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 ||||
여우주연상 | ||||
제19회 (1966년) | → | 제20회 (1967년) | → | 제21회 (1968년) |
줄리 크리스티 (달링) | → | 엘리자베스 테일러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 → | 이디스 에반스 (위스퍼러스) |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 ||||
여우주연상 - 드라마 | ||||
제16회 (1959년) | → | 제17회 (1960년) | → | 제18회 (1961년) |
수전 헤이워드 (나는 살고싶다) | → | 엘리자베스 테일러 (지난 여름, 갑자기) | → | 그리어 가슨 (캠포벨로의 일출) |
역대 베를린 영화제 | ||||
은곰상 - 여자연기자상 | ||||
제21회 (1971년) | → | 제22회 (1972년) | → | 제23회 (1973년) |
시몬 시뇨레, 셜리 맥클레인 (고양이), (데스퍼레이트 캐릭터스) | → | 엘리자베스 테일러 (해머스미스 이즈 아웃) | → | 없음 |
역대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시상식 | ||||
황금접시상(Targa d'oro) | ||||
제4회 (1959년) | → | 제5회 (1960년) | → | 제6회 (1961년) |
소피아 로렌 (검은 난초) / 수잔 헤이워드 (나는 살고싶다) | → | 엘리자베스 테일러 (지난 여름 갑자기) | → | 없음 |
외국여자배우상(Migliore Attrice Straniera) | ||||
제11회 (1966년) | → | 제12회 (1967년) | → | 제13회 (1968년) |
줄리 앤드류스 (사운드 오브 뮤직) | → | 엘리자베스 테일러 (말괄량이 길들이기) / 줄리 크리스티 (닥터 지바고) | → | 페이 더너웨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 캐서린 헵번 (초대받지 않은 손님) |
제16회 (1971년) | → | 제17회 (1972년) | → | 제18회 (1973년) |
알리 맥그로우 (러브 스토리) | → | 엘리자베스 테일러 (화려한 사랑) | → | 라이자 머넬리 (캬바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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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6336 Hollywood Blvd. | }}}}}}}}} |
}}} ||
<colbgcolor=#544C91><colcolor=#ffffff> | |||
본명 | 일리저버스 로즈먼드 테일러 Elizabeth Rosemond Taylor | ||
출생 | 1932년 2월 27일 | ||
영국 잉글랜드 런던 히스우드 | |||
사망 | 2011년 3월 23일 (향년 79세) |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160cm[3] | ||
직업 | 배우 | ||
활동 | 1942년 – 2003년 | ||
배우자 | 칸래드 니컬슨 "니키" 힐튼 주니어(1950년 결혼 – 1951년 이혼) 마이클 와일딩(1952년 결혼 – 1957년 이혼) 마이크 타드(1957년 결혼 – 1958년 사별) 에디 피셔(1959년 결혼 – 1964년 이혼) 리처드 버튼(1964년 결혼 – 1975년 이혼)/(1975년 결혼 – 1976년 이혼) 존 워너(1976년 결혼 – 1982년 이혼) 래리 포튼스키(1991년 결혼 – 1996년 이혼) | ||
자녀 | 장남 마이클 하워드 와일딩 주니어(1953년생) 차남 크리스터퍼 에드워드 와일딩(1955년생) 장녀 일리저버스 "라이저" 타드 티비(1957년생) 차녀 머리어 버튼 카슨(1961년생)[4] | ||
종교 | 크리스천 사이언스→유대교 | ||
별명 | 리즈(Liz)[5] | ||
서명 | |||
링크 | / 엘리자베스 테일러 재단 / / / / / [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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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 אליזבת טיילו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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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화 《고백》 (1965) |
난 그녀의 독보적인 재능과 직업정신에 압도되었다. 직관력이 뛰어나고 순간적인 감정몰입에 능했는데 그걸 지켜보는 건 일종의 특권이었다. 톱스타가 되면 거기에 안주해 제멋대로 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녀는 늘 열의를 갖고 자신을 새로운 한계로 밀어부쳤다. 전설 그 자체인 그녀를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다.
폴 뉴먼
영국과 미국의 배우, 인권운동가.폴 뉴먼
2. 인기 및 위상
보라색 눈으로 유명한 고전 할리우드 시대의 배우로, 30년 가까이[7]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하는 인기를 누리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다섯 번 후보로 지명되고 그 중 두 번[8] 수상했다. 골든 글로브 2회[9], BAFTA 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1회 수상자이기도 하다. AFI 선정 100년간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7위에 뽑히기도 했다. 말년엔 자신의 명성을 발판으로 유명인들 가운데 에이즈 퇴치 운동을 가장 먼저 시작하고 주도적으로 앞서 박애주의자로 칭송 받았다. 이런 공적을 바탕으로 2002년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수상받았다.초등학생 나이에 대스타가 되어 일상이 낱낱이 언론을 타게 되면서 유년기를 상실한 뒤 어른이 되어서는 더 큰 성공을 이뤄낸, 할리우드에서 매우 흔치 않은 사례다.[10] 어려서부터 "유명세가 마치 공기와 같을" 정도로 대중에게 공개된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 동시대의 스타들과 달리 사생활을 숨기지 않았고, 이는 오늘날 스타-대중의 관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인권 운동 참여, 화려한 개인사, 그에 따른 고난 등 현 할리우드의 공식이 된 스타성의 필수 구성 요건들을 가장 앞서 제시한 인물들 중 하나로 여겨진다. <클레오파트라>로 할리우드 배우 최초 출연료 백만 달러 계약을 이뤄냈으며 이를 기념하는 공식행사까지 가졌으나 제작이 늦어져 개봉년도로는 여배우 최초의 기록이다.[11]
3. 생애
영국에서 미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출생 때부터 미국과 영국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었다.[14] 부계가 미술중개업에 종사한 덕에 미술품에 조예가 깊었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두 살 때부터 교양 목적으로 발레와 노래 교습을 받았고 네 살 때부터 승마를 익혔으며, 왕족들과 학교를 다녔다. 덕분에 테일러가 3살 때 나간 학교 발표회에 엘리자베스 2세가 참석해 지켜보기도 했다.
고위직들로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화가 영국에 감돈다는 귀띔을 받고 테일러가 7살이 됐을 때 일가족이 귀국해 LA에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베벌리힐스에서 유명인사들이 드나드는 화랑[15]을 운영했고, 가족들은 주말마다 말리부에서 바베큐 파티를 했다. 고모할아버지 하워드 영은 특히 재산이 많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같은 거물들과 친밀한 사이였고, 뉴욕 펜트하우스에 거주하면서 코네티컷주에는 대저택을, 플로리다주엔 겨울 전용 휴양지를 구비하고 있었는데, 슬하에 자녀가 없어[16] 테일러 가족을 대리로 삼아 자신의 부를 마음껏 누리게 해주었다.
테일러는 "유명하지 않았던 순간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아기 때부터 빼어난 외모로 근방에 소문이 자자해 할리우드 진출을 자주 권유 받았다. 그러나 부모님은 딸을 연예계에 내놓는 걸 선뜻 내켜하지 않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과 레트의 딸 보니 역할 제의도 거절해버렸다. 그러나 테일러의 연기 활동이 아직 가족들에게 많이 낯선 미국 사교사회에 녹아드는 데 도움이 될 거란 판단이 서자[17] 1941년 테일러가 9살이 됐을 때 영화사와 계약을 체결했다.[18]
테일러는 1942년 10세 때 배우로 데뷔했으며 12살에 <녹원의 천사> 주연을 맡으며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이는 "또래 아이들이 누리는 평범한 삶과의 영원한 결별"을 뜻하기도 했다. 이때부턴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아버지가 술에 취하기만 하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테일러의 말로 미루어 보면, 어린 딸이 자신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된 것을 참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9] 모순되게도 테일러의 데뷔를 주저하던 어머니를 설득했던 건 먼저 마음이 바뀐 아버지 쪽이었다. 래시 시리즈 오디션 기회조차도 아버지의 친구가 MGM의 제작자여서 받게 된 것이었다.
유서프 카쉬가 1946년 테일러가 14살 때 찍은 작품 |
15살 때 MGM 창립자 루이 B. 메이어가 매니저 역할을 해주던 어머니에게 언어폭력을 쓰며 고압적으로 구는 걸 보고 "너나 스튜디오나 다 꺼져버려!"라고 소리 지른 적이 있다. 부회장들까지 나서서 중재했지만 테일러는 끝까지 사과를 거부했고 루이 B. 메이어가 오히려 어머니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일러는 이때 MGM에서 자신을 내쫓지 않는 걸 보고 본인의 상품 가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테일러의 어머니는 촬영장마다 일일이 쫓아다녀 지나친 과보호가 비아냥을 샀는데, 사실 이 덕분에 테일러는 20세기에 활동한 다른 아역스타들과 달리 마약 강요나 성희롱 같은 더러운 일을 한 번도 겪지 않을 수 있었다.[20]
성인 연기자로 대중의 눈에 확실하게 도장을 찍게 해준 작품은 1951년작 <젊은이의 양지>다. 이때부터 할리우드에 TV와 경쟁해야 하는 세상이 도래하고 기존 영화 체계가 전부 허물어지게 된다. 테일러는 딱 이 시기부터 성인 연기자로 활약했음에도 그 직전에 아역 스타로서 전통 스튜디오 양식을 제대로 다 경험했던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에 "할리우드 황금기 스튜디오 체계가 남긴 최후의 유산"이라고 한다.[21]
이후 2001년까지 50편의 영화 - 드라마나 미니시리즈, 성우로 출연한 것까지 합치면 80여 편 - 를 찍었다. <자이언트>, <클레오파트라>,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등도 대표작이다. 특히 개봉 당시 실제 배우자였던 리처드 버튼과 함께 출연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실감나게 막장 부부 연기를 보여준 게 유명하다.
평생 연기 수업 한 번 받은 적 없이 현장에 바로 투입되었음에도 처음부터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다. 테일러는 기억력과 현장집중력이 뛰어난 배우였다. 배우라면 웃고 떠들다가도 큐 신호에 즉각 연기에 몰두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촬영 직전에 준비가 필요하다며 대사를 다시 확인하거나 집중을 위해 워밍업을 하며 다른 배우들을 기다리게 하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모든 장면의 촬영을 단 한 번의 시도만으로 완벽하게 해내는 걸로도 정평이 나있었다. 코미디, 심리극,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를 전부 능란하게 소화해낼 정도로 연기폭도 넓었다. 이에 부합하는 영예로운 상을 많이 탄 축에 속하지만, 그만큼 "스넙" 당한 적도 많아 이미 당대부터 미모 때문에 연기력을 정당하게 평가 받지 못하는 여배우의 예시로 자주 꼽혔다.
출연작 제목대로 태어났을 때부터 미모, 돈, 연기력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여성"이었지만 타고난 조건들이어서 그랬는지 이 모두에 그다지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모두가 꺼리던 HIV/에이즈 인권 운동에 앞장서면서 "처음으로 삶에 목적 의식을 갖게 된다."
1983년 12월 5일 알코올 의존증 문제를 해결하고자 베티 포드 센터[22]에 할리우드 스타 최초로 자진 입소했다. 자니 카슨, 메리 타일러 무어 등 동료 스타들이 그 뒤를 따랐고, 덕분에 중독 문제를 쉬쉬하던 미국 사회의 판도가 완전히 뒤집혀 오늘날 일반 대중들이 중독 문제를 주변인들과 공유하고 치료소에서 적절한 조치를 받게 되었다. 1984년 1월 20일 퇴소했지만, 1988년 다시 한 번 들어갔다. <녹원의 천사>에서 승마 연기를 하다가 척추를 다친 게 고질병이 되어서 허리 통증을 해결하려다 진통제에 중독돼 고생하기도 했는데, 이는 의료진이 의도적으로 유도한 과잉복용 때문이었다. 1990년 캘리포니아 의료위원회는 80년대에 테일러에게 진통제 처방전을 수천 장 내준 3명의 의사를 적발했고 후에 경고장을 보내 견책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멀쩡한 신체기관이 전무한 수준이라 온몸의 장기를 돌아가며 수십 번의 수술을 받았다. 가장 오래된 최초의 기억이 "고통"일 정도였다. 래리 킹조차도 왜 나한테만 이런 가혹한 질병들이 벌어지나 하늘을 원망한 적 없냐고 안타까워했을 정도. 평생 밤마다 끙끙댔지만 티내지 않고 밝게 생활했다. 수많은 병마와 각종 사건들을 이겨냈기 때문에 "생존자"라는 표현이 자주 붙었다.
1994년과 1995년엔 두 번의 고관절 교체 수술이 있었다. 1997년엔 뇌졸중이 뇌종양 제거 수술로 이어졌다. 2002년엔 피부암 방사선 치료를 견뎌야 했다. 1998년과 2004년엔 등에 압박골절이 일어나 수술을 거쳤고 말년엔 휠체어 신세를 지기도 했다.
2002년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테일러가 참석한 가운데 헌정 공연이 열렸다. 그리고 이듬 해인 2003년 3월 24일, 건강악화 등을 이유로 배우 은퇴를 선언했다.
2011년 3월 23일 울혈성 심부전증 투병 중 향년 7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친구 조운 콜린스는 유명인의 사망에 언론 취재가 이 정도로 몰려든 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타계 이후로 처음 겪는 장면이었다고.[23] 장례식은 비공개로 가족끼리 치렀으며, LA 인근의 포리스트 론 공원묘지에 묻혔다.[24] 2012년 사후 수익 랭킹 1위를 차지했고[25] 2017년까지 최상위 명단에 연속으로 올랐다.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 中에서 |
4. 주요 출연 작품
4.1. MGM 아역스타 시절
- 귀로(There's One Born Every Minute), 1942 - 글로리아 트와인 역
유니버설 픽처스와 MGM이 '신비로운 눈을 지닌 9살 여자애' 테일러의 미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접촉해왔다. 어머니가 유니버설을 택해 계약 후 찍은 첫 작품이다. 주인공의 막내딸 역할이었다. 그러나 유니버설은 곧 아이답지 않은[26] 성숙한 얼굴을 탐탁치 않게 여기게 됐고 계약을 취소했다. 이 영화 시작 부분을 보면 테일러는 전문 성악 발성으로 어른처럼 노래하는데[27] 이처럼 아이답게 노래할 줄 모르는 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 래시 집에 오다(Lassie Come Home), 1943 - 프리실라 역
그 유명한 래시 시리즈의 탄생이었다. MGM이 영국식 억양의 조연을 필요로 하면서 오디션을 통해 3개월 임시 계약을 했다.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대중에게 각인 시킨 첫 작품이다. 결국 7년 짜리 정식 계약을 체결했다.
- 제인 에어(Jane Eyre), 1943 - 헬렌 번스 역
20세기 폭스 제작. MGM이 테일러를 빌려줬다. 로체스터 역을 맡았던 오슨 웰스는 어린 테일러의 미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초반에 짧게 나오지만 불운을 고요하게 받아들이는 소녀를 강렬한 존재감으로 표현하며 영화 전체에 고딕 분위기를 잘 깔아주었다는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는다.
- 도버의 하얀 절벽(The White Cliffs of Dover), 1944 - 베치 케니 역
로디 맥다월이 아이린 던의 아들로, 테일러가 이 아들이 좋아하는 이웃 소녀로 나온다. 감독은 테일러를 눈여겨 봤다가 <녹원의 천사> 주연으로 추천했다.
-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 1944 - 벨벗 브라운 역
첫 주연작이다. 남장을 한 채 애마에 올라 장애물 경마에 나가는 소녀의 애기다. MGM은 수준급 승마와 영국식 억양 구사가 가능한 어린 여배우를 찾는 데 큰 난항을 겪었다. 가까스로 테일러를 구한 뒤엔 아직 체격이 작아 원작 주인공에 어울릴만큼 성장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MGM이 몇 달 기다려주는 동안 테일러는 승마를 더 연마하다가 부상을 당했다. MGM 간판스타 미키 루니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영화는 흥행과 비평 양면으로 성공했다. "그 세대의 또래 소녀들은 모두 녹원의 천사가 되고 싶어했다."[28] 테일러는 이때의 경험에 대해 "연기가 아니라" "동물을 사랑하는 어린아이였던" "내 실제 삶의 연장이었다"고 말했다. 테일러는 같이 연기할 말을 직접 골랐는데 MGM은 이 말을 13살 생일선물로 줬고 테일러는 이 말이 사망할 때까지[29] 길렀다. 테일러에게서 대스타의 가능성을 엿본 MGM은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 아버지와 인생을(Life with Father), 1947 - 메리 스키너 역
코미디. 윌리엄 파월과 아이린 던이 이야기의 중심인 부부로, 지미 라이든이 아들이자 테일러의 애정상대로 나온다. 작품의 완성도는 물론 네 배우의 연기가 찬사를 받았다.
- 신시아(Cynthia), 1947 - 신시아 비숍 역
대본에 버스터 키튼이 참여했다. 뮤지컬에 재능이 있다는 설정이다. 테일러는 학교 오디션 장면에서 곡 하나를 능숙한 성악 창법으로 완창한다. 후에 MGM의 뮤지컬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댓츠 엔터테인먼트>(1974)에도 실렸다. 지미 라이든과 또 연애 관계로 엮인다. 로비 카드가 예쁘게 뽑혔다.
- 주디와 데이트(Date with Judy), 1948 - 캐럴 프링글 역
이 작품을 통해 청소년 역으로 확실히 넘어갔다. 로버트 스택은 테일러가 영화상에서 처음으로 어른스런 입맞춤을 하게 된 상대 배우였다. 이 작품부터 화장다운 화장을 하게 되었다. 개봉년도 전체 흥행 9위를 차지했다.
- 줄리아 미스비헤이브(Julia Misbehaves), 1948 - 수전 패킷 역
부잣집 딸로 나왔다. 어려서 헤어져 오래 보지 못했던 어머니 줄리아(그리어 가슨 분)를 자신의 결혼식에 초대해 신분 차이로 헤어졌던 부모님이 재결합하는 계기를 만든다.[30]
-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1949 - 에이미 마치 역
테일러를 새침한 미녀 역으로 고정 시키려는 MGM의 의도가 있었다. 피터 로퍼드가 다시 한 번 상대역이 되었다. 3월 10일 개봉.
- 공모자(Conspirator), 1949 - 멀린다 그레이튼 역
누아르. MGM에서 가능성 있는 여배우(들)에 대한 전례 없는 규모의 고투자 고수익 방침이 세워진 뒤, 테일러를 그 대상으로 결정하고 찍은 첫 번째 작품이다. MGM은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열어주고 프랑스 파리로 호화여행을 보내주는[31] 등 매우 공을 들였다. 첫 성인 배역이며 영국에서 촬영했다. 로버트 테일러가 상대역이었다.
- 신부의 아버지(Father of the Bride), 1950 - 캐서린 "케이" 뱅크스 역
개봉 직전에 있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니키 힐튼과의 결혼식 비용을 MGM에서 다 댔다. '신부'라는 이미지로 연계된 이 영화의 홍보에 써먹기 위해서였다. MGM의 고투자는 보답 받았다. 1950년에 가장 흥행한 영화 중 하나다. 스펜서 트레이시가 아버지로 나온다. 5월 18일 개봉.
- 아버지의 작은 배당금(Father's Little Dividend), 1951 - 케이 던스턴 역
<신부의 아버지>의 대성공에 고무돼 서둘러 제작한 후속작이다. 흥행면에서 또 다시 대성공을 거뒀다. 이때까지의 테일러는 이 영화의 감독인 빈신트 머넬리가 아버지라 당시 자주 촬영장에 놀러왔던 라이자 머넬리의 표현처럼, "아직 애"였다.
4.2. MGM 성인연기자 전성기
화면 속 존재감, 민감하고 깊이 있는 연기, 인물에 대한 상상력, 압도적인 관능미 등 사람들이 배우에게서 꿈꾸는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시기다.-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 1951 - 앤절라 비커스 역
파라마운트 픽처스 제작. MGM이 테일러를 임대해주었다. 이 작품을 통해 미국 대중이 테일러를 완연한 성인 연기자로 인지하게 됐다. 전형적인 MGM식 "눈요기감 배우로 머물뻔한 위기에서 벗어나" "깊이 있는 연기가 가능한 진지한 배우"로의 전환이 이뤄졌다. 절친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만난 작품이기도 하다. 흥행과 비평 면에서 전부 대성공했다. 그러나 아카데미 "스넙"의 시작이기도 했다.
- 최고의 사랑(Love Is Better Than Ever), 1952 - 애너스테이자 "스테이시" 매커보이 역
"사랑의 매혹", "러브 이즈 베터 댄 에버"로도 유통되고 있다. 무용교사 역으로 나왔다. 스탠리 도넌 연출. 이 작품 개봉 직후 도넌의 <사랑은 비를 타고>가 개봉됐다. 한참 잘 나가던 상대역 래리 파크스[32]가 하필 1951년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바람에 촬영 후 1년 동안 창고 신세가 됐다가 겨우 개봉했다. 파크스의 마지막 할리우드 영화다. 진 켈리가 특별출연했다.
- 아이반호(Ivanhoe), 1952 - 리베카 역
로버트 테일러와의 재협업. 이 작품을 통해 두 번째 남편 마이클 와일딩을 만났다. 와일딩은 다른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촬영장이 서로 근처에 있던 것이 인연이 됐다.
-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아가씨(The Girl Who Had Everything), 1953 - 진 라터머 역
페르난도 라마스, 윌리엄 파월, 기그 영 출연.
- 랩소디(Rhapsody), 1954 - 루이즈 듀랜트 역
찰스 비더 연출. 비토리오 가스만, 존 에릭슨, 루이 캘헌 출연. 3월 11일 개봉.
1900년대 초 취리히 배경. 1908년에 에설 리처드슨[33]이 발표한 소설 "Maurice Guest"가 원작이다.
- 거상의 길(Elephant Walk), 1954 - 루스 와일리 역
파라마운트 픽처스 제작. 신경쇠약을 이유로 하차한 비비언 리의 대타 투입이 필요해지자 MGM이 테일러를 또 임대해주었다. 테일러는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피터 핀치, 데이너 앤드루스 출연. 4월 21일 개봉.
- 호걸 브롬멜(Beau Brummell), 1954 - 레이디 퍼트리샤 벨럼 역
보 브러믈 전기영화. 10월 1일 개봉.
- 내가 마지막 본 파리(The Last Time I Saw Paris), 1954 - 헬렌 엘즈워스 역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이 원작인 로맨스. <카사블랑카>의 엡스틴 쌍둥이 형제가 대본을 썼다. 2002년 AFI 100대 애정영화 후보에 올랐었다. 밴 존슨이 상대역이었고, 로저 무어가 조연으로 나온다. 프랑스어 대사를 직접 소화했다. 11월 18일 개봉.
- 자이언트(Giant), 1956 - 레슬리 린튼 베너딕트 역
MGM이 이번엔 워너 브라더스에 임대해주었다. 제임스 딘은 본인 분량을 다 찍자마자 요절했는데, 테일러는 딘과 같이 나오는 장면의 단독 촬영이 남아있어서 매우 고통스럽게 작업했다. 노년 모습까지 신빙성이 있게 인물을 구축했음에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되지 못해 스넙으로 여겨진다. 워너 브라더스 역사상 최고의 매표 기록을 세웠다.
- 애정이 꽃피는 나무(Raintree County), 1957 - 수재나 드레이크 역
몽고메리 클리프트, 에바 마리 세인트, 리 마빈이 출연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첫 후보 지명되었다. 작품 자체는 고평가 받지 못했다. 촬영분 일부는 <서부 개척사>(1962)의 치커모거 전투 낮 장면에 쓰였다.
-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Cat on a Hot Tin Roof), 1958 - 매기 "더 캣" 펄릿 역
촬영 시작 후 고작 2주가 지났을 때 세 번째 남편 마이크 타드가 사망했다. 남편 역의 폴 뉴먼은 테일러가 "연기 도구들을 정확히 사용할줄 아는 배우"라고 평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두 번째로 올랐다.
- 지난 여름, 갑자기(Suddenly, Last Summer), 1959 - 캐서린 할리 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세 번째 후보 지명되었다. 테일러는 자신이 이 작품으로 수상했어야 했다고 말한 바 있는데, 많은 평론가들이 동의한다. 친척(캐서린 헵번 분)에 의해 강제로 뇌엽절리술을 받을 위기에 처한 여성 역이다. 테일러가 스타 파워로 집어넣은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여주인공의 정신상태를 감정하는 의사로 나온다. 감독 조저프 L. 맹키위츠와 제작자 샘 스피글이 클리프트에게 무례하게 대해 헵번과 테일러가 함께 엄청나게 싸워대서 영화가 미완으로 남을 거란 우려까지 있었지만 강렬한 결과물이 나왔다. 헵번의 대표작으로도 꼽힌다. 고어 비달이 대본을 썼다.
- 버터필드 8(BUtterfield 8), 1960 - 글로리아 역
MGM 산하 마지막 작품이다. 서류상으론 계약이 끝나있었는데 MGM에서 우겨서 성사 시켰다. 대신 당시 남편 에디 피셔를 작은 역할로 동반 출연시켰다. 여러 남성들과 잠자리를 갖고 "선물"로 돈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며 스스로를 혐오하는 콜걸을 연기했다. 테일러는 대본부터 맘에 안 들었다며 이 영화가 "쓰레기"라고 일갈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네 번 후보 지명 끝에 첫 수상했는데, 테일러는 이를 막 촬영을 시작했던 <클레오파트라> 촬영장에서 폐렴으로 쓰러져 심정지로 여러 번 사망선고까지 받았던 것에 대한 동정표라고 봤다. "목숨값으로 받은 상"이라는 말까지 했었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의 셜리 맥클레인이 받는 게 옳았다고 생각한다고. 더 가디언 평론가 피터 브래드쇼는 역대 최고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 중 하나로 이 작품 속 테일러를 꼽았다. 친구 샤론 스톤은 AFI와의 인터뷰에서 "탁월한 신체언어 활용만으로 서사를 만들어낸" 점을 높이 샀다.
- 클레오파트라(Cleopatra), 1963 - 클레오파트라 역
20세기 폭스 제작. 조저프 L. 맹키위츠 감독과의 두 번째 작업이다. 촬영 도중 기관절개술을 받아 흉터가 크게 남았다. 실제 클레오파트라보다 더 클레오파트라답다는 얘기를 들었음에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지 못해 스넙으로 간주된다. 60년대엔 눈에 유독 힘을 주는 화장법이 유행했는데 그 시작을 바로 이 영화 속 테일러의 눈화장으로 본다.
4.3. 리즈&딕 시절
주로 리처드 버튼과 협업하며 일과 사랑을 양립하던 시기다. 둘은 언론에서 "리즈&딕(Liz&Dick)"으로 불리며 함께 하는 모든 것이 늘 큰 화제를 모았다. 흥행력이 최고조에 올라 내내 최상위권을 유지했고 예술적으로 큰 성과도 있었지만 후반엔 소위 "하이 캠프"스러운 진부한 영화들만 생산해내 비판 받았다. 보통 영화사에 뜻깊은 기여를 한 연기는 60년대 후반이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본다.- 예기치 못한 일(The V.I.P.s), 1963 - 프랜시스 앤드러스 역
<클레오파트라> 촬영 종료 후 헤어졌던 버튼과 테일러는 1963년 초 이 영화의 주연으로 함께 발탁되며 재회했다. 숙소가 런던 도체스터 호텔[34]에 잡혔는데 각자 다른 객실에 머물렀음에도 유언비어가 크게 번져 버튼의 아내가 12월에 이혼을 신청하면서 재결합했다. 버튼과 테일러가 각각 백만장자 남편과 그를 떠나려는 유명 여배우로 출연해 둘의 염문을 연상케 하며 박스오피스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 고백(The Sandpiper), 1965 - 로라 레이놀즈 역
빈신트 머넬리 연출. 작품평은 안 좋았지만 크게 흥행한 덕에 주제곡 "The Shadow of Your Smile"이 인기를 끌어 AFI 선정 100대 영화음악에 꼽혔다. 커크 더글러스에 따르면 매카시즘의 선봉에 섰던 칼럼니스트 헤더 하퍼가 초연 때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랐던 미국 공산당원 작가 돌턴 트럼보를 왜 크레딧에 넣었냐고 따져묻자 테일러가 "좀 닥치는 게 어때요?"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찰스 브론슨이 동료 예술가 중 하나로 나온다.
아내(에바 마리 세인트 분)가 있는 교사(버튼 분)가 문제학생을 아들로 둔 화가 로러를 학부모 상담으로 만나 관계를 맺는다.
-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1966 - 마사 역
마이크 니콜스 연출. 테일러가 가장 만족스러워하는 작품이다. 캐릭터 형성을 위해 일부러 10kg 가량 살을 찌우고 목소리를 낮추고 자세를 바꾸며 자신의 존재를 전격적으로 다시 돌아보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라고. 이 영화로 두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수상이 거의 100% 확정이었음에도 유럽에 머무르던 테일러는 참석을 거부했다. 대리수상자는 다음해 <졸업>으로 스타덤에 오르게 되는 앤 밴크로프트. 테일러는 이후 아카데미를 향한 감사 표시도 건너뛰었다. 버튼을 늘 후보에만 올리고 상은 주지 않던 경향성에 대한 간접 항의로 해석된다.
-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 1967 - 캐서리나 역
<로미오와 줄리엣>(1968)의 프랑코 제피렐리가 감독했다. 1967년 개봉한 작품 중에서 가장 큰 수익을 거둬들였다.
- 황금 눈에 비친 모습(Reflections in a Golden Eye), 1967 - 리어노라 펜더턴 역
영화 내용을 직설적으로 반영한 "금지된 정사의 숲"으로도 불린다. 존 휴스턴 연출. 카슨 매컬러스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테일러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발탁을 출연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클리프트가 촬영 직전 사망해 말런 브랜도가 대타가 되었다. 영화평은 그리 좋지 않지만 테일러의 연기가 빼어나 대표작으로 자주 꼽힌다.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개봉했다. 테일러가 촬영 중에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로 뉴욕비평가협회 상을 탔을 때 브랜도가 왜 진작 테일러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냐고 기자들을 호통 친 일이 유명하다.
- 위험한 여로(The Comedians), 1967 - 마사 피네더 역
- 붐(Boom!), 1968 - 플로라 "시시" 고포스 역
테너시 윌리엄스 원작, 조지프 로시 연출. 나름 호화 제작진임에도 불구하고 흥행과 비평 모두 실패했다. 존 워터스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 중의 하나다. 실제로 워터스의 작품들과 결이 비슷하다. 다만 테일러가 선보인 스타일은 돌체 앤 가바나 등 패션계에서 영감의 대상이 되거나 행사에서 후배들이 재해석해 선보이고 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테일러는 한동안 비주류 영화에 깊게 빠져 74년까지 특이한 작품들을 주로 찍었다.
- 비밀(Secret Ceremony), 1968 - 리어노라 역
영국에서 제작했다. <붐>처럼 조지프 로시 연출인데, <붐>과 달리 평은 나쁘지 않았다. 미아 패로, 로버트 미첨이 나온다. 스릴러 장르팬들 사이에서 숨겨진 명작으로 불린다.
- Here's Lucy, 1970 - 본인 역
루실 볼의 인기 TV쇼 3기의 포문을 열었다. 출연 회차 제목은 "Lucy Meets the Burtons(루시, 버튼 부부를 만나다)." 팬들을 따돌리려고 배관공으로 변장했던 버튼을 루시가 진짜 배관공으로 착각해 집에 들인다. 후에 루시는 버튼이 버리고 간 작업복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발견해 껴본다. 이는 버튼 부부가 기자간담회에서 선보이기로 한 그 유명한 '테일러 반지'였고, 반지가 빠지지 않자 루시는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팔이 테일러의 팔인 척 한다. 쇼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회차다.
- 해머스미스 이즈 아웃(Hammersmith Is Out), 1972 - 지미 진 잭슨 역
버튼과의 마지막 협업작이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인 은곰상을 받았다. 작품은 은곰상을 하나 탔고, 금곰상 후보이기도 했다. 파우스트 전설 모티브를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피터 유스티노프 연출.
4.4. 하향기
TV 출연이 잦아졌고, 연기력이 작품별로 들쑥날쑥하는 경향을 보였다. 70년대까진 흥행력 면에서 여전한 위세를 지녀 마이클 케인과 <화려한 사랑(Zee and Co)>(1972)을 찍을 때 케인의 10배를 받았다.- 수요일(Ash Wednesday), 1973 - 바버라 소여 역
큰 주름이 진 중년여성이 딸보다 어린 여성에게 빠진 남편(헨리 폰다 분)을 붙잡아두기 위해 주름제거수술을 해서 테일러의 얼굴이 된다. 로저 이버트는 이 영화 평에서 "미국의 국보인 테일러의 얼굴을 보존할 목적이라면 무슨 짓을 하든 응원할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적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왕관은 테일러의 소유"라며,[35] 이런 테일러를 떠나려는 남편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전혀 믿겨지지 않는다는 게 영화의 근본 문제라고 지적했다.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 더 드라이버스 시트(The Driver's Seat), 1974 - 리자 역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익스플로이테이션 심리극. 자신을 살해해줄 남자를 찾아헤매는 정신이 불안정한 여성을 연기했다. 과거엔 불친절한 서사 때문에 최악의 필모로 꼽혔으나 오늘날엔 컬트팬층이 형성됐다. 버튼과의 첫 번째 이혼을 신청한 다음 날 촬영이 시작됐다. 앤디 워홀이 잠깐 나온다. 여기에서 보여준 뛰어난 화장 손기술이 2016년 미국 넷상에서 큰 화제가 됐다.
- 거울 살인 사건(The Mirror Crack'd), 1980 - 머리나 러드 역
배우 진 티어니의 실화에서 영감을 받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원작.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네 편 감독한 가이 해믈턴이 연출했고, 영국에서 제작했다. 테일러는 진 티어니에 해당되는 역할이고, 록 허드슨이 남편인 영화 감독, 킴 노백이 테일러의 오랜 앙숙으로 등장하며, 앤절러 랜즈버리가 탐정 미스 마플로 활약한다. 제럴딘 채플린, 에드워드 폭스, 토니 커티스가 출연한다.
- 남과 북(North and South), 1985 - 마담 콘티 역
남북 전쟁 소재 TV 대하드라마다. 시즌1 5화에서 군인들에게 매춘부들을 제공하는 포주로 등장하는데, 악역의 꾐에 빠져 여주인공의 큰 비밀을 부지불식간에 노출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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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트 버드 오브 유스(Sweet Bird of Youth), 1989 - 앨릭산드라 델 라고 역
테너시 윌리엄스 희곡 원작 TV 영화. 나이 먹는 걸 괴로워하는 유명한 중년의 여배우로 나온다. 호텔에선 커즈모나폴러스 공주(Princess Kosmonopolis)라는 이름을 쓰는데, 한 유럽 왕자(prince)와 결혼하면서 공주 작위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여자들을 등쳐먹는 배우지망생(마크 하먼 분)과 엮여 그의 옛 연인이 있는 고향으로 함께 향한다. "나는 네 나이(31살)에 이미 전설이었어"라는 대사가 나온다.
하먼에 따르면 테일러는 계약대로 하루 촬영이 8시간이 지나면 남은 분량이 있든말든 가버려 작업이 수월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세트를 수정하느라 2시간이 초과되자 테일러가 왜 날 기다리게 만드냐며 화를 냈는데, 하먼이 "그러게요, 저랑 X나 같은 처지네요"라고 빈정댔다고 한다. 하먼은 당연히 자신이 잘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테일러는 그 다음 날부터는 시간이 얼마가 초과되든 계속 일했다고. 테일러는 촬영이 다 끝난 뒤 하먼에게 해밀턴 시계를 선물로 줬는데 뒷면에 "하먼에게, 2시간, 째깍째깍, 사랑을 담아"라고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 1994 - 펄 슬래그후풀 역
여주인공 어머니 역이었다. 마지막 장편영화 출연작이다. 대개 클래식 배우들의 마지막 영화 나들이 작품은 보통 흥행이 그저 그런데 이 작품은 제작비 46,000,000 달러로 341,631,208 달러를 벌어들이는 초대박을 쳤다. 연기가 혹평을 받아 골든 라즈베리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원작 만화 팬덤에선 만족을 표했다.
- 디즈 올드 브로즈(These Old Broads), 2001 - 베럴 메이슨 역
ABC TV 영화. 평생 알고 지낸 업계 동료들인 셜리 맥클레인, 데비 레널즈, 조운 콜린스와 뭉쳤다. 테일러의 유작이다. 대사로도 직접 제시되고 있지만, 잘 걷지도 못하는 처지라 침상에 앉은 채로 대사만 치는 조연이었고, 나머지 세 배우들이 벌이는 소동의 양상이 영화의 중심이다. 원래는 줄리 앤드류스와 로런 버콜이 기용될 예정이었다.
- 몇 편의 애니메이션에 성우로 출연했다.
- 폭스 심슨 가족의 매기 심슨역을 맡기도 했는데, 매기가 했던 몇 안 되는 대사들 중 하나인 "Daddy"가 바로 테일러의 목소리이다. 여러 느낌을 시도하느라 녹음이 꽤 오래 걸렸는데 다 끝나자마자 테일러가 매기 목소리로 "Fxxx you"라고 해서 사람들이 박장대소 했다. 원래 작가 한두 명만 있곤 하던 녹음실은 테일러를 구경하려는 제작진들로 가득 차있었다.
- 1993년 5월 13일에 방영된 심슨 가족 4시즌 막화 "Krusty Gets Kancelled(크러스티 쇼 중단되다)"에서 본인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방송에서 쫓겨난 광대 크러스티를 구제하기 위해 베트 미들러, 자니 카슨,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등이 컴백쇼를 준비하는데, 테일러는 에이전트의 훼방으로 출연하지 못해서 에이전트를 해고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는 내용이다.
- 캡틴플래닛에서 앤드루스 부인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4.5. 연극
- 1981년 "작은 여우들"에서 주인공 리지나 역으로 연극에 첫 출연했다. 플로리다주 파커 극장와 케네디 센터에서의 공연 후 브로드웨이로 무대를 옮기면서 테일러가 출연한다는 광고가 뉴욕 타임스에 실렸는데 이후 한 주 동안 100만 달러 상당의 표가 순식간에 동이 났다. 비평계의 찬사를 받으며 토니상 여우주연상 후보와 드라마 데스크 상 후보에 올랐다.
- 그러나 1983년 전남편 리처드 버튼과 재회한 노엘 카워드의 "사생활(Private Lives)" 공연에선 그렇지 않았다. 이혼한 부부가 각자 새 배우자와 프랑스로 신혼여행을 가다가 마주친다는 내용의 코미디였는데, 테일러-버튼의 재결합을 희망하던 대중의 열광 덕에 매진돼 상업적으론 대성공했고 팬들과 언론이 통제불가능 수준으로 브로드웨이의 런트-펀탠 극장[36] 앞에 몰려들었지만, 이스라엘에서 겪은 교통사고 후유증인 혈종 문제, 우울증에서 기인한 폭식 습관, 진통제/알코올 중독이 다발로 겹친 테일러는 연습에 성실히 임하지 않고 자만한 모습을 보여 테일러의 태도와 연기를 극찬하던[37] 버튼을 크게 실망시키고 고통 받게 했다. 그러나 등 수술을 받은지 얼마 안 된 버튼 역시 건강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38] 결국 두 사람 모두 혹평을 받았다. 보스턴, 로스앤젤레스 등을 순회했다.
이 공연이 끝나고 테일러는 중독 증상들을 고치기 위해 할리우드 스타 최초로 베티 포드 센터에 자진 공개 입소하게 된다.
2013년 당시 상황을 소재로 BBC4에서 상상을 가미해 <Burton & Taylor>라는 TV 영화를 제작한 바 있다. 헬레나 본햄 카터가 테일러였고 도미닉 웨스트가 버튼이었는데,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5. 사회공헌 활동
전세계에 의료 관련으로 사재를 자주 쾌척했다.1968년, 1966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절친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기리며 심장병 연구 재단을 세우고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특히 아프리카에 병원을 짓는 데 돈을 보태기 위해 여러 번 보석을 팔았다. 1978년엔 '테일러-버튼 다이아몬드'를 팔아 일부를 보츠와나 병원 건립 자금으로 냈다.
5.1. HIV/에이즈 운동
80년대 중반 절친이었던 록 허드슨이 에이즈에 걸리자 에이즈 연구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1985년 허드슨이 UCLA 메디컬 센터(UCLA Medical Center)에 입원해 있을 땐 첩보작전을 방불케하는 방식으로 기자들을 따돌리며 병문안을 다녔고, 허드슨의 주치의이자 1981년 학계에서 에이즈를 신종 질병으로 최초 규명했던 면역학자 마이클 S. 고틀립(Michael S. Gottlieb)을 만나 설명을 듣기도 했다. 고틀립에 따르면, 테일러는 자신이 허드슨으로부터 HIV를 옮게 될까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면역체계가 무너져있는 허드슨에게 혹시 모를 병균을 옮길까봐 걱정했다고 한다.AIDS Project Los Angeles(APLA)에 합류한 테일러는 그해 9월 최초의 에이즈 모금행사인 Commitment to Life를 조직하고 주관했다.[39] 그리고 허드슨이 죽기 전날밤 뼈 밖에 남지 않은 그의 몸을 보면서 "내 모든 생명력을 다 쏟아부어서라도 이 병이 뭔지 밝혀내고 아예 절단을 내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10월에 허드슨이 사망하고 비슷한 시기 친딸처럼 여기던 며느리 에일린 게티[40]마저 에이즈에 걸리자 에이즈 정복에 사활을 걸었다. 테일러는 에이즈를 향한 사회의 "거대하고 요란한 침묵"에 "분노"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캘리포니아주를 기반으로 하던 National AIDS Research Foundation(NARF)의 이사진에 합류했다가 1986년 전국 규모 단위의 에이즈 연구 자선단체 앰파(amFAR)[41]를 공동 창설했다. 앰파는 이후 전세계 3,300개 에이즈 연구팀을 후원했다. 앰파의 설립 기금엔 록 허드슨이 이를 위해 유언장에 지정해놓았던 250,000 달러가 포함돼있었다. 테일러가 앰파를 통해 이룬 업적은 의학박사 마틸드 크림(Mathilde Krim)의 노고와 함께 HBO 다큐멘터리 "The Battle of amfAR"에서 조명된 바 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호모포비아로 에이즈의 존재와 그로 인한 피해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적극적으로 로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1987년 로널드 레이건에겐 편지를 쓰고 영부인 낸시 레이건과는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앰파의 기금 마련 만찬에 참석해 공개 발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로부터 7주 뒤, 테일러의 편지에 설득된 레이건은 자리에 참석해 에이즈의 무서움과 조치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에이즈의 존재가 규명된지 6년만의 일이었다.
사회가 그저 "경멸하고 무시하고 조롱만 할 뿐" "에이즈의 급속한 확산은 외면"해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하던 시절"에 이런 활동은 친구 엘튼 존[42]의 말처럼 "연민"은 물론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더 노멀 하트의 작가 래리 크레이머는 테일러는 "우리를 위해 싸워준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유명인사"였으며 "다른 유명인사들은 바람 맞히던 자리에도 남들의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언제나 나타나주었다"고 술회했다. 테일러는 환자들의 익명성을 보호하기 위해 몰래 호스피스 봉사를 다니면서 필요한 게 무엇인지 환자들로부터 직접 얘기를 듣고 실천했다. 테일러의 광범한 활동은 에이즈 사태에서 마치 "자연이 부리는 거대한 힘"처럼 작용했다.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 받아 1987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89년 테일러는 태국의 최초 에이즈 기금 마련 행사를 위해 방콕을 방문했다. 당시 태국 정부는 에이즈 창궐을 부인하고 있었고 HIV 보균자들은 바로 직장과 마을에서 쫓겨나곤 했다. 테일러는 그중 하나이며 수혈을 통해 감염된 에이즈 환자의 요청으로 만남을 갖고, 장갑을 끼지 않은 채 악수하는 사진을 찍어 HIV 보균자들은 두려워해거나 비난할 대상이 아니며, 수혈만으로도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전세계 환자들의 낙인을 벗겨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태국 적십자사의 국립 혈액 센터가 전수 조사에 들어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미리 구할 수 있었다.
1991년엔 HIV 보균자들의 치료에 중점을 둔 본인만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에이즈 재단(The Elizabeth Taylor AIDS Foundation)'을 설립했다.
한편, 1991년 맨해튼 기반의 예술단체 Visual AIDS는 HIV/에이즈 환자들에 대한 연대 메시지를 표명하는 빨간 리본을 만들게 된다. 현재 쓰이고 있는 다른 모든 비슷한 캠페인 리본들의 원조다. 이 단체의 사무총장 넬슨 샌토스(Nelson Santos)에 따르면 "빨간 끈을 한 번 겹쳤을 뿐인" 이 리본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착용한 순간, 국제적으로 유명한 에이즈 연대 메시지의 상징이 되었다." "테일러는 이 리본을 거의 몸에서 떼지 않았다."
영화 <문라이트>(2016)의 대본을 쓴 터렐 앨빈 맥크레이니는 2017년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머니는 내가 22살 때 에이즈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한 달여 전에 나는 (초고인)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을 완성했다... 25년 전인 1992년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폴 뉴먼과 작품상을 시상할 때 에이즈 확산 저지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하얀 드레스 위에 빨간 리본을 달고 있었다... 오늘 나는 영예롭게도 어머니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대표하기 위해 25년 전과 똑같이 하얀 양복 위에 빨간 리본을 달았다."
1992년 4월엔 에이즈로 사망한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에 나와 에이즈에 관해 이야기했다. 콘돔 사용을 통한 감염 예방을 홍보하기 위해 손에 콘돔을 든 모습으로 1992년 11월호 베니티 페어 표지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공적을 인정 받아 테일러는 1993년 아카데미 진 허숄트 박애상 등 인권 관련상을 수차례 받았다. 현재 테일러의 자녀들과 손주들은 물론 케이트 버튼 등 테일러의 전남편들이 다른 결혼(들)에서 얻은 자녀들과 그 후손들도 테일러의 재단에 후원하거나 일에 깊이 참여하고 있다.
2019년 미국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는 29년 전인 1990년 HIV와 에이즈 관련 기금 조성이 논의되던 국회 하원 예산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증언을 하던 테일러, 그리고 바로 그 옆에 함께 있던 자신의 사진을 공유하며 테일러의 노고를 기렸다. 1990년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에이즈 사망 환자의 이름을 딴 라이언 화이트 법안(Ryan White CARE Act)에 서명하게 된 데엔 테일러의 활동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테일러는 1986년과 1992년에도 HIV/에이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의회를 방문했다.
1990년 테일러는 바이러스성폐렴으로 폐 수술을 받았는데 에이즈 환자들을 너무 가까이 해서 에이즈에 걸린 거라는 소문이 돌아 이를 부인하는 공식 성명을 내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43]
1996년 에이즈를 주제로 한 유엔 총회에 참석해 연설했다.
할리우드 황금기 스타들 중에서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개입했던 사람은 테일러가 유일하며, 성소수자 인권이 바닥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온갖 루머가 양산되고 인신공격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점을 성소수자 인권운동가들은 아직도 안타깝고 미안하게 여기고 있다.
친구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테일러를 두고 "(형체가 없던) 에이즈에 얼굴을 달아준 인도주의자"였다고 기렸다. 테일러의 팬 케이티 페리는 테일러의 생애를 다룬 팟캐스트 "Elizabeth the First"에서 "최초의 진정한 인플루언서였다"고 정의 내리기도 했다.
6. 종교
어머니를 따라 크리스천 사이언스라는 개신교파를 믿고 있었지만, 랍비의 아들이었던 유대인 남편인 마이크 타드가 1958년 사망하고 찾게 된 유대교 회당에서 정신적 안정을 느끼고 1959년 개종했다. 히브리어 이름은 엘리셰바 라헬.[44]같은 해 이스라엘 채권을 10만 달러 구매해 투자 형태로 시오니즘에 경제 지원을 한 사실이 아랍권의 반감을 사서 통일 아랍 공화국[45]에서 테일러의 출연작 전체가 상영 금지되었다. 1962년 <클레오파트라> 촬영 땐 유대교인이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하는 것에 분노한 이집트 당국에 의해 입국을 불허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개봉 후 영화의 전세계적 인기가 이집트 홍보에 긍정적 도움이 됐다는 결론을 내린 당국은 1964년 1월 테일러와 관련된 규제를 해금했으며 직후 이집트에서도 해당 영화 상영이 시작되었다.
유대교 신자가 된 뒤 이스라엘과 유대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1967년엔 소련의 반이스라엘 입장을 비판하며 모스크바 방문을 취소했다. 1975년엔 유엔의 결의안이 반이스라엘적이라며 항의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시몬 비젠탈 센터의 후원자였으며, 친구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와 함께 유대 민족 기금[46] 행사에 참여한 적도 있다. 1976년 엔테베 작전 개시 직전에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의 인질로 잡혀있던 248 에어 프랑스 승객들과 자신을 교환해달라고 이스라엘 정부에 자청한 적이 있다. 이는 당시엔 함구되었다가 나중에 공개되었다. 1982-3년엔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 레바논 대통령 아민 제메옐[47]을 각각 만나 평화 협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7. 외모 특징
영화 <클레오파트라>(1963) |
또한 첩모중생증으로 태어나 속눈썹이 두 겹으로 나서[51] 마스카라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래시 집에 오다>(1943)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 로디 맥다월[52]은 테일러가 촬영에 들어간 첫날부터 혼이 났던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저 여자앨 촬영장에서 당장 내보내 - 눈화장이 너무 진해, 마스카라를 너무 많이 얹었잖아." 물을 묻힌 수건으로 테일러의 눈을 문지르고 나서야 촬영기사는 그게 천연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유명한 보라색 눈은 단지 사진이나 영화 속에서만 그렇게 보인 게 아니다. 오히려 실제로 보면 더 선명한 보라색이어서 당대의 무수한 동료 배우, 감독, 제작자, 분장사, 기자들이 예외 없이 상세히 증언하고 있다. 테일러가 보라색눈을 가졌다는 사실은 동시대 업계인들과 관객들에겐 왈가왈부할 여지가 없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었다. 데뷔 전 아버지의 화랑에 들리던 손님들 사이에서 이미 입소문이 자자하게 나있었을 정도.더 가디언 보라색 렌즈가 없던 시절 테일러를 오랫동안 전담했던 대역 배우는 테일러의 보라색 눈과 최대한 닮아보이게 하기 위해서 시중에 나와있던 렌즈들을 조합하며 애써야했던 고충을 털어놓았다.뉴욕타임즈[53] 또한 테일러의 눈엔 특유의 오묘한 광채가 있어서 오팔에 비견되기도 했다.
재밌는 점은 테일러는 연보라색(lavender), 자색(purple), 청자색(periwinkle blue), 흰색을 좋아했는데, 전자의 두 색깔은 테일러의 눈색을 표현할 때 기자들과 동료 업계인들이 자주 쓰던 표현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코와 입술과 얼굴 윤곽의 유려한 곡선은 어머니로부터, 숯같은 눈썹과 빽빽한 속눈썹, 길고 깊은 눈매와 강렬한 눈빛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아버지와 판박이로 닮은 오빠 하워드도 <녹원의 천사>에 엑스트라로 나온 것을 시작으로 배우 활동을 한 바 있다.
스타들의 스타로[54] 테일러가 나타나면 스타들조차도 다들 홀린 표정으로 바라봤다고 한다. MGM 촬영장 내에 위치한 교사[55]에서 함께 수업을 들었던 데비 레널즈에 따르면 본인을 포함한 전교생이 재학 내내 테일러의 경이로운 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그럼에도 테일러는 자기 외모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오히려 어느 쪽이었냐면 싫어하는 편에 속해 자신의 출연작들을 보는 걸 극히 꺼릴 정도였다. 존 워너와의 결혼 생활 중 우울증으로 지나치게 쪘던 살을 감량했던 때를 제외하곤 평생 관리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사실 70년대 이후 배우 경력이 하강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반면에 나이 먹는 걸 그저 기쁜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노화 현상을 오히려 즐기는 모습을 보이는 인터뷰도 자주 했다. 노화에 대한 이런 긍정적 태도는 테일러가 사망 직전까지 명랑한 성격을 꾸준히 유지하고 활발히 외부 활동을 벌일 수 있던 밑바탕이 되었다.
8. 인간관계
8.1. 결혼과 이혼
결혼을 여덟 번 한 것으로 유명하다.[56] 테일러는 "오히려 너무 청교도식으로 교육 받고 자라서, 사귀면 꼭 결혼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 크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 말대로 결혼까지 못 간 교제 횟수는 아주 잠깐이라도 만나봤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남자들까지 다 따져도 두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일과 연애를 완전히 분리해 일 관계로 만난 사람들 중에 엮인 건 리처드 버튼이 유일하다.[57] 리즈&딕 시절이 대중에겐 가장 큰 인상을 남겼지만 테일러의 삶 전체로 보면 가장 예외적인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미혼 시절엔 육군사관학교 미식축구 스타 글렌 데이비스[58], 윌리엄 D. 폴리 주니어[59]와 건전한 청소년 교제를[60] 했다.- 칸래드 니컬슨 "니키" 힐튼 주니어 (Conrad Nicholson "Nicky" Hilton Jr.) (1926 - 1969 / 1950년 결혼 , 1951년 이혼 )
힐튼 호텔의 경영자의 아들. 결혼 당시 테일러의 나이는 겨우 18살이었다. 테일러는 결혼하자마자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약혼 기간 동안 자신이 알코올 의존증이란 사실을 감쪽같이 속인 도박광 니키 힐튼은 "사교사회 어디를 가든 늘 자신보다 주목 받는 테일러를 질투해" "주먹을 휘둘렀고" 임신 중인 테일러의 배를 세게 차서 유산을 시키기도 했다. "전신에서 멍이 가시는 날이 없었다." 이는 나중에 언론이 밝혀낸 것으로, 이혼 당시에 테일러가 법정에 제출한 사유는 "욕설, 무관심 등 극심한 정신적 학대"였다. 말년에 자신은 "인간 펀칭 백이었다"고 표현하며 가정폭력 피해자였음을 인정했다.
- 마이클 와일딩 (Michael Wilding) ( 1912 - 1979 / 1952년 결혼 , 1957년 이혼)
영국 출신 영화배우. 아들 두 명을 낳았다. 안정을 찾기 위해 차분한 성격의 20살 연상 남편에게 청혼했지만, 영국에선 "꽃미남"[61]으로 불리며 상당히 인기 있던 와일딩은 테일러를 따라 할리우드로 온 이후로 이렇다 할 배역을 따내지 못하자 자격지심에 사로잡혔다. 테일러의 돌발행동들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와일딩의 말에 따르면 테일러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순간을 참지 못했다. 한 번은 와일딩이 혼자 읽던 신문을 뺏어 벽난로에 던진 적도 있었다. 니키 힐튼의 투명인간 취급이 심어놓은 트라우마였다.[62]
이혼 계기는 와일딩이 테일러가 <자이언트>(1956)를 찍으러 떠난 사이 아이들을 테일러의 부모님께 맡겨놓고 집으로 스트리퍼 두 명을 불러서 칸피덴셜[63]지에 기사화 됐기 때문이다. 심경을 묻는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테일러는 침묵하다가 별거-이혼 수순을 밟았다. 또한 테일러는 결혼할 때 몰랐지만 사실 와일딩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무대 공포증>(1950)에 같이 나왔던 마를레네 디트리히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상태였다. 테일러가 이를 어느 시점에 알게 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래도 와일딩을 아이들 아버지로서 끝까지 존중해 와일딩과 관계된 언급은 극도로 자제했고 자식들 앞에서도 단 한 번도 탓한 적이 없다고 한다. 더 나아가 와일딩 가계의 전통도 익히도록 키웠다. 디트리히와도 업계 동료로 무난하게 지냈다.
- 마이크 타드 (Mike Todd) (1909 - 1958 / 1957년 결혼 , 1958년 사별 )
유대인으로 본명은 아브롬 히리쉬 골드보겐. <80일간의 세계일주>(1956)를 만든 영화 제작자로, 본인의 합작회사 타드에이오(Todd-AO)를 통해 동명의 와이드스크린 포맷을 개발했다. 이 포스트프로덕션 회사는 오늘날까지도 성업 중이며, 타드의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많은 상을 받았다. 테일러는 23세 연상인 타드의 번쩍이는 재능을 존경했다.
데비 레널즈의 말에 따르면 이 부부는 금슬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타드는 농담을 잘하고 장난기가 많은 성격으로 테일러와 죽이 잘 맞았고, 테일러의 지적인 면을 좋아했다. 테일러는 요리해주길 좋아하는 타드의 곁에서 "사랑 받고" "보호 받았다." 타드는 테일러에게 "사랑의 의미"를 최초로 알려준 사람이었다. 또한 테일러에게 선물하는 걸 즐겼는데, 테일러에게 선물 주는 것이 취미였다. 테일러가 소장했던 보석 중엔 타드의 선물 비중이 상당히 크다. 195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썼던 다이아몬드 티아라도 타드가 선물한 것이었다.
그러나 타드는 결혼 1년 만에 전 대통령 해리 트루먼을 만나러 가다가 뉴멕시코에서 전용기 사고를 당한다. 탑승한 전원이 사망했다. 원랜 테일러도 함께 하기로 했던 여정이었지만 갑자기 고열에 시달려 집에 머물러 있었다. 첫째 딸은 막 6개월차가 된 터였다. 테일러는 죽을 때까지 타드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단 하루도 그를 떠올리지 않고 지나간 날이 없다." 테일러는 리처드 버튼과 더불어 자신이 사랑한 두 남자로 타드를 꼽았다. 타드의 급사 후 테일러가 유대교 관련 활동에 평생을 투신했고 엔테베 작전 때처럼 아예 목숨까지 내놓으려 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버튼보다 타드를 더 사랑했을 거란 분석도 많다.
- 에디 피셔 (Eddie Fisher) (1928 - 2010 / 1959년 결혼 , 1964년 이혼)
1950년 초반 가장 인기있던 가수로[64] 데비 레널즈와 결혼한 터였다. 타드와 테일러의 결혼식에서 피셔는 신랑 들러리를, 레널즈는 신부 들러리를 맡았을 정도로 넷은 끈끈한 사이였다. 그런데 타드가 사망하자마자 위로해줘야겠다며 비행기를 타고 테일러 곁으로 날아간 피셔는 그대로 테일러와 바람피우기 시작했고 레널즈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세 번의 결혼이 내리 비극으로 끝난 터라 테일러에 대한 동정심이 절정에 달해있던 대중들에게 갑자기 찬물이 끼얹어진 것이다. 하필 친구에게 남편을 잃게 된 레널즈가 배신감에 크게 상처 받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레널즈와 피셔는 수년 동안 전 미국인들이 선망하는 이상적 부부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고, 세 사람의 당시 개인 위상이 엄청났던 만큼[65] 이 삼각관계는 "미국 연예계 언론이 스타들의 사생활을 다루는 방식 자체를 완전히 바꿔놓는 분수령"이 되었다. "이후 벌어진 그 어떤 할리우드 사건도 이 스캔들의 대서특필 수준을 뛰어넘지 못했다"고 평가될 정도.
그러나 훗날 레널즈와 그 자녀들은 테일러의 연약해진 심리를 피셔가 계획적으로 파고든 당시 상황을 각자의 회고록을 통해 증언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스타워즈의 레아 공주 역을 도맡아했던 캐리 피셔다.[66] 당시 테일러를 걱정하며 지켜본 많은 주변인들은 "테일러가 타드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곧 자살할 거라고 생각했다." 전담 미용사 시드니 길러라프[67]에 따르면 테일러는 "깨어있는 동안에는 계속 비명을 질러댔다." 자해 시도를 하는 게 발각돼 진정제가 끊임없이 투여되기도 했다. 테일러의 이런 위태로운 상태를 에디 피셔는 접근하기 좋은 절호의 기회로 봤던 것이다.
레널즈가 밝혔던 얘기 중 가장 소름 끼치는 부분은 에디 피셔가 타드의 사망 즉시 "타드의 모든 점을 정확히 모방했다"는 사실이다. "인격을 아예 타드로 갈아끼운" 수준이었다고 한다. 피셔는 "원래 평생 술담배를 전혀 안 하던 사람이었는데, 타드처럼 술을 마시고 시가를 태우기 시작했다"고.
테일러는 경력을 그대로 이어가고 피셔는 재기하지 못한 것 역시 이런 정황들과 맥락이 맞닿아 있다. 이를 두고 "테일러의 팬들은 테일러를 용서하게 됐지만, 에디 피셔의 팬들은 끝까지 피셔를 용서하지 못했다"고들 한다.
테일러가 버튼과 사랑에 빠지면서 이혼을 요구하자 피셔는 재산 분할을 놓고 몇 달 동안 공개적으로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1964년 3월 5일 테일러가 멕시코 법원에 낸 진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걸 실패하면서 이혼이 결정났다. 둘은 40여 년이 지나고서야 통화를 재개했다. 그럼에도 캐리 피셔에 따르면, 테일러는 에디 피셔가 사망했을 때 가족의 죽음이라 여기고 울었다고 한다. 말년에 테일러는 피셔와의 결혼은 타드를 되살려놓는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술회했다.
레널즈와 테일러는 테일러가 피셔와 이혼하고 버튼과 결혼한 직후인 1964년 관계를 회복했고[68], 제화업계 재벌과 재혼한 상태였던 레널즈와 테일러-버튼 부부가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69] 캐리 피셔가 대본을 쓴 TV영화 <디즈 올드 브로즈>(2001)에 테일러와 레널즈가 함께 출연하기도 했을 정도. 캐리 피셔는 이 영화 속 대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아버지 에디 피셔를 또 한 번 비난했다.
레널즈가 밝혔던 얘기 중 가장 소름 끼치는 부분은 에디 피셔가 타드의 사망 즉시 "타드의 모든 점을 정확히 모방했다"는 사실이다. "인격을 아예 타드로 갈아끼운" 수준이었다고 한다. 피셔는 "원래 평생 술담배를 전혀 안 하던 사람이었는데, 타드처럼 술을 마시고 시가를 태우기 시작했다"고.
테일러는 경력을 그대로 이어가고 피셔는 재기하지 못한 것 역시 이런 정황들과 맥락이 맞닿아 있다. 이를 두고 "테일러의 팬들은 테일러를 용서하게 됐지만, 에디 피셔의 팬들은 끝까지 피셔를 용서하지 못했다"고들 한다.
테일러가 버튼과 사랑에 빠지면서 이혼을 요구하자 피셔는 재산 분할을 놓고 몇 달 동안 공개적으로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1964년 3월 5일 테일러가 멕시코 법원에 낸 진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걸 실패하면서 이혼이 결정났다. 둘은 40여 년이 지나고서야 통화를 재개했다. 그럼에도 캐리 피셔에 따르면, 테일러는 에디 피셔가 사망했을 때 가족의 죽음이라 여기고 울었다고 한다. 말년에 테일러는 피셔와의 결혼은 타드를 되살려놓는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술회했다.
레널즈와 테일러는 테일러가 피셔와 이혼하고 버튼과 결혼한 직후인 1964년 관계를 회복했고[68], 제화업계 재벌과 재혼한 상태였던 레널즈와 테일러-버튼 부부가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69] 캐리 피셔가 대본을 쓴 TV영화 <디즈 올드 브로즈>(2001)에 테일러와 레널즈가 함께 출연하기도 했을 정도. 캐리 피셔는 이 영화 속 대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아버지 에디 피셔를 또 한 번 비난했다.
- 리처드 버튼 (Richard Burton) (1925 - 1984 / 1964년 결혼 , 1975년 이혼 , 1975년 결혼 , 1976년 이혼)
웨일스 출신의 배우.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역을 맡게 되면서, 아직 피셔와 결혼생활 중이었던 테일러와 1962년 촬영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사실 둘의 첫 만남은 앞선 1953년 진 시먼스의 집에서 열린 파티였는데, 버튼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고 싶어질 정도로[70] 특별하고, 너무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운" 테일러에게 첫눈에 반해 들이댔지만 단칼에 거절 당한 바가 있었다. 버튼은 이번에야말로 테일러의 마음을 얻겠다며 총력을 기울였고, 테일러는 버튼이 뻔히 수를 쓰는 걸 알면서도 빠져들었다. 버튼은 테일러가 유일하게 영화 작업을 통해 만나 관계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버트 스턴이 <클레오파트라> 촬영장에서 찍은 작품 |
테일러는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란 별칭까지 있던 우상이었기 때문에 사회 각계에서 난리가 났다. 무려 미국 국회에서 두 사람의 재입국을 막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교황청도 공개서한을 통해 꾸짖었다.[72] 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로 선정된 50명 중 셜리 템플, 프레드 어스테어, 제임스 캐그니 단 셋만 제외하고 전부 한 번 이상씩 불륜을 저질렀음에도 잉그리드 버그만과 테일러만이 극단적인 비난을 받은 건 매우 불공평한 처사였는데, 버그만은 외국인이라 단죄 받은 게 컸고, 테일러는 그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은 세계적 스타라는 이유로 공격 대상이 되었다. 2인 구도 사진을 건지기 위해 전세계 파파라치들이 로마 촬영장 근처에 몰려들어 나무 위나 건물에 숨어있곤 했다. 이를 통해 오늘날 파파라치의 모습이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73]
결국 둘은 각자의 배우자와 헤어지고 결혼식을 올렸다. 둘의 결혼식은 '세기의 결혼식'이라고 불렸다.
테일러는 친구 셜리 맥클레인에게 "버튼은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준 남자"라고 말했다.[74] 버튼은 다혈질에다가 알코올 의존증까지 있어서 테일러와 엄청나게 싸웠지만 테일러가 가장 사랑한 남자였고, 테일러는 죽은 후에 함께 묻히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버튼은 테일러의 사진 뒷면에 "그녀를 만나보지 못했거나 알게 된 적이 없는 사람은 삶에서 많은 걸 놓친 것이다"라고 적었다. 둘은 테일러가 에디 피셔와 준비해왔던 독일 태생 고아 머리어의 입양 수속도 함께 마쳤다.
버튼은 테일러에게 끝없이 보석을 선물했는데, 그중 일부는 아예 이름에 '테일러'나 '테일러-버튼'이 붙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혼 후 재혼을 감행할 정도로 서로에게 매료돼 있었지만 결국 두 번째 이혼으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테일러는 "우린 너무 사랑해서" "서로의 사정과 감정과 영혼에 함몰된 나머지 개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던 게 문제였다고 말했다.
결혼 전 버튼이 멕시코에서 <이구아나의 밤>(1964)을 찍을 때 테일러가 따라갔는데, 촬영장이 있던 항구 푸에르토 바야르타는 그 테일러와 버튼이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 큰 화제가 돼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다. 둘은 이 영화를 감독한 존 휴스턴에게서 멕시코의 저택 까사 킴벌리(Casa Kimberly)를 사서 함께 거주한 적이 있다.
테일러는 버튼 사망 후에도 시아버지였던 필립 버튼을 자주 병문안 하고[75] 웨일스의 유족들을 챙겼다.
버튼은 테일러에게 끝없이 보석을 선물했는데, 그중 일부는 아예 이름에 '테일러'나 '테일러-버튼'이 붙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혼 후 재혼을 감행할 정도로 서로에게 매료돼 있었지만 결국 두 번째 이혼으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테일러는 "우린 너무 사랑해서" "서로의 사정과 감정과 영혼에 함몰된 나머지 개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던 게 문제였다고 말했다.
결혼 전 버튼이 멕시코에서 <이구아나의 밤>(1964)을 찍을 때 테일러가 따라갔는데, 촬영장이 있던 항구 푸에르토 바야르타는 그 테일러와 버튼이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 큰 화제가 돼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다. 둘은 이 영화를 감독한 존 휴스턴에게서 멕시코의 저택 까사 킴벌리(Casa Kimberly)를 사서 함께 거주한 적이 있다.
테일러는 버튼 사망 후에도 시아버지였던 필립 버튼을 자주 병문안 하고[75] 웨일스의 유족들을 챙겼다.
- 존 윌리엄 워너 (John William Warner) (1927 - 2021 / 1976년 결혼 , 1982년 이혼 )
정치인. 군인 출신으로 6.25 전쟁 참전용사이며 해군부 차관과 장관을 지냈다. 해군부 장관에서 물러나고 2년 후 테일러와 결혼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된다.[76] 이 인기에 힘입어 결혼 2년 후인 1978년 선거에서 당선돼 상원의원이 되었다. 워너 본인도 테일러의 덕을 본 것을 늘 솔직하게 시인했다. 테일러는 특히 여성 유권자들의 표심에 많은 기여를 했다. 테일러가 워너와 결혼했을 때 워싱턴 정가에서 제일 궁금해했던 건 역시나 "눈이 진짜 보라색일까?"였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로 보라색이었고, 테일러는 실물이 더 아름다워 모두가 황홀해했다고.
테일러는 연기를 뒤로 하고 일중독 남편을 위해 워너의 지역구인 버지니아주 뿐만이 아니라 미 전역의 공화당 정치 행사를 바삐 돌며 헌신했다. 하지만 공허하고 외로운 정치인 아내로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해 우울증에 시달리다 폭식 증상이 생기는 등 정신건강이 심히 악화되자 이혼을 선택했다. 이때 무려 80kg까지 쪘을 정도로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한편, 이렇게 살이 찐 뒤에도 대중이 전과 똑같이 테일러에게 관심을 보이며 열광했기 때문에 평론가들은 스타성의 근원을 새롭게 탐구하게 되었다.
시행착오를 거쳐 30kg 감량에 성공한 뒤 그 요령을 1987년에 발간한 베스트셀러 <Elizabeth Takes Off>를 통해 자세히 공유하기도 했다.[77][78] 이 책은 스타들이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수필("tell-all")을 유행시킨 신호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유책이 있어서 헤어진 게 아니라 친구로 남았고, 워너의 자녀들은 특히 테일러와 가깝게 지냈다. 워너는 테일러가 여성의 평등한 권리에 대한 생각을 뿌리 내리게 해줬다고 말한 바 있다. 화술과 카리스마로 청중을 잘 휘어잡아 가는 곳마다 열렬한 호응을 얻었기 때문에 정치 다시 안 하냐는 질문을 꽤 받았는데, 정치판의 속성 자체에 큰 염증과 혐오를 느꼈음을 암시하며 손사래쳤다.
- 래리 포튼스키 (Larry Fortensky) (1991년 결혼 , 1996년 이혼)
20살 연하의 건설 노동자이자 트럭 운전기사. 알코올 의존증을 치료하려 들어간 센터에서 만난 동료 환자였다.[79] 마이클 잭슨의 농장인 네버랜드 랜치에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족들이 모두 참석해 축하해주었고, 현장을 찍기 위해 언론사들이 헬리콥터를 동원하는가 하면 기자들이 낙하산을 타고 떨어지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결혼식 사진으로 일군 수익은 전액 에이즈 문제 해결을 위해 기부했다. 포튼스키는 에이즈 봉사활동을 자발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테일러의 집엔 그 유명세만큼 도둑이 자주 들었는데 포튼스키는 사라지는 귀중품의 양에 충격을 받아 테일러를 동정했다.
포튼스키가 강박증에 시달리면서 집안에만 틀어박히는 등 이상행동을 보이고 테일러의 거듭된 수술로 의사소통이 부재하게 되면서 결혼생활이 무너지게 된다. 포튼스키가 남성판 신데렐라로 세간에 존재가 공개된 즉시 언론은 그가 블루칼라 출신이라는 점을 빌미로 삼아 골드 디거라는 의심을 강하게 표출했는데, 실제로는 돈 문제를 일절 일으키지 않고 우호적으로 이혼했고 서로 인상이 좋게 남아 자주 연락하며 지냈다. 몇 년이 지나 포튼스키는 세간의 지나친 관심이 괴로웠다고 털어놓았는데, 말년에도 집안 곳곳을 테일러 사진으로 장식해놓고 살았다.
- 버튼과 이혼하고 워너를 만나기 전, 주미 이란 대사 아르데쉬르 자헤디[80]와 사귀며 이란을 방문하기도 했다. 아직 학생이었던 사진작가 사촌 피루지 자헤디가 찍은 당시 사진들이 유명하다. 그러나 아르데쉬르 자헤디와 친밀한 사이였던 국왕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압력으로 헤어졌다.
워너와 이혼 후 멕시코 변호사 빅토르 루나(Victor Luna)를 만나 1983년 약혼했다가 취소했고, 1984년 사업가 데니스 스타인(Dennis Stein)과 약혼했다가 역시 다음해 취소했다.
8.2. 가족
어렸을 때 자신을 때렸던 아버지를 용서해서 아버지까지 포함해 모든 가족들과 사이가 돈독했다. 매해 추수감사절 테일러의 자택 식탁에 모여앉는 친지들이 50명에 달했다.- 오빠 하워드는 60년대 보수적인 부촌에 살면서 마을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히피들에게 테일러 캠프라는 히피촌을 내어주었다. 인종, 동성애 등의 문제에 대한 태도에 있어 테일러처럼 주류 기득권 문화에 대해 삐딱선을 타던 가치관이 강했다.
- 네 자녀들과도 사이가 늘 좋았다. 한참 파파라치가 극성을 부릴 땐 자녀 한 명 당 경호원을 10명 이상 붙여주는 등 총력을 기울여 보호했다. 전남편들인 리처드 버튼이나 존 워너가 이전 결혼에서 얻은 자녀들과 어울려 노는 자리도 많이 만들어줘서 테일러의 자녀들은 어린시절이 신나고 행복했던 기억들로 가득하다고. 집안에서 같이 보물찾기 하는 걸 좋아하고 얘기를 잘 들어주는 친구 같은 어머니였다고 한다. 10명의 손주들 역시 같이 침대에 누워 간식을 먹으며 테일러가 좋아하던 드라마 로앤오더를 시청하거나 연애 상담을 해주던 기억을 공유하며, "집안 전체를 이끈 대단한 여성 가장"이라고 치켜세웠다. "베푸는 삶"과 "사회정의"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는 한편, 손녀들에겐 학교 무도회 화장까지 직접 시켜주는 "할무니"였다. 손주들을 위해 아이스크림을 항상 쟁여놓고 있었다.
- 첫째 아들 마이클 와일딩 주니어는 80년대에 배우일을 했던 외식사업가다. 둘째 아들 크리스터퍼 에드워드 와일딩은 영상 음향 편집과 사진 일을 한다. 첫째 딸 라이저 타드 티비는 조각가다. 둘째 딸 머리어 버튼 카슨은 모델, 패션디자이너를 거쳐 탤런트 에이전시를 운영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조용히 살고 있다. 손주들도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를 졸업하고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는 등 각자 전문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 입양한 딸 머리어 버튼 카슨이 하반신에 타고난 유전적 결함을 고쳐주기 위해 스무 번이 넘는 수술을 시켜줬다. 덕분에 패션쇼 캣워크가 가능할 수 있었다.
- 부하 직원들도 가족의 범주로 생각했다. 오래 일한 조수 팀 멘델슨의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얘기를 듣자 테일러는 자신의 집에 모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같이 살았다.
8.3. 친구
테일러는 "한 번 우정을 쌓으면 끝까지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몽고메리 클리프트와는 "남매"라고 불릴 정도로 허물 없는 관계였다. 테일러는 클리프트가 자동차 사고를 당했을 때 구출했을 뿐만 아니라 회복 과정에서 끝까지 곁을 지키며 간호했고, 후유증으로 얼굴이 망가져 일감이 떨어지자 테일러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자신의 스타로서의 지위를 이용해 클리프트를 <지난 여름 갑자기>(1959)에 출연시켰다. <황금 눈에 비친 모습>(1967)의 말런 브랜도 배역도 원랜 테일러가 클리프트를 위해 따낸 자리였다. 자기파괴적으로 변해 술독과 약에 빠진 클리프트를 구하려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 둘의 우정만을 다룬 전자책이 나와 있다고 한다.
피터 스택폴(Peter Stackpole)이 1950년 <젊은이의 양지> 촬영 중에 쉬는 시간에 찍은 사진 |
- 록 허드슨은 <자이언트> 촬영으로 테일러를 알게 되자마자 "영혼의 단짝"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합류해 테일러와 급속도로 우정을 쌓은 제임스 딘이 테일러를 독점해 시간을 보내자 이를 질투해서 딘과 사이가 나빠졌을 정도였다.[81] 테일러는 허드슨이 에이즈 투병을 고백했을 때 이전과 똑같이 대해준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허드슨이 사망한 뒤 허드슨의 베벌리힐스 집에서 열린 추도식을 주관한 것도 테일러였다. 촬영 때 추억을 재현해 마리아치와 마가리타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고.
- 그레이스 켈리와는 모나코 공국 공비가 된 후에도 종종 만났다. 켈리는 말을 고상하게 하는 걸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테일러는 때로는 비속어도 섞고 표현에 거침이 없는 편이라 켈리를 종종 당황시키긴 했지만. 젊어서는 자넷 리와 친했고, 셜리 맥클레인, 오드리 헵번[82]과는 말년까지 친분을 유지했다. 조운 콜린스에 따르면 테일러는 여자친구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좋았다.
무엇보다도 에디 피셔와 엮이고부터 7년의 기간을 제외하곤 데비 레널즈와 평생 우정을 누렸다. 사망 직전 몸상태가 너무 나빠져 모두의 전화를 거절하던 테일러가 레널즈에게서 걸려온 전화만큼은 받았을 정도. 레널즈는 소원했던 사이에도 테일러를 향한 사랑을 멈춘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83]
테일러의 40세 생일파티에 참석한 그레이스 켈리의 머리를 만져주고 있는 모습 |
- 테너시 윌리엄스 원작 영화에 자주 나오면서 절친이 되었다. 윌리엄스가 "워낙 순진하고 사업감각이 없어" 영화사와 계약을 엉성하게 맺어 금전적 이익을 얻어내지 못한 걸 알고 테일러가 나서서 도와주기도 했다.
- 마이클 잭슨은 아무 연고도 없던 1984년에 테일러의 생일을 맞아 Victory 투어 VIP 티켓을 여러 장 선물했다. 그러나 공연 당일 무대에서 너무 멀고 유리벽으로 폐쇄된 자리를 배정 받은 테일러는 불쾌해하며 일찍 자리를 떴고, 테일러가 보고 있다고 믿으며 공연했다가 나중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잭슨은 울면서 사과 전화를 했다. 테일러는 다정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나처럼 유명한 스타는 절대 싼 좌석에 앉지 않아"라고 말했다고. 이후 테일러는 잭슨의 투어 장소가 바뀔 때마다 정확히 그곳으로 전화를 걸어주었다.[84]
"팝의 황제(King of Pop)"라는 잭슨의 칭호는 1989년 테일러가 잭슨에게 Soul Train Award를 시상하면서 처음 쓴 표현이다.
26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둘은 연인 관계라는 의심을 사곤 했다. 1989년 테일러가 잭슨에게 자기 집에서 살면 어떻겠냐고 물어봤던 때가 있는데, 나중에 전기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회상하며 잭슨이 "그렇게 했다면 정말 즐거웠을 거에요. 결혼까지 했을지도 모르죠"라고 말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둘은 친구 사이였다. 1993년 성추행 논란에 휩싸였을 땐 테일러에게 많이 의지했다. 테일러는 잭슨의 자녀 3명의 대모이며[85] 2001년 잭슨의 마지막 공연 때도 함께 해주었다. 잭슨은 1997년 테일러에게 Elizabeth, I Love You라는 곡을 헌정한 적이 있으며, 다이아몬드 팔찌, 시계, 목걸이를 선물하기도 했다. 둘의 우정만을 다룬 종이책이 나와있다. 마이클 잭슨의 Leave Me Alone 뮤직비디오는 마이클의 머릿속을 탐험하는 내용인데 테일러가 나오기도 한다.
- 김대중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축하 메시지를 공식서한으로 보내왔다. 원래는 취임식 때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건강악화로 무산되었다. 이외에도 세계 정상들이 만남을 요청하며 호의를 베푼 경우가 워낙 많아 넬슨 만델라 등 이름이 알려진 전세계 지도자급 대다수와 교류가 있었다.
- 콜린 패럴과 말년에 가깝게 지냈다. 2009년 패럴의 차남이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마주쳐 안면을 텄고 불면증을 계기로 전화로 수다를 떨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패럴은 신체적 접촉은 전무했지만 본인 입장에선 로맨틱한 관계였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8번째 남편이 될 수도 있었을 거라며 농담하기도 했다.
- 이외에도 가수 캐럴 베이어 세이거[86] 등 이 문서에 미처 다 언급하지 못한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9. 패션과 보석
9.1. 패션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패션계에서 손꼽히는 아이콘이었다. 이전 세대 스타들과 달리 힘을 주지 않고 모양만 가볍게 잡은 부드러운 펌을 했는데, 1950년대 내내 유행했다. 나이를 먹으면서는 스타일이 더 대담해져 70년대와 80년대엔 색이 짙은 눈화장과 미니스커트, 부분가발과 풍성한 주름 장식, 깃털목도리를 애용했다. 또 태닝, 풍만한 가슴을 강조하는 깊이 파인 목둘레선에 소장품인 화려한 보석들이 더해지면 극적 효과를 연출했는데 이에 따라 잡지 표지도 무수히 장식했다.}}} ||<width=50%> ||시그너처 룩 중 하나가 초록색 드레스다. 테일러, 자신의 남미 정체성을 숨겼던 리타 헤이워스 이렇게 두 사람을 주요 견본으로 삼고, 에바 가드너의 말년 자서전에서 영감을 얻은 베스트셀러 "The Seven Husbands of Evelyn Hugo"의 표지 일러스트가 초록색 드레스인 이유다.}}} ||<width=45%> ||
디자이너들과 친분이 많았다. 디자이너 발렌티노 가라바니와 절친한 사이였다. 1960년 발렌티노가 본인의 브랜드를 막 개시했던 신인 시절에 안면을 텄고, 여러 자선활동을 함께 했다.
디자이너 잔니 베르사체와도 절친이었다. 베르사체는 1992년 라인석을 꿰어 테일러의 대표작 속 배역들을 묘사한 "The Face"라는 볼레로 이브닝 재킷을 창작하기도 했다. 이 재킷은 테일러 사후 크리스티스 경매에서 예상가(15,000 - 20,000 달러)의 10배가 넘는 128,500 달러, 즉 2022년 가치로 2억원이 넘는 가격에 낙찰됐다.}}} ||<width=41%> ||<width=28%> ||
디자이너 마이클 코어스의 우상이기도 하다. 1976년 인터뷰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로 홀스턴을 꼽았다. 디자인에 앞서 인간성이 좋고 친구이기 때문에. 테일러의 강력한 지원 덕에 홀스턴은 70년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의 하나가 되었다.
저명한 패션 사진작가 브루스 웨버(Bruce Weber)와 90년대에 절친해져 웨버가 찍은 일상사진들이 많이 남았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본인 이미지와 아우라에 기반해 제작하는 향수 사업 류의 시초다.[88] 오래 가꾼 장미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1987년 직접 기획해 내놓은 첫 개인 향수인 PASSION도 바로 남성용이 따로 나올 정도로 인기였지만, 1991년 엘리자베스 아덴과의 협업으로 낸 개인 향수 WHITE DIAMONDS는 그야말로 전세계에서 폭풍과 같은 반향을 일으켰고, 그 뒤로 너도나도 향수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총 12개의 향수와 코롱이 있다. 2010년에 낸 마지막 작은 팬들의 요청에 따라 작명한 VIOLET EYES다. 이 향수들은 2023년 현재도 엄청나게 팔리고 있다.}}}||}}} ||<width=33.5%> ||<width=32%> ||
1998년에는 제17회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CFDA)에서 Lifetime of Glamour Award를 받았다.
9.2. 보석
- 소장했던 보석 중에, 안목이 뛰어난 버튼이 경매 입찰에 적극 참여해 선물한 것들이 많다. 33캐럿 '엘리자베스 테일러 다이아몬드'는 192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세계 최초로 특허를 받은 커팅법인 애셔컷으로 제작되었다. 화학적으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다이아몬드인 IIa형에 무색인 D 컬러로, 광학적으로 매우 투명해보인다. 원랜 나치에 무기를 공급하던[89] 독일 크루프 가문 소유였는데, 테일러는 그런 보석을 유대교인인 자신이 소유하게 된 것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다.
- '테일러-버튼 다이아몬드'라고 불리게 된 배 모양 해리 윈스턴 68캐럿 다이아몬드도 존재한다. 버튼은 이 보석을 구매한 뒤 "이건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성이 가져야만 했다. 이게 만약 재키 케네디[90]나 소피아 로렌[91]의 손에 들어갔다면 난 졸도했을 것이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 16세기에 타지마할의 주인공인 무굴 제국의 왕비 뭄타즈 마할이 소유했던 하트 모양의 다이아몬드나,[92] 윈저 공작부인이 소지했던 다이아몬드 브로치, 500년 전 파나마만에서 한 노예가 건져올려 펠리페 2세가 메리 1세에게 선물했던 세계 최대 배 모양 천연진주 '라 페레그리나(La Peregrina)'가 달린 목걸이[93], 장엄한 상형문자가 음각된 파루크 1세의 팔찌 등도 있었다.
- 버튼은 선물할 구실로 탁구 내기를 걸고 지면 대가로 테일러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기도 했다.
- 2011년 12월에 테일러의 보석 컬렉션이 화제가 되었다. 총액이 무려 115,932,000 달러로, 역사상 가장 높은 금액 가치를 달성한 보석 경매로 등극했으며 다이아몬드, 루비, 진주 개별 품목 신기록도 달성했다. 이는 테일러의 유명세 덕에 총 경매가 예상가의 20배를 상회하는 가격에 낙찰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상가의 150배에 낙찰된 보석도 있었다. 그중 '엘리자베스 테일러 다이아몬드'는 한국의 이랜드그룹에 881만 달러에 낙찰됐다.일부
- 관련 저서로 《My Love Affair with Jewelry》(2002)가 있다. 또 같은 해에는 뉴욕에서 보석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 로마에만 지점이 있던 지방 브랜드 불가리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한 계기가 바로 테일러다. 1962년 영화 <클레오파트라>를 로마에서 찍으면서 오늘날 불가리 특유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세르펜티(Serpenti, 뱀) 팔찌를 1월 30일에 사서[94] 착용한 채 다니고 있었는데 영화 홍보차 찍은 촬영장 사진이 전세계 잡지에 실리면서 유명해진 것. 버튼이 "테일러가 할 줄 아는 이탈리아어는 불가리 뿐"이라고 농담한 이유도 테일러가 당시 거의 매일같이 불가리를 외치며 지점을 방문해 구경했기 때문이다. 테일러가 불가리의 존재를 알려줘서 자신은 그 대신 테일러에게 맥주에 대해 알려줬다고 말하기도 했다.
- 테일러의 보석 사랑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카스튬 브로치(costume brooch)를 선물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테일러는 보석이 "신이 부린 솜씨의 현현"이고 자신은 그 보석의 긴 여정 중에 잠시 곁에 머무는 "수호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디자이너가 도안한 초고가 보석만 수집한 게 아니라, 시장에서 파는 모조보석류도 구분 없이 사곤 했다. 테일러가 좋아한 건 "보석이 지닌 사연"이었기 때문이다.
- 90년대에 에이본(Avon)에서 본인 이름을 딴 패션 주얼리 라인이 나왔었다. 홈쇼핑 채널 QVC에 테일러의 외모 및 소장품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스테이트먼트 주얼리[95] 라인도 있었다.
10. 어록
그건 오늘을 포기하고 어제로 뛰어드는 행위에요. 내겐 아직 끝나지 않은, 깜짝 놀랄만큼 수많은 내일들이 있어요.
말년에 왜 회고록을 쓰지 않냐고 묻자
말년에 왜 회고록을 쓰지 않냐고 묻자
나는 항상 남편과 아이들을 원했지만, 가정주부로서의 내 삶은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내 자리는 관객들이 봐주는 영화속이다.
나는 평생 화려한 보석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하지만 내가 정말 필요로 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 그것 뿐이었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헤어진다.
리처드 버튼과 이혼하면서
리처드 버튼과 이혼하면서
성공은 탈취제 같다. 과거의 향기를 다 앗아가 버리니까.
나는 많은 남편과 보석을 얻으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내게도 삶은 그저 발생했다.
당신이 스캔들에 휘말릴 때 진짜 친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아름다움.
아카데미 시상식 후 피로연에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꼽으라고 했을 때의 대답
아카데미 시상식 후 피로연에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꼽으라고 했을 때의 대답
11. 여담
- 2000년, 영국 신년 서훈명단(2000 New Year Honours)에서 대영제국 훈장 여성 2등급(DBE)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대영제국 훈장의 2등급은 받으면 호칭(Sir/Dame)이 따라붙는 '작위급 훈장'으로, 남성의 기사작위(Knight Bachelor)와 동급인 특전이다. 이때부터 '엘리자베스 테일러 여사(Dame Elizabeth Taylor, DBE)'로 불렸다. 또 2001년에는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코망되르를 받았다.
- 전술되었듯이 거의 모든 방면에서 매우 리버럴한 성향을 보였다. 대표적 사례로 1976년 대선에서 민주당 지미 카터를 지지하고 행사에도 나온 적이 있다. 그러나 90년대가 되어서야 후원을 시작했다. 2008년엔 대선 후보로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 6번째 남편 존 워너는 공화당 소속이었지만 중도주의자로 유명했고 주지사를 그만둔 뒤에는 아예 민주당 사람들을 지지했다.
- 주변인들의 말에 따르면 엄청난 다독가여서 매우 박식했지만 이런 점이 티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 1985년 미국에서 장미 육종가 반 C. 웨들(Von C. Weddle)이 개발하고 테일러의 이름을 붙인 "Elizabeth Taylor"란 월계화 개량 품종이 있다. 진한 차향이 나는 꽃분홍색 겹꽃 하이브리드 타이 장미(hybrid tea rose)다. 테일러는 몇 년 뒤 자신의 정원에 이 품종을 직접 키우기도 했다.
-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고 필기체도 달필이었다. 감독들이 종종 써먹었다.
초등학생 때 그린 그림 |
- 어려서 영국에 살 땐 말 베티(Betty)를 소유했고 켄트의 가족 농장에서 애완용 닭 스트로베리(Strawberry)를 길렀다. 아역 시절에는 다람쥐 니블스(Nibbles)를 매우 아껴 어디든 데리고 다녔다. 당시 MGM 구내식당에선 밥을 먹는 테일러의 어깨 위에 얌전히 서있는 니블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13살 때 직접 그린 삽화와 일화를 엮어 Nibbles and Me(1946)란 책을 냈다. 성인이 된 후엔 개, 새, 고양이를 주로 길렀다.[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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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역 스타 시절 케리 그랜트 사인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그랜트는 테일러가 스스로를 재밌고 흥미로운 사람으로 느끼게 만들어줬다고 한다.
- 존 레넌을 죽인 마크 채프먼은 가석방 심사에서 폴 매카트니, 로널드 레이건, 재키 케네디와 함께 테일러의 살해도 계획했음을 밝혔다. 그가 살해 대상을 고른 기준은 "유명세" 단 하나였으며 후에 살해 동기로 "질투심"을 들었다.
- 샤워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타입이었다.
- 베티 포드 센터에 들어갔을 때 최초로 손빨래를 해봤다고 한다. 시중 들어주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자라서 모든 걸 스스로 해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처음이었다.
-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선물은 절대 받지 않았다. 즉, 테일러가 선물을 받았다고 인증하는 건 내가 선물을 받아들일 정도로 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테일러 식의 표현이었다. 테일러 본인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틈나는대로 선물을 한아름씩 안겨주었다. 손님들이 집구경을 하다 마음에 들어하는 게 있으면 보석이 됐든 옷이 됐든 그냥 다 줘버렸다고 한다.
- 1987년 절친인 기업인 맬컴 포브스에게서 퍼플 패션(Purple Passion)이란 애칭이 붙은 첫 할리데이비슨을 선물 받았다. 이후 한동안 바이커들과 교류했다. 대중은 둘을 연인 사이로 짐작했지만 포브스는 사후 게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대식가로 유명하다. 60년대엔 베이컨과 땅콩버터를 가득 채운 긴 프랑스빵을 반드시 점심식사에 곁들였다. 그 덕인지 영화 속에서 음식을 섭취하는 모습이 맛깔스러운, 일종의 먹방 배우로 평가 받기도 한다.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 사이 MGM 구내식당엔 "엘리자베스 테일러 샐러드"라는 정식 메뉴가 있었다고 한다. 잘게 찢은 칠면조, 살라미, 스위스 치즈, 로메인 상추와 물냉이에 포도주 식초와 오일 드레싱을 섞은 찬 샐러드였다.[98] 그녀가 특히 좋아했던 음식으로는 이탈리아 요리, 블러드오렌지 주스, 트라이플, 인앤아웃버거 등이 있다.
- 1949년 8월 22일자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다. 이때 고작 17살이었다.
- 워홀이 가장 관심을 갖고 소재로 삼았던 세 여성 유명인사 중 하나다.[99] 테일러를 주제로 한 실크스크린 001번을 테일러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결국 소원대로 테일러와 친구가 됐다.
- 앤디 워홀이 창간한 잡지 인터뷰에서 1976년 11월호 표지로 테일러의 초상화를 그려 인쇄한 적이 있다. 같은 초상화를 2007년 2월호에 다시 썼다. 화가는 워홀 사단에 있던 팝아티스트 리처드 번스틴(Richard Ber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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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면-우면으로 이뤄진 두폭화로, 테일러는 좌면에 등장한다. 즉 양면을 합치면 테일러가 그림 중앙에 놓인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윗줄: 로런 버콜, 작가 본인, 그레고리 펙, 진 할로우, 마를레네 디트리히, 조운 콜린스, 자니 카슨
아랫줄: 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존 휴스턴, 테일러.
* <Celebrity Night at Spago>, 1993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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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줄: 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존 휴스턴, 테일러.
* <Celebrity Night at Spago>, 1993년작.
작가가 직접 겪은 아카데미 파티 경험들을 토대로 그렸다.
윗줄: 제러미 아이언스, 숀 코너리, 밥 호프, 빌리 크리스틀, 진 시스컬, 울프갱 퍽[101], 모건 프리먼, 조지 번즈, 마이클 잭슨
아랫줄: 스위프티 러자[102], 그레고리 펙, 매기 스미스, 잭 니컬슨, 폴 뉴먼, 우피 골드버그, 테일러.
윗줄: 제러미 아이언스, 숀 코너리, 밥 호프, 빌리 크리스틀, 진 시스컬, 울프갱 퍽[101], 모건 프리먼, 조지 번즈, 마이클 잭슨
아랫줄: 스위프티 러자[102], 그레고리 펙, 매기 스미스, 잭 니컬슨, 폴 뉴먼, 우피 골드버그, 테일러.
- 만화가 앨 허쉬펠드[103]가 팬이여서 여러 번 묘사했다. 테일러도 허쉬펠드를 좋아해 작품을 한 점 소장했었다.
- 프란스 할스, 데이비드 호크니, 파블로 피카소, 에드가 드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빈센트 반 고흐, 마르셀 베르테(Marcel Vertès)의 작품들을 소장했다.
- 매해 자택에서 부활절 달걀 찾기 행사를 열었다.
-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를 저택으로 초청해 가족, 친구들과 야외공연을 감상하곤 했다.
- 얼핏 봐선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아주 약한 외사시를 갖고 있었는데 이는 그녀의 미모를 조금도 가리지 못했다. 외려 보통 사람과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 코미디언 조운 리버스는 존 워너와의 결혼 후 우울증으로 살이 찐 테일러를 주된 농담 대상으로 삼아 조롱하며 경력을 쌓았다. 둘의 공통된 친구였던 로디 맥다월은 테일러에게 기분을 묻고 리버스에게 전달했는데, "그런 건 내 삶을 상처 낼 수 없다"는 게 테일러의 답이었다. "테일러는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이었고 체중이 증가한 걸 모르지도 않았다. 스스로의 중심을 확고하게 잡고 있어서 (리버스의 농담은)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리버스는 1991년 책 "Still Talking"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104]이 자기 관리를 안 하면 우리 여성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런 여성이 게으름을 피우면 나머지 여성들은 뭐가 되겠는가"라고 적었다.
- 선배 배우 조운 크로퍼드는 테일러가 여러 번 결혼한 것을 두고 비판적인 논평을 했는데 남의 인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해선 안 됐다며 나중에 후회했다. 크로퍼드는 결혼을 총 네 번 했다. 그래도 테일러의 연기는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 테일러가 에이즈 인식개선 운동가였고 동성혼을 지지하는 등 성 소수자 인권 운동에 호의적이었다는 이유로 웨스트보로 침례교회에서 "잘 죽었다" 팻말을 들고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적이 있다.
- 벌레스크 댄서 디타 본 티즈가 우상으로 여긴다. 속눈썹 모양까지 참고할 정도로 영감의 대상이다.
- 유복한 어린시절, 뛰어난 미모와 여배우 경력, 화려한 이혼경력 등 한국 원로 배우 김지미와 유사점이 많고, 실제로 언론에서도 김지미를 묘사할 때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고 일컫곤 했다.
12. 매체에서
- 1995년 NBC TV 전기 영화 <Liz: The Elizabeth Taylor Story>의 제작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셰릴린 펜[105]이 테일러를 맡았다. 시청자 평가는 좋지 않았다.
- 2012년 라이프타임이 린지 로핸을 기용해 만든 TV 영화 <Liz & Dick>도 있다. 테일러를 자택에서 만나봤던 제작자의 요청으로 유백광이 가미된 연보라색 렌즈를 껴서 테일러의 눈까지 재현했지만 역시 낮은 완성도로 기대 이하의 평가를 받았다. 이 배역을 얻기 위해 메간 폭스가 경쟁했었다.
- 한 책을 바탕으로 테일러와 버튼의 사랑을 영화화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2010년엔 안젤리나 졸리와 캐서린 지터존스가 테일러 역을 맡으려 경쟁에 돌입했었다. 2011년엔 파라마운트가 마틴 스코세이지와 함께 제작에 착수했었다. 나탈리 포트만과 <킹스 스피치> 작가 데이비드 사이들러도 제작에 관심을 표했지만 경쟁에서 밀렸다. 파라마운트는 레이첼 바이스를 테일러 역으로 점찍고 버튼 관련인들의 협조까지 받고 있었으나 현재는 바이스가 자체 제작을 타진해보고 있다.
- 2018년 배드 로봇 프로덕션에서 테일러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나왔으나 그 뒤로 소식이 끊겼다.
- 2023년 영국 로열 내셔널 시어터에 리처드 버튼의 전설적인 1964년 "햄릿" 공연을 둘러싼 얘기를 소재로 삼은 연극 "The Motive and the Cue"가 올라갔다.# 터펜스 미들튼(Tuppence Middleton)이 테일러 역으로 캐스팅 되었다.
[1] 사진은 1948년 2월 21일자 라이프지에 실린 필립 할스만의 작품이다.[2] DBE를 받은 배우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외에 줄리 앤드류스, 헬런 미런, 매기 스미스, 주디 덴치,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 등 열손가락 안에 든다. 다른 분야로는 추리소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DBE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기사 준 2등급(Knight Bachelor)보다 높으며 KBE를 받은 찰리 채플린과 동등한 정식 2등급 기사 등급이다.[3] 활동 당시 신체 정보[4] 입양한 딸이다.[5] 본인은 어린 시절 오빠가 놀리던 별명("Lizzie the Cow, or Lizard")에서 유래된 이 애칭을 좋아하지 않았다. 발음이 hiss(히스. 야유하다, 쉭쉭대다 등의 뜻이 있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남편 타드가 사망할 때 타고 있던 전용기 이름이 하필 "The Lucky Liz"였다. 1992년 자니 카슨 쇼에 출연했을 때도 이 애칭과 본명 중 무얼 더 선호하냐는 질문에 "엘리자베스"라고 답한 뒤 "엘리자베스라고 불리는 게 진심으로 더 좋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참고로 오빠와는 평생 우애가 좋았다.[6] 보유 기네스 세계 기록이 엄청 많다.[7] 40년대 - 60년대.[8]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회 이상 수상한 여배우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대표적으로 잉그리드 버그먼,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 비비언 리, 메릴 스트립, 조디 포스터 등이 있다.[9] 이중 한 회는 여우주연상이 아니라 연기특별상이다.[10] 이에 비견할 수 있는 경우는 마이클 잭슨 정도다. 주디 갈런드도 <오즈의 마법사>를 10대 후반인 청소년기에 찍었다.[11] 개봉년도순으로는 남녀 통틀어 말런 브랜도의 <바운티호의 반란>이 최초다. 두 영화는 상당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논란이 많은 실존 인물들이 주인공인 시대극이며, 크게 흥행했음에도(<바운티호의 반란>은 개봉년도 전체 흥행 5위, <클레오파트라>는 개봉년도 전체 흥행 1위.) 제작비를 너무 거하게 들여 회계상으론 거하게 말아먹었고,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의 작품상 후보에 동시에 올랐으며, 제작자와 감독이 징하게 싸운 악명 높은 촬영장이며, 그로 인해 한창 유망하던 명감독들이 은퇴를 결심하게 만들었다.[12] 1897 - 1968.[13] 1895 - 1994. 걸음마를 떼자마자 발레 훈련을 받은 무대 배우였다.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은퇴했다. 테일러가 출산한 뒤에는 바쁜 테일러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봐주곤 했다.[14] 당시에는 영국도 현재의 미국, 캐나다와 마찬가지로 국적 속지주의를 채택하여 부모의 국적과 관계없이 영국 영토 내에서 태어난 신생아에게는 자동으로 영국 국적을 부여하였다. 현재는 혈통주의로 개정되어 영국에서 태어났다고 자동으로 영국 국적이 부여되지는 않는다.[15] 1949년 하워드 휴즈는 이 화랑에 들린 테일러를 잠깐 보고 반해 테일러의 어머니에게 100만 달러(2024년 가치로 1320만 달러로, 한화로는 약 160억 원 수준이다)을 줄테니 테일러와 결혼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결혼이 성사되면 테일러 한 사람을 위한 단독 스튜디오도 만들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보석이 가득 담긴 서류가방을 보내기도 했다. 돈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테일러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전부 거절하고,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다.[16] 20대 초에 유행성 이하선염을 앓은 뒤 생식능력을 잃고 말았다.[17] 테일러가 화제거리가 되면 가족 전체가 사교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정도의 생각이었다.[18] 이때 누가 실질적으로 스튜디오들과 테일러 가족 사이에 가교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 당대 최고의 연예 칼럼니스트 헤더 하퍼였다는 얘기도 있으나 하퍼와 테일러 가족은 전혀 친하지 않았다.[19] 1999년 친구 바버라 월터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사실이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는 마이클 잭슨과 가까워지게 한 공통분모이기도 하다.[20] 마약의 경우는 테일러의 작업 속도가 워낙 빨랐고 가는 체형이어서 작업 능률 향상과 체중 감량을 목적으로 하던 MGM의 소위 비타민 주사("vitamin shots")를 처방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21] 테일러는 세대적으로 보면 클래식 할리우드 말기를 장식한 비트 세대 할리우드 스타에 속한다. 하지만 동시대 배우들과 달리 셜리 템플처럼 일찍 데뷔해 클래식 할리우드 체계를 체험한 케이스.[22] Betty Ford Center. 전 영부인 베티 포드가 설립한 곳으로, 베티 포드도 사회 통념 때문에 알코올 의존증 문제를 방치하다가 뒤늦게 이를 대중과 공유한 바 있다.[23] 이로써 20세기 할리우드를 수놓은 고전배우들(비비언 리, 마릴린 먼로,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 대부분이 역사로만 남게 되었다. 현재는 소피아 로렌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24] 절친 마이클 잭슨과 같은 묘지다.[25] 이전에 1위를 지속한 인물은 마이클 잭슨.[26] 당시 아역계의 교과서였던 셜리 템플을 기준으로 봤을 때.[27] 테일러는 성인이 된 후 아리아까지 소화해냈다.[28] 멀리서 리버스가 어머니 조운 리버스가 몇 년 동안 테일러를 조롱했던 일을 두둔하며 한 말이다. 이어지는 말은 다음과 같다. "모든 어린 소녀들은 자라서 테일러처럼 아름답고 화려해지길 바랐다 - 다이아몬드와 자기를 차지하려고 싸워대는 남자들 같은 걸. 어머니는 그런 환상 속 존재를 인간으로 되돌려놓으려고 한 것이다."[29] 테일러가 24살 때 죽었다.[30] 스포일러 사실 수전은 한 화가(피터 로퍼드 분)와 사랑에 빠져있었고, 어머니의 응원 하에 사랑의 도피를 한다.[31] 묵게 된 호텔의 로비와 방을 수십 개의 난초로 장식했다.[32] Larry Parks. 1914 - 1975.[33] Ethel Richardson. 필명 헨리 핸들 리처드슨(Henry Handel Richardson).[34] The Dorchester. 테일러-버튼은 이후 결별 전까지 이 호텔을 애용하며 엘리자베스 2세와 함께 대표 고객으로 꼽히게 되었다.[35] 사후엔 테일러를 두고 "우리 세대의 여신"이라고 정의 내렸다. 이버트는 테일러를 몇 번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다.[36] Lunt-Fontaine Theater.[37]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배우 중 하나"이며 테일러의 연기술이 "시대를 앞섰다는 걸 사람들이 언젠가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38] 이 공연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사망했다.[39] 테일러를 비롯한 연예계 인사들이 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해 힘쓴 과정을 다룬 동명의 다큐멘터리가 개봉될 예정이다.[40] Aileen Getty. 진 폴 게티의 손녀다.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혼외정사를 한 게 원인이었다. 에이즈 환자가 된 건 1985년이고, 언론에 알린 건 농구선수 매직 존슨이 HIV 보균자라는 걸 고백한 후인 1991년이다. 처음엔 수혈 과정에서 걸렸다고 거짓말 했지만 곧 에이즈의 실체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테일러의 뜻에 공감해 사실대로 고했다. 아들 크리스터퍼 와일딩과 게티는 이를 계기로 1987년에 이혼하며 8년 간의 결혼생활을 끝냈지만 테일러는 게티가 계속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게 해주었다. 게티 역시 에이즈 타파를 위해 힘쓰고 있는데, 입원했을 때 테일러가 행사에 대리 출석해준 적도 있다.[41] Foundation for AIDS Research.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의사들을 모았다. 1983년 출범 때는 AIDS Medical Foundation(AMF)였는데, NARF와 합치면서 American Foundation for AIDS Research가 되어 이 이름을 2005년까지 유지하다가 American을 떼어버렸다.[42] 역시 에이즈로 친구들을 잃어 본인만의 에이즈 재단을 설립하고 관련 활동을 하면서 테일러와 가까워졌다. 테일러가 사망하자 콘서트에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로 테일러를 기렸다.[43] 이 병은 1992년에 재발했다.[44] אֱלִישֶׁבַע רחל / Elisheba Rachel. 영어 이름 엘리자베스는 엘리셰바에서 유래한 것이다.[45] United Arab Republic. 짧게 존재했던 이집트, 시리아, 예멘 동맹. 1958년 이집트와 이 동맹을 맺었던 시리아는 1961년 내부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연대를 파기하게 됐다.[46] Jewish National Fund.[47] Amin Gemayel. 1942-.[48] "마릴린 먼로는 육감적인 배우(sex goddess)였고, 그레이스 켈리는 냉미녀(ice queen)였으며, 오드리 헵번이 영원한 말괄량이(eternal gamine)였다면,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미의 화신(beauty incarnate)이었다."[49] 관능미로 유명했지만, 의외로 체구가 굉장히 작았다. 실물을 처음 보고 너무 가냘퍼서 깜짝 놀랐다는 증언이 많다.[50] 나중에 한때 태닝에 열광해 검게 그을린 피부를 지니기도 한다.[51] 睫毛重生症, distichiasis. 테일러의 출생 시 의사는 이를 돌연변이(mutation)라고 기록했다. 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눈 위쪽은 두 줄이었지만, 아래쪽은 한 줄이었다.[52] abc 뉴스 인터뷰 등에서 한 말이다. 평생 가까웠던 친구로, 나중에 <클레오파트라>(1963)에도 함께 출연했다.[53] 훗날 미국 렌즈 회사들은 최초로 보라색 컬러렌즈를 개발하면서 테일러의 눈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뉴욕타임즈 (더 자세한 관련 내용은 이 항목 참조.)[54] 이에 동의하지 않은 스타는 한때 같은 MGM 소속이었던 에바 가드너 정도다. 가드너는 미국 최대 출판사인 사이먼 앤 슈스터 수장 리처드 E. 스나이더에게 "테일러는 아름다운 게 아니에요. 예쁜 거지. 아름다운 건 나였죠"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말도 하긴 했다. "테일러의 아름다움은 얼굴 코 입의 모양새나 그 굉장한 눈이 아니라 극소수에게만 주어지는 내면의 강인함과 활력에서 기인한다."[55] 캘리포니아 주법에 따라 교육연령이던 MGM 소속 스타들이 매일 일정시간 수업을 듣던 빨간 건물이다. 그 시절의 예고라고 할 수 있다.[56] 할리우드에 7-8번 결혼을 한 사람들은 테일러 외에도 상당수 존재한다. 테일러가 유독 이 화제로 유명한 건 본인 자체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할리우드 내 최고 기록은 아닌데, 자자 가보라는 선배 배우가 9번에 달하는 기록을 보유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가보는 7번째 남편과 이혼하지 않은 채 재혼했기 때문에 8번째 결혼은 법적 효력이 없어 공식적으론 8번 결혼이다. 가보는 테일러의 첫 번째 남편 칸래드 니컬슨 "니키" 힐튼 주니어의 아버지 칸래드 힐튼 시니어와 1942년부터 1947년까지 결혼생활을 했는데, 1944년 당시 의붓아들이었던 니키 힐튼과 불륜을 저지른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57] 심지어 이 원칙을 HIV/에이즈 운동과 유대교 관련 활동에도 적용했다.[58] Glenn Davis. 1924 - 2005. 포지션은 하프백. 별명은 "Mr. Outside." "Mr. Inside" 닥 블랜처드(Doc Blanchard)와 함께 묶여 유명세를 떨쳤고 웨스트포인트 미식축구팀 영구결번이 되었다. 테일러와는 군복무 중이던 1948년부터 교제를 시작했다. 그가 한국에서 복무하게 됐을 때 테일러는 그를 빼내려고 집안 연줄을 총동원했지만 실패했다. 수많은 위문편지로 장거리 연애를 했고 1949년 재회한 뒤 청혼을 거절하면서 헤어졌다. LA 램스에 스카웃되어 2시즌을 뛰었으나 부상으로 방출됐다.[59] William D. Pawley, Jr. 명문가 자녀로, 아버지는 브라질과 페루의 외교관을 역임했던 백만장자였다. 약혼까지 했었지만 취소했다.[60] 상대방이 입술 뽀뽀가 전부였다고 나중에 인터뷰했다.[61] Matinée idol. 젊은 여성팬층이 두터운 연기자.[62] 집안 사용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몇 주에 걸쳐 테일러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연기한 적도 있다고 한다. 때릴 때만 제외하고.[63] Confidential. 할리우드 황금기 시절 시대를 앞서는 최첨단 장비를 갖춘 사설탐정들을 고용해 물적 증거들을 토대로 스타들의 사생활을 폭로해 일대를 풍미했던 연예 잡지다.[64] 1948년 데뷔했고 페리 코모, 냇 킹 콜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프랭크 시나트러가 피셔의 엄청난 인기에 자신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해 자살 시도를 했을 정도다. 그러나 테일러와의 결혼을 부도덕하게 보는 업계와 세간의 평가에 이름을 내건 단독 TV쇼 <디 에디 피셔 쇼(The Eddie Fisher Show)>가 취소 당하면서 슬럼프에 빠진 뒤 재기하지 못했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됐다. 분야는 음악과 텔레비전. 할리우드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악명 높은 바람둥이였다.[65] 레널즈도 <태미와 독신자>(1957)에서 부른 노래가 빌보드 1위를 할 정도로 전성기였다.[66] 아버지 에디 피셔가 숱한 여성들과 바람피웠던 역사를 엮어 자서전으로 내자 DNA를 소독하고 싶다는 등 악감정을 내비쳤을 정도로 경멸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곤 했다. 회고록에도 아버지가 테일러를 손에 넣기 위해 총동원한 수법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는데, 아버지의 성기까지 언급했다. 반대로 테일러에겐 수차례 존경심을 표했고 테일러를 위한 각종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과거 사건의 피해자로서 때로는 테일러를 디스하는 발언들도 했는데 아버지를 비난한 수위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67] Sydney Guilaroff.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미용사로, 그외 주요 고객으로 프랭크 시나트러, 캐서린 헵번, 케리 그랜트 등이 있었다. 양성애자로 그레타 가르보와 염문설도 있다. 1938년엔 미국 독신 남성 최초로 입양을 허가 받기도 했다.[68] 런던행 여객선 퀸엘리자베스호에서 우연히 마주친 게 계기가 됐다.#[69] 그래서 레널즈와 그 자녀들이 버튼과의 살벌한 부부싸움에 대한 생생한 증언 역시 남기게 되었다.[70] 친구 로디 맥다월도 9살 때 테일러를 처음 보고 너무 완벽하게 완성돼있는 아름다운 얼굴에 폭소했다고 말한 바 있다.[71] “What do you think I’m doing? I’m f***ing your wife.”[72] "erotic vagrancy"란 표현이 유명하다.[73] 테일러가 할리우드 단골식당의 칠리를 로마까지 배달 시킨 얘기조차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74] 버튼과 엮인 초기에 맥클레인이 두 사람 사이를 반대할까봐 울면서 한 말이었다. 맥클레인도 덩달아 울면서 알겠다고 했다고.[75] 다만 언론이 몰려오기 전에 자리를 떠야했기 때문에 매번 30분 이상 머물지 못했다.[76] 부고 기사 제목조차 "한때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결혼했던 전 상원의원 별세"였다.[77]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이유는 테일러의 솔직하고 재기 넘치는 입담이다. 테일러는 데비 레널즈가 한참 자신과 사이가 안 좋던 시절에 자신이 가장 살쪘을 때의 사진을 냉장고 앞에 붙여놓고 반면교사로 삼으며 식욕을 다스렸던 일화를 풀어놓는다. 그러면서 레널즈에게 효과가 있었다면 여러분도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며 자신의 뚱뚱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책에서 잘라 냉장고에 붙여보라고 권한다.[78] 기자가 직접 2주간 실천해본 더컷 체험담 기사가 있다.[79] 전미트럭운송노조(International Brotherhood of Teamsters)에서 보험으로 치료비를 지원해주었다.[80] Ardeshir Zahedi. 1928 - 2021.[81] 이건 비단 허드슨 뿐만이 아니라 먼저 촬영을 시작했던 모든 배우들 사이에서 조성된 공감대이기도 했다. 캐럴 베이커는 "딘이 자기들한테서 테일러를 뺏어갔다고 생각했다." 이때 딘은 테일러와 밤을 새워 대화하며 어려서 목사에게 성추행 당한 과거를 털어놓고 있었다.[82] 1993년 헵번이 사망한 후 장례식장에서 “하늘이 가장 아름다운 새 천사를 갖게 됐다”고 조문하였다.[83] 캐리 피셔는 "엄마는 테일러 '팬'이라 테일러를 미워하지도 못했다"며 차라리 자신이 테일러를 더 미워했다고 말했다.[84] 테일러는 잭슨의 스케줄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잭슨이 알려준 게 아니라 업계 연줄 덕이었다.[85] 대부는 맥컬리 컬킨.[86] Carole Bayer Sager. 작곡가로 더 유명하며 그래미 어워드,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 등을 수상했다.[87] 사진작가는 앤서니 암스트롱존스(Antony Armstrong-Jones). 마거릿 로즈의 전 남편.[88] 사실 이를 시도한 최초의 스타는 소피아 로렌이지만 제품이 인기가 없어 묻히는 바람에 두 번째인 테일러가 실질적 원조로 여겨진다.[89] 철강, 철도차량 제작 기업인데, 당시에는 국가 총동원 체계였으므로 자의든 타의든 협력하여야 했다. 전후 전범 기업으로 분류되어 제재를 받았었으나, 유대인 말살에 약품을 공급했던 바이에르와는 달리 2020년대 현재도 티센크루프 그룹으로 건재하다.[90] 이즈음 테일러, 로렌, 케네디는 모두가 동경하면서도 질시하는 여성들의 세 표본으로 같이 호명되곤 했다.[91] 버튼이 로렌과 영화를 찍으며 친구가 되고 서로를 배우로서 존경하게 되기 전의 일기다.[92] '나의 사랑하는 마할에게'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다.[93] 버튼이 발렌타인 데이 선물로 줬는데, 테일러는 이 목걸이를 라스베이거스 호텔방에서 잃고 몹시 놀란 적이 있다. 목에 걸치고 있다가 한순간 사라졌는데 키우던 개가 뼈를 물어뜯는 소리를 내서 개의 입안을 살펴보니 진주에 기적적으로 흠집이 안 나있었다.[94] 불가리의 장부 기록에 따르면. 다만 본인이 산 것인지 버튼이 사준 것인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불가리도 자사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이를 밝혀내려고 노력했는데 실패했다.[95] statement jewelry. 착용함으로써 삶에 대한 태도나 가치관을 표현하는 용도의 보석.[96] 버튼에 따르면, 이혼 사유엔 반려동물들 때문에 충돌한 비중이 크다고 한다. 버튼은 테일러만큼이나 반려동물들을 아꼈지만 그와 동시에 감당할 수가 없었다.[97] 요즘 연예인들도 은행일이라든지 여행 갈 때 예약을 안해본 사람이 적지 않다 하니, 아역 때부터 활동한 테일러가 그랬던 것은 놀랄 일은 아니다.[98] 같은 시기 본인 이름을 딴 메뉴를 가졌던 또다른 MGM 배우로는 뮤지컬 스타 시드 셔리스가 있다.[99] 나머지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마릴린 먼로.[100] 베벌리힐스 호텔 내의 식사 공간으로, 무수한 영화의 배경으로 나왔다.[101] Wolfgang Puck. 소위 스타 셰프다. 1995년부터 아카데미 공식 파티 요리 메뉴를 담당했다.[102] Irving Paul "Swifty" Lazar. 파티 주최자. 무수한 할리우드 황금기 배우들의 에이전트였다.[103] Al Hirschfeld. 1903 - 2003.[104] 미국에서 널리 쓰인 테일러의 별칭.[105] Sherilyn Fenn. 트윈픽스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