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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촌, 저는 삼촌의 순수했던 교사 시절이 그리워요.
폴 포트의 조카가 킬링필드에 경악하며 작성한 글. 폴 포트의 형인 그의 아버지는 동생을 원망하며 자살하였다.
폴 포트의 조카가 킬링필드에 경악하며 작성한 글. 폴 포트의 형인 그의 아버지는 동생을 원망하며 자살하였다.
1960~70년대에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대량 학살로, 좁게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폴 포트가 주도하던 민주 캄푸치아에서 크메르 루주가 사람들을 대규모로 처형한 사건을, 넓게는 이를 전후로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학살을 일컫는 말이다.
르완다 학살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체 현대사는 물론,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비극 중 하나로 여겨지며 홀로코스트, 르완다 학살 등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근대의 실패', '이성의 실패'를 드러내는 사례로서도 꼽힌다. 킬링필드의 참혹성을 보여주는 해골이 야지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사진들로도 유명하다. 캄보디아는 5월 20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크메르 루주와 폴 포트에 의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킬링필드 종결 26년 후인 2005년 기준 캄보디아의 인구별 연령대 분표. 24세(1981년생) 이하와 25세(1980년생) 이상 인구 비율이 대조적이다. 2020년 기준으로도 41세(1979년생)에서 갑자기 수가 급감하고 42~45세(1975~1978년생)가 41세에 비해서도 수가 지나치게 적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킬링필드'라는 표현은 민주 캄푸치아 정권에서 살아남은 캄보디아의 사진기자 디트 프란(ឌិត ប្រន, 1942 ~ 2008)이 민주 캄푸치아의 패망 후 태국으로 탈출할 때 보았던 희생자들의 시체 더미와 유골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었다. 여담으로 디트 프란도 민주 캄푸치아 정권 하에서 형제 3명과 자매 1명을 잃었다.
2. 배경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캄보디아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에 점령당했는데 1945년 3월 12일,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은 인도차이나 지역에서의 일본과 프랑스의 대립을 틈타 캄보디아의 독립을 선언하였지만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패망하자 1946년에 식민지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못한 프랑스의 보호 하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끊임 없는 독립운동을 통해 1947년, 헌법을 공포하였고, 1949년에는 프랑스 연합 내에서 독립할 것을 선언하였으며, 1953년에는 경찰권, 군사권을 회복함으로써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이후 시아누크는 비동맹·중립 외교 정책을 표명했다. 내전으로 어수선한 동남아시아였지만 시아누크 정권 시기에는 군사적 충돌이 격화되지 않았고 식량도 풍부하여 수입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으며, 대량의 난민도 발생하지 않아 서구 열강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난 중립외교를 표방하는 것이 가능했다.
다만, 베트남 전쟁 직후 동부 캄보디아 지역은 사실상 북베트남의 실효 지배 하에 있었는데 북베트남은 이 지역에 대규모 지하 터널 네트워크를 통한 보급로인 호치민 루트를 확보하고 있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전쟁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주던 이 보급로에 타격을 주기 위해 국제법을 위반한 '비밀 작전'을 추진했다.
1969년 3월, 미 공군이 아침 식사 작전(Operation Menu)이라고 불리는 동부 캄보디아 지역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시행했다. 이 공습으로 북베트남 남부전선 사령부(COSVN, Central Office for South Vietnam)에 얼마간의 타격을 주긴 했지만 효과는 미미했고 결정적으로 호치민 루트를 단절시키지는 못했다. 이후 북베트남 남부전선 사령부가 계속해서 이동하며 게릴라전을 벌이자 미국은 폭격 지역을 확대했다. 하지만 여전히 큰 소득을 얻지는 못했고 남베트남과 미국의 연합군의 작전이던 '슈메이커 작전'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1970년 3월, 캄보디아의 일부 군부 세력이 미국과 결탁해 친미 쿠데타를 일으켰다. 중립정책을 펴던 시아누크 국왕은 축출되었고 친미 세력인 론 놀이 시아누크 국왕을 대신하여 집권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의 공습이 더욱 격화되었고, 계속된 폭격으로 캄보디아의 농지는 황폐화되었다. 기반 산업인 농업이 무너지자 경제가 붕괴되면서 캄보디아가 직면한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1] 1,000,000명 이상의 피난민이 수도 프놈펜으로 몰려들었지만 식량난과 국제적 고립에 처한 캄보디아는 실향민 및 난민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에게 식량지원을 받았으나 역설적으로 이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은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할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일 뿐이었으며 거의 종결되던 베트남 전쟁의 확전을 부추겼다. 계속되는 폭격으로 론 놀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이 생기고 반미 성향이 강화된 상태에서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자 캄보디아에는 캄보디아나 남베트남 군이 메울 수 없는 정치적·사회적 공백이 생겼다. 결국 이 공백을 틈타 기회를 엿보던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의 정권을 잡게 되었다.
2.1. 크메르 루주 집권
1960년에 설립된 좌익 무장세력이었던 크메르 루주는 사회주의의 실현, 론 놀 정부의 친미노선 철폐라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농민, 공장 노동자, 민족주의 세력들이 모인 거대한 정치 공동체였다. 주로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았으며 미국의 캄보디아 동부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론 놀 정권의 친미 정책과 미국의 본토 폭격을 비판하며 지지도와 세력을 키웠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상, 곧 '혁명'을 꿈꾸기 시작했다.서서히 민심을 잃고 있던 론 놀 정권은 1973년 3월 29일 미국이 베트남으로부터 완전 철수함에 따라 치명타를 입었다. 1975년 4월 17일에 크메르 루주에 의해 수도인 프놈펜을 점령당하고[2] 정권을 빼앗기자 론 놀은 정치적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결국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이미 전국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크메르 루주는 자연스럽게 수도 프놈펜에 입성하게 되었고, 쿠데타 이후 복귀를 위해 크메르 루주를 지지하며 물밑 작업을 펼쳤던 시아누크 국왕이 다시 수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3. 크메르 루주의 집단 학살
풀을 죽이려면 뿌리도 죽여야 한다.
폴 포트
폴 포트
시아누크 국왕은 크메르 루주에 의해 복귀하는 듯 했으나 크메르 루주는 곧 1976년에 시아누크 국왕에게 온갖 혐의를 씌워 가택 연금을 시키고[3]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농업의 붕괴로 실업과 식량난에 처한 사람들이 수도에 몰려들었으나, 이들을 자력으로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고, 반미 노선으로 인해 미국의 식량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크메르 루주는 경제 성장과 식량난을 곧 극복하겠다는 말로 이들을 달래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당시 크메르 루주는 마오쩌둥 사상을 추종하여 폴 포트 본인이 마오쩌둥의 인민 전쟁에 영감을 받았다는 발언을 몇 번 하기도 했다. 크메르 루주는 문화대혁명식 농촌 강제 이주를 결심했는데 이 결정은 수천년 역사의 고국을 초기화시켜 버린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보다도 더욱 가혹했다.[4]
이 전대미문의 대악행 중의 대악행을 저지른 크메르 루주의 수장 폴 포트는 프랑스 유학 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일종의 열성 엘리트로서 지식과 학력은 높았으나 사회 운영이나 갈등 조정에 관한 지혜가 부족했고 가치관도 상당히 잘못되어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처음에는 시아누크가 복귀하면 사회가 안정화될 것이라며 환영했던 민심이 괴상한 정책의 시행으로 떠나가기 시작하자 폴 포트는 더욱 추잡한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폴 포트는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는 이른바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런 추악한 논리로 자국민들을 학살하던 폴 포트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1977년 9월 "혁명에 반대하는 전체 인구의 1~2%만이 제거됐다"고 주장하며 학살을 조장하고자 했으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1978년에는 캄보디아 인구의 20~30%가 여전히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국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후술할 극단적인 통제들을 일부 완화했으며[5] 사형도 '당과 혁명, 인민에게 절대적으로 적대적인 자들'이나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대상'으로 한정지어 임의적인 처형을 줄이고자 했고 지방에 하방된 귀국 유학생들을 프놈펜으로 보냈고 공장들에서는 '부르주아의 상징'으로 간주되던 전문기술 교육을 재개했으며 심지어 외무부 간부들을 양성하기 위한 외국어, 비서 관련 업무 교육과 국립공업전문대학 신설까지 실시되었다.
물론 폴 포트는 자신의 정책 실패의 원인을 정책 그 자체의 문제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도부에 배신자나 스파이가 숨어 '파괴활동'을 자행해서 그럴 거라고 믿었으며 이로 인해 그와 동시에 집권 이래 최대의 숙청 작업도 진행되어서 '중앙에서 결정된 숙청'이 계속 실시되어 수만 명이 처형당한 것은 물론이고 폴 포트가 집권할 때 22명에 달하던 공산당 중앙위원회 의원이 폴 포트가 축출될 무렵에는 단 4명만 살아남았다. 심지어 베트남과 국경을 맞댔으며 베트남과 밀접한 연관을 맺은 간부들이 우세했던 데다 친베트남 성향이었던 캄보디아 동부 지역에서는 폴 포트가 '너무 온건하다'고 생각한 동부 지역의 간부들에 대해 당 중앙군을 동원해 동부 지역을 침공해 가면서까지 당, 군대 및 인민 모두에 대한 대규모 무차별 숙청을 가했고 이에 따라 단 6개월 만에 동부 지역에 살던 약 150만 명 중 무려 25만 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폴 포트 정권 하에 있던 모든 학살 중 가장 심각했다고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탈출한 간부들 중 일부는 베트남으로 피신했고 일부는 다른 지역에서 또다시 학살을 저질렀다.
하술할 내용들을 보면 알겠지만 폴 포트의 악행들은 문자 그대로 사실상 전국민을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혁명화구역에 강제 입소시킨 것과 똑같았다.[6]
다만 저런 학정 속에서도 저항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민주 캄푸치아 시기에는 크메르 루주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이 적어도 한 지역에서 발생했고, 1976년 9월부터 전국적으로 계속되는 폭력과 새로운 사회의 경직된 본질에 실망한 폴 포트에 대한 크메르 루주 내부의 쿠데타 계획이 군부 지도자들과 당 간부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7] 최소한의 저항 징후는 처형으로 다스려졌기 때문에 이조차 제대로 된 효과를 내지 못했다.
3.1. 도시민 강제 이주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의 시민들이 강제로 추방되는 모습 |
크메르 루주는 도시가 자본주의의 온상이자 공산주의를 방해하는 원흉이라고 보았는데 도시민을 인간 개조가 필요한 '신인민'이라고 부르면서 프놈펜을 포함한 모든 도시민들을 농촌에 소개시켜 공산주의 사상을 다시 배우게 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크메르 루주는 이 계획을 정권 장악으로부터 이틀밖에 안 된 1975년 4월 19일[8] 오전 10시 반에 미군의 공습이 있을 것이라는 거짓말을 이용해 프놈펜을 포함한 모든 도시에 살던 사람들을 도시에서 강제로 나가게 한 것으로 시작했다. 먼저 군인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협박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쫓아냈으며[9]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거나 24시간 이내에 나가길 주저하면 곧바로 그 자리에서 죽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대로 된 준비 하나 없이 강제로 집에서 쫓겨난 후 10대 병사 두세명 정도가 관리하는 행렬에 가담하게 되었다. 크메르 루주는 강제 이주를 할 때에 '2~3km만 이동하면 2~3일 후에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거짓말을 쳤지만 현실은 사실상 모두가 2~3년이 넘어도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강제 이주는 매우 끔찍했다고 한다.[10] 하필 강제 이주 무렵인 4월 중순은 1년 중 가장 더운 우기 직전이라 기온이 40도 이상으로 치솟았고[11] 이 와중에 도시를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도로가 꽉 차 5일 동안 13km밖에 걷지 못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겨우겨우 외진 곳으로 걸어가는 과정에서 멈추거나 대화하거나 웃거나 울고 힘들어서 차에 태워 달라고 요청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혹은 일단 태워 준 뒤 모두 처형했다고 한다.
당연히 크메르 루주는 강제 이주 과정에서 중환자, 임산부, 어린이와 노약자도 조금도 배려하지 않아 200미터마다 아이들의 시체가 하나씩 보였을 정도였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버리고 갔으며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울부짖었다고 한다.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가족이 행방불명돼서 그 가족이 돌아올 때까지만 도시의 집에서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자 크메르 루주는 그렇게 집에 있고 싶다면 죽을 때까지 집에 있으라면서 문에 쇠사슬을 묶은 채로 그 사람을 감금했고 이렇게 감금된 사람은 물도 마시지 못해서 결국 사망했다고 한다.
그 혼란 속에서 이주 과정에서만 열대우림 환경에 기아와 질병 등까지 겹쳐 1만~2만 명이 아사하였고 1975년 한 해 동안 도시 이주민 중 무려 1/3이 사망했다. 심지어 이주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 중에는 폴 포트의 형이자 폴 포트의 사상에도 영향을 준 캄보디아의 유명한 좌익 언론인 살로스 차이(Saloth Chhay, 1920?~1975)도 있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며칠 안 지나 캄보디아에 있는 다른 도시에 살던 사람들도 모두 이와 같은 강제 이주를 당했다.
3.2. 강제 노동
1976년 캄퐁참 지방에서 관개 작업을 하는 캄보디아인들 |
캄핑 푸오이 저수지를 건설하는 모습 |
게다가 이후에는 휴식 시간이 더 짧아지며 아예 아침 식사도 안 먹이는 일이 흔해졌고 심지어 저녁 식사마저 안 주거나 자정 이후까지 일하는 경우까지 생겼다.[12] 휴일은 10일에 한 번씩만 있었고, 그 휴일도 정치회합에 참여하는 걸로 채워졌다. 예외적으로 전통적인 설이자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시기인 4월 중순에는 3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물론 화폐가 소멸했으니 이들은 모두 완전한 무급과 배급을 받으면서 일했다.[13]
크메르 루주는 "방조제가 있으면 물이 있고, 물이 있으면 쌀이 있고, 쌀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다"는 타이틀을 내걸고 노동자들을 3개의 '군'으로 조직했는데 첫 번째 부대는 15~40세 정도의 미혼 남성들로 구성되어 관개시설 건설을 담당했으며 두 번째 부대는 기혼 남녀로 구성되어 쌀 농사를 담당했고 세 번째 부대는 4세 이상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직물 짜기나 바구니 만들기처럼 비교적 덜 힘든 일을 담당했다.
이후 크메르 루주 치하의 모든 캄보디아인들은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고,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산다'는 슬로건과 함께[14] 농사철에서는 논에서 농사를 지어야만 했고 나머지 기간에는 맨몸으로 운하와 댐, 제방, 총연장 1만 5천km에 달하는 수로 등의 관개시설 건설에 강제로 참여해야만 했는데 이 과정에서 실수하거나 반항하는 사람들은 '살려 둬도 이익이 없고, 없애도 손해가 없다'는 막말을 들어 가면서 끌려간 후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거나 총살당했다. 이때 크메르 루주는 처형당한 사람들에게 '코코넛으로 환생하라'는 막말을 퍼부었다. 당연히 이런 노동에 '자본주의의 잔재'인 기계가 사용되는 일은 전혀 없었다.
후 님은 크메르 루주 최고지도부에게 '농업 생산량 향상을 위해 기계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자 '농업에서 외국 기계를 사용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닌 자본주의자의 사고방식이다'라는 답변을 들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만삭의 임산부까지 목까지 잠길 정도로 깊은 강 속에서 추운 우기에 운하 작업을 해야 해서 다리와 발이 퉁퉁 부어오르고 출혈이 생겼을 정도였다고 하며 크메르 루주는 철로도 맨손으로 만들도록 시켰고 한 생존자는 농장에는 링거를 꽂은 상태로 링거를 당기면서 걷는 환자와 혼자서 출산하는 임산부들도 많았는데 그 풍경은 가히 지옥과도 같았다고 증언했다. '일하기엔 너무 약하다', '할당량만큼 생산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죽어나갔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으며 높은 할당량을 못 채운 사람은 살아남더라도 여분의 일을 더 하거나 더 적은 식량 배급을 받아야만 했다.
민주 캄푸치아의 강제노동 모습을 담은 실제 영상
3.2.1. 심각한 기근과 무책임한 대응
이러한 무자비한 정책으로 농촌의 노동력은 어느 때보다 많았지만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렸다.[15] 캄보디아는 농사 짓기 좋은 환경이어서 해마다 약 2백만 톤대의 쌀을 생산하는 국가였지만 1975~76년에는 비축한 쌀이 전혀 없었고 1977년이 되어서야 쌀 수만 톤을 수출하게 되었고 1978년에는 농촌 지역의 땅들 대부분이 경작되지 않은 채 버려졌을 정도로 국가가 초토화되었다.[16] 당시 폴 포트가 1976년에 농산물 생산과 수출을 대대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4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다른 무엇보다도 쌀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며 이에 따라 쌀 생산량을 이전의 3배인 1헥타르당 1톤에서 1헥타르당 3톤으로 늘려야 한다'며 국민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한 것을 감안하면 처참하기 그지없는 결과였다. 물론 폴 포트는 이 수확량을 위해 '서구 문물'인 화학 비료 대신 동물의 배설물과 충적토 등을 쓰라고 지시했으며 이에 따라 어린이들과 노약자들은 비료로 쓸 배설물과 사람의 시체를 모아야 했다. 물론 진작에 집권 이전 내전 과정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농지 80%가 불모지가 되어 농사를 제대로 못 짓는 환경이 되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17] 이를 감안하더라도 크메르 루주 농업 정책의 비현실성과 과격성은 도를 넘은 수준이었다.이렇게 수확량이 떨어져도 크메르 루주의 관리자들은 처벌을 회피하고자 목표량을 달성하거나 초과했다고 상부에 허위 보고하거나 사망자 수를 줄여서 발표하고 사망자에게 돌아갈 식량을 빼돌리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정부는 이를 토대로 군대나 행정기관에 공급하고 전략물자로 비축할 쌀을 징수해 갔다. 그러고도 크메르 루주는 중국으로부터 무기를 얻을 자금을 얻기 위해서[18] 이렇게 수확한 작물들의 대부분을 '최전선 전사를 위한 것'이라는 명목으로 수탈하여 수출했고 주민들에게는 이엥 티릿 사회부 장관이 '밥을 지을 필요 없이 일하고 와서 그냥 밥을 먹으면 된다'는 말을 남긴 것처럼 다 함께 하나의 급식소에서 하루 2잔의 멀건 쌀죽[19]만 허용했는데 심지어 병이 들어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 맹물에 가까운 조잡한 쌀죽조차 한 숟가락도 주지 않았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는 음식이라고 하기 힘든 이런 음식을 먹으며 맛없다고 하거나 겨우 '국수를 배불리 먹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보이면 바로 끌고 가고 처형했으며 병에 걸려 노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도 '인력을 잃게 만들었다'고 모함하거나 '혁명의식의 결핍'이나 정권에 대한 반항, 심지어 '일을 기피하고 더 많은 음식을 얻기 위해 꾀병을 부린다'고 주장했다. '병자들은 그들 자신의 상상의 희생자들이다', '우리는 자신이 아프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고 우리 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만들기도 했으며 환자들을 위한 약과 휴식을 거의 주지 않았다.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것은 '가상의 질병'에 걸린 것으로 여겨졌고 열악한 노동 조건과 식량 배급에 불만을 품거나 기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사형으로 다스렸다.
폴 포트는 집권 초기인 1975년 8월에 서남지대를 방문하고 이주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고통을 겪고 있고 식량과 의약품이 부족하다는 것을 목격했으나 이주민들의 고통보다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노동력 약화를 더 심각하게 여겨 각 지역의 생산할당량에 맞춰 인구를 재배치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크메르 루주는 '프놈펜이나 바탐방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지원자를 모은다'는 명분으로 '지원자'들을 모으고 이들을 대부분 캄보디아의 대표적 곡창비대인 서북지대로 보냈다. 그리고 폴 포트는 매주마다 각 지역 지도자들이 보낸 상세한 보고서를 통해 국민들의 고통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1976년 말에는 당 지도부의 비공개회의에서 '농촌 지역의 3/4이 심각한 식량부족을 겪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도 기근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며 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다. 그나마 후자의 회의에서 폴 포트는 '이것은 우리의 실수다'라고 하면서도 이것이 자신의 정책상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혁명에 대한 태도와 혁명의식이 미약하기 때문이라고 진심으로 주장했다. 덤으로 폴 포트는 1976년 12월에 중앙위원회 회합에서 식량 부족의 이유가 '숨어 있는 적들의 식량 약탈과 적들에 의한 자기들의 지령 왜곡, 적들이 인민들이 병에 걸리던 말든 강제로 일을 시키며 인민들을 학대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원래 크메르 루주는 1인당 하루 배급량을 570g 정도로 약속했으나 실제 배급량은 많으면 500g 정도였고 배급량이 250g에 불과한 지역도 있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340g짜리 깡통의 절반 정도인 약 180g 정도만 배급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20] 그런데도 크메르 루주는 시간이 지나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음식 배급량을 도리어 더욱 줄였다.
이렇게 양과 질 모두 형편없는 음식만 먹어야 했던 사람들은 너무나 굶주린 나머지 수유기 여성들의 젖이 나오지 않고 생리가 멈출 정도로 기아상태에 빠졌다. 결국 사람들은 살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수렵채취로 기아를 면했으며 독이 있거나 덜 익은 동식물은 물론이고 돼지가 먹을 사료, 나뭇잎과 나무껍질, 흙을 넘어 심지어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벌거벗은 세계사에 출연한 캄보디아인 패널인 위살봇의 증언에 따르면 사람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도마뱀이나 바퀴벌레를 잡아먹었고 본인의 외할아버지도 이때 기아로 인한 염분 부족 상태로 사망했다고 한다. 폴 포트 치하에서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부모, 큰언니, 여동생을 잃은 캄보디아계 미국인 여성 인권 운동가 로웅 웅(Loung Ung, 1970~)의 증언에 따르면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죽은 남편의 살을 너무 배고팠던 나머지 자기의 아이들과 나눠 먹은 한 여성이 독에 중독되어 아이들과 같이 목숨을 잃어 한 가족이 몰살되는 참혹한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폴 포트는 살기 위해 인육까지 먹어야 한 사람들이 적발되면 목까지 땅에 파묻어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둔 후 죽으면 효수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로 삼게 했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는 식량과 물물교환을 하는 것을 반역 행위로 간주해 식량과 물물교환을 하다가 걸린 사람은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면서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이름을 털어놓아야 했다. 물론 식량을 기르는 밭들은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며 주민들이 식량을 몰래 가져가는 것을 막았으며 심지어 여자들이 밭에서 식량을 훔치다 걸리면 그 군인들은 걸린 여자들이 아무리 어려도 봐주지 않고 강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크메르 루주는 정부가 정하지 않은 야채와 채소를 기르는 것은 물론이고 물고기를 잡거나 야생 망고 하나를 채취하는 등의 수렵채취도 사람들마다 수렵이나 채취로 구한 것들의 양이 다르니 평등하지 않다는 이유로 금지시켰다. 이런 조치는 지도자의 지도자들이 승인한 것이었다.[평전] 심지어 농장을 휘젓고 다니는 멧돼지를 죽이거나 '엉까의 소유물'로 간주된 땅에 떨어진 과일을 줍는 것까지 '민간 기업 활동'이나 '집단 재산 절도'로 간주해 처형으로 다스렸고 감자를 잡다 들킨 사람은 현장에서 총살되었으며 작물을 먹는 새들을 쫓는다는 명목으로 과일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려 과일 채집까지 막아 버렸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는 "배고픔은 가장 효과적인 질병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음식을 갖게 되면 공동체의 음식 분배가 부적절해진다. 우리는 모두 평등해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굶주리면 모두 굶주려야 한다.", "인민의 재산에서 손을 떼십시오! 쌀 한 알, 고추 한 알, 바늘 한 알도 안 됩니다!" 등의 말들로 국민들의 아사를 조장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측정한 킬링필드 시기 캄보디아의 1인당 평균 열량 섭취량은 처참하여 1970년 기준으로 2,088kcal의 낮은 수준이었다가 캄보디아 내전의 영향으로 1974년 기준 1,902kcal의 매우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으나 이조차 1975년에는 1,596kcal로 폭락했고 1976년에는 1,519kcal로 다시 한 번 폭락했으며 1977년에는 1,537kcal, 1978년에는 1,580kcal로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단 5년 만에 평균 열량 섭취량이 76.4%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1976년에는 1970년의 72.7%였다. 킬링필드 시기 연평균 열량 섭취량은 1,558kcal이었으며[22] 이쯤이면 하루 두 끼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슷하게 혼란상에 빠졌던 라오스도 평균 열량 섭취량이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내내 1,900~2,000kcal대 박스권을 맴돌고 베트남도 이와 비슷한 수준[23]이었단 것을 감안하면 매우 치명적인 수준이다.[24] 참고 자료
그러한 정책의 결과가 가져온 여파는 장기적으로 이어졌는데 크메르 루주가 축출되고도 반 년도 더 지난 시점이었던 1979년 10월 8일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폴 포트의 퇴진 후에도 캄보디아 아동의 영양실조율은 무려 90%에 달했고 식량배급량은 겨우 130g에 불과해 많은 사람들이 곤충을 잡아먹으며 연명했다고 하며 당시 캄보디아의 참상은 크메르 민족 자체가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했다고 한다. 출처 크메르 루주가 집권할 동안 27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민주 캄푸치아를 탈출하여 태국 난민 수용소에서 살아가야 했으며 1979년에 태국 난민 수용소에서 일했던 의사 존 콜린스 하비(John Collins Harvey)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8세에서 11세라고 생각한 소년들이 사실은 16세에서 20세였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했다. 곧 성인이 될 청소년들이 하도 굶어서 영양부족에 시달린 나머지 몸집이 초등학생 수준으로 줄었다는 뜻이다.[25]
크메르 루주는 농학에 무지하여 국토마다 기후와 환경이 다른데도 모든 지역이 동일한 농사 일정을 따라야 한다는 규범집을 만들고 이를 강요했으며 기껏 건설한 관개시설도 공학적 지식이 전무한 크메르 루주 간부들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제 기능을 할 리가 없어 제대로 된 효과를 보지 못했다. 더구나 폴 포트는 서양 의학을 '자본가의 발명품' 정도로만 여기며 서구식 병원과 의학 도서관을 모두 불태운 후 의사들이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사람들을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가야 한다며 10대 소년들을 아무런 훈련과 기본적인 지식 전수 없이 환자들을 치료하게 했는데 그 소년 의사들은 다양한 식물의 혼합물을 융합한 것을 코코넛 주스에 용해한 뒤 재활용된 더러운 바늘로 주사하거나 환자에 대한 기본적인 마취 하나 없이 환자들을 '치료'했다고 한다.[26] 보건소에서는 무자격 간호사들이 정맥주사나 비타민 주사를 투여했고 말라리아 치료제라며 약초를 나눠주었다. 물론 폴 포트는 이를 '혁명적인 의학'으로 자화자찬했지만 자신들도 이런 '서구적이지 않은' 치료는 받기 싫었는지 크메르 루주 수뇌부들은 아프면 중국까지 가서 서구식 치료를 받았고 지방 간부들은 서구 의약품을 이용했다. 프놈펜에 있는 병원 두 곳은 티오운 티오은과 인 소칸이 운영했는데 고위간부와 외국 외교관이 이용했다.
당연히 경제 사정이 좋아질 리가 없어 UN 통계 기준으로 민주 캄푸치아의 1인당 GDP는 언제나 95~106달러의 박스권을 맴돌았으며 1975년(184위)을 제외하면 모두 187개국 중 185위, 즉 뒤에서 3위였다.[27] 물론 이는 캄보디아가 내전의 영향으로 크메르 루주가 집권하기 전부터 경제가 박살났던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28] 정부가 큰소리친 것과 비교하면 턱없는 성과였다.
그러나 더욱 분노할 만한 점은 이렇게 국민들은 심각한 기아에 시달렸으나 정작 크메르 루주 수뇌부들은 국민들이 배급받는 쌀죽을 같이 먹어가며 솔선수범하기는커녕 '백두혈통'과 마찬가지로 너무 잘 먹고 잘 산 나머지 오히려 집권 이전보다 살이 더 찔 정도였다. 당장 폴 포트 문서 최상단의 그림을 봐도 집권 전 사진과 비교하면 얼굴에 살이 많이 붙은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다. 시아누크 국왕은 중앙위원회 병참부로부터 푸르삿의 오렌지, 캄포트의 두리안, 람부탄, 파인애플과 같은 각 지방의 특산 과일과 일본산 화과자, 호주산 버터, 프랑스식 바게트빵, 오리알, '맛 좋은' 캄보디아산 게 등을 공급받았으며 이엥 사리는 시가와 코냑에 대해 뚜렷한 취향을 가졌을 뿐더러 UN 총회에 다녀오는 길에 푸아그라와 스위스 치즈가 든 바구니를 들고 왔고 폴 포트는 당시로서는 호화로운 음식이었던 코브라 수프[29], 사슴 및 멧돼지 고기, 신선한 과일, 브랜디, 중국산 술을 즐겨 먹었다.
크메르 루주의 농업 정책과 기아에 대한 참고 자료
3.3. 반지성주의에 입각한 대량 학살
우리는 교수, 의사, 기술자를 비롯한 전문적 인사들에 대해 …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 우리 당의 방침은 그들을 고용하지 않는 것이다. … (그들을 고용하면) 그들은 우리 당원에게 점점 더 깊이 침투할 것이다.
민주 캄푸치아 중앙위원회
민주 캄푸치아 중앙위원회
이전에는 조종사가 되려면 고등교육을 받아야 했다. … 이제는 석 달이면 충분하다. … 정치의식이 중대한 요인이다. … 전파탐지기는 두 달만 배우면 조종할 수 있다. … 선박을 조종하는 법도 배울 수 있다. …
폴 포트
폴 포트
크메르 루주 정권은 자본주의나 외국과 관계되어 있거나 관계되었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 공무원, 교수, 교사, 의사, 약사 등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유학생들과 중산층 이상의 사람, 심지어 유명 스포츠 선수와 음악가를 포함한 예술가들, 즉 농민, 노동자 외에 모든 사람들을 사회의 장애물이자 악의 축으로 보아 전부 처형하거나 수용소에 가두었다.
크메르 루주가 지식인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매우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그 유명한 '영어를 안다'[30], '손바닥에 굳은 살이 없다', '안경을 썼다'[31], '피부가 희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인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매우 양호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캄보디아에는 펜을 가졌다는 이유는 애교였고 무려 책을 똑바로 들 줄 안다, 화장을 한다, 술을 마신다, 담배를 핀다, 시계를 볼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지식인으로 몰려 처형된 사람과 배가 나왔다는 이유로 부르주아로 몰려 처형된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캄보디아의 의사들은 800명 중 40명만 살아남게 되었다.
한 예로 핑 소이와 그의 동료는 중등교육이 시작될 때를 대비해 혁명교과서를 집필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중등교육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크메르 루주군에 합세한 이들이 각 집단농장에서 어린이들에게 기초적인 읽고 쓰기와 산수를 가르쳤지만 이조차도 촌장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평전]
킬링필드의 광풍을 입증하는 엽기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1977년 7월 6일에 폴 포트의 파리 유학 당시 동창생이자 크메르 루주 정권의 정보선전장관이었고 온건파였던 후 님(Hu Nim, 1932~1977)이 반역죄 혐의로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 뚜올쓸라엥에 끌려가고 나서 아내의 처형으로부터 한참 지난 후 다른 126명과 같이 처형당했는데 처형 사유가 참으로 가관인 것이 무려 크메르 루주의 정권 장악 직후에 라디오 방송에서 피아노곡을 전국에 내보내서였다고 한다.[33] 후 님의 처형으로부터 3일 후 해외 음악은 물론,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본 테니스를 포함한 스포츠도 모두 금지되었고 유망한 테니스 선수들도 전부 숙청되었는데 이처럼 운동선수 2천여 명이 자본주의자라는 명목으로 몰살되었다. 당연하지만 캄보디아의 전통 문화에 능통하던 사람들도 대량으로 학살당했으며 단순히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조차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했고 심지어 단순히 학교 근처에서 놀던 일자무식의 아이들조차 '지식인'으로 몰려 살해당했다.[34]
이것 때문에 캄보디아에서는 문맹률이 굉장히 높아져 정보 전달을 위해 식당 간판에 접시를 그려넣는 등 거리의 간판에 그림을 그리는 사례까지 나타났다고 한다.[35]
권력자의 학살 자체가 문제지만 그 명분마저도 근거가 부족하고 그 실행마저도 중구난방이었다. 처형시킨 이유는 사실 핑계고 그냥 죽이고 싶어서 죽였다 수준에 가깝다. 폴 포트는 이를 합리화하며 죄책감에서 도피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이런 극악무도하고 무식하기 그지없는 박해의 대상이 된 지식인들이 죽거나 숨거나 탈출하여 사라지자[36] 크메르 루주의 학살 대상은 농민들 중 협조적이지 않은 자들로 확대되었으며 나중에는 크메르 루주 간부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살해되는 숙청 투쟁으로까지 변해 버리면서 말 그대로 캄보디아 전역이 사지(死地), 즉 킬링필드로 변모해 버렸다.
한창 교육 현장에 종사해야 할 교사들마저 다 학살당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처럼 캄보디아 교육에 크나큰 '단절'을 가져왔으며 비교적 최근까지 캄보디아의 교사들 중에는 과학 실험을 직접 해 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기술이나 예산 문제도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이러한 '단절' 때문이며 자기들이 못 배웠는데 다음 세대를 잘 가르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37] 그도 그럴 것이 크메르 루주는 교사들을 10명만 남겨놓고는 모두 몰살해 버렸다.
당연하겠지만 독립 후 크메르 공화국 시절까지 기득권을 누려 온 친불 지주들도 킬링필드 과정에서 완전히 몰락했다. 특히 이들은 공산주의가 매우 혐오하는 지주 세력이었으니 목숨만 부지해도 천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학살 과정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학살당한 것에 더 가깝긴 했지만.
3.3.1. 학살 방법
학살 수법도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인류가 탄생한 이래 그 이전에는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을 엽기적이고 피비린내나는 학살 방식을 선사했다. 과장 좀 보태서 크메르 루주는 인간을 살육하는 데만 쓰잘데기없이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했다고 해도 될 정도다.이들이 쓴 살해 방법은 대강 이러하다.
- 가장 흔한 방법은 눈을 가린 뒤 팔을 뒤로 묶고 몽둥이를 이용해 죽이는 것이었다.
- 반동으로 낙인찍힌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묻힐 구덩이를 파게 하고 밖으로 나와 가장자리에 서게 한 뒤 몽둥이로 뒤통수를 쳐서 구덩이로 밀어넣어 죽였다.
- 총알을 아끼기 위해 유난히 가시가 많은 설탕야자나무 몽둥이로 사람을 때리거나 손을 묶고 비닐 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시켰다. 이것은 키우 삼판의 아이디어였다.
- 구덩이나 우물에 사람들을 산 채로 몰아넣은 뒤 밀폐해 죽였다.
- 사람들을 일렬로 세운 뒤 한꺼번에 창으로 찔러 죽이기도 했다. 크메르 루주는 50명에서 1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집단을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것을 즐겼는데 어떤 경우에는 약 130명을 동시에 처형하기도 했다.
- 참수는 처음에는 '정석적으로' 칼로 하다가 나중에는 가시가 달린 나뭇가지와 날카로운 야자수 잎줄기, 줄기 가장자리로 했다.
- 사람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것을 넘어 산 채로 타일 오븐에 넣어 죽이기까지 했다.
아래 내용은 1996년 6월 7일에 타전된 방콕발 연합뉴스 기사에서 발췌하였다.
- 민간인 학살에 고압선을 이용한 전기고문과 물고문은 물론, 사람을 고문 침대에 눕혀 놓고 쇳덩어리로 머리를 짓누르는 방법도 사용했다.
- 반동으로 몰린 사람들이 과거 정권에 협조했다고 불지 않을 때는 도끼로 손을 자르거나 산 속 나무에 묶어 이 나무를 오르내리며 먹이를 찾는 열대 붉은왕개미들로 하여금 살을 파먹게 했다.
- 심지어 이들이 여성일 경우에는 민감한 부분들을 도려냈다.
- 고문은 주로 크메르 루주에게 세뇌당한 10대 위주의 고문기술자들이 맡았다. 이들은 고문 센터에서는 물론이고 사람을 죽이기 직전에도 고문을 가했다.
- 고문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수감자가 정보를 말하기 전에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크메르 루주의 고문 수법은 이러하다.
- 주먹질이나 몽둥이, 쇠파이프, 채찍, 전선 등으로 사람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 수감자의 팔을 뒤로 묶은 채 도르레로 끌어올려 어깨를 탈구시켰다.
- 사람을 거꾸로 매단 후 오물이 담긴 바구니에 얼굴을 담그게 했다.
- 담뱃불이나 불에 달군 금속으로 사람을 지졌다.
- 독이 든 지네와 전갈을 수감자들의 상처나 은밀한 부위에 풀어놓았다.
- 사람을 철제 침대 프레임에 눕힌 뒤 자동차 배터리를 통해 전류를 신체의 민감한 부위에 집중적으로 흘려보냈다.[38]
- 처형자를 욕조에 넣고 욕조 안의 고리에 사지를 끼워 고정시킨 뒤 서서히 물을 채워 익사시키기도 했다.
- 플라이어로 얼굴을 훼손한 뒤 그 위에 산을 부었다.
- 전기 드릴로 뒤통수를 뚫었다.
- 거세하기도 했다.
- 디딜방아처럼 생긴 도구에 머리를 넣고 찧어 죽였다.
- 처형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을 가리기 위해 나무에 매단 스피커로 선전가들을 요란하게 틀었다.
- 이렇게 학살, 고문, 처형을 하면 시체가 남기 마련인데 처형한 시체에는 DDT를 뿌려 시체의 냄새를 가렸으며 심지어 DDT를 집단 무덤 속에서도 간신히 살아남았던 사람에게 뿌려 죽이기도 했다.
- 폴 포트는 "풀을 죽이려면 뿌리도 죽여야 한다."[39], "썩은 사과는 상자째로 던져야 한다."는 말을 남기며 '반동분자'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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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이를 가시가 많은 나무(킬링 트리)에 패대기치고 있는 크메르 루주의 모습.[42] 저 마귀만도 한참이나 못한 것과 그 부하들은 대상이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봐주는 법이 없었으며, 오히려 젖먹이 아기들에게 가장 몹쓸 짓을 저질렀다. |
- 만약 한 '반동분자' 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가장 먼저 살해하고는 부모도 고문한 후 살해했다.
- 아기들을 공중으로 던져 총검술 연습의 표적지로 사용했다.
- '운다'는 이유로 7~8개월밖에 안 된 아기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빼앗은 후 3층 발코니에서 떨어뜨렸다.
- 아이들을 아예 악어가 득실거리는 늪에 던져 악어밥으로 주는 식으로 살해했다.
- 팔이나 다리를 잡고 몸뚱이를 바위나 시멘트 바닥 또는 통나무 등에 내려쳐 끔찍하게 살해했다.
- 여기에다가 마을에 스피커를 달아서 온 마을 사람들이 이 아기가 고통에 몸부리치는 비명소리를 듣게 하거나, 나무에 갓난아기를 내리치는 동안 스피커로 선전 가요를 요란하게 틀어서 아기의 비명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 이 광경을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 강제로 지켜보게 하며 그 아이의 시신을 근처에 미리 파둔 큰 구덩이에다 던져넣은 후 그 아이의 어머니를 강간하고는 때려 죽인 후 아기와 같은 구덩이에 암매장했다.
당시 크메르 루주가 아이들에게 저지른 짓이 너무나 극악무도했기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 극도의 뻔뻔함을 보이던 뚜올쓸라엥 수용소의 소장 두치마저 2008년 2월 26일 아이들을 잔혹하게 죽인 뚜올쓸라엥의 '킬링 트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이 나무에서 희생된 아이들에게 사과했다.
그 외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 크메르 루주 군인들은
- 크메르 루주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이기도 하며 폴 포트 정권의 잔학상을 그린 아카데미상 수상 영화 '킬링필드'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행 S. 응고르[43]는크메르 루주는 물고기를 훔친 부이 소판(당시 31세)이라는 친척을 인민재판에 회부한 후 죽인 뒤 간을 꺼내 요리해 먹었다.
고 폭로하기도 했다. - 크메르 루주 군인들은 구치소에 감금되었던 출산 직전의 임산부를 연행한 후 살해하고 간과 심장을 술안주로 삼기도 했다.
- 한 여성에게는 남편이 살아 있었을 때 잘라낸 간을 요리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 한 여자를 강간하고 살해한 후 그 여자의 10살밖에 안 된 자식을 살해하고 문자 그대로 그 아이의 간을 꺼내 먹었다.
- 농민 출신 크메르 루주 간부들은 '연기에 그을린 아이'를 마법의 부적으로 이용하고, 죄수의 쓸개를 꺼내 약으로 먹었다.
- 크메르 루주 수뇌부는 이런 행위들을 잘 알았다. 손 센은 지방 관리들로부터 이런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받았다.[평전] 하지만 이를 저지하기 위한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 어찌 보면 당연한데 두치가 재판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상술한 수용자들의 자식들에 대한 살해는 윗선에서 "복수를 막아야 한다." 는 명목으로 직접 지시하여 공식 정책으로 삼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두치 피셜로는 본인이 수감자들의 '자백'에 대해 상부에 보고하면 상관인 누온 찌어 부서기가 두치에게 조언하며 지시를 내렸다고 하고 폴 포트가 명령을 내리면 누온 찌어가 이 명령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결정했다.
- 이들의 학살 방법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략해서 후술할 S-21 수용소를 탈환했을 때 수용소 곳곳에 고문으로 심하게 훼손된 시신들이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던 참혹한 상황이었다.
- 사실 원래 크메르 루주는 나치 독일의 절멸수용소처럼 가스실을 운영하여 '효율적으로' 학살을 벌이려고 했지만 치클론 B를 운영할 기술이 없어서 이런 방법들을 사용한 것이었다는 듯하다.
그랬으면 학살을 포기했어야지... - 참고로 치클론 B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생산 단가가 비싸고 유통기한도 짧아서 아우슈비츠랑 마이다네크에서만 사용되었고 전차에서 뜯어낸 전차 엔진을 공회전시켜 나온 일산화탄소로 죽이는 절멸수용소가 더 많았다. 나치 독일을 따라하기에는 자원도 없고 기술도 없으니 저런 야만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이며 따지고 보면 가스실도 '서구 문물'이다.
- 이런 끔찍한 폭력, 고문, 살해들은 크메르 루주 정권 하에서 모두 혁명의 업적으로 포장되었다.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 중 한 명은 대학살은 민중의 순화의 수단이라는 극단적인 망언을 남겼다.
- 크메르 루주는캄보디아에 단 100만 명의 사람만 남더라도 우리는 학살을 계속해야 한다.공산주의 혁명은 단 두 사람이 있어야 성공 가능하다.
고 생각했으며, 간부들에게한 손은 생산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한 손은 적을 가격하기 위한 것이다.
고 말하며 학살을 조장했다. - 폴 포트 본인은 이런 피비린내 나는 학살들을 「캄보디아 혁명」이라고 부르고 이를 '세계 혁명의 본보기'라고 부른 것도 모자라 민주 캄푸치아는 혼란스러운 세계 한가운데 떠 있는 순결의 섬이자, 인류의 귀중한 본보기라고 불렀으며 스탈린처럼 ‘계급투쟁은 혁명 이후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강화된다’고 믿었다.
인육을 먹으면 극도로 무자비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게 하는 용기를 얻게 해 준다.
고 믿었기 때문에 크메르 루주 치하 캄보디아에서는 엽기적인 식인 행위들도 일어났다. 실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렇게 인육을 먹은 군인들은 눈알이 붉어지며 매우 잔인하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3.3.2. 뚜올쓸라엥 - 캄보디아판 아우슈비츠
자세한 내용은 뚜올쓸라엥 문서 참고하십시오.'S-21 보안감옥'이라고도 불리며 크메르 루주가 운영하던 120~196곳의 정치범수용소 중 가장 악명이 높은 곳으로 프놈펜에 있는 고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모든 수감자들을 학살하기 위한 절멸수용소였다. 가혹한 환경과 고문, 처형 때문에 수감되었던 2만 명 중 최종 생존자는 단 12명밖에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기록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생존자도 전무했던 지방의 교도소 중에는 뚜올쓸라엥이 양호해 보일 정도로 잔혹한 수용소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3.3.3. 학살 주범들의 모순
안경을 쓴 폴 포트의 모습[45] |
크메르 루주가 정한 기준대로라면 서구의 문물을 누구보다도 많이 누렸고 국가의 적이라는 지식인의 조건에 가장 완벽하게, 모든 조건에 부합하여 캄보디아인들 중 가장 먼저 멸족되어야 했을 인물이 바로 이 학살을 지시하고 주도한 폴 포트 본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나 지식인을 멸족하려던 폴 포트 본인이 자신이 세운 학살 기준을 무려 38개[46]나 충족했기 때문이다. 후술하듯 크메르 루주의 지식인 판별 기준이 극도로 가혹했기 때문에 일반적이었으면 아무 관심도 주지 않았을 사소한 내용까지 강조되어 있다.
- 집권 전 행적: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데다 어릴 적에 왕실 불교 사찰에서 승려 교육을 받았고 가톨릭계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프랑스어도 알게 되었고 16살 무렵에는 궁녀들과 혼전 성관계를 맺었으며 이후에는 기술학교에 재학하다가 시아누크 국왕의 후원으로 유럽의 프랑스에서 국비 장학생으로 지내며[47] 무선 전기공학[48]을 전공했으며 집권 전에는 교사로 일했다.
- '서구 문물' 애호: 중학교 시절에는 바이올린과 축구와 농구를 잘 했고 유학 생활 시절에는 프랑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저서와 프랑스의 시인 폴 베를렌의 시를 좋아했으며 집권 시절에는 브랜디를 즐긴 데다 아프면 해외인 중국까지 가서 서구식 치료를 받았고 시력이 나빠 안경을 쓰고 다녔으며 서구 문물인 메르세데스-벤츠, 그것도 론 놀이 가졌던 것을 보유해 국내의 시골 여행에 썼다고 한다.
- 친척들: 심지어 폴 포트의 친척들도 크메르 루주의 기준으로는 가장 완벽한 '반동분자' 그 자체였다. 폴 포트의 아내는 캄보디아 최초의 학사 학위 보유자였고 처제는 캄보디아 최초의 영문학 학위 보유자에 교수 출신이자 사립 영어 학교의 설립자였으며 두 자매는 모두 파리 유학 경험이 있고 장인은 판사였다. 게다가 폴 포트의 형 중 한 명은 왕궁의 관방실 서기관이었고 이복누나는 왕의 비빈이었으며 심지어 사촌누나는 무려 왕후였으니 폴 포트는 지배 계층의 일원이었다.
- 기타: 폴 포트의 본명도 상대적으로 밝은 피부 안색을 의미하는 단어였으며 중국계 혈통이 혼재되어 있었다. 심지어 본인의 가장 유명한 가명인 폴 포트도 다름 아닌 영어 혹은 프랑스어의 약자였고 크메르 루주의 '루주'는 '빨갛다'를 뜻하는 프랑스어였으며 집권 기간 동안 너무 잘 먹은 나머지 이전보다 배가 나왔다.
게다가 다른 크메르 루주 수뇌부도 폴 포트보다 비교적 적은 자격을 충족했을 뿐 이들도 낱낱이 파헤쳐 보면 모두가 크메르 루주 기준으로는 제1급 멸족 대상이나 다를 바 없었다. 우선 당 부서기였던 누온 찌어와 국방장관이었던 손 센, 부총리 이엥 사리 등 크메르 루주 수뇌부 대부분은 외국인 혈통이 섞였던 데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나[49] 국비 장학생으로서 프랑스 유학 생활을 한 후 고국에서 교사로 일한 적이 있고 폴 포트의 아내 키우 폰나리[50]와 그녀의 여동생이자 이엥 사리의 부인이었던 이엥 티릿 사회부 장관도 판사의 딸로 태어나 파리로 유학을 갔다 온 당대 여성으로서는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엘리트였고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 뚜올 쓸라엥의 소장인 둣(깡 겍 이우)은 수학교사 출신이었으며 심지어 국가주석이자 킬링필드 이론의 창시자였던 키우 삼판은 무려 파리 유학 중에 파리 대학[51]전 세계 기준으로도 어마어마한 엘리트였다.]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데다 대학교 법학 교수로 일한 적도 있던 사람이었으니[52] 그도 크메르 루주의 기준대로라면 폴 포트 다음으로 멸족되어야 했을 인물이었다.
크메르 루주 수뇌부가 얼마나 모순된 자들이었는지를 나치 독일 수뇌부들에 대입하자면 폴 포트는 아돌프 히틀러[53] 포지션이고 이엥 사리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54] 포지션이며 누온 찌어는 아돌프 아이히만[55], 손 센은 하인리히 힘러[56], 키우 삼판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57], 이엥 티릿은 요제프 괴벨스[58], 깡 겍 이우는 루돌프 회스[59] 포지션인데 이들이 알고 보니 모두 유대인 혈통이 혼재된 부모를 가지고 신체적 장애를 가졌던[60]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나라를 이끌어 갈 여러 인재들과 제도, 인프라를 완전히 붕괴시킨 것도 모자라 어처구니없는 기준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지식인으로 몰아서 학살하는 것을 주도한 최고 권력자들이 정작 그 조건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한 자들이었던 것도 모자라 오늘날 기준으로도 엄청난 지식인이었다는[61] 모순에 가득한 나라가 바로 크메르 루주 치하의 캄보디아였다.
3.4. 소년병 양성과 아동 세뇌
우리 아이들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엉까를 좋아합니다.
엉까 덕분에 우리는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아이들은 가난했고 짐승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추위에 떨며 고통스러위했습니다.
하지만 적은 우리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몸은 걱정스러울 만큼 말라 그야말로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밤이면 밖에서 잠을 잤고
낮에는 먹을 것을 찾아 구걸을 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졌습니다.
이제 엉까가 우리에게 건강과 힘을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공동부락에서 삽니다.
혁명과 평등과 자유의 빛이 우리를 환하게 비춥니다.
아, 엉까여, 우리는 당신을 깊이 사랑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열어준 붉은 길을 따라 걸어갈 것입니다.
크메르 루주의 아동용 선전 가요 '위대한 엉까(The Great Angkar)'의 가사.
북한의 아동용 선전 가요 세상에 부럼없어라와 분위기가 너무나 유사하다.
엉까 덕분에 우리는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아이들은 가난했고 짐승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추위에 떨며 고통스러위했습니다.
하지만 적은 우리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몸은 걱정스러울 만큼 말라 그야말로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밤이면 밖에서 잠을 잤고
낮에는 먹을 것을 찾아 구걸을 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졌습니다.
이제 엉까가 우리에게 건강과 힘을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공동부락에서 삽니다.
혁명과 평등과 자유의 빛이 우리를 환하게 비춥니다.
아, 엉까여, 우리는 당신을 깊이 사랑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열어준 붉은 길을 따라 걸어갈 것입니다.
크메르 루주의 아동용 선전 가요 '위대한 엉까(The Great Angkar)'의 가사.
북한의 아동용 선전 가요 세상에 부럼없어라와 분위기가 너무나 유사하다.
크메르 루주의 소년병들. |
크메르 루주의 세뇌 교육을 받는 어린이들의 모습. |
폴 포트는 '제국주의를 가르치는 수단'이라며 서구식 교육을 모두 금지시키고 아이들이 어른들과 달리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아' 사상 교육으로 이상적인 국민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믿음 하에 겨우 5~9살 정도밖에 안 된 어린이들을 납치해 강제로 부모와 떨어뜨려 부모와 사실상 절연하게 한 후 아무것도 모르는 이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독해력과 수리 능력은 뒷전으로 하면서[62] '엉까[63]는 부처처럼 틀리는 법이 없으니 엉까에 의문을 품는 것은 무조건 잘못이다', '진정한 자유는 엉까의 말과 글, 행동을 따를 때만 존재한다' 등 엉까에 대한 찬양과 극단적인 공산주의 사상 교육으로 세뇌시킨 후 군사 훈련을 시켜 소년병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크메르 루주 치하의 캄보디아에서는 겨우 9살밖에 안 된 아이들이 소대를 지휘하는 일까지 있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소위, 중위가 맡는 소대장을 초등학교 저학년 나이의 어린이가 맡은 것이다.
크메르 루주는 이렇게 납치한 어린이들에게 길 잃은 개 등의 동물들을 고문하는 것으로 하여금 '반동분자'들을 고문하는 방법을 배우게 했으며 '반역자' 부모와 이웃을 염탐하고 밀고하며 쏴 죽여도 좋다고 세뇌시켰다.[64]
더욱이 크메르 루주는 어린이들에게 "조국을 사랑한다면 너희 적들을 증오해야 한다. 부모가 정부를 위해 일한다면 우리의 적이므로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너희들이 죽게 될 것이다.", "좋은 아들딸이 된다는 것은 부모를 욕하고 명령하는 것이다."라고까지 가르치면서 어린이들로 하여금 패륜을 미풍양속으로 여기게 했으며 엉까가 캄보디아에 있는 모든 어린이들의 친부모라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주입시켜 친부모를 자신들과 동거하는 '가짜 부모'처럼 여기게 했다.[65] 이렇게 세뇌된 어린이들은 "뭔가를 물었을 때 1초도 생각하지 말고 즉각 대답해야 한다. 만약 생각한다면 그것은 반동이다."라는 말처럼 맹목적인 복종만 가능한 기계나 다를 바 없게 되었는데 친부모 대신 엉까를 진정한 부모로 여기면서 막사 인근에서 어른들이 이야기를 하면 속삭이는 말 하나하나까지 엿들었고 만약 이 중 하나라도 거슬리는 발언이 있으면 크메르 루주 상부에게 고발하고는 어른들이 자신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즐겼으며 부모들이 과거의 신분을 숨겨도 세뇌된 어린이들이 고발하면 그 부모는 즉시 처형되었다.
심지어 크메르 루주의 세뇌는 상술한 소년병보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크메르 루주는 하술할 '가족 파괴' 정책에 따라 어린이들을 부모와 강제로 흩어놓은 후 여섯 살 미만의 어린이들은 정부가 선발한 '할머니'들의 손에서 자라며 당에 대한 '충성심'을 배우게 했고 6~12살 정도의 아이들은 전술한 것처럼 철저한 세뇌 교육을 받은 후 소년병 단체에 들어가 지방을 돌아다니며 당에 불충하는 사람들을 색출하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철저히 세뇌된 아이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시민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거나 영아 살해에도 동원되었을 정도로 어른들보다도 훨씬 잔혹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크메르 루주의 몰락 후에도 한동안 캄보디아에는 '어린이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크메르 루주 정권이 무너진 후 크메르 루주의 소년병들은 '어떻게 남자, 여자, 아이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대부분 '그저 지도자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3.5. 종교 탄압
이들의 제거 대상은 불교와 기독교 등 종교계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크메르 루주의 종교 탄압은 알바니아와 북한의 그것과도 견줄 수준이었다고 한다.[66]당시 캄보디아는 상좌부 불교 신자가 전국민의 85%였을 정도로 불교가 지배적이었고 프랑스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의 수는 약 1만 명 정도였는데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는 그 중 9천 명을 죽이고 종교행위와 포교 활동을 금지했으며 이전까지 캄보디아에 존재했던 7만 명에 달했던 승려들은 겨우 2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가톨릭 교도는 절반이 사망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일부는 문자 그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했다.
프놈펜의 가톨릭 성당과 바탐방의 캄보디아 복음교회, 참족들의 모스크 133개, 그리고 3천 개가 넘던 전국의 절들은 모두 폐쇄되었으며 캄보디아의 절들 중 1/3이 파괴된 데다 철거되지 않은 절들은 곡물 창고나 감옥, 심지어 처형장 등으로 용도가 바뀐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당시 캄보디아에서 온전히 남은 절은 겨우 5% 미만에 불과했다고 한다.[67] 물론 나이 상관없이 승려들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난민 수천 명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태국 국경으로 탈출했다. 심지어 크메르 루주는 불상을 참수하기도 했는데 머리를 가장 신성한 부위로 여겨 어린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조차 커다란 모욕적 행위로 여기는 동남아시아 국가인 캄보디아에서 불상의 머리를 제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단순(?) 종교모독을 넘어 '인간 말살적 의미'와도 같았다고 한다. 이렇게 캄보디아에서 불교가 파괴되는 데는 크메르 루주의 집권 이래 겨우 1년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크메르 루주의 불교 탄압은 손 센의 아내 윤 얏(Yun Yat, 1934~1997)이 지휘했는데 불교는 혁명과는 양립할 수 없는 반동 종교라고 믿은 그녀는 1978년에 "캄보디아에 더 이상 종교는 없으며, 모든 승려들은 절을 떠났다"고 자랑하듯이 말했다.[68]
뿐만 아니라 크메르 루주는 무슬림에게 돼지고기를 한 달에 두 번씩 먹을 것을 강요하고[69] 쿠란과 모스크들을 보이는 즉시 불태웠으며 강제로 수염을 밀 것을 강요했다. 물론 크메르 루주는 승려를 '다른 사람의 코로 숨을 쉬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맹비난하며 불경들을 불살랐고 불교 관련 예술품들을 훼손한 후 강과 호수에 버렸다.
여담으로, 이러한 악행을 지도한 폴 포트는 원래부터 무종교인임은 물론 신조차도 전혀 없다고 믿는 뼈속까지 무신론자였다.
3.6. '자유'라는 개념의 말살
모든 국민의 키가 정확히 1백 60센티미터인 국가.
메이 만[70]
메이 만[70]
'타락한 서양 문화에 대한 허영심을 제거해야 한다'는 이유로 국민들의 생활도 완전히 통제되었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국가가 만든 집단 농장에서 검은색 옷과 폐타이어로 만든 신발을 신고 남자는 챙 모자를 쓰고 빨간 스카프를 매야 했으며 모든 여자는 단발머리를 해야만 했다. 심지어 어디에서 살지, 누구와 결혼할지, 무엇을 먹을지, 언제 잠을 잘지까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오직 국가만이 이를 결정할 수 있었다. 일례로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시계도 '부자와 빈자 사이에 심한 계급 분열을 일으키는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금지되었다.[71]
여기에 크메르 루주는 유리를 깨거나 쟁기질하는 동안 소를 잘 다루지 못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실수까지도 사형으로 다스렸고 전통적인 장례식도 금지시켜 죽은 사람은 화장 대신 구덩이에 집단으로 던져진 후 대충 파묻는 것으로 처리했다. 자살은 정권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며 금지당했고 자살한 사람의 가족은 '적의 가족'으로 취급되어 처형되어야 했다.
보통 일주일에 두 번씩 열리는 생활모임 시간엔 자아비판이 강요되었는데 고참 지도부의 지휘하에 각자 자신이 잘못한 일과 최근에 한 활동을 공개적으로 자백했으며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크메르 루주의 모든 간부들이 참여해야 했다. 이 자아비판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상호감시와 잘못에 대한 고발이였기 때문에 서로를 계속 경계하고 의심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판사도 545명 중 4명만을 제외하고 모두 살해함으로써 법원과 재판도 모두 없어졌다.
뿐만 아니라 크메르 루주 이전까지 1년에 300편 이상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동남아시아 쪽에서도 제법 인기를 끌었다는 캄보디아의 영화[72] 산업은 말 그대로 궤멸되었고 상당히 수준이 높았던 캄보디아의 대중적 가수들도 '오래되고 부패한 캄보디아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상당수가 처형되거나 실종되었으며 '서구의 영향을 받은' 모든 음악 장르가 포함된 음반과 마스터 테이프도 대다수가 파괴되면서 캄보디아의 음악계도 궤멸 수준까지 갔다.[73] 이렇게 캄보디아에서 모든 형태의 예술적 표현이나 오락은 금지되었고 크메르 루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시와 노래만 허용되었는데 폴 포트는 '과거를 지우면 처음부터 새로운 혁명 문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언론의 자유도 크게 제한된 정도를 넘어 특권층을 위한 언론을 제외하면 모든 언론이 소멸했는데[74] 1966년 2월 2일에 설립된 국영 TV 방송국이던 TVREK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바로 당일 크메르 루주와 관련된 뉴스가 끝나기가 무섭게 크메르 루주에 의해 모든 시설이 파괴되고 스태프들도 모두 처형되었으며[75][76] 라디오 방송도 같은 날부터 크메르 루주의 선전 방송 빼고는 모두 금지되었고 민간 신문 간행도 모두 금지되었으며 각 가정이 보유하던 모든 전화기들은 몰수 후 폐기되었다. 물론 책을 똑바로 들었다는 이유로 지식인으로 몰려 죽은 사람도 있던 판이었으니 읽을거리도 당 간부를 위한 기관지 두 종과 프놈펜의 각료를 위한 월간지 퉁 파데밧(Tung Padevat)[77]을 제외하면 모두 금지되었고 일반적인 캄보디아 국민들은 이에 접근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했다.
크메르 루주는 북한과 이디 아민의 선례를 따르듯 현지 크메르 루주 당국의 허가 없이는 국민들이 다른 지역, 심지어 옆 마을을 왕래하는 것조차 금지시켜 허락도 없이 다른 지역으로 가려는 사람들은 즉결 처형했다. 행정부의 한 부서의 관리가 다른 부서로 방문하는 것까지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게 해 이동의 자유를 완전히 없앴고 심지어 폴 포트마저 프놈펜의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군사검문소에서 검문을 받게 할 정도로 이 정책을 강경히 밀어붙였다.[78] 심지어 크메르 루주는 이도 모자라 사람들이 서로 모여 농장에서의 참상을 공유하며 변화를 추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감독되지 않은 2인 이상의 모임을 완전히 금지시켜 결사의 자유까지 완전히 없앴다.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은 지루하고 재미가 하나도 없는 삶을 유도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열반에 이르려면 속세의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폴 포트 치하에서는 집산주의를 위해 사랑, 슬픔, 분노, 열정을 비롯한 모든 감정은 떨쳐버려야 할 개인주의의 소산으로 치부했고 캄보디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웃거나 노래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평전]
상술한 것처럼 '엉까'를 숭배하라는 세뇌 교육은 지속적으로 자행되었지만 의외로 김일성, 마오쩌둥, 차우셰스쿠, 멩기스투 등 다른 공산독재자들과는 다르게 당시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에 대한 대대적인 우상화는 자행되지 않았는데 이는 폴 포트가 집권한 지 2년 후인 1977년에야 공식 석상에 모습을 나타낼 정도로 극도로 외부 노출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폴 포트의 공식 석상 첫 출현 직후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미술가들에게 폴 포트의 공식 초상화와 반신상을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나 이들 중 선전용으로 쓰인 것은 없다시피했고 1979년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크메르 루주 정권이 붕괴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우상화를 하지 않은 게 폴 포트에게 남은 마지막 양심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으로 크메르 루주의 악행은 글로 읽는 것만으로도 극히 괴로운 수준이었다.
3.7. '가족'이라는 개념의 파괴
이엥 티릿 사회문제부장이 주도한 가족 정책도 끔찍하기 그지없었는데 이엥 티릿은 여성들의 '봉건적 가부장제, 가사 및 육아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명분으로 기혼 여성을 남편은 물론이고 생후 1개월도 안 된 자식들과 강제로 분리시켰으며[80][81] 부부끼리 '여보'라고 하는 것 같은 애정 표현과 노인을 공경하는 것, 남편이 아내가 아기를 분만하는걸 돕는 것조차 금지시켰고 오히려 노인들이 '일하기에는 너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죽여 댔다. 거기다가 자식이 아플 때 부모가 자식을 방문하는 것을 넘어 자식이 사망했을 때 부모가 슬퍼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부르주아적 감상주의 행위'로 여겨지며 금지당했고 오히려 어린 자식의 죽음을 '대혁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며 자랑스럽게 여겨야만 했다. 이러한 가족 분리는 정권 이외의 대상에 대한 충성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실시되었다.호주의 사학자 벤 키어난(Ben Kiernan)의 주장에 따르면 크메르어 krosaa는 가족을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크메르 루주 정권 이후 배우자를 의미하는 단어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아동들이 배제된 크메르 루주 정권의 단면을 보여준다. 1973년부터 아이들이 조부모, 부모, 자매에게 의지하지만 그들은 유리되어 있고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부자들에 의존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가사의 노래를 만들었는데 이는 계급 투쟁 이론과 가족 관계를 동일시한다. 1975년에는 '위대한 엉까(The Great Angka)'라는 체제 찬양 동요가 만들어졌고, 1977년에는 혁명 이전 어린이들의 고통스러운 삶과 대비되는 힘과 건강을 보장해 주는 공동체에 대한 노래가 만들어졌으며 1978년에는 무장 세력을 환영하고 전투 부대에게 경의와 승리를 표하는 노래가 만들어졌다.[82]
게다가 화내는 것이 금지된 것을 넘어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도 '부르주아적'이라며 금지시켰다던가, 단순히 '가족끼리 서로 화목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온 가족을 몰살했다던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이유로 웃거나 농담하거나 노래하는 것조차 금지된 지역까지 있었다는 엽기적인 실화들도 전해진다. 크메르 루주는 '울지 말라. 울음은 지금의 생활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웃지 말라. 웃는 것은 옛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슬로건까지 만들었고 키우 삼판은 "여러분의 부모, 가족, 아내도 모두 정신적인 사유재산입니다. 우리는 모두 엉까의 보호를 받는 커다란 가족입니다."라는 발언을 남겼으며 가정을 버리는 것은 '재산에 대한 금욕'으로 간주되어 석가모니가 세속과 인연을 끊은 것과 같다고 여겨졌다. 티릿은 양성평등을 강조했지만 이 '양성평등'은 영락없이 '남성과 같은 일을 하고 체력과 혁명 정신을 기르자'는 의미였고 이 정책의 영향으로 크메르 루주의 학살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여성들도 많았다. 프놈펜포스트에서는 '티릿의 여성개조ㆍ가족개조 정책은 저열한 이념의 표본이었다. 그들은 봉건적 가부장제와 가사 및 육아노동으로부터의 여성 해방을 위해 먼저 여성을 가족과 자녀로부터 ‘독립’시켰다. 독신 여성은 부모로부터, 기혼 여성은 남편과 아이들로부터 강제로 분리됐다. 태어난 지 한 달, 심지어 1~2주일 만에 아이를 떼어놓아야 했던 여성도 있었다. 이엥 티릿의 ‘성평등’은 여성주의적 평등이 아닌 체력과 정신력의 기계적 평등이었다. 남성과 똑같은 노동을 똑같은 양 만큼 수행해야 했다.'고 평했다. #
게다가 당시 캄보디아의 가족들은 연령과 성별에 따라 작업 여단으로 나누어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83][84] 이는 크메르 루주가 가족의 유대를 약화시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상을 더 쉽게 주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크메르 루주는 가족의 사진을 간직하는 것과 친척과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심지어 가족이 처형 등으로 죽었을 때 울거나 슬퍼하는 것조차 사형으로 다스렸다.
자유 연애도 금지되어 남녀관계도 '애정의 감정을 없애고 집산주의자의 태도를 취해야' 했으며 자유 결혼도 완전히 금지되어 국가가 중매자 역할을 해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결혼식이 가능하도록 했고 결혼 상대자는 인민공사 회합 때 단체로 발표되었고 결혼식은 최소 10쌍을 모아서 정부 기관 주관으로 합동 결혼식 형태로 치러져야만 했다. 허름한 건물에 임시로 설치된 결혼식장에서 치러진 합동 결혼식은 가족의 참여도 금지시키고 크메르 루주 간부 몇 명만 참여한 채 '엉까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고, 충성하겠다'는 서약만 하고 끝나는 식으로 대충 치러졌다.
이 결혼 풍습 변경은 전통적인 구혼의례를 조직적으로 파괴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실시되었는데 이렇게 강제결혼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끌려가 낯선 남자와 결혼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85] 물론 강제결혼을 거부하는 여자들은 사형당했으며 크메르 루주는 혼전 성관계를 한 사람도 양쪽 모두 사형으로 다스렸다. 출산 휴가는 길어야 1개월, 짧게는 1~2주에 불과했으며 출산 휴가가 끝난 여성은 그 즉시 다시 열악한 영양 배급 속에서 막대한 일을 해야만 했다.
당시 캄보디아에서 결혼한 여성들 중 무려 96.6%가 자기의 의지로 결혼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결혼당한 경우였다고 하며 크메르 루주 시기에 이렇게 강제로 결혼을 당한 여성은 25만 명 정도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옛 사람'은 '옛 사람'끼리, '새 사람'은 '새 사람'끼리만 결혼해야 했으며 '옛 사람'이 '새 사람'과 결혼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게다가 폴 포트는 강제 이주로 캄보디아의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지자 "15년 안에 캄보디아 인구를 8백만 명에서 2천만 명으로 늘려야 한다.", "여성은 아기를 낳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므로 국가를 위해 아이를 낳는 것이 여성의 임무다."[86]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며 인구를 늘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여성의 배란기에 강제적으로 남편과의 동침을 강요하면서 한 여성이 최소 3~5명의 자식들을 낳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 여성들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3.8. 대규모 성범죄
크메르 루주 시기 캄보디아에서는 대규모 성범죄가 정권의 묵인과 장려 하에 발생했다. 앞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결혼한 여성들 중 무려 80%가 결혼식 후에 강간을 당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성범죄 피해자는 문자 그대로 14살 소녀부터 독신의 할머니까지 나이대를 가리지 않았다.일단 강제결혼 후의 성관계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수용소에 끌려가거나 처형당했는데 당시 크메르 루주의 지방 간부들은 겨우 16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까지 봐주지 않으며 젊은 여성들을 납치하고 강간한 후 오히려 여성이 '부도덕한 행동'을 했다는 모함을 씌워 처형시키는 일이 많았다고 하며 강제로 결혼시킨 여성들에게 크메르 루주 군인들이 성관계 여부 확인을 위해 감시하는 가운데 성관계를 강요했고 여성들이 성관계를 거부하면 '처벌'이라며 그 여성들을 강간했는데 이렇게 강간을 당한 여성들은 강간 직후에 살해당하거나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강간을 저지른 사람들은 민간인이 전혀 없는 대신 사실상 전부가 크메르 루주 간부들이었고 거의 모두가 처벌받지 않았으며 처벌받더라도 다른 이유로 처벌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당시 캄보디아는 문자 그대로 성폭행이 합법화된 나라와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처형하기 전에 윤간을 당한 여자들이 많았고 여자들의 사지를 묶은 뒤 윤간했다거나 강간 후에 그 피해자에게 휘발유를 부은 후 분살하는 일들이 잦았다고 하며 심지어 남편이 강제로 결혼당한 여성과 성관계를 거부하자 크메르 루주 간부가 그 남편이 여성을 강간하게 도왔다는 등의 끔찍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더욱 끔찍한 것은 크메르 루주는 소수민족 여성들에게 집중적인 강간을 가하거나 성노예 역할을 수행하게 했으며 심지어 이들은 소수민족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수민족 여성의 남편을 살해한 후 그 여성을 강간하고 임신시켜 혼혈 자녀를 낳게 한 후 살해하는 행각까지 벌여졌다는 것이다.
3.9. 소수민족에 대한 제노사이드
제노사이드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 20세기 이후에 벌어진 사건만 기술. ⚖️: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사건. | ||
사건 목록 | <colcolor=#000,#ddd> 세부 사항 | ||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1904 ~ 1908, | 발생 위치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 ||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 | 아시리아인 대학살 ,1914 ~ 1924, | 발생 위치 오스만 제국 |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 ~ 1917, | 발생 위치 오스만 제국 | ||
관련 인물 이스마일 엔베르 | |||
그리스인 대학살 ,1914 ~ 1922, | 발생 위치 오스만 제국 | ||
관동대학살 ,1923, | 발생 위치 일본 제국 전역 | ||
| |||
난징대학살 ,1937, | 발생 위치 일본군 점령하 중화민국 난징시 | ||
롬인 말살 정책 ,1935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파슬리 학살 ,1937, | 발생 위치 도미니카 공화국 | ||
관련 인물 라파엘 트루히요 | |||
제2차 세계 대전 | 슬라브인 말살 정책 ,1939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홀로코스트 ⚖️ ,1941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 |||
관련 인물 아돌프 히틀러 | 헤르만 괴링 | 하인리히 힘러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아돌프 아이히만 | 하인리히 뮐러 | 루돌프 회스 | 프란츠 슈탕글 | 크리스티안 비르트 | 아몬 괴트 | |||
관련 단체 나치당 | 친위대 | 국방군 | 게슈타포 | 무장친위대 | 아인자츠그루펜 | 질서경찰 | |||
수용소 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 다하우 강제 수용소 | |||
크로아티아 홀로코스트 및 세르비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크로아티아 독립국 | ||
관련 인물 안테 파벨리치 | 딘코 사키치 |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 |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 | |||
관련 단체 우스타샤 | 우스타샤 민병대 | |||
수용소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 |||
보슈냐크인 및 크로아티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추축국 점령하 유고슬라비아 | ||
관련 인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 |||
관련 단체 체트니크 | |||
크림 타타르족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체첸인 및 인구시인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체첸-인구시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알제리 학살 ,1954 ~ 1962, | 발생 위치 프랑스령 알제리 전역 | ||
과테말라 마야인 제노사이드 ,1960 ~ 1996, | 발생 위치 과테말라 | ||
난쟁이 수용소 ,1970 ~ , | 발생 위치 북한 전역 | ||
방글라데시 제노사이드 ,1971, | 발생 위치 동파키스탄 | ||
이키자 ,1972, | 발생 위치 부룬디 | ||
아촐리족과 랑고족 학살 ,1972 ~ 1978, | 발생 위치 우간다 | ||
관련 인물 이디 아민 | |||
동티모르 제노사이드 ,1975 ~ 1999, | 발생 위치 인도네시아령 동티모르 | ||
킬링필드 ⚖️ ,1975 ~ 1979, | 발생 위치 민주 캄푸치아 | ||
재판 ECCC | |||
관련 인물 폴 포트 | 키우 삼판 | 깡 겍 이우 | 누온 체아 | 이엥 사리 | 이엥 티릿 | |||
관련 단체 크메르 루주 | |||
수용소 뚜올쓸라엥 | |||
구쿠라훈디 학살 ,1983 ~ 1987, | 발생 위치 짐바브웨 | ||
관련 인물 로버트 무가베 | |||
안팔 학살 ,1986 ~ 1989, | 발생 위치 이라크 쿠르디스탄 | ||
재판 안팔 학살/재판 | |||
관련 인물 사담 후세인 | |||
이사크 학살 ,1987 ~ 1989, | 발생 위치 소말리아 소말릴란드 | ||
관련 인물 시아드 바레 | |||
보스니아 전쟁 |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 ,1992 ~ 1995, | 발생 위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 스릅스카 공화국 | |
재판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 라도반 카라지치 | 라트코 믈라디치 |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 니콜라 요르기치 | 프라뇨 투지만 | 슬로보단 프랄략 |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 |||
관련 단체 스릅스카 공화국 | 헤르체그 보스니아 | 스릅스카군 | |||
세부 사건 스레브레니차 학살 | 프리예도르 인종 청소 | 포차 학살 | |||
르완다 제노사이드 ⚖️ ,1994, | 발생 위치 르완다 | ||
재판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르완다 제노사이드 가해자 목록 |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인물들 목록 | |||
관련 단체 후투족 민병대 (Interahamwe | Impuzamugambi) | |||
제1차 콩고 전쟁 중 후투족 학살 ,1996 ~ 1997, | 발생 위치 자이르 키부 | ||
파룬궁 학살 ,1999 ~ , | 발생 위치 중화인민공화국 전역 | ||
밤부티 피그미족 학살 ,2002 ~ 2003, | 발생 위치 콩고민주공화국 이투리주 | ||
다르푸르 학살 ,2003, | 발생 위치 수단 공화국 다르푸르 | ||
관련 인물 오마르 알바시르 | |||
야지디 학살 ,2014 ~ 2019, | 발생 위치 이라크 니나와주 Sinjar | ||
관련 단체 ISIL | |||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 ,2014 ~ , | 발생 위치 중화인민공화국 위구르 자치구 | ||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 ,2016 ~ , | 발생 위치 미얀마 라카인주 | ||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 ,2023 ~ , | 발생 위치 이스라엘 전역 | ||
[!] 논란의 여지가 있음. | }}}}}}}}} |
캄보디아 인구의 15%에 해당하던 20개 이상의 소수민족의 존재를 금지해 소수민족의 고유어 사용을 금지하고 학살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50만에 달하고 이슬람을 믿던 참족은 전통 복장과 언어, 관습,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당한 것은 물론 단 4년 동안 무려 30만 명이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특히 학살은 민족주의적 감성에 의해 중국계와 베트남계에 집중되었다. 화교들은 캄보디아의 경제를 꽉 잡고 있었고 농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큰 피해를 입었으며 베트남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약 43만 명에 달하던 화교들 중 20만 명 정도만 생존했고[87] 베트남인과 결혼한 사람은 물론 베트남인에게 말을 걸거나 단순히 베트남인을 쳐다만 봤거나 베트남인처럼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사형당한 사람까지 존재하던 판이었으니 10만 명에 달하던 베트남계 캄보디아인들 중에서 겨우 1만 명 정도만 살아남게 되었다.[88] 심지어 폴 포트는 '베트남 여자와 결혼한 캄보디아인은 살려면 자기 아내를 죽여야 하고, 아내를 죽이기 싫으면 아내와 함께 처형장에 가야 한다'는 명령을 직접 내렸는데 캄보디아 북부 지역의 책임자였던 캉 찹도 아내가 절반은 베트남계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내를 총살하도록 강요받았고 캉 찹은 그 명령을 곧바로 따라야 했다.[89]
게다가 크메르 루주는 집권한 지 한 달도 안 된 1975년 5월 3일에 푸꾸옥 섬을 침공했고 일주일 뒤에는 토추 섬을 침공해 민간인 528명을 학살하고 6월 14일에 베트남 인민육군에 의해 쫓겨난 일도 있었다. 비록 1976년에 베트남과 캄보디아 당국의 협상으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크메르 루주는 1977년부터 다시 베트남을 침공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으며 특히 1978년 4월 18일에 크메르 루주는 베트남 국경에서 인근인 안장성에 있는 인구가 1만 6천 명인 바축(Ba Chúc) 마을을 침공해 봉쇄하고 사람들이 피난을 간 동굴에까지 수류탄을 던져 가면서 4월 30일까지 무려 3,157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 학살의 생존자들 상당수가 이 학살로 가족을 전부 잃었다. (바 축 학살)
국가 간부회 의장 겸 총리였던 키우 삼판은 1975년 베트남인을 본국으로 송환한 이유에 대해 "여기는 미국이 아니니까!"라고 답했고 2003년에 증언하면서 자신도 킬링필드가 제노사이드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평전]
다만 크메르 루주에도 소수민족이 상당히 많았다. 화교나 베트남인은 나라가 없는 게 아니었으며 참파족은 이슬람을 믿었고 원래부터 다른 원주민들과 사이가 무척 나빴던 데다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노선과 매우 거리를 뒀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왔다. 되려 많은 소수민족들이 크메르 루주의 편을 들었는데 이들이 10년 넘게 내전을 벌이는 것에 큰 도움이 됐다. 오죽하면 폴 포트가 죽었을 때 소수민족들은 매우 슬퍼했는데 학살자이던 폴 포트가 이들에겐 매우 관대했기 때문에 그랬다고 한다.
4. 학살 이후
4.1. 크메르 루주 정권의 붕괴와 캄보디아의 내전
상술했듯 크메르 루주의 침략과 학살로 큰 피해를 입은 베트남은 1978년 12월 21일부터 민주 캄푸치아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태국과 더불어 동남아시아의 최강자였으며 이에 더해 베트남 전쟁으로 단련된 베트남군은 풋사과에 불과한 크메르 루주를 손쉽게 박살내 버리고 1979년 1월 7일에는 수도 프놈펜에 입성했다. 결국 폴 포트, 이엥 사리 등의 크메르 루주 수뇌부는 태국 국경 근처까지 쫓겨났고 유폐에 가까운 상태에 있던 시아누크는 다시 베이징으로 피신했다. 1월 10일 베트남은 헹 삼린을 수장으로 하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는 일단 베트남의 침공으로 끝났다.하지만 헹 삼린의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베트남의 괴뢰 정권이라는 이유로 소련 및 폴란드 등 친소 국가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국가들의 승인을 받지 못했고 1979년에는 킬링필드가 서방권에서 묻혔기 때문에 마침 미-중 수교 이후 밀월관계에 있던 중국과 미국의 어그로를 동시에 끌었다. 우선 중국은 버르장머리 없는 베트남에 대한 징벌행위로서 무력침공을 비밀리에 모의했고 대외적으로는 캄보디아 해방 등을 명분으로 1979년 2월 17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국경을 넘어 중국-베트남 전쟁을 일으켰으며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치욕을 잊지 않고 베트남에 대항하기 위해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 미국은 외교적으로 베트남을 "아시아의 프로이센"이라고 지칭하며 깡패 국가로 간주하고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면서 CIA를 동원해 마약을 팔아 가면서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국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크메르 루주는 타이 국경 근처의 그들의 본거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1982년 크메르 루주는 (베트남이 만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에 반대하는 2개의 비공산계열 크메르 단체들과 같이 연합전선을 형성해서 명목상 시아누크를 지도자로 옹립했다. 결국 베트남은 크메르 루주를 격파하고도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동시에 미국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잔존 크메르 루주 게릴라 세력과 베트남 전쟁과도 같은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휘말리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후술하겠지만 베트남은 외교적 정당성을 위해 크메르 루주의 대량 학살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내전은 장기화되었고 이 기간 동안의 사망자 역시 수십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내전 당시 크메르 루주는 공포심과 적을 몰아낼 용도로 각종 대인 지뢰를 캄보디아 전역에 마구 뿌렸는데 이 지뢰에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까지 휘말리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크메르 루주가 지뢰에 대한 정확한 표시 하나 없이 마구잡이로 지뢰를 뿌렸고[91] 지뢰를 찾는 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캄보디아의 상황으로 인해 크메르 루주 실각 이후에도 캄보디아 내 지뢰로 인한 피해자나 사망자[92]는 늘고 있어 아직까지도 캄보디아의 발전을 막는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4.2. 잊힌 학살
사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까지는 킬링필드의 참혹한 실상이 외부에 잘 알려지지 못했다. 크메르 루주는 외국인 기자들을 다 쫓아내고 학살을 은폐하는 정책을 폈으며 미국은 크메르 루주 정권 수립 직후에 크메르 루주 정권의 대규모 학살을 주장했지만 베트남 전쟁 직후 미국의 신뢰성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라 친미 국가의 정부조차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당시 대규모의 캄보디아 난민 문제로 골머리를 썩던 태국이 그나마 주장하긴 했지만 그 영향은 미미했다. 거기에 80년대 초에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에게 엿먹이기 위해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크메르 루주의 학살 주장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본격적으로 킬링필드가 알려진 것은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크메르 루주를 몰아내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물론 베트남이 순수한 의도로 이런 악행을 알린 건 아니었고 우연히 베트남군이 땅을 파다가 사람 유골이 발견되고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를 침공했다는 반대 여론이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자 국제 여론을 달래기 위해 크메르 루주가 저지른 대학살을 외부에 공개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베트남은 S-21수용소 뚜올 슬랭에 박물관을 만들고 이것을 소련과 동유럽은 물론 서방에도 공개했으며 프놈펜 외곽의 다른 킬링필드도 찾아내서 공개했다. 서방 기자들은 원하면 캄보디아 전역의 킬링필드를 돌아보고 취재할 수 있었고 이 취재를 바탕으로 크메르 루주들의 천인공노할 만행들이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2005년까지 뚜올 슬랭 박물관(S-21)에 전시되어 있었던 해골 지도다. 형무소에서 발굴된 유골로 캄보디아 지도를 만들어 놓았으나 반인륜적이라는 인권 단체 등의 거센 비난으로 인해 철거되었고 현재는 안치되어 현지에서는 더 이상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안치된 장소는 바로 옆에 있는 선반이다. 대학살이 관광상품이나 다름없이 전락해 버린 이러한 맥락 속에서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할 때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킬링필드를 과장했다고 주장하는 서적도 있다. '아시아의 기억을 걷다'
캄보디아 언론인 딧 쁘런(ឌិត ប្រន)의 탈출 기행을 다룬 뉴욕 타임즈 기사를 토대로 1984년에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이를 쓴 시드니 섄버그(Sydney Schanberg)는 이 기사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를 통해 서방에 크메르 루주의 학살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각에선 당시 공산권과 유럽, 일본 등의 좌파 정당이나 언론이 우파에 의한 철저한 기만 선전이라고 주장했다고 알고 있으나 당연히 당시 상황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마오이즘을 지지하던 좌파들도 있었으나 자신들의 침략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킬링필드를 가장 필사적으로 홍보하던 베트남은 바로 그 호치민의 후예이면서 미국과 베트남 전쟁에서 싸우고 미국을 사상 최초로 패배하게 만든 나라였고 소련은 베트남을 지지했다.
당시 중국과 미국이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던 상황이었다.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해서 도와줬을 뿐 미국은 친미 정권인 론 놀 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반미, 좌파 정권인 크메르 루주와는 당연히 사이가 나빴다. 미국은 킬링필드가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진 후에는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원을 전격 중단하고 주로 반공, 자유민주주의 노선의 크메르 민족 해방 전선(KPNLF)을 더 지원했다. 중국도 알려지지 않은 킬링필드에 경악해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이를 따라 북한도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다. 이 말은 즉슨, 크메르 루주는 공산권 국가들조차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극악무도한 조직이었음을 증명한 셈이다.[93]
4.3. 긴 내전의 끝
어쨌든 수렁에 빠져 있던 베트남군은 1989년 9월에 캄보디아의 자치 능력 향상과 동유럽 혁명의 여파로 철수했고 괴뢰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자동으로 해체됐다. 당시 총리에 있던 훈센은 베트남군이라는 배경을 잃고 세력이 약화되어 내전은 더욱 수렁에 빠졌다. 결국 1990년 6월 4일~5일 크메르 루주와 시아누크 전 국왕의 푼신펙, 손 산 전 총리의 KPNLF 등 3개 정파가 참가하는 평화를 향한 직접 대화의 장소로서 캄보디아에 관한 도쿄 회의가 개최되었다. 다음해인 1991년 10월 23일 캄보디아 평화 파리 협정이 개최되어 "국제 연합 캄보디아 잠정 통치기구(UNTAC)"의 설치, 무장해제와 내전 종결, 난민의 귀환, 제헌의회 선거의 실시 등을 골자로 한 최종 합의문에 19개국이 승인함으로써 20년에 이르는 캄보디아 내전이 종결되었다.캄보디아 평화 파리 협정으로 훈 센 정권과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를 통합한 4개 계파에 의한 캄보디아 최고 국민 평의회(SNC)가 결성되었다. 다음해인 1992년 2월부터 유엔 캄보디아 잠정 통치기구(UNTAC)가 평화유지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와중에 외국군을 위한 매매춘이 극성을 부렸고 그 결과 에이즈가 창궐하기 시작했다. 1993년 5월에는 국민의회 총선거가 실시되어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었고 시아누크 국왕이 복위된 후 국민들도 절망을 버리고 점차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가꿀 의지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크메르 루주의 수장인 폴 포트가 1998년에 사망하여 잔존세력이 완전히 소탕되기 전까지 앙코르와트 유적군의 외곽 지역(쁘레아 뷔히어, 오다 멘쩨이)은 장갑차를 타고 가야 할 만큼 완전한 평화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1979년에 크메르 루주가 베트남군에 의해 전복될 때 베트남 괴뢰정부 쪽에서 크메르 루주 축출에 가담한 인물들은 여전히 정치권에서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총리가 되어 2023년까지 집권한 후 아들에게 총리직을 세습시킨 훈 센과 1993년 정부 수립 이래 굳건한 여당인 CPP(캄보디아 인민당)의 주요 인물들이다. 그런데 사실 훈 센도 부패한 독재자인지라 캄보디아는 어느 정도 경제가 성장하긴 해도 2023년 기준으로도 1인당 GDP가 1,896$(195개국 중 152위)에 불과한 빈국으로 남아 있으며 내전기의 베트남과 괴뢰정부에 대해서는 책임을 거의 묻지 않는 편이다.
4.4. 전범 재판
21세기 들어 UN과 캄보디아 정부가 학살과 반인권 범죄 처벌에는 시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념에 입각해 크메르 루주 전범재판소(ECCC)를 설립하여 사건 발생으로부터 거의 30년 만에 비로소 책임자에 대한 처단이 시작되었다. 이미 주범들 중 다수는 처벌을 받지 않고 사망한 지 오래이기 때문에 사실상의 처벌보다는 위의 이념을 명시하기 위해 실시하는 재판이라고 볼 수 있다.ECCC(캄보디아 전범 재판소)는 2006년에 출범했으며 2007년 7월 3일 재판소는 죽음의 감옥이라고 불렸던 S-21 교도소 깡 겍이우 소장을 첫번째로 기소하여 2010년 7월 26일 징역 35년에 확정 판결을 내렸다. 2011년 6월 27일에는 사건의 주범 4인방인 크메르 루주 정권 서열 2위 누온 체아(85)를 비롯해 이엥 사리(85) 전 외무장관, 그의 부인 이엥 티릿(79) 전 내무장관, 키우 삼판(79) 전 주석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와 캄보디아 정부 등 여러 정치집단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이들에 대한 재판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는데 특히 캄보디아 정부와 미국 정부가 주요 요인이다. 캄보디아 정부에는 크메르 루주 정권 부역자들의 다수가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며크메르 루주의 과격함에 질색하여 베트남으로 망명사기는 했지만 훈 센 총리도 크메르 루주 경력이 있다.[94] 캄보디아 정부의 압력으로 재판관들이 사퇴하면서 수사 부진 우려가 제기되었으며(#1, #2) 캄보디아 정부와 함께 일각에서 또 다른 킬링필드를 만든 주범으로 여겨지는 미국 정부의 비협조가 가장 큰 장애물로 지적된다. 이렇게 재판이 지연되던 가운데 티릿은 2012년에 알츠하이머병이 악화되었다는 이유로 석방되었고 2013년 3월 14일에 이엥 사리가 사망했다.
2014년 8월 7일 전범재판소는 누온 체아 당시 공산당 부서기장과 키우 삼판 전 국가주석에 대해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하면서 지체되다가 2년만에 다시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2015년 8월 22일에는 이엥 티릿이 사망했다. #
2017년 킬링필드 전범재판소가 11년간 3억 달러를 들여서 3명밖에 유죄 선고를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2018년에 캄보디아 정부는 킬링필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날(5월 20일)을 국가공휴일로 지정했다.
2019년 8월 4일에 폴 포트 정권의 2인자 누온 체아 전 공산당 부서기장이 사망했다.# 2020년 9월 '두크'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진 카잉 구엑 에아브가 사망했다.#
2022년 9월 22일에 키우 삼판 전 국가주석이 대량 학살, 반인도적 범죄, 제네바 협약의 중대한 위반 등의 혐의로 종신형이 최종 확정되면서 캄보디아 전범재판은 종결되었다. 기사 현 시점에서는 키우 삼판만이 생존한 상태다.
5. 학살 규모
폴 포트의 정권의 손에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오늘날에도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다고 한다. 미국의 폭격 및 내전에서 제대로 피해자 규모도 통계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교도소들은 공로를 부풀리기 위해서 위험 분자를 제거했다고 사망자를 일부러 더 많이 기록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록에 따르면 처형되었다고 하지만 막상 베트남군이 몰려와서 해방된 수용소에서 살아 있던 이들도 있었다고 하며 반대로 처형 기록이 전혀 없음에도 시체조차도 찾지 못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상당수 기록도 파기되었고 남은 기록도 워낙 엉망인 상황에서 정확한 사망자 파악은 이뤄지지 못하게 되었다.초기에는 베트남의 괴뢰국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크메르 루주에 의하여 3,300,000명이 학살되었다고 발표했으며 베트남도 그렇게 주장하였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다. 초기에는 유엔과 유니세프도 3,000,000명 정도가 학살되었다고 추정했는데 국가 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였던 캄보디아에서 신뢰할 만한 통계를 찾는 건 불가능했고 가능했던 것은 태국 일대의 난민수용소에서 사망율을 추산한 뒤 인구에 대입하는 표본조사 방법뿐이었지만 사실 피난민들은 일반 국민들보다 훨씬 높은 사망율을 보였다. 당연히 도망친 사람들이 훨씬 상황이 심각했을 것이니까.
현재 연구에 따르면 킬링필드 치하에서 사망자는 200±50만 명 정도로 수렴되고 있다. 캄보디아 문서 센터가 발굴한 학살 매장지는 23,000여 곳이며 확인된 유해만 1,300,000명이 넘는다. 매장되지 않고 유기된 시체까지 포함하면 대략 2,000,000명 내외로 추정되고 처형뿐만 아니라 강제 노동으로 인한 과로사, 굶주림과 질병으로도 많이 죽었다고 한다.연구방법 폴 포트 치하에서 직접 처형된 인원수는 학살의 희생자 수의 60%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나머지는 굶주림과 질병 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캄보디아 전범재판에서는 최소 1,700,000명이 학살당했다고 판결했으며 키우 삼판은 자신들이 집권할 적에 1,000,000명이 죽었다고 주장했고 폴 포트는 800,000명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캄보디아 전범재판의 추정치를 받아들인다면 캄보디아에서는 4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국민들 중 무려 25.3%, 즉 4명 중 1명이 사망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미국의 역사학자 벤 키에넌(Ben Kiernen, 1953 ~)은 '새 사람'의 29%와 '옛 사람'의 16%가 킬링필드로 죽었다고 추산했다. 장 루이 마골린이 인용한 통계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30~40살 사이 인구 중 40%, 60살 이상 인구 중 54%, 20~30살 사이 인구 중 34%가 사망했다고 한다.
세계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1975년에 6,728,000명이던 캄보디아의 인구가 1979년에는 6,052,000명으로, 이전의 10% 정도가 줄었고 킬링필드가 1979년 시작 직후에 끝났다는 것을 감안하여 1978년 인구(5,961,000명)를 기준으로 놔도 단 3년 만에 이전의 11.4%가 감소한 셈이라고 볼 수 있다.[95] 이런 마당이었으니 "킬링필드 당시 생존한 사람들 중 4촌 안에 있는 친척이 죽지 않은 경우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면 말 다했다.
구글의 기대 수명 데이터에 따르면 캄보디아는 1975년, 1976년에 기대수명이 12세로 나온다. 동시기 베트남은 63 - 65세, 라오스는 45세로 라오스에 비해서는 1/4를 조금 넘고 베트남에 비해서는 1/5도 안 되는 수준에 캄보디아 자체로도 1969년에 46세, 1974년에 40세 정도를 기록하였던 것을 보면 킬링필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 시기 베트남이나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도 이 정도로 심각하게 기대 수명이 떨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10대 초반의 기대수명은 정상적으론 나올 수 없는 수치다.
사망자의 수와 사인은 지역에 따라 어느 정도 상이한 결과를 보였는데 크메르 루주의 권력 중심지 중 하나였던 캄보디아의 남서부 지역은 처형이 비교적 드물었고 '새 사람'도 크메르 루주에 협조하면 박해를 면제하는 등 비교적 온건한 통치가 이루어졌으나 크메르 루주 간부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줄 쌀을 모두 프놈펜으로 보냈던 서부 지역과 북서부 지역은 기아로 사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북부 지역과 중부 지역에서는 아사한 사람들보다 처형된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하며 캄보디아를 넘어 전체 동남아에서도 가장 고립되고 낙후된 지역 중 하나인 북동부 지역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신뢰성이 있는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6. 관련국
예일대 캄보디아 학살 연구-U.S. Involvement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의 베트콩에 대한 보급로인 '호치민 루트'를 파괴하기 위해 캄보디아 동부 지대를 폭격하였다. 미군이 캄보디아에 쏟아부은 폭탄의 투하량은 539,129톤에 달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에 투하된 투하량은 총합 18만 톤인데 캄보디아의 면적은 일본의 절반 가량인데 폭탄 투하량은 3배 가량이었으니 면적당 폭탄 투하량은 일본의 6배였던 셈이다. 도쿄 대공습과 같은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에 대한 전략폭격이 없어 사망자 비율이 더 낮을 수도 있고 최소한의 방공망과 대응체계, 의료시설과 방재시설도 없는 무방비 상황이었으므로 더 높을 수도 있다.
미국의 폭격으로 인한 캄보디아 민간인의 희생자 수는 5만~15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많게는 40만 명에서 80만 명까지 보기도 한다. 캄보디아 동부는 메콩강 하구와 톤레삽 호수 등의 담수 공급원이 집중되어 있어 언제나 식량 생산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차적인 폭격의 희생자와는 별개로 식량 생산에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를 무시한다면 캄보디아의 전쟁 이전 경작이 가능했던 논 가운데 80%가 불모지로 변하고 380만톤에 달했던 쌀 생산량이 66만톤으로 줄어들어 이로 인해 프놈펜으로 농촌 인구가 몰려든 걸 설명할 방법이 없다. 론 놀의 쿠데타, 이후 크메르 루주 지원 등은 둘째쳐도 폭격으로 인한 희생자에 대한 책임이 없을 수는 없다.
반미 성향 사람들은 헨리 키신저가 사실 크메르 루주만큼이나 악독한 학살자였으며 킬링필드를 일부러 부각시켜 자신들의 학살을 덮으려고 하고 이로 인해 헨리 키신저를 전범으로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련 기사 미국 책임론은 노엄 촘스키 같은 반서방 진영에서 종종 펼치는 주장이며 노엄 촘스키는 크메르 루주에 의한 학살까지 부정/미화하여 비판받았다. 대한민국에서는 도올 김용옥이 이 주장을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중국은 수십만명 이상의 중국계 캄보디아인들이 크메르 루주의 인종청소에 인해 학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월전쟁을 통해 베트남을 공격해 크메르 루주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동시기 북한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초기에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지만 당시 최고 지도자 김일성이 폴 포트가 저지른 킬링필드의 실체를 알고 경악하면서 지원을 완전히 끊었다.
한편 베트남과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측도 깨끗한 건 아니다. 현재 캄보디아에서는 베트남군이 크메르 루주의 폭정에서 해방시켜준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방군이라고 보기에는 영 찝찝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원래 역사적으로도 베트남이 캄보디아의 남부 영토 일부를 뜯은 적이 있고 태국과 함께 캄보디아 내정에 간섭해먹은 적이 있어서 사이가 나쁜 데다 내전 과정에서 베트남이 캄보디아의 여러가지 이권을 가져갔던 면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의견이 강하다.#
7. 여담
7.1. 마지막 피난처인 프랑스 대사관
크메르 루주가 군대를 끌고 프놈펜을 장악할 당시 외국인과 캄보디아인들이 마지막으로 대피할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프랑스 대사관이었다. 당시 대사관으로 대피한 인원은 외국인과 캄보디아인을 합쳐서 약 3,000여 명으로 추정된다.대사관 측은 크메르 루주와 안전 보장을 위한 협상을 벌였지만 크메르 루주 측은 캄보디아인은 외국인 남성과 혼인한 여성 및 그 자녀들[96]만 남기고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내보내라고 요구했으며 그러지 않으면 대사관에 공급되는 식량과 전기/수도를 차단함은 물론, 외국인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고 협박했다. 이는 외교공관과 외교관에 대한 불가침 의무를 당돌히 위반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비엔나 협약의 존재와 내용을 크메르 루주 측에서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외국과의 모든 교류를 끊고 전세계에서의 고립을 택한 크메르 루주에게는 외국인의 안전 "따위"는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결국 대사관 측에서는 캄보디아인들 '솎아내기' 작업을 거쳐, 크메르 루주가 요구한 대로 이들을 대사관 대문 밖으로 쫓아내야 했다. 인권 국가를 자처하던 프랑스는 이 사건으로 인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어야했다.
대사관에 남은 사람들은 약 1개월 뒤인 1975년 5월에야 프랑스와 크메르 루주 간의 협상이 간신히 타결되면서 트럭에 실려 태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 내용은 아래의 동명의 영화에도 묘사되어 있다. 단, 영화에서 여권을 위조하여 딧 프란을 구하는 것은 영화에서 창작한 내용이다.
당시 대사관에는 김대국이라는 이름의 한국인 항공기술자도 1명 있었는데 무사히 태국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8. 영화화
- 킬링필드 (1984)
- 이스케이프 (2015, 원제 No Escape)
킬링필드를 모티브로 하였다. 영화 자체의 배경은 21세기 현대의 캄보디아지만 작중 캄보디아의 상황은 킬링필드를 일으킨 크메르 루주 시절과 판박이이며 마지막에 주인공 가족을 구출하는 세력은 하필이면 베트남군이다. 이 때문에 이 영화는 캄보디아에선 개봉하지 못했다.
-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 (2017, First They Killed My Father)
안젤리나 졸리 감독의 다섯 번째 작품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했다. 실제 킬링필드의 생존자인 작가이자 인권운동가인 로웅 웅이 집필한 동명의 회고록이 원작이며 이 회고록은 한국에서 '킬링필드, 어느 캄보디아 딸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2019년에 번역 출판되었다. # 다만 이 영화는 베트남군을 순수한 해방군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캄보디아에서는 평이 엇갈린다. 이 영화 제작에는 후술할 리티 판이 참여했다.예고편 영상
- 서구인이 아닌 캄보디아인의 시선을 다루는 감독이라면 리티 판 감독이 있는데 내전으로 가족 대다수를 잃고 프랑스로 망명해 프랑스에서 영화를 공부했으며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영화 라이스 피플부터 시작해 다큐멘터리 작업인 미싱 픽처, 추방자까지 영화 커리어 자체가 킬링필드를 중심으로 삼고 있고 비평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1975 킬링필드, 푸난 (2018, Funan)
캄보디아계 프랑스인 드니 도 감독이 자신의 부모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제작한 애니메이션으로, 2022년 1월 27일 한국에 개봉하였다. 드니 도 감독의 부모는 중국계 캄보디아인이었다. 베레니스 베조와 루이 가렐이 성우로 참여하였다.
9. 참고
10. 언어별 명칭
언어별 명칭 | |
<colbgcolor=gray><colcolor=#000> 크메르어 | វាលពិឃាត (viəl pikhiət [ʋiəl pikʰiət\][97] |
영어 | Killing Fields |
중국어 | 殺戮戰場/杀戮战场 |
베트남어 | Cánh đồng chết |
프랑스어 | La Déchirure |
러시아어 | Поля смерти |
독일어 | Tötungsfeld |
이탈리아어 | Campi della morte |
스페인어 | Campos de la Muerte |
그리스어 | Πεδίο θανάτου |
스웨덴어 | Dödens fält |
리투아니아어 | Mirties laukai |
라트비아어 | Nāves lauki |
노르웨이어 | Dødsmarkene |
폴란드어 | Pola śmierci |
일본어 | キリング・フィールド |
인도네시아어 | Ladang Pembantaian |
11. 둘러보기
미국의 대내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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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폭격과 그에 따른 각종 식량난, 재해로 인한 사망자가 1,200,000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폭격의 1차적 희생자만 캄보디아에서 600,000명, 라오스에서 350,000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키신저 재판》 참조.[2] 이때 크메르 루주는 이전까지의 모든 것을 부인한다는 의미에서 프놈펜 점령일을 원년으로 공표하였다. (현재 기준으로 민주 캄푸치아 [age(1974-04-17)]년 = 서기 20[age(2000-01-01)]년) 프놈펜 함락 당시 프놈펜의 모습[3] 그나마 자신들이 집권하는 데 론놀 정권을 적대한 시아누크의 공이 컸기 때문에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4] 공산주의를 모르더라도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생산수단의 양질적 측면이 사회 진보를 추동하는 하부요인이라는 건 마르크스 책 한 권만 봐도 알 수 있다. 스스로 명망 높은 공산주의 이론가이기도 했던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 와중에도 자신이 직접 설립에 서명한 중국과학원에는 홍위병들이 절대 손을 못 대게 했고(흥분한 홍위병들이 마오의 명령조차 무시하고 몇 과학자들에게 위해를 가한 사례는 있었다. 여하간 피해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피해가 덜한 분야 중 하나였다.) 마오의 또 다른 대표적 실책으로 평가되는 대약진 운동도 사실 공업화를 잘 추진해 보려다가 의도와는 다르게 대차게 실패한 것이다. 물론 공업화에 대해서 일자무식이었던 당시 중국공산당 상층부가 진행한 대약진 운동도 인류 역사에 남을 정도로 멍청한 정책 중 하나로 꼽히지만 적어도 크메르 루주처럼 공업화와 기술은 모두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부정해야 한다는 정신나간 논리는 펼친 적이 없으며 스탈린주의는 한술 더 떠서 대놓고 공업화를 추구하여 (좌파 출신의) 반공주의 독재자 박정희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을 정도였다. 공산주의에 문제점이 많지만 저들은 공업화라도 시도해서 성공적인 국가 경영을 꾀하기도 했는데 폴 포트는 그냥 자신의 뒤틀린 신념으로 인해 고의적으로 나라의 인프라를 전부 파괴한 것이다. 폴 포트의 조악한 공산주의 이해도와 크메르 루주 특유의 잔혹함이 얼마나 반지성주의적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사람이 더 빨리 달리기 위해 두 다리를 잘라버려야한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다. 그러니 다른 독재자들을 두둔하는 공산주의자들마저 폴 포트만큼은 사실상의 반공주의자로 취급할 수밖에 없는 거다.[5] 이때 수렵활동과 가족끼리 개별적인 식사를 허용하고 여러 가지 색으로 된 옷을 입어도 좋다는 조치를 시행하기도 했으며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차별 정책을 폐지했고 '옛 사람'과 '새 사람'의 결혼을 허용했으며 전국민의 정치활동 참여권, 심지어 한 달에 세 번씩 종려당으로 단맛을 낸 쌀죽을 먹는 '후식 먹는 날'을 제공하려고 했다. 물론 이 정책들은 지방 간부들의 재량에 따라 시행하는 것으로 결정된 데다 결정적으로 이 조치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더욱 나빠져 완전히 전시행정이 되었다.[6] 북한 정치범수용소도 민주 캄푸치아의 집단농장과 비슷한 구조이다.[7] 한 망명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모든 군인들은 프놈펜 점령 이전처럼 인민들이 일터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반란을 일으키기를 원했다고 한다.[8] 캄보디아 패널인 위살봇에 의하면 저 때가 바로 캄보디아의 최대 명절이었다고 한다. 즉, 가족끼리 모여 행복하게 지낼 날이 최악의 악몽이 되어 버렸다.[9] 더 기가 막힌 건 자본주의와 지식에 물든 도시인들이 가득하다고 믿은 크메르 루주의 생각과 달리 당시까지 프놈펜에 살던 사람 250만 명 중 무려 200만 명이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프놈펜으로 피난을 와 프놈펜에 정주하던 친척의 집에 얹혀 살거나 판자촌에서 살아가야 했던 난민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명색이 수도이자 한때 동남아시아의 파리로 불렸던 프놈펜에는 단 5천 명만 남았다고 한다.[10] 벌거벗은 세계사 캄보디아 패널인 위살봇의 어머니도 도시인 시아누크빌에 살다가 강제로 이주당했다고 한다. 더 비극적인 것은 외신 기자들은 이를 보고 도시의 식량 부족과 과잉 인구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로만 생각했다는 것이다.[11] 게다가 습도까지 감안하면...여기서부터 폴 포트가 마귀만도 못한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12] 이는 쉽게 말해 캄보디아 국민들 중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는 (저녁 시간만큼은 휴식을 허용했다고 가정해도) 새벽 4시부터 자정이 넘어서까지 18시간 이상을 강제로 노동했다.[13] 폴 포트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1백만 리엘이 있다면 우리는 이 돈을 모두 국가를 건설하고 지키는 데 쓸 것이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절반만 국가 건설과 방위에 쓰고, 나머지 반은 임금을 지불하는 데 쓴다. 그래서 그 국가들은 우리보다 50만 리엘만큼 뒤쳐진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 자리에 있던 경제학 박사 출신의 키우 삼판 주석은 이 황당한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었다.[14] 물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행생즉사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15] UN의 보고에 따르면 1975~1980년 캄보디아의 영유아 사망률은 1,000명당 319.24명이었는데 이는 1950년 이후 각 국가들의 영유아 사망률 수치 중 가장 높은 수치다. 참고 자료 다만 크메르 루주 치하 캄보디아의 GDP 수치는 불명인데 사실 1975년부터 1992년까지의 캄보디아의 정확한 GDP 수치는 세계은행의 통계가 없다. 이는 크메르 루주의 축출 후에도 캄보디아가 내전에 시달렸던 것의 영향이 크다.[16] 이런 현상은 캄보디아 뿐만 아니라 소련, 중국, 북한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 참상이기도 했는데 자신에게 돌아올 보상이 없으니 사람들은 감독관에게 걸리지 않을 만큼만 일하게 되고, 감시로 강제노동을 시켜도 노동의 질까지는 개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7] 전술한 링크에서도 1971년을 기점으로 캄보디아의 쌀 생산량이 급감, 1975년에는 1970년의 1/4 수준인 100만 톤 초반이었고 이후에도 크메르 루주 집권기 동안 거의 제자리걸음이었다가 1979년에는 1974년 수준인 50만 톤 가량으로 떨어졌다. 그나마 캄보디아의 안정과 농업기술의 발달로 2022년의 쌀 생산량은 1162만 톤이다. #[18] 크메르 루주가 외국으로부터 얻은 자금의 최소 90% 가량을 중국 혼자서 제공했다고 한다.[19] 2017년 6월에는 킬링필드 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한 캄보디아인이 이 음식을 재현했는데 당시 크메르 루주가 제공한 죽은 맹물 수준으로 묽었으며 양조차 밑바닥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적었다고 한다. 링크 벌거벗은 세계사에 출연한 캄보디아인 패널이 이 쌀죽의 대략적인 제조법을 설명했는데 큰 가마솥에 물을 가득 붓고 쌀을 딱 두 컵만 넣은 뒤 나뭇잎을 몇 개 던져넣고 끓인 것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죽은커녕 미음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맹물인 셈이다. 참고로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도 이 죽과 별 다를 바 없는 멀건 야채수프를 배식하긴 했지만 여기에 추가로 톱밥을 섞어 만든 작은 빵조각과 폐야채를 태워 만든 가짜 커피에 기호품으로 매주 담배 3개비까지 배급했다. 나치가 준 음식도 "그것만 계속 먹다보면 죽어가기 딱 좋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크메르 루주는 그것보다 못한 음식을 준 것이다.[20] 하루 권장 영양공급량인 2천-2,500kcal를 쌀로 환산하면 600~700g 정도다.[평전] ‘폴 포트 평전’, 필립 쇼트 지음, 이혜선 옮김, 실천문학사[22] 평균 수치로 놓고 보면 1970년 대비 74.6% 수준으로 추락한 셈이다.[23] 1997년까지 베트남의 1인당 평균 열량 섭취량이 1,900kcal 밑으로 떨어진 적도 베트남 전쟁 종전 직후인 1975~1978년, 1991년 5번밖에 없었고 최저치도 1978년의 1,775kcal였다.[24] 물론 1979년 1,616kcal를 시작으로 킬링필드 종결 후 캄보디아의 평균 열랑 섭취량은 점차 나아져 1987년 킬링필드 이전 수치를 회복하고 1991년 1인당 평균 열량 섭취량이 2,000kcal대를 회복했으며 2018년 기준으로 캄보디아의 1인당 평균 열량 섭취량은 2,492kcal이다.[25] 이와 비슷하게 우크라이나 대기근도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줄어들어 버렸고,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늙어버렸다."는 언급이 있다.[26] 훗날 캄보디아의 총리가 될 크메르 루주 부대장 훈 센의 장남 훈 캄솟은 의사의 실수 때문에 떨어져서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심지어 훈 센이 첫 자식을 봤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27] 뒤에서 3위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런 캄보디아보다 가난한 나라가 있었다! 그 주인공은 광물 자원 개발(석유도 80년대 중반에야 발견되었다)과 변변한 산업도 없던 데다 외부 지원도 부족했던 농업국 남예멘(1975), 베트남 전쟁을 겪은 베트남(1975~1976)과 오가덴 전쟁을 일으키면서 1인당 GDP가 반토막난 소말리아(1977~1979), 라오스 내전을 겪은 라오스가 전부인데 특히 라오스는 전 기간 동안 킬링필드를 겪던 캄보디아보다도 훨씬 가난했다.[28] 사실 1970~1971년 캄보디아는 1인당 GDP가 100달러를 넘기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20개국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1972년에는 103달러이긴 했어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15개국 중 하나로 추락했고 1973~1974년 기준으로 캄보디아의 1인당 GDP는 88달러/89달러, 순위는 183위, 즉 뒤에서 5위로 전락해 있었다.[29] 그가 매우 좋아하던 음식으로, 폴 포트는 이 음식을 뱀의 피를 컵에 담은 것과 같이 먹었다고 한다.[30] 판단 증거도 걸작인 게 영어로 말하고 고개를 돌아보면 영어를 아는 걸로 판단해 죽였다. 물론 그 논리대로라면 대놓고 영어를 말한 크메르 루주 단원이 먼저 처형당해야 했지만.[31] 크메르 루주의 처형 사유 중 가장 많았다. 참고로 이것 때문에 지금도 캄보디아에서는 안경을 착용하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평전] [33] 다만 이는 뚜올쓸라엥에서 고문을 통한 자백으로 알아낸 것이기는 하니 신빙성은 알아서 판단하자. 뚜올쓸라엥의 고문으로 얻어낸 자백 중에는 폴 포트의 아내인 키우 폰나리(Khieu Ponnary, 1920~2003)가 CIA 요원이라는 황당한 내용도 있었기 때문에 깡 겍 이우 뚜올쓸라엥 소장 본인은 물론이고 크메르 루주 수뇌부조차 그들의 자백이 모두 진실이라고는 믿지 않았으며 그저 '장애물'로 간주된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34] 다만 화가들만은 그대로 놔뒀는데 당시 크메르 루주가 폴 포트의 공식 초상화를 그릴 만한 화가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뚜올쓸라엥에 구금되었다가 생존한 성인 수감자 7명 중 4명이 이 지시를 이행하도록 살려둔 미술가들이었다.[35] 다행히 2015년 기준으로 캄보디아의 문맹률은 19.5%로 많이 낮아졌다. 사실 이것도 동남아시아 최하위권이기는 하다.[36] 벌거벗은 세계사에 출연한 캄보디아 패널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의 외조부는 지방 고위경찰에 어머니도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 계층이라 숙청 대상 1호였으며 이 때문에 살기 위해선 눈이 있어도 못 본 척, 귀가 있어도 못 들은 척, 입이 있어도 못 말하는 척을 해야 한다고 대를 이어서 교육을 했다고 한다. 물론 후술하듯 숙청 대상 0순위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했던 사람들은 바로 크메르 루주 수뇌부였다.#[37] 유니세프의 통계에 따르면 킬링필드가 끝난 지 30여년이 지난 2007년 기준으로 프놈펜의 미성년자 중 30%대에 달하는 5~10만 명이 매춘에 종사했다고 하며 2008년 기준으로도 캄보디아의 중학교 취학률은 34%, 고등학교 취학률은 10%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38] 이런 전기고문 방식은 더러운 전쟁 당시 남미의 극우 군사정권이 애용한 것으로 유명하다.[39] 이와 완전히 판박이로 김일성도 "독초는 적시에 제거하고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물론 김일성도 북한식 연좌제가 가장 먼저, 철저히 적용되어야 했던 인물이란 것은 폴 포트와 판박이다.[40] 이 말은 실제보다 축소된 것이다. 뚜올쓸라엥 교도소의 소장이었던 깡 겍 이우마저 "내가 체포되었다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매제, 조카도 함께 체포되었을 겁니다."라고 술회했을 정도였으며 심지어 크메르 루주의 수뇌부격이던 누온 체아조차 삼촌과 사촌을 포함한 핏줄 40여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 하물며 진짜 정치범들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연좌제가 적용되었을 것이다.[41] 그나마(...?) 이는 정치범의 가족들에게 한한 것이며 '지식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형자의 3족을 멸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물론 정치범 가족의 3족을 멸한 것도 극악무도하기 그지없었다는 것은 마찬가지지만.[42]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후술할 뚜올 슬렝 강제수용소에 1년간 수감되었던 화가 반 나트(Vann Nath, 1946~2011)로 그는 이 외에도 다양한 기록화들을 남기며 킬링필드의 참상을 후대에 전했다.[43] Haing S. Ngor, 1940~1996. 원래 군의관 출신이었다가 크메르 루주의 탄압 때문에 태국으로 탈출한 후 1980년에 미국에 정착했으며 1996년에 미국에서 피살되었다. 다만 그를 죽인 범인은 이미 완전히 몰락했던 크메르 루주가 아니라 돈을 노리고 강도살인을 벌이려고 했던 아시아계 불량배들이었다.[평전] [45] 잘 보면 오른손에 펜을 들고 있으며 사진 오른쪽에는 또 다른 안경이 보이고 전체 사진을 보면 책상에 서구식 책도 있다. 크메르 루주의 '지식인' 판단 기준이 앞뒤가 안 맞았음을 보여주는 산 증거다.[46] 이것도 확인된 것에 한한 수치다.[47] 시아누크는 해외에서 보다 많은 기술을 배워 와야 한다며 유럽에 많은 국비 장학생들을 보냈다. 그런데 그 많다는 것도 객관적으로는 매우 적은 수로, 1900년대 초부터 폴 포트가 유학을 간 1949년까지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 캄보디아인의 총합은 고작 250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즉, 폴 포트는 가히 당대 캄보디아에서 손에 꼽을 수준의 엄청난 엘리트였다. #[48] 지금이야 무선은 흔하고 널렸지만 당시에는 최첨단 기술이었고 더군다나 동남아시아 식민지 출신이 전공하면 말이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지식인이었다.[49] 정확히는 누온 찌어는 부유한 농부의 자식이었고 손 센은 소규모 지주의 자식이었으며 이엥 사리도 부유한 지주의 자식이었다.[50] Khieu Ponnary, 1920~2003. 캄보디아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캄보디아 여성이었으며 파리로 유학을 가 크메르 언어학을 전공했다. 폴 포트와 1956년에 결혼했으나 남편의 집권 무렵부터 정신병에 시달리다가 남편이 퇴출당한 1979년에 이혼했다.[51] 1970년에 68 운동으로 해체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의 대학교 중 하나였다. 즉슨, 키우 삼판은[52] 그런데도 삼판은 '정신개조'를 명분으로 한 강연에서 "지식인 여러분은 유럽의 영향력, 우리식으로 말하면 '식민주의의 잔재'를 가지고 외국에서 돌아왔습니다."라는 말을 남기면서 예기치 못하게 자아비판을 해 버린 꼴이 되었다. 비슷하게 김일성도 "억압은 억압을 낳고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교시를 남겨 예기치 못하게 자아비판을 했다.[53] 학살의 총책임자[54] 외교 담당[55] 학살의 실무책임자[56] 비밀경찰 수장+수용소 운영 관리[57] 학살 방안 확립[58] 학살에 '적합'한 환경을 확립+최고지도자를 제외하면 반인륜 범죄에 있어 가장 중대한 책임을 짐[59] 가장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의 소장[60] 왜 그것이 나치 독일 입장에서 '중죄'였는지는 T4 작전 문서 참조. 이들 중 히틀러는 잠복고환, 괴벨스는 소아마비 환자였다.[61] 특히 키우 삼판은 캄보디아가 최빈국에서 벗어난 현 기준으로도 손에 꼽을 수준의 엘리트이다.[62] 물론 가르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교육을 어느 정도로 소홀히 했는지 10대 소년 위주였던 뚜올쓸라엥 교도소의 교도관 중에는 문자 그대로 7 이상을 셀 줄 모르는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였다.[63] អង្គការ(Angkar). 크메르어로 '조직'을 의미하며 크메르 루주 치하 첫 2년 동안은 크메르 루주 수뇌부의 존재는 캄보디아에서는 공식적으로 기밀로 유지되었고 크메르 루주 수뇌부는 '엉까'로 불렸다.[64] 1988년에 전직 크메르 루주 일원이 남긴 증언에 따르면 크메르 루주는 어렸을 때부터 정글 속에서 생활하면서 게릴라 훈련 이외에는 별다른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어린 소년들의 잔학성을 길러주기 위해 끔찍한 살상훈련을 반복 실습했다고 하는데 특히 이들은 고양이나 쥐를 잡아 가능한 한 잔인하게 죽이는 연습에 익숙하다 보니 이후 사람을 잡아 똑같은 잔인한 방법으로 살상을 해도 죄의식이나 별다른 표정이 생길 리가 없었다고 한다. #[65] 마치 북한의 김씨 3대와 조선로동당이 자신들이 북한에 있는 모든 어린이들의 친부모 내지 어린이들을 친부모도 주지 못할 사랑으로 보살펴주는 존재라는 주장을 주입시켜 어린이들을 세뇌시킨 것을 연상시킨다.[66] 적어도 북한은 헌법 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됨을 보여주는 척이라도 하기 위해 어용 수단으로 일부 교회나 성당, 사찰들을 현재까지 유지는 하고 있다. 킬링필드 시절 캄보디아는 그러한 최소한의 요식행위조차도 없었던 상황.[67] 굉장히 아이러니하게도 크메르 루주는 국립박물관, 큰 사찰들, 왕궁 같은 역사적 기념물들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하며(이것 덕분에 앙코르 제국 시절 유적지들은 내전 시기에 훼손되긴 했지만 파괴되는 수난은 면했다) 오히려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문화재 관리인들을 특별보호 대상으로 삼게 했고 특별 허가를 받은 사람들에 한해 앙코르 와트를 비롯한 관광지들을 둘러볼 수 있게 했다. 국기에도 앙코르와트를 넣었다.[68] 윤 얏은 1997년에 정부군에 투항하려던 손 센과 함께 크메르 루주에 의해 살해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69] 이에 몇몇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거부하고 그대로 굶어 죽는 것을 선택했다.[70] Mey Mann, 1927~2001. 젊었을 적에 폴 포트의 동료였다.[71] 크메르 루주는 '한 개인이 나머지 국민이 가지지 못하는 물건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크메르 루주 수뇌부는 수입 사치품에 접근할 수 있었고 폴 포트도 외제차까지 보유한 데다 호화로운 식사를 즐겼으며 몰락 후인 1988년에 아내에게 준다며 중국에서 손목시계를 구매하는 사진이 남아 있다. #[72] 당장 노르돔 시아누크 국왕부터가 직접 영화를 만들었을 정도로 열렬한 영화 매니아였다.[73] 대표적으로 '캄보디아의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불렸으며 크메르 공화국을 지지했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신 시사뭇(Sinn Sisamouth, 1932?~1976?)도 크메르 루주 시기에 행방불명되었다.[74] 마치 특권층, 외국인, 연구원 정도를 제외한 전국민의 인터넷 사용을 금지시킨 북한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75] TVREK는 TVK라는 이름으로 1983년 12월 3일에야 재건되었고 1986년 7월 19일에 흑백 방송에서 컬러 방송으로 전환했다. 참고로 캄보디아는 세계에서 가장 늦게까지 흑백 방송만 송출하다가 컬러 방송으로 전환한 나라이기도 하다.[76] 크메르 루주 반군 실무자들은 농촌 출신의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당시 캄보디아는 도•농간 격차가 엄청났던 데다 1960년대 후반 이후의 혼란기로 인해 인프라 개발이 지체되면서 전기가 안 들어오는 시골도 부지기수였고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자도 많았다. 그들에게 도시 문명의 모든 것은 부의 상징이자 증오의 대상으로 보였고 자동차, 라디오, TV, 전자기기는 '있는 놈'들의 물건이었다. 캄보디아에서는 1966년에 TV 방송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당시 캄보디아의 정세가 혼란해서 경제사정이 좋을 리는 없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의 대중화는 요원한 상태라서 부유층의 물품이기는 했다. 캄보디아와 다르게 경제가 성장 중이던 인도네시아와 태국에서도 TV는 아직 부자들이나 가질 수 있는 물품이었고 1980년대 이후에야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1975년 기준으로 3가구 당 1대꼴로 TV가 보급되었는데 도시 지역은 어느 정도 TV가 보급되었지만 시골이나 달동네에서는 저녁이나 주말이면 TV 본다고 TV 있는 집에 가거나 만화방에 가는 것이 보편적인 풍경이었을 만큼 아직 보편적인 대중매체는 아니었다. 다만 캄보디아에서도 자동차는 아직은 있는 놈들의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잡혀간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다. 당대 한국 기준으로 보면 TV는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보급되기 시작했고 자동차는 아직 대중화되기조차 전이었지만 라디오는 한국이 한창 가난했을 시절인 1960년대에 대중화되었는데 이는 다른 개발도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77] 여기서 '파데밧'은 '혁명'을 의미한다.[78] 폴 포트는 이러한 이동의 자유 통제를 어길 수 있는 권한이 있었는지 상술했듯 론 놀의 소유였던 메르세데스-벤츠를 가지며 전용 운전사까지 데리고 자유롭게 국내 시골 여행을 다녔으며 면 단위의 서기장들은 자전거를, 시나 군 단위의 서기장들은 오토바이를 보유했고 도 단위의 서기장들과 그 이상은 자동차를 보유했다. 폴 포트의 메르세데스-벤츠 차는 폴 포트의 몰락 후에는 한 농부가 판매할 수박을 운반하는 용도로 쓰다가 2000년에 한 영국인 금융 컨설턴트가 구매했다고 한다.[평전] [80] 애당초 폴 포트는 중앙위원회 회합에서 어머니와 자식이 너무 긴밀한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실제로 했던 인물이었다. 물론 본인은 몰락 후에 낳은 외동딸은 지극히 아꼈던 데다 후처와 결혼한 이유도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81] 공산권에서도 민주 캄푸치아에 버금가는 극악한 체제를 유지했던 북한은 완전통제구역 수감자들에 한해 이와 비슷한 정책을 실시했는데 '죄'를 저지른 남자는 따로 수용시켜 부부를 분리시키고 열두 살 미만의 어린이들이 있는 경우 인민학교 4학년까지 어머니가 데리고 있게 했으며 4학년이 되면 자식 중에서는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분리시켰고 엄마는 엄마대로 서로 분리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북한조차 국가적 차원에서 수감자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의 가족들을 강제로 분리시키는 극악무도한 악행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82] 김현정.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아이들. 제주대학교 통역대학원, 2009 #[83] 이런 크메르 루주의 만행으로 인해 캄보디아에서 이산가족이 양산되어 새 정부 수립 이후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대한민국처럼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방영되었다고 한다.[84] 비슷하게 북한도 2023년부터 '가장 악질적이고 반동적인 자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장(장기) 하나하나가 찢어져 문드러지는 최상의 고통을 받게 해야 한다'는 취지에 따라 '죄'를 지은 부모와 자식을 다른 수용소로 떨어뜨리고 있다. #[85] 당시 캄보디아에서 결혼당한 여자들 중 남편이 될 사람의 이름를 안 사람은 전체의 절반도 안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유부녀를 강제로 이혼시킨 후 재혼을 강요한 사례들도 보고되었다.[86] 캄보디아의 인구는 크메르 루주의 실각 42년 후인 2021년 기준으로도 고작(?) 1,659만 명인데 이를 보면 폴 포트가 얼마나 황당한 목표를 세웠는지 알 수 있다.[87] 물론 상술했듯 폴 포트 본인을 포함한 크메르 루주 수뇌부의 상당수는 중국계 혈통이 혼재되어 있었다.[88] 이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고 기세등등하던 베트남으로부터 엄청난 분노를 유발하여 크메르 루주와 베트남 사이에 극한의 외교적 대립이 이어졌는데 결국 1978년 12월 25일 베트남군은 망명한 캄보디아 난민으로 캄푸치아 민족구국통일전선을 조직하고 크메르 루주 장교로서 베트남에 망명한 헹 삼린을 내세워 폴 포트 타도를 기치로 캄보디아를 침공했다.[89] 정작 부총리 이엥 사리의 어머니도 절반은 베트남계 혈통이었다.[평전] [91] 90년대 중반까지 캄보디아에 매장된 지뢰는 도합 1000만 개였으며, 내전 이후에도 600만 개의 지뢰가 남아 있었고, 매달 200~300명이 지뢰를 밟을 정도였다. 농담이 아니라 사람보다 지뢰가 더 많았다.[92] 캄보디아는 지금까지도 지뢰로 인한 피해자 보유국 세계 1위국이며 벌거벗은 세계사의 캄보디아 패널에 의하면 어릴 때부터 지뢰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93] 이러한 점은 레오폴드 2세가 통치하던 콩고 자유국의 상황과 흡사하다. 레오폴드 2세는 사유지였던 콩고 자유국에서 오직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려는 목적만으로 유색인종에 대한 식민지배와 탄압, 인종 차별이 일상화되었던 제국주의 시절 제국주의 국가들도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의 학정을 저질렀다. 천만 이상이 죽었다는 것은 당시 콩고의 자연환경을 보면 뻥튀기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긴 하지만 적어도 수천~수만 명의 원주민들이 학살당했을 것만큼은 확실하며 학살의 동기 자체만 따져도 레오폴드 2세는 사상 최악의 학살자 중 하나로 꼽히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마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가 죽인 사람의 수는 동렬에 놓이는 독재자들과 비교하면 적긴 하지만 그 비율과 악행의 질까지 따지면 폴 포트도 능가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받는 것과 비슷하다.[94] 다만 훈센은 시아누크 국왕의 명을 받아 론 놀 군부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인 왕당파에 가까웠다.[95] 킬링필드를 제외하면 외침, 자연적인 기근 없이 자국 인구 손실 비율이 킬링필드보다 더했던 사례는 전대의 라나발로나 1세 시기의 메리나 왕국, 동시기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시기의 적도 기니 정도밖에 없다. 이들은 집권할 동안 각각 '6년 만에 내전으로 인구의 50% 감축/10년 동안 전란 하나 없이 인구의 1/7 감축'이라는 초유의 기록을 세웠으며(응게마 시기 적도 기니의 인구 손실 비율은 무려 50 ~ 75%에 달한다.) 특히 응게마는 별명이 아프리카의 폴 포트였던 데다 폴 포트와 유사한 반지성주의 및 종교 탄압 정책을 벌인 인물이었다.[96] 외국인 여성과 혼인한 캄보디아인 남성 제외[97] 위얼 삐키엇. '살인의 벌판'이라는 뜻이다. 이걸 영어로 킬링필드라고 번역했고 한국과 일본에 영어 표현이 그대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