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22:47:26

독일/과거사 청산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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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나치 독일에 대한 태도3. 독일 제국 시절 제국주의에 대한 태도4. 일본과의 비교
4.1. 역사관4.2. 영토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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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가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하였고 모든 증거를 빠짐없이 제출하였으며 극복이 불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만행이 있던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에 맡겨야 합니다."
- 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 1966년 이스라엘 국빈 방문 당시 연설 중.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의 과거사 청산 방식이 망각에 치우쳐져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출처1]
"오늘 우리는 전쟁 및 독재 정권하에서 발생한 모든 희생자를 기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특히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당한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추모합니다. 우리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은 모든 국가, 그중 특히 소비에트 연방폴란드의 수많은 국민을 애도합니다. 독일인으로서 우리는 고향에서의 공습, 억류 상태, 추방 과정에서 군인으로서 목숨을 잃은 동포들의 죽음을 기립니다. 우리는 신티와 로마, 살해된 성소수자들, 죽임을 당한 정신 장애인 그리고 종교적 또는 정치적 신념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을 추모합니다. 우리는 총살을 당한 포로들을 기립니다. 우리는 독일이 점령한 국가에서 투쟁 중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기억합니다. 독일인으로서 우리는 시민, 군사, 종교에서 비롯되었던 독일 내 저항운동과 노동자 계층 및 노조에서 시작된 저항운동,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저항운동에서 발생한 희생자분들께 존경을 표합니다. 우리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나 신념을 굽히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한 사람들을 추모합니다." (...)

"중요한 것은 과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극복은 불가능합니다. (...) 하지만 과거 앞에서 눈감는 자는 현재를 볼 수 없게 됩니다. 반인도적 행위를 잊고자 하는 자는 새로운 감염 위험에 다시 노출될 것입니다."
- 독일연방공화국 제6대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1985년 5월 8일 나치 정권 붕괴 40주년 기념연설 중. 학계에서는 이 연설이 독일의 과거 기억 문화가 오늘날과 같이 정립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출처2] 이 연설은 피해자인 이스라엘에서도 큰 반향을 이끌어내었다. 당시 이스라엘 대사관은 바이츠제커의 연설이 '현대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대환영하며 그를 이스라엘에 초청했다.[3] 동시에 이는 바이츠제커가 대통령 재임 도중 이뤄낸 가장 큰 업적으로도 손꼽힌다. 반면 이보다 3일 전인 1985년 5월 5일 헬무트 콜 총리는 로날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함께 친위대원들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크의 독일군 전사자 묘지에 참배하여 국내외적 비난에 직면했다.

독일은 전세계에서 과거사로 가장 악명이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독일은 같은 추축국 출신인 일본, 이탈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전국민이 독일과의 합병에 찬성하며 적극적으로 나치에 부역하고도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미비했던 이웃 독일어권 국가인 오스트리아 등과 달리 그동안 많은 피해국들에 일관적으로 사과와 반성의 태도를 보였고, 자국에서도 나치즘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성찰 분위기가 있기에 주변국과 신뢰를 회복했다.

다만 과거사 청산이 주로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즘 특히 체코와 폴란드 같은 이웃한 유럽의 피해 국가들과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위주로 한정되었고, 거리가 먼 남유럽, 동유럽의 피해국들이나 나치 정권 이전 독일 제국 시절 아프리카의 독일령 식민지에서 저지른 제국주의적 만행에 대한 반성은 비교적 부실하다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4]

2. 나치 독일에 대한 태도

파일:external/www.gerhard-richter.com/9127.jpg
파일:2547.jpg
파일:2569.jpg
《루디 삼촌》
Onkel Rudi, 1965
《마리안네 이모》
Tante Marianne, 1965
《하이데 씨》
Herr Heyde, 1965
위 세 그림은 독일 현대미술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1932 ~)가 1965년에 발표한 가족초상화 연작들이다. 홀로코스트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된 1960년대 즈음 현대미술계에서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예술가의 책무'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이에 여러 예술가들이 독일인들의 어두운 과거사를 예술 작품들을 통해 폭로하였는데, 리히터 또한 이 물결에 참가했다.

리히터의 가족초상화 연작은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가족사를 과거 비극적 시대의 역사와 연결짓는다. 우선 가장 좌측의 작품은 1965년작 《루디 삼촌(Onkel Rudi)》이다. 친족어로 구성된 제목과 사진 속 모델의 순박하게 웃는 얼굴은 가까운 가족 중 누군가의 오래된 사진을 보는 것과 같이 어딘가 친밀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동시에 어두운 색감과 나치 독일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국방군 제복은 이와 상반된 불안한 느낌을 주고 있다.

실루엣처럼 흐릿하게 번진 듯한 질감은 이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 모호하게 만들며, 단순한 배경도 장소의 구체성을 약화시킨다. 제목 '루디 삼촌' 역시 그렇다. 1차적으로는 이 작품의 모델이자 실제 작가의 외삼촌이었으며 2차 대전 당시 국방군에 복무했던 루돌프 쇤펠더(Rudolf Schönfelder)를 지칭하지만,[5] '루디'는 한국의 '철수'처럼 많은 독일인들이 쓰는 애칭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인상들이 한데 어우러져 어디에나 있을 법한 누군가의 가까운 가족, 하지만 전쟁범죄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풍긴다. 다시 말해 '루디 삼촌'은 당대 독일군으로 참전하여 나치 범죄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으나 동시에 누군가의 가까운 가족이기도 했던 불특정 다수, 즉 악의 평범성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현재는 체코 리디체[6]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는 독일과 체코의 역사적인 화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증표이기도 하다.

두 번째 작품 《마리안네 이모(Tante Marianne)》는 작가의 이모인 마리안네 쇤펠더(Marianne Schönfelder)의 사진을 가지고 만들었다.[7] 독일군 군인인 동생 루돌프와는 반대로 마리안네는 나치즘의 피해자였는데, 1945년 2월에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T4 작전의 두 번째 페이즈인 브란트 작전(Aktion Brandt)의[8] 대상이 되어 살해당했다.

마리안네를 죽인 인물은 드레스덴 지역에서 브란트 작전을 감독하던 친위대 의사 하인리히 오이핑어(Heinrich Eufinger)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리히터의 장인이기도 했다. 리히터는 결혼하고 나서야 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루디 삼촌이 당대의 독일 군인들을 상징한다면, 마리안네는 나치 정부의 희생자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안네는 현재 독일에서 조피 숄, 그리고 안네 프랑크와 함께 나치 정권의 대표적인 희생자로 기억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작품이자 베르너 하이데(Werner Heyde)의 사진을 이용한 《하이데 씨(Herr Heyde)》는 이 복잡한 가족사를 더 심화시켜 보여 준다.[9] 의사였던 하이데는 리히터의 장인인 하인리히 오이핑어의 친위대 시절 동료였다. 그는 친위대 의무부대장으로써 T4 작전 수립에 참여하고 각종 강제수용소와 절멸수용소에서도 근무했다. 그 역시 1945년 리히터의 이모 마리안네의 죽음에 관여되어 있다.

베르너 하이데는 전후에 프리츠 사바데(Fritz Sawade)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나 그가 친위대 의사 '베르너 하이데'라는 사실은 전후 독일 의학계에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었다. 그는 한동안 일상을 영위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독일 사회의 과거 청산 분위기가 무르익자 결국 1959년에 재판장에 자진출두했다. 그리고 1964년 본격적인 재판이 열리기 전 감옥에서 스스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리히터의 작품 '하이데 씨'는 베르너 하이데가 법원에 출두하던 모습이 찍힌 사진을 원본으로 한다. 당연하게도, 하이데뿐만 아니라 나치 전범들 모두를 상징한다.[출처3]

리히터 일가의 이 복잡하고 기구한 과거사는 그의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초상화 연작에서 볼 수 있는 흐릿한 실루엣은 당대 다른 많은 독일인들의 가정과 인간관계에도 루디 삼촌과 마리안네 이모, 그리고 하이데 씨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위르겐 슈라이버의 미술사 서적인 《한 가족의 드라마(Ein Maler aus Deutschland)》,[11] 그리고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영화 《작가 미상(Werk ohne Autor)》이[12] 리히터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20년 전: 논쟁적인 국방군 전시회"[13]

왜 독일은 네오 나치를 뿌리 뽑지 못하는가?(슈피겔 기사 번역/2012), 독일, 네오 나치 마을 야멜에 가보았다(프랑스2/2019)[14]
오늘날 독일의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상황은 기대했던 것보다 꽤 낫습니다. 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이성을 말해 줍니다. 하지만 미래에 어떻게 될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인류의 안녕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인류의 행복은 여러 위협에 대한 실제적인 경계 태세에 기초합니다만, 그러한 행복은 동시에 경계심을 파괴합니다. 자유는 당연한 것으로 쉽사리 간주됩니다. 이 말은 곧 다시 독재자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folding [ 독일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Die gegenwärtige Situation in Deutschland - politisch und moralisch - ist aber viel besser, als man hoffen konnte. Das spricht für die fundamentale Vernunft der Menschen. Aber man weiß nicht, was die Zukunft bringt. Es gibt eine Paradoxie im Wohlergehen der Menschheit: Das Wohlergehen der Menschheit beruht auf einer wirklichen Wachsamkeit gegen eine Menge Gefahren. Aber das Wohlergehen vernichtet auch die Wachsamkeit. Die Freiheit wird leicht zu etwas Selbstverständlichem. Das bedeutet, dass man dann eben wieder einem Diktator zum Opfer fällt.}}}

- 철학자 칼 포퍼, 1992년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통일 직후 독일 사회에 대해 논하며.#
양차 대전으로 인해 주변국들에 많은 상처를 안겼음에도 과거에 대한 반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주변국의 신뢰를 회복하고 통일을 이룩하는 등 교훈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서 대외적인 이미지가 상당히 좋다.[15] 실제로 그런 이미지와 행보를 고수하면서 강대국 지위를 회복했으며 유럽 내에서 강한 발언권을 유지한다.

그러나 독일의 과거사 반성은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세계적인 강대국들과 홀로코스트의 최대 피해자인 유대계의 모국 이스라엘, 그리고 폴란드체코,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을 비롯한 유럽 이웃나라들에게 외교적으로 밉보이지 않기 위해 행하는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사실 패전 직후에는 서독 내에서 구 나치 정권에 대한 비판이 적었다. 1950~1970년대에는 이런 현상이 더 심해서 역으로 나치를 비판하다가 주변인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았다.[16] 대표적인 예가 전후 6년 만에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당(SRP, Sozialistische Reichspartei)인데, 이 정당은 서독에서 친위대독일군 출신들이 모여 합법적으로 나치즘을 계승할 목적으로 만든 당이었고 나치의 정강 정책이나 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심지어 북부 독일 일부에서는 25%에 달하는 득표율을 기록하여 나치 깃발이 다시 휘날리는 상황도 벌어졌다. 결국 헌법수호청은 1956년, 이 정당에 해산 명령을 내리고 후속 내지는 대체 정당 금지도 선고했다. #

현재 독일에서는 나치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우호 발언 뿐 아니라 나치 휘장, 하켄크로이츠를 공중(公衆)에 내비치는 것조차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팔만 잘못 올려도 당장 잡아간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발언 역시 위법이다. 그래서 독일어 위키백과#에서는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일부 나치 관련 문서는 편집제한 문서로 묶여 있으며, 토론란에도 키보드를 잘못 놀리면 감방에 갈 수도 있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히틀러와 나치즘 경험이 치욕스럽고 끔찍했는지 정보기관인 연방헌법수호청(Bundesamt für Verfassungsschutz)이 정치인, 공인들을 상대로 사상을 검증하여 조금이라도 나치즘, 파시즘스러운 발언을 했다간 공직 인생이 끝장난다. 이는 제2의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하기 위함이다. 이는 외국인에게도 예외는 없어서 나치 등을 소재로 삼아 독일을 비하하면 독일 법에 저촉된다.[17]

이러다보니 몇몇 독일인들은 "독일이 애국심을 가지면 좋게 끝난 적이 없다"며 국가의 상징들을 혐오한다. 이건 독일이 딱히 개념이 충만하다기보다는 전 국민이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진 것에 가깝다.[18] 위에서 말했듯이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에 나치나 히틀러에 대해서 언급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도 않고, 학교에서도 올바른 역사와 나치와 히틀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교육한다. 독일 내 곳곳에 박물관을 만들어서 어린이들이나 관광객들에게 과거의 조상이 대참사를 일으킨 장본인이었으니 절대 이렇게 되면 안 되고 후세에는 절대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교육을 철저히 한다.
요제프 오베르하우저
전 나치 독일 SS 중위 | 독일 뮌헨의 어느 한 맥줏집

저, 선생님... 하루에 맥주를 몇 리터나 파십니까?[19]
대답해 주실 수 없으세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오베르하우저가 자신을 촬영하고 있는 란츠만의 모습을 의식하면서 심히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모습이 잡힌다.)

무슨 사정이시죠? 하루에 맥주가 몇 리터나 팔리나요?

맥줏집 종업원: 그냥 알려드려요!
요제프 오베르하우저: 뭘 알려줘?
맥줏집 종업원: 대충이라도요. 대충 어립잡아서 알려드리라고요!
요제프 오베르하우저: 400에서 500리터 정도 팝니다.

얼마큼이라고요?

400에서 500리터요.

그 정도면 많이 파는 거네요.
여기서 일한 지는 오래됐습니까?

20년 정도 됐습니다. (이 시점부터 오베르하우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안경을 쓴다.)

20년이요.
그런데 얼굴은...

사정이 있습니다.

...왜 가리시는 거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요. (오베르하우저가 자리를 뜬다)

무슨 사정이요? 아니, 말 좀 해주세요!

이분 알아보시겠어요? (란츠만이 베우제츠 수용소장 크리스티안 비르트의 사진을 꺼낸다.)

모르세요? 크리스티안 비르트라고... (오베르하우저는 사진을 바라본 후 모르는 척하며 담배를 꺼내 핀다.)
오베르하우저 씨!

베우제츠 기억나시죠?
베우제츠에 대해 기억나는 것 없습니까?
구덩이들이 시체로 넘쳐나던 거 기억 안 나요?
정말로 모르겠습니까?
- <쇼아> 중에서. 촬영 대상인 요제프 오베르하우저는 T4 작전과 폴란드 유대인 절멸 작전이었던 라인하르트 작전에 배치되었던 친위대 하급장교로, 60만 명이 살해된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에서 근무했다. 당시 베우제츠에서 그는 비르트 수용소장의 연락장교였으나 그 외에도 '하역' 작업을 감독하거나 가스실 확장에도 관여하였다. 그는 전후 베우제츠 재판에서 살인방조 혐의로 4년 반을 선고받았으나 형기의 절반만을 채우고 석방되었다. 이후 뮌헨에서 바텐더로 일하다 1979년 사망했다.

하지만 이 역시 완전한 나치 청산이 아니라서 1950년대에서 60년대까지 서독 법무부 간부 77% 나치당원 출신이라는 자료가 있다. 독일 법조계 일부 변호사들은 서독 전후 판사들은 대부분 나치즘을 믿는 나치 그 자체였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1960년대 서독에서 홀로코스트를 직접 실행한 중간급 장교, 하급 장교들이 많이 체포되어 재판에 섰지만 적은 형량만 선고 받고 그나마도 가석방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 직접 치클론 B를 주입한 SS 장교 한스 스타크(Hans Stark)[20]같은 범죄자가 겨우 3년 복역하고 석방되었을 정도로 당시 서독 판사들은 지나치게 홀로코스트 전범들을 봐주었고 그 결과 나치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21]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나치당 출신 판사들이 은퇴할 나이가 되고 나치의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은 세대가 판사가 된 이후부터 홀로코스트 등 전쟁범죄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나치의 전쟁 수행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중형을 선고하는 현재와 같은 재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1947년부터 현재까지 독일 법원에서 홀로코스트에 관여했던 나치 전범 중 책임자급 124명만 종신형을 선고 받고 나머지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홀로코스트에 직접 관여한 독일인이 수십만 명이고 간접적으로는 최소 100만 명 이상의 독일인이 관여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 정부와 독일 국민들은 자신의 가족들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들추기보다는 역사 속으로 묻어 버리고 싶어했다. 우는 어머니와 아이를 뒤에서 총으로 쏘는 사진이 찍힌 나치 병사, 구덩이를 파놓고 무릎 꿇린 포로의 머리에 총을 쏘는 사진이 찍힌 나치 병사 등처럼 실질적으로 각종 만행을 저지른 수십만의 독일 사람들이 재판도 받지 않고 손자, 손녀들에게 둘러쌓여 천수를 누리며 죽어가는게 바로 독일 과거사 청산의 현실이다. 다만,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게, 나치 독일이 하나의 정권이었고 그 아래에서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종사한 사람은 수없이 많다. 그렇기에 종전 후, 바로 냉전 체제로 전환된 세계 정세에서 나치 독일 인력 중, 유능한 군인이라든가, 천재 과학자들은 직접적인 피해자들인 연합국 지도부에서조차 대충 처벌하거나 아예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등용했다. 적성국도 이럴진데, 온 나라가 10년 이상 나치즘 치하에 있었던 독일은 나치 몰락 이후에도 구 나치 인사들을 배제하면 정치는 둘째치고 공장조차 돌릴 수 없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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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국방군 방첩국 중장이자 전후 초대 서독 연방정보국장인 라인하르트 겔렌(Reinhard Gehlen).
독일 연방총리실 직속의 정보기관인 독일 연방정보국 역시 창립 당시에는 게슈타포와 국방군 방첩국 요원들이 주축이었다. 창립자인 라인하르트 겔렌 중장은 국방군 방첩국 동방부서장으로 소련 지역에서 벌어지는 대량 학살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모은 대소련 정보를 가지고 연합군에 항복,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미국에 채용되어 그들을 위해 일했다. 그는 겔렌 조직이라는 일종의 정보조직을 꾸려 구 방첩국 동료들과 게슈타포 동료들을 불러들였고, 심지어는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한 특수작전집단 출신 요원들 33명 가량을 받아주기도 했다. 연합군 군정 종료 후 이들은 콘라트 아데나워 연방총리의 비밀 정보조직이 되었으며 아데나워가 주도하는 '빨갱이 몰이'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독일 연방군의 설립에도 상당히 관여하였고[22] 훗날 독일 총리실 직속의 정보기관으로 개편되어 지금에 이른다. 그러나 그동안 연방정보국은 독일 정부기관 중 가장 나치 물이 덜 빠진 조직으로 악명높았고 시민사회의 큰 비판을 받았다.

최근에는 이러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인지 아우슈비츠 회계사로 있었던 90살이 넘은 노인도 기소하여 재판을 받게 할 만큼 독일 법조계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가스 주입한 SS 장교는 봐주더니 이제 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회계사 노인 기소해봤자 무슨 소용이냐'라는 비판도 상당하다. 시간이 많이 흘러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관련자들이 사망하거나 사망할 나이가 되어 실질적으로 나치 독일 과거사 청산의 마지막 재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역사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 상징적인 의미로 이제와서 90살 넘은 노인을 재판정에 세우는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재판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다만 이러한 경직된 분위기가 오히려 당시 상황을 객관적이고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여지까지 없애버렸다는 내외적인 비판도 있다. 물론 이것도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닌게, 계속해서 나치에 희생당한 성소수자 등에 대한 메모리얼을 만들고 히틀러를 희화화한 소설이 베스트셀러화되는 등 나름 회자되고 있다.

어쨌든 독일의 원죄의 상징이라서 외국인들과 섞인 환경에서 말이 나오는 건 불편해하는데 본인들에 대한 공격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나치에 대해 꺼내는 것은 현대 독일에 대해 비난하는 의도로 꺼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독일에서 사람들에게 매장당하기 싫으면 말실수를 조심해야 한다.

독일은 통일 당시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했는데 이는 소련폴란드가 독일 통일을 승인하는 전제조건으로 영토 포기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주변 국가들이 독일 통일에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럼에도 통일을 위해 과거 영토를 영구 포기하는 손실을 감수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23] 한편 메르켈 총리는 구 독일령 내에 거주했던 독일인들이 추방된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우경화 사상의 발로가 아니며 그저 추방되는 과정에서 독일인들이 겪은 고초를 지적한 것 뿐이다.[24]

조금 더 실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자면, 패권 다툼을 땅따먹기로 하던 때는 제국주의 시대였고 현재 세계의 패권은 조금 더 복잡한 외교전/경제전으로 진행된다. 독일은 이웃나라 프랑스와의 비전을 공유하고 비유럽국가들의 고성장으로 인한 기타 다른 유럽국가들의 위기감과 본인들의 경제적인 부국으로서의 입지를 잘 살려서 전 유럽적인 블록을 만들고 그 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행사하면서 이미 전유럽을 독일의 영향권 아래 놓는다는 오랜 숙원에 어느 정도 근접한 상황이다. 까놓고 제국주의 시절 독일은, 후발국 패권 도전자의 위치에서 전 국토를 들고 도박을 한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 현대 독일은 이미 EU라는 거대한 블록 안에 패권국에 가까운 위치이기 때문에 이런 무리수적인 도박을 둘 필요도 없을뿐더러 본질적으로 국제 판도를 뒤흔드는 행위인 전쟁이 일어나면 오히려 현 질서에 균열이 일어날 수 있기에 잃을 것이 더 많다. 게다가 1차 대전 독일[25]과는 또 다르게 2차 대전 나치 독일은 유례없이 심한 짓을 저지른 것도 맞다.[26] 유래없을 정도로 민간인까지 미친듯이 죽여나갔고 벨라루스 초토화 등 휩쓸고 지나간 곳은 잿더미가 되었기에[27] 이것은 전유럽적 트라우마로 남아 현대 독일의 발언력과 영향력 확대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있다.

독일 입장에서도 나치즘으로부터 현 독일에 직접적으로 계승되는 유산이 거의 없기에 나치 독일을 철저히 부정하고 흑역사로 규정하여 유럽의 역사적인 문제로 인한 균열을 차단하고 단결을 도모하여 세력권을 공고히 하며 유럽의 중심 지위를 살리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28][29] 물론, 이 정도의 계산을 이웃 국가들도 모를 리는 없으나 이유가 뭐가 되었든 간에 과거사를 반성하고 배상하는 것이 그들로서도 나쁘지 않을 일이니 주변국들도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이게 어느 정도 성공했기에, 독일 통일 이후 독일 재무장에 관해 주변국들 역시 환영했고, 2010년대 들어서는 유럽을 이끌어가는 데 주요 파트너인 프랑스의 여론조사에서 독일을 가장 호감가는 나라로 뽑아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다만 여전히 독일 내에도 극우적인 언동이 종종 있다. '마스 강에서 메멜 강까지 에치 강에서 벨트 해까지'라는 가사가 실린 국가 1절은 공식 행사에서는 안 불렀으나 월드컵 경기 중 관중들이 떼창을 해서 문제가 생긴 적이 있다. 때때로 다시 네오나치가 창궐해서 폭력을 휘두르고 다니는데, 경찰이 검거에 실패했다거나 하는 뉴스는 잊을 만하면 올라온다.

또한 국방군과 같이 현 독일로 계승되는 경우 그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진 않는다. 전 국방군의 장례식 같은 행사가 거창하게 행해지기도 하고 나치 시절의 전투 등 일부 업적은 형식적으로나마 기념한다. 만약 국방군의 요소를 철저히 배제한다면 전 독일 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티거라는 이름의 약국을 운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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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2월 26일, 뮌헨 시립 미술관(Rathausgalarie)에서
시민들이 국방군 범죄 전시회(Wehrmachtausstellung)를 관람하고 있다.
수백만의 국방군 병사들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범죄에 연루되었습니다. 친위대와 비교하자면, 25만 명의 친위대원들이 홀로코스트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죠. 독일에서는 모든 논의가 홀로코스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동부전선에서 소련인 2600만 명 이상을 죽인 1000만 명의 국방군 병사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훨씬 꺼립니다. 모든 독일인들의 친지 중 서너 또는 너덧 명은 바로 이 일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folding [ 독일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Millionen Wehrmachtssoldaten waren an den Verbrechen der Wehrmacht beteiligt - im Unterschied zu den etwa 250.000 SS-Leuten, die für den Holocaust verantwortlich waren. Mit dem Gedenken an den Holocaust hat es in Deutschland funktioniert. Aber mit den zehn Millionen Soldaten an der Ostfront, die mehr als 26 Millionen Sowjets umgebracht haben, war der Widerstand in der Gesellschaft sehr viel größer. Jeder hatte drei, vier, fünf Verwandte, die daran beteiligt waren.}}}

- 독일 사학자 한네스 헤어(Hannes Heer), 도이체 벨레와의 2020년 인터뷰에서.#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이론의 여지 없이 민주주의자였고 독일연방공화국의 민주주의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착실하게 복무한 국방군 군인이기도 했죠. 그는 레닌그라드 포위전에도 종군했습니다만 이 일을 주제로 삼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우린 (그때) 그가 무엇을 했고 하지 않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말은, 이 사진은 개인의 도덕과 제도적 도덕에 관한 다양한 물음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folding [ 독일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Helmut Schmidt, der zweifellos ein Demokrat war mit großen Verdiensten für die Demokratie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hat als braver Soldat in der Wehrmacht gedient. Er hat an der Belagerung Leningrads teilgenommen. Er hat das nicht thematisiert. Man weiß nicht, was er gemacht oder nicht gemacht hat. Das heißt, gerade an diesem Foto gab es und gibt es die Möglichkeit, diverse Fragen in Bezug auf die persönliche Ethik und auch die institutionelle Ethik zu stellen.}}}

- 독일 사학자 미하엘 볼프존(Michael Wolffsohn), Deutschlandfunk와의 2018년 인터뷰에서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의 국방군 시절 사진에 대해 평하며.#

물론 독일 국방군도 홀로코스트에 관련되었지만 이들은 무장친위대와 달리, 나치즘이라는 사상 아래 강제로 전쟁에 동원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비교적 가치중립적인 평가를 받는다. 물론 해군선옥론 문서의 '독일의 깨끗한 국방군 신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도 전쟁범죄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비교적 근래까지 독일에서 독일 정규군은 무죄라는 인식은 널리 퍼져 있었으나 1983년을 기점으로 현재는 나아져가는 추세로 대부분 정상적인 독일인들과 대화를 나누어보면 국방군도 전쟁범죄에 관여했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독일에서 국방군 장교의 군모만 장난으로 써도 독일인들의 시선이 거의 경악에 가깝다. 특히 통독이후 인사개편과 역사 재인식과정을 거치면서 국방군 신화를 거의 부인하고 있고 통독 이후 사과에선 '독일인들에 의한' 이라는 문구를 넣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독일의 우경화가 진행되면서 다시 한번 국방군 신화가 고개를 들고 있다. 2차 대전 참전 용사인 독일 노인들을 보면 자신들은 볼셰비즘 러시아와 맞서 유럽을 지킨 것이라며 강변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보상 문제에 대해선 제일 말이 많은데 일괄적으로 파리 조약을 통해 서독 정부의 전쟁배상 처리를 항복 당시 조건에서 완화해주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독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를 비롯한 여러 약소국에는 일체 배상하지 않았고 현재 독일 정부도 공식적으로 배상금 요구에 같은 입장을 고수한다.

하지만 독일의 통일과 유럽 연합 창설 이후 독일 정부는 독일에 부채를 지닌 그리스나 해당 국가들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전쟁 종결일에 특별 부채 탕감이라는 태도로 비공식적 배상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만 여전히 공식적인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독일과 동유럽/남유럽 국가들 사이에 외교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2.1. 독일 연방군의 과거사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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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일 제국 시절 제국주의에 대한 태도

현대 독일은 독일 제국에 대해서도 견해를 어느 정도 밝혔다. 다만 특이한 점은 독일 제국에 관해서는 시대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우선 빌헬름 1세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다스리던 시절의 독일 제국 전반기에 대한 평가는 전반적으로 좋다. 빌헬름 1세는 독일 내에서도 프리드리히 대왕 등과 더불어 칭송받는 군주 중 한 명이며, 비스마르크는 독일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하나이다. 이는 이들이 수 세기 이상 조각난 나라를 통일하고 철천지 원수였던 프랑스를 꺾어 베르사유 궁전에서 통일 제국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빌헬름 2세가 다스리던 제국 후반기 및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다. 빌헬름 2세는 대부분 암군이라고 평가를 하는 군주이며, 특히 빌헬름 2세의 세계 정책, 온갖 외교적 불화,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에 가장 커다란 불씨를 제공한 점은 많은 독일인들이 그를 히틀러 다음으로 혐오하게 만들었다.

한편 독일 정부는 제국주의 역시 타국의 자유와 주권을 박탈하고 영토 확장 논리에 입각한 위험한 사상이라는 공식적인 입장을 유지한다. 따라서 이 입장을 바탕으로 교육과정에서도 독일 통일과 별개로 독일의 제국주의는 엄연히 비난의 대상으로 명시한다.

결론적으로 독일의 제국주의 청산까지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의 경우, 제국주의 문제에 있어서도 역사 수정주의적 태도를 보이려 하지 않고 인식한다는 점을 내세운다.[31] 반면에 독일의 과거사 청산의 진정성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독일의 반성과 사죄는 과거사 청산을 안할 수 없거나 독일 재통일을 위하여 일부러 자세를 낮추어야 하는 최소한의 국가 및 민족에 대해서만 선택적으로 행해진다는 점과 여전히 2차 대전 피해국들과 달리 구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배상을 완강히 거부하는 태도를 들어 비판한다.[32][33] 실제로 상당수 연구에 따르면 현재 독일인들은 과거 독일이 제국으로 군림하던 시기와 오늘날 토고, 나미비아, 부룬디, 탄자니아 지역에서 살인을 저질렀던 데 대한 기억이 거의 없으며[34] 자신들이 제1차 세계 대전 유발국이라는 것에 대해선 베르됭 묘지에서 매년 인정하고 사과함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부는 독일 제국군에 대해서는 나치 독일의 독일 국방군이나 슈츠슈타펠만큼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35]

3.1. 나미비아 학살과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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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비아에 세워진 희생자 추모 동상
한편 과거 식민지로 삼았던 탄자니아, 나미비아아프리카 국가들과 같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아프리카 국가들의 식민지 침략이나 학살과 인권 탄압 등에 대해선 대부분 유럽의 강대국 국가들이 그렇듯 국가간 차원에서 합의된 배상과 사과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따라서 연구에 따르면 현재 독일인들은 과거 독일이 제국으로 군림하던 시기와 오늘날 토고, 나미비아, 부룬디, 탄자니아 지역에서 살인을 저질렀던 데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36]

특히 나미비아 학살과 관련해서는 2004년 하이데마리 비초레크초일 경제협력개발부 장관의 사과가 있었으나, 정부 차원에 담화 수준이 아닌 장관 개인의 말 한마디에 불과했으며, 독일 정부는 이것이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라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37] 이마저도 나미비아 학살 피해자인 헤레로 부족이 미국 법정에 독일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배배상 소송 취하를 요구하면서 언급한 것이었다.[38] 독일 정부는 이렇듯 역사적 과오나 국제법상 국가책임 자체는 인정하되, 본론 격인 구체적 배상문제와 관련하여서는 피해자 측에 대하여 국내외법상 근거를 엄격히 요구하거나 관습 국제법이나 지엽적 절차법의 문제를 들어 강경하게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39]

독일 제국은 1904년 1월12일 나미비아 수도 빈트후크 북쪽 70㎞ 지점의 오카한자에서 헤레로족과 나마족이 일으킨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을 학살했다. 독일의 인권단체 '위협받는 민중을 위한 모임(GfbV)'은 2004년 초 보고서에서 "독일인들이 저지른 최초의 '인종학살'에 의해 약 7만 5천 명이 사망했으며 많은 수가 국외로 탈출해야 했다"고 밝혔다.[40]

2004년에 하이데마리 비초레크초일 독일 경제협력개발부 장관은 독일 제국 시기 자국의 식민지에서 발생한 이 나미비아 학살과 관련하여 "독일은 헤레로 부족에게 특별한 책임이 있다"며 사과를 언급하긴 했지만 독일 정부로부터 '장관 개인의 견해'라고 선이 그어져 '반쪽짜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학살에 관해서도 개별적 배상을 하진 않았고 대신에 나미비아 정부에 대한 경제원조를 해왔지만 자국의 식민지 과거사를 완전히 인정하는 것을 항상 꺼려왔다. 피해자인 헤레로 부족은 명확한 사과와 나미비아 내에서 소수 인종인 자신들에 대한 직접 배상을 요구했는데, 독일 측은 이를 거절했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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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나미비아 정부의 협상에 반대하고 있는 전통 부족 지도자들 수도 윈드호크에서 나미비아 학살에 대한 독일과 나미비아 정부의 합의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는 나미비아 시민들

독일은 2021년 5월 28일, 나미비아 학살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독일은 1990년 나미비아 독립 후 상당한 개발원조를 해왔다는 이유로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다가, 2015년에 들어서야 양국 정부간 논의를 시작했다. 나치 홀로코스트 범죄에 대한 독일의 태도와는 대조적이다.[42]

독일은 사과 성명과 동시에 나미비아에 30년간 11억유로(약 1조 5000억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중 10억 5000만 유로는 나미비아의 농업개혁, 직업교육 등 개발 지원 기금으로 조성되고, 나머지 5000만 유로는 화해재단 설립에 사용된다. 그러나 BBC는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 신중하게 작성된 성명이라며 협상이 학살 인정으로 귀결됐지만, 선언문은 공허하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독일은 나미비아에 대한 금전 지원을 '배상'이 아니라 '지원금'으로 규정했다. 독일은 이번 성명에서 '배상'이나 '법적 책임'이라는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이 개발지원금을 근거로 들어 앞으로 법적 보상금을 청구할 수 없다고 명시했는데 이는 학살 피해자인 오바헤레로족이 독일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고 시도하는 와중에 국가를 상대로한 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못박은 것이다.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만행에 대한 법적 책임도 지지 않고, 피해자나 후손에 대한 직접적인 의무도 지지 않게끔 했다고 보도했다.[43]

피해 당사자들이 참여하지 않은 일방적인 성명 발표였던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독일의 성명이 발표되던 시점에 오바헤레로족 등은 학살 문제에 대한 대응 방안 등을 두고 여전히 부족간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피해 부족들은 모욕적인 액수라며 지원금이 나미비아 집권당인 서남아프리카인민기구(SWAPO)를 지원하기 위해 사용될 것이라고 지적했다.[44] 학살 과정에서 독일은 우물에 독을 풀고, 일부 유골은 실험을 위해 자국으로 반출했다. 하지만 이번 합의에서는 독일 박물관과 도서관 등이 보관 중인 유골 수만점과 예술품 반환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45]

독일이 제공하는 개발 원조금 자체에도 문제가 있는데,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프리카인을 경제적, 기술적 변화를 끌어낼 능력이 부족한 '야만인'으로 취급한 식민지 시대의 인식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개발 원조는 여전히 독일이 아프리카에 대해 가진 우월감의 일환일 수 있으며 그 결과 원조를 받는 자와 주는 자 사이엔 불평등한 관계가 유지된다.[46] 역사학자 위르겐 치머러는 지난 29일 독일 신문 <파사워 노이에 프레세>와의 인터뷰에서 "지원금은 지원하는 쪽을 도덕적으로 우위에 놓게 한다. 반면, 배상은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하는 의무"라고 설명했다.[47] 오바헤레로족과 같은 피해 부족들은 오밤보족이 이끄는 나미비아 정부에게 원조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소수 민족인 자신들에게 직접 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왔으나, 앞서 언급되었듯 독일은 이를 묵살했다.

독일 정부가 나미비아에 대한 사과를 하는 것은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 확대라는 국익상의 목적이 있다. 폴리티코는 독일이 말리에 있는 유엔 평화유지 임무에 원조금을 늘리고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기로 한 데 이어 스스로 나미비아에서의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의 역할을 확대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킴 바그너 런던 퀸메리대학 제국사 교수는 독일과 프랑스의 성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좋을 일이라면서도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진정한 역사에 대한 인식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48]

따라서 독일의 이와 같은 태도는 자국이 천명하듯이 침략이나 식민지배의 과거사와 관련하여 이를 진지하게 성찰, 실천하고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독일의 반성과 사죄는 경제적 이익이나 독일 재통일을 위해 자세를 낮추어야 하는 주요국들에 한해 선택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49]

4. 일본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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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역사관

이 문단은 일본 제국나치 독일에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 제국나치 독일에 함께 대응하는 개념이라는, 즉 대공황 이후부터 1947년까지의 일본이 독일의 파시즘과 흡사한 전체주의 국가라는 설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50]
아프리카 나미비아를 방문 중인 하이데마리 비초랙-초일 독일 대외원조개발부 장관은 13일 독일 대사관에서 나미비아 헤레로 부족 대표들과 만나 "독일은 헤레로 부족에게 특별한 책임이 있다"며 과거 식민 시절 잘못을 사과했다. (...) 그러나 독일 정부는 이 사건이 유대인 학살 및 보상과는 다른 문제라고 이를 반박하면서 공식 사과와 보상 요구를 거부해왔다.
1백년전 잔혹한 식민통치 역사에 시달리는 독일
정리하건대, 독일의 위와 같은 성명은 자국이 천명하듯이 침략이나 식민지배의 과거사와 관련하여 이를 진지하게 성찰, 실천하고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즉, 기존에 독일이 구축한 전향적인 국제적 이미지도 사죄하고 청산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거나 독일 통일을 위하여 자세를 낮추어야 하는 최소한의 대상 국가 및 민족에 대해서만 선택적으로 구축하였다는 인상을 불식시키기 어렵다.
독일의 전후 배상 실행에 관한 최신 연구: 나미비아 등 구 식민지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에서는 과거사 문제를 깔끔하게 청산했다는 이미지로 인해, 각종 한국 매체에서 일본의 태도를 비판할 때 모범 답안으로 독일이 자주 제시된다. 그러나 후술되어 있듯 독일의 과거사 청산을 자세히 보면 대중들의 인식과 다른 부분이 상당히 많다.

위에서 언급했듯, 독일이 나치즘을 흑역사로 여기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일본군 위안부 등의 전쟁범죄와 가미카제, 가이텐 등 인명 경시는 분명하게 흑역사로 여기고 있다.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과 별개로 난징 대학살이 존재하였다는 점은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이다. 또한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에서 위안부가 일본인을 제외하면 한국인이 많았다는 점, 당사자들의 의사에 반하여 행해졌다는 점, 군의 관여 하에서 존엄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는 점,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영되었다는 점, 위안소의 설치와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하여 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을 공식적으로는 인정하고 사과했다.[51]

아시아 각국이 피해를 입은 전쟁범죄들에 대해서는 무라야마 담화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즉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일어난 반인륜 범죄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도 독일 정부도 모두 공식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한다. 그리고 일본은 간 담화를 통하여 한일병합이 한국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사과하였다. 문제는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생전에 이런 담화들을 표면적으로만 계승하는 척 하기 급급했으며, 후임자인 스가 요시히데 역시 극우는 아니지만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는 점이다. 2020년대에 들어 자민당 내 온건파인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집권한 이후로는 일본 극우를 비롯한 역사왜곡 세력의 영향력이 많이 약해졌지만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닌데, 2023년 3월 윤석열 대통령이 방일했을 때 일본의 진보 정당 입헌민주당의 대표 이즈미 겐타초계기 문제평화의 소녀상 관련한 질문을 했다고 하는데, 입헌민주당은 소녀상 철거를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단순한 식민주의 문제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이었던 일본 제국의 명백한 전쟁범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국인 입장에서 좋게 보기는 어렵다. 독일은 기민련 등 주류 보수주의 정당들도 나치의 전쟁범죄에 대해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자국의 만행을 대하는 양국의 태도를 비교하자면, 독일은 나치 독일 때 벌어진 잔혹한 행위들을 숨기지 않고 낱낱이 자세히 밝히며 어떠한 변명 없이 자신들의 잘못이라는 점을 분명하고 철저하게 교육한다.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 행위에 대해 언급을 하긴 하지만 비교적 성의없이 넘어가며 잘못에 대한 가치판단은 잘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원폭 투하 등 자국 피해에 대해서는 굉장히 자세하게 가르침으로써 은근슬쩍 피해자인 듯한 뉘앙스를 강하게 띄우는 편이다.

또한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자신들이 제국주의 시절 저질렀던 악행을 인정한 것과는 별개로 일본의 극우 성향 정치인들이 과거 만행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는 등 제도권 차원에서의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도 독일과의 차이점이다. 독일은 일부 네오나치의 테러나 폭력은 있을지언정 적어도 제도권에 속한 유력 정치인이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나치의 만행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독일은 매년 공식적 인정과 사과를 반복하며 체코를 침략한 날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일인 9월 1일, 그리고 종전날인 5월 4일 연속적으로 전쟁범죄에 대해 사과를 하고 있으며 9월 1일엔 아예 공식적 행사에선 전쟁으로 인해 학살된 무고한 타국 국민들에게 묵념하는 의식을 치른다. 또한 2018년 9월 1일 독일-폴란드 친선경기에서 일부 독일 관중들이 나치의 공식 구호인 Sieg Heil을 외치자 선수단이 국민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공식적인 규탄성명을 냈다.

심지어 독일 국방군마저도 나쁜 것은 모조리 나치 친위대가 한 짓이라며 미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민간 차원에서 볼 경우 옛 일본군에 대한 현 일본인들의 생각처럼, '나라를 위해 싸운 젊은이들'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며, 전체주의 등의 사상과는 선을 그으려 하는 시선이 전후 직후에 강했으나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어린나이에 목격한 세대와 그들로부터 그 참혹함을 직접 들은 세대가 주류가 된 1980~90년대에는 청중년층을 중심으로 국방군 미화 시선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을 표현했고 국방군 무오설의 최초 독일인 신고자도 바로 1982년에 나왔다. 더 나아가 1983년부턴 국방군 무오설의 대표주자 롬멜 신화에도 정면적 도전이 이루어졌고 아예 1999년에는 롬멜 박물관 예산 삭감, 2000년에는 베를린시청 롬멜공적비를 철거했으며 통일 후 공식 교육과정을 비롯한 모든 입장에서 독일국방군의 범죄까지 함께 중요 교육과정으로 포함하며 중등교육과정이상에서 반드시 독일인들의 만행이라는 주제로 독일국방군의 죄목도 명백히 인정한다. 또한 현재 독일 국방부 제2차 세계 대전 백서를 비롯해서 연방군 교육지침에 국방군 전통 계승을 부인하며 범죄 참여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과 어느정도 선을 그어두려고 노력하며 연방군 내부에서 극우 사상에 상당히 민감하게 대응한다. 민간 차원에서 위에 지적된 관점의 경우 팽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앞의 전제 조건이 따로 있었다. 국가사회주의라는 어리석은 사상에 물들어 정의롭지 못한 국가를 위해 어리석게 목숨을 던져 싸운 젊은이들이라는 게 상당수의 입장이고 민간차원에서 이러한 생각을 기반으로 어찌하여 저렇게 어리석게 목숨을 버렸을까 하는 동정적 시각이 오히려 더 다수이다. 하지만 전쟁 당시 생존했던 이들과 국방군 출신 장교들이 제창한 국방군 무오설이 극우 성향이 강한 구 동독 지역에서 다시 등장하는 것이 현 독일의 사회 문제이다.

종합하면 2차 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분명 독일이 일본보다 더욱 전향적이며 국방군의 역시 나치와 완전하게 선을 긋는 게 불가능하기에 독일 내에서도 자정 작용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독일 제국 시절 저질렀던 제국주의적 만행으로 시선을 돌리자면 이들에 대한 독일인의 관점은 결코 모범 답안이라고 볼 수 없다. 독일에서는 독일 제국군은 그저 사상적 문제가 없는 평범한 독일군이라는 입장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계속 강조되지만, 이 문서는 제국주의 시절 일본군은 독일 제국군독일 국방군에 함께 대응한다는 관점을 채택하므로, 당연히 독일 제국군에 대한 현 독일인들의 관점 역시 거론할 수 밖에 없다.

독일은 과거사를 철저히 반성했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독일이 과거 식민지배 피해국에게 지원한 경제적 원조는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독립 축하금 및 경제 협력 발전 자금보다 미비하며 독일이 식민지에 배상한 사과는 한국이 일본 총리들에게 받아낸 담화만도 못한 수준이다. 독일은 자신을 패망하게 만든 미영소 등 주요 연합국, 폴란드등 주변 피해국, 그리고 유대인의 모국 이스라엘에는 전향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자신들이 침략하여 지배한 식민지집시에 대한 사과는 미비한 수준이다. 또한 독일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이웃나라 폴란드를 상대로 한 사죄 및 배상 역시 나치 독일로서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한정되어 있고, 독일 제국 시절 폴란드를 식민지배하고 수탈한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

헤레로 부족과 국제 인권단체와 역사가들은 유대인 대학살보다 훨씬 앞서 일어난 `독일인에 의한 최초의 인종 대량학살'인 이 사건이 제대로 조명받거나 정당한 보상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유대인 피해자들이 홀로코스트 배상금을 받은 것처럼 오바헤레로족과 나마족 역시 같은 처우를 받는 방법 역시 고심 중이다.[52]

다만 이문제에 대해 좀더 언급하자면 독일에 대한 서구인들의 비판은 2차 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으로서의 역사와 전쟁 발발의 기반이 된 전체주의, 군국주의, 인종주의 등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식민지를 착취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옛 추축국들의 과거사 반성과 달리 제국주의 문제는 '그때는 외국도 그랬음'이라는 식으로 구 열강들이 어영부영 넘어가는 편이다.

달리 보면 제국주의는 당시 대세였고 현 중국 정도를 제외한 현 강대국들의 상당수는 제국주의 국가였던 만큼 파시즘처럼 독일, 이탈리아, 일본 이렇게 소수 국가에 특정할 수 없다.[53] 현 강대국들은 거의 모두 공범이고 오히려 추축국보다 연합국의 제국주의적 횡포가 더욱 심했던 만큼 독일도 어영부영 넘어갈 수 있다.[54] 실제로 서양 국가들도 나치 청산에만 날카롭고 제국주의는 자신들의 죄과가 더욱 심하기에 언급하지 않는 편이다.[55]

또한 독일이 그나마 제국주의 자체에는 공식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일례로 빌헬름 카이저 과학연구소는 제국주의 사상이 이름에 반영되었다는 이유로 영구 사용금지 처분되었고 현재 막스플랑크 과학연구소로 개명되었다. 이처럼 독일은 다른 열강 국가들과 달리 자신들이 저지른 제국주의적 만행에 대해서 문제 의식 정도는 가진다. 또한 독일 공식 교육과정에서도 '제국주의는 힘으로 힘없는 국가의 자유를 박탈하고 그들의 국민에게 합법적으로 자유를 박탈하고 노동력을 착취할 권리를 가지게 하는 사상으로 우리 독일의 제국주의로 많은 식민지인들이 상처를 입었다'라고 명시하며 칭다오나 아프리카 침략 당시 악행에 대해서도 교육한다. 물론 배상 문제엔 '영국이나 프랑스도 안했는데 우리가 왜?'라는 입장을 은근슬쩍 드러내고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타 열강들과 크게 다르진 않지만 어찌되었든 이 문제는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추축국, 연합국, 중립국 할 것 없이 제국주의를 펼친 서유럽 열강들과 일본, 미국, 러시아 모두가 반성할 문제이다.

다만 독일도 난민 문제 등을 계기로 이를 부정하려는 세력이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56] 사실 이 문제는 2010년대 중후반 이후 기준으로 난민 문제 때문에 전 유럽이 우경화[57]되고 있는 것의 흐름 중 하나이다. 독일의 경우 일본과는 달리 나치라는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 뿐이지 옛 군대에 대한 태도를 거론하자면 이 문서에서는 일본군이 독일 제국군과 독일 국방군에 함께 대응한다는 관점을 채택하고 있으므로 독일이 잘 청산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 독일 교육과정이라든가 공식 정부 입장에선 국방군 무오설 같은 것도 일제 부인하고 있고 전쟁이란 그 자체로 독일인들이 무고한 민간인들과 타 국민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입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군국주의 및 전쟁범죄의 역사에 관련해서 일본에 비해 훨씬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렇기에 종합적으로 봤을 때 2차 대전기 벌어진 전체주의, 군국주의적 만행에 대해서는 일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58] 등 구 추축국보다 훨씬 잘된 편이고, 식민지 수탈을 비롯한 제국주의적 악행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는 영국, 프랑스 등 구 열강과 다를게 별로 없다.

4.2. 영토 문제

영토 문제에 있어서는 전후 독일이 일본보다 확실히 전향적이다. 여전히 패전으로 상실한 독도와 남쿠릴 열도를 놓고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과 달리,[59][60] 독일은 2차 대전으로 폴란드와 러시아에 상실한 영토의 영유권을 소련과 폴란드가 독일의 재통일을 승인하는 대가로 포기했다. 물론 이는 정치적 이유로 이루어진 결정이었고 개인 차원의 반발 역시 컸지만 일단 더 이상 국가 차원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61][62]

특히 일본은 본토가 아니라 19세기 후반 이후 점령한 식민지를 도로 뺏긴 것에 불과하지만 독일은 역사적 문제가 있을지언정 본토를 대거 빼앗겼음에도[63] 그리고 제1,2차 세계 대전의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에 현대 독일은 주변국들을 대상으로 영토 분쟁을 유발하진 않는다. 오히려 독일은 신뢰 관계를 회복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유럽 권역의 실질적인 리더로서 주변국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한편 실제 독일이 공식적으로 구 동부 영토에 대한 영구 포기를 선언했을 때 이를 인정하는 태도가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팽배했다.[64] 이는 당시 동부전선에서 정말 많은 독일군이 죽었고 독일인들이 전면 추방당한지 45년의 시간이 지났으며 독일의 재통일을 승인받기 위해서는 구 동부 영토에 대한 미련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을 다수의 독일인들 역시 인지했기 때문이다.

[출처1] 알렉산너 렌너, 최광준, <한국과 독일의 과거청산과 기억문화>[출처2] 알렉산너 렌너, 최광준, <한국과 독일의 과거청산과 기억문화>[3] 바이츠제커는 이스라엘을 방문한 최초의 독일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았다.[4] 실제로 독일 제국 시절 아프리카 식민 지배 피해국들이나 똑같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게 피해를 입었던 거리가 먼 유럽의 전쟁 피해국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일례로 2016년과 2018년, 2023년에 독일 제국 시기 나미비아에서 저지른 헤레로족 학살과 탄자니아에서 저지른 무분가, 응긴도족에 대한 학살,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의 그리스인 학살 사건에 대해 독일 정부가 피해국가인 나미비아와 탄자니아, 그리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으나 배상만큼은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5] 루돌프 쇤펠더는 1944년 7월 31일 노르망디에서 전사했다.[6] 1942년 친위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자 나치 독일이 보복 학살을 벌였던 마을이다.[7] 사진 속 여성이다. 앞의 아기는 어린 시절의 작가 본인.[8] 친위대 의사 카를 브란트에게서 따온 작전명이다.[9] 그림 아래에는 "1959년 11월, 법원에 출두하는 베르너 하이데(Werner Heyde im November 1959, als er sich den Behörden stellte.)"라고 적혀 있다.[출처3] 김승호. (2020).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가의 책무 -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가족초상화시리즈>(1965)를 중심으로 -. 석당논총, 76, 5-36.[11] 원제는 '독일의 한 작가'. 국내에는 도서출판 한울을 통해 번역 출판되었다.[12] 2018년작. 국내에는 2020년에 개봉했다. 도너스마르크 감독은 동독 독재정권의 감시를 그린 영화 타인의 삶의 감독으로 유명하다.[13] 지난 1997년, '국방군 전시회(Wehrmachtsausstellung)'가 촉발한 독일 사회의 갈등을 보여주는 슈피겔 방송. 1995년에 함부르크사회조사연구소가 주최한 국방군 전시회는 나치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를 조명하고, 그들 또한 히틀러의 절멸전쟁(Vernichtungskrieg)에 적극 기여했음을 보여 주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많은 독일인들은 국방군은 전쟁 범죄나 홀로코스트와 무관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 전시회는 그러한 시각을 뒤바꾼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믿는 많은 수의 참전용사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국방군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분개하였으며, 거리로 나와 해당 전시회에 대한 보이콧 운동을 벌였다. 그러자 안티파 또한 맞불 집회를 벌여 이에 맞섰다.[14] 슈피겔의 기사로부터 7년이 지났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히틀러와 하켄크로이츠에 대한 명확한 언급 없이는 경찰이 개입할 수 없다"라는 기사의 마지막 부분대로 현지 경찰은 이 문제를 방치한다.[15] 독일 입장에서도 EU를 바탕으로 온 유럽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현 상황이 영토나 이념 문제로 얼굴 붉히며 스스로의 외교적 입지를 깎아먹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지이다.[16] "독일국방군". 볼프람 베테 지음.[17] 한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도 독일 여행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경고한다. 아예 이 사항에 대해서는 언급조차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언급했듯 팔만 잘못 올려도 바로 잡아간다. 그래서 독일의 축구 응원이나 콘서트 응원 영상을 보면 관객들이 절대로 한 팔만 앞으로 뻗어서 응원하지 않는다. 두 손을 들거나, 팔을 위로 쭉 드는 등으로 응원한다.[18]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의 제주도 편에서 독일 친구들에게 멕시코 친구들이 국기를 가져오지 않았냐고 묻자, 독일 친구 다니엘이 ‘독일이 국기를 들고 오는 건 그렇게 좋지 않지’라고 말했다.[19] 이탤릭체 부분은 인터뷰어 클로드 란츠만의 대사이다.[20]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했으며 유대인 학살에 직접 가스를 주입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반성치 못하고 유대인 여성들을 죽인 걸 무용담처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던 인물이다. 3년만에 석방되어 천수를 누리다 1991년 3월 29일 다름슈타트에서 사망했다.[21] 한편 1949년 서독이 사형제를 폐지한 이유도 인권 보호 국가로의 지향보다는 수많은 나치 전범들을 구제하기 위함이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실제 서독은 사형제 폐지를 명분삼아 1950년대까지 미국, 영국이 자국에서 전범들을 처형한 것에 항의했다.[22] 연방군 창립을 결의한 1950년의 힘머로트 회의 당시 참여한 15인의 정부 인사들 중 겔렌 조직 소속이 5명이었다. 연방군의 초대 대장이 되는 아돌프 호이징거한스 슈파이델 역시 겔렌 조직 일원으로 당시 회의에 참여했다.[23] 참고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원인도 단치히를 독일에게 넘기라는 구실이었으니 폴란드를 비롯한 주변국들도 현 폴란드 영토 반환 자체를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24] 추축국의 피해를 입은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마저도 피해자 행세로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독일 정부의 수장이 자국민이 겪은 피해를 정당하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일이다. 독일은 과거 나치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을 하기 때문에 자국민을 위한 이러한 발언마저 피해자 행세라고 비난하기는 어렵다.[25] 이들도 화학무기를 선방쳤고 벨기에의 강간 등 전쟁범죄를 벌였지만 협상국 역시 화학무기를 썼기에 어느 정도 참작된다.[26] 간혹 서양인들이 당해서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아예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무언가를 얻기 위한 부수적인 수단으로서의 학살은 항상 있었지만, 살인 공장을 돌리고 지역별로 세세하게 학살할 인구 비율을 계산하는 등 최종 목적으로서의 학살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기에 20세기 초중반 기준으로도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운 발상이었다. 특히 ‘유럽 문명의 정수’였던 독일이 이러한 잔혹한 행위를 벌였다는 사실은 큰 충격을 불러왔다.[27] 2차 대전의 전체 사망자 가운데 2/3 정도가 유럽 방면에서 나왔고 이는 모조리 나치 독일로부터 시작된 참사였다.[28] 게다가 독일은 상임이사국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두 번이나 전쟁을 일으킨 경험이 있는 독일은 필사적으로 전쟁을 다시 일으킬 의사가 없다는 것을 어필해야 하는 처지이다.[29] 참고로 이 관점에서 보면 일본과 독일의 역사에 대하는 서로 다른 태도가 설명된다. 우선 일본의 정계 자체도 2차 대전 때와의 연속성이 독일보다 훨씬 강하게 나타나기에 완전히 부정하기에 여의치 않다. 게다가 일본은 근본적으로 섬나라에 중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있어서 어차피 지역 패권을 틀어쥐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굳이 독일처럼 주변국들의 눈치를 볼 입장이 아니다.[30] 그러나 전차 에이스 미하엘 비트만SS 소속이어서 전과가 삭제되었다.[31] 일례로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는 자신들의 악행을 인정했지만 은근슬쩍 과거 제국주의적 행태를 미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과 달리 독일 정부는 후술되어 있듯 빌헬름 카이저 과학연구소라는 명칭이 제국주의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금지하는 등 제국주의 자체를 미화하지는 않으며, 나비미아 학살에 대해서도 정부가 역사 수정주의적 태도를 보인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같은 서구 열강인 영국, 프랑스 등이 여전히 제국주의의 성격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는 것과 달리 독일은 제국주의조차도 ‘상대악’ 정도로 규정하여 일단 그 부정적인 성격을 인지한다.[32] 일본의 경우 비록 ‘독립 축하금’이라는 명칭으로 인해 논란은 있으며 그 독립축하금의 절반 이상이 ‘유상 차관’이었다는 한계도 명백하나 어쨌거나 상당한 액수의 배상금을 한국에 지원한 바 있다. 반면 독일은 나미비아 등 구 독일의 식민지에 대해 어느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에 행하는 경제 지원 이상의 배상을 지급한 바도 없다. 따라서 ‘구 식민지 출신 국가에 대한 금전적인 배상’이란 측면만 놓고 보면 독일이 일본보다도 못한 것은 맞다. 다만 일본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협력이 필수불가결한 이웃 국가 한국과 달리 독일은 나미비아와 멀리 떨어져 있어 관계 복원에 전혀 절실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일본의 배상이 자발적인 성격이라기보단 미국의 압박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33] 한편으로 이는 독일 뿐 아니라 유럽의 구 열강들이 처한 공통의 문제이다. 일례로 프랑스의 경우 아이티를 독립시킨 이후에도 아이티에 인프라 건설을 빌미로 2차 대전 이후까지 한 세기 이상 배상금을 뜯어냈다. 다만 독일은 1차 대전 패전에 따라 식민지를 잃게 되어 이러한 조치를 취할 여지조차 없었다는 점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34] 나미비아 대학살: 독일이 여전히 비판 받는 이유[35] 후술하듯 사실 국방군에 대한 재인식 역시 1980년대 무렵에 들어서야 등장했다. 그 이전까지는 독일 국방군은 나치 정권과 별개의 집단이며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했을 뿐 나치의 전쟁범죄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다는 것이 대다수 독일인들의 시각이었으며 서방국들 역시 냉전이라는 상황 속에서 서독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국방군 문제를 걸고 넘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를 시작으로 나치즘 협조자로서의 국방군의 성격이 사회 전반적으로 부각되었고 21세기 현재에는 독일인들도 국방군의 이러한 면모를 인지한다. 다만 독일 정부는 국방군과 현대 독일군의 계승성 역시 부정하진 않는다.[36] 나미비아 대학살: 독일이 여전히 비판 받는 이유[37] 헤레로 전쟁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다원적 관점의 독일 식민주의 역사교육[38] 1백년전 잔혹한 식민통치 역사에 시달리는 독일[39] 독일의 전후 배상 실행에 관한 최신 연구: 나미비아 등 구 식민지 지역을 중심으로[40] 1백년전 잔혹한 식민통치 역사에 시달리는 독일[41] 1백년전 잔혹한 식민통치 역사에 시달리는 독일, 나미비아 대학살: 독일이 여전히 비판 받는 이유[42] 아프리카 향한 독일·프랑스의 잇딴 사과, 그러나 청구권은 없다?[43] 아프리카 향한 독일·프랑스의 잇딴 사과, 그러나 청구권은 없다?[44] 나미비아는 1990년 독립 이후 오밤보족이 이끄는 SWAPO가 줄곧 집권했고, 여타 부족들은 소외됐다.[45] 아프리카 향한 독일·프랑스의 잇딴 사과, 그러나 청구권은 없다?[46] 나미비아 대학살: 독일이 여전히 비판 받는 이유[47] 독일, 1조5천억원으로 학살 사과 나미비아 “우리 존재에 대한 모욕”[48] 아프리카 향한 독일·프랑스의 잇딴 사과, 그러나 청구권은 없다?[49] 독일의 전후 배상 실행에 관한 최신 연구: 나미비아 등 구 식민지 지역을 중심으로[50] 심지어 일각에서는 일본 제국과 일본군이 각각 독일 제국, 독일 제국군에만 대응한다고 보는 관점 역시 병렬적으로 존재하며, 이 관점을 채택할 경우에는 애초에 나치 독일과 일본의 비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천황제 파시즘 항목 참조.[51] 일단 공식적인 차원에서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 등을 계승한다는 태도이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공식 차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극우 정치인들은 UN에 강제 연행은 없었다는 망언을 내뱉으면서 고노 담화의 내용을 전면으로 뒤집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인다.[52] 1백년전 잔혹한 식민통치 역사에 시달리는 독일나미비아 대학살: 독일이 여전히 비판 받는 이유[53] 다만 현 중국은 티베트, 위구르 등 소수 민족들이나 동아시아동남아시아에 위치한 주변국들을 향해 신제국주의적인 행보를 보인다는 비판에 직면한다.[54] 독일은 아프리카 일부와 아시아/태평양 몇몇 지역, 일본은 조선/대만/중국 동부 해안가 등 인접 지역,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에티오피아 등 한정적인 지역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제국주의를 펼친 반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은 더욱 광범위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제국주의 질서를 구축했다.[55] 영국, 프랑스 외에도 타 서유럽 국가 역시 이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벨기에는 콩고인들을 무참히 학살했고 네덜란드 역시 나치에서 해방되지 얼마 안되어 자국 재건용으로 지원받은 마셜플랜 자금을 인도네시아 재정복에 사용하려 하였고 수년간 인도네시아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또한 포르투갈은 1960년대에 인도가 고아 지방에 대한 반환을 요구했을 당시 자국의 힘으로 식민지를 지키지 못할 처지가 되자 나토에 인도로부터 고아를 지켜달라고 탄원했다. 이렇듯 제국주의, 식민주의 담론에 있어서는 서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원죄를 가지고 있으며 연합국의 제국주의가 더욱 규모가 크고 심했다.[56] #[57] 이탈리아는 무솔리니 손녀가 상원의원을 하고 있고 프랑스에서는 마린 르펜 같은 인사가 세를 불리고 있으며 영국도 결국 난민과 이민자 배척 흐름에서 파생된 브렉시트가 통과되었다. 이에 대해 유럽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크며 현 흐름에는 독일 정치가 그나마 제일 전향적이라고 평가받는다.[58] 이탈리아도 파시즘 청산이 비교적 부실한 편인데 우익~극우 이탈리아의 형제들에 소속된 현 총리뿐 아니라 중도우파 포르차 이탈리아 소속인 전 총리조차 무솔리니를 옹호 발언을 하고, 무솔리니 손녀중도우파 정당의 의원까지 하는 나라이다. 다만 이탈리아의 경우 거듭된 졸전과 이른 항복 및 비교적 경미한 전쟁범죄 등의 이유로 세계적으로도 존재감이 약하며 일본의 난징 대학살, 종군 위안부나 독일의 홀로코스트처럼 추축군 시기에 자국이 자행한 악행들이 거론되지 못하고 있다.[59] 일본은 중국, 대만과도 센가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놓고 대립 중이지만 독도나 남쿠릴 열도와는 달리 센가쿠는 현재 일본이 실효지배 중인 영토이다.[60] 다만 독도를 패전으로 상실했다는 서술도 일본 측의 입장이 반영된 일방적인 관점이며 한국의 입장에서 독도 탈환은 어디까지나 독립에 따른 주권 회복의 일환이었다. 러일전쟁 과정에서 독도가 일본에 강제 편입될 당시 대한제국은 클레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도가 아니라 나라 전체가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었기에 독도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실제로도 6년 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61] 이는 독일의 경우 일부 영토의 상실은 물론 남은 국토조차도 동서로 분단되는 등 일본보다 더 불리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몰락작전이 실행되기 전에 항복했기에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영토를 뜯긴 상황과 더욱 비슷하다.[62] 다만 소련의 압력으로 오데르-나이세 선을 즉각 인정한 동독과 달리 서독은 1970년대 할슈타인 원칙 폐기 전까지 동독은 물론 동방 영토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끊임없이 했으며 70년대 이후에도 외교 문제에서 이를 걸고 넘어지지 않았을 뿐 여전히 영유권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굽히진 않았다. 독일의 구 동부 영토에 대한 포기는 1990년 독일 통일 시점에야 이루어지는데 2차 대전 승전국들이 이를 인정해야만 통일을 허락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63] 1914년 면적 대비 1/3, 1937년 면적 대비 약 1/4 가량을 잃었다. 일례로 동프로이센포메른의 경우 주요 곡창지대였으며, 포메른의 주도 슈테틴은 수도 베를린의 외항이라는 핵심적인 기능을 갖춘 도시였다. 또한 슐레지엔루르 공업 지대 다음으로 산업이 발달한 경제 중심지였으며 주도 브레슬라우 역시 전전 독일 내에서 7~9위권에 해당하는 주요 대도시였다. 반면 일본이 걸고 넘어지는 남쿠릴 열도와 독도는 각각 18~19세기, 20세기에 들어서 점유한 만큼 일본 고유의 영토와는 거리가 멀고 상징성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전전 일본 경제에서 중요한 지역도 아니었다. 이렇듯 역사적 연고권, 면적, 경제력, 전전 인구 등 여러 기준에서 독일이 상실한 구 동부 영토의 가치는 일본이 상실한 독도, 남쿠릴 열도와 비교되지 않는다.[64] 주로 구 동방영토에서 이주해온 실향민 출신과 현 독일 본토 출신 독일 국민들 사이에 의견이 많이 갈렸는데 구 동방영토의 실향민 출신들은 독일 정부가 자신들을 배신했다며 격렬하게 비난했고, 현 독일 본토 지역에서 태어나 구 동부 영토에 관심이나 연고권이 없었던 독일 본토 출신의 독일 국민들은 이제 포기하고 현 영토를 수호하는 입장을 가닥을 잡아야 한다며 입장이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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