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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 삼미 슈퍼스타즈[1] | 삼성 라이온즈 | |
해태 타이거즈[2] | MBC 청룡[3] | OB 베어스[4] | |
[1]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現 키움 히어로즈의 전신 [2] 現 KIA 타이거즈 [3] 現 LG 트윈스 [4] 現 두산 베어스 |
해태 타이거즈 | |||||||||
Haitai Tigers | |||||||||
<colbgcolor=#f01e23><colcolor=#fff> 창단 | 1982년 1월 30일([age(1982-01-30)]주년) | ||||||||
매각 | 2001년 8월 1일([age(2001-08-01)]주년) | ||||||||
모기업 | 해태제과 | ||||||||
법인명 변천 | ㈜해태타이거즈 (1982~2001) | ||||||||
구단명 변천 | 해태 타이거즈 (1982~2001) KIA 타이거즈 (2001~ ) | ||||||||
연고지 | 광주광역시 (1982~2001) | ||||||||
홈구장 | 무등 야구장 (1982~2001)[1] | ||||||||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 (1982~1989)[2] | |||||||||
2군 홈구장 | 무등 야구장 (1988~2001) | ||||||||
페넌트레이스 우승 | 4회[3] 1991, 1993, 1996, 1997 1983 전기, 1988 통합[4] | ||||||||
최종 우승 | 9회 1983,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1996,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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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2년 호남 지방을 연고로 창단해 해태그룹이 운영, 2001년 7월 31일까지 존재했던 KBO 리그 구단이자 KIA 타이거즈의 전신.홈경기를 치르는 핵심 연고지는 광주광역시였고[5] 1989년까지는 광역 연고권에 해당하는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홈경기를 분산 개최했다. 구단의 상징 동물은 호랑이였다.
본 구단은 프로 야구 창설 후 초반 20년간의 반, 즉 1982년 원년부터 2001년 KIA로 변경하기 전까지 19년여 동안 무려 9번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서 9번이나 우승했을 정도로 프로야구의 절대 강자로 꼽혔다. 즉 평균 2년마다 한번씩 우승 반지를 꼈으니 해태를 전설이라 불러도 과장된 말은 아니다. 좁게 본다면 출범 다음 해인 1983년부터 1997년 외환 위기로 해태그룹이 부도가 난 1997년[6]까지 15개 시즌 동안 9회 우승이라는 어마어마한 승률을 자랑한다. 프로 야구가 출범한 1982년 이후 1980, 1990년대 18년 동안 9번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했으니 그 기간 동안 절반은 해태 타이거즈가 한국프로야구의 패권을 잡았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 프로야구 처음 20년간의 화두는 우승 구단이 해태인가, 아닌가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82년부터 2001년 7월 31일까지 해태 타이거즈라는 구단명으로 있다가 현대자동차그룹이 인수한 후 기아 산하에 편입되어 2001년 8월 1일부터 KIA 타이거즈로 변경했다.
무등산 호랑이로 유명했다.
2. 연혁
2.1. 1981년~1982년
캐치프레이즈 | |
1982년 | 야구를 통해 호남인의 긍지를 심자[7] |
한국프로야구를 출범할 당시 기업주의 고향이 호남 출신인 기업 내지는 호남에 연고를 둔 기업 중에서 해태제과를 택해[8] 창단한 구단. KBO에서는 당시 호남 연고 구단 창단을 위해 호남 출신 기업인들이 세운 호남 기반 3대 기업이었던 삼양사[9], 금호그룹[10], 대한교육보험에[11] 프로 야구단 창단을 제안했으나 모조리 거부 당했다.[12]
그렇다고 호남만 빼놓고 프로 야구를 출발할 수는 없었기에 정말 궁여지책으로 호남과 연관 관계가 있는 기업 중에서도 중소기업 수준이었던 해태제과를 선정한 것이다. 그만큼 호남 연고 대기업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해태의 참여가 확정되기 전 광주일보의 김종태 사장은 만에 하나 해태가 단독으로 창단할 능력이 없다면 일본프로야구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경우처럼 전라도민들의 공모 주를 모아 도민 구단을 만들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처음에 지역감정이 심화될까봐 지역연고제를 반대했던 청와대도 그것을 허락했는데, 다른 지역에 하나씩 야구단이 생기는데 호남만 비어 있다면 소외론이 나올수도 있고, 호남 지역민의 정치 관심을 줄이기 위해서라도[13][14] 꼭 구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1981년 10월 28일 동아일보에서 프로 야구 창립 과정이 처음 세상에 공개됐다. 프로 야구 창립 과정에서 호남 연고 구단을 맡기로 지명된 기업은 호남 최대의 기업인 금호그룹이었다. 당시 박인천 금호그룹 회장의 셋째 아들인 박삼구 금호실업 사장이 프로 야구 참여에 대해 긍정적인 뜻을 밝히고 부친이자 그룹 회장인 박인천 회장에게 건의를 하기로 했는데 부친이 고령에 병환이 있어서[15] 말을 못하고 있다가 뉴스를 통해 박인천 회장이 금호의 프로 야구 참여 소식을 알고 화들짝 놀라게 됐다. 프로 야구 창립을 주도하던 인물 중 하나인 이상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의 말에 의하면 보도가 나간 뒤 박성용[16] 금호그룹 부회장이 청와대로 찾아와 금호가 호남 프로 야구단 담당 기업으로 지명된 것이 전두환 대통령의 뜻이냐고 물었고 이상주 수석은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박성용 부회장이 "그러면 우린 빼달라"라고 말해서 사실상 금호의 참여는 물 건너갔다. 프로 야구 참여 거부가 박성용 부회장 본인의 뜻인지[17] 박인천 회장의 뜻인지 둘 다 같은 생각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는 창업주의 상의 없이 아들들이 멋대로 정한 일에 분통을 터뜨려서[18] 불발되었다고 하나 단순히 그 이유 하나만은 아니라는 게 더 합리적이다.
현대, 럭키금성, 대우, 선경 같은 최상위권 재벌은 참여하지 않고[19] 롯데[20], 삼미, 해태 등이 선정되자 삼성은 이런 피래미들과 같이 못 놀겠다고 창단을 포기하려는 걸 억지로 주저앉혔다고 한다.[21][22][23] 해태가 프로 야구에 참여한 건 굉장히 의외인 일이었다. 롯데는 프로 야구 창립 계획서에 '경쟁 대상인 같은 업종은 가급적 피한다'라고 써있는데 왜 해태가 들어오냐며 반대를 했다. 급기야 참여 안 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나중에 알려진 것에 의하면 롯데 신격호 회장이 부산 대신 서울을 연고지로 얻어내려고 강하게 나가기로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한다. 해태를 반대하던 롯데는 결국 추진위원회를 못이기고 부산을 연고로 정했다. 호남 연고가 붕 뜬 상황에서 박건배 회장이 참여 의사를 표력하여 탄생하게 됐는데 이때 해태는 김동엽을 감독으로 선임할 권리를 약속 받는다.[24]
우여곡절 끝에 1982년 1월 30일 해태제과 본사에서 타이거즈는 절대적인 선수 수의 부족으로 창단 당시 6개 구단 중 가장 적은 15명의 선수로 창단식을 치렀다. 실업 야구 시절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대성공을 거둔 김동엽 감독은 자신감에 넘쳤다. 선수는 15명으로도 충분하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해태는 1982년 내내 선수 부족으로 고전했다. 창단당시 해태 엔트리에는 투수로 등록된 선수는 딱 5명. 그중에도 이상윤과 방수원, 최영조는 대학 4학년을 앞두고 중퇴한 선수로 대학중퇴자는 선수로 뛸 수 없는 KBO 규정상 선수 자격에 문제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최악의 경우 투수 3명으로 시즌을 시작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창단식을 강행한 셈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프로팀 입단을 주저하며 혹은 연고지 팀의 지명을 받지 못하며 실업무대에 남아 있던 선수들 중에 서울 출신의 김경훈[25]과 대전 출신의 홍순만을 각각 원래 서울지역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MBC 청룡과 OB 베어스 측에 양해를 얻어 충원했고 시즌 개막 직전 역시 서울 출신인 조충열을 급히 데려오게 된다.
전국을 서울, 인천·경기·강원, 충청, 부산·경남, 대구·경북, 호남 등 6개 권역으로 나누어 각 구단이 각자의 연고지 출신 선수들을 배타적으로 그리고 무제한으로 선발할 수 있게 했던 것이 프로 원년의 규정이었다. 하지만 그 출신 지역의 기준은 본적지나 출생지가 아니라 졸업한 고등학교로 설정되어 있었고[26] 따라서 해태 타이거즈가 뽑을 수 있는 선수는 광주를 포함한 전라남도와[27] 전라북도 지역 내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그 지역 안에서 걸출한 선수를 배출할 만한 학교가 당시로서는 군산상고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28] 이 때문에 후술되는 표처럼 선수단의 절반은 군산상고 출신으로 짜여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금도 그렇지만 1980년대 당시에도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선수라고 하더라도 고등학교는 서울이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서 졸업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호남 지역의 고등학교가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1949년 청룡기 대회에서 김양중이 이끌던 광주서중 이후 1972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의 군산상고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호남 야구의 붐을 타고 그 뒤를 이은 것은 1975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우승한 광주일고와 1977년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우승한 광주상고였다.[29]
1975년과 1977년이 되어서야 전국 무대에서 우승을 다툴만큼 경쟁력이 갖추게 된 호남 지역 고등학교의 졸업생이 프로 무대로 나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왜냐면 프로 야구가 생기기 전까지 야구 선수에게도 선수 생활을 그만두게 될 서른 안팎의 나이부터 직장 생활의 무기가 되어줄 학벌을 챙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장종훈, 이승엽, 장성호 등 고졸 선수들이 성공 신화를 대거 쓰면서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선수로 가는 것이 대세가 되었고 대학 진학은 고등학교 때 드래프트에 실패해 다시 한 번 기회를 얻기 위해 가거나 유사시 체육교사 자격을 얻기 위해 가는 정도가 되었긴 하지만[30]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특기생으로 대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을 만한 실력이 갖춘 선수들의 경우에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로였다.
그리고 특별히 국제대회에 우승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병역특례를 받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당시로서는 운동선수들도 평범한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대학 재학 중에 혹은 대학을 졸업하는 대로 육군(경리단), 공군(성무)이 각각 운영하는 팀으로 입대해 병역을 마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다.[31] 즉, 호남지역 고등학교에서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프로로 오려면 더더욱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도 선수가 부족했던 건 사실이었기에 시즌 개막을 한 후에도 마산 출신의 임정면과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을 앞두고 결성한 국가대표 선수단에서 무단이탈한 김일권을 우여곡절 끝에 영입하여 간신히 21명의 선수단을 구성할 수 있었다.[32] 또한 약속대로 초대 감독으로 김동엽이 선임되었지만 불과 13경기를 치렀을 때 조창수와 유남호 두 코치가 감독의 폭력적인 행동 등을 문제삼으며 구단을 이탈하는 사건이 터졌고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전에 자존심이 상한 김동엽 감독은 5승 8패라는 성적만 남긴 채 스스로 옷을 벗고 구단을 떠나버렸으며, 조창수 코치의 감독 대행 체제로 시즌을 치르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처음부터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한 한국프로야구였지만, 해태는 워낙 선수층이 얇았던 탓에 가끔 지명타자 없이 김성한이 선발투수와 타자의 투잡을 뛰기도 했다. 한 구단이 선수 9명만으로 한 경기를 치른 사례(그러려면 지명타자가 없어야 하고 선수 교체도 없어야 한다)는 한국프로야구에서 딱 두 번 있었으며 전부 원년의 해태가 기록한 것이다.[33] 김성한의 투타겸업이 없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참고로 김성한의 1982년 성적은 투수로서는 10승 5패(7위), 방어율 2.89(6위)였는데 다승과 방어율은 팀내 1위였다. 타자로서는 타율 0.305, 홈런 13개(4위), 타점 69점(1위) 도루 10개였다. 둘 중 하나에 더 전념했더라면 더 좋은 성적을 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34]
1982년 원년 멤버[35] | |
투수 (5명) | 강만식 김용남 방수원 신태중 이상윤 |
포수 (3명) | 김경훈 박전섭 홍순만 |
내야수 (6명) | 김봉연(주장) 차영화 최영조 조충열 임정면 차정득 |
외야수 (5명) | 김우근 김일권 김종모 김준환 김종윤 |
투타겸업 (1명) | 김성한 |
출신 고교별 원년 멤버 현황 | |
군산상고 (9명) |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우근 김종윤 김용남 김성한 박전섭 차정득 |
광주일고 (4명) | 강만식 차영화 이상윤 방수원 |
광주상고 (2명) | 김종모 최영조 |
기타 고교 (5명) | 김경훈(신일고) 조충열(선린상고) 신태중(전남고) 홍순만(대전고) 임정면(마산상고) |
선수층은 양적 기준으로 타 구단보다 허약해 보였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선수 개개인 수준이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투수에 김용남, 이상윤은 국가대표 출신에 강만식, 방수원도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이름 좀 날리던 투수였다. 야수 중에서도 김봉연은 실업 야구계를 평정하던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이자 원년 연봉 1위였고[36] 김성한, 김종모, 김준환에 뒤늦게 합류하는 김일권도 국가대표로 잘 뽑히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소수정예로 원년 리그를 보낸 셈이다. 이름과 달리 스타 선수 하나 없다고 감독이 푸념할 정도로 약체였던 삼미 슈퍼스타즈보다 더 얇은 선수층으로도 어째서 4위를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2. 1983년~1985년
캐치프레이즈 | |
1983년~2001년 | 꿈을 심는 해태! 용맹스런 타이거즈![37] |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제 5편 왕조(2020.02.13) 이 문서를 보면서 같이 보는 것을 추천한다.
1983년 미국에서 야구 유학[38]을 마치고 돌아온 김응용 감독이 4,800만원의 계약금과 연봉을 합친 금액에 부대조건으로 승용차 한대를 받고 해태 2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대대적인 팀 개편에 들어갔다. 먼저 조창수와 유남호를 필두로 한 기존의 코치진에 군산상고 감독 출신 백기성을 영입해 코칭스태프를 강화했다. 그 외에도 부족했던 선수를 보강하기 위해 삼성에서 벤치로 밀려나있던 서정환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했고[39] 재일교포 선수인 포수 김무종과 언더스로 투수 주동식을 영입해 팀의 약점인 배터리를 든든하게 했다.
1983년부터 재일동포를 비롯해 해외에서 뛰고 있는 해외파 선수에 대한 영입이 시작되었는데 해태 구단은 영입 작업에 진통이 있었다. 가장 먼저 점찍은 것은 멕시코에서 뛰고 있던 이원국이었지만 결국 계약금과 연봉에 이견을 좁히지 못했던 것이다. 계약금과 연봉 을 합해 7,400만원 그리고 15승을 넘을 경우 2,000만원의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이원국이 요구한 것은 기본 1억 2,000만원에 20승을 넘기거나 평균자책점 2.0 이하의 성적을 낼 경우 추가로 1500만원씩의 인센티브를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 나이가 많아 얼마나 오래 선수 생활을 할지 모르는 선수에게 그렇게 큰 돈을 쓸 수 없다며 영입을 최종적으로 포기한다. 대신 잡은 선수는 주동식이었다. 나이는 이원국보다 한 살 많고 장명부보다 기록이 한참 처졌지만 계약금과 연봉을 합해 7천만 원만 투자하면 부담없는 선택이라는 매력이 있었다. 1억 4,500만원으로 삼미로 간 장명부의 절반도 안되는 액수였다.
물론 1982년 실업 야구 최우수 신인 투수상을 받은 박동경과 최우수 신인 타자상을 받은 양승호에게 계약금과 연봉 각 1200만원을 주고 영입한 것을 비롯해 원년에는 단 한 명도 없었던 왼손타자 송일섭과 김일환을 영입하는 등 10명의 선수들을 충원하긴 했다. 하지만 국가대표와 해외파에서 눈에 띌 만한 재목을 끌어오지 못한 해태 타이거즈의 행보는 누가 보기에도 초라했고 사실상 가장 유력한 꼴찌후보로 지목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 1983년 들어 해태는 시즌 전 하위권 전력이라던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부임 첫 해에 팀을 전기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는데 6월 초까지 장명부를 앞세운 삼미와 1위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했고 2.5게임차로 뒤진 가운데 6월 7일부터 열린 광주 3연전 맞대결을 싹쓸이하며 단독 1위로 올라섰다.[40] 그리고 마침내 6월 24일 삼미가 OB에게 패하면서 해태는 남은 경기와 관계없이 한국시리즈 직행을 확정 짓게 되었다.
바야흐로 타이거즈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한편 김응용 감독은 스파르타식 훈련을 앞세운 전임 감독과는 정반대로 팀 훈련 외 시간은 철저하게 선수들의 자율에 맡겼다. 단체 훈련도 하루 3시간을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 1983년 6월 25일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김응룡 감독은 "프로 선수에겐 결점 보완의 처방만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훈련은 각자가 하는 거지요"라고 밝혔다.[41][42]
여기에는 원년과 달리 막강해진 마운드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이상윤이 20승을 거두는 활약으로 에이스로 거듭났고 기존의 김용남(13승)과 강만식(6승)도 호투하며 힘을 보탰다. 거기다 일본프로야구 출신의 김무종은 당시 국내의 어떤 포수들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안정적이고 지능적인 투수 리드를 선보이면서 투수력의 전반적인 향상을 이끌어 냈다. 김일권으로 시작해 김성한, 김봉연, 김종모, 김준환 등으로 줄줄이 이어지는 타선의 힘은 한층 강해져 전기리그 1위를 기록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윘다.
투타가 완벽하게 조화가 이룬 해태는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1승 2세이브를 따낸 이상윤과 5경기 8타점을 기록한 한국시리즈 MVP를 받은 김봉연의 활약으로 후기리그 우승팀인 MBC 청룡을 4승 1무로 압살하고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43]
그러나 역사적인 첫 우승 이후에도 선수단에 대한 연봉 처우는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이에 대해 극도로 폭발한 선수단의 불만이 1984 시즌 내내 악재로 작용하면서[44] 그해 종합 순위 5위에 그쳤고[45] 1985년은 에이스 이상윤의 부상 공백으로 투수력에 애를 먹으면서 종합 3위에 머물게 된다.[46]
2.3. 1986년~1989년
우승 9회라는 전대미문의 대기록을 세운 해태의 상징 검빨유니폼. |
1986년부터는 해태 왕조의 신화가 본격적으로 막을 연 시즌이다.
이때 해태는 팀 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내부적으로 코칭스태프에 김인식 전 동국대 감독, 재일교포 박정일 코치를 영입했고 OB와의 트레이드로 국가대표 3루수 한대화를 라인업에 더하게 되었다. 1986년은 해태에 우수한 신인 선수들이 합류한 시즌이기도 했다. 차동철(광주일고, 건국대)과 까치 김정수(광주진흥고, 연세대), 장채근(광주상고, 성균관대), 이건열(군산상고, 동국대), 신동수(광주상고) 등이 이 시즌에 한꺼번에 팀에 합류했다. 이전까지 고질적인 선수부족에 시달렸던 해태 입장에서 좋은 선수들의 대거 가세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다.[47]
실제로 차동철은 데뷔 첫 해 10승을 따내며 마운드에 큰 힘이 됐고 김정수는 정규 시즌 9승에 그쳤지만 1986년 한국시리즈 3승을 혼자 쓸어 담으며 시리즈 MVP에 오르기도 했다 여기에 2년차에 접어든 선동열이 무려 24승에다가 불멸의 기록인 0.99의 평균 자책을 기록하며 역대 투수 최고의 시즌을 보냈고 부상에 신음하던 원조 에이스 이상윤도 10승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이해 해태 마운드의 시즌 팀 평균 자책은 2.86으로 투수진 전체가 에이스급 성적을 낸 것과 다름없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단 둘뿐인 대기록을 세웠다.[48][49]
참고로 1986 시즌 우승에는 그해 변경된 규정의 덕을 좀 봤다. 전해 시즌인 1985년 삼성 라이온즈가 전후기를 전부 싹쓸이하면서 한국시리즈를 소멸 시키는 통합 우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흥행 참패를 하자 KBO는 전후기 모두 2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전후기 중 한 번만 2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플레이오프를 거치는 방식으로 포스트시즌 규정을 변경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전후기 모두 2위를 한 해태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전기 1위인 삼성 라이온즈와 후기 1위인 OB 베어스는 플레이오프로 밀려나게 된다. 하지만 규정 변경이 없었다면 해태 타이거즈의 페넌트 레이스 전략도 당연히 바뀌었을테니 반드시 해태가 규정 변경 덕을 봤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당시 후기리그가 끝난 후 해태와 OB는 동률로 공동 1위였다. 그런데 당시는 동률인 경우 3전 2선승제로 순위결정전을 치르게 되어 있었고, 포스트시즌 대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후기리그 우승결정전을 치렀다. 여기서 해태가 져서 2위. 전후기 통합승률은 70승 1무 37패를 마크한 삼성이 653으로 1위, 67승 4무 37패를 기록한 해태가 644로 2위였지만 이 규정 때문에 삼성은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해태는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해태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결국 삼성과 OB는 플레이오프 끝에 삼성이 이기고 체력을 비축해 놓은 해태가 그 삼성을 잡고 통산 2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86에 대해서는 해태 팬들도 말이 많다. 87이면 모를까 아싸리 단일리그해도 선동열의 힘이 장난이 아닌지라...
1986~89 시즌 해태의 페넌트레이스 성적을 보면(괄호 안은 통합 승률 순위)
1986 시즌 67승 4무 37패 .644(2위) (1위: 삼성 라이온즈 70승 1무 37패 .654)
1987 시즌 55승 3무 48패 .532(2위) (1위: 삼성 라이온즈 64승 44패 .593)
1988 시즌 68승 2무 38패 .642(1위)
1989 시즌 65승 4무 51패 .558(2위) (1위: 빙그레 이글스 71승 3무 46패 .604)
즉 16승 투수 둘(선동열, 이상윤), 30홈런(김성한), 26홈런(장채근)으로 56홈런을 합작한 슬러거를 앞세운, 팀 타율도 .283으로 압도적이었던 1988년만 절대적으로 리그를 지배했을 뿐 나머지 시즌에서 해태는 강팀 수준일 뿐 리그를 지배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4년 연속으로 우승을 달성한 것은 어찌보면 대단한 일인 셈.
1986 시즌엔 전, 후기 규정이 있는 데다 투타를 보면 삼성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수준이었다. 방어율, 실점은 비슷했으며 타율은 삼성이 무려 1푼 5리나 앞섰고 나머지 타격지표는 삼성의 우위지만 홈런은 해태가 25개나 많이 쳤다. 말 그대로 단일 시즌으로 시즌을 치렀다면 비슷하지만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 거기다 제일 중요한건 86 해태가 대 삼성전에서 11승 1무 6패로 다소 강했다는 점이다.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은 향후 두 팀의 운명을 가른 명승부였다.
삼성은 천하의 선동열을 상대로 김성래가 7회 홈런을 쳐내며 2대0으로 앞서갔다. 하지만 해태 타선은 삼성 에이스 김시진이 등판한 8회 뒤늦게 폭발했다. 8회말 김봉연의 적시타로 1점을 만회한 뒤 1 대 3으로 뒤진 9회말에 김일권의 1타점 3루타와 만루에서 나온 김성한의 밀어내기 몸에 맞는 공으로 극적인 동점에 성공했다. 그리고 11회 말 2사 2루에서 김성한의 끝내기 중전 안타가 터지면서 4시간 9분 간의 혈투가 끝이 났다. 삼성으로서는 에이스 김시진믈 투입하고도 당한 패배라서 아픔이 두 배였다.
하지만 1987년의 경우 다윗과 골리앗 수준이었다. 1987년의 삼성은 팀 타율 3할을 기록했으며 23승의 다승왕 김시진까지 건재한, 말 그대로 그 다음해의 해태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팀이었다. 해태는 2위권에서 아슬아슬하게 치고받는 수준에다 주전의 줄부진 내지는 부상 때문에 팀타율 .252의 빈타까지 겹쳤다. 하지만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만나 4승 무패로 완벽한 우승을 차지했다. 고비 때마다 홈런을 터뜨린 김준환이 시리즈 MVP가 됐다.[50] 명실상부한 '왕조'를 세우는 해가 되었다. 참고로 1987년 한국시리즈 우승은 광주에서 거둔 유일한 우승이며 해태-KIA의 나머지 우승은 원정구장 또는 중립 구장(잠실)에서 대부분 했다.
이렇듯 정규 시즌에서 롯데 자이언츠보다 8승을 더 거두고도 한국시리즈조차 나가지 못한 1984년의 OB 베어스, 1986년에도 한국시리즈에 나가지 못한 OB 베어스, 통합 우승을 거두고도 해태 타이거즈에게 작살난 1987의 삼성 라이온즈가 겹치며 1989년부터는 아예 전ㆍ후기리그 제도를 폐지하고 단일 시즌의 체제로 나가게 된다.
1988~1989년에는 상대가 삼성 대신 빙그레로 바뀌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98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문희수가 눈부신 호투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198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박철우가 맹타를 휘둘러 각각 시리즈 MVP에 올랐다.
1989년은 빙그레 이글스보다 사실상의 전력은 조금 약해 보였다. 물론 기존의 선동열에 이강철, 조계현이 가세한 투수진은 이상군, 한희민의 빙그레와도 막상막하였지만 타선이 그해 홈런왕을 차지하면서 최초로 20-20을 달성한 김성한, 이해 제2의 코끼리로 등극하며 .318을 찍은 박철우 이외에는 믿을 만한 타자가 별로 없었다. 반면 빙그레는 이정훈, 이강돈, 장종훈에 말년의 유승안마저 타점왕에 홈런 2위를 달성한, 그야말로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절정을 찍던 시기였다. 하지만 오히려 4승 1패로 빙그레를 압도하면서 4연패를 이뤄내고 만다.
이러한 4년 연속 우승에는 선동열, 이상윤 등을 중심으로하는 강력한 마운드와 방수원[51], 신동수, 김정수 등이 중심인 불펜진, 김봉연, 김성한, 한대화, 김종모, 이순철 등으로 구축된 공포의 타선, 그리고 뛰어난 용병술과 팀 장악력, 카리스마를 발휘한 김응용 감독의 수완이 절묘하게 맞물려 이뤄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당시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인기팀으로 성장했다.
2.4. 1990년~1997년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해태의 강력함은 변함없었다. 1990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3연패로 물러나며 한 해를 쉰 해태는 1991, 1993, 1996, 1997년 네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마운드에는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임창용, 야수진에는 이종범과1992 시즌은 빙그레가 워낙 전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해태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그 상황에서 1992년 4월 11일 OB전에 선동열이 무리한 투구[52]를 하다가 건초염 부상을 입게 된 이후로 투수진의 뎁스가 얇아지게 되면서 더욱 불리해진 것이다. 1992년 6월 12일 해태가 롯데전에서 승리하고 빙그레가 OB전에서 패배하며 잠깐 1위를 탈환하기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고, 그 이후로는 줄곧 2등에 머물렀다. 결국 역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빙그레를 12승 6패로 압도하고도 중하위권 팀에게 열세를 보이며 페넌트레이스 우승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포스트시즌에서는 2승 3패로 롯데에게 패하였다.
1993년의 해태는 전해 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게 통한의 패배를 씻고 완전히 다른 팀으로 바뀌어서 91년 수준의 압도적인 팀으로 변했다. 투-타에서 이대진, 이종범이 들어오고, 선동열이 92년 부상에서 완쾌되면서 93년 중무리역할을 했다. 특히 이 시기는 92년의 타격 몰빵 팀에서 벨런스 팀으로 변모하는데 성공한 시즌이기도 하다. 이종범의 젊은 혈기와 홍현우, 한대화, 이순철의 괜찮은 장타력을 기반으로 한 타선의 힘이 여전한 상황에서 조계현-이강철-김정수-송유석-이대진으로 이어지는 훌륭한 선발진을 바탕으로 81승3무42패로 91년의 승률을 넘어서는데 성공한 것이다.[53] 특히 이 시즌에 10승 투수가 앞에 나온 5명은 당연하거니와 마무리였던 선동열도 10승을 찍은덕에 무려 6명에 달했고 이 기록은 24시즌이 시작된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즉, 이시기 해태의 투수진은 르네상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93년 한국시리즈는 그것의 백미였다. 비록 해태가 정규 시즌은 압도적이었어도, 그해 삼성한테는 7승11패로 좀 약했던 덕에 "이번에는 삼성이 드디어 해태를 깰 수 있는 건가?"라는 얘기가 나왔으나, 해태는 자신들이 왜 해태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자세한 상황은 1993년 한국시리즈 참조.
1994 시즌은 개막전에서 응원가를 발표하는 등 의욕적으로 시작했다. 타자 쪽에서는 이종범이 그야말로 리그를 지배했으나 김성한, 이순철의 노쇠화와 한대화의 LG 이적에 따른 공백을 이종범 혼자 메우기는 역부족이었다. 투수 쪽에서는 조계현이 18승으로 2년 연속 다승왕에 오르고 이강철도 6년 연속 10승-100탈삼진 이상을 기록하며 분전했지만, 국보급 투수 선동열의 부진이 치명적이었다. 5월 한때 팀 자체 최다연승 타이인 12연승을 기록하며 선두권을 위협하기도 했지만, 그 해 팀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강의 압도적 기량을 선보인 LG 트윈스를 넘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한화 이글스와 공동 3위로 정규시즌을 마친 후 팀 사상 처음으로 준플레이오프를 치렀지만, 과거 한국시리즈에서 3번이나 털었던 한화에게 2연패로 패퇴하여 시즌을 마감했다.
이후 1995 시즌은 상당히 치욕적으로 마감했는데 85년 이후 10년만에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한 것이다. 다만 순위 자체는 4위였는데 왜 포스트시즌을 못 갔냐면 당시 KBO에는 3-4위 격차가 3.5게임 이상이면 준플레이오프를 생략한다는 이해하기 힘든 룰이 있었기 때문이다.[54] 당시 3위였던 롯데와의 승차가 4.5 게임차라 준플레이오프를 열 수가 없었던 것.[55] 특히 1995 시즌 이후 또다른 위기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선동열과 김성한이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벗게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선동열은 선수로서 주니치 드래곤스로 이적했고, 김성한은 은퇴를 선언한 뒤 코치 연수생으로서 주니치 드래곤스로 일종의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러자 당연히도 1993년 이후 두해 연속 4위권에 머물며 부진(?)했던 해태 타이거즈를 향한 우려의 시선은 한층 깊어졌다.[56] 94~5시즌 들어 확실히 뒷걸음치는 것으로 보이던 해태의 전력에서 80년대와 90년대 전반부를 통틀어 해태 타이거즈 투수와 타자를 상징했던 두 사람의 이름까지 빼고 보면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하위권으로 떨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야구 전문가들을 설문해 시즌 판도를 예상하던 언론들의 해태에 대한 전망도 그리 좋지 못했다. 1996년 봄에 나온 언론들의 2강, 4중, 2약의 전망에서 해태가 쌍방울과 함께 2약에 머문 것이다.[57] 그런 상황에서 해태가 기대하는 것은 1996년에 입단할 예정인 두 명의 걸출한 신인들인 박재홍과 김동호였다. 우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92년에 일찌감치 1차 지명으로 찍어 놓았고 일단 대학부터 다녀오라고 해태 측에서 권유해서 연세대로 진학했던[58] 국가대표 외야수 박재홍이 졸업하는 해가 96년이었고 계명대에 진학 중이던 오른손 정통파 투수 김동호는 96시즌 1차 지명자였다. 이들이 온다면 선동열과 김성한의 공백도 어느정도 메꿔볼 만 했겠지만 프로야구판에 진출하려던 현대그룹이 현대 피닉스라는 공룡 실업 구단을 만들며 이 판을 뒤집어 엎어버린다.
현대 피닉스는 무시무시한 자금력을 동원해 그해 고교와 대학을 졸업하던 선수들을 훓어갔고[59] 박재홍과 김동호 역시 여기에 걸려버리며 돈이 없던 해태는 이들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60] 거기다 당시 연고지 출신 고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세 명씩 지명할 수 있게 했던 고졸 우선 지명에서 골라냈던 세 명의 선수들 중에서도 서재응과 김상훈 두 명이 대학행을 선언하며 그나마 진흥고의 김상진이 합류한 것을 빼면 사실상 보충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61] 기둥 두개를 들어냈지만 새로 쓸 재목은 아직 베지 못한 형국. 타이거즈가 그렇게 앞뒤로 막히고 몰린 상황에서 맞이한 것이 1996 시즌이었다.[62]
이 상황에서 선수진의 구심점을 맡아준 것이 이순철이었다. 1985년 선동열과 함께 입단해 그해 신인왕을 차지한 데 이어 세 차례나 도루왕에 올랐던, 그리고 역사상 최고의 외야수비 능력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는 대 선수이자 해태 왕조시대를 이끌어간 또 한 명의 주역이었던 그는 그 무렵 후배 선수들에게 선동열, 김성한이 없다고 우승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허깨비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며 결속을 다지고자 했다.
특히 이순철의 이 생각은 모든 선수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고 그에 따라 혈압 올리면서까지 집중해야할 버거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즉, 1996~7년의 연속 우승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이시기에 젊은 선수들이 기대보다 빠르게 성장하며 선동열과 김성한의 공백을 완벽히 메꿔주었던 것도 주목할만 하다.
특히 이들 중 가장 인상깊은 대상은 단연 이종범이었다. 이종범은 프로팀에 입단하기 전 부터 아마추어 야구를 평정한 국가대표 유격수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입단 첫해였던 1993년에도 신인왕 경쟁에서는 0.341의 타율에 23개의 홈런을 날리며 프로 야구사에서 처음으로 괴물 신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삼성의 양준혁에 밀리긴 했지만 0.280의 타율에 16개의 홈런 73개의 도루를 기록한데 이어 한국시리즈 MVP 까지 휩쓸며 아마추어 시절의 기대를 넘어서는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이종범은 2년차였던 1994년에 제대로 폭발했다. 그해 이종범은 무려 196개의 안타와 19개의 홈런을 쳐내며 .393의 타율을 기록했고 동시에 도루를 84개나 성공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한 시즌 최다 도루 부분에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통산 최다기록이며[63] 타율 역시 원년 백인천에 이은 역대 두 번째 고타율이었다. 19개의 홈런도 그해 홈런왕 김기태의 25개에 6개가 뒤지는 것이긴 하지만 경이로운 수준의 타율과 도루를 기록한 타자가 동시에 만들어낸 수치라는 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충격적인 요소였다. 그해 이종범의 타율이 워낙 높아서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1994년도 투고타저의 시기-3할 타자가 고작 8명에, 2위가 .323로 무려 7푼! 차이다-였다. 그리고 이어진 세 시즌 동안 3할 3푼대의 타율과 60개 안팎의 도루를 유지하면서도 1996년에는 박재홍, 1997년에는 이승엽과 끈질기게 홈런왕 경쟁을 벌이며 각각 25개와 30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재차 삼차 그리고 좀더 높은 수준에서 그런 능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타선에선 이종범이라는 거대한 신성이 등장했다면 마운드에서는 신구의 조화가 이루어지며 이전의 명성을 유지해갔다. 당장 선동열의 대를 이어 에이스 자리를 맡아준 것은 조계현이었다. 선배 선동열보다는 롯데의 최동원을 더 닮은 듯 싸움닭이라고 불릴 정도로 근성있는 승부를 즐기던 그는 90년대 들어 완숙미를 더한 모습으로 정점에 올랐다. 1993년과 1994넌에는 17승과 18승을 기록하며 다승왕에 1995년에는 1.71의 기록으로 평균자책점왕에 등극하며 리그 최강의 선발투수로 인정 받게 되었던것이다. 그 조계현에게 1996년은 에이스급 활약을 보여준 전성기의 마지막 해가 되고 말았지만 무려 11경기를 완투하는 등 191.2이닝 을 평균자책점 2.07로 버티며 16승을 올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아주었다.
조계현이 1차적으로 마운드의 중심을 잡아줬다면 1989년 데뷔 이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두 자릿수 승리를 올려준 이강철이 뒤를 받쳐줬다. 물론 첫 4년 동안처럼 해마다 200이닝 안팎을 감당하며 15승 이상을 기록하는 놀라운 페이스는 아니었지만 5년차였던 1993년 이후로도 그는 기복 없이 해마다 150이닝 이상을 던지며 2점대 중반에서 3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과 두 자릿수 승리를 이어가며 조계현의 부담을 덜어줬다. 조계현과 이강철이 선동열이 있으나 없으나 한결같은 활약을 해준 반면 약진하며 선동열의 빈틈을 메워준 신진 에이스는 이대진이었다. 입단 첫 해부터 상대 팀 에이스들을 차례로 굴복시키며 전 구단 상대 승리 투수가 되는 심상치 않은 내력 속에 10승을 올리며 실한 떡잎을 보였던 이대진은 방위복무를 마치고 제대로 발을 들은 1995년부터 에이스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95년에 2점대 중반의 평균자책점으로 14승을 올리며 조계현에 이어 2선발급으로 부상한 그는 이듬해인 1996년에 16승을 올리며 조계현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다시 1997 시즌엔 다시 17승으로 하며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리고 조계현과 이강철 그리고 이대진이 이룬 삼각편대에 더해 고졸 우선 지명으로 합류한 김상진이 예상밖의 힘이 되어주었다. 김상진은 묵직한 직구를 주무기로 삼아 입단 첫 해였던 1996년과 이듬해인 1997년에 각각 9승씩을 거두며 바로 몇해 전 이대진이 보여 주었던 것과 닮은 출발을 보였다. 이 행보를 본다면 김상진이 또 한 명의 이대진이 되줄것은 너무나도 확실해 보였고 이들을 주축으로 이전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빈자리를 말끔히 채워 넣을 2세대가 형성되는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96년이 되면 2약으로 분류되었는데도 연속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강력했던 무적 해태의 전설이 어떻게 가능했을지 궁금해질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면 우선 1980년대 이후 호남 지역의 아마추어 야구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것을 들 수 있다. 광주일고, 광주상고, 군산상고 등 호남권 학교에서 매년 마다 전국 최정상권의 우수 선수가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해태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1차 지명을 통해 즉시 전력감의 유망주를 꾸준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특히 안그래도 아마리그를 씹어먹던 신인들은 우승경험이 있는 좋은 선배들을 보고 배우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기량이 향상됐다. 거기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랑한 김응용 감독의 지도력이 더해지며 저마다 개성이 강한 해태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하나의 팀으로 뭉칠 수 있었다. 또한 매년 코치진을 갈아 버리는 몇몇 팀과 달리 해태는 코치진에 큰 변화가 없었기에 지도 방식에도 연속성과 일관성이 있었고 코칭스태프의 지도력이 흔들리는 일도 생기지 않았다. 이것이 해태 전설의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러한 강력한 위계질서는 코칭스태프뿐만 아니라 선수단 내에서도 존재했다. MBC, 해태. 빙그레 등 세팀을 경험한 유승안은 해태는 선후배 간 위계질서가 광장히 엄격한 팀이었으며 심지어 1년 차 선후배 간에도 위계가 분명했다고 밝혔다. 다만 역시 해태 선수였던 신동수는 위계질서가 나쁘게 작용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해태에서는 팀에 확실한 구심점을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차동철 역시 투수조는 선동열을 중심으로 타자 쪽에서는 김일권 김봉연 김준환 등 고참들을 중심으로 구심점이 형성되어 선수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고 큰 경기에서 더욱 강한 힘을 발휘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구심점의 존재는 해태 특유의 끈끈하고 강인한 팀 분위기로 이어졌다.[64]
다소 역설적이지만 해태가 짠돌이 구단이었던 것도 한국시리즈에서 선수들이 힘을 발휘한 원동력이었다. 연봉에 대한 개념이 처음부터 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버티는 곳이었던 해태에서 그나마 선수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은 한국시리즈 우승밖에 없었다. 어느 한 인터뷰에서 김응용 감독은 연봉이 워낙 짜다 보니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통해 보너스를 받으려는 열망이 컸다고 회고했고 유승안 감독은 같은 보너스라도 해태에서 주는 천만 원과 빙그레에서 주는 천만 원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고 밝혔다. 좀 과장하면 해태 선수들은 그 천만 원을 1억으로 보는 반면 삼성이나 빙그레 선수들은 백만 원 쯤으로 봤다고 보면 된다. 해태 선수들은 기필코 보너스를 받아내겠다는 마음으로 필사적이라면 다른 팀 선수들은 받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이런 식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준플레이오프나 플레이오프와 같은 작은 무대에서는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는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을 나았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1990년대 들어서 타이거즈는 준플레이오프나 플레이오프에서 전부 떨어졌으며 이는 팀명이 KIA로 바뀐 현재에 와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래도 이에 대한 반작용인지 아직까지도 타이거즈는 한국시리즈에서 무릎을 꿇은 적은 없다는 징크스가 아직까지는 유지되고 있다.
또한 해태 선수들에게는 승리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동기가 있었는데 해태의 승리는 광주와 호남 팬들에게 단순한 야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는 것이다. 영호남 지역갈등의 최대 피해자이자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에서 김대중의 전략으로 본격화된 지역갈등, 5.18 민주화운동에서 신군부의 군사반란에 저항했다가 광주학살이 일어난 호남 지방은 문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다. 이 5.18 민주화운동을 짓누르고 출범한 전두환 정부가 3S 정책으로 출범한 게 한국프로야구였으며 호남 연고 구단이 없으면 프로야구는 출범할 수 없다고 선언 할 만큼 어떻게든 호남 지방의 저항을 누르려 하고 있었다.
전라도라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누명으로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눌리고 밟히면서 차별과 억압에 울던 그들에게 해태의 야구는 얼음 계곡물에 몸 한번 담그고 정신 바짝 차리면 강자의 발목이라도 한번 물어 뜯을 수 있다고 악을 쓰며 항변하는 듯한 몸짓이자 일종의 정치 사회적인 대리전이었고 권력에 대한 통쾌한 복수와도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1997년 해태 왕조의 마지막 해에 열린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4수 끝에 김대중이 아주 적은 표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며 그렇게도 갈망했던 숙원을 풀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김대중이 대통령에 될 수 있었던 것은 김영삼 정부의 1997년 외환 위기 때문이었고, 그 1997년 외환 위기는 해태 타이거즈의 모그룹인 해태그룹을 부도로 몰고 가면서 마침내 해태 왕조도 함께 저물어 가게 되었다. 이후 인수된 KIA 타이거즈도 이전의 해태와 달리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 팀이 되었으며 엘롯기라는 굴욕적인 멸칭을 얻게 된다.[65]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타계한 2009년 8월, KIA 타이거즈는 우주의 기운을 받아 8월에만 KBO 월간 최다 승인 20승을 싹쓸이하며 2009년 페넌트레이스를 제패했고, 두 달 뒤 열린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그렇게 타이거즈를 괴롭혀 왔던 아홉수를 풀어내고 V10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KIA 타이거즈/2009년 참고. 여러모로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연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타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2.5. 1998년~2001년
2.5.1. 1998년
그러나 1998년 이후로 해태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모 회사인 해태그룹이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경영난에 허덕이게 되고[66] 이종범의 일본 진출로 전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 선동열, 이종범의 일본 진출도 본인들이 원해서 간 것도 있지만 구단 입장에서는 현금 확보를 위한 면이 컸다. 특히 이종범의 경우 김응용 감독이 향후 10년은 팀을 이끌 주축 선수로 주목했다는 점에서 그 공백이 클 수밖에 없었다.이종범의 해외 진출에 묻혀서 그렇지 한때 에이스 역할을 하던 조계현을 현금 4억 원에 삼성 라이온즈[67]로 합의 트레이드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고액 연봉자인 이순철을 방출하는 등, 지출을 줄이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 둘은 이미 하와이 스프링캠프 때 구단의 내분을 주도했으므로 어느 정도 김감독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조건을 갖춰 줬다.
1998년 전체만 보면 말 그대로 "종범이만 있었어도" 정도로 괜찮았다. 에이스 이강철이 15승을 거두며 1992년 이후 최고의 성적을 올렸고 차기 에이스였던 12승을 거둔 이대진도 현대와의 경기에서 10타자 연속 삼진 잡을 정도로 건재했으며 어린 유망주 김상진이 생애에서 마지막의 불꽃을 태우듯 3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마무리에는 데뷔 3년차 신인 임창용이 철벽같이 버티고 있었다. 일부는 임창용이 삼성 라이온즈 시절보다 이 시기에 더 강력한 구위를 구사했다고 평가한다. statiz 기준 1998 시즌 WAR 1위는 임창용이었다.
게다가 타선도 나쁘지 않았다. 김창희가 조금이나마 성장세를 보이고 장성호, 이호준이 본격적으로 3할 타자로 발돋움하는 시기였다. 오히려 이종범이 해태에 잔류해서 계속 1996~1997년처럼 호령했다면 짜임새는 더 좋았을 뻔했다. 외국인 선수 도입 첫 해인 만큼 다른 구단처럼 OB의 타이론 우즈는 바라지 않아도 우즈 다음으로 현대에서 맹활약하던 스캇 쿨바급의 용병이 있었다면 모를 일이었다. 아니 숀 헤어가 규정 타석 채워서 .280 15홈런만 치는 조엘 치멜리스 수준이었어도.
전체적으로 투수력도 좋았고 무엇보다 이강철-이대진의 원투펀치와 임창용의 철벽 마무리의 조화가 최고인 시즌이었다. 장성호는 15홈런+타율 5위를 기록하면서 볼넷도 골라내는 대단한 1번 타자였다. 여기까지 장성호는 타석에서 만큼은 이종범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주루 스피드에서 큰 차이를 보였고[68] 클린업의 축이었던 홍현우와 성님이 조금 부진[69]했다.[70]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 직전 해에 부진했던 것일 뿐, 홍현우의 생산력은 지금처럼 세이버를 기준으로 골글을 선정할 시 당연히 김한수를 씹어먹는 수준[71]이었고, 이호성도 부상 및 장타력 하락이 있긴 했지만 wrc+가 115 수준으로 그해의 송지만, 정수근보다도 높은 수준이었다. 신구 조화로 따지면 98은 오히려 노장들이 하락세를 보이며 생산력을 갉아먹었던 95,96시즌보다 좋은 수준이었다.
마지막 OB와의 2경기를 남기고, 해태는 분수령에 서있었다. 2경기를 모두 이기면 시즌 3위[72], 1무만 거둬도 플레이오프 진출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OB에게 2연전 싹쓸이 패. 특히 마지막 경기는 임창용이 3회에 등판했음에도 11:5로 대패를 당했다. 그리고 해태는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현대 유니콘스가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순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야만없이긴 하지만 이종범이 있었다면, 그래서 몇 승이라도 더 챙길 수 있었다면 1998년 포스트시즌의 양상은 크게 변했을 수도 있다. 아니 이종범이 아니라 중박이상 치는 타자 용병, 타이론 우즈급은 아니더라도 쿨바, 치멜리스 하다못해 숀 헤어가 풀시즌 .260 15홈런 정도만 하는 외국인 선수였다면 이런 탈락은 없었을 것이다.[73][74]
해태의 가을야구 탈락 및 14년 연속 5할 실패 및 14년 만의 5위 추락의 가장 큰 원인은 이종범의 유출과 더불어 그 해 대부분의 팀들이 외국인 타자를 영입하여 공격력이 상승하거나 중심타자의 부진을 메우는 수준까지 갔고, 외국인 타자를 영입하지 않았던 삼성과 쌍방울도 97과 비교하면 공격력이 다소 하락하였으나 적어도 외국인 타자로 인해 피해를 보진 않았다. 그러나 해태는 그 외국인 타자가 팀킬질을 하여 무등아재들의 혈압을 돋구었다. 그것은 이해 해태가 최저 득점(489)을 올리는 원인이 됐다. 그러나 어째튼 장성호와 이호준의 성장으로 99년에는 해태 타선에 양준혁과 용병 2이 가세한 것, 홍현우의 각성으로 가히 핵폭발을 일으키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
2.5.2. 1999년
IMF 후폭풍으로 해태그룹은 점점 망조를 타고 있었고, 해태제과의 경영난이 악화되면서 팀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1998 시즌 후 타이거즈는 주력 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팔려갔던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임창용. 대가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양준혁, 황두성, 곽채진 등등을 얻어오긴 했다.[75] 하지만 이들도 임창용의 구멍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76] 그나마 쌍방울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쌍방울의 상황은 이보다 더더욱 비참했다. 해태는 이종범과 선동열의 이적료&임대료를 매년 수십억씩 받기라도 했지 쌍방울은 이런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양준혁을 데려옴으로서 1999년은 해태 왕조의 마지막 불꽃을 발하듯 엄청난 화력을 뿜을 수 있었다.극단적인 타고투저 시즌이었던 1999년, 해태 타선은 왕조의 마지막 불꽃을 발하듯 핵방망이를 연신 터뜨려댔다. 종범이가 도루하고 1점 올리던 그런 득점력에 평균득점력 +1 을 달고 살았다고 생각하면 쉽다. 도루를 굳이 안해도 홈런이 매일 터져주니.. 양준혁의 가세에, 기존의 홍현우, 장성호가 커리어하이를 기록했으며 트레이시 샌더스, 스토니 브릭스 두 용병 또한 출중한 장타력을 가지고 있었다. 양준혁이라는 핵우산 효과가 엄청났다.[77] 샌더스의 40홈런은 2009년 김상현(36홈런)과 2024년 김도영(38홈런)도 넘지 못한 역대 타이거즈 최다 홈런 기록이다.[78] 그해 팀 홈런 개수만 210개를 기록하며 당시 한 시즌 최다 팀 홈런 기록을 갈아치웠고 이 기록은 이마양으로 대표되는 2003년 삼성이 213개로 갈아치운다. 허나 몇몇 포지션에 생긴 구멍과 붕괴한 투수진 문제로 승률은 .457(전체 7위)에 그쳤다.
시즌 보정을 하지 않으면 2017년에 이어 역대 타이거즈 2위의 타선이었다.[79] 한 경기 3홈런은 무려 24회를 기록했으며 4 홈런 이상 경기도 8번이었다. 4게임 중 1게임은 3홈런 이상 경기였으며, 10득점도 우습게 해댔다. 광주구장에 심심할 때마다 A를 새길 정도로.[80] 1999년이 아무리 타고투저의 시즌이었어도 해태의 210홈런은 대단한 기록이다. 1999년 해태는 팀 홈런 말고도 프로 야구에 여러 가지 기록을 세웠다. 팀 최다 홈런(210)[81], 팀 최다 득점[82], 그리고 순득점(득점-실점)이 많은 팀 중 최초의 7위 달성. 구장 문제에 관해 덧붙이자면 해태 타선은 잠실 19경기에서 23홈런을 쳤다.[83][84] 이 수치를 가지고 만약 이해 해태가 잠실을 홈으로 쓰는 구단이었다면? 산술적으로지만 잠실에서만 9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는 기록이 나오며[85] 원정 경기까지 감안하면 210홈런까진 아니어도 190 홈런 정도는 충분히 기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렇게 리그 1위를 다투는 핵타선을 가지고도 7위밖에 하지 못한 이유는, 전년도 핵심 투수 4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공백을 나머지 투수들이 메울 수 없었고 답이 없는 해태의 수비진이 되어버려서 수습이 안 되었던 것이다. 우선 선발 에이스 역할을 하던 이대진이 그동안의 누적된 관리 부실로 인해 결국 부상으로 누웠다. 이강철은 10년 동안 정말 잘 던져줬으니 그만큼 피로도 많이 쌓였고 시즌을 통째로 쉬게 되었다. 3선발 젊은 피로 주목받던 김상진마저 청천벽력 같은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결국 이듬해인 1999년에 시즌 도중 향년 22세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뒷문을 잠그던 진정한 핵심 투수 임창용은 30억 원에 삼성에 팔려가고 말았다. 결국 전년의 핵심 투수 4명이 이대진의 1경기 말고는 아예 등판하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샌더스 양준혁 홍현우의 100홈런보다 더 많은 승수를 올려주던 투수들이 누워버렸다. 이건 지금 어느 팀이 와도 어떻게 해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투수가 리그 최하위냐 하면 그건 아니고 8구단 6위정도는 했다. 더 못 던진 팀은 LG와 쌍방울이다. 투수들을 이닝별로 살펴보면 22살의 신예급 유동훈이 155.1 이닝[86]을 던지며 ERA 4.75를 기록해 리그 평균보다 좀 더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사실상 에이스로 활약한 곽현희는 팀 최다 승인 11승을 기록했지만 평균 자책점은 무려 6.15이나 되었다.[87] 오철민 최상덕 박진철도 리그 평균보다 조금 못한 수준으로 이닝을 채워갔다.[88] 쌍방울에서 온 오봉옥이 3점대 초반으로 잘 던져줘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시즌이다. 까치 김정수의 해태 마지막 시즌이었고 이때도 구원으로 곧잘 했다.
수비진도 영 아니었다. 타이거즈 역사상 손꼽히는 수비수 김종국은 부상으로 단 3경기만 출장했으며[89] 그 수비 안 좋은 장성호는 좌익수, 1루수를 떠돌아다녔고 때에 따라서는 중견수로도 나왔다. 삼성을 떠나기 싫어했지만 어디서든 최선을 다했던 양준혁은 지명타자와 1루수로 주로 나왔으며 이호준도 그 전해 지명타자에서 3루수~1루수를 전전하였다. 그나마 고졸 1차지명으로 정성훈이 입단해서 3루를 봐준 게 다행이었다. 당시 용병 제도 도입 초창기상 비슷한 팀이 많았지만 해태는 유독 타력이 좋아도 떠도는 선수가 많았다.[90]
2.5.3. 2000년, 2001년
2000 시즌도 암울했다. 요약하면 투수력은 작년보다 눈꼽만큼 나아진 수준에서 타격이 한 해만에 역대 타이거즈 최악으로 변했다.[91] 거기다 전해 최다 승 투수 곽현희는 99년에 무리한 탓인지 이때부터 부상으로 1, 2군을 왔다갔다하고, 8팀 중 6위로 마친 게 다행일 정도다[92]. 전년도 우승팀 한화 이글스와 신생팀 SK 와이번스가 손잡고 나란히 바닥을 기어주며 오히려 전년보다 1단계 올라갔다. 팀 최악의 타선답게 20홈런 타자가 없었다.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는 최상덕 1명인데 ERA가 4.56으로 리그 평균급이다.[93] 타격이 좋았던 작년과 달리 팬들에는 정말 재미가 없는 시즌이었다. 장성호가 출루율왕을 먹어서 그나마 타이거즈의 꼴찌 추락은 막아줬다. 특히 이 시즌 압도적인 우승팀이었던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2승 17패로 압살 당하고 말았다.과정을 살펴보면 1998~1999 시즌에 맹타를 휘두르며 활약했던 이호준을 2000 시즌 중 성영재와 트레이드 되어 SK 와이번스로 떠났으며 이강철은 FA로 삼성에 이적해서 2000시즌부터는 팀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94] 26세의 이대진은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100이닝 이상을 잘 던져서 팀에 큰 도움이 되었으나 이것이 자신의 투수 인생 마지막 불꽃이었으며, 그 이후 다시는 20세기 때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외 투수는 오봉옥과 SK에서 넘어온 성영재가 잘했고, 구원진의 이병석, 곽채진도 제몫을 했다. 그리고 이게 전부였다. 유동훈은 2년차 징크스로 묶였다. 이강철의 삼성 FA 이적 보상 선수인 박충식은 재활중이었기 때문에 전혀 나오지 못했다.
한편 타선은 이후 팀의 주축이 되는 대졸신인 홍세완과 김상훈이 합류했지만, 첫해였기에 뛰어난 활약을 보인 건 아니었다. 홍현우는 직전 시즌 30-30 클럽 달성 과정에서의 무리 및 시범경기 때의 부상 등으로 크게 부진하였으며[95], 리그 수위급 활약을 보인 선수가 그해 출루율왕을 수상한 장성호뿐이었다. 거기에 양준혁을 주고 얻어온 투수 손혁이 트레이드에 반발해 팀에 합류하지 않는 등의 사건사고도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이 있었던 5월 18일에는 광주 무등 야구장에서 경기를 하지 못하고 원정 경기나 제2홈구장 경기만 해오던 해태가(사유는 후술할 문단 참조) 2000년에 오랜만에 5월 18일 홈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그 경기에서 송진우에게 노히트 노런 패배를 당했다.
무려 외국인 선수 6명과 계약한 해였다.[96] 1999년 현대에서 뛰던 피어슨과 말레이브를 영입했다가 조기 퇴출했으며 포조와 베스를 데려왔으나 이들도 잠깐 뛰고 퇴출 당했다. 이후 미첼과 타바레스를 영입했고 이중 타바레스가 대박을 친다.
2000 시즌이 끝나고 결국 1년전부터 해태를 떠날것이라는 소문대로, 1983년부터 장기 집권해 오던 김응용 감독이 삼성으로 이적했고 김응용 밑에서 타격코치로 있던 김성한 감독이 2001년부터 감독에 부임했다. 그러나 이때 주전 3루수인 홍현우가 FA를 통해서 LG 트윈스로 이적해버리면서 장타력이 있는 선수가 그나마 가끔 20홈런을 치는 장성호 이외에는 남아나지 않는 최악의 사태를 맞게 된다.[97]
2001 시즌 해태는 그야말로 해태의 비밀번호 5-7-6을 찍었던 종전 3년을 뒤집을 정도로 끈질긴 모습을 보여주었다. 투수는 작년이나 제작년처럼 6위권인데 암울한 타선이 리그 평균급으로 살아났다. 최상덕과 나름 원투펀치를 이룬 외국인 투수 루이스 안두하[98]와 레스덕에 그나마 마운드의 숨통이 틔였으며, 타선에서는 홍세완, 이동수, 신동주, 산토스, 장성호 등이 두자릿수 홈런을 쳐주며 장타력도 의외로 뛰어났던 데다 김종국, 김창희도 나름 제 역할을 해주었고 이종범도 한국으로 돌아와 45경기지만 이름값 어디 안가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덕분에 해태는 7월 29일 삼성과 마지막 경기를 벌일 때까지도 4위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99][100]
그리고 2001년 8월 1일, 해태제과가 기아자동차에 팀을 매각하면서 현재의 KIA 타이거즈로 변신한다. 당시 전라남도 및 광주광역시 연고 기업 중 가장 대기업인 금호그룹에서 타이거즈를 인수해야 한다는 지역 여론이 끓었으나 금호그룹은 프로 구단에 관심이 없는 데다가 자신들의 호남색을 지우고 싶어하는 그룹이여서 무산되었다.[101] 때문에 수도권을 연고로 하는 프로 구단을 창단하려 했고 그 산물이 인천광역시 연고의 금호생명 여자 농구단이었지만 투자는...
금호그룹 대신 광주광역시 서구 내방동에 아시아자동차 시절부터 군용 및 상용차량 생산 공장을 운영 중이었던 기아자동차가 인수하게 된다. 기아자동차의 인수에 대해 광주광역시 지역 여론은 좋은 편이었다. 기아자동차는 1976년에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면서 호남에 자동차 공장을 보유하게 되었다.[102] 이 부분은 기아 항목을, 이후 역사는 KIA 타이거즈 항목을 각각 참조.
3. 특징
자세한 내용은 해태 타이거즈/특징 문서 참고하십시오.붉은색으로 대표되며 원정 유니폼인 빨간 상의와 검정 하의는 상대에게 무시무시함으로 통했는데 해당 디자인은 초대 감독이었던 김동엽 감독이 자신의 취향을 적극 반영한 것이다.
4. 응원가(무등산 호랑이들)
선동열과 이종범, 그리고 양수경이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Two&One이 부른 노래. 1994년 4월 9일 한화 이글스와의 홈개막전[103]에서 처음 공개되었다.#들어보기
힘들었던 많은 시간들 결코 잊지 말아야 해 노력만큼 남겨진 결과 서로 만족할 수 있게 늘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생각보다는 세상에 힘든 일이 많을 테니 언제나 최고를 향해 달려가는 거야 어떤 아픔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아 무등산 호랑이 기상을 보아라 힘차게 외치네 나의 해태! 해태 타이거즈! 두렵다는 말을 하지마 우린 뭐든 할 수 있어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새로움에 도전하자 늘 기쁜 일들만 우릴 기다리진 않겠지만 마지막 순간 서로가 함께 웃을 수 있도록 언제나 최고를 향해 달려가는 거야 어떤 아픔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아 무등산 호랑이 기상을 보아라 힘차게 외치네 나의 해태! 해태 타이거즈! 언제나 최고를 향해 달려가는 거야 어떤 아픔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아 무등산 호랑이 기상을 보아라 힘차게 외치네 나의 해태! 해태 타이거즈! |
5. 구단 디자인
5.1. 엠블럼/심볼/워드마크
자세한 내용은 KIA 타이거즈 문서의 구단 디자인 부분을
참고하십시오.6. 마스코트
7. 해태의 왼손잡이 선수 수난사
KBO 리그 내에서 희한할 정도로 왼손잡이 선수가 희귀하거나 잡아와도 제 역할을 못하는 두 팀[104] 중에 하나였다.선동열, 김성한, 이순철, 조계현, 이종범, 홍현우 등등 해태 왕조를 이끈 선수들은 예외 없이 오른손잡이다.[105] 타자쪽에선 그나마 장성호라도 있지[106] 투수 쪽에선 왼손잡이는 김정수, 신동수, 강태원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107] 1997 신인드래프트에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였던 좌완투수 오철민을 1차지명하여 계약금 2억 4,000만 원[108]에 입단시키기도 했지만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때문에 김응용 감독은 투수든 타자든간에 왼손잡이를 데려오려고 그렇게 동분서주했고[109] 트레이드로 박노준, 정성룡, 김상훈, 동봉철 등을 데려오고[110], 결국 양준혁을 데려오면서 그 소원을 풀었지만 1년만 뛰고 LG행. 1980년대 중반에는 주전 라인업중 이순철 한 명 빼고 죄다 '김'씨에 오른손잡이라서 '김씨타선', '가장 한국적인 타선'[111] 소리도 들었다. 그런데 정작 주전 라인업 중 왼손잡이가 3~4명이 되던[112] 1999년에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왼손 타자들은 KIA 타이거즈로 넘어오면서 이용규, 김원섭, 최희섭, 최형우, 나성범, 최원준같은 선수들이 들어오며[113] 해태 시절에 비해 많이 나아졌고 우투좌타라는 개념이 한국 야구계에 확산되어 좌타자가 더 많아진 뒤에는 오히려 우타자가 귀해진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으나[114], 왼손 투수는 여전히 없다시피 할 정도였다. 특히 과거에는 왼손으로 공 던질줄만 알면 투수한다는 농담이 공공연히 돌 정도. 그나마 2009년 이후에 양현종이 포텐이 터지면서 조금은 나아졌다. 물론 지금도 왼손으로 공 던진다는 이유로 1군에 있는 투수는 수두룩하다.[115] 물론 2023년 기준에선 이의리, 윤영철이라는 괴물급 신인 좌완 투수들이 연달아 등장하면서 한때 외국인인 파노니까지 포함하면 선발 5명중 4명이 좌완이라는 진풍경을 연출할 정도였다. 불펜에서도 이준영, 최지민, 김기훈, 곽도규 등이 등장하며 옛날처럼 좌완 기근이라는 소리를 듣지는 않아도 될 수준까진 오게 되었다.
7.1. 해태의 좌타자 계보
- 김일환 (1983~1987)
- 1982년 롯데 자이언츠 창단 멤버였으나 이듬해 해태로 트레이드된 1루수. 실업 야구 한국화장품 시절에는 27경기 연속 안타라는 대기록을 세운 강타자였으나, 해태에서는 김봉연, 김성한 등에 밀려 잘해야 백업 신세였다. 1987년 태평양으로 이적하여 이듬해 은퇴할 때 까지 통산 성적은 타율 0.240, 76타점, 8도루였고 홈런은 한 개도 없었다. 그래도 최동원 상대로 9회에 동점타를 친적은 있는데 그 적시타로 인해 이 날 경기는 전설로 남게 되었다.
- 송일섭 (1983~1988)
- 1983년부터 해태에서 뛰기 시작한 좌타 외야수이다. 그가 그때부터 이적한 1988년까지는 1987년 박철우, 1988년 김성규 빼고는 그가 정말 말 그대로 유일한 좌타자였다. 1985년 해태에서 103경기 338타수 104안타 15홈런 41타점 타율 0.308을 기록했다. 이후 1989년 빙그레에서 반짝 부활한 것을 빼면, 주로 대타 전문으로 활동했다. 해태에서는 좌익수와 우익수로 뛰었고, 빙그레에서는 중견수도 봤다.
- 김성규 (1988~1991)
- 1988년 입단한 외야수이다. 해태의 좌타 갈증을 풀어줄 듯했으나 아마추어 시절에 쌓은 명성과 기대에 비해서 너무 못했다. 입단 첫해 80경기 출장해 타율 2할 8푼에 8도루로 나름대로 선전했으나 그 다음해 시즌의 1/3도 못 뛰고 타율은 1할 5푼대로 추락하더니 그 다음해도 겨우 80경기 뛰고는 0.245에 6타점 2도루. 1991년까지 뛰고 쌍방울로 이적해 1993년에 은퇴했다. 본인이 회상하기는 스스로 너무 게을러서 훈련을 안한 탓에 망했다고 후회했다.
- 박철우 (1987~1993)
- 1987년 입단하였다. 포지션은 좌익수였다가 전성기 찍고는 지명타자로 활약하였으며, 가끔 1루수로 나오기도 했다. 1993년까지 해태에서 뛰었고, 1997년 쌍방울에서 은퇴한 선수. 큰 덩치와 느린 발로 전형적인 거포의 외형이었으나, 커리어 하이인 1989년 홈런이 13개였다. 타율도 3할을 넘긴 것은 1989년밖에 없었다(0.318). 하지만 좌타자가 그밖에 없었던 해태의 사정상 중심타선에서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짧고 굵은 선수 생활을 했다.
- 933경기 출장 2813타석 2487타수 695안타 58홈런 370타점 통산 타율 0.280
- 아들은 NC 다이노스 포수 박세혁이다.
- 박노준 (1992)
- 1992년 OB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어 왔다. 1991년 OB에서 타율 0.293에 19도루의 준수한 성적으로 전성기를 계속 구가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92년 딱 서른이 되던 해 해태에서의 성적은 2할 4푼에 11도루. 그나마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한 게 사실상 해태 시절의 전부였다. 그리고 1시즌만 뛰고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다. 살림살이 어려운 3연속 OB-해태-쌍방울로. 보통 이런 경우(강팀-열악한 강팀-신생 팀)라면 그냥 어영부영 은퇴할 수도 있으나 쌍방울로 트레이드된 이후에는 보란 듯이 부활한다. 심지어 1994 시즌에는 OB 시절에도 못 한 3할 타율을 기록했다. 김응용이 가장 배아파했을 선수. 하지만, 이듬해 다시 추락하며, 1997년도에 은퇴한다.
- 김상훈 (1994~1995)
- 2000년대 중반 위의 박노준과 함께 직구 아님 변화구, 초시계 드립으로 야구 팬들에게 욕을 먹던 SBS 스포츠의 전 해설위원이자 현 SPOTV의 해설위원. 그렇지만 해설위원 시절과는 달리 선수 시절은 미스터 청룡/LG라 불리운 MBC 청룡과 LG 트윈스의 대표 타자였다. 1988년 타격왕과 1990년 1루수 골든글러브를 차지했고 이적 직전 시즌인 1993년에는 타율 0.285, 12홈런 71타점으로 주포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 연봉 협상 마찰과 올스타전 쪼인트 사건으로 한대화와 사이가 안 좋던 해태와 송구홍의 입대, 김상훈의 하락세에 의구심을 가지던 LG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1993년 12월 1일 한대화, 신동수, 허문회, 김봉재 - 김상훈, 이병훈의 트레이드가 성사된다. 당시 전문가들은 해태의 승라라고 생각했으나... 1994 시즌이 시작하자 트레이드의 핵심이었던 김상훈은 부상에 시달리며 2할 3푼대로 주저앉은 반면 한대화는 타율 0.297, 10홈런 67타점으로 부활에 성공하였다. 결국 이해 무너진 김상훈은 1995 시즌까지 뛰고 은퇴를 선언하였고 이 트레이드는 해태에게 흑역사가 되었다.
- 박재용(1994~1999)
- 이전 왼손잡이 박철우의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을 만큼 코감독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하필 후계자라는 작자가 선배의 성적을 단 한 번도 못 넘긴 것이 컸다. 수비도 당시에 별로여서 지명타자와 1루수를 번갈아 볼 정도였다.[116] 그래도 운이 좋았는지, 두 번 우승도 맛보고 우승 프리미엄에 경쟁자가 별로 없던 운 좋은 시즌을 만나 KBO 골든글러브 투표 지명타자 부분에서 2연패를 했다. 그러나 이후 성적이 별로였고 바로 밑에 후술하게 될 후배 선수가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바람에 1999 시즌 중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됐다. 은퇴는 팀이 SK 와이번스로 바뀐 2000년에 하였다. 2019년까지 롯데 자이언츠 2군과 3군 코치 역임.
- 장성호 (1996~2010)
- 해태가 길러낸 유일무이한 스타급 이상의 좌타자이다. 김응용 감독의 신뢰를 바탕으로 데뷔 시즌 개막전부터 선발로 기용되었고 이듬해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자리잡았다. 3년차인 1998년부턴 리그의 강타자로 성장했으며 홍현우와 함께 해태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눈야구의 달인답게 장타력이 탑급이 아님에도 볼넷을 얻어내는 데에는 특출난 선수이자 세이버메트릭스로 인해 평가가 더욱 좋아진 선수, 이후 KIA로 팀이 인수가 되고 나선 복귀한 이종범과 함께 팀을 이끌며 팀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의 위치까지 올랐고 9년 연속 3할을 기록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의 위상으로까지 올랐다. 타이거즈를 상징하는 선수로 V10까지 함께 했지만 팀과의 불화로 타이거즈를 떠나게 되며 아쉬운 마무리를 하게 된다. 꾸준히 활약한 선수가 없어 사실상 계보라기 보단 잔혹사에 가까운 타이거즈 좌타자 중 유일하게 레전드로 성장한 선수로 팀에 상당한 기여를 하며 이견이 없는 타이거즈의 영구결번 후보이며 타이거즈의 무수히 많은 영구결번 후보들[117] 중 유일한 좌타자이다.
- 동봉철 (1996.05~1996.11)
- 최훈재 (1996.11~1998.12)
- LG에서는 김재현과 박준태[118], 노찬엽, 심재학 이라는 거물급에 밀려서 왼손 대타-외야 백업 역할이었고 96년 11월 6일에 최향남을 상대로 트레이드를 되어 해태로 오게 되었다.[119] 해태에서의 2년간은 97년엔 3번 타자로 뛰며 우승을 이끄는 등 상당히 준수한 기량을 보여주면서 탈쥐효과를 입증하나 싶었으나, 트레이드 당시 LG로 건너간 최향남의 포텐이 터지면서 묻혀버렸다. IMF 이후 재정난이 심해진 해태는 최훈재를 1998 시즌 종료 후 두산 베어스(당시 OB)로 넘기면서 그와 해태의 인연도 끝나게 된다. 신기하게도 그가 몸 담은 시절 3팀 모두 우승을 하는 진기록을 보았다.
- 양준혁 (1999)
- 1999년에 주전 외야수로 뛰면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는 했으나, 해태에 오기 싫다고 트레이드 거부를 외친 점이나, 양준혁의 맞트레이드 상대인 손혁 역시 해태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은퇴를 선언했다가 복귀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지 이 계보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타이거즈 팬들 사이에서 이미지도 별로 좋지 못했었다. 물론 이는 올드팬 한정으로 현재는 양준혁이 해태에서 뛴지도 20년이 넘은지라 양준혁이 해태에서 뛰었는지도 모르는 팬이 생길 정도로 타이거즈 팬덤도 누그러진 상태고 양준혁은 정작 해태에서 뛰고나선 해태에 대해 절대 나쁜 말을 하지 않아[120] 현재 타이거즈 팬들 사이에서의 이미지가 나쁘지 않다.
- 트레이시 샌더스 (1999)
- 40년 가까이 된 타이거즈 역사상 한 시즌 최다 홈런의 주인공이자 타이거즈 선수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40홈런을 친 외국인 선수. 타율은 .247로 평균만도 못했고 무려 133개의 삼진을 당했으나 4할이 넘는 출루율과 6할에 가까운 장타율로 뛰어난 득점 생산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세이버메트릭스 및 OPS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으며, 낮은 타율과 많은 삼진으로 인해 저평가 당했다. 게다가 이미 개막장으로 몰린 해태구단의 재정으로 인해 재계약에 실패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2000년에 팀 최다 홈런 선수가 14개인 장성호, 홍현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코감독은 시즌 내내 샌더스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샌더스보다 홈런은 좀 적지만 해태의 마지막 4번 타자로 이름을 남겼고 팀명이 KIA로 바뀌고 나서도 정규 시즌 3할을 기록한 산토스가 오며 다소 위로를 하게 된다.
8. 여담
배구공이 야구 훈련에 쓰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김응용 야구 감독이 미국 대학팀에서 연수를 받은 덕에, 1983년 초 동계 훈련 기간에 자율 야구의 일환으로 배구공을 훈련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태 타이거즈의 전기리그 우승 및 한국시리즈 우승을 기록했다.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이 벽에 배구공을 튕겨서 훈련하는 사진이 있었다고 하나, 2023년에 찾기는 힘들 것이다.8.1. 5월 18일에는 광주 경기를 하지 못한 구단
해태 타이거즈는 프로 원년인 1982년부터 1999년까지 무려 17년간 5월 18일에 연고지인 광주광역시에서 홈경기를 한 적이 없다. 무려 17년간 광주에서 해태 홈경기가 열리지 못한 것은 5.18 민주화운동의 여파 때문이었다. 아래는 1982년부터 해태가 존속했던 2001년까지 5월 17일~5월 19일 3일간 해태의 경기 기록들이다.연도 | 일자 | 경기장 | 상대 구단 | 전적 |
1982 | 5월 17일 (월) | 경기 없음 | ||
5월 18일 (화) | ||||
5월 19일 (수) | 대구 | 삼성 라이온즈 | 0:2 패 | |
1983 | 5월 17일 (화) | 경기 없음 | ||
5월 18일 (수) | 대구 | 삼성 라이온즈 | 6:5 승 | |
5월 19일 (목) | 1:2 패 | |||
1984 | 5월 17일 (목) | 대전 | OB 베어스 | 3:4 패 |
5월 18일 (금) | 경기 없음 | |||
5월 19일 (토) | 광주 | 삼성 라이온즈 | 2:3 패 | |
1985 | 5월 17일 (금) | 경기 없음 | ||
5월 18일 (토) | ||||
5월 19일 (일) | ||||
1986 | 5월 17일 (토) | 광주 | MBC 청룡 | 3:0 승 |
5월 18일 (일) | 전주 | 4:3 승 | ||
5월 19일 (월) | 경기 없음 | |||
1987 | 5월 17일 (일) | 부산 | 롯데 자이언츠 | 1:5 패 |
5월 18일 (월) | 경기 없음 | |||
5월 19일 (화) | 광주 | MBC 청룡 | 3:0 승 | |
1988 | 5월 17일 (화) | 인천 | 태평양 돌핀스 | 3:4 패 |
5월 18일 (수) | 11:5 승 | |||
5월 19일 (목) | 대전 | 빙그레 이글스 | 5:2 승 | |
1989 | 5월 17일 (수) | 경기 없음 | ||
5월 18일 (목) | 인천 | 태평양 돌핀스 | 3:2 승 | |
5월 19일 (금) | 3:3 무 | |||
1990 | 5월 17일 (목) | 경기 없음 | ||
5월 18일 (금) | ||||
5월 19일 (토) | 부산 | 롯데 자이언츠 | 2:1 승 | |
1991 | 5월 17일 (금) | 전주 | 쌍방울 레이더스 | 5:2 승 |
5월 18일 (토) | 7:5 승 | |||
5월 19일 (일) | 5:10 패 | |||
1992 | 5월 17일 (일) | 잠실 | LG 트윈스 | 4:2 승 |
5월 18일 (월) | 경기 없음 | |||
5월 19일 (화) | 전주 | 쌍방울 레이더스 | 8:5 승 | |
1993 | 5월 17일 (월) | 경기 없음 | ||
5월 18일 (화) | 전주 | 쌍방울 레이더스 | 2:1 승 | |
5월 19일 (수) | 3:1 승 | |||
1994 | 5월 17일 (화) | 잠실 | OB 베어스 | 2:1 승 |
5월 18일 (수) | 8:5 승 | |||
5월 19일 (목) | 6:2 승 | |||
1995 | 5월 17일 (수) | 전주 | 쌍방울 레이더스 | 1:7 패 |
5월 18일 (목) | 0:3 패 | |||
5월 19일 (금) | 광주 | OB 베어스 | 2:0 승 | |
1996 | 5월 17일 (금) | 부산 | 롯데 자이언츠 | 7:3 승 |
5월 18일 (토) | 8:1 승 | |||
5월 19일 (일) | 4:0 승 | |||
1997 | 5월 17일 (토) | 군산 | 쌍방울 레이더스 | 2:0 승 |
5월 18일 (일) | 4:7 패 | |||
5월 19일 (월) | 경기 없음 | |||
1998 | 5월 17일 (일) | 전주 | 쌍방울 레이더스 | DH1 5:3 승 DH2 1:4 패 |
5월 18일 (월) | 5:2 승 | |||
5월 19일 (화) | 경기 없음 | |||
1999 | 5월 17일 (월) | 대전 | 한화 이글스 | 11:4 승 |
5월 18일 (화) | 경기 없음 | |||
5월 19일 (수) | 광주 | 두산 베어스 | 4:6 패 | |
2000 | 5월 17일 (수) | 광주 | 한화 이글스 | 2:2 무 |
5월 18일 (목) | 0:6 패[121] | |||
5월 19일 (금) | 부산 | 롯데 자이언츠 | 5:3 승 | |
2001 | 5월 17일 (목) | 광주 | SK 와이번스 | 3:2 승 |
5월 18일 (금) | LG 트윈스 | 2:4 패 | ||
5월 19일 (토) | 13:9 승 | |||
역대 5월 17일 전적 | 14전 8승 1무 5패 (승률 0.571) | |||
역대 5월 18일 전적 | 13전 9승 4패 (승률 0.692) | |||
역대 5월 19일 전적 | 16전 10승 1무 5패 (승률 0.625) |
5공 군사정권은 KBO 리그 출범 기획 과정에서 지역감정 때문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당초 지역연고제 도입을 반대했으나 참모들의 설득으로 허락을 했고 결국 호남 연고 구단으로 해태가 창단됐다.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을 생각은 없었는지 KBO에 압력을 넣어서 5월 18일에 광주에서 해태 홈경기가 열리지 않게끔 일정을 만들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의견이 있었는데, 이 의견이 2017년 실제 문건을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KBO 리그 초창기에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한 전두환과 신군부가 집권 세력으로 시퍼렇게 살아 있었기에 압력을 행사한 것이었다.
당시 KBO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프로 야구 원년인 1982년 5월 15일부터 이틀간 무등 야구장에서 해태와 삼성의 주말 2연전이 편성돼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정부에서 그 시합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치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해당 경기 날짜가 5월 18일과 가장 가까운 주말이었던 만큼 5.18 추모기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분노한 시민들이 야구장에서 소요 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122][123] 그러나 KBO 총재 서종철이 정부 관계자들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을 하고[124] 경기를 그대로 진행시켰다. 결국 서 총재의 예측대로 이날 경기는 시작 전은 물론 경기 도중과 경기 후에도 아무런 소요사태 없이 경기가 무사히 진행됐다. 당시 리그 사무국 관계자였던 이호헌 선생과 이용일 선생 등의 증언을 들어보자. 다만 1982년 5월 이후 두 번 다시 5.18 즈음 광주에서는 해태의 홈경기가 열리지 못했다.[125]
실제로 2017년 경향신문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국군보안사령부의 ‘5·18 대비 광주 지역 프로야구 경기 일정 일부 조정’ 문건에서 1986년 5월 17일을 전후해 “광주권 안정을 위한 당국의 권유”라는 이름으로 5월 18일 17시부터 무등 야구장에서 열려고 했던 MBC 청룡 VS 해태 타이거즈의 경기 장소를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으로 바꿨다는 내용이 나온다. 5월 17일 16시로 예정된 경기는 광주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감안해 광주에서 그대로 치렀지만 플레이볼 시간을 앞당겨 15시에 시작하도록 했고 심판들로 하여금 경기를 빨리 끝내게끔 조치하라는 문구가 등장한다.[126]
또 다른 기록을 보면 1991, 1993, 1995, 1997, 1998년의 5월 18일에 해태는 전주와 군산 등에서 경기를 치렀다. 이때는 전주 연고 구단으로 쌍방울 레이더스가 창단된 후였기 때문에 해당 경기들의 홈 구단도 해태가 아닌 쌍방울이었다. 즉 1983~1990년에는 아예 해태의 홈경기가 이날 일정에 잡히지 않았으며 그 이후에는 광주 이웃 연고 구단인 쌍방울 레이더스의 홈구장으로 가서 경기를 치르게 했던 것이다. 결국 5월 18일에 광주에서 해태 홈경기를 치르지 않는다는 불문율은 해태의 연고권인 전라남도 출신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에야 깨진다.
프로 야구 출범 이후 5월 18일에 무등 야구장에서 해태 홈경기가 열린 첫 해는 광주민주화운동 20주년을 맞은 2000년이었고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였는데 공교롭게도 여기서 해태는 초대 선수협 회장님에게 노히트 노런을 조공하는 희생양이 되었다. 참고로 이해 송진우는 선수협 결성 활동을 하며 선수협 회장을 맡았는데 이 때문에 스프링캠프도 거부하며 투쟁을 하느라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시즌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경이로울 지경. 다만 1997년 외환 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 해태의 전력이 급격하게 약화됐다는 점도 노히터 헌납의 요인으로 고려해야 할 부분 중 하나다. 이당시 목포의 눈물을 부르거나 당시 대통령이 였던 김대중의 이름이 연호되었다.
해태에서 KIA 타이거즈로 바뀐 후에는 과거와는 달리 5월 18일에 자유롭게 광주 홈경기가 편성되고 있다. 다만 5월 18일에 홈경기가 편성되면 광주 홈경기에 한해 국민의례 때 5.18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을 하고 치어리더 공연과 화려한 홈경기 행사 등을 생략하고 있다.
2019년 스승의 날 이벤트로 엠스플 중계에 출연하신 유수호 옹의 증언에 의하면, 1980년대 5월 18일에 즈음해서 무등야구장 경기 중계가 잡혔을 때 조금이라도 광주 팬들의 귀에 거슬리는 코멘트를 하면 어김없이 관중석에서 중계석으로 물병이 투척됐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무등야구장의 중계석이 관중석보다 높은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광주MBC 인터뷰에서 김성한 선수도 이 날만큼은 "경기를 꼭 이겨서 지역민들의 한을 운동장에서 풀어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는 각오가 남달랐다고 한다. 실제로 해태 존속 기간 중 5월 18일 경기의 성적은 9승 4패.
2024년 5월 18일 경기까지 이기면서 KIA의 5.18 승수가 해태의 승수가 같아졌다.
8.2. 해태 선수 출신 감독은 성공할 수 없다?
해태 타이거즈는 자타가 공인하는 1980~1990년대 KBO 리그의 맹주였지만, 흥미롭게도 이 팀에서 선수로 뛰었던 이들이 감독을 맡으면 희한하게도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역대 해태 선수 출신 감독은 서정환, 김성한, 유승안, 이순철, 한대화, 선동열, 이강철, 김종국이 있다. 이들은 선수 시절 한국시리즈 우승을 밥먹듯이 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우승을 경험한 선동열과 kt wiz 감독 시절 우승을 경험한 이강철을 빼면 감독으로는 누구도 한국시리즈 우승의 영광을 안지 못했다. 대부분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명제를 증명한 이들이다.해태 선수 출신으로는 처음 감독을 맡은 사람은 1980년대 타이거즈의 주전 유격수였던 서정환이었다. 그는 해태에서 은퇴한 후 1994년까지 해태 코치를 맡았다가 1996년, 본인의 친정팀이었던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자리를 옮겼고, 1998년부터 2년간 감독을 맡았다. 감독 재임 기간 내내 삼성 라이온즈를 가을야구로 이끌었지만, 1998년에는 재계 라이벌 LG 트윈스에 플레이오프에서 패퇴했고, 1999년에는 한국시리즈 진출을 눈앞에 두고도 롯데 자이언츠에 믿기 어려운 역전패를 당한 후 잘리고 말았다. 2001년 해태로 다시 돌아왔고, 2006년부터 KIA 타이거즈 감독을 맡았다. 취임 첫 해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올랐지만 한화 이글스에 패하며 탈락했고, 이듬해인 2007년에는 구단 역사상 2번째 꼴찌의 불명예를 쓰면서 감독직에서 잘렸다.
타이거즈의 대표적 강타자 김성한은 해태의 마지막 감독이자 KIA 타이거즈의 초대 감독이었다. 그가 해태 감독으로 취임한 2001년은 구단 매각 문제로 안팎의 사정이 워낙 어수선했다고 치더라도 모기업이 기아자동차로 바뀌고 팀 이름이 KIA로 바뀐 후에는 구단에 대한 지원이 막강해졌다. 특히 2002년부터 KIA는 리그의 강력한 우승 후보로 떠올랐고 해태 시절에도 없었던 2년 연속 6할 승률을 기록하는 등 강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으나 정작 한국시리즈 무대는 밟아보지 못하고 플레이오프에서만 두 번 연속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2004 시즌 도중 프런트와 불화를 일으켰고, 결국 감독직에서 경질된다.
1990년대 타이거즈의 군기반장 역할을 했던 이순철은 삼성 라이온즈 코치로 있을 시절에는 그럭저럭 호평을 받았지만, LG 트윈스 감독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흑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팀은 가을야구를 나가지 못했고, LG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이상훈, 김재현, 유지현을 비극적으로 몰아내면서 LG빠들로부터 거의 매장당했다. 현재까지도 LG빠들은 이순철을 금지어로 칭하고 있다.
OB 베어스, LG 트윈스, 쌍방울 레이더스 등 여러 팀을 오갔지만 타이거즈에 소속됐던 시절이 가장 화려했던 한대화도 프로 감독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물론 한대화의 경우 그가 맡았던 팀의 전력이 좋지 않았다 점을 감안해야 한다. 오히려 2011년에 탈꼴지를 해서 구단이 6연속 꼴지 기록을 세우는 것을 저지해서 야왕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고, 한대화 이후 후임 감독들이 하나같이 한화의 처참한 뎁스에 개발린 채로 감독 임기를 마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불과 두 시즌만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고, 타이거즈보다 이글스 선수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유승안도 1군 감독으로는 사실상 실패했다.
그나마 성공한 케이스를 꼽으라면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2번의 한국시리즈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을 거둔 선동열을 꼽을 수 있겠지만, 선동열의 성공 스토리는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로 한정할 수밖에 없다. 특히 감독 재임 초기였던 2005년과 2006년의 우승은 선동열이 스스로 이룬 성과라기보다는 전임 감독인 김응용의 유산이거나 소위 선수빨로 우승했다는 비판도 있다.[127][128] 그리고 삼성이란 팀 분위기 때문에 2009년에 가을야구를 못 보내고[129], 2010년에 SK에게 한국시리즈를 내리 스윕하고, 후임 감독이 5연속 정규 시즌 우승과 4연속 통합 우승을 했기 때문에 삼성 팬덤에게 우승하고도 흑역사 취급을 당하고 있다. 어쨌든 선동열은 삼성 라이온즈 시절의 영광을 안고 고향 팀인 KIA 타이거즈에 감독으로 돌아왔지만 5위 - 8위 - 8위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불명예 퇴진하게 된다. 타이거즈 감독들 중에 유이하게[130]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고, 선동열의 전임 감독인 조범현과 후임 감독인 김기태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기 때문에 더더욱 비교 된다.[131]선동열의 흑역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는데, 금메달을 따고도 욕을 먹는 국가대표팀의 감독이라는 점이다. 심지어 국대 감독으로서의 비판도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9년부터는 타이거즈 사상 최고의 잠수함 투수였던 이강철이 kt wiz의 제3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됐는데, 이강철의 성과에 따라 타이거즈 선수 출신 감독의 잔혹사가 끊기던가 아니면 이어지던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강철은 비록 포스트시즌에는 한끗 차이로 못 갔지만, 취임 첫 해부터 5할 승률과 6위라는 순위로 kt wiz 역사상 최고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다만, 한용덕의 사례처럼 1년 반짝일지는 아직 지켜봐야 할 일이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지각 개막한 2020 시즌 들어 초반의 부진을 딛고 중반부터 무서운 기세로 승수를 쌓아가며 결국 정규 시즌 2위로 플레이오프 직행에 성공했다. 2021 시즌에는 전년도 MVP 멜 로하스 주니어가 일본 진출을 위해 퇴단하는 아쉬움 속에서도 KBO 사상 최초 정규 시즌 1위 결정전[132]까지 가는 대격전 끝에 한국시리즈 최다 진출팀인 삼성 라이온즈를 물리치고 정규 시즌 1위에 올라 한국시리즈에 직행했고, 7년 연속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게 된 두산 베어스를 4전 전승으로 스윕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따라서 해태 출신 감독 중 제일 성공한 사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강철도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는데 정확히 말한다면 리그에선 팀을 4년 연속 가을야구에 보냈고 1번의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을 기록하며 잘 나갔지만 국대 감독이 되고나서 치른 2023 WBC를 대차게 말아먹은 것. 결국 WBC가 끝나자 곧바로 잘리면서 타이거즈 출신 감독 잔혹사를 이어가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김종국이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부임되어 2022년부터 호랑이 군단을 맡게 되었다. 해태 타이거즈 출신 선수 + 감독은 김성한, 서정환, 선동열 이후 4번째이며 광주 출신 타이거즈 선수로 한정하면 선동열 이후 2번째 였던지라 그의 행보는 많은 주목을 받았다. 2022 시즌 5위로 겨우 가을 야구에 진출했지만 경직된 경기 운영 등으로 인해 벌써부터 팬들의 비판에 직면한 상태이며 2023 시즌에는 우승권 전력이란 소리를 듣던 팀이 6위에 랭크되어 가을 야구 진출에도 실패하며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성적만 봐도 타이거즈 출신 감독 잔혹사를 이어가긴 충분했지만 거기에 한 술 더 떠 배임수재 혐의를 받고 감독직에서 경질되며 잔혹사를 제대로 계승하고 말았다.
여담으로 선수 출신이 아닌 타이거즈 코치 출신 감독들도 그렇게 신통치는 못했다. 김응용 감독을 제외하고 해태에서 코치로 생활한 감독 중에서 우승을 경험한 감독은 김인식 감독이 유일하다. OB - 두산 베어스 감독으로 1995년 한국시리즈와 2001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했으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우승과 프리미어12 초대 대회 우승의 성과를 올렸다. 굳이 갖다 붙이자면 1994년부터 2년간 해태 2군 감독을 맡았던 김성근도 우승 경험이 있는 감독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김성근은 사실상 해태에서 이룬 성과가 딱히 없다.
해태 코치 출신 감독 중 최악의 사례는 김응용 감독 전성기 시절 수석코치 중 한 명이었던 유남호 감독이었다. 타이거즈에서만 코치로 14년을 일한 유남호는 2004 시즌 중반 김성한의 감독직 사퇴로 감독 대행을 맡은 이후 2005년 타이거즈 감독에 부임했으나 타이거즈 사상 최초의 리그 꼴찌라는 거대한 흑역사를 기록하고 한 시즌 만에 잘리게 된다. 이 외에 해태의 초대 감독이었던 김동엽 감독은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전 소속 팀이던 해태를 상대했지만 1무 4패로 무릎을 꿇었고, 이후에는 가을야구 문턱에도 가지 못했고, 해태와 삼성에서 감독 대행만 두 번 했던 조창수 코치 역시 감독으로서 올린 성과가 거의 없다.
심지어 해태 왕조의 군주였던 김응용도 해태와 삼성에서는 한국시리즈 통산 12회 출전, 10회 우승, 2회 준우승의 금자탑을 세우지만 2013년부터 2년간 한화 이글스 감독을 맡았다가 흑역사만 잔뜩 세우고 말았다. 김응용 역시 한화의 처참한 뎁스를 극복하지 못했다. 한화를 리빌딩 하려고 안간힘 썼으나, 후임 감독인 김성근에 의해 그 성과조차 희미해졌다.
8.3. 매년 샘솟듯 나오는 10승 투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타이거즈는 1982년 원년부터 구단명이 KIA로 바뀐 후인 2004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무려 23년 연속으로 10승 투수를 배출한 투수 왕국이다. 23년 연속 10승 투수 배출 구단은 타이거즈가 유일하다.[133]원년 시즌 투타를 넘나들었던 슈퍼스타 김성한과 구단 초창기 에이스 역할을 했던 이상윤·김용남을 비롯해 1980년대 중반부터 KBO 리그를 씹어먹은 선동열을 거쳐 1980년대 후반 이후 타이거즈의 마운드를 연달아 책임진 이강철, 조계현, 이대진 등도 10승 투수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게다가 타이거즈의 가세가 기울었던 1990년대 후반에도 최상덕이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투수 왕국으로서의 체면을 세웠다. 아래는 역대 타이거즈에서 매년 배출됐던 10승 투수들의 명단.
연도 | 10승 투수 이름(승수) |
1982년 | 김성한(10승) |
1983년 | 이상윤(20승), 김용남(13승) |
1984년 | 강만식(11승), 이상윤(10승) |
1985년 | 강만식(13승), 문희수(12승), 김용남(11승) |
1986년 | 선동열(24승), 차동철·이상윤(10승) |
1987년 | 선동열(14승) |
1988년 | 선동열·이상윤(16승), 차동철(10승) |
1989년 | 선동열(21승), 이강철(15승) |
1990년 | 선동열(22승), 이강철(16승), 조계현(14승) |
1991년 | 선동열(19승), 이강철(15승), 신동수(14승), 송유석(11승) |
1992년 | 이강철(18승), 김정수(14승), 신동수(13승), 조계현·문희수(10승) |
1993년 | 조계현(17승), 송유석(11승), 이강철·김정수·선동열·이대진(10승) |
1994년 | 조계현(18승), 이강철(12승), 송유석(10승) |
1995년 | 이대진(14승), 이강철·송유석(10승) |
1996년 | 조계현·이대진(16승), 이강철(10승) |
1997년 | 이대진(17승), 임창용(14승), 이강철(11승) |
1998년 | 이강철(15승), 이대진(12승) |
1999년 | 곽현희(11승) |
2000년 | 최상덕(12승) |
2001년 | 최상덕(12승) |
2002년 | 키퍼(19승), 리오스(14승), 김진우(12승) |
2003년 | 김진우·최상덕·신용운(11승), 리오스(10승) |
2004년 | 리오스(17승) |
2005년 | 없음[134] |
2006년 | 그레이싱어(14승), 김진우·한기주(10승) |
2007년 | 없음[135] |
2008년 | 윤석민(14승) |
2009년 | 로페즈(14승), 구톰슨(13승), 양현종(12승) |
2010년 | 양현종(16승) |
2011년 | 윤석민(17승), 로페즈(11승) |
2012년 | 앤서니(12승), 김진우(10승) |
2013년 | 없음[136] |
2014년 | 양현종(16승) |
2015년 | 양현종(15승), 스틴슨(11승) |
2016년 | 헥터(15승), 양현종·지크(10승) |
2017년 | 양현종·헥터(20승) |
2018년 | 양현종(13승), 헥터(11승) |
2019년 | 양현종(16승) |
2020년 | 양현종·브룩스·가뇽(11승) |
2021년 | 없음[137] |
2022년 | 양현종(12승), 이의리(10승) |
2023년 | 이의리(11승) |
2024년 | 네일(12승), 양현종(11승), 전상현(10승) |
9. 출신 현역 선수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단 하루라도 입었던 선수 중에서 여전히 현역 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 선수는[138] 2017 시즌 당시 임창용, 이호준, 김경언, 정성훈, 강영식 5명이 남았지만 2017 시즌 종료 후 임창용과 정성훈을 제외하고 전부 은퇴하거나 방출됐다.2016년 삼성에서 방출된 임창용이 KIA 타이거즈에 입단했고, 2018년 LG에서 방출된 정성훈이 다시 고향 팀 KIA 타이거즈에 입단하며 KIA는 마지막으로 남은 해태 출신 투-타 선수들을 모두 보유한 팀이 되었다. 둘 모두 빼어난 실력을 가지고서도 원치 않은 트레이드 대상이 되어[139] 오랫동안 돌고 돌아 다시 고향 팀으로 돌아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2018 시즌 종료 후, 정성훈이 KIA의 코치직을 받아들이며 현역에서 은퇴했고, 임창용은 KIA에서 방출된 뒤 새 팀을 찾지 못하고 은퇴함으로써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현역 선수는 전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20년 현재 해태 타이거즈를 1군 경기에서 상대해본 선수로 범위를 넓혀도 김주찬, 김태균 단 둘뿐이며[140], 당연히도 그들은 모두 고졸이고 대졸 선수 중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해본 최후의 생존 선수는 박한이.[141] 이제는 해태 타이거즈가 사라진 후 태어난 선수들이 프로에 입단하는 시절까지 와버렸다. 당장 타이거즈 역사상 두 번째 신인왕인 이의리가 해태가 사라진 후인 2002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2021년을 기준으로 김태균과 박한이, 김주찬도 모두 은퇴하면서 해태 타이거즈를 1군 무대에서 상대해본 선수들마저도 프로 무대에 남지 않게 되었고 해태 타이거즈를 2군에서나마 상대해봤거나 최소한 해태가 생존해 있을 때 현역이었던 선수도 이대호, 김강민 이렇게 둘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2022 시즌을 끝으로 이대호도 은퇴했고, 2024 시즌을 끝으로 김강민도 은퇴하며 해태를 겪어본 타 팀 선수들도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해태라는 이름을 달고 했던 마지막 드래프트인 2002년 드래프트[142]에서, 8개 구단들에게 지명된 선수들중 최후의 선수가 최형우인데 KIA 타이거즈로 이적후 아직까지 현역으로 뛰고있다.
해태 타이거즈가 치른 마지막 한국시리즈이자 우승 시즌인 1997년 한국시리즈를 경험한 현역 선수는 임창용과 이호준이 유이했으나 이호준이 2017 시즌을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나고 2018 시즌이 끝나고 임창용이 KIA에서 방출된 후 결국 은퇴하게 되면서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현역 선수는 이제 없어졌다.
10. 역대 성적
| 우승 |
| 준우승 |
| 포스트시즌 진출 |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
연도 | 정규 시즌 순위 | 최종 순위 | 구단명 | 경기 수 | 승 | 무 | 패 | 승률 |
1982 | 4위/6팀[143] | 4위 | 해태 타이거즈 | 80 | 38 | 0 | 42 | 0.475 |
1983 | 2위/6팀[144] | 우승 | 100 | 55 | 1 | 44 | 0.556 | |
1984 | 5위/6팀[145] | 5위 | 100 | 43 | 3 | 54 | 0.443 | |
1985 | 3위/6팀[146] | 3위 | 110 | 57 | 1 | 52 | 0.523 | |
1986 | 2위/7팀[147] | 우승 | 108 | 67 | 4 | 37 | 0.644 | |
1987 | 2위/7팀[148] | 우승 | 108 | 55 | 5 | 48 | 0.532 | |
1988 | 1위/7팀[149] | 우승 | 108 | 68 | 2 | 38 | 0.639 | |
1989 | 2위/7팀 | 우승 | 120 | 65 | 4 | 51 | 0.558 | |
1990 | 2위/7팀 | 3위 | 120 | 68 | 3 | 49 | 0.579 | |
1991 | 1위/8팀 | 우승 | 126 | 79 | 5 | 42 | 0.647 | |
1992 | 2위/8팀 | 3위 | 126 | 71 | 1 | 54 | 0.567 | |
1993 | 1위/8팀 | 우승 | 126 | 81 | 3 | 42 | 0.655 | |
1994 | 3위/8팀 | 3위[150] | 126 | 65 | 2 | 59 | 0.524 | |
1995 | 4위/8팀 | 4위[151] | 126 | 64 | 4 | 58 | 0.524 | |
1996 | 1위/8팀 | 우승 | 126 | 73 | 2 | 51 | 0.587 | |
1997 | 1위/8팀 | 우승 | 126 | 75 | 1 | 50 | 0.599 | |
1998 | 5위/8팀 | 5위 | 126 | 61 | 1 | 64 | 0.488 | |
1999 | 드림 4위/4팀 | 드림 4위 | 132 | 60 | 3 | 69 | 0.465 | |
2000 | 드림 4위/4팀 | 드림 4위 | 133 | 57 | 4 | 72 | 0.442 | |
이후 역사는 KIA 타이거즈로. |
리그를 대표했던 최강팀이었던 만큼 삼성 라이온즈와 함께 구단 역사상 단 한 번도 페넌트레이스 최종 순위에서 최하위를 한 적이 없다. 물론 꼴찌에 가까웠던 해도 있었는데 1983년 우승 후유증을 겪었던 1984년은 삼미 슈퍼스타즈 덕분에 꼴찌를 면했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구단의 살림이 어려워진 이후에는 하위권에 가까웠는데 구단의 말년 시점이던 1999년과 2000년에 드림리그 꼴찌(4위)를 하기는 했지만 전체 구단 성적으로 치면 꼴찌는 아니었다. 1999년은 해태보다 살림살이가 더 처참했던 쌍방울 레이더스가 꼴찌로 처졌고 2000년은 그 쌍방울의 유산을 기반으로 재창단한 SK 와이번스가 있어서 해태가 꼴찌를 면했다. 하지만 역대 통산 꼴찌 0회의 빛나는 성과는 후신 KIA가 2005년과 2007년 두 번이나 꼴찌로 추락하며 해태의 위업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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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 OB 베어스 | ★ 1회 | ||
1983 | 해태 타이거즈 | ★ 1회 | ||
1984 | 롯데 자이언츠 | ★ 1회 | ||
1985 | 삼성 라이온즈 | ★ 1회 | ||
1986 | 해태 타이거즈 | ★ ★ ★ ★ ★ 5회 | ||
1987 | ||||
1988 | ||||
1989 | ||||
1990 | LG 트윈스 | ★ 1회 | ||
1991 | 해태 타이거즈 | ★ ★ ★ ★ ★ ★ 6회 | ||
1992 | 롯데 자이언츠 | ★ ★ 2회 | ||
1993 | 해태 타이거즈 | ★ ★ ★ ★ ★ ★ ★ 7회 | ||
1994 | LG 트윈스 | ★ ★ 2회 | ||
1995 | OB 베어스 | ★ ★ 2회 | ||
1996 | 해태 타이거즈 | ★ ★ ★ ★ ★ ★ ★ ★ ★ 9회 | ||
1997 | ||||
1998 | 현대 유니콘스 | ★ 1회 | ||
1999 | 한화 이글스 | ★ 1회 | ||
2000 | 현대 유니콘스 | ★ ★ 2회 | ||
2001 | 두산 베어스 | ★ ★ ★ 3회 | ||
2002 | 삼성 라이온즈 | ★ ★ 2회 | ||
2003 | 현대 유니콘스 | ★ ★ ★ ★ 4회 | ||
2004 | ||||
2005 | 삼성 라이온즈 | ★ ★ ★ ★ 4회 | ||
2006 | ||||
2007 | SK 와이번스 | ★ ★ 2회 | ||
2008 | ||||
2009 | KIA 타이거즈 | ★ ★ ★ ★ ★ ★ ★ ★ ★ ★ 10회 | ||
2010 | SK 와이번스 | ★ ★ ★ 3회 | ||
2011 | 삼성 라이온즈 | ★ ★ ★ ★ ★ ★ ★ ★ 8회 | ||
2012 | ||||
2013 | ||||
2014 | ||||
2015 | 두산 베어스 | ★ ★ ★ ★ ★ 5회 | ||
2016 | ||||
2017 | KIA 타이거즈 | ★ ★ ★ ★ ★ ★ ★ ★ ★ ★ ★ 11회 | ||
2018 | SK 와이번스 | ★ ★ ★ ★ 4회 | ||
2019 | 두산 베어스 | ★ ★ ★ ★ ★ ★ 6회 | ||
2020 | NC 다이노스 | ★ 1회 | ||
2021 | kt wiz | ★ 1회 | ||
2022 | SSG 랜더스 | ★ ★ ★ ★ ★ 5회 | ||
2023 | LG 트윈스 | ★ ★ ★ 3회 | ||
2024 | KIA 타이거즈 | ★ ★ ★ ★ ★ ★ ★ ★ ★ ★ ★ ★ 12회 |
KBO 리그 역대 왕조팀 | |
★★★★ 1986~1989 해태 타이거즈 (해태 왕조) | ★★★★ 2011~2014 삼성 라이온즈 (삼성 왕조) |
왕조를 달성한 당시 구단명과 엠블럼으로 서술함 | |
다른 틀 둘러보기: 일본프로야구 역대 왕조팀 ·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대 왕조팀 한국프로축구 역대 왕조팀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역대 왕조팀 |
1983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구단 | ||||
OB 베어스 | → | 해태 타이거즈 | → | 롯데 자이언츠 |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구단 | ||||
삼성 라이온즈 | → | 해태 타이거즈 | → | LG 트윈스 |
1991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구단 | ||||
LG 트윈스 | → | 해태 타이거즈 | → | 롯데 자이언츠 |
1993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구단 | ||||
롯데 자이언츠 | → | 해태 타이거즈 | → | LG 트윈스 |
1996년, 1997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구단 | ||||
OB 베어스 | → | 해태 타이거즈 | → | 현대 유니콘스 |
[1] 이후 무등 야구장은 KIA 타이거즈가 2013년까지 사용하다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로 옮겨간 후에는 아마추어 전용 야구장이 되었다.[2] 전라북도 연고 제8 구단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 전까지 전북은 해태의 광역 연고지였다. 이 때문에 전주를 홈경기 분산 개최 도시로 선정했다.[3] 단일 리그 기준[4] 전기+후기[5] 창단 당시에는 전라남도 광주시였다.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하며 전라남도에서 분리한 것은 1986년이었다.[6] 1997년 한국시리즈 일주일 후 부도가 났다.[7] 출처[8] 1984년에야 광주공장을 세웠으며, 창단 당시엔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당시 본사)과 경기 안양에 공장을 각각 뒀다. 더불어 해태제과 창업주 4인 중 하나인 송당 박병규 사장의 고향이 광주광역시이기도 했다.[9] 김연수 창업주가 전라북도 고창군 출신이다.[10] 박인천 창업주가 전라남도 나주시 출신이며 금호그룹의 모태가 된 금호고속도 원래는 광주에서 출발한 택시 회사였다.[11] 신용호 창업주가 전라남도 영암군 출신이다.[12] KBO 리그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호헌(前 MBC 야구 해설)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호남 출신 후보 기업군 중에서 프로 야구단을 맡을 만한 능력이 되는 대기업은 매우 적었다"라고 했을 정도로 호남의 기업 경제 기반은 수도권이나 영남권에 비해 매우 취약한 편에 속했다. 참고로 저 세 기업 모두 스포츠 쪽 보다는 문화 예술 분야나 학술 지원 분야에 더 관심이 많은 기업들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을 통해서 클래식 음악과 순수미술 분야 쪽을 꾸준히 지원해 왔고 교보그룹은 창업자 신용호 회장의 호를 딴 대산문학상을 통해 문학계 인재 양성 쪽에 큰 공을 들였다. 그리고 2020년대에는 금융권은 별도 법인을 세워야 하는 프로 스포츠단을 보유할 수 없다는 법령 때문에 키움 히어로즈처럼 구단 메인 스폰서를 맡는 정도가 한계다. 다만 하나금융그룹의 대전 하나 시티즌처럼 법을 우회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삼양그룹 역시 창업자 김연수 회장의 호를 딴 수당재단을 통해 중고교 장학 사업을 전개해 왔다. 그나마 삼양사는 휘하에 사이클 실업단을 두고 있기는 하다. 그리고 정말로 금호가 프로 야구단을 창단했다면 그 이전부터 망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반면교사가 있기 때문이다.[13] 프로 야구 원년(1982년) 시즌이 개막하기 2년 전에 광주에서 어떤 사건이 터졌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금방 나온다.[14] 아이러니하게도 스포츠경기는 사람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많이 모일 수 있고, 시끌벅적해도 아무렇지 않은 행사이다. 그렇다보니 군부독재 타도와 같은 구호가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당시에는 2000년대의 응원가 문화가 아직 없었지만, 현재의 야구팬들이 경기가 끝나고 구장앞에서 응원가를 부르며 뒷풀이하는 문화처럼, 이 당시에도 응원이후 시위로 번질 가능성을 청와대는 두려워 했다. 그래서 후술되어 있듯이 5월 18일에는 82년부터 99년까지 광주 홈경기를 잡지 않았다.[15] 박인천 회장은 결국 1984년에 세상을 떠났다.[16] 박인천 회장의 장남으로 앞서 언급된 박삼구 회장의 맏형이다.[17] 실제로 박성용 회장은 스포츠보다 클래식 애호가로 더 유명했다. 서울에 있는 금호아트홀에는 박성용 회장의 지정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광화문 금호아트홀은 2019년 5월 1일부터 경영 악화로 폐관했고 연세대학교 서울캠퍼스에 금호아트홀 연세를 지어 명맥을 잇고 있다.[18] 실제로는 금호그룹이 프로 스포츠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풍토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에도 금호그룹은 계열사인 금호생명에서 잠깐 여자 농구단(OK저축은행 읏샷에서 부산 BNK 썸으로 바뀌면서 역사 단절)을 운영한 것을 제외하면 프로 스포츠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1988년에 축구계의 요청으로 호남 연고 컨소시엄 구단을 창단하려다가 포기했고 2003년에도 서울 연고 프로 축구단을 창단하려 했으나 광주/전남권의 초강력 반발로 재차 포기했다. 그뿐만 아니라 삼성처럼 체계가 탄탄하지 못한 것도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19] 당시 현대그룹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해야 된다는 이유로 고사했고 LG그룹은 구자경 회장이 해외에 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실무진에서 책임질 수 없는 큰 결정을 할 수 없기에 고민만 하다가 결국 MBC 청룡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때문에 구자경 회장에게 한소리 들었다고 한다. 이후 현대그룹은 1995 시즌 이후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면서 LG는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하면서 야구판에 들어가게 된다. 선경그룹은 본디 야구뿐 아니라 스포츠단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전두환의 반농담으로 인해 축구단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게 바로 유공 코끼리였다. 그리고 선경그룹은 2000년 쌍방울 레이더스를 해체 후 재창단 방식으로 인수해 SK 와이번스를 창단하며 야구판에 입성했지만 2020 시즌이 끝나고 신세계그룹에 야구단을 매각했다. 한 술 더떠 대우는 기업이 해체될 때까지 야구와 연관된 적이 아예 없었다.[20] 2000년대 이후로 한국 5대 그룹으로 언급될 정도로 성장한 롯데지만 1980년대 당시 롯데는 재계 서열 49위의 그저 그런 기업이었다.[21] 일본도 사실 프로 야구 참가 기업 면면을 보면 재계 일류 기업은 아니다. 언론사(요미우리, 주니치), 철도 회사(한신, 세이부), 유통 기업(라쿠텐), 식품 회사(니혼햄, 야쿠르트, 롯데), 인터넷 기업(DeNA), 2선급 자동차 회사(마쓰다), 금융업체(오릭스) 등. 그나마 일류 기업이라고 할 만한 게 소프트뱅크 정도다. 과거에는 한신을 포함해 고쿠테츠(국철, 야쿠르트 전신), 니시테츠(세이부 전신), 난카이(다이에 - 소프트뱅크 전신), 한큐(오릭스의 전신), 킨테츠(오릭스에 합병) 등 아예 철도 회사로 12개 구단 중 절반(6개 구단)을 채웠고 특히 칸사이권 4개 구단(한신, 난카이, 한큐, 긴테츠)은 모두 철도 회사 산하 구단이었다. 그래서 일본도 한국과 같이 기업명제로 운영하는 것이다. 물론 일본은 다이요가 연고지를 요코하마로 옮기고 이름을 바꾸면서(다이요 웨일스→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지역명 호칭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22] 삼성 입장에선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삼성이 지금처럼 대한민국 원탑에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현대, 럭키금성, 대우와 더불어 대한민국 4대 재벌이고 프로 야구단을 창단하기로 한 타 기업(롯데그룹, 해태제과, 삼미그룹, 문화방송)은 다 삼성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삼성이 아닌 타 대기업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23] 그렇게 경쟁자들을 비하했던 삼성은 프로 야구가 시작되자마자 MBC에게 7:11 대역전패라는 매운맛을 본 것을 기점으로 2001년까지 그렇게 비하했던 기업들이 세운 구단들에게 매운맛을 제대로 보게 된다. 당장 원년 한국시리즈에서 OB에게 우승을 내줘야 했고(이후 팀명을 두산으로 바뀐 뒤에도 베어스는 2001년, 2015년에 삼성을 상대로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삼성도 그냥 당하진 않고 2005, 2013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을 상대로 설욕에 성공한 적도 있다.)해태에게만 우승을 3번 빼앗겼으며(86,87,93) 져주기 게임까지 감행하며 한국시리즈 상대로 골랐던 롯데에게도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한 방 먹으며 준우승에 그쳤다. 한국시리즈만 봐도 이정도지 준플레이오프나 플레이오프까지 따지면 이렇게 아래로 본 구단들에게 물을 먹은 횟수는 더 많다. 특히 2016년부터는 하위권을 전전하며 이런 구단들보다 아랫순위에 위치하고 있는 걸 보면 이 당시 타 기업들을 피래미라 무시했던 삼성 윗선들이 뒷목을 잡을 상황이다.[24] 박건배 해태 회장과 김동엽 감독은 서울 경복고등학교 선후배였다. 프로 야구 창립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감독 한 명쯤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실 상징성을 감안하면 호남 야구를 대표하는 인사인 김양중이나 최관수가 감독을 맡는 게 합당했지만 김양중은 이미 일선 지도자에서 물러난 지 15년이 지난 상황이었고 최관수는 이 시기에 파킨슨병 투병 생활 중이라 일선에 나설 수가 없었고 원래 호남 출신도 아니었다. 즉, 인맥도 인맥이거니와 마침 호남 대표 야구인들 중 감독을 맡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네임벨류가 있는 감독인 김동엽은 환영받을 인사였다.[25] 원래는 광주 출신이지만 그가 다니던 광주동신고등학교 야구부가 해체하면서 신일고로 전학했다.[26] 그래서 대구에서 태어나서 중학교 때까지 대구에서 살았지만 경북고 진학에 실패하는 바람에 고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와서 대광고를 나온 김재박이 대구 연고 구단 삼성이 아닌 서울 연고 구단 MBC 청룡으로 가게 됐던 것이다.[27] KBO 리그 출범 당시만 해도 광주는 전라남도 산하의 일반시였다. 광주가 직할시로 승격된 시점은 해태가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직후인 1986년 11월 1일이다.[28] 현시점에서 호남권의 전통 강호로 평가받는 광주일고와 광주동성고(이당시는 광주상고), 광주진흥고는 이시기에는 이제 막 비상을 시작하던 시기라 비상을 주도하는 선수들이 프로무대에 오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실제로 해태의 대표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광주일고, 광주상고의 핵심 선수였던 선동열과 이순철도 프로야구 창단 당시에는 대학생이라 이미 대학중퇴자 3명을 영입한 해태 입장에서는 영입이 불가능했고 이들은 대학을 졸업한 뒤인 1985년에 입단하게 된다.[29] 광주의 또 다른 학교인 광주진흥고는 프로 야구 출범 시점에서 1977년 봉황대기 준우승, 1981년 황금사자기 준우승이 전부였을 정도로 출발이 늦었다.[30] 실제로 이걸 준비했던 대표 사례가 나성범이다.[31] 이마저도 1984년 각 군에서 운영하던 팀들이 국군체육부대로 일원화되면서 문턱이 좁아지게 된다. 프로 선수들은 그조차도 지원이 불가능했다.[32] 김일권은 그해 53도루로 초대 도루왕을 차지하며 해태에 큰 보탬이 되었다.[33] 참고로 2024년 현재에도 이 기록은 유효함으로 절대 깨지지 못할 기록으로 남겼다. 순위가 결정된 일회성 경기에서 강우 콜드가 나오면 모를까 투수가 완투할 일도 별로 없는 요즘 시대에서는 희귀할 수밖에 없다.[34] 김성한은 원래 투수 출신으로 동국대 시절까지 투수를 했으나 타격에 더 재능이 있는 걸 발견한데다 결정적으로 팔꿈치 부상이 생기며 타자로 완전 전향했다. 다만 세간에서 당시 선발 투수로 활동했다고 인식하는 것과는 달리 26경기 출장(김성한은 원년 모든 경기에 출장했으며 26경기란 잠깐이라도 투구를 한 경기를 의미한다.) 중 5경기만 선발로 나왔다. 즉 주로 나온 포지션은 구원 투수라는 것. 실제로 이렇게 투수로 뛰면서 팔꿈치에 다시 문제가 생기기도 했던 탓에 1982 시즌 후 인터뷰에서 "너무 힘들어서 자청해서 마운드에 올라 죽도록 던지고 다시는 투수를 할 수 없도록 팔이 영영 고장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물론 훗날에는 나중에 생각해보니 힘들었던 건 생각 안나고 재밌었다고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당시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투타 양면에서 모두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것을 보면 그저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35] 창단은 14명이었지만 뒤에 김일권을 포함에서 몇 명이 더 들어오기는 했다.[36] 프로 야구 출범 당시 KBO에서 선수들의 롤 모델로 지정한 것만으로도 그 위상을 알 수 있다.[37] 무등 야구장 1루 덕아웃 옆에 캐치프레이즈 문구가 새겨진 현수막이 항상 걸려 있었다.[38] 요즘처럼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팀의 코칭스태프로 활동하는 것 등과는 꽤 거리가 먼 것이었다. 1981년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지만 여전히 만 40세가 채 되지 않았던 김응용은 미국 조지아 주의 서든 칼리지에 학생으로 입학하는 한편 학교 야구부의 보조 코치를 자청했다. 말하자면 그는 대학야구의 한 구성원이자 조교쯤 되는 위치에서 미국 야구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길지 않은 시간을 머물다 온 셈이었고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선진국 야구를 배우고 돌아왔다는 설명이 민망할 정도로 유치한 경력일 수 있다.[39] 여담으로 이 트레이드는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첫 선수 트레이드로 역사에 남아 있다.[40] 이때 광주 시민들이 밤중에 삼미 선수들의 숙소로 가서 꽹과리를 두드리거나 고성을 지르는 등 휴식을 방해했다.[41]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김성한, 정회열이 김응용의 자율 야구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김성한은 김응룡의 지론은 "연습을 길게 하면 선수가 부상을 입는다"라고 말했고, 정회열은 해태가 자율 야구를 제일 먼저 도입한 팀이었다고 밝혔다.[42] 더하여 한대화가 트레이드로 영입되었을 때 지병이 있는 한대화가 충분히 수면을 취하며 훈련할 수 있게 배려를 한 것도 김응룡 감독이었다.[43] 공교롭게도 당시 MBC 감독은 바로 전해 감독직에서 물러난 김동엽이었다. 그는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한껏 복수심을 불태웠지만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한국시리즈 개막이 약 1주 정도 연기되었고 그 와중에 터진 선수단 훈련 문제와 보너스 지급 문제로 인해 선수단의 결속력이 와해되면서 해태에게 속절없이 깨지고 만다.[44] 후술하게 되는 이른바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사건'이 1984 시즌 초에 발생하게 된다.[45] 물론 그 와중에도 후기리그 우승을 두고 삼성, OB, 롯데와 경쟁을 하는 저력을 보여주긴 했다.[46] 1984년은 롯데 자이언츠가 슈퍼스타 최동원을 내세워 삼성을 격파해 우승하였고, 1985년은 삼성 라이온즈가 최강 전력을 뽐내며 1985년 전후기 통합우승을 차지했다.[47] 연세대로 진학하기로 한 송유석은 해태에 연습생으로 입단했고 1987년부터 1군에서 기회를 잡기 시작했다.[48] 이후 4년 연속 우승은 2011~2014년까지 연속 우승을 차지한 삼성 라이온즈가 달성했다. 역으로 말하면 해태 이후 기록이 달성되기 까지 25년의 세월이 걸린 샘이다.[49] 특히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횟수도 2011년 SK 와이번스가 5년으로 갱신하기 전까지 최다 연속 진출 기록이기도 했다. 이후 SK는 2012년에도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으며 기록을 6년 연속으로 늘렸고 삼성 라이온즈가 2015년에 5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해태의 기록을 3위로 몰아냈다. 이후 두산 베어스가 2015~2021년까지 7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한국시리즈 최다 연속 진출 기록을 갱신하면서 해태의 기록은 4위로 밀려났다.[50] 김준환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밝히길 부인이 첫째를 낳고 중병(혈소판 감소증)에 걸려 집, 야구장, 전남대병원을 왔다갔다 하느라 정규 시즌에서 2할을 간신히 넘는 타율을 기록했으나 한국시리즈에서 활약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51] 패전 처리조로도 출전하였다.[52] 당시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이 경기에서 선동열은 김시진이 보유하고 있던 KBO 통산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우는 동시에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이 된 29번째 완봉승을 기록했다.[53] 다만 밸런스적으로는 91년보다는 약했다. 그래도 선동열이 마무리 전향을 계기로 몬스터 시즌을 만들어낸 덕분에 91년에 뒤지지 않는 강력한 투수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54] 이 룰이 제정된 이유도 다소 황당한데 1992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부터 올라온 롯데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자 정규시즌 승률이 낮은 4위팀이 준플레이오프 1차전을 승리로 시작해 우승할 가능성도 제기되어 이를 막기 위함이었다...[55] 결국 이 룰은 1999년 양대리그제로 개편되며 폐지되고 2001년 단일리그로 복귀하고나서도 적용되지 않게 된다.[56] 현시점에서 본다면 2시즌 연속 4위면 그래도 포스트시즌 진출인데 왜 부진이냐 할 수 있겠지만 당시 해태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던 탓에 해태가 4위에 랭크된다는 사실도 사람들이 이해를 못한 것이다.(...)[57] 여담으로 2강은 현대와 롯데 4중은 LG, OB, 삼성, 한화였다. 물론 결과가 말해주듯 언론들의 예측은 현대를 제외하면 완벽하게 빗나갔다. 2약으로 예측한 해태와 쌍방울이 명백히 정규리그 1, 2위를 찍었기 때문이다.[58] 원래 해태의 지명을 피하려고 연세대로 진학했다 알려졌으나 박재홍 본인이 해태 측에서 대학을 먼저 다녀오라 권유해서 대학으로 간 것이라고 밝혔다.[59] 당시 현장의 회고에 따르면 사실상 인질극과 비슷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수들이 대처할 방법도 없었다고.[60] 당시 박재홍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무려 홍현우를 요구했는데 해태 입장에선 죽었다 깨어나도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이었다.[61] 그나마 김상훈은 대학 졸업 후 합류하며 2000~2012년까지 타이거즈의 안방을 지켜줬지만 서재응은 대학을 중퇴하고 메이저리그로 가버리면서 지명 후 12년이 지난 2008년이 되고 나서야 타이거즈에 합류하게 된다.[62] 물론 그상황에서도 들어올 명선수들은 들어왔다. 오늘날도 타이거즈 대표 프랜차이즈로 기억되는 장성호와 김종국, 타이거즈에서 프로 데뷔를 해서 SK와 NC의 강타자로 명성을 날린 이호준이 데뷔한 시즌이 바로 1996년이기 때문이다.[63] 최다 안타는 2014 시즌 넥센 히어로즈의 서건창이 201안타로 경신하였다.[64] 물론 이것이 타이거즈 특유의 똥군기 문화를 나았다는 비판도 존재하며 이런 비판은 타이거즈 올드팬덤과 현대팬덤을 불문하고 전부 수긍되는 편이다. 실제 해태 문화를 경험한 이종범과 이대진이 괜히 고참이 되고 나서 이런 문화를 전부 정리한 것이 아니다.[65]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김대중부터 노무현까지 이어지는 민주당 집권기이기도 했다.[66]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 우승하고 정확히 1주일 후 모기업인 해태제과가 부도났다.[67] 당시 한국시리즈 우승에 목말라 있던 구단으로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서라면 물 불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돈으로 승부했다.[68] 물론 어디까지나 이종범과의 비교고 장성호가 주자로서의 주력은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69] 홍현우는 1998 시즌 잠시 부진했지만 1995년~1997년 3년 내내 KBO 골든글러브 및 3할을 유지할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모 성님께서 1995년/96년 일시적으로 부진하면서 뭔가 조짐이 이상하기 시작했다.[70] 해태가 1993년부터 해태가 멸망할 때까지 8년 연속으로 1번 타자들은 전체 구단 1번 타자의 최고 생산력을 기록했다. 1991~1992의 이순철도 대단했지만 동시기에 빙그레의 이정훈이 있었다. 말하자면 1990년대의 해태 1번 타자들은 도루를 빼도 웬만한 구단의 3번 타자를 훨씬 능가하는 생산력을 자랑했다![71] 가까운 근래로 2023시즌 오지환과 박찬호의 골글대결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72] 승패는 같지만 10승 8패로 LG에 우위를 보였기에 준플레이오프 1차전은 광주에서 치르게 되는 것이었다.[73] 숀헤어는 당해년도 타율 0.206 무홈런 14안타, 3타점이 전부였다. 그 꼴찌를 한 롯데 자이언츠의 용병인 덕 브래디 보다도 못한 결과였다.[74] 게다가 트라이아웃에서 지명했던 투수 윌리엄 채드 저비와도 계약하지 못하면서 외국인 선수 덕을 전혀 못 봤다.[75] 임창용에 앞서 삼성은 위에 서술한 것 처럼 조계현을 이미 4억 원에 사갔었다. 비슷한 시기에 삼성은 이순철, 정회열을 영입했는데 이쪽은 해태에서 방출된 것을 영입한 것이다.[76] 역시 마무리투수와 중심타자의 가치 차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압도적인 마무리투수는 1994, 97년의 이종범급이 아닌 이상 아무리 뛰어난 타자라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양준혁은 1년간 32홈런, 21도루를 기록하며 괜찮게 활약했지만 곽채진은 임창용만큼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152], 황두성은 아예 1군에서 10경기도 뛰지 못하고 2000년 시즌 후 방출되었다. 그리고 그는 현대로 들어가 현대의 마지막 세이브 투수가 된다.[77] 양준혁이 떠난 이듬해 해태는 이호준을 SK로 보내고 홍현우마저 길고긴 하락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절반도 안되는 86홈런을 기록한다. 파크 팩터상 광주가 잠실보다 홈런이 잘나오는 구장이므로 해태 입장에선 매우 쪽팔린 기록이다.[78] 샌더스는 당시 40홈런, 94타점 .247/.408/.575를 기록했다. 타율만 가지면 공갈포지만 이해 출루율이 타율 2위(.349)의 이병규를 능가할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101개의 볼넷 뒤에는 133개의 삼진 또한 있었다. 즉 이 선수는 홈런/볼넷/삼진 3개중 하나였던 독특한 선수였다. 그 뒤를 이은 진정한 선수가 등장한다.[79] 보정을 하면 리그에서 더 상대 우위를 보인 시즌 여러 개에 밀린다. 그래도 팀 역사상 상위권 타선은 맞다.[80] 한 이닝에 10득점 이상을 기록할 때, 당시 전광판들은 이닝별 점수를 한 자릿수밖에 표시하지 못하는 성능 때문에 9를 넘어서면 10=A, 11=B 등으로 숫자를 알파벳으로 표기했다.[81] 4년 후에 이승엽이 56홈런을 친 삼성이 깼다.[82] 2000년 현대가 깼다.[83] 그 요인에는 괴물이었던 트레이시 샌더스의 활약이 컸다. 잠실에서만 무려 9개의 홈런을 치며(이승엽이 1999년 잠실에서 4개 2003년 2개를 쳤다는 것을 기억하자. 물론 이승엽이 잠실에서 잘했던 적도 있었다 1998년에는 무려 8개, 2002년에는 7개를 쳤었다. 하지만 샌더스에게는 안됐다.) 진정한 파워히터의 홈런은 구장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하지만 홍현우와 양준혁도 잠실에서 많은 홈런을 기록했으며, 홈런과는 관계없는 최해식이나 박계원도 잠실에서 홈런을 기록할 만큼 이팀은 이해에 홈런에서만큼은 복이 있었다.[84] 그와 반대로 해태의 2연속 우승이었던 1996,97년에는 OB 베어스를 상대로 잠실에서 단 한개의 홈런도 기록하지 못하면서 피홈런만 15개를 기록했다. 잠실이 아무리 넓다 해도 18경기에서 홈런을 단 한 개도 치지 못한 것 또한 진기록이다. 반면 LG 트윈스상대로는 1997년에만 9경기에서 7개의 홈런을 치긴 했다.[85] 이것은 다른 잠실 팀 원정 경기까지 합산이다.[86] 개인 경력 최다 이닝.[87] 근 20년이 흘러 유희관이 6점대 10승 투수가 된다.[88] 최상덕은 이미 1995년도에 부상이 있어서 1997년도 까지 제대로 못 뛰었다가 1998년도 서서히 회복하였다.[89] 그 빈 2루수 자리는 홍현우가 채우게 된다.[90] 현재 그러한 기조는 두산 베어스가 뒤를 잇는다. 이쪽은 정반대로 기본적으로 수비 좋은 선수를 뽑고 쓴다는 기조 때문에 수비가 안되는 선수는 어떻게든 경기에 나오기 위해 1루, 좌익 등의 포지션으로의 전향을 활발히 하고, 거기서도 낙제점 판정을 받으면 1군에 올라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다름 아닌 김재환이 그런 케이스의 전형으로, 15년도까진 타격도 타격이지만 포수, 1루수로서의 수비력이 1군급에 아예 못 미치는 수준이었기에 2군 선수에 그쳤지만 그나마 좌익수로서 자리를 잡으면서 주전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91] 정확히 말하면 원년~2021년까지 해서 가장 최악은 2015년, 그 다음이 2021년, 세 번째가 2000년 해태다.[92] 실제로 피타고리안 승률은 고작 .397로 오히려 7위였던 한화보다도 낮았다.[93] 참고로 1999 시즌부터 2001 시즌은 원조 타고투저 시대였다.[94] 그러나 2000시즌을 제대로 말아먹고 1년만인 2001년에 다시 타이거즈로 돌아왔다.[95] 이 이후 홍현우는 더 이상 반등하지 못하고 FA 먹튀가 되어 커리어를 마감하였다.[96] 사실 이때는 외국인 선수 제도 도입 초기였기 때문에 교체 한도가 규정되어 있지 않아 구단이 원하면 언제든지 영입했다가 성적이 신통치 않거나 맘에 안 들면 방출시키고 새로운 선수를 데려올 수 있는, 말 그대로 '용병'에 부합한 형태였다. 이후 1년 뒤인 2001년에도 한화 이글스가 무려 5번이나 외국인 선수를 교체해댔고, 결국 2002 시즌부터 한 팀당 최대 2회로 교체한도를 지정하게 되었다.[97] 그나마 이 시즌에는 외부에서 들어온 이동수, 신동주, 산토스등이 장타력을 선보이며 해결된다.[98] 불과 4경기지만 평자가 3.00일 정도로 안정적인 피칭을 했다. 그러고도 조기 퇴출 당한 이유는 저 문단 참고.[99] 물론 2001 시즌은 삼성-현대-두산 3강 체제에 5개 팀이 나머지 한 장의 가을잔치 티켓을 놓고 유례없는 전쟁을 치를 때였다. 2001 시즌의 롯데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순득점(득점-실점)+, 그것도 48점이나 득점이 실점보다 많음에도 꼴찌를 차지하는 수모를 당했고, 이게 고 김명성 감독의 타계와 함께 8888577이라는 비밀번호로 이어졌다.[100] 2001년 7월 29일 경기는 마지막 홈경기고(마지막 홈경기 상대가 삼성이었고 당시 감독은 해태 왕조를 이끌었던 김응용이었다), 진짜 해태의 고별 경기는 동년 7월 31일 인천 SK 와이번스전이었지만 우천 순연되었다.[101]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스포츠에 인색한 편이며 상대적으로 문화예술 쪽에 투자를 많이 한다고 한다.[102] 2000년 이전까지 일부 택시 기사는 기아자동차, 삼성광주전자를 지역 기업이 아닌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103] 이글스가 '한화'라는 이름으로 치른 정규시즌 첫 경기이기도 하다.[104] 나머지 한 팀은 윤석환, 유희관 외에는 제대로 된 왼손 투수가 없던 두산 베어스.[105] 이 중 이종범은 야구만 오른손으로 치고 던졌고 나머지 일상생활은 왼손으로 하는 왼손잡이다. 좌타자를 해보지 못한 한은 아들을 통해 풀고 있다. 하필 야구를 처음 시작할 때 야구부에 좌투용 글러브가 없어서 어쩔수 없이 오른손으로 야구를 했다고. 특히 이 시기는 우투좌타나 좌투우타, 하다 못해 스위치 히터 같은 개념이 없던 시대라 공격과 수비 모두 한손으로만 하는 게 지배적이었다. 이종범 본인도 나중에 우투좌타 개념을 알고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하고 후회했었다고 한다. 물론 막상 해보니 우타자가 잘 맞았던 것도 있고 좋은 성적도 냈지만.[106] 그나마도 해태 왕조 시대 이후인 해태 말기~KIA 초반 6년 시절이 전성기인 선수이다.[107] 거기에 이 좌완들도 뭔가 하나 모자란 선수들이었다. 김정수만 보더라도 제구력이 워낙 나빠서 김응용이 내가 발로 던져도 너보단 잘할 것이라고 까버렸고 강태원은 성준처럼 구속이 느린데다가 구종도 단순했다.[108] 모기업이 부도로 쓰러지기 1년 전이던 당시 2억 4,000만 원은 해태로서는 너무나 큰 투자였다. 실제로 오철민이 받은 계약금은 김진우(7억 원)가 입단하기 전까지 해태 투수 최고액이었다. 그나마 김진우는 해태가 KIA로 바뀌기 직전인 2001년에 지명을 받은지라 지명만은 해태에게 받은 경우였다. 물론 계약금은 KIA가 줬지만.[109] 오죽했으면 1990년 말 신인드래프트 때 광주일고 - 인하대 거포 김기태와 광주진흥고 - 한양대 우완 에이스 투수 오희주를 두고 고심했다가 오희주를 지명했다. 그러나 프로 데뷔 이후 둘의 차이는 천지 차이였다. 김응용 감독도 김기태를 못데려온걸 제일 아쉽게 생각한다고. 만약 김기태가 해태 유니폼을 입었다면 해태 전성기는 더욱 더 연장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송유석은 오희주도 10승 투수들이 즐비한 선발투수진과의 경쟁에서 패했는데 김기태가 설령 해태로 왔다고 하더라도 기존 선수들과의 경쟁이 치열해서 쌍방울 입단이 오히려 더 개인에겐 잘 된 것 같다는 의견을 내비쳤다.[110] 이상하게도 이 선수들은 빨간 유니폼을 입자마자 모두 폭망했다. 특유의 팀 분위기에 적응을 못했다거나 그 외 모종의 사건이 있었을 듯하다.[111] 한국에서 제일 많은 성씨가 김씨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른손잡이다.[112] 장성호, 양준혁, 트레이시 샌더스를 주축으로 장일현도 경우에 따라 선발로 나오기도 했다.[113] 사실 최희섭은 1998년에 이미 1차지명을 받은 상황이었다. 만일 예정대로 1998년에 그가 MLB에 가지않고 해태에 입단했더라면 그해 해태가 4강을 갔을지도 모르지만 야구에 만약은 없다. 특히 IMF로 자금난에 시달리던 해태가 최희섭의 몸값을 감당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고. 그리고 이용규와 김원섭은 트레이드로, 최형우와 나성범은 FA로 넘어온 선수들이다. 현 시점에서는 최원준 정도만이 육성으로 얻은 좌타자 케이스. 그외에는 한준수도 조금씩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114] 우타자로만 본다면 박찬호와 김도영, 김선빈, 이우성 등 좋은 우타자는 많다. 다만 나지완 은퇴 이후 황대인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탓에 우타 거포가 없는 것일뿐.[115] 후에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다시 현장에 복귀한 김응용은 류현진 때문에 한화 감독직을 수락했다면서 류현진을 메이저 리그로 보내기 싫었다고 밝혔었다. 해태 시절에 좌완에 한이 맺힌 김응용 전 감독은 현역 시절에 좋아하던 유형의 투수는 류현진과 같은 덩치 좋은 좌완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렇다 보니 삼성 감독이 되고서 해태 시절에 아끼던 강영식을 데려가기도 했다.[116]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박재용은 청각장애에 가까울 정도로 중증 수준의 난청 질환을 겪었고 발까지도 느려서 외야수로 등록됐음에도 외야 수비를 거의 보지 못했다. 타구음을 듣고 낙구 위치에 가야 하는 외야수의 특성상 난청과 느린 발을 동시에 가졌던 박재용에게 외야 수비는 태생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봐야 한다.[117] 김응용, 김봉연, 김성한, 이순철, 한대화, 이강철, 조계현, 홍현우, 장성호, 양현종[118] 이 선수 시즌 초만 되면 날아다니고 중반부터 서서히 알아서 기울어지는 전형적인 DTD 선수[119] 동봉철과 송유석은 1996년 11월 5일, LG의 조현을 상대로 트레이드 된 상황이었다. 트레이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다음날에 최훈재와 최향남 트레이드가 이루어진다.[120] 오히려 해태에 대해 우호적인 언사를 많이 했다. 당장 본인이 쓴 책에서도 처음엔 그랬지만 막상 와보니 상당히 괜찮았다고 회고를 했으니...[121] 노히트 노런 패배[122] KBO 초대 사무차장이던 이호헌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정부가 흰색 소복을 입은 수천 명의 시민들이 야구장으로 몰려와 소요사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정보를 언급하면서 경기 장소를 옮기라고 압박했다"라고 한다.[123] 이러한 정부 당국자들의 우려는 훗날 광주가 아닌 마산에서 현실화되기는 했다. 6.10 민주 항쟁이 시작된 1987년 6월 10일, 마산에서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한국 A팀 대 이집트 팀 간의 경기가 펼쳐지던 도중에 최루가스가 경기장 내부로 들어와 이집트 선수들이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고 결국 몰수 게임이 선언되었는데, 마산아재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환불을 받지 못하자 넥타이 부대로서 대거 시위에 참여했다. 부마항쟁으로부터 8년이 지난 후의 얘기이다.[124] 당시 서종철 총재의 설득이 정부에 먹혔던 것은 서 총재의 권세 덕에 가능했다. 서 총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육군사관학교 선배였고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의 군 시절 상관이었다.(서 총재가 장군이던 시절 부관으로 일하던 장교가 전두환과 노태우) 게다가 제4공화국에서 국방부 장관까지 역임했던 인물이었기에 야구판과 당시 정부에서 그의 권세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많지 않았다.[125] 다만 1985년 5월 16일에는 해태와 삼미 슈퍼스타즈의 경기가 광주에서 열린 적이 있다. 아마도 이때가 평일이었기에 별 영향이 없다고 판단하고 경기를 편성한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이 경기는 해태가 이겼다.[126] 같은 호남 지역이지만 전북 지역은 5.18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5.18 당시 광주 봉쇄 작전이 진행될 때도 신군부는 광주와 목포로 가는 철도와 도로의 통행을 전북의 최남단 지역인 정읍시까지만 허용했다. 그 정도로 전북 지역 내부에서는 통행이 자유로웠다. 이 때문에 이 시기 한 주 내내 타 지역 원정을 다녀온 후라든가 홈경기를 치러야 할 상황에서는 광주가 아닌 전주에서 홈경기를 치러야 했다.[127] 선동열이 취임할 당시 삼성은 이미 준우승팀이었고 그 전인 2001~2년에도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했을 정도로 전력이 매우 좋았다. 여기에 자금난을 겪던 현대 유니콘스에서 박진만과 심정수를 FA로 사들이면서 1강 취급을 받은 상황이었다.[128] 다만 이후 통합 4연패의 발판이 되는 채최박과 JOKKA 라인을 구축한 것 역시 선동열이기에 여러 갑론을박이 오간다.[129] 특히 2009년의 가을야구 실패는 13년 만의 일이었으니 그 충격이 컸다.[130] 나머지 한 명은 맷 윌리엄스.[131] 특히나 이 둘은 비해태 출신이라 KIA 팬들의 해태순혈주의를 박살내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132] 2019 시즌까지는 승률 1위 팀이 2팀 이상일 경우 팀 간 전적을 따져 순위를 가렸는데, 그해 SK 와이번스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하고도 다음 날 마지막 720번째 경기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둔 두산 베어스가 공동 선두에 오른 후 팀 간 전적에서 앞선 두산이 한국시리즈에 직행하자 팀 간 전적으로 정규 시즌 1위를 가리는 것이 비합리적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어 2020 시즌부터 최종 승률 1위 팀이 2팀일 경우 이 2팀이 단판승부를 벌여 정규 시즌 1위를 가리기로 했다. 그런데 이 제도가 도입된 이후 불과 2번째 시즌에서 kt wiz와 삼성 라이온즈가 동률 1위를 기록하여 팀 간 전적에서 앞선 삼성의 홈구장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1위 결정전을 치러 kt가 이 경기를 승리하여 창단 첫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따냈다. 정규 시즌 1위 결정전이 도입되지 않았다면 kt는 2년 전 SK처럼 시즌 막판에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놓칠 뻔했다.[133] 강력한 전력을 이뤘던 삼성 라이온즈도 1982년부터 줄곧 10승 투수를 배출했지만 1996년 그 대가 끊겼고 인천·경기·강원지역의 탄탄한 투수 팜을 자랑했던 삼청태현도 전통의 투수 왕국으로 불렸지만 눈물겨웠던 원년을 비롯해 중간중간에 10승 투수를 못 낸 해가 있다.[134] 타이거즈 역사상 최초의 꼴찌 시즌. 당시 팀내 최다승 투수는 나란히 6승을 기록한 김진우와 그레이싱어였다. 리오스의 2005년 최종 성적이 15승이지만 KIA에서 거둔 승수는 6승 뿐이고 나머지 9승은 두산으로 이적한 후 쌓은 승수다.[135] 타이거즈 역사상 두번째 꼴찌 시즌으로 당시 팀내 최다승 투수는 나란히 8승을 기록한 신용운과 스코비였다.[136] 타어강의 저주가 발동한 시즌으로 당시 팀내 최다승 투수는 나란히 9승을 기록한 소사와 김진우와 양현종이었다.[137] 양현종이 해외에 진출한 시즌으로 팀내 최다승 투수는 8승을 기록한 임기영이었다.[138] 2002년 신인지명에서 해태의 1차 지명으로 선택된 김진우도 지명 당시 해태 유니폼을 입어본 적 있으나 애초에 팀이 기아자동차에 인수되는 게 확정된 상황에서 지명받았기 때문에 제외. 그리고 애초에 해태 유니폼을 입고 한 경기도 뛰어보지도 않았다.[139] 임창용은 1998년 말 IMF 사태로 인해 자금난에 시달리던 해태가 현금 확보를 위해 마침 당시 전력 보강에 열심이던 삼성이 양준혁+현금 20억을 해태에 내주는 조건으로 해태를 떠나 삼성으로 건너갔고, 정성훈은 2003년 초 KIA가 내야진 교통정리 겸 타선 보강을 위해 박재홍의 반대급부로 현대로 트레이드된다. 이후 임창용은 삼성을 거쳐 일본, 메이저리그까지 찍고 온 뒤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논란에 연루되어 징계 차원에서 방출, 은퇴 위기까지 몰렸다가 KIA가 그를 영입했고, 정성훈은 현대에서 주가를 올리며 후에 LG와 FA 대박도 두 차례나 이뤄내는 등 꾸준하게 활약하다가 2017 시즌 후 LG에서 방출되고 나서야 KIA로 돌아올 수 있었다.[140] 이대호, 이성우, 김강민, 권오준은 프로 입단은 해태가 생존하던 시절에 했으나 1군에 올라온 건 해태가 KIA로 바뀐 후였다.[141] 여담으로 박한이는 2001년 7월 29일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광주 홈경기에서 해태를 상대로 홈런을 치기도 했다.[142] 상술했듯이 여기서 해태에게 지명된 선수는 유니폼만 입었고 경기를 뛰진 않았다.[143] 전기리그 4위, 후기리그 4위[144]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4위[145]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3위[146]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3위[147]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2위, 후기리그에서 실제로는 33승 2무 19패로 공동 1위였으나 1위 결정전에서 OB에게 패했다. 82~85 시즌의 제도였다면 죽을 힘을 써서라도 1위에 도전했겠지만 제도가 바뀌어서 어차피 한국시리즈 직행하는 데 별 의미 없는 경기였기도 했다.[148]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2위[149]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1위[150] 한화 이글스와 공동 3위.[151] 왜 4위하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냐면 3위인 롯데 자이언츠와 3경기 이상 벌어져 준플레이오프가 생략되고 대신 플레이오프가 7전 4선승제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5년의 해태는 팀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하고도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한 유일한 팀이었다. 그런데 22년 후 LG가 팀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하고도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하면서 2번째로 불명예 기록을 세운 팀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