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6:08

왕(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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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종류 및 서열
2.1. 일자왕의 서열 문제
3. 중국4. 한국
4.1. 고대4.2. 고려4.3. 대한제국4.4. 중원에서 바라본 한민족 군주
5. 일본
5.1. 일본 황실5.2. 시라카와 백왕가5.3. 비황족 왕작
6. 베트남7. 유럽8. 번역에 관하여
8.1. 영어로 번역할 때8.2. 영어를 번역할 때

1. 개요

동아시아에서 (王)은 군주의 칭호로 쓰이기도 했으나, 황제(천자)의 제후에게 주어지는 작위 칭호이기도 했다. 이럴 때는 '왕작(王爵)'이라고도 한다. 주로 황족이 그 수여 대상이 되었다. 영어로는 그 성격에 따라 Prince 또는 King으로 번역된다.

황족에게 왕작을 책봉하는 친왕 개념은 동아시아 이외 지역에서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황제나 다른 왕을 주군으로 하여 그에 예속된 왕들이 나타나는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흔히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였다. 때문에 왕작을 받은 사람이나 실질적으로 다른 군주에게 예속되어 있는 왕은 일반적으로 제후왕 또는 번왕(藩王)으로 통칭되고 있다.[1]

서양의 대공과 비견되며,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왕은 군주가 사용하는 칭호이고, 유럽 내에선 독립적인 나라의 군주라도 함부로 칭할 수 없는 나름의 권위가 있었기에, 일반적으로 제후의 작위로는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일부 특이한 사례는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인 보헤미아 왕.

2. 종류 및 서열

한자문화권의 왕작은 크게 직계 황족이 책봉되는 왕작 개념인 '친왕(親王)'과 방계 황족이나 비황족도 책봉될 수 있는 개념인 '군왕(郡王)'으로 구분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도식적인 것으로 왕작 제도는 왕조마다 모두 달랐기에, 왕작의 종류와 서열 또한 일률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그 용어나 제도적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 나라별로 시행된 작위 제도를 확인해야 한다.

왕작이 친왕과 군왕으로 구분된다는 통념과 달리, 실제 왕작은 수여하는 봉국(封國)의 규모에 따라 국왕(國王)-군왕(郡王)-현왕(縣王) 순의 개별 작위로 나뉘었고, 친왕은 수나라 이후의 왕조에서 최고 서열인 국왕 작위 내부의 등급에 불과했다.[2]

또한 왕은 원래 군주격 칭호였으므로, 제후의 작위인 오등작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순의 서열이므로 왕작이면 무조건 공작보다 높을 거라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왕작이 늘 오등작보다 높았던 것은 아니다. 서양의 대공의 경우 동아시아에서 작위 칭호로 쓰인 전례가 없고, 반대로 서양에서는 왕작이 일반적으로 쓰인 사례가 없기에, 대공이 무조건 한자문화권의 왕작보다 낮은 개념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으며 유사한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옳다.

왕작 개념이 최초로 성립된 한나라 때에도 왕이 무조건 공보다 높지는 않았다. 한나라 때의 공은 이왕삼각에 따라 옛 왕조의 후예를 천자의 빈객으로 예우한 경우였거나, 구석(九錫)의 특전을 받아 천자에게도 예우를 받는 특수한 신분이었다. 이들은 당연히 의전상 서열이 왕보다 앞섰다. 조조가 위공(魏公)으로 책봉된 뒤에 위왕(魏王)으로 승격한 사례 때문에 당시에도 공이 왕보다 낮은 작위였던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위공 당시에 쓰인 헌제의 조서에서도 위공의 서열은 제후왕에 앞선다고 명시되어 있다.[3]

오등작이 도입된 서진부터 남조 때까지 작위의 등급은 작호(爵號)의 서열에 따른 것이 아니라 보통 봉국의 규모에 따라 정해졌다. 당시 이십등작에서 유래된 열후(列侯)는 오등작 남작보다도 그 서열이 낮았다. 작호의 서열 순으로 작위의 서열이 지정된 것은 북조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서진에서 군공(郡公)·군후(郡侯)가 제정되면서 현왕은 그 하위의 서열이 되었기에, 군왕과 현왕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때문에 하위 작위인 현왕은 반드시 봉호에 현왕임을 명기하는 것이 원칙이 되었고, 군왕은 보통 '군(郡)'자를 생략해서 표기했다. 북주 이후로는 현왕이 쓰이지 않게 되었으나, 군왕의 상위로 국왕 작위가 도입되면서 마찬가지로 하위 작위인 군왕을 구분하기 위해 봉호에 군왕임을 명기하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 국내 작위인 국왕은 실제 봉호 표기에서 '국(國)'자를 생략하여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에 따라 국왕 표기를 명기하는 경우는 대체로 외국의 군주로 한정되었다.[4]

즉, 서진 이후 현왕은 그 봉호에 '현왕'을 명기해야 하고, 북주 이후 군왕은 반드시 그 봉호에 '군왕'임을 명기하는 것이 원칙이다.[5]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작위의 종류나 서열은 근세에 정립된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대와 나라에 따라 운영하고 있는 작위 제도는 모두 다 달랐고, 위에서 살펴본 것 처럼 그 서열도 일률적으로 도식화하긴 어렵다.

2.1. 일자왕의 서열 문제

흔히 왕작 가운데 봉호가 1글자인 왕을 '일자왕(一字王)'이라고 하여, 왕작 가운데 최고 서열으로 단정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어디까지나 원나라 때에 한정하여 옳은 것이다. 명나라의 경우에는 친왕군왕이 관제상의 등급 명칭에 불과했고, 관례적으로 친왕은 옛 나라의 국호를 봉호로 지정했기에 '일자왕'이 되고 군왕은 옛 군(郡)의 이름으로 봉호를 지정했기에 '이자왕(二字王)'이 된 사례다. 이 두 왕조를 제외한 다른 왕조에서 1자왕의 서열이 높게 보이는 것은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특히 명나라의 특수한 사례를 다른 왕조에서도 적용하여 1자왕은 무조건 친왕이고 2자왕은 무조건 군왕이라 대입하는 경우도 보이는데, 청나라의 경우 군왕의 봉호도 보통 1글자의 존호로 지정했다. 이는 '국왕'과 '군왕' 개념을 인지하지 않았기에 발생되는 오류로 보인다.

원래 춘추전국시대 이전까지 읍(邑)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1글자로 썼다. 당시 2글자 지명은 그 읍의 별명이거나, 특정 읍과 그 주변을 여러 구역으로 구분했을 때 쓰인 이름이거나, 다른 읍에 예속된 비읍(鄙邑) 등에 쓰인 경우였다. 전국시대 무렵부터 2글자 지명의 사용이 일반화되었지만, 보통 나라의 국호는 그 나라의 본읍(本邑)에 해당되는 지명을 사용했기에 1글자로 사용되었다. 또한 군·현의 이름 중에도 기존에 쓰인 읍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1글자의 지명으로 쓰인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오호십육국시대부터 이주민이 대량으로 발생하면서, 이주민을 정착시킬 때엔 그 정착지에 이주민의 출신인 주·군·현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행정구역을 새로 설치했는데, 이를 통틀어 교치(僑置)라고 한다. 문제는 기존의 행정구역을 교치하는 것이 단순히 몇 차례에 그친 것이 아니라 남북조시대까지 수 백년간 누적되어 발생하다보니, 같은 지역에서 파생된 교주·교군 여러 개가 난립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주(州)의 규모는 1개 군(郡)과 동일해지고 불과 5개 이내의 현에 그치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주·군의 지명은 다른 지역과 서로 겹치지 않는 이름으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특히 수나라 이후로 주현제가 정립되면서 군은 실제 행정구역이 아니라 단순히 주의 별칭으로 여겨지게 된다. 주현제 하에서 군은 이런 사정이 있어서 그 지명이 2글자가 된 것이다.

북주 때 옛 나라의 국호를 봉호로 삼는 왕인 '국왕' 작위가 등장하고, 이후 주현제가 시행되면서 군(郡)의 이름이 2글자로 지정되자, 국왕의 봉호는 자연히 1글자가 흔히 쓰이게 되고 군왕의 봉호는 2글자가 되었다. 때문에 국왕은 대게 '1자왕'으로 보이는 것이고, 군왕은 '2자왕'처럼 보이는 것이다. 서진 이전에는 단순히 군 이름이 1글자인 경우도 있었기에 종종 '1자왕'이 책봉되었지만, 이건 단순히 봉국의 이름이 1글자라 그렇게 불린 것일 뿐 2글자 봉국과 특별히 격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를 북주 이전에 '1자왕 서열론'을 무조건 대입하면 오류가 발생한다. '서초(西楚)'를 국호로 사용한 항우가 스스로 격을 낮춰 '한왕(漢王)'이나 '제왕(齊王)'보다 낮은 서열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또한 후한동해왕 유강은 원래 황태자였다가 모후의 폐후 문제로 인해 그 지위를 포기하게 되어 제후왕으로 책봉된 것으로 아버지인 광무제도 이를 미안하게 여겨 특별한 대우를 한 경우였는데, 같은 시기에 유강의 친동생인 유보가 패왕(沛王)으로 책봉되었다고 하여 그를 친형인 동해왕보다 앞서는 서열이었다 할 수 있을까? 또한 북주 이후로도 작위의 서열은 작호(爵號)와 그 세부 등급에 따른 것이었지, 봉호의 글자 수로 따진 것이 아니었다.

1자왕이 특별한 서열로 규정된 것은 원나라가 유일했다. 원나라는 종1품 군왕과는 별개의 작위로 그 상위에 정1품 왕(국왕) 작위를 운영했는데, 정1품 왕의 등급을 5개로 나눠서, 등급별로 인장의 재질이나 형태를 달리하여 수여했다. 인장은 금인수뉴(金印獸紐: 순금맹수)-금인이뉴(金印螭紐: 순금이무기)-금인타뉴(金印駝紐: 순금낙타)-금도은인타뉴(金鍍銀印駝紐: 금도금낙타)-금도은인귀뉴(金鍍銀印龜紐: 금도금거북이) 5종류였는데, 이중 금인수뉴를 받는 왕이 최고 등급으로 국호를 1글자로 지정했기에 '1자왕'으로 불렸다. 종1품 군왕은 봉호에 '군왕'임을 명기했고, 인장의 종류도 은인귀뉴(銀印龜紐: 은거북이)로 현격히 달랐다.

사실 고려왕을 포함한 외국의 군주들은 국호가 2글자 이상임에도 금인수뉴를 받았으므로, 1자왕 원칙은 그 봉토가 원나라 직할령에 설정된 경우로 한정된 것이었다. 심양왕의 경우, 국호가 2글자이므로 원래는 군왕급이라고 단정짓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엄연히 정1품 왕(국왕)으로 시작된 작위였으며, 나중에 금인수뉴를 받는 왕으로 격상되었기에 1자왕 '심왕'으로 변경된 사례였다. 참고로 《원사》제왕표에는 심왕이 39번으로 고려왕이 41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서열 순서로 간주하여 고려왕이 심왕보다 아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39번까지는 봉토가 원나라 직할령에 위치한 왕들의 목록이고, 40번은 《원사》 편찬자들이 봉호를 확인하지 못한 왕위였으며, 고려왕 이후로 기록된 왕들은 모두 외국의 군주이다. 즉, 40번 이후로는 서열 순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왕과 심왕을 겸작한 충선왕은 고려왕을 우선하여 '고려심왕'으로 불렸다.

일부에서는 《고려사》에 인용된 요나라의 국서의 내용을 근거로 일자왕의 특별성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오역이라 할 수 있다.
옛 현도(玄菟)의 땅을 그대에게 모두 주나니 영광은 옛날 일자왕(一字王)보다 높고, 조칙에 의해 부여받은 높은 직위는 삼공(三公)을 겸했다.
《고려사》 권6 세가6 정종(靖宗) 5년 4월(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역주, 2008, 『국역 고려사』, 경인문화사.)
이 대목의 원문은 아래와 같은데,
玄菟全封, 榮加於一字, 溫詔峻秩, 兼示於三師.
원문 상으로는 '옛날 일자왕'이라는 표현이 없고 그저 '一字'로만 되어있다. 이는 '三師'를 '삼공'으로 번역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들이 특별히 표현을 더하거나 고친 것인데, 요나라의 작위 제도를 정확히 이해하지 않은 채로 이 문장을 해석했기에 '옛날 일자왕'이라는 오역이 나온 것이다.

요나라에선 품계를 초월한 일명 '무품(無品)' 왕을 3등급으로 나눠서 시행했는데, 그 등급에 따라 ○○국왕-○국왕-○왕 순으로 나뉘었고 ○○국왕이 최고 서열이었다. ○○국왕은 '2자국왕(二字國王)'이라 했는데, 봉호의 글자가 2글자라 그렇게 불린 것이 아니라, 2개의 국호가 병기되는 왕이라 그렇게 불린 것이다. 예를 들면 소사온(蕭思溫)의 작위는 채초국왕(祭楚國王)으로 '채'와 '초' 두 나라의 국호를 병기한 왕이었고, 북요의 시조인 야율순(耶律淳)의 원래 작위는 진진국왕(秦晉國王)이었는데 '진(秦)'과 '진(晉)' 두 나라의 국호를 병기한 왕이었다. 위의 기록에서 '一字'라고 한 것은 '고려국왕'은 '고려'자체가 하나의 단일 국호이므로 엄연히 '1자국왕(一字國王)'의 부류에 속하지만, 특별히 자국의 '2자국왕'과 비견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3.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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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왕은 상나라 군주가 독자적으로 자칭한 칭호였으며, 주나라 때는 천자의 전용 칭호로 개념상 유일무이한 최고의 격이었다. 물론 춘추시대부터 초나라를 위시한 주나라 주변의 강력한 이민족 국가들은 독자적으로 왕을 칭하고 있었으나, 주나라가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소속된 제후들에게 널리 인정받는 칭호는 아니었다.[6] 오히려 그런 나라들이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주나라를 대신하는 패권을 차지하고자 주나라 왕의 제후를 자처했다.

전국시대가 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바뀌었는데, 춘추시대까지는 강대국이 다른 나라를 종속시킬 수는 있어도 그 세력을 완전히 해체하여 흡수 합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영역이었으나, 지방통치체계가 도입되는 춘추시대 말엽부터 적극적으로 약소국이나 경쟁국을 침탈하여 그 영역을 합병하는 것이 실현되었으므로, 근본적으로 국제질서를 천자 중심으로 유지할 필요성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삼진(三晉)의 분할로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더이상 무의미하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낙읍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주나라 또한 내부적으로 찬탈이 일어나거나 분열되는 혼란한 상태였기에, 기존에 천자의 제후를 자처했던 강대국의 군주들은 더이상 제후를 자처하지 않게 되었고, 아예 왕 칭호를 자칭하기 시작했다.

전국시대의 '왕'들은 천자를 자처하지 않았을 뿐이지, 칭왕 이후로는 자신을 딱히 주나라 왕의 제후라 여기진 않았다. 하지만 유가를 위시한 복고주의 집단이 질서회복을 외쳤기에 관례적으로는 제후로 칭해졌고, 이에 당시부터 왕 칭호의 가치는 낮게 인식되어 이를 대신할 칭호를 찾으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진나라가 6국을 병합하여 통일을 완수하자 진나라 왕황제라는 새로운 칭호를 만들어냈고, 옥새를 만든다던지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하는 등의 수단을 통해 새로운 칭호인 황제의 격을 천자로 만드려 노력했다. 이렇게 왕은 자연스럽게 소멸된 칭호가 되었으나, 황제를 칭한지 12년 만에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면서 진나라의 통치질서가 무너지고 진승이 왕을 자처하면서 부활했다. 비록 진승의 세력은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으나, 이를 계기로 6국 부활을 명분으로 내거는 세력들이 기존 6국 유력자들의 지지 속에서 일제히 일어나 옛 왕실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했다. 최후에는 멸망을 목전에 둔 진나라가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스스로 왕을 자처하는 지경이 되었다.

항우가 진왕을 살해한 뒤 자신의 주군을 의제(義帝)로 올리고 자신과 18인의 제후를 왕(王)으로 분봉하면서, 왕 칭호는 공식적으로 제후 신분의 칭호로 사용된다. 항우가 내세운 의제는 곧장 항우에게 살해되었으나, 초한전쟁을 거치면서 자신에게 적대적인 제후들을 모두 제거한 한왕(漢王)이 남아있는 제후왕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오르면서, 황제와 왕의 관계는 공식적으로 천자와 제후의 관계가 되었다.

물론 이때까지도 '제후'라는 신분은 구색에 가까운 것으로, 실제로는 독자적인 별개의 세력이었다. 고제가 황제가 된 이후에도 기존의 제후왕들은 독립이나 제위를 찬탈하고자 반란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아예 숙청되어 봉국을 잃은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가 기존 제후 왕국들을 완전히 흡수 합병하지는 못했다. 제거된 제후왕을 대신하여 황제의 친족을 왕으로 세워, 이전보다는 한나라 황제의 통제를 강화하는 수준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한계였다.

이렇듯 전한 초반까지 제후 왕국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통치권과 군사력을 보유했으며 그 영역도 여러 개의 군(郡)에 달했다. 그러나 한나라 황실이 안정을 찾은 경제 때부터 제후들을 약화시키고 중원 전역의 통치권을 한나라 조정이 독점하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기존 제후왕들은 당연히 반발했고, 결국 오초7국의 난이 일어났으나 황제가 이를 진압하면서 강행되었다. 제후국을 운영하는 조정의 신하들은 기존의 제후가 아닌 황제가 임명하게 되었고, 특히 무제는 "황제의 은덕을 널리 퍼트린다(추은령)"는 명목으로 제후 왕국의 분할상속을 밀어붙였기에 결과적으로 제후 왕국의 규모는 1개 군 수준으로 줄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제후왕의 봉국은 독자 세력의 지위를 잃고, 실질적으로 군과 동격인 행정구역이 되어버렸다.

오초7국의 난 이후로 제후왕은 그저 규정에 따른 녹봉을 받아먹을 뿐인 존재가 되었지만, 제후왕은 소멸하지 않고 황족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관례적으로 책봉되는 작위로 계속 유지되었다. 유교 경전에 따른 복고주의 정책을 시행한 신나라에서만 오등작 제도를 구현하고자 왕 작위를 완전히 폐지했었을 뿐, 후한 초기에 황족을 왕으로 책봉하는 관례를 부활시키면서, 중원에서 왕은 황제의 제후가 책봉되는 작위로 정착된다.[7]

작위 책봉으로 수여하는 봉토가 명목상으로만 설정되는 허상에 불과해진[8] 위진남북조시대 이후에도, 왕작에 책봉된 황족 만큼은 황태자의 저위(儲位)를 방해하지 않고 중앙정계에서 후계다툼을 미리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실제 봉토로 부임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임지에선 일정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있어도 실제 통치나 사법에는 직접 개입할 수 없었으며, 또한 직접 임명할 수 있는 관리들 또한 현대의 비서실 개념인 왕부(王府)의 측근 이외에는 없었다. 다만 건국 초기나 혼란기에는 원칙상 왕으로 봉해질 수 없는 이성(異姓) 신하가 왕으로 봉작되기도 했고, 서진이나 명나라 초기에는 황족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통치권한과 군사력을 부여했기에,[9] 이런 경우에는 허울 뿐인 작위로 기능하지는 않았다.

당나라 중기 이후 군벌화된 절도사들에게 왕작을 수여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유력 번진의 절도사에겐 동·서·남·북 방위명이 들어간 '○평군왕(○平郡王)'으로 책봉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단순히 봉호로 사용된 지명이 '○평'에 불과했던 것이었으나, 이때부터 정치적인 상징성이 부여되기 시작하면서 오대십국시대에는 '평왕(平王)' 작위로 정착해버렸다. 평왕으로 책봉된 절도사는 왕위를 세습했고, 사실상 반독립국으로 바뀌게 된다. 북송 때에 절도사의 왕작은 폐지되었지만, 서하의 군주를 서평왕으로 베트남리 왕조를 남평왕으로 책봉했다. 원나라 이후로는 특별한 의미가 없어졌다.

각 왕조에서 시행한 작위 제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3.1. 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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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서는 호쇼이 친왕(和碩親王·화석친왕)도로이 기윤왕(多羅郡王·다라군왕) 두 종류의 왕작을 시행했는데, 이는 후금 시절에 사용했던 호쇼이 버이러(貝勒·패륵)을 개편한 작위였다.[10] 청나라에서는 종실에게 수여하는 작위, 몽골 등 외번(外藩)에게 수여하는 작위, 공신·외척에게 수여하는 작위의 종류가 모두 달랐다. 그 중에서 왕작으로 분류되는 호쇼이 친왕과 도로이 기윤왕은 종실과 외번에만 수여한 작위였다.

청나라의 작위제도는 본래 후금 시절의 팔기군 지휘관 계급에서 기원한 것으로, 입관(入關) 이후에 명예적 포상을 위한 작위로 분화되었다. 호쇼이 버이러 또한 본래는 팔기군의 기주(旗主) 역할을 하던 지위였다. 때문에 다른 중원 왕조와 달리 팔기군이 설치되는 외번에도 왕작을 수여한 것이며, 특히 호쇼이 친왕의 약칭으로 사용하던 '친왕'에는 딱히 황자라는 의미가 포함된 것이 아니었기에 입관 이후에 세운 외번에게도 '호쇼이 친왕' 작위를 수여할 수 있던 것이다.[11] 삼번의 난 이후 한족 외번은 모두 철번되었으나, 몽골과 신강 등에는 여전히 왕작을 받는 외번이 남았으며, 외번 왕작은 칸(汗)보다 낮은 서열이었다.

종실에 수여하는 왕작은 원래 세습에 제한을 두었고 세습이 거듭될 수록 점차 그 작위가 낮아지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일부 왕작은 그 작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세습하는 특권인 '세습망체(世襲罔替)'가 부여되었는데, 그 혜택을 받는 왕작은 '철모자왕(鐵帽子王)'이라고 불렀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 황실 문서 참조.

4. 한국

한국사 군주의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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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군주 황제, 대황제 }}}}}}}}}


고종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칭제하기 전까지, 한민족 군주들이 황제(皇帝)를 직접 칭한 사례는 문헌 상 확인되지는 않는다. 다만 조선 초기에 《고려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황제 등의 표현을 고쳐적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고,[12] 발해의 경우 해당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이 있을 뿐 대이진 때부터 황제를 칭했다고 간접적으로 적은 기록은 있다. 근래에 '제국(황제) 콤플렉스' 때문에 고구려나 신라에서 사용된 태왕(太王)·대왕(大王) 같은 칭호를 황제에 준하는 고유 칭호로 내세우는 경우도 많지만, 이와 같은 칭호들은 모두 일시적인 사용에 그쳤던 것으로 확인되고, 단순한 수식표현이 아니라 실제 왕(王)과는 구별되는 독자칭호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하지만 고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민족 국가의 임금들은 자신에게 예속되는 번왕(藩王)을 두고 있었으며, 번왕도 왕 칭호를 사용한다고 하여 자신의 칭호를 높이거나 번왕의 칭호를 격하하지도 않았다. 특히 고대에는 '칭호를 독점한다'는 개념이 희미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그 정황이 확인된다. 당시 지증왕을 포함한 서라벌 6부의 '간지(干支)'들은 '7왕(七王)'으로 통칭되는 모습이 확인되며, 7왕의 통칭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지방의 촌주(村主) 또한 '간지' 칭호를 사용했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즉, 황제를 칭하지 않은 것보다는 굳이 황제를 칭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근세 조선까지 '왕'은 어디까지나 한자식 표현으로, 언중들은 군주를 '임금님'이나 '나랏님' 등으로 불렀지 '조선국왕'을 일상적인 호칭으로 사용하진 않았다.[13] 굳이 국내 전용의 칭호로도 언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한자식 표현을 새로 내세울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특히 황제란 칭호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려는 중원 제국과 인접하고 있는 이상, 이를 공식적인 칭호로 내세워 굳이 외교적 불화를 일으킬 이유도 없었다.

'천자국 체제'와 '제후국 체제'를 대비하면서,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였거나, 관제의 형태가 3성 6부제이거나, 일부 금석문에서 황제격 표현들이 사용된 점 등을 토대로 고려 때까지 외왕내제가 시행했다고 보고, 이를 자주성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은 사학계에서도 심도있게 다뤄지고 있던 주제였으나, 최근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중원 제국과 한민족 국가가 단순히 조공책봉에 따른 외교 형식이 아닌 실질적으로 '천자국'과 '제후국'으로 대비되기 시작했던 것은 원 간섭기에 생겨난 일이었다. 이 때에는 고려의 지위가 실제로 제후국으로 격하된 시기였기도 했고, 몽골의 원나라가 유독 서열과 그 서열에 따른 격식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던 점이 크다.

사실 원나라를 제외한 여타 중원의 황제국들은 제후국들이 대외적으로 황제를 칭하거나 독자 연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14] 외국에서 내부적으로 어떤 제도를 시행하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외왕내제를 실천한 베트남 등에서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그 당시부터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베트남 침략의 명분으로 내세우지 않는 이상은 보통 그런 행태를 묵인해왔다. 조선에서 '천자국 제도'로 인식하고 있던 묘호 또한 실제로 정응태 무고사건으로 비화되기는 하였으나, 조선에서 내부적으로 선왕들에게 묘호를 올리고 있던 사실은 당시에 이미 널리 알려져서 명나라에서 유통되던 조선 역사서에도 기록되고 있을 정도였다. 정응태의 무고에 따라 명나라가 사실 확인차 사신을 통해 묘호의 사용 여부를 확인하긴 했으나, 조선에서 관례적으로 묘호를 올리고 있다는 답변을 듣기만 했을 뿐 중단을 요구하거나 항의하지도 않았다. 오등작에 따른 작위제도 또한 원나라에서만 문제삼았던 관제였을 뿐, 베트남에서 오등작을 시행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명나라나 청나라가 항의한 적도 없었다.

'천자국(황제국)'과 '제후국'의 대비는 원나라 이후로 성리학자들이 설정한 '사대'의 세계관에서 창조되고, 현대에는 사대에 대한 반동으로 '제국 콤플렉스'로 표출되는 기묘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4.1. 고대

상술한 것처럼 칭호를 독점한다는 개념이 희미했던 것으로 보이는 만큼, 종속국의 군주나 신하들을 왕으로 책봉한 사례는 제법 발견되는 편이다.
  • 고조선
    고조선에선 비왕이라는 왕작이 있었다고 중국 사서엔 기록하고 있다. 이는 흉노의 비소왕 사례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 고구려
    초대 동명성왕 재위 당시 종속국이 된 비류국송양이 다물국왕(多勿國王)으로 칭해지는 사례가 있다. 그 외에 초기 고구려의 연맹체 구성원으로 추정되는 황룡국과 갈사국의 군주 또한 왕으로 칭해지고 있다. 이후 장수왕 때는 고구려에 망명한 북연 황제 풍홍을 ‘용성왕’이라 부르며 제후왕 취급을 한 일도 있다. 이외에도 덕흥리 고분이나 고구려 유민들의 묘지명 등을 통해 제후왕을 작위로 내리는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신찬성씨록과 같은 기록에서 일부나마 그 책봉 사례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는 군주가 군림하는 아래에 후왕(侯王), 국주(國主), 매금 등이 존재하는 위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견해에 따라서는 북연의 천왕 역시 대종(태왕)과 소종(천왕)으로서 이 위계에 들어간다고 간주하기도 한다.
  • 백제
    백제에선 여러 신하에게 매라왕, 벽중왕, 아착왕, 면중왕 등으로 책봉해두고 이를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는 국서가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있다. 칠지도의 명문에는 일본국왕을 "후왕(侯王)"이라고 칭하여 일본국왕 또한 제후왕 취급했음을 알 수 있다.
  • 신라
    신라에 귀부한 고구려 왕족에게 '고려국왕' 내지는 '보덕국왕' 작위를 내렸다. 또한 진골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책봉하기도 했고, 일부 왕족들은 '갈문왕' 칭호를 사용했다. 제주도의 탐라국이나 울릉도의 우산국도 왕이 존재했으나 신라의 속국 지위에 있었다. 형식상이었지만 나중에 후삼국 시대의 고려후백제도 물리적 권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던 신라의 제후왕임을 자처했던 것을 살펴보면, 당시의 신라는 쇠약해지긴 했어도 삼한일통의 정통성이란 상징적인 우위를 인정받고 있었던 듯하다.묘하게 신성 로마 제국스럽다
  • 발해
    함화 4년명 불상에 새겨진 명문에 '허왕부(許王府) 참군(參軍) 기도위(騎都尉) 조문휴(趙文休)'라는 인물이 확인되는데, 참군과 기도위는 관직명이고 허왕부는 조문휴가 소속된 기관명이다. '부(府)'란 현대식 표현으로 고치면 '비서실' 내지는 '부속실'에 가까운 것으로 '허왕부'란 허왕의 비서실을 의미한다. 함화(咸和)는 대이진이 사용한 연호였고, 발해 건국 이전에 걸사비우측천무후에게 허국공(許國公)으로 책봉된 적이 있던 만큼, 걸사비우의 후손들에게 왕작이 책봉되었고 대를 이어 세습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 발해에서 내부적으로 책봉된 사례는 아니지만, 대조영의 재위 기간 중 당시 태자인 대무예가 외교의전상 당나라에서 계루군왕으로 책봉된 사례가 있는데, 당시 대조영은 발해군왕으로 책봉되고 있었고 보통 후계자는 그보다 격을 낮춰 책봉하는 것이 통례였던 만큼, 특수한 사례에 해당된다.

4.2.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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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 상보 상보 낙랑군왕 실직군왕 문원대왕
견훤 김부 김위옹 왕정
<rowcolor=#670000> ▨▨대왕 필영대왕 정간왕 양헌왕
(미상) (미상) 왕기 왕도
<rowcolor=#670000> 탐라국왕 우산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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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경순왕 김부(金傅)는 경종이 상보(尙父)로 책봉한 고명(誥命)에서 이미 낙랑군왕(樂浪郡王)을 받았음이 확인된다.[15] 또한 《고려사》에는 태조의 왕자 왕정(王貞)이 문원대왕(文元大王)으로 봉증(封贈)된 사실과, 현종의 아들인 평양공(平壤公) 왕기(王基)문종이 정간왕(靖簡王)으로 추봉한 것이 파악된다. 그리고 《고려사》에는 단순히 조선국공으로 봉해졌으며 죽은 뒤 '양헌'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으로 기록된 문종의 아들 왕도(王燾)는 그의 차남인 왕원묘지명을 통해 양헌왕(禳憲王)[16]으로 봉작(封爵)된 사실도 확인된다.

혜종 때 만들어진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에서 ▨▨대왕필영대왕(弼榮大王)도 확인된다. ▨▨대왕은 비문이 마모되어 봉호를 확인할 수 없지만, 글자가 남아있는 부분을 통해서 문원대왕과는 별개의 인물로 파악된다. 해당 비문에서 왕요군(王堯君)왕소군(王照君)과 함께 언급되는 점으로 보아 모두 태조의 아들이 추봉된 사례로 추정된다. 다만 최근에는 '大王' 부분이 원래는 '대광(大匡)'이었으며 '匚'획이 마모된 것이라는 의견이 등장했다.

한편 삼척군삼척 김씨 문중에서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인 실직군(悉直君) 김위옹(金渭翁)이 경순왕의 손자 중 유일하게 실직군왕(悉直郡王)으로 책봉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었는데, 조선 후기인 1838년에 김위옹의 실제 무덤이 확인되면서 실존 인물로 파악되었다. 실직군왕의 사례는 김위옹이 고려의 왕실과는 별다른 연고가 없는 인물인 점에서, 이 사례는 경순왕의 낙랑군왕 작위가 그대로 세습되지는 않은 '승습(承襲)'[17] 형식의 봉작으로 여겨진다.

이상의 사례는 모두 신하 신분인 사람에게 작위를 책봉한 것임이 명백하며, 생전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임금의 선친에게 고려국왕과 동등한 신분을 부여하는 추존의 사례와는 구분된다.[18] 이처럼 문헌 사료인 《고려사》와 실물 사료인 금석문 등을 통하여,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왕작(王爵)을 수여했으며, 오등작 봉작제(封爵制)가 정착된 문종 이후에도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고려의 번국(藩國)이었던 탐라국우산국 군주의 경우 일부 문헌에서 '국왕(國王)'으로 표기한 사례가 확인되지만, 《고려사》에는 국왕으로 표기한 사례는 없고 탐라국의 군주를 성주(星主)·왕자(王子)로 표기한 기록만 남아있다. 《고려사》는 편찬 과정에서 조선 초기의 사관(史官)들이 자기 관점에 따라 고려 당시에 쓰였던 여러 표현을 '제후국의 격식'에 맞춰 고쳐 적는 이른바 '개서(改書)'가 이뤄졌는데, 세종이 '개서'를 문제 삼으며 고려 당시의 표현대로 다시 고쳐 적으라는 이른바 '이실직서(以實直書)'를 명령했지만, '이실직서' 또한 당시 사관들의 주관에 의하여 선택적으로 이뤄졌으며 그나마도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입증되어 있다.[19] 이 점을 감안하면, 조선 초기의 사관들이 '제후국' 고려의 '번국'에서 국왕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참칭으로 여겨서 '개서'한 결과로 추측된다.

고려에서는 작위를 수여한 왕족들을 '제왕(諸王)'으로 통칭했고, 조선의 종친부(宗親府)에 해당되는 기관의 이름 또한 '제왕부(諸王府)'였다. 이 '제왕' 용어를 두고 외왕내제에 따른 '내부적 왕작(王爵)' 칭호로 보는 학술 의견이 있는데,[20] 외왕내제를 실천한 베트남에서는 공식적인 작호(爵號)는 '군공(郡公)'·'현후(縣侯)' 등으로 하면서 내부에선 '친왕'·'번왕' 등으로 격을 높였다고 설정하여,[21] 마찬가지로 고려도 공(公)·후(侯)·백(伯)으로 책봉된 왕족을 내부적 왕작인 '제왕(諸王)'으로 격을 높였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고려 말의 학자인 이제현이 "종실(宗室)을 제왕(諸王)으로 칭한 것은 마치 한(漢)의 '제유(諸劉)'와 당(唐)의 '제이(諸李)'와 같으니, 동성(同姓)을 뜻한 것이지 작위가 아니다."라고 설명한 《익재난고》의 기록과 대치된다.[22] 또한 고려에서 공·후·백 등으로 책봉된 자를 개별적으로 '제왕(諸王)'으로 호칭한 사례는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내부적 왕작' 개념보다는 '종친'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 용례만 확인된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봤듯 고려에서는 공·후·백과 별개로 '왕작'을 시행한 사례가 발견되고 있으므로, '제왕' 용어를 '내부적 왕작'으로 볼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는 제시되지 못한 상황이다.

하지만 고려에서 왕작을 받지 않은 왕족을 '친왕(親王)'이나 '후왕(侯王)'으로 부른 용례는 실제로 확인되고 있다. 《고려사》에서 왕족을 '친왕'으로 통칭한 사례가 여러 기사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이정묘지명〉에서도 왕족을 '친왕'으로 통칭하고 있다. 특히 순종이 동생 선종을 친왕으로 지칭한 유조(遺詔)도 확인된다. 또한 의종강릉공 왕온(王溫)의 아들인 왕영(王瑛)을 '후왕(侯王)의 아들'로 부른 사례가 발견된다. 이러한 점들과 작위를 받은 고려의 왕족이 전하(殿下)로 호칭된 사례 등을 함께 살펴보면, 고려에서는 왕작에 책봉되지 않은 왕족도 다른 나라의 왕작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4.3. 대한제국

구한말고종은 왕의 칭호를 대군주로 고치고 호칭 또한 폐하로 격상시켰다. 당시 서구에서도 이미 동아시아에서는 왕이 황제에게 책봉된 제후 작위의 개념으로 쓰인다는 점이 널리 알려졌기에, 서구 세력과의 교류에서 조선의 자주성을 강조하고자 고안해낸 새로운 칭호였다. 이에 서양의 King을 대군주로 번역하는 한편, 대군주라는 칭호를 서양에서 통용되고 있는 King과 필적하는 권위를 부여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때문에 당시 서양 출신의 외교관들이 왕과 대군주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웃픈 상황도 발생했었다. 원래 조선에서는 세자가 아닌 왕자왕녀에게 '저하'나 '마마' 등으로 호칭하지 않고 '자가'로 불렀으나, 이때 왕자를 포함한 왕족들과 흥선대원군의 호칭도 전하로 바뀌었다.[23]

이후 대한제국과 황제 칭호를 선포하면서 친왕 제도를 도입하였는데, 실제 책봉 사례는 친왕 문서 참조. 종인학교 관제에 친왕 뿐만이 아니라 '군왕(郡王)'도 함께 언급된 점을 살펴보면 군왕 책봉 또한 고려하여 제도를 설계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한제국이 13년 만에 끝났기에 군왕 책봉 사례는 없다.

대한제국이 불법 합병된 뒤, 구 대한제국 황족은 일본에게 작위를 받아 왕공족이 되었다. 왕공족의 수장은 이왕으로, 이태왕으로 봉해진 고종을 포함하여 순종영친왕 3인이 봉작되었다. 그외 의친왕 일족과 흥친왕 일족이 공작 지위를 얻어 왕공족으로 분류되었다. 다른 대원군궁의 사손들은 후작 지위를 얻었으나, 왕공족에는 포함되지 않고 조선귀족으로 분류되었다.

4.4. 중원에서 바라본 한민족 군주

흔히 '일자왕'이 곧 친왕이고 '이자왕'이 곧 군왕이란 개념 때문에, 두 글자 국호를 쓰고 있던 한민족 국가의 군주들을 중국 왕조에선 군왕으로 취급했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있으나,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애초에 '왕(국왕)'과 '군왕'은 별개의 작위였으며, 실제 '군왕'으로 대우를 받았던 것은 건국 초기의 발해조선 뿐이었다. 발해의 경우 당나라에서 어쩌다가 기미주를 차지했지만 오래가지 못할 정권 정도로 보고 발해군왕으로 유지해오다가, 마도산 전투 이후 더이상 요동 지방을 기미주로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깨닫고 발해와의 국교도 정상화되었기에 발해국을 외국으로 정식 승인할 수밖에 없게 된 경우였다. 조선의 경우 주원장이성계에게 꼬장(...)을 부려 일부러 '군왕'격으로 대우했던 것에 불과했으므로, 건문제 이후로는 친왕급으로 예우했다.

중원 제국이 한민족 군주의 격을 실제로 낮춰본 시기는 현실적으로 고조선 멸망 이후부터 서진 시대로 제한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중에는 중원 제국의 조정에선 직접 다른 외국과의 외교를 주관하지 않았고, 대체로 그 외국과 가장 가까운 태수가 임의로 외교를 담당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서진 때부터는 태수나 관직에게 교위(校尉)직을 겸임시켜 공식적인 외교적 권한을 부여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이민족 지도자를 군주가 제후로 인정한 게 아닌 건 변함 없었다. 이민족 지도자를 왕으로 부르더라도 이민족 특수 작위인 솔중왕(率眾王)의 일종으로 보았고, 황제가 직접 책봉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남북조시대에 들어서면서 중원 제국은 현실적으로 중원과 구분되는 세계인 '해외(海外)'와 그곳에 위치한 '외국'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중앙 조정에서 '외국'과의 외교를 직접 담당하고 외국의 군주도 '제후'로 책봉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중원 제국은 삼국시대 한민족 군주들에게 관직과 작위를 수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군왕~군공 사이의 작위를 책봉했다가 점차 군왕 작위로 정착되어, 신라낙랑군왕, 백제대방군왕, 고구려요동군왕으로 정립되었다. 이때 수여된 작위를 보고 중원 제국에서 한민족 군주의 격을 낮춰봤다는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작위 수여는 외국의 군주 지위를 승인한 것과 별개로 주어진 것이었으며, 아직 외국과의 조공책봉체계에 따른 외교관례가 정착하지 않은 상태라 '이미 외국의 군주인 자'를 '책봉'하는 것이 어색했기에 구색을 맞추고자 의례상 자국에서 시행되고 있던 작위를 책봉했던 것에 가깝다. 최고 서열인 국왕으로 책봉하지 않은 것도, 국내 작위로서의 국왕은 황족에게만 수여하는 작위였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각 나라에서 파견된 사신들을 대접할 때는 자국에서 수여한 작위를 기준으로 의전을 달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4.4.1. 남북국시대

국제질서가 정립된 당나라 중엽부터는 더이상 외국 군주에게 별도 작위를 책봉하지 않게 되었고, 특히 외국 군주를 책봉할 때에는 '국왕' 표현을 명기하여 자국에서 황족에게 책봉하는 작위인 국왕과는 구분됨을 명확히 했다. 8세기경 성덕왕·강왕대부터는 신라국왕·발해국왕으로 부르고 과거처럼 낙랑군왕·발해군왕 호칭도 더 이상 쓰지 않았다. 다만 신라왕이 낙랑군왕으로 책봉되었던 사례로 인해, 이후 고려에서는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를 봉호로 삼을 경우에는 낙랑공, 낙랑후, 낙랑공주 등의 사례처럼 '낙랑'을 사용하기도 했다.

신라는 나당전쟁 승리로 당나라의 침략 의지를 꺾었고 발해도 건국 초기에 당나라와 군사적으로 대치하며 둘 다 당에게 있어 만만치 않은 나라임을 드러냈고, 당나라와 두 나라가 화해한 이후로는 당나라의 빈공과를 두 나라가 휩쓸며 당나라에 버금가는 문명국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당나라 주변국 중에서도 특별하게 인식되었고 의전서열도 높게 간주되었다. 당은 신라를 두고 구당서에서 군자의 나라(君子之國)로 일컬었고 성덕왕에게 보낸 조서에서는 신라를 춘추시대의 예의지국으로 유명한 노나라에 비유하고 숙위자에게 비록 명예직이지만 다른 나라들과 달리 문관직에 임명하는 등 다른 주변국과는 다름을 강조하는 대목이 많다.[24] 이러한 높은 인식이 아래에 설명할 고려, 조선까지 대체로 이어지게 된다.

4.4.2. 고려 시대

고려는 옛 고구려의 후계임을 널리 인정받았고 특히 고구려 후기에는 당시 정식 국호가 '고려'였던 만큼, 수양제의 300만 대군을 격파하고 당태종마저 정복에 실패한 나라로 평가되었던 것에 더하여, 당대 초강대국으로 평가되었던 거란을 격파한 실제 사례까지 있었기 때문에 그 대우가 남달랐다. 송나라에서는 요나라와 사실상 동급으로 취급할 정도였는데, 이는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자칭한 서하대월과는 현격한 차이였다. 물론 대외적으로 황제를 칭하진 않았지만, 사실 당시 이 나라들이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자주국의 체제라고 불리는 외왕내제라는 개념이 실상 현실에선 묵시적 승인조차 받지 못한 허상에 불과했음을 나타내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원 간섭기에 들어서 고려왕은 원나라 황제에게 책봉 받는 제후 작위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고, 왕실 또한 황실의 외손 가문으로 바뀌었다. 다만 그 봉토인 고려는 다소 애매모호하게 취급되었는데, 완전한 원나라의 직할령으로도 볼 수 없고 완전한 별개의 외국으로도 볼 수 없는 이중적인 지위인 '부마국'이 되었으며, 고려국왕 또한 '외국의 군주'와 '황제의 제후'라는 이중적인 신분으로 여겨졌다. 원나라 조정과 고려의 조정은 이런 이중적 지위를 서로의 필요에 따라 이용해먹었다.[25]

원나라 조정의 요구에 따라 고려는 '천자국의 격식'에 대비되는 '제후국의 격식'을 마련해 관제를 고치기도 했다. 중원 제국과 한민족 왕조의 관계를 '천자국'과 '제후국'으로 엄격히 따지기 시작한 것은 이 시점부터이다. 그리고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난 뒤에 명나라청나라에선 엄연히 '번부(藩部)'가 아닌 '외국'으로 취급되어 예부(禮部)가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대상이었음에도, 천자국과 제후국이라는 관계의 틀에서는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고, 오히려 한민족 지배층들이 사대의 관념을 심화시켜 나갔다.

4.4.3. 조선 시대

조선 건국 초기에 명나라와 알력이 있었기에 홍무제는 조선국왕의 격을 낮춰 '군왕'으로 취급했으나, 홍무제가 죽은 뒤엔 조선과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명나라에선 친왕격으로 대우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정식으로 친왕급으로 고쳤다. 이처럼 국초에 군왕급으로 여겨진 사례를 들어 조선 왕이 군왕급이었다고 단정하는 경우가 있으나, 일시적인 갈등이 표출된 사례에 불과한 것으로 엄연히 잘못된 지식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1402년의 기사건문제태종에게 면복을 주며 칙서에 이리 말한다.
"조선은 본래부터 군왕(郡王)의 벼슬이오니 5장(五章)이나 7장복(七章服)을 내려 주셔야 옳습니다." 하였다. (…중략…) 이제 특명으로 친왕(親王)의 9장복(九章服)을 내려 주며 사자(使者)를 보내 짐의 뜻을 알리는 바이다.
또한 건원릉에 세운 비문에는
영락(永樂) 원년(1403)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조(詔)와 인(印)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國王)으로 봉(封)하고, 이어서 한림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와서 전하에게 곤면 9장(袞冕九章)을 하사하였으니, 품계(品階)가 친왕(親王)과 동일하였다.
라고 쓰여있어 정식으로 친왕 대우를 받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명나라에선 황태자·친왕·군왕 모두 정규 9품계를 초월한 최고 서열이었으므로, 친왕이 정1품이었기에 조선왕도 정1품이라는 속설 또한 그 근거가 없다. 아마도 조선에서 명나라와의 외교 시에 사용한 이등체강(二等遞降)의 원칙을 왕에게도 적용하다보니 왕의 품계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등체강의 원칙은 황제-황태자-친왕 순의 서열에서 조선 왕이 친왕과 동급으로 대우받은 것이었으므로 "황제에서 2등을 내리는 것"을 조선의 신하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하는 관례였지, 이등체강의 원칙에 따라 조선 왕도 품계를 따진 것이 아니다. 이등체강의 원칙에 따라 조선의 의정부대신(삼정승)이나 좌우찬성은 조선에서 정1품이지만 명나라 의전예우로는 정3품 대우이다.

조선이 멀쩡할 때에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꽤 크게 여겼다. 지금도 대체로 인구 분포가 그렇지만 한반도나 베트남 같은 경우 땅이 제법 크고 인구도 많은 편이라 작위는 왕이라도 만주·몽골·티베트 등지의 여러 칸들보다는 실질적인 격은 위라 볼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명나라나 청나라와 국경을 맞댄 나라들 중 조선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는 지극히 드물었다. 러시아와 인도는 청대에 들어 겨우 접했고 그나마도 중국의 직접 통치력이 약하다 보이는 몽골·티베트 방면에서 접했다. 더불어 수왕조를 쳐바르고 당나라를 고전시킨 고구려, 그 후신이자 요나라를 귀주에서 발라버린 고려, 다시 그 후신이자 요동을 이래저래 엿본 초기 조선 등 한반도 역대 왕조들은 중국 통일 왕조 입장에서도 가볍게만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조선은 스스로 사대를 천명하고 알아서 숙였으니 중국 측에서도 어느 정도 꽤 대접은 해주었다 볼 수 있다.

때문에 명나라 시대에는 천자의 대리인으로 온 사신들도 조선 국왕을 만나면 칙서를 반포하기 전에는 공손하게 읍하며 예우를 했고 초기 환관을 보내던 데서 후기로 올수록 사신 지위도 높아졌다. 황제의 스승이자 공부상서를 지낸 사람이 올 정도였다. 이 사람은 정2품으로 조선 관직상 판서에 해당한다. 명나라는 재상을 없애고 1품 직위는 대학사, 즉 황제의 자문에 불과했기 때문에 관직상 오를 수 있는 최고직이다.

반면 국세가 기울어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된 선조 시절에 경략(해당 지역 책임자)으로 온 명나라 병부우시랑 송응창은 정3품으로 조선 관직으론 병조참판에 해당한다. 명나라 시절 남경 정부에 시랑 한명, 북경엔 좌우 시랑을 두었으며 청나라 시기엔 만한상서 2인 밑에 만인시랑 2명, 한인시랑 2명 총 4명을 두었던 비교적 낮은 직책이다. 덕분에 일국의 왕세자인 광해군은 상국의 연대장급 지휘관을 상대로 아버지의 친구를 맞는 예로 인사하는 처지가 되었다.

정응태 무고사건 등에서 조선시대의 문서를 보면 조선왕은 스스로 명나라의 신하이자 번왕임을 자처하고 있다.
설사 중국에서 정응태의 말대로 육사(六師)를 출동한다 하더라도 나는 머리를 조아리며 환영할 것이니 어찌 조금이라도 후회하겠는가. 아, 고질병이 있는 못나고 어두운 신(臣)임을 스스로 이미 밝게 알고 있어 전후에 여러 차례 물러나게 해줄 것을 빌었으나 불행하게도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경들에게 유한(遺恨)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성지(聖旨)가 내리지 않아 죄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니, 어찌 감히 번왕(藩王)으로 자처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평일과 다름없이 있겠는가. 더구나 온갖 병이 몰려드니, 어찌 오래 가겠으며, 역시 무슨 면목으로 중국 장수를 접대하겠는가. 지금부터 모든 국사를 세자가 처결하고, 접대하는 등의 일도 세자로 하여금 대행하게 하라."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인데, 군신의 의리도 그중 하나이다. 만약 여기에 죄를 얻으면 금수일 뿐이다. 지금 내가 적을 이끌어 들여 임금을 반(叛)하였다는 죄명을 얻었다. 신하로서 이런 죄악을 지고 무슨 면목으로 천지 사이에 살겠는가. 경들은 이런 정세를 여러 아문에 읍소(泣訴)하고, 또 급히 사신을 보내 번왕의 자리를 사직하기를 청하라. 이밖에 도리가 없으니, 경들은 다른 말을 하지 말라."
내용의 화자는 선조이고 임금은 명나라 황제 만력제이다. 여기서 번국이란 종번국의 관계로 속국과는 다르다. 명·청 시대 대부분 기간의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번국으로 중국은 조선에 책봉 등 종주권은 행사하되 조선 안에서의 주권행사는 제외되었다.

청나라의 홍타이지도 삼전도의 굴욕을 시전할 때 항복 절차가 끝나고 나서 "조선왕은 일국의 국왕이니 짐의 아우(친왕급)들 사이에 앉혀라" 했다. 이후 청나라는 조공국들 중에 그나마 나라꼴을 잘 갖춘 조선은 주요국으로 대우했고 산해관을 넘어서 명나라를 접수할 때도 조선의 공로가 없었다곤 할 수 없었기에, 사신으로는 늘 3품 이상인 만주인 고관을 보냈다. 그쪽에서 봐도 비교적 큰 나라인 조선 국왕에게 수천~수만에 불과한 몽고 추장 7~80명과 같은 왕 작위를 줬어도 대우는 현격히 달랐다. 구한말에는 청의 황제도 아닌 일개 북양대신 이홍장의 대리로 온 위안스카이에게 조선 국왕 고종도 개무시받았다. 서재필은 1896년 7월 4일 자 독립신문에서 독립문 건립의 필요성을 피력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조선이 몇 해를 청나라의 속국으로 있다가 하나님 덕에 독립이 되어 조선 대군주 폐하께서 지금은 세계의 제일 높은 임금들과 동등이 되시고...
이는 1800년대 후반 오랜 번국이었던 류쿠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것에 자극을 받은 청에서 조선 왕국을 폐지하고 군현을 설치하여 중국의 영토로 편입시키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위안스카이를 조선에 파견하여 종주권을 행사하면서 속국화 정책을 실행에 옮긴 기간을 말한다.[26]

이후 고종은 갑오개혁을 하면서 제후를 벗어난 자주국을 표방하기 위해 국왕이라는 칭호를 폐지하고 대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외국의 국왕들도 전부 대군주로 번역하게 했으며, 1897년에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고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대한제국의 황제와 대청의 황제는 서로 대등한 관계로 한청통상조약을 맺는다.

하지만 이후 일본제국에 의해 대한제국이 망하고, 청나라도 신해혁명으로 망하면서 두 제국 모두 없어지고 1991년 공화국이 된 두 나라는 서로 대등한 현대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5. 일본

5.1. 일본 황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일본 황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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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황족들을 대상으로 친왕(親王)이나 왕(王) 칭호를 수여한다. 원래는 황자만 친왕으로 불렀고, 5세손까지는 모두 왕으로 불렀으며, 5세손 이하는 적통 후손만 칭호를 세습할 수 있었다. 황족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아지면 방계 황족들에게 성(姓)을 하사하는 방식으로 귀족 신분으로 낮췄는데, 이렇게 황족 신분을 잃는 것을 '신적강하(臣籍降下)'라고 불렀다. 특이하게 여성도 왕이 되었으나, 내친왕(内親王)이나 여왕(女王)으로 바뀌어 불렸으며, 황족이 아닌 사람과 결혼할 경우 신적강하되어 해당 칭호는 박탈되었다.

1889년 1월 15일에 황실전범이 제정되면서 4세손까지 친왕·내친왕 칭호를, 5세손 이하는 왕·여왕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5세손 이하는 적남(嫡男)이 아닐 때는 성이 하사되거나 결혼으로 신적강하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9세손은 모두가 신적강하되어, 실질적으로 8세손까지 왕·여왕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1947년에 신헌법이 제정되고 황실전범 또한 현행 전범으로 개정되면서, 손자까지 친왕·내친왕으로 증손자 이후는 왕·여왕으로 개정되었으며, 신적강하라는 표현 또한 황적이탈로 바뀌었다. 현재 일본 황실의 친왕 사례는 친왕 문서 참조.

5.2. 시라카와 백왕가

남성 방계황족이라도 성(姓)을 하사받고 신적강하가 이뤄지면 친왕 또는 왕 칭호는 박탈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천신지기(天神地祇)의 제사를 담당하던 신기관(神祇官)의 장관직인 신기백(神祇伯)을 세습하던 시라카와(白川) 가문 또한 겐(源) 성을 하사받아 신적강하된 구 황족이었기에 왕 칭호가 박탈되어야 했으나, 신기백에 재임하는 동안에는 황족으로 복귀한 것으로 취급되어 왕 칭호 사용을 허락받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러한 관례를 자진 폐기했고, 화족으로 편입되면서 자작 작위를 받게 되었다.

5.3. 비황족 왕작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쇼군이나 관백([ruby(関白, ruby=かんぱく)]) 등이 일본국왕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으나, 이는 동아시아의 조공책봉관계에 따른 외교질서에 따르고자 자칭하거나 중원의 천자에게 책봉되어 사용한 대외적 칭호였다. 일본이 실제로 책봉한 비황족 왕작은 구 대한제국 황실 당주에게 부여한 이왕 작위와 류큐 왕국의 쇼타이 왕에게 부여한 류큐 번왕이 유이한 사례이다.

6. 베트남

베트남은 딘 왕조에서 968년에 국내 한정으로 '대구월(大瞿越, Đại Cồ Việt, 다이꼬비엣)'을 국호로 삼고 황제를 칭하면서 본격적으로 외왕내제를 실천한 나라가 되었다. 오등작과 별개로 왕작을 시행했는데, 왕조나 시기별로 운영방식이 조금씩 다름을 살펴볼 수 있다.

베트남의 왕작은 대왕(大王, Đại vương)과 왕(王, Vương)의 구분이 있고, 대왕이 최고 서열이다. 또한 다른 한자문화권에서는 일반적으로 태자에 책봉되면 기존의 작위를 버렸지만, 베트남 왕조들의 경우 황태자가 왕작을 겸한 사례도 발견된다. 그리고 건국자의 4대조를 황제와 같은 격으로 추존한 중원 왕조의 예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왕작을 추봉하기도 했다. 방계 황족이 제위에 오를 경우, 조선의 대원군과 유사하게 친부를 태왕(太王, Thái vương)으로 추존한 사례도 있다.

왕작은 원칙적으로 황족이 책봉되는 작위였으나, 이성 신하가 봉작된 사례도 종종 발견된다. 또한 황자를 일괄적으로 왕작에 봉한 것처럼 보이는 왕조도, 세부적으로 사례를 살펴보면 왕작을 받지 못한 황족도 발견되는 등, 왕작 책봉 원칙이나 대상 등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일례로 리 왕조의 경우, 황자들은 보편적으로 왕작을 수여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들이 제위에 올라 생전에 태상황이 된 공황(恭皇)은 왕작이 수여된 적이 없어 그전까지 숭현후(崇賢侯)에 머물러 있었음이 확인된다.

후 레 왕조에서는 성종이 황자가 봉해지는 친왕(親王)은 봉호를 1글자로, 황손인 사왕(嗣王)은 봉호를 2글자로 하도록 규정했다. 자연스럽게 1자왕과 2자왕의 서열 구분이 발생했지만 '대왕(大王)' 또한 책봉되었기에, 후 레 왕조에서는 대왕-1자왕-2자왕 순의 서열이 정립되었다.

응우옌 왕조의 경우 황자도 공작에 책봉된 뒤에 승진을 통해서 왕작을 받을 수 있었기에, 왕작 책봉 사례는 많아도 생전에 수여한 경우는 적은 편이다. 다른 왕조에서 군왕(郡王, Quận vương)은 일반 왕의 정식 봉호나 별칭 정도로 쓰인 것으로 보이나, 응우옌 왕조에서는 군왕은 일반 왕보다 서열이 낮은 별개 작위로 운영되었다. 1884년에 톈진 조약의 체결로 실질적인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뒤에 외왕내제 체제를 청산하여 정식으로 황제를 칭하게 되었다. 당시 인도차이나 총독 등을 역임한 프랑스인을 대상으로 작위를 수여했는데, 일부는 왕작에 책봉(...)되기도 했다.
딘(丁) 왕조: 968~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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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width=100%>
성명
생년
몰년
왕작
책봉년
비고
남월왕
南越王
딘리엔
丁璉
?
979
975 딘보린의 장남.[27]
위왕
衛王
딘또안
丁璿
974
1001
975 딘보린의 차남.
위왕→황제(979)→위왕(980)
부왕
副王
레호안
黎桓
941
1005
979 딘또안을 황제로 옹립 후 부왕 자칭.
부왕→황제(980)
}}}}}}}}}
전 레(黎) 왕조: 98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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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생년
몰년
왕작
책봉년
비고
장흥왕
長興王
레막
黎覔
? 980
(추봉)
태조의 부친.
경천대왕
擎天大王
레롱터우
黎龍鍮
?
1000
989 태조의 장남. 황태자.
경천왕→대왕(추증)
동성대왕
東城大王
레롱띡
黎龍鉞
?
1005
989 태조의 차남.
동성왕→대왕(1004)
남봉왕
南封王
레롱비엣
黎龍鉞
983
1005
989 태조의 3남.
남봉왕→황제(1005)
어만왕
禦蠻王
레롱딘
黎龍釘
986
?
991 태조의 4남.
개명대왕
開明大王
레롱딘
黎龍鋌
986
1009
992 태조의 5남.
개명왕→대왕(1004)→황제(1005)
어북왕
禦北王
레롱껀
黎龍釿
?
1005
991 태조의 6남.
정번왕
定藩王
레롱뚱
黎龍鏦
? 993 태조의 7남.
부왕
副王
레롱뜨엉
黎龍鏘
? 993 태조의 8남.
중국왕
中國王
레롱낀
黎龍鏡
?
1005
993 태조의 9남.
남국왕
南國王
레롱망
黎龍鋩
? 994 태조의 10남.
행군왕
行軍王
레롱데
黎龍鍉
? 995 태조의 11남.
부대왕
扶帶王
즈엉히리엔
楊熙璉
? 995 태조의 양자.[28]
개봉왕
開封王
레롱사
黎龍乍
1000?
?
1006 와조제의 장남. 황태자.
초왕
楚王
레티에우리
黎紹理
? 1006 와조제의 양자.
한왕
漢王
레티에우후언
黎紹勳
? 1006 와조제의 양자.
삼원왕
三原王
레옥투옌
黎偓佺
? 1008 와조제의 양자. }}}}}}}}}
리(李) 왕조: 1009~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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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생년
몰년
왕작
책봉년
비고
현경왕
顯慶王
(미상) ? 1009
(추봉)
태조의 부친.
무위왕
武威王
(미상) ? 1009
(추봉)
태조의 친형.
무도왕
武道王
(미상) ? 1009
(추봉)
현경왕의 동생.
개천왕
開天王
리펏마
李佛瑪
1000
1054
1012 태조의 장남.
개천왕→황제(1028)
개국왕
開國王
리보
李菩
?
1069
1013 태조의 차남.
동정왕
東征王
리륵
李力
?
1038
1018 태조의 3남.
익성왕
翊聖王
(미상) ? ? 태조의 4남?
무덕왕
武德王
(미상) ?
1028
? 태조의 5남?
위명대왕
威明大王
리호앙
李晃
?
1057
1041 태조의 말자.
위명후(1039)→위명왕→대왕(추증)
개황왕
開皇王
리녓똔
李日尊
1023
1072
1033 태종의 장남.
개황왕→황제(1054)
봉건왕
奉乾王
리녓쭝
李日忠
1025
1043
1035 태종의 차남.
명인왕
明仁王
(미상) 1068
?
? 성종의 차남.
명도왕
明道王
리티엔록
李天祿
1132
1132
1132 성종의 장남.
보국왕
保國王
리롱쓰엉
李龍昶
1151
1181
1151 영종의 장남.
현충왕(顯忠王)→황태자(?)→보국왕(1175)
건녕왕
建寧王
리롱민
李龍明
1152
1175
? 영종의 차남.
건정왕
建靖王
리롱호아
李龍華
1152
1175
? 영종의 3남.
건안왕
建安王
리롱득
李龍德
1153
1175
? 영종의 4남.
건강왕
建康王
리롱익
李龍益
1167
1212
? 영종의 5남.
건평왕
建平王
리롱뜨엉
李龍祥
1174
?
? 영종의 7남.
고려 화산군(花山君)
원왕
元王
(미상) ?
1221
? 영종의 아들.
혜문왕(惠文王)→대립황제(1214)→원왕(1216)
지명왕
智明王
(미상) ? ? 종실로 추정되나 불명.
지명왕→지명후(1150)
건국왕
建國王
쩐뜨카인
陳嗣慶
?
1224
1225
(추봉)
쩐 태조의 형.
순류백(順流伯)→창성후(彰誠侯)→건국왕
봉건왕
奉乾王
쩐리에우
陳柳
1211
1251
? 쩐 태종의 형. 책봉 시점 불명.
관내후(關內侯)→봉건왕
}}}}}}}}}
쩐(陳) 왕조: 1225~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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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생년
몰년
왕작
책봉년
비고
홍의대왕
弘毅大王
(미상) (미상) 1225
(추봉)
목조의 손자.
충무대왕
忠武大王
쩐투도
陳守度
1193
1264
1264
(추봉)
홍의대왕의 아들.
건국대왕
建國大王
쩐뜨카인
陳嗣慶
?
1224
1225
(추증)
원조의 장남.
흠명대왕
欽明大王
쩐리에우
陳柳
1211
1251
1236 태종의 형.
문황(文皇, 1225)→회왕(怀王)→안생왕(安生王, 1237)→흠명대왕(추증)
흠천대왕
欽天大王
쩐녓히에우
陳日皎
1225
1268
1226 태종의 동생.
흠천대왕→흠천군왕(1228)
회덕왕
懷德王
쩐바리엣
陳婆列
? ? 태종의 동생.
무성왕
武成王
쩐조안
陳尹
?
?
1256 흠명대왕의 차남.
흥도대왕
興道大王
쩐꾸옥뚜언
陳國峻
1228
1300
1250 흠명대왕의 3남.
흥도왕→대왕(1289)
정국대왕
靖國大王
쩐꾸옥캉
陳國康
1237
1300
? 흠명대왕의 4남.
흥무왕
興武王
쩐꾸옥응히엔
陳國巘
1250?
?
? 흥도대왕의 장남?
흥지왕
興智王
쩐꾸옥히엔
陳國顯
1251?
?
? 흥도대왕의 차남?
흥양왕
興讓王
쩐꾸옥탕
陳國顙
1252
1313
? 흥도대왕의 3남.
흥효왕
興孝王
(미상) ?
1352?
? 흥도대왕의 아들?
문혜왕
文惠王
쩐꽝찌에우
陳光朝
1287
1325
1301 흥양왕의 아들.
정국대왕
靖國大王
쩐꾸옥캉
陳國康
1237
1300
? 태종의 2남.
소명대왕
昭明大王
쩐꽝카이
陳光啓
1241
1294
? 태종의 4남.
평원왕
平原王
쩐냣빈
陳日永
? ? 태종의 5남.
무위왕
武威王
쩐주이
陳維
? ? 태종의 6남.
소도왕
昭道王
쩐꽝쓰엉
陳光昶
? ? 태종의 7남.
소국왕
昭國王
쩐잇딱
陳益稷
1254
1329
? 태종의 8남.
소문왕
昭文王
쩐냣주앗
陳日燏
1255
1330
? 태종의 9남.
명헌왕
明憲王
쩐우엇
陳蔚
? ? 태종의 10남.
인국왕
仁國王
(미상) ? ? 정국대왕의 장남.
문숙왕
文肅王
쩐다오따이
陳道載
? ? 소명대왕의 차남.
무숙왕
武肅王
쩐다오○
陳道▨
? ? 소명대왕의 3남.
위숙왕
威肅王
쩐반빗
陳文璧
? ? 소명대왕의 손자.
위숙후(1294)→위숙공(1301)→위숙왕
좌천대왕
佐天大王
쩐득비엡
陳德詰
1265
1306
? 성종의 차남.
인혜왕
仁惠王
쩐카인이으
陳慶餘
?
1339
? 성종의 양자.
혜무대왕
惠武大王
쩐꾸옥쩐
陳國瑱
1281
1328
? 인종의 차남.
혜무왕→대왕
공정대왕
恭靜大王
쩐응우옌딱
陳元晫
1319
1370
? 명종의 차남.
공정왕→대왕
공정대왕
恭定大王
쩐푸
陳暊
1321
1395
? 명종의 3남.
공정왕→대왕(1367)→황제(1370)→태상황제(1373)
공민왕
恭敏王
쩐응우옌후
陳元煦
?
1347
? 명종의 4남.
공간왕
恭簡王
쩐응우옌탓
陳元石
?
1350
? 명종의 5남.
공숙왕
恭肅王
쩐응우옌죽
陳元昱
1335
1364
? 명종의 6남.
공숙왕→황태백(皇太伯, 1370 추존)
공신왕
恭信王
쩐티엔탓
陳善澤
?
1379
? 명종의 7남.
공선대왕
恭宣大王
쩐낀
陳曔
1337
1377
? 명종의 9남.
공정왕→대왕→황제(1373)
민왕
愍王
쩐응악
陳𩖃
?
1392
? 태상황제의 장남.
장정왕(莊定王)→대왕→민왕(1391)
간정왕
簡定王
쩐응오이
陳頠
1375
1410
? 태상황제의 차남.
소정왕
昭定王
쩐응웅
陳顒
1378
1399
? 태상황제의 3남.
소정왕
창무대왕
彰武大王
쩐비
陳煒
1360
1374
? 예종의 장남.
영덕대왕
靈德大王
쩐히엔
陳晛
1361
1388
? 예종의 차남.
건덕대왕(建德大王)→황제(1377)→영덕왕(1388)
창정왕
彰靖王
쩐응우옌히
陳元翬
?
1390
? 예종의 4남.
인도왕
仁道王
(미상) ? ?
충성왕
忠誠王
(미상) ? ? 인도왕의 아들. 태조의 사위?
인숙왕
仁肅王
쩐또안
陳鑽
? ?
보의왕
保義王
쩐빈쫑
陳平仲
1259
1285
1285
(추봉)
보의후→보의왕
회문왕
懷文王
쩐꾸옥또안
陳國瓚
1267
1285
? 회문후→회문왕
소성왕
昭成王
(미상) ? ?
중성왕
中誠王
(미상) ? ?
혜정왕
惠正王
(미상) ? ?
혜숙대왕
惠肅大王
쩐니엔
陳年
? ? 혜숙왕→대왕
보무왕
保武王
(미상) ? ?
흥효왕
興孝王
(미상) ? ?
정숙왕
正肅王
쩐캄
陳堪
? ?
보위왕
保威王
쩐호안
陳瓛
? ?
공간왕
恭簡王
쩐응우옌탄
陳元晟
? ?
공정왕
恭正王
쩐스히엔
陳師賢
? ?
장정왕
章靖王
쩐응우옌히
陳元熺
? ?
충민왕
忠敏王
쩐응오랑
陳吾郎
? ?
회도왕
懷道王
응우옌논
阮嫩
1160
1229
1215 응우옌 왕조 회도효무대승왕(懷道孝武大勝王)
회도후→회도왕
흥인대왕
興仁大王
풍타추
馮佐周
1191
1241
1223 개국공신.
흥인왕→대왕(1236)
위국대왕
衛國大王
호꾸이리
胡季犛
1336
1407
1388 선충위국대왕(宣忠衛國大王)→흠덕흥렬대왕(欽德興烈大王, 1398)→황제(1400) }}}}}}}}}
호(胡) 왕조: 1400~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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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생년
몰년
왕작
책봉년
비고
위국대왕
衞國大王
호응우옌쯩
胡元澄
1374
1446
1400 장황제의 장남.
위왕(衞王)→위국대왕(1401?)
양왕
梁王
호돈
胡潡
? 1400 장황제의 3남.
신흥군왕
新興郡王
호쯔
胡注
? 1400 장황제의 4남.
보녕대왕
保寧大王
쩐안
陳𭴣
1396
?
1400 쩐 왕조 소제(小帝)
일남군왕
日南郡王
쩐응오이
陳頠
1375
1410
1400 쩐 왕조 간정왕(簡定王)
일남군왕→황제(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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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레(黎) 왕조: 1427~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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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생년
몰년
왕작
책봉년
비고
소효대왕
昭孝大王
레홉
黎學
? 1427
(추봉)
선조의 장남.
홍유왕
弘裕王
레쯔
黎除
? 1556
(추봉)
선조의 차남.
남국공(藍國公) 추봉(1427)→홍유왕
충무대왕
忠武大王
레타익
黎石
?
1421
1427
(추봉)
소효대왕의 아들.
소징왕
昭徵王
레코이
黎魁
? 1556
(추봉)
홍유왕의 장남.
현공왕
顯功王
레캉
黎康
? 1556
(추봉)
홍유왕의 차남.
규국공(葵國公) 추봉(1427)→현공왕
광업왕
光業王
레토
黎壽
? 1556
(추봉)
현공왕의 아들.
장간왕
莊簡王
레주이티에우
黎維紹
? 1556
(추봉)
광업왕의 아들. 영종의 조부.
군왕
郡王
레뜨떼
黎思齊
1401
1472
1429 태조의 장남.
개군공(開郡公, 1428)→국왕(國王, 1429)→군왕(1433)→군애왕(郡哀王) 추증
양산왕
諒山王
레응이전
黎宜民
1439
1460
1440 태종의 장남.
황태자→양산왕→황제(1459)→여덕후(厲德侯) 추증
공왕
恭王
레칵쓰엉
黎克昌
1440
1476
? 태종의 차남.
신평왕(新平王)→공왕(1459)
가왕
嘉王
레뜨타인
黎思誠
1442
1497
? 태종의 4남.
평원왕(平原王)→가왕(1459)→황제(1460)
양왕
梁王
레뚜옌
黎銓
1462
?
? 성종의 차남.
송왕
宋王
레뚱
黎鏦
1464
?
? 성종의 3남.
당왕
唐王
레까오
黎鎬
1466
1493
? 성종의 4남.
건왕
建王
레떤
黎鑌
1466
1502
? 성종의 5남.
건왕→덕종 추존(1517)
복왕
福王
레짠
黎錚
1467
1500
? 성종의 6남.
연왕
演王
레통
黎鏓
1470
?
? 성종의 7남.
광왕
廣王
레따오
黎鐰
1471
?
? 성종의 8남.
임왕
臨王
레뜨엉
黎鏘
1473
?
? 성종의 9남.
응왕
應王
레깐
黎⿰(⿰金昭)
1475
?
? 성종의 10남.
의왕
義王
레찌에우
黎⿰(⿰金耿)
1475
?
? 성종의 11남.
진왕
鎮王
레힌
黎鋞
1476
?
? 성종의 12남.
조왕
肇王
레토안
黎鋑
1477
?
? 성종의 13남.
형왕
荊王
레끼엔
黎鍵
1478
?
? 성종의 14남.
장정대왕
莊定大王
레숭
黎漴
?
1509
? 덕종의 장남.
장정왕→대왕(1510 추증)→명종 추존(1517)
영은왕
靈隱王
레오아인
黎瀠
1495
1516
? 덕종의 차남.
영은왕→황제(1510)
목의왕
穆懿王
레조아인
黎濴
?
1509
? 덕종의 3남.
익공왕
翼恭王
레꾸옌
黎涓
?
1509
? 덕종의 4남.
후택대왕
厚澤大王
레뚜언
黎洵
1482
1512
? 헌종의 장남.
안왕(安王)→대왕(추증)
○왕
○王
레뚜언
黎濬
1488
1510
? 헌종의 차남.
○왕→황제(1505)
통왕
通王
레중
黎溶
? ? 헌종의 4남.
명왕
明王
레찌
黎治
? ? 헌종의 5남.
사왕
思王
레즈엉
黎瀁
? ? 헌종의 6남.
타양왕
陀陽王
레이
黎椅
1506
1527
1522 명종의 장남.
황제(1516)→타양왕(1522)
공왕
恭王
레쑤언
黎椿
1507
1527
? 명종의 차남.
공왕→황제(1522)
숭정왕
崇靖王
(미상) ? ? 종실로 추정되나 불명.
의훈왕
義勳王
응우옌반랑
阮文郎
1435
1513
1513
(추봉)
의군공(義郡公)→의국공(義國公, 1510)→의훈왕
충대왕
忠大王
레티리에우
黎時寮
1647
1723
1723
(추봉)
충군공(忠郡公)→충대왕
안흥왕
安興王
막당중
莫登庸
1483
1541
1527 무천백(武川伯, 1511)→명군공(明郡公, 1519)→인국공(仁國公, 1521)→안흥왕→황제(1527)
완왕
阮王
응우옌푹코앗
阮福濶
1714
1765
1744 효정후(曉正侯)→효군공(曉郡公, 1738)→효국공(曉國公, 1740)→완왕 자칭(1744)
정왕
定王
응우옌푹투언
阮福淳
1754
1777
1744 완왕 계승→태상왕(1776)
신정왕
新政王
응우옌푹즈엉
阮福暘
?
1777
1776 정왕 계승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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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생년
몰년
왕작
책봉년
비고
명강태왕
明康太王
찐끼엠
鄭檢
1503
1570
1570
(추봉)
익군공(翼郡公, 1539)→양국공(諒國公, 1545)→상보 태국공(太國公, 1569)→명강태왕(明康太王)
평안왕
平安王
찐뚱
鄭松
1550
1623
1599 복량후(福良侯, 1550)→장군공(長郡公, 1570)→장국공(長國公, 1571)→평안왕
청왕
淸王
찐짱
鄭梉
1577
1657
1624 평군공(平郡公, 1598)→청군공(淸郡公, 1599)→청국공(淸國公, 1623)→청도왕(淸都王)→청왕(1629)
서왕
西王
찐딱
鄭柞
1606
1682
1652 영군공(榮郡公, 1614)→서군공(西郡公, 1631)→서국공(西國公, 1645)→서정왕(西定王)→서왕(1659)
정왕
定王
찐깐
鄭根
1633
1709
1674 부군공(富郡公, 1656)→의국공(宜國公, 1660)→정남왕(定南王)→정왕(1684)
안왕
安王
찐끄엉
鄭棡
1686
1730
1709 보안후(普安侯, 1700)→보군공(普郡公, 1702)→안국공(安國公, 1703)→안도왕(安都王)→안왕(1714)
전왕
全王
찐장
鄭杠
1711
1761
1730 성국공(盛國公, 1727)→위남왕(威南王)→위왕(威王, 1732)→정왕(貞王, 1793)→전왕→태상왕(1740)
명왕
明王
찐조아인
鄭楹
1720
1767
1740 은국공(恩國公, 1736)→명도왕(明都王)→명왕(1742)
정왕
靖王
찐섬
鄭森
1739
1782
1767 정국공(靖國公, 1758)→정도왕(靖都王)→정왕(1769)
전도왕
奠都王
찐깐
鄭檊
1775
1782
1782 전도왕→공국공(恭國公, 1782)
단왕
端王
찐똥
鄭棕
1763
1786
1782 단남왕(端南王)→단왕(1785)
안도왕
晏都王
찐봉
鄭槰
1749
1791
1786 계군공(桂郡公, 1749)→곤군공(琨郡公, 1782)→안도왕→출가(1787)
후 레 왕조 수여 작위 기준. 찐씨 가문의 자체 칭호는 찐씨 정권 문서 참고. }}}}}}}}}
막(莫) 왕조: 1527~1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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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생년
몰년
왕작
책봉년
비고
신왕
信王
막꾸옛
莫(⿰言厥)
? ? 소조의 차남.
자왕
慈王
막독띤
莫篤信
? ? 소조의 3남.
홍왕
弘王
막찐쭝
莫正中
? ? 태조의 차남.
정왕
定王
막푹선
莫福山
? ? 태조의 3남.
강왕
康王
막년푸
莫仁甫
? ? 태조의 4남.
광왕
廣王
막꽝카이
莫光啟
? ? 태조의 5남.
가왕
嘉王
막다이중
莫大用
? ? 태조의 8남.
영왕
寧王
막푹뜨
莫福滋
1524
1593
? 태종의 차남.
겸태왕
謙太王
막낀디엔
莫敬典
1525
1580
? 태종의 3남.
겸왕→겸태왕(1564 민종 추존)
응왕
應王
막돈니으엉
莫敦讓
1535
1593
? 태종의 7남.
단웅왕
端雄王
막낀지
莫敬止
1
1593
? 겸태왕의 장남.
당안왕(唐安王)→단웅왕→추탈(1564)→웅례공(雄禮公, 1580)→황제(1592)
당안왕
唐安王
막낀푸
莫敬敷
?
?
1564 겸태왕의 3남.
단량공(端亮公)→당안왕
돈후왕
敦厚王
막낀꿍
莫敬恭
?
1625
? 겸태왕의 7남.
돈후공→돈후왕→황제(1593)
위왕
威王
막낀중
莫敬用
1561
1598
? 선종의 아들.
경왕
慶王
막낀코안
莫敬寬
?
1638
? 위왕의 아들.
경왕→황제(1621)
이왕
莅王
막리똔
莫履遜
? ?
흥례왕
興禮王
막꿍
莫珙
? ?
숭안왕
崇安王
막년찌
莫仁智
? ?
부녕왕
扶寧王
막년럿
莫仁栗
? ?
안풍왕
安豐王
막년카인
莫仁慶
? ?
안산왕
安山王
막낀탄
莫敬誠
? ?
장왕
壯王
막낀쯔엉
莫敬章
? ?
차왕
次王
(미상) (미상) ?
안용왕
安勇王
(미상) (미상) ?
만녕왕
萬寧王
(미상) (미상) ?
신왕
信王
(미상) (미상) ?
기산왕
祈山王
(미상) (미상) ?
복왕
福王
(미상) (미상) ?
혜무왕
惠武王
(미상) (미상) ?
서기왕
西岐王
응우옌낀
阮敬
1508
1572
1572
(추봉)
개국공신.
서군공(西郡公)→서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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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이선(西山) 왕조: 1778~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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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생년
몰년
왕작
책봉년
비고
북평왕
北平王
응우옌반후에
阮文惠
1753
1792
1786 태덕제의 동생.
북평왕→황제(1788)
동정왕
東定王
응우옌반르
阮文呂
1754
1787
1786 태덕제의 동생. }}}}}}}}}
응우옌(阮) 왕조: 1802~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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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생년
몰년
왕작
책봉년
비고
낭천군왕
浪川郡王
응우옌우옹
阮汪
?
1558?
1943
(추봉)
조조의 장남.
낭천후(浪川侯)→낭천공(朗川公)→낭천군왕
의흥군왕
義興郡王
응우옌푹케
阮福溪
1589
1646
1831
(추봉)
태조의 10남.
상군공(祥郡公, 1646 추증)→의흥군왕
양양군왕
襄陽郡王
응우옌푹하오
阮福暤
? 1831
(추봉)
흥조의 장남.
국공(1805 추증)→장공(莊公, 1814)→양양군왕
해동군왕
海東郡王
응우옌푹동
阮福晍
?
1777
1831
(추봉)
흥조의 차남.
국공(1805 추증)→위공(威公, 1814)→해동군왕
안변군왕
安邊郡王
응우옌푹먼
阮福旻
?
1783
1831
(추봉)
흥조의 5남.
군공(1775)→의공(毅公, 1805 추증)→안변군왕
통화군왕
通化郡王
응우옌푹디엔
阮福晪
?
1783
1831
(추봉)
흥조의 6남.
국공(1805 추증)→양공(襄公, 1814)→통화군왕
건안왕
建安王
응우옌푸다이
阮福旲
1795
1849
1849
(추봉)
세조의 5남.
건안공(1817)→건안왕
정원군왕
定遠郡王
응우옌푹빈
阮福昞
1797
1863
1863
(추봉)
세조의 6남.
정원공(1817)→정원군왕
연경왕
延慶王
응우옌푹떤
阮福晉
1799
1854
1854
(추봉)
세조의 7남.
연경공(1817)→연경왕
소화군왕
紹化郡王
응우옌푹쩐
阮福昣
1803
1824
1824
(추봉)
세조의 9남.
소화공(1817)→소화군왕
상신군공
常信郡公
응우옌푹꾸
阮福昛
1810
1849
1849
(추봉)
세조의 11남.
상신공(1817)→상신군왕
안경군왕
安慶郡王
응우옌푹꾸앙
阮福㫕
1811
1845
1845
(추봉)
세조의 12남.
안경공(1825)→안경군왕
수춘왕
壽春王
응우옌푹미엔딘
阮福綿定
1810
1886
1874 성조의 3남.
수춘공(1830)→수춘군왕→수춘왕(1878)
영순군왕
寧順郡王
응우옌푹미엔응이
阮福綿宜
1810
1874
1874 성조의 4남.
영순공(1830)→영순군왕
영상군왕
永祥郡王
응우옌푹미엔호아인
阮福綿宏
1811
1835
1835
(추봉)
성조의 5남.
영상공(1830)→영상군왕
부평군왕
富平郡王
응우옌푹미엔아오
阮福綿𡪿
1817
1865
1937
(추봉)
성조의 6남.
부평공(1830)→부평군공(1865)→부평공(1878)→부평군왕
종선왕
從善王
응우옌푹미엔텀
阮福綿
1819
1870
1878
(추봉)
성조의 10남.
종국공(從國公, 1835)→종선공(1854)→종선왕
수리왕
綏理王
응우옌푹미엔찐
阮福綿寊
1820
1897
1878 성조의 11남.
수국공(綏國公, 1839)→수리공(1854)→수리군왕→수리왕(1883)→수리현공(1883)→수리공(1885)→수리군왕(1889)→수리왕(1894)
양안군왕
襄安郡王
응우옌푹미엔브우
阮福綿寶
1820
1854
1878
(추봉)
성조의 12남.
양국공(襄國公, 1839)→양안공(1843)→양안군왕
광녕군왕
廣寧郡王
응우옌푹미엔멋
阮福綿宓
1825
1847
1878
(추봉)
성조의 30남.
영국공(寧國公, 1839)→광녕공(1842)→광녕군왕
화성왕
和盛王
응우옌푹미엔뚜언
阮福綿寯
1827
1907
1899 성조의 37남.
화성군공(1843)→성국공(盛國公, 1885)→화성공(1895)→화성군왕→화성왕(추증)
회덕군왕
懷德郡王
응우옌푹미엔럼
阮福綿㝝
1832
1897
1894 성조의 66남.
회덕군공(1846)→낙국공(樂國公, 1885)→회덕공(1885)→회덕군왕
홍화군왕
弘化郡王
응우옌푹미엔찌엔
阮福綿𡩀
1833
1905
1905
(추봉)
성조의 66남.
조풍군공(肇豐郡公, 1850)→경국공(瓊國公, 1878)→홍화공(1883)→조풍향공(1883)→조풍군공(1885)→경국공(1889)→홍화공(1895)→홍화군왕
금천군왕
錦川郡王
응우옌푹미엔끼
阮福綿寄
1838
1881
1918
(추봉)
성조의 75남.
금천군공(1859)→금국공(錦國公, 1878)→금천군왕
안천왕
安川王
응우옌푹미엔방
阮福綿㝑
1838
1902
1898 성조의 76남.
안천군공(1885)→천국공(川國公, 1885)→안천군공(1892)→천국공(1893)→안천공(1896)→안천군왕→안천왕(추증)
안성왕
安城王
응우옌푹미엔릭
阮福綿𡫯
1841
1919
1908 성조의 78남.
안성군공(1858)→성국공(城國公, 1893)→안성군왕→안성왕(1911)
안풍군왕
安豐郡王
응우옌푹홍바오
阮福洪保
1825
1854
1899
(추봉)
헌조의 장남.
안풍정후(1840)→안풍공(1898 추증)→안풍군왕
태성군왕
泰盛郡王
응우옌푹홍푸
阮福洪付
1830
1890
1897
(추봉)
헌조의 3남.
태국공(泰國公, 1846)→태성공(1878)→태성군왕
서태왕
瑞太王
응우옌푹홍이
阮福洪依
1833
1877
1877
(추봉)
헌조의 4남.
건서공(建瑞公, 1846)→건서군왕(建瑞郡王)→서태왕(1897 성태제 추존)
홍치왕
弘治王
응우옌푹홍또
阮福洪傃
1834
1922
1897 헌조의 6남.
홍치군공(1846)→의국공(宜國公, 1878)→홍치공(1891)→홍치군왕→홍치왕(1922 추증)
가흥왕
嘉興王
응우옌푹홍흐우
阮福洪休
1835
1885
1883 헌조의 8남.
가흥공(1846)→가흥군왕→가흥공(1885)→가흥군왕(1889 추증)→가흥왕(1841)
안복군왕
安福郡王
응우옌푹홍끼엔
阮福洪健
1837
1895
1895
(추봉)
헌조의 10남.
안복군공(1852)→상국공(常國公, 1883)→안복군공(1888)→상국공(1889)→안복공(1891)→안복군왕
수화군왕
綏和郡王
응우옌푹홍쭈옌
阮福洪傳
1837
1889
1889
(추봉)
헌조의 12남.
수화군공(1852)→봉국공(奉國公, 1883)→수국공(綏國公, 1883)→영국공(榮國公, 1883)→수화군공(1888)→영국공(1889)→수화군왕
견태왕
堅太王
응우옌푹홍까이
阮福洪侅
1845
1876
1885
(추봉)
헌조의 26남.
견국공(堅國公, 1865)→견왕→견태왕( 경종 추존)
문랑군왕
文朗郡王
응우옌푹응아이
阮膺𩡤
1847
1883
1909
(추봉)
헌조의 29남.
문랑군공(1865)→낭국공(朗國公, 1878)→황제(1883)→폐위(1883)→문랑군왕
서원군왕
瑞原郡王
응우옌푹응쩐
阮福膺禛
1852
1884
1885
(추봉)
건서군왕의 차남.(익종의 양자.)
춘장공(春長公, 1869)→폐위(1871)→서국공(瑞國公, 1883)→황제(1883)→폐위(1883)→서원군왕
선화왕
宣化王
응우옌푹브우또안
阮福寶巑
1882
1941
1941 공종의 9남.
선화군공(1900)→선화공(1905)→선화군왕→선화왕(추증)
회은왕
懷恩王
응우옌푹브우리엠
阮福寶嵰
1884
1940
1933 공종의 10남.
흥인국공(興仁國公, 1904)→흥인공(1912)→흥인군공(1916)→회은공(1919)→회은군왕→회은왕(추증)
안화군왕
安化郡王
응우옌푹브우뚱
阮福寶𡾼
1886
1900
1943
(추봉)
경종의 차남.
안화공(1917 추증)→안화군왕
부광군왕
扶光郡王
똔텃헌
尊室訢
1854
1944
1944
(추봉)
태종의 후손. 섭정.
부광자(1911)→부광백(1916)→부광후(1928)→부광군공(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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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생년
몰년
왕작
책봉년
비고
보호군왕
保護郡王
앙리 루셀 드 쿠르시
Henri Roussel de Courcy
1827
1887
1885 통킹 원정군 사령관(1885~1886)
부국군왕
扶國郡王
에띠엔 리쇼
Étienne Richaud
1841
1889
1889 인도차이나 총독(1888)
양국군왕
亮國郡王
피에르폴 라인아트
Pierre-Paul Rheinart
1840
1902
1889 인도차이나 총독(1888~1889)
부남왕
扶南王
아르망 루소
Armand Rousseau
1835
1896
1896 인도차이나 총독(1895~1896)
좌국군왕
佐國郡王
리옹 볼로슈
Léon Boulloche
1860
1922
1899 인도차이나 총독대리(1894)
보국왕
輔國王
장 보
Jean Beau
1857
1926
1908 인도차이나 총독(1902~1907)
부남군왕
扶南郡王
알버트 피키에
Albert Picquié
1853
1917
1912 인도차이나 총독(1910~1911)
보남왕
輔南王
알버트피에르 사라우트
Albert-Pierre Sarraut
1872
1962
? 인도차이나 총독(1911~1913, 1917~1919)
택남군왕
澤南郡王
피에르 파스퀴에
Pierre Pasquier
1887
1934
1931 인도차이나 총독(1928~1934)
제남왕
濟南王
장 샤를
Jean Charles
1865
1946
1934 안남 보호령 주찰장관(駐紮長官)
제남공(濟南公)→제남왕
부국왕
扶國王
장 드쿠
Jean Decoux
1884
1963
1943 인도차이나 총독(1940~1945) }}}}}}}}}

7. 유럽

유럽의 황제는 전통적으로 유럽 그 자체였던 로마 제국과의 연계를 증명할 수 있는 정통성이 있어야 했고, 기독교의 보호자로 공인되어야 했다. 즉 한 지역의 지배자가 아닌 유럽과 기독교 세계 전체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칭제 이전까지는 로마 제국신성 로마 제국에만 황제가 존재했다. 또한 마찬가지로 기독교 세계 내에서는 군주라고 하여 무조건 왕으로 칭해진 것이 아니라, 황제나 교황의 승인을 받아야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칭호였다. 봉건제 전통이 유지되고 있던 유럽에서 이란 휘하에 여러 공국, 후국, 백국의 소군주들을 봉건제후로 거느리고 그 자신은 명목상 로마 황제 만을 섬기는 실질적인 최상위 대군주였다. 이런 조건들에 해당되지 않는 나라들은 유럽 내에서는 왕국이 아닌 대공국이나 공국에 머물러야 했다. 예를 들어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웬만한 왕국보다 넓었지만 대공 칭호를 썼고[29] 루스 차르국의 경우도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를 하기 전까지는 본인들은 차르라 칭했지만 서유럽에서는 모스크바 대공으로 취급받았다.

그래서 황족들을 대상으로 왕작을 남발한 동양과는 달리 나폴레옹 등장 이전의 유럽에서는 제국이라 할지라도 휘하에 제후왕을 인정해 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왕이 로마 황제의 휘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개념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영토에서 황제와는 개별적으로 사법권을 행사하고 교회의 수장직을 맡는 권능이 인정되고 있었던 만큼, 왕 칭호를 승인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황제의 영향력을 벗어난 독립국이라고 인정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 특히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 7대 국왕이던 필리프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 플란데런 연합군을 부빈 전투에서 격파하여 황제 오토 4세가 굴욕적인 퇴위를 당하기에 이르자, 왕은 그 자신의 국가 안에서 황제와 사실상 동격이다 라는 의식은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관습적으로 공인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예외적인 사례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차기 황제로 선출된 사람이 즉위하는 로마인의 왕(Rex Romanorum)과 신성 로마 황제 휘하의 제후왕인 보헤미아왕이 있었다. 선거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특성상 당시 보헤미아 공작은 황제를 선출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황제 선거에 출마한 자들은 왕으로의 승작을 약속하며 지지를 얻어내는 일이 잦았기에, 그 결과 황제 휘하의 제후이면서도 예외적으로 왕 칭호를 쓰게 되었다. 물론 합스부르크 왕조 이후로는 황제가 보헤미아 왕을 동군연합으로 겸하게 되어 신성 로마 제국에서 그나마 하나 있던 제후왕 개념도 실질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1701년에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원군을 제공하는 대가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 프리드리히를 '프로이센에서의 왕(König in Preußen)'으로 승격시켰다. 하지만 이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지위라는 점을 명확하게 하고자 제국 밖에 있는 프로이센 공작 지위만 왕으로 승격시켜 제국 내에서의 국왕이 아님을 드러낸 것일 뿐이며, 대외적으로도 프로이센 국왕 칭호를 내세울 수 없었다.[30] 1772년에 폴란드 분할을 통해 프루시 왕령을 합병하고 나서야 대외적으로 프로이센 왕국과 프로이센 국왕(König von Preußen) 칭호를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이 해산될 때까지 제국 내에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외부의 프로이센 국왕을 동군연합으로 겸하고 있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다가 프랑스의 전제 권력을 확보한 나폴레옹이 '프랑스인의 황제'라는 명목으로 스스로 제위에 등극하여 기존 유럽의 군주 질서 체계에 파란을 일으켰고, 1806년에는 라인 동맹을 결성하여 프란츠 2세가 신성 로마 제국을 자진 해산하도록 만들었다. 라인 동맹에서 기존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들은 왕 또는 대공(Großherzog)으로 지위가 바뀌었고, 그 결과 나폴레옹에게 협력한 바이에른·작센·뷔르템베르크 선제후가 왕으로 승격했다. 또한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와 이탈리아 국왕을 겸하면서, 동양의 친왕 작위처럼 자신의 친·인척들을 스페인·홀란트·베스트팔렌·나폴리 등 괴뢰국의 왕으로 책봉했고, 자신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가 태어나자마자 프랑스 황제의 후계자 자격으로 로마왕(Roi de Rome)으로 봉했다. 상술했듯이 신성 로마 제국에서 '로마인의 왕'은 선제후들에 의해 선출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칭호였지만, 나폴레옹은 그런 절차 없이 대놓고 동양의 황태자같이 책봉하면서 칭호의 격까지 높인 것이다.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나폴레옹이 강제로 세워둔 괴뢰국 왕들도 폐위되었으나, 빈 체제 하에서 옛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들은 왕위를 그대로 인정받았고, 베스트팔렌 왕국이 해산되면서 복구된 하노버 선제후국이 왕국으로 승인되었다. 하노버 왕국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다시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되었지만, 바이에른·작센·뷔르템베르크 왕국은 독일 제국 때까지 유지되어 프로이센 국왕이 겸하는 독일 황제에 종속된 제후국으로 남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제후왕은 아니지만 유럽에서 여왕의 남편(국서)에게 주어지는 작위로 King consort가 있다. 여왕왕비를 구분할 때 왕비에게는 Queen 뒤에 consort를 붙이는 것과 똑같다. 여왕은 Queen regnant. 사실 군주인 왕도 엄밀히 따지면 King regnant인데 남성인 왕이 기본값에 가까울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그냥 짧게 King으로 사용될 뿐이다. 다만, King consort라는 작위는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만 사용되었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여왕의 남편의 호칭에 인색한 관계로 그냥 Prince consort의 작위를 주었다. 그마저도 영국은 아예 공동 왕으로 즉위한 펠리페 2세윌리엄 3세, 그리고 앨버트 공을 제외하면 여왕의 남편에게 Prince consort 작위를 주는 것마저 인색했다. 필립 공 역시 Prince consort 작위를 받지 못했을 정도. 여왕의 남편은 한국에서는 부군이나 국서(國壻)로 번역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부군은 여왕의 남편 뿐만 아니라 남의 남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국서는 여왕의 남편/왕의 사위(부마)의 뜻으로 한정된다.

직접적인 명칭이 은 아니지만 유사한 경우로 흔히 왕자라고 번역하는 프린스(Prince)라는 작위는 로마 황제의 칭호인 프린켑스(Princeps)에서 유래한 칭호로 본래는 군주라는 뜻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제후나 왕자들에게 내리는 작위가 된 경우로 이 역시 동양의 친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중국어에서는 서양의 Prince라는 작위를 일괄적으로 모두 친왕이라고 번역한다. 또 동로마 제국 같은 경우 바실레우스 아래에 데스포티스라고 황족에게 사용된 작위가 있었고, 데스포티스는 자신만의 번국을 가질 수 있었다. 모레아 전제군주국이 그 예이다. 동로마 제국의 계승은 동로마의 마지막 황녀와 결혼한 러시아의 차르가 이어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서유럽에선 무관심이었다. 지역군주가 황제를 주장하는 꼴이기 때문. 특히 러시아의 경우 로마 제국 시대에는 크림 반도 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로마의 강역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리고 이 당시는 러시아가 서구화를 외치며 유럽 세계에 편입되지 않았을 때였다.

8. 번역에 관하여

왕작은 군주 칭호 개념인 King으로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왕족 전용 작위인 Prince로 번역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팔왕의 난의 팔왕을 영어로는 보통 Eight Princes라고 번역한다. 다만 유럽도 유럽 대륙 이외의 왕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에 종속된 군주인 '번왕(藩王)'과 같은 개념이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기에, 번왕 또는 제후왕을 무조건 Prince로 번역하지는 않는다.

8.1. 영어로 번역할 때

현재 서양에서 Prince라는 단어는 보통 왕실 구성원의 칭호라는 의미로 쓰이고, 그 서열도 일반적으로 공작(Duke)보다 높거나 유사한 급으로 취급되고 있다. 물론 개별 사례로는 왕족의 의미로 쓰이지 않으며 공작보다도 서열이 낮은 경우가 현존하지만, 그런 경우들에 한정해 'Sovereign Prince'처럼 별도 수식을 붙여야할 만큼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은 아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왕(王)'은 군주의 칭호로 쓰인 것이 극히 일부였고 보통은 황족들을 대상으로 임명한 작위로 여길 수 있기에, 현재는 왕작(王爵)을 어디까지나 왕실 구성원의 칭호로 보는 관점으로 자신들에게 가장 익숙한 개념인 Prince로 번역하는게 일반적이다. 물론 틀린말도 아니기도 하고.

물론 중국에서는 왕작이 황족들에게만 수여된 것은 아니었기에, 이례적으로 등장한 이성(異姓) 제후왕이나 번왕 등의 경우에는 King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고 그대로 Prince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어서 일관되고 있지 않다. 초한전쟁 무렵까지 있던 왕들은 보통 King으로 번역하고, 초한전쟁 이후 유씨 동성제후왕으로 교체된 시점부터는 Prince를 사용한다. 후한 말기에 등장한 위왕(魏王)·한중왕(漢中王) 같은 경우는, 아주 멀지만 어쨌든 황족인 한중왕 또한, 혈연에 따라 세습한 제후가 아닌, 실력으로 쟁취한 것이므로, 모두 King으로 번역하면서 필요에 따라 under the Han dynasty라는 부연 설명을 덧붙인다. 위진남북조시대 또한 마찬가지로 보통 독립적인 세력을 갖추었거나, 앞선 조조처럼 말이 제후왕이지 선양(찬탈)이 가시권일 정도로 권신인 왕들은(사마소, 유유 등) King으로 번역하고, 황족으로서 왕작을 받은 경우에는 Prince로 번역한다. 서진 시대 사마씨 8왕의 난 또한 영어로는 War of the Eight Princes이다. 반면 청나라 초기에 등장한 삼번(三藩)은 정식 작호가 '호쇼이 친왕'이어서 그런지 보통 Prince로 번역된다. 국체(國體)에 따른 번역도 일관되지 않는데, 오초7국의 난 시점의 제후왕들은 Prince로 번역하면서도 제후왕국은 Kingdom으로, 청나라 삼번은 Feudatory로 애매하게 번역된다. 참고로 삼국시대오호십육국시대오대십국시대의 왕조들은 황제를 칭하더라도 모두 Kingdom으로 번역된다.

이런 점들은 인도 제국에 예속된 인도 번왕국에도 유사하게 적용되었는데, 번왕국의 수장들인 '라자(राजा)' 들은 모두 King으로 번역되었지만, 그들의 영지는 Kingdom이 아니라 'Princely state'로 지칭되었다.

8.2. 영어를 번역할 때

먼저 이 문단을 읽기 전에, Prince라는 단어의 뜻이 여럿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어의 Prince, 독일어 Prinz나 Fürst[31] 등을 중국어로 번역할 때 일괄적으로 친왕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 Prince가 정확히 무슨 뜻으로 쓰였느냐에 따라서 왕자나 대공, 공작, 후작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하는데, 중국에서는 그렇게 따지는 게 번거롭다고 여겼는지 모조리 친왕이라고 옮기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유럽 군주국의 왕족들을 중국어로 표기한 것을 보면 조금 황당한 경우도 있는데, 아버지의 칭호도 왕(국왕),[32] 아들의 칭호도 왕(친왕)인 셈. 대표적으로 Prince of Wales의 중국어 번역이 威尔士亲王(웨일스 친왕)이다. 영어로는 King과 Prince가 형태상 확실히 구분되는데, 중국어로는 부자(父子)가 모두 '왕'인 것이다. 다만 대한제국이나 일본제국도 Prince를 친왕으로 King을 황제로 번역한 적은 있었다. 현대 중국에선 독립된 국가의 군주를 일괄적으로 황제로 번역하는데 왕이란 칭호가 황제에게 종속된 존재였던 세월이 너무 길어서 독립된 국가의 왕이란 존재를 상상할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단, 영어 Principality[33]는 '친왕국'이라고 하면 어색해서 잘 안 쓰고 공국(公國)이나 후국(侯國)이라고 쓰되, 군주의 칭호를 '친왕'이라고 번역한다. 그래서 모나코 공국(Principality of Monaco)는 摩納哥公國이나 摩納哥侯國이라고 번역하고, 모나코 공(Prince of Monaco)은 摩納哥親王이라고 하는 식이다.

[1] 근래에 '번왕'은 다른 군주에 예속되어 있으나 어느정도 독자성이 인정되는 경우에 해당되는 어휘로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전근대 중국에서 쓰인 '번왕'은 황제 휘하의 모든 '왕'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였으며, 제왕(諸王)과 유사한 표현이었다. 한나라 이후 중국에서 왕작은 황족을 예우하기 위한 명목상의 봉작으로 쓰인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독자성을 갖는 왕작이 이례적인 사례에 해당된다.[2] 친왕이라는 용어는 북위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남조의 양나라에서는 '정왕(正王)'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친왕 또는 정왕을 세습하는 왕은 왕조마다 부르는 용어가 달랐다가, 수나라 이후부터 '사왕(嗣王)'으로 통일된다. 즉, 친왕에 상대되는 개념은 군왕이 아니라 사왕이라 할 수 있다. 명나라에서 친왕과 사왕을 구분하지 않기 시작하면서 '국왕'이 곧 '친왕'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며, 왕작이 '친왕'과 '군왕'으로 대비되기 시작했다.[3] 조조의 위왕 등극은 공작보다 더 높은 지위를 받은 것이라기 보다는 황족이 아닌 그가 왕위 오른 점에서, 한 고조 유방이 표방한 원칙에 따라 황족만 책봉될 수 있는 왕작을 받는 관례를 무너뜨린 행동으로, 사실상 한나라의 최소한의 틀조차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런 점을 살펴보면 소위 망탁조의에 왕조 교체를 실현한 조비가 아닌 조조가 들어가는 점이나,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당시에 반대여론이 없었던 점, 관우의 북진이나 제갈량의 북벌 당시 위나라 내부에서 적지 않은 세력이 이들에게 호응해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알 수 있다. 유비는 후한 황실과 까마득하게 먼 촌수관계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유방의 후예였고, 유씨만 왕이 될 수 있다는 한나라 예법 상의 명분에도 문제가 없었으므로, 한중왕 자칭을 통해 조조의 대척점을 자처하는 유비의 행보는 반조조파에겐 거부감이 없던 것이다. 실제로 칭제 당시에는 한중왕 때와는 달리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4] 요나라부터 금나라 초기까지는 국왕 작위가 3등급으로 구분되어, 국왕 칭호를 반드시 명기해야하는 경우가 있다.[5] 하술되듯, 명나라에서는 국왕(친왕)과 군왕의 구분이 수월해지면서 별개의 작위로 취급되지 않게 되어, 명나라에 한정하여 군왕은 봉호에 '군'자를 생략하는 것이 원칙이다.[6] 간혹 초나라의 경우 왕호를 인정하는 경우는 초나라를 중화 문명과는 별개의 존재로 취급하여, 단순히 남만 오랑캐의 독자 칭호로 인식했기 때문이다.[7] 조금 세세하게 따지자면, 삼국시대 위나라 초기에 황족의 왕작을 폐지하고 공(公)으로 책봉한 사례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때 손권을 오왕(吳王)으로 책봉했으므로 왕작 자체를 폐지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듬해에 황족을 왕으로 승작시켰다. 아마도 후한 때 제후왕으로 책봉된 구 황족들을 강봉(降封)하고자 이와 같은 절차를 진행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의 왕조는 조비의 선양 사례를 명분으로 삼아, 이미 왕으로 책봉되어 있던 전 왕조의 황족들을 강봉했기에 동일한 이유로 왕작을 폐지한 사례는 없다.[8] 삼국지를 여러 번 읽거나 접해 봤다면 촉에서 분명히 원래는 위나라 땅에 설정되어 있는 사예교위니 행양주자사니 하는 명목상의 관직을 수여한 것을 본 기억이이 있을 것이다. 영가의 난 이후 동진 이래로의 남조 시절에도 5호16국 및 북조에게 잃은 북방 영역에 설정된 관직이 임명된 것이 자주 보인다.(...)[9] 물론 이런 정책이 결과적으로 팔왕의 난이나 정난의 변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기에, 다른 왕조들에서 어째서 제후왕을 허울 뿐인 존재로 두려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반면교사 사례로 남게 되었다.[10] 호쇼이 버이러 8인 중 상위 4인은 '암바(大) 버이러'로 구분되기도 했으므로, 청나라를 선포하면서 왕작 또한 두 종류로 나눠 개편한 것으로 보인다.[11] 순치제 당시까지는 화남 지방을 외번으로 편제하여, 중앙에서 직할하지 않고 간접통치하는 체제를 구상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때문에 청 초기에는 한족 출신의 항장(降將)을 왕으로 책봉한 삼번(三藩)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강희제는 삼번의 철번을 시도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삼번의 난을 진압하면서 중원 전역의 직할통치를 실현시켰다.[12] 고려 초기의 금석문 가운데 고려의 임금을 황제로 지칭한 경우도 종종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대왕으로 명시된 사례도 많기에 그 표현이 일관되지 않으며, 황제보다는 왕으로 지칭한 경우가 훨씬 많은 문제점이 있다.[13] 그 밖에 군주를 지칭하는 순우리말식 표현으로 백제에는 어라하·건길지, 발해에는 가독부라는 단어가 있었음이 확인된다.[14] 심지어 서하나 대리, 베트남 등이 내부적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음에도 중원에서는 그것을 빌미로 침공하려 하지는 않았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외교적 의례나 문서에서는 내부적 연호를 감추고 철저히 상국의 연호를 사용해 통교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국내의 공문서나 금석문 등에만 독자 연호를 표기(혹은 상국의 연호와 병기)하고는 하였다. 아울러, 중원에서 방문한 사신들이 제후국의 종묘나 금석문 등을 둘러보며 설령 그들의 내부적인 연호 사용을 알아차렸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일일이 시비를 걸어 연호 사용을 중단하라 한 사례는 없다. 고려 인종 시기에도 윤언이가 연호 사용을 주청하며 '설령 연호를 사용한다 해도 금이 그것을 빌미로 침공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15] 해당 고명은 《고려사》에도 인용되었다. 이 고명 중 "官分王爵"은 낙랑군왕의 성격이 '왕작(王爵)'임을 명확히 한다. 고명의 본문에는 '낙랑왕(樂浪王)'으로 표기되었으나, 《삼국유사》에서 생략하지 않은 해당 고명의 시행문을 통하여 정식 봉호는 '낙랑군왕'이었음이 파악된다.[16] 〈왕원묘지명〉의 '王'자 부분에 흠집은 있으나 글자 판독에는 무리가 없는 상태이다. 『한국금석문전문』(허흥식, 1984.)에서는 교감을 하지 않고 '正'으로 판독했으나, 『역주 고려묘지명집성』(김용선, 2001.)에선 '王'으로 판독했다. 『한국금석문전문』의 판독을 따르더라도 해당 대목에는 '正'자가 쓰일 수 없는 위치인 만큼 이를 '王'으로 교감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판독문 상의 문제 때문에 고려에서는 왕작이 시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견해들은 '조선국양헌왕'의 봉작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점이 확인된다.[17] 선대가 죽은 뒤 관작을 잇는 것을 의미하지만, 고려와 조선에서는 선대의 봉작을 그대로 세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봉작을 받았다. 때문에 항렬마다 봉호가 다른 경우가 많다.[18] 견훤 또한 고려에 귀순한 직후에 '상보'로 존대받고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받은 점을 보면, 상보이자 낙랑군왕이었던 경순왕과 마찬가지로 왕작을 함께 받았을 것이 유력하나 확인되지는 않는다.[19] 장동익, 2010, 「高麗史의 編纂過程에서 改書」, 『退溪學과 韓國文化』 46,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20] 김기덕, 1997, 「高麗의 諸王制와 皇帝國體制」, 『國史館論叢』 第78輯, 국사편찬위원회, 161~164쪽.[21] 한국사학자들이 실제 사례를 확인하지도 않고 논의하는 것일 뿐으로, 실제 베트남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왕작을 운영한 적이 없었다. 베트남 또한 고려와 마찬가지로 오등작과 별개로 왕작을 시행했으며, 책봉된 공·후를 내부적으로 왕으로 높였던 것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베트남' 문단 참고.[22] 김기덕 교수는 이제현이 고려의 관제가 제후국 체제로 전환된 원 간섭기의 학자라는 이유로 이러한 설명을 평가절하했으나, 이제현이 제후국 관제를 제정한 충선왕 때에 만권당에 소속되어 정책 자문을 맡았던 인물임을 감안하면, 이러한 평가는 당대인의 증언이라는 1차 사료적 가치를 지나치게 무시하는 의견이다.[23] 네이버 지식백과 독립신문 1897년 1월 9일 토요일1897년 7월 31일 토요일 기사.[24] 권기현, 2020, 「8세기 중엽 신라의 對唐關係 -在唐 新羅人 金日晟 墓誌銘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탐구』 第35輯, 367~413쪽.[25] 원나라에서 고려의 지위가 제후국인 점을 들어 내정간섭을 시도하면, 고려에서는 '세조구제'라는 필살기(...)를 통해 고려의 지위가 원나라의 직할령이 아님을 내세우며 이를 막아냈다. 반대로 충혜왕을 쫓아낼 당시에는 오히려 고려에서 원나라 황제의 내정간섭을 촉구하여 폭군을 폐위시켜 달라고 청원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원나라에서는 내부 반란 진압을 위해 고려군을 동원하면서도, 왜구 침략과 같은 고려의 자체적인 사정에 개입하고 싶지 않을 때는 고려를 철저히 외국으로 취급하여 책임을 회피하기도 했다.[26] 위안스카이는 부임 후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직전 중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10년간 조선을 속국으로 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지만, 청일전쟁의 패배와 함께 청의 속국에서 벗어나 안경수 이완용 서재필 등의 주도로 독립을 선언한 독립문을 건립하기에 이른다.[27] 출생연도는 940~951년 사이로 추정된다. 딘보린은 삼남 딘항랑(丁項郎)을 황태자로 책봉했으나, 이에 반발한 딘리엔이 979년에 황태자를 살해했다.[28] 응오 왕조 양평왕(楊平王) 즈엉땀카(楊三哥)의 손자를 입양함.[29] 사실 가톨릭으로 잠시 개종했을때 교황으로부터 왕 칭호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토속 신앙으로 재개종하여 왕 칭호는 다시는 사용하지 않게 된다.[30] 프로이센 공국은 1657년에 벨라우 조약을 통해 폴란드 국왕과 형식적인 봉신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였으나, 폴란드 국왕은 여전히 프루시 왕령(서프로이센)을 소유하여 프루시 왕을 겸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사실상 프로이센 공작 개인의 지위만 왕으로 승격하는 조치였던 것.[31] 남성 왕족 또는 황족의 통칭으로 쓰이는 prince를 독일어에서는 Prinz(프린츠)라고 하며, 제후와 군주의 칭호로서 쓰이는 prince는 Fürst(퓌르스트)라고 한다.[32] 단, 중국어에서 국왕과 관련된 다른 용어들은 황제를 뜻하는 皇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국왕의 칭호는 국왕이라고 쓰지만 그가 속한 왕실은 황가(皇家)라고 표기하는 게 그 예이다. 이것은 서양의 king이 중국인들이 왕(제후로 여겨짐)보다는 황제에 더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런 표기상의 비일관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게다가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홍콩에서는 아예 영국 국왕/여왕을 국황(國皇)/여황(女皇)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홍콩의 실질적인 표준어인 광동어로는 어차피 王과 皇의 발음이 같은데, 이 점도 皇을 애용하는 경향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한편 중국이 국왕을 황제로 변역하는 경향은 역사에서 찾아야 하는데, 중국은 꽤 오랜기간 동안 황제가 지배하다 보니 왕은 그저 황제의 부하 내지 가족이라는 관념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을 알수 있는 사례가 있는데, 중국에서 대장금을 방영할 때 조선왕을 조선 황제라 번역하였다.[33] Prince(의미상 독일어 Fürst에 해당)가 다스리는 나라 또는 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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