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 러시아 |
러시아어: Российско-германские отношения
1. 개요
독일과 러시아의 국가관계.영국과 미국은 러시아에 대한 국민감정이 상당히 나빠 외교 정책에도 반영될 정도지만, 독일은 1990년대 초반 독일 재통일과 소련 해체 이후 프랑스-러시아 관계처럼 나름대로 러시아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이는 독일·프랑스가 영미권과는 달리 러시아를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 그레이트 게임을 겪은 영국과 20세기 중후반 냉전을 겪은 미국 입장에서 러시아는 세계 패권을 두고 다투는 견제의 대상이었지만, 독일·프랑스는 대리전의 대리인이 되기 보다는 자신들의 국익을 도모하느라 러시아와 충돌할 여지가 적은 덕분이다.
2. 역사적 관계
주요 강대국인 양국은 본래 2차례 대전쟁으로 피로 피를 씻은 숙적이었다.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 이전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숙적은 폴란드-리투아니아였으나 폴란드 분할을 계기로 양국은 국경을 마주하면서 몰락한 폴란드 대신에 독일이 새롭게 러시아와 대립하게 되었다.결국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을 지나 냉전이 되면서 쭉 대립하다 소련 붕괴로 냉전이 종식된 이후로는 독일 재통일 및 독일계 러시아인의 송환 문제 등으로 가까워지는 행보를 보였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으로 양국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으나, 코로나 사태 때 협력을 계기로 다시 원만해졌다. 소련 붕괴 이후 냉전의 최전선에서 물러난 독일은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군축을 해 왔기에 양국 모두 러시아를 단독으로는 감당해 낼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독일은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면서 사실상 EU의 수장인 데다 러시아산 가스의 고객 1호이다. 따라서 마냥 함부로 대하기가 어렵다. 양국간 충돌이 벌어지면 둘다 타격을 심하게 받지만[1] 독일과는 그래도 영국, 미국과 달리 이야기가 잘 되기 때문에 독일하고는 최대한 잘 지내보려고 한다.
다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독일도 더이상 러시아의 행보를 좌시하기 어려워졌다. 우크라이나 옆은 폴란드이고, 폴란드가 위태로워지면 독일도 안보를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
2.1. 중세
중세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정교회를 믿는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킨다는 명분으로 침략하였으나,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지휘하는 노브고로드군에게 격퇴당했던 바 있었다. 알렉산드르 넵스키는 독일과 러시아 관계가 냉각될때마다 러시아 측에서 아이콘으로 삼는 인물이기도 하다.오늘날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등이 위치에 있어서 간과할 수도 있지만, 동방식민운동을 통해 중유럽과 동유럽 각지에는 독일계 상인 커뮤니티가 퍼져 있었다. 오늘날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국가였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 일대에 주둔한 발트 십자군(튜튼 기사단)이 세운 독일 기사단국이 세속 국가로 전환한 프로이센 공국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 시대에 동군연합으로 합쳐져 출범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기원으로, 프로이센 공국의 옛 수도 쾨니히스베르크가 오늘날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다.[2] 이 외에도 오늘날의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일대는 13세기 이래 독일계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자리잡은 독일계 식민지로 독일계 커뮤니티와 러시아 사이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여러 도시들은 한자동맹의 멤버로서, 한자동맹의 성장은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해상 무역 쇠퇴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2.2. 근세
러시아는 발트해 진출을 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및 스웨덴과의 지속적인 전쟁을 벌였다. 이반 4세 시절에는 루스 차르국 군대가 리보니아를 침공하였으나, 현지인들에 대한 지나친 약탈과 학살로 반발을 사서 진출이 저지되었다. 이반 4세 사후 혼란 시대를 걸친 러시아는 로마노프 왕조가 세워지며 복구되는데 로마노프 왕조의 기원 역시 독일계로 여겨진다.러시아의 발트해 유역 진출은 표트르 대제 시대 전후에야 이루어졌다.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일대에서 라트비아인과 에스토니아인들은 주로 농노로, 독일인들은 주로 지주와 상인 계급을 차지하던 상황이었는데 러시아 제국이 스웨덴의 발트 지역을 점령한 이후에도 발트 지역에서 독일계들의 기득권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외에도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영내 상당수 독일계 커뮤니티가 러시아 제국 영토로 편입되기도 했다.
18세기에 로마노프 왕조의 대가 끊어질 뻔 했으나, 역시 독일인이었던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3]가 러시아로 건너와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Гольштейн-Готторп-Романовской) 왕조가 되어 니콜라이 2세 때까지 러시아를 지배한다. 예카테리나 2세를 비롯한 독일계 황제들은 독일인 이민을 장려하였는데, 이미 중유럽과 동유럽 각지에 퍼져있던 독일인 상인 및 농민들이 러시아로 건너와 오늘날의 독일계 러시아인을 이룬다.
이후 18세기 말엽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폴란드를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고, 러시아는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때 프로이센을 지원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러시아와의 친선을 외교정책의 골자로 삼았고, 결국 후방을 찔릴 염려를 충분히 없앤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인접국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됨으로써 독일 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다.
2.3.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독일 통일 후에도 독일과 러시아의 밀월은 계속되어, 1872년 삼제동맹으로 독일-오헝제국-러시아 동맹이 맺어졌다. 그러나 1878년 베를린 회의를 계기로 독러간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하였으며, 불가리아 문제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었고, 결국 1887년 3월에 삼제동맹은 최종 붕괴되었다. 1907년 체결된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 영국 간 삼국협상이 체결되며 독일이 가담한 삼국동맹에 대항했고, 이 세력 대결 구도는 1차 대전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은 초기 계획인 슐리펜 계획이 실패하고 서부전선에서는 참호전이 이어지자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다. 동부 전선에서는 서부와 다르게 독일군이 우세를 점거하고 있었다. 물론 브루실로프 공세와 같은 러시아의 전략적 승리도 있었지만 가면 갈수록 러시아 내에서는 전제정을 타도하자는 목소리가 늘어나면서 2월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러시아 공화국이 들어서게 되면서 러시아 제국은 소멸한다.
차르의 전제정을 몰아내고 공화국이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국민들이 원하는 종전은 오지 않았다. 공화국의 대다수 고위 관계자들도 독일이 점차 힘이 빠지게 되고 곧 패망할 것 같은 예감이 들자 승전국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고 싶어한 것이였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 국민들은 참지 못하고 공화국 정부도 불신하게 되었고 이를 이용해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러시아 혁명을 이르킨다. 혁명이 일어나고 공산정부가 들어서자 독일 제국은 러시아 공산정부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강화를 맺는다. 또한 독일 제국은 러시아 내전에서는 전러시아 임시정부(백군)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지의 민족주의 세력들을 지원했다.
2.4. 바이마르 공화국과 소련
1차 대전 이후 패전국이 된 바이마르 공화국과 공산국가로 변한 소련은 같은 처지인 국제 정치의 아웃사이더로 끈끈한 관계를 가졌다. 자세한 내용은 라팔로 조약 문서 참조. 나치 정권 수립 이전까지 소련은 독일군의 훈련소를 비밀리에 제공할 정도였다. 1933년 히틀러가 권좌에 오른 것을 계기로 양국 사이의 군사적 교류는 중단되었다.당시 소련에 파견되었던 독일 장교들 발터 모델, 브라우히치, 카이텔, 만슈타인 등은 후일 독일군 원수 지위에 올랐고, 원수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하인츠 구데리안 역시 소련에서 훈련받았던 독일 군인이었다. 한 편 소련의 경우도 역시 바이마르 공화국에 상당수의 장교들을 파견하였지만, 스탈린 대숙청 기간 동안 해당 인물들은 거의 전원 다 총살당하였고, 이는 소련군이 독소전쟁 발발 당시 독일군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인명 피해가 더 누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2.5. 나치 독일과 소련
자세한 내용은 나치 독일-소련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나치 정권은 소련의 볼셰비즘을 매우 적대시하였고 인종주의적 사상으로 레벤스라움을 확대하려 생각해 독소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한때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기도 하였으나 끝내 1941년 인류 최대의 전쟁인 독소전쟁이 발발했다. 결국 엄청난 피를 흘린 끝에 승리한 소련은 독일을 분단시키고 독일 동방 영토에서 거의 모든 독일인들을 추방했다.
2.6. 독일 분단기
2.6.1. 동독과 소련
우정의 노래[4]동독이 소련의 입김으로 세워졌다. 그 때문에 동독은 소련의 강력한 영향 아래 놓여있었으며, 늘 소련과 협력했다. 소련군[5]은 독일이 통일된 이후에도 1994년까지 동독에 주둔했다. 결국 고르바초프가 개혁 개방 정책을 펴면서 동독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였고 이는 동독의 붕괴와 독일의 재통일로 이어졌다.
2.6.2. 서독과 소련
유럽 자유진영의 최선봉이었던 서독은 소련과 전혀 적대 관계가 아니었다. 서독은 자신들을 독일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보았고 할슈타인 원칙을 내세웠으나, 초강대국인 소련만은 예외로 하였다. 서독과 소련은 1955년 수교했으며 소련도 마찬가지로 냉전 시대 때 남한, 대만, 남베트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서독은 국가로 인정했다.[6]동 · 서독의 분단과 갈등으로 인해 서독과 소련이 적대 관계였으며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 정책으로 관계 개선이 이뤄졌다고 오인하는 경우도 있는데, 양국은 수교를 한 55년부터 교류 확대를 도모했으며 브란트가 집권하기 3년 전인 66년부터 극적으로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66년 말부터 서독에 대연정이 수립되고 양국의 관계 정상화를 가로 막는 요소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65년부터 경제 성장율의 하락과 스탈린식 계획 경제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코시긴 - 리베르만 개혁을 단행한 소련 정부는 여러 선진국들과 접촉해 다양한 기술과 설비를 구입했고 여기서 가장 소련과 많은 거래를 한 국가가 바로 서독이었다. 60년대 중반부터 서독과 소련은 무역 파트너 관계를 구축해 경제 교류를 늘려 나갔으며 마티아스 루스트 사건 같은 정치 · 외교적 문제로 양국 간의 관계가 악화되더라도 경제적으로는 계속 교류를 이어나갔다.
2.7. 독일과 소련
독일 재통일 이후 독일과 소련은 우호관계를 이어나갈 거라 생각되었다. 14개월 뒤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하며 소련의 외교자산은 러시아 연방이 승계하게 되었다.2.8. 독일과 러시아
독일과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메르켈의 뒤를 이은 숄츠 총리가 속한 사회민주당의 대표를 지냈고, 지금은 러시아-독일 포럼의 의장인 마티아스 플랏체크는 "왜 우리가 러시아를 미국과 달리 봐야 하느냐?"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이나 러시아나 독일에는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뜻이죠.
분단됐던 동서독이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당시 소련 고르바초프의 결단 덕분이었습니다. 서방은 독일의 분단을 원했지만 그럼에도 소련 덕분에 통일할 수 있었다는 게 독일인들의 인식이라고 합니다. 심정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러시아와 척질 이유가 없다는 거죠.
독일과 러시아는 경제적으로도 밀접합니다. EU의 최대 경제권인 독일은 천연가스 전체 사용량의 절반을 러시아산으로 충당하고 있고, 원유와 각종 원자재 대부분을 러시아에서 수입합니다. 러시아가 피해를 당하면 독일도 어떤 식으로든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동조화된' 경제 구조인 거죠.
독일은 러시아편? 러시아 향한 독일의 속마음
분단됐던 동서독이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당시 소련 고르바초프의 결단 덕분이었습니다. 서방은 독일의 분단을 원했지만 그럼에도 소련 덕분에 통일할 수 있었다는 게 독일인들의 인식이라고 합니다. 심정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러시아와 척질 이유가 없다는 거죠.
독일과 러시아는 경제적으로도 밀접합니다. EU의 최대 경제권인 독일은 천연가스 전체 사용량의 절반을 러시아산으로 충당하고 있고, 원유와 각종 원자재 대부분을 러시아에서 수입합니다. 러시아가 피해를 당하면 독일도 어떤 식으로든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동조화된' 경제 구조인 거죠.
독일은 러시아편? 러시아 향한 독일의 속마음
1991년 이후 두나라의 관계를 요약하자면 '러시아는 독일의 고도화된 공업 기술력'을, '독일은 러시아의 광대한 자원'을 원하는 100년의 관계가 피와 철이 아닌 말과 볼펜으로 바뀐 상태이다. 그리고 프랑스가 러시아와 되도록이면 마찰을 최소화하려고 하는 것처럼 독일도 러시아와는 되도록이면 우호적으로 유지하면서 마찰을 최소화하고 있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독일에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많이 이주했다. 하지만 독일내에서 언어, 문화로 인한 차이로 인해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90년대말부터 독일 정부는 독일계 러시아인들의 귀환을 까다롭게 했다. 물론 독일계 러시아인말고도 러시아인들의 이민들도 많았으며 독일내 살고있는 러시아계 혈통은 300만명 가까이된다.
2.8.1. 2010년대
2014년 크림 위기 이후 독일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가담하고 있는 중이고 2018년에 영국에서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영국과 함께 연대하면서 EU의 러시아 외교관 추방정책에 동참했다. 하지만 완전한 반러성향은 아니라서 메르켈 총리는 비공식회담에서는 푸틴 대통령과 솔직하게 대화할 정도이고 미국의 추가적인 대러제재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독일내에서도 지나친 대러제재에 대해선 비판의 목소리가 있는 편이라서 독일과 러시아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운동이 독일에서 러시아로 행진하는 캠페인을 하기도 했다.#(러시아어) 그리고 독일과 러시아의 역사학자들도 교류와 협력을 하는 경우도 있는 편이다.#(러시아어)2018년에 트럼프 대통령이 노르트스트림2와 관련해서 독일을 러시아의 포로라고 발언하자 독일측은 반발했다.# 2018년 8월 13일에 푸틴 대통령은 독일을 방문해서 메르켈 총리와 시리아, 이란 문제 등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8월 18일에 푸틴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는 3시간동안 만난 자리에서 시리아문제, 가스관문제에 대해 훈풍을 탔다.# 그리고 가스관문제를 놓고 간접적으로 트럼프를 비판했다.#
2018년 12월 29일에 시리아 문제를 놓고 메르켈 총리와 푸틴 대통령은 전화통화를 통해 논의했다.#
2019년 2월 7일에 메르켈 총리는 천연가스관 사업인 노르드스트림2가 완공되더라도 가스부분에서는 러시아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2월 8일(현지시간)에 EU측은 러시아와 독일간의 천연가스관 연결사업인 노르드스트림2에 대해서 독일이 우선적으로 협상권을 갖는 것으로 합의했다.#
독일 검찰은 독일에서 발생한 전 체첸 반군 지도자 살해사건과 러시아와의 관련성을 고려하며 수사를 가속화하기로 해 러시아와 갈등을 빚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리고 독일 정부는 러시아 외교관 2명을 추방시키는 조치를 취하자 러시아는 반발했다.# 러시아측은 독일서 피살당한 조지아인이 자폭테러범 훈련 등 테러활동을 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노르드스트림2에 대해 제재를 하자 독일과 러시아는 반발했다.#
2.8.2. 2020년대
자세한 내용은 독러관계/2020년대 문서 참고하십시오.3. 문화 교류
옴스크에선 베를린의 러시아어 사용 화가들의 전시회가 열렸다.#(러시아어)양국간에 교류도 많은 편이라서 독일에서도 러시아어 교육이 이뤄지고 있고[7] 러시아도 독일어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어와 독일어는 양국간의 주요외국어로도 지정되어 있다. 독일내에도 러시아어 화자들이 존재해 있다.
러시아와 독일은 공동 전시회와 문화 활동에 대해 시행을 논의하고 있다.#(러시아어)
2020년 9월 26일에 함부르크에서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의 듀엣 공연이 이뤄졌다.#(러시아어)
2020년 10월 12일에 독일에서 타타르 문화의 날이 개최되면서 러시아의 타타르족 문화에 관련된 행사가 열렸다.#(러시아어)
4. 교통 교류
양국을 이어주는 항공노선이 존재한다. 양국 항공사들이 자주 항로로 왕래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양국을 이어주던 항로는 단항됐다.# 양국간 무비자협정은 체결되지 않아서 양국 국민들은 입국시 비자를 받고 입국하고 있다.5. 부록: 역대 대사
대사 목록은 독일어 및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관련항목을 참조했다. 독일이 공화국이 된 1918년 이후로는 백작, 남작 등 칭호는 성명의 일부에 불과함.5.1. 러시아/소련 주재 독일 대사
- 러시아/소련 주재 독일 대사 [접기 · 펼치기]
- -----
- 북독일 연방 -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 독일 제국 - 1914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 로이스 공자 하인리히 8세 (Heinrich VII. Prinz Reuß, 1871-1876)
- 한스 로타르 폰 슈바이니츠 (Hans Lothar von Schweinitz, 1876–1892)
- 베른하르트 프란츠 폰 베르더 (Bernhard Franz Wilhelm von Werder, 1892-1895)
- 후고 폰 라돌린 후작 (Hugo Fürst von Radolin, 1895-1901)
- 프리드리히 요한 폰 알벤슬레벤 백작 (Friedrich Johann Graf von Alvensleben, 1901-1905)
- 빌헬름 폰 쇤 남작 (Wilhelm Freiherr von Schoen, 1905-1907)
- 프리드리히 푸르탈레스 (Friedrich Pourtalès, 1907-1914)
- 빌헬름 폰 미르바흐하르프 백작 (Wilhelm Graf von Mirbach-Harff, 1918)[8]
- 바이마르 공화국
- 쿠르트 비덴펠트 (Kurt Wiedenfeld, 1921-1922)
- 울리히 폰 브로크도르프란차우 백작 (Ulrich Graf von Brockdorff-Rantzau, 1922-1928)
- 헤르베르트 폰 디르크젠 (Herbert von Dirksen, 1928-1933)
- 나치 독일
- 루돌프 나돌니 (Rudolf Nadolny, 1933-1934)
- 프리드리히베르너 폰 데어 슐렌베르크 백작 (Friedrich-Werner Graf von der Schulenburg, 1934-1941)
- 동독
- 루돌프 아펠트 (Rudolf Appelt, 1949-1955)
- 요하네스 쾨니히 (Johannes König, 1955-1959)
- 루돌프 될링 (Rudolf Dölling, 1959-1965)
- 호르스트 비트너 (Horst Bittner, 1965-1974)
- 하리 오트 (Harry Ott, 1974-1980)
- 에곤 빈켈만 (Egon Winkelmann, 1981-1986)
- 게르트 쾨니히 (Gerd König, 1987-1990)
- 서독/독일
- 빌헬름 하스 (Wilhelm Haas, 1956-1958)
- 한스 크롤 (Hans Kroll, 1958-1962)
- 호르스트 그뢰퍼 (Horst Groepper, 1962-1966)
- 게브하르트 폰 발터 (Gebhardt von Walther, 1966-1968)
- 헬무트 알라르트 (Helmut Allardt , 1968-1972)
- 울리히 잠 (Ulrich Sahm, 1972-1977)
- 한스게오르크 비크 (Hans-Georg Wieck, 1977-1980)
- 안드레아스 마이어란드루트 (Andreas Meyer-Landrut, 1980-1983, 1987-1989)
- 한스외르크 카스틀 (Hansjörg Kastl, 1983-1987)
- 클라우스 블레흐 (Klaus Blech, 1989-1993)
- 오토 폰 데어 가블렌츠 (Otto von der Gablentz, 1993-1995)
- 에른스트외르크 폰 슈투드니츠 (Ernst-Jörg von Studnitz, 1995-2002)
- 한스프리드리히 폰 플뢰츠 (Hans-Friedrich von Ploetz, 2002-2005)
- 발터 위르겐 슈미트 (Walter Jürgen Schmid, 2005-2010)
- 울리히 브란덴부르크 (Ulrich Brandenburg, 2010-2013)
- 뤼디거 폰 프리치 남작 (Rüdiger Freiherr von Fritsch, 2014-)
5.2. 독일 주재 러시아/소련 대사
- 독일 주재 러시아/소련 대사 [접기 · 펼치기]
- -----
- 러시아 제국
- 파벨 П. 우브리 (Павел Петрович Убри, 1871-1879)
- 표트르 А. 사부로프 (Пёт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абуров, 1879-1884)
- 니콜라이 А. 오를로프 공작 (Князь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Орлов, 1884-1885)
- 파벨 А. 슈발로프 백작 (Граф Павел Андреевич Шувалов, 1885-1894)
- 알렉세이 Б. 로바노프-로스톱스키 공작 (Князь Алексей Борисович Лобанов-Ростовский, 1895)
- 니콜라이 Д. 오스텐사켄 백작 (Гра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Остен-Сакен, 1895-1912)[9]
- 세르게이 Н. 스베르베예프 (Сергей Николаевич Свербеев, 1912-1914)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 소비에트 연방 (독일/서독 주재)
- 아돌프 А. 이오페 (Адольф Абрамович Иоффе, 1918)
- 니콜라이 Н. 크레스트친스키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Крестинский, 1922-1930)
- 레프 М. 힌추크 (Лев Михайлович Хинчук, 1930-1934)
- 야코프 З. 수리츠 (Яков Захарович Суриц, 1934-1937)
- 콘스탄틴 К. 유레네프 (Константи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Юренев, 1937)
- 게오르기 А. 아스타호프 (Георг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стахов, 1937-1938)
- 알렉세이 Ф. 메레칼로프 (Алексей Фёдорович Мерекалов, 1938-1939)
- 알렉세이 А. 슈크바르체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еевич Шкварцев, 1939-1940)
- 블라디미르 Г. 데카노조프 (Владимир Георгиевич Деканозов, 1940-1941)
- 발레리안 А. 조린 (Валери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Зорин, 1955-1956)
- 안드레이 А. 스미르노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Смирнов, 1956-1966)
- 세묜 К. 차라프킨 (Семё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Царапкин, 1966-1971)
- 발렌틴 М. 팔린 (Валентин Михайлович Фалин, 1971-1978)
- 블라디미르 С. 세묘노프 (Владимир Семёнович Семёнов, 1978-1986)
- 유리 А. 크비친스키 (Ю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вицинский, 1986-1990)
- 블라디슬라프 П. 테레호프 (Владислав Петрович Терехов, 1990-1991)
- 소비에트 연방 (동독 주재)
- 게오르기 М. 푸슈킨 (Георгий Максимович Пушкин, 1949-1952, 1954-1958)
- 이반 И. 일리초프 (Иван Иванович Ильичёв, 1952-1953)
- 블라디미르 С. 세묘노프 (Владимир Семёнович Семёнов, 1953-1954)
- 미하일 Г. 페르부힌 (Михаил Георгиевич Первухин, 1958-1962)
- 표트르 А. 아브라시모프 (Пётр Андреевич Абрасимов, 1962-1971, 1975-1983)
- 미하일 Т. 예프레모프 (Михаил Тимофеевич Ефремов, 1971-1975)
- 뱌체슬라프 И. 코체마소프 (Вячеслав Иванович Кочемасов, 1983-1990)
- 겐나디 С. 시킨 (Геннадий Серафимович Шикин, 1990)
- 러시아
- 블라디슬라프 П. 테레호프 (Владислав Петрович Терехов, 1991-1997)
- 세르게이 Б. 크릴로프 (Сергей Борисович Крылов, 1997-2004)
- 블라디미르 В. 코테뇨프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Котенёв, 2004-2010)
- 블라디미르 М. 그리닌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Гринин, 2010-2018)
- 세르게이 Ю. 네차예프 (Сергей Юрьевич Нечаев, 2018-)
6. 관련 문서
- 독일/외교
- 러시아/외교 / 러시아-유럽 관계 / 유럽연합-러시아 관계
- 독일/역사
- 러시아/역사
- 동방정책
- 발트해 국가 이사회
- 독일/경제
- 러시아/경제
- 독일/문화
- 러시아/문화
- 독일계 러시아인 / 러시아계 독일인
- 독일어 / 러시아어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중부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동유럽 국가
7. 관련 기사
[1] 누가 더 피해를 보게 되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리는데 장기적으로는 독일에 팔아먹을게 많은 러시아가 더 피해를 본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수십년간 독일 산업의 경쟁력은 값싼 러시아의 천연자원에 힘입은 것이라는 견해 또한 있다.[2] 허나 프로이센 왕국의 중심지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었지 프로이센 공국에서는 프로이센이라는 이름만 빌려왔다. 호엔촐레른 가문 군주들의 주요 거주지는 베를린과 포츠담이었으며 쾨니히스베르크는 대관식하러가는 장소나 전쟁 시 피난처 정도였고, 대관식을 치른 국왕도 프리드리히 1세와 빌헬름 1세 2명 뿐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타넨베르크 전투 때문에 융커들이 동프로이센에 집착했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실제 프로이센 왕국 융커들은 브란덴부르크, 포메른 출신이 동프로이센 출신보다 훨씬 많았고, 동프로이센 융커 계층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 시대에 대부분 씨가 말랐다.[3] 표트르 3세는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조의 방계인 홀슈타인고토프르 가문 출신이었고, 예카테리나 2세는 부계로는 브란덴부르크를 개척하였고 안할트의 통치 가문이었던 아스카니아 가문, 모계로는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 출신이었다.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는 6촌지간이었다.[4] 독소관계를 찬미하는 노래이다.[5] 소련 붕괴 이후에는 러시아군.[6] 1955년까지는 서독도 마찬가지로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수교하면서 인정하게 되었다.[7] 동독 시절에는 제1외국어가 러시아어였다.[8]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주재 독일 제국 대사[9] 독일계 러시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