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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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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인
1.1. 저항자
2. 양심적인 군인
2.1. 애매한 인물
3. 유능한 인물
3.1. 군사 지휘관3.2. 육해공군의 에이스
4. 정계의 일원이 된 민간인5. 평범했던 인물
5.1. 군사 지휘관5.2. 기타 인물
6. 시대의 증언자7. 나치 독일을 탄생시킨 인물8. 슈츠슈타펠9. 나치를 열렬하게 따른 인물10. 외국인 협력자들11. 희대의 악인
11.1. 핵심 전범11.2. 의사(醫師)11.3. 수용소의 간수11.4. 학살자
12. 가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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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인

이 사람들은 나치에 몸을 담았지만 민간인을 구한 위대한 영웅들이다. 민간인은 ★로, 군인들은 ☆로 표기한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하얀 장미 등 직접적으로 민간인들을 구출한 것은 아니지만 나치에 저항했던 인물은 밑의 저항자들 항목에서 따로 서술한다.
  • 얀 자빈스키, 안토니나 자빈스카
    나치 독일이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점령하려 할 때 자빈스키 부부는 바르샤바 동물원의 관리자였다. 독일의 동물학자 루츠 헤크로부터 동물원을 나치군 식량 조달용 돼지 농장으로 개조하고 운영하도록 허락받았고, 자빈스키 부부는 이 돼지들의 사료를 구하기 위해 게토의 음식물 쓰레기를 가져오곤 했는데 이 방식으로 300여 명의 유대인을 구했다.
  • 존 라베
    일명 난징의 부처로 불리며 나치 독일의 인물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다. 난징 대학살 당시에 수많은 난징 시민들을 살린 인물이다. 그러나 말년은 영 좋지 못해서 가난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그의 일화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그 영화에서는 그가 나중에 반나치로 전향하게 되지만 실제로 그는 죽을 때까지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다. 그 때문에 “영화 결말을 반드시 반나치로 만들어야 했냐.“ 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 오스카 쉰들러
    비록 부정부패에 쩔어 있던 인물이었으나 자신의 재산을 몽땅 털면서까지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보호했다. 나치당 인사 중에서 존 라베와 함께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 알베르트 괴링
    헤르만 괴링의 동생이지만 형과는 반대로 나치에 부정적인 인물이었다. 형의 빽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을 구출하였고 그 공로로 전범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헤르만도 동생이 이런 일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고 그가 도움을 청할 때마다 아무 말없이 들어 주곤 했다.
  • 하인츠 지크프리트 오이겐 하이드리히(Heinz Heydrich, 1905년 9월 29일 - 1944년 11월 19일) ☆
    오른쪽의 인물이 하인츠 오이겐 하이드리히이고, 왼쪽은 그의 형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이다.생전 그의 얼굴[1]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남동생으로 무장친위대 중위이다.[2] 그러나 홀로코스트의 주도자였던 형과 달리 자신은 유대인과 집시족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그는 형이 자행한 일들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몰랐으나, 형이 암살당한 후 그 행적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고 괴로워하다 유대인 탈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게슈타포가 자기를 조사하고 있단 풍문이 돌자 권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후일 게슈타포 문건을 조사한 결과로는 하인츠의 유대인 구출은 게슈타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고 단지 종이 공급의 부족에 대한 형식적 조사였을 뿐이었다고 한다.[3] 자식으로는 아들인 페터 토마스 하이드리히(1931~2000), 하이더, 하르트무트와 딸인 이사, 잉그리드가 있으며, 페터는 자신의 큰아버지인 라인하르트의 전쟁범죄를 인정하였다.
  • 조르조 페를라스카
    나치 독일의 인물과는 상관없지만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들을 구출한 인물이기 때문에 여기에 올린다.
  • 빌헬름 호젠펠트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슈필만[4]을 구해준 그 독일군 장교다. 그 말고도 다른 유대인과 폴란드 사람들을 도와준 의인이다. 수용소를 담당했을 때는 자기 직권을 남용해 가족들이 자유롭게 면회할 수 있도록 했고, 스포츠 센터를 담당했을 때는 필요한 서류 등을 위조해 유대인과 지하 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던 폴란드인 등을 스포츠 센터 직원으로 만들어 숨겨 주었다. 한 가지 의문점이 드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선 호의적이었다는 것이다.[5] 다만 히틀러를 천재라고 칭하는 등 나치 독일의 행보를 지지하던 초반과는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일기와 편지에 조목조목 엄청난 나치 비판을 적어 놓았고, 슈필만을 만났을 때는 독일인인 게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가 소련군의 포로가 됐을 때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선처를 호소했고, 비록 풀려나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이후 2007년에 폴란드에서 두 번째로 높은 메달인 폴로니아 레스티투타를, 2008년에 야드 바솀의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 칭호를 받았다.
  • 하인츠 드로셀
    나치에 항거하여 적 포로와 유대인들을 구출시켰고 유대인 여인들을 구해냈다.
  • 라울 발렌베리
    마찬가지로 나치 독일 측 인물과는 상관없지만 나치에게서 유대인들을 구출하였으므로 여기에 올린다. 스웨덴의 사업가[6]로 유대인들에게 가짜 서류와 스웨덴 비자를 발급해 주는 식으로 2만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살리고, 1만 3천명의 유대인들에게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독일군 사령관인 아우구스트 슈미트후버 SS소장협박하여 거주지에 갇힌 유대인 7만 명이 악마의 손길에 끌려가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런 행적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당시 철강을 수입하던, 또한 인종적으로 매우 우수하다고 여겼던 스웨덴과의 우호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 이러한 발렌베리의 태도를 눈감아 주었다. 하지만 뒤로는 암살을 시도한 걸 보면 그의 행적이 매우 거슬리긴 했던 듯하다. 그리고 1945년 1월 17일, 발렌베리는 전후 유대인 문제 등으로 소련군을 찾아갔다 독일 스파이로 오해받아 NKVD에 체포되고, 그 후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수많은 증언과 행방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으나 결국 정확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 막스 리트케(Max Liedtke), 알베르트 바텔(Albert Battel)
    독일 국방군의 소령과 중위이다. 막스 리트케는 1894년 동프로이센에서 태어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을 나왔으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베테랑이다. 그는 초기부터 나치에 부정적이었는데, 1차 대전 이후 그라이프스발트의 한 신문 편집장으로 재직하며 나치를 성토하다 1935년에 자리에서 강제로 쫒겨나기도 했다. 그러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국방군에 징병되었고, 1942년에는 폴란드 프셰미실[7] 지역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한편 알베르트 바텔은 그의 부관으로, 1891년 슐레지엔 주에서 태어났다. 리트케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1차 대전에 참전했으며 2차대전 당시에는 이미 50줄에 들어선 상태에서 예비역 중위로 징집되었다. 그는 1933년 나치당에 가입한 나치당원이었지만 반유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치당원이 된 이후에도 많은 유대인 지인들과 교류했고, 심지어 독일의 탄압으로 어려운 형편에 처한 유대인 친구를 재정적으로 돕다가 당 법정에 섰던 적이 있으며, 리트케의 부관으로 프셰미실 지역에 도착한 이후에도 학창시절 급우였던 프셰미실 게토의 유대인 평의회 위원장 둘디크(Duldig)와 진심어린 모습으로 악수를 나눈 것 때문에 상부에게서 엄청난 질책을 받아야 했다. 후에 그들이 구해낼 유대인들에게는 다행히도 미쳐돌아가던 나치 독일 내부에 얼마 없던 반나치주의자와 반-반유대주의자가 정말 우연하게 사령관과 부관으로 만나 게토를 관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942년 7월 26일로 넘어가는 한밤중에 친위대가 프셰미실 게토의 유대인 주민들을 집에서 끌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들을 라인하르트 작전[8]에 따라 베우제츠 절멸수용소로 이송하여 살해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26일 새벽 5시경 리트케는 친위대 소위 아돌프 벤틴(Adolf Benthin)과 전화하면서 적어도 자신의 부대를 위해 일하는 유대인 남자들만은 이송에서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총사령부에 이의를 제기하겠다고 위협했는데, 이미 그는 무선으로 이 사건에 대해 총사령부에 보고한 상태였다. 한편 바텔은 이 보고에 대한 총사령부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유대인 게토의 유일한 출입구에 연결된 다리를 봉쇄하고 기관총을 사격할 것처럼 위협하여 친위대가 게토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친위대가 사람을 보내 항의했으나 바텔은 자신이 그 이전에 이미 프셰미실에 비상사태를 선포했기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고 반박했고, 리트케는 그 친위대원에게 자기 부관이 내린 명령이 정당함을 증명하여 돌려보냈다. 이는 친위대에게 쓰라린 굴욕이자 도발이었지만 법적 절차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기에, 친위대는 총사령부에 게토 봉쇄 해제를 요구할 높은 계급의 책임자를 크라쿠프에서 데려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친위대가 결국 뜻을 관철하리라 내다본 바텔은 자기 휘하의 군 차량들을 보내 이미 리트케의 사령부에서 일하고 있던 유대인 노동자 약 90명과 그 가족들 말고도 또다른 240명을 게토에서 데리고 나와 사령부 지하실로 보냈다. 바텔과 리트케는 상황을 제대로 예측했다. 봉쇄는 풀렸고, 7월 27일 이른바 '소개 작전'이 다시 시작되어 둘디크 평의회 의장을 포함한 남은 유대인들은 전부 베우제츠로 이송되어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그러나 친위대원들은 리트케의 부대가 막고 있는 국방군 사령부 내부로는 진입하지 못했으며, 그 덕에 그 안에 숨어 있던 수백 명의 유대인들은 목숨을 건졌다.

    한편 이 법적 문제 없는 항명 행위에 격노한 친위대는 사태를 일으킨 당사자인 바텔과 리트케에 대해 조사하여 곧바로 상부에 보고하였고, 나치당원임에도 유대인에 매우 동정적이었던 바텔의 과거 행적들로 인해 이 문제는 심각한 사안으로 분류되어 친위원수 힘러와 나치당 당수부장 보어만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후 이에 대한 보복으로 리트케는 프셰미실의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1 기갑군을 따라 캅카스로 보내졌다. 불행히도 그는 1945년 보른홀름에서 소련군에 생포되어 소련에서 저지른 전범 행위를 조사받으며 지내다 55년 억류 중 죽었다. 반면 바텔은 나치당원의 신분임을 감안해도 그보다는 매우 운이 좋았다. 힘러는 그를 일단 당적에서 제외하고 전쟁이 끝나면 그때 잡아넣기로 결정했지만 결국 나치가 패망함에 따라 바텔이 나치 법정에 서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나치당 고위층이 자신에 대해서 칼을 갈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1944년 심혈관 질환으로 인해 의병 제대했고, 종전 직전 국민돌격대로 재소집되었다가 소련군에 붙잡혔다. 전후에는 서독에서 살면서 전쟁 전 직업인 변호사로 복귀하려 했으나 탈나치화 재판정에서 나치당에 가입했던 전적이 문제가 되어 4급 전범 단순가담자(Mitläufer)로 판단되었으며, 이 때문에 법률가로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전후 7년이 지난 1952년에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근처의 하터샤임에서 사망했다. 이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기려 이스라엘에서는 그들에게 각각 1993년과 1981년에 열방의 의인 칭호를 부여했다.[9]
  • 쿠르트 게르슈타인
    쿠르트 게르슈타인은 나치 당원이 되기 전 독일 유수의 대학인 아헨공과대학을 나왔다. 1941년 초 SS가 되었는데 T4 작전으로 정신지체를 앓던 자신의 누이가 처형되자 SS내부의 일을 직접 알기 위해 일부러 자원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높은 학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고속승진을 거듭하여 1942년 중순 에는 절멸수용소의 방역을 담당하는 부서의 장이 되었다. 게르슈타인은 베우제츠트레블링카의 위생상태를 점검하고 아우슈비츠에 치클론 B를 납품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1942년 8월 19~20일 베우제츠와 트레블링카를 직접 방문한 뒤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베우제츠에서는 아래에 기술한 것처럼 3000명의 유대인 처형을 직접 목격했고 바로 다음날 견학한 트레블링카에서는 학살을 직접 목격하진 않았지만 광장에 엄청나게 쌓인 희생자들의 옷가지와 물품들을 목격했다.

    견학 후 며칠 뒤 그는 바르샤바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에서 스웨덴 외교관 예란 본 오테르를 만나 그가 본 것을 들려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국제사회에 퍼뜨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한편 바티칸,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와도 접촉해 홀로코스트 사실을 알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등 1945년 전까지 그의 노력은 거의 어떤 효과도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를 통해 그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고 1945년 4월 그가 연합국에 투항하자 연합국은 그가 목격한 사실을 보고서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따라 게르슈타인 보고서가 만들어져 홀로코스트를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는 SS였음에도 이런 행적 덕분에 프랑스에서 부드럽고 동정적인 대우를 받았다. 얼마 뒤 그는 셰르셔 미디 감옥으로 이송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거기서는 그의 행적을 전혀 몰랐는지 그를 여타 전범들과 같은 대우를 해버렸고, 결국 그는 7월 25일 감방 안에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

    한편 그가 죽은 후 게르슈타인 보고서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되어 헤르만 괴링한스 프랑크를 비롯한 전범 여럿을 지옥으로 보냈고, 1961년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에도 등장하여 아이히만을 지중해의 물귀신으로 만들었다.
  • 한스 뮌히
    나치 친위대소속 군의관이었으며, 아우슈비츠의 의사이기도 했다. 그 악명높은 요제프 멩겔레가 시작한 인간 실험에 참가했지만, 다른 의사들과 달리 일부러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인체에 무해한 실험을 고안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고문당하는걸 막았다. 다른 의사들과 달리 수용소에 새로운 포로가 들어올때 가스실로 보내거나 실험할 대상을 고르는 행위를 완강히 거부했으며, 자신의 실험 대상자로 선택된 사람들을 항상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며, 심지어 몇명이 도망칠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자신이 도와줬던 수용소의 포로들이 그를 변호해 주어서 무죄를 선고를 받고 2001년까지 장수했다.

1.1. 저항자

이 사람들은 나치가 온 독일을 공포로 물들이고 있을 무렵 그에 항거했던 진정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 바르트, 불트만 등이 참여한 고백교회의 설립자.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전쟁막바지인 1945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에 유학 중이었으나 머무르지 않고 히틀러의 광기로 가득한 독일로 자발적으로 왔다. 방송과 문서로 히틀러를 반대했기에 요주의인물로 나치는 주시하고 있었다. 유명한 말 중에 "만일 어떤 미친 운전자가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로서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자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이다" 한국 민주화 운동 당시 본회퍼는 하나의 모범이자 지침으로 여겨졌다.
  • 아우구스트 란트메서(August Landmesser, 1910~1944)★
    1936년 독일해군 훈련함 진수식 당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나치 경례를 하는가운데 혼자 팔짱을 낀 채 대놓고 비웃으며 구경하는 모습이 담긴 이 역사적 사진이 남아있다. 그는 본래 취직을 시켜준다는 감언이설에 홀려 1931년에 나치당에 가입했으나, 1935년에 유대인 여성 이르마 에클러와 연애를 하다 당에서 제명당했다. 그는 그해에 에클러와 곧 결혼식을 올리고 장녀를 낳는다. 2년뒤 아내와 자신의 아이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하고 수용소에 갈 처지가 되자 함께 제 3국으로 도피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인종오염죄로 체포당한다. 첫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자 나치 법원은 지금이라도 이혼을 한다면 무사할 것이라 경고하였으나, 사랑하는 아내와의 강제 이혼을 끝까지 거부하다 다시 체포되어 아내와 함께 강제수용소로 향한다. 에클러는 당시 수용되었던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학살당했고, 란트메서는 순혈 아리아인이였기에 살아남아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다. 하지만 곧 형벌부대에 징집당해 크로아티아 전장에서 실종되었고 작전 중에 사망 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 에릭 얀 하누센
    히틀러에게 선동술을 가르친 유대인. 히틀러가 폭주해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자, 전쟁을 일으키면 나치가 멸망한다며 말렸지만 결국 감옥에 쳐박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다.
  •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국방군 육군 대령.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던 장본인이며 상징격 인물로, 나치 독일의 양심[10]이라고 추앙받고 있다. ZDF 선정 위대한 독일인 49위에 선정되었다. 2차 대전기 나치 독일의 군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순위권에 들어있다.
  • 루드비히 베크
    국방군 육군 예비역 상급대장.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참여자. 쿠데타 성공 시 대통령으로 취임할 예정이었으며, 예비역이었음에도 현역 시절 인맥을 동원해 쿠데타를 지원했다.
  • 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국방군 육군 보병대장.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참여자. 파리 주둔군 총사령관으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파리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주동자였다.
  • 에리히 펠기벨
    국방군 육군 통신대장.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참여자. 사건 당시 통신선을 고의로 차단시켜 히틀러의 생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방해했다.
  • 프리츠 린데만
    국방군 육군 포병대장.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참여자. 여러 반나치 인사들이 주로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보수 반동적 인물들이었던 것에 반해, 특이하게도 민주주의, 공화제를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 빌헬름 카나리스
    독일 해군 대장이자 독일 국방군 정보국 아프베어의 국장이다. 본래 나치 지지자였으나 히틀러의 행위가 독일을 파국으로 몰고 갈 것을 깨닫고 영국과 접촉하여 히틀러의 광기를 막기 위해 애썼다. 또한 그는 반나치 조직인 검은 오케스트라의 창립 인원이며,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수많은 사람을 구하기도 했다. 그는 나치의 범죄행위를 목격하고 연합군에 끊임없이 정보를 넘겼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나치의 의심을 사서 가택 연금당했고, 그 여파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하지 못했지만, 이후 고문당한 가담자들의 입에서 카나리스가 언급되었고, 이로 인해 종전을 얼마 앞두고 디트리히 본회퍼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나치 독일의 양심이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다.
  • 헤닝 폰 트레슈코프
    국방군 육군 소장.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참여자. 그 이전에도 암살 시도를 실행했었다. 다만 전범 혐의가 있는데, 회프너처럼 집단 학살에 연루된 것은 아니지만 폴란드 청소년을 독일화한다는 명목의 유괴 작전을 실행한 전과가 있다.
  • 루돌프-크리스토프 폰 게르스도르프
    국방군 육군 소장. 자살 폭탄 테러로 히틀러 및 괴링, 힘러 등과 폭사하려 했다가 실패했고, 이때의 경험(?)을 되살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폭탄을 제공하였다.

2. 양심적인 군인

민간이나 포로 학살에 찬동하지 않았거나 반대했던 군인들이다. 전쟁은 반대하지 않았으나 군인으로서 양심은 지키려던 자들이다.
  • 오토 스코르체니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로, 2차 대전에 참전한 명장이며 이후의 행적도 이에 버금간다. 무장친위대 인물이었으나 민간인과 포로들에게는 친절했다.
  • 요제프 슐츠
    Josef Schulz(1910~1941.7.20). 세르비아에 주둔한 714 보병사단 소속 독일 국방군 병사.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주민들을 파르티잔을 도운 혐의로 즉결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 없다며 거부하였고 그 결과 전시 명령 불복종 죄로 주민들과 함께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가족들에겐 전선에서 싸우다 죽었다고 전해졌다. 군장을 해제한 체로 표적지로 걸어가는 슐츠의 모습이 담긴 역사적 사진이 남아있고 전후 서독 연방의회 의원에선 슐츠가 맞다고 확인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처형장소인 팔랑카에 기념관을 세우고 슐츠를 위대한 군인으로 추모하고 있다. 1973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자스타바 필름에서 요제프 슐츠라는 13분 길이의 단편영화도 제작하였다.
  • 아돌프 갈란트
    이름하여 창공의 신사라 불릴 만큼 공중전에서 불필요한 공격을 자제했으며, 발터 폰 라이헤나우의 강조 명령을 대놓고 씹고 무시할 정도로 전쟁범죄를 혐오했다. 당연히 전범재판에서 이렇다 할 처벌도 받지 않고 무사히 풀려났다.
  •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또 한 명의 방어전의 대가로 나치의 폭압적인 행위에 동조하지 않았다. 정치장교 명령에 동조한 것은, 부대 관리와 예방 차원의 목적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유능했으며, 네로 명령을 어기기도 했고, 대전 말에 베를린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 발터 모델
    마법사의 제자(zauberlehring).덕장이면서 명장이고, 인품까지 두루 갖춘 인물이다. 바르샤바 봉기 무력 진압 명령에 대해 나치의 폴란드 탄압으로 인한 결과에 무력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며 이를 거절하였다. 히틀러의 네로 명령을 거부하기도 하였으며, 대전 말에는 부대를 해산시키며 병사들을 제대시켰고, 나치는 범죄 집단임을 인정하였다.[11]
  • 에르빈 롬멜
    모델 원수와 함께 참 군인의 표본이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의 식수가 부족하자 장갑차에 백기를 꽂고 식수를 가져다 주어 독일군의 전통인 기사도 정신을 보여준 일화가 있다. 다만 이와 별개로 휘하 병사들에게는 거칠었다. 귀관은 병사들에 대한 복지가 너무 관대한 거 아닌가?라고 말한 적도 있다. 모델 원수의 내가 이끄는 장병들은 나의 아이들이야. (Meine soldaten sind meine kinder.)라는 말과는 대조적이다.
  • 한스 랑스도르프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그라프 쉬페의 함장으로, 1939년 9월 20일부터 10주간 통상파괴작전에서 9척의 상선을 격침시키는 성과를 내면서도, 민간인 선원을 죽이지 않고 항구에 풀어줄 때까지 함 내 승무원들과 똑같이 치료를 해 주는 등 인도적인 대우를 해 주었다. 이후 몬테비데오 항에서 그라프 쉬페가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수병들을 무의미하게 희생시킬 수 없다며 히틀러의 결사항전 명령에 불복종했고,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자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적국인 영국 해군이 참석할 정도였고, 최근에는 독일에서조차 영웅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 핫소 폰 만토이펠
    발터 모델을 따라 아르덴 전역을 수행하며 뫼즈 강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한 명장이며 전범 혐의도 전무했다. 나치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었다면 4급 단순가담자(mitläufer)로 분류해서 활동에 제약을 걸던 독일연방공화국에서도 국회의원 활동을 했을 정도였다.
  • 펠릭스 슈타이너
    슈츠슈타펠의 최고참 중 한 명이다. 영화 Der Untergang에서는 공격에 실패한 무능한 장군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비킹 사단을 이끌고 대활약한 명장이며 그의 전쟁범죄에 대한 의혹 역시 확실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발터 크뤼거
    무장친위대 측 인물로, 다스 라이히(Das reich) 사단을 지휘하여 쿠르스크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무장친위대(Waffen-Schutzstaffel) 측 인물이었으나 전선에서만 활동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1945년에 자결했다. 여담으로 형인 발터와 달리 동생인 프리드리히 크뤼거는 전범이다.
  • 에리히 하르트만
    에이스 파일럿이다. 격추한 전투기가 350대 이상이다. 소련에서 그를 전범으로 분류하여 10년의 형을 살았지만 훗날에 러시아 정부가 이는 위헌이었음을 인정했다.
  • 알프레트 리터 폰 후비키(Alfred Ritter von Hubicki, 1887. 02. 05. ~ 1971. 07. 14.)
    오스트리아계 장군 중 한 명이었다. 같은 오스트리아계 장군이었던 에르하르트 라우스처럼 전쟁범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인물이었다.
  • 프란츠 슈티글러
    독일 국방군 공군 소속 조종사다. 격추수 28기의 에이스 조종사로, 루프트바페의 다른 슈퍼 에이스들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후술할 B-17 폭격기를 영국 방향으로 유도해 준 휴머니즘 일화로 유명한 조종사이다.
  • 알렉산더 추 도나-슐로비텐 (Alexander zu Dohna-Schlobitten)
    동프로이센의 유명한 귀족가문인 도나(Dohna) 백작 가문의 후계자였다. 성 뒤에 붙은 슐로비텐은 오늘날 폐허로 남아있는 도나 가문의 성이었던 슐로비텐 성에서 나왔다.
    알렉산더는 30년대 내내 정치에 무관심했지만, 反나치 성향의 융커 계급 장교들이면서 가문의 일원이기도 한 쿠르트 폰 플리텐베르크 (Kurt von Plettenberg)와 쿠르트의 삼촌인 하인리히 추 도나-슐로비텐 백작 (Heinrich Graf zu Dohna-Schlobitten)[12] 등의 영향을 받아 나치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2차 대전이 터지자 장교로 입대한 알렉산더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마지막 탈출 비행기로 간신히 살아돌아온 고생을 했고, 1944년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되었다.
    1944년 3월에 사보타지 공작을 위해 이탈리아 라스페치아에 침투했던 15명의 미군 특공대를 독일군이 체포한 후, 상부로부터 이 15명의 미군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상관인 안톤 도슈틀러와 함께 받았다.
    포로 사살 명령이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 것을 깨달은 알렉산더는 단호하게 이 명령을 거부한 반면에 직속 상관이었던 도슈틀러는 이 명령을 곧이곧대로 따라서 미군 포로들을 사살하였다.
    알렉산더는 명령거부죄로 곧바로 파면되고 고향인 동프로이센으로 돌아갔지만[13][14] 도슈틀러는 나중에 미군에게 체포되어 포로학살 혐의로 총살되었다.

2.1. 애매한 인물

전범들보다는 양심적인 인물에 가까우나 양심적인 인물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인물들이다.
  •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유고슬라비아에서의 학살 묵인 건만 없었다면 양심적인 군인으로 분류될 수 있었을 것이다.[15] 그러나 이와 별개로 점령지 유화 정책을 펴고 인종주의에 회의적이었으며 이를 위해 참모의 조언까지 받았던 점은 높이 평가받는다.
  • 하인츠 구데리안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국방군의 나치화를 주도한 점으로 인해 이 항목에 넣는다. 그렇지만 전쟁범죄의 발생을 억제하고 카틴 학살을 밝혀낸 중부집단군의 원수인 보크 원수에게 감사함을 표했고[16]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도 무혐의로 풀려났다. 독일인이라면 무조건 유죄 판결을 내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소련 조차 이 사람의 기소를 중지했을 정도. 자신도 잔인한 짓은 꺼렸다.[17] 거기다 연좌제로 갇혔던 에리히 펠기벨의 가족을 빼내주기도 했다.
  • 헬무트 폰 판비츠
    유고슬라비아 빨치산 진압 과정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나 점점 정도를 넘어서자 부하들을 강하게 단속했으며 히틀러에게 슬라브족을 열등 인종으로 분류해서는 안된다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 에리히 레더
    카를 되니츠 이전의 해군 제독으로 독일 해군의 아버지로 불린다. 베저위붕 작전을 제안하여 노르웨이, 덴마크 침공전 및 대서양 해전에서 활약했다. 유능한 해군 장성이었지만 히틀러와의 의견 충돌로 해임되었다. 그가 한 말로 "이제 독일 해군은 멋지게 죽을 일만 남았다." 라는 말이 전해진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중도에 출옥했기에 전범으로 분류되지만, 후임인 카를 되니츠와 달리 이 사람을 전범으로 분류하기엔 그의 전범 행적이 불분명하다. 위의 헬무트 폰 판비츠와 마찬가지로 전범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완전히 낙인찍기는 애매하다.

3. 유능한 인물

3.1. 군사 지휘관

나이 순, 경력 순, 여기에 계급까지 고려하여 배치한다.
  • 귄터 폰 클루게
    부하들과 사적인 대화를 거의 하지 않을 만큼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에 여러 모로 가까이 하기 힘든 사람이긴 하지만, 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 정열적이었고 특히 전술적 임기응변 능력이 탁월한 지휘관인 인물이다.
  • 발터 폰 브라우히치
    블롬베르크가 물러나고 라이헤나우, 룬트슈테트 등의 후보를 제치고 임명된 육군 총사령관으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 승리의 일등 공신이다. 브라우히치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육군 총사령관에서 물러나고 히틀러가 이 자리를 겸임하면서 총통 직할 명령으로 인한 문제가 종전까지 커지게 된다.
  • 빌헬름 리터 폰 레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북부집단군 사령관 재임 당시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지휘, 포위된 소련군과 민간인들이 아사하도록 방치하는 작전을 실행했는데, 그 도중 회의감을 느낀 것인지는 몰라도 1942년 1월 16일에 스스로 사임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3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기소 기간이 3년이 되었기에 실질적인 수감 생활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임 후 예비역 생활 중에도 나치의 프로파간다에 참여한 전력이 있고, 사적으로 히틀러에게 수십만 라이히스마르크를 하사받기도 했으며 면세 특권까지 누렸다.[19]
  • 알베르트 케셀링
    유능한 포병 장교 출신으로 공군 확대 정책에 따라 전출, 슈투카를 적극 운용한 전술 폭격으로 초기 독일군의 대승리에 기여했다. 다른 전역에서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북이탈리아에서 2년 간 연합국의 공세를 막아낸 것은 그의 지휘력을 증명한다.[20] 부하로부터 평판도 좋아서, "알베르트 아저씨"나 "웃는 알베르트"라고 불렸다. 그러나 서부전선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후에는 무기력하다 못해 히틀러의 오판을 방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대단히 관료주의적인 친나치 장성인지라, 북아프리카 전선을 상실하는 데 제대로 한 몫했다.[21]
  • 에르빈 폰 비츨레벤
    낫질 작전의 성공을 이끈 사람이자 반나치 군인으로 원수 신분임에도 발키리 작전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 일로 피아노 갈고리 줄에 묶여서 처형 당했다. 여담으로 히틀러는 이들의 처형 장면을 비디오로 찍게 했으며 그것을 보고 즐거워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고 한다.[22]
  • 페도어 폰 보크
    중부집단군 사령관 재임 당시, 클루게 원수와의 통화에서 학살 명령에 반대하는 내용이 부하 장교들의 진술로 확인되었다. 동부전선의 다른 집단군에 비해서는 중부집단군 점령 지역에서 인종 범죄가 적었고, 오히려 카틴 학살을 밝혀낸 것도 중부집단군 사령부이다.
  •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매우 공격적인 지휘로 유명한 기갑 지휘관이다. 유고슬라비아 왕국 점령지에서 독일 괴뢰국을 만들었고 이들이 학살을 저지르는것을 묵인한 데에 대한 책임으로[23] 10년 형을 선고받았고, 한 달에 한 번 가족들에게 엽서를 쓰는 것조차 마지막 7개월 동안에만 허락되었다. 사후 매장 장소조차 기록이 없다.
  • 에른스트 부슈
    타지에서 옥사한 사람 중 클라이스트와 더불어 계급이 가장 높다.
  • 베르너 폰 프리치
    힌덴부르크의 추천으로 독일군의 참모총장이 된 인물이다.일찍 사망했지만, 힌덴부르크가 그를 히틀러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그가 뛰어나다는 증거이다.
  • 에리히 폰 만슈타인
    독일군 최고의 두뇌를 가졌다고 평가받는다. 프랑스 침공 당시 낫질 작전을 입안하여[24] 독일군이 단 6주만에 프랑스를 점령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1944년 초까지 독소전쟁에서 활약했다. 회고록으로는 잃어버린 승리(Verlorene Siege)가 있다. 오늘날에도 어떤 원수와 함께 나치 독일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받는다. 전범임에도 불구하고 전쟁범죄에 약간의 연결이 있으면 진출을 제약하는 독일연방공화국에서 참모 활동을 했을 정도로 전술적으로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다만 전략적 식견은 형편없었고, 히틀러에게 과잉충성한 탓에 동료들로부터의 평판은 나빴다.
  • 하인츠 구데리안
    기갑전의 아버지. 기갑이 주력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반대하는 보수파들과 대립한 탓에 동료 장성들과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단지 이론에만 머물지 않고 스스로 기갑 부대를 지휘하여 폴란드, 프랑스 침공을 성공시킨 장본인이다. 지금도 회자되는 독일 전차 군단의 이미지는 구데리안이 만든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차의 엔진은 주포만큼이나 강력한 무기이다.(Der Motor des Panzers ist ebsenso die starke Waffen wie die Kanone.)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 발터 모델
    프리츠 폰 로스베르크 장군의 계보를 이은 2대째 방어의 사자, 방어전의 마스터이다. 동부전선에서만 적어도 다섯 번 이상 독일군을 구해 낸 수호자이자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서부전선에서 승리를 거둔 유일한 인물이다.
  • 카를 되니츠
    당시 나치 독일의 유보트 함대 사령관직을 맡다가, 해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뒤 뜻밖에도 2대 대통령으로 히틀러에게 지목되었다.[25] 그 후 이런저런 꼼수로 나치 독일의 수명을 연장시키려고 하였으니 전부 실패하고 독일의 항복 과정을 마무리한 인물이다. 아이큐가 138로 나치 독일 전범 중에서 꽤나 높다고 한다.
  • 에르빈 롬멜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며 전쟁의 역사를 알던 모르던 간에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만한 유명 인사.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서 암살 시도를 히틀러에게 알리지 않은 직후 자신과의 직접 대면을 갖고 자신은 의혹에서 자유롭다는 해명을 하라는 요구를 거절하였기에 자살을 강요받게 된다. 이 때 롬멜을 죽게 한 장본인은 빌헬름 부르크도르프이다.[26]
  •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독일 역사상 전쟁 중 유일하게 항복한 육군 원수이다. 일찌감치 육군참모총장 감으로 인정받은 우수한 참모장교였고, 첫 야전 지휘관인 6군 사령관으로서도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의 승리, 청색 작전에서의 과감한 진격으로 전공을 인정받았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참패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2차 대전 당시에도 전후에도 히틀러의 절대 사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 것에 비난이 많았으나 냉전의 종식 이후 공개된 당시 문서들에 따르면 이는 파울루스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파울루스는 일개 군 사령관이고, 집단군 사령부 차원에서 구체적인 퇴각 지시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독일군 최연소 원수로 그 유명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사촌동생이다. 그의 첫 번째 전장은 하필이면 만프레트가 전사한 1918년 4월 21일의 하늘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기록한 격추 수는 8기. 스페인 내전에서의 실전 지휘를 통해 공군의 지상 폭격 전술을 확립했고, 2차 대전에서는 전술 폭격 부대 지휘관으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맹활약했다. 집단군사령관들이 서로 리히트호펜의 부대를 휘하에 두려고 할 만큼 막대한 전과를 올렸으며 모스크바 전투의 패배로 고위 장성들이 해임당하는 상황에서도 리히트호펜은 1942년 2월에 상급대장으로 진급한다. 제1차 르제프 전투에서 독일군이 역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폭설이 몰아치는 악천후에도 적재적소의 지상 폭격을 성공시킨 리히트호펜 부대의 전과에 힘입은 것이다.
    더운 여름에는 군복 상의를 벗어둔 뒤 셔츠 차림으로만 비행기를 몰고 다니며 정찰을 하고 야전에서 지휘관 회의에 참석하는 등 무척 활동적인 기상의 소유자. 그가 뇌종양에 걸려 일찍 예비역에 편입되지만 않았으면 독일 공군 전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후배 조종사인 아돌프 갈란트 중장이 "각하께서 독일 공군 총사령관이었으면..." 하고 탄식했을 지경.[27] 만슈타인도 그를 루프트바페 최고의 지휘관으로 극찬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민간인에게 가차없이 소이탄을 투하하는 것을 즐긴 전범이기도 하다.
  •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제1전투비행단(JG1)'[28] 소속으로 총 28기 격추, 푸르 르 메리트도 받은 공군 에이스였다. 전후 뮌헨의 항공우편국에서 일하다가 1920년의 어느날 그 분을 뮌헨->베를린 항공편 승객으로 태워주면서 나치당과 인연을 맺게 되고, 1923년 뮌헨 폭동에도 참가하였다. 1933년부터 괴링루프트바페 창설을 도왔고 이듬해 조종사 학교 초대 총장에 임명된다. 전차전으로'만' 유명한 쿠르스크 전투에서 휘하 폭격기들의 활약으로 곡엽검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5년 히틀러가 벙커 안에 있을 때 공군 원수로 진급했다. 이유는 괴링이 배신을 때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미군에게 항복하면서 "난 공군 원수지만 내가 지휘할 공군은 없다."고 씁쓸하게 말했다고 한다. 직후 카를 되니츠 원수와 만남을 가진 지 얼마 안 되어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되니츠는 이 마지막 만남에 대해 1958년 펴낸 그의 전쟁 회고록 “10년 20일”에서 "우리는 매우 깊은 감정으로 헤어졌다"라고 술회했다.
  • 한스 크렙스
    나치 독일의 마지막 육군 참모총장이다.[29] 몰락에서는 지도와 물고기 성애자와 히틀러에게 갈굼 당하는데다 그다지 중요시되지도 않는 인물이지만 발터 모델을 따라서 르제프 전투의 판세를 역전시키기도 했다. 또한 마지막에는 베를린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
  • 빌헬름 카나리스
    독일 해군의 제독이자 독일 국방군 정보국 아프베어(Abwehr)의 국장, 그리고 반나치 인사로 전쟁 중에도 끊임없이 MI6에 정보를 넘기고 히틀러 암살계획을 주도하였다. 다만 펠릭스 작전에서 독일을 완전히 패망으로 몰아넣으려 했던 점에서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군인이라면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국가 그 자체에는 충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모습도 보였다. 이러한 면모는 오토 스코르체니 중령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언급했다.
  • 오토 스코르체니
    별명은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다. 온갖 유명 특수 작전의 지휘관이자[30] 주역으로 활약했으며 전후 행적[31]도 이에 버금간다. 거기다 의외로 민간인이나 포로에게도 친절했다고 한다. 그가 스페인국으로 도망간 이유는 연합국이 그를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내려 놓고도 풀어주지 않고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32]
  • 알프레트 요들
    나치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 작전부장이며 사실상 3군의 총참모장격 임무를 수행하였다. 나치 독일의 패배가 다가 왔을 때 연합국과의 항복협상을 주도하였으며 첫 번째 항복 협상을 이끌고 서명하였다. 헌데 상관 빌헬름 카이텔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딸랑이었다. 롬멜이 북아프리카 전선의 지원을 요청했을 때 거절한 원흉이다.[33]
  • 에리히 회프너
    히틀러 암살 및 쿠데타(발키리 작전) 계획 적극 가담자로 유명한 기갑 부대 지휘관이다. 뛰어난 지휘력과 암살자 그룹의 일원인 것과는 별개로 아인자츠그루펜과의 연관 가능성을 부정하기 힘들다.
  • 에르하르트 라우스
    오스트리아 출신 장성으로 상급대장에 오른 3인 중 한 명이다. 특히 라우스는 일찌감치 나치에 동조한 로타르 렌둘릭 상급대장과 달리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독일 군대에 편입한 외부인이었기에 진급이 상당히 늦었지만 침착하고 이지적인 성품으로 상관과 부하들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인 평가를 받으며 높은 전공을 세워나간다. 제1차 르제프 전투와 겨울폭풍 작전에서 맹활약했고 이후 남부 집단군의 일원으로 계속되는 퇴각 작전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 요제프 하르페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와 함께 일찌감치 구데리안의 기갑화 정책에 동조한 장성. 중부집단군의 르제프 고기분쇄기 전역과 쿠르스크-오렐 전투에서 가장 높은 전공을 세운 장군 중 하나로 상급대장까지 진급했다. 구데리안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인해 무너진 동부전선에서 발터 모델 원수와 하르페 장군이 집단군 사령관으로 독일군을 지켜낸 것에 깊은 신뢰를 나타내고 있다.
  • 핫소 폰 만토이펠
    전역 후에 정계에 입문하여 한때 적장이었던 아이젠하워와 악수를 나누고, 서독 연방군의 부활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아르덴 대공세 당시 기갑 부대 선봉장으로 활약했으며 그의 진격은 후일, 미군의 분석에 따르면 '주어진 여건을 초월하는' 성과를 보였다고 극찬했다.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조카딸과 결혼하는 등 여러 모로 명문 군인 가문 출신이다. 굉장히 작은 키 덕분에 친구들을 그를 '꼬맹이(Kleiner)'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했는데 서류 상으로 158cm였다.
  • 에리히 바렌핑거
    갈란트 다음으로 최연소 장성이며 세바스토폴 공방전, 캅카스 산맥 전투 등에 참가하며 놀라운 공훈을 세웠다.훗날 베를린 전투에서 자살한다.
  •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독일 중부 집단군이 자랑하는 또 한 사람의 방어전 명장. 독소전쟁에서 활약했고 제4군 사령관으로 주코프의 공세를 패퇴시킨 경험도 있으나 병약한 체력 탓에 건강 상의 문제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베를린 전투에 비스툴라 군집단 사령관으로 대활약, 젤로 고지 전투에서 또다시 주코프와 추이코프가 직접 지휘하는 부대를 40:1의 교환비를 자랑하며 승리했다. 히틀러의 네로 명령을 거부하고 베를린의 다리를 보존했으며, 베를린 시가지의 파괴를 가능한 한 막기 위해서 전투 행위조차 자제할 정도였다. 비스툴라 군집단 사령관이 하인리히 힘러였을 당시 SS 병사들조차 실력도 없는 지휘관이라며 이에 불만이 많았는데, 하인리치로 교체되자 '유능한 국방군 장성이 온다'며 SS병사들도 오히려 반가워했다고 한다.
  • 헤르만 발크
    뛰어난 기갑부대 사령관으로 그리스 올림푸스 산을 독일군 최초로 돌파했으며, 그 이후에도 겨울폭풍 작전 때 치르강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봄의 각성 작전 등에서 활약했다. 전후에도 대 소련군 전문가로서 역량을 인정받아 1979년부터 1980년 초까지 미 육군참모대학에서 이뤄진 NATO군 연합 참모 세미나에 패널로 참여하기도 했다.
  •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고집이 센 인물이었던 탓에 아프리카에서 롬멜과 자주 다투었고, 이 때문에 저평가 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화성 작전에서 주코프와 코네프가 지휘하는 소련군을 상대로 초기방어에 성공하고 후에는 주코프가 후퇴하게 만들었다!!! 이것만 봐도 유능한 인물이다.
  • 헤르만 호트
    거의 모든 일반인이 모르고 있지만 프랑스 침공, 낫질 작전에서 활약한 구데리안급 장성이다. 덕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학살 명령에 찬동한 전범이기도 하다.
  • 막시밀리안 프레터피코
    스탈린그라드나 바그라티온 작전, 부다페스트 포위전 등 여러 곳에 구원투수로 불려갔던 장성이다.
  • 쿠르트 마이어
    3차 하르코프 공방전이나 노르망디 등에서 활약한 SS 장성이다. 독일인에게는 자비로워서 히틀러 유겐트 탈영병을 뺨만 치고 복귀시키기도 했다.[34] 그러나 유대인이나 연합군 포로 등에게는 가혹했다.
  • 에두아르트 디틀
    독일 산악사단의 수호신이다. 노르웨이 방어전, 핀란드의 계속전쟁 등에서 산을 타며 활약했으나,1944년 비행기 사고로 전사한다. 군인이기 이전에 전문 산악인으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 로타르 렌둘릭
    에두아르트 디틀의 뒤를 이어 핀란드 주둔 산악사단을 이끈 장성이다. 피해가 있기는 했지만 핀란드 주둔 독일군을 노르웨이로 철수시키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대통령이된 만네르하임과의 밀약으로 상당한 거리를 안전하게 철수했으나 결국 소련의 압력에 굴복한 핀란드와 라플란드 전쟁이 벌어지고 만다.
    다만 남동유럽에서 군 사령관을 지내던 시절에 히틀러의 포로처형 명령 수행의 책임을 물어 전범재판에서 유죄를 받았다.
  • 발터 뱅크
    봄의 각성 작전 때 독일군으로 소련군을 돌파해낸 장성이다. 히틀러의 명을 받아 베를린 공방전 당시 동진했지만 그것은 민간인을 구해내려 한 행동으로 "베를린은 더이상 아무것도 아니고 제국도 없다"[35]라고 하는 등 개념인이기도 했다.
  • 카를 아돌프 홀리트
    이지움 포켓, 스탈린그라드, 하르코프 등 여러 곳에서 스탈린에게 좌절을 안겨준 장성이다.
  • 펠릭스 슈타이너
    몰락에서 공격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히틀러의 분노를 사지만[36] [37]SS의 가장 유능한 지휘관으로 전쟁범죄도 의혹만 있지 증거가 없는 논쟁의 대상이기도 한다.

3.2. 육해공군의 에이스

  • 아돌프 갈란트
    추축국, 연합국 통틀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장성이 된 인물들 중 한명이다.
  • 한스 울리히 루델
    지상 격파 세계 1위다. 현재도 지상 공격기 가지고 기록이 진행 중이나 아직까지 이 사람이 격파한 만큼 실적 올린 사람은 없다. 그리고 적 공군기 격추도 5대를 찍는 데 성공했으니 사전상 에이스의 의미에도 부합한다.
  • 쿠르트 크니스펠
    전차 격파 대수 공식 168대, 비공식 기록 195대(!)로 1위이다. 체코에서 태어난 독일인이다. 생전에 아나키즘에 가까운 사상을 가지고 있어 동료들에게 격파 기록을 양보하였다. 격파 대수에 비해 계급이 낮은 편인데 아인자츠그루펜 장교를 폭행한 사건 등 나치에 대하여 반항적이었기 때문에 최종 계급은 상사에 불과했다.
  • 오토 카리우스
    전차 격파대수 150대 이상으로 2위다. 1944년과 1945년은 독일군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는데도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에 더욱 높은 전과를 달성하며 살아서 종전을 맞이하였다.
  • 미하엘 비트만
    전차 격파 대수 138대로 5위다. 대전차포 132문까지 포함하면 1위다. 사실 대전차포는 기본적으로 위장을 하여 쏘기 전까지 위치를 알기 힘든 경우가 태반이다. 오토 카리우스도 대전차포 한 대의 가치는 전차 2대의 가치가 있다고 말할 정도다. 실제로도 많은 전차들이 매복한 대전차포의 먹이가 되었다.
  • 에밀 자이볼트
    2 SS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소속이다. T-34 에이스로 종전까지 6~70대 이상을 격파하였다. T-34로 가장 많은 전차를 격파한 인물이다.
  • 에른스트 바르크만
    SS 판터 전차 에이스다. 쿠르트 크니스펠과 함께 보기 드문 부사관 에이스다. 아르덴 대공세 당시 판터 전차를 탑승하고 미군 부대를 유유히 돌아다닌 만헤이 활극과 교차로에서 셔먼 9대를 격파한 바르크만의 교차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전후 소방관으로 일했으며 2009년에 사망했다.
  • 카를 쾨르너
    쾨니히스티거 전차 에이스다. 소련 기갑사단을 단독으로 급습하여 39발을 발사하여 39대의 적 전차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전쟁 말까지 후퇴하면서도 100대 이상의 소련군 전차와 29문 대전차포를 격파했다. 전후까지 생존하여 1997년 8월 8일 사망했다.
  • 발타자르 볼
    격파 대수 100대다. 애칭은 '발티'. 미하엘 비트만의 포수다. 비트만의 격파기록을 논할 때 볼을 빼놓을 수 없을 정도다.
  • 귄터 프린
    유보트의 전설로 불리는 유보트 함장이다. U-47번 유보트의 함장으로 있었으며 흔히 스캐퍼플로[38]에 직접 자신의 U보트를 이끌고 들어가서 전함과 해상 경비정 등 2척을 격침시키고 유유히 빠져나온 인물로 유명하다.[39]

4. 정계의 일원이 된 민간인

  • 얄마르 샤흐트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라이히스방크 총재로 엄청나게 유능한 천재였다.[40] 전범 재판에서 아이큐가 143이 나왔을 정도로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을 잡을 정도로 유능했던 인물이지만 히틀러를 만나서 팔자가 꼬였다. 전범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1970년 6월 3일 사망했다.
  • 레니 리펜슈탈
    그 유명한 선전 영화 의지의 승리의 감독으로 나치즘 선전 영화를 찍었다. 그녀는 분명 뛰어난 재능을 가진 감독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재능을 좋지 못한 곳에 써 먹었기에 두고두고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죽기 직전 그녀는 "히틀러를 만난 건 내 일생의 가장 큰 실수였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 알베르트 슈페어
    "히틀러에게 친구라는 존재가 있었다면 그것은 알베르트 슈페어일 것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히틀러와 친했던 인물이며 독일의 건축가이자 군수장관이였다. 훗날 히틀러가 세계정복을 하면 세울 세계 수도인 '게르마니아'라는 도시를 설계한 사람이다. 그리고 네로 명령을 거부하는 등 나름 상식적인 면도 있었다.
  • 마르틴 하이데거
    철학계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지만 나치 독일에 찬성했던 흑역사가 있다. 그래도 나치 독일에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지 않아서 여러 모로 논란이 있다.
  • 카를 슈미트
    독일의 법학자이자 나치 당원으로 헌법의 수호자 논쟁, 헌법학에서의 결단주의 등 민주주의의 취약점 등을 예리하게 파헤친 명저들을 남겼으나, 한편으론 자신의 사상을 나치의 이념적 기반으로 생각했고, 총통의 정당화가 특히 독재자의 개념을 통한 법철학에 대한 고려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슈미트는 나치 독일 체제의 정당성과 법체계를 확립해 준 인물이다. 그는 ‘장검의 밤’을 “가장 고결한 행정적 정의의 형태(höchste Form administrativer Justiz)”라고 정당화했으며. 극단적 반유대주의자로서 "독일 법이 유대 정신(jüdischem Geist)의 오염에서부터 깨끗해져야 한다", "유대인 학자가 발표하는 모든 논문에는 유대인임을 상징하는 작은 심볼이 부착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테오도어 모렐
    히틀러의 주치의이다. 히틀러를 마약 중독자로 만들어 졸지에 나치 독일의 패망에 기여한 인물이다. 의사로써의 실력은 돌팔이에 가까웠지만, 생체실험 등 인륜을 저버리는 짓은 절대 반대하였다. 나치의 열렬한 신봉자였지만 전쟁범죄에 가담하지 않았고 출세를 위해 부정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보니 뇌졸중에 시달리던 상태를 감안해도 감옥에 가둘 명분도 죄목도 없어서 운 좋게 집에서 말년을 보냈다.
  •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fmann) (1885년 9월 12일 - 1957년 12월 15일)
    히틀러의 사진사로 히틀러의 선전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히틀러와 처음 만나게 된 일화는 꽤나 흥미롭다. 무명의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이 미국 신문사로부터 1000달러를 약속받고 몰카를 시도하다 돌격대원들에게 걸려 두들겨 맞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현장을 목격한 히틀러는 웬일로 흥미가 있었는지 그를 불러 얘기를 나눴고, 그에게 자기 사진을 독점적으로 찍을 수 있는 파격적인 권리를 약속하고 대신 그 수익 중 10%를 받게 되었다. 호프만의 사진은 대박을 터뜨려서 본인도 돈방석에 앉았지만 이 역시 히틀러의 축재에 한 몫 단단히 하게 된다. 우리가 자주 보는 히틀러의 사진 중 상당수가 바로 호프만의 작품이다. 그리고 히틀러만이 아니라 의외로 연합군 측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는데 바로 테오도어 모렐을 히틀러에게 소개한 것이다.... 나치가 패망한 후 나치당원으로 일하면서 폭리를 취한 죄로 10년 징역을 받는다. 1957년 12월11일 뮌헨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 에른스트 한프슈탱글(Ernst Hanfstaengl) (1887년 2월 2일 - 1975년 11월 6일)
    나치당 초기 인사로 히틀러의 중요 후원자 중 하나였다. 키가 190cm가 넘었고 영어도 능통했고 학벌도 좋아서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예술에도 조예가 있었는지 피아노를 굉장히 잘 쳤으며, 뮌헨에서 미술 전문 출판사를 운영했다. 게다가 부모님들이 두분 다 대단한 미국 명문가 출신이었고 본인도 엄청난 부자였다. 또한 히틀러에게 뮌헨 상류층 인사들을 소개하고 국내외 언론과의 인터뷰도 잡아주었다. 그러나 잘난 놈 싫어하는 괴벨스와 많이 다투었고. 이후 히틀러의 과격한 행보에 불만을 품어 마찰을 빚었으며 이후 나치 독일이 들어서자 신분의 위협을 느끼고 나치의 열렬한 팬이 된 아내와 자식을 두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적국인으로 투옥되었으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워싱턴으로 망명, 연합군 고문이 되었다.
    미드 《히틀러 : 악의 탄생》에서는 사실상 또 다른 주인공쯤 되는 역할을 맡았는데, 처음에는 유대인 친구들이랑도 사이 좋게 지내고 나름 고위층으로 적당히 살다가, 한 유대인 친구가 '히틀러라는 또라이가 있는데 한 번 구경이나 하러 가자'고 제안해서 같이 갔다가, 그 연설을 듣고 유대인 친구는 썩은 표정을 하는 가운데 본인은 박수를 치며 매료되어 버렸다. 이후 개인적으로 히틀러를 찾아가 자신이 알고 있는 고위층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후원까지 받게 해주는데 심지어 그 멤버 중에 괴링도 있었다. 이후 나날이 세력을 더해가는 나치에서 공보부 장관직까지 받지만 자신보다 더 나치에 열광하는 아내와 점차 광기를 띄기 시작하는 나치에 회의감을 느끼고 독일을 떠난다.
    사실 막판에 정신을 차린 것 뿐이지, 이 인간이 위에서 말한 고위층과의 만남을 주선하여 아돌프 히틀러가 재벌들의 빽을 업고 세력을 확장하였으므로 나치에 상당한 도움을 준 인물이다.
  • 그레고어 슈트라서
    독일의 정치가이며 나치당의 간부였다. 그의 사상은 공산주의에 가까웠기에 당내 좌파를 이끌었다. 그렇기에 우파였던 괴링과는 대립이 심했다. 한편, 나치당 내에서도 꽤나 상식인이었다고 하며 그 미치광이 집단 중에서도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장검의 밤 때 숙청 당했다.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20세기 초중반을 대표하는 지휘계의 거장으로 지금까지 회자되는 인물이다. 나치당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나치당이 원하는 대로 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었다. 일단 나치 수뇌부들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매우 나빴고,[41] 유대인 음악가들을 보호해주다가 엉뚱하게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자로 몰려(...) 게슈타포에게 체포될 뻔하기도 했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나치당에 협력하고 나치의 사상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 음악가지만 유대인 며느리를 비롯한 주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치의 협력자의 자세를 취해야 했다는 동정 여론도 있고 국가 음악국 총재로서 공공연한 반유대주의를 표명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치 부역자' 로 모는 것을 부당하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실제로 슈트라우스는 총재를 역임할 동안 나치의 반유대주의 캠페인에는 별 신경도 쓰지 않았고 오히려 나치의 신경을 거슬렀던 파울 힌데미트 같은 음악인들을 옹호하는 등의 행동으로 괴벨스를 자주 빡돌게 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나치에 협력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의견이 많다.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그의 지휘를 최고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무작정 까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음악적인 평가가 엇갈리기도 하며 제 발로 직접 나치당에 입당한 기록이 밝혀졌다. 굳이 말하자면 대단한 나치 수괴는 아니었더라도 파시스트 사상의 동조자였다는 비판이 있다.
  • 발터 도른베르거
    폰 브라운의 상관으로서 독일 로켓개발의 총책임자. 친위대 소속이었던 브라운과 달리 그는 독일 국방군 소장이었으며 이에 따라 페이퍼클립 작전의 대상자였지만 재판에 회부된다. 베르너 폰 브라운의 죄까지 덮어 썼다는 의견도 있다.
  • 베르너 폰 브라운
    독일 출신의 미국인 로켓 과학자이며 나치 독일에서 V2 로켓을 처음 개발하였고 이후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 미국으로 자리를 옮겨 머큐리 계획, 아폴로 계획의 우주개발을 책임졌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나치의 잔혹 행위에는 모두 눈을 감아버렸다는 비판이 있는 과학자이다.

5. 평범했던 인물

5.1. 군사 지휘관

  •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제1차 세계 대전에선 참모장교[42]로 활약하고 1936년에 독일 국방군 최초원수계급에 올랐으나 33살연하인 에르나 그룬과의 스캔들로 1938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군에서 물러나 정작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은 인물. 흔히 히틀러의 전쟁의사에 반대를 표한 인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킨 정의로운 장군으로 알려진 모양이지만, 사실 그의 별명은 아첨하는 사자 또는 고무사자였다. 그는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 뺨치는 열성적인 나치였다. 그는 1929년에 어느 장군보다 먼저 나치를 접했고, 당시 사회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그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히틀러에게 충성을 서약하기도 했다.
  • 에리히 레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해군 제독이다. 해군의 최고참 1차대전때 부터 유틀란트 해전 등 주요 해전에 참여하였고, 전후에는 해군의 재건에 힘썼지만 히틀러가 전쟁을 시작했을 때는 "이제 해군은 멋지게 죽을 일만 남았다."고 한탄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받았지만 1955년 병보석으로 석방되었고 그 후 자서전을 쓰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60년 11월 6일 사망했다.
  • 프리드리히 프롬
    나치 독일의 군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예비군 총사령관이었으며 히틀러에 대한 충성과 암살 계획 사이에서 기회주의적인 처세술을 발휘하였으나 결국 의심받은 끝에 처형되었다.
  • 디트리히 폰 콜티츠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의 주인공으로, 히틀러의 파리 초토화 명령을 거부하고 자유 프랑스군에 항복, 후에 파리 명예 시민칭호를 받았다. 전쟁범죄에 책임이 있다는 말이 있으나, 그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도 없고 오히려 네덜란드군 포로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막는 등 양심적인 태도를 보였다.
  • 안톤 도슈틀러
    나치 독일의 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보병대장. 1910년에 육군에 입대하여 1944년 3월 22일, 이탈리아 제노바와 라 스페치아 간 철도 터널을 폭파하기 위해 라 스페치아 북방 100km에 상륙한 미군 특수부대원들이 독일 국방군과 무솔리니 당원들에게 체포된다. 이들은 독일군 제135여단 으로 끌려가 심문받은 뒤, 제75 군단 사령부로 이송되었는데 75 군단장이었던 그는 이들을 그냥 총살해 버리라고 지시를 내렸다. 즉 무단으로 미군 포로를 처형했는데, 135여단에서 처형을 늦추자고 하니까 짜증내며 당장 실행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훗날 이 때문에 도슈틀러는 1945년 10월 12일 로마의 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탈리아 왕국 아베르사에서 독일군 대장의 정복을 입은 채 총살형으로 사형이 집행된다. 참고로 안톤 도슈틀러 중장의 사형 집행 장면은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 헬무트 폰 판비츠
    독일 측 카자크 부대를 지휘한 인물.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파르티잔 진압 임무를 맡았다. 진압은 매우 잔혹했지만 이 때 병사들의 전쟁범죄가 도를 넘어서자 이를 강하게 저지했다고 하며 히틀러에게 슬라브족을 열등 인종으로 분류해서는 안된다고 말한 적도 있다. 전후 부하들과 함께 소련으로 송환되었고[43] 표트르 크라스노프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5.2. 기타 인물

  • 호르스트 베셀
    나치당의 베를린 프리드리히스라인 지구 돌격대 사령관이다. 유독 공산당 깡패들을 잘 때려잡고 전투력이 높아서 공산당 깡패조직 사이에서 척살대상 1순위였다. 그러다가 공산당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나치는 장례식 직후 사적인 갈등으로 죽은 베셀을 공산당에 의해 살해된 순교자이자 국가유공자 급의 영웅으로 과장되게 선전했고, 동시에 이 노래도 공식 나치 당가로 지정해 모든 나치 집회에서 필수적으로 부르도록 규정화했는데 이것이 바로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다. 물론 이 노래는 나치 독일의 몰락 이후 금지곡이 되었다.
  • 프리츠 자우켈 (1894년 10월 27일 - 1946년 10월 16일)
    하스푸르트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병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한 뒤 15세 때부터 선원으로 일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항해 도중 배가 연합군에 의해 배가 나포되어서 프랑스에 억류되기도 했다. 전후인 1919년 풀려난 뒤 독일로 귀국해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23년에는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1927년에는 튀링엔 대관구의 관구장(Gauleiter)에 선임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수상이 된 뒤에는 제국의회 의원과 튀링엔 대관구의 제국 지도자로 승격되었으며 돌격대친위대의 명예 상급집단지도자(Obergruppenführer) 계급도 부여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카셀의 제국 국방위원을 역임했고, 1942년 3월 알베르트 슈페어의 추천으로 제국 전권 노동 감독관이 되었다. 독일 내의 많은 노동 가능 인원들이 징집되어 노동 인력이 부족해지자, 점령지에서 약 500만 명에 달하는 인력을 독일로 보내 노동에 종사하도록 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노동자들 중에는 자원해서 독일로 간 이들도 있었으나, 뭐 다 그렇듯이 대부분 강제로 징용되어서 기본적인 생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우를 받거나 탄압을 받았다.
    종전 후에는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중에 자우켈은 자신이 노동력 동원을 주도한 점은 인정했지만, 그들이 당한 가혹 행위나 부당한 처우, 살해 등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사실 재판관들 사이에서도 사형 선고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았고, 특히 자우켈의 상관이었던 슈페어가 훨씬 가벼운 20년형을 선고받은 것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일부 방청객들은 슈페어가 살아남기 위해서 자우켈에게 교묘하게 책임을 떠넘겼다고 비판하기도 했고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사형 집행은 다른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교수형이었고, 교수형이 집행 직전 최후 진술에서 "나는 무고하게 죽는다. 내 형량은 불공평하다. 신이여, 독일을 보호하소서!"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형대에 올라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교수대를 바라보며 "난 죄 없이 죽는거요."라고 애처롭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자우켈의 시체 (혐짤주의)
    사망 후 시체는 자살한 괴링을 포함한 사형수 11명의 유해와 함께 뮌헨 근교의 화장장에서 화장된 후 유골은 미 육군에 의해 공개되지 않은 채 강에 뿌려졌다.
  • 요제프 디트리히
    나치당 초창기부터 히틀러가 가장 총애한 인물이다. 나치 친위대의 아버지 격이다. 덕분에 최신예 전차들이 디트리히 예하 부대로 우선 지급되는 등 부하들에게 인기는 좋았다. 하지만 군사적 능력은 일반 부사관 수준인 덕분에 이해력 부족으로 참모들이 작전 회의마다 골치 아파한 것은 유명하다.[44] SS에서도 유능한 기갑 지휘관들은 초창기 육군 장교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 오토 귄셰 (1917년 9월 24일 - 2003년 10월 2일)
    1935년에 나치당에 입당해 1936년부터 히틀러를 보좌하는 총통호위부대에 뽑혀 처음으로 히틀러의 신변경호를 담당했다. 전선에서 복무 후 1944년 2월에 다시 히틀러의 부관이 된 그는 7월 20일에 발생한 발키리 작전으로 인해 가벼운 부상을 입기도 했지만 1945년 1월에 히틀러와 함께 베를린으로 이동하여 히틀러의 신변경호에 종사했다. 4월 30일에 베를린 공방전에서 총통 지하벙커에 있던 히틀러가 자살 당시의 유언에 따라 총통관저 정원에 구덩이를 파고 히틀러와 그의 아내 에바 브라운의 시체에 가솔린을 부어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시체를 완전히 없애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결국 히틀러의 시신 일부는 소련군에 의해 회수되었다.
    귄셰는 5월 1일에 벙커를 탈출했지만, 다음날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고 소련군은 히틀러의 시체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그를 고문했다. 그러나 그는 히틀러의 시체를 완전히 없앴다고 끝까지 주장했고, 전후 몇 년간이나 히틀러의 죽음에 관해 계속 소련군의 고문을 받다가, 1950년에 징역 25년형에 처해져 수감되게 되고 1955년에 동독으로 다시 넘겨져 1956년까지 바우첸의 수용소에서 복역했다. 출소 후에는 서독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회사원으로 평범하게 살았다. 그 후 2003년에 86세의 생일을 맞고 난 뒤 8일 후에 사망했는데 그의 시체는 평소 그의 유언대로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 빌헬름 몽케
    1933년 3월 17일에 요제프 디트리히가 편성한 첫 117명의 히틀러 경호대의 한 명으로 선발되어 친위대 소위가 되었다. 그는 폴란드 침공 당시에 LSSAH연대의 제 5중대장으로 참가하여 제 1,2급 철십자 훈장을 수상받기도 했으며. 프랑스 침공이나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같은 서부전선에서 여러 가지 학살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전황이 점점 밀리게 되자 그는 총통관저의 방어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히틀러가 자살한 다음날 베를린을 탈출하려다 소련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고 말았다. 전후 히틀러의 자살과 관련해 소련군의 집요한 고문을 받았던 몽케는 전시 포로를 학살하긴 했지만 학살의 숫자가 적기도 했으며 그 정도의 학살은 전쟁 중에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되어, 전범으로 기소되지는 않았고, 1955년 10월에 징역 10년형을 마치고 석방되었다. 그 후 함부르크에 머무르면서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일한 몽케는 2001년 8월 6일에 사망했다.
  • 카를 하우스호퍼
    이른바 오컬트 마니아. 루돌프 헤스의 스승이자 이상한 오컬트 사상에 빠져서 티베트를 점령해야 한다는 둥의 이상한 소리들을 많이 하고 다녔다. 레벤스라움 사상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지만 아내가 유대인이어서 나치의 과격한 인종주의는 배격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아예 히틀러를 뒤에서 조종해서 침공 계획을 세우게 만든 원흉 마냥 소개되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진짜 모종의 예언 능력 같은 게 있던 하우스호퍼가 작전을 세우고 히틀러가 그에 따르면 항상 대승을 거뒀다는 이야기이다. 허나 도중에 히틀러가 오만해진데다 하우스호퍼의 아들이 반히틀러 운동가라 히틀러 암살 기도를 하다가 실패하고 죽는 바람에 나치와 결별했고, 그래서 독일이 졌다고 한다. 물론 그냥 찌라시성 내용이라고 보면 되는데 왜냐하면 이언 커쇼 히틀러 책을 봐도 나온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비중이기 때문이다. 소련과의 동맹을 지속할 것을 주장하여 토사구팽당했고, 전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사형선고를 받을 것 같자 자살했다.
  • 파울 슈미트(Paul Schmidt) (1899년 6월 23일 - 1970년 4월 21일)
    전격전의 전설에서도 나오는 히틀러의 통역관, 친위대 연대지도자로 뮌헨 협정과 같은 여러 협상에서 통역관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프랑스 침공 당시에 히틀러와 제3제국의 상황이나 제3제국의 여러가지 정황이나 내용들을 보고 들은 다음 그것들을 회고록에 썼으며 이 회고록은 상당히 중요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전범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 후에는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면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통역하는 기술이나 방법들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1967년에 퇴임한 후에는 회고록을 쓰기도 했다.
  • 에바 브라운
    아돌프 히틀러의 오랜 동거녀이자 유일했던 부인이다. 히틀러의 연인으로 유명하지만, 히틀러는 평생 동안 브라운과 함께 있는 모습을 절대 공식 석상에서 연출하지 않았고 심지어 사적인 자리에서도 브라운과 손잡는 것 외에는 일체의 애정 표현을 하지 않았다. 슈페어의 증언에 의하면 굉장히 금욕적인 모습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최근에는 굉장히 유명한 히틀러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독일에는 히틀러의 최측근들을 제외한 모든 독일인들은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히틀러와 브라운의 관계는 커녕 브라운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 없이 히틀러의 사재와 국가 예산을 마음껏 자신의 사치에 이용하여 많은 돈을 소모했다. 그러나 결국에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 히틀러와 함께 총통 벙커에서 자살하였다.
  • 막스 아만 (1891년 11월 24일 생 - 1957년 3월 10일)
    슈츠슈타펠 대장, 나의 투쟁이라는 책 제목을 지은 출판가다.
    뮌헨에서 태어난 아만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바이에른 예비보병 제 16연대에 들어가 종전까지 싸워 준위 신분으로 제대했는데 이 연대엔 히틀러도 상등병으로 소속해 있었기 때문에 둘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전후 나치당에 입당한 아만은 나치당 기관지의 상업담당 주필로 근무하다가, 1922년에는 나치당 출판전국지도자로 취임해 당 출판사의 사장이 되었고, 맥주홀 폭동 사건 때에는 히틀러와 함께 투옥되었지만 약 4개월 만에 석방되어 이후 계속해서 나치당의 출판 전국지도자로 일했다. 1925년에 히틀러의 옥중 구술로 집필된 저서 "거짓과 어리석음, 그리고 비겁함에 맞써 싸운 4년간의 투쟁"이라는 제목이 붙여질 예정이었는데 아만은 내용이 딱딱한 내용이며, 긴 제목을 붙이면 팔리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이에 히틀러가 판결 직후에 쓴 문장에서 발췌하여 그 유명한 나의 투쟁으로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아만은 이 책이 그다지 팔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당시 일반서적의 2배 가격인 12마르크를 붙였지만 의외로 책이 잘 팔리자 출판자금을 회수하기도 했고, 나치가 확장 국면을 탄 이후에는 직접 이 책의 인세를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 역시 자기 돈주머니 챙기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히틀러는 결국 자기 회계관리를 부총통 루돌프 헤스의 심복인 마르틴 보어만에게 맡겼다. 그래도 아만은 나치당의 집권 후 선전 전국지도자인 요제프 괴벨스와 함께 선전에서 크게 공헌했고 히틀러 내각이 성립된 후 공로를 인정받아 국립출판원 총재로 취임했고 그는 독일 전역의 출판활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또 국회의원으로도 선출되어 종전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장검의 밤 당시에는 돌격대 간부인 룀의 체포와 처형에도 관여했던 아만은 1941년에 친위대 명예지도자 및 친위대 대장계급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독일의 패전 후에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으며, 1953년에 석방되어 풀려났지만 재산과 연금은 몰수되어 궁핍하게 살다가 1957년에 고향인 뮌헨에서 사망했다.
  • 야콥 나단
  • 오스카 그뢰닝(1922년 - 2018년 3월 9일)
    21세의 나이로 나치 무장 친위대에 자원입대했고, 1942년 아우슈비츠 수용소 경비병으로 일을 하였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2년여 동안 수용자들의 짐을 압수하고 금품의 액수를 계산해 베를린의 친위대 본부로 보내는 역할을 맡아 ‘아우슈비츠의 회계원’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아무튼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의 경비원으로 일할 당시 유대인 30만 명의 학살을 방조한 죄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상태였으나 고령의 나이로 인해 수형을 살기가 힘들다고 계속 탄원서를 냈고 결국엔 단 하루도 감옥에서 살지 않고 삶을 마감했다.
  • 한스 프리체
    단지 파울 요제프 괴벨스와 목소리가 똑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징발되어 대중계몽 선전성에 배치되었다. 그 이후 파울 요제프 괴벨스카게무샤가 되었는데 괴벨스가 써 준 대본을 괴벨스의 말투로 읽기만 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종이에 써 있는 글을 읽기만 했을 뿐인 혐의로 훈방되었지만 서독 정부가 따로 체포해서 재판 끝에 징역 9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얼마 못가 암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6. 시대의 증언자

  • 헤르베르트 브루네거
    3 SS 토텐코프 소속이자 폭풍 속의 씨앗의 저자. 출판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회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선 긍정적이진 않지만 부정적이지도 않으나 회고록인 폭풍 속의 씨앗 자체는 저자의 생생한 경험과 당시의 전황을 잘 묘사했지만 악명 높은 3 SS 토텐코프 사단 옹호 등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편이라 가려들을 필요가 있다.
  • 귄터 그라스
    전후 독일 최고의 명작의 하나인 양철북의 작가. 일설에는 유겐트에서 친나치 발언만 좀 했다고 하지만, 미국 문서에서도 확인된 마당에 과연... 공군에 징집되었다가 친위대에 자원입대했다. 17세 시절에 멋모르고 한 일이라서 1990년대에 사실이 밝혀졌지만, 아주 큰 파장은 없었다. 참고로 SS는 원칙상 자원입대에 복무기간도 국방군보다 배는 더 길지만 예외없는 원칙은 없다고, 친위대도 병력이 부족하면 국방군에게서 병력을 넘겨받기도 했다. 무장친위대 군복의 좌완에서 가끔 보이는 V자가 3개 겹쳐진 표식이 바로 국방군이 친위대에서 근무하게 되었을 때 부여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라스가 소속된 부대가 1945년의 심각한 병력 부족의 상황 하에서도 최우선으로 재편되었던 제10 SS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의 기갑부대인 것 등을 보면, 국방군에서 징집한 인원이 친위대로 넘어가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이렇게 강제 징집된 국방군 출신들은 나중에나마 SS 취급을 면하기도 했다.
  • 위르겐 기르겐존 (1924년 8월 21일 - 2007년 7월 24일)
    5 SS 비킹 사단 소속의 병장. 우린 대체 무엇을 위해 싸웠습니까? 를 말한 주인공. 무장친위대 소속 중 몇 안 되는 진심으로 뉘우친 인물로, 텔레비전에 나와서 자신이 어떻게 훈련을 받았는지를 이야기하기도 했고 나치와 무장친위대의 전쟁범죄를 고백하기도 했으며. 전후에는 사민당원으로 활동하였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아내의 동생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있는데 Jürgen이라는 동명이인이라서 생긴 오해인 듯하다.
  • 한스 폰 루크
    독일 국방군 제21 기갑사단 소속의 대령이자 전쟁사학자,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의 저자. 항목 참고.
  • 기 사예르
    독일계 프랑스인으로 어머니가 독일인이다. 대독일 사단에서 복무했으며 최종 계급은 상병이다.
  • 니슬리 미클로시 (Miklós Nyiszli) (1901년 6월 17일 - 1956년 5월 5일)
    유대인 출신. 그 유명한 요제프 멩겔레의 조수로 유대인 감별과 실험을 도왔으며 머리까지 좋아서 법의학이나 독일어헝가리어, 루마니아어를(심지어 웬만한 사투리까지 다 알 정도로) 마스터한 천재였다. 이 때문에 한니발 렉터의 모델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다만 이 위키에서는 굉장히 나쁜 편으로 이야기 되는데 논란이 좀 있는 인물이다. 이 위키에서는 니슬리가 가스실에서 어느 여자아이가 살아남자 그대로 끌고 가서 해부해 버린 쓰레기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와는 굉장히 다른 이야기가 있다. 이 자료나 영어 위키백과를 보면 어느 날 가스실에서 시체를 치우고 있는데 사후 강직 현상으로 가느다란 팔다리가 뻣뻣하게 굳은 시체더미 아래 밑바닥에서, 열여섯 살 소녀가 산 채로 발견되자 니슬리는 반사적으로 어린 소녀에게 낡은 코트를 덮어주고 따뜻한 수프와 차를 주었으며 어깨와 등을 마사지해 주었고, 니슬리는 집단수용소 지휘관에게 수용소에서 일하는 독일 여자들 틈에 소녀를 숨겨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으며, 게다가 니슬리는 1944년 6월에 아우슈비츠에 끌려왔기 때문에 악행을 저질렀다는 시간도 굉장히 짧은 편이다.
    게다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내와 딸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왔고 요제프 멩겔레가 자신의 실험을 도와주지 않으면 니슬리와 아내 그리고 딸까지 죽이겠다고 협박하다시피해서 니슬리는 멩겔레의 실험을 강제로 할 수 밖에 없었고 멩겔레가 시켜서 수십 차례에 걸쳐서 피해자들을 생체실험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이 죽기 전에 정확한 임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조사하고 그들의 아직 따뜻한 몸을 절개하는 것을 수행했다고 한다. 게다가 나중에는 멩겔레가 지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 버리자 자신과 아내 그리고 딸은 다른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해방되면서 간신히 살아남았고 전후에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증언했으며 Auschwitz: A Doctor’s Eyewitness Account. 라는 책을 쓰면서 멩겔레의 실험이나 나치의 생체실험을 증언하는 자료를 냈다고 한다. 물론 저 주장이나 이야기가 니슬리의 거짓된 증언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지만 어쨌든 무조건 나쁘다고 주장하는 견해에는 굉장히 무리가 있고 여러모로 논란이 있는 사람이다.

7. 나치 독일을 탄생시킨 인물

  • 안톤 드렉슬러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창립자. 그가 만든 그 정당은 아돌프 히틀러가 자양분으로 빨아먹기 시작해 아시다시피 히틀러가 아예 그 정당의 주인이 되어버렸다. 히틀러의 악명이 워낙 높아서 창당자임에도 오히려 잊혀졌다. 실제 역사상에서도 히틀러가 들어오기 전 까지만해도 흔한 우익정당 수준도 되지않는 하류 우익정치가들의 모임에 불과했었지만...
  • 헤르만 괴링
    제국 원수이며 제3제국의 수치라고 불릴 정도로 무능해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독일 공군을 강군으로 키운건 엄연히 괴링이다. 괴링에게 잠만 쳐잤다고 일갈한 독일 공군 장교들도 이 사실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독일군의 문제는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독일군 전체의 문제다. 청년 시절에는 간지나는 모습으로 사교계에서 유명한 공군의 에이스였지만 낭심에 심한 부상을 입고 치료하다 보니 마약에 중독되어 전쟁 중반부터는 초기에 보인 명석한 면모는 거의 사라졌다. 전쟁이 끝난 후에나 겨우 마약을 끊고 제정신을 차려 전범 재판 당시에 나치 인사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며 열심히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결국 사형 선고를 받자 숨겨놓은 청산가리 앱플을 씹고서 자살했다.
  • 루돌프 헤스
    카를 하우스호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지 웬 괴상한 짓이나 하고 다니는 오컬트 마니아였다. 나중에는 비행기를 타고서 영국에 그냥 협상하러 갔다가 잡혀서 포로로 살았고 나중에 전범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서 죽었다. 히틀러도 허울 좋은 부총통 직위 빼곤 코딱지만큼도 챙겨준 적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비서였던 마르틴 보어만에게 밀려나는 굴욕까지 맛보았다. 히틀러의 사상을 담은 불쏘시개 나의 투쟁을 받아 적었다.
  • 빌헬름 카이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강직해 보이는 인상과는 반대로 나치 독일 최고의 아첨꾼으로 악명 높으며 군대 지휘도 잘 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역량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고집 부리지 않고 다른 유능한 인재들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또한, 좋은 사교력과 부하들에겐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며 병사의 복지를 신경쓰는 전형적인 덕장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전쟁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 파울 폰 힌덴부르크
    타넨베르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대통령까지 해먹었던 양반이지만 사실 타넨베르크 전투도 그가 승리로 이끈 것이 아니었고 과장된 것이었으며 정치력은 별로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히틀러를 끌어들여서 결국 나치 독일을 탄생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에 대접이 매우 좋지 못한 인물이다.
  • 프란츠 폰 파펜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 하지만 역사는 그를 나치 독일 탄생의 1등 공신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슐라이허에 의해 총리로 임명된 파펜은 지지기반이 없었기에 힌덴부르크에 아부하며 독재하기 위하여 프로이센 쿠데타도 일으키다가 너무 막 나간 나머지 총리 자리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히틀러와 나란히 손잡고 총리나 해먹으려다가 2차 대전에서 패망하고, 이후에는 숙청 당하지 않기 위해 깨갱거리게 된다. 전범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그는 죽을 때까지 히틀러 집권은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물론 세계적인 평가는 "너 때문 맞거든?" 이며 당연히 지금까지도 나치 독일을 탄생시킨 장본인 중 한 명이라고 까이고 있다.
  • 알프레트 빌헬름 프란츠 마리아 후겐베르크(Alfred Wilhelm Franz Maria Hugenberg) (1865년 6월 19일 - 1951년 3월 12일)
    1865년 6월 19일에 하노버에서 프로이센 왕국의 국회의원 출신인 아버지 아래 태어난 후겐베르크는 1891년에 범독일연맹을 설립했다. 후겐베르크는 처음에는 프로이센의 관리가 되었지만 1907년에는 실업가로 직업을 갈아탔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광업은행 지배인으로 취임하였고 이어서 1909년엔 티센크루프 사의 중역으로 초빙되어 은행업무와 철강계통의 업무를 담당하며 1918년까지 재무, 경리이사장을 지냈다. 독일 제국 시절에 국민자유당 소속이던 후겐베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1918년에 독일국가인민당에 입당했다. 이 당은 자본가의 이익을 대표하는 보수우익반동적 정당으로 후겐베르크는 실업계와 산업계를 대표하는 정당에 참가한 것이었다.
    국회의원이 된 후겐베르크는 1928년에 국가인민당의 당수로 취임했고 바이마르 헌법체제를 비판하며 보다 급진적인 이념을 주장했지만 군주제 부활엔 부정적이어서 국가인민당 내부의 보수제정파 대부분이 이에 반발하여 탈당해 새로운 당을 결성했다. 1929년에 경제 대공황으로 경제위기와 공산주의의 대두를 우려한 실업계를 대표하여 후겐베르크는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과 접촉하여 협력관계를 구축했지만, 후겐베르크가 듣보잡이던 히틀러를 키워줬다는건 과장이다. 서로 이용해 먹는 관계였고 여러번 사이가 틀어졌다. 히틀러의 성공시대를 보면 후겐베르크가 거의 은막의 제왕 수준으로 나오는데 후겐베르크는 독일 최대 재벌 티센크루프에서 월급 사장하다가 언론사를 인수한 인물로 나치와 히틀러 추종자인 프리츠 티센 밑에서 월급이나 받아먹던 인물이다. 그가 150여개나 되는 언론 신문사 영화사가 있었고, 언론을 장악해서 히틀러를 띄워주었다고 하는데 후겐베르크가 후원하는 철모단 독일인민당은 나치당과 대립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리고 현재나 그 당시 독일이나 현재 우리나라처럼 여론 독점이 심하지 않다. 후겐베르크 언론사가 1위인 건 맞는데 2위가 공산당 계열이었고 나치당 또한 60여개 신문을 발행하는 언론 재벌이었다. 바이마르 시대 후반 베를린에만 일간지 주간지 등을 발간하는 언론 매체가 130여개가 난립했다. 뭐, 다만 당시 독일에서도 후겐베르크를 히틀러를 배후조종한 인물로 보는 시각이 없진 않았다.
    그러던 중 슐라이허 내각이 들어서자 다시 파펜에게 구워 삶아진 후겐베르크는 나치당과 연대했고, 1933년 1월 30일에 나치당과 보수파의 연립을 이끌어내 제1차 히틀러 내각을 만들었다. 후겐베르크는 경제장관 및 농림식량장관으로 히틀러 내각에 입성했다. 이 내각에는 수상인 히틀러, 내무장관인 빌헬름 프리크, 그리고 헤르만 괴링이 대두했지만 내각 대부분은 여전히 보수파가 많았고, 파펜과 후겐베르크는 히틀러를 제어하여 나치당을 압박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독일 국회 의사당 방화사건으로 나치당은 일명 장검의 밤으로 반대세력을 축출하였고 후겐베르크와 파펜은 데꿀멍 모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히틀러가 1933년 3월에 수권법으로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하자 결국 후겐베르크도 답이 없다고 판단하여 1933년 6월에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고 국가인민당도 해산되었다. 또한 후겐베르크의 콘체른도 강제매각되어서 결국 자신의 언론도 나치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후겐베르크는 조용히 살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구속되었다가 1951년에 사망했다. 여담으로 그가 한창 정치를 할 때에도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별명이 햄스터였다고 한다.
  •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1883년 1월 31일 - 1960년 2월 16일)
    나치 독일을 탄생시킨 공신 중 한 명이다.
    독일 제국의 군인이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외아들이자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이종사촌이다. 1903년에 근위 제3 보병연대의 사관으로 입대해 동료 쿠르트 폰 슐라이허와 친구가 된 오스카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제 20사단 참모로 있다가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군에 남았다. 1925년에 부친이 대통령이 되자 오스카도 대령이 되어 아버지의 부관을 역임했다. 이미 노인이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정치 결정은 실제로는 사적 고문관이던 아들 오스카, 슐라이허, 대통령 부장관인 오토 마이스너가 다 해냈다. 이 때문에 헌법의 위에는 대통령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오스카는 친구였던 슐라이허의 영향을 받아 나치에 호감을 가지고 이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때문에 1932년에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이 나치의 돌격대를 금지시키자 이 조치를 아버지에게 부탁해 해제하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스카는 원래 자신과 친했던 슐라이허가 총리가 되고 나서 고개가 뻣뻣해진데다가 "헌법에도 없는 대통령 아들 주제에 너무 나서는거 아니냐?" 라는 말을 듣고 격분해 슐라이허와 원수가 된다. 그리하여 1933년 1월엔 다수당이 된 나치당의 당수 히틀러와 파펜 전 수상의 리벤도르프 자택에서 열린 비밀회담에 참석해 나치의 정치 참가를 협의했다. 히틀러를 보헤미아의 상병이라 부르며 수상 지명을 거부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했고, 결국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월 28일에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해 나치 정권이 발족되었다. 1934년 8월 2일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수상이 후임 대통령을 겸임하는 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려 했지만 그 직전에 오스카가 8월 18일에 라디오에서 아버지의 유언이라면서 히틀러를 차기 독일을 이끌어 갈 지도자로 추천하니 국민들은 대동단결하라는 의미의 유서를 읽어내렸다. 그러나 당시 헌법에선 대통령이 후계자를 지목할 수 없었고 거기다가 힌덴부르크의 유언장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권력과 여론은 이미 히틀러에게 넘어가고 있었고 결국 8월 19일에 이루어진 국민투표에서 90%가 히틀러의 대통령직 겸임을 찬성했다. 그런데 히틀러는 이 결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지는 않겠다고 하면서 대신 지도자 겸 수상으로 등극했는데, 이른바 총통으로서 독일의 정치권력이 완전히 히틀러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오스카는 이러한 공적(?)으로 소장으로 진급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동프로이센의 포로수용소 책임자로 임명되었지만 학살은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바로 군을 사직한 후 소유 중이던 장원에서 은거 생활을 보냈다. 이후 소련군이 침공해 오자 서쪽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전후에는 뤼네베르거 하이데에서 거주 중이던 지인에게 의탁해 생활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파펜의 재판 시 증인으로 출석했다가 이후 병이 악화되어 하드 하르츠부르크의 양로원에서 사망했다.
  • 쿠르트 폰 슐라이허[45](Kurt Ferdinand Friederich Hermann von Schleicher) (1882년 4월 4일 - 1934년 6월 30일)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독일 총리이자 군인. 그러나 그는 나치 독일이 탄생하게 된 씨앗을 뿌린 장본인이다.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펠에서 육군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슐라이허는 1900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해 근위 제 3 보병연대 제 5중대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동료였던 힌덴부르크의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훗날 원수 사이가 되지만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또다른 부대에서는 그 유명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친한 사이였다. 1913년에 참모본부에 배치된 슐라이허는 자신의 희망에 의해 빌헬름 그뢰너 중령의 철도부에 배속되었다. 그곳에서 지인인 프란츠 폰 파펜을 알게 되었다. 1914년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대위로서 병참부대에 소속되었다가 1917년에 제 237보병사단참모로 대전을 보냈다. 1918년에 소령으로 진급 후 독일혁명 당시 그가 속한 군부는 독일 사회민주당(SPD) 주도의 임시정부 협력에 찬성했다. 상관이던 그뢰너 참모차장과 SPD 당수였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오토 벨스는 서로 협약을 맺어 두 사람을 반란군의 손에서 구출했다. 이 협약은 잠정정부의 안정과 함께 군부에게 국가안의 국가라는 독립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1차대전 후 병무국장이던 한스 폰 젝트의 측근이 되어 아들 오스카를 통해 힌덴부르크 대통령과도 개인적 신뢰관계를 쌓은 슐라이허는 독일군 내부에서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다. 1929년에 국방차관으로 취임한 후 1931년에는 종형제의 미망인이자 폰 헤닝 장군의 딸이던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슐라이허는 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총리란 이미지로 공화국을 지키려다 희생당한 비운의 민주투사(?)란 왜곡된 이미지가 있는데 애초에 파펜을 추천해서 원격 조종하려고 했고, 그 이전에도 민간인들이 감히 범접 못하는 군부에서 정치 뒷공작이나 하던 정치군인 똥별 출신이다.
    1932년에 하인리히 브뤼닝 수상이 세계 대공황의 선후처리를 위해 경제정책을 손대자 사회주의적이라며 슐라이허는 반대했는데 나치의 돌격대가 대두되자 돌격대 금지령을 둘러싸고 상사였던 그뢰너 국방장관과 마찰을 빚자 그뢰너를 사직으로 몰아넣어 브뤼닝 내각에 큰 타격을 입혔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지지를 잃은 브뤼닝 내각은 퇴진하여 슐라이허는 후임 수상으로 오랜 지기였던 파펜을 추천했다. 파펜 내각에서 국방장관으로 취임한 슐라이허는 8월에 나치의 수상이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부수상직을 제시하면서 여당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했다. 사회민주당 오토 브라운이 수반으로 일하던 프로이센 주 정부를 프로이센 쿠데타로 해산시키고 정부 지배에는 성공했지만 파펜의 정치능력과 인기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고. 파펜은 의회를 정지시키기 위해 군부를 이용한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군권을 잡고 있던 슐라이허가 거부하여 결국 파펜을 실각시켰다. 파펜이 물러나지 않으면 내전이 터질 수도 있다는 사실상의 협박으로 12월 3일에 슐라이허는 신임 수상으로 취임했다. 파펜의 실각 후 슐라이허는 나치당에 연대를 제안했지만 결과는 슈트라서만 해외로 날라버리고 끝났다. 군부의 자금원조와 신문에 의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슐라이허 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우익에선 “붉은 장군”이라며 경멸했고 좌익에서는 프로이센 주 자치정부의 전복 경위에 의해 “반동주의자”라 찍혀서 사실상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다. 당시 강철의 대원수에게서 도망쳐 독일에 있었던 레프 트로츠키마저 그가 '군복을 입은 물음표' 같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그는 우왕좌왕했다. 공산당에 손을 내밀었다가 우파에다가 손을 내미는 둥 한마디로 개판 그 자체였다.
    한편 슐라이허에게 실각당한 파펜은 히틀러와 접촉해 이들은 1933년 1월에 은행가의 중개로 두 차례의 극비회담을 가졌다. 1월 22일 회담에서는 슐라이허의 옛 친구이던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은행가, 대통령부 장관인 오토 마이스너도 히틀러 같은 인물을 왜 총리에 임명하지 않느냐고 힌덴부르크를 설득했고, 여기에 국가인민당도 참여하는 형태로 슐라이허의 포위망이 형성되어 사면초가가 된 슐라이허는 1월 28일에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회담에서 사직을 권고받은 후 히틀러를 차기 수상으로 한다는 힌덴부르크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힌덴부르크는 "나는 이미 무덤에 한 발을 디디고 있다. 후에 천국에 가서도 이 행위를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슐라이허는 "그런데 각하, 이 배신 후에는 각하께서 천국에 가시게 될지 저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슐라이허는 축출되었지만 여전히 독일군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히틀러에게 있어서 위험요소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그를 숙청하기로 마음 먹었다. 결국 1934년 6월 30일에 슐라이허는 히틀러가 일으킨 숙청 이른바 장검의 밤 사건으로 신혼 집에서 부인과 함께 총 맞고 죽었다. 그는 현역 육군원수였지만 나치 친위대가 그와 그의 부인까지 살해했어도 독일 국방군은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았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던 가정부는 다음 해에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되었는데 공식적으론 자살로 발표되었고 2년 후에는 슐라이허가 에른스트 룀과 손잡고 반역을 일으키려는 꿍꿍이가 있었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히틀러가 집권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독일에서 까이는 중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까일 예정이다.

8. 슈츠슈타펠

9. 나치를 열렬하게 따른 인물

  • 루이제 린저
    한때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다가 억울하게 옥살이했던 투사로 알려져있었으나, 오랫동안 그녀와 교류해왔던 스페인가톨릭 신부인 호세 산체스 데 무리요와 루이제 린저의 장남인 크리스토프가 2011년에 출간된 그녀에 대한 평전에서 린저의 친나치 행적을 폭로해 독일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1944년 나치에 체포될 때까지 열성적인 나치 교사로서 나치 찬양 시를 썼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의 유태인 교장을 비난했던 증거들이 나왔다. 나치의 청년여성 조직인 '독일소녀동맹'의 한 교육소 책임자가 되었으며 이후 괴벨스의 영화부서인 UFA가 제작하는 선전영화의 대본작가로 활약하면서 두둑한 보수를 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무리요 신부는 루이제 린저가 보통의 나치 추종자들을 넘어서는 나치에 꽉 엮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옥중기' 등은 모두 자신을 미화한 거짓 이야기이며 나치 시절 그녀가 출판금지 조치를 당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음으로 드러났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작가 클라우스 헤르만의 유품(베를린 국립도서관 소장) 중 유고에 따르면 루이제 린저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헤르만이 나치를 추종하는 그녀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주기 위해 당시 정세를 설명하는 가운데 히틀러를 지원하는 대기업가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지원정치자금의 규모 등을 말해주었는데 린저는 친구에게 이 말을 전해주었고 그 친구의 남편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린저를 나치의 게슈타포에 고발했다는 것이다. 이에 구치소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던 것이다. 린저의 주장처럼 국가반역죄를 받은 것이 아니었고 사형 선고를 받지도 않았으며 1945년 이전 조기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 발터 폰 라이헤나우
    독일 국방군 내에서 가장 유명한 나치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히틀러 집권 전부터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다. 독일군 초기 전역에 대활약을 하여 원수까지 진급했다 그러나 친나치 군인의 대명사였기 때문에 독일군 내부에서도 평판이 나빴고, 1941년 육군 총사령관으로 영전될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1941년~2의 동계 전투가 끝날 무렵 뇌출혈과 후송 지연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만약 전후에도 살아남았다면, 키예프 대학살의 시발점이 된 강조명령이 제대로 재판을 받았다면 인종학살 범죄의 주범으로서 유죄 선고를 받았을 수도 있으나, 총사령부에 근무한 장성이 아닌 야전군 지휘관은 사형을 받은 예가 없다는 점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을 확률은 낮다. 하단의 쇠르너, 리스트 등과 비슷한 경우이다.
  • 발터 폰 브라우히치
    처음에는 오스터 음모 사건에 가담하고, 히틀러의 안슐루스 및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에 소극적이었으나(침략 전쟁으로 이어질 경우 위 음모에 가담하기로 했었다.) 서방 연합국의 미적지근한 대응으로 히틀러의 뜻이 이루어지자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심지어 출세를 위해 이혼하고 나치를 열렬히 따르는 여인과 재혼했을 정도이다. 이후 폴란드의 단치히 우체국 공방전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했으며, 독소전쟁 때에는 학살을 조장하거나 묵인했고, 반대하는 장교들에게는 이를 따를 것을 강요했다.
  • 페르디난트 쇠르너
    라이헤나우와 쌍벽을 이루는 친나치 군인이다. 그리고 부하들의 목숨을 돌같이 여겼다. 다짜고짜 후방에 나타나서는 길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병사를 끌어내서 그대로 총살시킨 사건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사살당한 병사들에게는 그 어떤 군사 재판도 군법 위반도 없었으며 쇠르너가 일부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자신의 명령을 잘 듣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부하 장교들이 진술했다. 쉽게 말하면 자신의 모자라는 지휘력을 부하들의 목숨을 땔감삼아 불을 지펴 싸웠다는 것. 종전을 앞두고는 장병들이 최후까지 소련군을 막는 동안 자신은 사령관 직을 내팽개치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채 도주하다 붙잡혔다. 결국 소련에서도 서독에서도 징역을 살았다. 소련은 그를 전범으로 고발하고 독일 군인들은 즉결 처형 혐의로 고발했다는 것. 괴벨스마저도 흐뭇하게 인정한 친나치 군인의 대명사. 히틀러를 만나고 올 때마다 전공에 욕심을 내서 무리한 전투로 부하들을 희생시킨 경우도 많았다. 때문에 전후 살아남은 장병들이 제일 증오한 장군으로 유명하다.
  • 빌헬름 리스트
    청색 작전 당시에 목표 달성을 실패했기에 무능하다는 평을 받으나 사실 히틀러의 삽질이 더 크다는 의견이 많다 다만 리스트 개인의 정치적 성향은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친 나치 인사였고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 당시 나치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기에 폴란드에서 학살을 주도하기도 했고, 발칸 반도에서는 대대적인 파르티잔 진압에 나서기도 했다. 그래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도 종신형을 받았다. 그런데 5년만에 건강상의 이유로 출소했으니, 결국 죄값을 다 안 치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에른스트 룀
    에른스트 룀은 초기 나치당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돌격대(SA)의 사령관이었다. 그는 나치당 초기의 급진 사회주의 성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때문에 보수층의 지지를 잃거나 당에서 너무 눈치도 없이 나대기도 했고 그가 잠재적 경쟁자로 떠오를 것을 우려하여 장검의 밤 때 살해당하였다. 여담이지만 히틀러는 동성애에 부정적이었는데, 룀은 동성애자였다.
  • 베른하르트 루스트 (1883년 9월 30일 - 1945년 5월 8일)
    "교육의 전 기능은 나치스의 육성"

    나치 독일의 교육부 장관
    하노버에서 태어난 루스트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투 중 머리를 부상당하여 뇌손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다가 1922년에 나치당에 입당한 루스트는 193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치당의 후보로 나서 당선되었고 나치의 집권 이후에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루스트는 독일의 새로운 교육심벌로 교사와 학생들의 인사를 나치식 경례로 통일시켰다. 루스트는 유대인과 자기의 입맛에 안 맞는 학자 천명 이상을 추방시켰는데 이 중에는 그 유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제임스 프랭크, 프리츠 하버, 오토 마이어호프, 오토 바르부르크(히틀러 덕분에 추방은 면했다) 등과 같은 역사에 남을 과학자들과 노벨상 수상자들까지도 독일에서 추방시켰다. 그러면서 루스트는 아리아인이 아닌 사람이 하는 과학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행동 때문에 나치 독일이 몰락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루스트는 우생학을 필수 과목으로 채택하는 등의 인종교육정책을 실행했으며, 독일 대학에서 유대인들을 추방시켰다.
    또한 나치의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해서 나폴라(napola)를 30곳이나 창설하며 나치 독일의 사상을 독일에 주입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정책과는 달리 특이한 점은 히틀러 유겐트를 반대했다는 점이다. 루스트는 이것을 학교 교육에 벗어나는 위험한 짓이라고 반대했는데 히틀러가 시라흐를 지지했기에 히틀러 유겐트는 통과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가 말했듯이 전쟁 말기에는 교육제도가 붕괴되어 어린 학생들도 방공임무에 동원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방공호에서 학생들의 교육을 실시했다. 물론 전혀 인류에 도움이 안되는 쓸데없는 우생학이나 나치당원을 만드는 교육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독일이 패전한 후인 1945년 5월 8일에 자살했다. 여담으로 최근 국정교과서 논란이 일어나면서 한국에서 이 인간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반유대주의의 선봉자. 그가 창간한 잡지 돌격자(Der Stürmer)는 나치의 선전수단 중 가장 광범위하고 유대인에 대한 위험한 영향력을 끼치는 신문이 되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인륜에 대한 범죄를 인정받아 사형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사형당할 정도로 위험하고 잔인한 인간이었는지는 조금 논란이 있다.
  • 파울 하우서
    무장친위대 창설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대전 중 수많은 전쟁범죄에 관여했다. 대전 후에는 무장친위대 무오설을 주장하며 무장친위대 이익집단을 조직했다. 그는 독일의 과거 청산을 심각하게 방해하였으며, 그의 회고록들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일 네오 나치의 정신적 뿌리 중 하나로 기능한다.
  • 헤르베르트 바케 (1896년 5월 1일 - 1947년 4월 6일)
    헤르베르트 바케는 러시아 제국령이던 그루지야의 바투미에서 독일인 사업가이던 알브레히트 바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인 알브레히트는 사업 실패로 인해 1907년에 자살했다. 막막해진 그는 러시아 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독일과 러시아가 적대국이 되어 적성주민인 프로이센 사람들은 포로수용소에 보내지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된 후 레닌의 볼셰비키 정부는 1918년 3월에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가 전쟁에서 빠지자 바케도 수용소에서 해방되어 조국인 독일로 귀국했다. 전후에 나치당의 돌격대에 입대해 활동했고, 1925년 12월 1일에 정식으로 나치당에 입당했다. 1926년 11월 24일에 한번 탈당하기도 했지만 1931년 10월 1일에 복당했다.
    입당 후 바케는 농업 경험을 살려 나치당 농민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냈고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 1933년 10월 27일부터 농업장관 다레 밑에서 농업차관으로 일한 바케는 1942년에 농업장관 다레가 히틀러의 갈등이 생겨서 해임되자 대신 농업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바케는 전시중에 유대인들이 죽게 되는 원인중 하나인 "기아 정책"을 실행해 유대인들과 포로들에 대한 식량 공급을 대폭 줄여 남은 식량을 군에 돌렸는데 이것이 전후 그가 전범으로 기소된 이유가 되었다. 전후 연합군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그는 1947년 4월 6일에 수감 중이던 뉘른베르크 유치장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다만 그가 했던 "기아 정책"이 정말로 유대인을 죽이기 위해서 한 것인지는 애매하기 때문에 강력 전범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좀 있는 편이다.

10. 외국인 협력자들

나치 독일 국적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나치에 직접적으로 가담했던 외국인들도 다수 있었다.
  • 아민 알후세이니
    팔레스타인 독립운동가이자 나치의 협력자로 영국을 몰아내기 위해 나치와 손을 잡았다. 단순히 협력한 수준이 아니라 1942년부터 독일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실제적인 업무도 맡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성과가 "제13무장산악사단"으로, 모병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군이 붕괴할 경우 그 인간 말종 집단인 아인자츠그루펜을 이용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을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실행할 부대로서 Einsatzgruppe Egypt를 조직하였으나 엘 알라메인 전투 이후 이 부대는 동부전선으로 차출된다. 참고로 하인리히 힘러와는 오래전부터 서로 서신을 나누었던 사이로 사적으로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 알렉상드르 빌라플란
    프랑스의 축구선수이자 나치 부역자로 BNA(Brigade Nord Africain)라는 조직을 구성하여 강도, 방화, 강간, 살인 등 각종 범죄 행위를 일삼았으며, 이후 BNA가 프랑스의 무시당에서 52명의 레지스탕스 소년병들을 학살 할 때, 빌라플란 역시 10여명의 소년을 살해하였다.
  • 코코 샤넬
    프랑스의 복식 디자이너이자 세계적인 패션 아이콘으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사실 2차 대전시절 나치의 스파이로 활동하였다. 1940년에 독일과 프랑스가 휴전을 한 이후 나치의 비밀경찰과 가까워지면서 스파이가 되었고, 1941년 여름에 독일 방첩국에 의해 첩보원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서 나치의 요원으로 쓸만할 인물을 탐색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밖에 1943년에는 독일이 영국에 휴전을 제안할 때 비공식 사절로 윈스턴 처칠과 만나기도 했다.
  • 자크 도리오
    30년대부터 파시즘으로 전향해 프랑스가 추축국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 말기 폭격으로 사망할 때까지 독일에 부역했으며 프랑스인 자원병을 독소전쟁 전선으로 보내 나치에게 훈장을 받기도 했다.
  • 마르셀 데아
    원래는 사회당 소속이었지만 우경화되었다. 프랑스가 항복한 직후 비시 정부에 있다가 비시 정부마저 너무 온건하다는 이유로 프랑스 군정청으로 넘어가 계속 독일에 부역했다. 전후에는 죽을 때까지 이탈리아에 숨어 있었다.
  • 이반 코노노프
    가족들이 볼셰비키에 탄압받고 목숨을 잃었음에도 출신을 속이고 소련군에 입대, 이후 독소전쟁 시기 독일군에 항복해 독일 측 카자크 부대에 소속되었다. 전후에는 호주로 도망가 살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 헤유스 판데르묄런
    네덜란드 출신의 유명 골키퍼. 하지만 적극적인 나치 당원 활동으로 그의 존재는 흑역사화되었다.

11. 희대의 악인


지금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는 물론 심지어 네오나치들마저 핵심 전범들을 제외하고는 찬양하다 못해 비방하고 고인드립을 시전 하기도 한다. [46]

참고로 여기 나온 악질 5위부터는 뉘른베르크에서 죽은 인물들이 아니다.

11.1. 핵심 전범

  • 아돌프 히틀러
    뛰어난 연설능력으로 듣보잡 정당이였던 나치당을 독일 제1당으로 만들고 집권하였고, 집권 이후 각종 침략전쟁을 벌여 유럽에서만 무려 3천만명 이상의 사람이 사망해간[47]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게 만든 장본인으로 나치당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인물이다. 전쟁에서 패배하자 결국 베를린 총통벙커에서 자살하였다.
  • 하인리히 힘러
    나치 친위대 국가지도자이며 유대인 대학살의 총책임자로 가장 악명 높은 나치당의 인물 중 하나다. 그러나 학살에는 유능했지만 학살에 물자를 퍼부어대고 과학기술을 쓸데없는 연구와 개발에만 몰두시켜 전쟁에 패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다. 골 때리는 사실은 수많을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다니면서도 유대인들을 다 죽이기는 싫었는데 괴벨스 그 양반이 과격해서 그런다고 궁시렁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황이 점점 기울어지자 자기 혼자 살아남으려고 히틀러를 배신하고 자신이 곧 총통이 될 것이라며 서방과 협상했으나 히틀러한테도 배척당하고 서방에게도 배척당하자 신분을 숨기고 도망다니다가, 영국군에 잡혀 포로수용소에 들어갔으나 어차피 정체가 드러날 것임을 느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힌 다음에 청산가리 앱플을 씹고 자살했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선전 선동의 신으로 히틀러가 집권하게 만든 가장 큰 공을 세운 일등 공신으로 그의 선전 능력은 시대를 앞서갔다고 평할 정도로 선전에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홀로코스트를 선동하는 등의 행태를 통해 독일인들에게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키웠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하인리히 힘러보다 더 싫어하는 인간이다. 베를린 전투로 독일이 패망이 눈 앞에 이르게 되자 결국 아내 마그다 괴벨스와 자녀 8명과 함께 자살하였고 시체는 불에 태웠지만 다 태우지는 못해서 소련군들에게 시체가 넘어갔다.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나치 독일에서 수십만명을 학살하는데 관여한 핵심 인물 중 하나로, 안네 프랑크를 죽게 만든 이른바 네덜란드의 도살자이다. 잉크바르트로 인해 약 30만이 넘는 네덜란드인들이 학살당했다고 파악되고 있다.
  • 마르틴 보어만
    히틀러와 대화가 매우 잘 통하는 사람이어서 일명 나치당 내의 공공의 적으로 히틀러에게 아부하여 다른 나치 인사들을 히틀러에게 멀어지게 만들었으며 히틀러가 싫어하는 서류작업이나 행정업무를 맡아서 시시콜콜하게 명령하여 누가 총통인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학자들은 1943년 이후는 보어만이 독일의 실질적인 지도자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놈도 유대인을 싫어하고 슬라브인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했던 전범이다. 게다가 적군이 코앞에 오는데도 권력다툼을 하여 나치의 패망을 앞당겼다. 패망 이후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남미로 도주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결국 유골이 발견되면서 베를린에서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다.
  • 롤란트 프라이슬러
    독일의 법원을 인민 재판으로 만든 사람이며 판결을 할 때 온갖 인신 공격과 욕설을 퍼부었던 재판관이다. 1945년 그가 폭격으로 사망했을 때조차 주위 사람들은 그가 천벌을 받아서 죽었다고 할 정도로 원한을 많이 샀던 재판관으로 현재는 독일 법조계의 흑역사이다.
  • 아돌프 아이히만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치하의 독일로 이주해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축출 전문가로 통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직접 지시를 받고 600만명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 위치에 있었던 인물. 세간에는 그가 평범한 공무원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이 놈은 인간 말종이자 절대로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힘러가 1945년에 물자가 부족하니 유대인을 그만 죽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그 지시를 거부하고 더욱 더 유대인을 죽이려고 했으며, 남미로 도망가서는 '나는 유대인을 1천만명은 죽였어야 만족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오스트리아 출신 나치 독일 친위대 장성 겸 제국보안본부 본부장, 독일경찰청장으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뒤를 이어서 친위대 지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으며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만든 장본인이다. 게다가 멩겔레와 브란트의 실험을 최종승인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 카를 항케(Karl August Hanke) (1903년 8월 24일 - 1945년 6월 8일)
  • 테오도어 아이케
    제 3SS 기갑사단 토텐코프의 창립자이며 장검의 밤 당시에 에른스트 룀을 죽인 인물이자, 독소전쟁 당시 동부전선에서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약탈하는 전쟁범죄를 저지르며 엄청난 잔인성으로 악명높았던 핵심전범이다. 흔히 토텐코프 사단의 악명은 이 자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최종계급은 SS대장(Obergruppenführer)
  • 하인리히 뮐러
    히틀러의 핵심 측근 중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던 인물. 이른바 게슈타포 뮐러라고 불리며 게슈타포와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를 이용하여 무려 140만명이 넘는 인간들을 학살하며 엄청난 악명을 떨친 인물이며, 아돌프 아이히만의 상관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2차대전 후부터 지금까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나치 인사이기도 하다.
  • 한스 프랑크
    나무위키에 서술된 2차대전 전범들 가운데 유일하고도 확실하게 미군들에게 Running the gauntlet[48]이라는 폭행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머지 전범들이 연합군에게 구타를 당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49]

11.2. 의사(醫師)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 참조.

아우슈비츠에서 그리고 부헨발트나 여러 다른 수용소에서 요제프 멩겔레, 호르스트 슈만, 카를 게프하르트, 카를 브란트, 카를 클라우베르크 등 생체실험에 참가한 의사들은 꽤나 많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전범으로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20여 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도망치거나 이름을 감춘 채 해외로 도망다니면서 살았다. 대표적으로 그 악명 높은 요제프 멩겔레만 해도 남미로 도망가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점에서 참 아이러니하다.
  • 요제프 멩겔레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인간으로 쌍둥이를 이용한 실험으로 악명을 자랑하는 죽음의 천사다. 전세계에서 가장 악명이 드높은 죽음의 천사로 아마도 생체실험을 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떠올리라면 생각나는 자이다.
  • 카를 게프하르트
    무장친위대 의사 총책임자로 술폰아미드로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는 실험 성과를 얻기 위해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수용인들의 신체를 이용한 외상 인체실험을 실시했다
  • 카를 브란트
    T-4 프로그램 및 생체 실험을 자행한 인물로 유대인이 아닌 독일인을 주로 죽인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전범 재판 자체가 반인륜 범죄에 대한 응징 목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자국민 학살자도 처벌 대상에 들어갔으므로 결국 그 역시 전범으로 분류되어 처형되었다.
  • 호르스트 슈만
    1939년 10월 초 나치의 장애자 안락사 계획인 T-4 프로그램에 참가한 슈만은 주로 일산화탄소를 이용한 가스 살해를 실시했으며, 그러다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부임한 슈만은 요제프 멩겔레를 비롯한 다른 매드 사이언티스트들하고 동료로서 아주 친하게 지냈으며 그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X선을 이용한 불임화와 거세 실험을 실시했다. 또한 여자의 나팔관 끝에서 난소를 잘라내기도 했으며 물론 실험조건을 변화시키지 않기 위해 이러한 실험을 할 때에는 마취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개발한 그의 거세장치는 매일 1천명의 사람들을 불임으로 만들었으며, 호르스트 슈만의 불임화 실험에 사용된 여자 수인들은 거의 모조리 사망했고 잘라낸 생식기를 베를린에 보내기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이름프리트 에베를(Irmfried Eberl) (1910년 9월 8일 - 1948년 2월 16일)
    안락사 프로그램인 T-4 프로그램에서 '안락사 의사'로 악명 높았으며 트레블링카 강제 수용소의 초대 소장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던 그는, 1931년 나치당에 가입, 그는 독일의 장애인들과 정신병자들을 대상으로 한 안락사 프로그램 T-4 프로그램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는1940년 브란덴부르크 와 베른베르크 살인센터 운영 책임을 맡아 무려 1만 8천 명을 살해했다. 그후 트레블링카 수용소 건설에 참여한 뒤,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50] 초대 소장에 부임했다. 1942년 8월까지 트레블링카의 초대 소장으로 지내는 동안 무려 28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진행했다. 전후에 처벌받지 않고 의사로 일하던 그는 1948년 미군정청에 체포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베르너 하이데(Werner Heyde) (1902년 4월 25일 - 1964년 2월 13일)
    T-4 프로그램에서 안락사 의사들 중에서도 전문가로 꼽혔던 죽음의 천사.
    1902년 독일 포르스트에서 태어난 베르너 하이데는 1932년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의 신경정신과 사강사(Privatdozent)로 임명되었고 그 다음 해 나치당에 입당했다. 1935년 뷔르츠부르크 인종정책실장에 임명된 그는 이듬해 친위대에도 가입했다. 이후 그는 유전생물학을 연구하기 위해 강제 수용소로 파견되어 비밀국가경찰이 요구하는 소견서 작성 업무를 맡았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38년에는 친위대 사령부의 의무보건 담당 참모 자리에 올랐다. 이와 같이 든든한 배경 때문에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는 특별한 연구 업적이 없었지만 1939년에 그를 정교수에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의학실장 자격으로 안락사 프로그램 T-4프로그램의 시행 과정에 깊숙히 관여했다. 그 결과 그는 '정신병자 살해자(lrrentoter)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그는 그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장인 테오도어 아이케와도 친했으며 또다른 인간 말종 빅토어 브라크 밑에서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와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에서 생체 실험을 실시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덴마크의 무장친위대 야전병원 원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친위대 계급이 대령이었다. 종전과 더불어 하이데는 영국군에게 체포된 후 미군에 넘겨졌다가, 1947년에는 다시 독일 법정으로 인도되었다. 그는 재판 기간 내내 안락사 프로그램은 관계자들을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자기만은 인간다운 모습을 간직한 본보기가 되려고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47년 4월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의사 재판에 증인 자격으로 출석했다가 돌아온 후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2년이 지난 후였다. 이 동안 그는 처음에는 다른 나치의 전범들처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방에서 농부로 숨어 지냈지만, 킬의 암시장에서 '자바데(Sawade)라는 이름의 위조 신분증을 구입한 후 대범하게도 플렌스부르크 시의 체육 학교에서 의사로 활동하기까지 했다. 그러는 동안 그가 시 당국의 요구에 따라 작성한 진단서만 해도 무려 7천 통에 달했다. 만약 그가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조용히 살았다면 그는 붙잡히지 않고 그를 의심하지 못했겠지만 그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던지 지나칠 정도로 조심성 없이 행동했다. 그는 외국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가족들을 불러 크리스마스 파티를 여는가 하면 운전 중에도 사고까지 냈기 때문에 결국 그의 행적이 수사기관에게 포착되고 말았다. 결국 그는 자신이 체포될 것임을 직감했고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만나기 위해 뷔르츠부르크에 갔다가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렇게 1959년 11월 12일에 독일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재판이 시작되기 5일 전인 1964년 2월 13일 감옥에서 스스로 목을 매서 자살하고 말았다.
  • 발데마르 호펜 (1903년 2월 10일 - 1948년 6월 2일)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난 호펜은 고등학교 졸업 후 1919년부터 1933년에까지 스웨덴, 미국, 덴마크, 프랑스에서 생활했다가 1933년에는 독일로 돌아와서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뮌헨대학에서 공부했다. 1934년에 친위대에 입대한 호펜은 의학을 배웠다는 이유로 나치 친위대의 내과의사가 되었고, 1937년에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1940년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 부임했다.
    카를 브란트가 실시했던 장애자 및 유대인에 대한 안락사 프로그램 이른바 T-4 프로그램에 관여하여 사람들을 죽였고, 나중에 부헨발트와 같은 수용소에서는 실험자들에게 생체 실험을 실시하였다. 호펜은 약물에 대한 전문가였고, 그는 주로 가스 실험을 하거나 여러가지 약물을 이용한 실험을 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인간에게 페놀을 주입했을 때 혈청의 내성을 연구한다는 이유로 강제로 페놀을 주사하여 1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마비되었고, 100명의 포로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다양한 독극물에 대한 효능을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이 실험으로 엄청난 독이 투입되어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으며 더 나아가 독을 간편한 도구에 이용하여 쓸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실험자들에게 별의 별 독극물들을 사용하였다.
    게다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인간 말종 카를 게프하르트가 실시했던 술폰아미드 실험과 이페릿 가스 실험을 실시했다. 이 두 실험은 톱밥, 못, 철 조각 등의 날카로운 물질들을 피부에 비벼서 상처를 낸 후에 상처가 난 곳에 여러가지 독극물들을 투입시켜서 인간이 어떻게 죽게 되는지를 실험하는 실험이었고 이를 실험하여 많은 희생자들을 발생시켰다. 그 외에도 요제프 멩겔레가 실험한 말라리아에 대한 위험과 치료법을 대상으로 한 말라리아 실험도 했으며, 전염병, 황달 실험도 실시했는데 이 실험은 여러 질병들에 대한 치료와 관찰을 위해, 그리고 육군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실험하였다.
    실험자들은 질병 바이러스와 황달액을 피해자들에게 강제로 투입하고 피해자들이 어떻게 사망하는지를 관찰했다. 발진티푸스 실험이 실험은 발진티푸스를 천연두, 파라티푸스, 황열병, 콜레라 등을 비롯한 여러 바이러스의 위험성과 치료법, 백신의 개발을 위해 실시되었는데, 이 실험을 할 때마다 다른 실험들보다도 훨씬 더 높은 90% 이상의 사망률을 보였고 바이러스를 위한 백신 개발에서조차 괴상한 물질들을 백신이랍시고 주입시켜서 많은 사람들을 사망하게 만드는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웃긴 사실은 호펜은 자신의 잘못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호펜은 1943년에 독일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비리혐의로 체포된 여성간수 일제 코흐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친위대 장교에게 호펜이 치사량의 페놀주사를 놓았다는 혐의였다. 나치 독일 정부는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전황의 악화로 인한 의사의 부족 탓에 1945년 3월 그를 석방시켰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패전 이후 연합군에게 체포된 호펜은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비인도적 행위와 학살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법정에서의 발데마어 호펜 1948년 6월 2일에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끌려간 이후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처형되는 발데마어 호펜
  • 아리베르트 하임(Aribert Heim) (1914년 6월 28일 – 1992년 8월 10일, 정확하지는 않다)
    Dr. Death(죽음의 의사)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서양에서는 가히 요제프 멩겔레 급으로 유명한 전범아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모사드가 쫓았음에도 2009년까지 흔적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꽁꽁 숨어 살았을 정도로 잘 숨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계속 거론되어왔기 때문이다.
  • 빅토어 브라크 (1904년 11월 9일 - 1948년 6월 2일)
    브라크는 지금의 라인 지방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지역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29년 그의 나이 25살 때부터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후에 슈츠슈타펠에 참가했다. 1936년에는 아돌프 히틀러 총통 사무실 비서에 임명되었다. 그는 독일의 총통 히틀러에게 해결을 위해서 보내는 제국 부처의 공문서 나치당의 공문서 등에 대한 문제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1940년 11월 9일, 브라크는 슈츠슈타펠에서 수석 대령이 되었다. 그는 하인리히 힘러의 운전기사였으며 하인리히 힘러와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렇게까지 힘러에게 접근한 이유는 나치 독일의 생체 실험을 하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
    나치당이 집권한 후인 1939년 12월에 브라크는 장애인 말살 정책 T-4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그는 장애인들이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논리에 따라서 정신병 환자와 장애인들을 가스를 이용하여 죽이는 일을 실시했다.[51] 그렇게 그는 그의 논리에 따라 병원에서 안락사로 약 15,000에 달하는 독일 시민들을 살해했다. 그렇게 체계적으로 장애인들을 죽인 후에는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결정되었고, 이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밀려들어오는 유대인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대량으로 불임하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아우슈비츠에서 호르스트 슈만과 함께 불임 실험 X-선 실험을 개발하였고 하인리히 힘러는 이 방법을 채택하여 많은 수용소들에서 사용되어 그는 호르스트 슈만을 비롯한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매일 3000명에서 4000명에 달하는 수용자들을 X-선 실험 실시하였고 피해자들은 이 실험을 받고서 다양한 이상 증상으로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비용이 과다하게 지출된다는 이유로 주로 유전병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쓰였다고 한다. 또한 나치의 학살전담반인 아인자츠그루펜의 독가스 트럭 개발에도 참가하였고 이 독가스 트럭 때문에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사망하게 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빅터 브라크의 이러저러한 실험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의 수는 무려 7만명에 이른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브라크는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빅토어 브라크의 당시 사진.1948년 6월 2일 교수형으로 사망했다.'''처형되는 빅토어 브라크
  • 카를 클라우베르크
    아우슈비츠에서는 호르스트 슈만과 함께 불임실험을 실시하였고 특히 마취제 없이 여성의 자궁 안에 산을 투입시키거나, 난소를 떼어내고 엑스레이를 연속으로 찍는 이른바 X선 실험을 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여성의 난소의 화학적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압력실에 여성 포로들을 집어넣고서 남자들에게 성관계를 강요했고 카를 클라우베르크는 이들의 성관계 장면을 엑스레이 촬영하기도 했다. 한편 클라우베르크는 여성이나 남성의 성기에 무척 관심이 많아 포로들을 가스실에서 죽이기 전에 그들의 성기를 반드시 잘라내는 끔찍한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 볼프람 지퍼스[52] (1905년 7월 10일 - 1948년 6월 2일)
    독일의 힐데스하임에서 기독교 교회 음악가였던 아버지 아래서 태어난 지퍼스는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어릴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여러 악기들을 잘 연주했다고 하며 독일의 바로크 음악을 좋아했다. 지퍼스는 학생시절부터 반유대주의 단체에 참가하여 과격한 활동을 벌이다가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그는 세일즈맨으로 일하기도 했고, 전문대학을 다니면서 역사와 철학, 종교학 등을 공부했다.
    1929년에 나치당에 입당한 지퍼스는 친위대에도 지원하였으며 빠른 시간 내에 대령까지 승진했다. 1933년에 친위대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가 신비주의 연구를 위해 설립한 재단에 들어가 일했고. 1935년에 친위대에 입대한 지퍼스는 아넨엘베[53]의 이사장이 되어 실권을 잡았고 1943년엔 군사과학연구회의 감독관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바탕으로 나치의 여러가지 생체 실험에 깊이 관여했다.
    밑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생체 실험을 한 의사들의 대부분이 나치 친위대 소속이다. 그 중 하나가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아우구스트 히르트의 인종 연구를 위한 인골 표본 제작을 한 것이었다. 지퍼스는 당시 인골을 모으기 위해 112여명의 유대인 수용자들을 선발하여 살해한 후에 뼈를 표본으로 만들어 보냈다. 그리고 친위대의 소속 부서 중에 하나로 인체 실험과 게르만 민족에 역사와 신비를 연구하는 부서인 아넨엘베의 부장이 되며 많은 의사들의 특정한 목적에 인체 실험을 허가해 주었고 많은 수용자들을 지원했다.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 게르만 민족의 신비한 전설과 인종을 연구했다. 독일의 패망 후 연합군에게 체포된 지퍼스는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 에서 전범으로 법정에 세워졌고, 생체 실험과 같은 전쟁범죄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1947년 8월 20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전범 재판 당시 지퍼스의 사진 그 뒤 형무소에 끌려간 지퍼스는 1948년 6월 2일에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처형되는 볼프람 지퍼스
  • 프리츠 에른스트 피셔(Fritz Ernst Fischer) (1912년 10월 5일 - 2003년 ?월 ?일)
    카를 게프하르트의 조수인 인물이다. 베를린에서 태어난 피셔는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의 대학을 다니면서 1938년에 함부르크 대학을 졸업했다. 1934년에는 친위대에 입대하였고, 1937년에 나치당에 정식으로 입당해 무장친위대 병원에서 친위대 중위로 의사로 근무했다. 이곳의 주임의사는 하인리히 힘러의 측근인 카를 게프하르트였다. 1940년에 SS의 아돌프 히틀러 사단의 군의관에 들어간 피셔는 전투 중 부상으로 다시 무장친위대 병원으로 돌아왔다.
    그 후 라펜스브뤼크의 강제 수용소 소속 의사로 부임한 피셔는 카를 게프하르트가 수용소에서 실시한 인체 실험 당시에 조수로써 일했다. 그는 뼈와 근육, 신경 재생 그리고 뼈 이식과 같은 실험을 했었다. 그는 실험 외과 시술을 위해 특히, 육군의 부상병 들을 위하여 생체 실험을 하였고, 결국 이 실험으로 인해 생체 실험을 당한 희생자들은 영원히 장애인이 되거나, 몸의 일부가 절단되거나 평생 고통을 겪게 되었다.
    전후 미군에게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았지만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기도 했으며 게프하르트와 함께 실시했던 생체 실험을 증언했다. 그는 게프하르트가 시켜서 생체 실험을 했다는 점이 인정 되어서 1951년에는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4년에 석방 되었다.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그는 유죄 판결을 받은 의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의사라고 한다. 전후 의사면허를 취득하여 잉겔하임의 화학약품 회사인 베링거 사에서 근무했다. 피셔는 2003년에 잉겔하임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사망일은 알 수 없다.
  • 헤르타 오버호이저(Herta Oberheuser) (1911년 5월 15일 - 1978년 1월 24일)
    그녀는 라펜스브뤼크 수용소에서 일했는데 피셔와 마찬가지로 카를 게프하르트의 조수였다. 그녀가 한 실험은 뼈 이식 수술, 신경재생 수술을 하였고 아이들을 기름에 넣어 끓여서 죽이거나 이페린을 투입시켜 죽게 만들었다. 이때 여러 장기를 떼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떼어낸 아이들의 장기를 또 다른 실험을 실시했고 그녀는 아까운 재료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취미는 건강한 아이들의 몸 속에 기름을 주입해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것을 즐기는 것이었으며, 죽은 아이들에게서 흉골과 장기를 적출하기도 했다. 또한 군인들이 전장에서 생길 부상에 대한 치료법을 개발하기 위해 일단 많은 성인 포로들을 모아놓고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때려서 부상을 입게 만들었고 목재, 녹슨 못, 유리 조각, 먼지와 톱밥 등을 상처에 비볐고 그 상처를 치료하겠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생체 실험을 하였다. 그녀가 카를 게프하르트 박사의 감독 아래 86명을 생체 실험하였고, 그 중 대다수가 사망했는데 그들은 대부분이 폴란드의 정치범이었다.
    그렇게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만 74명의 폴란드 정치범과 86명의 여성이 헤르타에 의해 사망했다. 더욱 악질적인 일화로는 아이들이 공포에 질려서 그녀에게 "장기를 떼어내는 고통이 없게 저를 죽여주세요."라고 부탁했지만 냉정하게 무시하고 아이들을 산 채로 장기를 떼어내버렸다. 이유는 실험을 위해서는 단 한 부분의 신체라도 아까워서 그랬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시간까지 의식을 언제까지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가 궁금해진 그녀는 이를 위해 수용소에서 끌고 온 아이들을 기름이 든 통에 넣어서 끓여서 죽여버렸고, 아이들은 약 3분에서 5분 사이에 사망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린 결론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의식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결론이었다고 한다. 미치광이 실험으로 인해 그녀는 종전 후 재판에서 20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1952년 풀려났다. 그 후 1956년 병원을 개업하였으나 수용소 생존자가 그녀를 알아보고 신고해서 1958년 의사 면허가 취소되었고 그렇게 가난하게 살다가 1978년 쾰른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 루돌프 브란트 (1909년 6월 2일 - 1948년 6월 2일)
    루돌프 브란트는 친위대 제국총통(나치 친위대의 총 대장 자리)인 하인리히 힘러의 오랜 비서였으며, 그의 신임을 바탕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모든 방면에 손을 대며 실험을 한 인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브란트는 타이핑 교육을 받으며 법학을 공부했다. 이후 독일 내무성에서 근무하다가 1932년에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해에 나치당에 가입한 그는 1933년부터 친위대에 들어가 12월에 카를 볼프의 친위대 전국지도자 개인 참모부 에서 근무하며 패전까지 하인리히 힘러의 측근으로 일했다.
    1930년 말기에 루돌프 브란트는 히틀러의 개인비서가 되어 힘러와 내무성 사이를 연결하는 연락장교가 되었고 1943년부터 힘러가 내무성의 장관이 되자 힘러의 조언자로도 일했는데 브란트는 강제 수용소에서 실시된 친위대 의사에 의한 인체 실험의 조사, 관리를 담당했다. 그는 아우구스트 히르트의 인종별 두개골 샘플 취득을 위해 86명의 유대인을 살해하는 것에 관여했다. 그러나 브란트는 패전 후에 힘러와 함께 영국군에게 포로가 되었고 전후 개최된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브란트는 자신의 생일날인 1948년 6월 2일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처형되는 루돌프 브란트
  • 카를 겐츠켄(Karl Genzken) (1885년 6월 8일 - 1957년 10월 10일)
    홀스타인 주의 프렛츠에서 태어난 겐츠켄 고교졸업 후 튜빙겐 대학, 마르부르크 대학, 뮌헨 대학, 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1915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2년부터 1919년까지 독일 해군에서 군의장교로 근무한 그는 잠수함 의무국에서 종군하며 빌헬름스하펜에서 근무 후 종전이 되자 고향인 프렛츠로 돌아와 1934년까지 의사로 일했다. 1926년 7월 7일에 나치당에 입당한 겐츠켄은 1933년 11월 5일에 친위대에 입대했다. 1934년에 국방성 부속 예비사관으로 베를린 병원에서 1년간 근무한 후 1937년 2월 1일에 무장친위대 토텐코프 사단의 지휘관이 되었다.
    테오도어 아이케가 강제 수용소 총감으로 취임하자 겐츠켄은 강제 수용소의 의사장이 되었다. 젠카가 담당한 임무는 수용소 인원의 치료로, 명목상으론 의료행위를 한다고 했지만 실제론 의약품을 횡령했고 유전질환 치료라는 이유로 수용소에서 강제 불임 수술을 실시하기도 했다. 1939년 가을부터 1940년까지 해골사단 위생부에서 일한 젠카는 패전까지 무장친위대 위생부장관 겸 강제 수용소 인체 실험 책임자였다.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 백신의 효과를 테스트하기 위해 실시된 천연두, 콜레라 및 기타 질병실험을 실시하였고 이러한 장티푸스 치료 실험이라는 업적으로 1943년에 친위대 중장 및 무장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한 겐츠켄은 전후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1947년 8월 20일에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소이탄 폭탄 실험도 했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54년에는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가 1954년 4월 17일에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석방된 후 3년 후인 1957년 10월 10일에 사망하였다.
  • 에두아르트 비르트스(Eduard Wirths) (1909년 9월 4일 - 1945년 9월 20일)
    에두아르트 비르트스는 바이에른의 가톨릭 가정인 비르트스 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열렬한 나치주의자가 되었고 나치에서 활동하면서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다른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1933년 6월에 나치당에 들어갔고 1934년에는 슈츠슈타펠에 자진해서 들어갔다. 그 후 아우슈비츠에 들어간 그는 요제프 멩겔레가 들어왔을 당시 그의 상관이었다. 그리고 요제프 멩겔레와 호르스트 슈만과 함께 생체 실험을 했다. 그는 호르스트 슈만과 같이 불임 실험을 했고 X선을 이용한 방사선 불임 실험과 여자의 난소 제거와 같은 실험을 했다. 게다가 요제프 멩겔레를 아주 좋아했는지 요제프 멩겔레를 뛰어나고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전범 마찬가지로 영국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고, 처형 될 것이 두려워 1945년 9월 20일 자살했다.
  • 에른스트 로베르트 그라비츠(Ernst Robert Grawitz) (1899년 6월 8일 - 1945년 4월 24일)
    군의관의 아들로 베를린 교외의 샤로텐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라비츠는 제 1차 세계 대전시 1917년부터 종군했지만 1918년에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1919년에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베를린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그는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1년에 나치당에 입당한 그라비츠는 1932년 3월 29일에 친위대에 입대했다. 그러다가 1942년부터 1943년까지 라펜스브뤼크의 강제 수용소에서 수용자를 가스로 피부를 괴사시키는 감염 실험 등의 잔학한 생체 실험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행해진 악명높은 동성애자 실험에도 참가해서 동성애자들을 처참하게 생체 실험을 하거나 사망하게 만들었다.[54] 그라비츠는 이후 총통 지하벙커 에서 히틀러의 주치의로 일하다 1945년 베를린 전투가 한창이던 당시 베를린 탈출 요청을 히틀러에게 신청했지만 거부당하자 절망하여 집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가족들과 함께 자살했다.
  • 쿠르트 블로메(Kurt Blome) (1894년 1월 31일 - 1969년 10월 10일)
    블로메는 신경 가스와 살충제 및 실험을 하거나 일본의 731부대와 협력하여 세균전 실험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인하여 1947년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그의 석방되었으며 다시는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같이 풀려나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1969년 도르트문트에서 사망했다.
  • 요아힘 므루고프스키(Joachim Mrugowsky) (1905년 8월 15일 - 1948년 6월 2일)
    요아힘 므루고프스키는 인체 실험을 한 대다수의 의사들처럼 똑똑하고 유명한 의사였다. 그는 이전부터 약학을 전공하였고 친위대에 입대하여 친위대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배운 지식으로 인체 실험을 자행했는데, 그것은 바로 독을 바른 총알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는 질산염을 첨가한 총알을 개발했는데, 이 총알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사격 실험을 자행하여 수많은 포로들을 죽게 만들었고 결국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란츠베르크 형무소로 끌려간 무르곱스키는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처형될 당시의 요하임 므루고프스키 므루고프스키는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으로 괴상한 연구도 했는데 그게 바로 “부르크힐트 프로젝트”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고. 부르크힐트 프로젝트
  • 아우구스트 히르트(August Hirt) (1898년 4월 28일 - 1945 6월 2일)
    아우구스트 히르트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의학 교수였다. 그는 생체 실험 의사들 중에서도 상당히 의문스러운 점이 많은 의사였다고 한다. 그가 한 만행은 해부를 위해 인간의 두개골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는 다양한 인종의 두개골들을 모을 수 있었으며 전화 몇 번만으로도 이 사진처럼 (혐짤주의) 다양한 인종의 시신을 얻었을 수가 있었고 사람들의 시체를 부검하기도 했으며, 사람들의 해골과 시신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데에 동참하기도 했다. 또한 힘러로부터 독가스에 대채할 수 있는 인종 청소 물질을 연구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를 위해 아우슈비츠 형무소에서 청산가리를 이용한 물질을 연구하였다. 그 외에도 라펜스브뤼크 형무소에서 실험을 위한 보조자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이 가까워지자 잡힐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자살하여 생을 마감했다.
  • 엘리자베트 마르샬(Elizabeth Marschall) (1886년 5월 27일 - 1947년 5월 3일)
    라펜스브뤼크의 여간호사이다.
    라펜스브뤼크(Ravensbrück) 수용소에서 나치 독일의 생체 실험을 감독한 사람 중 한명. 포로들 중에서 여자들이 출산하면 아이들을 상대로 생체 실험을 실시해서 모두 4주를 못 넘기고 전부 처참하게 살해해 버렸고 아우구스트 히르트의 실험을 돕기도 했으며 포로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일을 감독하는 임무도 맡았는데, 아우슈비츠로 이송할 800명의 여성을 가스실로 보내 살해했다. 결국 체포된 후 죄가 인정되어 1947년 5월 3일 하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녀의 나이 60세였다.
  • 아돌프 포코르니(Adolf Pokorny) (1895년 7월 25일 - ?)
    그는 외과의사로써 피부병, 성병에 대한 의학 전문가였다. 그가 주로 한 생체 실험은 생식선 거세 실험이었다. 위에서 보았던 호르스트 슈만이 실험했던 실험이다. X-선 실험, 그리고 항문에 고무를 덮씌운 판을 쑤셔넣는 것 등 그의 실험 의도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다른 인종들의 인구 증대를 억제하긴 위해서 실험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혐의로 전후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 출석했는데, 생체 실험을 한 혐의가 분명했는데도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이 나왔고 석방된 이후 행적이나 정확한 사망일은 알 수 없다.
  • 게르하르트 로제(Gerhard August Heinrich Rose) (1896년 11월 30일 - 1992년 1월 13일)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다하우 수용소와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포로에 대한 실험을 실시했다. 그가 한 생체 실험의 목적은 말라리아와 발진티푸스를 어떻게 하면 견딜 수 있는가였다. 이를 위하여 튀링겐에 있는 정신 병원에서 전쟁의 러시아 포로에게 말라리아 약물 테스트를 실시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서 그의 반인륜적 실험 소식을 듣고 연구지의 정확한 위치를 얻기 위해 수소문 했고 결국 전쟁이 끝난 후에 체포 되었다. 그는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가 인정되어서 유죄로 인정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형이 20년으로 감소하면서 그는 1955년에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출소했고 37년을 더 살다가 1992년 사망했다.
  • 헤르만 베커(Hermann Becker) (1910년 7월 18일 - 1961년 8월 27일)
    나치 독일 시대에 항공 의학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았던 인물이지만 그도 역시 생체 실험을 하였다. 다른 생체 실험들과 같이 소금물, 즉 바닷물을 실험자들에게 투입하여 사망하게 만들었다. 바다에서 긴급 상황이 일어났을 때 바닷물을 마시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지를 확인한다는 실험에 참가했었다. 이런 인간은 처벌을 받아야 했지만 미국은 그의 항공 의학 능력을 인정하여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미국으로 빼돌렸고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 1961년에 생을 마감했다.
  • 빌헬름 바이클뵈크(Wilhelm Beiglböck) (1905년 10월 10일 - 1963년 11월 22일)
    다하우 수용소에서 바닷물 실험을 한 의사로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전쟁범죄에 대한 유죄 판결로 15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0년 형으로 감형되고 1963년 감옥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 오스카 슈뢰더(Oskar Schröder) (1891년 2월 6일 - 1958년 1월 26일)
    다하우 수용소에서 바닷물을 이용한 생체 실험을 한 의사.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55년에는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풀려나서 1958년 사망했다.
  • 콘라트 셰퍼(Konrad Schäfer) (1911년 1월 7일 - ?)
    다하우 수용소에서 바닷물을 이용한 생체 실험을 한 의사, 그러나 그의 항공 의학 능력을 높이 산 미국은 그를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무죄판결이 나도록 한 후 그를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빼돌렸고 미국에서 천수를 누리다 사망했다.
  • 지크프리트 한틀로저(Siegfried Handloser) (1895년 3월 25일 - 1954년 7월 3일)
    발진티푸스를 이용한 생체 실험을 실시한 의사로서 죄가 인정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54년에 20년으로 감형되었고 암으로 59살 나이에 뭔헨에서 사망했다.

11.3. 수용소의 간수

  • 그레타 뵈젤(Greta Bösel)(7번 오른쪽의 여자) (1908년 5월 9일 - 1947년 5월 3일)
    직업이 간호사였던 뵈젤은 1939년에서부터 유대인 선별 작업의 관리자로서 라펜스브뤼크(Ravensbrück) 강제 수용소에서 근무했다. 뵈젤은 어떤 수감자가 즉시 가스실로 보내질 것이며 어떤 수감자가 포로 수용소로 보내질지를 결정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광적인 나치주의자였으며 그녀는 온갖 학대와 고문 그리고 폭력을 일삼았고 그러다가 환자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만약 그들이 일을 할 수 없다면, 썩어서 죽어버리게 내버려 둬"라고 수감자들에게 말했던 것으로 생존자들이 증언했다. 소련군이 라펜스브뤼크 수용소로 밀고 들어오자 그녀는 그녀의 남편과 함께 탈출했으나 나중에 영국군에게 발견되어 체포되었다. 그리고 함부르크 라펜스브뤼크 전범 재판에서 학대 행위, 살인, 그리고 유대인 선별 과정에 참가한 것으로 인정되어 정확하게 1947년 5월 3일 오전 9시 55분에 교수형으로 처형당했다.
  • 게르트루데 파이스트(Gertrude Feist)
  • 루돌프 회스(Rudolf Höss) (1901년 11월 25일 - 1947년 4월 16일) 다른 사진
    나치 간수들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간수들 중에서도 최악의 학살자. 그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책임자이며 수백만이 죽은 인종청소의 가장 큰 주범이다. 의도적인 살해가 아니라 병과 기아 등 어쩔 수 없는 죽음이 대부분이었다고 되도 않는 변명을 하기도 한 진정한 쌍놈. 나치 독일에서 아우슈비츠 소장으로 복무할 때 그곳에서 벌어지는 강제 노동, 생체실험, 수용자 학대 등의 각종 잔혹 행각을 주도했으며 이러한 행각의 결과로 무려 1백만 이상의 사람을 죽게 한 악마 중의 악마다. 전후 가명을 써서 탈출했으나 영국군이 아내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 아이 중 하나를 소련으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을 해 농장의 인부로 숨어있던 그를 찾아냈다. 당시 회스의 악행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이자를 잡자마자 동행한 군의관이 "살려서 재판에 넘겨야 된다."라고 일갈할 때까지 두들겨패댔다고 한다.
    연합군은 그의 죄악을 응징하는 의미에서 일부러 아우슈비츠 근처까지 끌고 가서 교수형에 처했는데, 나치의 핵심 전범들조차 그런 대우는 받지 않은 점에서 얼마나 죄가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죄를 후회하지 않았으며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가족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는 개드립을 쳤다. 처형당할 때 아우슈비츠 소장 사무실, 즉 그의 이전 근무자가 보이는 곳으로 특별히 처형장을 만들고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에게 그의 처형을 관람하게 하는 등 갖은 모욕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처형당했다. 그의 처형지는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아직까지도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남긴 서찰은 자기가 저지른 짓이 인류에 대한 범죄임이 분명하며 사죄한다는 식의 데꿀멍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름이 루돌프 헤스랑 비슷한데, 헤스와는 관계 없으므로 주의할 것.
  • 루트 클로지우스노이데크(Ruth Closius-Neudeck) (1920년 7월 5일 - 1948년 7월 29일)
    클로지우스 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폴란드의 블라우스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결혼해서 루트 노이데크 또는 루트 클로지우스노이데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944년 7월부터 라펜스브뤼크(Ravensbrück) 수용소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그녀는 잔인성이 대단해서 라펜스브뤼크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상부의 눈에 들어 승진을 거듭했다. 이 자는 나치의 여성 범죄자들 중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잔인한 자였는데 약 5천 명에 달하는 여자와 아이들을 거의 장난감 가지고 놀듯이 했다. 가스실에 들어갈 여자 포로들을 직접 골랐으며 포로들의 목구멍에 날카로운 삽을 집어넣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또한 그녀의 감독 하에 있던 사람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죽기 일쑤였다. 결국 나치가 패망한 후 체포되어 하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했다.
  • 마리아 만델(Maria Mandel) (1912년 1월 10일 - 1948년 1월 24일)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그녀는 아우슈비츠 생체실험의 공식적인 지휘자 중 하나가 되었고 나치의 여성간부들중에서 가장 높은 대우를 받은 간부로서 50만명의 여성 포로를 죽이는데 직접적으로 가담한 걸로 알려지고 있으며,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가 직접 수용소 문 앞에서 포로들이 나오는걸 지켜보면서 죽일 포로들을 골랐다고 하며 그 때문에 그녀가 문앞에 서 있는 날에는 포로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게다가 유대인들을 자신의 애완동물로 부려먹기 위해서 선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선별한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이 지겹다고 느껴졌을 때, 그녀는 그 "애완동물"들을 가스실로 보내버렸다. 또한 유대인 이송, 유대인 선별, 유대인 처형 그리고 점호를 하는 동안에 공연을 하게 했던 아우슈비츠 여성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나치가 패망한 후 그녀는 도망가다가 체포되었고 전범 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1946년 1월 24일 교수형을 당했다.
  • 반다 클라프(Wanda Klaff) (1922년 3월 6일 - 1946년 7월 4일)
    1922년 단치히에서 태어났고 1938년에 학교를 졸업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1942년 결혼할 때까지 잼 공장에서 일하다가 라펜스브뤼크 수용소에 합류했는데 대부분의 간수들은 1941년에 참가한 반면 클라프는 뒤늦게 나치에 합류해서 지각생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클라프는 스투트호프 강제 수용소로 1944년에 배치되었고 그녀는 1945년 종전 직전까지 그 곳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밀고 들어오고 탈출하다가 폴란드 경찰에 1946년 체포되었고 1946년에 그녀는 재판을 받고 그녀가 저지른 범죄행위가 인정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클라프의 악행은 전범 재판에서 그녀가 말했던 단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난 매일 최소 두 명의 수감자들을 구타했어요. 난 정말로 유능하고 강제 수용소에서 내가 맡은 일에 헌신적이었어요."
  • 베라 잘베크바르트(Vera Salvequart) (1919년 11월 26일 - 1947년 6월 26일)
    라펜스브뤼크 캠프의 간호사. 1919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독일로 이사했고 1941년부터 라펜스브뤼크 수용소에 근무하면서 나치 생체실험의 주요인물이 되었다. 대부분의 포로들이 가스실에서 죽었지만 그렇지 않은 포로들은 직접 독을 주입해서 죽였는데 약 1000명이 넘는 여자들을 가스실에서 죽였다고 한다. 그녀는 나중에 사망 진단서를 작성하여 시체에서 금니를 빼내는 일을 하기도 했다. 결국 전범 재판에서 죄가 인정되어 1947년 6월 26일 교수형으로 사망했다.
  • 야키프 팔리(Jakiw Palij)(1923년 8월 16일 - 2019년 1월 11일)
    2018년 9월까지 자신의 신분과 나치 독일에 협력한 사실을 숨기고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하다 추방 당한 인물이다. 1949년 미국으로 이민 올 당시 야키프는 이민 심사에서 농장과 공장에서 일해왔다고 속여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게슈타포 훈련을 받았고 1943년에는 트라브니키 수용소에서 무장 경비로 근무한 사실이 있고, 유대인 학살 작전인 라인하르트 작전에 가담한 혐의가 있으며 SS 훈련 또한 이수한 혐의가 있다. 사실 야키프는 2001년 당시 미 법무부 조사에서 나치에 가담한 사실이 발각되어 2004년에 연방 법원이 추방 명령을 내렸지만 독일, 폴란드에서 수용을 거절한 것과 인권유린 등의 문제 때문에 어영부영 말년을 보내는가 싶었지만 미국 정부가 독일과 계속 담판을 지은 결과 추방을 집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때 미국인들이 야키프 팔리를 쫓아내면서 한 말은
    You're Neighborhood is Nazi!

    당신의 이웃은 나치다!

    한 평생을 평범한 사람인 척하며 살아온 그는 2019년 1월 9일 독일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 이르마 그레제
    아우슈비츠와 같은 강제 수용소에서 간수로 근무했으며 잔혹하고 변태적인 성격으로 승진을 거듭하여 3만명 이상의 수감자를 관리했다. 그 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였는데 그들을 권총과 채찍, 그리고 자신이 기르던 개를 이용하여 포로들을 죽였다. 수용소안의 유력한 장교들과 스캔들을 내면서 장교들까지 자기 손아귀에 넣었는데 염문이 난 인물 중에서 요제프 멩겔레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나치가 패망하고 그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 일제 코흐
    부헨발트의 붉은 마녀 혹은 부헨발트의 암캐라고 불리며 엄청난 악명을 떨친 부헨발트 수용소의 악명높은 간수이자 수용소장 카를 오토 코흐 SS대령의 부인이다. 포로들 중에 문신한 사람들의 피부를 벗겨내고 피부를 이용해 전등갓, 손가방, 사진첩 등을 만들었다. 인간의 엄지손가락 뼈로 만든 전등스위치도 발견되었지만 물론 이것들은 과장된 면이 있다. 그 유명한 연쇄살인마 에드워드 게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코흐이다. 말년에는 결국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복역 중 자살하였다.
  • 엘리자베트 폴켄라트(Elizabeth Volkenrath)(1919년 9월 5일- 1945년 12월 13일)
    라펜스브뤼크와 아우슈비츠에서 일하다가 베르겐-벨젠 수용소의 수석 간수로 영전했다. 다른 자들 못지 않게 잔인하여 포로 처형에 가담하였고 전후 처형되었다.
  • 요제프 크라머(Josef Kramer) (1906년 11월 10일 - 1945년 12월 13일)
    루돌프 회스 그리고 오스카 디를레방어와 쌍벽을 이루는 자. 뮌헨 출신으로 1940년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루돌프 회스 소장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5월부터 1944년 12월까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관리자로 일했으며 1944년 12월부터는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안네 프랑크가 있던 수용소의 수용소장이 된 것이다. 그는 포로식량비를 착복했으며 수용능력의 8배가 넘는 8만8천여 명을 쑤셔넣은 결과 티푸스가 창궐, 매일 250~300명씩 죽어나갔다. 그러나 처리를 못 해 쥐가 시체를 먹고 산 사람까지 공격했다. 전후 베르겐-벨젠에서 해방된 수용자들은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나갈 방법은 이 굴뚝 외엔 없다라고 소각로를 가리킨 말은 매우 유명하다.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3만7천여 명에 달했다. 안네의 일기로 잘 알려진 안네 프랑크도 그 희생자 중의 하나다. 당연히 영국군에게 잡힌 후 열나게 두들겨 맞고 인사불성이 되어 교수형으로 처형된다.
  • 유아나 보어만(Juana Bormann) (1893년 9월 10일 - 1945년 12월 13일)
    비젤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거나 개를 데리고 있는 여자라고 불리며 엄청난 악명을 떨친 여자이다. 1939년에 보어만은 나치의 보조단체에 가입했다. 그 이후 그녀는 종전직전까지 독일에서 가장 악명높은 강제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 라펜스브뤼크, 베르겐-벨젠을 거쳤다 그녀는 또한 잔혹한 행위로 유명했는데, 그녀가 수감자들을 구타할 때 동행했던 독일 셰퍼드 견종을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 잘 유명했고, "개를 데리고 있는 여자"라는 별명은 여기서 온 것이다. 포로들 사이에서 그녀는 악마로 통했으며 포로들이 고통 속에 죽어가는걸 즐겨보는 취미로 유명했다. 보어만 앞에서는 절대로 포로들을 한번에 죽여서는 안되었고 고문하면서 죽여야 했으며 그녀가 기르는 독일산 셰퍼드로 포로들을 잡아먹게 해서 죽이거나 개한테 물어뜯겨서 사망하게 하는 것으로도 악명이 자자했다. 훗날 나치가 패망하고 요제프 크라머, 이르마 그레제와 함께 체포 된 후 전범 재판에서 그녀가 했던 말에 따르면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이런 짓을 했다."고 한다 결국, 그녀의 잔혹한 행동과 새디즘적인 행동은 살인혐의로 인정되어 유죄판결을 받았고 1945년 12월 13일 처형되었다.
  • 예니 반다 바르크만(Jenny Wanda Barkmann) (1922년 ?월 ?일 – 1946년 7월 4일)
    아름다운 유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나치에서의 포로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주로 여자들과 아이들을 맡았으며 포로들을 짐승 취급하기로 유명했던 인물로, 특히 애까지도 무자비하게 대했다고 한다. 지 마음에 안 들면 가스실로 직행시켰기 때문에 수감자들은 그녀를 엄청나게 두려워 했다고 한다. 결국 나치가 패망하고 체포되어 전범 재판에서 죄가 인정되어 사형판결을 받았는데, 그녀는 유죄판결을 받자 "보통 인생에서 기쁨과 즐거움은 정말로 짧은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결국 1946년 7월 4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처형 후 그녀의 사진이다.
  • 쿠르트 프란츠 (1914년 1월 17일 - 1998년 7월 4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난 쿠르트 프란츠는 1929년부터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다가 1935년에 독일 국방군 육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2년 후인 1937년에 친위대로 이적한 후 토텐코프 사단에 배치되어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의 간수로 일했다. 1939년부터 그는 T-4 프로그램에 동원되어 1942년 4월에 베우제츠 강제 수용소로 배속되었다. 1942년 8월에 트레블링카 강제 수용소로 이동한 쿠르트 프란츠는 프란츠 슈탕글 소장 아래에서 부소장으로 일했다. 1943년 6월에 친위대 소위로 승진한 후 1943년 8월부터는 트레블링카가 폐쇄되는 11월까지 소장으로 일했는데 쿠르트는 수용소 내에서 사디즘적 기질을 발휘하여 유대인들에게 잔학행위를 하며 그것을 즐겼다. 전후 미군의 포로가 된 쿠르트는 포로수용소에서 탈주하여 다시 요리사로 일했지만 1959년에 서독의 사법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수용소 내의 잔학행위로 재판을 받았다. 1965년에 그는 법정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지만 1993년에 건강악화를 이유로 석방되어 1998년에 양로원에서 사망했다.
  • 크리스티안 비르트
    여기 있는 간수들 중에서도 최악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독일인에게도 구타를 서슴지 않았으며 여기에 수천명의 사람이 죽는 모습을 대놓고 즐길 정도였던 인물로, 여타 간수들도 그를 역겹다고 여겼다. 라인하르트 작전이 벌어진 기간 중 5개월 동안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의 소장으로, 그 이후에는 작전 감독관으로 있으면서 수용소를 작업장처럼 속이거나 가스실을 샤워장으로 위장하는 방법을 도입하여 절멸수용소들의 학살 시퀸스를 완성하였다. 작전 종료 이후에는 여타 라인하르트 작전 관련자들과 함께 북이탈리아-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토벌 임무에 투입되었다가 파르티잔의 습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 프란츠 슈탕글 (Franz Paul Stangl) (1908년 3월 26일 - 1971년 6월 28일)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소장이자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의 초대 소장이다.[55] 트레블링카의 초대 수용소장이었던 이름프리트 에베를의 후임자로, 엉망진창이던 수용소의 학살 시퀸스를 정비하여 학살이 훨씬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그의 부임기간 동안 약 60만명이 트레블링카에서 살해되었다. 이전에도 소비보르에서 불과 4개월만에 10만을 살해했으며, 기타 집시, 장애인들까지 합치면 그가 살해한 인물은 100만 이상이 될 수도 있다.
    오스트리아의 알트뮌스터에서 태어난 슈탕글은 야간경비원인 아버지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아 1916년에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슈탕글은 아버지가 입었던 제복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다고 나중에 이야기했다.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슈탕글은 1931년에 일을 그만두고 오스트리아 경찰에 들어갔다. 당시 위법단체였던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당원으로 2년간 재적했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슈탕글은 1938년에 오스트리아 합병시 구 경찰요원들이 체포되자 이를 피하기 위해 나치당에 가입했던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당원이 되어 기금도 냈다고 후에 증언했다. 이에 슈탕글은 검거열풍에도 살아남아 오스트리아 경찰의 간부직을 유지했는데 1940년에 하인리히 힘러의 요청으로 그는 T-4 프로그램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1942년에 폴란드로 건너 간 슈탕글은 1942년 3월부터 9월까지 소비블 강제 수용소의 소장으로 근무했다. 슈탕글은 유대인의 처리를 담당하여 10월에 기계가 고장으로 멈출 때까지 약 1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의 아내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것에 대해 근심스럽게 이야기하자 슈탕글은 이것은 일일 뿐,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며 더 이상의 질문을 막았다고 한다. 1942년 9월에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소장으로 부임한 슈탕글은 술에 취한 채 유대인들을 화물로 부르기도 했는데 그는 술을 매우 많이 마시는 사람이었으며, 술버릇이 나빠서 화물에서 취중에 유대인을 죽인 적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자 슈탕글은 신분을 감추고 숨었다. 그러던 중 미군의 포로가 되었지만 탈옥하여 이탈리아로 달아났다. 당시 바티칸의 알로이스 후달 사교가 도주로를 만들어 슈탕글을 도망시켰다고 하여 바티칸과 나치의 공모혐의로 꽤 시끄러워지자, 슈탕글은 적십자사가 발행한 위조여권을 사용하여 시리아로 향했다. 후달 사교에 의한 나치 잔당의 도망제공은 1947년 신문에서 대서특필되었는데 그 후 후달은 1951년에 사직하여 1963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슈탕글은 1951년에 브라질로 향하기 전까지 약 3년간 아내와 가족과 함께 시리아에 머물렀다. 브라질로 도망한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상파울루의 폭스바겐 공장에 취직했다. 그리고 프란츠 슈탕글이란 본명을 떳떳하게 현지에서 사용했다. 그러나 슈탕글은 1961년에 나치의 학살혐의로 체포되어 서독정부의 법정에 기소되었다. 슈탕글은 법정에서도 시종일관 자신은 맡은 일에 따랐을 뿐이라 주장했지만, 결국 법정은 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1971년 6월 28일에 수감 중이던 뒤셀도르프 형무소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쿠르트 볼렌더 (1913년 5월 21일 - 1966년 10월 10일)
    독일 뒤스부르크 출신인 볼렌더는 1939년에 나치당에 입당해 나치 친위대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T-4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도 했고. 그는 동료인 프란츠 슈탄겔 및 카를 프렌젤과 함께 1942년 4월에 막 완성된 소비블 강제 수용소의 간수로 부임했다. 소비블에서 볼렌더는 수인들의 작업 감독관으로 일했는데 파울 그로드 친위대 장교와 함께 개를 데리고 다니면서 동향을 감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끔식 죄수들에게 "어라? 넌 일할 마음이 없나보군?"이라면서 개를 풀어 물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이 수용소에 도착하면 가스실로 보낼 자와 일할 자를 구분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그러나 소비블 근무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1942년 7월에 거짓 이혼의 증거를 제출한 혐의로 체포되어 12월에 친위대 법정에 세워지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1943년 10월에 소비블에서 죄수들의 대탈주가 벌어지면서 소비블이 폐쇄되자 볼렌더는 출소 후 소비블의 해체작업에 파견되었고 그렇게 근무는 끝났다. 전후에는 볼렌더는 아내에게 자신이 죽었다고 증언하게 하여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 했다. 볼렌더는 하인츠 브룬너라는 가명으로 홀트하임에서 숨어 살았는데 1961년 5월에 서독의 사법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는 당시 유대인들의 대량학살에 관여한 죄로 기소되었지만 하겐에서 재판이 이루어지던 도중인 1966년 10월 10일에 구치소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 헤르타 보테(Herta Bothe) (1921년 1월 8일 - 2000년 3월 16일)
    보테 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를 도와 작은 나무 가게에서 일하다가 병원에서 간호사로 한 후, 공장에서 잠깐 일했다. 그러다가 1942년에 징병된 후 보테는 단치히 근처의 스투트호프 수용소에서 복무했다. 그녀는 잔혹한 감독관으로 재판에서 이야기 되었고, 보테는 소련군이 스투트호프 수용소로 밀려들어오자 탈출에 성공했으나 목재보관소를 관리감독했던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체포되었다. 그녀는 전범 재판에서 새디스트적인 성격과 무자비한 성격의 소유자로 묘사되었으나, 그녀가 저지른 범죄행위는 그녀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범죄 수준만큼 악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물론 무자비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교수형에 처해지는 대신에 감옥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영국 정부로부터 매우 관대한 처분을 받기도 전에 풀려나서 감옥에서 고작 6년만 복역했다.
    2004년에는 종전 후 60년이 지나서 했던 인터뷰 도중에 그녀는 강제 수용소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서 기자가 자신이 했던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요? 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요. 그것이 강제 수용소였다는 것이 잘못이었죠. 하지만 난 그곳에 가야만 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내 스스로가 그곳에 집어넣어졌을 테니까요. 그게 내가 저지른 잘못이었어요."

11.4. 학살자

  • 빌헬름 레디스(Wilhelm Rediess) (1900년 10월 10일 - 1945년 5월 8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프로이센에서 홀로코스트 집행에 관여하여 동프로이센의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는데 관여했고 1,558명의 정신병 진단을 받은 유대인을 가스로 70일에 걸쳐서 살해했다. 이후 노르웨이의 친위대 및 경찰 고급지도자로 임명된 레디스는 독일의 패전까지 자리를 유지했는데, 또한 금발벽안이 많았던 북구인종의 노르웨이인과 독일인의 결혼이라고 쓰고 강간이라고 읽는 이른바 레벤스보른을 권장하여 8천명의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기도 했다. 1945년 5월 8일에 레디스는 노르웨이에서 자살했다. 그의 시체는 노르웨이 점령판무관이던 요제프 테어보덴에 의해 벙커로 옮겨졌고, 이후 테어보덴도 스스로 폭탄을 터뜨려 자살했다.
  • 아르투어 네베 (Arthur Nebe)
    독일 경찰이었으며 경찰 조직이 친위대에 완전통합된 후에는 슈츠슈타펠 중장이 되었다. 아인자츠그루펜B부대의 책임자로서 바르바로사 작전당시 학살에 일조하였다. 혹자들은 Krippo(범죄 경찰)이 친위대에 흡수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다는 것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한 것때문에 네베를 저항자로 보고 있으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가 프로이센 경찰때부터 반유대주의에 앞장섰다는 것을 찾아내었다. 현재 대다수의 평가는 자신이 일하던 경찰조직이 갑툭튀한 친위대에 넘어가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하인리히 힘러의 제거를 위해 암살작전에 가담했다고 한다.
  • 아몬 괴트 (Amon Leopold Göth) (1908년 11월 12일 - 1946년 9월 13일) 다른 사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인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치에 매력을 느껴서 1930년에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입당 후 친위대에도 입대해 친위대 이등병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오스트리아 정부에 의해 비합법정당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SS부대는 지하테러조직이나 다를 바 없었고, 결국 괴트도 오스트리아 경찰로부터 폭탄테러 용의자로 수배되어 독일의 뮌헨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열성적인 나치당원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괴트는 모범적인 친위대원으로 평가받았고 1937년엔 친위대 상사로 승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40년 3월에 폴란드로 파견되어 동유럽과 러시아에 체류 중인 독일인의 보호와 데려오는 작업에 참가한 괴트는 1941년 7월에는 친위대 소위로 승진했고 1942년 8월부터는 루블린 지구의 경찰 지도자 사무소로 이동하여 각 지구의 게토 해체작업에 종사했다. 이 공적으로 괴트는 1943년 2월에 크라쿠프 근교의 강제노동수용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친위대 소위급으로는 이례적인 소장취임으로 1943년 5월에 크라쿠프의 게토를 해체한 괴트는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일할 수 있는 자는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
    1943년 7월에 SS의 소장들로부터 추천을 받아 2계급을 특진하여 친위대 대위로 승진했다. 키가 192cm에다가 120kg의 거인이었던 괴트는 변태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어서 재미로 사람을 총으로 쏴죽이는 인간 도살자였다. 매일 아침 저격용 소총으로 수용인을 사살한 후 그 시체를 롤프와 랄프라는 그가 사육하는 개 두 마리에게 던져주는 것이 일과였다. 괴트에게 직접 총으로 살해당한 수용인만 해도 500명 이상이어서 프와쉬프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괴트는 부하들에게도 냉혹하여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친위대의 규율위원회 및 경찰에 인도했다. 웃긴 것은 자신은 사리사욕을 채워 국고에 귀속될 몰수한 유대인들의 재산을 횡령한 것이다. 유대인으로서 예외적으로 괴트의 기사로 일했던 수용인 미테크 펜퍼는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죽고 있을 동안에 괴트는 수용소에서 술탄처럼 군림했다. 라고 증언했다. 그러다가 횡령 혐의가 드러나 1944년 9월 13일, 횡령혐의로 빈에서 친위대에 체포된 괴트는 심리를 받던 도중에 종전을 맞이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흔적지에 세워진 포로 수용소에 갇혔던 괴트는 독일 국방군의 제복을 착용하고는 미군에게 자신을 전선에서 귀환한 병사라고 신고했다. 그러나 그의 정체는 곧 드러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소장이던 루돌프 회스와 함께 폴란드로 이송되었다. 1945년 7월에 크라쿠프에 도착한 괴트는 8월부터 9월까지 재판을 받았다.
    괴트의 죄목은 수용소에서의 8천 명을 학살에 대한 죄, 게토의 해체 당시에 2천 명의 학살에 관한 책임, 수용소에서 행하여진 수백 명의 처형 책임자라는 죄목이었다. 검찰 측 증인으로서 법정에 불리어진 검사가 유대인의 이름을 읽어나가던 중에 그 새끼들은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고 말할 거면서 왜 말하느냐. 라며 소리를 지르며 짜증을 내기도 했으며[56] 전후 자신의 죄는 힘러가 시켰다는 헛소리나 지껄였다고 한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9월 13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여담으로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도 묘사되어서 굉장히 악한 모습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놈의 딸인 모니카 괴트는 아버지의 악행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죄하는 등 상당히 개념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버지 죄 용서빕니다." 참으로 얄궂게도 이 놈의 손녀인 제니퍼 티지는 흑인 피가 섞였다. 쉰들러 리스트를 보고 나서야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았다고 한다.
  • 오딜로 글로보츠닉(Odilo Globocnik) (1904년 4월 21일 - 1945년 5월 31일)
    최종계급 친위중장(Gruppenführer). 힘러가 붙여준 별명은 '글로부스'(Globus. 지구본이라는 뜻)이다. 폴란드 총독부와 그 주변 유대인 200만명을 학살한 최고 실무책임자.190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트리에스테(현재는 이탈리아령)에서 독일계 슬로베니아인인 프란츠 글로보츠닉과 체코-독일계 세르비아인인 안나 글로보츠닉 사이에서 태어났다. 십대였던 1차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패전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붕괴 이후로는 가족 전체가 오스트리아 남부의 케른텐으로 이사하였으며, 도중에 유고슬라비아와의 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3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가입하였고, 안슐루스 당시에는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힘러의 눈에 들어 이듬해 폴란드 총독부령 루블린의 SS경찰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는 라인하르트 작전을 지휘하며 폴란드의 유대인들을 학살하였고, 1943년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한 이후로는 라인하르트 작전 당시의 부하들인 프란츠 슈탕글(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소장), 크리스티안 비르트(베우제츠 절멸수용소 소장), 프란츠 라이히라이트너(소비보르 절멸수용소 소장)와 함께 이탈리아로 보내져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트리에스테(아드리아 해 연안 작전 구역)의 SS경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을 토벌하였다. 1945년에 학살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직후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어 자살하였다.
  • 오스카 디를레방어
    36 SS 장갑착탄병 사단 디를레방어의 사단장. 바르샤바 봉기당시 폴란드 주민과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했다. 게다가 전과마저도 엄청나게 화려해서 1934년에 독일여성동맹의 멤버이던 13세 소녀를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되어 2년 금고형의 판결을 받아 직위와 박사 학위를 상실했던 전적이 있었다. 여담으로 오토 스코르체니와는 사이가 엄청나게 안 좋았으며, 고틀로프 베르거를 제외하면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 오토 라슈(Otto Rasch) (1891년 12월 7일 - 1948년 11월 1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지시로 졸다우 강제 수용소의 건설에도 종사했고 독소전쟁이 벌어지던 1941년 6월부터 1941년 10월에 걸쳐서 아인자츠그루펜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약 8만 명의 유대인 및 소련군 포로를 학살했고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 또한 1941년에는 자신의 지휘 하에 있던 부대를 이끌어서 키예프에서 33,771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기도 했다. 1947년 9월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심각한 건강상의 이유로 1948년 2월 5일에 재판에서 제외, 그 해였던 11월 1일에 사망했다.
  • 에두아르트 로슈만 (Eduard Roschmann) (1908년 11월 25일 - 1977년 8월 10일)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서 태어난 로슈만은 맥주공장에서 일하다가 오스트리아의 나치당에서 활동했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합병되자 나치 친위대에 입대하여 대위가 되었다. 그는 리가 게토의 부사령관, 그리고 카이저발트의 강제 수용소장을 지냈고 홀로코스트에도 관여했다. 로슈만은 많은 여성과 아이, 노인들을 차례로 학살했으며. 희생자의 옷, 머리카락, 틀니 등과 같은 것들을 현금자산으로 취급하여 모았다. 그리고 수용자들은 하루에 18시간의 노동을 강요받았고, 대다수가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어갔다. 그는 처형된 수용자들을 한 곳에 모은 후에 수용자들의 옷을 벗겨서 다른 사람들에게 팔기도 했다. 그리고 빈사상태에 빠진 수용자들을 굶주린 개에게 던져주어서 개의 먹이가 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약 3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한다.
    독일이 패망한 후 그는 독일 국방군의 제복을 입고 연합군의 체포망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고 그라츠의 가족에게 무사히 돌아갔다. 그러나 1947년 12월 31일에 네오나치 조직에서 활동하다가 오스트리아 경찰에 체포되었다. 로슈만은 연합군에게 신병이 인도되기로 결정되어 영국군에게 압송될 예정이었지만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달아났다. 그 후 여러 협력자의 도움을 얻어 오스트리아로 잠입한 그는 로마를 지나서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다.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그는 이름을 프레데리크 베게너로 바꾼 후 가구공장을 경영했다. 1955년에는 비서와 재혼했지만 이 소식이 그의 전 아내에게 알려지면서 중혼죄 혐의로 쫓기게 되었고. 1960년에는 그가 적어도 3천명의 유대인을 학살했고 어린이 8백명을 학살했다고 판단되어 그의 학살행위에 대한 체포영장이 나왔다. 그러나 워낙에 잘 도망다닌 탓에 잡히지 않았고 파라과이까지 도망가 편하게 살다 1977년 8월 10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에두아르트 슈트라우흐 (Eduard Strauch) (1906년 8월 17일 - 1955년 9월 15일)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관이 되어 제 2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부대는 1941년 11월 30일부터 10,600명의 유대인을 룸블라 숲에서 살해하는 등 벨라루스의 홀로코스트에 관여했다. 1941년 12월에 벨로루시의 보안경찰 및 첩보지휘관으로 취임한 그는 러시아에서 55,000명의 유대인을 10주간에 걸쳐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그가 하도 잔인해서 다른 러시아 점령지의 지휘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대장은 그를 현재껏 만난 인물들 중 가장 최악의 인간이라고 평가했다.[57] 독일의 패전 후 미군에게 붙잡힌 슈트라우흐는 학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슈트라우흐는 자신이 정신병자라면서 자신의 죄를 부인했지만 법정은 그의 말을 쌩까고 사형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벨기에 정부가 슈트라우흐를 자국의 전범으로 세우고 싶다고 원하여 미국은 그의 신병을 벨기에로 인도했고, 벨기에 법정에서도 쌍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그러나 사형이 집행되기 전인 1955년에 감옥에서 병을 얻어 사망했다.
  • 위르겐 슈트로프(Jürgen Stroop) (1895년 9월 26일 - 1952년 3월 6일)
    슈트로프는 아내가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자였고, 자신도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을 흠모했기 때문에 나치즘에 공감했다. 1932년 7월에 나치당에 입당한 그는 친위대에도 가입했다. 1932년 11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치당원의 승리에 공헌하여 하인리히 힘러의 눈에 띈 슈트로프는 제72 친위대 연대의 지도자가 되었고, 1941년 12월부터 1942년 10월까지 러시아 남부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였던 한스 프리츠만 대장 아래에서 보안경찰 및 감찰관으로 일하며 남러시아의 치안유지에 종사했다. 그러던 중에 다른 친위대 대원이 바르샤바 게토 봉기 진압에 실패하면서 해임되자 힘러는 슈트로프를 그 자리에 앉힌 뒤, 그에게 진압을 맡겼다. 그는 곧바로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실시하여 바르샤바를 생지옥으로 만들고 봉기한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리고 봉기의 핵심조직이던 “유대인 전투조직”의 사령부 지하호를 발견하여 지휘관을 살해하는데 성공하자 그는 5월 16일에 정식으로 바르샤바 게토 봉기 진압작전의 종료를 선언하고는 그 기념으로 유대인 교회당을 박살내버렸다. 슈트로프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때에 56,000명의 유대인을 체포하였고, 약 7천 명을 사살하였으며, 체포한 유대인들을 이송하던 중에 또 다시 약 7,000명을 처형하여 총 이전에 죽인 숫자를 합쳐서 무려 14,000명을 죽였다고 한다. 거기다가 간접적인 화재 피해와 유탄에 맞아 사망한 폴란드인들만 해도 6천명이 넘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서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패전 후 1945년 5월에 체포되어 미군 병사 살해혐의로 미군 군사법정에 세워져 1947년 3월 22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폴란드 정부로 인계된 슈트로프는 폴란드의 법정에 세워져 바르샤바 게토 봉기진압의 책임자로 다시 사형 판결을 받고, 1951년 9월 8일에 바르샤바에서 처형되었다.
  •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Erich von dem Bach-Zelewski) (1897년 3월 1일 - 1972년 3월 8일)
    무장친위대 대장. 바르샤바 봉기 진압 총 책임자. 폴란드계 출생이었음에도 민족을 배반하고 바르샤바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민간인 5만 명을 학살한 볼라 학살(Wola Massacre)의 주도자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클라우스 바르비 (Klaus Barbie) (1913년 10월 25일 - 1991년 9월 25일) 다른 사진
    독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에서 태어났고 히틀러 유겐트의 일원이었다가 1935년 친위대 소속의 보안대에 입대했다. 2차 대전 중인 1942년 리옹의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 제 4분과 책임자로 있으면서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도자인 장 물렝을 잔혹하게 고문해 살해하고, 자신과 동거하던 스위스 여인을 싫증난다는 이유만으로 총살시켰으며, 어머니 품속에 있던 유대인 아기를 빼앗아 유대인 수송 화물열차 모서리에 던져 죽이고, 유대인을 포함한, 리옹시 주민 650명을 강제 수용소로 보냈으며, 산간 학교에 숨어있던 유대인 어린이 44명을 체포해 5명의 교사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강제이송 시켰으며, 아이들을 모두 가스실에서 죽었다. 4000명을 살해하고 7500명을 추방시키면서 일명 '리옹의 도살자'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종전 후 그는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미 정보기관에서 그의 능력을 높이 사 볼리비아로 피신시켜주었다. 볼리비아에서 그는 미 방첩대(CIC) 요원이 되었으며, 클라우스 알트만이라는 가명으로 살면서 사업가로 성공했다. 1970년, 볼리비아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71년 나치 추적자인 클라르스펠트 부부에 의해 그의 정체가 드러났다. 1993년 볼리비아에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바르비는 프랑스로 강제 송환되었으며, 공소시효가 없는 '반인륜범죄'로 재판에 기소, 종신형을 선고 받고 리옹 감옥에서 복역 중에, 1991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법정에서의 모습
  • 쿠르트 발트하임
    전후 유엔 사무총장이며 오스트리아의 대통령을 지냈으나 후에 돌격대 장교 근무가 들통난 인물이다. 전 버전과 달리 친위대와는 관련이 없다. 나치에서의 행각은 굉장히 잔인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인물이 유엔 사무총장을 거쳐 오스트리아 대통령까지 된 걸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
  • 파울 블로벨 (1894년 8월 13일 - 1951년 6월 8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태어난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1,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고 1차대전 후 건축업에 종사했지만 경제공황의 여파로 실직했다. 그러다가 1931년에 나치당에 입당하였고 나치 친위대의 대원이 되었다. 그리고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난 뒤인 1941년 6월에 우크라이나에서 게릴라의 토벌에 나선 그는 자신의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를 이끌면서 본격적인 만행을 시작했다.
    그는 발터 폰 라이헤나우 등과 긴밀히 협조하여 키예프 등지에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여 약 15,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총살시켰다. 이 때 그가 저질렀던 학살 중 가장 유명한 학살이 우크라이나 바비야르에서 꼴랑 36시간만에 3만 7천여 명을 학살한, 참으로 쓰잘데기없을 뿐더러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대학살인 바비야르 학살이다. 그러나 평소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했던 블로벨은 몸이 상하여 1942년 1월 13일에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1942년 6월부터 아인자츠그루펜 부대의 학살과 같은 동유럽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한 증거를 인멸하는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맡을 임무는 학살된 시체들을 묘지에서 발굴해 소각하는 일이었다.
    전후에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세워진 그는 사형을 언도받고, 1951년 6월 8일에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유언으로 "나는 우리 국민들의 신앙 속에서 죽는다. 내가 오로지 바라는 것은 독일 국민이 적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여담으로 알코올 중독자이면서 성격이 더러웠다고 전해진다.
  • 프리드리히 예켈른 (1895년 2월 2일 - 1946년 2월 3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예켈른은 나치당 초반부터 친위대에 머무르면서 친위대 경찰고급지도자까지 올라갔다. 그 후 제2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의 해골사단 제2 보병연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1941년 6월에는 동부전선에 파견되었다. 남러시아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로 임명된 예켈른은 9월 29일부터 30일에 벌어진 키예프의 대학살에 관여했다. 1941년 11월부터 독일의 패전까지 예켈른은 자신의 지배지구인 동부전선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의 유대인 및 빨치산 살해활동을 감독하기도 했다. 예켈른은 자신이 지은 "예켈른 방식"이라는 조직적인 대량학살을 실행했는데 기가 막힌 사실은 그는 학살을 즐겼다고 한다. 1941년 11월 30일부터 12월 8일에 걸쳐 룸블라 숲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 당시 약 500명-1,000명 정도의 주민들을 나란히 배열시킨 후 10km 떨어진 남쪽의 처형장으로 이동하게 한 다음 희생자들의 옷과 금품을 뺏고, 나체가 된 포로를 총살시켜서 구덩이로 밀어넣었다. 룸블라의 학살 당시에는 무려 25,000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1945년 1월부터 2월까지 제5 SS 산악군단장으로 일한 예켈른은 독일이 패하면서 소련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소련의 군사법정은 1946년 2월 3일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후 선고 당일 바로 그를 교수형에 처했다.
  • 프리츠 크뇌힐라인(Fritz Knöchlein) (1911년 5월 27일 - 1949년 1월 28일)
    SS 토텐코프 소속 장교. 1940년 프랑스 침공 중 르 파라디에서 영국 노보크 연대 병사 89명에 대한 학살을 주도했으며 도망치는 여자들까지 조준사격했다. 이 때 학살의 증인인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를 죽이려고까지 했다.[58] 종전 후 영국에 인도되어 르 파라디 학살의 책임을 지고 1949년 처형당했다.
  • 한스 라우터 (1895년 2월 4일 - 1949년 3월 2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클란겐푸르트에서 태어난 라우터는 1914년에 오스트리아 육군에 입대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산악부대 중대장의 부관으로 종군하다가 1915년에 부상을 입어 전장에서 제외되어 1918년 7월에 예비역 중위로 퇴역했다. 전후인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의용군에서 활동한 후 오스트리아인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여 그 리더가 되었다. 1933년에 히틀러에 의해서 사회주의 단체가 해산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한스 라우터는 나치당에 입당했고 1935년까지 돌격대에 재직하면서 돌격대 대령까지 승진했다.
    1935년 2월 20일에 친위대로 이적한 그는 친위대 상급대령의 계급이 주어져 힘러의 측근이 되어 특무장교로 일했다. 1936년 4월에 친위대 본부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힘러의 부관으로서 1938년까지 일한 라우터는 이후 친위대 남동지구 사령관으로 일했다.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1940년 6월 26일에 친위대 소장계급으로서 네덜란드 주둔 친위대 사령관 및 경찰지도자로 임명된 라우터는 이후 독일의 패전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국가변무관으로서 네덜란드의 통치를 담당했던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함께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진 유대인 탄압 정책을 담당했다. 한스 라우터는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기 전 임시로 수용하는 임시수용소를 짓고 이송열차로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확보하여 아우슈비츠 등지로 보냈는데, 안네 프랑크도 그 희생자의 한 명이었다. 라우터는 약 3만 이상의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냈다.
    1945년 3월 6일 밤에 승용차로 이동하던 라우터는 독일군으로 위장한 레지스탕스의 습격을 받았지만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전후 영국군의 포로가 된 라우터는 네덜란드 정부에 신병이 인계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1949년 1월 12일에 전쟁범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아 3월 25일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 호르스트 뵈메 (1909년 8월 24일 - 1945년 4월 10일)
    1930년에 나치당에 입당해 친위대 대원이 되었고 1935년부터 친위대 정보부에 배치되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휘하에서 일하며 하이드리히의 명령으로 암살과 관련된 작업을 했다. 1938년 3월 14일에 빈의 독일대사관에 근무했던 빌헬름 폰 케텔러 남작을 암살한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했고. 1939년 봄에 체코의 프라하에서 보안경찰서장으로 취임한 그는 게슈타포를 이끌면서 고등교육을 폐지하고 프라하의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 약 천 오백여명을 작센하우젠의 강제 수용소로 보냈고, 유대인 이송회합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프라하의 보안경찰 및 정보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 당하자 보복에 나서서 그 악명 높은 리디체 마을에서 학살을 했다. 그 후 루마니아의 부크레슈티에서 보안경찰로 일하다가 1943년 1월부터 8월까지 아인자츠그루펜의 사령관이 되어 벨라루스에서 학살을 자행했고 1943년 9월부터 1944년 3월에는 우크라이나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했다. 그러다가 1945년 4월 10일 그는 전투 도중에 행방불명되었고, 1954년에 독일 법정은 그가 1945년 4월 10일에 사망한 것 같다고 선고했다.
  • 에리히 바우어 (Hermann Erich Bauer) (1900년 3월 26일 - 1980년 2월 4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바우어는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 1933년 입당해 돌격대 대원이 되었다가 다시 친위대로 이적했다. 그는 1940년까지 차장 일을 하다가 1940년 후반에 T-4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승진했다. 1942년 4월에 소비블 강제 수용소로 파견된 바워는 그곳에서 유대인과 집시들의 가스실 처형을 담당했다. 얼마나 유대인들을 잔인하게 처형했는지 수용자들은 바워에게 목욕탕의 마이스터(장인)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전후에도 그 악명으로 인해 가스실의 마이스터라고 불리던 바우어는 소비블 강제 수용소의 탈주극이 벌어졌을 때 수용자들에게 살해된 친위대 중사 루돌프 베크만의 시체를 처음으로 발견하여 가까이에서 일하던 유대인 수용자 2명을 총살하기도 했다. 전후 오스트리아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바워는 1946년에 석방되어 베를린에 머물렀지만 1949년에 소비블에서 일어난 탈주극에서 살아남은 수용자들이 그를 고소하여 다시 체포되었다. 전범혐의로 기소된 바우어는 1950년 5월 8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서독에서 사형이 폐지되면서 종신형으로 감형된 후 1971년에 가석방되었고, 1980년에 사망했다.

12. 가상 인물


[1] 참고로 안경 쓴 친위대 장교가 그다.[2] 무장친위대 다수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걸 생각하면 예외적이다.[3] 그래서 친했던 셸렌베르크가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4] 독일어의 sp는 어두에서 '슈프'라고 읽는다. 다만 슈필만은 독일인이 아니라 폴란드인이기 때문에 독일식인 Spielmann 이 아닌 Szpilman이다.[5] 하지만 이게 꼭 이상한 것은 아닌 게 당시엔 인종 말살 같은 전쟁범죄는 혐오하면서도 부강한 조국을 만들어 나가는 나치를 지지하던 군인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6] 유럽 최대(最大), 그리고 최고(最古) 재벌인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이다.[7] Przemyśl. 폴란드 남동부 국경지대의 도시. 폴란드의 독립 이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령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의 도시였으며,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곳의 프셰미실 요새를 두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러시아 제국이 대대적인 공방전을 벌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참고 영상[8] 폴란드 유대인 절멸 작전. 이 작전 기간 동안 200만 명 가량이 살해되었다.[9] 출처 1:《나치의 병사들》, 죙케 나이첼 및 하랄트 벨처, 민음사, 518p. 출처 2: 위키백과[10] 반론도 있는데 이 사람은 융커였다. 또 여기에 더해 제2차 세계대전 초반기에 폴란드에 대한 나치의 침공에도 긍정적이었다. 그가 히틀러를 죽이려던 1944년에는 융커(왕당파)와 총통과의 사이가 틀어진 시기다. 7월 20일 사건이 순수하게 나치에 대한 저항이라고 보기는 힘들다.[11] 들소 작전 당시 초토화 전술과 러시아 민간인 강제이주에 관여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지만, 소련 공군으로부터 민간인들을 피난시킨 것이라는 독일 측의 주장도 만만찮은 증거가 있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본인도 개인 성향을 떠나서 자신의 군 복무가 결국에는 나치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자결했다.[12] 두 사람 모두 반나치 성향의 우익 장교 그룹이었던 검은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히틀러 암살작전에 적극 동조하였지만, 암살이 실패하면서 체포되어 희생당했다.[13]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소련군이 동프로이센으로 진군해오자, 스탈린그라드에서 무사히 탈출했던 것처럼 알렉산더는 수백명의 난민과 수백마리의 말, 그리고 가문 대대로 내려온 귀중한 미술품들을 가지고, 이번에도 독일 본토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14] 전쟁이 끝나자 알렉산더는 스위스로 이주하였다. 노년에는 폴란드 영토로 변한 옛 고향인 동프로이센 슐로비텐 성을 자주 방문하여 폴란드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고향의 재건을 도왔다.[15] 본인은 리델 하트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결코 그 일에 찬동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리델 하트 본인부터가 에리히 폰 만슈타인 등 핵심 전범들을 미화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었기에 클라이스트 역시 리델 하트와 접촉하여 자신을 미화하려 했다는 의견 역시 존재한다.[16] 실제로도 중부집단군은 다른 집단군에 비해 전쟁범죄의 수가 적었다.[17] 일례로 스몰렌스크 점령 뒤 스몰렌스크 성당을 지키려 한 사례를 들 수 있다. 또한 전쟁범죄 명령은 본인 또는 윗선에서 반려했다고 주장했으며,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의 경우와 달리 이에 대한 반론은 아직 없다.[18]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라 그는 별다른 전공도 없었고 오히려 각종 패전에 책임이 있는 등, 평가에 매우 거품이 많이 낀 인물이라는 평이 있다.[19] 히틀러는 국방군의 최고참 장성들의 친나치 성향과는 별개로 이들과 사이가 나빴다. 그렇기에 이들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서 장성들에게 거금의 수표 지급을 남용했다. 이는 정경유착과 맞물려 전쟁 후반 독일의 경제력이 형편없어지는 계기가 된다. 이 수표를 받은 장성들은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하거나, 면세 특권을 이용해 스위스 은행에서 현찰로 환전한 뒤 땅이나 부동산을 마련하여 전후 그곳에 정착하였다.[20] 종전까지도 연합군은 케셀링이 방어하는 이탈리아 전선을 뚫는 데에 실패한다. 물론 오버로드 작전 이후에는 이탈리아 전선 자체가 소강 상태로 들어간건 감안하자.[21] 에르빈 롬멜 원수는 지원을 더 요청하기 위해 독일 본국으로 향했지만, 관료주의 체제로 인해 이탈리아 전선 책임자 케셀링, 독일국육군총감 구데리안, 총통의 대리자 알프레트 요들, 그리고 총통 히틀러 본인까지 총 4명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 했다. 이렇게 지체되는 와중에 영국군은 북아프리카에서 반격에 성공한 것이다.[22] 이 영상은 비츨레벤이 마지막에 하일 히틀러를 외쳤고, 저주스러운 유언(지금의 학정도 3개월 후면 몰락과 함께 끝날 것이라는 말.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도 나온다.)을 내뱉은 탓에 공개되지 않았다.[23] 폰 클라이스트 원수는 당시 해당 지역에 주둔하던 1군단의 최고 지휘관이었다.[24] 그의 상관 격인 프란츠 할더 등이 반대했지만, 직속 상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와 최고 상관 히틀러가 그의 계획에 동의하였기에 작전은 실행되었다. 다만 할더가 괜히 반대한 것이 아닌데, 이 작전은 군대의 속도에 비해 보급을 간과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실제로 이 때문에 아라스 전차전에서 패배를 맛보기도 했으며, 굉장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애초에 승인된 것도 제 2의 슐리펜 계획에 불과한 황색 작전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25] 히틀러와 육군과의 사이는 매우 험악했으며, 공군 책임자이자 2인자인 헤르만 괴링은 전쟁 말엽에 나치의 최순실 보어만의 묘수로 배신자 이미지가 씌워지며 억울하게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바펜-슈츠슈타펠[61]의 최고 책임자 하인리히 힘러 역시 전쟁 말엽에 히틀러를 배신했다. 그렇기에 히틀러는 뜬금없이 고분고분한 되니츠를 후계자로 삼았다.[26] 이 때 역시 같은 혐의로 의심받던 한스 슈파이델, 귄터 블루멘트리트 등은 보신을 위해 상관 격인 롬멜의 이름을 불었다.[27] 단, ~했으면 독일이 이겼을 것이다는 식의 래퍼토리는 독일 장성들의 정신승리 래퍼토리라는 건 감안하자.[28] 바로 그 헤르만 괴링이 있던 곳이다.[29] 정확히는 참모총장 대리 자격으로 구데리안을 대신해 들어갔다.[30] 무솔리니 구출 작전인 알라릭-떡갈나무 작전, 호르티 제독의 아들을 납치하여 헝가리 왕국이 소련 치하로 넘어가는 것을 막는 판처파우스트-마가레타 작전, 아르덴 대공세 중의 그라이프 작전 등[31] 프랑코의 고문을 지내는가 하면, 상상 이상의 괴력으로 걷지 못하게 된 상태를 극복했다.[32] 스코르체니는 간 적도 없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법정에 섰다.[33] 이는 롬멜의 부하였던 한스 폰 루크의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요들은 롬멜의 요청을 듣자마자, 총통께서는 이온 안토네스쿠 원수와의 회동에 이미 만족하셨는데 그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다고 말하며 롬멜의 말을 묵살했다.[34] 출처 :히틀러의 아이들[35] 이 당시 독일은 명목상의 공화제에 불과한 일당 독재 국가였으나, 제국 색깔 빼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3제국 체제 자체는 여러 면에서 프로이센, 즉 독일 제국의 연속체에 불과했기에 여기서의 제국은 프로이센으로 이해해야 한다.[36] 사실 성공 자체가 불가능한 공격이었던데다가, 히틀러가 언급하는 부대들은 서류 상으로만 존재하는 종이 부대였다. 괜히 Steiner könnte nicht genügende Kräfte massieren.(슈타이너는 충분한 부대를 전개시킬 수 없었습니다.)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37] 문법적 요소를 하나 덧대자면 상관에게 말하는 공손한 표현인지라 접속법 2식이 사용되었다. 접속법 2식은 이외에도 관용구, 가정, 근미래(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 반면 비교적 먼 미래의 전망을 나타낼 때는 접속법 1식을 사용한다.)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독일어에서 가장 중요한 문법이니 독일어를 공부할 생각이 있다면 반드시 익혀두자.[38] 전쟁 당시 영국의 가장 중요한 군항[39] 토크멘터리 전쟁사 144부 참고[40] 기존 화폐인 마르크를 렌텐마르크로의 치환하는 화폐 개혁을 통해 독일국의 초인플레이션을 단번에 진정시켜 독일이 경제적으로 안정되도록 하였다. 하인리히 브뤼닝이 의도적인 디플레이션과 내핍으로 독일의 경제 상황을 안정시키려다 실패하고 그에 대한 책임으로 실각하는 것을 지켜보았기에 본인은 기업과 결속하여 메포 어음을 발행하고 신뢰도가 높은 라이히스마르크 통화로 독일국 정부가 직접 어음을 상환할 것을 보장함으로써 기업의 투자를 유도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덕분에 독일국은 산업 역량을 다시금 키워나가고 군대를 양성했다. 허나 곧 히틀러 정권은 이와같은 단물만 보고 메포 벡셀의 발행을 무진장 남발했고, 결국 상환 보장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침략을 통한 전시 약탈 경제를 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상환 역량을 넘어서는 군대 양성은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샤흐트는 좌천되었고, 후임에 발터 풍크가 임명된다. 애초에 2차대전의 개전 목적 자체가 전시 약탈 경제를 통한 국가 발전이었기에 전쟁범죄를 필연적으로 수반했다.[41] 심지어 괴벨스와 악수한 후 곧바로 손수건으로 손을 닦기도 했을 정도였다.[42] 영관급인데도 무려 푸르 르 메티르훈장을 수여받았다.[43] 독일인이라 송환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스스로 송환되었다.[44] 그래서 부하들에게 작전재량권을 줬다.그래서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쿠르스크 전투등에서 제1SS가 미친 수준의 활약을 보인것이다.[45] 풀네임은 쿠르트 페르디난트 프리드리히 헤르만 폰 슐라이허이며, 슐라이허는 본인의 인생처럼 '기회주의자', '살살거리는 자'라는 뜻이라는 웃긴 사실이 있다.[46] 아주 드물게는 히틀러를 혐오하는 네오 나치도 있다. 이 경우는 히틀러와 툴레 협회 이전의 원류 파시즘을 신봉하는 경우이다.[47] 나치 독일 한정이고 일본 제국까지 합치면 무려 5천만명이 사망했다.[48] 피해자가 두 줄로 나뉘어 선 가해자들 가운데를 달려가면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몽둥이로 구타하는 방식이다.[49] 다만 그렇다고 무조건 안 했다고만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으며, 기록에만 남기지 않았을 뿐 암암리에 구타를 자행했을 가능성은 있다.[50] 여기는 강제노동 없이 바로 절멸에 들어갔으며 아우슈비츠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51] 여담으로 이 일은 꽤나 나중에나 알려졌다.[52] 지페르스 또는 자이버스라 알려져 있으나 지퍼스에 가깝게 발음된다.[53] 나치의 인종학 연구기관.[54] 대표적인 실험 중 하나가 동성애자 들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얼음물이 든 탱크에다 집어 넣고서 동성애를 없애겠다는 실험이었다.[55] 1달 간의 비율로 따지면 트레블링카가 아우슈비츠보다 더 악랄했다.[56] 그러자 검사가 "무슨 소리야? 이 사람들은 다른 수용소 사람인데?" 라고 구라치자 바로 안색을 바꾸고 "그럼 내가 살린 사람들이네요?" 라고 개드립을 쳤다.[57] 골 때리는 사실은 첼레프스키도 러시아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바르샤바 봉기 당시 20만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이 있으니 할 말 없다.[58] 브루네거가 이 때 "저들은 여자잖습니까?" 라고 항명하자 이 이후로 그를 죽이기 위해 그에게 온갖 부당한 명령을 해댔다.[59] 인면암의 제4의 얼굴이 많은 유태인을 학살한 전 나치의 간부다.[60] 다만 라스푸틴은 나치에게 고용되었을 뿐이기에 나치의 사상을 추종하지는 않으며, 심지어 멍청한 놈들이라고 비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