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카미노 토시오(神農敏男) |
출생 | 1922년 12월 28일 |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도남리 546번지 (現 경상남도 통영시 도남동) | |
사망 | 1944년 12월[1] (향년 21~22세)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260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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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922년 12월 28일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도남리(現 통영시 도남동) 546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상북도 대구부로 이주하여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했다.1939년 7월,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칠곡군 왜관면의 철도노선 매립작업에 근로동원 되었었는데, 이들 중 7기인 5학년생이 중심이 되어 평소 민족차별을 일삼던 악질 일본인 교유를 작업장에서 구타한 일이 있었다.
이에 2·3·4학년생들은 그와 같은 선배들의 항일저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39년 10월 초, 각 기수별로 윤독회(輪讀會)를 조직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 및 문학서적을 윤독하며 월 1, 2회 모임을 가졌다. 이때 8기로 4학년생이던 그는 그해 10월 말에 학교 친구인 박효준(朴孝濬)·이태길·문홍의·유흥수 등과 함께 항일민족의식을 담은 작품집을 간행하기로 뜻을 모으고, 윤독회를 통하여 원고를 수집하는 한편, 방학 때에도 귀향하지 않고 원고를 편집하여 1940년 1월에 「반딧불」이라는 책자를 간행하였다. 내용은 주로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의 고취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1940년 11월 23일, 그는 박효준·이태길·문홍의 등과 함께 당시 대구부 봉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소재 이태길의 하숙집에 모여 문예활동을 표방하는 항일학생결사 '문예부(文藝部)'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동지 포섭과 비밀 엄수, 매주 토요일 작품감상 등을 운동방침으로 정하고 1940년 11월부터 1941년 3월까지 약 9회의 모임을 가지면서 민족문화 존중 및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한편, 그는 문예부의 활동 외에도 교내의 다른 비밀결사인 '연구회(硏究會)'에도 참여하여 연구회의 문예부 책임을 맡았다. 연구회는 학술연구를 위장한 비밀결사로서 문예부와 비슷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문예부 및 연구회 회원들의 다수가 졸업을 하게됨에 따라 이들은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즉, 졸업 후 각기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현지의 활동상황 및 성과를 매월 1회 간사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이렇게 보고된 상황은 취합하여 다시 전회원에게 배부하기로 했는데 이때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공문을 가장하여 발송하기로 했다.
1941년 3월,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그는 경상남도 창녕군의 대합국민학교 훈도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연구회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본 경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창녕경찰서 형사대에 체포되었으며 그후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4년 12월에 옥중 순국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5월 2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43년 3월 3일 별세한 것으로 오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