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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고종 태황제의 생애(1852.07.25.~1919.01.21.)를 다루는 문서.2. 가계
고종(高宗)은 본래 영조와 사도세자의 후손이 아니라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직계 8대손이었다. 왕족이라지만 9대조까지 거슬러가야 왕(인조)이 나오며, 선왕인 철종과는 무려 17촌 간으로[1], 왕위에서는 너무 한참 멀어진 일개 방계 왕족(거의 전주 이씨 말단 종친)에 불과한 처지였다. 그러나 양자 관계[2]를 통해 '왕위 계승권'을 논할 만큼 정말 많이 가까워질 수 있었다(양자 관계까지 포함하면 7촌).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은 숙종의 서자 연령군 이훤의 양손자이자 낙천군의 양자가 되었지만 후사 없이 사망했는데, 이에 조선 순조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 진사 이병원의 차남 이채중(이구)을 사후 양자로 입양시켰다. 이로써 남연군이 된 이채중(이구)은 원래 인조의 직계 7대손으로 왕위 계승권이 없었지만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직통 왕위계승에 정말 가까워질 수 있었다.3. 출생과 즉위
1852년(철종 3년) 7월 25일, 흥선군 이하응과 군부인 여흥 민씨의 둘째 아들로 한성부 안국방 구름재동 흥선군 개인 사저에서 출생하였다.[3] 어린 시절의 고종은 특별할 것 없이 여느 일반 또래 아이들처럼 지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흥선군은 실권은 없어도 전주 이씨 종친부의 주요 직책들을 맡았기 때문에 조선 시대 기준으로 엄연히 상류층이었다. 처음 아명은 '개똥이'였다가 소년기에 '명복(命福)'[4]으로 고쳤다. 조선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항렬에 맞춰 '재황(載晃)'으로 개명했다가 피휘를 위해 '형(㷗)'으로 다시 개명했다. 처음 자(字)는 명부(明夫)였다가 즉위 후 '성림(聖臨)'으로 개명하였다.1863년(철종 14년) 음력 12월, 그냥 일개 평범한 종친으로 살 흥선군의 둘째아들 이명복의 인생이 한 순간에 뒤바뀌는 상황이 오는데 당시 국왕이었던 철종이 후사없이 끝내 병으로 일찍 죽자 흥선군과 효유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 조씨)의 후원(뒷받침)으로 조선 익종(효명세자)과 신정왕후의 양자(차남)로 정식 입적되어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해지고 곧바로 조선 제26대 임금으로 정식 즉위하였다.
대왕 대비전에서 흥선군의 제2자에게 사위를 시킬 것을 명하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서 흥선군(興宣君)의 적자(嫡子)인 제2자(第二子)에게 사위(嗣位)시키라고 명하고, 영의정 김좌근(金左根)과 도승지 민치상(閔致庠)을 보내어 잠저(潛邸)[5]에서 봉영(奉迎)하여 오게 하였다.
○大王大妃殿, 命興宣君嫡己第二子 嗣位, 遣領議政金左根, 都承旨閔致庠, 奉迎于潛邸。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實錄卷之十五終
- 《철종실록》 15권, 철종 14년(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8일 (경진) 9번째기사.[6]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서 흥선군(興宣君)의 적자(嫡子)인 제2자(第二子)에게 사위(嗣位)시키라고 명하고, 영의정 김좌근(金左根)과 도승지 민치상(閔致庠)을 보내어 잠저(潛邸)[5]에서 봉영(奉迎)하여 오게 하였다.
○大王大妃殿, 命興宣君嫡己第二子 嗣位, 遣領議政金左根, 都承旨閔致庠, 奉迎于潛邸。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實錄卷之十五終
- 《철종실록》 15권, 철종 14년(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8일 (경진) 9번째기사.[6]
4. 친정(親政) 시작
사실 수렴청정은 조 대비가 고종이 15세 되던 해인 1866년(고종 3년)에 물러나면서 끝났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그 때부터가 친정이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법적 제도적 근거 없이 살아있는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실질적으로 상왕처럼 군림했기 때문에 고종의 실질적 친정은 한참 뒤로 밀리게 된다. 어린 시절에 그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의지와 생각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지만 즉위 10년이 지나 22세가 되자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계기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옹호하는 신하들을 몰아내어 자기 주도적으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직접 친정을 하였다. 흥선대원군 섭정 시기의 치세와 대원군의 실각 과정은 흥선대원군 문서 참조.흔히 부인 민씨나 그 일족과 힘을 합쳤다는 야사에서 기인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여흥 민씨 일족 세력은 기존의 외척가들에 비해 받쳐줄 세(勢)가 약해 강성하지 못했다.
외척 세력이 득세하던 세도정치를 엎고 등장한 흥선대원군이 과거의 전철을 밟으며 누대로 강력한 세도가의 여식을 왕비로 뽑을 리 없었다. 더구나 명성황후는 가까운 혈족과 친지가 없던 거의 고아 신세였다. 그런데 어떻게 여흥 민씨가 척족 세력으로 득세를 했을까? 기이하게도 여흥 민씨는 고종 뿐 아니라 흥선대원군, 그 아버지 남연군에게는 처가이면서 외가인 기묘, 기이한(?) 3중의 겹사돈이었다. 심지어 고종 뒤의 순종까지도 첫 부인 순명효황후가 여흥 민씨였다.[7] 단순히 명성황후 한 사람 때문에 여흥 민씨 세력이 득세했다고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고종은 친정 초기에 박규수, 이경하를 비롯한 흥선대원군파, 중도의 안동 김씨 일문, 흥인군 이최응, 김병학을 비롯한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골고루 탕펼하여 조정의 균형을 잘 맞추면서도, 민승호와 민겸호를 비롯한 여흥 민씨들을 등용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물론 고종은 대원군의 개혁을 대부분 계승하여 호포제[8], 사창제, 서원 철폐 등을 고수했고 만동묘(萬東廟)[9]는 복구하였으나 국가가 제사를 주관하게 하여 유림의 명분은 충족시켜주되 힘은 돌려주지 않는 교묘한 방법을 썼다. 당백전만큼은 아니었지만 화폐 경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던 호전(청전)을 혁파했고 문세도 없애어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무렵의 정치를 보면 기본 능력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어도 '전통 시대 군주'로서 평타 이상은 되는게 이 시기.
다만 재정적으로 이 시기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유는 당백전를 대체하기 위한 '청전(淸錢)' 때문으로, 크기와 구리 무게가 상평통보인 1/3인 것이 막대한 인플레이션을 불러왔기 때문이다.[10] 이 때문에 조선은 한순간에 국고가 사실상 1/3로 줄어드는 재정난에 몰렸고 세수 확보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11]
5. 운요호 사건(1875)
그러던 중 1875년(고종 12년) 운요호 사건이 강화도 영종진 앞바다에서 터진다. 측량(해안 측정)을 구실로 접근한 일본군의 운요호는 조선군이 정당한그런데 왜 이렇게 쉽게 무너졌느냐 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874년(고종 11년) 1월, 고종의 친정 이후 강화도 일대의 군영에 돌릴 예정이던 예산(군비/군수 지원금)들이 모조리 끊기고 전부 박살났던 것. 청전(청나라의 동전) 폐지로 갑자기 극심한 디플레이션이 야기되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강화도 일대 군영의 주요 수입원이던 경강수세(한강 통행세)를 혁파하여 가뜩이나 재정력이 부족했다. 때문에 운요호 사건 시점에서 경기도 서해안의 주요 수군영은 몇 달째 군수 지원이 끊긴 상태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부득이한 조치들이었는데 국가 1년 예산의 15배도 넘어가는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1866년(고종 3년) 11월에 당백전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정말 무리하게 찍어낸 흥선대원군의 화폐 정책 때문에 당시 조선의 화폐 유통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벌어지는 상황[12]이었다. 이후 2년 만에 말도 안 되는 악화[13]인 당백전이 폐지되었는데 인플레이션[14]이 벌어진 상황에서 당백전이 폐지되자 조정의 재정난이 극도로 심화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흥선대원군이 주력한 것이 관리들이 밀수입한 청나라의 동전인 '청전(淸錢)' 유통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청전 유통이 합법화된 것도 1867년(고종 4년)의 일로 이것도 흥선대원군의 작품이다. 그리고 유통되던 당백전을 회수하는 과정도 당백전을 청전으로 바꿔준 다음에 당백전을 다시 녹여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청전도 악화다.[15] 관리들이 청나라 동전을 밀수 했겠는가? 이 청전은 삽시간에 상평통보 유통량의 40%를 점유하였고 조선 내에서는 화폐를 불신하는 풍조가 다시 생겨났다. 당백전으로 불안했던 경제 사정에서 인플레이션이 다시 시작된 것도 당연한 수순. 이렇게 당백전의 무리한 발행과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재정 위기를 그나마 넘어가기 위해서 도입된 청전이 한순간에 조선 경제를 다시 휘청하게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4년~5년이었다.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화폐 부실 문제로 1874년(고종 11년), 청전이 폐지되자 다시 올랐던 인플레이션을 포함해서 역작용으로 디플레이션이 이어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다시 극심한 재정난으로 돌아가야 했다. 경강수세가 폐지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고종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왕실 재정에 집착하고 모든 국가 재정을 자신이 장악하려고 하였는데 이런 초기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흥선대원군의 무리한 경복궁 중건이 국가 근간의 등골을 빼먹는 수준으로 조선 정부의 재정적 여력을 악화시켰다는 것과 당백전과 청전의 유통 과정에서 발생했던 과도한 인플레이션과 폐해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왜 고종이 부작용을 감수하면서도 다시 폐지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천천히 폐지하는 것이 어떠냐는 비판조차 말이 안 되는 것이 화폐 개혁을 시간을 두고 진행한 경우는 거의 100% 그레샴의 법칙이 왜 무서운지 알게 된다. 단적으로 당백전이 발행 되자마자 조선에서는 상평통보가 씨가 말랐고 당백전이 폐지된 이후에도 관북 이상 지방과 영남 지방은 청전 같은 악화는 쓰지도 않았기 때문에 부작용은 더더욱 집중되었으며 그 부작용은 안 그래도 허약한 조선 조정의 재정난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왜 청전을 폐지해서 군사력을 더 떨어트렸느냐 라는 것은 억지 비판이 된다.
그 뒤로 고종은 새로 화폐를 발행하는 데에 상당히 신중을 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한다. 묄렌도르프가 당오전(當梧錢) 주조를 주장하자 김옥균의 차관 도입에도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이 뒤통수 치는 바람에 차관 도입은 실패하고 당오전은 당오전대로 막장으로 굴러가서 효과는 못 봤다. 그러나 중화에 강자로 군림했던 중국 청이 서양(영국, 프랑스 등)에게 단숨에 수도 베이징(北京)이 무너지고 일본이 미국 페리 제독에게 강제로 개항되는 상황에 군비를 삭감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조선 경제가 모두 초토화되는 사태라도 불과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등 수백년 전 외침을 겪어왔던 나라에서 "당장 쓸 일도 없는 군대"라고 신경 쓰지 않은 것은 큰 오판이자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당시 조선 조정의 인식이 "가랑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하고 당장 먹을 것도 없는 우리 나라에 서양 놈들이 와서 뭐 하겠어"하는 인식이었던 것.
6. 강화도 조약(1876)
일본 운요호의 무력에 조선은 놀라기는 했지만 이최응과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파 조정 대신들과 고종은 문호 개방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 문(國門)을 열고 관(館)을 설치하여 통상(通商)을 하면 백성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러 유림과 흥선대원군의 결사 반대조차 옳지 않다고 무시하고 강화도 조약[16]을 조선 조정과 제대로 된 협의없이 반강제적으로 체결한다.7. 임오군란(1882)
그러던 중 민씨 일가가 장악하고 있던 선혜청(宣慧廳)의 부패(비리, 공금 횡령 등)로 인해서 가뜩이나 신식 군대인 별기군 창설 이후에 푸대접받고 있던 오군영 구식 군인들이 무려 13개월치[17]나 월급을 못 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나마 훈련도감을 비롯해서 특별한 소속이 있는 군인들은 제때 월급을 꼬박꼬박 받을 수 있었으나 별기군 창설 이후 수많은 구식 군인들은 특별한 소속없이 방치되었고 그들은 왕십리에서 채소를 재배해서 부업으로 겨우 먹고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위험 수위에 이르자 그들에게 1개월 치 급료가 지불되었는데 문제는 급료로 지불된 쌀이 겨와 모래가 섞인 썩은 쌀들이었다. 분노한 군인들이 항의하자 고지기들은 겁도 없이 군인들에게 썩 꺼지라고 적반하장격으로 오히려 큰소리를 쳐댔고 분노한 군인들은 그 고지기의 얼굴과 몸을 단체로 반병신되게 밟아 죽사발로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13개월이나 급료를 받지 않고도 규율을 지킨 것이 가상하다"고 칭찬하면서[18] "나라에서 월급 못 준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니 잘 타이르라"는 정상적인 결론을 내린다. 근데 민씨 일가의 수장인 선혜청 제조 민겸호는 왕의 명령을 가볍게 제끼듯 무시해버리고 주모자들을 강제 연행, 감금한다. 이에 구식 군인들 사이에서 "민겸호가 잡아간 군인들을 죽일 것"이라는 찌라시 소문이 돌았다. 폭발한 군인들은 선혜청 제조 민겸호, 흥인군 이최응을 비롯해 원성을 하고 있던 고관 대작들을 보이는 즉시 닥치는대로 죽였고, 일본군 훈련 교관들과 일본인 민간인도 일본인이라는 이유하나 만으로 무참히 살해했다. 주조선 일본 공사 요시모토 하나부사(義質花房)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고 겁에 질린 고종은 허겁지겁 흥선대원군을 모셔와 "군인들을 달래달라"고 요청하며 다시 전권을 내어주었다. 군인들은 대궐에 나타난 흥선대원군을 보고 열광, 환호했으며 대궐에 일제히 몰려든 군인들은 중전을 내어 줄 것그런데 청나라 이홍장의 지시로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쳐 흥선대원군을 자신들의 진지로 초청하는 체 하며 그를 강제 납치하여 청나라 톈진로 끌고 가는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동시에 홍계훈의 기지로 목숨을 건졌던 명성황후가 청나라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와 다시 집권하게 된다. 청나라가 나름 친 청적인 면모를 보인 흥선대원군을 납치해간 이유는 흥선대원군의 쇄국(통상 수교 거부 정책) 재개가 일본을 더욱 자극하여 동북아시아의 균형을 망치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한편 정여창의 눈에 들어 출세한 23세의 젊디젊은 위안스카이는 북양 군벌의 철수 이후 조선에 잔류한 청나라군을 지휘하며 조선에서 총독이라도 되는 것 마냥 고종을 꼭두각시 혹은 암군(暗君, 어리석은 임금)이라면서 자기가 행사하겠다고 오만방자하게 왕처럼 군림 행세하게 된다.
8. 갑신정변(1884)
이 와중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의 젊은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의 지원을 얻어 정변을 일으키니 이것이 곧 1884년(고종 21년)의 갑신정변이다. 우정국 사건을 시작으로 민영익을 베어 넘긴[19] 그들은 민씨 일파, 고종과 명성황후를 확보하여 경우궁[20]으로 옮기고 자신들에 반대하고 청나라에 사대하던 관료들을 입궐시킨 후 닥치는 대로 베어 죽였다.[21] 고종은 사태가 심각해졌는지, 아니면 수습하기 어려웠는지 눈물을 흘리며 제발 그들을 살려달라고 김옥균 등에게 붙잡고 사정하듯 애원했지만, 피를 보고 눈이 뒤집혀 크게 흥분한 급진 개화파들은 고종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급진 개화파는 정강 14조를 발표하여 개각(改閣)을 단독으로 선언했지만, 눈치 빠른 명성황후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리고 "효유대왕대비(效裕大王大妃)께서 넓은 곳으로 옮기길 원한다"고 말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가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다고 자신하여 넓어 방어하기 어려운 창덕궁으로 옮겨가는데, 이것이 패착(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무너진 패배 요인)이 되어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1,500명의 청군과 이에 합세한 조선군이 몰려들면서 급진 개화파는 완전히 궁지에 몰린다. 급진 개화파는 고종을 데리고 인천으로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려 했지만 고종이 죽어도 효유대왕대비(신정왕후 조씨)가 계신 창덕궁에서 죽을 것을 고집하여 결국 고종을 놔두고 자기들만 양복으로 갈아입고 상투를 자른 후 일본으로 암암리에 도주/망명하는 처지가 된다.
이중에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 홍영식은 남아 오조유가 이끄는 청군에 합류하려던 고종을 만류하던 중에 느닷없이 공격해온 조선 병사들에게 도륙당해 죽는다. 결국 이들의 정변으로 인해 개화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말았고 급진 개화파의 친족들은 무참한 죽임을 당하고 저잣거리에서 효수당한다. 그리고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사대 관계)은 오히려 공고해지고 말았다. 한편 일본은 적반하장으로 조선에 한성 조약[22]을 강요하며 배상을 모두 받아냈고 청에겐 무력 시위를 하여 1885년(고종 22년)에 톈진 조약[23]을 체결하는 데 모두 성공했다.
9.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1894)
갑신정변 이후 10년 간 조선은 청나라가 주도권을 잡고 유럽, 미국, 일본의 세력이 주변을 기웃거리는 묘한 공백 상태에 빠진다. 주차관 위안스카이가 국왕에 준하는육영공원을 비롯한 학교, 제중원 등의 근대식 병원, 전신, 전기 등이 이 시기에 들어왔다. 하지만 고종의 일련 개혁들은 어디까지나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의 대혼란 이후에 극도로 불안해진 나머지 자신의 왕권 유지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두루뭉술했다. 정권 유지에 대한 집착은 정권 유지 기반인 재정 확보에 매달리게 했고 내무부는 개혁 조치가 아니라 고종의 개인 비자금 확보에 더 주력했다. 서양 신식문물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마구잡이로 들여온 일부 무기와 군함도 거의 쓸모가 없었다.
한편 계속된 교세 확장에 고무되고 기존에 금지된 천주교, 개신교의 합법화에 자극받은 동학이 대대적으로 합법화를 요구하게 된다. 1892년(고종 29년) 교주 최시형의 허락 아래에 공주에서 동학교도들의 집회가 열려 충청 감사 조병식을 통해 동학 합법화의 뜻을 전달했다. 조병식은 "나라에서 하는 일을 감영에서 와서 따지면 뭘 어쩌라는 거냐?"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동학 단속을 다소 완화했다. 이후 삼례에서 더 큰 집회가 열렸지만 충청도에서 거둔 것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1893년(고종 30년), 동학 대표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최제우를 신원하고 동학을 합법화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복합상소).
이에 고종 이하 조정은 매우 긴장했다. 고종은 "이단(異團)을 탄압하는 것이 열성조(列聖祖)의 법"[24]이란 입장을 분명히 했고, 유림들도 앞을 다투어 "동학을 탄압해야 한다"는 상소를 일제히 올렸다. 결국 조정은 동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동학 지도부는 보은에 전국의 모든 교인들을 집합시켰고 보국안민(保國安民),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깃발을 휘두르는 수만 명의 교인이 보은에 집결했다. 경악한 조정은 어윤중을 내려 보내 동학교도들을 달래려고 시도한다. 한편 조정은 동학교도들이 서울로 진공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는데 강화도와 평양의 병력을 수원과 용인에 급파하고 서울의 군사들을 대기시키자는 논의에 고종은 외국 군대(외세)를 동원하자는 의견(?)을 내놓는다.
조정은 고종의 주장에 크게 반대했지만, 고종은 "청나라 군사를 쓰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냐"는 입장을 계속 고수했다. "어차피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청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으니 청군의 힘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한편 어윤중은 동학 교인들을 타일러서 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실 해산이 신속했던 것은 동학 지도부가 전봉준을 비롯한 과격파에 스스로가 놀랐기 때문이었다. 전봉준 등은 전라도 금구로 이동하여 또 집회를 가졌고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분노하여 마침내 봉기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동학농민운동 항목 참조.
조정은 황토재에서 관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듣자 홍계훈과 장위영 병력을 급파하지만 장성 전투에서 또 패전보를 듣고 전라 감영까지 함락 당하자 마침내 고종과 민영준은 위안스카이와 접촉하여 청군의 도움을 적극 요청하게 된다. 위안스카이는 이에 "간단한 일"이라고 호언장담했고 이에 이홍장도 파병을 결정하여 아산만에 청군이 도착한다. 그런데 동학농민군은 홍계훈의 독일제 쿠르프 야포 포격에 잇달아 패해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있었고, 청군의 등장에 일본군이 톈진 조약을 빌미로 덩달아 인천에 나타나면서 조선도, 청도, 농민군도 동시에 당황한다.
농민군은 "이러다가 나라가 외세의 전쟁터가 되겠다"고 전주 화약을 관군과 맺고 평화적으로 물러났고, 조선 정부는 청과 일본에 모두 철수를 요구한다. 청나라는 이에 곧바로 응했지만 일본은 "우리가 알기론 동비(東備, 동학농민군)들이 소탕되지 않았다."란 억지를 부리며 철수를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자 청나라는 일본군이 혹시 뒤통수 맞을 것을 두려워하여 저러는가 싶어서 동시에 철수하잔 제안을 했으나 일본은 이마저도 거부한다. 이에 조선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미국, 영국이 중재에 같이 나섰으나 일본은 이 역시 매몰차게 거부했고 역으로 청나라에 같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고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하잔 제안을 한다.
청나라는 "동학 란은 이미 다 끝났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사람들의 일인데 왜 니들이 더 난리냐?"라고 거부했고 일본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공격을 퍼부어 아산만에서 청나라 군함들을 전격 침몰시키니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일본은 난데없이 경복궁을 야밤에 기습으로 불법점령하고 조선의 대청 독립 선언(조선에 대한 청나라 종주권 포기)을 강요한 다음에 고종을 위협, 겁박하여 청나라의 모든 조약을 전면 파기하고 모든 청군은 조선을 떠나라는 국왕의 명령서를 받아낸다. 일본은 대원군을 포섭하여 고종에게서 빼앗은 전권을 위임한다. 대원군은 민씨 일족들을 숙청하면서 내정 개혁에 착수하려 했지만 문제는 대원군 역시 고종과 마찬가지로 일본 때문에 별다른 힘이 없는 바지사장 같은 느낌이라 할 수 있다. 실세는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박정양을 비롯하여 일본의 뒷배, 후원을 받는 친일적 성향을 띄는 新급진 개화파들이었다. 군국 기무처(軍局機務處)가 설치되고 갑오개혁이 새로 실시된다.
이 시기에 노비제, 신분제가 폐지, 철폐되었고 도량형의 통일, 화폐 개혁, 조세의 금납화, 재정 일원화가 실시되었다. 과부의 재가 허용, 조혼 금지, 과거제 폐지, 과도한 고문(압슬형) 폐지, 연좌제 폐지도 동시에 실시되었으며 지방관(사또와 같은 수령)의 개인 사법권도 박탈하고 형사적인 재판소를 설치하여 사법권을 일원화 했다.
한편 자신이 일본에게 이용만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대원군은 전봉준[25], 이홍장 등과 은밀히 접촉하면서 힘을 합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자신에게 권력을 쥐어달란 로비를 하고 있었는데 청군이 평양 전투를 비롯해서 일본군에게 개 박살나고 동학 농민군도 우금치 전투에서 처참히 패배하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자세한 것은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항목 참조.
어쨌거나 조선의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이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 간섭으로 인해 요동을 빼앗은 걸 다시 토해내는 것을 본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할 생각을 가지고 인아거일(引啞拒日)이라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몰아내는 외교 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독일과 미국에도 구조 요청을 보내지만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도 별다른 힘을 갖고 있진 못했고 미국은 금광(금광채굴권)만 먹었다.
10. 을미사변(1895)
청일 전쟁 와중에도 일본은 김홍집 친일 내각을 통해 조선과 동맹을 불합리하게 체결했고 20개조 개혁안을 통해 고종의 실권을 상당수 뺏고 명성황후의 정사(政事) 개입도 일절 금지했다. 이 와중에 청나라군 및 동학군과 내통한 것이 걸린 흥선대원군은 정치판에서 완전히 실각한다. 일본은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를 내무대신, 서광범을 법무대신으로 내세웠고 고종으로 하여금 홍범 14조를 반포하게 했는데 이 시기 고종의 호칭은 대군주, 왕비가 왕후, 세자가 왕태자로 바뀐다. 한편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 대사 베베르와 접촉하면서 "우리가 믿을 것은 러시아 황제 폐하뿐이다."라고 노골적으로 알렉산드르 3세, 그 뒤를 이은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 제국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이에 베베르도 고종 부부의 주장에 부응, 화답하면서 본국에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주장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소극적이었다.이 와중에 이준용 역모사건이 터지는데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고종에게는 3촌 조카)이 박준양, 이태용 등과 합세하여 2차 김홍집 내각을 없애고 고종, 태자, 명성황후를 폐한 후 스스로 왕좌에 앉으려 한 것이다. 이를 박영효와 서광범이 밝혀내어 자신들의 권위를 공고히 한다. 궁궐 수비대를 훈련대로 바꾸자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26] 역모를 꾀했다고 하는데 체포령이 떨어지자 박영효는 허겁지겁 일본 공사관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그는 명성황후, 유길준, 이노우에 가오루의 모함으로 자신이 실각했다고 멋대로 (허위)주장한다. 박영효에 의해 실각한 김홍집이 복귀했고 박정양, 이완용, 이운용, 이범진, 민영환 등의 정동 구락부 출신의 친미파와 친러파들이 득세(3차 김홍집 내각)하는데 박영효 중심의 친일 내각이 완전히 실각한 것이다.
고종은 일본군에 의해 훈련받던 훈련대도 강제 해산해버렸으며 이에 분노한 일본은 군인 출신의 미우라 고로 공사를 부임시켰는데 이노우에 가오루는 바로 귀국하지 않고 보름이나 그와 같이 지내며 모종의 계획을 꾸몄다. 그 결과가 친청파이자 친러파였던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시해한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에는 흥선대원군도 동석하여 명분 비슷한 것을 갖추었고 홍계훈과 이경직을 죽이고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이 와중에 낭인들은 고종 앞에서 감히 칼을 겨누고 왕태자 척의 머리채를 끌어잡는 등 잔혹한 행패를 부렸다. 미우라 공사는 고종의 부름에 입궐하는 척하며 입궐하여 친미파와 친러파를 내쫓고 친일파 이재면, 조희연, 유길준으로 새로운 내각(4차 유길준/김홍집 내각)을 구성한다. 각국 공사들의 추궁에 훈련대의 짓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얼버부리지만 워낙 증인들과 목격자가 정말 많아서 곧 거짓말인게 드러난다.
새로운 내각의 핵심은 유길준이었는데 그의 주도하에 을미개혁이 실시되고 단발령이 실시되어 고종과 순종이 같이 먼저 상투를 자르고 머리카락을 자른다. 거의 연금 상태의 고종은 러시아와 미국의 외교관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일본의 독살을 우려하여 아예 그들이 만들어온 음식들 만을 먹으며 연명했다. 그 와중에 명성황후가 단순히 어디 피한 것이 아니라 외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근왕파와 민심이 매우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재순, 이도철 등의 근왕파들은 이완용, 이범진 등의 친미파와 친러파,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관들과 합세하여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는 춘생문 사건을 일으키지만 일부 대대장의 밀고로 군부 대신 어윤중에 의해 진압/저지당한다. 정동 구락부 인물들은 각국 공관에 대피한다.[27] 한편 고종은 유림들에게 암암리 밀사를 보내 대대적으로 의병 궐기를 촉구했고 1896년(고종 33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하였으며 의병들은 애꿎은 수령들을 참수하고 여러 고을을 점거했는데 이것이 을미의병이다.
11. 아관파천(1896)
을미의병으로 인해서 서울에 주둔한 군사 대부분이 각 지방으로 내려가 감시가 소홀해지자 고종은 궁녀가 타는 가마를 타고 아들 왕태자 척과 함께 대궐을 두고 러시아 공사관[28]으로 피신하는데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이다. 베베르는 인천항에 정박시켜 놓은 러시아 수병 117명을 동원해 즉각 공사관에 배치함으로 공사관을 지켰는데 단순히 117명이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고종을 손아귀에 쥐고 있음을 분명하게 한 제스처였다. 사실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는 일찍이 고종이 일찍부터 막대한 이권으로 매수하다 시피한 인물이었고 후일 고종이 친러 정책을 펴는 배경이 된 인물이었다.[29] 고종은 즉각 "김홍집 내각의 관료들을 죽이라"는 교지를 내렸고 군중이 김홍집, 정병하 등을 노상에서 살해했고 유길준 등은 황급히 일본으로 망명한다.12. 독립협회(1896~1898)
아관파천 이후에도 고종은 한동안 러시아 공사관과 기존의 궁을 오가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부각된 단체가 독립협회(獨立協會)이다. 원래는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서 발족했던 단체였으나, 이후 독립신문 발간 등의 독자적인 활동을 하면서 조직이 그대로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별도의 단체가 되었다. 초기 독립협회는 친정부적인 형태로 출범하였으나, 개창자 중 대표적인 인물인 서재필[30], 그리고 이후에 활동하는 박영효 계열 등의 영향으로 급진 개화 단체의 성격이 강해졌다. 고종의 환궁 이후에는 개혁 방안을 두고 고종과 갈등을 빚었으며 중추원 설립 과정에서 독립협회의 과욕, 친일성향을 보이던 독립협회에 대한 고종의 불신 등이 겹친 상황에서, 결국 중추원의 권한남용 사건이 터지면서 고종이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무력 해산시켰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독립협회, 독립문, 독립신문, 대한제국 중추원, 광무개혁 항목 참고.[31]13. 대한제국 선포, 광무개혁(1897)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내외부에서는 외세의 간섭을 막고 자주적으로 근대 국가를 세우자는 주장이 자주 벌어졌고, 외부에서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아관파천이 시작된 지 1년 뒤인 1897년(고종 34년) 2월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정식 환궁하였다. 또한 고종은 환궁 후 10월 26일에 정식으로 국호를 황제의 국가를 뜻하는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며 원구단을 축조하여 그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독립된 자주국가임을 공식 선포하였다.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 고종은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전면 추진하였다. 자세한 것은 광무개혁 항목을 살펴보자
고종은 이 개혁을 통하여 근대식 정부와 행정제도 국민개병제와 도시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황권(皇權)'을 더욱 강화하려 했지만, 결국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켜 군대를 주둔시키고 한일의정서의 강압적인 체결과 일본의 승리로 내정간섭이 심화되면서 중단되었다.
14. 러일전쟁(1904~1905)
당시 대한제국은 삼국 간섭 이후로 꾸준히 신경 쓰던 인아거일 정책을 통해 러시아의 힘으로 일본을 막으려 했고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당연히 러시아와 일전을 벌여야 했다. 러시아 - 일본 간의 갈등은 첨예해졌고 결국 1904년(광무 8년)에 러일전쟁이 터진다. 고종은 러일전쟁 발발 직전 프랑스 공사관으로 망명하기 위해 프랑스 공사와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일제에 의해 실패한다. 일본은 또다시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으로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군대를 공격했고 중립을 선포한 대한제국을 강제로 동맹국으로 끌어들였다.[32] 이때 독도를 멋대로 자기네 땅이라고 불법으로 편입하고 다케시마(竹島)로 불법 개칭 후 선언하였다.[33]일본군은 러시아 군대에게 청일전쟁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끝내 승리를 거둔다. 러일전쟁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 아래에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최종적으로 일본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최후의 대일 견제 세력인 러시아가 물러나면서 대한제국은 그야말로 일본 앞에 잘차려진 따뜻한 한 끼의 밥상이 되고 만다.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포츠머스 조약 중재 대가로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15. 을사조약(1905)
러일전쟁의 종전 이후 일본군은 경운궁을 완전 장악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덴노의 위협적인 국서(國書)를 가지고 고종을 직접 알현한다. 국서의 내용인즉 '순순히 외교권(外交權)을 넘긴다면 유혈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였다. 정말로. 덴노의 뜻이라기 보단 일본을 움직이던 일본 고위 수뇌부들의 뜻이었겠지만.고종은 "이는 나라를 망치는 일이니 죽는 한이 있어도 응할 수 없다"고 처음에 매우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왕 체결할 김에 최대한 대한제국에 관대한 처우라도 바라자는 안을 내놓은 이가 있었으니, 이가 바로 학부 대신 이완용'이다. 그리고 고종은 "경들이 대책을 강구해 보라"고 자신은 인후통을 핑계를 대어 물러나버리고 8대신을 이토 히로부미와 면담하게 하였다.[34] 그런데 이완용은 거의 외교권을 송두리째 일본에게 갖다 바치는 결과를 낳았으니... 자세한 것은 을사늑약 항목 참조.
이후 대한제국은 최익현을 비롯한 유림들은 물론이고 거의 전국이 발칵 뒤집혀서 대혼란에 빠졌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도 이때의 일. 곳곳에서 을사늑약을 규탄하는 자결자(민영환이 대표적으로 을사조약의 부당함에 스스로 자결했다.)들이 속출했고 백성들은 나라가 망했다고 혼비백산했다. 평민, 유림을 가리지 않는 광범위한 의병이 일어나니, 이가 바로 을사의병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항 움직임도 을사늑약을 되돌리진 못 했다.
16. 헤이그 특사사건과 고종의 강제 퇴위(1907)
"짐이 살해당해도 나를 위해서 아무런 신경을 쓰지 마라. 너희들은 특명을 다하라.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찾아라."
- 고종의 '헤이그 특사'인 이위종과 이상설이 로이터 통신과 한 인터뷰 내용[35]
- 고종의 '헤이그 특사'인 이위종과 이상설이 로이터 통신과 한 인터뷰 내용[35]
을사늑약의 체결은 단순히 외교권을 강탈한 수준이 아니었는데 사실상 대한제국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종이 노골적으로 도움을 요구했던 미국과 영국 등의 국가들도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36] 각국의 대사관을 강제 철수시켜버렸다.
이쯤 되면 고종이 최선적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일본은 고종의 항거를 막기 위하여 고종의 권한을 대폭 축소했고 차례로 대한제국의 권리들을 차근차근 박탈했다. 고종은 마지막 시도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했지만 그들은 사전에 이 일을 안 일본의 수작으로 문전박대당했다. 결국 이준은 헤이그에서 객사(客死)하고 말았는데 이것이 헤이그 특사이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앞에 나아가 "멋진 일을 하셨더군요. 근데 앞으로는 좀 더 공공연하게 하시지 그러십니까?"라고 대놓고 비웃었으며 이완용과 송병준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고종의 퇴위를 은근히 협박하듯이 강요했다.
고종은 박영효를 궁내부 대신으로 삼으며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완용과 송병준은 전화선까지 끊고는 고종을 사실상 궁에 감금하였다. 이에 고종은 마지 못하여 대리청정의 명을 내렸지만 얼마 후에 일본에서 새 황제 즉위를 축하한다는 문서가 오자 이완용은 내시 2명을 데려와 각각 고종과 순종의 자리에 세우고는 날치기로 황위를 고종에서 순종으로 교체해버렸다.
그렇게 1907년(광무 11년) 7월 19일, 고종은 일본의 압박과 친일적인 주변 신하의 끈질긴 퇴위 강요에 끝내 못이겨 강제로 퇴위했고 7월 20일, 한국사 최후의 군주인 순종이 주변의 강요와 협박으로 강제 즉위했다. 형식은 양위였으나 퇴위식이자 즉위식인 이날 고종과 순종 모두 불참하였다.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당했으며 그 결과로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일어나 숭례문에서 치열한 남대문 전투가 크게 일어났지만 일본군의 압도적인 무기와 병력 열세 차이로 밀려나 패배했다.
1909년(융희 3년), 기유각서 체결로 대한제국의 사법권 및 교도 행정권이 1910년(융희 4년), 한일약정각서의 체결로 경찰권이 일본에 넘어갔고 결국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5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조선의 명맥을 이은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3년만에 멸망했다. 이후 고종과 황족들은 일본의 강요로 일본 정부에게서 작위와 은사금을 억지로 받았다.
17. 항일과 망명시도(1907~1919)
1908년(융희 2년) 봄 이위종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고종황제의 독립자금 1만 루블(Ruble)을 가지고 연해주의 노보키예프스코예(Novokiyevskoye)에 도착했다. 한러국경에 가장 가까운 러시아 마을인 연추는 전신국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보의 집결지로서 이미 러일전쟁 초기부터 한러군사협력 및 항일의병전쟁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에 황제의 자금이 이범윤, 안중근, 최재형 등이 참여한 연해주 대한독립군 조직인 同義會 창설에 소요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大韓義軍은 1907년(광무 11년)에 해산된 구한국군대를 계승하여 항일독립전쟁을 이끌어 나갈 주력부대가 됨으로써 고종황제가 그 최고통수권자가 되었음은 명백하다. 대한의군의 설립은 1908년(융희 2년) 11월에 구체화된 고종황제의 블라디보스톡 파천계획의 전제조건으로서 고종의 연해주 망명정부수립 구상의 일환이었다. 1910년 7월 28일 “고종황제로 하여금 노령의 연해주로 조속히 파천하여 망명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영도”하라고 청한 十三道義軍都總裁 유인석과 이상설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는 항일전쟁을 지휘할 최고 사령관이 고종황제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 결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고종황제를 정점으로 한 대한의군의 항일독립전쟁사의 序幕에 해당되는 바, 이는 1945년까지 항일독립전쟁을 지속시킬 동력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의군의 활동에 정통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지대하다.
- 고종황제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1904~1910) 2012, vol., no.73, pp. 95-142 (48 pages)
따라서 大韓義軍은 1907년(광무 11년)에 해산된 구한국군대를 계승하여 항일독립전쟁을 이끌어 나갈 주력부대가 됨으로써 고종황제가 그 최고통수권자가 되었음은 명백하다. 대한의군의 설립은 1908년(융희 2년) 11월에 구체화된 고종황제의 블라디보스톡 파천계획의 전제조건으로서 고종의 연해주 망명정부수립 구상의 일환이었다. 1910년 7월 28일 “고종황제로 하여금 노령의 연해주로 조속히 파천하여 망명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영도”하라고 청한 十三道義軍都總裁 유인석과 이상설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는 항일전쟁을 지휘할 최고 사령관이 고종황제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 결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고종황제를 정점으로 한 대한의군의 항일독립전쟁사의 序幕에 해당되는 바, 이는 1945년까지 항일독립전쟁을 지속시킬 동력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의군의 활동에 정통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지대하다.
- 고종황제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1904~1910) 2012, vol., no.73, pp. 95-142 (48 pages)
본 연구는 러일개전(1904)에서 헤이그특사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시기(1909)까지 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을 황제의 강제 퇴위(1907)를 정점으로 양 시기로 구분하여 고찰한 것이다. 전기는 개전 이후 단교되었던 한러관계가 주한공사 파블로프가 지휘하는 상하이정보국과 고종황제의 비공식 정보협력 채널을 통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전쟁기간 중 러시아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상하이정보국의 한국분과 요원들의 활동은 한러간의 정보협력뿐만 아니라 전후 이들이 의병활동에 투신함으로써 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후기는 헤이그 특사사건 이후 고종황제가 측근들을 통한 소극적인 저항보다는 연해주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통해 직접 독립운동을 지휘하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던 시기였다. 이를 위해 고종황제와 러시아 당국간의 비밀교섭 창구 역할은 상하이주재 러시아 상무관이던 고이예르와 현상건이 맡았으며 이들은 러일전쟁기 파블로프의 상하이정보국에서 공조했던 전력이 있었다. 따라서 러일전쟁 이후 한러관계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정보협력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 고종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 정보국(1904~1909) 81 (2014.12), pp.43-84
- 고종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 정보국(1904~1909) 81 (2014.12), pp.43-84
[토요판 커버스토리/단독]고종의 ‘항일 스파이’… 러와 손잡고 싸웠다
고종의 시종무관 김인수 참령의 후손 100년 만에 나타나다
고종은 국외로 망명해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첫 망명시도는 1990년대 탈냉전 이후 러시아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1904년(광무 8년), 러일전쟁의 위험이 커지자 고종은 러시아 측에 망명 가능성을 은밀히 타진했다. 이때는 국내의 러시아 공사관 뿐만 아니라 국외 망명까지 고려한 것이었다.[박종효,2002,101] 하지만 이미 전쟁은 막을 수 없는 대세여서 러일전쟁으로 이어졌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손아귀에 사실상 떨어졌다. 두번째 망명시도는 1907년(광무 11년), 강제 퇴위당한 바로 그 다음해였다. 당시 일본의 감시를 피해 국외 망명을 시도했고[박종효,2002,73] 3번째 망명 시도는 1908년(융희 2년) 11월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러시아 측 대일협상파에 의해 저지당했다.[박종효,2002,74]4번째 망명 시도는 고종은 1910년(융희 4년) 6월경 다시 연해주 망명정부 수립을 기도 했었다.[외교통상부,2003,223~224] 즉 고종은 병탄전에만 4번의 망명시도를 했다가 모두 좌절됐고 한일합방 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이 망명시도 이전에부터 고종은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은 상황이었다. 1902년(광무 6년) 12월 서울 경운궁에서 고종은 인사차 찾아온 카를 베베르 전 주한 러시아공사에게 “관립노어학교 졸업생 10명을 러시아 군사학교에 입학시키고 싶다”고 부탁하였고 베베르는 고종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2년 뒤 고종이 러시아의 상하이 정보국을 통해 특별히 안부를 물었다는 졸업생들이 바로 이들이며 이때 그들 중 9명은 이미 러시아의 정보요원이 돼 있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한국인 유학생들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대항해 러시아 정보요원으로 활약한 사실은 2015년에서야 밝혀졌는데 이는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러시아 국립역사문서보관소를 통해 당시 작성된 러시아 정부의 비밀 문건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로 당시 일본의 침략에 대응해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공동 항쟁에 나섰음을 보여 주는 역사적 사료로 평가된다.
이 당시 유명한 인물로는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김인수로 김인수도 함경도로 파견돼 첩보 활동을 벌였는데 이런 반일 첩보활동은 러일전쟁의 패전으로 한러 합작으로 운영되던 상하이 정보국이 1905년(광무 9년) 11월경 일시 해체되면서 끝이 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간도 침략으로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새로운 인물인 레프 고이예르 상무관을 내세워 1908년(융희 2년), 상하이 정보국을 재건함. 당시 비밀 문건 중에는 고이예르가 2차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즉각 한국 의병들에게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는 계획을 세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무렵 고종의 심복인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한-러 정보 협력의 대가로 수만 명의 의병으로 구성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러시아 측과 협의하게된다. 그러나 이상설의 계획이 러시아의 갑작스런 비협조로 실패하면서 항일의 방식을 놓고 양측의 시각차가 드러났고 러일전쟁 패배 이후 일본과 화해 국면에 들어간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적극적인 무장 투쟁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김인수는 대한제국의 참령(소령)이자 고종의 시종무관이었고 한편으로는 러시아 국적자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그의 이러한 신분과 고종의 반일 친러 행보는 당시 일본의 강한 경계를 받았고 이에 일본은 러시아 측에 러시아 국적자인 김인수가 대한제국의 참령으로 복무하는게 옳지 않다는 식으로 러시아 측에 강하게 항의하게 되지만 '빅토르 김(김인수)이 비록 러시아 국적자이지만 대한제국 출신이므로 한국군에 복무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러시아는 앞에와 같은 전문을 보내면 쿨하게 씹었고 이후에도 김인수는 대한제국에서 고종의 러시아어 통역관 겸 시종무관 겸 첩보원으로 계속 활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 러일전쟁이 터짐에 따라 결국 러시아로 탈출하게된다.[41]
1915년 7월 26일 성낙형 등은 내관 염덕인(廉德仁·또는 염덕신)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에게 중·독·영·러가 연합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 대세라는 등의 보고서를 올리게 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만족한 고종은 성낙형에게 ‘한중의방조약안’을 가지고 직접 알현하라면서 승낙의 징표로 과거 정조가 사용했던 ‘온여기옥(溫如其玉)’이란 인영(印影·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러나 고종 면담 직전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金思濬)·김사홍(金思洪)·김승현(金勝鉉) 등 다수의 관련자가 검거됨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이 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이때 고종의 아들이였던 의친왕도 적극 협력했었다.
고종의 해외 망명이 다시 추진된 해는 1918년이었다. 그리고 이 망명은 고종의 생전 마지막 망명시도가 되었다. 이번에는 우당 이회영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회영의 장남 규학의 아내 조계진(趙季珍)이 고종의 생질(외조카)로서 고종과 사돈인 데다 이상설과 헤이그 특사사건을 기획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 고종 망명 계획에 나서게 했다. 내적인 조건은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때는 마침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 황실 이방자 여사의 혼담 결정으로 황제의 고민이 지극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종이 (이회영) 선생의 생각을 상주하자 뜻밖에 쾌히 승낙하셨다”고 전하는 대로 국혼(國婚) 문제였다. 순종이 후사가 없는 판국에 황태자(영친왕)가 일본 여인과 결혼한다면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맥은 끊기는 것이었다.
이회영과 민영달은 육로 대신 수로를 이용하기로 하고 상해와 북경을 저울질하다가 우선 북경에 행궁(行宮)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민영달이 행궁 구입 자금으로 5만원(圓)을 내놓자 이회영은 1918년 말께 이득년(李得年)·홍증식(洪增植)에게 건네 북경의 동생 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이제 고종이 덕수궁을 나서 일본의 감시를 피해 신하들과 합류하면 됐지만 이때 고종이 1919년 1월, 갑자기 급서하면서 실패한다.
하지만 이 망명시도는 아예 헛되지는 않아서 훗날 연해주는 항일의병들의 주 거점이되었으며 많은 의병 단체들이 연해주에서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되게된다.
18. 의문의 최후
1907년 망국의 군주로 완전히 물러난 이후에도 무려 1919년까지 생존했는데 이는 현대의학의 힘 때문에 장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국왕 치세+대한제국 황제 치세+태황제 치세+(왕공족)이태왕 치세까지 모두 합하면 영조의 재위 기간조차 넘어가며 정확히 55년이다. 노년임에도 자기관리와 현대의학의 힘 때문에 건강해서 고명딸 덕혜옹주가 이 시기에 태어났다. 일제가 주선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약혼을 반대했지만 영친왕의 보안과 안전을 위해서 어쩔수 없이 울며겨자먹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1919년 1월 21일, 항상 야참으로 마시던 식혜[42]를 마신 뒤 잠자리에 들었다가 깨어나 목이 마르다고 차를 마셨는데, 그 뒤 복통을 호소하다 각혈한 뒤 붕어하였다. 왕으로 즉위한 지 정확히 55년이 되는 날이었다.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 곁방에서 붕어(崩御)하여 그의 인산일로 하여금 삼일절(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게 한, 3.1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덕수궁 이태왕(李太王·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인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병명도 기록하지 않은 채 그날 병이 깊어 동경(東京)에 있는 황태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고종이) 밤중에 식혜를 드신 후 반 시각이 지나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괴로워하시다가 반 시간 만에 붕어(崩御)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음식물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소문은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덕혜옹주는 아버지가 독살당한 것으로 굳게 믿고 가쿠슈인(學習院)에 다니면서도 반드시 먹는 물을 보온병에 따로 챙겨다녔으며,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조현병까지 걸렸다. 심지어 일본 황족인 며느리 이방자 여사조차 시아버지가 독살당했을 거라고 판단했다.
고종의 사인이 독살이었다는 주장은 윤치호 일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진창(韓鎭昌)[43]씨는 광무태황제가 틀림없이 독살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완벽하게 건강하던 광무태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 안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사망했다.
2. 하루 이틀 사이에 광무태황제의 팔다리가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바지를 벗기기 위해 통 넓은 한복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閔泳達)과 몇몇 사람들이 약용 솜으로 광무태황제의 입안을 닦아낼 때 황제의 이가 모두 빠져있고, 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목에서부터 복부까지 30센티미터 가량 검은 줄이 길게 나 있었다.
5.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 했다.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 등과 함께 염(殮)을 한 민영달 씨가 한진창 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 (1920년 10월 13일자)#
1. 완벽하게 건강하던 광무태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 안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사망했다.
2. 하루 이틀 사이에 광무태황제의 팔다리가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바지를 벗기기 위해 통 넓은 한복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閔泳達)과 몇몇 사람들이 약용 솜으로 광무태황제의 입안을 닦아낼 때 황제의 이가 모두 빠져있고, 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목에서부터 복부까지 30센티미터 가량 검은 줄이 길게 나 있었다.
5.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 했다.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 등과 함께 염(殮)을 한 민영달 씨가 한진창 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 (1920년 10월 13일자)#
고종 독살설의 증거로 대중사학자 이덕일의 저서 <누가 왕을 죽였는가> 등을 토대로 하면 다음과 같다.[44]
- 일제의 발표에 의하면 사인은 지병인 뇌일혈인데, 전조 증상이 분명한 뇌일혈에 비해 고종은 붕어한 당일까지 건강 상태가 매우 양호하였다.
- 고종 사후 염습(殮襲, 시신을 깨끗한 여러 옷으로 감싸 봉인하는 일)한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1~2일이 만에 시신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로 부풀고 썩기 시작하며 이가 빠지고 혀가 닳기 시작했으며, 3일 만에 완전히 부패하여 이가 빠지고 살점이 뚝뚝 떨어졌는데, 이는 조선 시대에 독약으로 자주 사용된 비상(砒傷; 비소 화합물)의 비소 성분으로 사망 시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다.[45] 고종의 붕어일은 양력 1월 21일, 한 겨울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라면 3일만에 부패하는 경우는 당연히 있을 수 없다.
- 고종에게 최후의 간식을 올리고 기미한 것으로 보이는 궁녀들도 이후 의문사하였다.
- 그의 승하가 기록된 《고종실록》 및 《순종실록》이 일제에 의해 편찬된 점으로 보아 미심쩍은 구석도 있었다. 《순종실록》 부록에선 1919년 1월 20일 고종의 와병 기록이 있고, 여기선 정확한 병명에 대한 언급 없이 도쿄에 있는 이왕세자 영친왕에게 전보를 쳐서 알렸고, 이완용(李完鎔)과 이기용이 숙직했다는 기록이 전부다. 또한 사망일 역시 《고종실록》의 1월 21일인지, 《순종실록》의 1월 20일인지 불분명한 경우도 있다.
- 조선총독부가 칙령 9호로 이태왕 승하에 따라 3일 간 가무음곡을 중지한다고 결정했는데, 1주 뒤에 칙령을 내린 점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46]
- 데라우치 마사타케 당시 총리대신을 비롯한 고위층에서 이 무렵에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이를 고종 암살설과 연계시킬 수도 있다.[47]
정확한 사인을 알 수는 없지만 살해당했다면 보통 이완용과 이기용[48]이 배후일 거라고 지목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고종 독살설의 배후로 이왕직 장시국장을 지낸 한창수 남작과 시종관 한상학을 꼽는 이들도 있는데, 이증복은 1958년 12월 16~19일자 <연합신문>에서 1918년 12월 19일에 두 한씨가 고종에게 독이 든 식혜를 올려서 독살케 했다고 기록했고, 구양근 성신여자대학교 교수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낸 국민대회 성명서에서도 "그들(이완용 등 친일파)은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윤덕영과 한상학을 시켜서 식사와 기미 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타서 올려서 살해했다"는 대목이 있다고 설명했다. 우당 이회영의 며느리이자 고종의 생질(외조카)인 조계진도 고종 승하 닷새 뒤 운현궁에 다녀와서 시부에게 이러한 사실을 전한 일화도 있었며, 독립운동가 송상도가 쓴 <기려수필>의 유신영 편에서 "역신 한상학, 윤덕영, 이완용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종의 죽음에 대한 논의와 평가는 1910년대의 혁명적 환경을 외면하고, 3.1운동의 발생을 고종의 죽음이라는 우연한 사건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게재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와 함께 일어난 3.1운동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인들이 고종을 민족의 대표자로 인식하지는 않았더라도 국가의 상징적 존재로는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고종 자신이 장기간 일본에 시달리면서 유의미한 반격은 거의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죽음이 도화선이 된 3.1운동으로 최초이자 최후로 일본에 큰 유효타를 먹이는 데에 성공한다.[49]
2009년, 한국사학자 이태진과 이승엽은 '고종 독살설'에 대해 심도 깊은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이태진은 창부용삼랑일기(倉富勇三郞日記)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고종독살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는데, 같은 자료를 분석한 이승엽은 오독의 가능성을 제기한 뒤, 고종 독살설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조선인의 불만과 영친왕이 일본인 여성과의 혼인에 대한 반감에서 야기된 소문의 확대 재생산에 불과하며, 사실임을 증명할 만한 근거는 전무하다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고종 붕어 직후 보도된 한국과 일본의 자료를 검토하고 재구성하여 고종의 사인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1월 20일부터 고종의 붕어까지 각 보도 자료 내용을 종합하여 시간 순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월 20일
- 오전 11시 - 고종 기상, 안상호 촉탁의 배진, 아침식사 (매일신보 1919.1.22.)
- 오후 3시 - 고종 가미온담탕 진어 (매일신보 1919.1.22.)
- 오후 가미오카 대표 촉탁의 2회 배진 (경성일보 1919.1.24.)
- 오후 6시 도가와 촉탁의 배진 진맥 (경성일보 1919.1.24.)
- 오후 10시 저녁식사(평소 저녁식사 11시) (매일신보 1919.1.27.)
- 1월 21일
여기서 뇌일혈 증세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21일 오전 1시 30분경 왼쪽 손에 마비가 와서 고통에 시달렸다는 오사카매일신문과 고종의 평상시 생활습관이 평소 새벽 3시에 잠들어 오전 11시에 일어나고 오후 3시에 아침을 먹고 저녁식사를 11시에서 12시에 했다는 경성일보하고 1914년 12월 31일에 측정된 체중 기록에서 고종의 체격이 키 153cm[A]에 몸무게 70[A]~73[52]kg이라는 비만체형이라는 것에서도[53] 충분히 발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한편 독살설의 근거로 제시되는 자료는 김명길 상궁이 고종의 시신을 염(殮)할 때 시체에서 피와 살이 묻어나 독살의 의문을 표했던 것, 윤치호일기에 고종의 팔다리가 엄청나게 부어오르고 이가 모두 빠져있다고 한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보통 시신은 사망 후 하루 안에 바로 염을 하는데 고종의 시신은 4일 정도 아무 조치를 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순종 황제가 아닌 도쿄에 유학 중인 황태자가 오길 기다렸기 때문이다.[54] 고종 시신에서 혀가 없어지고 다리가 붓고, 목 가슴 복부 등의 상위 부분에서 일직선 모양의 검은색 선이 목에서 복부까지 눈에 띄게 나타나 있는데 정상적인 부패라고 보기가 어렵다. 검은색 부패는 보통 10일 이상을 넘겨야 가능한 법이다.
사망 후 시신은 바로 부패가 일어나 급격히 붓기 시작하는데, 건강한 사람의 경우 평소 장내에는 약 1kg의 세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고종은 뇌일혈을 일으키며 다소 체온이 상승하고 밤 10시에 저녁식사를 하여 다소 열이 있었으며, 따뜻한 실내에서 시신을 안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패가 심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오전 6시 경에 사망했으나 사망 발표는 그 다음날인 1월 22일 오전 8시에 이뤄졌으며 사망일자도 1월 21일 오전 6시가 아닌 1월 22일 오전 6시로 하루 늦춰졌다. 고종의 사망일과 사망 소식 발표가 하루 늦어진 이유는 당시 불과 4일 뒤인 1919년 1월 25일에 영친왕과 마사코 여왕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이왕직 장관 민병석, 이왕직 차관 고쿠부 쇼타로(國分象太郎), 찬시(贊侍) 윤덕영, 조민희,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완용, 조선귀족 송병준, 윤택영 등 대부분의 고위고관들이 결혼식 준비를 위해 동경(東京)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 총독부와 이왕직의 주요 수뇌부가 부재한데 고종이 사망하는 극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겨우 입장을 정리한 이왕직은 1월 21일 오후 1시 경에 고종이 중태에 빠졌다고 발표했다. 한편 고종의 사망 소식을 일본에서 접한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일본 궁내청과 상의하여 영친왕의 결혼식을 연기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에 있던 고관들은 모두 귀국을 시작했다. 그리고 1월 22일 오전 8시, 이왕직은 고종이 1월 22일 오전 6시에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왕가의 혈통을 끊으려한다는 소문이 있는 상황에서 혼례를 거행할 때, 소요 사태가 분명 일어날 것이라고 하여 혼례를 연기하고 이후 고종의 소식을 늦게나마 알리게 된 것이다. 김윤식의 <속음청사>에서도 고종의 급서로 아들들(순종, 의친왕, 영친왕 등)이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의 장례는 일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의 장례를 기준으로 하여 장의괘장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郎), 제관장에 일본 궁내청 식부차장(式部次長) 이토 히로쿠니(伊藤博邦)[55] 등을 각각 지명했다. 기존 전통식 국장과는 다르게 대여와 신연을 분리해 훈련원과 종로로 각각 향했다. 3월 3일에는 훈련원에서 '국장식'이라는 별도의 식을 열어 두 행렬이 동대문 밖에서 만났고, 청량리에서 노제를 치르고 현재의 남양주가 있는 홍유릉 구역으로 향했다.
2010년에는 일본이 일부러 고종을 독살할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는 주장이 국내 연구자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같은 시기 일본에 머물고 있던 영친왕과 이방자의 혼례가 불과 4일 뒤에 있을 상황에서, '내선일체'(內鮮一体)의 이데올로기를 홍보할 좋은 기회를 맞이했던 일본이 일부러 신랑의 아버지인 고종을 제거해 물의를 일으킬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고종 망명설을 부정하거나 사전에 막아 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입장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망국의 군주, 고종 황제의 장례식은 일본의 강요로 전통식으로 아닌 일본식으로 치러졌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식(傳統式)'은 일본식으로 치르는 장례식과는 다르게 사후 몇개월이 지나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조선과 대한제국의 전통이자 관습이었는데, 고종은 일제강점기 이왕가의 '덕수궁 이태왕' 신분으로 승하했기 때문에 돌아간지 얼마 안돼서 바로 짧게(1~2개월 만에) 장례를 치른 것이다.
위에 언급하였듯이 일본은 혼례를 앞두고 고종을 죽일 이유가 없었는 시각에서는, 뉴욕 타임즈에서는 고종이 자살하였다고 잘못 기재, 보도한 것도 그 연장선으로 본다#.
2009년에는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독약을 탔다는 증거가 처음으로 발굴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이는 기자의 설레발 혹은 제목 낚시. 기사를 잘 읽어보면 "데라우치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음요. 님 혹시 들은 내용 없음?" 이라고 구라토미가 질문한 것뿐인데, 이를 독살의 증거라고 확대 해석한 것이다. 이 질문은 당시에도 독살'설'이 있었다는 증거이지 독살 자체의 증거는 아니다.
어찌됐든 고종의 유해가 남아있으므로 나폴레옹처럼 현대 과학 기술로 검사해보면 독살당한 것이 사실인지 규명해 볼 수 있겠으나 홍유릉을 발굴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으므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56] 조선왕릉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전주 이씨 문중의 허락이 필요한데 당연히 조상의 무덤, 그것도 왕의 무덤을 판다는 것에 극도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종은 사실 전에도 독 타진 음료를 마시고 사망 할 뻔했다. 1898년(광무 2년) 김홍륙독차사건이다. 실각한 김홍륙이 앙심을 품고 평소 고종이 즐겨마시던 커피에 독(아편)을 넣어 벌어진 일이었다. 고종은 조금 먹어보고 커피의 냄새가 이상하여 뱉고, 다 마시지 않고 버려서 화를 당하지 않았다. 다만 같이 커피를 마신 순종과 내관은 죽다 살아나 평생 후유증[57]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정세가 어지러울 때는 독살 위협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에비슨과 같은 외국 선교사들이 보내준 연유 통조림과 삶은 계란 몇개로 연명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릉(洪陵)[58] 명성황후와 합장되어 있다. 고종의 능은 전통적인 조선식 왕릉과는 다른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황제릉'(皇帝陵)의 형식으로 꾸민 것이라고. 본래 홍릉은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되고 처음에는 오늘날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 묻혔었는데 1919년에 고종이 붕어(승하)하고 당시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원래 홍릉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것이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소인 '영휘원'(英輝園)인데 오늘날에도 그 근처에는 '홍릉로'(洪陵路)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며 이 근처에는 홍릉 수목원이 있다.
뒷날인 1926년, 아들 순종황제가 죽은 후에도 홍릉 근처에 능을 써서 이 능역을 합쳐 홍유릉(洪裕陵)이라고 부른다. 홍유릉 뒤편에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나 의친왕,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일원들의 묘소도 함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홍유릉 일대는 대한제국 황족들의 가족무덤인 셈.
19. 복제 논쟁
고종황제의 승하 이후 아직까지 잔존한 유림들 사이에선 20세기 판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고종의 사망 이후 일부 유림들이 "우리는 대한제국 황제(大韓帝國 太皇帝)의 신하들이지, 일본 이태왕(日本 李太王)의 신하는 한 적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할 수 없다!"라고 고종에게 절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긍섭으로 고종 무복설(無服說)을 주장하였는데, 간단히 말하면 망국의 책임이 있는 왕은 왕 대접을 해주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명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숭정제를 들며 망국의 책임이 있는 군주라면 마땅히 자결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일제로부터 '이태왕'이라는 작위까지 받았으니 고종을 위해 상복을 입는 건 일본의 신하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59]그런데 서울(경성)에서 고종이 일본에게 저항하다가 끝내 독살되었단 소식이 들어오자, 그렇다면 고종은 친일을 한 것이 아닌 것이 된다고 하여 고종에게 절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이후 유림계는 "고종황제 폐하께서는 무능하셨다. 근데, 그것이 오직 그분만의 책임인가? 우리도 여러 실책을 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니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간재 전우 등의 강경파[60]를 제외한 대다수 유림들은 3.1 운동 등에 참여하여 다른 종교인들과도 상호 연대하고, 파리 장서 사건을 모의하는 등 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 철종을 기준으로 혈연적 촌수를 계산하면 (17) 철종 - (16) 전계대원군 - (15) 은언군 - (14) 사도세자 - (13) 영조 - (12) 숙종 - (11) 현종 - (10) 효종 - (9) 인조(공통 조상) - (8) 인평대군 - (7) 복녕군 - (6) 의원군 - (5) 안흥군 - (4) 이진익 - (3) 이병원 - (2) 남연군 - (1) 흥선대원군 - (본인) 고종.[2] 훗날 고종이 되는 명복은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의 양아들로 입적 되었다.[3] 그가 태어난 사저는 처음에 구름재댁으로 불리다가 그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비로소 운현궁(雲峴宮)이라는 궁의 작호를 받게 된다.[4] 무병장수, 오래 살라는 의미로 이름을 흥선군이 직접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유는 당시 흥선군의 처지가 안동 김씨 등 세도가에 붙어 기어들어가지 않으면 아무리 방계 왕족 종친이라 할 지라도 목숨줄이 단명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고종이 태어났을 때 일계 종친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를 '목숨 명'에 '복 복' 자로 지은 것이다.[5] 잠저(潛邸) : 창업(創業)한 임금이나 종실(宗室)에서 들어온 임금으로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컬음. 또는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즉 여기서 말하는 잠저는 운현궁이다.[6] #.[7] 순명효황후 민씨는 순종이 황태자를 하던 시절에 세상을 일찍 떠났고, 이후 새로 맞은 황태자비가 해평 윤씨 가문의 순정효황후 윤씨.[8] 양반, 지주들에게도 세금과 군역을 매기는 법을 제정하였다. 당시 19세기 조선 사회에서는 고금에 들어보지 못한 혁신적인 개혁정치라, 양반들에게는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백성들에게는 정말 두 손 들고 적극 환영할 만한 일이라 대원군의 지지율이 더 올라갔다.[9] 명나라 만력제(신종)를 모시기 위해 만든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어 구해준 의리, 즉 사대에 대한 명분을 강조하기 위해,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명분과 기초 아래 지어졌으며 후대에까지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사대부와 유림 세력은 자기네 사비가 아닌 전부 국고(국가의 세금)로 충당하여 조선 재정상태가 엉망이 될 정도였다.[10] 그런데 막상 폐지하고 보니 조정의 창고에는 청전만 가득했다. 당백전 때와 마찬가지로 지방 관아와 병영에서 양화인 상평통보는 자기들이 챙기고 악화인 청전만 공납으로 올려보냈기 때문이다.[11] 그렇다고 천천히 폐지할 수도 없었다. 조정의 창고에 있던 청전을 민간에 풀고 다시 상평통보를 거둬들이면 조정의 피해를 고스란히 민간에 억지로 떠넘기는 행태가 되고 어차피 폐지될 청전의 유통량이 더 늘어난다. 악화이기 때문에 손에 들어온 청전은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소모해 없애버리는 것이 이득이므로, 굉장한 속도로 유통되면서 당시 조선의 화폐 경제를 붕괴시켰던 것이다.[12] 당백전을 살리자니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당백전을 폐지하자니 조선의 시장 경제가 망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의 무리한 당백전 화폐 정책은 백성들에게 있어 민심을 이반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13] 명목 가치는 이름 그대로 상평통보의 100배. 실질 가치는 6배 정도.[14] 당백전이 발행되고 조선의 물가는 정말 엄청나게 폭등했다. 단적으로 쌀값은 당백전 유통 6개월 만에 6배로 폭등한다.[15] 청전은 상평통보의 1/3의 가치밖에 없는 악화였다.[16] 이 조약은 강제로 불평등하게 체결했기에 '늑약'(勒約)이라고도 한다.[17] 13개월이라는 숫자가 감이 안 올 수 있겠으나, 13개월이면 1년하고도 1개월이 더 지난 상태로 월급을 계속 못 받은 것이므로, 그동안의 구식 군인들이 참다 참다가 별기군과의 차별, 그로 인해 구식 군인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불만 등으로 군란이 터질래야 터질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18] 근데 이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에 13개월(거의 1년 이상)이나 급료도 못 받았는데 호구처럼 군대 규율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하지만 그런 사태를 만든 장본인이 본인이라는 것은 망각한 듯 하다.[19] 미국인 선교사 겸 외교관, 의사인 호러스 뉴턴 알렌의 구사일생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죽진 않았다.[20] 현재의 덕수궁인 경'운'궁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後. 현목수비 박씨 추증)의 사당이다.[21] 이때 죽은 이들을 온건 개혁파라고 부르는 견해가 있지만 갑신정변 때 숙청된 이들은 급진 개화파와 척을 지고 있던 사람들(보수적인 사람)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이전에는 기득권 유지에 급급했다고 썼지만 죽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개화에도 관여했을 정도로 우수한 인재들이 많았다. 애초에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이유는 본인들의 처지가 막장이 되어서였지,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의지로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22] 갑신정변에 대한 전면 피해보상, 일본 공사관 신축 배상 및 조선에 일본군 주둔.[23] 양국군 철수 및 동시 진입 보장.[24] 성리학이외에는 모두 탄압해야 한다는 것이 조선 태종때부터 이루어진 숭유억불 정책에 기초하여 나온게 이단(천주교, 동학 등)을 탄압하는 조선 고유의 기본 정책이다.[25] 이 과정에서 대원군에게는 고종 밀서 위조 의혹이 있다. 동학 세력은 고종의 밀서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대원군의 후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 뻥이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이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해서 동학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고종은 일본이 경복궁을 기습 불법점령한 사건의 영향으로 일본군의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밀서를 보낼 상황이 아니었고 동학 내에서도 일본에게 왕이 위협받고 있는데 2차 봉기를 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했다고 본다면 이 모든 의문들이 해결되기 때문이다.[26] 훈련대는 일본군이 훈련하는 부대고 시위대는 미군이 훈련하는 부대다. 일본을 경계하던 고종이 이걸 받아들일리 만무했다.[27] 일본은 이 사건을 핑계 삼아 미우라 고로를 풀어준다. 왜냐고? "서양이 조선에 간섭하는데 우리가 간섭 못할게 어디 있냐?"란 논리이다.[28] 러시아가 아닌 서울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이다. 분명 러시아 공사관이니 조선 땅 안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을 말하는거다.[29] 실제로 베베르는 이후 열심히 친조선 정책을 펼쳤는데 너무 친조선적으로 활동한다라는 이유로 2번이나 조선 공사 직에서 파면당할 상황이 온다. 처음은 주일 공사가 우연히 죽으면서 유임되는데 이 때 아관파천이 터진다. 고종이 베베르를 유임시켜 달라고 러시아 외무부에 직접 편지를 보낸 것까지 남아있다. 이후에도 고종을 위한 활동을 많이 했으니 매수는 대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30] 갑신정변을 주도한 그 서재필이 맞다[31] 워낙에 모순적인 부분도 많고 흔히 교과서 등에서는 쉽게 언급 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아서 내막이 잘 알려지지 않은 단체이다.[32] 고종은 이범윤을 러시아군에 합류 시켰다고 한다.[33] 일본이 다케시마(竹島)으로 불법 개칭하고, 주인없는 땅이라고 전에 공포했던 고종의 칙령 제41호('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독도)는 울도군에 속한다.')는 싸그리 무시한채 자기네 영토에 있는 시마네현에 불법 편입하여 일본이 자국의 영토라고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일본이 독도에 대한 억지 영토 영유권 주장을 한다고 해도, 100년동안 실효적 지배 점유를 한다면 그나라의 영토로 자연스레 귀속되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일본 영토로 넘어갈 가능성은 정말 현저히 낮다.[34] 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이 쓰레기 같은 나라에도 충신이 있었군요!' 하면서 감탄했다.[35] 인터뷰에서는 "황제의 마지막 전언"이라고 했다.[36]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몇 개월 전 1905년(광무 9년) 7월,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고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권을 갖는 것에 비밀리에 합의했다. 1905년(광무 8년) 8월, 영국과 일본은 제2차 영일 동맹으로 영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에서 갖는 이익을 보장하고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옹호/승인하기로 서로 합의하였다. 즉,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 지배하겠다는 내용에 대해 미국과 영국이 이미 차례로 승인했던 것.[박종효,2002,101] 박종효 편역,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101쪽[박종효,2002,73] 박종효 편역,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73쪽[박종효,2002,74]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74쪽[외교통상부,2003,223~224] 외교통상부, 『이범진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 2003년, 223~224쪽[41] 이후 대한제국의 장교이자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김인수는 10년만에 러시아 제국의 대령으로 나타난다. 중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인수는 러시아 여성과 결혼하여 러시아 제국군의 대령으로까지 진급하게되었으며 김인수 역시 1차 세계대전 당시 수 많은 연해주 지역의 항일의병들과 함께 러시아 제국군 소속으로서 동부전선에 참전하게 된다. 지금도 러시아에는 김인수 참령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후손들도 할머니(김인수의 친손녀)에게 설명을 듣기전까지는 조상님이 한국인이고 심지어 제정 러시아의 대령이었다는 사실 조차 몰랐다고한다. 그 이유가 일단 본인들 외모는 100% 백인 외모이고 제정 러시아가 혁명으로 무너진 이후에 제정 러시아의 장교이자 간부였던 김인수의 성을 계속가지는 것은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김인수 부인의 성으로 모두 바꾸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것이라고[42] 또는 수정과 혹은 홍차라는 설도 또한 있다. 황제가 커피를 자주 즐겨 마셨다는 것에서 나온 듯.[43] 윤치호의 외삼촌. 전라북도,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낸 후 1927~1934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44] 이덕일이 노론 음모론, 고조선 강역 견강부회 등 각종 음모론으로 악명이 높지만, 의외로 박사 논문이 일제강점기를 다루고 있으며, 그의 고종 독살설에 대한 해석은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등의 정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독살설' 근거를 잘 정리한 것으로서는 가치가 있다.[45] 비소 중독의 경우는 세포 조직이 먼저 괴사하며 사망하기 때문에 부패가 이른 편이다.[46] 해당 책에서 이덕일은 이러한 일을 통해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 간에 뭔 일이 있었을 걸로 추측될 여지가 있다고 봤다.[47] 당시 데라우치는 조선 총독이 아니라 본토 총리대신으로 승진해 있었고 총독은 하세가와 요시미치였다. 암살에 개입했을 가능성이야 있지만 내지 정무로도 충분히 바빴었을 사람이 현직 조선 총독을 점프하여 암살에 개입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낮다는 반박도 있다.[48] 일제강점기 때, 자작 작위와 은사금 3만원을 받았던 인물로 고종의 5촌 조카이기도 하다. 친조카인 영선군은 정적이었던 것 등, 고종은 일가와 사이가 상당히 안 좋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49] 그리고 대규모 항쟁이 꼭 모두의 투쟁하자는 암묵적 동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 아주 우연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일어나는 경우도 일어난다. 예시로 루마니아의 공산독재정권이 무너진 것도 그 시작은 그저 반차우셰스쿠 성향의 신부가 강제 이주 판결 및 폭행을 당한 것과 이에 대한 항의집회였다. 그게 커지고 커지다 혁명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러니 전임 군주의 죽음은 그 폭발력이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단순한 자연사도 아닌 독살이라는 설까지 돌고 있으니... 하다못해 꼭두각시 군주였던 순종조차도 나라가 망한 뒤 옛 조선의 백성들과 만났을 때 그에게 만세를 외쳤음에도 일본에서는 아무 제지도 하지 못했고 그가 죽었을 때(1926년) 아버지 때와 마찬가지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A] 경성일보[A] 경성일보[52] 1914년 12월 31일의 체중 기록[53] 이는 고종이 아이스크림, 와플, 사이다처럼 단 음식과 삼계탕, 추어탕처럼 고단백 음식을 좋아한데다 야식을 즐겨먹었으며 운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54]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가 사망했을 때에는 아들 영친왕이 귀국하지 않았는데도 기다리지 않고 사망 당일 바로 염습했는데, 이건 엄귀비가 전염병(장티푸스)으로 죽어 시신 처리가 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친왕은 전염병 감염 문제 때문에 생모의 입관을 직접 볼 수 없었다.[55]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56] 실제로 2008년 청나라의 비운의 황제로 알려진 광서제의 유해를 부검한 결과 비소 성분이 발견되어 독살당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위안스카이(원세개). 서태후도 함께 용의선상에 오르고 있으나 당니 서태후는 이질(痢疾)이라는 중병에 걸려 있었고 익일에 광서제를 따라갈 정도로 몸이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다. 서태후의 악명을 고려하면 결코 배제할 수는 없으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위안스카이의 이후 막장 짓거리를 생각해보면 정황상 위안스카이가 가장 충분히 유력하다.[57] 순종은 먹었을 당시 치아 전체가 헐어 빠졌고, 심각한 복통이 발생되어 구토, 혈변 섞인 설사가 몇주 내내 발생하여 엄청 고생했다고 한다.[58] 공교롭게도 강화도에 있는 고려 고종의 능호도 홍릉(洪陵)으로 한자까지 똑같다.[59] 이 주장으로 조긍섭은 최병심 등의 상복 찬성파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되고 제자에게도 절연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다가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듣자 한발 물러서 상복을 입게 된다.[60] 유림 강경파들은 "머리 깎은 자들의 복국 운동(伏鞫運動)은 유림으로써 상종할 일이 되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3.1 운동 참여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