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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록 음악의 역사를 요약한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Dani California 뮤직비디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멤버들이 각 시대의 중요한 록 뮤지션들처럼 분장하여 그들을 흉내낸다. 복사하듯 완전 똑같이 흉내냈다가 보다는 각 뮤지션들의 특징을 자기들 RHCP식으로 재미있게 소화해서 재현해냈다. 물론 한 곡 안에 록의 방대한 역사를 모두 담아내기는 불가능하지만 각 시대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록 뮤지션들 위주로 보여준다. 등장하는 뮤지션들은 RHCP 멤버들의 취향에 따라 선정된 것으로 보인다.[1]
2. 탄생 배경
록 음악은 전신은 로큰롤 혹은 로커빌리라 불리는 장르였다. 로큰롤은 12마디 블루스를 (당시 기준으로) 격렬하고 퇴폐적인 댄스리듬으로 바꾸면서 탄생한 장르이다. 로큰롤은 1940, 50년대의 미국의 노동자 및 하층계급 백인 청년들이 자신들과 가까이 일하던 가난한 흑인들의 문화에 열광하고 뒤섞이면서 출현하였다.[2] 당연히 이러한 하층민들이 클래식이나 찬송가 특유의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할 이유가 없었고, 자연스럽게 로큰롤은 훨씬 더 자유롭고 표현을 직설적으로 띄는 성격을 띄게 된다.이러한 배경으로 발전한 로큰롤이 원조이기 때문에, 그 후신인 록 음악의 발전사 역시 기존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성향과 기존 시스템을 따르는 상업적 성향이 반복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록 음악계의 사회비판과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새로운 방향 제시가 대중의 호응을 얻으며 대중음악(팝)으로 변화하고, 다시 이를 비판하면서 또 다른 장르가 출현하는 식이다.
그래서 록 음악의 역사에는 메인스트림의 위치를 차지한 장르들과 이의 안테테제의 대립구도가 자주 언급된다.[3] 이 기준은 음악적 완성도에 중점을 둔 메인스트림 뮤직과, 새로운 시도와 메세지 전달에 중점을 둔 얼터너티브 뮤직의 대립으로 보는 관점에서 기인한다. 사실 이것은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록 음악의 특성과도 상당히 부합하는 관점이라 볼 수 있다.
3. 1940년대~1950년대: 발흥기
3.1. 로큰롤
리틀 리처드 'Tutti Frutti' (1955) | 척 베리 'Johnny B. Goode' (1958) |
버디 홀리 'Peggy Sue' (1957) | 엘비스 프레슬리 'It's Now or Never' (1960) |
록 음악의 기원은 1940년대 후반~1950년대이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시체제가 풀리면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경직된 분위기에서 풀려난 수많은 청년층들이 기존의 중후한 스탠다드 팝, 재즈 장르의 이외의 더욱 신나고 경쾌한 음악을 추구하면서 자연스레 발생했다.
당시 미국에서 블루스, 컨트리 뮤직, 부기우기와 같은 루츠 음악들을 기반으로 크로스오버하여 빠르고 경쾌하게 연주한 음악을 '로커빌리'라고 불렀는데 성인 층을 대상으로 한 당시 스탠더드 팝과는 달리 10-20대와 같은 젊은 수용층을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성장했다. 로커빌리란 장르는 50년대 초중반에 로큰롤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며 그 인기를 가속화시켰다. 초기 로큰롤에서는 피아노를 리드 악기로 썼지만 5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기타가 추가되거나 기타가 리드 악기로 쓰이는 형태를 띄게 되었으며 척 베리의 등장으로 로큰롤 기타 주법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서 로큰롤은 주류의 격렬한 지탄을 받았는데, 그런 로큰롤이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불세출의 슈퍼스타의 등장으로 당시 대중음악계의 흐름을 뒤집어 버리며 정점을 찍는다. 또한, 대중음악 내에서 처음 주류 진입에 성공한 하위문화 음악으로 이러한 일은 50년대 이후에도 반복되며 주류음악과 하위음악의 대립 구도가 지속된다.
이 엘비스 프레슬리는 문화사 측면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무려 20대 초반의 애송이 주제에 미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스타가 된 엘비스의 영향은 막대했는데, 그때까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든, 일반 대중컬쳐든 중장년층 중심으로 흐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회적인 분위기 또한 그러했으며, 지금의 영미권을 본다면 상상도 못 하겠지만 10대는 당연하고, 청년층의 입지는 상당히 낮았다. 그러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성공을 기점으로 청년층의 입지가 메인스트림에 오르기 시작한다.[4]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락스타의 탄생이 청년 문화를 지상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또한, 그동안 대중음악계에서의 댄스라면 그저 클래식에서 유례한 왈츠 스타일의 영향력이 진한 춤이 보통이었는데, 엘비스 프레슬리의 춤을 기준으로 왈츠를 벗어낸다 새로운 댄스 형식의 시작이었다.
한편으로 인종차별이 격렬하다 못해 당연시하던 그 시대에 백인 청년이 흑인 음악을 들고와 역사적인 인기를 일으킨 것부터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넘어 당대 미국 사회 시스템 자체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와 비슷한 시기를 같이 보낸 리틀 리처드나 제임스 브라운같은 흑인 뮤지션들이 그를 인정하는 부분도 시대적인 배경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로큰롤은 58~9년경부터 순식간에 몰락하게 되는데, 저질음악 취급하며 꾸준히 로큰롤을 탄압했던 기성 세대들의 불만과 로큰롤 뮤지션들의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생긴 결과였다. 제리 리 루이스는 미성년자 사촌과 결혼했다가 큰 지탄을 받아 몰락했고, 버디 홀리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 척 베리는 미성년자를 동반하고 무단으로 주(州) 경계선을 넘다가 체포되었으며 리틀 리처드는 괴팍한 행동을 하다가 갑자기 팝 가스펠로 넘어가고, 엘비스 프레슬리는 여론의 눈길을 피하고자 군 입대를 선택했다.
3.2. 서프 음악과 트위스트
딕 데일 'Misirlou' | 비치 보이스 'Surfin' U.S.A.' (1963) |
처비 체커 'The Twist' (1960) | 처비 체커 'Let's Twist Again' (1961) |
흔히 로큰롤의 몰락시기,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배경등으로 폄하되기도 하는 시대이지만, 이 시기에는 로큰롤에서 절대 빼놓을수 없는 기타의 기교를 발전시킨 서프 음악과, 한 세기를 풍미한 트위스트가 탄생했다.
1958~9년경, 로큰롤은 기성세대와 언론의 철퇴를 맞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대중음악의 주도권은 팝, R&B/소울을 비롯한 "안전한" 음악에 자리를 내어 주게 되며, 리키 넬슨이나 레이 찰스, 로이드 프라이스,[5] 브룩 벤턴[6] 같은 비교적 얌전한 이미지의 뮤지션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1959~60년쯤 이르게 되자 이제 과거의 가죽옷을 입고, 머리에 잔뜩 기름을 바른 불량배들은 퇴출된것으로 느껴진다.[7] 더이상 방송에서 흔들고, 비비고, 구르는 저질적인 가사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 무렵에 유행한 음악이 바로 '인스트루멘탈 로큰롤'이다. 가사 없이 연주만으로 구성된 음악이었는데, 댄스 파티 등에서 디제이들이 다른 음악과 믹싱하기 쉬웠기 때문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50년대 로큰롤에 비해 사운드가 공격적인 느낌도 덜 했고 가사도 없기 때문에 딱히 기성세대에게 트집 잡힐만한 건덕지도 별로 없었다. 이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뮤지션이 바로 링크 뤠이(Link Wray)인데, 그는 퍼즈톤을 최초로 사용한 기타리스트로 평가받는다. 다시 말해, 현대 록음악에서 사용되는 좌우지 좡지지지하는 기타 소리를 최초로 사용한 기타리스트인 것. 아울러 그는 리버브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기타리스트로 평가된다. 링크 뤠이의 대표곡 Rumble
그러던 중 1960년에 이르러 드디어 로큰롤은 기성세대의 신경을 크게 안 거슬릴 새로운 소재를 찾는다. 바로 모든 젊은이들이 관심있어 하는, 해변에서의 낭만을 즐기며 여자들과 노닥거리기이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 대략 이 무렵 미국 해안지역에서 '서프 문화'가 융성하게 된다. 바다의 낭만을 고스란히 담은 미술 및 디자인이 성행하기 시작했고, 비키니라는 패션이 등장하는 등 미국 젊은이들은 낭만적이면서도 쾌락적인 청년 문화를 누리고 있었다. 이에 음악 또한 배제될 수는 없는 터라 위같은 배경에 힘입어 서프 문화의 일환으로 음악계의 대세로 떠오르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서프음악 뮤지션들로는 듀언 에디, 딕 데일, 더 섀도우스, 더 벤쳐스 등이 있다. 그리고 몇년 후 이들 초기 서프음악의 붐이 꺼졌을 때즈음 비치 보이스가 혜성처럼 나타나 히트곡 행진을 구가하며 서프음악 붐을 다시 일으켰고 역대 서프 뮤지션들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일단 서프라는 장르에서 기타를 비롯한 다양한 악기의 질적 발전을 가져온 것은 듀언 에디와 딕 데일이었다. 듀언 에디는 1950년대 후반부터 "wet"한 리버브 사운드를 적극 활용한 인스트루멘틀 로큰롤 음악의 귀재였다. 딕 데일은 1961년 "Let's go trippin"이라는 곡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뒤, 서프 록 기타 연주를 집대성한 곡이자, 록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곡 중 하나인 Misirlou를 발표한 뮤지션이다. 이 곡은 십수 년 뒤 영화 펄프 픽션을 비롯해 블랙 아이드 피스의 곡까지 안 쓰인 데가 없는 곡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이 당시 딕 데일이 선보인 속주 기타 주법은 훗날 하드록과 헤비메탈을 비롯한 모든 기타리스트들에게 영향을 준다.
섀도우즈와 벤쳐스는 서프의 붐이 불고난 뒤 서프음악의 쌍벽을 이루며 활동한 밴드다. 섀도우스가 클리프 리처드의 백밴드로 활동해서 시작한 베테랑들이라면, 벤쳐스는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온 입지전적인 밴드다. 둘 다 인스트루멘탈 로큰롤과 서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로큰롤 기타 연주 면에서 테크닉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데 기여한 뮤지션들이다. 섀도우스의 아파치 벤쳐스의 워크 돈 런 1960년부터 활동한 벤쳐스는 서프 음악의 본격적인 원조격 밴드였다. 듀언 에디가 서프 음악의 시초였다면, 벤쳐스와 딕 데일은 서프 음악을 완성시켰다고 보면 된다. 특히나 벤쳐스의 인기는 당시 대단했기 때문에, 전 세계 수많은 뮤지션들, 특히 기타리스트 지망생들의 롤 모델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냐면 당시 한국에서도 벤쳐스의 인기가 상당했고, 당시 미국 뮤지션으로서는 드물게 일본에 공연을 하러 올 정도였다. 벤쳐스는 당시 한국의 뮤지션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당대의 기타리스트들에게는 제일 교과서적인 존재였다. 일례로 신중현씨의 밴드 Add-4의 앨범 쟈켓에도 '한국의 벤쵸스 애드-훠'라는 홍보 문구가 써있을 정도였다.
이들의 '초기' 서프 음악은 대중적 인기도 인기지만, 록큰롤 음악의 기타 연주와 사운드적인 측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내었기 때문에 일반대중들에게보다는 이후에 나온 기타리스트 뮤지션들에게 더욱 의미가 큰 존재이다. 이 시기에는 노래에 어떤 내용을 담을지 보다는, 얼마나 더 아름답고 독특한 기타 사운드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경쟁적으로 열과 성이 넘쳐났다. 예를 들자면, 당시 활동하던 더 토네이도스라는 밴드가 Telstar라는 싱글을 발매했을 때, 전 세계 음악 업계 관계자들은 뒤집어졌다. 왜냐하면 역사상 최초로 딜레이 머신을 적극 활용하여 우주적이고 영롱한 사운드를 만들어 냈기 때문. 토네이도스의 텔스타 그리고 이 음반을 프로듀싱하고 작곡한 조 믹 또한 이 이후 명 프로듀서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서프 음악은 장르 자체로는 2~3년의 짧은 기간동안 활활 타올랐다가 1962년경부터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서프음악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소재가 제한되어 있고 사운드에만 신경을 쓴 철저히 '테크니컬'한 음악이었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이 오래 가지 못한 것. 뮤지션들이야 대단한 연주 테크닉과 녹음방식에 입이 쩍쩍 벌어지겠지만 일반 대중들이야 그런거 신경 쓰겠나. 그리고 초기 서프음악 거장들이 이루어낸 연주 혁신들도 더 이상 새로운게 계속해서 나올 수는 없는지라 아이디어와 창작력도 고갈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프 음악의 인기가 다 꺼졌다 싶었던 1963년에 Surfin' U.S.A.[8] 등의 서프 노래를 다시금 히트시키며 서프음악의 마지막 불꽃을 다시 크게 살려낸 스타가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비치 보이스다.[9] 그 전 초기 서프음악을 이끌었던 선배 서프 뮤지션들이 질주하는 느낌의 빠르고 현란한 전기기타 사운드를 통해 청자를 매료시켰다면, 비치 보이스는 멤버들이 어렸을 때부터 같이 호흡을 맞춰왔던 정교하고 아름다운 보컬 하모니가 주무기였다. 그리고 뮤지션과 음악관계자들, 그리고 소위 듣는 귀가 높은 음악광들 위주로 인기를 끌었던 초기 서프 음악들과는 달리, 비치 보이스는 훨씬 듣기에 쉽고 보편적인 매력을 담고 있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폭넓은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선배 서프 음악인들보다 더욱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톱스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렇게 비치 보이스는 서프 장르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리더 브라이언 윌슨이 비틀즈로부터 영향과 자극을 받은 뒤 1966년경부터는 서프를 벗어나서 더 야심적이고 예술적인 음악 창작을 추구하면서 단지 서프 음악 전문 밴드라고 국한시킬 수 없게 되었다.[10]
이 비치 보이즈를 마지막으로 서프는 숱한 음악적인 유산만을 남긴 채 이어지는 마땅한 계보도 없이 사실상 종말을 맞게 된다.
한편, 처비 체커는 1960년 전설의 명곡 The Twist를 발표한다.당시 그야말로 혁명에 가까웠던 이 노래에 맞춰서 몸을 회오리 바람식으로 비틀면서 추는 트위스트 춤 역시 전 세계에 퍼젔고 1960년과 1962년 두 번에 걸쳐 빌보드 핫 100 1위를 먹게 된다.
그리고 다시 1년 뒤 후속 곡이라 할 수 있는 Pony Time을 발표하여 The Twist에 이어 빌보드 핫 100 1위를 하게 된다. 1960년과 1962년에 The Twist로 빌보드 1위를 했는데 1961년엔 이 곡으로 1위를 하여 3년 연속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Pony Time 발표 이후 그 해에 Let's Twist Again을 이어서 발표했다. 아쉽게도 빌보드 핫 100 성적은 8위에 그치지만 히트는 대성공.. 나열된 대표곡 중에선 음원 순위는 가장 낮지만 널리 알려져서 유명해진 덕에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하다.
이 외에도 1962년에는 Joey Dee & The Starlighters의 <Peppermint Twist - Part I>, Gary U.S. Bonds의 <Dear Lady Twist>, <Twist, Twist Senora>, Dee Dee Sharp의 <Slow Twistin'>, 샘 쿡의 <Twistin' the Night Away>, King Curtis의 <Soul Twist>, 아이즐리 브라더스의 <Twist and Shout>[11], 지미 소울의 <Twistin' Matilda (And the Channel)> 등 수 많은 트위스트를 주제로 한 히트곡들이 나왔다.
그리고 이 영향으로 인해 트위스트 말고도 미국에서는 수많은 댄스가 유행했었는데, 주로 락앤롤이나 R&B, 소울 장르의 곡들이었다. 처비 체커가 만든 댄스인 "Pony Time"[12], "The Hucklebuck"[13], "The Fly"[14], "Limbo Rock"[15] 등도 있었지만, 이 곡과 처비 체커가 미국 음악계에 미친 영향이 너무 크기에 다음과 같은 댄스들이 나왔다.
1962년의 "매쉬드 포테이토"는 트위스트를 제외하고 제일 크게 유행했던 댄스로, 처비 체커의 여자 버전이라고 볼 수 있는 미국의 댄스 여가수 Dee Dee Sharp에 의해 유행되었다. Dee Dee Sharp의 1962년 곡 "Mashed Potato Time"의 인기는 엄청났는데, 196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위를 기록하였다.[16] Dee Dee Sharp는 이 곡 이외에도 같은 해 발표한 "Gravy (For My Mashed Potatoes)"라는 곡으로 이 댄스의 생명력을 유지시켰다.
같은 해, 당시 인기 있었던 미국의 4인조 음악 그룹 The Orlons가 유행시킨 댄스 "와투시"는 이들의 노래 The Wah-Watusi가 큰 인기를 끌며 동시에 유행했다. 이 댄스의 촉발제인 "The Wah-Watusi"는 빌보드 핫 100에서 2위까지 올라갔다. 196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선 24위에 올랐다.
1963년 미국의 소울 가수 Major Lance가 유행시킨 "The Monkey"도 큰 인기를 끌었던 댄스이다. 이 댄스를 대표하는 곡인 "The Monkey Time" 역시 빌보드 핫 100에서 8위, 빌보드 R&B 차트 2위, 196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8위를 하는 등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렇듯, 이 두 장르의 덕택으로 로큰롤은 1세대 가수들이 사라진 후에도 완전히 가버린 장르가 되지않고 남아있을수 있었다. 그러나 두 장르모두 장기적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데는 실패했고, 1세대에 있었던 락의 정신도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이때, 영국에서 구원투수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4. 1960년대: 부활
4.1. 브리티시 인베이전
비틀즈 'I Want to Hold Your Hand' (1963) | 비틀즈 'Help!' (1965) |
비틀즈 'In My Life' (1965) | 롤링 스톤스 'Paint It Black' (1966) |
미국에서는 로큰롤이 기성 세대의 탄압과 뮤지션들의 불운한 사고들,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의 고갈 등으로 몰락했지만, 상대적으로 미국보다 개방적이었던 영국에서는 뒤늦게 로큰롤의 열풍이 불며 여러 로큰롤 밴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비틀즈가 1959년 결성되어[17] 리버풀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그 후로 롤링 스톤즈(1962년 결성), 더 킹크스(1964년 결성), 더 후(1964년 결성)와 같은 전설적인 밴드들이 차례차례 결성되었다.
로큰롤이란건 50년대 후반에 생명을 다 해버려 이미 죽은 장르 취급을 당하던 미국에서 1963년부터 비틀즈의 로큰롤 음반들이 기록적인 성공을 거둔 것을 계기로 다시금 록큰롤의 인기가 부활하기 시작했다. 특히 1964년 초 비틀즈의 미국 공연 때 비틀즈의 인기는 더욱 폭발했고, 이후 비틀즈의 뒤를 이어 롤링 스톤스, 더 후같은 영국 밴드들이 미국에 진출하여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비틀즈를 필두로 한 영국 밴드들이 미국에 진출하여 큰 인기를 거두고 다시 로큰롤 열풍을 부활시켰던 현상을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부른다.
이런 영국의 브리티시 인베이전 밴드들에게 영향과 자극을 받아 미국에서도 다시 로큰롤이 부흥하게 되어 많은 록 뮤지션들이 새롭게 쏟아져 나왔고, 비틀즈, 롤링 스톤스 등을 포함한 영국과 미국의 다양한 록 뮤지션들에 의해 저변이 넓어지면서 록 음악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면서 전 세계적으로도 록 음악 열풍이 불었다. 비틀즈는 로큰롤에서 록 음악을 정의하면서 하면서 대중음악의 바탕에 록을 자리잡게 했고, 이 시대를 상징하는 비틀즈의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 현대 대중음악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비틀즈는 대중음악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바꿨다고 평가받는다.
비틀즈의 경우, 포크 록, 사이키델릭 음악, 팝 록, 프로그레시브 록, 소프트 록, 라가 록, 아트 록 부터, 쟁글 팝, 파워 팝, 드림 팝, 바로크 팝, 챔버 팝, 아트 팝 등 다양한 장르의 탄생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는 후에 대중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현대 대중음악계에서 앨범을 단순히 싱글곡 모음집이 아닌 하나의 장르로 보아 통일된 예술성을 부여한 것도 최초였으며,[18] 자극받은 모든 음악가들이 명반을 만들기에 열중한다, 그렇게 앨범시대를 개막한다.
뮤직 비디오도 최초의 주크박스 뮤직 비디오들을 이어서, 광고 목적으로 1966년 Paperback Writer/Rain 싱글 발매 때 최초의 TV 뮤직 비디오를 촬영했고, 그 후 A Day in the Life와 Strawberry Fields Forever, Penny Lane 같은 독특한 예술성이 잡힌 현대 뮤비의 시초작을 제작한다. 그동안 작곡, 작사, 연주, 가수가 따로 였던 기존의 구조에서 모든 것을 한번에 구상하는 시스템을 굳히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리고 음악계에서 시도조차 없던 각종 음향 기법을 기존 대중음악에 도입하여 실험음악과의 경계도 허물었다.
결정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가 시작하고 케네디 대통령이 이어가던 젊음의 분위기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일탈과 케네디 암살로 꺼졌는가 싶었지만, 비틀즈의 등장으로 다시 재점화되면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포함한 문화계 전체가 10대 ~ 20대의 청년층 문화를 핵심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평화주의, 평등주의, 성해방, 개인주의 사상부터 각종 사상들이, 당대 사회문화 운동의 화신이라고 평가받던 비틀즈의 표방 이념이 되어, 일탈에서 당당한 주류 사회 문화의 일종으로 인정받는다.
LP가 주류 매체이던 시절에, 미국 시장에서 최소 40% 최대 60% 이상의 음반 판매량을 보이면서 음악 시장의 대호황을 일으켜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었고, 비틀즈가 본격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키면서 기존의 클래식 시대의 막을 내렸다. 1960년대 후반기에는 영화계를 포함한 대중문화계가 전체적으로 현대적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비틀즈가 형성한 자유로운 사회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즉 영국에서 재탄생한 로큰롤이 비틀즈를 계기로 다시 미국에 전파되었고, 많은 인적 자원을 가진 미국을 거치며 더욱 거대한 태풍으로 확대되어 전 세계로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의 파장은 단순히 음악이나 문화계 내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적인 영향으로 뻗어나가게 되는데, 68혁명, 히피, 문화적 자유주의 등 세상을 뒤흔들었던 근간이 되어주기도 했으며, 더 나아가 록 음악 열기가 영미권 뿐 아니라 세계로 퍼지면서 전 세계적으로도 록 음악 열풍이 불며 록 음악으로 대표되는 대중음악이 전 세계 대중문화의 중요한 분야로 자리잡게 된다.
자세한 것은 브리티시 인베이전 문서를 참고바란다.
4.2. 포크 록
밥 딜런 'Like a Rolling Stone' (1965) | 비틀즈 'You've Got To Hide Your Love Away' (1965) |
버팔로 스프링필드 'For What It’s Worth' (1966) | 사이먼 앤 가펑클 'Mrs. Robinson' (1968) |
미국에 상륙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도취시킨 비틀즈의 영향은, 당시만 해도 로큰롤과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던 장르인 포크 음악의 유망주였던 한 미국 청년에게도 크게 미쳤는데, 그가 바로 밥 딜런이었다.[19] The Freewheelin' Bob Dylan(1963)의 성공 이후 포크 장르의 일약 스타로 떠올랐지만, 포크 엘리티즘 특유의 폐쇄적이고 강압적인 포크 커뮤니티에 슬슬 질려가고 있던 데다가, 단조로운 포크 사운드만으로는 음악적 표현의 한계를 느껴서 뮤지션으로서의 회의감에 빠져있던 차에 비틀즈를 접하게 된 것이다.
밥 딜런은 비틀즈의 로큰롤이 지닌 에너지와 자유로운 환희에 본인의 10대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금 매료되었다. 이후 그는 전기 기타를 들어 포크 커뮤니티를 배신하고[20], Bringing It All Back Home(1965), Highway 61 Revisited(1965), Blonde on Blonde(1966)[21] 세 장의 포크 록 앨범을 냄으로서 음악적 변화를 추구했다. 포크와 록 두 장르를 결합한 혁신적인 사운드와, 은유적이고 문학적인 그의 가사는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가사는 남녀 간의 사랑 위주였던 기존의 록 음악에서 탈피하고 사회 전반에 걸친 메시지와 철학적인 내용을 담아 록 음악이 예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밥 딜런이 비틀즈에게 먼저 영향을 받았지만, 그 후 비틀즈 역시 밥 딜런에게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밥 딜런의 깊이 있는 작사면에서 영향을 받아서, 사랑 문제를 벗어나 좀 더 문학적이고 은유적인 내용들을 가사에 담기 시작한다. 록 음악 역사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시점인 것이, 가사적인 면에서 록 음악이 문학적이고 고차원적인 예술로 나아간 첫 발자국이었으며, 이렇게 애초엔 장르를 달리하던 두 뮤지션의 상호 화학작용에 의해 '포크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고 만개하게 된 것이다.
특히 이러한 변화는 세계 음악시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바로 단순히 젊은 세대의 노래에 그친 록 음악이 예술적인 지평을 확장시킨것이다.[22]
4.3. 블루스 록
애니멀스 'The House of the Rising Sun' (1964) | 롤링 스톤스 '(I Can't Get No) Satisfaction' (1965) |
비틀즈 'Come Together' (1969) | 에릭 클랩튼 'Layla' (1970) |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록 아티스트들이 정립한 장르이다. 보통 1960년대 후기까지만 해도 독자적인 장르로서 인정받지 못 하는 기류가 있기도 했다. 보통 이 장르의 선구자들로 애니멀즈, 롤링 스톤스, 에릭 클랩튼 등이 손꼽히는 편이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전성기를 이루던 록 음악의 장르로, 당시 수많은 록 아티스트들이 시도했다.
음악적 특징을 들자면 강하면서도 담백한 드럼 비트 베이스에 퍼즈 이펙터를 사용한 기타로 소위 '더티'하다고 표현하는 거친 사운드를 내는 것을 중점으로 한다. 경우에 따라 베이스 기타에 이펙터를 적용해 대신 쓰기도 한다.
음악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장르임에도 한국에서는 유독 인지도가 낮은 장르이다.[23] 아이러니하게도 이 음악을 개척했다고 제일 널리 알려진 에릭 클랩튼은 대한민국에서 매우 유명하다.[24]
1970년대 후반까지 헤비 메탈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밴 헤일런이 등장하면서 하드 록과 헤비 메탈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1980년대 후반 경에는 글램 메탈의 영향으로 메탈계에서 블루스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나, 여전히 건즈 앤 로지스 등 블루스의 영향을 받은 밴드들이 존재했다. 또한 메탈이 아닌 하드 록 계열에서 블루스 록은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장르이다.
4.4. 사이키델릭 록
비틀즈 'Rain' (1966) | 제퍼슨 에어플레인 'White Rabbit' (1967) |
지미 헨드릭스 'Are You Experienced?' (1967) | 도어스 'Light My Fire' (1967) |
이런 가운데 1965년에 발매된 비틀즈의 6집 Rubber Soul은, 철저히 싱글 위주였던 그때까지의 대중음악계 관행을 깨고 최초로 싱글곡 컷팅 발표 없이 정규 앨범만을 발표하여 파장을 몰고 왔다. 게다가 앨범 전체에 흐르는 유기적인 구조와 감성적인 통일성은 대중음악도 앨범 자체가 하나의 감상 단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비틀즈의 혁신적인 시도에 영향과 자극을 받아 비치 보이스[25], 롤링 스톤즈, 더 후, 버즈 등도 너나 할 것 없이 야심적인 명반 앨범 만들기에 주력하였고, 마치 백가쟁명같이 다양하고 풍요로운 명반 앨범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비틀즈가 이어서 발표한 Revolver 앨범도 사이키델릭 록의 태동과 제3 세계 음악의 접목 등 중요한 혁신과 실험으로 또 한번 발전한 성취를 이루어낸다.
환각제같은 몽환적이고 전자적인 사이키델릭 록에 영향을 준 요소로는 우선 약물에 의한 환각 체험이 있고, 그 외 인도 명상 사상이나 중국, 티베트 등 불교의 선 사상 같은 동양의 신비주의 종교 사상, 현대 클래식 음악에서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등 전위적인 음악가들이 시도한 백워드 마스킹이나 신디사이저 등등의 새로운 음향 실험, 와우와우 주법 등 일렉트릭 기타의 새로운 주법과 음향효과 개발 등등이 있다.
Revolver 등을 통해 시작된 사이키델릭 록의 시대는 1967년에 만개했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비틀즈의 역작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26]가 그 핵심이었으며, 더 도어즈의 The Doors, 러브의 Forever Changes,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Are You Experienced?, 핑크 플로이드의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 등의 명반들이 쏟아졌다. 60년대 이후 사이키델릭 록은 이후 하드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을 비롯한 여러 록 음악 장르의 탄생에 영향을 주고 흡수되면서 독자적인 장르로서의 사이키델릭 록은 사라졌지만, 그 음악적 요소들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실험적인 대중음악 장르의 DNA에 영원히 남아있다.[27]
4.5. 팝 록
비틀즈 'Here, There and Everywhere' (1966) | 비틀즈 'Hey Jude' (1968) |
빌리 조엘 'Uptown Girl' (1983) | 에이브릴 라빈 'Sk8er Boi' (2002) |
콜드플레이 'Fix You' (2005) | 패닉! 앳 더 디스코 'High Hopes' (2018) |
요네즈 켄시 'Lemon' (2018) | 벤슨 분 'Beautiful Things' (2024) |
블루스 록과 함께 록 음악에서 가장 대중적인 장르이다. 블루스 록이 헤비 메탈 계열에 영향을 줬다면 팝 록은 현대에 와서도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는 매우 대중적인 장르이며, 록 음악이 전반적으로 침체된 현재에도 명맥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되고 있다.
팝 록의 기원은 불분명하나, 1950년대 후반의 기존 로큰롤 음악가들의 음악과, 로큰롤의 사멸로 대안으로 등장한 가벼운 로큰롤 타입의 음악가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다고 판단되고 있다. 그러다가,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로큰롤의 부활에 이어 록 음악으로의 발전과 함께 정립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비틀즈에 의해 팝 음악의 요소가 록 음악에 도입되면서 대중화되었다.[28]
처음으로 대중화된 1960년대부터, 현재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다채로운 방식으로 표현되는 록 음악이다.
4.6. 일렉트로닉 록
실버 애플즈 'Oscillations' (1968) | 탠저린 드림 'Phaedra' (1974) |
밴 헤일런 'Jump' (1983) | 다프트 펑크 'Robot Rock' (2009) |
일렉트로닉 음악의 요소를 록 음악에 결합시킨 것을 뜻한다. 주로 신디사이저나 멜로트론과 같은 전자 악기를 사용하고 록 음악의 가장 주된 악기중 하나인 기타를 뒤로 내빼[29] 이색적인 사운드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키보드 악기 사용을 중시하는 프로그레시브 록의 발전과 함께 일렉트로닉 록 역시 발전하였다.
대중음악계에서 처음 전자음악적인 색채를 띄우기 시작한 건 1960년대 후반으로, 이 시기 비틀즈가 페퍼 상사를 시작으로 후기 앨범 등에서 슈톡하우젠의 영향을 받은 음향 실험들로 통해 대중들에게 전자음향 기법을 각인 시켰고, 미국의 밴드 실버 애플즈, 그리고 캔이나 크라프트베르크같은 서독의 프로그레시브 록 아티스트들에 의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발전되었다.[30] 실질적으로는 전자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일렉트로닉 록을 시작으로 알려졌는데, 그것은 1970년대로, 60년대 이후 막 시작한 크라우트 록의 한 갈래로 일렉트로닉 뮤직을 처음 소개했었다.
이후 이 계열에 속해 있던 프로그레시브 성격이 강한 탠저린 드림, 클라우스 슐체 등이나, 테크노 성향의 크라프트베르크[31] 등과 같은 아티스트들이나 장 미셸 자르로 대표되는 서유럽권의 프로그레시브 일렉트로닉 아티스트들이 신디사이저, 시퀀서[32], 드럼 머신 등 전자 악기들로만 연주된 일렉트로닉 뮤직으로 처음으로 상업적으로 성공하면서 일렉트로닉 뮤직이 대중음악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상 일렉트로닉 뮤직의 시작이기도 하다.
4.7. 아트 록
비틀즈 'Eleanor Rigby' (1966) | 벨벳 언더그라운드 'Heroin' (1967) |
비틀즈 'A Day in the Life' (1967) | 핑크 플로이드 'Wish You Were Here' (1975) |
아트 록(Art rock) 은 일반적으로 록에 대한 도전적이거나 아방가르드적인 접근 방식을 반영하거나, 모더니즘적이고 실험적이거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요소를 활용하는 록 음악의 하위 장르이다. 아트 록은 록 음악을 엔터테인먼트에서 예술적인 표현으로 끌어올리기를 열망하며, 음악에 대한 보다 실험적이고 개념적인 관점을 선택한다. 실험음악, 아방가르드 음악, 클래식 음악, 재즈 등의 장르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다.#[33]
아트 록의 음악은 춤보다는 감상과 명상의 의도로 만들어졌으며, 초기 록의 추진력 있는 리듬과는 거리가 먼 일렉트로닉 효과와 이지 리스닝 질감을 사용하는 것으로 종종 구별된다. 이 용어는 때때로 "프로그레시브 록" 과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지만, 후자는 특히 고전적으로 훈련된 악기 기술과 교향악적 질감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장르의 가장 큰 인기는 1970년대 초반 영국 예술가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음악은 물론 장르와 관련된 공연의 연극적 성격도 특히 그 기교와 음악적/서정적 복잡성으로 인해 예술에 관심이 있는 청소년과 젊은 성인층의 관심을 끌었다.
5. 1970년대: 발전기
음악 시장의 메인스트림을 장악한다. 팝 록의 최전성기였고, 영국에서는 하드 록, 프로그레시브 록, 글램 록이 유행했고, 미국에서는 하드 록과, 팝 록에서 파생한 좀 더 잔잔한 분위기의 록인 소프트 록, 그리고 블루스, 컨트리, 포크와 같은 로큰롤의 원류 음악을 받아들인 루츠 록이 활성화되었다. 분파로 하트랜드 록, 컨트리 록이 등장하고 또한 개러지 록에 뿌리를 둔 펑크 록(Punk rock)이 등장한다.펑크 록에서 파생한 포스트 펑크, 뉴 웨이브도 등장, 댄스 록도 탄생한 시기이다. 고딕 록의 움직임도 시작됐으며, 1960년대 후반기에 탄생한 일렉트로닉 록이 정립, 발전했고, 인더스트리얼 록도 등장한다. 흑인 음악인 펑크(Funk)에 영향을 받은 펑크 록(Funk rock)도 등장했고, 블루스 록도 전성기를 맞으며, 록이란 록 음악은 거의 전부 등장한다.
70년대 미국의 록 음악은 영국보다 열세였으나 나름의 독자적인 음악들을 내놓았다. 미국에서도 에어로스미스를 비롯한 아메리칸 하드 록 밴드들이 나타나 인기를 끌었으며, 하드 록에 비해서 좀 더 팝 지향적인 소프트 록 역시 유행했다. 대표적으로 이글스, 플리트우드 맥[34]이 있는데, 블루스 밴드에서 소프트 록 밴드로 전향한 플리트우드 맥의 1977년 앨범 Rumours이 1,500만장을 판매하며 막대한 성공을 거두면서 소프트 록은 상업적인 정점을 찍었다. 하트랜드 록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Born to Run도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또한 블루스, 컨트리, 포크와 같이 록 음악의 뿌리가 되는 음악들에 더욱 집중한 록 음악인 루츠 록 역시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 유행했다. 컨트리 록을 구사했던 더 밴드나, 올맨 브라더스 밴드, 레너드 스키너드와 같은 서던 록 주자들,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등이 루츠 록의 대표적인 밴드들이다.
5.1. 하드 록
크림 'Sunshine of Your Love' (1967) | 지미 헨드릭스 'Foxy Lady' (1967) | |
레드 제플린 'Immigrant Song' (1970) | 블랙 사바스 'Iron Man' (1970) | |
딥 퍼플 'Smoke on the Water' (1972) | AC/DC 'Back in Black' (1980) |
하드 록은 블루스와 사이키델릭 록에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좀 더 야성적이고 공격적인 기타 사운드를 위주로한 음악을 추구했다. 60년대 하드 록 음악의 선구자격 밴드인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크림, 더 후와 같은 밴드들의 등장으로 파워풀한 전기 기타 연주 및 드럼 연주 기법 등에 혁신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런 성과물을 바탕으로 뒤이어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딥 퍼플 같은 밴드들이 60년대 후반 - 70년대 초 등장해 명반을 발표하고 큰 인기를 누리며 영국 하드 록의 시대를 이끌었다. 하드 록은 후일 80년대에 들어서 헤비메탈 음악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 전 시대인 6, 70년대의 하드록은 훗날의 헤비메탈과 달리 블루스 친화적인 그루비한 사운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호주에서 또한 하드록 밴드인 AC/DC가 출현하였다.
이후 하드 록은 더욱 발전 하여 디스토션을 가득 먹인 기타와 강하고 거친 드러밍에 빠르고 경쾌한 리듬, 고음역 처리에서 쇳소리가 날때까지 내지르는 보컬를 보여주는 헤비메탈로 이어지게 된다.
5.2. 프로그레시브 록
킹 크림슨 '21st Century Schizoid Man' (1969) | 예스 'Roundabout' (1971) |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From the Beginning' (1971) | 핑크 플로이드 'Breathe (In the Air)' (1973) |
프로그레시브 록은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발히 진행된 록의 한 주류이다. 스튜디오 음향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다양한 실험적인 록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프로그레시브 록은 그러한 실험 음악의 한 부류이다.
프로그레시브 록은 5분을 훌쩍 넘어가는 대곡지향성, 클래식과 재즈의 요소 도입, 변박과 엇박을 넘나드는 치밀한 곡 구성, 각종 실험적인 음향기법 도입 등의 특징을 가진다. 핑크 플로이드, 킹 크림슨, 예스, 제네시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등의 밴드들이 이러한 프로그레시브 록을 추구하며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핑크 플로이드 경우에는 The Dark Side of the Moon(1973)이 미국 시장에서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741주 동안 빌보드 200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앞서 말했듯이 프로그레시브 록의 경우에는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유행했으며, 독일의 프로그레시브 록의 흐름은 영미 중심의 록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독일의 프로그레시브 록은 일명 '크라우트록(Krautrock)'[35]이라고 부르는데,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영향을 받아 전자음악적 요소를 도입한 것이 특징이었다. 크라프트베르크, 캔, 탠저린 드림, 노이! 등을 위시한 크라우트록의 흐름은 일렉트로닉 뮤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러시 - 2112 | 드림 시어터 - The Dance Of Eternity |
심포니 X - Set the World on Fire | 반덴 플라스 - Postcard to God |
프로그레시브/아트 록의 곡 편성을 가져와 헤비메탈에 여러 실험적인 작법을 컨버젼시킨 퓨전 장르안데, 프로그레시브 록이 기존의 록 음악에 클래식 음악의 기법을 따와 이식하고 여러 장르에서 가져온 어프로치를 활용하는 것처럼, 프로그레시브 메탈은 헤비메탈 약 3분에서 5분에 걸쳐서 1절, 후렴, 2절, 후렴, 간주(대부분 기타 솔로), 후렴 식의 정형화된 진행을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다. 거의 대다수가 컨셉형식을 빌리며, 하나의 스토리라인을 음악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음악극의 성향을 가진 메탈로 볼 수도 있다.
5.3. 글램 록
티렉스 'Cosmic Dancer' (1971) | 데이비드 보위 'Ziggy Stardust' (1972) |
데이비드 보위 'Life on Mars?' (1971) | 미카 'Grace Kelly' (2007) |
글램 록은 양성적인 패션과 퇴폐적인 분위기로 화려함과 섹시함을 강조한 시각적인 요소가 가미된 락의 조류이다. 음악적 스타일은 로큰롤과 하드록의 중간의 사운드이며 사이키델릭 록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전자 악기, 특히 일렉트릭 기타나 신디사이저를 가미한 것이 특징이다. 글램 록은 기술적으로는 신스팝과 아트 록을 융합시켰으며, 음악적으로는 (주로 록시 뮤직과 브라이언 페리의 영향에 의해) 1950년대의 방식을 복고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티렉스의 Electric Warrior(1971)가 성공을 거두면서 글램 록이라는 장르화[36] 및 유행이 시작되었고, 데이비드 보위의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1972)의 대성공으로 당당한 락의 조류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데이비드 보위는 대중음악계 전체[37]에서 공연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로 도약하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시각적인 효과를 강조하면서 Ziggy Stardust, Thin White Duke와 같은 페르소나를 도입하여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굳히는데 성공했다. 당시까지 대중음악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이었는데, 페르소나를 이용한 다양한 분장과 의상 등으로 비주얼을 강조했다. 그리고 무대에서 각종 세트 기법을 도입해 연극성을 살렸고, 여러가지 연출 방법을 도입했다.
시각적 요소를 강조한 데이비드 보위와 글램 록은 대중음악 공연이 하나의 퍼포먼스로 도약할 수 있게 함으로서, 1970년대 후반 이후의 MTV 세대의 대중음악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여는데 시작이 되었다. 특히, 록 오페라의 확립에도 기여했다. 음악의 다양한 시각화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5.4. 소프트 록
비틀즈 'Something' (1969) | 레드 제플린 'Thank You' (1969) |
닐 다이아몬드 'Sweet Caroline' (1969) | 캐롤 킹 'You've Got a Friend' (1971) |
존 레논 'Imagine' (1971) | 플리트우드 맥 'Dreams'' (1977) |
첫 등장은 1960년대로 보고 있다. 당시 비틀즈를 대표로 여러 소프트 록 장르의 음악들이 등장했고, 비틀즈는 해체 후에도 많은 기여를 한다.[38] 1970년이 되면서, 60년대를 풍미했던 사이키델릭 록의 전성 시대는 히피 문화의 쇠퇴와 동시에 끝나가고 있었고, 하드 록 음악이 그 자리를 빠르게 메워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닐 다이아몬드로 대표되는 소프트 록 음악 역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카펜터즈와 브레드의 성공은 소프트 록 음악의 본격적인 전성기를 불러왔다. 1970년대 전체는 소프트 록이 최고 전성기를 누렸던 시대이다. 70년대 초-중반을 비롯하여, 디스코의 시대였던 70년대 중-후반에도 소프트 록은 디스코와 함께 미국 음악계의 큰 주춧돌이었다.
음악적으로 부드러운 멜로디, 얌전한 구성을 가진 미드 템포 음악과 적당한 분위기의 록 음악, 발라드, 어덜트 컨템퍼러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주로 얌전하고 잔잔한 곡들로 분류된다. 팝 록 아티스트들이 자연스럽게 겸하는 록 장르이기도 하다. 현재 2020년대에도 등장하고 있으며, 주로 백인 대중 음악가들의 작품에서 많이 혼합돼서 나오고 있다.
5.5. 펑크 록
라몬즈 'Blitzkrieg Bop' (1976) | 이기 팝 'Lust For Life' (1977) |
섹스 피스톨즈 'God Save the Queen' (1977) | 더 클래시 'Janie Jones' (1977) |
70년대 전반의 록의 지형은 특히나 하드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을 중심으로 소비되었는데, 70년대 중반에 들어서 펑크 록이 등장함에 따라 록 음악은 (특히나 영국에서) 급격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펑크 록의 부흥은 당시 영국의 경제적·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일명 영국병으로 인해 영국 경제가 파국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주류 사회에 반항하는 젊은 이들에 의해 펑크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당시의 하드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 등 연주가 너무 복잡하고 테크니컬한데다가 현실과 동떨어진 지적 허세를 뽐내는 듯한 가사 투성이인 주류 록 음악과 기업화되어버린 거대 록밴드들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그 대신 사운드 면에선 더 원초적이고 단순한 로큰롤 음악을, 가사 면에선 뜬구름같은 추상적인 내용보다는 거리의 생생한 현실 얘기를 다룬 쉬운 가사를 추구하였다. 당시의 주류 음악에 대안으로서 등장한 이런 원초적인 로큰롤 음악들을 펑크 록이라 부른다. 주류 사회에 대한 반항적인 목소리를 담고 있던 영국의 펑크 록은 당시 영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펑크 록이 DIY 정신을 내세움에따라 수많은 펑크 록 밴드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1977년에는 섹스 피스톨즈의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와 더 클래시의 The Clash의 발매와 함께 펑크 록의 인기는 정점을 찍는다.
70년대 영국 펑크 문화의 일부라는 좁은 의미에서의 펑크 록이 아니라, 그 근원이 되는 원초적이고 미니멀한 록이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펑크 록은 그 사운드적 기원이 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들의 음악은 펑크 록 이전의 펑크 록이란 뜻에서 '프로토 펑크'라고 불린다.[39] 이 '프로토 펑크'로 분류되는 음악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 제일 먼저 등장한게 '개러지 록'이다. 1964년경 브리티시 인베이전에 영향을 받은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친구들과 밴드를 구성했는데, 주로 집 차고(garage)에서 연습했기 때문에 '개러지 록'(Garage rock)이라고 불렸다. 이들 개러지 록 밴드들의 음악은 기술적으로 다듬어지거나 세련되지 못한 아마추어적인 음악이라서 조악하고 거친 사운드를 들려줬는데, 이런 투박한 면이 오히려 신선한 매력으로 작용했고 이후 다른 프로토 펑크 뮤지션들 및 더 후대의 본격적인 펑크 록 뮤지션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프로토 펑크를 논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존재가 바로 뉴욕의 벨벳 언더그라운드다. 당시에 전위 예술이 한창 유행하던 뉴욕에서 이에 영향을 받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데뷰 앨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가 1967년에 발매되었다. 동부 뉴욕의 고독하고 지적이면서도 퇴폐적인 아웃사이더 문화에 영향을 받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은 미니멀하고 거친 로파이 사운드를 담고 있었고, 이는 당시 미국의 웨스트코스트 지역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던 화려하면서 초현실적인 느낌의 록 음악과는 색깔과 정서가 매우 다른 음악이었다.
한편 미시건 주에서도 프로토 펑크로 분류할 수 있는 밴드인 MC5, 그리고 이기 팝의 밴드 스투지스가 활약했는데, 특히 스투지스는 이후 펑크록의 탄생에 직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친 중요한 걸작인 Fun House(1970), Raw Power(1972) 등을 발표했다. 1970년 메사추세츠 주에서 결성된 더 모던 러버스는, 극히 단순한 코드로 이루어진 이들의 셀프 타이틀 앨범 The Modern Lovers(1973)를 발매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상에서 언급한 각종 개러지 록 밴드들, 그리고 벨벳 언더그라운드, MC5, 스투지스, 모던 러버스, 뉴욕 돌스 등의 밴드들은 이후 본격적인 펑크 록이 등장하기에 앞서서 그 청사진을 보여줬다는 의미에서 '프로토 펑크 록'이라고 불린다. 참고로 '프로토' 펑크록이 아닌, '본격적인' 펑크록의 시초는 라몬즈부터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렇게 산발적인 개러지록 등 프로토-펑크 음악들의 영향을 받아, 뉴욕을 중심으로 70년대 중반부터 펑크 록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었으며, 이들의 음악은 영국 펑크록 밴드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라몬즈 등을 통해 후일 영국 펑크로도 이어진다. 뉴욕 펑크를 논할 때는 CBGB라는 장소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뉴욕 빈민가인 보웨리에 세워진 CBGB는 원래 다양한 음악을 하는 밴드들을 무대에 올리는 작은 클럽이었다. 그런데, 이 장소를 거쳐간 밴드들, 패티 스미스 그룹, 라몬즈, 토킹 헤즈, 블론디, 텔레비전, CBGB를 거쳐한 이 다섯 밴드들이 펑크 록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패티 스미스와 텔레비전의 경우 아트 펑크(Art punk)를 추구하며 80년대 포스트 펑크로 이어지는 예술적 흐름을 선취했으며, 라몬즈의 경우 3코드 연주와 다운스트로크만을 이용한 단순한 연주법으로 영국 펑크 밴드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토킹 헤즈와 블론디의 경우에도 후술한 펑크 록 이후의 음악인 뉴 웨이브와 포스트 펑크의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예술성을 추구했던 뉴욕 펑크의 흐름은 미국 내에서는 오일 쇼크로 침체된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성공하지 못했으나, 영국으로 그 음악적 영향력이 전파되어 앞서 설명한 섹스 피스톨즈와 더 클래시를 비롯한 영국 펑크 록의 부흥으로 이어지게 된다.
6.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중흥기
6.1. 포스트 펑크
갱 오브 포 'Damaged Goods ' (1978) | 더 클래시 'London Calling' (1979) | |
토킹 헤즈 'Once in a Lifetime' (1980) | 조이 디비전 'Love Will Tear Us Apart' (1980) |
개러지록과 프로토 펑크, 예술성을 추구한 뉴욕 펑크의 흐름을 거쳐, 영국에 당도하게 된 펑크 록은 1977년 정점을 맞이하게 된 이후 급속도로 몰락하게 되는데, 펑크 문화와 결합되어 반문화를 추구했던 이들의 움직임이 주류 미디어의 간택을 받아 주류 문화로 올라오게 되면서 그 정체성이 분열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7년 이후로 펑크 록은 여러 갈래로 분화됨에 따라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고, DIY 에토스를 내세운 펑크 문화도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대안 음악으로서의 원초적인 펑크 록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해 뉴 웨이브와 포스트 펑크, 하드코어 펑크라는 새로운 장르로 발전해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 펑크 록의 등장 이후 음악적 성질이 그 대척점에 있던 프로그레시브 록은 완전히 몰락했으며, DIY 에토스의 펑크 록 운동은 80년대부터 나타나는 인디 록의 시발점이 되었다.
뉴 웨이브는 1978년부터 유행하여 1980년 초까지 크게 유행했던, 펑크 록의 후속 장르로, 신시사이저를 적극 차용하는 등 일렉트로닉적 요소를 도입하고, 당대에 유행하던 디스코와 같은 말랑말랑한 팝 사운드와 펑크 록을 결합한 음악이다. 미국에서는 블론디, 토킹 헤즈 등이 있었고, 영국에서는 더 폴리스, 듀란 듀란, 엘비스 코스텔로 등이 있었다. 신디사이저의 적극적 차용은 영국에서는 80년대부터 신스팝, 뉴 로맨틱으로 이어져 80년대 영국 팝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
포스트 펑크는 펑크 록을 바탕으로 등장한 실험적인 음악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펑크 록의 혁명적인 등장과 더불어서, 이러한 음악에 자신들만의 독창성과 실험성을 가미한 밴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로는 펑크 록과 거의 동시에 등장했으며, 1977년부터 1980년까지 그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와이어는 Pink Flag(1977)에서 곡 길이가 3분을 넘지 않는 최소한의 구조의 미니멀한 음악을 보여주었고, 갱 오브 포는 Entertainment!(1978)에서 록에 펑크(Funk) 리듬을 도입하여 베이스의 역할을 강조했다. 뉴욕 펑크의 일원이었던 토킹 헤즈는 4집 Remain in Light에서 아프로비트를 도입했고, 런던 펑크의 일원이었던 더 클래시는 London Calling에서 레게, 덥 리듬을 도입했다. 조이 디비전은 Unknown Pleasures(1979)와 Closer(1980)에서 음울한 음악 세계를 표현했다. 이와 같이 각자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음악을 했던 이들이지만, 펑크 록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는 점이 공통 분모로서 포스트 펑크로 한데 묶인다. 복잡한 곡 구조를 지닌 프로그레시브 록과는 달리 구조적 단순성을 유지하되 그 표현 방식을 다양화 했다는 점에서 실험성이 구분된다. 포스트 펑크는 당대에는 팝 지향적인 뉴 웨이브에 비해서 상업적으로 큰 인기를 끌지 못했으나, 그 영향력은 8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 후술할 얼터너티브 록 음악의 직접적인 선조가 되었다.
한편으로 포스트 펑크는 자유를 갈망하던 동구권의 아티스트들에게서도 유행했으며, 당대 소련을 중심으로 데데테, 키노 같은 밴드들이 등장하며 동구권 록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소련 붕괴로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동구권 록은 여전히 포스트 펑크가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하드코어 펑크는 80년대 초 미국에서 등장한 펑크 록의 하위 장르로, 더욱더 과격하고 빠르며 단순한 펑크 록을 추구했다. 하드코어 펑크의 대표 주자는 블랙 플래그로, 블랙 플래그의 리더 그레그 진은 그들의 1집 Damaged가 앨범이 레코드 사로부터 퇴짜를 맞자 직접 SST 레코드라는 레이블을 설립해 그의 앨범을 발매하고, SST 레코드에서 여러 하드코어 펑크 밴드들을 키워냈다. 이러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지닌 블랙 플래그의 Damaged가 하드코어 펑크 신의 대표작으로 뽑히며, 워낙 과격하고 단순한 음악을 했기에 비평적으로 좋은 소리를 듣진 못했다. 허나 하드코어 펑크에서 출발하여 그 음악색이 변화한 일부 하드코어 펑크 밴드들이 초기 얼터너티브 록의 걸작을 내놓았으며, 하드코어 펑크에 영향을 받아 탄생할 포스트 하드코어 음악 역시 얼터너티브 록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후술할 얼터너티브 록의 선대 장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6.2. 헤비 메탈
모터헤드 'Ace of Spades' (1980) | 주다스 프리스트 'Breaking the Law' (1980) | |
아이언 메이든 'The Trooper' (1982) | 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1986) |
펑크 록과 뉴 웨이브의 열풍으로 록의 정체성은 더 다각화되었으며 본래 록 음악이 가지고 있던 음악적 단일성은 다소 희석되었다. 비록 그 기원은 흑인 음악에서 시작된 록이었지만 어느새 백인 메인스트림 음악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록 음악의 안티태제로 흑인 메인스트림 음악인 R&B, 즉 펑크(Funk), 소울 음악, 디스코 등이 6~70년대에 대중음악계의 주류로 자리잡았다.[40] 특히나 미국 흑인 및 게이 클럽 문화에서 출발한 디스코의 유행은 선풍적이었고, 이에 많은 록 팬들은 록 음악, 특히나 하드 락을 필두로 한 '백인스럽고 남성적인' 록 음악의 위치는 흔들리고 있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백인 남성 록 팬들의 불안감은 시카고 화이트삭스 홈구장인 코미스키 파크에서 관객들이 디스코 음반들을 깨부수고 불태운 디스코 폭파의 밤(1979)이라는 일련의 사건으로 분출된다. 이는 단순히 음악사를 넘어 흑인, 라티노, 여성, 성소수자들의 문화에 위협받는다고 느낀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이 느낀 위기감과 피해의식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평가되며, 디스코 밴드 시크(Chic)의 기타리스트 나일 로저스는 "나치의 서적 소각 같은 짓", 음악 평론가 데이브 마쉬는 "록 음악이 인종청소 당할 것이라는 편집증적인 판타지"라고 비판했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냥 디스코에 질렸을 뿐이라는 인터뷰도 많다. 대중의 지루함과 똘끼넘치는 방송인의 콜라보일 뿐이라 평가절하하는 의견도 있고, 자세한 것은 디스코 폭파의 밤 참고.
그래서일까, 80년대에 들어서서는 메인스트림 록 시장은 하드 록으로부터 파생된 헤비메탈에 의해 점령된다. 헤비 메탈 음악은 그 기원은 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특히 블랙 사바스가 지금의 정형화된 메탈 음악의 원형을 최초로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70년대를 거치며 발전하던 하드 록/초기 헤비메탈은 펑크 록의 등장 이후 이들의 공격성과 속도감을 결합한 NWOBHM[41] 운동으로 발전하여 모터헤드, 주다스 프리스트, 아이언 메이든과 같은 영국 밴드들이 인기를 끌었고, 80년대 초중반에 들어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드코어 펑크의 영향을 받아 기존 헤비메탈 음악보다 더욱더 공격성과 속도감이 강화된 익스트림 메탈이 나타났다. 특히나 메탈리카를 비롯한 쓰래시 메탈 밴드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8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는 무게감 있는 메탈의 기타 드라이브와 대중적인 멜로디가 결합된 글램 메탈 밴드들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6.3. 80년대 록의 판도 변화
퀸 'Bohemian Rhapsody' (1975) | 퀸 'Another One Bites the Dust' (1980) | |
본 조비 'Livin' on a Prayer' (1986) | 건스 앤 로지스 'Sweet Child O' Mine' (1987) |
70~80년대를 관통하는 밴드로는 퀸이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 Another One Bites the Dust, Don't Stop Me Now 등 수없이 많은 히트곡과 프레디 머큐리의 빼어난 가창 능력은 록의 역사에 있어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분기점임이 틀림이 없다. 당대와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대중들과 음악가들에게 회자되며 록이라는 장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아티스트로 손꼽히지만, 다양한 장르를 받아들이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기에 이들을 록의 음악적 흐름에 끼워넣기에는 다소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뮤직 비디오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비틀즈, 데이비드 보위, 핑크 플로이드같은 아티스트들의 뮤비를 거쳐 단편 명작 수준으로 수준을 끌어올린 것도 이 시대 퀸의 Bohemian Rhapsody다. 이를 위해 일류 영상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큰 제작비와 세심한 공을 들여 제작하였고, 당대의 첨단적인 촬영 기법과 특수효과가 총동원되었다. 후처리를 전혀 거치지 않고 촬영 과정부터 특수 효과를 적용했다는 점도 유명하다.
1970년대 중반경부터 당시 두 인기 밴드였던 퀸과 ABBA에 의해서 뮤직 비디오가 더욱 보편화됐다. 퀸의 Bohemian Rhapsody이 당시로서는 블록버스터급 뮤직 비디오여서 많은 관심을 모았고, 그리고 퀸과 동시대의 인기 밴드였던 ABBA는 1974년경부터 모든 싱글 발표 곡들에 그 각 가사들을 단편극처럼 영상 스토리화하거나 댄스풍 영상으로 만든 뮤직 비디오를 촬영해서 전 세계 TV에 방영시켜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고, 이는 이후 다른 팝 뮤지션들에게도 신곡 발표때마다 뮤비를 제작하는 관행을 널리 유행시키는 계기가 된다.
특히 후술할 1970년대부터, 50년대 ~ 60년대를 거치며 발전한 무대 매너, 퍼포먼스 등과 산업의 발달으로 공연 비즈니스의 발전과, 서구 선진국들 뿐 아니라 개발도상국 등 세계의 여러 국가들에도 가정용 TV가 대중들에게 한창 보급되던 시기라서 세계의 대중음악팬들이 "단지 듣는 것 뿐 아니라 보면서 즐기는 음악"에 대한 욕구와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이다.
카세트 테이프가 점차 대중화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전의 주 음반 매체였던 LP는 부피가 크고, 재생 매체마다 음질차가 큰 등 여러 문제가 있었기에 개발되었다. 카세트 테이프는 1980~1990년대의 대중 음악 시장의 급속 팽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LP는 가격도 비쌌고 부피가 커서 재생에 한계가 있었는데, 카세트 테이프가 등장하면서 수천 원 전후의 가격으로 LP보다 엄청나게 작은 크기에 좋은 휴대성까지 갖춘 덕분에 음반 시장 발달에 크나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데이비드 보위가 무대에 각종 연출 방법과 세트 기법을 대중음악 공연에 끌어와 도입시켰으며, 각종 분장과 의상 등으로 무대에서의 비주얼적인 모습을 강조한다. 그동안 믹 재거 같은 일부 록 밴드의 프론트맨이나, 몇몇 뮤지션들만 행동했던 적극적은 무대 매너를, 보위를 포함한 각종 록 아티스트들이 적극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기 시작하는 1970년대는 공연 비즈니스가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 시대다.
그리고 레드 제플린과 롤링 스톤스가 아레나 록 형성에 큰 영향을 줬다. 레드 제플린의 시대 이전까지 록 밴드는 콘서트장에서 30분~1시간 정도만 잠깐 노래를 부르고 나가는게 관례였고 비틀즈의 부도칸 공연이나 셰이 스타디움 공연도 이런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런 비틀즈 등의 유산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연 시간을 최소 2시간 이상으로 확 늘리고, 화려한 무대 의상과 조명을 통해 후대 글램 메탈 밴드들 뿐만 아니라 대중 음악 전반의 무대 세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퍼포먼스 측면에서는 앞서 언급한 데이비드 보위부터, 롤링 스톤즈의 믹 재거같은 관객 친화적이고, 활동적인 프론트맨을 보유한 밴드들이 크게 이끌었다. 앞서 언급한 믹 재거,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 이기 팝, 퀸의 프레디 머큐리, 섹스 피스톨즈의 시드 비셔스 등이 있었으며, 이는 다음 시대에도 이어지며 발전한다.
80년대에 들어서, 대중음악사에서 록은 헤비메탈 계열의 록이 큰 인기를 얻으며 매너리즘의 길로 빠져들었다. 과거 재즈와 스탠다드 팝의 시대를 뚫고 서프 음악을 제치며 비틀즈,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등 거대한 흐름을 제시한 뮤지션과 함께 날아올랐지만, 점점 혁신에 비하여 더 빠르고 강한 연주만을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록 밴드들 속에서 1980년대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흐름을 맞이하였다.
그것은 MTV의 개막과 힙합과 마이클 잭슨의 등장이었는데, 70년대 최후반에 디스코가 폭락하고, 포스트 디스코에 1980년대 초 들어 인기를 끌기 시작한 뉴웨이브, 신스 팝 등이 결합하며 새로운 형태의 댄스 음악이 등장했는데, 그게 바로 댄스 팝이다. 댄스 팝이 등장하며 다양한 팝 스타들이 출현했다. 또한, MTV의 개막으로 새로운 흐름이 시작한다. 괜히 MTV 세대라는 시사용어가 나온게 아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음악을 듣는 시대에서 보는 시대로 만든 전환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흐름에 마이클 잭슨은 거대한 록밴드의 수입을 거두며 1980년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마이클 잭슨은 대중음악사 최초의 흑인 슈퍼스타로, 그 폭발적인 인기로 아직 대중음악계에는 남아있던 흑백장벽을 무너뜨린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백인 음악가들이 장악하여 '백인 음악'으로 인식되던 록 음악에 반해, 70년대 후반기 디스코 시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침체돼있던 R&B와 소울 음악, 펑크 등의 흑인 음악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힙합은 흑인들의 거리 음악으로 시작해 록 음악의 영역이었던 공격적인 사운드와 록의 정신이라고 일컫는 '자유', '저항', '퇴폐' 같은 시대정신의 대변이라는 장점을 빼앗으며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힙합이란 말은 '엉덩이를 흔들다(hip hopping 혹은 hopping hip)'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Keef Cowboy라는 MC가 "Hip-Hop"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친구가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Keef Cowboy가 친구를 놀리면서 '그럼 훈련소에서 행군할 때 "hip-hop"하면서 구령을 외치겠네?'라며 놀렸다. 일종의 군대식 발음과 엉덩이(hip)을 이용한 말장난인 셈. 그걸 무대에서 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이 그 소리를 응용하고 샘플링하면서 랩과 브레이킹 문화를 힙합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1981년, 미국의 뉴웨이브 밴드 블론디가 발표한 싱글 "Rapture"는 빌보드 핫 100 1위를 기록하는 영광을 안았는데, 이 곡은 미국 힙합 역사에서도 아주 중요한 곡이다. 왜냐하면 이 곡이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한 최초의 랩 음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점점 하위 문화에서 시작한 힙합은 주류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Run-D.M.C., Fresh Prince & Jazzy Jeff, LL Cool J, 비스티 보이즈, 퍼블릭 에너미를 필두로 메이저로 급부상하여 어엿한 대중음악의 일부로 자리매김한다. 이 외에도 슬릭 릭, 쿨 모 디, 라킴, 빅 대디 케인 등등 전설적인 래퍼들이 힙합을 크게 발전시켰다. 새롭게 태동하던 힙합의 등장, 흑인 음악으로 R&B와 소울 음악, 펑크가 떠오르고, 70년대를 이어서 한층 더 적극적이게 변화한 퍼포먼스, 1980년대 들어서 널리 퍼지게 된 신디사이저를 비롯한 신문물의 사운드[42], 대중음악의 새로운 방향이 제시된 시기다. 당시 신세대들은 당연히 기존의 록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새로운 음악들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뮤직 비디오가 연출 기법이 더 발전되어 한 편의 짧은 극을 보는 정도로 발전하고, 이전 시대의 흐름을 이어 각종 무대 장치를 동원하여 음악 산업에서 비주얼 시장이 이전보다 더욱 커진 것도 1980년대 부터다. 나아가 과거 비틀즈의 성공에 뒤이어 수많은 록 밴드들이 등장하였듯이, 힙합의 전설들의 등장과 주류화, 마이클 잭슨, 마돈나, 프린스, 엘튼 존, 조지 마이클과 같은 새로운 스타들이 음악 차트를 점령하기 시작하니, 기성의 록 밴드들은 주요 자리를 록 밴드를 대체한 팝/힙합 뮤지션들에게 하나둘씩 자리를 내주기 시작한다. 이 시대부터 음악 시장의 정점을 꾸준히 차지해 왔던 록 음악이 조금씩 하락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본 조비, 건스 앤 로지스, U2, 머틀리 크루, 저니, 서바이버 등의 여러 밴드들이 80년대부터 활동했지만, 지금 2020년대에 결과적으로 보면 음악계의 주요 장르를 바꾸지는 못 했다.
한편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탈냉전 시대에는 소련이나 동독 등 공산권에도 록 음악이 유행하였으며 이러한 음악이 서구권으로 역수입되기도 하였다. 차갑고 냉소적인 가사로 소련 말기의 사회 불안정을 비판한 빅토르 최는 그러한 흐름의 첨병이었다.
7.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의 전성기
7.1. 얼터너티브 록
픽시즈 'Where Is My Mind?' (1988) | 너바나 'Lithium' (1991) |
라디오헤드 'Paranoid Android' (1997) | 스매싱 펌킨스 '1979' (1995) |
잉베이 말름스틴의 등장 이후 헤비메탈씬에서는 클래식의 작법이 거의 완전하게 메인스트림에도 녹아들고, 그 영향을 받은 하위 장르들인 파워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등 스케일이 다른 록 사운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등장한 고민이 갈수록 진입 장벽이 높아지는 록 음악에 대한 문제였다. 더이상 1960~70년대 개러지 록 시대처럼 음악에 대한 열정만 가지고 사람들이 모여서 밴드를 만들고 음악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점점 고도의 테크닉과 정확도, 조화에 신경쓰다보니 마치 현대의 클래식 음악처럼 점점 '록 음악은 하는게 아니라 듣는 것이다'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면 아주 수준높은 실력의 밴드만이 클래식 오케스트라단처럼 살아남고 나머지는 그나마 언더그라운드에서 진입장벽 낮은 펑크같은 장르만 살아남는 정도의 극단적인 분열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얼터너티브는 바로 그런 록 씬의 불안을 대체하고자 일어난 움직임이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메인스트림에서의 헤비메탈·글램메탈은 1991년 너바나의 앨범인 Nevermind의 흥행으로 인해 몰락하게 되고, 너바나를 필두로 한 얼터너티브 록이 급부상한다. 얼터너티브(Alternative)는 '대안'이라는 뜻의 영단어로 당시 매너리즘에 빠져 그 인기를 잃어가던 헤비메탈 음악의 대안적 음악이라는 뜻에서 명명되었다. 얼터너티브라는 명칭은 90년대에 새로운 음악의 등장과 함께 고안되었으나, 얼터너티브 록의 음악적 기원은 8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얼터너티브의 부흥 이후 많은 밴드들이 얼터너티브의 선조로 재평가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초기 얼터너티브 록은 70년대 후반 등장한 포스트 펑크가 80년대에 들어서서 점차 발전한 형태로, 80년대 초 후기 포스트 펑크/초기 얼터너티브 록 음악들은 그 장르적 특성이 혼재되어 있어 많은 80년대 밴드들이 포스트 펑크 밴드이자 얼터너티브 록으로 동시에 분류된다. 80년대 메인스트림 시장을 헤비메탈이 점령한 기간 동안, 많은 포스트 펑크/초기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은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며 로컬 씬에서 입지를 다졌다. 이러한 초기 얼터너티브 음악은 대학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많이 퍼져나갔기 때문에 칼리지 록이라 부르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80년대 초, R.E.M.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면서 많은 얼터너티브/인디 록 밴드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하드코어 펑크 밴드 출발한 허스커 듀, 미니트맨, 리플레이스먼츠는 하드코어 펑크에 멜로딕한 요소가 가미된 음악을 하여 얼터너티브의 초기 주자로 탈바꿈해 유명해졌다. 영국에서는 80년대 초 쟁글 팝 계열의 음악을 들려준 더 스미스가 큰 인기를 끌었고, 80년대 후반에 더 큐어의 고딕 록과 스톤 로지스의 매드체스터 장르가 인기를 끌었다. 또한 아일랜드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U2는 The Joshua Tree(1987)가 그래미 상을 석권하면서 세계적인 얼터너티브 록 주자로 떠올랐다.
특히나 초기 얼터너티브 록에서 두드러지는 흐름 중 하나는 바로 노이즈에 대한 탐구로, 80년대 초중반부터 시끄러운 기타 노이즈를 음악적 요소로 가미한 밴드들이 등장했다. 영국의 지저스 앤 메리 체인은 Psychocandy(1985)에서 달콤한 멜로디와 노이즈 피드백을 결합한 음악을 들려주었고, 노이즈 낀 전위 음악을 구사하던 소닉 유스는 Daydream Nation(1988)에서 변칙적인 기타 튜닝과 기타 노이즈를 팝 멜로디에 성공적으로 결합시킴으로서 노이즈 음악을 팝, 록의 일부로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픽시스는 노이즈 낀 기타 사운드와 광적인 보컬을 아름다운 팝 멜로디에 결합시킨 역작 Doolittle(1989)를 발매했다. 이러한 노이즈 팝/록의 시도는 영국에서는 슈게이징 장르의 발전으로, 미국에서는 그런지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미국의 하드코어 펑크 신은 이러한 노이즈 록의 흐름을 받아들여 포스트 하드코어로 발전했으며, 빅 블랙, 푸가지와 같은 포스트 하드코어 밴드들 역시 얼터너티브 음악에 영향을 끼쳤다.
80년대 메인스트림 헤비메탈의 움직임과는 별개로 언더그라운드/인디를 중심으로 찬찬히 진행되어서 오던 얼터너티브의 움직임은 결국에 너바나의 등장과 함께 폭발하게 된 것이다.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 역시 R.E.M., 픽시즈, 소닉 유스와 같은 밴드들의 영향력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90년대에 들어서서 얼터너티브 록은 수많은 하위 장르를 낳으며 발전해 나갔다. 주된 흐름으로는 90년대 초 미국의 그런지 열풍, 1993~97년 간의 브릿팝 열풍, 그리고 1990년대 중후반에 등장하여 2000년대로 이어지는 포스트 그런지·뉴메탈·얼터너티브 메탈과 포스트 브릿팝 정도를 꼽아볼 수 있으며, 이 외에도 슈게이징, 인더스트리얼 록, 팝 펑크와 같은 다양한 장르의 밴드들이 등장했다.
그런지는 너바나가 소속되어 있던 장르로 얼터너터브 부흥과 함께 떠오른 장르라고 봐도 무방하며, 90년대 초의 미국 록 신을 지배했던 장르이다. 시애틀의 로컬 록 신에서 발전한 음악으로, 너바나, 펄 잼, 앨리스 인 체인스, 사운드가든 네 밴드가 대표적인 밴드로 손꼽힌다. 이들의 음악색은 펑크, 하드 록, 메탈 등 다양했으나 디스토션과 노이즈가 잔뜩 걸린 기타와 90년대를 관통하는 젊은이들의 '루저' 정서를 대변한 우울한 가사가 장르적 특징으로 삼았다. 그런지 열풍이 지나간 뒤에는 이에 영향을 받은 포스트 그런지가 다시금 유행을 이어나갔다.
7.2. 브릿팝
블러 'For Tomorrow' (1993) | 스웨이드 'Beautiful Ones' (1996) |
오아시스 'Wonderwall' (1995) | 펄프 'Common People' (1995) |
미국이 너바나를 필두로 한 그런지 열풍으로 들썩이는 동안, 영국에서는 전혀 다른 형태로 록의 재구성이 일어났다. 이러한 1990년대 영국 록의 주류를 브릿팝이라고 부른다. 브릿팝은 미국의 그런지와 마찬가지로 얼터너티브 록으로 분류되기는 한다. 그러나 묘하게 유행한 시기만 같았을 뿐, 영국의 브릿팝 열풍은 미국의 그런지와 거의 개별적으로 일어난 움직임이었다.
90년대 초 미국의 그런지 열풍이 휩쓸었을 때에, 90년대 중반 영국에서는 브릿팝이라는 음악이 유행했다. 이 음악은 60~70년대의 비틀즈와 킹크스를 비롯한 록 음악과, 파워 팝 같은 기타 팝 음악을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가까이는 80년대 영국 인디 밴드인 더 스미스와 스톤 로지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장르적 특징으로는 기타와 멜로디 중심의 편곡과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꼽을 수 있다. 오아시스, 블러, 펄프, 스웨이드 네 밴드가 브릿팝의 대표 주자로 뽑힌다. 브릿팝은 90년대 초 유행하던 미국의 록 음악의 대항마로서 영국 매스미디어의 의해 발굴되어 큰 푸쉬를 받았으며, 브릿팝 전쟁과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낳았다.
밝고 경쾌한 브릿팝 음악은 오아시스의 Definitely Maybe·(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같은 명반으로 약 4-5년간의 기간동안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 후 1997년에 브릿팝과는 대비되는 우울한 분위기의 두 걸작, 버브의 Urban Hymns와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의 등장으로 이들의 우울한 분위기를 계승한 새로운 록 앨범들이 나오게 되는데 이들을 한데 묶어서 포스트 브릿팝이라는 말을 쓴다. 콜드플레이, 뮤즈, 트래비스를 비롯한 초기 포스트 브릿팝 밴드들은 버브와 라디오헤드의 영향을 받아 이들과 유사한 음악을 들려주었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어 자기만의 음악색을 찾아가면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다. 90년대 영국 록 음악의 게임 체인저가 된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는 현재는 록 음악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명반 중 하나로 손꼽힌다.
7.3. 다양한 90년대 서브장르의 등장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Sometimes' (1991) | 슬로우다이브 'When the Sun Hits' (1993) |
그린 데이 'Basket Case' (1994) | 벡 'Loser' (1994) |
슈게이징 음악은 8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는 노이즈에 대한 탐구에서 큰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장르로, 층층히 쌓아올린 기타 노이즈에 서정적인 보컬 멜로디라는 이질적 요소를 결합한 장르이다. 시끄러운 기타 노이즈와 대비되는 몽환적인 분위기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크리에이션 레코드 소속의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슬로우다이브, 라이드 세 밴드가 슈게이징의 대표 주자이며,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loveless(1991)가 슈게이징 장르의 대표작으로 손 꼽힌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loveless는 장르의 대표작을 넘어서서 90년대 록 음악을 대표하는 명반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 슈게이징은 90년대 초 등장해 전성기를 맞이한 뒤 이후로는 침잠했으나, 2010년대 들어서 앞서 언급한 세 밴드가 다시 새로운 앨범을 발매함에 따라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인더스트리얼 록은 80년대에 등장한 실험적 장르인 인더스트리얼에 영향을 받아 기계음과 메탈의 헤비한 기타 사운드를 결합한 음악으로, 나인 인치 네일스의 성공으로 메이저 장르로 등극했다. 이후 나인 인치 네일스의 트렌트 레즈너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밴드 마릴린 맨슨이 인기를 끌었다. 대표작으론 나인 인치 네일스의 The Downward Spiral(1994)이 있다.
팝 펑크는 대중적인 멜로디를 강조하며 재등장한 펑크 록의 한 갈래로, 하드코어 펑크 씬을 통해 펑크 록의 전통을 유지하던 미국에서 출발하였다. 사회 비판과 저항이 중심으로 하던 기존의 공격적인 펑크 록과 하드코어 펑크와는 달리 90년대를 관통하는 '루저' 정서를 바탕으로 개인적인 정서를 대중적인 멜로디와 코드 진행을 통해 표현한 펑크 록이다. 오프스프링의 Smash와 그린 데이의 Dookie는 이러한 팝 펑크의 시초격인 앨범으로 이들은 펑크 록을 다시금 메인스트림으로 돌려놓았고, 이후 sum41, blink-182와 같은 후발주자들이 뒤따랐다. 당시 폐쇄적인 하드코어 펑크 신에서는 이들을 배신자라며 비난했으나,[43] 그러한 비난과는 별개로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면서 펑크 록의 대표주자들로 떠오르며 2000년대 후반까지 명맥을 이어갔다.
또한, 얼터너티브 록의 시대를 맞이하여 다양한 장르의 록 음악이 쏟아져 나오자, 이러한 음악들을 경계없이 뒤섞은 크로스오버 음악들도 여럿 등장했다. 90년대 초 그런지 음악의 유행과 함께 인기를 끈 밴드 스매싱 펌킨스는 드림 팝, 프로그레시브 록, 사이키델릭, 고딕 록 등을 여러 록 음악의 요소들을 결합한 음악을 들려주었으며, 벡은 록의 경계를 넘어서서 힙합과 컨트리 뮤직와 같은 음악까지 뒤섞은 음악으로 주목을 받았다. 또한 위저는 1994년 데뷔작인 Weezer(Blue Album)을 필두로 파워 팝 장르의 르네상스를 이끌었고, 두 번째 앨범은 Pinkerton은 발매 당시 혹평을 받았으나 세월이 흘러 재평가되어 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의 대표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90년대에 유행했지만, 메인스트림의 얼터너티브 록 조류와는 이질적인 흐름으로 포스트 록 장르의 등장이 있었다.[44] 포스트 록은 앰비언트, 프리 재즈, 크라우트록, 최소주의 클래식 음악과 같이 인스트루멘탈의 역할이 강조된 실험적인 음악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탄생한 록의 흐름으로, 영국 밴드 톡 톡의 Laughing Stock(1991)과 미국 밴드 슬린트의 Spiderland(1991)가 발매된 1991년이 포스트 록의 시작점으로 거론된다. 포스트 록은 멜로디 중심의 기존 록 음악과는 달리 악기의 소리와 질감 그 자체를 강조하는 음악을 추구했다. 때문에 보컬은 중요시되지 않으며, 곡의 길이는 길지만 반복적인 모티브를 중점으로 이루어진 최소주의적 음악들이 많다. 91년의 등장 이후 미국에서는 토터즈의 쓰릴 쟈키 레이블을 중심 하나의 장르로 발전해 이어져왔고, 영국에서는 슈게이징 장르와 결합하여 성장했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에는 시규어 로스와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가 Ágætis byrjun(1999)과 Lift Your Skinny Fists Like Antennas to Heaven(2000)의 발매로 장르 내에서 주목을 받았다.
7.4. 힙합 음악의 영향과 랩 메탈
Run-D.M.C.와 에어로스미스 'Walk This Way’ (1985) |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Killing In The Name' (1991) |
림프 비즈킷 'Rollin'' (2003) | 린킨 파크 'Faint' (2003) |
80년대 후반부터 메인스트림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힙합 음악은 등장 초기부터 이러한 얼터너티브 록 음악들과의 결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Run-D.M.C., 비스티 보이즈와 같은 초기 힙합 주자들은 록 음악을 샘플링하며 얼터너티브 힙합을 구사했으며, 90년대 초에는 헤비메탈 음악과 힙합의 랩을 결합한 랩 메탈 음악들이 등장했다.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은 랩과 펑크(funk)를 결합한 음악적 특징 및 정치적인 가사로 인기를 끌었다. 그외 90년대 후반으로는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낮은 튜닝의 거친 기타와 턴테이블 등의 요소를 가미한 뉴 메탈이 등장했다. 림프 비즈킷, 콘, 데프톤즈와 같은 뉴 메탈 초창기 밴드들은 이러한 뉴 메탈 씬을 열어주었고 이후 많은 뉴 메탈 밴드들은 높은 인기를 끌었다.
8. 2000년대 ~ 2010년대: 침체기
스트록스 'Reptillia' (2003) | 프란츠 퍼디난드 'Take Me Out' (2004) |
LCD 사운드시스템 'All My Friends' (2007) | 콜드플레이 'Viva la Vida' (2008) |
폴 아웃 보이 'The Phoenix' (2013) | 이매진 드래곤스 'Believer' (2017) |
2000년대에는 여전히 얼터너티브 록, 얼터너티브 메탈, 뉴 메탈, 포스트 그런지, 포스트 하드코어, 모던 록 밴드들이 인기를 끌었으며, 청소년 계층을 중심으로 이모 문화가 유행하면서 emo 장르 역시 유행했다.
또한 새로운 흐름 중 하나로 개러지 록 리바이벌이 등장했다. 개러지 록 리바이벌, 혹은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이라 불리는 이 흐름은 좀 더 기타 중심의 기본적인 록 음악을 구사하는 밴드들로, 60-70년대 개러지 록/뉴 웨이브/포스트 펑크와 같은 고전적인 음악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음악을 보여주었다. 2001년 스트록스의 Is This It과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White Blood Cells의 성공으로 메이저로 떠올랐으며, 더 킬러스, 인터폴, 프란츠 퍼디난드, 리버틴즈, 악틱 몽키스, 더 블랙 키스와 같은 후발 주자들이 뒤따랐다. 개러지 록 리바이벌은 2000년대 후반이 되어서 대부분의 밴드들이 상업적으로 실패하며 리바이벌 열풍은 사그라들었다.
2000년대에 중요한 음악적 특징 중 하나는 록 음악이 인디와 메이저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록 음악의 인디 또한 매우 소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인디 록 흐름의 대표적인 밴드로는 Funeral(2004)로 명성을 얻은 아케이드 파이어가 있으며, 이를 비롯한 많은 인디 밴드들이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인터넷을 통해서 소비되었다. 또한 2000년대에는 디지털 기기의 발전으로 일렉트로니카 음악이 발전하면서 록과의 결합을 꾀하는 시도 역시 자주 일어났다. 프로디지의 The Fat of the Land(1997),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1997)과 Kid A(2000)는 이러한 시도의 시발점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LCD 사운드시스템이나 The XX와 같이 록 음악 인스트루멘탈과 일렉트로니카를 결합한 음악들을 시도하는 밴드들이 나타났다.
201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록 음악은 얼터너티브 메탈 붐과 개러지 록 리바이벌을 끝으로 이렇다 할 조류를 형성하지 못하며 팝 음악의 메인스트림의 바깥으로 밀려나간 상태이다. 애초에 폭발적으로 장르 분화가 진행되었던 20세기와 달리 21세기에 새로 등장한 장르는 누 게이즈, 블랙게이즈 정도로 매우 적으며 메이저한 장르도 아니다. 많은 인디 록 밴드들이 여전히 새로운 앨범을 내놓으며 명맥을 이어나가곤 있으나, 새로운 흐름으로는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 이매진 드래곤스나 폴 아웃 보이, 콜드플레이, 마룬 5 등의 아티스트들이 시도하는 일렉트로닉 락으로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도 아직 미미한 편이다. 당장 2010년대 초반의 빌보드 차트만 봐도 힙합, R&B가 압도적인 대세였으며 2010년대 이후로 락 장르의 음악은 찾기가 어려운 편.[45]
9. 2020년대: 복고 유행과 뉴 메탈의 재조명
힙합이 강세를 띄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로 록은 긴 침체를 겪었다. 그러나 2020년대부터 2000년대 펑크 씬에서 유행했던 emo 장르에 대한 힙합 씬에서의 관심이 닿아 Lil Peep, Lil Uzi Vert를 필두로 트랩 비트에 얼터너티브 록 음악을 샘플링한 장르가 이모 힙합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였는데, 이의 연장선으로 MGK와 Yungblud이 펑크 록과 싱잉랩을 섞은 <I Think I'm Okay>라는 곡을 발매했다. 이 곡은 록 씬이 아닌 힙합씬에서 "신선한 스타일"의 음악으로써 유행하고 있는 추세다.[46] 흥미로운 점은, 대중음악계에서 줄곧 주류를 차지하던 록 음악의 자리를 대체시킨 주인공인 힙합 씬에서 록이 다시금 주목받을 수 있도록 새 생명력을 불어넣어주고 있다는 것이다.한편으론 록 음악 자체로서도 20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복고주의 흐름의 수혜를 받기 시작했다. 2020년대 초반에는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긴 했어도 2000년대에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세대를 중심으로 팝 펑크 리바이벌이 유행하여 현 청소년층에서도 나름대로 성과를 냈다.
2020년대 중반부터는 힙합에 익숙한 Z세대를 중심으로 이들의 유년기에 유행했던 뉴 메탈 장르가 재평가받아 해당 장르를 중심으로 밴드 음악에 대한 관심이 활성화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틱톡의 영향력으로 데프톤즈와 같은 뉴 메탈 밴드들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재유행했으며, 비슷한 시기 림프 비즈킷이나 린킨 파크 같은 대형 뉴 메탈 밴드들이 활동을 재개하는 시류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2020년대에 들어서 대중적 성과와는 관계 없이 음악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거두는 락 밴드들이 여럿 등장하고 있다. Black Midi가 Hellfire, Black Country, New Road가 Ants from Up There 등의 명반들을 발매한 것이 그 예이다. 해당 작품들은 RYM 등 여러 음악 커뮤니티에서 그해 최고의 앨범들 중 하나로 인정받으며, 락의 (음악적)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받는 중이다.
일본에서는 세계 시류와 무관하게 꾸준히 강세를 보이는 장르인데, 세계적 복고 흐름으로 인해 록 역시 수혜를 받아 사실상 일본 록이 전세계 록 음악의 첨병으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특유의 음악 생태계로 인해 록 음악이 죽을래도 절대 죽을수가 없는 구조라 미래가 밝은 편이다.
10. 록은 왜 영향력을 잃었는가?
2010년대 이후 2020년대에 들어서는 음악사학자, 평론가, 록 매니아들을 필두로 "록 음악은 이젠 생명력이 다해서 거의 죽은 상태에 도달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클래식 음악이나 재즈 음악도 계속 끝없이 발전한게 아니라 전성기 때 폭발적으로 발전했다가 나올만한게 다 나와서 수명이 다 한 뒤로는 계속 정체되듯, 록 음악도 마찬가지라는 견해다. 많은 이들은 그간 록 음악이 너무 빠르게 발전해서 이젠 거의 모든 방법론이 이미 다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장르의 침체는 현대의 평가로도 이어져서, 오늘날에는 과거의 록 명반들도 대중음악 명반 순위에서 가차없이 강등당하는 등, 불과 수 십년 전만 해도 대중음악계에서 상업성과 평론 분야 모두를 독차지하던 록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대중과 평론가를 막론하고 자리잡혀가고 있다.전 세계가 인정하는 독보적인 음악적 성취와 대중적 인기를 누린 아이콘을 시대별로 간단히 추려보면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엘튼 존, 마이클 잭슨 등이 각각 1940~80년대까지 당대의 대체불가의 인기를 누리며 시대를 관통하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는데, [47] 그중에서 볼드체 처리한 팀이 록 뮤지션이다. 당대 최고의 인기와 평가를 받은 뮤지션 중 상당수가 록 장르에서 활동했을 정도로 생명력이 넘쳤고 대중의 주목도 역시 높았다.
너바나로 대표되던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얼터너티브 운동이 90년대·2000년대 컨템퍼러리 R&B, 힙합과 치열하게 경쟁하다가[48][49][50][51][52][53] 2010년대부터 힙합과 알앤비가 각종 차트와 판매량 면에서 음악시장을 지배했고, 심지어 2010년대 이후에 탄생한 밴드 중 시대를 호령하는 원톱 아이콘으로 뽑을 만한 밴드 자체가 없다.
록 음악과 블랙 뮤직 계통의 헤게모니 대립이 팽팽하던 1990년대와 2000년대는 과도기로 치부하더라도, 명백히 2010년대는 청소년기에 어셔, 에미넴과 칸예 웨스트, 비욘세와 리아나, 그리고 드레이크와 더 위켄드 등으로 대표되는, 분명히 힙합과 알앤비, 소울 음악과, 더 나아가 일렉트로니카의 영향력을 받은 시대이며 이 시기의 대중음악들은 비틀즈, 밥 딜런, 데이비드 보위 등 이런 전범위적인 음악가들은 제외한 '한정적인' 백인 록 음악가의 영향보다는 상대적으로 레이 찰스, 마빈 게이, 아레사 프랭클린, 제임스 브라운, 스티비 원더 같은 흑인 음악의 전설들과 마이클 잭슨, 프린스, 휘트니 휴스턴, 자넷 잭슨, 머라이어 캐리, 투팍 등의 비교적 최근의 흑인 음악가들, 그리고 크라프트베르크, 탠저린 드림, 장 미셸 자르 등의 일렉트로닉 뮤직의 거장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그리고 이는 2020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며 오히려 세부 장르들이 끝없이 탄생하고 진화하면서 더 가속화되는 추세다. 이런 변화가 워낙 빠르다 보니 힙합 음악도 점점 정체가 시작되면서 2024년 현재는 힙합 음악조차 전성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드는 것이 가시화된 지표로 증명될 정도다.
많은 음악 사학자, 음악 평론가, 그리고 음악가들은 록 음악의 틀 안에선 더 이상의 혁신적인 흐름이 등장하기는 매우 힘들어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입을 모은다. 물론 록은 음악적 특성상 폭이 아주 넓은 편이기 때문에 벌써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은 성급한 진단이라는 반론도 있지만 음악적 폭이 넓다는 특성은 재즈도 마찬가지였다. 재즈의 경우 1960년대에 들어 다양한 재즈 음악가들이 예술적 진보를 추구하며 아방가르드 재즈, 프리 재즈, 퓨전 재즈 등으로 옮겨가다가 결국 심하게 난해해졌고, R&B, 소울 음악, 펑크(Funk), 록, 힙합 등의 새로운 장르들의 영향을 짙게 받으며 '대중음악'으로서의 순수 재즈의 생명력은 크게 잃었다. 2020년대에 들어선 현재 재즈는 일부 매니아층이 존재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흘러간 장르 취급을 받는다. 록 음악의 경우도 타 장르에 양념처럼 곁들이는 콜라보를 제외하곤 록 자체가 다시 생명력을 얻는 경향은 확실히 덜해졌으며, 역사를 돌아보았을 때 결국 재즈와 같은 운명임이 꽤나 자명해보인다.
10.1. 높은 진입 장벽
이러한 록 음악의 몰락에 대한 이유로는 첫 번째, 기술의 발전과 결부시켜 설명하는 이론이 있다. 록 음악을 제대로 하는 것은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밴드를 만드려고 한다면 기타, 베이스, 드럼 등의 악기류 몇가지와 앰프 및 이펙터 장비는 반드시 필요하다. 거기에 마음이 맞는 멤버를 포지션 별로 구해야 하는 것 또한 난관이다. 가뜩이나 없는 사람들 중에서도 유사한 장르를 좋아하는 멤버를 구해야 마찰이 덜 심한데, 본 문서에 서술된 종류만 봐도 알 수 있듯 록의 장르는 셀 수도 없이 다양해서 취향 차이가 갈리기 쉽다. 퀸 같은 반례가 있긴 하나 음악 성향 차이로 해체한 밴드는 역사적으로 많다. 당장 비틀즈부터 해체된 여러 복합적인 사유중 하나가 바로 음악적 성향 차이였다. 록밴드는 힙합과는 달리 보컬, 베이스, 드럼, 기타중 하나가 없으면 굴러가지 않는다. 악기 연주 하나는 세계 최강이었던 레드 제플린조차 드러머의 사후 바로 해체되어 버렸다.이러한 기나긴 과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어렵사리 밴드를 구성한다고 해도 합주나 곡 작업을 해야한다. 이 또한 다른 음악에 비해 각 파트들의 합이 우선시 되어야 하기에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록 음악을 구사하기 위한 록 밴드는 기본적으로 보컬, 리드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라는 큰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전자 음악이나 전자 음악 기반의 힙합이 수십 수백 스템을 겹쳐 매우 복잡하고 광대한 사운드를 구사할 수 있는 것에 비해 매우 불리하며, 마음 먹고 트윈 기타나 이펙터, DJ 등을 추가해 사운드를 보강하려 해도 세션이 늘어남에 따라 요구되는 기술과 인건비는 배로 부담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많은 난관들을 헤쳐 나왔다 해도, 연습할 장소를 구해야 한다. 밴드 세션 최소 3 ~ 5명이 모여서 연습할 공간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합주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원들이 똑같은 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소리가 매우 크며, 그에 따라 수준급의 방음 환경을 요구한다. 드럼세트나 앰프같은 장비들의 물리적인 크기나 바닥에 줄줄이 널려있는 케이블들은 당연한 이야기. 당연히 좁고, 방음 시설도 없는 아파트나 공용 주택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며, 연습실을 구한다 해도 이에 따라오는 대여 비용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수준이다. 밴드부가 있는 학교의 연습실도 아예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는 학교 점심시간에 교실에서 노래 크게 틀어놓고 추는 춤이나, 하다못해 집 거실에서 소음 방지 슬리퍼를 착용하고 카펫 위에서 살살 춰볼 수라도 있는 춤보다도 진입 장벽이 높다.
반면 힙합 및 전자 음악은 록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낮은 준비과정 및 몇마디 루프로써 작곡이 가능해 혼자만의 음악작업이 용이하다. 컴퓨터도 집에서 개인이 혼자 시작해 보는 수준이라면 메인스트림급 게이밍 PC라면 부담은 없고, 좁은 방 안에서 혼자 이어폰을 착용한 채로 조용히 작업에 몰두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심지어 아이패드나 스마트폰같은 핸드헬드 포터블 기기로도 가능하다! 아예 인기 가수나 OST를 작곡하는 전문 작곡가나 엔지니어의 작업실도 5인 록 밴드 연습실에 비해 크지도 않다. 이는 음악에게 재능을 떠나서 많은 이들이 흥미를 느끼며 나도 한번 해볼까? 할 수 있게 하며 이런 식으로 사람이 몰린다. 인재가 몰리니 일부는 스타가 되고, 그 스타를 보고 또 많은 이들이 일종의 선순환으로 힙합이나 전자음악에 투신한다. 일종의 선순환이다.[54]
역으로 말하면 록은 이와 정확히 반대인 악순환에 몰린 것이다. 하기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니 록을 하려는 사람은 줄어들고, 새로운 록스타가 없으니 점점 옛날 음악, 쿨하지 않은 음악으로 인식되며, 이런 인식은 다시 록을 하려는 사람을 더욱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선풍기 바람 오래 쐬면 죽는다 식의 해괴한 록 음악에 대한 선입견이 우리나라에는 많이 남아 있는 편이며, 가죽 자켓입고 긴 머리에 가오 잡고 소리나 지르는 시끄러운 음악이라는 편견 역시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런 이미지는 과거 노브레인이나 크라잉넛을 필두로 히트했던 한국의 펑크 록, 일명 조선펑크를 필두로 하는데, 펑크나 록발라드 등 한국에서 명곡이라 추앙받고 있는 한국 록 음악들이 얼마나 오래된 음악인지 생각해보자. 이는 특히 국내 록 씬에서 최근까지도 '새로운 소재가 유입되어 순환되지 않는다'는 방증이다.[55]
이는 일본에서 왜 록 음악이 여전히 큰 인기를 얻는지 설명할 수 있는데 다른 나라에 비해 밴드음악을 하는 진입장벽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인디밴드 생태계를 잘 묘사한 봇치 더 록!만 봐도 인디밴드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록 생태계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달해 있다. 거의 모든 학교에 반드시 밴드부가 있으며 이 수많은 밴드들이 활약할 일본 특유의 라이브 하우스 문화가 엄청나게 크다. 한국에서 표절 논란으로 이미지가 안좋은 CNBLUE가 일본에서 꾸준히 인기를 얻으며 생존하고 있는 것만 봐도 어느정도 인지도만 얻으면 밴드 생활이 충분이 가능하다. 게다가 한국의 드라마 OST처럼 애니송이라는 또다른 버팀목도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에도 엄청난 숫자의 밴드 지망생들이 생겨나고 있는 곳이 일본이다.
10.2. 보수적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록 팬들
두번째 이유는 록 음악 씬 안에서 록을 받아들이는 태도 문제이다. 록 음악은 힙합과 재즈, R&B와 같이 새로운 장르와 결합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록 음악을 소비하는 이들은 의외로 같은 록 음악임에도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록 음악인 것과 아닌 것을 배척하는데 너무 심하게 열을 올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완전히 기타와 드럼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키보드 정도는 허락하거나 록이라는 형식만 있어도 된다면서 일렉 기타 대신 전자 기기를 주로 쓰는 밴드도 있다.예시로 2010년대 밴드 중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이매진 드래곤스는 신시사이저와 전자드럼을 통한 (보수적인 록 음악 입장에서는 보기엔) 진보적인 록 음악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보수적인 팬 층에게 록이 아니라 팝 밴드같다는 이유로 Slipknot 팬들을 비롯한 극성 까들에게 심한 손가락질을 당해 우울증에 걸렸었다고 밝혔다. 또한 마룬파이브나 콜드플레이같이 음악적 노선을 여러번 바꾸길 좋아하는 밴드에게 1~2집이 "록 음악스러워서 좋았지.."같은 푸념을 늘어놓으며 최근에 낸 앨범들을 비하하기도 한다. 이는 그들의 음악적 질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차트에서 성과를 거두면서 록 음악의 생명력을 연장 시키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후대 밴드에게 어떻게든 새로운 길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퀄리티가 어쨌건 간에 망한 록 씬에 색다른 바람을 불어넣으려 한 시도는 환영해야할 찰나에 음악 퀄리티를 명분으로 "게이 음악한다", "아이돌 음악이나 하면서 돈만 챙기려고 한다", "록 아니다" 식의 배척과 욕설을 하는게 과연 씬의 부활에 도움이 될까?
록 음악 향유자의 배척 문화는 한창 록이 주류 장르였던 1970년대에 일어난 디스코 폭파의 밤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록 음악만이 자신들의 목소리와 권리를 대변하는 음악이라고 과몰입하며 다른 장르에 대한 무분별한 배척과 공존 따위는 있을 수 없다며 천명한 일이였다. 아무리 록 음악이 팬들이 많다 한들 록 음악 팬들이 아닌 일반 대중들의 수는 훨씬 많을 것이고, 이런 행태를 본 일반인은 록 음악을 소비하고 만드는 이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같은 록 계열 안에서도 서로를 비난하고 여론 몰이를 하기도 한다. 메탈팬들이 너바나에게 가지는 증오심은 설명할 필요도 없고, 메탈/하드코어 하위 장르인 트랜스코어나 메탈코어하는 밴드는 메탈 쪽에서 욕 먹으며, 뉴 메탈은 그 음악을 주도했던 사람도 싫어한다. 심지어는 메탈 같은 일부 장르 내에서는 라이벌로 여겨지던 밴드의 팬들이 팬심에 욕 박고 싸우는데, 딥 퍼플과 레드 제플린 팬들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싸이월드 추억의 팝송 등으로 매우 좋아하는 그린데이, 에이브릴 라빈 등의 팝펑크/팝락 아티스트들은 너무 상업적이며 대중적이라 펑크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록 딱지를 때라고 할 정도였다. [56]
국내에서는 박완규가 머리 자른 김경호를 보고 록을 버렸다며 한바탕 싸웠던 일화, 메탈 음악을 버리고 발라드로 전향한 후 동료 뮤지션과 메탈 팬들의 비난 세례를 못 이겨 죄책감에 산 속으로 잠적해버린 임재범의 경우가 록 음악은 폐쇄성이 짙다 라는 식으로 대중들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온면이 있다.
음악 평론가 안토니 판타노 역시 이 현상을 지적했다. 2019년 "록은 장르 음악으로써 완전히 죽었으며, 이는 록에게 오히려 좋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는데, 록 음악이 이제는 완벽하게 기성세대의 것이 되었으며, 록 커뮤니티 안에서는 과거의 음반들만을 찾아 들으며 그것을 카피하는 카피 밴드들의 출현만이 반복되고 있고, 현 세대의 음악을 비난하는 록 팬들의 꼰대화는 오히려 록에게 치명적이니 이에 '대중 음악 장르'로서의 록의 죽음을 인정하고 부담을 내려 놓아야 음악적으로는 록 음악가들과 록 팬들에게 오히려 더 낫다는 내용이다.
이 현상은 현재 록 음악 씬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매진 드래곤스, 조나스 브라더스, 마룬 5와 호주의 5 Seconds of Summer, 영국의 The 1975, 일본의 King gnu, 우리나라의 잔나비, 혁오, 윤하 등의 수많은 인디 및 인기 밴드가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춰서 차트에서 건승하거나 어떻게든 록의 색채를 유지하면서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 음악을 연구하고 성과를 본 케이스는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수적인 록 뮤지션과 팬들은 시도는 커녕 이들을 상업적인 록 밴드 취급하며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보수적인 록 음악 소비자들에게 '이건 록 음악이 아니야!'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록 뮤지션들이 거꾸로 대중에게 환영받는, 이상하지만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다. 이는 대중음악을 해서 돈을 버는 입장인 아티스트가 대중성을 간과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다행스러운 점으로 점차 이런 보수적인 추세는 나아지고 있다.
10.3. 시대의 발전에 뒤쳐진 장르화
세 번째는 기술과 시대 발전에 뒤쳐진 대처이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으로만 팔리는 것이 아니라 틱톡이나 유튜버들이 커버하면서 한번 더 소비되고 다시 새로운 청자가 유입되는 흐름이다. 하지만 록 음악하는 아티스트들은 유튜브나 바이럴 매체들을 뮤직비디오 올리는 공간 정도로만 활용하지, 그 이상의 다양한 홍보 시도나 사용 방법을 강구하지 않는다.[57][58] 예시로 힙합/R&B가수인 드레이크는 자신이 갓 발매한 곡들로 댄스 챌린지를 열어 주목을 받은 바 있고, 비욘세는 전 곡을 뮤직비디오로 채운 비주얼 앨범이라는 새 지평을 열었다.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흐름 차용해서 지코나 비같은 가수들이 챌린지를 열거나 음악 유튜버들이 커버하기 좋은 곡 또는 노래방에서 부르기 좋은 노래를 만드는 등, 단순히 좋은 곡을 쓰는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마케팅도 동시에 신경 쓰며 작업하는 모습은 현재 미국·영국을 포함해 전 세계의 트렌드가 됐다.
기술 발전의 다른 예시로 에어팟의 출시와 빌리 아일리시의 독특한 ASMR 창법이 맛물려 빌보드에서 큰 히트를 하자 기존 R&B씬에서도 고음과 퍼포먼스를 중시하기 보다는 허스키하고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창법과 미니멀하고 고요한 편곡을 중심으로 많은 곡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힙합씬에서도 멈블 랩, 클라우드 랩, 이모 힙합 등의 모습으로 시대 흐름에 발 맞추는 모습을 보였다.
정리하자면, 록을 듣지 않는 새로운 유입층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언제 음악을 듣고 왜 음악을 듣고 어떻게 음악을 접하는지 등등을 파악하고 이를 아티스트들 본인이 구사하는 장르의 특징에 연계 시켜서 어떻게 이목을 집중시킬 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11. 시대별 주요 음악가
- 모든 록 음악가들을 본 문서에 일일이 기재할 수 없으므로, 상업적 또는 평론적으로 일정 부분 이상의 성공을 거둔 음악가만을 기재하도록 한다.
11.1. 1950년대
음악가 | 장르 | 국적 |
엘비스 프레슬리 | 로커빌리, 로큰롤 | 미국 |
척 베리 | 로큰롤 | 미국 |
제리 리 루이스 | 로큰롤 | 미국 |
리틀 리처드 | 로큰롤 | 미국 |
버디 홀리 | 로큰롤 | 미국 |
11.2. 1960년대
음악가 | 장르 | 국적 |
비틀즈 | 로큰롤, 팝 록, 소프트 록, 사이키델릭 록, 블루스 록, 하드 록, 아트 록, 포크 록 | 영국 |
롤링 스톤스 | 로큰롤, 사이키델릭 록, 하드 록 | 영국 |
애니멀스 | 블루스 록, 포크 록 | 영국 |
킹크스 | 로큰롤, 개러지 록, 소프트 록 | 영국 |
밥 딜런 | 포크 록 | 미국 |
더 후 | 로큰롤, 하드 록 | 영국 |
야드버즈 | 블루스 록 | 영국 |
지미 헨드릭스 | 하드 록, 블루스 록, 사이키델릭 록 | 미국 |
비치 보이스 | 서프 록, 사이키델릭 록 | 미국 |
크림 | 블루스 록, 하드 록, 사이키델릭 록 | 영국 |
도어즈 | 사이키델릭 록, 블루스 록 | 미국 |
재니스 조플린 | 사이키델릭 록 | 미국 |
레드 제플린 | 블루스 록, 하드 록, 헤비 메탈 | 영국 |
플리트우드 맥 | 블루스 록 | 영국 |
핑크 플로이드 | 사이키델릭 록, 익스페리멘탈 록 | 영국 |
벨벳 언더그라운드 | 노이즈 록, 프로토 펑크 | 미국 |
11.3. 1970년대
음악가 | 장르 | 국적 |
레드 제플린 | 블루스 록, 포크 록, 하드 록, 헤비 메탈 | 영국 |
딥 퍼플 | 헤비 메탈, 하드 록, 프로그레시브 록 | 영국 |
블랙 사바스 | 하드 록, 헤비 메탈 | 영국 |
레인보우 | 헤비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 영국 |
올맨 브라더스 밴드 | 서던 록, 재즈 록, 블루스 록 | 미국 |
퀸 | 하드 록, 글램 록 | 영국 |
조지 해리슨 | 팝 록, 포크 록, 소프트 록 | 영국 |
윙스 (폴 매카트니 & 윙스) | 팝 록, 소프트 록, 신스팝, 펑크, 디스코 | 영국 |
엘튼 존 | 팝 록, 소프트 록, 피아노 록 | 영국 |
빌리 조엘 | 팝 록, 소프트 록, 피아노 록 | 미국 |
핑크 플로이드 |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 | 영국 |
킹 크림슨 |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 | 영국 |
제네시스 |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 | 영국 |
제쓰로 툴 | 프로그레시브 록, 프로그레시브 메탈 | 영국 |
러시 | 헤비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 캐나다 |
예스 |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 | 영국 |
플리트우드 맥 | 팝 록, 소프트 록 | 미국, 영국 |
브루스 스프링스틴 | 팝 록, 파워 팝 | 미국 |
포리너 | 하드 록, 팝 록 | 미국, 영국 |
패티 스미스 | 펑크 록 | 미국 |
라몬즈 | 펑크 록, 팝 펑크 | 미국 |
섹스 피스톨즈 | 펑크 록 | 영국 |
더 클래시 | 펑크 록, 포스트 펑크 | 영국 |
에어로스미스 | 하드 록, 블루스 록 | 미국 |
아이언메이든 | 하드 록, 헤비 메탈 | 영국 |
스콜피온즈 | 하드 록, 헤비 메탈 | 서독 |
데이비드 보위 | 글램 록, 아트 록 | 영국 |
U2 | 포스트 펑크, 얼터너티브 록, 컨트리 뮤직, 디스코 등 | 아일랜드 |
로리 갤러거 | 블루스 록, 포크 록 | 아일랜드 |
11.4. 1980년대
음악가 | 장르 | 국적 |
AC/DC | 하드 록 | 호주 |
다이어 스트레이츠 | 블루스 록, 팝 록 | 영국 |
프린스 | Funk rock | 미국 |
폴 매카트니 | 팝 록, 포크 록, Funk rock | 영국 |
필 콜린스 | 팝 록, 소프트 록 | 영국 |
피터 가브리엘 | 팝 록, 소프트 록 | 영국 |
포리너 | 팝 록, 소프트 록, Funk rock | 미국 |
오지 오스본 | 하드 록, 헤비 메탈 | 영국, 미국 |
데프 레파드 | 하드 록, 팝 메탈 | 영국 |
밴 헤일런 | 헤비 메탈, 글램 메탈 | 미국 |
본 조비 | 글램 메탈 | 미국 |
건즈 앤 로지스 | 하드 록, 헤비 메탈, 글램 메탈 | 미국 |
스키드로우 | 글램 메탈 | 미국 |
메탈리카 | 스래시 메탈 | 미국 |
메가데스 | 스래시 메탈 | 미국 |
잉베이 말름스틴 | 네오 클래시컬 메탈 | 스웨덴 |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 슈게이징 | 아일랜드 |
11.5. 1990년대
음악가 | 장르 | 국적 |
너바나 | 그런지 록 | 미국 |
스매싱 펌킨스 | 그런지, 얼터너티브 록 | 미국 |
블러 | 브릿팝 | 영국 |
오아시스 | 브릿팝 | 영국 |
뮤즈 | 얼터너티브 록 | 영국 |
라디오헤드 | 얼터너티브 록 | 영국 |
폴 매카트니 | 팝 록, 소프트 록, 로큰롤 | 영국 |
그린 데이 | 팝 펑크 | 미국 |
페이브먼트 | 인디 록 | 미국 |
레드 핫 칠리 페퍼스[59] | 얼터너티브 록, 펑크 록 | 미국 |
위저 | 팝 펑크, 파워 팝 | 미국 |
마릴린 맨슨 | 고딕 메탈, 인더스트리얼 | 미국 |
11.6. 2000년대 이후
음악가 | 장르 | 국적 |
콜드플레이 | 얼터너티브 록 | 영국 |
스트록스 |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 미국 |
악틱 몽키스 |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 영국 |
린킨 파크 | 얼터너티브 록, 뉴메탈 | 미국 |
림프 비즈킷 | 뉴메탈 | 미국 |
더 스크립트 | 얼터너티브 록 | 아일랜드 |
아케이드 파이어 | 인디 록 | 캐나다 |
이매진 드래곤스 | 얼터너티브 록 | 미국 |
모네스킨 | 하드 록, 글램 록, 얼터너티브 록 | 이탈리아 |
폴 매카트니[60] | 팝 록, 바로크 팝, 포크 록 | 영국 |
[1] 등장 뮤지션들은 순서대로 0:00 엘비스 프레슬리, 0:26 비틀즈, 0:36 지미 헨드릭스/크림, 0:56 팔리아멘트/펑카델릭, 1:21 글램 록, 1:51 섹스 피스톨즈, 2:02 미스피츠, 2:15 머틀리 크루/포이즌, 2:47 너바나, 3:01 레드 핫 칠리 페퍼스[2] 실례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히트곡인 'Hound Dog'은 1950년대 초, 흑인 여가수 빅 마마 손튼의 댄서블한 R&B 원곡을 리메이크 한것이며, 이 외에도 전설적인 흑인 소울 가수인 레이 찰스의 'I Got a Woman'을 엘비스가 50년대 중후반 경에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이렇듯 흑인들의 댄서블한 R&B가 초창기 로큰롤을 성립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것이 정론이다. 당장 로큰롤의 시조격인 척 베리와 리틀 리차드가 흑인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실제 1950년대 당시 R&B와 로큰롤을 비교하면 로큰롤의 템포가 좀 더 빠르고 살짝 거친 사운드가 들어간 점을 제외하면 근본적으로 차이가 거의 없었다.[3] 예시를 들면 1950년대 당시, 기성세대의 재즈와 스탠다드 팝과 대립하던 로큰롤, 1960년대 초창기 록 음악에 반하던 사이키델릭 장르, 1970년대 후반에는 펑크가 이전 세대의 모든 록 장르들을 비판하며 출현했고 1990년대에는 상업화되고 록 씬의 주류를 꽉 채운 메탈 장르에 반대하며 그런지와 브릿팝으로 대표되는 얼터너티브 록이 유행했다.[4] 오락 산업, 즉 엔터테인먼트의 흐름이 기존 중년층에서 청소년, 청년층으로 흐르기 시작하고, 기존 대중문화계의 문학(소설) 등에서 청소년 주인공 등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그 예시 중 하나이다.[5] 로이드 프라이스는 1959년 Stagger Lee (빌보드 핫 100 4주 연속 1위), Personality (빌보드 핫 100 2위, 195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위), I'm Gonna Get Married (빌보드 핫 100 3위) 등의 대히트곡을 발매했다.[6] 브룩 벤턴은 1959년 "It's Just a Matter of Time" (빌보드 핫 100 3위), "Endlessly" (빌보드 핫 100 12위), "So Many Ways" (빌보드 핫 100 6위), 1960년 "Baby (You've Got What It Takes)" (빌보드 핫 100 5위), "A Rockin' Good Way (To Mess Around and Fall in Love)" (빌보드 핫 100 7위), "Kiddio" (빌보드 핫 100 7위), 1961년 "Think Twice" (빌보드 핫 100 11위), "The Boll Weevil Song" (빌보드 핫 100 2위), 1962년 "Lie to Me" (빌보드 핫 100 13위), 1963년 "Hotel Happiness" (빌보드 핫 100 3위) 등의 곡이 크게 히트했다.[7] 물론 이것은 미국의 상황이었고, 관대한 영국은 좀 더 젊은이들 문화에 관대했다. 이는 미국은 청교도 국가고 영국은 성공회 국가였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빈스 테일러나 빌리 퓨리가 주름잡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 음악과 블루스음악들, 이를테면 머디 워터스나 소니 보이 윌리엄슨, 하울링 울프, 비비 킹 같은 뮤지션들의 음악들이 젊은 음악 매니아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들 중 전자는 훗날 록커들이 되고, 후자는 모드족들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훗날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자양분이 된다.[8] 척 베리의 원곡을 개사하고 서프 스타일로 편곡한 곡으로서 척 베리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자기들 곡처럼 발표했기 때문에 표절판정을 받아 저작권이 척 베리에게 넘어가게 된다.[9] 그 전부터 활동했었지만 그때까진 아직 캘리포니아의 신진 인기 로컬 밴드 정도였고 위의 더 초창기 서프 뮤지션들처럼 확고하게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던 존재는 아니었다. 비치 보이스가 로컬 밴드를 넘어 전국적인 인기스타가 되기 시작한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서프음악 붐이 시들해졌던 때인 1963년이다.[10] 사실 비치 보이스는 음악적인 면을 떠나서 서프 '문화'와는 애초에 살짝 거리가 있었다. 비치 보이스 멤버들 중에 실제로 서핑 등의 서프 문화에 관심이 있었던 건 데니스 윌슨 뿐이었고 브라이언 윌슨을 비롯한 나머지 멤버들은 그닥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11] 그 "아이슬리 브라더스" 맞다. 1960년대 1970년대 흑인 음악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밴드로, 이들의 첫 번째 메이저 히트곡이기도 하다.[12] 1961년 핫 100 1위[13] 1960년 핫 100 14위[14] 1961년 핫 100 7위[15] 1962년 핫 100 2위[16] 1962년 연말 차트 2위가 레이 찰스의 대표곡 "I Can't Stop Loving You", 연말 차트 1위가 애커 빌크의 Stranger on the Shore이다. 이 두 곡 다음 가는 인기를 끌 정도로 유행한 곡이었다.[17] 정확히 말하면 비틀즈라는 밴드명은 1959년에 지어졌지만, 로큰롤 밴드 활동은 2년 전인 1957년 존 레논의 고교 스쿨밴드인 쿼리멘 시절부터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알려진 비틀즈 멤버들이 구성되고, 작품을 발매하는 공식적인 데뷔 년도는 첫 싱글이 발매된 1962년이다.[18] 재즈, 영화 사운드트랙을 제외한 록, 팝 음악 등을 기준해서 최초이다.[19] 사실 밥 딜런은 청소년 시절인 1950년대에 엘비스 프레슬리를 비롯한 로큰롤 스타들의 열성 팬이었다. 엘비스가 서있었던 장소에 영광이라며 키스한 것도 유명한 일화이고 실제로 밥 딜런의 학창시절 사진들을 보면 리젠트 머리와 거친 로큰롤 옷차림을 즐겨입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미국에서 로큰롤이 몰락한 시점에 음악적으로 활약할 기회가 사실상 사라졌고 본인의 또다른 취향이었던 포크 음악으로 완전히 전향한 것이다.[20] 당시 폐쇄적인 포크 커뮤니티는 일렉 기타를 드는 행위는 포크의 순수성을 파괴하는 배신 행위라고 생각했다.[21] 최초의 더블 앨범이다.[22] 이후 밥 딜런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23] 대한민국은 록 음악 자체의 인기가 발라드, 힙합 등에 비해서도 낮은 편이다.[24] 사실 에릭 클랩튼은 한국 한정으로 1960~70년대 커리어보다 Change the World나 Tears in Heaven 등 후기 커리어가 더 유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상한건 아니다.[25] 비치 보이스의 걸작 명반 Pet Sounds 앨범도 바로 비틀즈의 Rubber Soul 앨범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서 만든 앨범이다.[26] 독일의 클래식 작곡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영향받은 비틀즈는 페퍼 상사에 여러 음향 실험을 통해 전자음향 기법을 사용하여 대중들에게 전자음향 기법을 각인시켰다. 대중음악의 초기 사례다.[27] 오히려 그 후신인 록 장르보다 힙합 장르에서 사이키델릭 록의 요소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례로 오토튠과 더욱 발전된 기계음으로 더 다채로운 사운드를 살려서 EMO힙합 장르가 탄생된 것이 그 예시다.[28] Campbell, Michael (2008). Popular Music in America: And the Beat Goes On. Cengage Learning.[29]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같이 사용하기도 한다.[30] 이 시기 독일의 록 음악을 크라우트 록이라고도 부른다.[31] 처음으로 완벽히 하나의 통일된 컨셉을 가진 아티스트로서 미래주의, 로봇, SF스러운 특징을 보여졌고, 이후 이 컨셉은 다프트 펑크와 같은 아티스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32] 이때 당시에는 DAW은 커녕 컴퓨터도 제대로 보급이 안 돼있던 시기여서 아르페지오같은 입력 소스들은 모두 시퀀서에 입력해서 사용했었다.[33] Campbell, Michael (2012). Popular Music in America:The Beat Goes On. Cengage Learning.[34] 나중엔 소프트 록 스타일로 인기를 얻었지만 초창기엔 블루스 록 밴드였는데,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가 이 초창기 플리트우드 맥의 열렬한 팬이었고 영향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35] 독일의 대표음식인 자우어크라우트에서 따온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독자적인 록 음악을 '김치록'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하면 된다.[36] 초기엔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록이란 의미에서 '글리터 록'(Glitter Rock)이란 표현도 병행해서 사용되었으나 갈수록 글램 록이라는 어휘가 더 우세해졌다.[37] 이미 1960년대부터 대형 록 밴드들의 프론트맨들과 멤버들은, 무대 매너라는 개념조차 없던 그 시대에 각양 각색의 무대 매너를 선보이며 퍼포먼스를 보였다.[38] 폴 매카트니 등이 대표적이다.[39] proto-( )는 ( )의 이전 형태, ( )의 원조라는 뜻이다.[40] R&B는 로큰롤의 전성기가 끝난 후였던 1959년부터, 소울 음악은 레이 찰스와 모타운 소속 아티스트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60년대 초중반부터, 펑크(Funk)는 제임스 브라운,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활약으로 60년대 후반 ~ 70년대 초반부터 미국 대중음악계의 주류로 자리잡았다.[41] 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 엔워븜이라고 읽는다.[42] 사이키델릭 록 항목에서 언급했지만 앞서 비틀즈가 페퍼 상사, 화이트 앨범에서 전자음향 기법을 사용했다.[43] 이는 부연설명이 필요한데 펑크는 락의 카테고리에 있지만 여타 다른 락 음악과는 달리 홀로 독자노선을 걸으면서 DIY 및 반문화 정신과 곁들여진 채로 발전되어 왔다. 80년대 미국에서도 이러한 문화가 계승됨에 따라 하위문화로써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존재하였는데 어느 날 언더그라운드 펑크의 무브먼트에 동참하던 그린데이가 당시 펑크들에게 터부시 되었던 메이저 회사(거대자본)와 계약을 하더니 전형적인 대형 락스타의 노선을 걷게되면서 "정신을 버린 채 음악형태만 펑크라고 해서 펑크밴드가 아니다" 라는 비난을 받은 것이지 단순 팝펑크 밴드라고하여 욕을 먹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린데이의 친구 밴드이자 빌리 조가 멤버로써 한솥밥을 먹기도 했던 랜시드는 대중성과 상업성을 노리면서도 그나마 정신을 계승하려는 스탠스를 취하며 세마리의 토끼를 다 잡았을뿐더러 보컬인 팀 암스트롱은 힙합과 펑크를 크로스오버 하면서도 여전히 펑크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44] 물론 평가하기에 따라 얼터너티브의 한 흐름으로 보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45] 그나마 폴 매카트니 등 과거의 전설들이 종종 차트에 모습을 드러내고는 있지만 이마저도 빌보드 200이 위주이며 핫 100 상위권에서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46] 사실 록과 힙합을 융합하는 시도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린킨 파크 등 2000년대를 풍미한 뉴 메탈 밴드들이 이런 실험을 먼저 했다. 다른 점이라면 뉴 메탈이 록을 중심으로 힙합을 곁들인 것과 달리, 현재의 유행은 힙합을 중심으로 록을 가미하고 있다는 것이다.[47] 5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빌보드가 2006년에 선정한 아티스트들이다.[48] 컨템퍼러리 R&B와 힙합 음악은 싱글 시장에서 우세했고, 록 음악은 앨범 시장에서 우세했다.[49] 미국 전역에서의 히트곡 순위를 매기는 차트 빌보드 핫 100에서는 1990년대 동안 컨템퍼러리 R&B 곡들이 강세였고, 힙합 음악의 경우는 90년대 초반에는 팝 랩 성향의 곡들이, 90년대 중반에는 G-funk로 대표되는 서부 힙합 곡들이, 90년대 말에는 퍼프 대디를 필두로 한 동부 힙합 곡들이 핫 100의 상위권을 기록했다.[50] 2000년 ~ 2008년까지의 빌보드 핫 100에서는 힙합 음악과 컨템퍼러리 R&B 곡들이 강세였고, 이 두 장르가 메인스트림에 위치했던 90년대보다도 인기가 더 높아졌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의 빌보드 핫 100 1위 곡 목록을 보면 힙합과 R&B 곡들이 거의 대부분이다.[51] 앨범 차트 빌보드 200에서는 80년대부터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휘트니 휴스턴의 Whitney Houston, 바비 브라운의 Don't Be Cruel, 자넷 잭슨의 Janet Jackson's Rhythm Nation 1814 등 연말 차트 1위를 기록하는 히트 앨범들이 나왔고 1990년대 초반으로 가면 MC 해머의 Please Hammer, Don't Hurt 'Em을 시작으로 머라이어 캐리의 Mariah Carey, Music Box,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 휘트니 휴스턴의 The Bodyguard: Original Soundtrack Album, 자넷 잭슨의 janet., 스눕 독의 Doggystyle과 같은 거대한 성공을 거둔 앨범들을 포함해 빌보드 200 1위를 차지하는 R&B, 힙합 앨범들이 많이 나왔다. 이후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힙합 앨범들이 앨범 차트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하거나 상위권에 오르는 경우가 많아졌다.[52] 빌보드 선정 1990년대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는 1위 머라이어 캐리, 2위 자넷 잭슨, 3위 가스 브룩스, 4위 보이즈 투 멘, 5위 셀린 디온, 6위 마돈나, 7위 TLC, 8위 휘트니 휴스턴, 9위 마이클 볼튼, 10위 토니 브랙스턴으로 10명 중 6명이 R&B 아티스트였다. (1 ~ 2위, 4위, 7위 ~ 8위, 10위) 싱글/곡 차트 빌보드 핫 100과 앨범 차트 빌보드 200에서의 차트 성적을 기준으로 선정되었다. https://books.google.com/books/about/Billboard.html?id=9w0EAAAAMBAJ (YD-18 페이지)[53] 빌보드 선정 2000년대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는 1위 에미넴, 2위 어셔, 3위 넬리, 4위 비욘세, 5위 앨리샤 키스, 6위 50 센트, 7위 니클백, 8위 브리트니 스피어스, 9위 데스티니스 차일드, 10위 JAY-Z로 10명 중 8명이 힙합이나 R&B 아티스트였다. (1 ~ 6위, 9 ~ 10위) 앨범 차트 빌보드 200과 싱글/곡 차트 빌보드 핫 100에서의 차트 성적을 기준으로 선정되었다. https://www.billboard.com/music/music-news/artists-of-the-decade-266420/[54] 이는 꼭 음악에만 적용되는 일은 아니다. 이를테면 특정 이유로 어떤 스포츠가 크게 주목받고 인기를 끈다면, '운동에 재능있는 아이'들이 그 스포츠 종목으로 몰려드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의 미식축구, 농구, 캐나다의 아이스하키, 유럽과 남미권의 축구가 대표적인 예시다.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는 이스포츠 역시 이러한 선순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실력만 된다면 투자 대비 성과가 말도 안되게 좋기 때문이다.[55] 물론 대중 음악계에서 오래된 곡들이 명곡 취급받는 경우는 흔하다. 하지만 이들과 한국 록 음악이 다른 점은, 다른 장르들은 현재까지도 새로운 인재들과 음악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발전하면서 과거의 명곡과 현재의 인기곡들이 똑같이 대중들에게 소비된다는 차이점이 있다.[56] 헤비메탈 빠로 알려진 유튜버 겸 영화제작자 제임스 롤프가 AVGN 아타리 스포츠 에피소드에서 은연 중에 내비친 타 음악에 내린 평가만 보아도 보수적인 록 음악 팬들이 보편적으로 어떤 태도인지 엿볼 수 있다. 슈퍼볼 공연에 계집애들 좋아하는 팝스타만 나온다는 식으로 다른 장르 아티스트에 대해 상당히 거부감을 표했다.[57] 다만 이 부분은 대중들한테 노출되는 기간이 적어 논란 및 사건사고에 휩쓸릴 위험이 적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다.[58] 또한 억지 밈 등을 통한 바이럴 마케팅은 오히려 대중의 비호감만 사는 역효과가 날 수 있으므로 적절한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59] 데뷔는 1984년에 했지만 1991년부터 전성기의 시작이었다.[60] 1960년대에는 비틀즈 명의, 1970년대에는 윙스 명의, 이후로는 솔로 명의긴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 문서에서 1950년대를 제외한 모든 연대에 본인의 이름을 올린 유일무이한 록 아티스트. 비틀즈는 말할 것도 없고, 1970년대에는 윙스의 리더로서 엘튼 존과 함께 70년대 록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1980년대 역시 메가 히트곡 Ebony and Ivory, Say Say Say 등을 필두로 빌보트 차트에 이름을 남겼으며 앨범, 싱글 성적이 다소 부진했던 1990년대에도 투어는 대성공, Flaming Pie가 영국 차트, 빌보드 200 모두 2위에 오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심지어는 록이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타 장르의 후배 뮤지션들이 차트를 본격적으로 휩쓴 2000년대 이후에도 2018년 Egypt Station을 빌보드 200 1위, 2020년 McCartney III를 빌보드 200 2위, 영국 차트 1위에 올리며 스스로가 왜 살아있는 록의 전설인지 당당히 입증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