르는 것은 현행 법질서를 다루는 예외적인 상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적절하다고 결론지었다.
위임적 독재의 출현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특징으로 한다.
(1) 위임적 독재는 독재자의 임명을 승인 할만큼 상황이 충분히 위협받는 순간에 발생한다.
(2) 독재자는 최고 통치자인 법정권위(pouvoir constitué)에 의해 임명되며, 이 특정 임무가 수행되면 독재자의 임무는 끝난다.
(3) 임명된 독재자는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헌법을 정지하거나 법의 통상적인 범위를 과도하게 침해할 수는 있지만 법령집에서 기존의 법률을 폐지할 수는 없다.
(2) 독재자는 최고 통치자인 법정권위(pouvoir constitué)에 의해 임명되며, 이 특정 임무가 수행되면 독재자의 임무는 끝난다.
(3) 임명된 독재자는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헌법을 정지하거나 법의 통상적인 범위를 과도하게 침해할 수는 있지만 법령집에서 기존의 법률을 폐지할 수는 없다.
슈미트에 따르면, 임명된 독재자가 헌법을 정지하는 목적은 헌법을 보호하고 위기적 상황이 끝나면 헌법을 복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재자의 임무는 위기적 상황을 제거하고 위협받는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술라와 카이사르의 독재는 슈미트가 주권적 독재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새로운 요소를 구현했다. 이와같은 주권적 독재는 현행 헌법이 아니고 장래의 이상적 헌법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 실현하기로 예정한 헌법에 의거하여 행사되는 독재를 말한다. 즉 이 경우에는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의 헌법제정권력(pouvoir constituant) 또는 슈미트의 헌법제정권력(verfassunggebende Gewalt)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독재자는 헌법제정권력을 인민(혹은 국가)의 위임에 의거하여 주권적 독재권으로서 이를 행사한다. 즉 주권자인 인민의 헌법제정권력을 법적 근거로 하여 독재를 실시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 있어서의 산옥당(Montagnards) 또는 로베스피에르(Robespiére)의 독재가 이 전형이며, 러시아 혁명에 있어서의 볼셰비키 독재는 주권자인 인민, 즉 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장래의 헌법(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을 실현하기 위한 독재로서 주권적 독재에 속한다. 슈미트가 보기에 위임적 독재와 주권적 독재의 많은 차이점은 전자는 법적 권한에 근거하여 독재자를 임명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 독재자의 임명은 인민의 제공권위(pouvoir constituant)에 근거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헌법적 권한은 1793년부터 1795년까지의 프랑스와 1917년 이후 소련의 경우처럼 주권자인 독재자 본인에 의해서만 인정된다.
주권적 독재의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은 지속될 수 있는 기간과 현행 헌법 질서와 장래의 이상적 헌법 질서 간의 충돌이다. 슈미트는 정치이론의 관점에서 주권적 독재라는 개념을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특히 마블리(Gabriel Bonnot de Mably)와 시에예스의 철학에서 찾고 있다. 마블리는 1756년 초 혁명 시기에 <인민대표가 모든 국정을 관리하고 행정 권력을 자신의 손에 쥐어야 한다>는 관념을 제창했는데, 마블리 스스로는 여전히 고대 로마의 법적 의미에서의 독재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슈미트에 따르면 이는 새로운 해석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독재는 법이 무너지고 부패가 만연할 때 발생한다. 슈미트는 “독재자는 개혁을 옹호하는 위원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기존 국가기관 전체에 비해 무한한 권한을 갖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슈미트가 보기에 혁명의 시기에 인민대표가 행정 권력을 인수해야한다는 마블리의 공식은 개혁 위원으로서의 독재자 개념과 비교한다면, 국민공회(National Convention)라는 신종 독재는 더 이상 위임적 독재(즉 위협을 받는 현행 법체계를 보호하기 위한 독재)가 아닌 혁명가의 독재라고밖에 이해될 수 없다. 이로써 보댕이 주권과 독재 사이에 설정한 대립은 해소되었고, 양자의 통일은 전체주의의 기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헌법제정권력의 원천은 제3신분에 관한 시에예스의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제3신분은 국가에 속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제3신분이 아닌 사람은 국가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제3신분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부이다>. 슈미트에 따르면, 헌법제정권력은 그가 원하는 어떤 헌법이라도 가질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조직화되지 않은 사람들의 의지는 모호하다. 예를 들어, 국민들은 기껏해야 그들이 헌법을 가지고 있다는 이런 염원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시에예스는 대표라는 개념을 건드린다. 조직하지 않은 국민의 대표자는 진정한 의미의 위원이며, 그의 임무는 국민의 일반적인 소망을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전혀 조직하지 않는 항상 다른 존재체이다. 그러므로 슈미트에 따르면 국민의 대표자는 위원이며, 그 권력의 근간은 조직되지 않은 인민(제권위)이며, 그들은 끊임없이 국민에게 호소해야 국민이 행동할 수 있다고 한다.
국민공회는 활동에 따르면 주권적 독재의 사례였다. 1792년 9월 20일에 개최된 국민공회는 권위를 확립한 특별한 기관이었다. 이 기관은 헌법 제정에 관한 일을 맡게 되었고, 완성된 초안은 국민에게 제출되었고 국민은 최종적으로 1793년에 이를 승인했다. 헌법이 채택된 후, 국민공회의 임무는 완료되었다. 국민공회의 임무가 완수된 이후에는 더 이상 권한을 행사하는 특별한 기관이 아니게 되었다. 통과에 실패하여 그 임무는 완수되었으나 1793년 10월 10일 국민공회는 전쟁의 위협과 국내 반혁명 활동이 제거될 때까지 해산할 수 없다고 결정하였다. 당시 헌법은 정지됐지만 폐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헌법은 결코 복원되지 않았다. 핵심 쟁점은 협약이 헌법을 정지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내부 및 외부 위협에 대응하여 국민공회는 1793년 4월 5일에 공안위원회(Comité de salut public)를 설립하여 이러한 위협을 제거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다. 위원회의 권한은 국민공회에서 파생되었는데, 슈미트에 따르면 국민공회는 1793년 10월 10일 이후 자칭 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권위는 국민공회만이 인정하는 제도적 권위로부터 파생되었다.
20세기 주권적 독재의 예는 레닌, 트로츠키, 라데크가 해석한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의 목표는 경제적 계급이 없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슈미트의 견해에 따르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를 역사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은 계급이라고 믿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적 과정에서 신흥 계급이기 때문에 부르주아지에 대해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 역사적 과정에서 신흥계급과 쇠퇴계급의 관계에서 전자가 후자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역사적 발전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 이런 행위는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이로부터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이 노동계급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명백하다.
슈미트는 주권적 독재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제거할 수 있는 상황을 기존 질서 전체에서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행 헌법은 정지는 물론 폐지도 가능하다. 주권적 독재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권적 독재자가 진정한 헌법으로 간주하는 헌법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유형의 독재 사이의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범주는 슈미트의 후기 저술 전반에 걸쳐 은밀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위임적 독재와 주권적 독재의 본질이 실제로 주권적 사례가 아닌지의 여부에 대한 논쟁을 유발시켰다. 주권의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성격에 대한 보댕의 정의가 받아들여진다면, 임명된 독재자는 그의 권력이 헌법상의 권위에서 나오기 때문에 확실히 최고 통치자는 아니다. 주권자는 언제든지 위임을 종료할 수 있다. 임명된 독재자가 자신의 임무 해임을 거부하면 그는 주권적 독재자가 되거나 심지어 최고 통치자가 될 수도 있다. 주권과 독재가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주권, 주권적 독재, 위임적 독재의 기본적인 차이점은 후자의 두 독재는 위임에 의존하는 반면, 주권은 특정 위임에 기초하지 않고 시간의 제한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5.2. 가톨리시즘
어릴 적부터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슈미트는 어릴 적부터 가톨릭 철학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그의 헌법이론의 근저 속에서 가톨릭주의는 그의 철학의 근간의 많은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그의 저서들 속에서는 다양한 신학적 정치학의 바탕이 되는 사상들이 등장하는데, 철학적 첫번째 업적이라 불리는 <정치적 낭만주의>에서 부터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철학의 허구성과 유악함을 비판하면서 제시한 메스트르, 루이 보날과 같은 반동적 가톨릭 국가주의 사상[21]을 기초로 하여 교회론적 철학의 바탕으로 드러난다고 여겨진다.
보날은 자신의 기독교적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1793년의 자코뱅주의를 무신론적 철학의 발현으로 봤다. 그는 신에 관한 신학적·철학적 관념과 정치적 사회질서 사이의 유비를 해명했다. 이는 군주제적 원리가 인격신이라는 일신론적 관념에 대응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시적인 섭리로서의 인격적 군주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군주제적-민주적 구성constitution은 초월적 신이라는 이신론적 가정에 순응해야 한다. 1791년의 헌법Constitution이 하나의 예이다. 이것에 따르면, 국가에 있어서 왕은 이신론의 신이 세계에서 그러하듯이 무기력하다. 보날에게 이것은 이신론이 비밀스런 무신론(crypto-atheism)이듯이 비밀스런 반왕실주의(cryptoantiroyalism)이다. 하지만 1793년의 ‘데마고기적 아나키’는 무신론에 열려 있었다. 즉, 신도 없고 왕도 없는 것이다
-<정치적 낭만주의> 중에서-
-<정치적 낭만주의> 중에서-
5.2.1. 가톨릭 대 유대교
1933년부터 1934년 사이에 카를 슈미트는 세 권의 팜플렛 『국가·운동·민족』(1933), 『제2제국의 국가구조와 붕괴』(1934), 『법학적 사고방식의 세 유형』(1934)을 출판한다. 법치 국가를 논의하기 위한 짧은 글이 1935년에 발표되었다. 1935년과 1936년 슈미트는 또 다른 짧은 글에서 유대인 문제를 건드렸다.슈미트는 1935년 9월 뉘른베르크법(Nürnberger Gesetze)에 대해 언급하면서 유대인은 독일 국가에 관심이 없으며, 독일인과 유대인 간의 결혼은 출신을 불문하고 이제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슈미트는 점점 더 목소리를 높였다. 법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1) 유대인의 대립성, (2) 유대인의 지적 특성과 이에 수반되는 모호한 학문적 능력, (3) 유대인의 사상과 독일 정신의 관계라는 세 가지 근거를 들어 유대인을 공격했다.
첫 번째 요점과 관련하여, 수 세기 동안 디아스포라(diaspora)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이 게토(Ghetto)에 갇혀 있었으며 낮은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누릴 수 없는 특권을 반복적으로 누렸다는 점과 19세기에 유대인들이 해방되어 대학에 입학하여 다양한 분야에 뛰어난 공헌을 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세기가 바뀌면서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한 직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문제에 대해 슈미트는 <인종정신병학>(Rassenseelenkunde)은 유대인이 자신의 나라와 땅이라고 생각하는 경계 밖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슈미트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무정부적 허무주의와 실증적 규범주의…감각론적 유물론과 가장 추상적인 도덕주의”와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슈미트가 내린 진단은 가톨릭교회의 반대물의 복합체(complexio oppositorum)와 낭만주의의 딜레마에 대한 그의 담론을 다소 연상시킨다. 분명한 것은 유대인과 가톨릭교회의 주요 차이점은 전자는 전체적으로 어떤 교리도 지지하지 않고 개인으로서만 지지한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낭만주의자나 유대인 모두 근본적인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슈미트의 유대인과 낭만파에 대한 공격을 살펴보면 이러한 공격에서 슈미트 자신의 기질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슈미트가 유대인과 낭만주의자들에게서 싫어했던 특성 중 일부는 슈미트 자신에게도 존재했다. 그는 조직화된 가톨릭교회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를 통해 스스로를 법학자라고 강조하였다. 슈미트가 법률 저술을 통해 주장한 유일한 것은 독일 다원주의의 딜레마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서 일원론적 신념이었다. 바이마르 시대의 다원주의는 자칫 내전으로 번질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원심력을 제거하여 독일의 질서와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 슈미트의 추앙을 받게 될 것이다. 슈미트는 자신의 충성심을 진리의 소유자인 교회에서 권력의 소유자인 국가로 옮기면서 1914년 자신이 비난했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22]
두 번째 요점인 유대인 학문에 대한 질문에서는 더이상 유대인 저자를 인용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유대인의 글은 지능과 인종 사이의 연관성 때문에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점에 대해 슈미트는 “유대인의 지성은 너무 멍청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유대인 학자들은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고 매우 유대인 혐오적인 태도를 취한다. 슈미트는 유대인 저자에 대한 독일인의 표절 관행이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여 유대인 작가들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면, 적어도 “유대인으로” 분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슈미트 자신의 새로운 태도는 그에게 높은 수준의 객관성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 학문의 수준을 높이려는 그의 노력에서 모호함과 심지어 자기기만이 쉽게 감지될 수 있었다.
세 번째 요점인 유대인 사상과 독일 정신의 관계에 대해 슈미트는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은 우리의 지적 성취물과 기생적이고 계략적이며 상업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유대인은 평소 사물의 진실과 거짓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는데…이는 기생충이자 순수한 사업가로서의 본능 때문이다. 유대인은 독일에서 돈이 어디에 있는지를 빠르게 간파한다…이 원칙을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종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인종이란 무엇인가?”
여기서도 슈미트의 반유대주의는 기독교 교리에 비추어 노골적인 반유대주의와 결합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그린 인상은 독일 지식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는 독일 유대인들이 그들의 독일 내 인구수와 비례하지 않는 지적 공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주장은 명백히 반유대주의적이지만, 위에서 인용한 마지막 문장은 그가 <생물학적 요인>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반유대주의가 전혀 인종주의적 해석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신적 반유대주의>의 배경에서 볼 때, 뉘른베르크법을 준수해야한다는 슈미트의 초기 주장은 이해할 수 있다. 히틀러는 이 법이 준수되지 않으면 나치당이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슈미트는 그러한 개입이 가져올 반종교적 결과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러한 개입을 피하고 싶었다.
1933년 이전의 슈미트의 글에는 반유대주의의 흔적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지만, 이 갑작스러운 반유대주의의 폭발은 새로운 모습으로 신학이 부활했음을 나타냈다. 그는 나치당을 인종주의에서 벗어나게 하고 필요한 경우 전통적인 반유대주의 노선으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슈미트는 유대인 문제가 당이 아닌 국가의 권한 내에서 다루어지기를 원했다. 그의 초기 담화는 이러한 해석을 확인시켜주었지만, 이후 유대인에 대한 그의 유명한 공격은 그 이상으로 나아갔다.
프란츠 블레이(Franz Blei)와의 사적인 서신은 슈미트의 반유대주의가 본질적으로 인종 차별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우리는 블레이로부터 슈미트가 절망 속에서 영감을 얻은 원천이 프랑스의 가톨릭 소설가 레옹 블루아(Léon Bloy)의 저서와 성금요일(Good Friday) 전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블루아가 폭력적인 감정 폭발로 유대인의 사업 기술에 대한 증오를 반복해서 드러냈지만, 그에 따르면 유대인은 기독교인의 종교적 선조이기 때문에 유대인에 대한 폭력 행위를 거부해야 마땅하다. 블루아의 단언─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나온다(Salux ex Judaeis est, Le salut par les Juifs)─은 유대인의 종교적 태도에 대한 그의 가장 적절한 결론을 내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금요일 전례는 가톨릭 신자 개개인이 <배신의 유대인>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요구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요구는 과거 기독교인들의 과격한 행동을 불러왔지만, 유대인을 육체적으로 학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예배의식의 의미이다.
이처럼 드문 재능을 가진 사상가 슈미트가 각계각층의 폭넓은 존경을 받으면서도 반유대주의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보통의 시대였다면 그의 발언은 오토 바이닝거(Otto Weininger)[23]와 같은 개종주의자의 발언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유대인들이 처한 환경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1933년 이전의 슈미트의 글에서는 이러한 가혹하고 편협하며 잔인한 반유대주의적 태도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이런 점에서 슈미트가 새롭게 배운 반유대주의는 의심할 여지없이 기회주의적이다. 슈미트가 앓고 있는 기회주의는 그가 『정치적 낭만주의』에서 기연주의(occasionalism)라고 부르며 비난한 것이다. “기회와 우연성이 원칙이 되는 곳이라면 구속력에 대한 커다란 우위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슈미트의 폭발적인 반유대주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유형의 반유대주의는 나치 독일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슈미트의 견해가 <생물학적 인종 해석>과 현저하게 다르다는 사실이 나치 당국에 알려지고, <정치적 생물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치 친위대(SS)가 독일에서 중요한 세력이 되면서 슈미트는 심한 질책을 받게 되었다. 슈미트는 법률연구자대회에서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친위군의 인종해석─즉 한스 프랑크(Hans Frank)의 해석─에 충실한 법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1936년 11월 대회가 끝난 후, 국가사회주의 법학연구자 협회에서의 그의 직위를 사임한다.
5.3. 정치신학
특정하게 정치적인 구분이란 정치적 행동과 동기들의 원인이 되는데, 그것은 친구와 적의 구분이다.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것은 규범과 정상성을 창출하는 내부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슈미트에 의하면 이것은 국가뿐 아니라, 국가, 정당, 윤리, 종교, 예술 등을 아우르며 그속의 정치적인 것, 요소를 구별짓는 중요한 기초가 된다.[24]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본질인 "정치적인 것"들을 윤리나 경제에 종속시킨다. 개인주의는 정치적인 것을 부정한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이론,정치이론을 만들지 못하고 오로지 개별적인 정책만을 비평할 뿐이다.간단하게 말하자면 가톨릭계 보수주의의 무신론적 해석이다. 구체적으로 정치는 개인의 영역에서 벗어선 일종의 사회규범과 룰의 역할을 하기에 당연히 비개인적이어야하고 개인의 집단인 사회와도 동떨어져 비사회적이어야한다. 중세에는 신이 그 역할을 담당했는데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부당하게 개인의 영역에 집어넣어버렸다. 개념 정의 수준에서 정치의 기본단위는 개인이 될 수 없다.최소단위는 국가이며 이는 정치행위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이 개념이어야하기 때문에 당연하다라는 뜻. 이런 관점을 가톨릭적으로 인식하면 가톨릭계 보수정당이 된다. 그리고 이 정당은 지금도 독일의 유력정당으로 남아있다.
5.3.1. 예외상태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정치신학>의 첫문장-
-<정치신학>의 첫문장-
이는 역설을 선호하는 낭만주의적 아이러니가 아니라 진정한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통찰은 언제나 밋밋하게 반복을 일삼는 텅 빈 일반화보다 깊은 곳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예외는 정상사태보다 흥미롭다. 정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지만 예외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예외가 규칙을 보증할 뿐 아니라, 규칙은 애당초 예외에 의해서만 존속한다. 예외 속에서 실제 삶의 힘은 되풀이됨으로써 굳어 버린 기계장치의 껍데기를 깨부술 수 있다.
-<정치신학> 1장 중에서, 카를 슈미트-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선언하는 자이다" 로 시작되는 그의 주권론적 통찰은 아주 독특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이 평이한 증명이 아니라, "예외" 라는 역설을 통한 논리적인 반정립의 반정립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주장해 가기 때문이다.-<정치신학> 1장 중에서, 카를 슈미트-
법실증주의가 제시하는 법 철학의 형이상학적 사유의 소멸속에서 입법자의 의무는 단지 정해진대로 법을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약 정해진 법규범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예외상태(비상사태)" 라면 어떨까?
슈미트에 의하면 이때야 말로 누가 진정한 주권자인지 어떻게 사회적 체계가 조직되어 있는지, 법조문의 존립이 구체적으로 무엇에 근거할 수 있는지. 이러한 "예외상태" 속에서 비로소 주권에 대한 진정한 본질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정상상태는 무엇도 증명하지 않지만 예외는 모든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대통령은 국민의 기본적인 주권을 대의하는 자이고,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그런데 국가에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국가 멸망의 위기가 도래했을 때, 대통령은 계엄이나 각종 비상사태 선포로 국민의 여론을 묵살하면서까지 자신을 뽑아준 국민의 기본권을 합법적으로 제한해버릴 수 있다. 즉 주권을 대의하는 대통령이 진짜 주권자를 제외해버릴 수 있다는 것이며, 합법적으로 법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이고, 법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면서 법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이 아닌 대통령이 진짜 주권자라고 봐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가 생긴다.
5.3.2. 결단주의
여기서 슈미트가 메타법률학의 차원에서 상정하고 있는 것은 '이념(ideology)' 이다. 법은 이념이라는 목적을 담고서 그 자체의 '목적성' 을 띄고 있는 것이며, 무언가 다른 것을 이루기 위한 부차적인 수단의 개념이 아니다.따라서 슈미트에게 법은 그 자체의 지고한 '목적'이지 '수단'이 될 수 없다.[25]
이러한 법 실증주의의 모순은 슈미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그들은 헌법조문을 쓰여진 활자가 튀어나와서 법을 실행한다고 가정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법조문은 사실상 정상상태의 관리의 의미밖에 없으며 그 관리조차도 법조문을 제정하는 자의 "결단"의 권위에 의존한다.
또한 현실의 상황과 법조문과는 당연한 괴리가 있으며 현실은 법전이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예외상태를 발생시킨다. 이때 이 "결단"하는 자는 정상상황을 "결단"한 만큼 "예외상황"도 "결단"할 수 있으며 이 정치행위에 헌법은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다.
이 결단하는 자는 당연히 "주권자"이다. 거꾸로 해도 똑같이 비상상태를 규정하는 자가 "주권자"이며 이는 법 실증주의와는 달리 현행 법조문과 관련하여 주권자가 취하는 행동과 개정[26] 양자 모두에 대하여 어떠한 정당화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핵심이다.
거칠게 줄이자면 소위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한다는 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들은 정치적 행위를 규정하지조차 못함을 헤겔인식론을 이용해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들이 정치의 개념조차 규정하지 못하니 이들은 정치의 근원적인 것을 "주관"을 떠나 "객관"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뜻이니 무능한게 아니라 불능하다는 이야기다. 이건 법 실증주의를 까는 이야기다.
영미권 개념에서의 국민주권은 "왕과 귀족은 널 언제나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안 죽이므로 너흰 복종해야 한다"라는 강압적인 권력에 반대하는 맥락으로 주장된 것으로, 권력의 근원은 국민 그 자체라는 측면에서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를 슈미트식으로 뒤집어 이야기하면, '민주주의에서 법을 제정하는 국민의 단결된 힘은 법 위에 있다.'는 것이 된다.[27]
이것이 단순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어째서 현대민주주의에서는 국민들의 숱한 불만과 불신들을 초래함에도 불구하고 대의제나 권력분립과 같은 방식으로 운용자인 엘리트와 민중들 사이에 거리 두려고 하면서, 반면 민중들의 직접적인 의사와 가치들이 반영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본다면...
현대의 헌법학에서 슈미트의 이런 결단주의적 법학은 켈즌(H. Kelsen)으로 대표되는 법실증주의적 헌법이론, 스멘트(R. Smend)에 의해 주창된 통합론(Integrationslehre)과 등 여러 이론과 함께 교육과정 중에 주요 헌법이론 중 하나로 다루어진다.
여기서 그럼 슈미트가 말하는 결단을 일으키는 주체가 한사람에게 만 있다는 라는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주체자는 구성원을 통합할 만한 카리스마를 지닌 한명의 사람일 수도, 강한 힘을 지닌 특정한 세력들일 수도, 대다수의 국민들 전체의 단결력에서 생겨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헌법적 제정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규범과 질서를 가르는 필연적인"결단"이 생겨난다는 점이다.[28]
정치이념사 정체를 통틀어 등장하는 고전적 반정립이 이 명제 안에 들어 있다. 바뵈프로부터 바쿠닌, 크로포트킨 그리고 그로스에 이르기까지의 무정부주의적 이론은 모두 하나의 격언, 즉 “인민은 옳고, 정부는 썩었다”(Le peuple est bon et le magistrat corruptible)라는 격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에 대해 드 메스트르는 정반대로 정부는 존립하기만 하며 그 자체는 선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정부는 존립하기만 하면 그 자체로 선하다(Tout gouvernement est bon lorsqu'il est etabli). 그 근거는 정부라는 권위의 존재 속에 하나의 결정이 있고, 매우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는 어떻게 결정되는지보다도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데에 있다.
-<정치신학>, 4장 중에서, 카를 슈미트-
그의 결단주의를 드러내는 구절이다.-<정치신학>, 4장 중에서, 카를 슈미트-
이 모든 사상은 훗날 나치 독일의 수령론인 지도자 원리에 강한 영향을 준다.
5.4. 정치적인 것의 개념
5.4.1. 레오 스트라우스의 주해
슈미트는 그의 연구의 근본적인 어려움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자유주의적 사고의 체계성이 오늘날 유럽에서는 다른 어떤 체계에 의해서도 대치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옳다면, 슈미트 자신도 그의 견해를 진술함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사고의 요소들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부터 슈미트의 이론구성의 잠정적인 성질이 발생하며, 그 자신이 그것을 언명하고 있다. 즉 슈미트는 광범위한 문제에 이론적으로 『틀지우는(encadrieren)』것 만을 의도하고 있으며, 그의 저작의 명제는 객관적인 토론의 출발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슈미트를 비평하려 하는 자는 어디에서 슈미트가 지배적인 자유주의적 견해에 단순히 따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보다는, 그가 어느 점에서 지배적인 자유주의적 견해와 구별되는가라는 것에 관해서 더욱 주의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특질>에 대한 1932년 레오 스트라우스의 주해는 슈미트가 두 번째 판에서 수정을 하도록 이끌었다고 한다. 이후 슈미트는 스트라우스가 가 독일을 떠날 수 있도록 하는 장학금 지원을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5.5. 헌법이론
5.5.1. 정체성 정치와 공동체이론(동일성 민주주의)
정치 공동체의 공동의 정체성과 차별성을 표시하는 구분이 구체적 상황에서 인민을 서로에 대하여 기꺼이 투쟁할 용의가 있는 적대적인 집단으로 분류하는 역할을 하게 되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그러한 구분은 정치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고 슈미트는 강조한다. 그 구분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전쟁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정체성과 차이의 분류이고, 그 분류에 입각하여 인민을 적과 동지로 구분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구분으로 인해 한 공동체는 통일된 사회 단위가 되고 정치적 공동체가 된다.[29]법과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가 창출되는 것도 바로 인민의 동질성을 정하는 이 근본적인 정치적 결정을 통해서이다. 자유주의는 이와 같은 결정을 회피하거나 영원히 미루려는 태도일 뿐이면서도 정치(적과 동지의 격렬한 대립)의 종언이라는 허구적인 기반을 두고 다원주의 국가를 수립하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체성을 둘러싼 정치적 전투에서 승리하려고 꾀하는 당파적 이념에 불과하다. 적과 동지의 구분을 포기하고 정치적인 것의 격렬한 대립을 외면함으로써 자유주의는 정치에서 그리고 개인의 삶에서 본질적 토대를 제거해버린다.
현대 정치학 용어로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indentity)가 자유주의보다 정치적인 것의 본질에 더 적합하다.
자유주의적 법률주의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 정치에서 더이상 설 자리가 없다는 듯이 짐짓 가장하지만, 이와 같은 가식적인 태도는 자기모순이라고 슈미트는 비판한다.
다원주의와 중립성을 내세워서 적과 동지의 구분을 폐기하려는 태도 자체가 이미 적과 동지의 구분을 전제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다원주의와 중립성 테제에 동의하지 않는 진영을 입헌민주주의의 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30]
슈미트에게 국가란 “정치적 통일의 상태”를 뜻한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기초는 피통치자와 통치자간의 동일성을 의미한다.[31]
동일성의 원리는 현존하는 인민(Volk)이 정치적 통일체와 자기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정치적 통일체가 구성되는 원리를 말한다. 이 동일상태는 현존하는 인민이 고유한 정치적 자각과 민족적 의지에 의해 적과 동지를 스스로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한 인민이 정치적 자각(적과 동지의 구별)에 의해 스스로를 정치적 통일체인 국가와 동일시할 수 있는 상태에 상응하는 국가형태, 즉 동일성의 원리를 실현하는 국가가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 국가이다.[32]
슈미트에 의하면 이러한 동일성의 기초는 평등(Gleiheit)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등은 동일성을 갖춘 인민들만의 ‘실체적인 평등’을 뜻한다. 그 결과 슈미트에게 국가형태로서의 민주주의란 모든 인민의 실체적 평등,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 통치자와 피통치자, 명령자와 복종자의 동일성”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민주주의국가에서는 통치자가 인민과의 동일성 내지 동질성으로부터 빠져나와서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여서는 아니 된다. 민주국가에서 “통치자의 권력과 권위는 동일성에 의해 일반의지를 실현하는 피치자의 의지, 위임과 신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33]
그는 선거권의 확대, 선거연령의 인하, 선거주기의 단축, 의회해산과 같은 일련의 민주적 경향과 제도들 또한 이러한 통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을 실현하려는 노력의 산물로 파악한다. 민주적 과정은 다양한 세력들이 인민들간의 통일된 정체감을 만들어내어 동일성을 실현 시키려 하는 과정이다.
이와 같이 슈미트는 민주주의이념에 기초한 국가를 통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 내지 실체적 평등에 기초한 국가형태로 보았고 자신의 이론이 인민의 자기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동질성에 기초한 정체성을 창조할 것을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적 이상은 대립하는 것이다. 즉,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민주주의는 자유주의를 부정한다. 따라서 슈미트에게 자유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고 실현될 수 없는 이념이다[34]
슈미트와 독일 나치와의 연관성에 대한 강조로 인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슈미트의 비판이 제공하고 있는 풍부한 통찰들을 평가 절하하는 오류를 피해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슈미트의 비판과 그가 내린 이론적 결론들 및 정치적 결정들을 분리하여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에서의 갈등과 적대적 성격에 대한 슈미트의 강조는 물론이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모순되고 화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며, 현대 대중민주주의 내지 의회민주주의는 서로 양립 불가능한 두 구성요소 사이의 긴장과 갈등으로 인해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지속 불가능한 기획이라는 슈미트의 주장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통찰들을 보여줌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로부터 슈미트가 선택한 결정, 즉 파시즘적인 독재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결론이 합리적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슈미트의 이론의 긍정성을 변증법적인 방식으로‘지양’하는 작업은 여전히 미완의 것으로 남아 있다.
-나종석 (2009). ‘정치적인 것’의 본질과 카를 슈미트의 자유주의 비판 . 헤겔연구, 25, 227- 254.-
-나종석 (2009). ‘정치적인 것’의 본질과 카를 슈미트의 자유주의 비판 . 헤겔연구, 25, 227- 254.-
5.6. 헌법의 수호자
5.7. 합법성과 정당성
5.8. 참고: 중기사상
참고: 법학적 사고의 세 종류
‘규범주의적 normativistisch’
‘결정주의적 dezisionistisch’
‘제도주의적 institutionalistisch’ : 역사적으로 형성된, 법을 적절하게 기능시키기 위한 ― 그 국가나 지역의 특성에 맞는 ― 제도들을 중시
↳ 중기 슈미트 사상의 개념인 ‘구체적 질서 konkrete Ordnung’
<정치신학> 제2판의 <머리말>에서 슈미트 자신은 ‘규범주의’적 사고와 ‘제도주의’적 사고도 중요하게 본다고 강조한다. ‘규범주의적 normativistisch’
‘결정주의적 dezisionistisch’
‘제도주의적 institutionalistisch’ : 역사적으로 형성된, 법을 적절하게 기능시키기 위한 ― 그 국가나 지역의 특성에 맞는 ― 제도들을 중시
↳ 중기 슈미트 사상의 개념인 ‘구체적 질서 konkrete Ordnung’
하지만 슈미트는, 서문이 무색하게 해당 저술에서 규범주의적 법적 사고, 특히 법실증주의에 반발하며 ‘결단주의’적 논증을 이어 갔다. 초기 슈미트는 법실증주의와의 대결을 자처하면서 결정주의적(결단주의적)인 관점을 취하게 되는데,
그러나 중기에 이르러 그런 슈미트에 사상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고 여겨진다, ‘구체적 질서konkrete Ordnung’ 개념이 생겨나면서 제도주의적 관점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 질서’란 한 공간 아래 대지에서 ‘민족’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질서를 중시하는 사상이다. 통상적인 법체계가, 추상적으로 상정하고 있을 뿐인 관념적 철학체계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버크주의와도 비슷한 맥락을 보인다.
이런 슈미트의 '구체적 질서' 등장에 대해서 학자들은 1930년대 나치당이 독일에 집권하며 그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기 위해서 나치의 민족 생활권이라는 개념과 자신의 사상을 조화시키기 위해 일루어진 것이라 평가하기도 하며 또는 슈미트는 원래 공허한 허무속의 ‘결단’에 관해 말했던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예외상태'와 ‘결단’ 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규범법학과 대비되는 "새로운 법질서를 발견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는 관점으로, 슈미트 철학은 그의 정치적 입장과 별개로 일관된 발전양상을 보인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5.9. 대지의 노모스
5.9.1. 경계선사고
독일의 정치신학자인 슈미트는 자신의 저서 『대지의 노모스』에서 자신이 그렇게 부르고자 하는 전세계적인 경계선사고(globales Liniendenken)를 전개한다. 경계선사고란 신세계의 발견과 함께 만들어진, 구세계의 유럽 공법의 국제법의 핵심을 다루고 있는 장소확정과 질서의 노모스(Nomos)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의 분할경계선인) 라야(Raya)와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우호선(amity line)을 통하여 전개된다.슈미트는 이와 같은 경계선사고를 <신세계>가 발견되기 이전의 전세계적이지 못한 신화적 관념들과 구분하여서 설명한다. 즉 그는 <신세계>의 발견 이전의 국제법은 전세계적인 성격을 가지지 못한 신화적인 표상들에 머물러 있다고 설명한다. 그가 이와같은 구분을 행하는 것은 아마도, 유럽 공법의 국제법을 여타의 국제법들과 다른 지위에 놓이게 함으로써, 유럽 중심적인 기독교 공동체의 유지와 확대를 보급하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많은 역사가들은 기원전 14, 15세기 이래의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미탄니(Mitanni) 클라티(Klati)의 파라오와 왕들의 교섭, 동맹, 통상조약, 정략적 통혼, 문서의 교환과 기록체제 등을 국제법적 관계의 원형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 헬레니즘, 유대, 인도, 아랍, 몽고, 비잔틴 등과 그 밖의 권력구성체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 또한 흥미 있는 설명의 대상이 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모든 것들은 단지 불완전하고 모호한 의미에 있어서의 국제법이었다. 당시의 모든 것, 특히 전쟁은 조직적인 면에서 볼 때, 당시의 기술적, 경제적 교통 또는 관계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무엇보다도 대지를 포괄하지 않으며 전세계적이지 못한 공간상이라는, 아직 과학적으로 측량되지 못한 대지라는 한계와 시야 속에 머물러 있었다>라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16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유럽 공법의 국제법은 지도제작과 그리고 지구의제작과 함께 정치적인 가능성을 발견하며, 장소확정과 질서의 결합의 방식으로, 즉 공간질서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서 클링호퍼(Arthur Klinghoffer)의 저서 『지도와 권련』─왜 유럽은 지도 상단에 표시되어 있고 아프리카는 지도 하단에 표시되어 있을까?─은 정치적 관념의 교훈이 풍부한 기록이다. 아무튼, 여기에서 중요한 개념이 되는 것은 육지의 취득이며, 그로써 생겨나는 노모스(Nomos)이다. 물론 이와 같은 기독교적 유럽의 연장으로서의 현대 국제법은 <이중헤게모니>로서 유지되어온 교황과 황제의 중세 기독교적 공간질서의 세계적 영향력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법사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활발하게 논의되어온 지동설과 천동설, 지평설과 지구설의 내용과 관련되며, 여기서는 따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하여 유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을 유의하길 바란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無主의 토지에 대한 발견과 선점의 가능성, 그리고 그로써 생겨난 <국가>의 가능성은 유럽의 모든 생활을 <세속화>하는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는 라야와 우호선의 구분 속에서 명확해지고, 정당화되어지고 있다. 그것은 유럽 내부의 문제점들로부터의 엄청난 면제를 의미하며, 그와 동시에 악명도 높은 <경계선의 저쪽(beyond the line)>이라는 말이 지닌 국제법적 의미이다. 슈미트는 여기에서 홉스의 국가창설에서의 자연상태에 관한 이론을 전개한다.
추가적으로 설명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여기서 설명한 내용은 아마도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우호선에 대한 내용이 그 주를 이루고 있으며, 더욱 자세한 내용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분할경계선인 라야와 1493년 6월 7일의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도록 『대지의 노모스』의 비토리아에 관한 챕터와, 칸트에 관한 챕터를 참조할 것.
5.10. 좌파 카를 슈미트
5.10.1. 슈미트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슈미트는 가장 재능있는 20세기 반자유주의 비평가 중 한명이었다. 슈미트는 나치와의 운명적인 동맹 외에도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의 법률 고문부터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전후 유럽의 정치 및 법률 사상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부터 70년대의 시대정세 속에서 슈미트의 사상적 지위는 극히 양의적인 것이었다. 그는 체제 쪽에서 추진하는 유사(有事)체제의 이론적 선행자로 간주되곤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 의회 바깥에서의 반대운동(APO) 활동의 번성함과 함께, 좌파 정치학자 요하네스 아그놀리(Johannes Agnoli)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예전 슈미트의 의회주의비판은 반체제 측에서 새로이 주목받게 되며, 실제로 슈미트 자신이 좌파 세력에 접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발언을 공적으로 하기도 했었다. 마르크스주의와 슈미트주의의 결합은 특히 이탈리아에서 커다란 사상사적 토픽 하나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대단히 이른 시기부터 슈미트가 이론적으로 수용된 나라 중 하나이다. 특히 1930년대에는 카를로 코스타마그나(Carlo Costamagna) 같은 이탈리아 파시즘 국법학자와 슈미트 사이에 친밀한 교류가 생겨났고, 슈미트가 1936년 봄에 강연을 위해 로마를 방문하고 있을 때에는 무솔리니와의 대담이 실현되는 등, 이탈리아 파시즘에 의해 슈미트는 적지 않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슈미트가 이탈리아에서 재차 주목을 모으게 되는 것은 가톨릭 계열 보수사상가(머지않아 1990년대 우익정당 북부동맹[Lega Nord]의 이데올로기로서 유명해지는) 쟝프랑코 미리오(Gianfranco Miglio) 등의 번역에 의해 1972년에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포함한 여러 논문들이 출판되었을 때이다. 『정치적인 것의 카테고리』라는 제목의 이 단행본이 출간되면서 이탈리아에서는 <카를 슈미트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상황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 영향은 전후 이탈리아의 정치사상이 전개되는 중심적 장이 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내부로까지 파급된다. 이리하여 생겨난 것이 마리오 트론티(Mario Tronti)를 대표로 하는 이른바 <슈미트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Marxisti Schmittiani)인 것이다.
트론티는 전후 이탈리아에서 좌파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이탈리아 공산당(PCI)의 주류로부터는 벗어난 곳에 몸을 두고 있었다. PCI는 1956년도 제8회 당대회에서 의회제 민주주의로의 길을 결의하지만, 이에 맞서 고도의 산업적 발전을 이루고 있던 북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공장노동자의 자발적인 자주관리를 주장하는, 직접 민주주의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마르크스주의 조류가 발생하게 된다. 그것이 1961년에 라니에로 판치에라(Raniero Panzieri)에 의해 창간된 잡지 『붉은 수첩』이 대표하는 노동자주의(operaismo)이다. 1936년 『붉은 수첩』의 분열을 거쳐 1964년 이래로는 새로 창간된 『노동자계급』으로 계승되는 이 노동자주의는 트론티를 위시하여 알베르토 아솔로자(Alberto Abruzzese),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맛시모 카치아리(Massimo Cacciari) 등의 참가 아래 특이한 마르크스주의의 계보 하나를 형성하게 된다.
5.10.2. 전후시기와 프랑크푸르트학파와의 연관성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카를 슈미트는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헌신적 노력으로 인하여 학문적으로나 저널리즘적으로 자유주의 및 좌파 지식인들의 관점에서 고립되게 되었다. 그러나 슈미트를 통하여 초기연방공화국의 법적사고를 형성한 수많은 학생과 지지자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에른스트 루돌프 후버(Ernst Rudolf Huber), 에른스트 포르스토프(Ernst Forsthoff), 베르너 버너(Werner Weber), 로만 슈너(Roman Schnur), 한스 바리온(Hans Barion), 어니스트 프리젠한(Ernst Friesenhahn)이 포함된다. 이들은 카를 슈미트의 70세와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공개적으로 그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한 기념 출판물을 발표한다.그 외에도 총리의 고문으로 알려지게 된 정치작가 뤼디어 알트만(Rüdiger Altmann)과 유명한 저널리스트 요하네스 그로스(Johannes Gross), 독일의 헌법학자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푀르데(Ernst-Wolfgang Böckenförde)와 요제프 이센시(Josef Isensee)가 슈미트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이들은 때때로 슈미트학파(Schmitt-Schule)라고 불리운다. 오늘날 뵈켄푀르데는 아마도 슈미트 직계 집단에서 가장 저명한 헌법학자일 것이다. 그는 개별 주제를 다룰 뿐만 아니라 슈미트의 질문 범위를 체계적으로 조사했다. 그는 국가와 법의 출현에 대한 슈미트의 강령적 관점과 정치신학적 관점을, 헌법적이고 자유 지향적인 방식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이해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슈미트의 정당한 후계자로 묘사될 수 있다. 함부르크의 뉴스 매거진 편집자 루돌프 아우구슈타인(Rudolf Augstein)을 포함하여 다양한 유명 인사들이 연방공화국 초기에 슈미트의 조언이나 법적 전문 지식을 구했다.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는 그의 연구 「연방공화국 정치적 역사에서의 칼 슈미트」에서 초기연방공화국에 대한 슈미트의 영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슈미트와 하이데거는] 둘 다 1933년의 위대한 예스맨 중 하나였다. 그들은 나치보다 무한히 우월하다고 느꼈고 총통을 이끌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야심찬 의도에 대한 환상을 경험했지만, 축제가 끝난 후 자신의 죄책감이나 정치적 오류까지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칼 슈미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1933년에 히틀러를 옹호한 것과 1945년에 그에게 침을 뱉은 것 중 무엇이 더 음란한 것인가?’ 이러한 거부와 야스퍼스 같은 회개의 설교자들에 대한 증오는 하이데거와 슈미트가 연방공화국에 미친 영향력의 시작이었다.”
동시대 학자들에게서도 놀라운 맥락에서 슈미트와의 많은 접촉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슈미트와 접촉했던 유대교 철학자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는 그의 『헌법이론』(1928)이 이스라엘 헌법에 대한 논의에 사용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는 1949년 연구원 시절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 도서관에서 그 책을 주문하는데 실패했을 때 우연히 이 사실을 발견했다. 즉 이스라엘의 법무장관 핀차스 로젠(Pinchas Rosen)은 이스라엘 헌법 초안의 몇 가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슈미트의 『헌법이론』을 필요로 하였다.
역사학 분야에서는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의 『비판과 위기』, 크리스티안 마이어(Christian Meier)의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정치의 출현』이 슈미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사회학 분야에서는 한노 케스팅(Hanno Kesting)의 『역사철학과 세계내전』이 영향을 받았다. 철학에서는 오도 마쿼드(Odo Marquard)의 『개인과 권력분립』, 헤르만 루브(Hermann Lübbe)의 『단어에 대한 논쟁: 언어와 정치』,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의 『헤겔, 그의 사상을 시각화하다』가 슈미트의 정리를 채택했다.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의 『근대의 정당성』도 슈미트의 작업을 다양한 지점에서 일부는 비판적으로, 일부는 감상적으로 다루었다. 종교연구에서 슈미트의 정치신학을 기반으로 한 것은 무엇보다도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의 『서구 종말론』이다. 한스 부흐하임(Hans Buchheim)은 정치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분석을 제시했고, 에른스트 볼라트(Ernst Vollrath)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를 따라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판단력에서 도출했다.
슈미트의 영향력에 대한 특히 어려운 질문은 정치적 좌파에 대한 그의 수용이다. 이는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으로 슈미트는 일종의 중요한 반면교사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그를 "완전히 죽은 자가 된 국가 사회주의 절대주의의 창녀 중 하나"로 묘사했다.
1986년 슈미트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관해 널리 논의된 에세이에서 엘렌 케네디(Ellen Kennedy)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의회주의를 비판하면서 슈미트적 주장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1968년경 이링 페처(Iring Fetscher)의 프랑크푸르트 세미나에서 슈미트는 에이케 헤닉(Eike Hennig)이 보고한 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라인하르트 메링(Reinhard Mehring)은 2006년에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하버마스에 대한 슈미트의 영향은 반복해서 논의되었다. 그는 이미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공기같은 존재였다. 슈미트는 비판 이론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변호사와 같은 존재였다. 오토 키르히하이머(Otto Kirchheimer)와 프란츠 노이만(Franz Neumann), 에른스트 프렝켈(Ernst Fraenkel),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모두 1933년 이전에 카를 슈미트를 읽었다. 키르히하이머는 슈미트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노이만과 함께 베를린에서 슈미트를 자주 만났다. 법과 인민주권에 대한 그의 정치적인 견해는 사회주의 법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두 사람의 관심사였다."
1968년 7월 프라이부르크에서의 취임 연설에서 정치학자 빌헬름 헤니스(Wilhelm Hennis)는 좌파의 헌법적 사고, 더 정확하게는 조직의 형식적 형태와 기본권의 실질적 원칙 사이의 구별을 "순수한 카를 슈미트의 프랑크푸르트"라고 묘사했다.
슈미트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주역들과의 연결 외에도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와 카를 슈미트 사이에는 문제적 연대의 요소가 있었다. 그녀는 1951년의 작품인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나치 독일에 동조했을 뿐만 아니라 나치를 확신한" "실제적 예술가와 학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가정한다. "예를 들어, 헌법 및 국제법 분야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나치에 헌신했던 칼 슈미트의 경력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국가사회주의자들은 "테오도르 마우츠(Theodor Maunz), 베르너 베스트(Werner Best), 한스 프랑크(Hans Frank), 고트프리드 니스(Gottfried Neesse), 라인홀트 회인(Reinhold Hoehn)과 같은 이류 및 삼류 인재들로 신속하게 그를 대체했다." 아렌트는 "정치적 낭만주의"와 같은 일부 슈미트식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런 맥락에서 블레셋과 정치적 낭만주의자들의 결합에 관한 그의 논문인 『정치적 낭만주의』를 언급했다. 심지어 1934년에 출판된 그의 국가사회주의 작품인 『국가, 운동, 민족』에서도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이 두권의 책 외에도, 『전면적인 적, 총력전, 전체국가』, 『역외 열강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는 국제법적 광역질서』를 그녀의 광범위한 참고 문헌에 포함시켰다.
5.11. 정치신학II
6. 저서
- 정치신학 外, 김효전 역, 법문사, 1988년, 477쪽
- 정치적인 것의 개념, 김효전·정태호 역, 2012년, 339쪽
- 합법성과 정당성, 김효전 역, 교육과학사, 1993년, 319쪽
- 로마 가톨릭주의와 정치형태/홉스국가론에서의 리바이어던, 김효전 역, 교육과학사, 1992년, 401쪽
- 헌법의 수호자논쟁, 김효전 역, 교육과학사, 1991년, 308쪽
- 유럽 법학의 상태·구원은 옥중에서, 김효전 역, 교육과학사, 1990년, 396쪽
- 파르티잔, 김효전 역, 문학과지성사, 1998년, 207쪽
- 헌법이론, 김기범 역, 교문사, 1976년, 425쪽
- 헌법논집: 1924년-1953 헌법학 자료, 김효전·정태호 역
- 대지의 노모스, 최재훈 역, 민음사, 1995년, 432쪽
- 독재론, 김효전 역, 법원사, 1996년, 335쪽
- 정치적 낭만, 배성동 역, 삼성출판사, 1966년, 197쪽
- 국가·운동·민족, 김효전 역, 정치신학 外, 1988년에 수록
- 법학적 사고방식의 세 유형, 김효전 역, 정치신학 外, 1988년에 수록
- 헌법의 수호자, 김효전 역, 법문사, 2000년, 250쪽
- 차별적 전쟁개념으로의 전환
- 입장과 개념들, 김효전·박배근 역, 세종출판사, 2001년, 522쪽
- 현대 의회주의와 정신사적 지위, 김효전 역, 관악사, 2007년, 118쪽
- 국민표결과 국민발안·제2제국의 국가구조와 붕괴, 김효전 역, 관악사, 2008년, 125쪽
- 정치신학Ⅱ, 조효원, 그린비, 2019년, 176쪽
- 국제법상의 침략전쟁의 범죄와 죄형법주의 원칙, 김효전역, 동아법학 제34호, 2004년, 381-496쪽
- 칼 슈미트 연구, 김효전 역, 세종출판사, 2001년, 420쪽
- 반대물의 복합체, 김효전 역, 산지니, 2014년, 552쪽
- 정전과 내전, 윤인로 역, 산지니, 2020년, 506쪽
7. 같이 보기
[1] 사유는 그녀가 출신지를 속였다는 것인데, 아마도 슈미트에게 자신을 크로아티아 남작의 딸로 소개했던 모양이다(실제로는 뮌헨 출신의 프로테스탄트였다). 이 문제로 1924년 본 지방 법원에서 결혼이 무효화되었다.[2] 그의 이전 결혼은 교회법에 따라 무효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1950년 두 번째 부인이 사망할 때까지 가톨릭신자에서 파문 당한 상태에 있게 된다. 그의 두 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외동딸 아니마(Anima)는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통합 팔랑헤당에 속한 스페인 법학 교수와 결혼했고, 그녀는 슈미트의 저작 중 일부를 스페인어로 번역했다.[3] 1933년 1월 30일 슈미트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해두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제국 총리가 되었고 파펜이 부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바로 하루 뒤에 이렇게 적고 있다. “경영대학원에 전화해서 강의를 취소했다. 점차적으로 경계심이 생기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상태에 있고, 신문을 읽고, 신이 났다. 멍청하고 우스꽝스러운 히틀러에게 분노하라.”라고. 슈미트는 법학 교사 중 최초의 국가사회주의자 중 한 명으로서 새로운 권력 구조에 빠르게 적응했다. 그는 그의 저작 목록에서 알 수 있듯이 특별한 문학적 열정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1936년 말까지 계속해서 줄어들지 않았다. 1933년 5월 NSDAP에 가입한 기간부터 1936년 12월 관련 직위를 잃을 때까지 슈미트는 40개 이상의 기사를 썼으며 그중 대부분은 전문 언론 외부에 게재되었다.[4] 예컨대, 당대의 기준으로 극우 혹은 반동은 민족주의와 군국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호엔촐레른 가문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의 전통을 칭하는 단어였는데 슈미트는 해당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는식.(그러나 그는 확실하게 민족주의자이자 국가주의자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를 군국주의자라고 말하여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라고 하겠다. 실로 슈미트는 "그러한 주장은 강한 유럽적 경향과 일치하였으며 진정한 정치적 에네르기, 또는 더 현대적 표현을 쓰면 일급의 군사적 잠재력이었다.(『대지의 노모스』참조.)"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역시 슈미트의 일부일 뿐이다.)[5] 이와 관련하여 『대지의 노모스』「서반구」라는 챕터를 확인해보길 바란다. 슈미트는 실제로 서반구를 실제적인 유럽의 공간질서의 후계자임을 승인하며 인정하는 태도를 취한다.[6] 물론 슈미트는 좌파 가톨릭 신학자에게서 보이는 “로마 가톨리시즘과 마르크스주의적 코뮤니즘의 공존”을 결코 유쾌하게 여기지 않았다.(『정전과 내전』,윤인로 역 참고.)[7] 이를 슈미트는 “세계사를 줄곧 움직이고 있는 변증법적 긴장”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헤겔처럼 최종적으로 절대지(知)로 지양되는 대립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는 1955년 12월 1일자 알렉상드르 코제브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헤겔에게 적이란 “단지 부정의 필연적인 이행단계인가, 혹은 무이며 본질을 갖지 않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의문을 표하면서, “헤겔에겐 애초에 '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코제브는 1956년 1월 4일자 편지에서 이 물음에 대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라고 답한다. 즉 “승인을 둘러싼 투쟁, 역사가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리고 그런 한에서는 그렇다고 하겠습니다”만, “역사(=승인을 둘러싼 투쟁)가 절대지에 있어 '지양'되고 있는 한에서는, 그리고 그렇게 되자마자 곧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적대는 상호 승인 속에서 지양, 즉 폐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현실에서 승인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있던 적일 따름이므로, 적대는 승인행위 속에서 보존(지양)되고 있기도 합니다. 단, 승화된(지양된) 형태에서 그런 것이지만 말입니다.”[8] (Carl Schmitt's Critique of Liberalism, Cambridge UniversityPress, 1997, 305쪽)[9] (Carl Schmitt zur Einführung, Hamburg 2000, 18쪽)[10] Bernard Faÿ, Civilisation Américaine, Paris, 1939, S. 9.[11] 그리하여 <La Jeune Engenie> 사건 (1822 ; 2 Mason 309, Fed. Cas. Nr. 1551)에서 스토리(Story) 대법관(大法官)은 모든 문명사회에 의해 또는 유럽의 기독교 국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구성하는 사회들에 원칙으로서 보편적으로 승인된 원칙들을 언급하고 있다.[12] 켄트(James Kent)는 그러한 국제법을 그의 『Commentaries on American Law』(1836)에서 다루었다. Henry Wheaton, History of the Law of Nations in Europe and America, New York 1845 참조. 칼보(Carlos Calvo)는 1868년의 그의 유명한 저서에 <Derecho Internacional teórico y práctico de Europa y América>(유럽과 아메리카의 국제법의 이론과 실제)라는 제목을 붙였다. 비안나(Sa Vianna)는 그의 저서 De la non existence d'un droit international américain, Rio de Janeiro, 1912, S. 241.에서 어떠한 아시아국제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아메리카 국제법이라는 말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13] 슈미트는 근대의 이원주의, 즉 자연과 인위의 이원주의적 분리를 비판하고, 그러한 이원주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슈미트는 이러한 이원주의 속에 프로테스탄트, 프롤레타리아트, 18세기 계몽적 합리주의를 포함시킨다.[14] 미국의 3번째 대통령이자,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다.[15] 미국의 5번째 대통령이며, 먼로 독트린을 선언한 것으로 유명하다.[16] 슈미트의 광역이론의 핵심은 이러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만 인식할 수 있게 된다.[17] 스페인의 가톨릭 선교사 · 도미니코회 수도자 · 멕시코의 가톨릭 주교[18]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다.[19] 벤담의 제자로 벤담의 아이디어를 제도로서 구체화한 법 실증주의로 유명하다. 본 항목의 슈미트에게 사정없이 까이지만 역설적으로 독일철학에 기초한 영미권철학자의 이단자로도 꼽힌다.[20] 범게르만주의, 대독일주의 항목 참조.[21] 당시 시민혁명적 가치관들에 반대하여 교황과 절대성과 신의 율법에 기초한 군주국의 지도자의 주권적 계승을 강조한 중유럽 보수주의 계통 부류의 학자들[22] 당시 그는 국가는 역사의 산물이자 시대의 희생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으며, 국가는 지상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매우 강력한 교회에 맞설 수 없다는 가톨릭교회 당국의 견해를 공유했다.[23] 오토 바이닝거(Otto Weininger).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유대인 금세공사인 아버지 레오폴트 바이닝거와 유대인 출신인 어머니 아델하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신의 유일한 대표작 『성과 성격』을 발표한 이후 23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바이닝거는 그 책에서 자신이 1902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음을 밝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최근에 한 유대인이 자살했는데, 그가 유대인들은 사람들의 타락 위에서 번영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24] 그러나 슈미트에 의하면 각 분야 별로 자율성을 지니고 있으나 언제나 결정의 최종 심급자는 '국가'에 해당한다고 보고있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 참고[25] 이것은 사실 장 보댕에서 부터 이어지는 유럽 공법학의 개념을 체계화시킨 것이기에 슈미트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다.[26] 법 실증주의하에서도 주권자는 법률위에 존재한다. 다만 법률 역시 내부의 체계성이 존재하기에 그 체계를 개정하려면 전체를 뜯어고치던지, 들어내던지해야한다. 즉 사전/사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을 뜯어고치건 삭제하건 필요가 생기면 해야하며 이런것들을 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27] 이런 헌법제정권력에 대한 논의는 이미 18세기 프랑스 혁명기 시에예스의 <제 3신분이란 무엇인가?>에서 전개된 바가 있다.[28] 곧, 이점이 슈미트가 가장 강조했던 부분이라 할 수 있다.[29] 카를 슈미트, 『합법성과 정당성』, 김도균 옮김, 도서출판 길(2015), 해제 참조[30] 카를 슈미트, 『합법성과 정당성』, 김도균 옮김, 도서출판 길(2015), 해설 참조[31] 성정엽. (2019). 칼 슈미트의 자유주의국가 비판. 서울법학, 27(1),[32] 성정엽. (2019). 칼 슈미트의 자유주의국가 비판. 서울법학, 27(1),[33] 성정엽. (2019). 칼 슈미트의 자유주의국가 비판. 서울법학, 27(1),[34] 성정엽. (2019). 칼 슈미트의 자유주의국가 비판. 서울법학, 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