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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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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종단3. 역사
3.1. 정치·경제적 입장에서의 한국 불교의 역사3.2. 일제강점기 시절
3.2.1. 친일 논란
3.3. 현대에 들어
4. 비판5. 대한민국 대통령불교와의 관계6. 탁발승 문제7. 신분제도 속의 불교8. 교육기관9. 같이보기

1. 개요

대한민국의 불교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종단

한국의 불교 종단

2020년 기준으로 한국 주요 불교 종단은 다음과 같다.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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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정치·경제적 입장에서의 한국 불교의 역사

한국 불교는 현세구복적, 호국적인 특성을 띈다는 점이다. 당장 해인사 팔만대장경만 봐도 고려 무신정권 시절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려는 염원을 담아 만들어진 경전이다.[1] 이는 동북아시아의 불교가 종교나 학문으로서 한반도에 전래된 외에 국가권력에 의해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되었다는 입장에서 부각된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고대에 각 토속신앙으로 분열된 민심과 지배층을 한꺼번에 불교란 고등종교를 이용해 사상적으로 통합할 필요가 있었다.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의 왕들은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개발해 왕이 곧 부처이라고 했고, 따라서 부처를 모시는 승려들은 왕의 병사가 됐다. 이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사찰을 수도 한복판에 거대한 규모로 지었다. 이렇게 승려가 지배층의 세력이 되면서 호국불교란 개념이 생겼는데, 이게 나중에 상당한 논란을 일으키는 개념이 된다. 그 이유는 따로 하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통일신라, 발해에서는 전국에 불교를 퍼트리는 것을 국가적 사업으로 삼았고 원효, 의상, 원광 등 고승이 등장해 한국 불교 사상의 기틀을 잡았으며 현대까지 남아있는 대부분의 오래된 고찰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처음 건립되었다. 또한 황해도금강산과 같이 신라 중앙에서 거리가 매우 먼 지역까지도 서라벌 불국사에서 볼 수 있는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 그대로 보급되는 등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서 각자 태동했던 한국 불교가 비로소 통일성을 갖추고 보편화된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불교계는 단순한 종교집단에서 벗어나 지배계층으로 대두하여 각종 특혜를 누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즉 고려시대까지의 불교계의 위상은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는 얘기다. 광종 때 이미 승과제도를 도입해 승려의 신분을 보장해 주었고 국사, 왕사 제도를 통해 불교계의 권위를 상징적으로나마 왕권보다 위에 두었다. 또한 국가로부터 토지와 면역이라는 엄청난 특혜를 받아 경제적인 성장의 발판도 마련했다. 사찰들이 대토지를 소유하고 술을 팔거나 고리대금업과 숙박업 등 상업활동에 관여하자 사찰의 세속화 문제가 대두되었고 종파적 분열의 양상까지 보여 불교계 내외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대해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통해 불교계의 경제적 폐단과 정치권에 대한 관여를 비판했다. 불교계의 폐단에 대한 비판은 고려에서 개혁운동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제기되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불교의 사상 자체에 대한 비판은 고려 시대까지는 거의 가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교의 사상이 도전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불교계 내부에서도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수차례 결사운동이 일어나, 의천천태종을 통해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했고 지눌은 무신정권기의 사회적 혼란상을 타파하기 위해 신앙결사운동을 전개해 갔다. 의천의 방식은 불행히도 사상적인 방식이 아닌 일반적인 방식[2]의 통합이었기에 의천 사후 도로아미타불이 되었지만, 지눌의 혁신 운동은 사상적인 통합을 기반으로 전개되어 지눌 이후에도 지속되며 상당한 성과를 보았고 사상적으로도 그 제자인 혜심의 유불일치설로 이어져 성리학이 수용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원 간섭기가 되자 몽골의 영향으로 불교계는 점차 사대적인[3] 귀족불교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인다. 법상종은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세속화되었고, 사원은 권문세족과 결탁하여 대토지를 소유하고 고리대금업에 관여하는 등 부패가 심화되었다. 고려 말 대두하기 시작한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이러한 불교계의 폐단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들은 과거의 유학자들이 불교의 폐단만 비판했던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불교의 사상 자체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폐단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에 의존했던 조선 사회의 전반에서 보여지는데, 불교에 대한 공격이 당시 조선의 본질적인 문제를 희석화하는 수단으로 쓰여진 셈이다.

신진사대부가 건국한 국가인 조선에서 불교계의 위상은 점차 추락하여 교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불교 윤리사상을 유교 윤리사상으로 전환시켜 국가 지도이념으로서의 역할을 빼앗고, 경제적으로도 사찰에 예속된 토지와 노비를 국가재정으로 환수했다. 문정왕후 등의 일시적인 숭불책이 수차례 있었으나 승려를 천민으로 대우하고 서울 등 도시 출입을 금지하는 등 숭유억불의 조류는 꾸준히 지속되었고 불교계는 경제적 기반과 인적 자원을 상실하여 사회적 위상을 잃었다. 그러나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를 잃었을 뿐 신앙의 대상으로서는 여전히 궁중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신봉되었고 교리의 발전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불교계가 보여준 호국적인 양상 또한 역사가 깊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입 당시 몽골군 장수 살리타이를 해치운 사람도 승장 김윤후였다.[4] 조선임진왜란 당시 휴정유정은 전국 사찰에 격문을 돌려 승병 궐기를 촉구했고, 그렇게 결성된 승군의 규모도 엄청났다. 유정은 이들 승군을 통솔하는 명목상 직책인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에 임명되기도 했다. 조선 정부의 억불정책에 많은 피해를 입긴 했으나 임진왜란 당시의 활약으로 이전에 비해 억압하는 면모가 꽤 줄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대장경 역시 불교의 힘으로 국가를 구하려한 열망을 담은 호국적인 사업이었다.

조선 후기로 가서 성리학이 쇠퇴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커져, 한때 불교 억제정책을 강화했던 정조마저 나중에는 이를 사실상 철회하고 수원용주사를 건립했으니 말 다한 셈. 하지만 승려 자체는 계속 낮은 신분이었기에, 사찰의 재물을 노리고 공격을 당하거나 아예 절을 빼앗아 무덤을 만드는 경우도 늘어났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주장이 나왔는데, "조선시대의 호국불교는 당시 불교가 지니고 있던 사회적인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다. 당시 불교는 조선 정부의 전형적인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서 여러가지로 탄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극히 반조선적 성향을 띠었으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해서 속칭 말하는 '이렇게 우리가 도와주고 나면 우리의 사정도 괜찮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물심양면으로 조선 정부를 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는 오히려 조선 정부 측에서는 '오! 이런 양질의 노동력이 있었나?' 하면서 승려들을 부역에 더더욱 많이 동원했다는 후새드한 후일담이 있다. 심지어는 임진왜란 등으로 공납할 장인들이 모자라자 등에 공납의 의무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불교에 대한 조선왕조의 자세가 다소 완화된 건 임진왜란 전후라는 건 확실하다. 우선 상기한 대로 불교계가 조선왕조 수호에 한 몫을 한 것도 있고, 전후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는데는 전란을 피해 멀리 도망가 있던 양반들의 전유물인 성리학보다 전란에도 대중의 곁을 지키며 역사적으로도 오랫동안 함께 해온 불교가 더 유리했고, 전쟁으로 조선을 포함한 주변 나라들이 죄다 갈아엎어지면서[5] 다른 최중요 과제들[6]이 잔뜩 늘어난데다가, 이후 인조반정, 양대호란 등을 위시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발등에 수차례 떨어진 불 끄기도 바쁜 조선 왕조가 불교 탄압에 예전만큼 신경 쓸 겨를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이 마냥 불교를 억압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도 최근에 등장하고 있다. 한국 불교의 역사 참고.

아무튼 이렇게 조선왕조에 억압받은 시기 때문에, 한국 불교에서는 수도에 전념하는 이판승과 행정이나 대외 부역 참여 등에 무게를 두는 사판승의 이원론적 체계가 생겨났다. '이판사판'이라는 말의 유래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 영향이 남아 한국 불교에서는 각 의 관리자가 2명씩 있다. 행정업을 맡는 주지와, 종교적 업무/승려 교육을 전담하는 방장이다. 종교 지도자도 마찬가지라, 조계종의 경우 행정업 전담인 총무원장과 종교적 업무 전담인 종정이 따로 있다.

일단 전조인 고려시대에 불교가 행했던 영향력과 악행들도 있고,[7] 유교의 원칙을 국가 이념으로 택했던 조선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본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 자체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취급은 그때도 여전했다. 그 예로 도첩제가 있다. 승려가 되기 위해서 거액의 포를 바치거나[8] 부역에 몇 개월 동안 무보수로 일해야 도첩을 얻을 수 있었다.[9] 이는 숭유억불 정책에 근거한 것이지만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도첩제 자체가 양인의 승려화를 막기 위해서였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승려세금을 안 내니까.

조선 건국부터 대한제국 이전까지 승려는 천민계급 중 하나였다. 신량역천도 아니고 법제적인 천민도 아니지만, 성리학적 규범과 양반 사회가 확립되면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팔반사천(八般私賤) 중 하나였다. 그리고 도성 출입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왕실의 원찰이나 승려가 도성에 들어온다고 승려 도성 출입 금령을 자주 내린 걸 보면 잘 지켜지긴 했는지 의문이다.

승려의 도성 출입이 공식적으로 허가된 것은 구한말 시기로서, 일본인 승려인 사노 젠레이(佐野前勵)[10]일본공사관의 후원을 통한 적극적인 로비로 출입 허가를 받아냈다. 물론 이렇게 사노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일본 불교의 종지로 한국 불교를 개종시켜(일본 불교의 교리를 한국에 심어), 결과적으로 한국 불교를 일본 일련종이 집어삼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 정부는 봉원사의 승려인 이동인의 건의로 이미 종교 자유의 일환으로 승려의 도성 출입 허가를 논의 중이었다. 그런데 공로는 다 사노에게 넘어갔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챙긴 셈이다. 그런데 애초에 이 이동인이라는 승려부터가 일본식 불교 승려[11]로, 개화파 중에서 골수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또한 최초로 창씨개명을 한 인물로 일본 이름은 아사노 도진(淺野 東仁).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밑밥 깔기에 가까웠다고 하겠다.

이후 1898년 고종황제원구단에 제사를 올리려고 할 때, 한 승려가 겁도 없이 주위를 둘러 친 장막의 틈새를 열고 들어와 "초능력으로 황제의 운명을 점치겠다"고 난동을 피운 일이 발생했다. 잡아서 문초를 하니 개운사 출신이란 것이 밝혀졌다. 그 외는 미상이다. 이 사건으로 3년 만에 승려 출입이 다시 금지되었고, 이후 실질적으로 승려 출입이 완전히 자유롭게 된 것은 1905년의 일이다.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은 흔히 잘 모르고 넘어가지만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개국공신 정도전부터가 숭유억불을 내세웠으며 불교를 논리적으로 공박한 불씨잡변을 쓰기도 했다. 태종은 특히 불교를 혐오하여 불교 종단의 해체, 파괴를 시도했다. 많은 절이 폐쇄되었으며, 심지어 유학자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산 속에 숨어있는 절까지 올라와서 깽판을 부리거나 불태웠다. 태조 이성계가 기거했던 회암사조차 고의적인 테러로 불태워졌으니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조선 시대에 불교가 기댈 수 있었던 곳은 오직 왕실뿐이었다. 조선 후기 왕실의 손이 귀해지자 왕실은 불교에 기대었고, 신하들도 강력히 반대하지 못했다. 영조의 경우 아들이 안 태어나자 신하들이 불사를 권하기도 했다. 왕실의 여성이나 몇몇 임금의 개인적인 신앙심이 불교를 유지해주었다. 나름대로 불교를 믿었던 태조, 세종대왕, 세조, 많은 왕비들의 비호 아래 암암리에 왕족들[12]은 불교를 믿어왔으나, 문정왕후를 마지막으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왕릉 근처에서 왕실의 제사를 지내고 왕실을 위해 기도하는 원찰이 딸려 있었다. 선비들이 평범한 절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데 들어가서 행패를 부렸다가는, "네놈이 감히 왕실을 능멸하느냐?!"고 불호령을 당하고 곤장을 얻어맞았다. 비슷한 것으로 조포사라는 절도 있었는데, 왕릉 근처에 있으면서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며 제사가 있을 때 제수 용품으로 쓸 두부를 마련하는 사찰이라 해서 두부 포 자를 써서 조포사라고 불렸다. 이 역시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었기에 선비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수원시에 있는 용주사가 대표적인 조포사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지키고 보관하는 수호사찰이 있었다. 봉화(奉化)의 각화사(覺華寺), 무주(茂朱)의 적상산성(赤裳山城) 내에 위치한 안심사, 강화(江華)의 전등사(傳燈寺), 강릉(江陵)의 월정사(月精寺)를 말한다. 이 수호사찰의 경우 주지승에게 실록수호총섭(實錄守護摠攝)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이 직책은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라, 병부를 갖고 있어 유사시 실록 수호를 위해 지역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상당히 강력한 권한을 가진 실무직이었다.

이외에 조선시대에 사찰들이 유생들의 탄압을 피하는 일종의 편법으로 태조 이성계를 절에 모시고 공양을 올리기도 했다. 유생들이 멋도 모르고 절에서 행패를 부렸다가 승려들이 "아이고오 즈어어어언하아아아아~" 하면서 어진이나 위패 앞에서 향피우고 통곡하면 유생들은 그저 데꿀멍 + 상소가 올라가면 왕실 능멸로 처벌 크리다. 이게 생각보다 잘 먹혀서 나중에는 태조 이성계를 사찰이 모시는 사찰이 지나치게 늘어나 나라에서 제제를 가하기도 했지만,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를 모신다는 점 때문에 조선 정부에서도 다 쓸어버리자니 께름직하기도 하고 알아서 건국자를 모시고 받들어 주니 나름 기특하기도 한지라 작은 절 몇 군데 시범 케이스로 조금 단속하는 선에서 크게 나아가진 않았다. 대구 파계사의 경우 절의 주지였던 용피가 당시 숙종이 아들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를 올린 것에 전답으로 보상받는 대신 절에 선대왕의 위패를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고 용피의 말대로 태어난 왕자가 연잉군이었다는 전승이 있는데, 실제로 파계사에 모셔진 목조관음상 안에서 영조가 입던 도포가 발견되기도 했다. 파계사 앞에는 지금도 '대소인개하마'[13]라고 새긴 하마비가 남아 있다. 위패를 모셨던 전각은 기영각이라고 해서 지금은 평범한 불당이다.#

세종대왕은 기본적으로 유학자 입장에서 불교에 비판적이었으나, 한글불경을 많이 지었다.(심지어 2번째 한글 작품은 불은(佛恩)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 또 세종대왕 당시에는 세종의 작은형 효령대군이 불교를 많이 후원하였다. 세종대왕의 차녀 정의공주와 그 남편인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도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세조는 드물게 불심이 깊었던 왕으로 불교를 많이 밀어줬다. 오대산 상원사의 문수보살와 관련된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성종 때 한 번 날아갔다. 연산군은 딱히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을 다 괴롭혔기 때문에 불교도 된서리를 맞았다. 원각사를 헐어 버린 것이 대표적인 예. 문제는 연산군 이후에 유학자들의 입김 때문에 타격을 받은 게 복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정업원의 늙고 추한 비구니를 몽둥이로 패서 내쫓고 7~8명의 젊은 비구니를 겁탈한 이야기도 있다. 겁탈의 배경이 되는 정업원(淨業院)이란 곳은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남편을 일찍 잃은 왕족 부인들이 비구니가 되어 여생을 보내는 곳이다. 연산군의 일은 한마디로 자기 친인척을 겁탈했다는 이야기다.

명종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보우무학대사 이래로 비어 있었던 국사 자리에 임명하는 등 강력한 불교 진흥책을 펼쳤다. 그러나 문정왕후 개인에게 의지한 불교 진흥은 한계가 있어서, 문정왕후 사후에는 오히려 강한 역풍을 맞았다.

정조 같은 경우 초기에는 억불정책을 시행하였으나 강하게 장기적으로 추진하지는 않았다. 수원에 조포사인 용주사를 지을 때는 오히려 앞장서서 후원하였고, 부모은중경을 좋아했다고 한다.[14]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는 지방에서도 사찰이 어느 정도 늘어갔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에서는 완전히 쫓겨났지만 민간 신앙적으로는 비교적 관대하게 대한 셈이다.

그리고 부녀자들 측에서도 불교에 대한 신앙은 깊었으며, 이는 심지어 사대부 부녀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향유되었던 규방소설 같은 작품들을 보면 사대부 남성들은 기를 쓰고 불교를 반대하지만, 여성들은 그 신앙을 존중하거나 직접 믿는 한편 에 불을 지르려 들다가 봉변을 당하는 사대부들을 그리는 등의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정치제도상으론 열심히 억제하려 했어도, 실제로는 여전히 신자가 많았던 셈.

하지만 이전 시대와 달리 유력 귀족이나 국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조선 후기의 큰 절들은 절의 유지와 확장 등을 위한 돈을 주로 신자들의 시주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사찰에서 기복신앙 행위의 증가와 무속과의 결합이 커지는 것도 이 시기의 영향이다. 이 문제는 불교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에 전파된 타 종교들도 마찬가지로 겪고 있다.

3.2. 일제강점기 시절

전통적인 불교국가이던 일본의 영향으로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숭유억불의 조선이 사라지자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결합하여 주변을 착취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사실 철저한 유교 국가를 지향한 조선시대에서 불교의 사회적 취급은 국가의 노비 취급, 도성 출입금지 등 말 그대로 개차반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에도 막부 내내 불교국가였던 영향으로 승려의 지위가 높아, 조선시대보다는 일제강점기의 대접이 훨씬 나았다.

하지만 인과관계를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조선인들을 이간질시켜 통치를 용이하게 하려던 일제의 계책이긴 해도 어쨌든 일제는 불교계를 대접해 줬으며, 그 결과 수많은 승려들이 친일로 변절하고 결국 당시의 한국 불교는 거의 일본화됐다.[15]

일본풍의, 소위 왜색이 불교에 스며든 것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시절 사찰령을 반포해, 전국 사찰을 조선총독부에 종속시킨 것에서 출발한다. 사찰의 주지스님들은 일종의 공무원이 돼 총독부의 지휘를 받았으며, 특히 총독부는 ‘대처식육’[16]으로 대표되는 세속화 조치를 내렸다.[17]

친일 승려의 악행은 임혜봉 스님의 저서인 「친일불교론」과 「친일 승려 108인」에서 낱낱히 고발되었다. 임혜봉 스님은 「친일 승려 108인」 때문에 해당 책에 실렸던 최범술 스님의 유족들과 민문연에게 너 고소를 당했지만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였다. [18]

물론 그 와중에 불심 깊은 촌부들을 꼬셔서 전 재산과 같은 논, 밭 등을 헌납하게 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었다.[19] 그동안 조선왕조 하에서 수백 년을 억눌려 있었으니 쌓였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일을 하며 사리사욕을 탐한 점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의 예와 같이 일본일본 불교에 맞서서 민족의 독립과 한국 불교를 수호하고자 했던 훌륭한 승려들도 꽤 많았다. 당시 외국 교민들의 불교계는 교민 사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3.2.1. 친일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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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中央敎務院
慰問金募集

시내 수송정(壽松町) 조선불교중앙교무원(朝鮮佛敎中央敎務院)에서는 비상시국을 극복하기 위하야 부내 각 사암(寺庵)과 포교소(布敎所)를 위시하야 황군 위문금을 모집중이든 바 우선 二白五十一 六十一전을 경성부윤을 통하야 헌납하였으며 게속하야 전 조선 一千五百여 사찰 승려(僧侶)와 신도 二十三萬명을 총동원하야 황군원호에 유루 없도록 지령을 발하고 위문군 모집, 출동부대 송영접대, 출동군인가족 유족의 위문격려 등 총후의 임무에 성심을 다하고 있다.

1937. 09. 02. 동아일보#

일단, 당시 국내의 모든 종교가 사실상 친일논란에 벗어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을 해야 한다. 친일 문제는 당시 한국의 모든 종교가 거의 피해가기 힘든 주홍글씨와 같다고 볼 수 있다.[20]

그렇지만 불교는 가장 일제와 마찰이 적었고, 개화사상가이자 친일 승려이동인의 적극적인 협력도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제에 순응적인 종교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상할 것도 없는 게, 조선은 망할 때까지 숭유억불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불교의 자유에 제약이 심했던 데다, 임진왜란승병 활약 이후로 조선 후기에 불교의 자유가 조금이나마 허용되긴 했어도 아직까지도 승려의 사회적 입지는 천민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잠시 신토를 앞세운 폐불훼석으로 불교가 된서리를 맞아 약간 침체된것 뿐이지, 전통적으로 도쿠가와 막부 기간 내내 한국보다 불교가 훨씬 주류였고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높던 사회다 보니, 조선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불교를 내세워 접근하기 딱 좋았다.

어느 시대나 상대국에 침투할 때는 상대국의 반발이나 경계심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 상대국과 자국의 공통점을 찾아내 그 방면으로 접근한다던가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본의 경우는 단지 그 수단 가운데 불교가 있었을 뿐이므로, 불교가 마냥 일제에 순응적이고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친일에 나섰던 종교로 보기는 어폐가 있다. 하지만 조선 불교 입장에서는 조선왕조 당시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억압을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조보단 일제가 낫다"는 생각을 가진 승려들이 많았다.

독립운동도 다른 종교계보다 불교계가 가장 소극적이었다는 주장도 많은데, 3.1운동에서도 불교의 참여율이 가장 낮았고[21] 내세울 만한 독립운동가들 또한 한용운백용성, 김법린 정도 밖에 없다는 것.[22][23]

이완용은 사찰령 이후, 조선 불교를 옹호하기 위한 명목으로 1917년 2월 불교옹호회를 설립하였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을 일제에 충실한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불교옹호회는 불교 신자인 조선 귀족들이 주로 맡았고,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해 해산되었다. 이완용은 후에 조선총독부가 개설한 삼십본산연합사무소란 불교계 중앙 기관에 평의원장으로 활동하였고, 삼십본산연합사무소가 폐지된 후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개편되어 민족주의 성향의 불교인들을 겁박해 완벽한 친일 성향의 기관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즉, 이완용은 총독부와 함께 조선내 불교의 친일화의 기틀을 어느정도 닦아놓은 셈이다.

이종욱승려로 활동하면서 월정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고, 1937년에는 여러 본산의 주지들이 모여 총본산(조계종)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던 중에 총본산건설위원회의 대표직을 맡기도 했다. 이종욱은 창씨개명에까지 참여하여 廣田鍾郁(히로타 쇼이쿠)라는 일본식 이름을 지녔다. 뿐만 아니라 친일단체였다 해방후 미군정 시기 미국에 충성하고 민간인을 학살한 국민회에 몸담은 적이 있다. 광복 이후에도 친일 행적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고 1951년에는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 1952년 불교계 대표인 중앙총무원장을 지내며 떵떵거렸다.

최범술은 한때 천황 암살을 모의했으며 항일비밀단체 '만당()'[24]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으나, 실체적인 활동도 하지 못하고 일제에게 압력 받은 끝에[25] 일제에 투항, 북지황군위문단이라는 관립 친일 불교단체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친일 행적은 책임지지 않았고, 독립운동 경력만 인정받아[26] 대한민국 초기에 제원의원으로까지 활동하게 되었다.

권상로는 "소헤이(僧兵)처럼 한국의 승려들도 태평양전쟁에 지원병으로 참전해야 한다"는 소리를 지껄였고, 일본 승려인 누카리야 가이텐과 함께 불교계에까지 식민사관을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 해방 이후에도 수많은 불교서적과 연구를 해왔으며, 심지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 했다.아래의 위키백과 권상로 문서를 찾아보면 더 많은 정보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변설호는 일제가 사명당 비석을 네 토막내는 데 일조했음에도 단죄받지도 않고 89살까지 천수를 누리고 살았다.

위의 인물들 이외에도 이회광 등의 친일 불교인사들이 많은데, 이들의 친일 행적은 다른 친일인사들이 그러했듯 청산되지도 처벌되지도 않았다. 한국에서 불교계의 친일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비판을 가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93년태고종 승려인 임혜봉이 <친일불교론>(상하2권)을 펴내면서의 일이다.## 임종국 선생이 명저 <친일문학론>을 발표한 것이 1966년. 친일불교론을 처음 펴낼 때에도 친일인사로 거론된 후손들이나 관련자들의 항의소동으로 출판이 1년간 유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며, 2005년 출간한 <친일승려 108인>에서 친일행적을 밝혔던 최범술의 유족에게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기도 했다(판결은 무죄).# 임혜봉은 이밖에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위원을 맡았고,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등 일제강점기 당시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연구해 저서를 내고 있다.

3.3. 현대에 들어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불교는 상술한 사찰령으로 변화를 겪었다. 사찰령은 승려들의 활동부터 주지 임명까지 전부 조선총독이 관리하고 '기혼자'에게 절의 주지 역할을 맡기는 조치로, 이때 임명된 주지들은 전부 일본인 아니면 결혼한 대처승이었다. 해방 후에도 대처승들이 엄청 많았다고 한다. 민중의 꾸준한 지원으로 각 사찰이 소유한 토지 및 재산은 적지 않았는데, 여기에 주목한 자유당 측에 의해 사단(불교 정화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불교 정화운동의 명분은 일본 잔재를 없애는 것이었다. 일제시대 확산된 대처승 집단과 소수의 비구승 집단은 해방공간에서 한국 불교의 노선을 쥐기 위한 헤게모니 투쟁을 벌였다. 특히 송광사 주지 구산이 1955년 혈서를 작성해 경무대에 보내는 등의 움직임도 있었다고 한다.출처

이에 앞서 이승만1954년 5월 21일 아래와 같이 1차 불교정화유시를 발표한다.[27]
우리 나라 각지 명산에 있는 사찰은 독신 승이 모여 수도하는 도량으로 세속의 처자 살림을 하지 않는 것이 고유한 전통인데, 왜정 하에서 한국 승려들도 왜색승을 본받아 사원 안에서 대처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이 나라의 명산대찰이 세속화하여 외국 관광객이 오더라도 보여줄 것이 없으므로 대처승은 사찰 밖으로 물러가서 살게 하고, 절에는 독신승이 살도록 하여야 되겠다"

대통령이 종교계 실태에 깊게 개입하는 것이 영 모양이 좋지 않았으나, 이 대통령이 개입을 결심하게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사건이 있다.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부통령이 1953년 한국을 방문할 당시 정릉동 경국사를 이승만 대통령과 동행했는데, 기저귀가 빨랫줄에 널려있고 일본제국을 찬양하던 주련이 걸려있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법보신문

그러나 이러한 불교정화유시의 진의를 두고 이견도 있다. 대표적으로 이 대통령의 유시의 실체는 기존 사찰 보유 자산을 활용한 '정치자금 확보' 및 휘하 단체 지원이라는 것이다.[28] 본래 해방 후 비구승과 대처승 간에 타협을 보아 '송광사해인사 등 주요 사찰을 우선 돌려받고 나머지는 추후 시간을 두고 조계종으로 전환한다.'는 결론까지 내린 와중에 정부가 무리하게 개입, 갈등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2004년 세수 91세(법랍 77세)로 입적한 서옹 스님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해방 전후 백양사에는 17세인 서옹 스님(당시는 동자승)만 비구승이고 다른 분들은 모두 대처승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행사 때는 서옹 스님만 법당 안에 들어가고 다른 분들은 법석을 깔고 밖에서 예불을 드렸으며, 더이상 대처승의 상좌(제자, 후계자 개념)를 들이지 않는 등 철저하게 타협안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최인규 내무부 장관 측이 불교성지순례 등 타협에 참가한 조계종 지도층의 공백기를 이용해 혈기왕성한 젊은 승려들을 부추겼고, 일부 사찰에는 지원을 명목으로 '머리 깎은 주먹들을 승려로 위장시켜' 보냄으로써 비구승VS대처승 간에 큰 충돌이 벌어지는 사단이 난 것이다.

갈등을 빚던 끝에 제3공화국 들어 대처승 측이 한국불교태고종을 만들어 떨어져 나갔다.[29] 태고종은 현재도 '대중교화'를 이념으로 삼고 있어서 머리를 기를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대중불교주의는 만해 한용운이 주장한 것이니 태고종 자체를 친일의 잔재로 볼 수는 없다.[30] 또한 현대의 한국 태고종은 더이상 대처승을 인정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출가하기 전 아내와 자식을 둔 가장이 출가해서 승려가 될 경우 가족과 함께 살며 부양할 것을 허가한다지, 이미 승려가 된 사람이 결혼하거나 자식을 두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조계종에서 태고종을 언급할 때는 아직도 태고종의 이런 편견을 일반화시키는 경우도 있으니 그런 편견을 듣게 된다면 적당히 가려 듣는것이 좋다. 단, 이 때문에 결혼을 위해 잠시 승적을 파계한 뒤 다시 승적을 회복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이것만은 태고종도 암묵적으로 허용한다.

1980년에는 10.27 법난이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나라의 지원금을 제일 많이 받는 종교이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중요 문화재 중 불교계에 예속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유지/보수를 끝마치고 나면 오히려 불교계는 가난한 편이다. 전통사찰 대부분을 가지고 있는 조계종 1년 예산이 200억 정도다. 국가예산은 한정되어 있기에, 작은 절은 시주도 뜸해 그야말로 황폐화되는 경우도 있는 듯.[31]

불교가 한국의 주요 을 전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돈 많은 종교라고 주장하는 모양새가 보이는데, 도심지와 산지의 땅값 차이만 고려해봐도 이게 얼마나 신빙성이 떨어지는 알 수 있다 그래도 땅을 대상으로 정부와 지자체와 법적 분쟁을 일으킨 적은 몇 번 있었다. 예를 들어 지율스님 도롱뇽 사건이나 진주 성전암 임야지 사건. 혹자는 삶의 터전 때문이라고 하지만 지율스님 같은 경우엔 님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진주 성전암 임야지 사건은 한 예수쟁이가 성전암 주지와 말다툼을 하다 홧김에 불을 질러 암자 건물이 전소된 탓에 진주시에서 복구하는 상황에서 임야지를 불법적으로 썼다는 사실이 들통났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 딱히 삶의 터전이라 보긴 어렵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가난한 종교이기 때문에[32] 비교적 높은 액수의 기도비 걷기, 대규모 재봉행, 기왓장 불사, 사찰 근처의 전통찻집이나 불교용품점, 식당(사찰 음식)[33] 운영 등을 한다. 도심과 좀 떨어져 있는 오프라인 매장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가격이 꽤나 높아서 폭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지만, 어디까지나 신도들의 불심에 맡기는 자율행위인데다 구속력도 없다."절 인심이 좋지 않으면 다른 절로 옮기기 쉽다"는 불교도의 주장이 있었고, 이는 신앙적으로 본다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성직자의 신성과 같은 신자와의 관계도 중요시 여기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불교는 상좌부든 대승이든 신앙의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종교이기 때문. 또한 도시 곳곳에 있는 교회와는 달리 절은 머나먼 산간벽지에 많은 편이라 절에서 섣불리 행동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으나,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기에 부처님오신날이나 중요한 불사가 있는 날엔 차를 돌려서 다른 절로 가기가 어렵다. 게다가 49일, 100일, 1000일 등등 기복을 위한 장기 기도에 들었을 땐 절이 신도를 붙잡아 두는 역할도 있다.[34] 때문에 이런 경우엔 이사 등 특별한 사정이 아닌 이상 쉽게 다른 절로 옮기는 경우는 드물다. 평시라면 몰라도 어느 절에 기도비 내고 100일 기도를 하다 중도에 다른 절로 옮겨서 승계하는 게 절 입장에서 봐줄 만한 일이 아니고, 신도 입장에서도 힘들기 때문.

불교 내부적으로도 신도들의 신앙심이 타 종교에 비해 낮다는 점을 지적하며, 올곧은 재가신도를 양성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조계종에서는 주도적으로 재가신도를 대상으로 한 학습서/수행서적들을 발간하고 있지만, 덧글에 지적하듯 스님들부터 문제라며 신도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링크한 불교 언론사가 친 종단적 언론임에도 이 정도.

근래에는 포교당(혹은 도심 선원)이라고 해서 산중이 아니라 도심이나 마을에 위치한 암자와 비슷하거나 좀 더 큰 수준의 절도 있다. 평은 극과 극. 같은 조계종 소속인데도 불교 욕먹인다는 소리를 듣는 마애사 포교당 같은 곳이 있는가 하면 한마음 선원처럼 좋은 평가를 받는 곳이 있다. 한마음 선원의 경우 아예 자체적 네트워크가 있어 각 지역/외국의 사원들과 본원이 연결되어 있다. 일반적인 포교당과는 달리 개신교보다는 천주교나 주류 종단의 일반적인 사찰 관리 구조와 비슷한 모습.

반면 무당이 사찰 형태로 운영하는 경우도 있어 주의할 필요가 있다. 무속인은 애초에 불교와 관련 없는 사람들이다. 무속인이 불교 공부를 해서 정식 법사 자격증이라도 있으면 모르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다만 일반인 법사가 운영하는 포교당이나 선원은 의외로 흔하다. 태고종이나 여타 군소종단의 경우에는 아예 도심이나 마을 안에 정식으로 절을 짓는 경우가 많아서 신도들이 사는 곳을 벗어나지 않고 간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해놓았다. 물론 조계종의 경우에도 도심에 사찰이나 불교문화원을 지어 포교하고 있다.

한국에서 불교세는 연령이 높을수록, 도시보다 농촌 지역이, 대체로 서쪽보다 동쪽 지역이 강한 특징을 보이는데, 가장 불교 신자 비율이 높은 지방은 경상도다. 아마 한국사에서 가장 독실한 불교 국가였던 신라, 고려의 영향이 남아 있는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신자 비율이 가장 낮은 곳도 경상도다. 전라도는 흔히 기독교 비율이 가장 높고 불교도 비율은 가장 낮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2021년 한국갤럽 조사 기준 전남/전북/광주를 모두 합친 호남인의 종교현황은 불교가 12%, 개신교가 22%, 천주교가 7%로 오차 범위 내에서 수도권, 충청과 동일하거나 비슷한 수준이다. 강원도는 해당 조사엔 설문인원 미달로 나오지 않았으나 대체로 수도권/충청/호남과 영남의 중간 수준을 보였다. 강원도 지역은 영동 지방에서 불교세가 높게 나타나며 그중 양양군은 낙산사의 존재 역시 한몫한다. 그래서 동쪽은 불교세가 강하고 서쪽은 기독교세가 강하다 하여 '동불서기'라는 말까지 생겼다. 또한 같은 지역 안에서라도 도시 지역은 기독교세가 강하고 농촌 지역은 불교세가 강한 특징까지 있어 불촌기도의 특징도 보인다. 사실 영남의 기독교 신자 비율은 수도권충청도와 큰 차이는 없긴 하다. 그리고 불교-기독교 신자 비율의 차이가 호남보다는 영남이 압도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사실 개신교 비중이 가장 큰 도인 전라북도에서도 농촌 및 산간 지역은 불교세가 꽤 강한 것에 비해[35] 영남은 대도시 지역(대구, 부산, 울산, 창원, 포항, 경주, 구미, 김천, 경산 등)에서도 불교세가 상당히 강하다. 그리고 청송, 영양, 영천, 안동, 청도, 영주, 영덕, 울진 등 촌락에서는 불교세가 더 짙다. 다만 멀리 떨어진 섬인 울릉도는 예외적으로 기독교세가 더 강하다. 충청도에서는 충북이 불교세가 어느정도 나타나는데, 크리스트교로 합하면 약세이나, 개신교와 천주교를 분리해서 볼 경우 개신교와 많이 차이가 나지 않는다. 충북은 대개 보은, 영동, 괴산, 단양 등에서 비교적 많이 나타나는 편이며 보은과 단양은 각각 법주사구인사 등의 중대규모 사찰의 존재도 한몫한다. 충남은 대다수 지역에서는 개신교세가 강하지만, 부여, 청양, 금산 등에서 불교세가 비교적 강하게 나타난다. 광역자치단체에서 불교 신자가 가장 많은 지역은 울산광역시이다.

현재는 탈종교 현상이 증가하는데다, 불교 자체의 교리적 특성상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탓에, 불자 수가 줄어들고 남은 신자들도 고령화되었다. 원인은 다양하다. 정보화 시대로 발전해가면서 굳이 종교 자체를 믿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데다, 승려들의 부정행위 및 종파 내부, 각 종파간 분쟁 때문에 일어난 실망감이 대표적인 원인으로 꼽힌다.[36] 무엇보다 젊은 세대들은 불교를 '고리타분하고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로 인식하고 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본다고 쳐도, 길거리 전도사를 마주쳤을 때 '불교 신자'라고 답하고 도망치는 정도라고 보면 편하다.

불교계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포교활동을 하겠다고 이런 저런 시도를 하지만, 별 성과를 얻지 못하는 현실이다. 어린이, 청소년, 청년 불자를 늘리려는 컨텐츠 개발도 미진하고[37] 날이 갈수록 젊은 층들이 불교에 부정적 인식을 가지는 경향이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상기한 불교 자체의 부패 문제도 한몫 한다.

2019년에는 영화 나랏말싸미가 후술할 역사왜곡 문제를 일으키면서 불교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2021년 한국갤럽 조사 결과 한국 내 불교 신자는 16%이다. (개신교 17%, 천주교 6%, 무종교 60%) 종교 현황 종교에 대한 인식

2020년대 들어 '젊은 불교'를 모토로 불교가 젊은이들에게 '힙'하다는 인상을 주기 시작하면서 불교 문화에 대한 청년들의 관심도도 높아지고 있다. 또한 채식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며 사찰 음식을 맛보고 직접 요리해보려는 수요도 어느 정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2024년 SETEC에서 열린 <서울국제불교박람회>는 젊은 층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성황리에 마무리되기도 하였다. 코미디언 윤성호의 부캐 '뉴진스님'을 초청해 불경 EDM 파티를 여는가 하면, 다양한 불교 굿즈도 판매되는 등 청년층의 불교에 대한 관심도를 높였다는 평을 받았다. #

4. 비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불교/대한민국/문제점 및 비판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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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한민국 대통령불교와의 관계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 가운데서는 노태우불자였고[38], 전두환천주교 신자[39]에서 백담사에 은거하면서 불교개종했다.[40] 또한 박정희는 스스로 무종교라 주장해서 무종교에 가까웠지만, 아내가 불자여서 그런지 친불교적인 모습들을 보였는데다 공식 약력에도 불교라고 돼 있으며, 그의 딸 박근혜도 불교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 실제로 박정희는 석가탄신일[41]을 공휴일로 제정하는 등[42] 불교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명박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서 불교와 접점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대선 당시 최측근인 김백준을 통해 능인선원의 지광스님에게 능인불교대학원대학교 설립과 관련하여 3억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자세한 내용은 지광 항목을 참고할 것.

노무현사법시험을 공부하던 시절에는 집 근처 절에서 주로 공부했다고 하는데, 그때 불경도 틈틈이 외웠다고 한다. 이후 변호사 시절에는 천주교에서 '유스토'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지만, 별로 신앙심도 없고 신앙 활동도 하지 않은 듯 하다. 대통령 시절에는 종교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프로필에도 '무교'라 적었지만, 불심이 깊은 영부인을 따라 친(親) 불교적인 활동을 몇 번 한 적은 있었다.[43]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해인사를 3번 방문했는데,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가장 방문 횟수가 많았다.[44]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문재인도 본인은 '티모테오'라는 세례명을 받은 가톨릭 신자이지만, 사법시험 공부를 해남군대흥사에서 하거나 불자 모임에 참가해 활동한 경력도 있는 등 불교계와 사이가 원만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하지만 2019년 들어서 불교계는 "문재인이 가톨릭 신자라 전통사찰을 홀대한다"고 불교계에서 말이 많다. 기사 1, 기사 2

결국 정청래 사찰 통행세 발언 논란이 터지게 되면서 결국 조계종 측이 폭발하고 말았다. 승려 대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며 불교계와 민주당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20대 대통령 당선자 윤석열의 경우 비록 자신은 무종교라고 주장하지만,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그 유명한 빤스목사)가 대통령 선거시기 윤석열이 도와달라고 3번 전화했다고 밝힌바 있어(https://www.youtube.com/live/u0-wXToGy1Q?si=el7SxP0FWjdfxKAq), 대통령 당선 이후 유착관계 의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편 불교계와는 특별한 마찰은 보이지 않으나 그렇다고 우호적이지도 않다.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되고 있다.

6. 탁발승 문제

탁발이란 승려가 먹고 입는 것을 돌아다니며 동냥으로 받은 것만으로 해결하는 것을 말하며, 초기불교에서는 필수적이었고 지금도 일본과 남방불교계에서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최대 종파인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1962년 탁발을 공식적으로 중단하였고, 여타 종단에서도 탁발을 대부분 중단한 상태이다. 물론 종단에서 특별한 의미를 담은 단발성 탁발 행사를 여는 경우는 간간이 있지만, 원칙적으로 승려 개개인의 탁발은 지금도 금지되어 있다.

그 이유는 승려를 사칭하는 가짜들이 무리한 탁발을 요구해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불교의 위상을 저하시켰기 때문. 그러나 이 사실을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 지금도 이나 공원 등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곧잘 불전함이나 바릿대를 놓고 목탁을 두들기거나, 가게에 불쑥 들어와 목탁을 두들기며 시주를 요구하는 정체불명의 승려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특히 2번째의 경우 손님이 있으면 일부러 더욱 목청 높여 독경을 하며 돈을 줄 때까지 안 나가거나, 대놓고 들어오자마자 돈을 요구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있다. 독경하는 것도 잘 들어보면 불교상에서 파는 불자보감이나 얇은 독경용 불경에 실린 일반 불자들도 자주 읽는 경전들로, 가장 많이 읽는 것은 천수경이다.

이 경우 위 사실을 말해주면 바로 나간다. 하지만 나가면서 투덜거리거나 욕하는 정도는 감안해야 한다. 이런 가짜 중들의 불법 탁발은 조선 시대부터 이미 사회문제였으며, 심지어 1900년대에는 아예 탁발을 하려면 공인증서를 갖추어야 했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타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이런 점을 기억해두어서 유사시 가짜에게 속지 말도록 하자.

또한 한국 불교는 본래 중국 선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선종에서는 노동 또한 수행의 일종이라고 보고 승려들도 직접 일을 해서 자급자족하는 것을 더욱 가치있게 여겼다. 그래서 탁발을 더욱 경시하게 된 부분도 있다.

물론 수행하면서 개인적으로 탁발을 부탁하는 스님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조계종에서 금지한 이래 현재는 과거 악명을 떨친 두타스님처럼 가짜 중들이 탁발을 요구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게 사실이고, 특히 남의 가게에 들어와 민폐를 끼친다면 그건 누가 봐도 승려라 볼 수 없다.

현재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자체 조리시설을 갖추고, 스님과 신도에게 공급되는 식사를 자체 조리하여 공양한다. 신도들에게 보시받은 돈을 가지고 식재료를 자체구매하는 경우도 있고, 신도들이 보시한 쌀과 식재료 등을 가지고 조리하는 경우도 있다. 장이나 김치의 경우 대부분 자체적으로 담그거나 관련 업체에서 구입해 충당하며, 일부 대형사찰이나 단체에서는 팔기도 한다.

7. 신분제도 속의 불교

고려왕조 때까지는 공식 국교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승려들은 고려왕이나 왕족 및 호족들 못지않은 우대를 받았으며 이 당시까지만 해도 국사(國師) 및 국승(國僧)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후에 조선왕조를 건국하게 된 이성계의 정치적 동반자로 알려진 무학대사도 고려왕조부터 승려로 지내왔다.

그러나 조선왕조 때부터는 사정이 달라져서 유림을 위시한 양반들에게 기득권이 넘어가고, 불교는 유교에 밀려 국교지위까지 상실하였고 승려들은 천민층으로 분류되어서 궁궐, 양반댁, 관료댁 등은 들릴 수 없고 포교활동도 할 수 없었다. 또한 양반 및 유림들은 대부분 유교사상에 숭상한 영향 때문에 불교와 승려를 매우 적대시하거나 천시하는 편이어서 이들에게 포교전래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교 및 유림과는 관계없는 단순한 일반평민과 천민층으로부터는 신앙대상이 되어서 대체로 우호적인 편이었다. 국교지위를 상실하고 승려들의 신분도 천민으로 내려갔지만 평민과 천민층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이 이어지기도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교학적인 성격이 옅어지고 기복성과 신비성이 강해지기도 했다.

1894년 갑오개혁과 1895년 을미개혁 때 신분제도의 폐지화와 함께 억불에서 벗어났고, 오늘날에는 가톨릭, 개신교 등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로 꼽힌다.[45]

8. 교육기관

파일:불교 종교표지(흰색).svg 대한민국의 불교 산하 고등교육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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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인대학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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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한국의 불교 산하 대학교는 모두 불교학과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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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학교(미션스쿨)들을 여럿 운영하고 있다.
  • 유치원
    • 동국대학교부속유치원
    • 내원정사유치원
    • 대자유치원

9.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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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양의 사례와 비교하자면, 전근대 유럽기독교를 믿는 국가들은 서로 자주 다투어도 같은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호국적인 면보다는 신앙(나아가 그것의 질서, 이익) 그 자체를 수호하는 데 의의를 두는 경향이 짙다. 대신, 유럽의 이런 유일신 신앙은 각 도시, 나라의 수호성인의 존재로 호국적 성격이 나타난다. 같은 하느님을 믿지만 A 나라는 베드로를 주로 기리고, B 나라는 요한을 주로 기리는 식이다. 유발 하라리 같은 일부 학자들은 이런 유일신 기독교의 특징을 다신교적 요소로 보기도 한다.[2] 쉽게 말해 하나에 승려들을 싹 몰아넣었다. 진짜 그런 건 아니고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3] 기존 왕즉불 사상에서 고려왕=부처의 권위가 고려왕이 아닌 원나라 황제에게 넘어가서 원황제=부처가 되었고, 원나라에서 계를 받은 스님들이 등장했으며, 고려의 거대 사찰들은 원나라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4] 김윤후 본인은 자신이 살리타이를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5] 중국의 명나라의 몰락과 청나라의 대두, 일본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종말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의 대두 등[6] 국가 복구, 외교 정비 등[7] 나라에서 빠른 공무 전달을 위해 배치한 역을 승려들이 멋대로 이용하거나, 가난한 농민들에게 살인적인 이자의 고리대를 걸거나, 심지어 불교에서 엄금하는 오신채를 재배해 팔기도 했다.[8] 세조 때는 승과에 합격한 자도 30필이나 되는 포를 바쳐야 했다. 그냥 100~200필보다는 적지만 당시엔 30필도 거액에 해당되었다.[9] 당시엔 부역의 노동환경은 극악에 가까워서, 부역 중에 죽은 자들이 상당히 많았다.[10] 일련종 소속으로, 지금의 도쿄 다이토구(아사쿠사) 출신이다.[11] 조선식 승려로 귀의를 했지만 1879년부터 일본 정토진종(眞宗)의 승려로 법계를 받았다.[12] 효령대군, 정의공주 등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13] 신분이 높든 낮든 이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라.[14]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한 경전. 불교중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없었다. 불교 반대파들이 "저 인간들은 출가해서 승려가 되는데 부모를 버리는 거 아님? 저거 불효임" 이런 식으로 공격하자, 불교 측에서 이에 맞서 "아니다, 우리도 효도를 강조한다."는 취지로 지은 경전이다. 게다가 유교에 비해 우월하다는 걸 은근히 드러내기 위해 "유교는 한 명의 부모님을 중히 여기지만, 우리는 만인의 부모를 중히 여긴다!"고 했다. 엄밀히 말하면 위경이기는 한다. 위경 참조.[15] 심지어 중일전쟁 시절엔 친일 승려들이 '탁발보국'이란 명목으로 비행기 등 군수품을 만들기 위한 위문 헌납금 모집 운동을 벌여나갔다.[16] 아내를 두고, 고기를 먹음[17] 일각에서는 이러한 일본 불교화가 근대화의 일환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8] 문제가 되었던 효당 최범술 스님은 독립운동가이면서도 정치가였는데, 불령선인회에서 천황 암살을 모의했으며, 불교 계열 항일비밀단체 '만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엔 정치가로서 제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다이쇼대학에서 불교를 배워온 대처승이란 이유로 같은 불교 내에서 평가절하되었는데, 북지황군위문단이라는 관립 친일 불교단체에서 활동해서 친일 논란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임혜봉 스님은 「친일 승려 108인」뿐만 아니라 대놓고「최범술: 불령선인회와 만당에서 활동 그리고 친일」이란 저서에서 최범술 스님의 친일행각을 고발하였다. 「친일 승려 108인」에 대한 소개.[19] 사실 이것이 꼭 불교 세력이 강했던 고려나 친일승려가 판치던 일제강점기만의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다. 판소리에서도 나올 정도로 조선시대에조차 치부(治富)하는 엉터리 땡초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작가 김정한사하촌에서 이런 추악한 면을 폭로하고 있다.[20]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는 (전체로 보면 극소수 분율이긴하나) 고신이나 침례회 같이 끝까지 저항한 부류가 있기는 하다.[21] 물론 아예 참여도 하지 못한 가톨릭이나 유교보다는 처지가 나은 편이겠지만.[22] 민족대표 33인의 종교별 구성은 천도교 15인, 개신교 16인, 불교인 2인이었다. 천도교가 주도한 독립선언에 당시 마침 105인 사건으로 탄압받고 있던 개신교가 적극 참여했고, 가톨릭은 각 단체의 이해관계 때문에 불참, 대종교친일파였던 단군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만주로 가서 항일무장투쟁을 꾸리고 있었다. 유림은 가톨릭처럼 학파별로 참여 여부를 놓고 논쟁하다 뒤늦게 김창숙 등 2인이 참가하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모임이 끝나버린 뒤였다.[23] 이외에도 105인 사건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서도 불교의 참여율은 저조한 편이다.[24] 한용운을 당수로 내세운 과격 비밀결사. 이용조, 조학유, 김상호, 김법린등이 창립 멤버였다. 정작 한용운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는 멤버마다 말이 다르다.[25] 애초에 만당의 성향 자체가 과격해서 친일 성향의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 찍혀 있었다.[26] 20년대까진 분명히 독립운동 경력이 있었다. 3.1 운동엔 과격시위를 지도했으며, 임시정부와 소통하여 박열이 구입한 폭탄을 운반한 것도 사실이다. 30년대부터는 일제와 친일 불교단체의 압력, 최범술 자신의 친일출신 한계(다이쇼대학 출신, 삼십본산연합사무소 기초위원)로 인해 실체가 불분명할 뿐이다.[27] 이 대통령의 정화유시는 이듬해까지 총 8차례 발표된다.[28]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을 의식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의 작품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실제로 오늘날 대도심의 시내에 있는 보이스카우트, YMCA 건물 중 연혁이 오래된 곳은 본래 사찰 소유 건물 혹은 토지였던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29] 태고종 자체는 삼국시대 고구려 소수림왕에 전해져 계속 법맥이 이어졌지만 한국불교태고종이란 종단은 불교정화운동에 밀려나 잔존한 대처승들이 1970년대에 고려 시대 명승 보우대사를 종조로, 박대륜을 종정으로 삼아 창시되었다.[30] 만해 자신도 처자식을 둔 대처승이었다.[31] 사실 절마다 형편이 큰 절은 웬만한 교회보다 잘 살고 작은 절은 못 사는 부익부 빈익빈. 오히려 큰 사찰은 불교 TV에 CF를 찍기도 한다.[32] 시주금은 개신교십일조천주교의 교무금처럼 처럼 교리적으로 납부기한과 납부금 제한마저 정해져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정기적 시주가 없어 불확정한 재정에 시달리기도 하고# 오히려 지나친 고액시주로 인해 뇌물수수 의혹에 시달리기도 한다. #[33] 당연히 모두 채식이다.[34] 천주교에서 5일, 9일, 54일 등 묵주기도가 있으나 이는 보속이나 신앙을 위한 기도일 뿐이고, 개신교에서도 수험생을 위한 100일 새벽기도가 있긴 하나 신앙적인 의미로 바치는 100일, 200일 새벽기도를 바치는 경우도 많다.[35] 같은 전라도 지역인 전라남도 역시 산간 및 도서 지역에서 불교세가 강하다. 비교적 강한 곳은 경상도와 가까운 무진장 일대와 구례 정도 있다.[36]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이전에도 지적되었으나, 조계종 전 총장인 설정의 도덕성과 제단법인 선학원 이사장 미투 논란으로 더욱 폭발해버리고 말았다.[37] 실제로 불교방송인 BTN과 BBS 모두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어린이, 청소년 포교용 컨텐츠가 나름 많았으나, 2010년대 이후 개편을 거치면서 대다수가 폐지 및 축소되었다.[38] 2012년에 천주교개종.[39] 근데 이것도 신자라기보다는 그저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것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본인이 딱히 천주교 신앙을 내비친 적도 없기 때문 마찬가지로 불자로써의 신앙심도 보이지 않았다.[40] 해외신문에서는 '한국의 고대국가에서 왕들을 처벌할 때 쓰던 방법을 현대에 재현했다.'라는 기사를 냈다.[41] 지금의 부처님오신날.[42] 박정희 정권 이전에는 성탄절만 공휴일이었다. 개신교 신자 이승만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다만 박정희도 갑자기 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한건 아니고 마침 불교계에서 성탄절만 공휴일로 지정된것을 불공평하다며 불교계에서 소송을 걸어서 인정해준 것이다. 물론 소송을 걸었어도 박정희가 무시했을수도 있을테니 박정희가 친 불교적 성향이 있었던게 영향이 있긴 있었지만.[43] 2007년 해인사 대비로전 건립 불사(佛事)에 들어간 비용 전액을 노무현이 부담했다. 이 대비로전에 한국 최고(最古)의 목조 비로자나불상이 있다.[44] 이런 인연 덕분인지 노무현 사망 때는 마침 하안거(여름 3개월간 하는 수행) 기간이었는데도 2009년 5월 24일 하안거를 깨고 해인사 스님 300명이 봉하마을로 와서 노무현 빈소에 조문했다.[45] 반면 종교 탄압국가인 북한의 경우 김씨일가가 아닌 유교, 가톨릭, 개신교등 다른 신을 모시는 종교들은 국가 반역죄로 간주해 철저하게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김씨 일가를 숭배하는 주체사상이 국교지위 될정도로 사실상 종교화 된상황이라 불교도 마찬가지로 예외는 아니라서 조선 시대때 억불정도가 아니라 아예 북한의 종교 말살을 대상이 되었고 천민층으로 분류되었던 승려들도 반공 분자, 국가 반역자로 간주했고 한국 전쟁이후 농업 집단화를 강행함과 함께, 사찰에 있던 승려까지 모조리 강제 노동에 내몰고 탄광 등에 강제수용함으로써 불교의 씨를 없애버렸다. 이후 조선로동당이 정치적 목적에 맞게 조선불교도련맹을 만들어 사찰에는 조선노동당에서 통일전선부에서 파견한 관리인이 들어앉게 되었다. 사찰은 역사/문화적인 고전 건물이자 민족주의 고취의 수단으로 보존되고 있을 뿐이며, 휴양소와 정양소, 지질 탐사대와 임산의 숙사로서도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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