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5 16:07:44

이이(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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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e4e3f> 성균관 문묘 배향 아국 18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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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373a3c,#ddd> ■ 진한 색: (동배향) 조선 5현
■ 진한 색: (서배향) 조선 5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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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조선 종묘 배향공신
※ 순서는 선후배 순으로, 동순위일 경우 동쪽이 서쪽보다 선배이다. ※ 조선 5현: 조선시대에 최초 종사된 5인.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역대 종묘 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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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하연
세조 권람, 한확,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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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신숙주, 정창손, 홍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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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김상헌, ■김집,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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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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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조 이종성, 민백상
정조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순조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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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 남공철, 김로, 조병구
헌종 이상황, 조인영
철종 이헌구, 익평군, 김수근
고종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순종 송근수, 이완용, 서정순
: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동배향)
: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서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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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
西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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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림파 [[틀:훈구파|{{{#000,#ddd ▲ 훈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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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 ~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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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 ~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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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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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7월
김정희
8월
장영실
9월
김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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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11월
김홍도
12월
신재효
1991년
1월
나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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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3월
한용운
4월
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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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정약용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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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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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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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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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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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박지원
4월
우장춘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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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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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고유섭
10월
이윤재
11월
안창호
12월
윤동주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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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이인문
3월
장보고
4월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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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극영
6월
원효
7월
지석영
8월
안중근
9월
박연
10월
최현배
11월
장지연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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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월
우륵
2월
황희
3월
김유정
4월
홍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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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천
6월
이상백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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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박은식
9월
박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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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11월
정도전
12월
신채호
1995년
1월
강세황
2월
조식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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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최무선
5월
이원수
6월
김병로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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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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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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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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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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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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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김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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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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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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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정인승
11월
전형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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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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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
3월
최윤덕
4월
이중환
5월
초의 (의순)
6월
한호
7월
이세보
8월
박제가
9월
박진
10월
장지영
11월
왕인
12월
송진우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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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개벽에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10개 부문별 위인의 선정자 및 차점자 명단이다.
<rowcolor=#ffffff> 사상 정치 군사 문학 미술
이황 이이 이순신 최치원 솔거
- 을파소 을지문덕 박지원 담징
<rowcolor=#ffffff> 종교 과학 산업 교육 사회개선
최제우 서경덕 문익점 최충 유길준
원효 정약용 흘간(屹干) - -
※ 응답수 100명 미만의 차점자는 공개하지 않음.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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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단군
동명성왕 온조왕
이사부 백결선생 의자왕 계백
김관창 김유신 문무왕 원효
혜초 장보고 고왕 강감찬
서희 정중부 최무선 죽림고회
김부식 지눌 의천 이종무
정몽주 문익점 최충 일연
최영 황희 맹사성 장영실
신숙주 한명회 이이 이황
신사임당 곽재우 조헌 김시민
이순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사육신 생육신 논개 권율
홍길동 임꺽정 삼학사 박문수
한석봉 김홍도 김병연 김정호
영조 정조 정약용 전봉준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이상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취소선은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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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8ad85><colcolor=#000000> 이이
李珥 | Yi I
파일:이이 표준영정.jpg
출생 1537년 1월 17일[1]
강원도 강릉오죽헌
(現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죽헌동 오죽헌)
사망 1584년 2월 27일[2] (향년 47세)
한성부(現 서울특별시)
본관 덕수 이씨 (德水 李氏)[3]
부모 아버지 이원수, 어머니 신사임당
형제자매 4남 3녀 중 3남
배우자 부인 노씨
자녀 2남 1녀
친인척 증외고조부 최만리[4]
숙헌(叔獻)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시호 문성공(文成公)
학력 성균관 (졸업)
종교 유교 (성리학)
서명
파일:이이(조선)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구도장원공2.3. 관료 시기2.4. 말년
3. 평가
3.1. 정치적 능력3.2. 십만양병설
4. 대중매체5. 여담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5000 앞.jpg
오천 원권 지폐 속 초상화

조선유학자, 관료.

조선은 물론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손꼽힌다. 장원 급제를 9번이나 하고, 이기일원론을 겨우 23세일 때 정립하였다.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이론에만 몰두하지 않고 현실 개혁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한 정치인. 우리나라 오천 원권 지폐의 모델이며, 신사임당이 오만 원권 지폐의 모델이 되며 모자(母子)가 지폐 인물이 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본인은 평생 붕당의 대립 해소에 진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5] 오랫동안 유학자의 면모만 부각되어 왔지만 정치인으로서도 영향력이 컸다. 생전에 이이의 서얼 차별 완화 등의 개혁 정책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6] 사후 조선에서 거론된 수많은 정책과 개혁론은 이이의 사상과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2. 생애

2.1. 유년기

1536년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부친 이원수와 모친 사임 신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외가인 강릉에서 자라 강을 낀 산천을 보며 심신을 수양하였다고 한다. 6살 때 모계 집안인 강릉[7]을 떠나 부계 집안으로 이사했는데 이이 본인의 고향은 강릉이지만 본가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8]라는 곳에 있었고 이이의 아호인 '율곡'도 파주 '율곡리'에서 본딴 것이다.

가문이 중요시되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고향은 '나 자신'이 아니라 '집안'이 연원을 둔 곳을 의미했는데,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율곡의 고향은 탄생지인 강릉이 아니라 친가가 위치한 파주가 된다. 다만 실질적인 본거지는 파주가 아닌 강릉인데, 이원수가 신사임당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인물이기 때문이다.[9] 강릉에는 외할아버지 신명화와 그 윗대로 이어지는 고리가 있고 집안 재산의 절대 다수가 있는 반면에 파주에는 진짜 아무 것도 없는데 유일한 장점은 근기(서울)에서 가깝다는 것뿐이다.

아버지인 이원수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하다. 이이가 남긴 기록 중 아버지에 관한 별다른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이이와 형제들은 아버지와 자주 다투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원수 때만 해도 가세가 좋지 않아 자기들보다 가세가 강했던 집안의 신사임당과 결혼했는데, 신사임당이 엄청난 인물이었던 데다가 아들까지 아버지의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인물이었으니 이원수가 소외감을 느껴서 그랬을 듯하다.[10]

1548년 13세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해 조광조의 문인인 백인걸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16세 때인 1551년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였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18세(1553년)에 관례를 마치고 상복을 벗었으나 모친을 잊지 못하였으며 봉은사에서 불서를 읽고 나서 감명하여 속세를 떠날 결심을 했다. 19세(1554년)에 친구들에게 편지로 이별하며 절에 들어갔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시점에서 불가에 회의를 느끼고 하산하여 이후 유학에 전심했다.[11]

22세(1557년)에 성주 목사 노경린(盧慶麟, 1516-68)의 딸인 곡산 노씨와 혼인했다.[12] 당대로서는 만혼이었는데 한창 결혼해야 할 나이에 어머니 삼년상을 치른 데다 삼년상 이후 불도를 익힌다고 산에 틀어박혀 있었던 탓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죽자 정신적 충격을 받고는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산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가 삭발을 했었는지는 불분명하나 의암(義庵)이라는 법명을 받기는 했다.[13][14] 그 때도 두문불출하며 온갖 불경들을 읽어내어 주변 스님들이 생불이 나타났다며 감탄해했다고 전한다. 머리가 좋은 것은 유교에서만이 아니라 불교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 부분은 훗날 그를 공격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당시 유학자들은 불교를 증오하다시피 했다. 천원권에 이황이 쓴 복건도 이황은 중이 쓰는 두건과 비슷하다고 하여 싫어했을 정도인데, 이이가 한때 불교에 심취했으며 법명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충분한 비난거리였다.[15] 이이는 성균관에서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하며 신입 벼슬아치들이 당하는 면신례도 심하게 당했는지, 그는 바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고 이를 비판했다고 한다. 다만 면신례는 본래 대상을 불문하고 혹독했는데 심지어 정몽주의 증손자도 과거에 급제하고 난 뒤 치른 면신례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숨졌다. 사대부들이 극진히 모신 정몽주 집안 사람이 이 정도였다면 당시 일반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던 이이를 어찌 대했을지는 뻔하다.

23세(1558년)에 퇴계를 만나기 위해 도산으로 갔고 이후에도 서찰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학문을 보완하게 된다. 퇴계를 만난 율곡은 자신이 불가에 들어갔던 사실을 이야기했는지 퇴계가 편지에서 이를 언급하고 있다.[16]

26세(1561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다시 3년상을 치렀다. 이후 출사 준비를 마친 이이는 29세인(1564년)에 생원시[17], 진사시[18]를 거쳐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정6품 호조정랑으로 등용되며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예조와 청요직인 이조좌랑, 사간원과 사헌부를 거쳤고 선조 재위 1년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북경에 다녀와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당시 율곡은 상소하여 하직하며 '어릴 때에 선학(禪學)에 물든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감히 논사(論思)의 책임을 맡을 수 없습니다.'고 하자 선조는 '예전부터 아무리 호걸스러운 선비라도 불씨(佛氏)에게 빠져들어 간 것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전에 선문(禪門)에 종사(從事)했다는 작은 실수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논사(論思)하는 중대한 직책을 경솔하게 체차할 수는 없다. 또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진 그 뜻이 가상하다.' 비답하였다. 이것이 이들의 첫 만남이었다.

2.2. 구도장원공

가장 유명한 일화로 과거시험에서 장원만 9번을 해서 당시에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렸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과거는 생원과 / 진사과(소과) 초시 → 생원과 / 진사과 복시 → 문과(대과) 초시 → 문과 복시 → 문과 전시의 5번을 거치게 되는데 이이의 경우는 생원과와 진사과 모두 장원으로 통과, 문과 전 시험 장원으로 통과, 거기에 특별 시험인 별시[19]에서도 장원, 진사과 초시에서도 장원을 한 번 더 해서 총 9번의 장원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사시, 외시, 행시 고등고시의 1차, 2차, 3차 시험을 모두 수석으로 합격[20]한 이상의 대업적이다. 그런데 응시자인 양반들 입장에선 9번이나 열 명 단위로 뽑히는 커트라인이 올라간 셈이다.

실제로 당시 이 부분은 정적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이미 합격해서 안 쳐도 되는 시험까지 억지로 중복 응시를 감행하는 행동이 장원이라는 타이틀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해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이가 장원을 한 시험과 시간은 다음과 같다.
  • 생원과 초시: 29세
  • 생원과 복시: 29세
  • 진사과 초시: 13세, 29세
  • 진사과 복시: 21세 (29세에도 응시했으나 장원은 못 하고 합격)
  • 대과 초시: 29세
  • 대과 복시: 29세
  • 대과 전시: 29세
  • 별시 초시: 23세

이이가 장원을 많이 했지만 시험에 떨어진 적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23세 때 이이는 「천도책」(天道策)으로 별시 초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정작 대과에서는 낙방하였다.[21]
“그런데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니,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사람의 기가 순(順)하면 천지의 기도 순하다. 그렇다면 이의 상(常)과 이의 변(變)을 어찌 한결같이 천도에 맡길 수 있겠는가? …… 성왕(成王)이 한번 잘못 생각하매 대풍(大風)이 벼를 쓰러뜨렸고, 주공(周公)이 수년을 교화하매 바다에 파도가 일지 않았으니, 그 기가 그렇도록 시킨 것도 또한 사람의 일(人事)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 아아, 일기(一氣)의 운행 변화가 흩어져 만수(萬殊)[22]가 되나, 나누어서 이를 말하면 천지만상이 각각 일기(一氣)이지만, 합하여 이를 말하면 천지만상이 같은 일기(一氣)이다. …… 이로써 본다면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육성되는 것이 어찌 임금 한 사람의 수덕(修德)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
율곡 이이의 과거시험 답안지 천도책(天道策)의 마지막 부분 출처

2.3. 관료 시기

선조대에 시작된 붕당 간의 싸움에서 그는 중립을 지켰다. 서로를 그르다고 주장하며 분열한 사림에게 양쪽 다 옳고 그르다고 하자 사림들이 양시양비론이 어디 있냐고 반발하니, 이에 전국시대 군주들의 전쟁은 다 그른 것이고 주 무왕주왕을 정벌한 것이나 백이숙제가 말린 것은 다 옳은 일이라고 반박한 것이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초년의 이이는 붕당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붕당이란 것이 풍문ㆍ명목으로 존재하여도 그들은 모두 군자당이므로 결국 공존하고 화합하지 계파가 나눠 대립한다는 생각부터를 않으려 했다. 붕당의 문제를 인정하여 훈구에게 반격할 빌미를 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언에선 붕당의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특히 이이를 한 축으로 지목하기까지 한 이준경을 '말이 사악하다'라고 비난했고, 죽은 이준경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정도였다. 이 문제는 류성룡 등의 동인이 반대해서 무산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유언으로 말미암은 이 이슈 또한 동서 분당의 무수한 전개 과정 중 하나로 작용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림이 자기들끼리 분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훈구의 정치적 수명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고, 실제 역사에서도 붕당의 문제와 대립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이 현실을 자각한 이이도 자신의 생각이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양파의 화합을 위해 움직이게 된다. 이때 이이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건이 바로 1575년 (선조 8년)에 있었던 을해당론(乙亥黨論).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며 슬슬 붕당이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자 김효원과 심의겸을 모두 지방관으로 좌천시켜 버린 것.

당대 집권층인 동인은 이이를 맹렬히 규탄했는데,[23] 이는 나중에 이이의 제자들이 성장하여 서인의 주된 세력을 형성하여 본래 중립적인 위치를 견지하던 이이가 서인의 종주로 세워지는 모순적인 상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심의겸의 파벌을 서인이라 부르다가 어느새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을 서인이라 부른다고 나온다. 당시 심의겸은 자신의 학파를 형성하기는커녕 이이에게 보호를 받는 처지였기 때문에 붕당을 주도하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이황, 조식 등 높은 학문적 성과를 이룬 거물급 유학자들의 제자인 신진 사림 동인에게는, 독학으로 학문적 일가를 이룬 이이가 배척의 대상이었던 반면 훈구들에게 우호적이던 기존의 권세가들에게 맞설 만한 거물이 없었던 서인들은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구도장원공의 문제 등 이이의 성격과 행동은 당대 조정의 비난 대상이었다. 29세로 젊은 나이에 한참 명성을 날리던 이이가 이미 합격을 해놓고도 계속 장원 자리를 노리며 불필요한 과거시험에 중복응시까지 감행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이의 성격은 "교만하고 일처리를 멋대로 한다"라며 삼사의 탄핵 사유가 되었다. 40~50살까지도 과거급제 33인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도 있는 마당에 본인은 갑과 장원을 하겠다고 중복응시.... 이뿐만 아니라 실록을 보면 이이는 어전에서 이황이나 서경덕의 학문을 비판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서 그 제자들이 이이를 역공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박시백의 의견이 흥미로운데, 정리하면 이이는 이황이나 조식, 서경덕 등의 시대가 끝나면서 막 그들의 학파가 정립이 된 상황에서 그들의 영향과는 별개의 학술적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말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 선배 학자들의 계보를 잇는 사람들과는 필연적으로 사이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선조 초년에 그는 관직 생활을 하며 <경연일기>를 남겼는데, 이 기록을 살펴보면 그에게 있어서 이황, 이언적[24], 권벌, 이준경, 기대승은 다 비난 대상이었고, 특히 기대승이나 이준경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준경은 자신의 스승인 조광조가 위훈 삭제를 하려다 벌어진 기묘사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훈 삭제 문제에 대해 매우 강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러자 이이는 이준경의 면전에서 "대신의 말이 애매모호하다."고 말하며 대놓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건 이준경과 이이의 환경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기는 그렇다. 그리고 이준경이 죽으면서 붕당을 경계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자, 그 말이 악하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자신을 추천하고 동네방네 자랑하던 백인걸 역시 예외없이 비판했다. 백인걸에 대한 인물 평을 요구받은 이이는 한마디로 "기고학황氣高學荒" 이라고 답변했다. 쉽게 말해서 "기가 높고 글이 거칠다"는 것이다.

가령 이황의 제자였던 김성일과 동석한 어전에서 이이는 "이황의 학문은 좋은데, 자풍이나 정신은 옛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고 발언했다. 이를 들은 김성일은 발끈하여 "이황의 학문은 하늘의 해와 같은데 어찌 언론이나 세간의 평판으로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반박하였고, 이황의 또 다른 제자인 류성룡은 이이에 대해 "다 좋은데 뭐든지 따지고 고치려 드는 성품이 흠이다"고 말하기도 했다.[25]

또한 서경덕이 죽고 나서는 우의정 추증에 찬성했을지라도 그의 학문에 대해서는 "도에 너무 치우쳤다"라고 비판했는데, 조선시대에 멀쩡한 유학자를 도교불교에 엮는 것은 대놓고 조롱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이이도 한 때 불교 심취한적이 있다. 이렇게 서경덕을 비판한 것은 제자이자 허난설헌허균의 부친이기도 한 허엽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26]

특히 이이와 허엽은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는 사이였는데,[27] 향약의 시행을 두고 허엽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허엽은 이이를 가리켜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비판하며 그를 혐오하였으며 이이는 허엽을 평하며 "이론에 모순된 점이 많고 문의에 어둡다"고 비판했다. 또한 허엽의 아들인 허봉은 이이를 탄핵한 '계미삼찬'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허봉은 이이를 탄핵했다가 선조의 분노를 사서 파직당했고 귀양에서 풀려난 직후 병사한다. 결과적으로 붕당 정치의 최종 승리자는 이이와 그의 문파였다.

이런 여러 이야기들을 볼 때 이이가 주변인들의 어그로를 잘 끄는 성격이기는 했던 모양[28]

일단 통치(내정) 면에서 보면 노비 인구 증가, 토지 잠식, 군역과 요역의 문란 같은 중종 대에 제기되고 이어진 민생문제에 대한 개혁담론들이 선조 대에 활발히 논의되었다.[29] 물론 선조 시기의 긍정적 면모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선조 시기의 긍정적 면모를 말한다면 조선은 건국 이후로 체제의 모순이 쌓여 와서 다양한 병폐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는데 선조 시기에 이에 대한 공론화가 점차 시작되었다. 특히 공납제도와 관련해서는 대동법프로토타입인 수미법(收米法)을 율곡 이이 같은 신하들이 제시하자 선조 또한 농업국의 한계에서는 적절한 정책이라며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본인의 한심한 추진력과 무원칙하고[30] 보신적인 행태로[31] 제대로 된 결실을 맺지도 못했으며[32][33] 문제는 논의가 점차 진행되면 될수록 당대에는 사주인(私主人)들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34][35][36] 등의 소극적인 모습만 보이며[37] 감시강화[38] 처벌강화[39] 이따위의 것들이나 대책이랍시고 내놓기나 하면서 그 어떠한 진전도 없이 제자리걸음만 걸었다는 것이다.[40][41] 물론 전란 전에 논의되었던[42][43][44][45][46][47][48]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전란 중에 처음으로 공포하고[49][50][51][52] 했으나 얼마 못가 폐지되었다.

2.4. 말년

1581년에 그는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였고 이와 더불어 군사훈련 등을 주창했으나, 선조와 대신들의 반대와 거부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부분은 후술.

이후 탄핵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조정의 호출을 받아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를 지냈다. 그는 1584년에 47세를 일기로 서울 대사동 사저(舍邸)[53]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자운산에 있는데, 아주 가까운 위치에 그를 배향한 서원인 자운서원이 있어서 지금은 율곡 유적지-라는 형태로 한 동선에서 관람할 수 있다. 참고로 이 묘역은 이이과 부인 노씨의 묘 이외에도 아버지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이이의 형 이선의 묘, 이이의 장남 이경림의 묘, 장손 이제의 묘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가족묘이다.

실록의 율곡 졸기는 다음과 같다.(링크)

물론 이 졸기는 『선조수정실록』에 있는 졸기로 서인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고 있는 졸기이다. 참고로 원래 『선조실록』에는 그냥 '졸하였다' 한 줄만 쓰여져 있다. 다만 이이와 같은 명망 있는 신료의 죽음에 사관이 평을 안 했을리가 없고, 아무래도 『선조실록』을 편찬했던 북인이 이이와 대척점에 서있던 동인 계열 중에서 강경파였다는 점에서 일부러 졸기의 내용을 뺐을 가능성이 높거나 이이 사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중 일부가 소실되었는데, 그 때 사관이 쓴 이이의 졸기도 소실되면서 빠졌을 가능성도 있다.]

3. 평가

서경덕 등이 주창한 주기론[54]이황이 정립한 주리론을 조화시키려 시도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학들이 크게 받듦으로써 '기호학파'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졌다. 흔히 이기 일원론이라고 하고 심시기(心是氣),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라고도 하는데, 퇴계학파에게는 주기론이라고 비판받았다.[55]

학자적인 성취는 이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사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성리학주자가 집대성했다면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과 이이가 그리했다고 볼 수 있다. 끝까지 '이'와 '심' 중심의 경학적 해석을 제일시했던 이황과 '이통기국'의 기발이승일도설이라는 독창적인 관점으로 이기의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는 해석을 고집했던 이이의 성리학은 '이기론'을 대표하는 입장들이었다. 이후 조선의 모든 붕당은 표면적으로나마 이기론의 해석에 따라 갈렸다.

조선 땅에서 500년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성리학은 이렇듯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 이기론, 18세기 인물성동이론 등의 논의를 거쳐 인간 심성론 쪽으로 치중되어 갔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이 심성학으로 변한 것은 이이 등을 필두로 시작된 이 일련의 논의들로부터 도출된 결과물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이이와 이황의 성리학을 당사자들이 학문하면서 스스로 밝혔던 바와는 판이하게 각각 성리학이 아닌 율곡학, 퇴계학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대표적인 제자로 김장생, 정엽, 조헌, 이귀가 있다. 이이의 학문은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을 거쳐 송준길, 송시열로 이어져 나가며 서인의 뿌리가 되어 조선 후기 사상계를 장악하게 된다.[56]

중국에선 명나라 대부터 과거 시험에서 양명학 등 다른 학문의 논리임이 분명한 견해도 이치에 맞는 훌륭한 답변이라면 정답으로 간주한 반면, 조선에서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답이 아니라면 답변자를 사문난적으로 간주하였다. 이이와 이황은 성리학 논의의 방향성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나 말 그대로 '학문을 완성'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주류 유학이 조선 중기 이후 강한 폐쇄성을 나타내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경향을 드러내게 되는 폐단의 책임도 본의는 아닐지언정 일정 정도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3.1. 정치적 능력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실록> 전반기를 이이 중심으로 그려낼 만큼 이이의 경장을 높게 산다. 이순신만 아니었어도 <중종실록> 편의 조광조처럼 표지 모델로 썼을 거라는 평가. 다만 사상사 - 제도사 등 큰 그림에서 역사를 보지 못해서 이이의 경장론이 후대의 서인에게 이어지는 대목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점은 아쉬운 점. 또한 해당 책에는 '경장'이라는 단어만 강조되나 이이는 '시무(時務)'[57]와 ‘무실(務實)'[58]이라는 표현도 즐겨 썼다.

이이가 병조판서로 재직하던 시절, 조선이 가장 우려한 외세의 공격은 일본이 아닌 여진족이었다. 여진족들은 바다 건너 일본 열도나 해적들보다 지속적이고 눈에 보이는 위협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이 경험한 가장 큰 전투가 벌어졌으니 바로 니탕개의 난이다. 이이는 장장 1년에 걸쳐 병력의 선발과 양성, 보급으로 니탕개가 호시탐탐 노리는 함경도에 중앙군 파견을 지속했다.

이이가 관료로서 세운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 전시 국방 장관으로서 세운 공이다. 이 시기에 행한 여러 긴급조치들이 동인들에게 지탄받아 "망국의 간물"이라는 하는 공세에 시달렸다.

사실 현실 정치에 있어서 이이는 1564년 급제 직후 차관보~국장급인 6조 좌랑에 오를 만큼 능력이 뛰어났던 관료였다. 불가에 잠시 몸을 담근 적은 있으나 보우, 윤원형 탄핵에 가세하는건 물론 3년 뒤 선조가 즉위할 때는 인순왕후의 외척을 탄핵하는 파이터이기도 했다.[59] 그 직후 즉위 사신단 서장관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 - 대사간을 거쳤다.

특히 1574년 대사간에 오른 이후부터는 사실상 대사간에만 6년을 있었다. 이전에는 승진이 늦어진 것 아니냐는 소리일 수 있으나 사림들에게 가장 중요한 직책이었던 3사 중 최고위직을 이렇게 오래 역임했다는 것은[60] 그의 학문적 깊이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 기술에는 삐져서 만언봉사를 올렸다 하는데 정작 만언봉사를 올린 시기는 1574년으로 막 대사간에 올랐던 시기이다. 사간원은 임금에게 간언하는 곳이었으니 오히려 이건 이이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임금에게 피력하는데 더활나위없이 좋은 직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이가 1580년부터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1584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친구였던 송강 정철도 1583년이 되어서야 예조참판으로 갔다가 특별 제수되어 예조판서가 되었고, 3살 정도 어린 이산해도 1580년에 가서야 형조판서가 되었다. 한마디로 이이는 늦게 승진했다기보다는 되리어 호조판서 제수 이후 이이의 승진속도를 봤을 때에는 이이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영의정은 무조건 갔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선조의 신임을 꽤나 받았기에 이조판서 다음 직책은 우의정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분위기상 1590년이 되기 전에 영의정에 제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하튼 다행히 왕의 신임이 있을 때에 떠나 좋은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동료들이 적어 홀로 개혁하는데 일생을 바쳤지만, 결국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정계에서 파란만장하게 산 고독한 정치인의 면모가 있다.

3.2. 십만양병설

그가 서인의 종주로 추대된 이후 임진왜란 종전과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서인이 정권을 얻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명 조식과 그 직계인 정인홍 등의 북인, 특히 대북 계열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고, 상단에서 언급된 이이와 직접 대립했던 이들의 평가도 아작난다. 그리고 이것은 이이에 대한 평가가 대폭 수정되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선조실록에는 없으나 선조수정실록에는 실린[61] 십만 양병설이다. 실제로 선조실록에는 이이가 선조에게 여러가지 국방과 세제개혁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기록인 시무 육조는 있으나, 십만이라는 구체적 숫자를 언급한 기척은 전혀 없다. 십만 양병설은 서인들이 이이를 높이기 위해 짜맞추어 만든 기록일 가능성이 높아 여러모로 의심스럽다.

우선 이이가 병조 판서로 있던 1583년 올린 시무 육조에는 양병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십만이라는 숫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이는 양병은 양민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면서 우선 양민부터 하고 나서 논의할 일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건 마치 중국의 삼국 시대 때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삼국 정립설과 같이 당시에 통용되던 의견들과 비슷하다.

그럼 십만양병설은 이후에 주장했다면 시급하여 의견을 바꾸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십만양병설에 대한 주장은 1582년 선조수정실록에 등장한다. 여기서도 본문에는 없고 덧붙여진 기사로 10만을 양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선조실록에는 없고, 서인 집권 이후인 선조 수정실록에만 존재하는 이 내용은 그 외에도 여러 글들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게 모두 이이의 제자인 서인들의 문집으로, 그나마도 양이 점점 불어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글은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이 1597년 편찬한 율곡행장이다.
'일찍이 경연에서 청하기를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위급한 사태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장차 토붕와해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혼의 제자로 역시 서인이고 이이가 죽었을 때는 겨우 13살이었던 안방준이 '임진기사'에서 그 내용을 보강하고 있다. 그 내용은 역시 서인으로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율곡연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세가 부진한 것이 극도에 달했으니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마땅히 토붕와해의 화가 있을 겁니다. 원컨대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을 비치하고, 세금을 덜어주고 재주 있는 자를 훈련시켜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다가 변란이 있으면 도성을 파수하게 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게 하소서'

이 글들에서는 10만이라는 수 외에도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이라는 구체적 방법과 더해서 앞서 언급된 글의 10년이 되지 않아서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참고로 임진왜란이 1592년 4월에 일어났다는데, 송시열의 율곡연보에는 1582년 4월 조에, 선조수정실록은 1582년 9월에 기사를 올리고 있는 것은 상당히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그 외에도 역시 서인인 이정구의 율곡시장, 이항복의 율곡신도비명, 성혼의 문인이었던 어우당 유몽인이 1622년 편찬한 어우야담 등에서 십만 양병설을 언급하고 있다. 십만 양병설 회의론에서는 이들이 모두 김장생의 율곡행장[62]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지만, 그렇게 볼 분명한 근거는 없다. 특히 이항복은 조정 내부 사정에 대해 어느정도 정통한 인물인만큼 이이가 실제로 그러한 종류의 발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유몽인은 북인이었고 실제로 류성룡이 한양에서 후퇴하며 '문성(文成, 이이)의 말이 과연 사실이었구나.' 식으로 후회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문성' 칭호는 인조가 내렸으므로 임진왜란 때 류성룡이 이이를 문성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이문정은 참 성인이다'라는 표현은 뛰어난 선견지명에 대한 당시의 관용구로 쓰였고, 실제로 율곡행장의 초판이나 율곡연보에도 이문정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항복이 쓴 이이신도비에는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李文靖眞聖人也)라고 쓰여있고, 율곡전서에도 문성이 아닌 문정으로 되어 있다. 문성으로 나오는 것은 후대의 것이다. 이문정은 북송 때의 명신 이항으로 류성룡이 이이를 이항에 빗대어 찬탄한 것인데, 율곡전서의 후기 교정자가 문정을 문성으로 잘못 교정한 것이다. 따라서 교정자의 실수에 불과한 것을 십만양병설 후대 조작설의 근거로 볼 수 없다. 수정실록이 편찬되기 전에 지어진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도 십만 양병설이 등장하고 유성룡의 후회도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유성룡이 이이를 숙헌(이이의 자)이라고 지칭했다. 참고로 이덕일은 이 꼬투리를 잡아서 십만 양병설을 율곡연보의 저자인 송시열이 조작했다고 우기고 있다...

당시의 조선의 상황으로 볼때 10만 양병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200만 정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만이나 되는 군사를 훈련하고 먹이는 비용은 상상도 못할 비용이라서 그 때 당시 조선으로서는 안하는 것이 상책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10만의 군대를 모았다 해도 백성들의 민심이 나라를 떠나버리기 때문에 의병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63]

게다가 그 1200만명 중 절반은 여자임이 명백하고 그럼 나머지 600만 중에서도 왕족, 노비 등의 천민을 제외하면 징발 대상인 평민은 더욱 한정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조선이 유지한 상비군인 갑사의 숫자가 14800명이였는데 4교대제라 평시 근무 인원은 3천 ~ 4천에 불과했던 것을 보면 10만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겠지만, 상비군이 아닌 예비군으로 해석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유형원의 반계수록 등에는 임란 전 조선의 군액 중에서 보인, 수군을 제외한 정병 기보병을 17만 ~ 18만으로 잡고 있다. 이렇게 10만을 훌쩍 넘어가는 숫자가 가능한 것은 조선군의 기본적인 체계가 교대 근무이기 때문이다. 4교대라면 정병 17만 ~ 18만에 상번군이 4만 남짓이 되며 이 숫자는 여러 문서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17만 ~ 18만에 달하는 정병은 엄연히 전시가 되면 정상적으로 동원될 수 있는 병력이지만, 당시에는 거의 방군수포화되거나 노동 부대로 전락해서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 훈련은 사실상 전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선조도 "병사들을 농사에 부치는 것을 비록 말하길 좋은 제도라고는 하나, 우리 나라(조선)는 병사가 없다. 다만 농민을 몰아 싸움할 뿐이니 마땅히 그 패함이 있다.(兵寓於農, 雖曰好制, 而我國則無兵, 只驅農民以戰, 宜其敗也)" 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10만의 상비군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제대로 훈련을 받은 병력 10만을 갖추자는 것은 현실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군제에 맞는 대응책이었다는 것이다.

보통 전근대 국가에서 상시 유지 가능한 군사력의 한계로 여겨지는 기준이 대략 총 인구의 1% 정도이다. 인구의 절반은 여성이고 나머지 절반인 남성 중에서도 또 대략 절반정도는 징병에 적절치 않은 연소자, 노약자, 환자나 장애인 및 기타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인원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총 인구중 징병대상인 건강한 성인 남성의 비율은 약 1/4(25%) 정도라고 어림잡을 수 있다. 따라서 총 인구의 1%는 곧 건강한 성인 남성 인구의 4%(1/25)이며, 성인 남성 25명 중 1명이 군인이 되는 정도가 전근대 사회에서 정상적인 사회의 기능의 유지를 전제로 상시 유지할 수 있는 전력의 한계라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보면 당시 조선의 인구가 1200만이면 상비군 10만 유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물론 정말 상비군 10만을 편성하여 유지하려면 양반 및 노비의 비율 및 징병문제도 따져야 하고 전반적으로 가벼운 세금-작고 검소한 정부를 지향했던 조선 정부의 유지 방침 자체가 제고되어야 하며, 정기적인 군사력 투사를 정책화-산업화하지 않았던 조선에서 이 정도의 군사력을 유지할 이유가 있는가, 정 유지하려면 그를 위한 제도적 기반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부터 문제가 되겠지만...

결국 지봉유설이나 반계수록 등에 나왔다는 정병 17~18만에 상번군 4만은 총 인구의 1.5% 정도를 전시 동원 가능한 예비군으로 유지하고 총 인구의 0.3%~0.4%를 상시 전력으로 유지하는 선으로써, 조선 정도 규모의 국가면 으레 유지해야 할 병력의 수준으로써도 결코 무겁거나 가혹하여 국가경제에 부담을 줄만한 규모는 아니며, (조선에서 운영하던) 교대근무식 징병제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힐만 하다. 결국 무(武)보다 문(文)을 더 중시하던 조선왕조에서도 국가의 안전보장에 필요한 수준의 군사력은 합리적인 수준에서 유지되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 안배되어 있었으나 이 시대에는 그러한 제도가 형해화되어 국가의 군사력 자체가 유명무실한 상황에 이르렀고, 이이의 양병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줄 알고 군대를 이렇게 허술하게 내버려두냐. 유사시에 대비하여 유명무실해진 군사제도를 정비해놓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애초에 조선을 포함한 전근대 동아시아는 숫자에 그렇게 민감한 문화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10만이라는 숫자에 그렇게 집착할 필요가 있는지는 좀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이가 주장한 것이 십만 양병설 하나가 아니라 십만 양병설은 그저 그가 주장한 경장의 일부였을 뿐이다. 이이는 기본적으로 사회 개혁을 주장한 경장론자였고 그의 경장에는 대동법의 전신인 수미법(收米法), 세제 개혁 등 여러 개혁이 있었으며 10만 양병론으로 대표되는 것은 그 중 군제 개혁 방안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십만 양병론 때문에 이이의 군제 개혁의 기반을 위한 양민 정책이 묻혀 버린 성향까지 존재한다. 이이의 주장은 시종일관 양민 후에 양병이었다.

여하튼 학자적인 성취는 상당해 지금은 여러 나라의 학자들에게 연구대상이며 조선의 엘리트층을 길러낸 밑거름이지만 당파 싸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그의 위치와 서인들의 신격화 흔적 등은 그의 가치를 깎아내고 있다.

물론, 이 문단의 평가는 주의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일단, 학계에서는, 이 십만양병설을 부정하는 논란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정해야 할 근거도 없기 때문에 십만양병설을 긍정하는 것이 주류다. 더욱이 손쉽게 편집 가능한 나무위키의 특성상, 이 평가를 곧이곧대로 믿는 것보다는 학계에서는 이러한 견해도 있다라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이와는 별개로,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임진왜란과는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 있다. 니탕개의 난으로 위협성이 증명된 여진족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 당시의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한 이후 다시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졌고, 조선은 일본이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이 되어 안정을 찾을 것인지조차 예측이 쉽지 않았다.[64]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국방상 집중할 곳은 정치 전황 자체를 예측하기 힘든 일본보다는 당장 침략이 자행되어서 위기감을 조성시키고 있는 북방의 여진족이었으며, 이이의 십만양병설도 이와 연계된 것이지 임진왜란이란 일본의 침략과는 별개의 사항이라는 게 이 주장의 핵심이다.

물론 율곡 이이가 왜적이 아닌 여진족을 염두에 두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더라도 니탕개의 난-임진왜란-정유재란-이괄의 난, 이렇게 4개 큰 변란으로 날라간 북방군과 대내외적인 혼란, 그리고 1570년대 말부터 요동총병 이성량의 비호를 등에 엎고 세력을 키워나가던 누르하치[65]를 고려해본다면, 그 현실가능성은 차치했을 때, 필요한 것이었다. 심지어 병자호란 이후로도 루스 차르국(러시아)의 만주 침공이 있었고 이는 결국 나선정벌로 이어졌는데, 비록 조청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서 루스 차르국의 한반도 및 중국 본토 침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유럽인의 동아시아 침공이라는 점에서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니, 시대 및 침략자가 속한 문화권을 막론하고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큰 의미가 있었던 셈이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찬양하는 부분은 '당장은 없더라도 미래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군사적 변란'을 대비해야 한다는 정치인으로서의 식견이지, 미래의 외국 정치 상황을 예언하는 노스트라다무스식 신통력이 아니다. 그러한 '미래의 변란'이 임진왜란으로 상당히 빨리 현실화된 것 때문에 이이의 식견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일 뿐이므로, 이이가 구체적인 변란의 내용까지 예측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동시대 다른 정치인들 중에는 국방의 허약화에 대해 문제를 확실히 인식, 제기하고 구체적인 개선 정책안까지 표출한 사람은 이이 말고 없으므로 십만양병설의 병사 숫자는 후대의 부풀림이라 해도 상당한 현안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4. 대중매체

  • 1974년 KBS 일일연속사극 <이율곡>에서 탤런트 신구가 연기했다.
  • 게임 대항해시대 6에서 항해사로 등장한다. 스킬 중 구도장원공이 있다.
  • 대체역사물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2부 초반에 등장하며 어지간한 판서직에는 다 이름을 올린다. 일본에 대해서 강경책을 제시하는 모습도 보이나 얼마가지 않아 사망한다.
  • 웹소설 여왕전하의 비선실세에서는 주인공이 조선으로 왔을 때 처음 만나며 실제 조상이라는 설정으로 둘의 얼굴이 서로 닮았다. 머나먼 후손인 주인공에게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형이라 불러서 주인공이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 있다. 유럽에 대한 궁금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주인공을 골아프게 하기도 하며 잉글랜드로 파견되는 사신단에 서장관으로 따라간다. 천재적인 두뇌덕에 외국어 마스터 기능이 탑재돼 사신단에 합류하자마자 중국어를 익혀 몇 주만에 중국어 구사 능력이 통역 가능할 정도로 올라가고 엿듣는 것만으로 영어를 마스터 해버리는 수준에 라틴어까지 탑재했다. 독자들은 잉글랜드에 유학을 퍼뜨릴 것인지에 대해 잔뜩 기대하는 중.[66] 잉글랜드에 머무르며 마키아벨리군주론에 빠져 번역 중이다. 이것으로 인해 조선에 일어날 변화도 기대되는 장면.
  • 대체역사 소설 근육조선에서는 근육이 크게 붙기 힘든 체질을 가졌다는 설정으로 등장하며, 그 대신 치밀한 근육 커팅을 통해 진짜 조각과도 같은 세밀한 근육을 도포 안에 감추고 있다는 묘사가 등장한다. 이를 본 2부 시점의 주인공 김성원은 자기도 모르게 '이소룡'이라는 단어가 입에서 나왔으며, 이를 들은 이이는 자신의 별호로 소룡을 칭했고 다른 이들에 의해 소룡식 입신체비라는 학풍으로 새로이 만들어졌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실록 초반을 이이를 중심으로 할 정도로 굉장히 비중이 크다. 기대승이 낙향한 후 이이가 조정의 이데올로그로 떠오르면서 첫 등장한다. 선조의 경연 자리에서 이준경과 대립한다. 이때 이준경이 “기대승보다 더 막가는 인물일세.”라며 이이를 깐다. 그리고 이준경이 유언을 남기고 죽자 “사람이 죽을때가 되면 그 말이 선해진다고 했는데 준경은 그 말이 악하다.”라며 이준경을 맹비난 한다. 하지만 그의 예언이 얼마안가서 실현 되면서 이이는 당쟁의 격화를 막기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한다. 그리고 동인이 이이에게 “공께서는 양쪽 다 옳다고 주장하시는데 세상에 둘 다 옳은 것이 어디있습니까?”라거 말하면서 이이를 거세게 비판한다. 이 일이 있는뒤 이이는 동인 강경파 이발과 서인 강경파 정철을 불러서 “두 분이 서로 싸우지만 않는다면 이런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겁니다.”라고 이 둘에게 싸우지 말라며 경고하고 이발과 정철이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불안정한 평화가 지속되었다. 얼마 뒤 또다시 이발이 정인홍과 같이 서인의 핵심인물인 심의겸을 탄핵 하려하자 소식을 듣고 온 이이는 성혼, 김우옹과 함께 와서 심의겸 탄핵을 취하토록 하라고 요구한다. 그날 밤 이발이 이이의 집에 찾아와서 “사림이 공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공께서 의겸을 져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공이 의겸을 버린다면 동서를 막론하고 공을 따르게 되어 동서간의 화합을 이룰수 있을 것 인데, 공이 자꾸 의겸을 감싸려 하면 정인홍도 공을 떠나고 말 것 입니다.”라며 이이를 심의겸을 탄핵하려고 설득하자 이에 걱정이 피어난 이이는 어쩔수 없이 이를 수용했고 허나 초안은 이이가 직접 작성하겠다 하자 이발은 이를 받아들인다. 이 초안을 정인홍에게 건네며 다른건 절대 추가하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정인홍은 이 기회에 서인 세력을 없애려고 윤두수, 윤근수, 정철이 심의겸과 사류를 맺었다고 쓰자 이에 분노한 이이가 “아니, 이리 나오면 어쩌자는거요? 정철은 심의겸의 당도 아니요. 그는 지조있는 선비인데 왜 그가 외척과 결탁했다 생각하는거요? 그리고 내가 일전에 정철을 크게 칭찬한 적이 있는데 오늘날 갑자기 내가 그를 비판하면 내 꼴이 뭐가 되겠소? 이 일은 그대가 반드시 책임을 지고 바로잡은 뒤 피혐해야 할 것이오. 자네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하겠소.”라며 정인홍에게 따지자 정인홍은 어쩔수 없이 이 일을 책임지고 낙향하자 동인 전체가 낙향하고 이이와 정철까지도 낙향하자 동서간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선조가 이이를 중용하자 이이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빡시게 일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이가 실수를 하자 동인은 이이를 오국소인이라 깠고 결국 선조는 이이를 유배 보낸다. 이후 1584년 (선조 17년) 이이가 병으로 죽으면서 등장종료. 이이 사후 동인은 이이, 성혼, 정철을 서인으로 몰아세우며 서인을 대거 실각시킨다. 광해군일기에서 엑스트라로 등장한다. 여담으로 박시백정광필과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시각이 거의 없는 인물이다. 이순신이 아니었으면 표지 인물로 했을 거라고 후기에 적었을 정도.

5. 여담

  • 민담 중에는 이황과 이이의 밤일에 대해 비교를 해놓은 것이 있다. 어느날 이이의 제자들이 스승의 부부관계를 엿보는 일이 있었는데 과연 대학자였다는 이이는 아주 점잖은 체위와 점잖은 빠르기로 조용히 일을 1회 치르고 바로 잠들었다 한다. 이이의 제자들은 라이벌이었던 이황의 제자들을 만나서 "실로 우리 선생께서는 방사조차 거유(巨儒)답게 하신다."고 자랑을 하였다. 그러자 약이 오른 이황의 제자들은 "우리 선생께서 율곡에게 점잖음으로 처지실 리가 있겠느냐." 하며 자기네도 스승의 부부관계를 훔쳐보기로 계획하곤 즉각 실천했는데, 뜻밖에 이황은 보기 드문 체위로 격렬하게예? 몇 번이고 일을 치렀다고 한다. 제자들이 졌다는 부끄러움에 다음날 스승에게 전말을 고하고 그 까닭을 따졌더니 이황은 허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릇 남녀의 정사란 천지간의 큰 화합과 같아, 비구름이 끼고 천둥이 몰아치듯 해야 한다. 율곡이 그 이치에 맞지 않게 일을 치르니, 필경 후사가 포도알처럼 많게 되지는 못하리라.
  • 이이의 부인인 곡산 노씨는 이이가 사망한 뒤 8년을 더 살았는데 임진왜란 때 이이의 묘를 지키다가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이 때 가까이 지내던 하녀도 함께 살해당했으며 임진왜란이 끝나고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냈는데 본래는 이이의 묘에 노씨를 합장하려 했으나 시간이 지난 탓에 노씨와 하녀의 두 시신 중 어느 쪽이 노씨의 것인지 알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별개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이의 경우 이황과는 달리 자식 복이 부족한 편이어서 정부인인 노씨와는 딸만 1명이 있었고 그나마 일찍 죽었다. 이 때문에 이이가 죽은 후 서자 이경림이 대를 잇게 되었다. 양반들은 적자가 없으면 친척에게서 양자를 들였지만 이이처럼 서자가 있으면 양자를 들이지 못함이 원래 예법이다. 단 서얼은 과거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가문의 격이 떨어져서 친족들 중에 양자를 들이는 것이다. 가장이 적첩구무자(嫡妾俱無子), 즉 가장과 적실 또는 첩 사이에 낳은 아들이 없어야만 가능하였다.# 만일 서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입양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적자가 없고 서자가 있으면 성서탈적(聖庶奪嫡)이라 하여 서자를 양자로 들여야 함이 본래 예법이다.[67]
  • 이이는 인간의 감정을 긍정하는 사람인데 비해 이황은 감정 이상의 도덕적 본성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일단 이이와 이황은 한 세대 정도 다른 시대의 인물임을 감안하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는 힘들다. 그러나 실제로도 이황은 적손이 있어 이황의 종손이 그의 사상을 정리하고 세계에 전파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반면, 이이는 적자를 낳지 못했다. 본처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못했지만 전주 김씨에게서 1남 1녀, 용인 이씨에게서 1남을 보았으며 이 중 서녀는 이이의 제자이기도 했던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에게 첩으로 들어가 아들들을 낳았는데, 적자가 없던 김집은 서자에게 후사를 물려줬다. 서장자인 경림에게 대를 잇게 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면도 보였는데 후손들은 그렇게 해서 근근히 이어진 것이다. 불천위 제사도 멀쩡히 잘 지내고 있다.# 이를 생각하면 진실일지도...
  • 민간 설화 중에 젊은 시절의 이이가 금강산 구경을 갔다가 천 년 묵은 구미호에게 홀렸다 달아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이야기를 읽은 이들의 공통적인 소감이 "주변 충고 더럽게 안듣는 찌질이"다. 실제로 이야기를 읽어보면 말 안듣고 멋대로 굴어서 자기를 도와주는 신들을 여럿 피보게 만든다.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한데 이이가 젊은 시절 금강산에 가서 수도하던 중에 일이다. 어느 날 자신을 누가 애타게 부르자 달려가보니 큰 잉어(또는 자라)가 어부의 그물에 잡혀있었는데 이이가 측은하게 여겨 어부에 사정해 물고기를 풀어주었다. 얼마 후 이이는 금강산 주막의 노파로부터 금강산에 혼자 사는 여인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듣는데 얼마 못 가 이이는 한 아리따운 처녀를 만나 유혹을 받는다. 아무래도 처녀가 노파가 말한 여인 같아 자리를 피한 후 노파에게 일러바친다. 노파는 처녀가 천 년 묵은 구미호니 접근하지 말라며 퇴치할 방법을 여럿 내주지만 그 때마다 처녀의 유혹과 충동에 사로잡혀 실패. 마지막으로 노파가 이전에 살려준 물고기에 도움을 받으라고 충고해주는데 알고보니 물고기는 용왕의 아들로 이이에게 목숨을 구원받아 은혜를 갚기를 기다리던 차였다. 용왕의 도움을 받아 용궁의 병사로 구미호를 퇴치하려 하지만 노파가 말한 금기를 어기는 바람에 실패. 결국 마지막 수로 이이는 용왕을 통해 상제에 건의해 간신히 구미호를 퇴치하는데 성공한다. [68] 이야기를 보면 알겠지만 진작에 퇴치할 수 있었는데 이이가 결정적인 순간에 일을 여러번 그르쳤다. 여담으로 주막의 노파는 원래 금강산의 산신령이었다고 한다.#
  • 나도밤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는데 이이가 어린 시절 한 지나가던 스님이 이이를 보고는 "아깝다. 이 아이는 커서 큰 인물이 되겠지만 10살이 되는 해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겠구나!"라고 말했다. 이에 놀란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가 대책을 물어보자 스님은 "뒷동산에 밤나무 100그루를 심으면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원수는 그대로 행했다. 이이가 10살이 되던 해에 호랑이로 변신한 승려가 이이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이원수는 지나가던 스님이 말해준 대로 "밤나무 100그루를 이미 심었다"고 하자 호랑이는 직접 밤나무를 세더니 "1그루가 말라 죽었으니 데려가겠다." 하고 주장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너도밤나무가 "나도 밤나무다"라고 말해 호랑이는 도망쳤다는 이야기.[69]
  • 파주에 별장이 있던 이이는 화석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이 때 이이는 비싼 송진과 기름을 정자에 수시로 발랐는데(또는 잘 타는 나무로 정자를 지었다고) 당시 사람들은 이이가 사치한다고 비웃었다. 이이 사후 터진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가 파주 나루터에서 불이 꺼져 배가 안 보이자 애를 태우게 된다. 이 와중에 생전 이이와 친했던 도승지 이항복이 이를 기억해내 정자에 불을 지르자 송진을 먹인 덕에 잘 탔고 멀리서도 비출 정도였다. 그 덕에 빈 배를 발견해 선조는 무사히 피난을 갔고 모두 이이의 혜안에 감탄했다는 얘기인데 다만 근거가 별로 없다. 이 내용은 류성룡의 <징비록>에 비슷하게 언급되는데 임진나루를 건너면서 나루터를 관리하는 관청인 승정 건물을 부숴서 불을 질러서 밤길을 밝히고 왜군이 뗏목으로 만들 수 없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여담으로 화석정은 700m나 떨어져 있어서 너무 멀다는 점에서도 현실성이 부족하다.
  • 이이에게도 어느 기생과의 러브스토리 이야기가 있으며 그녀를 위한 시까지 남겼다. 1574년 38세의 나이로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황주에 머물던 이이는 '유지'라는 12살짜리 기생의 시중을 받았다. 그 기녀는 본래 양반 출신이지만 천애고아가 된 후 기생으로 전락하고 만 불운한 소녀였다. 이이는 유지를 아껴주며 좋아하는 책도 마음껏 읽게 해 주었으며 당연히 그런 이이를 유지도 잘 따랐다. 얼마 후 이이는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어 두 사람은 헤어졌고 9년이 지난 후에 이이가 다시 황주에 잠시 들르게 되어 21살이 된 유지와 재회한다. 유지는 재회를 기뻐하며 술을 대접했고 어릴 때부터 품어온 흠모의 마음이 더욱 커져 밤에 홀로 이이의 숙소를 찾는다. 이이를 사모하는 마음을 고백하지만 이이는 당연히 가정도 있고 자신은 이미 47세로 늙고[70] 병든데다 나이차도 많이 나는지라 유지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녀를 돌려보내려 했으나 밤이 깊어져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한 방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이이는 유지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다음날 아침 그대로 그녀를 돌려보낸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으로 얼마 후 이이는 병사하게 되는데, 죽기 3달 전에 유지와의 사연과 그녀에 대한 마음을 이름없는 시와 글로 남겼다. 이는 후세 사람들에게 '유지사'라고 불리게 되었고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유지는 결국 맺어지지 못했지만 이 시와 글들을 보고 이이의 자신에 대한 마음을 알고 크게 슬퍼하며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 충무공 이순신과는 같은 덕수 이씨촌수로 따지면 19촌이었다. 이순신이 하급 군관이었던 시절 이조판서로 재직 중이던 이이는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동문 사람이라 하여 한번 불러 만나보고자 하였지만 이순신은 인사권을 가진 이이와 자신이 같은 문중 사람이라는 이유로 사사로이 만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하며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현대로 따지면 일선 소대장을 먼 친척인 행정안전부 장관이 만나보려고 먼저 불렀는데도 거절한 것이 된다.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는 먼 친척이었지만 현대에도 항렬로 '대부님'이나 '아저씨' 등 호칭으로 촌수 상관없이 문중 사람들을 경칭하는 것이 남아 있을 정도에다 학연, 지연, 혈연에 의해 이권이나 혜택이 오고가는 것이 우리나라이다.[71] 하물며 종법에 훨씬 깐깐했던 조선 시대였으니 고급 관료로 재직 중인 같은 문중 사람이 있으면 찾지 않아도 먼저 찾아가 다리를 놓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후일 한국사 최고 유학자와 최고 명장이라 칭해질 이들의 역사적인 만남이 성사됐을 수도 있었다. 결국 이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이의 성품을 생각해보면 서운함을 느끼기보다는 촌수 먼 일가 사람의 올곧기 그지없다는 소문이 정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흐뭇해했을 듯하다.
  • 흔히 세간에서는 이이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이가 강릉 오죽헌에서 신사임당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본래 강릉은 이이의 모친 사임당 신씨가 태어났던 고향이었으며 이이에게는 어머니의 친정인 외가가 있던 곳으로 사임당 신씨는 이이가 태어나기 전에 친정에 와서 이 곳에서 이이를 출산하였다. 이를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72]과 친영례(親迎禮)[73]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남귀여가혼이 주자가례에 어긋난다는 것을 모든 성리학자들이 인정했다는 것은 차처하더라도 결혼하고 2년이 지난 후에야 시가(媤家)에 인사를 간 신사임당의 경우는 특이한 사례이다. 다만 아이를 친정에 가서 낳는 풍속은 남귀여가혼과 별 상관없이 별개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흔히 장자 상속과 친영 등 종법 질서가 자리잡는 것은 17세기 중후반이 지나서야 가능했는데 이이가 태어났던 16세기만 하더라도 균분 상속과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이이 또한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가진 문서가 남아 있다. 이이는 6살 때 가서야 아버지의 고향인 파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자랐고 이후 파주에서 서원을 짓고 후학들을 양성하다가 숨을 거두었고 묘소도 파주 자운산 근처에 있다. 아호인 율곡도 실제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의 '율곡'에서 본딴 것인데 '알밤이 자라고 나는 골짜기'라는 뜻. 이이가 정착한 곳은 처가가 있는 황해도 벽성군 석담인데 수 백년간 후손들이 그 곳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다가 소련군정하에서 사유 재산 몰수가 한창 이루어지던 1947년 14대 종손이 월남했다. 월남 도중 북한의 내무서원들에게 잡혔으나 운 좋게도 직원 중 1명이 한때 종가집의 하인 일을 한 적이 있어서 몰래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 시대까지도 양반 상놈 노비하던 시절이라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결국 다른 종가집처럼 한옥 고택에서 기거하기는 곤란해서 경기도 고양시의 평범한 아파트에서 종가를 꾸려나가고 있다. 14대 종손도 원래는 셋째였는데 형제 중 장남은 한국전쟁 때 행방 불명되었고 차남은 종가에 남아 있다가 남북 분단으로 소식이 끊어져서 종손 자격을 잇게 되었다.
  • 이이의 저서인 <성학집요>를 보면 왕조의 변천사를 창업 - 수성 - 경장의 3가지로 분류했다. 창업은 요, 순, 탕, 무의 덕을 갖추고 개혁해야 할 시대를 만나 하늘과 사람의 뜻에 순응해야 하므로 논할 필요가 없고, 수성은 성왕과 현명한 재상이 법령을 세우고 제도를 만들어 다스릴 수 있는 도구를 모두 갖추고 예악을 훌륭하게 하면 후대의 임금과 신하는 이걸 따르기만 할 뿐이라고 하였다. 경장나라가 세워진 지 오래되면 초기에 세웠던 정책과 제도가 본래의 뜻을 잃고 폐단이 발생하므로, 밝은 임금과 총명한 신하가 나라의 뼈대를 다시 세우고 묵은 폐단을 고쳐서 공적은 선열에 빛나게 하고 사업은 후손이 미치는 것이라 하였다. 수성은 중간쯤 가는 평범한 임금과 자리만 채우는 무능한 신하라 할지라도 할 수 있지만 경장은 현명한 견해와 빼어난 재주가 필요하므로 더 어렵다고 적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무너지려고 하는 집을 가진 집주인은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고 집수리에 쓸 재목을 구하려 것이라는 예시를 들어 경장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이이는 당대의 조선이 창업과 수성을 지나 경장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전정, 군정, 환곡, 공납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개혁책을 내놓았다. 훗날 대동법의 전신이 되는 수미법(收米法)이 대표적인 예.
  • 정치에 있어서는 서인 쪽이 압도적으로 앞서서 이이-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는 서인 노론은 조선 후기 붕당 정치사를 주도하게 된다. 이걸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문묘에 배향된 18인을 의미하는 동국 18현이다. 동국 18현은 고려 시대에 헌액된 최치원, 설총, 성리학을 전래한 안향(또는 안유)가 종사되었고 조선 시대에 광해군 때 5현 종사를 시작으로 정몽주, 김굉필,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 종사되었다. 이 중에서 이이의 제자가 김장생과 조헌(성혼의 제자이기도 하다), 김장생의 제자가 송시열과 송준길(이 둘은 김집의 제자이기도 하다),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이자 이이의 사위이고 김집의 제자가 박세채이다. 이이의 후대로는 이이의 문열이 아니면 아무도 문묘 배향이 안되었다는 것이다.[74] 이황의 문열조차 이황을 제외하면 18현에는 없는데 기대승, 서경덕, 김안국, 조식[75] 등 굵직한 인물들의 명단은 하나도 없는 것을 봐도 위세를 알 만하다.
  • 율곡 이이는 친척에게 양자를 들이지 않았고 자신의 혈육인 서자가 제사를 잇게 했다. 그러나 당시 서얼은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므로, 사실상 양반 신분에서 탈락한다는 의미였다. 사후에 그의 직계 후손들은 명문가의 혼인할 수가 없었으므로 자연스레 명문가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 이이의 이름은 16세기의 중세 한국어에서 성은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아 '니'로, 이름인 '귀고리 이' 자는 현재는 사라진 반치음 이었고, /zi/로 읽혔다. 따라서 이이가 생존해 있던 당대에 그의 이름은 니ᅀᅵ로 적고 /ni.zi/로 발음하였다.
  • 평생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단순히 국법을 잘 지키는 모범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 사대부들이 몰래 쇠고기를 다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소의 힘으로 지은 곡식을 먹고 또 그 고기를 먹는 것이 옳겠는가'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진심으로 소를 중요하게 생각하기는 한 모양. 현대에도 이이의 제사상에는 쇠고기를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 KDX-III 세종대왕급 이지스 구축함 2번함인 DDG 992의 함명은 그의 이름을 따 '율곡이이함'으로 명명되었다. 22사단은 원래 '뇌종부대'였지만 이후 부대명을 변경하기로 하고 명칭을 공모했는데 22가 '이이'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 '율곡'으로 하자는 의견을 받아들여 '율곡부대'가 되었다.
  •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 이이는 다시 한 번 부상되는데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전면에 들고 나왔던 율곡사업 때문이었다. 이 시기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이슈가 되어서 수많은 논문이 쏟아지고 교과서에도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율곡 사업은 '율곡 비리 사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비리의 온상으로 드러났고 마침내 부정부패의 상징이 되었다. 이 때문에 덕수 이씨 문중은 비리 사업에 율곡 사업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조상 이름을 더럽힌다고 항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는데 비리 사업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다.
  • 신유학(新儒學)을 주창한 두웨이밍 교수는 한국의 천 원 지폐와 오천 원 지폐를 가지고 다니며 유학자가 이런 대접을 받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 본래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1970년대 전후에 세워진 동상이 서울 사직공원에 있었는데, 사직단과 어울리지도 않았기에 결국 사직단 복원 계획과 함께 2015년 10월에 위에 언급된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자운서원 인근의 이이 유적지로 이전했다.[76](언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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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536년 12월 26일. 한국은행권 오천원권이나 위인 전기문에는 음력 생일에 맞춰 1536년생으로 표기한다.[2] 음력 1584년 1월 16일.[3] 춘당공파(春塘公派) 13세손 옥(玉)변 항렬이다. 춘당공파의 지파(支派) 중 율곡문성공파(栗谷文成公派)의 파조이다.[4] 할아버지 이천(李蕆)의 외할아버지.[5]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김집-송시열,송준길 라인으로 이어진다.[6] 이른바 사림의 대두 이후 임진왜란 이전 까지의 정치제도 현황을 살펴보면 전근대 행정력의 한계로 수취, 재분배 체계에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연산군이 국역 체제를 심각하게 이완시키면서 걷잡을수 없어졌지만 서로 근간이 되는 사상이 다른 정치세력이 대립하고 중간에서 절대 한쪽손만 들어주지 않는 국왕과 미묘한 눈치게임이 벌어져 문제의식은 있으되 실행은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던 상황이 초유의 국난을 맞아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어 신속하게 실행된 것이다.[7] 강릉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고향이며 이이에게는 따라서 외가가 있는 곳이었다.[8] 그래서 파주시 곳곳에 가면 그를 기념하기 위해 율곡로, 율곡수목원, 율곡습지공원 등 시설명에 호를 붙였다.[9] 사실 이는 조선 전기에 일반적인 결혼 형태였다. 아들은 사돈 집에 들어가고 사위가 우리 집에 들어와 사는 것.[10] 신사임당의 부친인 신명화가 딸 신사임당을 편히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한미한 집안의 평범한 사람인 이원수와 혼인시켜 데릴사위로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이원수는 평생 아내에게 큰 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했다고 한다.[11] '불씨(佛氏:부처님)가 그 제자에게, 생각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라고 경계한 것은 무슨 뜻인가. 대개 그 학문은 별다르게 기묘한 것이 없다. 다만 이 마음이 내달리는 길을 끊어 정신을 집중시켜 정(靜)함이 지극하여 허명(虛明)한 경지로 나아가게 하고자 할 뿐이다. 화두(話頭)를 두고 거기에 매달려 공부하게 하는데, 또 그 사람이 미리 이런 뜻을 알면 선(禪) 공부가 알뜰하고 전일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런 금법(禁法)을 만들어서 속이는 것이다.'[12] '선생의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노씨(盧氏)인데, 곡산(谷山)의 명망 있는 가문 출신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노중례(盧重禮)의 현손(玄孫)이다. 그 아버지 노경린(盧慶麟)은 종부시 정(宗簿寺正)이요,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선공감 정(繕工監正) 김한로(金漢老)의 딸이다. 부인은 가정(嘉靖) 신축년(1541, 중종36)에 나서 정사년(1557, 명종12)에 선생에게 시집왔다.' - 출처: 행장, 김장생 저, 링크[13] 이를 밝혀낸 인물이 바로 이병도이다. 실제로는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기보다 거사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이 숭유억불로 유명하지만 조선 전기만 해도 유학자들 중에서 불교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고 그 중에 법명을 가진 거사들도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하루 술 3잔 설화로 유명한 손순효(칠휴거사).[14] 장유는 율곡을 직접 만났던 두 명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머리를 깎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게 사실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링크[15] 조선 전기에 유학자들이 주변인의 사망에 충격받아 불교에 심취하게 되는 경우가 없진 않았다. 세종 또한 유학을 따랐지만 소헌왕후와 아들들의 사망에 충격을 받아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16] '지난날 남들이, 그대가 불교 서적을 읽고 꽤 중독되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오랫동안 애석하게 여겼었는데, 일전에 나를 찾아와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그 잘못을 말하였으며, 이제 두 번 온 편지의 뜻이 또 이러함을 보니, 나는 그대가 도에 함께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겠습니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17] 장원 급제[18] 12위 급제[19] 특히 별시 당시 내놓은 답안인 '천도책'(天道策)은 당시 그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에 학문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나 이 시험은 몇 달 동안 출제자들이 고심하여 제출한 문제였는데, 이이는 단 세 시간 만에 답안지를 작성해서 제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확실히 천재는 천재인 듯.[20] 과거시험은 보통 9세부터 일평생을 바쳐 공부해야 한 번 될까 말까한 시험으로 문과 평균 합격자 나이가 35세였다.[21] <퇴계선생전서 권16 담이숙헌>에 퇴계가 '소년 등과는 불행'이라며 등과에 실패한 이이를 위로하는 구절이 있다. -> 앞글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퇴계선생문집 제14권'에 퇴계가 율곡에게 답하는 2개의 편지가 실려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런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링크[22] 모든 것이 여러 가지로 다 다름.[23] 왜냐하면 그들 생각에 심의겸은 외척 나부랭이로 허명을 얻었고, 김효원은 중망받는 사림인데, 이이의 해결책에서 심의겸은 조금 가깝고, 김효원은 멀리 간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지방의 거리까지 측정해서 똑같은 거리에 있는 곳으로 보내라는 것은 괴상하기 짝이 없다.[24] 율곡은 이언적이 을사사화 때 윤임파 사림을 취조한 일을 문제삼았다.[25] 류성룡이 좀 보수적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정작 류성룡은 이이를 높이 평가했을 뿐 아니라 이이의 정책과 사상을 지지했던 서인 인사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재상이 된 이후에 이이의 경장론과도 부합하는 정책을 시행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특히 류성룡은 이이가 제안했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적극적으로 건의했는데, 이는 뒷날 대동법의 토대가 된다. 다만 이이 생전에는 이이의 개혁 정책에 반대했긴 류성룡도 마찬가지였다.[26] 흥미롭게도 허엽 - 허균 - 기자헌 등의 동인 인사도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한때 법명까지 받아가면서 불법을 공부했던 이이도 그렇고, 조선 성리학에 불교 냄새가 강한 것이 괜한 일이 아니다. 애초에 성리학부터 주희가 유학에다 불교, 도교를 섞어서 만든 것이다.[27] 허엽의 별명이 묘지(卯地)였다. 토끼라는 게 아니라, 동서남북 네 방위를 북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열둘로 나눈 것인데, 이렇게 하면 묘지는 정동(正東)이 된다! 그야말로 타협 없는 동인이었다는 이야기다.[28] 이후의 그의 학통은 정계를 장악한 집단이 되면서 조선 후기 많은 잘못들을 저지르게 되지만, 이런 비판적인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후학들이 주체적으로 선배들의 학설을 연구하여 보다 옳은 것으로 취사선택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되기도 하였다.[29] 전라 감사가 치계(馳啓)하였다. "영암(靈巖)·강진(康津)·해남(海南) 세 고을은 양영(兩營) 사이에 끼여 있는 데다가 제주가 곧장 갈 수 있는 길목의 요충지여서 공부(貢賦)가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나 많습니다. 특히 을묘 왜변(乙卯倭變)을 겪은 뒤로는 방비에 대한 제반 일이 매우 많아 백성들이 심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세 고을에는 녹미(鹿尾)·녹설(鹿舌)·쾌포(快脯)가 생산되지 않으니 장록(獐鹿)이 많이 생산되는 제주에 옮겨 정하게 하소서. 교서관의 책지(冊紙)와 장흥고(長興庫)의 견양지(見樣紙)는 정공 도감(正供都監)018)[77] 으로 하여금 일이 덜한 내륙 지방으로 옮겨 마련하게 하소서." (선조 4년 9월 12일)[30] 반면에 선조는 때로는 동인을, 때로는 서인을 지지하며 대립을 이용했다. 국왕이 개혁의지가 부족하고 명확한 국정목표나 개혁의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깊어지고 고착화되어갔다. 선조는 성종처럼 교화라는 정치비전을 목표로 내걸고 서로 대립하는 세력을 중재하지 않았다. 또한 조광조 일파의 희생을 바탕으로 훈구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던 중종처럼 어느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동서분당 초기에 명확한 정치비전과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신하들 간의 대립을 조정하였다면,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 원한이 당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31]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설치하였다. 이준경(李逡慶) 등이 건의하여 국(局)을 개설하고 상밀하게 의논함으로써 대납(代納)의 간람(奸濫)한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청에 따라 설치한 것으로, 삼공(三公)이 주관하고 식견 있는 조사(朝士)를 선임하여 낭속(郞屬)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폐단을 없애고 백성에게 이익을 주기 위하여 설치했던 것인데, 상의 뜻이 전례를 따르기에만 힘쓰고 대신들 역시 경장(更張)을 싫어해서 단지 문서로 필삭(筆削)하며 감정(勘定)만 하였으므로, 결국 아무 이익도 없었다. (선조수정 3년 11월 1일)[32] 조칙(詔勅)을 맞이하는 습의(習儀)를 1차는 8일에, 2차는 13일에 할 것으로 개정하여 부표(付標)해서 아뢰었다. 상이 우성전(禹性傳)이 아뢴 바에 따라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혁파하였다. (선조 5년 9월 30일)[33] 며칠 전에 수찬 우성전(禹性傳)이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혁파할 것을 청하여 상이 따랐는데, 오늘 대간이 혁파하지 말고 시의(時宜)에 합당한 것을 가려 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 5년 10월 6일)[34] 헌부가 아뢰기를, "공판(公辦)에 관한 일은, 그 폐해를 논한다면 반드시 개혁해야 할 것인데 고루한 소견에 견제되고 있습니다. 신들이 사옹원(司饔院)·예빈시(禮賓寺)·풍저창(豊儲倉)이 궐내(闕內)·궐외(闕外)에서 공궤하는 식례(式例)와 횡간(橫看)132)[78] 및 《대전(大典)》133)(註 133)(《대전(大典)》 :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약칭.) 의 본의를 살펴보니, 사옹원 옹인(饔人)의 일은 궐내의 공궤를 맡는 것이고 예빈시의 직무는 빈객(賓客)의 연향(宴享)에 대한 공궤를 맡는 것이었습니다. 이밖에 크게는 육조(六曹)부터 작게는 소각사(小各司)의 당상(堂上)과 참상(參上)·참하(參下)에게 지공(支供)하는 미태(米太)·염장(鹽醬)·어염(魚鹽) 따위는 나누어 주는 데 정수가 있고 차등이 있으나 본아문(本衙門)이 익혀 장만하여 공궤한다는 글이 따로 없으니, 법을 세운 당초에는 필시 중국에서 월봉(月俸)으로 주는 것을 본떠서 각각 스스로 공궤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공판의 창설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백성을 해롭게 하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첫째, 폐해가 백성의 목숨에 미치는 것입니다. 각사(各司)의 음식을 전복(典僕)에게 장만하도록 책임지우는데 주인이 항상 먹는 음식물을 바치는 이외에 유연(遊宴)에 드는 것과 영전(迎餞)에 드는 것을 제멋대로 외람되이 요구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전복이 파산하여 떠돌게 되고 사주인(私主人)이 멋대로 탐학을 부리는 것은 형세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공판을 없앤다면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그 이로움이 어찌 넓고도 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또 이조(吏曹)가 생각을 국가에 두지 않고 사람들의 청탁에 따라 구차하게 빈 벼슬자리에 채울 것만을 생각하는 것에 대해 논하고 인하여 그 사례(事例)를 거론한 다음 파면하기를 청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고 공판에 관한 일은 대신에게 의논하여 조처하겠다고 하였다. (선조 6년 9월 26일)[35] 사헌부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공판(公辦) 1가지 일은 온갖 폐단의 근원이 되고 민생들의 모두(蟊蠧)155)(註 155)(모두(蟊蠧) : 해충.) 가 되는데, 우물쭈물하여 과감히 개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성명(聖明)의 때를 만나 예의(銳意) 경장(更張)해서 오래 되었던 큰 폐단이 하루아침에 통쾌하게 고쳐졌는데, 다만 자기만 편하려고 생각하는 인정이 마침내 싫어하고 괴로와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시행한 지 한 해도 못되어 갑자기 혁파하려는 생각을 하여 세우자마자 곧 혁파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정치하는 체통이겠습니까. 해조로서는 공판을 할 때에 비록 쌀을 주지 않더라도 본시 본사가 공급해 주는 것이 있으므로 전복(典僕) 및 사주인(私主人)156)(註 156)(사주인(私主人) : 지방에서 서울에 와 벼슬하는 사람들이 묵던 사삿집.) 에게 마련하도록 하면 되는데, 상례의 식사 이외에 놀이에 쓸 거리나 영접하고 전송할 때의 차림 따위를 멋대로 외람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의논에 흔들리지 말고, 국고(國庫)가 풍족하면 단지 조종조(祖宗朝)의 횡간 규정에 의하여 영구히 가공(家供)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가공에 관한 일은 공판을 개혁함으로 인하여 도리어 새로운 폐단을 일으키게 되었다. 여러 차례 다시 의논하도록 명했지만 좋은 계책은 보지 못했다. 혹은 마땅히 도로 그만두어야 한다고도 하고 혹은 구차한 의논만 올리고 있으므로 내 마음이 자못 쾌하지 못하다. 지금 계사(啓辭)를 보건대 횡간대로만 하자고 했는데, 이는 역시 쉬운 일이다. 다만 앞서 호조가 아뢴 것처럼 거행하기 어려울까 두렵다. 그러나 마땅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선조 7년 10월 28일)[36] 특진관 신식(申湜)은 아뢰기를, "기강이 퇴폐하여 아랫사람들이 폐단을 부리고 있습니다. 중국 사신이 나오더라도 소용되는 물품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중간에서 폐단을 부리는 일이 끝이 없는 탓입니다. 본디 우리 나라는 부세는 가볍고 공물(貢物)은 많아 민력이 여기에서 손상됩니다. 각 고을의 공물은 각각 사주인(私主人)이 있어 자기네끼리 서로 나누어 점유하여 부자간에 계속 전하고 있는데 본색(本色)의 물건이 좋더라도 10배의 값을 내지 않으면 바칠 수가 없습니다. 을해년168)(註 168)(을해년 : 1575 선조 8년.) 과 병자년169)(註 169)(병자년 : 1576 선조 9년.) 사이에 조정에서 이런 일을 염려하여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두고 사주인을 모두 혁파하였더니, 저들이 그 명맥을 잃자 원망이 분분하였으므로 얼마 안 되어 다시 하게 하였습니다. 이들의 작폐가 난후에 더욱 심하니 지금 공안(貢案)을 수정할 때에 중간에서 방해하는 일을 통렬히 혁파하여야 합니다. 근래 중국 사신이 또 나온다는데 국가에는 제반 물건이 모두 고갈되었습니다. 본색만 바치게 한다면 민생이 어찌 곤궁에 빠지기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선조 34년 10월 30일)[37] 여러 신하들이 다 아뢰고 나니, 상이 박순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여러 신하가 아뢴 말 중에서 어떤 일이 시행할 만한가?" 하니, 순이 차례로 분석하여 아뢰기를, "경제사 설치 문제는 사유를 갖추어 아뢰지 않았기 때문에 상께서 시행하기 어렵다고 여기시는데 마땅히 이이를 다시 불러 물으셔야 합니다." 하였다. 이이가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이 창졸간에 그에 대한 말을 자세하게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이 뜻을 다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갖가지로 폐단이 쌓여 군왕의 은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으니 반드시 시무(時務)에 마음을 둔 사람을 얻어 한 곳에 모여 서로 대책을 강구해서 시폐를 개혁하게 해야 합니다. 폐단만 다 개혁되면 또한 도로 관서를 혁파할 수도 있으며 관서를 설치하여 오래도록 보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오활하다고 본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맡긴단 말인가? 지난날 정공 도감(正供都監)도 폐단이 있었는데 이것도 폐단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였다. 박순이 아뢰기를, "각사의 관원을 각기 그 관사가 공궤하게 하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선조 14년 10월 16일)[38]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로 왔던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전에는 각 고을의 공물을 목면(木綿)으로 평균하여 사주인(私主人)에게 지급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상납하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전규(前規)에 의거하여 납부할 것을 독촉하고 있지만 목면이 매우 귀하기 때문에 모든 계책을 다 써도 목면을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별도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그 물건 값을 계산하도록 신에게 계달하여 변통케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색(本色)으로 상납하게 할 수는 없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전복(典僕) 등이 상사(上司)에 납부할 때 인정(人情)404)(註 404)(인정(人情) : 뇌물.) 을 바치는 것을 고달파하여 이와 같이 남징(濫徵)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외간의 사사로운 의견은 본색(本色)을 그대로 바치게 하되 호조(戶曹)로 하여금 납부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여 사주인(私主人)이 방납(防納)하는 폐단을 없애게 하고, 작목(作木)은 법대로 상납시키는 것이 마땅하며 사주인에게 급부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방납의 폐단이 이미 고질이 되었는데, 우상(右相)의 의견은 별도로 차사원을 정하여 스스로 공물을 납부하게 하면 폐단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전에 들으니, 백인걸(白仁傑)이 【인걸은 선조(先祖) 대의 유직(遺直)으로 관직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었을 때, 시탄 공물(柴炭貢物)을 자신이 직접 관할하여 납부하였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농간을 부릴 수 없었으므로 양주의 주민들이 공물이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역시 차사원을 별도로 정하되, 이와 같이 한다면 폐단을 막을 수 있겠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인걸과 같은 명사(名士)라면 가능하겠지만 미관 말직에 있는 관리들이야 필시 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노비 신공(奴婢身貢)의 경우에 있어서도 차사원을 데리고 온 적이 있었는데, 뇌물에 관한 일 때문에 감당해내지 못하였다고 하니, 매우 해괴합니다." 하였다. 원익이 아뢰기를, "납부하는 자와 차사원을 일시에 상경(上京)시키되 만일 인정을 남징하는 자가 있거든 호조에 호소하게 하여 자연히 규찰(糾察)하도록 하고 법사(法司) 또한 드러나는 대로 바로잡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개 내가 허락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와 같이 올라올 때에는 호조의 당상과 상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원익이 아뢰기를, "별도로 상의하여 잘 처리할 방도를 찾아보았으나 적당한 대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정당한 공사(公事)로써 말한다면 본색(本色)을 가지고와서 납부하는 것이 일에 매우 온당합니다만 형편상 할 수가 없을 따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무쪼록 편리한 방향으로 처리하도록 하라." 사신은 논한다. 국가의 기강이 느슨해지고, 나라의 법도 쓸어버린 듯 없어져 해관(該官)은 직무에 태만하고 하리(下吏)는 문서를 조작하며, 중간에서 사주인(私主人)이 일을 저지르는 폐단이 극에 달하였다. 뇌물을 핑계하고 크게 해독을 부려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수량이 본색(本色)보다도 더 많으니, 민생(民生)이 어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익(元翼)은 전하가 마음을 비운 날을 당하여 지금까지 내려온 폐단을 통렬히 혁파하고 유신(維新)의 정사를 크게 베풀었어야 마땅한데도, 도리어 사세에 얽매여 누적된 폐단을 결연히 제거시키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하였다. (선조 29년 10월 21일)[39] 간원이 아뢰기를, "공조 참판 허진(許晉)은 아무런 탈이 없이 집에 있었는데 예조가 망령되이 하리가 전하는 헛소문을 믿고서 죽었다는 공사(公事)를 만들었고 심지어는 정원에 올리고 조보(朝報)에 싣기까지 하였습니다. 재신(宰臣)의 생사를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고 이처럼 전도되게 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당상과 낭청을 모두 추고토록 명하시고 색리(色吏)를 수금하고 치죄하소서. 공물을 방납(防納)하는 폐단이 날로 더욱 외람되어져 본토에서 생산되는 물건이라도 모리배가 먼저 자진 납부하여 본 고을에서 손을 쓸 수 없게 만듭니다. 행여 본색(本色)을 가지고와서 납부하는 자가 있으면 사주인(私主人)들이 백방으로 조종하여 그 물건이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퇴짜를 놓게 하고 결국은 자기 물건을 납부하도록 도모하였으며, 값을 마구 올려 10배의 이익을 취하니 생민의 고혈(膏血)이 고갈되었습니다. 이익의 길이 한 번 열리자 소민(小民)만 다툴 뿐 아니라 세가(勢家), 귀족(貴族)도 공공연히 대납하는 것은 물론 간혹 사대부의 집안에서도 장사꾼과 더불어 납부를 도모하고 이익을 나누면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니 이미 고질직인 폐단이 되었습니다. 만약 법금을 거듭 밝혀 통렬히 개혁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지금 이후는 각도 관찰사로 하여금 월령(月令)을 상고하여 시기에 임박하여 간품(看品)해서 각별히 선정하게 하고 차사원이 직접 받아오면 해관(該官)이 대감(臺監)과 함께 입회하여 거두어들이되, 그 사이에 간혹 방납했다가 탄로된 자가 있으면 조관(朝官)은 장오죄로 논하고 장사꾼은 법전에 따라 전가 사변(全家徙邊)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 40년 10월 3일)[40] 광해군 시기는 경기도 외에도 최초로 임시적인 공물작미(貢物作米)들이 광역단위로 시행되기도 했는데 선조 40년 정미년에 이루어진 공물작미(貢物作米)의 근거라고 알려진 기사[79]의 정미년은 광해 9년 정사년의 오기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즉 광해 9년 정사년에 충청전라 해읍에서 공물작미(貢物作米)가 실시된 것이다. 이충(李沖)은 선조 대에 호조판서가 아닌 광해 대에 호조판서이고 병진년은 정사년 바로 전해이다. 병진년 이후 납입할 충청전라 해읍의 공물을 정사년에 작미(作米)해서 납입할 것을 광해군이 결재했다는 기사이다. 광해군 의문의 1승 이충(李沖)이 호조판서로 있을때 실제로 했었던 다음의 발언[80]을 참고하라[41] 하는 짓은 딱 중종 같은 암군인데 막상 중종보다 제대로 한 것이[81] 많은가 하면 중종이 명군으로 보일 지경이니 그렇지도 않은 것이 문제다.[42] 우부승지 이이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에 관한 것과 재변을 없애고 덕을 진취시키는 것에 대한 설을 극진히 아뢰었다. 그 소에, "신은 삼가 아룁니다. 정사는 시의(時宜)를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실공(實功)을 힘쓰는 것이 중요하니, 정사를 하면서 시의를 모르고 일을 당하여 실공을 힘쓰지 않으면 비록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치적(治績)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오늘 한 가지 계획을 진언하여 명목 없는 조세(租稅)를 없앨 것을 요청해 보아도 각 고을의 세금 징수는 여전하고, 다음날 한 가지 일을 건의하여 전호(田戶)의 부역(賦役)을 고르게 할 것을 요청해 보아도 호족(豪族)이 부역에서 빠지는 것은 전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선상(選上)을 줄인 것은 공천(公賤)을 소복(蘇復)시키기 위한 것인데도 치우치게 고통을 받은 자들은 예나 다름없이 떠돌아다니고, 방납(防納)을 금한 것은 백성의 재물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도 뇌물을 받으며 백성을 갈취하는 자들은 더 심하게 뛰고 있습니다. 탐욕을 부리는 관원을 탄핵하여 파직시키면 그 후임자가 반드시 앞 사람보다 훌륭한 것도 아닌데 공연히 마중하고 전송하는 폐나 끼치게 되고, 변장(邊將)을 가려 보낼 것을 청하면 인망(人望)이 두터운 자가 반드시 신진(新進)보다 우수하지도 않은데 도리어 방자하여 조심성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 밖에 훌륭한 명이 내려지고 아름다운 법이 반포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 주현(州縣)에 그저 몇 줄의 문서 쪽지만 전달할 뿐, 시골 백성들은 그것이 무슨 일인지조차 모릅니다....백성을 편안히 하는 데에는 그 요강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심을 열어 뭇 신하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공안(貢案)을 개혁하여 지나치게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애는 것이고, 셋째는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여 사치스런 풍조를 개혁하는 것이고, 넷째는 선상(選上)의 제도를 바꾸어 공천(公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고, 다섯째는 군정(軍政)을 개혁하여 안팎의 방비를 굳건히 하는 것입니다....이른바 ‘공안(貢案)을 개혁하여 심하게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앤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조종조에서는 쓰임새를 매우 절약하여 백성들에게 거두는 것도 매우 적었는데, 연산군(燕山君) 중년에 이르러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바람에 일상적인 공물로써는 그 수요를 충당하기에 부족하게 되었으므로, 공물을 더 책정하여 그 욕망을 충족시켰던 것입니다. 신은 지난날에 노인들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듣고도 감히 그대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정원에서 호조의 공안을 가져다 보건대, 여러 가지 공물이 모두 홍치(弘治)010)(註 010)(홍치(弘治) :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신유년011)(註 011)(신유년 : 1501 연산군 7년.) 에 더 책정한 것을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었는데, 그때는 바로 연산군 때였습니다. 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안을 덮고 탄식하기를, ‘이럴 수가 있는가. 홍치 신유년이라면 지금부터 74년 전이니, 그 간에 성군(聖君)이 왕위에 있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현사(賢士)가 조정에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런 법을 어찌하여 개혁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그 까닭을 추구해 보건대 그 70년 동안은 모두 권간(權奸)들이 국사를 장악한 때로서 두세 명의 군자가 간혹 조정에 있었다고는 하나 뜻을 펴보기도 전에 사화가 꼭 뒤따랐으니, 이에 대하여 논의할 겨를이 어찌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그 일을 오늘날에 기대하는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물산(物産)은 수시로 변하고 백성들의 재물과 전결(田結)도 수시로 증감하는 것인데, 공물을 나누어 책정한 것은 바로 국초(國初)의 일이었고 연산군 때에는 다만 거기에 더 늘려 책정한 것일 뿐이니, 역시 시대마다 적절히 헤아려 변통해 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에 와서는 각읍에다 바치는 공물이 그곳 산물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어서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고 배를 타고 물에서 짐승을 잡으려 하는 일이나 같게 되었으니, 다른 고을에서 사들이거나 또는 서울에 와서 사다가 바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백성들의 비용은 백 배로 늘어나고 공용(公用)에는 여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민호(民戶)는 점점 줄어들고 전야(田野)는 갈수록 황폐해져서 몇 년 전에 백 명이 바치던 분량을 작년에는 열 명에게 책임지워 바치게 하고, 작년에 열 명이 바치던 분량을 금년에는 한 사람에게 책임지워 바치게 하고 있으니, 이 상태로 나간다면 반드시 그 한 사람마저 없어진 뒤에야 끝장이 날 형편입니다. 오늘날 공안을 개정하자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조종의 법은 가벼이 고쳐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핑계를 대곤 합니다. 그러나 조종의 법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의 곤궁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고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연산군 때의 법이 아닙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일을 파악할 만한 슬기가 있고, 장래의 일을 미루어 알 만한 심계(心計)가 있으며, 일을 잘 처리할 만한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 공안에 관한 일을 전담하게 하되 대신으로 하여금 그들을 통솔하게 함으로써, 연산군 때에 더 책정한 분량을 모두 없애 조종의 옛 법을 회복하게 하소서. 그리고 각읍의 물산 유무와 전결의 다소와 민호의 잔성(殘盛)을 조사하고 상호 조절해서 한결같이 고르게 하고 반드시 본색(本色)을 각사(各司)에 바치도록 하면, 방납(防納)은 금하지 않아도 자연히 없어지고 민생은 극심한 고통으로부터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시급한 일로서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이른바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여 사치 풍조를 개혁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재물이 고갈된 것이 오늘날에 와서 극도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공물을 감해 주지 않을 수가 없는데 만약 소비하는 것을 조종의 법대로 하지 않으면, 수입에 맞추어 지출할 수 없게 되어 마치 모난 그릇에 둥근 뚜껑을 덮는 것처럼 앞뒤가 들어맞지 않을 것입니다....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자세히 보시고 익히 검토하시며 신중히 궁구하고 깊이 생각하시어 성상의 마음 속에서 취하고 버릴 것을 결정하신 다음, 널리 조정의 신하들에게 하문하시어 그 가부를 의논하게 한 뒤에 이를 받아들이거나 물리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전하께서 신의 계책을 채택하신다면 그 진행을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 정성껏 그것을 시행하게 하고 확신을 갖고 지켜 나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보수적인 세속의 견해로 인하여 바뀌게 하지 말고, 올바른 것을 그르다 하며 남을 모함하는 말로 인하여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3년이 지나도록 나랏일이 여전히 부진하고 백성이 편안해지지 않으며 군대가 정예로와지지 않는다면, 신을 기망(欺罔)의 죄로 다스리어 요망한 말을 하는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상소의 사연을 살펴보니 요순 시대를 만들겠다는 뜻을 볼 수 있었다. 그 논의는 참으로 훌륭하여 아무리 옛 사람이라도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하가 있는데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어찌 걱정하겠는가. 그 충성이 매우 가상하니 감히 기록해 두고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 다만 일이 경장(更張)에 관계된 것이 많아 갑자기 전부 고칠 수는 없다." 하고, 이 소를 여러 대신에게 보여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는 한편, 또 소를 등서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 당시 인심이 불안하던 차에 이이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고서는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선조수정 7년 1월 1일)[43] 또 기록한다. 유희춘이 아뢰기를, "상께서 즉위하신 뒤로 형벌이 맞지 않는 일이 드물어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백성들의 부역(賦役)이 공평하지 못합니다. 이는 본래 그전부터 행해져 내려온 것이지만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무(時務)를 아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 전일에 올린 이이의 상소에 대해 상께서 답하신 말씀이 매우 권장하고 허여하신 것이므로, 각기 보고듣는 사람마다 모두 감격하였습니다. 소신도 역시 재질과 학식이 이 사람만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만일 이 사람만 하다면 어찌 이처럼 권장받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이번에 이이의 상소로 인하여 공물(貢物)·선상(選上)013)[82] ·군정(軍政)에 관한 일을 강구해서 시행한다면 백성들의 곤고함이 소복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추기(追記)한다. (선조 7년 1월 21일)[44] 또 ‘임금이 백성을 위해 평안하도록 도모하지 못함은 또한 도리어 백성을 학대하는 짓이다.’ 한 대문을 강하고 아뢰기를, "지금의 민생들 고통은 바로 공물(貢物) 및 신역(身役)이 균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마땅히 이이(李珥)의 만언소(萬言疏)대로 변통(變通)하여 병폐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였다. (선조 7년 3월 6일)[45]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민생(民生)이 과거에 비해 어떠한가?" 하였다. 이이가 답하기를, "권간(權奸)이 국정을 담당할 때에 비교해 보면 가렴 주구(苛斂誅求)는 줄어든 듯하지만, 공부(貢賦)와 요역(徭役)의 법이 매우 사리에 어긋나서 날로 잘못되어 백성이 그 폐해를 입고 있으니, 만약 고치지 않는다면 비록 날마다 백성을 사랑하라는 전교를 내려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 8년 10월 24일)[46] 이때 가뭄이 대단히 심하여 농사가 또 장차 흉년이 들게 되었는데 평안·황해 두 도는 더욱 심하였다. 상이 경연에 나아가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흉황(凶荒)이 이러한데 서도(西道)는 더욱 심하다. 기근이 계속된 데다가 병난마저 일어난다면 계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겠는가?"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모름지기 미리 재력을 축적하여 구제해야 합니다." 하고, 이이가 아뢰기를, "만약 폐단이 되는 법을 변통하여 어려움을 구제하지 않고 다만 곡식을 옮겨 백성을 살리려고 한다면 곡식 또한 이미 절핍되어 옮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이와 같이 위급하니 상께서도 마땅히 변통할 대책을 생각하셔야 하고 모든 경비도 또한 마땅히 재감(裁減)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쓰임새는 별로 늘린 것이 없이 단지 옛 규례만 따르는데도 오히려 부족하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세금의 수입이 매우 많았으나 지금은 해마다 흉년이 들어 세금의 수입이 매우 적습니다. 그런데 경비는 그대로 구례를 따르고 있으니 어찌 절핍되지 않겠습니까. 세금의 수입을 적절히 늘려 정해서 나라의 경비를 넉넉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지만 백성의 생계가 매우 곤궁하여 형편상 더 거둘 수 없으니, 반드시 먼저 누적된 고통을 풀어 민심을 기쁘게 한 다음에 세금을 거두는 것이 적절한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공안(貢案)은 민가(民家)의 빈부(貧富)와 전결(田結)의 다소(多少)를 헤아리지 않은 채 무원칙하게 나누어 배정하고 또 토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방납(防納)하는 무리가 모리(牟利)를 할 수 있어 평민이 곤궁과 고통을 겪습니다. 이제 공안을 개정하되 민가와 전결을 헤아려 균등한 수량을 공평하게 배정하고 반드시 토산물로 바치게 한다면 백성의 쌓인 고통이 풀어질 것입니다." 하고, 유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 "이 일은 서둘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반드시 적합한 사람을 얻은 다음에 비로소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형세로 보아 필시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의 휴척(休戚)은 수령에게 달렸고 수령의 근면과 태만은 감사에게 달렸는데, 감사가 자주 바뀌기 때문에 누구나 구차하게 세월만 보내면서 정사에는 마음을 두려하지 않고 관례에 따라 오가고 있으며, 그 중에 직책을 다하는 자가 있더라도 또한 미쳐 시행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니 모름지기 큰 고을로 감영을 만들어 감사가 그 고을에 머물러 가족을 데리고 가서 다스리게 하여 책임을 맡겨 공효를 독책(督責)하면서 그 직에 오랫동안 있게 하고는 조정의 신하 가운데 법도를 제정해서 다스릴 만한 재간이 있는 자를 특별히 가려서 제수한다면 반드시 그 공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랫동안 맡기면 권세를 잡고 제멋대로 독단할 우려가 없겠는가."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이는 사람을 가리기에 달렸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어찌 가려 보내는 데 합당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주현(州縣)이 매우 많이 수령을 정선할 수가 없다. 나는 병합하여 줄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여러 신하가 다 대답하기를, "상의 분부가 매우 지당합니다. 만약 극히 쇠잔한 고을을 병합하여 다른 고을에 붙인다면 백성의 부역이 매우 수월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변혁하는 일은 경솔히 시행하기 어렵다. 나는 고을의 이름은 없애지 않고 한 고을 수령이 두세 고을을 겸임해 다스리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도 자주 변혁한 일이 있었으니 이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 때 국고가 이미 바닥이 나서 이듬해에는 구황할 대책이 없었다. 이이가 그것을 깊이 염려한 나머지 동료와 상의하고 차자를 올려, 나쁜 법을 변통하고 공안을 개정하며 주현을 병합하여 줄이고 감사를 오랫동안 맡길 것을 청하고, 또 어진이를 써서 인재를 진작하게 하고 몸을 닦아 다스리는 근본을 맑게 하며 붕당을 없애 조정을 화목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니 참으로 좋은 말이다. 옛법을 변경하는 일은 경솔히 하기 어려울 듯하다. 마땅히 대신과 의논하여 조치하겠다." 하였다. (선조 14년 5월 24일)[47] 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서도(西道)가 더욱 극심하다. 기근이 겹친데다 병란이 일어난다면 어떠한 계책을 써야 하겠는가?"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미리 재력을 비축하여 구제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이는 아뢰기를, "폐법(弊法)을 변통시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지 않고 단지 곡식만을 옮겨 백성들을 구제하려고 한다면 곡식 또한 핍절되어 옮길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매우 위태로우니 상께서는 변통시키는 계책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경비의 수요도 재량하여 감소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용도는 별로 증가시킨 것이 없이 예전 규례대로 준행하였을 뿐인데도 부족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세입(稅入)이 매우 많았지만 지금은 해마다 흉작이어서 세입이 매우 적습니다. 그런데 경비만은 예전 규례를 그대로 존속해 나가고 있으니 어떻게 궁핍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의 경비를 풍족하게 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헤아려 세공(稅貢)을 더 배정해야 할 것 같지만 민생이 곤란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서 부가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쌓인 고통을 해소시켜 민심을 기쁘게 해준 다음에야 조세(租稅)를 거두는 데 있어 적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공안(貢案)은 민호(民戶)의 성쇠와 전결(田結)의 다소를 고려하지 않고 난잡스럽게 분정하였는가 하면 바치는 물건도 모두가 토산물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방납(防納)하는 무리들만이 이익을 취득하므로 백성들만 곤궁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공안(貢案)을 개정하는 데 있어 민호와 전결을 참작하여 균등하고 공평하게 배정하고 토산물로만 바치게 한다면 백성들이 쌓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 일을 속히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무엇보다도 인재를 얻어야만 폐단을 구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민의 휴척(休戚)은 수령의 현부에 달려 있고 감사는 수령의 근만(勤慢)을 규찰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주 교체되기 때문에 모두가 구차스럽게 세월만 보내면서 정사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개중에는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려는 자가 있기도 하나 그들 역시 어떠한 일을 시행하지는 못합니다. 큰 고을에 감영(監營)을 설치하고 감사로 하여금 그 고을 수령을 겸임하게 하되 가족을 데리고 가서 다스리게 하여 책임을 완성하도록 위임시키되 조정의 신하들 중에 백성을 거느려 다스릴 만한 재주를 지녔거나 공보(公輔)의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별도로 선발하여 제수하면 필시 공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구임(久任)시키면 권세를 부리고 독단하는 폐단이 있지 않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점에 있어서는 인재를 얻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주현(州縣)이 너무 많기 때문에 수령을 정하게 뽑을 수 없다. 나는 병합시켜 줄이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하니, 군신들이 모두 대답하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만일 몹시 잔폐된 고을을 병합시켜 다른 고을에 붙인다면 백성들의 부역이 어느 정도 완화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혁하는 데에는 폐단이 있게 마련인데 경솔하게 거행할 수 없다. 나는 그러한 명칭을 거론하지 않고 단지 한 고을 수령이 두세 고을을 겸하여 다스리게 하고 싶은데 어떠할는지 모르겠다."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도 자주 개혁한 일이 있었으니 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이는 상의 뜻이 재변을 걱정하고 다스려 보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물러나와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폐법(弊法)을 변통시킬 것, 공안(貢案)을 개정할 것, 주현(州縣)을 병합시킬 것, 감사(監司)를 구임시킬 것 등을 청하고, 또 현자를 등용하여 인재를 진작시킬 것, 몸을 닦음으로써 치본(治本)을 맑게 할 것, 붕당을 제거시킴으로써 조정을 화합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보았는데 참으로 가상하다. 구법(舊法)을 변통시키는 일은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는 것인 듯하다. 그러나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고, 소장은 정부에 내렸다. (선조수정 14년 5월 1일)[48]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극진하게 진달하였다. 그 상소에, "삼가 아룁니다. 흥망은 조짐이 있고 치란은 기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닥치기 전에 말을 하면 흔히 신임을 받지 못하고 일이 닥친 뒤에 말을 하면 구제하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폐정(弊政)을 혁신하는 문제에 대하여 신이 전부터 간청한 바는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군적(軍籍)을 고치고, 주현(州縣)을 병합하고, 감사(監司)를 구임(久任)시키는 4조항이었을 뿐입니다. 군적을 고치는 일에 대해서는 윤허를 받았으나 신이 감히 일을 착수하지 못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신의 당초 의도는, 군졸의 설치 목적이 어디까지나 방어에 있는 만큼 군졸이 공물을 진상하는 역(役)을 감소시켜 전결(田結)에 이전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여유를 갖고 힘을 기르며 훈련에만 전념하여 위급함에 대비케 하고자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안을 고치지 말도록 명하셨으니, 군적을 고치더라도 양병(養兵)하는 계책은 반드시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옛말에 ‘이익이 10배가 되지 않으면 옛것을 고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만약 경장(更張)한다는 헛 소문만 있고 변통하는 실리를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옛날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아, 공안을 고치지 않으면 백성의 힘이 끝내 펴질 수가 없고 나라의 쓰임이 넉넉해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 변방 사태가 점점 심각해져서 안정될 기약이 없으니, 우선 시급한 것은 군사인데 식량이 모자랍니다. 그렇다고 부세를 더 징수하게 되면 백성이 더욱 곤궁해질 것이고 더 징수하지 않으면 국고(國庫)가 반드시 바닥날 것입니다. 더구나 군기(軍器)를 별도로 만들고 금군(禁軍)을 더 설치하는 등의 일 모두가 불가피한 것으로서 경비 이외에 조달할 곳이 매우 많은데, 어떤 특별한 계책을 내어 경비의 용도를 보충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주현 병합 계획은 본래 성상께서 생각해내신 것으로서 시행하기도 어렵지 않고 이해관계도 분명합니다. 전하께서는 매양 연혁(沿革)이라는 것을 중대하게 생각하십니다만, 옛날부터 연혁해 온 것도 꼭 대단하게 변통시킨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나누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기록에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소읍(小邑)의 쇠잔한 백성이 많은 역사(役事)에 시달리고 있는데, 만약 하루아침에 몇 고을을 병합하여 하나로 만들 경우 그 백성들은 마치 거꾸로 매달렸다가 풀려난 것처럼 기뻐할 것입니다. 지금 한 가지 일만 보아도 그 효과를 알 수 있습니다. 황주 판관(黃州判官)을 혁파하자 관리와 백성이 뛰고 춤추며 서로들 경하하였는데, 두 고을을 하나로 병합하는 일도 판관을 혁파할 때의 경우와 다름이 없으리라는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 백성들의 괴로움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수가 있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한번 혜택을 베풀어 주려 하지 않으십니까....의논하는 사람들은 혹 소요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근심하여 변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공안을 고치고 군적을 고치고 주현을 병합하는 등의 일은 모두가 조정에서 상의하여 결정하면 되는 일일뿐 백성에게는 한 되의 쌀이나 한 자의 베의 비용도 들지 않는데, 백성들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소요할 근심이 있단 말입니까. 양전(量田)027)(註 027)(양전(量田) : 농지 측량.) 과 같은 경우는 백성에게 약간의 동요가 없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풍년이 들 때를 기다려 시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안의 개정은 반드시 양전한 뒤에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공안은 전결(田結)의 다과(多寡)로써 고르게 정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양전한다고 해서 전결의 증감이 어찌 크게 차이가 나기야 하겠습니까. 따라서 공안부터 먼저 고치고나서 뒤따라 양전한다 해도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전결에 면적이 차고 모자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들 어찌 오늘날의 공안처럼 전결의 다과를 따지지 않고 멋대로 잘못 정한 것과 같기야 하겠습니까....아, 비도(匪徒)의 난리는 방비가 없는 데에서 일어나고 승패와 안위는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은 오히려 조용히 담소하며 서서히 옛 규정이나 상고할 뿐인데, 게다가 중론이 분분하게 일어나서 절충될 기약이 없으니, 만약 조정의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린다면 변방의 성은 이미 함락 되고 말 것입니다. ‘모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일이 성취되지 않는다.(謨夫孔多 是用不集)’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아, 형편없고 어리석은 신이 성명(聖明)을 만나 은총을 믿고는 조금도 숨김없이 망령된 말을 전후 여러 차례에 걸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계책이 소루하여 열에 하나도 시행되지 않으니, 외로운 처지에서 심정만 쓸쓸할 따름입니다.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받아 마땅한 것이므로 밤낮으로 슬퍼하고 탄식하며 머리털이 하얗게 되고 마음이 녹아내리는 지경인데도 수고롭기만 할 뿐 유익함이 없습니다. ‘힘껏 직무를 수행하다가 능력이 없으면 그만둔다.’030)[83] 라고 하였으니, 의리상 물러나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것이 마땅하나, 간담을 헤치고 심혈을 기울여 지금까지 슬피 부르짖으며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은, 진실로 국가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다 보답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뭇더미에 불이 붙는 것을 환히 보면서 감히 제몸만 돌보는 생각을 품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다시 말하지 않는다면 신에게 그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가엾게 살피시어 받아들여 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내가 우연히 연전에 경이 올린 상소를 보던 중이었는데 이번에 올린 경의 상소가 마침 들어왔다. 전후에 걸쳐 정성스런 상소를 보건대 용렬한 임금을 잊지 않는 경의 고충(孤忠)이 정말 아름답게 여겨진다. 나라 일은 훌륭한 대신들에게 맡겨야 마땅하다. 남행(南行)을 대간(臺諫)으로 삼았던 것은 이미 지나간 일로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다. 한 번 실수한 것도 이미 충분한데 어찌 차마 두 번씩이야 잘못할 수 있겠는가. 공안에 관한 일은, 조정에 의논하게 하였는데 그 논의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감히 다시 고치지 못한 것이다. 설혹 고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아울러 거행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군적에 관한 일은 본조에서 이미 명을 받았으니, 경이 어떻게 시행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주현을 병합하는 문제는 과연 나의 밝지 못하고 얕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다른 폐단을 끼치게 될까 하여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겨 변경하지 못하였는데, 경이 지극히 청하여 마지 않으니 한 번 시험해 봐야 하겠다. 감사를 구임시키는 일은 새로 제도를 만들기 어려워 지금까지 미루어왔으나, 그것도 경의 계책을 따라 먼저 양남(兩南)에서 시험하도록 하겠다. 서얼과 공천·사천을 허통해 주는 일은, 처음 사변이 일어났을 적에 경의 헌책(獻策)으로 인하여 즉시 시행하도록 명했으나, 언관(言官)이 논박하고 있으니 다시 비변사에 물어서 상의하여 거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세속에서 문·무과를 거치지 않고 입사(入仕)한 자를 남행(南行)이라고 한다. 이이(李珥) 등이 미출신인(未出身人)으로서 대간(臺諫)을 삼기로 청한 한수(韓修)·유몽학(柳夢鶴) 등이 이것이다. 성혼(成渾) 등은 일민(逸民)으로서 추천된 자이므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선조수정 16년 4월 1일)[49] 공안(貢案)을 상정(詳定)하도록 명하였다. 전란이 일어난 뒤로 공법(貢法)이 더욱 무너졌으므로 구안(舊案)을 감하여 한결같이 토산(土産)의 증감(增減)에 따르도록 명하였는데, 완전히 바로잡지 못한 상태에서 그만 두었다. 공물(貢物)을 쌀로 바치게 하자는 의논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선조수정 27년 1월 1일)[50] 영의정 유성룡이 차자를 올려 시무(時務)에 대해 진술하였다. 그 대략에, "‘깊은 근심 속에서 성명(聖明)한 지혜가 열리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국가가 흥기된다.’ 하였습니다....신은 또 듣건대 난리를 평정하여 정상을 되찾게 하는 방법이 충분한 식량과 군사에 있다고는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민심을 얻는 근본은 달리 구할 수 없고 다만 요역(徭役)과 부렴(賦斂)을 가볍게 하며 더불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 주는 데 있을 따름입니다. 국가에서 받아들이는 전세(田稅)는 십일세(什一稅)008)[84] 보다 가벼워서 백성들이 무겁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전세 이외의 공물 진상이나 각 절기 때마다 바치는 방물(方物) 등으로 인해 침해당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당초 공물을 마련할 때에 전결(田結)의 수로써 균일하게 배정하지 않고 크고 작은 고을마다 많고 적음이 월등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1결(結)당 공물값으로 혹 쌀 1, 2두(斗)를 내는 경우도 있고 혹은 쌀 7, 8두를 내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10두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에게 불공평하게 부과되어 있는데 게다가 도로를 왕래하는 비용까지 가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관청에 봉납(捧納)할 때는 또 간사한 아전들이 조종하고 농간을 부려 백 배나 비용이 더 들게 되는데, 공가(公家)로 들어가는 것은 겨우 10분의 2, 3에 불과할 뿐, 나머지는 모두 사문(私門)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진상에 따른 폐단은 더욱 심하게 백성을 괴롭히는 점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당초에 법을 마련할 때는 반드시 이와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시한 지 백 년이 지나는 동안에 속임수가 만연하여 온갖 폐단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곧바로 변통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다시 소생할 가망이 없고 나라의 저축도 풍부히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신은 늘 생각건대 공물을 처치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도내 공물의 원수(元數)가 얼마인지 총 계산하고 또 도내 전결의 수를 계산하여 자세히 참작해서 가지런하게 한 다음 많은 데는 감하고 적은 데는 더 보태 크고 작은 고을을 막론하고 모두 한가지로 마련해야 되리라 여겨집니다. 이를테면 갑읍(甲邑)에서 1결당 1두를 낸다면 을읍·병읍에서도 1두를 내고, 2두를 낸다면 도내의 고을에서 모두 2두를 내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백성의 힘도 균등해지고 내는 것도 한결같아질 것입니다. 방물 값 또한 이에 의거해서 고루 배정하되 쌀이든 콩이든 그 1도에서 1년에 소출되는 방물의 수를 전결에 따라 고르게 납입토록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결마다 내는 것이 그저 몇 되 몇 홉 정도에 불과하여 백성들은 방물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진상할 때에도 이런 식으로 모두 쌀이나 콩으로 값을 내게 해야 합니다. 이상 여러 조건으로 징수한 것들은, 전라도는 군산(群山)의 법성창(法聖倉)에, 충청도는 아산(牙山)과 가흥창(可興倉)에, 강원도는 흥원창(興元倉)에, 황해도는 금곡(金谷)의 조읍창(助邑倉)에 들이도록 하고, 경상도는 본도(本道)가 소복(蘇復)될 동안엔 본도에 납입하여 군량으로 하고, 함경도·평안도는 본도에 저장하고, 5개 도의 쌀과 콩은 모두 경창(京倉)으로 수송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 관청에 공물과 방물을 진상할 때 물건을 따져서 값을 정하는 것은 마치 제용감(濟用監)에서 모시·베·가목(價木)을 진헌하던 전례와 같이 해서 유사(有司)로 하여금 사서 쓰게 하고, 만약 군자(軍資)가 부족하거나 국가에서 별도로 조도(調度)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공물과 방물을 진상하는 수를 헤아려 재감(裁減)해야 합니다. 그러면 창고 안에 저장되어 있는 쌀과 콩을 번거롭게 환작(換作)하지 않고도 한량없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명나라에서는 외방에서 진상하는 일이 없이 다만 13도(道)의 속은(贖銀)을 광록시(光祿寺)에 두었다가 진공할 물품을 모두 이것으로 사서 쓰고, 만약 별도로 쓸 일이 있을 경우에는 특명으로 감선(減膳)하여 그 가은(價銀)을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먼 지방 백성들이 수레에 실어 운반하는 노고를 치르지 않는데도 사방의 공장(工匠)이 생산한 온갖 물품이 경도(京都)에 모여들지 않는 것이 없어 마치 깊은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것처럼 무엇이든 얻지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경사(京師)는 날로 풍부해지고 농촌 백성들은 태평스럽고 편안한 마음으로 직업에 종사한다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제도이니 우리 나라도 본받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그러면 일세의 유능하고 지혜있는 선비들이 모두 모여들어 국가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맡아 수행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차자를 비변사에 내려 모두 채택해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진관(鎭管)의 법은 사람들이 모두 편리하게 여겼는데도 끝내 시행되지 않았고, 공물 진상을 쌀로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의 뜻이 모두 강구하고 싶어하지 않아 거행되지 못하고 파기되었다. (선조수정 27년 4월 1일)[51] 비변사가 아뢰기를, "오늘의 위태로운 형세는 참으로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사람들이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인데도 팔짱을 낀 채 아무런 계책도 세울 수 없는 것은 오직 군량 한 가지 문제일 뿐입니다. 서울에 비축해 놓은 것은 겨우 몇 달을 지탱할 정도며 외방의 창고도 한결같이 고갈되었습니다. 지금은 가을이라 곡식이 익을 때인데도 공사(公私)의 형편이 이와 같으니 명년 곡식이 익기 전에는 다시 무슨 물건을 가져다가 이어 구제하겠습니까. 불행히도 적의 형세가 다시 치열해져 명군(明軍)이 들어온다면 우리 나라 신료들은 비록 군수물을 대지 못했다는 죄로써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일을 그르친 죄를 족히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문제를 의논하는 사람들이 어떤 이는 은(銀)을 채굴하여 곡식을 사들이자고 하고 어떤 이는 포목을 방출하여 곡식을 사들이자고도 합니다. 대개 은은 비록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기는 하지만 그 산출되는 양이 많지 못하여 힘이 많이 드는 반면 소득은 적고, 포목을 가지고 곡식을 사들인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역시 소량이니 국가의 씀씀이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때문에 오늘날 재용을 늘리는 방법은 각도의 공물(貢物) 진상을 모두 쌀로 하게 하고 또 상번 군사(上番軍士)의 호봉족(戶奉足)과 각사 노비(各司奴婢)의 신공(身貢)을 전부 쌀로 마련케 하며, 아울러 바닷가 소금 굽는 곳에서 많은 양을 구워내어 산협(山峽)의 소금이 귀한 지역에 배로 운반하여 곡식으로 바꾸어들인다면 소득이 반드시 많을 터이니, 이것이 오늘날 재용을 늘리는 방법입니다. 이외에 또 둔전(屯田)이 있으니 마땅히 시기에 맞추어 강구하고 힘써 실행할 것을 호조로 하여금 마련해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27년 9월 20일)[52] 결국 군량도 뜯고 공물도 또 뜯는 식으로[85]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애초에 군량 자체도 못 모았다.[86][87][88][89][90][91] 사기를 치려다[92] 제대로 치지도 못한 셈이다.[53] 지금의 인사동 관훈빌딩 언저리이다.[54] 카를 마르크스유물론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경덕의 경우는 기가 이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건 중국 성리학에도 없는 내용이었고, 이후에도 서경덕 계통의 학파는 맥이 단절되었다.[55] 흥미로운 점은 심지어 서인의 두 거두인 이이와 성혼도 논쟁을 했다.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하는 이이와 '이기 분속설(理氣 分屬說)'을 주장하는 성혼 간의 율·우논쟁(栗牛論爭).[56] 이이의 친구이자 학문적 동반자인 성혼의 학문은 사위 윤황과 외손자 윤선거를 통해 계승된다. 윤선거는 김집을 사사하기도 했고 아들 윤증으로 학맥이 이어져 나가며 소론의 뿌리 중 하나를 형성하게 된다.[57] 시급한 일, 혹은 그 시대에 중요하게 다루어야할 패러다임과 같은 말이다.[58]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뜻. 쉽게 말해 일을 해도 성과가 제대로 나도록 해야한다는 뜻이다.[59] 좌의정 심통원으로 심의겸의 작은 할아버지라는게 압권이다. 하지만 심의겸은 이를 일절 문제삼지 않았고 이것이 이이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배경이라고도 한다.[60] 심지어 중간에 자리를 잠깐 옮긴 자리도 홍문관 부제학이었다.[61] 다만 이 사례에는 문제가 있는데, 선조실록은 굉장히 부실할 뿐더러 선조수정실록이라고 정철을 비판했다.[62] 율곡전서에는 십만 양병설이 본편에는 없고 부록에 들어가 있다. 물론 율곡전서 역시 김장생의 율곡행장보다는 편찬시기가 느리다.[63] 당시에도 군역을 누가 지느냐에 대한 문제는 왈가왈부가 많았다. 후대로 가면서 개선을 꾀한다고는 하나 불합리하게 군역을 져야했던 대상들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됐던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자. 현재 대한민국에서조차 병역 징집 대상에서 누가 들어가고 누가 빠지고를 결정하는 일은 많은 논란을 불러오는데..[64]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반으로 사망한 것이 1582년 6월이었고 노부나가의 가신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제압한 것이 1586년, 규슈 토벌이 1587년이었고 1592년에 조선 침공이 일어났다. 1583년에 왜국의 침략을 예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65] 비단 누르하치가 아니더라도 조선과 국경을 맞닿은 건주 여진과 야인 여진에서 세력을 키우던 왕고, 왕올당 등의 여진 추장들은 1570~80년대 조선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66] 실제 유교에서 강조하는 군주에 대한 충성 사상은 모든 군주에게 있어서 매력적이기에 가능할 법한 이야기.[67] 장자는 양자로 들이면 안 되지만 이 규정도 편법으로 무시했다. 지손 가문의 장자를 종가의 양자로 들이기가 성행했다.[68] 여기서 더 이어지는 버전도 있다. 구미호를 퇴치한 한 후 노파가 구미호의 시체가 있던 곳에 여우 석상이 있을테니 절대 만지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이이는 이를 역시나 어긴다. 이이가 석상을 만지자 석상이 연기가 되어 이이에게 빨려 들어가는데, 놀란 이이가 노파에게 상담하니 구미호가 이이의 딸로 환생하여 재앙을 내리려 하니 나중에 태어날 딸을 죽여야지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며 마지막 충고를 한다. 그러나 이이는 딸을 죽일 수 없었고 그 대가로 이이는 십만양병설을 이루지 못하고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고 끝을 맺는다.[69] 이야기의 다른 버전에 따르면 죽은 밤나무가 승려로 변한 호랑이에게 "죽은 밤나무는 밤나무가 아니더냐~!"라고 호통쳐서 호랑이가 달아났다고도 한다. 또다른 전승으로는 이원수가 심은 나무들 중 상수리나무가 1그루 섞여있었는데 상수리나무가 호랑이에게 "자신도 밤나무"라고 이야기하여 아이를 구하기 위해 상수리나무가 신통력을 발휘한것에 감명받은 호랑이가 이이를 포기하고 이원수에게 "아이를 잘 키우라"고 하고는 산으로 돌아갔다는 내용도 있다.[70] 당시 기준.[71]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초반에는 설설 기다가 최민식이 하정우가 같은 성씨며 항렬이 낮음을 알고 사실상 남과 다름없는 하정우에게 족보를 들먹이며 하대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72]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본가로 돌아가는 형태[73] 남자의 집에서 여자를 맞아들여서 혼례를 남자집에서 치르고 신혼을 보내는 형태[74] 이이의 문묘 배향은 비교적 늦었으며 김장생, 김집, 송시열이 인조-효종-현종 시기에 정계를 장악한 서인들의 중심축을 형성하였기에 사실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당장 송시열은 '宋子'라고 불렸으니 문묘 배향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75] 조식은 광해군 때 문묘 배향이 될 뻔하였으나 제자들의 어그로로 실패하였다. 자기 스승만 올리면 되는데 이언적과 이황이 문묘 배향된 것을 시비 걸며 남인과 서인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었다.[76] 이이 본인뿐만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의 동상도 함께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