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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전용. 본 공공시설과 토지는 백인만 사용하도록 지정되었습니다. 백인 전용임을 알리는 표지판. 위가 영어 표기, 밑이 아프리칸스어 표기. |
남아프리카 연방 시절부터 사용되었던 아파르트헤이트 시행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기. 아파르트헤이트를 의도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현재 남아공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 시기의 상징으로 여겨져 교육 및 연구 이외의 사용이 일절 금지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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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2]는 아프리칸스어로 분리, 격리를 뜻하며 냉전 시기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당 정권이 실시한 인종차별 정책을 말한다.
인종 간의 실질적인 신분제도를 설정한 정책으로 "백인과 흑인을 격리하는 것과 차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라는 논리에서 시작했지만[3] 그 본질은 차별을 위한 정책이었다. 말이 분리지 유색인이 이용하는 시설들은 늘 백인들이 쓰는 것보다 열악하고 비위생적이었던 게 현실이었다. 여하튼 이 정책으로 인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이 정책을 실시, 고수하던 1960년대에서 1970~80년대까지 바로 이웃한 국가이자 모국과 똑같이 소수의 유럽계 백인 이주민의 후손들이 정권을 차지하며 다수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억누르던 로디지아와 함께 국제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척받아 고립되었다.
남아공의 노벨상 수상자 9명 가운데 6명[4]의 수상 이유가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5]되어 있는 것이나 앙골라 내전 당시 미국과 중국의 개입을 전 세계가 비난한 이유가 '타국에 대한 무단 침공'이나 '대학살' 따위가 아니라 '남아공과의 협력' 그 자체라는 것을 보면 아파르트헤이트와 그를 행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당시 세계의 인식을 알 수 있다.[6]
2. 배경
17세기 케이프 식민지가 성립하면서 네덜란드인들이 남아프리카에 이주해 왔다.[7] 이들의 후손들이 '보어인' 또는 '아프리카너'라고 불리는 사람들로 아파르트헤이트를 주도했다. 이들은 아프리카 토착 백인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굴러온 돌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다수의 흑인 민족들에게 영토와 재산을 빼앗기고 흑백혼혈로 피가 더럽혀져 흑인들에게 흡수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 수적 열세에 따른 공포감을 항시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곧 아파르트헤이트의 근원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아프리카너들의 움직임은 남아프리카 연방 성립(1910년) 이후 남아프리카 국민당의 결성, 그리고 국민당의 1948년 집권 이후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실시, 영연방 탈퇴와 공화국 수립(1961년)으로 이어진다.'보어'는 네덜란드어로 '농부'를 뜻한다. 이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어인들은 1652년 얀 판리베이크(Jan van Riebeeck)가 데리고 온 네덜란드 농부들로부터 시작해 칼뱅교도들과 프랑스계 위그노들, 그리고 주류 종교에 탄압받던 여러 개신교 신자인 백인들이 종교 활동의 자유를 찾아 지금의 남아공 지역으로 옮겨간 사람들로 구성되었다.[8] 후술할 다니얼 프란수아 말란(Daniel François Malan)도 이름에서 딱 알 수 있듯이 위그노 프랑스인이었다. 일반적으로 '남아공에서 몇 세대 이상 산 백인이고 문화적으로는 칼뱅파 개신교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비앵글로계이고 혈통과 상관없이 모국어로 아프리칸스어를 쓰는 사람들'을 아프리카너라고 한다면 크게 틀리지 않다. 이들에 대해서는 보어인 항목을 참고할 것.
이들이 서슴없이 인종차별적 정책을 감행할 수 있던 배경에는 이주하면서 같이 들여온 개혁교회[9]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당연히 네덜란드 본토와 비교하면 매우 보수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성향을 띄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 측은 아프리카너들을 내다 버린 꼴통 자식, 반대 방향으로는 믿음의 배신자 정도로 서로 적대시했기 때문에 남아공 아프리카너들이 네덜란드에 대하여 느끼는 유대감은 다른 영연방 국가들이었던 호주나 캐나다, 뉴질랜드의 백인계 국민들이 식민지배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에게 가진 우호적인 감정보다 훨씬 더 약하고 그 연결점도 느슨하였다.[10]
3. 정립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용어는 1917년에 얀 스뮈츠(후에 총리)가 한 연설에서 처음 등장하지만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 분리라는 개념은 영국 식민지였던 19세기 말부터 존재했다. 케이프와 나탈에서 실시된 통행법(pass law)은 백인과 유색 인종의 거주 구역으로 흑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 차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호주와 누벨칼레도니에도 비슷한 법률이 있었다. 이러한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상황은 1년간 체류했던 간디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의 비폭력 저항은 남아프리카에서 처음 전개되었다.이러한 정책은 1910년대 들어 남아프리카 연방 정부 하에서 이를 법제화하는 한편[11] 원주민 토지법을 제정하여 흑인들에게 토지 거래권을 박탈하는 법을 통과시켰으나 영국계의 이익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치고 1922년 백인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을 강경 진압하면서 1924년 총선에서 보어인들이 주축이 된 국민당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본래 국민당은 1915년 제임스 배리 뮈닉 헤르초흐에 의해 창당되었다. 당시만 해도 임금법(1925년), 연금법(1927년)등으로 백인 노동자와 농민들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진보적'인 정책을 취했지만 백인과 타 인종 간의 혼혈(컬러드)이 나오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풍기문란법을 제정했다. 그러다가 경제 대공황이 닥치고 나서 1933년 들어 얀 스뮈츠의 남아프리카 당과 기존 집권당인 국민당이 연립 정권을 구성했고 1934년에 연합당으로 합당되었다. 그러나 다니얼 프란수아 말란을 비롯해 국민당 내에서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한 계파가 탈당하면서 순수 국민당을 설립했다. 이후에도 흑인 유권자들은 별도의 의원에게만 투표를 할 수 있게 하는 차별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얀 스뮈츠가 다시 총리가 된 후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해 남아공 경제가 급부상하면서 백인들의 빈곤률이 급감하고 그동안 갖은 차별을 당했던 흑인들의 사회 진출도 활발해지며 인종차별에 대한 반발이 격화되었고 이에 얀 스뮈츠 정권은 인종차별 정책을 완화했으나[12] 완화 정도가 낮아서 흑인들의 불만을 샀고 아프리카너들에게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면서 헤르초흐계가 아프리카너 당으로 떨어져나갔고 보어인의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다.[13]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자치령이었던 남아프리카 연방[14]은 많은 수의 백인 남성을 북아프리카와 유럽 전선에 영국군의 일원으로 보냈는데 그들의 부재로 당시 남아공 내의 산업에 흑인, 특히 흑인 여성들이 빈 자리를 채우고 그들의 경제적 기여도가 높아져 감에 따라 권리 향상을 위한 요구도 높아져 갔다.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백인 병사들의 일자리와 백인 위주의 질서가 위협당한다고 느낀 당시 남아공의 백인들은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치러진 1948년 총선거에서 국민당은 컬러드와 영국계가 많이 살던 도시 지역에서는 당시 집권당인 연합당에 밀렸지만, 반대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농촌 지방에서 압승을 거두어 득표율에서 11.5%나 밀렸음에도(49.2% VS 37.7%) 연합당을 5석 차(70석 vs 65석)로 누르면서 기어이 승리했고 아프리카너 당과 연립정권을 수립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실시가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즉, 당시 남아공 주민의 4/5에게 헬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15] 널리 알려진 아파르트헤이트 개념을 주창한 베르너 아이젤렌은 인종 분리와 백인 우위가 그때까지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주장했다. 1948년에는 정치적 분할 정책으로서의 아파르트헤이트는 완전한 인종 분리에 비해 유리한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즉, 흑인과 백인이 하나의 국가의 한 국민으로 묶여 있는 한 소수 백인에 의한 지속적인 흑인 분리 및 통제는 비용이 많이 들고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에 백인 국가와 흑인 국가로 분할해 버리자는 것이다. 이 두 정책은 정치적 분할(대(大) 아파르트헤이트)과 인종 분리(소(小) 아파르트헤이트)로 구분되고 있다.
아무튼 위 과정을 통해 1948년 성립한 말란 내각은 인종간 혼인 금지법(Anti-miscegenation laws , 1949), 부도덕법(Immorality Act, 흑백간 성관계 금지)(1950)[16], 인종별 시설 분리법 제정, 통행법 강화를 통해 아파르트헤이트를 강화시켰다. 그 때문에 많은 부부들이 강제로 이혼당해 가정이 산산조각나는 일이 수두룩했고 특히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과의 성행위와 흑백혼혈 아기를 임신, 출산하는 것은 '순수 백인의 피가 더럽혀진다'고 여겨 엄금하고 엄히 처벌했다. 흑인과 성관계했다는 이유로 백인들도 감방에 가는 일이 속출하였기 때문에 백인 내에서도 이에 대한 반발이 일었다. 특히 흑백혼혈 계층에서의 반발이 극심했으나 1953년 총선에서 국민당에게 유리하게 선거구가 짜여진 점을 이용해 연합-노동당 연합을 제압했고(94석 vs 62석)[17] 후임 스트레이돔 내각은 컬러드와 아시아계 유권자를 선거에서 배제시키려는 법을 통과시키려고 했지만 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내리고 상원에서도 국민당과 아프리카너당의 의석이 과반조차 넘기지 못해 법안 통과가 불발되자 국민당 성향 판사들을 임명한 다음 상원 정수를 48석에서 89석으로 올리고 각종 편법을 동원해 국민당이 상원 의석의 77석을 차지하도록 조정한 뒤 사법부와 입법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나서 유색인의 공민권과 참정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법을 통과시켜 주요 야당인 연합당과 노동당을 식물 정당화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었고 이 시기 이후부터 연합당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수당은 꿈도 꿀 수 없고 나탈 주 의회에서만 다수를 차지하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 이로써 국민당과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견제 장치는 완전히 무력화되었다.[18]
이런 비민주적 행보에 영국이 비난하고 나서자 국민투표를 통해 영연방에서 탈퇴하였고, FIFA와 IOC로부터 추방당해 1957년 아프리카 네이션스 컵에 참여하려다가 쫓겨났다.[19] 남아공은 국제 사회로부터 완전히 매장당한 것이다.
네덜란드 출신인[20] 헨드릭 페르부르트(Hendrik Verwoerd) 박사(1901~1966)[21]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시행의 건설자로 불린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는 너무나 다른 흑인과 백인이 이웃으로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보어인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젊은 보어인들의 표를 사기 위해 선거 연령도 만 21세에서 18세로 낮추었으며 지금의 나미비아인 당시 남아프리카 속령이었던 남서아프리카를 하나의 주로 인정해 참정권을 주었다. 국민당 정권의 1950년 원주민 담당장관을 거쳐 1958년 남아프리카 연방 수상이 되었고 1961년에는 보어인의 숙원이던 영연방 왕국 이탈-공화국 수립을 주도하였다. 그는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자로서 반투자치촉진법(=홈랜드 건설로 흑인 참정권을 완전히 박탈), 대학교육확장법(대학기관을 백인, 흑인, 인도인 기관으로 분리) 등의 통과를 주도하였다. 1960년에 영국계 백인 사업가 데이비드 프랫에 의한 암살 미수는 피했지만 1966년 케이프타운에 있는 의사당에서 그리스계 경비원 디미트리 차펜다스에게 칼로 찔려 암살당했다. 페르부르트의 사망 이후 서방 세계는 그에게 형식적인 애도를 표했으며[22] 남아공 정부는 일부 공항 및 도시의 이름에 '페르부르트'를 집어넣었다. 1994년 ANC 정권의 출범 이후 아파르트헤이트 잔재를 없애기 위해 그의 이름은 남아공 전역에서 지워졌다.
4. 실태
아파르트헤이트주의는 반투스탄 혹은 홈랜드의 설정이라는 대(大) 아파트르헤이트와 일상 생활에서의 흑백 분리를 가리키는 소(小) 아파르트헤이트로 분리할 수 있다.
4.1. 대(大) 아파르트헤이트
흑인들은 대도시 중심가에 사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대다수 흑인들은 반투스탄 혹은 홈랜드[23]라고 불리는 낙후된 구역으로 격리되었고, 도시에 살더라도 외곽에 있는 흑인 전용 주거지에서 살아야 했다.남아공 정권은 격리를 확고히 하기 위해 이 홈랜드 영토들을 아예 국가로 독립시켜 버리기로 한다. 1970년 제정된 "홈랜드 시민권법"으로 반투스탄에 거주하는 흑인들의 남아공 국적을 아예 박탈해 버렸다. 남아공의 홈랜드는 총 10곳이었으며 그 중 4개(트란스케이, 보푸타츠와나, 시스케이, 벤다)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차례대로 독립했다. 백인 정부는 그곳의 땅을 떼서 흑인들에게 자치권을 주고 독립시켜 주는 것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남아공 국민의 자격을 주기 싫다는 뜻이었다.[24] 전 국토의 13%에 불과한 이 황무지에 인구의 과반 이상이 살았고 대도시 근교지역의 주거여건이 극도로 열악한 소웨토 같은 타운십에서 30% 가량이 살았다. 도시 외곽의 흑인들은 홈랜드와 달리 명목상으로나마 남아공 국민 자격을 유지하긴 했으나 2등 시민으로 차별받긴 마찬가지였다.
당연하지만 개발도 안 된 척박한 황무지였던 반투스탄이 갑자기 독립했으니 교육, 복지, 의료 등 기본적인 국가기능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서 남아공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남아공 법률상으로 이들은 외국인이었다. 홈랜드의 주요 수입원은 남아공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는 흑인 노동자들의 임금 수입과 남아공에서 오는 백인들의 관광[25] 수입뿐이었다.
물론 반투스탄을 승인한 나라는 남아공과 반투스탄 상호간 밖에 없다.[26] 결국 이 4개국은 만델라 정권 때 남아공으로 재편입되었다.
4.2. 소(小) 아파르트헤이트
흑인들이 도시에 들어오려면 허가증이 있어야만 했다. 주민등록증 같은 카드도 아니고 수첩처럼 두꺼운 것이었다고 한다. 흑인이 들어오는 경우는 주로 도시에서 노동자로 일하거나 관광 산업용이었다. 물론 허가증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백인들과 같은 시설을 이용할 자격이 없었다. 허가증이 없으면 바로 체포되었다.한방울 원칙에 따라 피가 더러워진다고 흑백혼혈 및 황백혼혈은 천시되었으며 유색 인종과 백인 간의 결혼과 섹스를 엄금하였다. 1949년 인종간 혼인 금지법 실시 이후 인종간 혼혈은 금지되었지만 이전에도 백인, 흑인, 황인, 인도인들이 수백년간 섞여 살았기 때문에 혼혈이 많이 일어났고 외모로 인종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 신분증에 인종을 명시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런 구분도 상당히 자의적인 것이어서 형제 간이라도 피부가 많이 그을린 쪽은 흑인, 안 그런 쪽은 백인으로 구분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1950년 배덕법의 제정으로 흑백간 모든 성관계도 금지되었다.
유명 축구선수 스티븐 피에나르는 어린 시절 반투스탄이 아닌 도시에 살았는데 옆집 여자 아이가 백인들에게 능욕당하여 혼혈 아기를 출산하다가 죽었고 그의 친구가 백인들에게 살해되기도 했다.
더불어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지배했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아프리카 식민정책과 비슷하게 남아공 백인 정권은 줄루족, 코사족, 은데벨레족, 스와지족, 코이산족, 벤다족, 츠와나족 등 남아공 국내의 흑인 부족들 간 분열과 대립을 키워 남아공의 흑인들이 단결하여 뭉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분열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 정책의 의도와는 무색하게 남아공 백인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자체가 워낙 악독해서 이 부족들끼리도 앙숙이었으면서도 서로 함께 손 잡고 백인 통치에 저항했다.[27] 일례로 백인 정권 통치에 대항하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과 타보 음베키 전 대통령,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는 코사족 출신이었기에 줄루족이 상당수였던 남아공 내 흑인 세력들 사이에서 적개심이 컸지만 그래도 부족은 다르지만 잔인한 백인 놈들보다 아니꼬워도 같은 흑인인 코사족 놈들이 더 낫다며 만델라와 음베키, 투투를 지지하던 줄루족과 그 외의 흑인 부족들도 많았다. 보통 이런 부족간 이간질 작전은 성공률이 높은 편[28][29]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남아공 백인정권이 얼마나 악랄했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도인, 중동인, 동양인 모든 비서양인 및 유색 인종들도 흑인만큼은 아니지만 차별 대우를 받았으며 백인과 흑인 혹은 유색 인종과의 혼혈인 컬러드(Coloured)도 차별받았다. 다만 일본인, 홍콩인 등 친서방 국가의 일부 동아시아인은 명예 백인(Honourary white)으로 분류되어 백인과의 섹스 및 결혼과 투표는 금지였지만 백인과 같은 시설[30]은 이용할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명예 백인 참조.
이렇게 강경 일변도로 막나가는 억압 정책을 편 주제에 상황에 따라 제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꾼 박쥐 같은 나라가 그 악명 높은 나치 독일이다. 후술하겠지만 아파르트헤이트는 정말로 거기서 배워 온 짓거리였다. 정확히는 높으신 분들 중 몇몇이 현지 친나치 단체에 가담한 것이긴 했다. 수상이었던 얀 스뮈츠부터가 1,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편에 붙어서 매우 잘 싸웠고 국제연맹 창설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인도계의 처우 개선에 앞장서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 역시 아파르트헤이트의 근본이 되는 인종간의 분리를 지지했다. 참고로 강경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1, 2차 세계 대전 때 괜히 전쟁에 끼어들어서 피를 흘렸다. 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편으로 참전했어야 했다!'며 얀 스뮈츠를 배신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대로 차별받은 흑인들도 '2차 세계대전 때 참전했다가 전사하거나 뉘른베르크로 끌려가서 사형당했어야 한다!'며 비난했다.
그나마 이건 나은 거라서 이전에는 세계에서 성공한 흑인들의 소개를 금지하기도 했다. 덕분에 남아공의 흑인들은 흑인 운동선수[31]나 가수들, 연예인들의 존재를 몰랐으나 오래 가지 않아 알려졌고 흑인들도 돈 많이 벌고 백인들에게 인기인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뒤늦게 정부에서 그 유명 흑인 인기인들은 명예 백인이라고 주장했으나 당연히 통할 리가 없다.
5. 대중문화 검열과 백인 간 갈등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본질은 단순한 인종차별 정권이 아니라 '유사 파시즘', '네오나치'라고 경멸당할 만큼 아주 폭압적이고 불온한 체제였다. 사실 기본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명목상 민주주의가 지켜질 뿐 비자유민주주의의 대표주자들인 헝가리, 싱가포르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고 오히려 프란시스코 프랑코 시절 스페인국, 2010년대의 푸틴, 메드베데프 시절 러시아나, 현재의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와 비슷한 정도로 억압적인 정권이었으며, 일부 극우파를 제외한 백인들 역시 이 독재정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당시 정권의 요직을 차지한 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시절 공개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나치즘에 동감하고 이를 모델로 삼았다. 전후 남아공의 총리가 되는 발타자르 요하너스 포르스터르(B. J. Vorster) 등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거물 지도자들 중 일부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반영, 친독 성향 파시즘 단체였던 '오제바브란트바흐'(Ossewabrandwag, 포장우차 파수대)에 가담했던 파시스트들이었다.2차 대전이 끝난 뒤로는 국제사회의 눈치가 보였는지 표면적으로 노골적인 파시즘 색채는 버렸지만, 그 대신 '반공'을 명분삼아 권위주의적인 경향은 계속 유지했다. 아프리카너계 백인들이 많이들 신봉했던 네덜란드개혁교회 교단들도 국민당 정권과 유착했고, 신학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되어먹지 않은 사이비스러운 궤변을 내세워 아파르트헤이트 정당화에 앞장섰다. 이렇게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이며, 문화적으로는 종교적 엄숙주의를 표방한 정권이었기에 대중문화 역시 철저하게 검열되었고, 조금이라도 아프리카너 민족의 '전통적 가치관과 미풍양속'에 반한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가차없이 편집되어야 했다. 이렇게 폭압적인 체제다 보니 명목상으로는 우월한 대우를 받는 백인들조차 답답함을 느꼈고, 따라서 인종을 불문하고 남아공인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쌓이게 된다.
심지어 텔레비전조차 페르부르트 정권까지는 아예 금지된 문물이었고 포르스터르의 집권기인 1976년에야 비로소 보급과 방송이 개시되었다.[32] 물론 TV방송도 철저하게 인종 분리 정책에 따라 편성되었다. 1번 채널은 백인 전용(영어와 아프리칸스어를 번갈아 송출), 2번은 줄루족과 코사족용, 3번은 소토족, 4번은 도시에 사는 흑인들 전용으로 채널을 편성하는 식이었다. 또한 종교주의 표방 영향으로 텔레비전 방송 종료전에 바로 국가가 연주된 후 텔레비전 방송을 종료하는 형태가 아니라 4분 내지 5분 이내의 목사의 설교와 기도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후 국가 연주 후 텔레비전 방송을 종료하는 형태였다.[33][34]
집권당이던 국민당(NP) 정부는 동성애[35], 음란물, 도박[36], 낙태[37] 등 사회적, 종교적으로 불온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모조리 금지시켰고 일요일에는 안식일이라고 백화점이나 극장 등에 대한 휴무를 강제했다. 그리고 아무리 백인일지라도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좌파나 자유주의자들은 얄짤없이 감옥에 집어넣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흑인과 비슷한 처지였던 백인 공산주의자들이 당시 ANC와 협력하며 반정부 활동을 펼쳤고 조 슬로보, 브람 피스허르, 루스 퍼스트 등 수많은 좌파 성향 백인들을 반아파르트헤이트 진영으로 가게 만들었는데 이들은 무장 투쟁, 문화 사회 계몽 운동, 법률 투쟁 등에서 ANC에게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안드레 브링크, 브레이튼 브레이튼바흐 등 당시 문학계의 아프리칸스어 문학 르네상스를 주도하던 인사들은 죄다 반체제 진영으로 넘어가 전 세계 학계, 문화계에서 남아공을 보이콧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거기에 당시 영화 산업도 상당히 최악이었다. 배우들은 거의 백인들만 나왔으며 흑인들은 그냥 단역만 따내면 감사할 정도로 안 나왔다. 그나마 흑인들로만 이루어진 영화가 나오긴 했으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하였고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난 뒤에도 상영금지가 풀리지 않다가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에야 상영금지가 해제되고 리마스터링되어 상영되었다.
특히 남아공 공산당의 최대 거물 중 하나였던 브람 피스허르(Bram Fischer)는 보어 전쟁 당시 오렌지 자유국의 거물 정치인이자 남아프리카 연방 내무장관을 지낸 아브라함 피스허르(Abraham Fischer)를 조부로 두었을 만큼 혈족 중심의 폐쇄적인 아프리카너 사회에서도 뼈대 있는 성골 집안 출신이었는데[38] 보장된 그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신념에 따라 반정권 인사로 투신함으로서 넬슨 만델라의 변호를 담당했으며 결국 자기도 만델라 따라 감옥에 들어가 장기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병보석 석방 이후 2주일 만에 죽어 남아공 당국만 빼고[39] 전 세계에서 살아 있는 양심이라고 칭송받았다. 상류층이고 명문가 출신이라 남아공 당국에서도 부담스러웠는지 추방과 망명을 조건으로 석방 제의를 했는데 이를 거부하면서 한 말이 "나는 자랑스러운 아프리카너이고, 나의 조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내 정부와의 정치적 마찰 때문에 내가 조국을 떠나야 할 이유는 없다."였다. 한 마디로 자신은 하나도 부끄러울 게 없으며 떠나야 할 쪽은 아파르트헤이트 당국이란 소리. 이를 두고 유대계 여성 운동가이자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사였던 루스 퍼스트(Ruth First)는 자신을 심문하는 아프리카너 경찰들에게 "브람 피스허르는 내 소중한 친구이자 동지이며, 정말 멋진 사람이다. 무엇보다 당신들 아프리카너란 종족 전체의 오명을 뒤집어 쓰고 이를 깨끗히 하는 아프리카너의 마지막 양심이다" 라고 평했다.
역시 남아공 공산당의 간부였던 조 슬로보(Joe Slovo)와 루스 퍼스트도 유명한 편인데 이 둘은 부부로 활동하다가 루스는 1982년 모잠비크에서 남아공 경찰에서 보낸 편지 폭탄[40]을 받고 사망했고 조 슬로보는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후 넬슨 만델라 정부에서 주택부 장관에 임명되는 등 고생 끝에 보상을 받는 듯했으나 퇴임 직후인 1995년 암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이 둘의 생애는 1988년 조와 루스의 자식인 숀 슬로보(Shawn Slovo)가 각본을 쓴 '갈라진 세계(A World Apart)'[41]를 통해 영화화되었다.
영화 감독인 얀스 라우턴바흐(Jans Rautenbach)가 아프리칸스의 정체성과 흑백혼혈에 대한 영화를 많이 발표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디 칸디다트(Die Kandidaat, 1968)[42], 카트리나(Katrina, 1969)[43]로 현재까지 남아공 영화사에 남아 있다.
1970~80년대 들어 대외적으로 남아공 정부는 로디지아 전쟁, 나미비아 독립 전쟁, 앙골라 내전 같은 주변의 냉전의 대리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고 남아공 정부 반대편에는 쿠바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좌파 민족주의 게릴라들이 있었기 때문에 매카시즘 공안 정국을 유지했다. 상술된 조 슬로보, 브람 피스허르 같은 진성 좌파 반아파르트헤이트 인사들이야 도덕적 명분은 둘째치고 어쨌든 법적 기준으로는 분명히 적성 외부 세력과 깊게 협조하는 이적단체 소속이라서 때려잡을 수 있다고 쳐도 냉전기 전체주의적 독재 국가들이 그랬듯이 여기서도 좌파나 남아공 내외의 게릴라들과 전혀 상관없는 자유주의 계열 백인 정치 세력도 탄압했다. 웨스턴케이프의 주지사이자 최근까지 남아공 제1야당인 민주연맹의 당수였던 헬렌 질은 당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1977년 흑인 민족주의 사상가이자 반아파르트헤이트 혁명가였던 스티브 비코가 불법 체포 후 구타당해 죽은 사건[44]을 취재하다가 높으신 분들의 압력으로 사퇴해야 했고 이후 반아파르트헤이트 여성 단체에서 활동하다 당국에게 찍혀서 도주 생활을 해야 했다. 심지어 당시 자유주의 계열 거대 야당의 지도자격 인물들로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백인들의 입장을 대변했던 해리 슈바르츠(Harry Schwarz), 헬렌 수즈만(Helen Suzman) 같은 전국구 정치인들도 도청, 감시 등의 당국의 위법적인 방해와 탄압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당시 남아공에 적지 않았던 인도계 주민들도 비록 흑인들만큼은 아닐지언정 도시 내 할당 구역 밖으로는 마음대로 나오지도 못하고 교육도 전적으로 공동체 자체적으로만 해결해야 했으며 사석에서는 여전히 쿨리 소리 들으면서 멸시당하는 등 인간 대접 못 받았다.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대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리기 시작하면서 인도계는 투표권을 부여하고 어용 단체 몇 개 만드는 식으로 분열과 통치를 위한 사탕발림을 꺼냈지만 대부분의 인도계는 선거에 참여하지도 않고 남아공 인도인 의회를 비롯한 인도계 정치 단체들은 ANC와 연대하는 걸로 회답했다. 유대인들도 공식적으로는 아프리카너 민족주의 정권이 전후 이미지 세탁 과정에서 반체제 파시스트 단체 시절의 반유대주의를 버리고 무엇보다 냉전 시대 국제 역학 관계와 지정학적, 전략적 유사함에 따라 이스라엘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 공식적인 차별은 없었지만 문화, 사회적 차원에서 멸시는 여전히 흔했다. 이에 따라 남아공 유대인, 인도계 공동체들은 좌익 노선이든, 자유주의적 개혁주의 노선이든 많은 수의 저명한 반아파르트헤이트 인사들을 대거 배출했다.[45]
6. 붕괴
1976년 6월 16~18일에는 소웨토[46] 지역에서 흑인 학생들이 아프리칸스어[47] 수업 반대 시위를 하자 경찰들이 학생들에게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나기도 했다. 사망자는 공식 수치로만 176명,[48] 부상자는 1139명[49], 체포자는 1298명일 정도로 참혹했다.[50] 이 과정에서 헥터 피터슨(Hector Pieterson, 1963년 8월 19일 ~ 1976년 6월 16일)이라는 학생이 사망했는데 피를 흘리고 쓰러진 헥터를 음뷰사라는 소년이 안고 헥터의 누나 앙또아넷이 옆에서 울부짖는 모습을 샘 은지마라는 사진작가가 촬영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사진 헥터 피터슨은 아파르트헤이트 저항 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헥터가 죽은 날은 1991년부터 '청소년의 날'이라는 공휴일로 지정되었다.또 나미비아 지역을 자국 영토로 불법 점유하고 1960~70년대 앙골라, 모잠비크 등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의 식민지 독립전쟁에서 포르투갈군의 식민지 독립 운동 진압을 거리낌없이 지원하여 자국과 이웃한 포르투갈령 식민지인 모잠비크와 앙골라[51]의 독립을 막으려고 했으며 이들이 독립하고 나서도 이들 국가에서 벌어진 내전에 무단으로 개입하기까지 하여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을 포함한 전세계적인 반감과 비난을 받았음에도 백인 정부는 이를 무시하였다.
사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이렇게 똥배짱을 부려댈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이 지배하는 국가였던 로디지아[52]와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로써의 모잠비크, 앙골라와 협력하면 고립을 타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아프리카의 백인 국가&잔존 식민지와 협력하면 언제까지고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방 주요 국가들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비록 인종차별 정책을 펼치는 남아공 정부를 공식적으로 비난하기는 했지만 당시 냉전 상황에서 반공주의 및 반소 정책을 표방한 남아공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의 교역이나 비공식적인 교류는 계속 해 왔기 때문에 냉전 시기에 그리 치명적인 타격은 입지 않았다.[53]
그러나 1974~1975년 사이 포르투갈 본토에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이 독립하고 설상가상으로 로디지아의 백인 정부마저 내부 분열로 개박살나면서 들어선 아프리카 흑인 국가들에 포위되면서 점점 궁지에 몰리고 경제에도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악에 받친 남아공 정부는 이스라엘과 손잡고 핵무기를 개발하면서까지 최후의 발악을 해 댔으나 국내외의 소요에 염증을 느낀 젊은 백인들의 탈출과 침체된 경제, 국제사회의 압력[54]으로 인해 결국 F. W. 더클레르크가 집권하면서 유화책으로 돌아섰고 냉전이 끝나는 무렵이었던 1990년에 넬슨 만델라를 전격 석방하며 협상 과정을 거친 뒤 1992년[55]에 유색인종에게도 백인들과 같은 권리를 주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흑인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 결과 1994년에 반투스탄이 해체되고 백인정권과 유착하던 흑인 기득권층과 백인 극우층들이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이들의 저항은 진압되었고 1994년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ANC가 압승을 거두고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아파르트헤이트는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7. 폐지 후의 잔재
넬슨 만델라에게 있어 평생의 타도 대상이었으며 결국 그의 당선과 함께 아파르트헤이트도 막을 내렸다. 그러나 너무 오래 지속된 정책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잔재가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56]흑인과 백인은 평등해졌지만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자산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흑인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그 결과 남아공은 세계 최악의 빈부격차를 자랑하는 국가가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지기 직전인 1980년대부터 상당수의[57] 남아공 백인들이 타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1990년대에는 흑인정권의 보복을 두려워해서라면 2000년대 이후에는 해외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려는 목적이 강하다. 호주, 뉴질랜드뿐만 아니라 언어적으로 비슷한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미국,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그리고 폴란드, 러시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조지아[58] 등으로 이민간 사람들도 있다.[59][60] 그리고 20대 백인들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로 원어민 강사 일을 하러 많은 수가 이주했다.[61][62]
사실상 아파르트헤이트가 단순 차별을 넘어서서 경찰이나 자경단의 잔학행위도 수반했기 때문에 보복이 두려웠던 건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일부 계층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만델라조차도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구호 아래 "잔학행위도 솔직히 공개적으로 자수하면 봐 주겠음" 하는 식으로 나갈 정도였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당은 노선을 전환하고 1997년에 신국민당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1999년 총선에서 당세를 크게 잃고 궁여지책격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야당인 민주당[63]과 합당하여 민주동맹을 창당했다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분리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2005년에 아프리카 민족회의에 흡수되어 해산되었다. 이들로부터 갈라져나왔던 재건국민당(HNP)은 군소정당으로 간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와 별개로 2008년 8월에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으로 이름이나마 부활했다. 하지만 유색인종 유권자들의 거의 다수를 적으로 돌리고 있고 백인들조차도 대부분이 민주동맹에 표를 던지는 만큼 그냥 듣보잡이었다.
한편으로 흑인들이 정치적인 기득권을 차지하면서 다른 의미로 남아공이 개판이 되었다는 얘기[64]도 많다. 1994년 이후 남아공에선 새로운 다른 3,000만의 국민을 먹여살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며[65] 경제성장률은 1980년대에 비해 오르기는 했지만 재정건전성에 신경쓴다고 예산 지출을 대규모로 하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높지는 않아서 대규모의 일자리 창출을 하기에 충분치 않은 수준이었다.[66] 당연히 대도시 지역에서 실업자가 급속히 불어나면서 범죄율이 크게 높아졌고 그 여파로 백인 중산층들이 대거 교외지역으로 빠져나가면서 요하네스버그나 프리토리아 등 주요 대도시의 중심가는 슬럼화가 가속화되었다는 것. 거기다가 흑인 우대 정책(BEE:Black Economic Empowerment)으로 인해서 백인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졌고 백인들의 유출이 가속화된다는 것이고 백인 빈민층이 40만에 달한다는 등[67] 문제가 심하다. 그리고 남아공 경제의 근간이 되는 전력사업이나 공공교통, 통신사업 등이 ANC 출신이나 그 지인들로 채워졌고 아파르트헤이트 재현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절대 백인은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는 경우가 없지만 실력보다는 인맥으로 인사가 진행되고 경영이 이뤄져 부실화된 경우가 다반사였다.
사실 아파르트헤이트가 반 세기에 가깝게 길어지면서 경제 및 과학에 뛰어난 전문지식을 갖춘 흑인은 거의 전무했다. 새 남아공의 기득권은 절대다수가 민주화 투쟁 경력만 있는 사람들이어서 전문성이 극히 부족했고 거기에 그동안 고생 좀 했으니 이제 좀 누려도 되는거 아니냐는 식의 멘탈리티가 사회지도층은 물론 일반 흑인 서민들한테도 팽배해 있다.[68] 이렇게 하여 민주화된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때 이상으로 부정부패가 심각해졌지만 그나마 제이콥 주마를 거처 시릴 라마포사 시기에 접어들자 아파르트헤이트를 시작부터 직접 피부로 겪은 노년층들이 사망하면서 반 ANC 감정이 90년대 이후 태생의 젊은 세대로부터 팽배해졌고[69][70] 나름 형식적으로나마 부정부패 해소 및 관련 인물들의 처벌이 2020년에 벌어졌지만 한편으로는 투쟁 시기 원로들[71]로부터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던 우국지사들을 박대하냐는 비난도 받았다.
또 반투스탄을 다시 남아공에 흡수하는 과정에서 반투스탄 지역의 공무원들[72]이 구조조정되는 일 없이 그대로 남아공 공직사회에 흡수되면서 남아공 공직사회의 부패에 기여했고 더군다나 BEE가 시행된다고 한들 백인은 백인대로 불만을 가지고 흑인들 중 빈민층은 여전히 낮은 교육 수준을 지니고 있기에 기회가 돌아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73]
남아공은 1994년 이후 아프리카화가 급격히 진행됐는데 그러다 보니 아프리카에서 가장 튼튼한 경제기초를 갖춘 남아공인 만큼 국경이 열리자마자 타 아프리카 국가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이민이 늘었고 이들은 대부분 저학력 막노동자들이라 요하네스버그와 더반 등 대도시에서 하류층을 이루게 된다. 물론 남아공 내에도 거의 외국인 취급받던 반투스탄과 타운쉽 인구가 많았지만 외교에서 신생 흑인 정부가 타 아프리카 국가들을 의식하지 않고 가려 받을 상태가 아니었고[74] 더군다나 행정력의 마비가 있어서 불법 이민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특히 위의 짐바브웨가 1990년대 이후 막장화가 가속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남아공으로 월남했고 이들은 불법 이민자들이 대부분이라 3D 업종을 차지해 기존 남아공 흑인들을 밀어냈다. 당연히 현지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번번히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남아공 내 타 아프리카 국가 출신 흑인들도 마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일례로 극악의 범죄율로 악명높은 요하네스버그 다운타운의 경우 가장 강한 갱 세력이 나이지리아 출신이었고, 남아공 흑인들이 반 외국인 제노포비아 성향의 폭동을 일으키면 비교적 소수더라도 맞서 싸우는데다 본국에서도 이에 대응해 반 남아공 운동이 일어난다. 그래서 아파르트헤이트 종결 이후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 회복이 현재 여러모로 남아공 정부 및 사회에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
더군다나 전력 같은 걸 민영화한다거나 파업 강경 진압 드립을 치고 노조와 공산당과 연합하면서[75] 정권을 잡고 있는 주제에 최저임금도 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 흑인들은 여전히 먹고 살기 힘들다며 불만이 강하고 BEE로 새로 등장한 흑인 중산층 입장에서도 잘 먹고 잘 사게 되었다지만 치안이 열악해서 길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기 힘들고, 대학 등록금도 비싸서 자식들을 제대로 공부시키는 건 물론이고 취업해도 월급이 적다며 불만이 많다. 요약하자면 극심한 탄압이 폐지되고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도 없어졌다지만 흑인, 백인, 컬러드, 아시아계 어느 하나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위에 나오는 불만이나 현상의 원인은 사실 ANC 정부의 무능이 원인이다. 만델라 시기야 아파르트헤이트의 후유증과 경험 미흡, 국민당과 인카타 자유당과의 연정, 과거사 청산 등으로 인해 여러모로 복잡한 사정이 많아서 그렇다지만[76] 타보 음베키 때부터 그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해 경제는 성장했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부패가 횡행하기 시작하고 인프라 공사의 구축도 늦어지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경제성장의 과실이 골고루 돌아가지 않으면서 흑인들 사이에서의 불만이 팽배해지기 시작했고 그 악명 높은 요하네스버그 가이드라인이라던가 흑인들이 백인 농장을 습격해 인종범죄를 저지르는 등 치안 문제도 해결되지 못했다. 여기에 BEE의 실행으로 백인층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커졌고 음베키의 대안으로 집권한 주마도 애시당초 백인들에게 상당히 적대적인 언행을 보여 온 데다가 집권 후에 공약(부의 재분배)을 지키지 않았고 치안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되었다지만[77] 경제는 원자재 값 하락의 여파로 침체일로에 있고 그 자신도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 흑인도 백인도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 애초에 아파르트헤이트는 절대적인 수적 열세 세력이 절대다수 위에 군림한다는 존립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체제였고 결국 멸망이 당연했지만 ANC를 비롯한 남아공 민주세력의 정권 이양 및 인수인계 준비도 전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동안 고생한 게 있으니 꿀 좀 빨겠다는 식의 멘탈리티가 사회의 제일 높은 곳으로부터 낮은 곳까지 팽배해 책임감보단 탐욕으로 점칠된 국가경영이 발현되었고[78] ANC 스스로도 갈수록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따져보면 요하네스버그 가이드라인이라는 도시전설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초래한 최악의 괴담이다.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현재는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주 구역/지역 등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으나, 아직도 대도시 혹은 근교 위성도시 지역에 백인, 유색인, 흑인 구역을 분리시켰던 흔적과 잔재가 남아있다. 굳이 남아공에 가지 않더라도 구글맵으로 대략적인 유추가 가능한데, 집 위치 및 외관이 깔끔하게 정리된 지역들은 백인 구역, 도로망은 깔끔하게 정리된 계획도시인데 집 배치 구조가 좀 정돈되지 않고 어질러진 부분이 있으며 외관이 깔끔하지 않고 좀 낡아서 소위 "못 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살고 싶지 않을 법한" 곳이라면 컬러드 구역, 그리고 지명이 흑인 토착언어로 되어 있고 도로망도 정돈이 안 되어있고 위에서 봐도 너무 슬럼 같은 곳은 흑인 구역이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지명이 유럽계 언어로 되어 있다고 해서 백인 구역이라고 마냥 단정을 지을 수는 없는데, 유색인 구역들도 종종 네덜란드어로 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비백인이라도 구 백인 지역에 문제 없이 거주하거나 돌아다닐 수 있는 오늘날에는 구 백인 구역에 가더라도 흑인 및 유색인들 위주로 보일 지경이지만, 그 반대로 구 유색인 혹은 흑인 구역은 비록 남아공 인종 구성 비율을 고려하더라도 백인을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아직도 구 흑인 구역들은 열악한 슬럼으로 방치된 곳이 한둘이 아니며 인프라가 처참한 수준이 아니라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고 온갖 범죄가 판을 치는 탓에 경제력이 꽤 되는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 오고 싶을지 생각해 보자. 다만 요즘에는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데, 이러한 구 흑인 구역들은 그야말로 재개발 열풍이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서서히 탈바꿈하는 중이다. 어떻게 보면 "흔적 지우기"가 아닌가 싶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자체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흑역사인 탓에 이런 흔적을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도 없다.
7.1. 종교 분야
남아공 개혁교회도 한동안 인종차별과 사회 분열을 조장한 종교적 배후 세력이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으며 당연히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에는 신자 수가 감소하고 몰락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이후에는 그 시절에 대한 반성으로 유색인 신자를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겨우겨우 남아공 최대의 개혁교단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경향을 자유주의 신학이란 핑계로 물고 늘어진 일부 브ㅡ수적인 백인들은 아프리칸스 개신교회(AP Kerk)라는 백인 전용 교단을 만들어서 분리했다.[79]현대 남아공은 과거와 달리 백인들은 네덜란드나 영국 본토처럼 무종교인이 늘어나서 더 이상 젊은 교인들은 증가하지 않으며 사실상 백인계 기독교는 멸망했다고 보는 추세라는 말도 있으나, 보수적인 보어인과 위그노 문화, 그리고 여전히 결속된 이들의 공동체로 인하여 보어인 그리고 혼혈 컬러드계는 아파르트헤이트 도입 훨씬 전인 네덜란드령 시절부터 영향력이 강한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에 여전히 신자 수가 만만치 않은 편이다.[80] 특히 옛 트란스발 주나 오렌지 자유주의 시골이나 교외 지역으로 가면 그 세가 절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영국계의 이민등으로 인하여 영국계 성공회는 멸망하는 것이 확실하다. 반면 흑인 기독교인들은 만델라와 데즈먼드 투투라는 구심점이 있었고 신심이 대단해서 증가하는 추세다. 그렇지만 흑인 사회의 기독교는 토착종교와 사이가 극히 나빠 예배당 테러나 청부살인 등이 간혹 벌어지기도 한다.
7.2. 기술 분야
남아프리카 항공에 아직도 A340 기종이 많고 한때 보잉 747 기종이 많았던 것도 아파르트헤이트의 잔재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항의로 남아프리카 항공에 대해 항로를 열어주지 않았고[81] 이로 인해 남아공에서 인도/홍콩 등지로 가기 위해서는 인도양을 건너야 했다.[82] 또한 남아공에서 서구권으로 가기 위해서도 아프리카 대륙을 거치지 않고 대서양으로 빙 둘러서 갔다는 것. 당시 ETOPS 규정이 매우 빡빡하여 대양을 건너거나 가로지를 경우 쌍발기로는 이동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남아프리카 항공이 수요가 나지 않는 구간을 운항할 때에도 대형기를 사용하였으니 대형기를 선호했다는 것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또 무기 시장에서도 남아공은 독자적으로 나름 견실한 무기들을 자체 개발해 생산하는 것으로 나름 명성이 있는데 이것도 아파르트헤이트가 낳은 것이다.[83]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제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해 왔으니 성능 좋은 무기를 외국에서 수입해 올 수가 없어 거의 모든 무기를 자체개발하거나, 기존에 운용하던 구식 무기를 개량해서 충당해야 했던 것. 더불어 소수의 백인만으로 군대를 편성해서 넓은 국경지대를 방어해야 했기 때문에 남아공군은 각종 차량을 이용하는 기계화가 잘 되어 있고 전투원의 생존성을 매우 중요시하게 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군 항목 참조. 상기됐듯 10%가 나머지 90%를 무력으로 짓누르는 걸 몇십년 동안 하다 보니 용병과 보안업체 등의 산업은 전세계 최고 중 하나지만[84] 그 말인 즉슨 남아공에 무기가 관리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많이 풀려 있고 범죄율도 그만큼 높다는 소리다.
한편 남아공은 현재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석탄석유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것도 아파르트헤이트의 산물이다. 석탄을 원료로 하여 각종 탄화수소(즉 석유)를 얻는 공정인 피셔-트롭슈 공정은 꽤 오래전인 1923년에 개발된 공법이고 2차 대전 말기 독일의 석유 공급을 지탱하기도 했지만 이후 유전이 활발히 개발되어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반응식만 남은 채 사장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제재로 석유를 대량 수입하기 어렵던 남아공만큼은 이 기술을 적극적으로 연구해 석유 수요의 상당 부분을 석탄석유화 공정으로 조달해 왔기 때문에 기술적 노하우가 계속 축적되어 이 분야에서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갖추게 되었다.
7.3. 스포츠 분야
남아공의 고립은 스포츠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1960년대부터 30년간 국제 경기에 출장 금지.[85] 남아공이 낳은 세계적인 육상천재 졸라 버드(Zola Budd)가 영국으로 귀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오랜 고립으로 인한 경험 부족 탓에 남아공 스포츠계의 질적 저하도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축구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1996년 자국에서 치른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는 우승을 달성했고 1998년 부르키나파소 대회에서는 준우승을 기록했으며 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2002년 한일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으나,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는 예선에서 탈락하였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같은 해에 열리는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과 겸하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월드컵 2차 예선에 진출하였고, 한물간 나이지리아에게 패하고 탈락했지만, 개최국 자격으로 월드컵에는 자동으로 참가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개최국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1라운드에서 탈락하면서 개최국이 2라운드에 진출 실패한 최초의 사례를 남겼다.[86] 게다가 2014년 월드컵에서는 한 술 더 떠서 1차예선부터 올라온 초약체 에티오피아에게 털리고 탈락했다.[87] 에티오피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쳐잡고 FIFA 랭킹이 50계단 이상 상승했다. 이후 2018 월드컵 예선 때도 최종 예선에서 조 4위 꼴찌를 차지하여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실감케 하였다.[88]다만 축구와 더불어 가장 인기있는 3대 스포츠 중 나머지인 럭비와 크리켓의 경우 세계구급 강자이며 럭비는 아예 럭비 월드컵 우승 4회로 럭비 월드컵 최다 우승국이다.[89] 아무래도 축구에 비해 타 국가들과의 교류가 활발했고 특히 두 종목의 종주국인 영국과는 아파르트헤이트 극후반인 1980년대 후반까지 교류가 있어 축구에 비해 피해가 덜했고 오히려 발전할 수 있었다. 반면 축구는 백인이 아닌 흑인 위주의 스포츠였고 현재도 그러하여 남아공 축구 국가대표팀에 백인이 뽑히면 실력과 상관없이 희귀성으로 스타가 되는 경우가 많기에 앞서 언급된 럭비나 크리켓과는 달리 발전 가능성이 몹시 낮은 상태다.
앞서 언급했듯 아파르트헤이트의 여파로 인종별로 선호하는 스포츠가 분리되어 있는데, 가장 인구 비율이 높은 흑인은 축구, 백인은 럭비, 대부분이 인도계인 아시아계는 크리켓을 가장 선호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외국에 나와 있는 남아공인에게 ‘남아공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스포츠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인종별로 대답이 갈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8. 기타
-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남아공에서 흑인들이 반 아파르트헤이트 항쟁을 벌였을 때 자신들이 백인에게 당한 수모를 그대로 백인들에게 돌려주자는 감정이 그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이드리스 엘바 주연의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2013년작)을 보면 반 아파르트헤이트 시위에서 죽은 아들의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흑인 여자가 넬슨 만델라의 부인인 위니 만델라에게 꼭 복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물론 아들의 죽음에 충격과 분노가 커서 나온 말이겠지만 당시 흑인들 사이에 이런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델라와 데즈먼드 투투 주교 그리고 F.W. 더클레르크가 노벨상을 받은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상황에서 흑인들에 의한 대(對) 백인 테러와 폭력을 어느 정도 막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디스트릭트 9은 남아공의 인종차별을 비판한 영화다. 실제로 당시 백인들이 흑인을 대한 태도는 일반적인 인종차별적인 생각인 '더럽다, 하층민'의 수준이 아니었고 인간의 형태는 갖추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 정도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영화적으로 차별 대상을 외계인으로 설정한 것. 앞부분에 장황하게 나오는 외계인의 범죄나 두려움에 대한 다큐는 실제 나이지리아 입국자 및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다큐에서 따 왔다. 그리고 케이프타운 인근에 나이지리아에서 건너온 흑인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가 있었는데 도시가 커지면서 그곳이 노른자 땅이 되었고[90] 백인들은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그곳을 '여러 민족이 교류하면 다툼만 일어날 뿐' 이라면서 강제로 백인 거주지로 설정하고 기존 주민들을 몰아내었다. 그곳이 바로 디스트릭트 6. 작중에서 나이지리아 갱들이 여기서 활개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 2013년 11월 25일 이스라엘 방송 우브다에 나온 유대계 미국인 영화 제작자 아르논 밀천(Arnon Milchan)(그의 제작, 기획영화)이 말하길 1970년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실시하던 남아공에게 이스라엘 유대인 이민도 받아들이고 친미, 친이스라엘 정책을 취하면 그 댓가로 할리우드 영화를 통하여 남아공을 좋게 받아 주겠다고 거래가 시도되었다고 하지만 남아공에서 기득권을 가진 보어 및 백인계들이 거부한 탓에 빡돈 할리우드에서 남아공 백인층과 아파르트헤이트를 까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보복했다는 것이다. 이에 미국 유대인 영화 단체들은 입을 다물었다.
- 이 때문인지 몰라도 1970년대 이후부터 1994년에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될 때까지 아파르트헤이트를 신나게 까는 영화가 영미권을 중심으로 나왔는데 이때 나온 영화로는 자유의 절규[91] 드라이 화이트 시즌, 파워 오브 원[92], 보파!, 갈라진 세계, 친구들이 있다. 다만 흑인이 주인공인 '보파!' [93]나 각본가의 개인사가 절절히 묻어나오는 갈라진 세계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너무 백인 중심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 편이다.
- 역설적이지만 최근 흑인 우월주의 운동 대부분이 흑백분리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당연히 이는 인종이 분리된 상태에서 한 인종이 더 큰 권리를 갖고 다른 인종을 통제하는 사회를 원한다는 점에서 어느 쪽을 지배 인종으로 설정하는지만 제외하면 아파르트헤이트와 일맥상통한다. 마틴 루터 킹이나 로자 파크스 등의 흑인민권운동가들이 인종 분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자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 리썰 웨폰 2에도 멜 깁슨이 Stop Apartheit Now라고 써진 피켓을 들고 영사관 앞에 등장하는 등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난하는 장면이 나오며 파트너인 흑인 형사 대니 글로버가 남아공으로 이민가겠다고 영사관으로 들어온다. 당연히 아파르트헤이트를 내세우던 영사관 인물들 얼굴이 일그러진다. 극중, 백인인 조 페시가 먼저 들어와 남아공에 이민가고 싶다라고 하자 영사관 측에서 미소지으며 환영하지만 내 친구랑 같이 가겠다면서 데려온 게 대니 글로버였던 것. 영사관 측은 흑인이라 곤란하다고 한다. 그러자 조 페시는 왜 곤란하냐면서 따져들고 대니 글로버는 남아공 흑인 인권 운동 만세라고 외치며 둘이 마구 난리법석을 부린다. 이틈에 멜 깁슨이 영사관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드러난 게 남아공 미국 영사관[94]이 마약 밀매에 살해,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최종보스로 나온다.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어 불법행위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된다는 설정. 웬만한 적성국이라도 저 수준으로 영화에서 다룬다면 외교적 마찰 등 많은 문제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저런 식으로 묘사되었다는 건 당시 남아공이 찍혀도 크게 찍혔다는 뜻. 알다시피 리썰 웨폰 시리즈는 액션물이지 다큐멘터리나 사회고발극이 아니다. 즉, 킬링타임 및 흥행을 목적으로 만든 영화라서 굳이 무거운 주제를 넣을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저런 식의 묘사가 이루어지고 이게 흥행했다는 건 대다수의 관객들이 남아공 묘사를 보고 기분 나빠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그 정도로 이 시절의 남아공은 말 그대로 북한이나 별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다.
- 남아공의 코미디언인 트레버 노아는 어린 시절 이 아파르트헤이트를 경험한 적이 있어서 공연에서 이를 언급하기도 한다. 트레버는 어머니가 흑인이고 아버지가 스위스계 백인이었는데 위에 나와 있듯이 흑백 결혼은 불법이어서 오랫동안 이를 숨겨야 했다. 심지어 부모와 함께 길을 걷다가도 멀리 경찰이 보이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남남인 척 길 맞은편으로 걸어야 했다고 한다.
- 장미셸 자르는 넬슨 만델라가 석방되기 2년 전 자신의 앨범인 Revolutions에서 이 아파르트헤이트와 싸우다가 프랑스 파리에서 암살당한 Dulcie September에게 헌정하기 위해 September라는 곡을 작곡해 수록한 적이 있다.
-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쉽고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도미니크 라피에르의 《검은 밤의 무지개》라는 책을 읽어 보는 것도 좋다.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일원인 얀 판리베이크의 남아공 도착부터 아파르트헤이트 철폐까지 이야기 형식으로 읽기 쉽게 쓰여진 책이다.
- 영화 프리즌 이스케이프(Escape from Pretoria)가 1970년대 남아공을 배경으로 줄거리를 진행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반대하는 팀 젠킨 등 두 사람이 각각 프리토리아(Pretoria) 감옥에서 각각 12년, 8년형을 선고받고 탈출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 남아공의 징병제는 백인 남성만을 징병했으며 아파르트헤이트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는 백인 징집병과 그들의 가족 사이에서 징병제를 반대하는 운동까지 있었다. 남아공의 징병제는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후 폐지되었다. 일론 머스크도 이를 피하기 위해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후 인력 감축으로 일자리를 잃은 남아공군 특수부대 출신 인원들이 Executive Outcomes(EO)라는 PMC를 결성했는데 이때 만델라의 거국적 화해로 똑같이 일자리를 잃은 ANC 산하 무장단체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인원들과 해임된 남아공군, 남서아프리카에서 각종 테러 행위를 일삼던 경찰 특수부대 쿠푸트(Koevoet), 남아공 국외에서 반대자 암살 및 제재 우회를 담당하던 CCB, 그리고 코사족 세력인 아잔 인민해방군(APLA) 출신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 때문에 EO는 소련 붕괴 후 해당 지역 출신들이 대거 들어오기 이전까지 한때 서로 죽이고 싸웠던 세력들이 한 지붕 아래 한솥밥을 먹는 특이한 광경이 연출되게 되었다. 하지만 원래 있던 일자리를 잃었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이들의 전우애 자체는 매우 끈끈했고 이는 이들이 시에라리온 내전 등지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 영연방의 수장이었던 엘리자베스 2세는 생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매우 혐오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2세는 자신이 영연방의 수장으로 있는 만큼 영국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압력을 가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철폐하도록 하고 싶어했지만 이러한 행위를 영연방 국가들에 대한 내정 간섭 행위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며 마거릿 대처가 반대하여 없던 일로 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 여왕과 대처 수상 간의 의견 대립이 상당했는지 언론사를 통해 갈등설이 보도될 정도였다.[95]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자 여왕은 굉장히 흐뭇해했다고 전해지며 1995년 3월 남아공을 방문하여 이를 축하했다고 한다.
8.1. 창작물
- 살인의 강: 중3부터 원양어선을 타고 3년간 세계를 돌아다닌 동식(신성록 분)과 고등학교 전교 1등을 하고 있는 승호(김다현 분)가 만나 술자리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동식은 남아공에서 흑인들이 백인의 버스를 타지도 못하게 한 목격담을 이야기하고 이를 알고 있던 승호는 곧바로 이를 아파르트헤이트라고 이야기한다. 동식은 한 번도 남아공을 가지 않은 승호가 아파르트헤이트를 알고 있는 것을 신기해한다.
- BNA: 작중 체제의 모티브를 아파르트헤이트에서 따 왔을 가능성이 있다.
- 보물찾기 시리즈: 월드컵 시즌에 맞춰 나온 '남아공에서 보물찾기'에서 중요한 스토리적 장치로 작용한다. 과거 어느 백인 기업가 남성과 흑인 노동자 여성은 서로 한눈에 반했지만, 이 시기는 냉혹한 아파르트헤이트가 시행되던 시기였고 끝내 그들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했다.[96]
9. 관련 문서
[1] 아파르트헤이트 당시에는 부모님 두 명이 같이 다닐 수는 당연히 없었고 어머니와 손을 잡고 걸어다니다 경찰이 보이면 바로 손을 놓고 서로 모르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본인은 "마치 대마초 한 봉지가 된 기분이었죠"라고 회상했다.[2] 남아프리카식 영어로는 '아파테이드' 라고 발음하며 미국/영국식 영어로는 '아파타이트'라고 발음한다.[3] 이런 아이디어는 '분리하되 동등한(Separate but Equal)'이라고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유지한 적이 있었고 20세기 초반에는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심지어 저 판결이 나왔을 때 반대했던 사람은 존 마셜 할란이라는 사람 딱 한 명밖에 없었다.(9명 중 8명 찬성, 1명 반대) 그러나 현실에서 인종 분리는 곧 차별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을 받았고 결정적으로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에서 판례가 뒤집혔고 위헌 판결을 받아 폐지되었다.[4] 앨버트 루툴리(노벨평화상, 1960년), 데즈먼드 투투(노벨평화상, 1984년), 나딘 고디머(노벨문학상, 1991년), 넬슨 만델라 & F. W. 더클레르크(노벨평화상 공동, 1993년), 존 맥스웰 쿳시(노벨문학상, 2003년).[5]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주도했거나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받았고 문학상을 받은 2명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시절의 남아공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받았다.[6] 당시 남아공에 대한 인식은 지금의 북한, 러시아에 대한 인식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심했다.[7]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과 달리 남아프리카에는 백인들이 아예 눌러앉는 경우가 많았다. 흑백갈등이 유독 남아프리카에서 격렬했던 이유도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남아프리카 토착 백인들의 존재 탓이 컸다.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들이야 식민지배가 끝난 뒤 본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으나 여기 사람들은 아프리카가 고향이었다.[8] 다만 좀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냥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해서 이주한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9] 네덜란드 본토처럼 남아공 개혁교회도 시간이 흐르면서 분열 과정을 겪었고 현재는 크게 3개의 교파로 나뉘어져 있다.[10] '아프리카너(Afrikaaner)와 '아프리칸스어(Afrikaans)'라는 말 자체도 아프리카인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토착 아프리카 백인이라는 것이었다.[11] 이를테면 국회의원 선거권을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백인과 혼혈인에게만 보편적인 선거권을 부여하고(여성은 1930년부터) 흑인과 아시아인들에게는 돈 많은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식이었다.[12] 페이건 위원회(Fagan Commission)를 설치했는데 이 위원회에서 인종차별을 완화해야 한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13] 이 시기에 넬슨 만델라는 연합당 정부가 인도계 주민들을 차별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연합당 정부 규탄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다.[14] 남아공이 영국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1961년의 일이다.[15] 참고로 당시 남아공에선 영국처럼 소선거구제를 체택하고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에는 네덜란드처럼 전국 단위의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덕택에 만약 연합당 정부에서 도시 지역의 선거구를 대폭 늘리는 등 선거구 조정을 했으면 인종차별이 얼마간 더 지속될 수는 있어도 인종차별 정책 폐지 시기가 몇십년 더 앞당겨졌을 거고 흑인들과 컬러드 계층이 오지로 내쫓기거나 백인과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처벌당하는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16] 명목상 외국이었던 반투스탄에서는 흑인 및 유색 인종 여성의 성관계가 허용되었다. 항목 참조.[17] 연합당과 노동당은 이 선거에서 국민당의 4배나 되는 선거비를 썼고 득표율에서도 국민당을 앞섰지만(50.4% VS 49.4%) 결국 게리맨더링의 한계를 넘기지 못했다.[18] 당시 제1야당이었던 연합당은 국민당의 막장 짓거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거진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고 결국 지지 기반이 눈 앞에서 대거 날라가는데도 변변한 대응책 하나 못 내놓는 연합당의 무능함에 빡친 일부 당원들이 1959년에 진보당으로 분당해 나갔다.[19] 그래서 월드컵에선 지역 예선조차도 나가지 못하고 올림픽에도 나갈 수 없었는데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대회 직전에 남아공과 친선럭비대회를 한 뉴질랜드에 대한 제재 조치가 IOC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프리카의 26개국이 대거 올림픽 보이콧을 선언하여 첫 정치적 사유의 대규모 보이콧이라는 선례를 남겼다. 카메룬과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는 18~20일까지는 참가했고 말리와 스와질란드(현 에스와티니)는 보이콧에는 동참했지만 개막식에는 참석했으며 세네갈과 코트디부아르만 아프리카 국가들 중 유이하게 끝까지 대회에 참여하였다. 다만 패럴림픽에서는 하계 한정(첫 동계 패럴림픽은 1976년에야 열렸다.)으로 1976년 토론토 패럴림픽까지도 참여 가능했다가 1980년 아른험 패럴림픽에서야 참가를 불허당해 1992년 바르셀로나 패럴림픽에서 참가가 허용될때까지 패럴림픽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20] 보어인이 아니고 2살 때 암스테르담에서 남아프리카로 이주했다.[21]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의 손자는 할아버지가 만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반감을 가진 사람이며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직후 아내인 멜라니와 함께 진상 규명 위원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때문에 할아버지와 비슷한 성향이던 아버지로부터 의절당한 적도 있었다.[22] 왜 형식적인 애도였냐면 서방 세계도 페르부르트와 남아공 정부를 싫어하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아공은 백인들조차 숨막혀하는 나라였다.[23] 아프리칸스어로는 '퇴위스란트(Thuisland)'라고 부른다. 언뜻 보면 이들의 민족을 침해하지 않고 보호해준다는 듯한 뉘앙스이지만 실상은 도시를 포함한 좋은 땅을 백인들이 다 먹고 나머지 낙후지역을 대충 묶어놓고 격리구역으로 설정해버린 것이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보면 홈랜드라는 말도 '백인들 사는 도시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네 집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보이게 된다.[24] 남아공은 외부에는 이것을 긍정적인 정책이라는 듯이 선전하였고 간혹 속아넘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실제로 1980년대에 나온 동아세계대백과사전에는 남아공의 이 정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홈랜드가 원주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별쇄 화보 속의 미소를 짓는 원주민을 보여주면서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25] 정확히 말하면 섹스관광, 곧 환락 산업으로부터 얻는 수입이었다. 당시 남아프리카 국민당은 종교와 유착하여 같은 백인에게도 도덕적 엄숙주의를 강요하였으며 인종간 흑백 성관계도 금지되어 있었는데 홈랜드는 명목상 외국이었기 때문에 카지노와 흑인과의 성관계를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반투스탄에는 아비 모르는 흑백혼혈이 넘쳐났고 새로운 사회 문제가 되었다. 그래 놓고 백인 정권은 홈랜드에 사는 흑인들이 가난하고 도박과 섹스에 물든 자들이라고 선전하였다. 당연하겠지만 흑인들을 가난, 도박, 섹스에 몰아넣은 이들이 바로 백인 정권이었다.[26] 단, 일단 국가 체제로 돌아가기는 했기 때문에 당시 브리태니커나 일부 자료에서는 세계의 국기를 수록할 때 이 4개국을 빼놓지 않았다. 홈랜드 깃발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 링크를 참조할 것.[27] 다만 이들 간의 알력과 내부 정치도 분명히 있어서 1980년대 이후 줄루족계의 잉카타 자유당은 ANC와 대립하기 시작하면서 남아공 정부와 손을 잡았고 총선 실시 과정에서 깽판도 좀 쳤다.[28] 대표적으로 르완다 내전과 부룬디 내전, 비아프라 전쟁만 봐도 알 수 있다. 식민지 시기 벨기에와 영국이 르완다와 부룬디, 나이지리아에서 저지른 투치족과 후투족, 이보족과 요루바족, 하우사족 간 식민지 내 종족 분열 정책의 여파로 인해 이들의 갈등이 유럽 열강에서 독립 후에 내전으로 벌어진 것이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져 아프리카 민족회의(ANC)가 집권당이 되어도 부족간의 반목이 강하다.[29] 정확히 말하자면 줄루족과 코사족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만델라야 모든 민주화 투쟁을 이끈 영웅이니 부족에 상관없이 존경받았지만 후임인 음베키는 코사족이었고 줄루족으로부터 고까운 평가를 받았다. 전직 대통령들이자 반 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의 공산주의계 네임드였던 줄루족 출신 제이콥 주마와 음베키는 앙숙지간이었다. 2008년 9월 음베키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이듬해 대선에서 주마가 압승함으로 줄루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코사와 줄루의 종족 경쟁은 현재진행형이다.[30] 예를 들면 화장실. 맨 위의 사진에서도 나오지만 당시에는 공원 벤치조차 흑인용과 백인용이 따로 있었다.[31] 특히 NBA에서 성공한 농구선수들[32] 남아공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은 남아프리카 방송공사(South African Broadcasting Corporation, SABC)에 의해 개시되었으며 방송 개시 시기는 이미 흑백TV에서 컬러TV로 바뀐 국가와 흑백TV에서 컬러TV로 바뀌어 가던 국가가 존재하던 시기였다.[33] 남아공의 텔레비전 방송 초창기인 1977년의 방송 종료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방송 종료 전에 나오는 국가 연주에 앞서 목사의 설교와 기도가 나오는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 프로그램 이름은 끝말을 의미하는 에필로그(Epilogue)로,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에도 방송되었다. #, #, #[34] 다만, 종교주의를 표방한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남아공을 제외하더라도, 20세기 당시에는 기독교 문화가 있는 영미권 국가의 경우 종교 전문 채널이 아닌 일반 상업방송이라 하더라도 하루 방송을 마감하는 즈음 목사나 신부, 랍비 등이 출연하여 설교나 기도, 성경 강해를 하는 짤막한 프로그램을 송출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미국,호주[35] 당시 남아공 정부에서 동성애를 교정한답시고 게이, 레즈비언들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켰으며 이들은 그 과정에서 온갖 잔혹한 치료 과정을 거쳤고 치료가 더디다고 판단되면 레즈비언에게는 교정강간, 게이에게는 강제 성전환 수술로 강제적 여성화를 자행했다. 이를 '혐오감 프로젝트'(The Aversion Project)라고 명명하며 피해자는 약 9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웃긴 것은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의사 오브리 레빈은 캐나다로 도피한 후 남성 환자들을 강간한 게 발각되었다. 소도미법은 1996년에 폐지되었으며 현재 남아공은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국가다. '국민당 정권 하에 탄압받은 모든 이는 내 형제자매'라는 정치적 합의 하에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후 새로 수립된 헌법에서 모든 종류의 차별을 금지했고 성적 지향도 거기에 포함된 것이다. 물론 지금도 동성애자들이 차별을 받거나 범죄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개인이 편견을 가지고 차별을 행하는 것과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차별 정책을 운영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36] 1990년대 이후 복권, 경마와 카지노를 전면적으로 합법화했다. 특히 카지노에서 거두어지는 수입이 상당하고 동시에 카지노를 위한 사회간접시설 확충 및 흑인들의 고용창출도 이루어지고 있다.[37] 참고로 남아공에서 1996년에 낙태가 합법화되었는데 임신 13주까지는 본인 선택에 의해서, 이후에는 건강상 문제가 있을 때 허용된다.[38] 다만 정당은 남아프리카당-연합당 계열이긴 하다.[39] 현재까지 몇몇 보어계 극우파들은 희대의 배신자라며 말도 안 되는 고인드립을 치고 있다.[40] 말 그대로 뜯으면 폭약이 바로 터지는 소포 폭탄이다. 이외에도 노쿠툴라 시멜레인(Nokuthula Simelane)을 비롯한 숱한 반정부 인사들이 남아공 경찰 암살단의 편지 폭탄으로 사망했다. 이 짓거리를 총지휘한 인물이 바로 고문경찰이자 백색테러범 유진 드 콕(Eugene De Kock)으로 결국 30년만인 1994년에 체포되어 212년형을 선고받아 법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41] OST를 무려 한스 짐머가 맡았다. 이 영화를 본 배리 래빈슨의 부인이 그를 레인 맨의 OST 담당자로 추천하면서 지금과 같은 전설적인 작곡가로 떠오를 수 있었다.[42]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정치 스릴러 영화로 알려져 있다.[43] 흑백혼혈과 백인의 사랑을 다룬 영화로 당시 남아공 사회를 생각해 본다면 상당히 파격적인 영화였다.[44] 역시 백인 저널리스트였던 도널드 우즈도 자기 친구였던 비코의 잔인한 죽음을 알리려다 가택연금당했는데 그가 영국으로 망명해서 쓴 책 덕분에 비코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1987년에는 자유의 절규라는 영화까지 제작되었다. 비코 사건으로 인한 파장이 남아공 정부도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었던지라 당시 법무부 장관이자 상원 의장이었던 지미 크루거는 사퇴하고 국민당 당원 자격까지 잃었다. 그나마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기 전인 1987년에 죽어 법의 심판은 면했지만.[45] 그 중, 대표적으로 헬렌 수즈만이 리투아니아계 유대인 출신이라 남아공 내 반유대주의와 함께 고통을 겪어야 했다.[46] 요하네스버그 남서쪽에 위치한 흑인 빈민가. 얼핏 들으면 아프리카 흑인들의 토속어에서 따온 지명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South Western Townships(남서 거주 지역)이라는 영어 지명의 줄임말이다. SWT 정도가 아니라 아프리카 토속어 비스무리하게(...) 줄인 것이었다.[47] 네덜란드계의 후손인 보어인들이 모국어로 쓰는 네덜란드어 사투리다. 언어 계통이 거의 비슷하여 본토 네덜란드어와도 제법 통한다.[48] 심지어 일각에서는 무려 500~7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추정치를 내놓기도 했다.[49] 사족으로 당시 진압으로 인한 부상자들을 받은 병원 의사들은 총상을 농양이라고 왜곡했다.[50] 그나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 육군이 '군사력을 보이기 위한 전술적인 수단'으로 대기를 명령받았다고 한다. 사실 경찰이 무자비하게 발포한 것은 군중 통제를 남아공 경찰 훈련에서 가르치지 않았던 것의 영향도 있다고 한다.[51] 역시 포르투갈령 식민지였던 기니비사우는 자국과 거리도 멀고 이익도 되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인해 지원을 하지 않았다.[52] 그러나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로디지아를 인정할 경우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이 더욱 심화될 것을 우려해 로디지아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거나 공식적으로 수교하지 않았다. 다만 두 나라 모두 아프리카와 국제사회에서 시대 역행과 흑인 인종차별 정책으로 고립된 왕따 국가 처지였는지라 사실상 실체를 인정해 대표부를 만들어 협력, 지원했다.[53] 사실 당시 다른 서방 국가들도 자국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펼치지 않았을 뿐이지 사회적인 인종차별 수준은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54] 미국과 영국은 반공을 표방했던 남아공 정부를 공식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압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 가면서 소련과 쿠바 세력이 아프리카에서 발을 빼면서 아프리카의 사회주의 세력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기 시작하자 남아공의 악행을 내버려둘 명분이 사라졌다.[55] 이 해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정확히는 만델라와 ANC와 협상을 계속할지)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는데 백인 전용 투표라 ANC에서는 처음에는 백인들은 아파르트헤이트를 유지하고 싶어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런데 막상 투표하고 보니 투표율 85퍼센트에 찬성이 68퍼센트 이상 나오면서 아파르트헤이트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꼴이 되었다.[56] 공식적인 폐지는 32년, 사실상 폐지는 29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잔재가 남아 있다.[57] 대략 80만 명으로 추산된다.[58] 국가적 차원에서 농업 이민을 유치했다.[59] 1990년대 초반에는 백인 인구가 500만을 넘는 수준이었는데 대대적인 이민과 출산율 저하(2.1명에서 1.8명)로 한때 430만에 못 미치는 수준까지 감소하다가 2000년대 중반부터 다시 인구가 늘기 시작해 2010년대 초반에는 460만 명까지 늘어났다.[60] 대표적으로 1989년 일론 머스크가 징병제와 남아공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어머니의 고향인 캐나다로 이주했다.[61] 한국 기준으로 남아공은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더불어 원어민 교사를 채용하는 국가 중 하나다.[62] 싱가포르에도 수많은 남아공 출신 영어 교사들이 있는데 주로 국제학교나 학원 등지에서 일한다.[63] 계보상으로 보면 위에 언급된 연합당(UP)계열이다.[64] 다만 여기서 걸러들어야 할 건 있는데 1990년대 이전에도 흑인 거주지의 상황은 애초에 좋지도 않았기에 치안이 좋을 수 없었고 주요 대도시 지역에서도 컬러드와 아시아계의 항의로 인해서 수시로 시위 같은 것이 일어나기도 했다. 단지 흑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혹독하게 처벌하기 때문에 생계형 범죄가 덜 벌어진 것이다. 물론 1990년대 이후에는 대도시 지역의 슬럼화가 가속화되면서 범죄율이 급증했다.[65] 아파르트헤이트 때는 전체 인구의 10%를 겨우 차지하는 백인들이 남아공 영토 대부분을 썼고 거기에 있는 산업시설들도 전부 다 그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나머지 90% 이상의 흑인들은 홈랜드에서 백인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빈약한 인프라로 살았다. 그런데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고 나니 10%의 인구를 위한 산업기반을 100%의 인구를 위해 써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66]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넬슨 만델라 시기에는 3%대였고 타보 음베키 시절에는 5%대를 기록했고 주마 때 와서는 원자재 가격 하락의 여파로 성장률이 다시 떨어졌다. 서구권 기준에서 볼 때는 높지만 문제는 당시만 해도 남아공의 연 인구증가율이 2%에 달했고 1960~70년대 당시에 출산율이 6명대에 달했기 때문에 노동력 증가율은 5%대에 달하던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교육정책의 여파로 인해서 이들의 교육 수준도 낮았기 때문에 숙련직으로 진출할 기회도 적었으며 주변국에서도 노동자들이 몰려오는 상황인지라 실업률은 전혀 줄지 않았다.[67] 사실 1960년대에 거의 사라졌던 백인 극빈층이 늘어난 건 1980년대에 남아공의 경제제재가 가속화되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남아공의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지고 흑인들의 저항이 가속화되어 군사예산이 크게 늘어났는데 그 반대급부로 복지예산이 크게 줄어들어서 자연히 백인들에게 제공되었던 복지정책도 급속히 축소되었다. 경제권을 쥐고 있던 영국계 백인들은 일단 쌓아 놓은 게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적었지만 상대적으로 못 먹고 못 사는 사람이 많았던 보어인들 사이에서 중산층에서 빈민층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보어인은 만약 흑인정권이 들어서면 더 못 먹고 못 사는 흑인들이 자기들을 제치고 지원 대상이 될 게 뻔했으므로 이들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다. 아파르트헤이트 후반기에 국민당보다 꼴통인 보수당이 원내 2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백인 빈민층들이 지닌 두려움 덕분이었는데 이들은 흑인 정권이 세워지면 백인들은 쩌리 오브 쩌리가 된다거나 흑인들이 백인들을 강간한다거나 인종청소하여 흑인 천국을 만들 수 있다며 두려워했다. 물론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난 후에 이들에게는 다행히도 백인들을 인종청소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정책지원에서 밀리면서 쩌리 신세가 된 건 맞고 이들은 해외에 이주할 여력도 못 되기 때문에 그대로 남아공에서 눌러 살고 있다. 당장 3,000만이 넘는다고 추산되는 흑인 빈민층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판에 쪽수 자체가 적은 백인 빈민층 문제가 해결되기는 앞으로도 요원할 것이다.[68] 더욱이 ANC 정부가 "우리를 지지 안하면 백인들이 다시 돌아와 억압할 것이다"는 식의 프로파간다를 꽤 유용히 사용했고 잘 먹혔다. 남아공 총선과 지선을 보면 흑인이 다수인 시골은 ANC의 득표율이 거의 99%에 가까울 정도였다.[69] 2020년대의 20대 흑인들의 대부분은 ANC는 50대 이상 기성세대나 지지하는 부패하고 무능한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더 급진적이고 흑인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강제적인 흑인 위주 경제개편 모토에 충실한 경제자유투사당(EFF)을 주로 지지한다.[70] ANC 지지자들의 지지 이유는 대체적으로 만델라를 비롯한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들에 대한 부채의식과 백인에 대한 분노+두려움인데 9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들에겐 아파르트헤이트는 역사책에나 나오는 얘기일 뿐이고, ANC가 기득권이었던 걸 보고 자랐기에 부채의식이 옅은 편이다. 대신 백인에 대한 분노는 타 세대에 비해 강한 편이라 오히려 더 강경하다 못해 극단적인 EFF와 줄리어스 말레마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71] 주로 줄루족 출신의 인카타 자유당 계열.[72] 반투스탄도 명목상으로는 국가였기에 당연히 국가가 돌아가려면 공무원을 고용해야 하니 공무원을 고용하기는 했다. 물론 대다수의 반투스탄이 상황이 막장이었던지라 공무원들도 부패하기 좋은 환경이기는 했다.[73] 사실 대학등록금이 비싸서 그렇다는 얘기가 많다. 대학에 들어와야 좋은 일자리를 얻을수 있는 건 남아공도 매한가지인데 빈민층들이야 아파르트헤이트 해체 이후에 학교가 대대적으로 늘어나면서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받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기는 하지만 대학 등록금이 비싸다 보니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경제력이 안 되어 갈 수 없고 자연히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허드렛일이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남아공의 대학 등록금 수준은 연간 평균 10만 랜드로 약 850만원 수준인데 빈민층은 감당이 안 되고 중산층들도 감당하기 부담되는 수준이다.[74]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뿐만 아니라 짐바브웨, 모잠비크, 앙골라 등 유럽 식민지들에도 ANC와 비슷한 흑인 독립운동 세력들이 있어 연대했고, 이들은 먼저 독립하자 자국에 망명정부를 세우는 걸 허용해 주고 군사훈련 및 재정 지원을 했다. 일례로 앙골라 지역에서 ANC와 연계된 나미비아의 SWAPO와 쿠바의 지원으로 ANC가 활발히 활동하자 남아공에서 앙골라 내전에 참전해 깊이 관여하였고 이는 큰 부담이 됐기에 아파르트헤이트의 몰락에 일조했다. 이러다 보니 만델라 집권 이후의 남아공이 이들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75] 공식적으로 ANC는 남아공 최대 노조인 남아프리카 노동 조합 회의(COSATU)와 남아공 공산당과 삼자 동맹(Tripartite Alliance)이라는 선거 연합을 맺고 있다. 물론 여기 서술된 이유로 현대 들어와 코사투와 공산당 내에서도 이 연합을 깨 버려야 한다는 의견도 심심찮게 부상하고 있다. 첨언으로 이것 가지고 실재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어설픈 반공 메카시즘 기믹을 띄워 ANC를 공산주의자, 소련 첩자라고 불렀고 현대에도 몇몇 인종차별주의자들과 극우들은 여전히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저항은 공산주의자들의 사주니 뭐니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넬슨 만델라 본인이 자서전에서 한 말 한 마디로 반박된다. "공산당이 우리를 이용해먹으려고 들었다고 주장할 사람들은 항상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ANC)가 공산당을 이용해먹었다고 못할 건 뭔가?"[76] 사실 1990년대 초반에 남아공이 백인 극우파의 반발과 흑인내의 갈등, 반투스탄 기득권층의 저항 등 여러가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백인 대학살이나 내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예측까지도 나왔던 걸 보면 ANC가 무능했던 건 아니다. 물론 아파르트헤이트 청산을 너무 온건하게 했다는 불만도 있는 데다 에이즈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는 문제점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흑백화합정책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끈 건 사실이었다.[77] 이것도 2010 남아공 월드컵 때문에 급하게 처리한 셈이었다. 주마는 2009년에 집권했는데 당시 범죄율이 전혀 낮아질 기미가 안 보여 FIFA에서 이 꼬라지 그대로 가면 호주나 영국한테 개최권 넘긴다고 통보했다. 워낙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강력한 경찰권으로 인권유린에 폭력이 많았던 터라 만델라 시절 경찰이 선제발포를 못 하게 하는 등 과도한 반작용이 있었고 범죄율 상승에 기여했지만 주마가 등극한 후 그 법부터 개정한 뒤 특수경찰부대를 전국에 투입해 엥간한 강력범죄는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월드컵 때 완벽하게 안전했던 건 아니고 월드컵이 끝난 후 남아공의 범죄율은 하강하는 경제와 함께 다시 상승하면서 도로 원상복귀된 상태이다.[78] 사실 이건 단순히 ANC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나 제3세계의 다른 구 서구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운동 세력이 탈식민화 후 지배세력으로 전환됐을 때 흔히 보이는 트렌드이다.[79] 신학적, 정치적 성향이 모두 보수적이라 유색인의 입교를 금하고 있다. 네오나치이자 테러 조직 아프리카너 저항 운동의 수괴 외젠 테르블랑슈(Eugene Terre'Blanche)가 생전에 이 교회를 다녔다.[80] 한 예로, 아프리카너 민족문화 보존을 위해 만들어진 아프리카너 전용 도시 오라니아의 홍보 영상인데, 여전히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내세운다는 것을 볼 수 있다.[81] 당연하지만 영공을 열지 않으면 그 국가에 취항하는 것도 불가능하다.[82] 아파르트헤이트가 한창이던 1980년대에 한국에서 남아공 가려면 중동에서 한번 인도 혹은 태국에서 한번 환승해서 갔어야 했다. 즉 최소 2번 정도는 환승이 필요했다.[83] 센추리온 전차를 독자개량해서 만든 올리판트 전차, 미라주 III의 독자개량형 치타 전투기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84] 민간군사기업(PMC)의 효시이자 PMC를 처음 대중에게 알려서 관련 업계에서는 나름 유명한 'Executive Outcomes'라는 회사도 남아공에서 나온 PMC였다.[85] 올림픽은 물론 올림픽에 대한 반발로 탄생한 신흥국 경기 대회에도 초대받지 못했다.[86] 승점 자체는 멕시코와 동점이었지만 득실차에서 3점이나 차이나서 탈락. 그나마 같은 조에 속하는 팀들이 세계구급 강팀인 멕시코와 프랑스, 우루과이라서 참작의 여지는 있던데다, 조직력이 병맛이었던 프랑스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2 : 1로 승리하면서 조 꼴찌는 면한게 위안.[87] 2014년 월드컵에서는 비록 지역 예선에서는 떨어졌지만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팀이 딱 3팀 있었다. 독일과 박빙의 승부를 연출한 스웨덴, 아르헨티나를 쳐잡아서 세상을 놀라게 했던 베네수엘라, 그리고 남아공을 잡고 최종예선까지 가서 나이지리아와 박빙의 승부끝에 탈락한 에티오피아이다.[88] 사실 아파르트헤이트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지만 남아공의 축구 스타일 자체가 신체능력을 기반으로 한 피지컬 축구이며 이런 류의 축구는 신체능력이나 조직력이 더 뛰어난 팀들한테 쌈싸먹히고 아프리카 대륙 내 축구 강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지리아나 이집트, 세네갈, 코트디부아르, 카메룬 등은 신체능력이 훨씬 더 뛰어난 선수들과 높은 조직력을 갖추고 있다. 또 아프리카에서 축구 산업이 가장 큰 나라 중 하나여서 이미 남아공 내부에서만 놀아도 어느 정도 활발하니 딱히 자정능력도 없는 풍토도 한몫한다.[89] 남아공 내 럭비는 한국에서의 야구와 같은 위치이며 그동안 거의 모든 선수들이 백인이어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의 상징과 같았다. 만델라 당선 1년 후 자국에서 유치한 월드컵을 우승했고 12년 뒤인 2007년에도 우승했다. 그리고 또 12년 뒤에 흑인 주장이 이끄는 럭비 국대가 우승해 인종을 뛰어넘는 하나의 남아공인으로서의 유대감이 있었다.[90] 강남이 논밭이었다가 서울특별시가 개발되면서 노른자땅이 된 것과 비슷하다.[91] 위에서도 언급된 흑인 운동가 스티븐 비코와 그와 친구가 된 백인 저널리스트 도널드 우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영화 자체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비코보다 백인인 우즈의 비중이 훨씬 크다는 비판을 받았다. 물론 1987년작인 만큼 이미 사망한 비코와 남아공에 있는 그의 지인과 연락할 수도 없어 자문을 철저히 우즈 부부에게 받아야 했으니 어쩔 수 없지만.[92] 1991년작 영화로 무려 다니엘 크레이그의 데뷔작이다(!) 당시 주인공 PK를 공격하는 악역 보타의 청년기로 출연했다.[93] 모건 프리먼이 감독했다.[94] 미국은 그 당시 남아공과는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단교 상태였으므로 대사관이 있을 수 없다.[95]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넘어서 대처와 엘리자베스 2세 간의 의견 대립은 여기저기 많았다고 전해진다.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도 그리 내켜하지 않아 아침마다 '우리 수상께서 오늘은 내 백성들을 얼마나 괴롭게 했는가?'라며 씹거나 일부러 대처를 15분씩 기다리게 했다고 한다.[96] 흑인 여성이 남긴 그림 중에는 '차라리 어느 한쪽의 피부색만 달랐더라면'을 염원한 듯한 흑인으로 그려진 기업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