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모습은 망나니 장군에 출연한 마츠다이라 켄의 모습.
《市川鰕蔵の竹村定之進》[1], 도슈사이 샤라쿠 작, 에도 시대 |
1. 개요
丁髷 (ちょんまげ)[2]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서 에도 시대까지의 헤어스타일로 일종의 상투다.
이마 위쪽부터 정수리를 비롯한 머리 위쪽을 거의 밀고 옆머리와 뒷머리만을 길러 상투로 틀어 올린 모양이다. 머리의 위에서 보면 고무래 丁(정)자와 비슷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다만 위 이미지나 후술된 내용처럼 본래 고대부터 가마쿠라 시대까진 흔히들 생각하는 모양이 아닌 전근대의 한반도 국가와 같이 머리를 기른 형태였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윗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모양은 센고쿠 시대 쯤 유행해 에도 시대에 정착된 케이스라고 한다.
2. 상세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패션 테러리스트 수준의 망측한 헤어스타일이만, 이런 전통 예식이 다 그렇듯 당시엔 나름대로 이유가 다 있었다. 전통적으로 인구 밀집 지대였던 일본 남반부는 여름에 한반도보다 훨씬 더우면서 습한 기후를 보였는데,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전투를 하다 보면 체온이 급격히 상승하기 마련이다.즉, 변발과 비슷한 이유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변발은 촌마게와는 달리 위생적 요인도 있었다. 변발을 하던 민족들이 활동하던 중국 북부나 더 북쪽의 유라시아 초원지대는 강수량이 적어 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장발을 하면 위생적으로도 대단히 불결했다. 반면 일본은 전국 어디에나 온천이 많고 한반도나 북중국보다 비도 자주 고르게 내리는 편이다. 대신 기후적으론 일본 쪽이 훨씬 더 습한 더위를 겪기 때문에 어쨌든 버티려면 다 빡빡 밀어야 했다.
그래서 촌마게는 전국시대 때 특히 유행해 에도시대까지 흔했으나 메이지 유신 및 일본의 문호 개방 이후로 일본제국 정부에서 단발령을 내려 다 자르게 했다.
사실 일본은 고대부터 가마쿠라 시대까지만 해도 머리를 길러서 뒤로 묶거나 관을 썼을 경우 관 밖으로 삐져나오는 머리카락을 밀어주는 정도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관모 칸무리를 쓸 때 머리를 막대 모양으로 모은 뒤 비녀로 뚫어 관에 고정시켰다.
그런데 가마쿠라 시대부터 일본의 지배층으로 떠오른 사무라이들의 경우 늘상 투구를 쓰고 격한 싸움을 하기 때문에 열을 식히기 위해 삭발을 할 필요가 있었는데, 상술한 관을 쓰는 방식 때문에 관을 쓸 때 필요한 머리카락만큼은 깎지 말고 남겨둬야 했다. 따라서 관을 고정시킬 뒷머리는 남겨두고 윗머리를 민 스타일이 무사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촌마게의 기원이다.
이후 전국시대 전후로 헤어스타일이 변해 앞머리와 윗머리를 밀어버리고 상투 부분이 뒤로 누워 머리에 납작하게 붙는 모양으로 변하면서 코지에 비녀를 꽂는 대신 흰 종이끈으로 머리와 턱을 둘러 고정하게 된다.
전국시대 때는 사무라이들이 이런 머리를 많이 하게 되었다. 전쟁이 계속 되는 상황이었기에 실전적인 이유가 주였지만, 평화로운 상황에서도 '난 항상 출전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보여주는 과시적 용도로 촌마게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러다 전국시대가 끝난 이후에는 일종의 사무라이 특징 중 하나로 굳어졌고, 관료가 되어버린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들도 이런 머리를 계속 유지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계층에게도 유행하기 시작해 그냥 상인들이나 농민들도 했다고 한다.
다만 에도 시대라고 해서 모두가 촌마게를 한 건 아니고 의사[3], 유학자, 수도승 및 공경 등은 예전처럼 머리를 밀지 않고 길러서 뒤로 묶는 소하츠(総髪)라는 머리 모양을 했다. 그 외의 촌마게를 하는 사람들도 전부 똑같이 하는 게 아니고 계급이나 직업 등에 따라 헤어스타일을 조금씩 다르게 했다.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71년, 일본 정부에서 단발령을 내리면서 결국 성년남자 모두 촌마게를 다 없애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들 반발했지만, 천황이 앞장서서 잘랐다고 하자 큰 저항 없이 전국적으로 퍼졌다. 대한민국에서 단발령이 있었을 때보다는 훨씬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는 조선의 상투가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라는 유교적인 철학에 기반한데 비해 일본의 촌마게는 그냥 실용적인 풍습에서 시작해 관례로 정착한 정도일 뿐이었기에 좀 더 쉽게 순순히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당시 사무라이들이 머리카락 따위보다 좀 더 불만을 가진 것은 사무라이의 진짜 상징 일본도를 못 들고 다니게 한 폐도령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면서 촌마게는 일본의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완전히 사라졌기에 사극 배우들 내지는 스모 선수들이나 하는 수준이 되었으며, 현대 들어서는 탈모인들에게 좋았던 시대가 에도 시대라거나 에도 시대 때의 분위기가 계속 유지되었으면 탈모인들이 멋쟁이였을 것이라는 식의 유머 소재로 취급되기도 한다.
일본의 단발령은 중화민국의 변발 금지령과 달리 서구화로서의 요소가 더욱 강한 면도 있었다. 메이지 시대에 있었던 적극적인 서구화가 일본 내에서 탈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해지는 데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신해혁명 직후의 중화민국 초기에 있었던 변발 금지령이 서구화로서의 측면도 있지만, 청나라의 만주족 문화와의 단절이라는 한족 민족주의로서의 측면도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오히려 일본은 머리보다는 일본도 패용을 전격 금지하는 폐도령이 훨씬 더 반발이 심했다. 백수가 될 위기에 처한 사무라이들이 대거 반발을 하여 세이난 전쟁이 터지기도 했다.
청나라 시대 이후의 변발과 마찬가지로 옛 일본인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여겨지는 헤어스타일이라 여러 그림이나 매체에서는 고대 일본인이나 헤이안, 가마쿠라 막부 시대 사람들까지 촌마게를 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앞에서 말했다시피 전국시대 즈음부터 유행해 에도 시대에 완전히 자리잡은 헤어스타일이므로 이는 잘못된 고증이다.
게다가 한국, 중국의 상투 및 속발과 달리 꾸준한 관리가 필요한 머리였다. 한국 상투는 몇 주 방치해도 그렇게 티가 안 나지만 일본의 촌마게는 부분적으로 짧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민머리였기 때문에 조금만 놔두면 시커멓게 새 머리카락이 올라와서 티가 많이 났으므로 그 부분은 면도를 자주 해 줘야 했으며, 상투 부분도 삐져나온 머리 없이 깔끔한 모습으로 정돈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엔 나름 럭셔리의 상징이기도 했다. 후쿠스케 인형의 모습에서 당시의 이러한 인식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일단 당연하게도 상위 계급 사무라이들의 기본 헤어스타일인데, 깨끗하지 못하고 짧게 털이 숭숭 난 머리는 예의 없어 보이기 때문에 상급자에게 정돈되지 않는 머리를 보여주는 것은 인사고과에 마이너스였고 게다가 게으르며 무능력한 가난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이건 현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에도 시대의 기록을 보면 하급 사무라이가 평균 3일에 한 번 정도 미용사에게 머리 손질을 받았다고 하니 관리가 빡센 걸 알 수 있다. 본인이 손수 밀면 되지 않나 싶은데, 수염과 달리 머리쪽을 부분적으로 제모해야 되어 본인이 하긴 힘들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의 경우 따로 종자가 깎아 주거나 해 주는 사람을 따로 고용했다. 대도시에는 이발소가 따로 있어 미용사들에게 3 ~ 5일에 한 번씩 머리를 맡겼다. 개중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는 그냥 부인이 깎아줬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 탈모가 될 경우에는 관리 비용이 줄지만 뒷머리까지 탈모가 된 경우나 원형 탈모의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서 상당한 고민거리였다고 한다. 속칭 '주변머리가 없는' 유형의 탈모가 제일 심각했다. 정작 길러야 하는 부분이 빠지고 밀어야 하는 부분이 남기 때문이다. 이 정도까지 오면 보통 노인일 테니 은퇴하고 여생을 보냈지만, 당연히 조기 탈모가 오는 사람도 있으니만큼 젊은 사무라이도 탈모에 걸렸는데, 젊은 사무라이는 한창 일해야 할 때 은퇴를 할 수 없는 노릇이라서 가발을 쓰고 다녔다.
사치를 멀리 하는 풍조의 집단에 속했거나 설혹 그렇지 않더라도 개인이 검소함을 신조로 삼은 경우엔 머리를 길러서 촌마게를 하기도 했다. 물 부족으로 변발이 효율적인 중국과 정반대로 일본은 강수량이 풍부한 기후대가 많았기 때문에 머리를 길러서 감는 게 더 효율적이기도 했다. 이를 상술했듯 소하츠(総髪)라고 한다. 실제로 도망다니는 낭인의 상징 중 하나가 덥수룩한 산발 머리다. 전국시대 일본을 다룬 영화를 보면 아시가루 같은 말단 무사나 평민들은 이마 위로 반삭처럼 짧게 머리가 나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영주들이나 가신 같은 고위층들은 말 그대로 맨살이다.
다만 중국의 변발은 중국 내에서도 북쪽 초원에서 건너온 풍습으로, 정반대 동남아시아와 맞닿은 남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강수량이 풍부한 편이라서 일본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길러서 감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청나라의 중원 입관 당시 북방 한족들보다 남방 한족들이 더욱 강하게 변발령에 저항했던 것도 이렇게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었던 면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변발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는 남방 한족들도 신해혁명에 참여한 이들 및 도사라서 청나라 때도 합법적으로 변발을 안 했던 이들을 제외하면 북방 한족들 못지않게 변발 금지령에 격렬히 저항하다가 강제로 변발이 다 잘렸다.
3. 매체
영화 대보살고개의 한장면. 촌마게 후 일정기간 동안 머리를 밀지 않으면 대충 이런 머리가 된다. 위쪽은 스포츠 머리 같은데 옆은 길어 뒤로 바싹 묶어 올렸다.
이 기묘한 헤어 스타일의 역사적 존재 때문에 일본 중세 사극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아역이 아닌 이상 촌마게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분적으로 삭발을 해야 하는 아픔이 있다. 위의 마츠다이라 켄처럼 사극에만 고정출연하는 배우들은 편하려고 아예 스킨헤드 혹은 1mm 삭발을 하며 그걸 계속 유지한다. 현재는 분장 기술의 발전 덕분에 부분 대머리 분장을 하기도 한다.
이 시대를 다룬 드라마 <노부나가 콘체르토>에서는 가신들이 최신 헤어스타일을 상경 준비를 하는 주인공에게 권하지만, 주인공이 못 하겠다며 생떼를 부리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은 모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라고 묻는 주인공의 말에 가신 일당이 뜨끔해한다.
한국에서는 그 부분을 대머리 가발처럼 처리한 가발을 쓰기 때문에 한국 배우들은 일본 배우들보다 사정이 나은 편이다. 청나라 변발과는 달리 옆머리를 밀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듯. 그리고 아무래도 현대 관점에서 보기엔 이질감이 좀 심하기에, 일본 창작물 중에선 덥수룩한 산발이나 꽁지머리로 때울 수 있는 낭인이 주인공으로 애용되기도 한다.
키테레츠 대백과의 로봇 코로스케의 머리도 이 촌마게의 일종이다. 한국어로는 '상투'로 번역되었다.
육家네 6쌍둥이에서는 대머리(...)로 현지화되었다.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1521년) 8월 12일 신묘 두 번째 기사에는 '방망이 상투(椎結)'라고 언급한다. 조선에서도 대머리인 사람은 뒷머리나 주변머리를 모아서 촌마게와 비슷한 모양새의 상투를 틀기도 했으니 변발처럼 아주 이질적이지는 않았던듯 한다.
일종의 능욕 행위인 '촌마게'도 있다. 한국어로는 '상투놀이', '상투' 등으로 번역하는데 남자가 타인의 정수리에 음경을 올려놓는 것. 그 모양이 촌마게와 비슷하다. 노노무라 병원 사람들의 카이바라 타쿠마로가 시전한다. 전투원, 파견합니다!의 전투원 6호도 시전했다.
배경이 에도 시대거나 그 이전 전국시대처럼 일본 전근대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들 중, 고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면 정작 비중이 제일 떨어지는 헤어스타일이기도 하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외관상 매우 거시기하기 때문에 주조연급 남캐들이 죄다 윗머리를 확 밀어버리고 있으면 여러 모로 그렇기에 대체로 그냥 길게 자란 머리를 뒤로 묶은 포니테일이나 꽁지머리, 소하츠 스타일로 하는 게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메이지 유신 같은 근대 이전엔 촌마게 외에 포니테일처럼 기른 머리를 뒤로 묶거나 소하츠로 하는 경우도 분명 있었으니 이런 역사적 사실로 비주얼에서 타협을 봤다고 보면 된다. (ex.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의 히무라 켄신, 이누야샤의 코하쿠, 도로로의 햐키마루) 물론 엑스트라들은 그런 거 없이 대부분 촌마게를 하고 다닌다.
순정만화 청루 오페라 2권 후기에 의하면 순정만화 잡지인 베츠코미에는 촌마게 금지령이 있다고 한다. 조연은 허용되지만 남주인공 급은 안 된다는데 역시 이것처럼 비주얼적인 이유에서인 듯. 일본 만화의 이런 경향 때문에 일본 만화만 즐겨 본 서양인 와패니즈들 중에서는 촌마게의 존재를 잘 모르고 과거 일본 남자들이 포니테일, 혹은 산발만 하고 다닌 줄 아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 사극중 고증이 중요치 않은 퓨전사극에서 고려, 삼국시대가 배경이라면 주연급을 맡은 남성 배우들이 마찬가지로 상투를 틀지 않고 장발로 나오는 것과 비슷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도 청나라 시기 변발을 가장 극혐하고, 중국 사극과 몽골 사극에 나오는 몽골인 캐릭터들이 제대로 된 몽골식 변발이 아니라 몽골식 변발에서 땋은 머리는 그대로이나 삭발이 없어진 머리 모양으로 나오기도 하는 걸로 보아 시대에 따른 헤어스타일에 호불호가 갈리는 건 만국공통인 듯.
4. 전근대 일본의 외모 풍습 목록
5. 둘러보기
6. 같이보기
[1] 가부키 배우 4대 이치카와 에비조(四代目市川鰕蔵)가 타케무라 사다노신 역으로 분장한 모습. 이 배우는 후에 6대 이치카와 단쥬로(六代目市川團十郎)로 개명한다.[2] 위의 사진은 일본 헤어스타일이 야마토에서 메이지 시대까지의 변화하는 모습이다. 메이지(明治:명치)시대에 서양식 머리가 된 건 덤.[3] 그러나 에도 시대 의사들 중에는 정반대로 위생 때문에 완전 삭발한 경우도 많았다. 드라마 JIN-진-에서도 한방과 난방(네덜란드식 의술)을 가리지 않고 의사의 반절 이상이 삭발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잘 모르는 한국인 시청자 입장에서는 승려들이 의사를 겸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