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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카를 마르크스 Karl Marx FRSA[1] | |||
본명 |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 ||
출생 | 1818년 5월 5일 | ||
프로이센 왕국 라인란트 트리어 (現 독일 라인란트팔츠 주 트리어) | |||
사망 | 1883년 3월 14일 (향년 64세) |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
국적 | 프로이센 왕국(1818 ~ 1845) → 무국적[2] | ||
직업 | 철학자, 언론인, 역사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하인리히 마르크스 (1777~1838) 어머니 헨리에테 마르크스[3] (1788~1863) | |
형제자매 | 9남매 중 셋째 | ||
배우자 | 예니 마르크스[4] (1843년 결혼, 1881년 사별) | ||
자녀 | 7명 | ||
학력 | 트리에 김나지움 (졸업) 본 대학교 (법학 / 중퇴) 베를린 대학교 (법학 / 학사) 베를린 대학교 대학원 (석사) 예나 대학교 대학원 (철학 / 박사[5]) | ||
묘소 |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 ||
종교 | 개신교 (루터회) → 무종교 (반신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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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 왕국 출신의 철학자, 언론인, 역사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공산주의를 정립한 인물이다.[6]2. 명칭
Karl Heinrich Marx의 이름을 한국어로 쓸 때, 독일어 표기법에 의하면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라고 쓰는 것이 맞다. 다만 예전부터 '칼 맑스'라고 불려진 까닭에 요즘에도 '칼 맑스'라고 표기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으며, 이로 인해 한국어 표기에 대한 갑론을박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7] '맑스' 표기법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원음과 비슷한 발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Marx'는 모음이 하나밖에 없는 1음절짜리 이름인데 '마르크스'로 표기하면 4음절이 돼버리니 한글 그대로 발음하면 1음절짜리가 원음과 비슷한 것은 사실이다.[8]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더라도 '관용어'로 쓰이는 외래어의 경우에는 허용해준다는 규칙이 있다. 옛한글을 쓰면 마ᇌ 로 쓸 수 있다.반면, '칼 맑스'라는 표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된다는 사람들은, 애당초 한글과 알파벳은 음절 또는 형태소에 대한 정의가 다르기에 일대일 대응하지 않으며, 번역에는 한 언어가 다른 언어를 완벽히 재현할 순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므로, 굳이 발음에 근거한 '관용어'를 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Dry에서 ㄷ과 ㄹ을 겹치거나 한글과 영어발음의 음절 수를 일치시키지 않듯이, Marx를 '맑스'라고 표기해봤자 1음절을 2음절로 늘린 것이며, 굳이 옛한글까지 동원해 억지로 1음절로 만들려면 상술했듯이 'ᄆ\ᅡᇌ'으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아니면 차라리 표준 한글표기와 달리 모음이 없는 '맑ㅅ'로 표기하는 것이 원어 발음과 가장 가깝다.[9]
또한 비록 표기상으로는 'ㄳ, ㄶ, ㄺ' 등의 온갖 겹받침이 다 존재하지만,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받침에 'ㄱ, ㄴ, ㄹ, ㅁ, ㅂ, ㅅ, ㅇ' 만을 사용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어의 한 음절 끝에서 날 수 있는 실제 발음이 [k̚](ㄱ), [n](ㄴ), [t̚](ㄷ·ㅅ), [ɭ~l](ㄹ), [m](ㅁ), [p̚](ㅂ), [ŋ](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맑스'라 표기해봤자 [ma̠ks͈ɯ](막쓰)라는 발음으로밖에 소리내지 못한다. ㄺ 받침은 맨 끝에 오거나 자음 앞에 올 경우 ㄹ 이 탈락되고 ㄱ 만 발음되기 때문. 그러므로 '맑스'라고 표기할 시에 '부드러운 ㄹ 발음 ( r )'은 애초에 소리나지도 않는다. '닭', '맑다', '밝다'의 올바른 발음이 [닥], [막따], [박따]인 것과 같은 이치. 하물며 저 'ㄹ' 이 발음된다 하더라도 그게 r인지 l인지조차 보장할 수 없다. 굳이 한글로 '독일어 원음과 비슷한 발음'으로 옮긴다 하더라도 /kaʁl maʁks/(카를 마륵스) 또는 /kaːɐ̯l ˈmaːɐ̯ks/(카알 마악스) 정도가 될 것이다. 참고로 후자는 독일 실생활식 독법에 가까운 표기이며, 전자는 공식적인 발화 상황일 때에 국한된다.
'맑스'라는 표기는 운동권 일각에서 '맑'을 이용해서 '맑음', '맑다'는 느낌을 주려는 뜻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맑스' 이외에도 외래어 표기법 제정 및 개정되기 전에는 애초부터 겹받침으로 표기된 외래어들이 많았다. 또한, 한국에서 '막스'라고 부르면, 동일한 분야에서 같이 많이 언급되는 인물인 막스 베버(Max Weber) 같이 유명한 사회학자와 혼동을 줄 여지가 커서 '맑스'라고 자주 불렀던 것이 굳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맑음'과 비슷해보이려고 일부러 '맑스'라고 표기했던 것은 아니며, 현재까지도 맑스라는 번역어의 사용이 자주 보이는 건, 근대 이후로부터 오랫동안 이어져 온 표기 관습(경로 의존성) 때문으로 보는 것이 맞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카를 마르크스/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사상
마르크스 이론의 독특성은 그의 정신적 원류라 할 수 있는 헤겔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역사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띤다는 헤겔의 관점을 가져오되, 인간의 이성의 발전과 종착역을 설정한 헤겔의 관념론과는 다르게, 인간의 노동에 따른 생산 양식의 발전과 이로 인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경향적 이행의 유물론을 주장하였다.[10]'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이지만, '변증법적 유물론', '마르크스주의', '사적 유물론' 등은 마르크스가 만든 용어가 아니라 사후 엥겔스나 다른 후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붙인 용어이다.
4.1. 변증법적 유물론
자세한 내용은 변증법적 유물론 문서 참고하십시오.4.2. 마르크스주의
자세한 내용은 마르크스주의 문서 참고하십시오.4.3. 마르크스 경제학
자세한 내용은 마르크스 경제학 문서 참고하십시오.4.4. 공산주의
자세한 내용은 공산주의 문서 참고하십시오.4.5. 사적 유물론
자세한 내용은 사적 유물론 문서 참고하십시오.5. 가계
- 父 하인리히 마르크스 (1777 ~ 1838) / 母 헨리에테 (1788 ~ 1863)
- 카를 마르크스 (1818 ~ 1883) / 妻 예니 마르크스 (1814 ~ 1881)
- 장녀: 예니 카롤리네 (1844 ~ 1883) / 사위: 샤를 룽게 (1839 ~ 1903) 저널리스트
- 외손자: (1873 ~ 1874) 요절
- 외손자: 장 룽게 (1876 ~ 1938) 저널리스트
- 외손자: (1878 ~ 1883) 요절
- 외손자: 에드가 룽게 (1879 ~ 1950) 의사
- 차녀: 예니 로라 (1845 ~ 1911)[11] / 사위: 폴 라파르그 (1842 ~ 1911) 사회주의 운동가
- 외손자 2명, 외손녀 1명: 어려서 요절
- 장남: 에드가르 (1847 ~ 1855) 요절
- 차남: 헨리 에드워드 가이 (1849 ~ 1850) 요절
- 3녀: 제니 에벌린 프란세스 (1851 ~ 1852) 요절
- 4녀: 제니 줄리아 엘레노어 (1855 ~ 1898)
- 성별 불명: 요절 (1857)
- 사생아 추정: 프레데릭 데무스 (1851 ~ 1929) 가정부 헬렌 데무스(1820 ~ 1890) 소생
6. 평가
자세한 내용은 카를 마르크스/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7. 어록
지배 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공산당 선언》
《공산당 선언》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공산당 선언》
《공산당 선언》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이 국가를 장악하기 전까지는 그 자신이 민족적이다.
《공산당 선언》
《공산당 선언》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공산당 선언》
《공산당 선언》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계를 해석해 오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12]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한 시대의 지배사상은 늘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독일 이데올로기》
《독일 이데올로기》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소극으로.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제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인간 해방을 위한 두 가지의 강력한 무기는 인간의 두뇌와 인간의 심장이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이다.
인간은 운명의 지배자다. 그러나 돈을 숭배하면 돈이 인간을 지배한다.
8. 저서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에서 제공 중인 마르크스의 출간 연도별 저작들[13]{{{#!wiki style="padding: 0 10px; border-left: 3px solid #000080"
대표 저작 (1818~1883년)}}}- 1839년,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14]
- 1842년, 《역사법학파의 철학적 선언문》(The Philosophical Manifesto of the Historical School of Law)
- 1843년,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 1844년,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 1845년, 《신성가족》
- 1845년,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Theses on Feuerbach)
- 1846년,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15]
- 1847년, 《철학의 빈곤》(The Poverty of Philosophy)[16]
- 1847년, 《임금 노동과 자본》(Wage-Labour and Capital)
- 1848년, 《공산당 선언》(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
- 1851년,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Napoleon)
- 1858년,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 1862년, 《잉여가치론》(Theories of Surplus Value), 3권
- 1865년, 《임금(혹은 가치), 가격 그리고 이윤》(Lohn, Preis und Profit/Value, Price and Profit)
- 1867년, 《자본 I》(Das Kapital)
- 1873년, 《프랑스 내전》
- 1875년, 《고타강령비판》(Critique of the Gotha Program)
{{{#!wiki style="padding: 0 10px; border-left: 3px solid #000080"
사후 저작 (1883년 이후)}}}- 1885년, 《자본 II》(Das Kapital)[A]
- 1894년, 《자본 III》(Das Kapital)[A]
- 1905년, 《잉여가치학설》(Theories of Surplus Value)[19]
9. 대중매체
- 영화 - 청년 마르크스
- 애니메이션 - 领风者(영풍자, The Leader)
- 소설
- 《프로메테우스》, 갈리나 I. 세레브랴코바 지음, 김석희 옮김. 소련에서 출판된 마르크스의 전기소설로, 소련공산당 부속기관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를 비롯한 학자들의 감수를 거쳤다고 한다. 한국어판은 일본어판의 중역인데 아쉽게도 현재 절판.
- 《디어 맑스》, 손석춘 지음.
- 《마르크스 서울에 오다》, 박홍순 지음.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흥선대원군이 당수로 있는(...) 조선의 만민공산당 놀음에 사이비 공산당이라며 기함하고 있다. 웃긴 건 그 사이비 공산당인 만민공산당이 1대 참의원 선거에서 원내 1당이라는 독보적인 성과를 거둬버리며 전 세계 공산주의/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렸다는 것...[20] 이후 본인에게 직접 배우고 싶다고 찾아온 전봉준에게 하숙집을 제공한다. 살림에 도움도 되고 심심함도 풀 겸 거두어서 가르쳤다고. 이후 엘레노어와 전봉준이 결혼하며 사돈지간이 되었고 얼마 후 천수를 누리다 사망한다.
- 대체역사소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 이후 많은 웹소설 작품에서 천마신공을 만든 천마신교의 초대천마로 취급된다. 이른바 공산천마.
- 게임
- 빅토리아 3에서 가장 먼저 사회주의를 연구한 나라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래서 게임을 하다 보면 프랑스 마르크스, 러시아 마르크스, 스웨덴 마르크스 등을 볼 수 있다.
-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에서 용역 깡패로부터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등장한다.
- 문명 6에서 정책 카드 공산주의를 설명할 때 등장한다.
10. 여담
- 국내 운동권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1980년대 초반부터 알려져 1980년대 운동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마르크스주의를 추구하는 집단은 주체사상을 추구하는 집단과 함께 운동권의 가장 지도적인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유행은 1990년대 루이 알튀세르와 미셸 푸코의 소개와 함께 소강 상태에 이르나, 현재에도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등 마르크스의 노선을 계승한 철학자로 한국 인문 사회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2010년대 이후 경제난으로 인해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재유행하는 추세에 있다.
- 독일 작센주에 위치한 켐니츠는 동독 시절인 1953년부터 1989년까지 카를 마르크스 슈타트로 불렸다가 1990년 원래 이름으로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동서 분단 시절 동독에 위치해 있었던 라이프치히 대학교는 1953년 동독 정부에 의해 카를 마르크스 대학교로 강제 개명을 당했다가 통일 이후 본래 명칭을 되찾았다.
- 그의 딸이 아버지에게 어떤 색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빨간색이라고 답해서 빨간색이 공산주의자들의 상징색이 되었다는 속설이 있지만, 사실 빨간색은 그 이전부터 이미 좌파 내지는 진보의 이미지로 차용되어왔다.[21]
- 2019년 2월 15일 그의 묘지가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스프레이 낙서와 함께 묘비를 망치로 내려쳤다고 한다. 반대로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에서는 다른 인물들의 동상이 훼손당하는 가운데, 마르크스의 동상은 보호받았다고 한다.
- 2018년 중국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열었고 중국이 마르크스의 정통 계승자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미국, 유럽의 자유주의-사회주의 계열 철학자와 사회학자들은 이를 부정하고 있다. 또한 '마르크스의 계승자 중국'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울 목적으로 2019년 중국에서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일대기를 그린 애니메이션[22]이 제작되기도 했다.
- 마르크스의 현손인 조셉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현재 파쿠르 선수이자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다고 알려져 화제를 모았으나 거짓임이 밝혀졌다. 마르크스의 자식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자식들은 모두 딸이며, 고로 마르크스의 후손들 중 마르크스의 성을 이어받은 사람은 없다. 마르크스의 생존한 후손들은 모두 마르크스의 첫째 딸 예니 카롤리네 마르크스와 그녀의 남편 샤를 룽게의 후손이며, 따라서 오늘날 마르크스의 후손들은 '룽게'나 마르크스가 아닌 다른 성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마르크스의 후손들 중에는 마르크스의 현손녀에 해당하는 프레데리크 룽게(1955년생)와 안나 룽게(1958년생)가 있으며, 이 둘은 현재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1] Fellow of the Royal Society of Arts, 왕립 예술학회 회원.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마르크스가 예술학회 회원이라는게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예술이라는 단어는 미술, 음악같은 기예(art) 뿐 아니라, 인문/사회학, 나아가서는 학문 자체를 지칭하는 데에도 쓰인다.[2] 프로이센에서의 추방 이후 프랑스 파리, 벨기에 브뤼셀, 영국 런던으로 망명하였다.[3] 혼전성은 프레스부르크[4] 혼전성은 베스트팔렌[5] 박사학위 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1841년). 지도교수는 브루노 바우어.[6] 사회주의라는 말은 1803년 기울리아니(G. Giuliani)가 루소의 개인주의적 원리에 대하여 사회적 생활원리라는 뜻으로 사용한 데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창시했다고 볼 수 없다. 공산주의 역시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사상이기에 그가 공산주의를 창시했다는 것도 엄연한 착각이다. 그러나 그 때의 공산주의는 다 실현 불가능한 내용이었고, 이를 현실에서 적용 가능하도록 발전시킨 것은 마르크스가 맞다.[7] 이 표기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단어가 들어온 1900년대 이전부터 '칼 맑스'라고 쓰인 것이 확인된다.[8] '마르크스'는 받침 발음을 할 수 없는 일본에서 '마', '루', '쿠', '스'(マルクス)의 네 음절로 나누어 표기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주장이 있다.[9] 한글로 표기한 외국어 발음 중엔 사실 원음과 비슷하지 않은 단어가 매우 많다. 예를 들어 'dog'와 같은 쉬운 단어조차 한글로 쓰면 '도그'나 '독'이지만 발음상으로는 [dɔːɡ\], 즉 '도ㄱ'로 읽어야 한다.[10] 물론 이는 마르크스의 다양한 사상적 면모들 중에서 그가 핵심으로 삼았던 과학적 공산주의의 측면을 아주 극히 단순하게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사상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헤겔부터 포이어바흐까지의 아주 깊이 있는 공부가 요구된다.[11] 차녀가 태어난 이후 영국으로 이주해서 살았으므로 차녀 이후 자녀들의 이름은 영국식으로 지어졌다.[12] 마르크스의 무덤 묘비와 《독일 이데올로기》 서문에도 작성된 글귀이다.[13] 참고로 마르크스 사후 저작은 엥겔스가 그의 유고를 정리하여 출간한 저서이다.[14] 마르크스의 박사 학위 논문.[15] 프리드리히 엥겔스와의 공동 저술작. 마르크스주의 이해에 자본론과 함께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헤겔학파와 포이어바흐, 청년 헤겔학파 등을 종합적으로 까면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핵심인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체화한 저서이다. 위에 나온 신성가족의 발전판이라 보면 되겠다. 또한 사적 유물론에 대한 개념이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등장한 저서이기도 하다.[16] 공상적 사회주의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프루동 저작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저서.[A]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유고를 모아 집필했다.[A] [19] 자본론 4권이라고도 알려져 있고 자본론의 내용에 포함되는 부분이지만 공식적으로 자본론에 포함되는 저작은 아니다. 카를 카우츠키가 엥겔스가 자본론 3권에 포함하지 못한 마르크스의 유고 중 '잉여가치학설'이라고 명명된 부분을 정리하여 출간한 책으로, 현재 전해지는 판본은 카우츠키의 것이 마르크스의 서술 의도를 왜곡하였다고 판단되어 이와 무관하게 소련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에서 재편집한 것이다.[20] 다른 정당의 경우, 독일 사회민주당은 원내 5당에 그쳤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자들이 만족하고 있었는데, 저 멀리 동방에서 왠 이상한 공산당이 첫 총선에서 원내 1당을 차지해버린 것. 참고로 이때는 공산당이 개화당에게 총리 자리를 양보해서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되었다. 두 정당 다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국왕인 귀남도 개혁을 꾸준히 밀어줬기에 정책을 두고 약간의 정중한 논쟁은 있을지언정 참의원 공성전 같은 무력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21] 예외가 있다면 대한민국, 미국과 일본. 이 세 국가에서는 빨간색이 보수정당의 색깔이 되었다.[22] 领风者. 7부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