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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실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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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준3. 인물
3.1. 한국사3.2. 중국사3.3. 일본사3.4. 동양사3.5. 서양사
4. 국가 및 단체
4.1. 동양4.2. 서양

1. 개요

실존하는 라이벌 중 역사에서의 라이벌을 정리한 문서

2. 기준

  • 인물의 경우, 두 인물 모두가 사망한 경우만 등재.
  • 집단 혹은 국가의 경우, 냉전(1991년) 이전의 사례 혹은 냉전 종식으로 라이벌 구도가 끝난 경우만 등재.
  • 시대 순으로 작성 및 수정.
  • 이후의 사례는 역사 문서가 아닌 라이벌/실존 문서에 기재할것.
  • 콩라인은 ▲ 표시. 승자에 해당하는 경우는 ★ 표시.
  • 부정적인 면이 강한 라이벌 구도는 # 표시.
  • 볼드체인 경우는 라이벌 간의 업적이 둘 다 뛰어난 경우를 뜻한다.
  • 역사 속에서 실제로 경쟁 관계를 형성했던 사례들만 서술할 것.

3. 인물

3.1. 한국사

3.2. 중국사

3.3. 일본사

3.4. 동양사

3.5. 서양사

4. 국가 및 단체

4.1. 동양

4.2. 서양




[1] 훗날 석탈해는 신라로 가서 신라의 왕족이 되었다.[2] 사실 결과적으로는 성왕이 진흥왕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게 대부분이다. 그리고 두 인물은 나이차가 40살이 넘게 차이나서 세대가 다르기도 하며, 성왕 치세의 대부분 기간 동안 가운데 약소국 가야를 두고 누가 가야를 장악할 것인지 물밑경쟁한 것은 비슷한 세대로 추정되는 법흥왕이었다. 그러나 이 쪽은 가야라는 완충지역의 대리전 위주의 일종의 냉전이었고, 성왕 말년의 관산성 전투와 비극적인 죽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여러 매체에서 진흥왕과 라이벌격으로 엮이는 경우가 많다.[3] 사실 둘이 대결한 기록은 황산벌 전투가 유일하지만, 워낙 매체에서 자주 다루다 보니 대중들에게는 그렇게 굳혀졌다.[4] 보통 김부식의 라이벌로 묘청을 들지만 묘청은 실상 서경파의 광대나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았고, 역사적 행적으로 보면 급수 자체가 김부식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김부식과 라이벌로 여긴 이는 서경파의 문신인 정지상을 드는데, 정지상은 학문상으로나 문학상으로나 김부식과 맞붙을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부적으로 김부식은 윤언이와도 라이벌이 서기도 했는데, 사실 김부식 입장에서 '라이벌'이란 단어에 걸맞는 인물은 거의 평생을 대립한 윤언이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5] 이 둘의 대립은 고려를 지키려는 자, 조선을 세우려는 자들의 대립이 압축되어 있다.[6] 계유정난 참조.[7] 그 외에도 송시열은 허목, 윤선거, 윤선도 등 많은 정적들을 두었다.[8] 승자는 인현왕후였지만 인현왕후에게 후사가 없어서 장희빈의 아이가 왕위를 잇게 된다.[9] 다만 경종은 후사가 없이 사망했으며 경종 다음으로 숙빈의 아들인 영조가 왕위에 올랐고, 희빈의 최후는 비참했으나 숙빈은 나름 평온하게 살다 죽은 것을 보면 최후의 승자는 숙빈이다. 희빈의 경우는 최후도 비참했으며 아들도 후사 없이 사망했고, 후대에도 악녀로 인식되고 있으므로 완벽한 패자라고 볼 수 있다.[10] 일단은 흥선대원군이 결국 실각하게 되었으니 둘 사이의 정치싸움만 놓고 보았을 땐 명성황후 민씨가 승리했다고 볼 수 있겠으나, 결국 둘 다 자신들이 원했을 조선을 유지하느라 정작 나라를 지켜낼 수는 없었으니...[11] 전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내각수상이 되었고 후자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또한 전쟁에서 서로 무력통일을 주장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심지어 자신을 우상화한 점까지도 비슷하다. 다만 김일성은 소련의 꼭두각시였으나 이승만은 미국과 사이가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12] 서로가 서로를 암살시도를 하였으며 남북한 경제력-군사력 증강이라는 체제경쟁으로서 둘의 대립기간으로 봐도 된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논란의 여지야 어떻든 박정희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데 분명 기여한 측면도 있는 반면 김일성은 나라를 사이비 거지 국가로 만들어 현재도 이 파탄 상태가 지속한다는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갈린다. 나이도 1910년대생으로 비슷한데다가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군인으로 활동했다는 점 등 서로 비슷한 점이 많고 남북이 가장 치열한 체제경쟁을 벌이던 때에 서로 경쟁했기 때문에 이승만이나 전두환보다 라이벌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13]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유명하며 1988 서울 올림픽개최를 놓고 방해공작을 숱하게 벌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체제경쟁을 벌였고 올림픽개최로 대한민국의 승리로 세계에 각인시켰다. 다만 전두환도 본인이 행했던 독재 정치와 친인척 부정축재로 후대에까지 민폐를 끼친 처사에 대해서는 남 말할 처지가 안 되긴 하나 김일성은 단순한 독재자이기 이전에 전범이자 민족분단의 원수이기에 역사에 끼친 해악은 전두환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다만 1980년대 시점에서는 김정일이 김일성 대신 권력을 장악해나간 시기이기 때문에 김일성과 전두환을 라이벌로 보기에는 다소 애매하다.[14] 신채호는 무장독립론에 기초한 독립운동을 추구했고,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자였다.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에도 나와있듯이 신채호는 강대국에 의존한 외교로 독립을 얻어낸다는 것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스티븐스 저격사건 같은 식으로 독립을 얻어내겠다는 것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 청원서를 넣게 되자 신채호와 이승만의 대립은 극한까지 치솟게 된다.[15] 북미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대립.[16] 이형근이 대한민국 국군 군번 1번을 받으면서 이를 시기한 채병덕이 이형근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창군 직후부터 군내 파벌이 형성되었다. 이형근 또한 채병덕이 6.25때 보인 무능한 행보를 보고 수상하다고 말하는가 하면, 군번이 성적순이라고 말해 어그로를 끌기도 했다. 문제는, 그 군번이란 게 별 의미없는 단순한 등록번호로 밝혀졌다는 것(...). 이쯤되면 돌별들의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17] 한국 현대미술사의 대표적인 라이벌. 같은 시기에 활동했으면서도 천재형과 노력형, 유학파와 독학파, 활동무대와 작품 성향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대비되는 화가들이다.[18] 현실참여적 저항시인과 현실도피적 모더니스트 간의 라이벌구도. 개인적으로는 막역한 사이였지만, 문학적 성향의 차이로 멀어진 애증의 관계. 당대에는 라이벌이라고 할 만했지만, 반 세기 이상 지난 지금 기준에서 두 사람의 위상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19] 5.16 군사정변 때문만이 아니다. 윤보선은 제4대 대통령 퇴임 이후 제5대,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연거푸 출마했으며, 두 번 다 2위로 낙선했다. 특히, 제5대 대통령 선거는 지금까지도 그 기록이 깨지지 않는, 대한민국 대선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접전으로 꼽힌다. 안타깝게도 선거 과정은 그리 깨끗하지 못했지만... 박정희 집권 초기인 제3공화국 시절의 가장 큰 정적은 다름아닌 직전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이었던 셈.[20] 두 사람 모두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견인차이면서 국토 자연 환경 측면에서는 취약점도 적지 않게 낳았으니 그 몇가지 예가 도심의 숲의 중요성을 망각하거나 경시했고 대도시에 고층 건물을 범람시켰다. 참고로 1980년대말~1990년대초의 민주화 초창기에 진작 TV다(多)채널의 신설을 정부에 적극 건의했어야 했는데 하지 않아 이를 몇해 늦추게 만들었다.[21] 이는 박정희와 장준하 사후에 박정희의 실질적인 장녀 박근혜와 장준하의 막내아들 장호준이 대립하게 되었으며, 박근혜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된 뒤 구속되었고, 장호준도 2021년 4월 13일부로 여권 효력 정지가 해제되면서 두 사람의 대립은 막을 내렸다.[22] 이 대립으로 인하여 영호남간 지역감정이 일어났다.[23] 김영삼과 김대중은 87년 이전까지는 같은 당 소속이었다.[24] 일명 3김. 콩라인인 JP인 김종필을 빼고 양김으로 보기도 한다.[25] 이 3명이 나타난 이후 한국의 야권 정치계가 활성화되고 87년도에 민주화가 성공하면서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가장 큰 역할을 한 장본인들이지만 한국 정치 특유의 보스, 계파정치와 점차 심해지고 있던 지역갈등이 최정점을 이뤘다. 여러모로 좋은점에서든 나쁜점에서든 한국 정치사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다. 이 중에서 김종필만 대통령이 되지 못했으며, DJP연합으로 김대중 산하에서 국무총리를 맡은 적도 있기에 콩라인으로 기재하였다.[26] 김대중이 정치활동 규제로 현실 정치에서 멀어지고, 유진산이 퇴장한 70년대 중후반 신민당 총재 직을 놓고 다투었던 관계. 노선도 선명 야당 vs 중도 통합으로 완전히 달랐다.[27] 이 대립으로 인해 10.26 사건이 일어났다.[28] 전단이 이끄는 제나라군이 3년동안 결사항전 한끝에 꾀를 써서 악의를 실각시키고 총공격을 감행하여 빼앗긴 70개의 성을 수복하고 연나라군을 몰아냈다.[29] 방연의 질투로 인해 대립이 이루어졌다.[30] 진시황 사후 중국 대륙을 둘로 나눈 희대의 라이벌. 출신과 세력에선 유방이 훨씬 불리했고 항우가 우세했지만 항우의 여러 실책들과 유방의 용인술로 한신, 장량, 소하 등이 활약하며 민심은 유방에게 기울었다. 결국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여 천자가 되는데 둘의 싸움을 소설로 그려낸 것이 초한지다.[31] 실제로 공손찬은 4개 주에 영향력이 있었지만 원소는 정말 미약하게 시작했으며, 그럼에도 원소는 책략과 선전술, 용병술로 공손찬을 수차례 무찌르며 최강의 세력을 쌓아올린다.[32] 관도대전. 조조가 오소를 습격하여 원소를 막아내긴 했었지만 그 뒤에도 원소는 여전히 강대했고, 원소가 급사한 후 원가가 분열된 뒤에야 하북을 평정할 수 있었다. 조조는 예전에 원소의 도움을 받아 재기할 수 있었던 적이 있으며, 순욱이 격려하기 전까지 조조는 원소에게 항복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기까지 했었다. 물론 연의의 원소는 조조의 반도 못따라가지만.[33] 연의 한정으로 호로관에서 여포와 장비가 1대1 일기토로 50합을 넘게 싸웠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나중에 서주에서는 100합이 넘도록 대등하게 싸웠다. 여포에게 서주성을 빼앗기기는 했지만.[34] 동아시아 최고의 라이벌. 연의에서야 유비가 무능하게 묘사되고 조조가 강력하지만 실제 이 둘은 서로를 두려워하며 의식하였다. 조조는 여러 번 유비를 몰아붙였으며, 유비는 적벽과 한중에서 조조를 패퇴시켜 조조의 천하통일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의 통일을 끝까지 저지하고 승패가 갈리지 않은 상태에서 둘다 사망하였으니 여타 라이벌들과는 다르게 동귀어진에 가까운 결과를 맞았다.[35] 연의 한정. 정사에서는 이 둘이 라이벌이었다는 언급이 없고, 정황상으로는 반 조조 노선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한다는 암묵적인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 가능하다.[36] 연의의 영향이 크다. 사실 정사에선 이들이 전투다운 전투를 해본 것은 4차와 5차 북벌이 전부. 다만, 그 전투들 모두 제갈량이 모두 이겼다. 물량과 홈그라운드 이점을 가지고도 사마의는 제갈량을 상대로 방어전만 펼치며 제갈량이 알아서 물러나주기만 기다렸다.(사마의는 기동전이 특기인데 제갈량에게는 기동전을 제대로 못 써먹었다.) 거기에 지휘관으로서의 역량만 아니라 정치가로서의 역량도 제갈량을 훨씬 높게 쳐준다.[37] 다만 훗날 종회혜강을 모함하면서 와룡과 비교한 점을 고려하면 제갈량은 당대로부터 사마씨의 숙적으로 여겨졌다고 봐도 무방해보인다.[38] 유비 사후 각자 문무 영역에서 제갈량이 의지할만한 양익으로 활약했지만, 서로를 극도로 혐오했던 사이였다. 그러나 둘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각자 분야에서 능력은 출중했으나, 성격적 결함이 치명적이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위연이 모반을 일으켜 양의가 위연을 죽이고 삼족을 멸하는 데 성공하여 승자가 될 뻔 했으나, 위연을 죽인 지 불과 1년만에 양의 자신도 역적스러운 발언을 해서 서민이 되고, 끝내는 자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승리자라고 보긴 어렵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증오했지만, 누구보다도 서로 닮았던 두 사람은 결국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시기에 몰락을 맞이했다.[39] 참고로 등애가 촉한을 멸망시킨 다음 "강유도 뛰어나지만 나 때문에 힘들었지!"라고 뻐기자 식견 있는 자들이 비웃었다는 후문... 물론 이를 두고 강유>등애라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등애와 강유 사이의 라이벌 플래그는 당대에도 존재했던 모양이다.[40] 북송의 개혁 문제로 맞붙었던, 당대 중국 최고의 관료들이자 다재다능한 두 천재의 대결. 최종적으로는 보수파였던 사마광이 승리했다고 볼 수 있으나, 재상이 된지 고작 8개월 만에 죽었고 왕안석도 같은 해에 죽었다.[41] 남송의 명장 악비와 금나라의 맹장 완안종필은 정강의 변에서 맞붙었다.[42] 아리크부카가 대신 나가긴 했으나 실질적인 명령은 몽케가 내렸으니 사실상 몽케가 패배하였다.[43] 가사도는 그후 정대전의 권력을 빼앗아 또 다시 이종황제와 도종황제를 유린하고 휘둘렀다. 또 한 몽골과의 악주 공방전에서 자신의 장강까지 밀고 들어가 몽골군이 후퇴를 했다는 거짓 승전보고를 해서 된것이였기에 누릴거 다 누려보자면서 계속해서 펑펑 국고를 빼돌렸다. 하지만 이인간은 평시재상으로서는 능력이 쓸데없이 좋았다. 국정운영과 긴축재정 민생안정 국방비 기획등 너무나 유능했어서 명장이였던 맹공마저 사후직전 추천을 하였었기 때문에 아무튼 능력은 좋았다. 하지만 권력에 탐욕이 많은 인간이였다. 그걸 본 젊은 관리이자 송말삼걸인 문천상은 진의중과 함께 손을 잡아 탄핵 결재를 올리고 공종황제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가사도는 탄핵되었으며 유배를 가던도중 급사하였다.[44]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 제 1, 2 선봉장. 그리고 라이벌 구도는 일본 국내에서도...[45] 일본에서 라이벌 하면 잘 뽑히는 전국무장들. '적에게 소금을 보내다(敵に鹽を送る)'라는 일본 속담이 바로 이들에게서 나온 말이다.[46] 전자는 기슈, 후자는 오와리 번주로 쇼군직을 둘러싸고 경합을 벌였으며 요시무네가 당선된 이후에도 무네하루는 공공연히 맞짱을 떴다.[47] 일본 헤이안 시대 말기. 흔히 겐페이 전쟁이라 함.[48] 일본 헤이안 시대 초기의 불교계[49] 두 사람이 섬기는 황후들, 그 친정집안들도 나름대로 라이벌 관계였다. 그러나 세이 쇼나곤이 섬기던 쪽이 콩라인...[50] 일본 음양계에 최대의 라이벌이다.[51] 메이지 유신의 주역[52] 조슈[96] 3존으로 불리는 인물[53] 일본군 삼대오물[54] 요 성종은 소태후 사후 현종이 태어나고 1년후 본인이 친정을 시작하고, 고려 현종이 즉위한 1009년부터 고려와 줄곧 대립각을 세웠으며, 이 둘의 대립으로 다시 한번 여요전쟁이 발발했다. 여요전쟁이 끝난 후엔 외교관계를 맺으면서도 한편으론 국경에서 소소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참고로, 이 두 사람은 같은 해인 1031년에 사망했다.[55] 라이벌을 넘어선 프레너미 관계, 애증 관계이다. 전술, 전략에서는 칭기즈 칸과 자무카가 서로 팽팽했지만 정치에서는 칭기즈 칸의 압승이었는데 둘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차이였다.[56] 1960, 1970년대 한정. 박정희 대통령과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은 둘 다 1917년생 동갑내기였고 서로 외모도 상당히 닮았다. 또한 실제로도 서로 의식을 많이 하고 굉장히 안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을 이끈 반면에 페르디난도 마르코스는 필리핀을 가난한 나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대비가 있다.[57] 실제로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라이벌적 대립구도가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마오쩌둥은 역사적으로 자국과 견원지간인 이웃나라 베트남의 초대 공산지도자인 호찌민과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겉으로는 정상회담을 하면서 화기애애하긴 했지만 1960년대 말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날 당시 호찌민은 당시 중국의 실상을 접하고 온 베트남의 외교특사들과 대사들을 통해서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라며 문화대혁명을 비판하는가 하면, 게다가 이 두 사람은 공산주의 통치에 대한 해석을 두고 상반된 의견을 내놓았는데 마오쩌둥은 반대자들을 죽이는 것만이 체제 확립에 도움이 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한 데 비해, 호찌민은 마오쩌둥의 이러한 극단적 주장에 찬성하지 않고, 범죄 행위가 확인된 자에 한해서만 처벌하고 공산주의 통치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8] 양자의 결전이었던 자마 전투는 스키피오의 승리로 끝났지만, 한니발의 군사적 능력을 더 높게 평가하는 의견이 고대 로마부터 주류를 이루었다. 뭐 예외도 있지만.[59] 로마 공화정의 기반을 뒤흔든 라이벌.[60] '주사위는 던져졌다' 명언의 기원.[61] 성찬 토론 등 몇 가지 분야에서는...[62] 쉴레이만 1세와 카를 5세 휘하의 해군 장수들.[63] 국내에서는 30년 전쟁만 주목하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크리스티안 4세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부왕 칼 9세의 말년 스웨덴을 먹어치울 목적으로 침공을 감행했으나 구스타브 2세에게 막혔던 전적이 있다. 또한 30년 전쟁 초창기 위기에 빠진 신성 로마 제국의 신교도를 구원하는 과정에서 덴마크가 신교도 국가의 맹주임을 자처하기 위해 스웨덴보다 더 많은 지원을 제공하면서 먼저 개입했으나 발렌슈타인에게 밀려 물러나고 그 뒤에 스웨덴이 개입했다. 구스타브 2세가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여 일찍 사망한 반면 크리스티안 4세는 장수했으나 1644년 벌어진 콜베르거 하이데 해전에서 구스타브 2세가 키워낸 스웨덴 장군 레나르트 토르스텐손에게 한쪽 눈을 잃는다.[64] 러시아와 스웨덴 양국의 운명을 걸었던 대북방전쟁!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스웨덴 역사상 최고의 장군 vs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황제'의 구도라고 생각하면 될 듯 싶다.[65]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은 없고, 서로를 존경하기는 했었다. 사실 이 둘은 음악이란 자식을 둔 부부다. 서방 세계에서는 절대 이 속설이 통하지 않는다. 염두에 두자.[66] 18세기 중반의 유럽의 판도를 바꾼 7년 전쟁의 맹주들이다. 경제, 정치, 외교 등 사사로운 것부터 큰 것까지 서로에 대한 신경전이 상당했고 이를 견제할 능력도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마리아 테레지아의 후계자 요제프 2세레오폴트 2세는 유능했던 반면 프리드리히 대왕의 후계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백부의 후광에 업혀간 잉여인간이었다.[67] 한때 둘도 없는 동지였으나 미국 건국 후에는 미국 정치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라이벌로 변했다. 그래도 말년에는 화해하였고, 두 사람 모두 같은 해 같은 날인 1826년 7월 4일에 죽었다.[68]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음악계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라이벌 관계가 됐다. 특히 영화 아마데우스의 인기가 높아 일반인조차 라이벌로 인식한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라이벌이었다 보기는 힘들다.[69] 상술한 바흐와 헨델의 경우와 마찬가지. 모차르트는 베토벤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으며, 베토벤은 오히려 모차르트에게 사사하고 싶어 빈에 갔으나 한 해 전에 모차르트가 이미 사망해서 스승을 하이든으로 바꿔야만 했다.[70] 위에서 언급한 한니발-스키피오의 관계와 비슷하다. 웰링턴 공작 대신에 호레이쇼 넬슨을 넣기도 한다. 웰즐리는 나폴레옹의 재능을 인정하는 말을 남겼다.[71] 엄숙하고 진지한 예술가와 대중지향적 엔터테이너 간의 경쟁구도. 당시 인기는 로시니가 압도적이었으나, 베토벤은 로시니의 음악을 경박하다는 이유로 좋아하지 않았다.[72] 19세기 전반을 주름잡던 피아노의 양대산맥. 작품세계로 보나 주법으로 보나 완전히 대조적인 스타일을 구축, 후대 피아니스트들까지 '쇼팽형', '리스트형'으로 불리우게 한 거장들. 하지만, 이러한 라이벌구도와는 달리 사적으로는 절친 중의 절친이었다.[73] 남북전쟁 중 남군 총사령관 vs 북군 총사령관.[74] 탐험사에 길이 남을 세기의 라이벌. 하지만 말이 라이벌이지 스콧의 능력은 아문센에게 비교가 실례가 될 정도로 저열했고 또 인격적으로 찌질하기까지 했다. 오히려 어니스트 섀클턴이 현대에 와서는 재평가를 받고 있다.[75] 역사에 길이 남을 세기의 라이벌. 전쟁 이전부터 전쟁 후, 심지어 죽은 후에도 여전히 라이벌이다. 둘 다 미술에 관심이 많아 그림을 여럿 남긴 게 재밌는 점.[76] 한때는 협력도 했으나 결국 갈라선 독재자 라이벌. 결국 최후의 승리는 스탈린이었다.[77] 사실 둘을 묶어 라이벌이라 하기엔 둘에게 공통점이 별로 없다. 몽고메리는 롬멜의 기동전에 말려들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전장에서 아프리카 군단을 격파하는 걸 보면 호적수라기보단 되려 극상성의 인물이다. 여담으로 몽고메리와 롬멜이 싸운 기간은 매우 짧으며 실질적으로 롬멜과 가장 오랬동안 대립한 장군은 클로드 오킨렉이었다.[78]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의 영향.[79] 그러나 실제로 호메이니는 이라크 사담 후세인보다는 오히려 팔레비 2세 전 이란 황제와 대립한 시기가 더 길었다.[80] 야율아보기가 나타나기 이전의 거란을 지배 및 복속했거나(위구르) 거란과 접했던 국가들. 야율아보기 이후 900년대에는 이미 멸망했던 위구르 칸국의 위구르를 포함한 투르크계 제족들을 받아들이기도 했고, 당은 훗날 멸망되어 오대십국으로 분열될 때 거란이 중국대륙 북부와 북서부 영토를 침공해서 조금씩 영토를 점령했고(멸망 전에도 당은 거란에게 영토를 조금씩 빼앗겼다), 훗날 야율아보기가 죽기 직전에 발해를 멸망시켰다.[81] 처음에는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워 발해를 멸망시킨 뒤 말갈족과 몽골족을 산하에 두었다. 이후 말갈은 여진족으로 개칭하고 금나라를 건국해 거란의 요를 멸망시키고 당시 군소 부족들이 산재하던 몽골족을 지배하였다. 거란은 서쪽으로 달아나 서요를 세웠다. 그 다음 칭기즈 칸이 나타나 몽골 제국을 세우고 서요와 금나라를 모두 갈아버리고 거란족을 동화, 멸족(엄연히 다른 민족이긴 했지만 거란과 몽골 모두 몽골계에 속했고, 다우르족 정도를 제외하면 몽골에게 흡수되었다)시키고 여진족을 지배하였다. 몽골 제국이 붕괴한 후 명나라 지배 때에는 다들 잠잠했으나 17세기에 여진족에서 만주족으로 이름을 바꾼 뒤 만주족에서 누르하치가 나타나 몽골족을 굴복시키고 청의 지배하에 두었다.[82] 둘다 사이좋게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83] 일본, 베트남도 포함[84] 조선 시대 관학파의 분열로 인한 두 개의 파벌[85]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시초[86] 일제강점기 말기 좌익계열의 두 단체.[87] 1948년 남북분단 이후 현재까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만큼 라이벌로 볼 수 있다. 국력만 봤을 때는 남한의 승리로 끝났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 북한이 붕괴되거나 남한 위주의 통일이 이루어지지는 않은 상황이므로 현재까지도 라이벌 관계 자체는 지속되고 있다.[88] 두 나라가 사이좋게 이슬람 제국에 정복된다... 싶더니 전자는 더 오래 갔다.[89] 로미오와 줄리엣의 전설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90] 일명 무역 국가들의 돈지랄 전쟁. 최후에는 베네치아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91] 합스부르크는 교황의 후견인을 자처해왔다.[92] 대항해시대였던 17세기당시에 이루어졌다.[93] 서로 우크라이나 스텝을 두고 경쟁했다. 전자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서 유럽의 경쟁국들을 견제하고 약탈하는 세력이었고 후자는 러시아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투민족이자 오스만 제국을 막는 최전선으로 이용되었다. 즉, 크게 보면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라이벌 관계의 연장선이자 대리전인 셈. 크림 칸국이 모스크바같은 러시아 대도시를 숱하게 약탈하고 수만명을 노예로 잡아가기도 하는 것을 보면 13세기부터 이어져온 몽골제국과의 악연의 최종편이라 볼 수도 있다. 두 세력 모두 우크라이나 스텝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기마민족이다. 이들의 강대국의 장기말 역할을 충실히 했지만 비슷한만큼 매우 대조적이다. 크림 칸국은 폴란드나 러시아같은 슬라브 국가라면 치를 떨 킵차크 칸국의 후예였고 이슬람교도 튀르크인 타타르족 국가였다. 반면 코자크는 우크라이나인의 조상격되는 동슬라브인의 일파였고 동방정교회를 믿는다. 특유의 호전적 기질로 서로가 서로를 약탈하고 침략한 기록이 아직도 우크라이나의 민담으로 전해진다. 코자크나 타타르에 대한 그림을 찾아보면 타타르 기마병과 코자크 기마병이 초원에서 일기토를 하거나 전투를 하는 그림이 꽤 있다. 비록 1783년 크림 칸국은 멸망하고 러시아의 영토가 됐지만 크림 타타르인과 러시아 간의 갈등과 악감정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94] 독일 지역의 맹주 자리를 다퉜던 유럽 전통의 라이벌... 같지만 두 나라가 라이벌리를 세운 기간은 프리드리히 대왕 시기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기간 정도에 불과하다. 독일 통일 이후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시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했으며, 역사적으로 호엔촐레른 가문루돌프 1세독일왕 선출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의 충견(..)을 자처했다.[95] 메카메디나의 주인 자리를 놓고 전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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