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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목록/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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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BO 리그

  • 선수의 전성기는 해당 구단에 소속되어 있던 시기 한정이다.
  • 굵은 글씨는 해당 구단의 영구 결번 선수.

1.1. OB-두산 베어스

1.2. 롯데 자이언츠

1.3. 삼성 라이온즈

1.4. SK 와이번스 - SSG 랜더스

1.5. 해태-KIA 타이거즈

1.6. 빙그레-한화 이글스

1.7. MBC 청룡 - LG 트윈스

1.8. 키움 히어로즈

1.9. NC 다이노스

1.10. 현대 유니콘스

1.11. 태평양 돌핀스

1.12. 쌍방울 레이더스

1.13. kt wiz

2.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3. 일본프로야구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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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6년을 제외한 나머지 시기에 가을야구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중에 준우승만 3번이란 게 좀 아쉬운 점.[2] 두산의 전성기, 이 당시 두산은 7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3회 우승. 17, 18년 연속 준우승에 그치면서 전성기에 물음표가 붙었으나 19년 다시 우승하며 전성기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2021년까지 무려 7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2022년엔 9위로 떨어지면서 왕조가 끝이났다.[3] 한국시리즈에서의 혹사로 첫 전성기가 마지막 전성기가 되어버렸다. 이유는 해당 문서 참고. 그래도 1995년에는 리즈 시절만큼은 아니었지만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어냈다.[4]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 않은 1988년은 제외.[5] 팀의 암흑기를 거쳐 두번째 우승까지 이끈 에이스.[6] 당시 최고의 마무리 투수 중 하나였다.[7] 우동수, 우동 트리오 시절[8] 1998년 외국인 최초의 시즌MVP를 수상했다.[9] 4년 연속 도루왕과 더불어 두번의 골글[10] 부상으로 부진한 2003년은 제외. 1999년 신인왕, 2001년, 2004년 포수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2004년은 포수+두산 시절 커리어하이. 다만, 01년과 04년 골글 모두 논란이 있는 수상이다. 오히려 받았어야 마땅할 02년에는 약쟁이 진갑용에게 내주었다.[11] 지명타자로 성공적인 부활을 알린 시즌. 이때를 기점으로 타격 포텐이 터졌고 롯데에서 절정을 맞는다.[12] 전성기라기보단 마지막 불꽃에 가깝다.[13] 타율 0.344 24HR 88타점으로 대폭발하며 두산의 우승을 견인했다.[14] 2000년대 우완트로이카 시절이자 양배추 넣고 던지던 시절[15] 세이브왕과 홀드왕 둘다 먹어 본 시절[16] 현역 마지막 시즌. 후반기 불의의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으나 홀드 2위를 달성하여 두산 정규시즌 우승의 공신이기도 했다.[17] 미친 듯이 혹사당하던 시절[18] 단, 2009년, 2012년은 제외[19] 종박 베어스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와 실력을 자랑했었다.[20] 신인왕 수상[21] 투수 리드 외에 타격에도 눈을 뜨며 리그 최고의 포수로 군림하기 시작한 시기.[22] 주전으로 자리잡은 것은 2013년이지만 2015년부터 매 시즌 100안타 이상을 쳐내면서 하위 타선과 내야 수비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23] 단 2017년은 제외.[24] 비밀번호를 끊으면서 부산에 역대급 야구 열풍이 불었고, 부산의 야구 응원문화가 전국적으로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팀 창단 최초로 5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의 기염을 토하기도 하며 플레이오프에도 2번 올랐더. 다만 99년 이후 PS 시리즈 승리는 2012년에서야 겨우 했으며, 플레이오프에 오른 두 번 모두 SK 상대로 2승 3패로 패하면서 좌절되었다.[25] 오랜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한 시기, 하지만 또 2승 3패로 준PO에서 막혔다.[26] 단, 1985년은 제외[27] 선수협 파동에 휘말려서 전성기가 끝난 후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었다.[28] 실제 그의 전성기는 경남고-연세대 시절이었고, 프로에 데뷔했을땐 전성기가 약간 지난 시점이었지만, 그럼에도 이 기간동안 쌓은 승수가 무려 89승이다(!) 특히 84년의 대활약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29] 단, 1990년은 제외[30] 6시즌 동안 200이닝을 던지고 93승을 했다.[31] 잘 안 알려져 있지만 1990년대 최고의 외야수 중 한 명이었다.[32] 고졸 신인 최초 200이닝-평균자책점 1위, 1992 시즌 다승 공동 3위(17승), 투수 골든글러브, 롯데의 유일한 신인왕.[33] 1994년은 방위병 복무시절이었다.[34] 남두오성의 톱타자로써 맹활약하던 시절[35] 단, 1997년은 제외[36] 전성기가 끝났을 때 주형광의 나이는 고작 만 24세였다. 얼마나 혹사를 많이 당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37] 타율 0.372 35HR 119타점으로 대폭발하며 타격왕을 차지했다.[38] 특히 2001년에는 단일 시즌 출루율 1위와 전설의 '영쑤 돈두댓' 사건를 기록하였다.[39] 2001년 타율 0.303 26HR 102타점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으나 이듬해...[40] 트리플 크라운 1회 달성. 단 류현진이 미친듯한 성적을 올리면서 MVP도 타는 바람에 묻혀 버렸지만...[41] 특히 2010년에는 트리플 크라운 2회 달성, 정규시즌 MVP, 타격지표 8개중 도루를 제외한 7관왕을 기록했다.[42] 은퇴시즌이자 마지막 불꽃.[43] 2시즌 다 맹활약을 펼치며 롯데의 포스트시즌을 이끌었다.[44] 투수 리드에서는 욕을 먹었지만 타격에는 눈을 뜬 시기[45] 단, 2014년은 제외[46] 현역 최고의 포수로 군림하던 시절[47] 롯데에서의 커리어하이, 2년 연속 지명타자 골글[48] 2년연속 20홈런 달성& 팀 국내 최초 20-20 클럽 달성[49] 한국시리즈에서는 준우승만 네 번 했지만, 전력과 선수층 면에서 단연 리즈 시절이었다. 한국시리즈를 무산시킨 85년 통합 우승도 바로 이 시기에 했다.[50]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지금도 최강의 전력으로 회자된다.[51] 이 해부터 그 전설의 12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기록의 시작이다.[52] 삼성의 최전성기, 이 당시 2009년을 제외하곤 가을야구에 단골 출전했으며, 이 중에 6연속 한국시리즈 진출(2010년~2015년)은 물론 4연속 통합우승(2011년~2014년) 과 7번의 통합우승까지 하면서 왕조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도박 사건 이후 제일기획으로 이관되면서 그 이후 2016년부터 암흑기가 시작되면서 과거로만 기억되고 있다.[53] 10년 간 통산 WAR 압도적 1위이며, 3번의 홈런왕, 4번의 타점왕, 2번의 최고 장타율, 5년 연속 골글 등 장효조와 더불어 삼성의 공격진을 이끌었다.[54] 뒷 세대 야구팬들은 올드 투수하면 최동원과 선동렬 밖에 없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김시진이 당시 최동원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었다. 큰 경기에 약한 건 논외다 최동원을 제치고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첫 100승 투수가 된 것이 그 증거. 롯데로 트레이드 되기 전까지는 못해도 10승 중반 잘하면 20승이상을 기대 가능한 대투수였다.[55] 3년 연속 타격왕, 5년 연속 최고 출루율 및 골글, 1983년 타격 4관왕 등 어마무시한 기록을 남겼다.[56] 3년 연속 골글과 더불어 홈런왕도 한 번 수상했다.[57] 홈런왕, 타점왕 그리고 MVP까지 수상[58] 단, 1992년은 제외[59] 강기웅과 더불어 최고의 키스톤 콤비라고 불리던 시절[60] 삼성 왕조를 만들어 낸 감독시절[61] 전설로 회자되는 181구는 1993년 한국시리즈의 등판기록이다. 즉 신인이 그 한국시리즈에서 무려 선동렬을 상대로 멘탈이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선동렬을 강판시켜 버린 것...(물론 9이닝이나 던졌으니 강판이라는 말은 부적절할 수도 있지만)[62] 단, 2005년은 제외[63] 이 기간에 때린 홈런포만 무려 302개에 타점은 799점, 게다가 모두 30홈런 이상에 50홈런 이상만 2번 기록 게다가 50홈런 이상을 기록한 한 시즌(2003년)은 아시아 홈런 신기록인 56홈런.[64] 20-20클럽에 가입하며 확고한 리드오프가 되었지만 감독과의 불화로 이후 성적이 추락했다.[65] 2루타 1위, 타율 및 장타율 5위로 삼성 핵타선의 일원이었다.[66] 쌍방울 시절에 이는 두번째 혹사리즈 시절[67] 단, 2002년은 제외[68] 박명환, 손민한과 함께 우완 트로이카를 구축하던 시절이다. 최고 구속 150대 초중반의 직구에 슬라이더, 포크볼, 체인지업까지 곁들여 던지는 그야말로 삼성 투수진의 최종보스. 이 기믹은 한국시리즈에서도 여전했다. 비공인 노히트노런 때문에 2004년 한국시리즈가 유명하지만 사실 2006년 한국시리즈야 말로 최종보스 배영수의 절정판이다.[69] 항상 꾸준한 성적을 낸 박한이지만 이 기간 동안 골글과 타이틀을 두 번 얻었었다.[70] 10승 투수도 해보고 홀드왕도 해본 KO펀치 시절[71] 단, 2006년은 제외[72] 그 드물다는 조동찬 주전 뛰던 시절[73] 단, 2009년은 제외[74] 최다 홀드 신기록도 세우는 등 대활약하고 있었으나...[75] 단, 2010년은 제외[76] 이 기간 동안 투수 중 가장 많이 승리, 이닝을 소화했고, 가장 WAR이 높다.[77] 단, 2019년2022년은 제외[78] SK의 최전성기 시절. 이 기간에 한국시리즈 6회 연속 진출해 우승 3회, 준우승 3회를 기록했다. 2011년 중반까진 김성근 감독이 이끌었으며 경질 뒤 이만수 감독이 이어받았다. 한국시리즈 연속 진출 기록을 6회를 찍었던 기간이다. 다만 말기에 더욱 강력한 전성기를 누리던 삼성에게 2011년과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만나 모두 패해 준우승으로 만족해야했다. 그 뒤 2013년에 4강 탈락이 확정되면서 SK의 전성기는 이것으로 일단 종지부를 찍었다. 참고로 6년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은 KBO 최초.[79] 무려 14.5게임차이를 뒤집었다.[80] SSG 랜더스로서의 첫 우승이자 KBO 최초의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81] SK의 초대 에이스이자 선발로 굴려지던 시절.[82] 불펜으로 굴려지던 시절.[83] 2008년 이후 먹튀가 되었지만, 그 전의 이호준은 타점왕도 먹고 30홈런도 2번이나 쳐내는 등 중심타자였다. 이후 먹튀로 전락했다가 FA로이드를 빨면서 2012년 재기했다. 그리고 NC로 가버렸다.[84] 단, 2006년은 제외[85] 리그 최고의 불펜 투수 중 하나였다.[86] 2009년 아틸레스건 파열로 커리어가 내리막을 걷기 전까지 박경완은 리그 최고의 포수였다.[87] 이 시기 김성근 벌떼야구의 핵심이자 최후의 보루가 바로 정대현이었다. 09~11시즌은 3시즌 연속 평균자책점 1점대를 기록했을 정도.[88] 단, 2007년 정규시즌은 제외[89] 단순히 성적만 보면 LG시절이 더 낫긴 하지만 SK에서 충분히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90] 첫 두 해에는 팀 내 WAR 2년 연속 1위, 뒤의 두 해에는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91] 특히 2009년은 상대 팀에게 악마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92] 3년간 기록 45승 13패, 방어율 2.49, WHIP 1.19, 494이닝 445삼진[93] 류현진과 더불어 리그 최고의 좌완이였던 시절. 3년연속 트리플 크라운의 문을 두드렸다. 08시즌은 리그 MVP였고 국대에서도 맹활약했으며, 09시즌에는 불의의 타구 직격으로 시즌아웃되기 전까지 타고투저를 홀로 씹어먹는 포스를 보이며 2년 연속 MVP 후보로 손꼽혔다. 10시즌은 류현진의 괴수 같은 성적에 묻혔을 뿐 김광현도 엄청난 스탯을 기록했다. 이후 부상과 재활로 저때의 포스는 되찾지 못하다가 그나마 2014년에 부활에 성공하여 나름 자존심을 지켰다.[94] KIA로 이적하기 전 송은범은 사실 SK 최전성기의 주축 투수였다.[95] 1년 반짝 플루크 시절, 마지막 불꽃[96] 드디어 날아오르나 했으나 고질적인 제구 불안으로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97] 커리어하이기는 하지만 역대급의 혹사를 당하고 결국 수술 후 재기하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은퇴하고 말았다.[98] 정대현에 이어 새로운 철벽 마무리로 군림하던 시절[99] 특히 2012년에는 06권오준을 넘어 홀드 신기록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3년 후 안지만이 갱신한다.[100] SK의 4대 에이스가 되나 했으나 연이은 불운으로 실패했다.[101] 구단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 1998년 모기업의 부도팀의 주축이 빠져나가면서 몰락했다.[102] 특유의 오리궁뎅이 타법으로 10승도 해보고 3번의 홈런왕, 2번의 최다안타를 차지하였다.한국 유일 한시즌 10승과 10홈런을 해본 사례.[103] 10년 연속 10승+100K[104] 선동열, 이강철과 더불어 해태의 90년대를 상징한 투수이다. 이 기간 동안 다승왕 2회(1993, 1994)에 방어율왕 1회(1995)를 기록했다.[105] 1993년과 1997년 한국시리즈 MVP, 1994년 최다도루 84개를 비롯한 타격 4관왕으로 시즌MVP를 수상하였다.[106] 1998 시즌 10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탈삼진왕 2회(1995, 1998)를 기록했다.[107] 9년 연속 3할.[108] 김성한과 서정환, 두 감독에게 엄청나게 혹사당하였다.[109] 한때 선발 10승에 특급 마무리였지만 99.9이후로...[110] 특히 2011년에는 투수 부분 3관왕을 석권하여 시즌 MVP와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였다.[111] 평균자책점 0.53 WHIP 0.74로 아름다운 1년을 보내고 다시 원상복귀했다.[112] 2009년 시즌 중 트레이드 선수 최초로 시즌 MVP를 수상했다.[113] 서재응의 한국 시절 전성기[114] 2014년 최동원상, 2015년과 2019년 최저 평균자책점, 2017년 시즌, 한국시리즈 MVP와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였다.[115] 꾸준히 잘했지만 2017년에 타격이 폭발하며 생애 최초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했다.[116] 빙그레의 전성기, 신생팀치곤 빠르게 팀을 정비하여 신흥 강호로 우뚝섰으나 당시 최강팀이였던 해태와 롯데에 밀려 준우승만 4번 했던 리그의 2인자 시절. 하지만 이 기간 중 한국시리즈에 4회 진출한 유일한 팀이었다.[117] 첫 우승이자 2024년 현재 한화의 마지막 우승.[118] 한화의 3연속 가을야구 진출 시기이자 한화의 전성기 이 중에서 2006년엔 준우승까지 해본 말 그대로 전성기라고 봐도 무방한 시기, 하지만 그 이후...[119] 이 기간에 홈런 104개, 타점 324개를 기록. 특히 92년에는 크보 최초로 단일시즌 40홈런을 달성했다. 이승엽 이전의 원조 홈런타자의 위엄.[120] 특이하게도, 남들 다 은퇴할만한 33세 시즌에 부활하여 38세 시즌까지 WAR 4 이상을 찍거나 180이닝을 넘게 찍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121] 두산 시절 한번도 풀타임 백업을 뛰어본적 없던 사람이 갑자기 소속팀 유일한 규정타석 3할 타자가 되었다.[122] 우승 1회(1994), 준우승 2회(1997, 1998), 3위 1회(1995), 4위 1회(1993)를 기록했다. 다만 1996년 7위, 1999년 매직리그 4팀중 3위로 포스트시즌 실패로 부진했다[123] 2013년 이전 LG가 마지막으로 가을야구를 한 해. 그 뒤로는 쭈욱 버로우를 타다가 2013년에서야 비밀번호를 종결지었다.[124] 이 기간동안 총 8번 가을야구에 진출해서, 그 중 4번은 플레이오프까지 올라갔다. 이 때 경험치를 많이 쌓고 뎁스도 탄탄해진 결과 29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125] KBO 유일의 4할 타격왕[126] 단, 1991년은 제외[127] 야생마라고 불리며 리그 최고 좌완투수중 한명으로 군림하던 시절.[128] 2013년에는 최고령 사이클링 히트, 최고령 타격왕을 기록하며 11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크게 일조했다.[129] 2007년 크보 미스터리의 주인공 중 한 명[130] 즉, 도루왕으로 도루 타이틀을 독식하던 시절.[131] 3년 연속 선발 10승을 거둔 암흑기의 에이스 시절.[132] LG를 2년 연속 포스트시즌으로 이끈 마무리 투수 시절.[133] 2009년은 타격왕 논란, 2010년과 2011년도 잘했지만 2012년부터 150안타를 매해 때려냈으므로 2012년부터 작성. 2018년도 리그 최다안타를 때려 최다 안타 주인공이 되었지만 리즈시절 일 수 있다.[134] LG에서 4번 타자로 뛰면서 타율, 출루율, 장타율이 가장 좋았던 시기.[135] LG로 이적한 2018년부터는 내내 전성기를 누리는 중.[136] 개인최다 및 역대 구단 최다타점(119타점).2019년은 전반기에 부진했지만 후반기에 살아나 리그 대표 외야수로 전성기를 누리는중.[137] 히어로즈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는가 했으나 바로 LG로 트레이드되었다.[138] 당시 히어로즈의 50승 중 11승을 책임졌다.[139] 히어로즈의 마일영과 더불어 투수진의 유일한 희망이었으나...[140] 10승 투수였으나 시즌 후 두산으로 트레이드되었다.[141] 리그 최고의 마무리로 군림하던 시절이다. 2013년에는 골글도 받았다.[142] 4년 연속 홈런왕 및 타점왕, 3년 연속 골글, 2년 연속 MVP 등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친정 팀을 땅을 치고 후회하게 했다.[143] 평균 자책점이 가장 낮은 데다가 다승 2위였지만 팀 잘 만난 다승왕 투수에게 골글 강탈 당한 시즌[144] 단, 2016년 전반기에는 넥센에 없었다.[145] 넥센에 있으면서 한 번도 평균자책점이 4점대 이상으로 올라간 적이 없었다. 특히 2014년에는 20승에 골글도 받았다.[146] 2년 연속 홀드왕을 먹었다.[147] 넥센 최강의 투수 유망주였던 시절[148] 혹사로 인한 재활과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렸지만 무사히 복귀한 후 KBO 최고의 마무리로 등극했다.(2020년 세이브 1위)[149] 한 시즌 최다 안타, 최다 득점, 최다 3루타 등을 기록하며 타격 3관왕에 MVP까지 수상했다.[150] 2014년부터 각성하더니 2015년 OPS 1.009를 찍고 최다 안타 타이틀까지 먹으며 리그 최고의 외야수가 되었다.[151]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초 넥센 마켓에서 살아남아 KBO리그 최고 유격수 계보의 일원이 되었고, 2014년엔 유격수 최초 40홈런을 친뒤 메이저리그에 직행, 피츠버그 파이러츠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자기관리 부족으로 선수 인생을 불명예스럽게 마감했다.[152] 2015년 강정호의 메이저리그행 후 유격수 주전을 빠르게 꿰차 2번의 20-20 클럽 가입, 역대 3번째 30홈런 유격수가 된후 25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했다.[153] 신생팀의 초대 토종 에이스로써 맹할약했다.[154] 도루왕으로 NC 구단 최초의 타이틀 홀더를 거머쥐었을때[155] 2013년에는 최우수 평균 자책점을 기록했고, 2014년에는 21세기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156] 특히 2015년에는 아시아 최초 40-40 클럽까지 달성하는 등 미친 활약을 보여주면서 리그를 씹어먹었다.[157] 2013년과 2014년 두 해도 잘하긴했지만 승운이 너무 없었고, 2015년부터는 득점 지원도 많이 받아 골글과 다승왕도 수상했다. 같은 기간 내에서 리그에서 가장 WAR이 높은 우완투수이기도 하다.[158] 단 1997년 6위, 1999년 드림리그 3위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159] 5년 연속 200이닝과 10승을 달성했고 1998년과 1999년에는 골글도 받았다.[160] 다승왕에 골글까지 받았다.[161] 이 기간동안 30-30을 세번 달성했고 골든글러브를 4번 수상하였다.[162] 1998년에는 신인왕과 승률왕을, 1999년에는 탈삼진 1위를, 2000년에는 공동 다승왕을 수상했다.[163] 2000년에는 홈런왕에 MVP까지 수상했고 2001년에는 포수로 20-20을 달성해내지만 홍성흔에게 골글을 강탈당한다.[164] 2002년에는 구원왕에 신인왕을, 2004년에는 세이브 2위에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165] 태평양 시절에 가을야구를 한 두 시즌. 그 중 94년은 준우승.[166] KBO 최초 좌타자 홈런왕.[167] 97 시즌 타격왕.[168] 김원형과 함께 쌍방울 마운드의 상징이었다. 1997년은 전설의 계투 20승 시즌이다.[169] 암흑기 탈출 이후 단골로 가을야구에 진출했으며 1번의 우승과 1번의 준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170] KBO 리그에서 가장 안정적인 토종 선발투수로 발돋움한 시기.[171] kt 창단후 역대 최고의 외국인타자.특히 2020년생태계 파괴자에 버금가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172] 2022년과 2023년에는 잦은 부상 때문에 예전만큼의 성적이 나오지 못했다.[173]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조 디마지오, 화이티 포드, 미키 맨틀이 이 팀을 40여년 간 정상에 올려놓았고 1949~1953년에는 케이시 스텡겔 감독의 지휘 하에 5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174] 베이브 루스가 나타난 시기이다.[175] 86년만에 밤비노의 저주를 깨부수고 우승한 시즌이다.[176] 보스턴의 경우 2004년 우승 이후 꾸준히 리툴링과 컨텐딩을 반복하고 있는 팀이기 때문에 명확한 전성기를 구분하기는 힘들다. 다만 2012, 2014~2015, 2020년은 빼박 암흑기.[177] 1941년에는 MLB 역대 마지막 4할 타율(.406)을 기록했다.[178] 1947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는 양키스에 밀려 콩라인 신세를 면하지 못했지만, 1955년 첫 월드 시리즈 우승 이후 1965년까지 4차례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179] 10년 간 딱 한 번(2021)을 제외하고 NL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가을에는 절대적 에이스의 울렁증 등이 겹쳐 WS 우승은 단 한 번(2020)밖에 없다.[180] 배리 본즈의 전성기 시절과 일치한다. 약의 힘[181] 2010, 2012, 2014년을 우승한, 이른바 짝수해의 기적을 이뤄낸 기간이다.[182] 09년을 제외하고 매년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07, 08년은 월드시리즈 2연패. 이 시기에 어느 손가락 없는 에이스가 팀을 정상자리에 올려놓았다.[183] 창단 이후 단 3년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184] 바비 콕스 감독의 지휘,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존 스몰츠의 미친 활약으로 14년 연속 지구 우승(1991-2005)과 1995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185] 이 기간 3번의 월드시리즈 우승, 6번의 리그 우승과 7차례의 지구 우승을 달성했다.[186] 스파키 앤더슨 감독의 지휘 하에 피트 로즈-조 모건-켄 그리피 시니어-토니 페레즈-자니 벤치 등의 호타준족들로 구성된 빅 레드 머신 타선을 앞세워 서부지구 7회 우승과 월드 시리즈 2연패라는 대업을 달성했다.[187] 밥 펠러, 밥 레몬, 래리 도비 등이 팀을 이끌어 결국 우승까지 만들어냈다. 이 것이 인디언스의 마지막 우승일 줄이야..[188] 2019년 현재 클리블랜드의 마지막 월드 시리즈 우승.[189] 짐 토미를 앞세워 7년 동안 AL 중부지구 6회 우승을 달성했으나, 월드 시리즈 우승은 거두지 못했다.[190] 2017년에는 메이저리그 최다 연승 기록인 22연승을 달성했다.[191] 락토버로 불리는 기적의 가을야구를 만든 시기이다.[192] 필라델피아는 지구에 현존하는 프로스포츠 사상 최초 1만패 팀이라는 전통의 약체팀이다. 80년에는 명예의 전당 3루수 마이크 슈미트, 에이스 스티브 칼튼의 활약으로 우승. 1883년 창단 이후 97년만의 우승은 메이저리그 최장기간. 월드시리즈도 1950년이 마지막이었다.[193] 00년대 후반에는 07년 지구 우승, 08년 월드시리즈 우승, 09년 월드시리즈 준우승으로 최강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194] 타이 콥, 샘 크로포드의 활약으로 아메리칸 리그 3연패를 달성했지만 월드 시리즈 우승은 하지 못했다.[195] 시토 개스턴 감독의 지휘 하에 3년 연속 동부지구 우승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196] 지구 6회 우승과 1985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197] 워싱턴 세네터스 시절 첫 우승. 물론 이건 어느 팔 길쭉한 강속구 투수가 다 해먹었기에 가능했다.[198] 두번의 우승, 월드 시리즈 4회 진출, 7년 연속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진출. 다만 2019 MLB 사인 훔치기 스캔들이라는 큰 오점이 존재한다.[199] 한큐 브레이브스 시절[200]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