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조선(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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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 조선 朝鮮 | Joseon(Chosŏn) 대조선국 大朝鮮國 | Tah-Chosu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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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 '''국기[* 1883년 조선의 외무부처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공식 도안한 태극기이다. 이후 아래와 같이 여러 차례 도안이 변경된다. {{{#!wiki | |||||
1888년의 도안 | 1893년의 도안 | }}}] (1883~1897)''' | <colbgcolor=#c00d45> 어기 | ||
▲ 조선의 강역 ■ 1410년대에 확장한 영토[1] ■ 1430년대까지 확장한 영토[2][3] |
1392년 8월 13일[4]~1910년 8월 29일[5] (518년 16일) | ||||||
성립 이전 | 칭제건원 이후 | |||||
고려 | 대한제국 | }}} | ||||
상징 | ||||||
국호 | <colbgcolor=#fff,#1c1d1f>고려국[6] → 조선국 → 대조선국 | |||||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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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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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수 | 국왕 (1392~1894) 대군주 (1894~1897) 황제 (1897~1910) | |||||
주요 군주 | ||||||
국성 | 전주 이씨 (李) | |||||
왕조 | 조선 왕조 | |||||
국교 | 유교(성리학)[30]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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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 개국[31] (1894~1896) 건양 (1896~1897) 광무 ,(1897~1907), 융희 ,(1907~1910), | |||||
통화 | 조선통보 (세종 재위기, 인조 재위기)[32] 상평통보 (1678~1894)[33][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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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朝鮮, Joseon[37], Chosŏn[38])[39]은 원 제국을 등에 업은 권문세족[40]과 불교 세력[41]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원명교체기의 혼란상을 견디지 못한 고려 말에, 신진사대부들이 역성혁명으로 왕씨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1392년에 개국하여, 1910년에 경술국치로 멸망할 때까지 약 518년[42] 동안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들을 지배했던, 한민족의 근세 국가이다.남북국시대의 대신라 때부터 크게 성장[43]해오던 유교세력은 고려의 중앙집권화 정책의 수혜를 받아서 성장했으나, 고려가 불교국가라는 태생적 한계[44]와 고려 말에 보였던 왕실의 실망스러운 모습은 유학자들에게 '고려'는 이미 실패한 체제[45][46]로 보였고, 특히 유학을 공부한 유능한 신진사대부들은 고려를 무너뜨려야한다고 의견을 통합했다. 황산대첩 등의 활약으로 명장으로 명성을 얻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자, 신진사대부들이 이성계와 결탁했고, 곧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했다. 이때 조선이라는 국호는 단군왕검께서 세우셨던 고조선[47]에서 가저온 것[48]이다. 이후 개화기였던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국호를 한(韓)으로 변경[49]했다.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태봉을 국가승계한 고려[50]와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통한 국가승계 왕조이므로 초기에는 고려를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51] 다만 여말 원 간섭기의 영향과 성리학의 유입이 고려와 조선의 차이를 크게 결정지었다.[52]
2. 상징
자세한 내용은 곤룡포 문서 참고하십시오.전통적 상징 | |
조선 국왕의 상징 기, 어기. | 조선 전기의 국왕 용보(위), 중기의 국왕 용보(가운데), 후기의 국왕 용보(아래). |
조선 국왕의 어기는 태극팔괘도(太極八卦圖)라고도 불렸으며, 조선 시대 이전에도 도교적 우주원리에 따라 음과 양, 세상의 이치와 자연의 섭리를 나타내는 영험한 문양으로 여겨져 널리 사용되다가 조선 건국 이후에는 성리학이 국교가 되면서 군주의 어기로 사용되었다. 태극 문양은 사서삼경 중 역경의 계사전(繫辭傳)에서 유래한 태극도(太極圖)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위 어기에 직접적으로 채용된 문양은 1415년(영락 13년) 명 성조의 뜻에 따라 호광 등 42명의 유학자가 편찬한 저서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수록된 태극도이며, 이는 구한말 조선의 우초(우표) 문장에도 반영되었다. 서울대 규장각 자료에 따르면 어기 사용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혹은 처음 사용된 시기는 아래 태극기 보다 약 한달 정도 빠른 1882년 8월 정도로 보여진다.#
자세한 내용은 태극기 문서 참고하십시오.
근대적 상징 | |
조선 후기의 국기, 태극기. | 조선 우정국의 우초(우표) 문장.[53] |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조선이 명나라와 청나라에게서 받아온 인장(印章)으로, 제후국인 조선은 국새에 '새(璽)'나 '보(寶)'자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대신 '인(印)'을 넣었다. 훗날 고종이 칭제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등을 독자적으로 만든다.
3. 국호
자세한 내용은 조선/국호 문서 참고하십시오.4. 역사
자세한 내용은 조선 시대 문서 참고하십시오.5. 평가
자세한 내용은 조선/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6. 왕조
자세한 내용은 조선/왕조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조선/역대 왕비 문서 참고하십시오.
7. 왕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왕실 문서 참고하십시오.8. 오해
자세한 내용은 조선/오해 문서 참고하십시오.9. 정치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삼사 | 의정부 | 국왕 직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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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군부 오위 → 비변사 오군영 속오군 | |||
<rowcolor=#f0ad73> 고려 중앙정치기구 · 대한제국 중앙정치기구 |
의정부서사제 시기와 6조직계제 시기의 조정 체계. |
조선의 정체(정치 체제)는 국왕 중심제의 전제군주제 국가이며 바뀐 적이 없다.[55] 특히 조선의 체제는 1910년 대한제국 멸망까지 계속되어 왔으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로 한국통감부의 간섭과 개입이 있었다.[56]
조선국왕에 대한 경칭은 전하(殿下)였는데 이는 원 간섭기를 분수령으로 하여 국가(국왕)의 자기 정체성의 설정 방식이 혁명적으로 변화한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그에 따라 원 간섭기 당시 고려에서 성립된 자기 정체성(제후국 체제)의 기본 틀은 그 이후 고려왕조를 이은 조선왕조까지 존속하게 되었고[57], 그 결과 국왕에 대한 경칭은 고려 후기때와 마찬가지로 계속 전하(殿下)로 불려왔다가, 청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의 경복궁 점령 및 내정개혁 강요의 결과 1894년 12월 17일 갑오개혁부터는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로 경칭이 격상되었다. 그리고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이후에는 아예 칭제건원을 함에 따라 황제폐하(皇帝陛下)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대한황실이 이왕가로 재편되면서 일제강점기에는 다시 전하(殿下)로 격하되었다.
관료는 수상(首相)격으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58]의 삼정승 직위가 있으며 갑오개혁 이후로는 영의정이 총리대신 등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조선 조정의 정치 조직은 국왕과 최고 의결 기관인 의정부 3상, 그리고 각 분야의 일을 담당하는 부서와 같은 기관인 육조 판서로 구성되어 있다.
10. 사회
자세한 내용은 조선/사회 문서 참고하십시오.11. 군사
자세한 내용은 조선군 문서 참고하십시오.12. 인구
세기 | 국왕 | 인구 |
14세기 | 태조 | 5,500,000 ~ 5,700,000명 |
15세기 | 태종 | 5,700,000 ~ 6,200,000명 |
세종 | 6,200,000 ~ 7,100,000명 | |
세조 | 7,300,000 ~ 7,900,000명 | |
성종 | 7,900,000 ~ 9,100,000명 | |
16세기 | 연산군 | 9,100,000 ~ 9,700,000명 |
중종 | 9,700,000 ~ 11,700,000명 | |
명종 | 11,700,000 ~ 12,800,000명 | |
17세기 | 선조 | 11,500,000 ~ 14,100,000명 |
광해군 | 11,200,000 ~ 11,500,000명 | |
인조 | 10,600,000 ~ 11,200,000명 | |
효종 | 10,900,000 ~ 11,400,000명 | |
현종 | 11,400,000 ~ 13,200,000명 | |
18세기 | 숙종 | 13,100,000 ~ 16,500,000명 |
영조 | 16,800,000 ~ 18,700,000명 | |
정조 | 18,000,000 ~ 18,400,000명 | |
19세기 | 순조 | 16,200,000 ~ 18,600,000명 |
헌종 | 16,500,000 ~ 16,600,000명 | |
철종 | 16,500,000 ~ 16,900,000명 | |
20세기 | 고종 | 16,800,000~ 17,300,000명 |
위의 표는 추정치로, 실제 인구수와는 차이가 있다. 가령 추정치에선 1910년 조선 인구수 추정치를 1730만명대로 잡았지만, 1910년 일제의 인구조사에서는 1300만명대로 400만명 가량 차이가 난다.
本朝人口之法, 不明錄于籍者, 僅十之一二。 國家每欲正之, 重失民心, 因循至今, 故各道各官人口之數止此, 他道皆然。
본조(本朝)는 인구(人口)의 법이 밝지 못하여, 문적에 적힌 것이 겨우 열의 한둘이 되므로, 나라에서 매양 바로잡으려 하나, 너무 인심(人心)을 잃게 되어, 그럭저럭 이제까지 이르렀으므로, 각도 각 고을의 인구수가 이렇게 되었고, 다른 도들도 모두 이렇다.
세종실록지리지 경기
전근대의 인구 자료를 정확하게 통계 낼 수는 없으므로 위 자료는 모두 현대의 추정치다. 왜냐면 조선에선 세금을 피하려고 호구 조사에 일부러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59] 세종 실록 지리지 경기도조에 의하면 조선왕조실록에 적힌 조선의 인구수는 실제 인구수의 10분의 1 ~ 2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며 조선 세종 시기의 인구는 최대 800만까지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즉,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호구를 통해 계산한 인구수는 그 수치의 8배 ~ 10배 이상을 곱해야 실제 인구수에 가까운 수치가 나온다는 것이다. 역시 송사, 고려도경을 기초로 12세기 고려 인구가 210만 구였다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으나 조선 시대 인구수 기록과 마찬가지로 고려 시대의 호구 / 인구 기록의 완정성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게 바람직하다.본조(本朝)는 인구(人口)의 법이 밝지 못하여, 문적에 적힌 것이 겨우 열의 한둘이 되므로, 나라에서 매양 바로잡으려 하나, 너무 인심(人心)을 잃게 되어, 그럭저럭 이제까지 이르렀으므로, 각도 각 고을의 인구수가 이렇게 되었고, 다른 도들도 모두 이렇다.
세종실록지리지 경기
특히 임란 직후와 19세기에는 조선의 행정력이 불안정해서 추측이 더 힘들다. 한 연구에서는 조선의 인구 통계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며, 양반 가문에서 내려오는 족보로 인구 증가율을 추정했는데, 18세기의 연 0.4% 증가율에서 19세기에는 연 0.8% 증가로 계산됐다. 하지만 호구조사상에서는 19세기에 정체하는 것으로 나온다. 결론적으로, 조선이 인구가 계속 증가했는지, 아니면 인구가 정체했는지, 인구가 어떤 추이를 보이는지는 답을 내릴 수가 없다.#
조선의 인구는 크게 증가한 이전까지 꾸준한 증가 - 임란 직후의 급감 - 임란 이후의 급증 - 19세기의 정체로 표현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인구는 수백만 명 수준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했던 것으로 추계가 그려진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농지 재개간, 상업 유통 발달, 새로운 기술의 도입(모내기법 등)으로 18세기에 인구가 1.5배 내외로 급증했다. 그러나 19세기부터는 인구가 정체되기 시작했는데, 당대 동아시아 국가들이 그렇듯 조선도 인구 폭발로 농지와 식량이 한계가 왔고, 개간할 땅마저 모자랐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삼림은 벌채와 개간으로 축소되어 버리고, 자투리 땅마저 농경지로 이용되었을 정도로 인구 압력이 심했다.[60] 당대 조선 식자층들 역시 식량 생산량이 소비량에 미치지 못한다며 우려를 나타냈을 정도다. 조선 전체의 인구 밀도는 중국의 부유한 지역이나 일본과 비슷하고, 산업혁명 이전에는 유럽에서도 이런 인구밀도를 달성하기 힘들었다. #
13. 외교
자세한 내용은 조선/외교 문서 참고하십시오.14. 여담
- 현재 한반도에서 "전통 문화"라고 부르는 것들의 거의 대부분이 조선 시대(특히 18세기 이후의 조선 중후기)에 형성된 것이다. 조선이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100년이 넘게 지났고, 일제시대, 군사정권시대, 민주화의 이룩이라는 사회의 변화가 여러번이 있었지만 조선 시대의 영향을 받은 문화는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깊이 뿌리를 내려있다. 성리학이나 과거 제도의 잔재는 현재도 교육, 결혼, 가족, 연애 문화 등에서 그 흔적이 강하여 현재까지 이어지는 타국과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주거의 형태[61]나 음주가무나 외모나 일부 장례와 관련된 풍습[62] 등은 성리학이 깊게 뿌리내리기 전부터 내려온 것이 지금까지 변형되어 있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이런 요소들도 형태는 살짝 변형되었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공예품 양식인 조선백자는 지금도 고려시대의 상감청자와 더불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식품으로 진귀한 대접을 받고있으며 대한민국의 도공들이 많이 생산하고 있다. 그래서 단적으로 한국과 옆나라 일본의 문화 차이라고 알려진 것들 중 상당수가 실상 조선 시대에 배제된 불교적 문화의 유무 차이에서 비롯된 경우가 굉장히 많다. 식문화, 차 문화, 식사 예절, 장례 형식 등.[63] 물론 일본사에서도 불교를 억압[64]한 기간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한국사처럼 수백년간 체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약식동원 사상도 남아 있어, 특히 한식을 중심으로 어느 질환에 좋은 음식이라는 마케팅이 흔하고 한식당에 음식의 효능을 강조하는 안내판은 아주 한국적인 모습이라며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편이다.
- 대한민국은 조선의 영토와 문화 등을 북한과 더불어 반절 계승하긴 했으나, 이와 국가의 정체(政體)는 완전히 별개이다.[65]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수도가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에서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고[66] 현재 통용되는 화폐의 기준인 원화 또한 대한제국 시절에 처음 사용된 단위이며 그 원화에 도안된 인물들이 100% 조선 전ㆍ중기 약 200여 년 기간에 살았던 사람들이며[67] 광화문 등 전국 곳곳에서 조선 시대 위인들이 기념되고 문자도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한글을 공식 문자로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은 조선의 문화적인 영향력이 현재의 대한민국에도 계속 그 영향력을 크게 끼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국기인 태극기도 조선 말기에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제정된 것이며 대한(大韓)이라는 국호 또한 대한제국에서 처음 사용된 국호에서 유례된 것이다. 또한 현재까지도 중국, 일본, 베트남 같은 한자문화권의 국가들에서는 조선반도[68], 조선어, 조선민족, 조선전쟁 등으로 한국을 호칭하는 경우가 많다.[69] 또 내국인들 사이에서도 일제강점기와 미소군정 때까지 '조선'이라는 단어는 공식적, 일상적 측면 모두에서 반도, 민족, 언어, 문화 등을 가리키는 주된 명칭으로서 존속했고 그 뒤에도 북한 정부에 한해서 현재까지도 공식 국명으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15. 연표
- 참고 서적: 조선왕조실록
- 1392년 이성계가 고려의 공양왕에게 양위받아 국왕(國王)으로 즉위
- 1393년 이단(이성계)이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으로 고치면서 국호 확립
- 1398년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은 왕자 이방원이 반란을 도모, 일으켜 정권 장악, 곧 이단이 양위하고 이방원은 자신의 형 이방과를 왕으로 세움
- 1400년 2차 왕자의 난
- 1446년 세종(世宗)이 훈민정음 반포.
- 1453년 세종의 왕자 이유가 쿠데타(계유정난)를 일으킴, 정권을 장악하고 단종에게 양위받아 즉위.
- 1460년 경국대전의 호전 완성.
- 1485년 경국대전 완성
- 1506년 반란 세력이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자 역을 옹립함.
- 1575년 동서분당, 사림이 분열하여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짐.
- 1589년 정여립이 역모 혐의를 받음, 동년 동인 대부분이 처형됨.[70]
- 1592년 임진왜란 발발
- 1598년 임진왜란 종결
- 1623년 능양군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국왕으로 즉위.
- 1624년 이괄이 난을 일으킴(이괄의 난), 반군에 의해 한양을 점거당했으나 곧 탈환.
- 1627년 정묘호란 발발.
- 1636년 병자호란 발발, 이 전쟁으로 인해 청나라는 황제만 쓰는 묘호를 폐기하려고 함, 조선 영토 내의 삼전도비 건립.
- 1721년 신임옥사 발발.
- 1762년 임오화변 발발.
- 1800년 정조(正祖)가 사망, 그의 아들 이공이 즉위. 이 기점으로 세도정치 시작.
-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 그러자 왕족 이하응이 자신의 아들 이명복을 왕으로 즉위시키고 정권을 잡음.[71]
- 1875년 운요호 사건 발생, 조선의 패배.
- 1876년 조-일 간의 강화도 조약 체결.[72] 이후 조선은 서양 세력들과도 조약(불평등 조약)을 맺음.
- 1870년대 중반 개화파 성립.
- 1882년 구식 군인들이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에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킴(임오군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조선 정부의 고종은 대원군을 긴급히 불러 섭정시킴, 대원군은 개혁 정치 대부분을 취소시켜 사건을 무마시키려 했으나 청군이 대원군을 천진으로 납치함.
- 1884년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급진파 세력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킴. 그러나 3일 만에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
- 1894년 동학 세력들이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위해 운동함(동학농민운동), 운동이 진행되면서 정치적 운동으로 성장했고 곧 사회 개혁을 목적으로 움직임. 1차는 정부와 협상하여 종결됐으나 2차는 일본-관군의 연합군에 의해 패배. 동년 청일전쟁 발발. 청-일본과의 싸움에서 일본이 승리하므로써 청은 종이 호랑이가 됨. 동년 조선은 갑오개혁을 실시.
- 1895년 청 - 일의 시모노세키 조약(하관조약/마관조약) 체결, 동년 조선, 을미사변 발발.
-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
-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 동년 '대군주' 칭호 사용, 곧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황제로 즉위(연호: 광무/光武)
-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일본 승리로 일본은 조선의 주권을 빼앗는다.
- 1905년 조 - 일의 을사늑약 체결. 이 일로 인해 조선은 일제의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없는 국가가 된다.
- 1906년 일본이 을사조약을 기반으로 통감부 설치.
- 1907년 고종이 일본의 압력에 의해 강제퇴위/양위, 그의 아들 이척(이하 순종)이 즉위.
- 1910년 일본이 한일합병조약을 맺음.[73] 조선 왕조가 멸망,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가 실시됨. 조선총독부 설치. 황실은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었고 순종은 이왕(李王)에 책봉됨.
16. 관련 문서
자세한 내용은 조선/관련 문서 문서 참고하십시오.[1] 위에 나오는 4군6진 지역은 이 시기에도 조선의 영토로서 이미 조선 태조때 6진 중 하나인 경원에 성을 쌓은 바 있다. 다만 이 때에는 본격적으로 영토로 편입한 것은 아니라서 세종 시기까지 6진 지역에는 경원 하나만 있었다.[2] 4군 6진 설치[3] 4군의 경우 1416년 여연군을 설치했다가 1432년 여진의 이만주가 내습하자 최윤덕을 파견하여 토벌하고 이후 1433년 자성군을 설치, 1443년 우예군을 설치했다. 1455년 관리의 어려움으로 인해 4군이 철폐되었다가 1683년 진이 설치되었다. 6진의 경우 1398년 경원부를 설치, 1410년 여진의 내습으로 후퇴했다가 1433년에 김종서에 의해 정복되어 1440년까지 확장하고 종성군과 온성군을 설치했다. 1441년 도호부로 격상, 1442년 진이 설치된다.[4] 음력으로는 1392년 7월 17일, 율리우스력으로는 8월 5일.[5] 한일병합조약 무효에 따른 명목상 존속 기간 : 1910년 8월 29일~1919년 4월 11일(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의한 대한제국 해산)[6] 건국 초기(1392년 8월 17일~1393년 3월 27일)에는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했다.[7] 이전에는 정권교체 전과 다름없이 국호는 ‘고려’였지만 이때부터 진짜 ‘조선’으로 국호가 변경된 것이다.[8] 간도 및 연해주 일대의 경우 고종대 대한제국-청 국경 분쟁과 대한제국-러 국경 분쟁이 존재한다. 범위가 불확실하고 실질적으로 조선의 행정력이 확고하게 미쳤다고 볼 수 없기에 일반적으로 강역에 합산되지 않는다. 대마도의 경우 1420년 이후 '대마주'로서 속주와 교류 거점의 성격을 지녔다.[9] 현 개성시. 조선 태조와 정종, 태종 때 수도였다.[10] 한양, 서울이라고도 불렸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 일대로, 일반 백성들의 경우 사대문안과 성저십리를 합쳐 그냥 '서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세기 제작된 '해좌전도'에도 '경(京, 서울)'으로 표기되었다.[임진왜란] 임진왜란 당시 임시수도.[임진왜란] [정묘호란] 정묘호란 당시 임시수도.[14]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으로 러시아 제국이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게 됨.[15] 4군 6진 개척이 이뤄진 초기까지만 한반도 북부에서 소수민족으로 존재했으며 이후 한반도에 거주하던 여진족들은 사실상 한민족에 동화되었다. 사실 고조선 때부터 한민족 국가의 피지배층으로 계속 존재해 온 민족이다. 숙신, 말갈, 여진, 만주족으로 시대에 따라 이름이 바뀌었다.[16] 갑오개혁을 통해 기본권과 왕권의 제한 개념이 도입되었고 법이 왕 위에 존재하진 않으나 왕이 법을 마음대로 위반할 수 없는 전근대적 입헌군주제가 확립되었다.[17] 1. 의정부서사제 (1392년~1414년)
→2. 육조직계제 (1414년~1435년)
→3. 의정부서사제 (1435년~1455년)
→4. 육조직계제 (1455년~1515년)
→5. 의정부서사제 (1515년~1592년)
→6. 비변사 설치 (1555년~1864년)
→7. 의정부 기능 부활 (1864년~1894년)
→8. 내각제 (1894년~1896년)
→9. 의정부 명칭 환원 (1896년~1907년)
→10. 내각제 (1907년~1910년)[18] 건국군주[19] 신문고 설치, 호패법 실시[20] 집현전 개편, 훈민정음 창제, 측우기ㆍ해시계 등의 과학 기구 제작.[21] 사림파 등용, 경국대전 반포[22] 이이ㆍ이황 등의 인재 등용, 유학 장려, 임진왜란 발발.[23] 정묘호란, 병자호란 발발, 대동법 개정[24] 탕평책 실시, 균역법 시행, 신문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편찬[25] 실학 발전, 규장각 설치, 중흥기의 절정이자 끝[26] 세도정치 시작, 신유박해, 홍경래의 난 발발.[27] 칭제건원, 갑오개혁 단행,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28] 대한제국 이전 기준을 따르면 1897년까지다.[29] 망국의 군주[30] 기본적으로 유교 이외의 종교의 교세 확장은 조선왕조 내내 일관적으로 억제되었다. 불교는 사찰을 도시에서 산으로 쫓아내고 권력에서 멀어지는 선에서 인정되었으며 무교(샤머니즘) 역시 천시(멸시)되었다. 18세기 말에는 가톨릭이 유입되었으나 유교와 배치되는 교리를 명분으로 심하게 박해당했고 19세기 말 개화기부터는 결국 종교활동의 자유를 인정해 숭유억불과 천주교 박해도 종료되고 개신교(프로테스탄트)도 유입되었다. 같은 유교라 하더라도 조선의 중심 사상인 성리학이 아닌 양명학 등의 사조는 비판을 받았다. 단 유교를 '종교'로 봐야 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종교 항목을 참조.[31] 고종 연간에 중국과의 사대 관계가 청산되면서 갑오개혁을 진행했고, 기존의 중국(명, 청) 연호를 버리고 1392년을 개국기원으로 잡는 연호를 도입하여 개국 503년부터 시작한다.[32] 세종 때의 조선통보는 일반 해서체이고 인조 때의 조선통보는 예서체 종류인 팔분서체로 새겨져 있다.[33]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의 영향으로 1894년부터 상평통보 주조가 중단되고 신식 압인주화를 발행하기 시작하지만 지방 각지에서 상평통보는 계속 유통되었다.[34] 당백전과 당오전도 액면과 크기만 다르지 뒷면은 똑같이 상평통보이다.[35] 조선 시대 함경북도의 녹둔도. (이순신 장군의 최전방 군 복무시절 여진족과의 육지전인 녹둔도 전투로 싸웠던 곳이기도 하다.)녹둔도가 퇴적 작용으로 강이 육지가 되어 러시아 연해주와 연결되어 버려서 뺏겼다. 뒤늦게 안 조선은 조선 시대부터 북한 때까지 러시아~소련 때까지 영유권을 주장했고 중국도 조선의 편을 들어주었으나 반환받지 못했다. 북한이 1990년 국경조약으로 녹둔도는 러시아, 즉 당시의 소련의 땅으로 인정했다. 반면 조선 땅이 퇴적작용으로 중국 영토와 연결된 조선 영토는 중국이 여전히 북한의 영토로 인정한다.[36] 압록강, 두만강 인근 일부 도서. 조중변계조약 이후 조선과 청나라 사이 불분명했던 국경선이 명확해졌다. 압록강 및 두만강에 위치한 하중도 및 사주 중 264개는 북한의 영토가, 187개는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37]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으로 나타낸 표기[38]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이다.[39] 중세 한국어: 됴ᇢ〯션〮, 됴ᇢ〯션〯 / 근대 한국어: 죠션, 조션, 됴션[40] 여기서는 부원세력들을 지칭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부원세력과 권문세족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양쪽 다 고려를 망친 주범임에는 틀림없다.[41] 고려말의 불교 세력은 부정부패했던 것이 맞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 불교를 생각하면 안된다. 크게 재산을 탐하지 않는 불교의 모습은 조선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고려시대의 사찰들은 전국시대 이전의 일본의 불교처럼 대농장을 지닌 거대한 세력이었다. 즉 종교개혁 이전의 천주교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42] 단 이 기간은 대한제국의 13년을 합친 기간으로 대한제국을 조선의 연장선으로 보지 않는다면 약 505년이다.[43] 단 유교 자체는 백제나 고구려에서도 따로 발전하긴 했다. 신라와 달리 유용하게 써먹지 못해서 삼국시대 말기에 국가의 단결에 도움이 안되었을 뿐이다.[44] 불교는 국민의 의식을 통일시키는 것까지만 도움이 되었고, 중앙집권을 하는데 큰 도움은 안되었다. 왕즉불사상이나 왕토사상은 귀족들까지 제어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45] 참고로 군현제를 완성한 것은 조선이다. 부정부패와 그로인한 민생문제와 별개로 고려 말까지 중앙집권화는 사실상 실패했고, 모든 문제를 타파하고 중앙집권제의 확립과 민생문제를 해결하려면 고려의 지배층이 갈려야만 했다. 고려 말, 왕조의 존치문제는 단순하게 역성혁명을 할 것이냐는 문제가 아니라, 기존 지배층을 갈아버리고 체제와 제도를 바꿀것이냐 말것인지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였다.[46] 또한 역사도 모르고 조선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사농공상의 질서를 세워서 상공업을 무시한 조선을 그냥 비하하지만 고려가 망한 이유 중 하나로 송나라부터 원나라까지 이어져온 국제무역체제가 무너지는 바람에 대외무역에 의존하던 고려경제가 붕괴했기 때문이다. 조선이 농업을 최고로 친 것은 농업 = 인구부양력 = 자력갱생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대동사회의 핵심은 인구부양력 증강에 있다는 관점 때문이고, 상공업을 낮게 본 것은 상공업에 종사하는 인구만큼 농업인구가 빠진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학자는 너무 근시안적으로 봐서 농업생산 증가 -> 인구부양력 증가 -> 인구증가 -> 인구부양력 감소로 대동사회 실현 불가라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다만 명나라가 기존 국제무역체제를 계승하지 않고 조공무역체제에 만족했기 때문에 어차피 조선은 유럽이 오거나 자신들이 수출로를 따로 개척하기 전까지 무역을 활성화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47] 고조선의 고는 '옛 고(古)'로 근세 조선과 고대 조선을 구별하기 위하여, 고대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고, 본래 고조선도 '조선'이 국호였다. 단 고려시대 이전에도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을 구분하기 위하여, 단군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부르고 위만조선을 조선이라고 불렀다. 근세부터 동양사에서 나중에 세워진 동명의 왕국에는 후고구려나 후백제처럼 후(後)를 붙이는 기본이나 고조선의 경우는 오래전부터 이미 써온 바가 있기 때문에 후(後)가 아닌 고(古)를 붙인 것이 관습처럼 내려와 현재까지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48] 역사에 몰지각한 자들은 사대주의에 빠진 신진사대부가 명나라에게 국호를 하사받은 것이라 하는데, 조선이 명목상으로 하사받은 시늉을 한 것이 맞으나, 조선이 명나라에 제시한 두 이름은 조선과 화령으로 화령은 몽골어로 카라코룸이었다. 이 카라코륨은 원나라의 두번째 수도 이름이었고, 그 도시는 몽골이 완전히 몰락하기 전까지 수도였기에 조선이 국가명의 후보를 제시할 때, 당시 명나라의 적이었던 몽골 수도도 카라코룸이었다. 즉 현대식으로 말하면 가불기를 쓴 것[49] 대한제국은 완칭일 뿐이지 본래 국호는 한(韓)이라는 외자이다. 대(大)는 전근대까지 자국을 의례적으로 붙이던 접두사였고, 제(帝)는 황제가 통치한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고 국(國)은 아랍어의 스탄(ستان/ stân)처럼 나라라는 의미로 붙인 접미사이다. 유교에서 황제국의 국명은 반드시 외자여야한다는 법칙이 있었고, 그에 맞춰서 지은 국명이다. 조선을 마지막으로 유교세계가 붕괴했으므로 유교식 명명법이 잊혀졌고, 대한제국 자체를 국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도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고 말했을 정도로 나라이름이 그냥 한(韓)이었다는 사실은 잊혀졌다. 그래서 해방될 때, 국호도 '한(韓) 공화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되었다.[50] 다만 거기에 더해 신라 경순왕으로부터 선양받아 신라를 무혈로 흡수하고 후백제를 정복하여 후삼국 통일을 달성했다는 것은 조선과 다르다. 고려가 역성혁명+정복활동의 병행으로 건국되었다면 조선은 역성혁명 그 자체로 건국된 국가인 것.[51] 성종(고려)이 꿈꿨던 유교 국가는 조선의 건국으로 실현되었다.[52] 예를 들어 환관 = 내시가 된 것도 고려 말 중원의 영향을 크게 받은 조선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원래 고려시대의 내시는 하급 문관으로서 고자가 아닌 일반인이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고자는 그보다 더 천한 신분으로서 환관이라고만 하는 서로 다른 개념이었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가 내시부의 관원을 전부 환관으로 채워넣고 그전까지 내시가 하던 일도 전부 환관들에게 맡김에 따라 의미가 통째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개에게 그곳을 물리는 등의 사고로 고자가 된 사람만 환관으로 삼았지 일부러 고자로 만들지도 않았거니와 그렇게 하는 것도 엄격히 금지했으나 원 간섭기 이후 환관 수요가 급증하여 음성적으로 스스로 고자가 되는 일이 잦아져 조선 시대부터는 아예 그게 정착이 되어버렸으며, 그외에 적서의 분별, 정처와 첩의 개념이 확고히 정립된 것도 고려 말의 변화였다.[53] 일각에서 조선의 국장(國章, 나라문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우초에 사용되었을 뿐 국장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54]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응준과는 동명이인이다.[55] 사실 중국이나 페르시아 같은 전제군주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대신들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즉, 과두정적 요소가 존재한다.[56] 갑신정변 때 정강 14조와 관민공동회 때 헌의 6조에서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적이 있긴 하다.[57] 최종석(2017), "13~15세기 천하질서하에서 고려와 조선의 국가 정체성", 《역사비평》 121; (2021),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歷史學報》 250, p.26; 김윤정(2020), "13~14세기 고려 지식인의 시대 인식과 정체성", 《역사와 현실》 115.[58] 이들은 의정부(조선의 최고의결기관)에 속한 관원이다.[59]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는데 전근대의 중국은 인구가 1억이 넘었는데도 세금을 피하려고 호구 조사를 기피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기에 장부상으로 파악한 인구가 6천만이였다.[60] 나중에 일본 제국이 조선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들었을때 조선의 인구 조사를 하면서 일본 정부는 조선이 인구 밀도가 희박하고 미개간지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조선은 이용 가능한 토지 대비 인구 밀도가 상당히 높았고 미개간지는 많지 않았으며 인구 증가율도 높았다. 인류는 전근대에 합계출산율을 넘기는 수준으로 자식을 가졌으니, 당연히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인구가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판단하기로는 한반도를 식량, 원료의 공급기지로 삼을 만큼 일본 열도보다는 오히려 많다고 할 지경이었다. 조선의 식자층 사이에서 오히려 땅이 척박하다는 인식이 흔하지, 인구 부양력이 높은 쌀 같은 작물은 유럽의 선진적인 지역에서도 생산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동남아조차 인구밀도가 조선의 10분의 1 정도였다. 인디카 문서에서 보듯 조선의 쌀은 생산성이 동남아의 그것에 비해 매우 높았다.[61] 한국식 아파트는 온돌, 안마당과 대청마루를 변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62] 심지어 어떤 풍습은 성리학의 이념에서 벗어난다는 인식이 있어 단속을 당하기도 했으나 없어지지 않기도 했다. 장례식 때 좀 시끌거리는 모습은 엄숙주의적인 유교적 장례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으로, 고구려의 장례에 대해 중국인들이 남긴 기록에서 오히려 비슷한 부분이 있다. 실제로 조선 전역에서 장례식 때 놀이를 했다는 주장도 있다. #[63] 그래서 발우공양 등 불교 문화나, 조선 시대 이전 사료를 보면 오히려 현대 일본과 비슷한 부분도 많이 나온다.[64] 메이지 유신 직후 폐불훼석(일본어: 廃仏毀釈) 운동이 일어나서 수 많은 사찰과 불경, 불상 등이 파괴되고 불교 세력이 크게 위축되는 결과가 잠시 발생하였었다.[65] 이는 조선과 대한민국 간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군주정 국가에서 공화제로 전환된 모든 국가가 해당되는 사항이다.[66] 서울의 점유와 수도로서의 계승은 역사적 정통성 차원에서 대한민국(남한)이 북한에 비해 가지는 우위이다. 외규장각, 어재연 帥자 장군기 등 근현대사의 수난으로 약탈당했던 문화재들이 반환될 때(영구임대, 즉 '사실상의' 반환 포함)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으로 반환되는 것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67] 해외 화폐에는 고대 혹은 근대화 이후의 인물을 도안하는 경우도 많지만 한국은 유독 특정 시기에 몰린 편이다.[68] 특히 일본에서 일본어로 부를 때 한반도를 한반도로 부르지 않고 조선반도(朝鮮半島)로 통칭해서 부른다.[69] 그냥 조선이라는 단어만 해도 위키피디아 중국어판에서는 북한을 가리킬 때도 만만찮기 때문에 동음이의어 문서지만 일본어판에서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를 다루는 문서이고 동음이의어들은 뒤에 (모호함 회피)를 붙인 문서에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韓은 남한 관련에 한해서 쓰일 때가 많고 朝鮮은 전체에 관련해서 일컬을 때 쓰인다고 볼 수 있다.[70] 이 사건에 대해서는 동인에 비해 세력이 열세였던 서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 출처[71]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세도 가문들과 비변사를 축출했고, 의정부를 부활시켰다.[72] 이는 불평등 조약으로, 조선을 일본과 같은 자주국으로 인정한다 라는 내용도 있었으나(사실상 청의 일방적 종주 주장의 배제가 목적이다.), 일본 중심의 조약인 치외 법권과 화폐 통용, 해안을 자유롭게 측량하는 권한 등 불평등한 내용이 매우 많았고 사실상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조약이었다.[73] 이미 효력이 없는 광무제의 옥새를 사용하여 조약을 체결했다.
→2. 육조직계제 (1414년~1435년)
→3. 의정부서사제 (1435년~1455년)
→4. 육조직계제 (1455년~1515년)
→5. 의정부서사제 (1515년~1592년)
→6. 비변사 설치 (1555년~1864년)
→7. 의정부 기능 부활 (1864년~1894년)
→8. 내각제 (1894년~1896년)
→9. 의정부 명칭 환원 (1896년~1907년)
→10. 내각제 (1907년~1910년)[18] 건국군주[19] 신문고 설치, 호패법 실시[20] 집현전 개편, 훈민정음 창제, 측우기ㆍ해시계 등의 과학 기구 제작.[21] 사림파 등용, 경국대전 반포[22] 이이ㆍ이황 등의 인재 등용, 유학 장려, 임진왜란 발발.[23] 정묘호란, 병자호란 발발, 대동법 개정[24] 탕평책 실시, 균역법 시행, 신문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편찬[25] 실학 발전, 규장각 설치, 중흥기의 절정이자 끝[26] 세도정치 시작, 신유박해, 홍경래의 난 발발.[27] 칭제건원, 갑오개혁 단행,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28] 대한제국 이전 기준을 따르면 1897년까지다.[29] 망국의 군주[30] 기본적으로 유교 이외의 종교의 교세 확장은 조선왕조 내내 일관적으로 억제되었다. 불교는 사찰을 도시에서 산으로 쫓아내고 권력에서 멀어지는 선에서 인정되었으며 무교(샤머니즘) 역시 천시(멸시)되었다. 18세기 말에는 가톨릭이 유입되었으나 유교와 배치되는 교리를 명분으로 심하게 박해당했고 19세기 말 개화기부터는 결국 종교활동의 자유를 인정해 숭유억불과 천주교 박해도 종료되고 개신교(프로테스탄트)도 유입되었다. 같은 유교라 하더라도 조선의 중심 사상인 성리학이 아닌 양명학 등의 사조는 비판을 받았다. 단 유교를 '종교'로 봐야 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종교 항목을 참조.[31] 고종 연간에 중국과의 사대 관계가 청산되면서 갑오개혁을 진행했고, 기존의 중국(명, 청) 연호를 버리고 1392년을 개국기원으로 잡는 연호를 도입하여 개국 503년부터 시작한다.[32] 세종 때의 조선통보는 일반 해서체이고 인조 때의 조선통보는 예서체 종류인 팔분서체로 새겨져 있다.[33]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의 영향으로 1894년부터 상평통보 주조가 중단되고 신식 압인주화를 발행하기 시작하지만 지방 각지에서 상평통보는 계속 유통되었다.[34] 당백전과 당오전도 액면과 크기만 다르지 뒷면은 똑같이 상평통보이다.[35] 조선 시대 함경북도의 녹둔도. (이순신 장군의 최전방 군 복무시절 여진족과의 육지전인 녹둔도 전투로 싸웠던 곳이기도 하다.)녹둔도가 퇴적 작용으로 강이 육지가 되어 러시아 연해주와 연결되어 버려서 뺏겼다. 뒤늦게 안 조선은 조선 시대부터 북한 때까지 러시아~소련 때까지 영유권을 주장했고 중국도 조선의 편을 들어주었으나 반환받지 못했다. 북한이 1990년 국경조약으로 녹둔도는 러시아, 즉 당시의 소련의 땅으로 인정했다. 반면 조선 땅이 퇴적작용으로 중국 영토와 연결된 조선 영토는 중국이 여전히 북한의 영토로 인정한다.[36] 압록강, 두만강 인근 일부 도서. 조중변계조약 이후 조선과 청나라 사이 불분명했던 국경선이 명확해졌다. 압록강 및 두만강에 위치한 하중도 및 사주 중 264개는 북한의 영토가, 187개는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37]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으로 나타낸 표기[38]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이다.[39] 중세 한국어: 됴ᇢ〯션〮, 됴ᇢ〯션〯 / 근대 한국어: 죠션, 조션, 됴션[40] 여기서는 부원세력들을 지칭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부원세력과 권문세족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양쪽 다 고려를 망친 주범임에는 틀림없다.[41] 고려말의 불교 세력은 부정부패했던 것이 맞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 불교를 생각하면 안된다. 크게 재산을 탐하지 않는 불교의 모습은 조선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고려시대의 사찰들은 전국시대 이전의 일본의 불교처럼 대농장을 지닌 거대한 세력이었다. 즉 종교개혁 이전의 천주교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42] 단 이 기간은 대한제국의 13년을 합친 기간으로 대한제국을 조선의 연장선으로 보지 않는다면 약 505년이다.[43] 단 유교 자체는 백제나 고구려에서도 따로 발전하긴 했다. 신라와 달리 유용하게 써먹지 못해서 삼국시대 말기에 국가의 단결에 도움이 안되었을 뿐이다.[44] 불교는 국민의 의식을 통일시키는 것까지만 도움이 되었고, 중앙집권을 하는데 큰 도움은 안되었다. 왕즉불사상이나 왕토사상은 귀족들까지 제어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45] 참고로 군현제를 완성한 것은 조선이다. 부정부패와 그로인한 민생문제와 별개로 고려 말까지 중앙집권화는 사실상 실패했고, 모든 문제를 타파하고 중앙집권제의 확립과 민생문제를 해결하려면 고려의 지배층이 갈려야만 했다. 고려 말, 왕조의 존치문제는 단순하게 역성혁명을 할 것이냐는 문제가 아니라, 기존 지배층을 갈아버리고 체제와 제도를 바꿀것이냐 말것인지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였다.[46] 또한 역사도 모르고 조선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사농공상의 질서를 세워서 상공업을 무시한 조선을 그냥 비하하지만 고려가 망한 이유 중 하나로 송나라부터 원나라까지 이어져온 국제무역체제가 무너지는 바람에 대외무역에 의존하던 고려경제가 붕괴했기 때문이다. 조선이 농업을 최고로 친 것은 농업 = 인구부양력 = 자력갱생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대동사회의 핵심은 인구부양력 증강에 있다는 관점 때문이고, 상공업을 낮게 본 것은 상공업에 종사하는 인구만큼 농업인구가 빠진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학자는 너무 근시안적으로 봐서 농업생산 증가 -> 인구부양력 증가 -> 인구증가 -> 인구부양력 감소로 대동사회 실현 불가라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다만 명나라가 기존 국제무역체제를 계승하지 않고 조공무역체제에 만족했기 때문에 어차피 조선은 유럽이 오거나 자신들이 수출로를 따로 개척하기 전까지 무역을 활성화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47] 고조선의 고는 '옛 고(古)'로 근세 조선과 고대 조선을 구별하기 위하여, 고대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고, 본래 고조선도 '조선'이 국호였다. 단 고려시대 이전에도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을 구분하기 위하여, 단군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부르고 위만조선을 조선이라고 불렀다. 근세부터 동양사에서 나중에 세워진 동명의 왕국에는 후고구려나 후백제처럼 후(後)를 붙이는 기본이나 고조선의 경우는 오래전부터 이미 써온 바가 있기 때문에 후(後)가 아닌 고(古)를 붙인 것이 관습처럼 내려와 현재까지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48] 역사에 몰지각한 자들은 사대주의에 빠진 신진사대부가 명나라에게 국호를 하사받은 것이라 하는데, 조선이 명목상으로 하사받은 시늉을 한 것이 맞으나, 조선이 명나라에 제시한 두 이름은 조선과 화령으로 화령은 몽골어로 카라코룸이었다. 이 카라코륨은 원나라의 두번째 수도 이름이었고, 그 도시는 몽골이 완전히 몰락하기 전까지 수도였기에 조선이 국가명의 후보를 제시할 때, 당시 명나라의 적이었던 몽골 수도도 카라코룸이었다. 즉 현대식으로 말하면 가불기를 쓴 것[49] 대한제국은 완칭일 뿐이지 본래 국호는 한(韓)이라는 외자이다. 대(大)는 전근대까지 자국을 의례적으로 붙이던 접두사였고, 제(帝)는 황제가 통치한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고 국(國)은 아랍어의 스탄(ستان/ stân)처럼 나라라는 의미로 붙인 접미사이다. 유교에서 황제국의 국명은 반드시 외자여야한다는 법칙이 있었고, 그에 맞춰서 지은 국명이다. 조선을 마지막으로 유교세계가 붕괴했으므로 유교식 명명법이 잊혀졌고, 대한제국 자체를 국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도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고 말했을 정도로 나라이름이 그냥 한(韓)이었다는 사실은 잊혀졌다. 그래서 해방될 때, 국호도 '한(韓) 공화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되었다.[50] 다만 거기에 더해 신라 경순왕으로부터 선양받아 신라를 무혈로 흡수하고 후백제를 정복하여 후삼국 통일을 달성했다는 것은 조선과 다르다. 고려가 역성혁명+정복활동의 병행으로 건국되었다면 조선은 역성혁명 그 자체로 건국된 국가인 것.[51] 성종(고려)이 꿈꿨던 유교 국가는 조선의 건국으로 실현되었다.[52] 예를 들어 환관 = 내시가 된 것도 고려 말 중원의 영향을 크게 받은 조선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원래 고려시대의 내시는 하급 문관으로서 고자가 아닌 일반인이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고자는 그보다 더 천한 신분으로서 환관이라고만 하는 서로 다른 개념이었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가 내시부의 관원을 전부 환관으로 채워넣고 그전까지 내시가 하던 일도 전부 환관들에게 맡김에 따라 의미가 통째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개에게 그곳을 물리는 등의 사고로 고자가 된 사람만 환관으로 삼았지 일부러 고자로 만들지도 않았거니와 그렇게 하는 것도 엄격히 금지했으나 원 간섭기 이후 환관 수요가 급증하여 음성적으로 스스로 고자가 되는 일이 잦아져 조선 시대부터는 아예 그게 정착이 되어버렸으며, 그외에 적서의 분별, 정처와 첩의 개념이 확고히 정립된 것도 고려 말의 변화였다.[53] 일각에서 조선의 국장(國章, 나라문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우초에 사용되었을 뿐 국장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54]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응준과는 동명이인이다.[55] 사실 중국이나 페르시아 같은 전제군주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대신들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즉, 과두정적 요소가 존재한다.[56] 갑신정변 때 정강 14조와 관민공동회 때 헌의 6조에서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적이 있긴 하다.[57] 최종석(2017), "13~15세기 천하질서하에서 고려와 조선의 국가 정체성", 《역사비평》 121; (2021),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歷史學報》 250, p.26; 김윤정(2020), "13~14세기 고려 지식인의 시대 인식과 정체성", 《역사와 현실》 115.[58] 이들은 의정부(조선의 최고의결기관)에 속한 관원이다.[59]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는데 전근대의 중국은 인구가 1억이 넘었는데도 세금을 피하려고 호구 조사를 기피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기에 장부상으로 파악한 인구가 6천만이였다.[60] 나중에 일본 제국이 조선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들었을때 조선의 인구 조사를 하면서 일본 정부는 조선이 인구 밀도가 희박하고 미개간지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조선은 이용 가능한 토지 대비 인구 밀도가 상당히 높았고 미개간지는 많지 않았으며 인구 증가율도 높았다. 인류는 전근대에 합계출산율을 넘기는 수준으로 자식을 가졌으니, 당연히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인구가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판단하기로는 한반도를 식량, 원료의 공급기지로 삼을 만큼 일본 열도보다는 오히려 많다고 할 지경이었다. 조선의 식자층 사이에서 오히려 땅이 척박하다는 인식이 흔하지, 인구 부양력이 높은 쌀 같은 작물은 유럽의 선진적인 지역에서도 생산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동남아조차 인구밀도가 조선의 10분의 1 정도였다. 인디카 문서에서 보듯 조선의 쌀은 생산성이 동남아의 그것에 비해 매우 높았다.[61] 한국식 아파트는 온돌, 안마당과 대청마루를 변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62] 심지어 어떤 풍습은 성리학의 이념에서 벗어난다는 인식이 있어 단속을 당하기도 했으나 없어지지 않기도 했다. 장례식 때 좀 시끌거리는 모습은 엄숙주의적인 유교적 장례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으로, 고구려의 장례에 대해 중국인들이 남긴 기록에서 오히려 비슷한 부분이 있다. 실제로 조선 전역에서 장례식 때 놀이를 했다는 주장도 있다. #[63] 그래서 발우공양 등 불교 문화나, 조선 시대 이전 사료를 보면 오히려 현대 일본과 비슷한 부분도 많이 나온다.[64] 메이지 유신 직후 폐불훼석(일본어: 廃仏毀釈) 운동이 일어나서 수 많은 사찰과 불경, 불상 등이 파괴되고 불교 세력이 크게 위축되는 결과가 잠시 발생하였었다.[65] 이는 조선과 대한민국 간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군주정 국가에서 공화제로 전환된 모든 국가가 해당되는 사항이다.[66] 서울의 점유와 수도로서의 계승은 역사적 정통성 차원에서 대한민국(남한)이 북한에 비해 가지는 우위이다. 외규장각, 어재연 帥자 장군기 등 근현대사의 수난으로 약탈당했던 문화재들이 반환될 때(영구임대, 즉 '사실상의' 반환 포함)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으로 반환되는 것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67] 해외 화폐에는 고대 혹은 근대화 이후의 인물을 도안하는 경우도 많지만 한국은 유독 특정 시기에 몰린 편이다.[68] 특히 일본에서 일본어로 부를 때 한반도를 한반도로 부르지 않고 조선반도(朝鮮半島)로 통칭해서 부른다.[69] 그냥 조선이라는 단어만 해도 위키피디아 중국어판에서는 북한을 가리킬 때도 만만찮기 때문에 동음이의어 문서지만 일본어판에서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를 다루는 문서이고 동음이의어들은 뒤에 (모호함 회피)를 붙인 문서에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韓은 남한 관련에 한해서 쓰일 때가 많고 朝鮮은 전체에 관련해서 일컬을 때 쓰인다고 볼 수 있다.[70] 이 사건에 대해서는 동인에 비해 세력이 열세였던 서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 출처[71]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세도 가문들과 비변사를 축출했고, 의정부를 부활시켰다.[72] 이는 불평등 조약으로, 조선을 일본과 같은 자주국으로 인정한다 라는 내용도 있었으나(사실상 청의 일방적 종주 주장의 배제가 목적이다.), 일본 중심의 조약인 치외 법권과 화폐 통용, 해안을 자유롭게 측량하는 권한 등 불평등한 내용이 매우 많았고 사실상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조약이었다.[73] 이미 효력이 없는 광무제의 옥새를 사용하여 조약을 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