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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제24대 대왕 원종 | 元宗 | |||
'소릉'으로 추정되는 고분군 전경 | |||
출생 | 1219년 4월 5일 | ||
고려 양광도 교동현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 | |||
즉위 | 1259년 7월 21일 | ||
고려 | |||
사망 | 1274년 7월 23일 (향년 55세) | ||
고려 개경 개성부 제상궁 (現 경기도 개성시) | |||
능묘 | 소릉(韶陵) | ||
재위기간 | 고려 왕태자 | ||
1235년 2월 9일 ~ 1259년 7월 21일 (24년) | |||
고려 제24대 대왕 | |||
1259년 7월 21일 ~ 1269년 6월 21일 (9년) | |||
고려 태상왕 | |||
1269년 6월 21일 ~ 1269년 12월 17일[1] (5개월) | |||
고려 제24대 대왕 (복위) | |||
1269년 12월 17일 ~ 1274년 7월 23일 (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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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전(倎) → 식(植) | ||
부모 | 부왕 고종 모후 안혜왕후 | ||
형제자매 | 2남 2녀 중 장남 | ||
배우자 | 순경왕후, 경창궁주 | ||
자녀 | 4남 3녀 | ||
종교 | 불교 | ||
자 | 일신(日新) | ||
묘호 | 원종(元宗) | ||
시호 | 고려: 순효대왕(順孝大王) 원: 충경왕(忠敬王)[3] | ||
절일 | 함녕절(咸寧節)[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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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24대 대왕이자 고려의 마지막 해동천자.자는 '일신'(日新). 묘호는 '원종'(元宗), 시호는 '순효대왕'(順孝大王)이며, 원나라가 추증한 시호는 '충경왕'(忠敬王)이다.
제23대 고종과 안혜태후의 맏아들이며, 휘는 처음에는 '전'(倎)이었다가 '식'(植)으로 바꾸었다. 원종의 휘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제16대 고국원왕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원종이 신하 백승현(白勝賢)의 주청대로 자신의 휘를 고대 서주의 성군 강왕(康王)의 이름과 같게 바꾸려다가 하필 그 이름이 평양성 전투에서 유시를 맞고, 비명횡사한[5] 고국원왕의 휘와 같다는 것을 알고 기겁해 그냥 옛날 이름 그대로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6]
해동 천하 고려의 마지막 해동 천자라는 주장도 있는데, 고려가 외왕내제 체제였다는 것을 긍정하면 그렇게 볼 여지도 있지만 항목에도 있듯 학계에서도 찬반양론이 있는 주제라 확정할 순 없다. 그러나 아버지 고종 때 최씨정권이 타도당한 후 무신정권의 별다른 간섭 없이 왕위에 올랐고, 그 이후에도 무신정권은 이어졌으나 최씨 정권 집정자들 같은 권신은 없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이뤄진 상태라 원종은 최씨 집안 덕택에 즉위하고 왕권을 보전했던 완전 허수아비였던 부친과는 달리 어느 정도 권력은 갖고 있었다. 때문에 김준, 임연 같은 무신 집정자들을, 그 잘못한 부분을 공문을 근거로 찾아내 소환하여 갈구고 면박 주는 등 우리가 아는 이미지와는 꽤 달랐다.
그가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원을 끌어들이기로 마음 먹은 건 그럼에도 삼별초 등 무력 집단을 완전히 장악하기가 어려웠고, 임연과 임유무가 생각보다 정치적 능력이 떨어지고 말도 안되는 무리를 자행하는지라 빨리 진압해야 하여 불가피한 상황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2. 묘호, 시호
제25대 충렬왕이 올린 묘호는 '원종'(元宗)으로 고려 최후의 묘호이다. 원종은 고려의 마지막 대왕으로서 종묘에 안치됐다. 원종의 왕후이자 충렬왕의 모후인 순경태후 또한 고려 고유의 시법을 지킨 마지막 왕후로 종묘에 안치됐다.이후 충렬왕부터 제30대 충정왕까지는 원나라 황제의 제후가 되어 묘호를 올리지 못하게 되었고, 제31대 공민왕부터 독자적 시호가 회복되긴 했다. 공민왕의 아들 우왕(제32대)과 손자 창왕(제33대)은 왕씨가 아닌 신씨로 몰려(우창비왕설) 폐위당하고, 왕이 된 역사 자체가 부정당하여 시호를 당연히 못받았으며, 제34대 공양왕은 폐위되었지만 조선 제3대 태종 이방원에 의해 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명나라의 제후국이 되었으면서도 묘호 제도는 조선이 건국되고 난 이후 회복되었다. 원종은 묘호를 달리 불러 '원묘'(元廟)라고도 불렸다.
충렬왕이 올린 시호는 '순효대왕'(順孝大王)이며, 고려가 독자적으로 올린 시호이다. '원종' 묘호가 격하된 '원왕'(元王)이라는 시호로 불리기도 했다. 제26대 충선왕 대에 원나라가 추증한 시호는 '충경왕'(忠敬王)이었다. 조선시대 때도 묘호를 받은 다른 고려 임금들은 묘호로 불리지만 원종은 '충경왕'이나 '원왕'으로 많이 불린다. 원 간섭기 내내 이 시호로 불려 '충경왕' 시호도 유명하다. 보통 원나라의 시호와 고려의 시호를 합쳐서 '충경순효대왕'(忠敬順孝大王)으로 불린다.
3. 생애
3.1. 쿠빌라이 역베팅에 성공하다
참혹한 여몽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235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1259년에는 기나긴 몽골과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강화를 맺기 위해 태자 신분으로 몽골에 가던 중 부왕 고종이 승하하고 만다. 이후 당시 몽골의 실력자이자 화북 지방의 총독이었던 보르지긴 쿠빌라이를 알현했는데, 본래는 사천성 방면에서 원정 중이던 제4대 몽케 칸을 만나러 가던 중 몽케 칸이 전쟁 중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대칸위에 공백이 생기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좀 더 자세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은데, 몽케 칸 사후 중원 화북에 있던 쿠빌라이와 몽골 초원의 수도 카라코룸을 지키던 아리크부카 사이에 대칸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고, 고려 태자 왕전 일행은 둘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중차대한 순간에 직면했다. 그리고 어찌보면 고려를 넘어 한민족 역사의 운명을 갈랐다고 볼 수 있는 이 선택에서 태자는 쿠빌라이 쪽을 선택했다.[7]
이에 쿠빌라이는 기뻐하며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쿠빌라이의 입장에서는 고려 태자의 방문을 반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 대칸위를 놓고 동생 아리크부카와 격렬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수십 년 동안의 전쟁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고려가 스스로 자신의 진영을 찾아와 제후국을 청하면서 명분에서 크게 앞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조
이 만남을 계기로 원종과 쿠빌라이가 친해지게 되면서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인 제국대장공주 보르지긴 쿠틀룩켈미쉬를 원종의 아들인 충렬왕 왕심에게 시집보내게 되었다. 이 와중에 고려의 혼인 제안을 한 차례 퇴짜를 놓기도 했는데 근본적인 원인은 원종 자체가 아닌 삼별초의 대몽항쟁 때문이었다.
충렬왕하고 사돈을 맺는데, 이게 놀라운 것이 그때 충렬왕의 부인이 되는 사람이 제국대장공주잖아요. 제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의 막내딸이에요. 몽골 황족은 황금씨족이라고 해서 자기들끼리 결혼을 하는 부족이 정해져 있었어요. 몽골 내에서도 칭기즈칸과 특별한 관계, 정말 의리로 뭉친 그런 몇 안 되는 가문들과 통혼하지 절대 외부랑 통혼을 안하는데 황금씨족 딸을 충렬왕하고 결혼 시킨거에요. (중략) 제국대장공주가 죽은 후에 원나라 사람들이 와서 제문을 쓰는데 이런 말을 써요. "막내딸이다. 황제에게 자식이 수도 없이 많지만 그래도 막내딸은 특별히 귀여운 법이다. 이 딸을 고려 왕과 결혼시켰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리고 그 후로 고려가 계속 몽골 황실과 결혼하지만 황금씨족과는 결혼하지 않아요.[9] 그만큼 쿠빌라이가 (원종의 제안에) 흥분했다는 거에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고려 vs 몽골전쟁 2- 中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고려 vs 몽골전쟁 2- 中
쿠빌라이는 자신에게 온 태자 왕전을 크게 환대하고, 강화를 논의했다. 마침 고종이 붕어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고려 대왕도 공석이 되자 쿠빌라이는 왕전을 국왕으로 책봉해 고려로 속히 보냈다.
그리고 향후 고려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한 가지 약속을 하게 된다. 바로
불개토풍(不改土風)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 되더라도 고유한 풍속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이었다. 이 약속은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도 불리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나라의 초대 황제이자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인 쿠빌라이(세조)의 유훈이라서 후대의 원나라 대칸들도 건드릴 수 없었다. 동아시아 왕조, 특히 유교 문화권에서는 선대 군주의 제도나 유훈은 함부로 거스를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건국조인 '태조'나 중흥지주인 '세조'처럼 왕조에서 중요한 군주들의 유훈은 거의 불문법 역할을 했다.덕분에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한편으로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부원배들의 입성책동에서도 고유한 정체성 유지가 가능했다. 물론 긍정적으로만 사용된 건 아닌데 권문세족의 기득권 유지 명분으로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원 간섭기에는 '모수사패'와 '압량위천'을 통한 농장의 확대와 양인의 수 감소가 심각했는데 노비제 개혁을 통해 이를 개선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활리길사라는 관료를 파견했을 때, 권문세족이 노비제 개혁을 저지시킨 명분이 바로 '세조구제'였다.
상략… 원나라의 활리길사(闊里吉思)가 행성평장(行省平章)이 되었을 때에 모든 노비는 부모 중 한 사람이 양인이면 양민(良民)이 되는 것을 청허(聽許) 받으려 하니, 저지하는 재상이 없었다. 그런데 김지숙(金之淑)이 말하기를 “세조께서 일찍이 첩첩올(帖帖兀)을 보내 우리나라를 관리할 때에, 조석기(趙石奇)라는 자가 양천을 판정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첩첩올이 상국의 법을 적용하고자 하니, 세조께서 본국의 구속(舊俗)을 좇으라고 조서를 내리셨습니다. 이 전례가 갖추어져 있으니 바꿀 수 없습니다." 하였더니, 활리길사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하략
元闊里吉思,爲行省平章,凡奴婢,其父母一良者,欲聽爲良,宰相莫有止者,之淑曰,世祖,嘗遣帖帖兀,來監國,有趙石奇者,訴良賤,帖帖兀,欲用上國法,世祖,詔從本國舊俗,此例具在,不可變更,於是闊里吉思,不敢復言
《고려사절요》
元闊里吉思,爲行省平章,凡奴婢,其父母一良者,欲聽爲良,宰相莫有止者,之淑曰,世祖,嘗遣帖帖兀,來監國,有趙石奇者,訴良賤,帖帖兀,欲用上國法,世祖,詔從本國舊俗,此例具在,不可變更,於是闊里吉思,不敢復言
《고려사절요》
결국 제대로 된 개혁을 실행한 것은 원나라가 제위 계승 분쟁과 황권의 추락, 권신들의 발호, 사치와 향락, 군사력의 약화, 지방 군벌들의 득세로 인해 멸망으로 향할 때인 제31대 공민왕 시기가 되어서였다. 참조
3.2. 재위 기간
등극한 고종 안효대왕(高宗 安孝大王)의 아들 | |
24대 | 강제 등극 |
원종 순효대왕 | 안경공 |
원종이 즉위할 무렵은 그 길었던 무신정권의 황혼기로 62년 우봉 최씨 무신정권의 마지막 수장이었던 천출 출신 최의가 살해되고(무오정변) 새로운 실권자인 김준이 집권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원종이 몽골에 입조하고 있을 때 고종이 붕어했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 있어서 위험할 뻔했는데 대몽 강경파인 김준이 원종의 동생인 안경공 왕창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종의 유언에 의해 고려에 남아 있던 태손 왕심(王諶)이 임시로 왕위를 대신했다.[10] 결국 이듬해에 왕전이 몽골과 강화를 맺고 돌아와서 정식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왕은 강안전(康安殿)[11]에서 즉위했다. 관정(灌頂)[12]한 뒤 경령전(慶寧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강안전에 가 백관(百官)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후에 황의(黃衣)[13]를 입고 남쪽을 바라보며 용상(龍床)에 앉았다. 속리대(束里大)와 파투(波透)[14]는 강안전에 들어와 동쪽을 바라보며 앉았다. 태손(太孫)[15], 공(公), 후(侯), 백(伯)[16], 재추(宰樞)[17]와 고위 문•무 양반(文武兩班)은 강안전 앞뜰에 순서대로 들어왔고, 하위 양반은 강안전문 밖에 서서 표문(表文)을 올리고 만세(萬歲)를 외쳤다.
- 《고려사》 <원종 순효대왕 세가> 재위 원년(1260년) 4월 중.
후에 황의(黃衣)[13]를 입고 남쪽을 바라보며 용상(龍床)에 앉았다. 속리대(束里大)와 파투(波透)[14]는 강안전에 들어와 동쪽을 바라보며 앉았다. 태손(太孫)[15], 공(公), 후(侯), 백(伯)[16], 재추(宰樞)[17]와 고위 문•무 양반(文武兩班)은 강안전 앞뜰에 순서대로 들어왔고, 하위 양반은 강안전문 밖에 서서 표문(表文)을 올리고 만세(萬歲)를 외쳤다.
- 《고려사》 <원종 순효대왕 세가> 재위 원년(1260년) 4월 중.
이 당시 김준과의 관계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무신집권기 집정들과 왕들과의 관계가 사뭇 달랐음이 중요하다. 분명 최고권력자지만 권위와 권력이 오히려 최의만도 못했던 김준, 그리고 그에 비례해 그전보다 목소리가 높아진 문신 세력들, 또한 고종과는 달리 누구한테도 빚진 게 없이 적법한 태자로서 즉위한데다 적극적인 성격에 자기 주장도 강했던 원종, 이 세 세력 간에 일종의 눈치싸움과 3파전이 벌어진 것이다. 김준 이전 최씨 정권 기간에는 문신이든 왕실이든 최씨 집안 앞에 납작 엎드려 있었으나 상황이 완전히 바뀐 것이었다. 원종은 김준이 올리는 인사안이 맘에 안 들면 재가해주지 않고 퇴짜를 놓거나, 혹은 김준이 싫어할만한 인사를 일부러 요직에 심어 김준에 대한 불쾌감을 은근슬쩍 몇 번 내비치는 식으로 정치에 개입했는데, 이는 무신정권기 고려 왕들이 한 번도 하지 못했던 행태지만 김준은 이에 대해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왕의 인사권 및 최종재가 권한은 그때도 왕의 적법한 권한이었으나 그저 최씨 정권이 무서워서 행사하지 못했을 뿐, 제도상으로 부정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긴장된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았던 김준의 일족들이 왕실에게 갈 세공선을 급습해서 재물을 털어가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원종은 김준을 직접 소환하여 수량이 맞지 않는 재고를 공문과 대조하고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일이 발생한 경위에 대해 추궁하면서 갈궈댔고, 김준은 별 수 없이 본인 일족들이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건 최씨 정권도 차마 저지르지 못한 개념없는 짓이었던 건 맞지만 그만큼 원종의 권력이 강했음을 입증하는 사안이다. 하지만 김준도 사람인지라 그전 임금들과는 꽤 다른 행동을 취하는 원종에 대한 미움이 쌓여갈 수밖에 없었고, 김준 측에서 아예 원종 폐위까지 거론하는 단계가 되자 원종은 선수를 치게 된다. 1268년 임연과 함께 공모하여 당시 무신정권의 수장이었던 김준의 목을 베고 그 일족들을 처단했다(무진정변).
그러나 1년 후인 1269년에는 태자 왕심을 몽골로 입조토록 하여 친몽정책과 개경 환도를 시도하다가 김준 살해 후 새로운 무신 집정자가 된 임연에 의해 일시적으로 폐위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이때 잠시 임금으로 즉위한 인물이 바로 이전에도 차기 계승자로 한 차례 거론된 바 있었던 안경공 왕창이었다. 밀려나버린 원종은 안경공을 앞세운 임연에 의해 태상왕(太上王)에 봉해졌고, 강화도에 있는 별궁 용암궁(龍岩宮) 명화전 숭녕부에 유폐당하는 신세가 된다(기사정변). [18]
그러나 마침 고려로 귀국하는 도중에 있었던 태자 왕심이 이 소식을 듣고 몽골로 돌아가 쿠빌라이 칸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결국 쿠빌라이 칸의 압박으로 원종이 다시 복위하게 되었다. 이후 몽골로 가서 직접 쿠빌라이 칸과 만나 일의 자초지종을 알리고, 동시에 몽골의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씨 황족, 즉 황금씨족 출신의 황녀와 태자 왕심과의 혼인을 추진하게 되며, 개경 환도를 시도하게 된다. 때마침 임연이 근심으로 인한 병으로 죽고, 새롭게 무신 집정자가 된 임연의 아들 임유무를 그의 측근인 홍문계, 송송례를 회유하여 결국 죽이는데 성공하고(경오정변), 마침내 100년간이나 지독하게 고려 왕조를 좀먹었던 무신정권을 무너뜨렸으며, 이후 귀국과 동시에 개경 환도를 하게 된다. 다시 왕위를 되찾았을 때 원종은 자줏빛 옷을 입고 있다가 노랑색 곤룡포를 입고, 고려 정궁에서 신하들로부터 하례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북방의 서경에서는 최탄 등이 1269년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의 54개 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의 6개 성을 들어 원나라[19]에 투항하고 말았는데 이 때 원나라는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직할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원종은 이를 돌려달라고 계속 쿠빌라이 칸에게 요구했으나 쿠빌라이 칸은 이를 듣지 않아 결국 원종이 죽을 때까지 이 영토를 돌려받지 못했는데 이 지역은 1290년 충렬왕 시대에 돌려받았다.
개경으로 환도했으나 근본적으로 무신정권의 친위대였던 삼별초가 고려 정부의 친원정책에 반발하면서 결국 배중손을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봉기하여, 진도와 제주도로 계속 근거지를 옮겨가며 원나라와 고려 왕실에 끝까지 저항했다. 이들은 왕족 승화후 왕온을 즉위시키고, 서해와 남해안을 전전하며 막강한 해상 세력을 구축했고, 고려를 거점으로 한 일본 원정에 쓰일 함선을 파괴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 함선들이 자신들을 토벌할 때 쓰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원나라의 홍다구와 고려의 김방경을 위시한 여몽연합군에게 토벌되었다. 이후에는 일본 공격 방침을 세운 쿠빌라이 칸의 요구로 고려는 일본 원정을 위한 대함대를 만드는 데 국력을 쏟아부었으며, '결혼도감'을 설치해 원나라로 가는 공녀를 모집하기 시작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한탄이 극에 달했다.
짐(朕)[20]이 박한 덕으로 종조(宗祧)를 지킨 지가 15년이 되었다. 그러나 부담이 막중하여 병에 걸리니,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이르건대 대보(大寶)는 잠시라도 비울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내(予) 원자(元子)는 원랑의 덕성으로 인망을 얻으니 명철한 품성은 타고난 것이다.
지금 상조(上朝)에 있어 직접 명(命)을 받지 못했지만, 무릇 너희 신민(臣民)은 사왕(嗣王)의 명을 받들어 전령(前寧)의 위대함을 잃지 말라. 제사는 하루를 달로 계산해 3일안에 끝내라. 산릉(山陵)의 제도는 검약하게 해야할 것이다. 번(藩)[21], 진(鎭), 주(州), 목(牧)은 자기 영역을 넘어오지 말고 조정(朝廷)의 지시를 따르라. 과거, 혼인 등은 멈추지 말고 그대로 하라.
아! 너희 보상대신(輔相大臣)과 월궐서사(越厥庶士)[22]들은 지나치게 슬퍼하다 다치지 말고 모든 심력(心力)을 다해 방가(邦家)를 보호하고 안정시켜라.
- 《고려사》 <원종 세가> 중, 원종의 유조(遺詔). 고려의 마지막 '유조'(詔)이다. 이후 충렬왕부턴 '유교'(敎)라 해서 제후의 제도를 따른다.
이르건대 대보(大寶)는 잠시라도 비울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내(予) 원자(元子)는 원랑의 덕성으로 인망을 얻으니 명철한 품성은 타고난 것이다.
지금 상조(上朝)에 있어 직접 명(命)을 받지 못했지만, 무릇 너희 신민(臣民)은 사왕(嗣王)의 명을 받들어 전령(前寧)의 위대함을 잃지 말라. 제사는 하루를 달로 계산해 3일안에 끝내라. 산릉(山陵)의 제도는 검약하게 해야할 것이다. 번(藩)[21], 진(鎭), 주(州), 목(牧)은 자기 영역을 넘어오지 말고 조정(朝廷)의 지시를 따르라. 과거, 혼인 등은 멈추지 말고 그대로 하라.
아! 너희 보상대신(輔相大臣)과 월궐서사(越厥庶士)[22]들은 지나치게 슬퍼하다 다치지 말고 모든 심력(心力)을 다해 방가(邦家)를 보호하고 안정시켜라.
- 《고려사》 <원종 세가> 중, 원종의 유조(遺詔). 고려의 마지막 '유조'(詔)이다. 이후 충렬왕부턴 '유교'(敎)라 해서 제후의 제도를 따른다.
실로 고려 왕조가 몰락으로 향하던 시기로 원종은 이를 지켜보다가 1274년 향년 56세를 일기로 붕어했다. 고려의 정식 묘호인 '종'을 쓴 마지막 군주가 되었는데 이후 아들인 충렬왕부터 제30대 충정왕까지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모두 충(忠) 자를 붙이게 되었다. 고종과 원종은 처음에는 원나라의 시호를 안 받고, 자국 시호만 올렸지만 이후 제26대 충선왕 2년 때 원나라가 '충경왕'(忠敬王) 시호를 보냈다.[23] 원종의 아버지 고종에 대해서도 '충헌왕'(忠憲王)이라는 시호를 추가로 보내 상•하 종속 관계를 확실히 하려 했는데 원나라가 시호와 더불어 추증한 관작은
'단성봉화보경량절강제좌리공신(端誠奉化保慶亮節康濟佐理功臣) - 태사(太師)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상서우승상(尙書右丞相) - 상주국(上柱國)'
이었다.태자가 세자로 바뀐 것도 원종때가 시작으로 여러 왕실 예법이 격하된 시대가 바로 이때였다. 이렇게 제후국으로 격하된 칭호들은 이후 600년이 지난 1894년 갑오개혁때에 와서야 되돌려진다. 고려는 왕실의 칭호뿐만 아니라 귀족의 작위도 오등작을 썼었고 관직명, 국가 기관 명칭 등 내정 제도 전반을 황제국급으로 썼었지만 원종 이후로 전부 왕국급 혹은 그 이하로 격하되었다. 이후 칭호와 관제 등은 제31대 공민왕 때 다시 복권되었고, 이후 조선 초기에 조율을 통해 다시 하락되기도 했다. 5등작도 복원됐다가 조선 태종 때 다시 없앴고, 묘호 제도도 조선 내부에서 폐지론이 자주 나왔지만 그것만은 계속 사용했다.
4. 평가
원종 치세는 치욕일 수도 있는 원 간섭기를 연 시대였다. 그런데 고려 말이나 조선 사대부들의 평가를 보면 원종에 대해서는 동정적인 것을 넘어 호의적이다. 라는 식의 평가가 대부분이다. 사실 호평이고, 악평이고 전부 무신정권의 종료라는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사대부들은 위로는 고려 초기 문벌귀족, 뒤로는 권문세족과도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에 무신정권 시기에 대한 평가는 혹독했고, 이를 무너뜨린 군주는 고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몽골에 항복한 부분이 커버되는 것도 결국 무신정권이 붕괴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다만 자력으로 무신정권을 끝내지 못하고, 몽골의 힘을 빌렸다는 점은 비판받았다. 실제 《동국통감》에서는 원나라와의 화친은 그런대로 높이 평가하나, 나라를 위협하는 권신을 자신이 자발적으로 제거하지 못했다는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적어도 김준은 어디까지나 본인이 주도한 음모로 끝장낸 것이었고, 삼별초란 조직은 조직 특성상 권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탈피할 수밖에 없어 별도의 무력이 없는 원종으로서는 그대로 끝장내기엔 영 무리였다. 최의를 본인 힘으로 제거한 것도 아닌 고종보다 원종이 훨 못한 평가를 받을 이유는 없다. 거기다 원종이 몽골의 힘을 빌렸다는 비판은 무신정권이 키운 군대 삼별초한테도 해당된다. 삼별초도 난을 일으키는 와중에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에 서신을 보내서 원병을 요청한 사실이 일본 귀족이 쓴 길속기에 남아있는데 원종은 몽골과 손잡은 사대주의자라고 매도하고 삼별초를 자주적인 세력이라고 미화하는 것은 올바르게 역사를 보는 자세가 아니며, 오히려 크나큰 역사왜곡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삼별초도 일본군을 한반도로 끌어들이는 반역을 시도했으며, 이는 오늘날 외환죄로 처벌 받을 수 있는 중죄이다.
그러하니 당대 세계 최강대국인 몽골 제국과 장기전을 벌였음에도 직할 통치를 면한 점 자체는 인정해줘야 할 부분이다. 쿠빌라이 칸이 약속한 불개토풍(不改土風)으로 고려는 고유 풍속을 유지하고, 자치 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쿠빌라이 칸의 유지[24]를 이후의 몽골 대칸들도 바꾸지 못했다.[25] 게다가 왕조를 살려둬서 이후 고려 국왕이 쿠릴타이 회의에 원나라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씨 황실 일원으로 참가하게 된 것도 큰 대우이다. 덕분에 초창기 횡포를 부리던 다루가치들도 이후에는 부마(몽골어: 쿠르겐, 페르시아어: 귀르겐)국이 된 고려 임금에게 큰 소리를 못내게 된다. 원종 또한 치욕임을 알았으면서도 전란으로 백성들을 고단하게 하기보다는 외교적 협상을 통해 유리한 조건에서 몽골 제국에 복속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26]
사실 최씨 무신정권 주도하에 벌어진 대몽항쟁의 실상은 최씨 무신정권이 안전한 강화도에 앉아서 조세나 강탈해가고, 본토의 백성들은 조세는 조세대로 뜯기며,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약탈당하고 학살당하는 것이 일상사였던 참혹한 시기였기 때문에 강화를 맺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태조 칭기즈 칸 이후로 몽골 제국은 반항하는 나라를 모조리 박살을 내버렸기 때문에 무신정권의 수뇌부들 역시 몽골군에게 나라가 점령당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뻔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몽항쟁 시기에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도망간 뒤에 사치스럽게 놀았어도 동시에 몽골군을 격퇴하는데 골몰하는 등 할 일은 했으며, 상황이 중과부적이라서 끝내 몽골 제국에게 졌지만 무신정권도 전쟁에 대해 손을 놓지는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렇다고 해서 최씨 정권의 만행이 비호되지는 못하는데 무신정권이 강화도에 짱박혀 군대를 보내거나 산성이나 섬으로 피신하라고 전하는 등 직접적인 움직임은 하지 않았으며, 본토에서는 백성들이 몽골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영토가 초토화되는 그 순간에도 최씨 정권의 수뇌부들은 저택을 짓고, 향락을 즐기기에 바빴다.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던 것이 몽골의 1차 침입 때 중앙군이 몽골 전초 부대의 기습에 붕괴되었기 때문에 전투를 하고 싶어도 할 주력 병력이 없었으며, 남아있는 건 최씨 가문의 사병들뿐이었는데 사병을 운용해 몽골에 저항하다 반대 세력의 뒤통수를 맞고 싶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 간섭기와 관련해서는 결과적으로 원나라에 항복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자치권만은 지켜내며 고려의 위상을 세우려 노력한 임금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인지 이후 조선의 명군 세종은 고려 태조(제1대), 현종(제8대), 문종(제11대), 원종(제24대)은 백성에게 공덕이 있는 임금들이니 종전대로 제사를 지내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또한 원종은 고려를 원형대로 유지하려 애쓰기도 했다. 《고려사》 <원종 세가>에 따르면 원나라의 압박이 거세지는데도 불구하고, 황포를 입었으며, 9묘제 태묘(太廟)를 재설치했다. 태묘(종묘)에는 5묘제와 7묘제(9묘제) 두 가지가 있는데 5묘제는 묘호가 없는 제후식 종묘였고, 7묘제는 묘호를 올리는 천자식 종묘였다. 원종이 묘호를 받은 것은 적어도 자신 대까지만은 고려의 종묘 예법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원종은 스스로를 '짐'이라 칭하고, 신하들에게 표문을 받는 등 현상 유지에 노력했다. 친원파 세력들이
"왕세자를 본받아 우리도 몽골풍 옷을 입읍시다!"
라고 하자 왕은 "난 절대 조가(朝家)의 풍속을 못 바꾸겠으니 내가 죽고 나면 해보든지 그래"
라고 거절하기도 했다.[27] 이후 충렬왕은 원나라와 고려를 오가면서 몽골풍 옷, 즉 호복을 착용했고, 이를 본 많은 고려 사람들은 울면서 한탄했다고 한다. 정작 원나라에서는 불개토풍이랬더니 고려는 왜 우리 따라하냐고 어리둥절했다고 한다.5. 태묘 악장
계보가 원종 →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공민왕 순인데 원종의 4대손인 공민왕은 재위 12년차에 새롭게 태묘 악장을 제정했다. 원종의 악장은 제목이 없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밝고 밝으신 아조(我祖)여,
덕이 건곤(乾坤)과 맞먹습니다.
바로 그 커다란 덕이,
후곤(後昆)[28]을 돌봐주십니다.
향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니,
사직이 아름다워질 뿐입니다.
즐기시고 흠향하시고,
영원히 강녕(康寧)하도록 보호해주십시오.
덕이 건곤(乾坤)과 맞먹습니다.
바로 그 커다란 덕이,
후곤(後昆)[28]을 돌봐주십니다.
향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니,
사직이 아름다워질 뿐입니다.
즐기시고 흠향하시고,
영원히 강녕(康寧)하도록 보호해주십시오.
6. 대중매체에서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 게임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서 등장하는데 능력치는 정치 57, 전투 56, 지모 34로 낮다. 특기는 농업과 원나라 내전 당시 쿠빌라이 칸을 지지해 외교로 고려를 구한 것을 감안해서인지 외교 특기가 있는데 외교에 필요한 능력치가 지모라는 것을 생각하면 능력치 배분이 엉망이다. 병과 특성은 보병 C, 궁병 C, 기병 D, 수군 D. 국왕으로 생몰년도가 정확함에도 불구하고 생몰년도가 정확히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 <징기스칸 4>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2에서 고려의 군주로 나오는데 부하로는 김통정, 김방경만 있을 뿐. 단, 국내 정발판에서는 정안이 추가되었고 재야에 있는 유청신을 등용할 수 있어 4명의 부하 장수를 둘 수 있다. PK 시나리오 3에서는 고종의 어린 왕족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처음 시작할 때 자식이 없는 다른 시나리오의 고려에 비하면 왕위 계승이 편하다.
드라마 <무신>에서의 원종 |
- 2012년 MBC 드라마 <무신>에서는 배우 백승우와 배우 강성민이 연기했다. 처음에는 왕실을 되찾고 사직을 위해 열일하는 인물로 나오나 김준이 집권한 이후부터는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몽골에 붙어 고려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임연과 함께 김준을 처단한 인물로 표현된다. 무신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작가에 의해 의도치 않게 희생양이 된 셈.[29]
- 대체역사소설로 고려 중기를 배경으로 한 <고려 흑태자>에서는 비범한 현대인 주인공이 빙의하며 원간섭기를 막기위해 동분서주하는 주인공으로 나온다. 다만 몽골 제국이 가장 전성기던 시절이다보니 주인공이 활약하더라도 여전히 불리한 상황이라 발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생존물에 가깝다. 자세한건 문서참조.
[1] 당시 무신정권 제10대 집권자였던 임연이 정치적 갈등 끝에 원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이었던 안경공 왕창을 영종으로 옹립시켰다. 그러나 원나라의 개입으로 5개월 만에 원종은 복위했다.[2] (족보)[3] 시호를 올릴 때 없었으며, 사후 36년 뒤인 1310년에 원나라가 추가했다.[4] 절일의 이름이 제16대 예종과 같다.[5] 《고려사절요》에 실제로 사용된 표현(不得其死)[6] 참고로 그 휘는 釗. 원래 뜻은 "멀 조"이며, 고국원왕의 이름은 "쇠"라고 읽는데 이는 우리나라식 국훈이다.[7] 다만 사료에서는 원종이 쿠빌라이를 선택했다는 명시적인 기록이 없다. 김호동 교수는 태자의 귀국로와 쿠빌라이의 북상로가 상당 부분 일치하고, 지니고 온 표문을 바치지 않았으며 쿠릴타이에도 참석하지 않은 점을 볼 때 단순한 조우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8] 고구려는 제20대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바꾸었다. 그리고 당대 고려의 역사관은 고씨가 세운 고려를 그대로 왕씨의 고려가 이어받은 것이었다. 고려인에게 고구려와 고려 두 나라는 별개의 나라가 아니었고, 중국인뿐만 아니라 북방 유목민족들도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또 북송 말기의 서긍이 쓴 《고려도경》 등에서도 확인된다.(비슷한 예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있다.)[9] 다만 정확하게 말하면 원성공주/제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막내 딸이지만, 옹기라트 부족 여인의 소생이 아니기에 위에서 설명하고 있는 최고위급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원나라의 대칸은 칭기즈칸의 부계 혈통과 보르테 우진의 부족이던 옹기라트부 출신의 여성 사이에서 출생되어야 했기 때문이다.(몽골의 풍습은 같은 부족 며느리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 사후 손자인 성종 테무르 칸이 즉위하면서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가 되는 충선왕과의 위치에서 분란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다음부터는 '비교적' 가까운 황족 일원에서 시집보냈는데, 이들 역시 모두 소위 '황금씨족'에 속했다.[10] 왕심은 외할머니가 권신 최우의 딸로서 원종 사후 충렬왕으로 즉위했다.[11] 강도(江都) 고려궁지에 있던 본궐의 편전.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편전이다.[12] 밀교의 세례식이다.[13] '치황의'나 '자황포' 중 하나로 보인다.[14]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파견한 관리들.[15] 당시 태손은 충렬왕 왕심이다. 아직 태자로 승급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태손'으로 불렸다.[16] 고려의 봉작제는 이분화되어 있었다. 신하의 5등작, 왕족의 3등작인데 여기선 왕족의 3등작을 지칭한 것이다.[17] 고려 양대 최고 정부기관인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위 관료들을 지칭한다.[18] 하지만 이 때도 임연이 원종 일가를 처분하는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기껏 안치한 게 강화도였던 걸 보면 임연의 권력 또한 그다지 강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19] 쿠빌라이 칸이 '대원'이라는 중국식 국호를 쓴 것은 1270년이다.[20] 원종때까진 아직 외왕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21] 제후의 땅을 '번'(藩)이라고 한다. 원종은 스스로를 짐(朕)이라 하고, 제후의 번(藩)을 통솔하며, 자신의 유언을 '조'(詔)라 하여 천자(天子)로서 붕어했다.[22] 나라 밖의 선비들. 즉 몽골 출신 관료들을 말한다.[23] 공교롭게도 수백년 후 조선 철종이 청나라로부터 받은 시호 역시 '충경'(忠敬)이었다. 그나마 이 칭호는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 폐지되지만.[24] 하다 못해 쿠빌라이 칸 대신 다른 계승자인 아리크부카를 지지했다면 작게는 고려 왕실, 크게는 한반도 자체의 존망이 위태로웠을지도 모른다. 운이 따라준 감은 있지만 그의 줄서기는 그냥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25] 다만 한국 학계에서 몽골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바꾸지 못한 것이 아니라 바꾸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실제로 몽골 제국은 고려뿐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그 지방 풍습을 대체로 인정해주었으며, 서아시아의 일 칸국(훌레구 울루스) 같은 경우는 페르시아의 종교였던 이슬람을 국교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는데 왕조의 입장을 제하고 나면 고려가 특별 대우까지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26] 만약 고려가 계속 몽골 제국에 항쟁했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훌레구 칸의 몽골 서정군이 중동을 쓸어버릴 당시, 아바스 칼리파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할 때 바그다드 시민들은 대량 학살당했다. 몽골이 휘저었던 동유럽에 살던 유럽인들이 세대가 지나도 당시 몽골을 코즈믹 호러급 괴물들로 묘사하는 것을 보면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계속 항쟁했다가 고려도 그 꼴이 났을 수 있었다.[27] 《고려사》 <충렬왕 세가> 즉위년 기록.[28] 후손, 자손의 다른 말.[29] 실제로 원종은 몽골의 힘을 빌려 무신정권의 잔재를 처단하긴 했지만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담 항목에 전술해놓은 행적들이 바로 그 증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