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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7년 11월 16일 |
한성부 서부 용산방 마포계 (現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동)[1] | |
사망 | 1938년 7월 13일 (향년 50세) |
소련 러시아 SFSR 프리모리예 지방 | |
본관 | 안동 김씨 |
초명 | 김상엽(金相燁) |
호 | 제관(霽觀) |
가족 | 아버지 김동헌[2] 배우자 배명원 장녀 김원정 차녀 김인정 삼녀 김례정 외아들 김담 외손자 우원식[3] |
학력 | 호세이대학 (정치경제과 / 졸업) |
이명 | 김판관(瓣觀), 김자홍(子弘) |
상훈 |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경력 | 대한제국 공무원 변호사 광복단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 비서국장 조선공산당원 고려공산청년회 국제당 혁명자후원회(МОПР) 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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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887년 11월 16일 한성부 서부 용산방(성외) 마포계(現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동 296번지)에서 아버지 김동헌(金東憲)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4년부터 대한제국 통신원 주사, 탁지부 주사, 세무 주사 등을 지낸 뒤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호세이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해 졸업한 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1910년 국권피탈 이후 1912년 만주로 망명했으며 상하이, 톈진, 봉천, 지린, 하얼빈 등지에서 대한독립단 단원으로 항일 활동에 참가했다. 1916년 비밀결사 광복단의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그 해 7월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고, 대한적십자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2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법부장을 맡았고, 1920년 2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 비서국장으로 선임되었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에 연루돼 1923년 1월 28일 체포 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7년 4월 24일 일본 도쿄 도요타마형무소에서 형기를 모두 마치고 옥문을 나섰다. 철창에서 되돌아온 김한은 동료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 사회주의 비밀결사 운동을 개시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엄혹한 경찰의 취조 속에서도 조직의 비밀을 단 하나도 누설하지 않은 투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의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일명 중립당)의 창립 멤버이자 지도부 성원이었다.
경찰 기록과 공판 문서에는 그에 관한 단 하나의 정보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들씌워진 혐의를 폭탄 문제 하나로 귀일시키는 데 성공했다. 국외 반일 단체 의열단과 손잡고 국내에 폭탄을 반입하려 했으며, 폭탄을 보관하고 있다가 김상옥이나 박열처럼 필요한 혁명가에게 분배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출감하자마자 비밀결사 운동 복귀를 비밀스럽게 모색했다. 출감 이듬해인 1928년 8월, 마침내 고려공산청년회 위상을 가지는 비밀결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단체는 중립당 계열의 과거 동료들을 재결속한 것이었다. 수감 생활을 마치고 되돌아온 옛 동료들과 새로이 운동에 참여한 신진 인사들이 합류했다. 이 단체는 다른 계열의 사회주의자들에게 화요파 공산그룹의 부활로 간주되었다.
이듬해인 1929년, 이 비밀결사는 경찰의 억압이 아닌 구성원들 스스로의 결정으로 해산했다. 그리고 코민테른이 직접 지도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합류했다. 국제공산당의 지시와 노선을 실지에서 수행하는 사회주의자들과 결합했던 것이다. 국제선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각파 공산그룹이 운동 발전에 유해한 역할을 끼쳤다고 보았다. 기존 파벌 관계를 단절하고 국제당의 지도 아래 조선공산당을 재건한다는 노선을 천명했다.
국제선의 국내사업 지도부는 3인인데, 김단야, 김정하, 조두원이었다. 모스크바의 국제당 집행위원회가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비밀리에 비합법적으로 활동하는 환경 속에서 곧잘 채택되던 트로이카(삼두마차) 조직 형태를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그들은 1929년 8~9월 국내에 잠입했다. 이들에 더하여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모스크바 유학생들도 잇따라 입국했다. 권오직(權五稷)을 비롯한 공산대학 졸업생 9명이 국제선의 일원으로서 비밀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했다.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2개월 만에 당과 공청 조직의 근간을 세웠다. 그해 11월 5인으로 구성된 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발족했고, 10월에는 3인 지도부로 이뤄진 공청 트로이카를 결성했다. 하부조직도 바로바로 구축됐다. 서울을 비롯해 평양, 원산, 부산, 목포, 함흥, 마산, 청진, 웅기, 신의주 등 도시 지역에 지방 당기관을 설치했다.
김한은 직접 국제선 그룹에 가담했다. 그는 모플 사업을 전담했다. 모플(МОПР)이란 혁명가후원회를 뜻하는 러시아 외래어였다. 옥중에 수감된 혁명가와 그 가족을 돌보는 구호 사업이었다. 당과 공청의 비밀 조직 사업을 20~30대 젊은 세대가 주로 맡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적절한 역할 분담이었다. 김한은 옥중 생활을 오래 했기에 그 방면의 실정을 꿰뚫고 있었고, 변호사들과 지면도 넓었다. 적임자였다. 그는 국제선 그룹에서 상당한 금액을 받아, 그 돈을 수감자 차입비, 출옥자 치료비, 피검자 가족 구호비 등으로 썼다.
자신이 제공했던 도화동 은신처가 수사의 초점이 되고 있었다. 경찰이 최상급 간부라고 지목한 김단야가 그곳을 근거지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이미 저들에게 탐지됐다. 그뿐인가. 공산당과 공청 지도부에 다 소속된, 김단야 탈출 이후 가장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고 있던 권오직이 바로 그 집에서 체포됐다. 공청 3인 지도부의 한 사람인 김응기도 떡장수로 분장해 그 집을 방문했다가 잠복 중이던 경찰에게 체포되고 만다. 도화동 은신처를 둘러싸고 중요 인물들이 거푸 검거되었던 만큼 경찰은 그 집을 아지트로 알선한 김한을 반드시 잡아들여야 할 인물로 보았다.
그리하여 김한은 국외로 탈출하기로 결심했고, 3월16일, 김단야의 아내이자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여성 사회주의자 고명자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목적지는 소련이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930년 4월 초순경이었다. 그는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 그는 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에서 근무했다. 1930~31년 조선의 적색노동조합운동을 후원하고 독려하는 일을 했다.
망명 2년이 지나고, 1932년, 김한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는데, 모스크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불행이었다. 그는 소련으로 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 국제선 검거 사건이 대규모로 터진 이유가 김한에게 있지 않으냐는 혐의였다. 그는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에게 체포됐다. 이 기관은 1934년부터 1941년까지 스탈린 대숙청을 앞장서서 수행하던 비밀경찰이었다. 결국 스탈린의 숙청으로 내무인민위원부 관료들의 손에 사형당해 1938년에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