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본의 외교 관계.일본은 동아시아의 선진국[1]이자 강대국[2]으로, 제1세계 내에서도 대표적인 친미 국가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시아-태평양 지역 내 미국의 최우선 파트너이다. 오늘날 일본은 추축국의 멍에로 인해 정치·군사적으로는 적잖은 제약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3위 규모의 경제력과 오랜 기간 쌓아온 외교 역량[3]을 바탕으로 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4][5]
일본은 2022년 기준 152개국에 자국 대사관이, 157개국의 대사관이 도쿄에 설치되어 있다. #
2. 역사
2.1. 근대 이전
고대에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한반도 국가들 및 중국과 교류가 많았다. 그리고 한반도 국가들과 중국을 통해 문물을 많이 받아들였다. 그외에도 바닷길을 통해 동남아 국가들과도 교류가 일부 있었고 일본인들 중에도 동남아에 정착해서 생활한 경우도 있었다.조선, 베트남, 중국 등과 외교를 했다. 15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일본에도 진출하면서 천주교를 전파했지만, 기독교가 퍼질 것을 우려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가 생긴 이후 유럽인 탄압이 이루어졌고 네덜란드 이외의 국가와는 무역을 하지 않았다.
근대 이전의 일본에 외교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1582년 유럽인들에게 일본의 존재를 널리 알려지게 한 사절단 덴쇼 소년사절단이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왕복해 유럽을 방문한 하세쿠라 츠네나가도 유명하다.
2.2. 일본 제국
19세기 중엽 일본의 에도 막부는 쿠로후네 사건을 계기로 급격한 개화압력에 맞닥뜨리게 되나, 당사국인 미국이 남북 전쟁을 치르는 사이 자국의 역량을 총결집하여 근대화를 이룩하고, 대정봉환·판적봉환을 거쳐 중앙집권적인 일본 제국을 형성하는 데 성공한다. 1870년대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울 파견해 유럽 문명들을 직접 보고 겪었는데 이때의 충격은 일본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신생 일본 제국의 당면 외교과제는 단기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침탈에 맞설 자구책을 확보하며 장기적으로는 서구 열강들 사이에서 일본의 이해를 관철시킬 방책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이에 답하고자 아시아주의부터 정한론과 탈아입구, 세계최종전쟁론까지 온갖 사상이 난립하였으나, 일제는 주변국들을 침탈하여 스스로 제국주의 열강에 올라서겠다는, 어찌 보면 가장 쉽지만 가장 위험한 노선을 택하였다. 그 결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 일제는 류큐 왕국을 오키나와현으로 완전히 편입했고, 청일전쟁 승리로 대만을 합병했으며, 러일전쟁으로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에서 조선-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한 데 이어 5년 뒤에는 식민지화했다. 뒤이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일본 제국은 승전국의 편에 서서 패전국의 일부 극동 식민지를 확보하였고, 이를 즈음하여 형식적으로나마 내부적인 제도 정비 역시 끝마치면서 국제적으로도 제국주의 열강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럴싸한 겉보기와는 달리 대다수의 일제 신민들은[6] 여전히 착취와 빈곤에 시달렸으며, 국부(國富)나 과학·군사기술, 국민들의 근대화 수준 역시 서구 열강에 비하면 처참한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급격한 근대화와 팽창의 결과 내부에서는 자치·독립을 요구하는 식민지의 민족주의 운동 및 평등·혁명을 요구하는 공산주의 운동이 동시에 터져나왔고, 1930년대 이후 일본 제국은 이를 군국주의로 억누르며 만주, 중국, 동남아시아, 태평양으로 연이어 무리한 팽창을 꾀하다가 끝내 미국의 원자폭탄 두 발에 패망하면서 대부분의 영토를 토해낸다.
2.3. 현대
패전 이후 일본은 7년여 간 미군의 통치를 받았고, 이후 55년 체제가 성립되었다. 냉전기 일본의 외교 전략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우위를 받아들이고 서방진영에 속한 국가들과 연대하여 북한·중국·소련을 견제하는 것이었으나, 동시에 자국의 경제적 역량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및 인접 지역[7]에서의 부분적 역내 패권 유지[8]를 추구하기도 하였다.그러나 강력한 문화·산업 역량을 바탕으로 미국마저 위협하던 일본의 경제는 플라자 합의 이후 거품이 꺼지고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며 끝없는 경기 침체로 이어졌고, 그 사이 중국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일본이 구축해 둔 친일 네트워크가 하나하나 잠식당하고 있다. 비록 냉전이 제1세계의 승리로 끝나면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해갈 수 있었으나,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를 들고 나오는 바람에 일본 입장에서 위협적인 경쟁자인 중국 견제에 반드시 필요한 미일관계마저 흔들리고 있는 처지[9]이다. 대한 외교 역시, 군사정권 시절에는 양국의 현실적 필요[10]로 인해 그리 나쁘지 않았고 이후 잠재적 파트너인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국력도 신장되었으나 양국의 과거사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리스크가 존재한다. 때문에 오늘날 일본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선진국이자 경제 대국이라는 이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안보적으로 마냥 웃지만은 못하는, 다소 불안한 외교적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11]
2.4. 미래
20세기 전반기 내내 일본은 한국[12], 중국[13], 소련[14]을 죄다 적으로 돌렸지만 영국, 미국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역내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다. 비록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 일본 제국은 패망하였으나, 대일 승전의 최대 주주인 미국은 냉전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일본의 어두운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았고, 중화민국은 국공내전의 패배로 인해 국력이 급격하게 쪼그라들면서 역시 별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반면 20세기 후반기 일본은 미국의 보호·감시 아래 다시금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결과적으로 패전 이후 미군정기 잠깐을 제외하면 100년 이상 세계 열강의 지위를 누려온 셈이다.[15]그래서인지 일본의 외교 노선은 1930~40년대 귀축영미를 외치던 군국주의 시절을 제외하면 탈아입구로 일관되어 있었다. 서구와의 긴밀한 관계는 일본을 아시아 최선진국이자 서구의 대변자 지위에 빠르게 오르게 하였다. 아시아 주변국들과의 외교에서는 거의 대부분 갑의 위치에 있었고, 그래서 독일과 달리 상대적으로 과거사 청산에 대한 압박으로부터도 훨씬 자유로웠다.[16]
만일 지금 일본이 경제적 전성기처럼 역내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는 상황이었다면 그나마 진심어린 사죄가 통할 가능성도 있고, 일본 사회도 의외로 그런 사죄를 할 여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17] 그러나 중국의 부상과 그로 인한 세계적 패권 경쟁과 동시에 한국이 한강의 기적으로 완전히 성장을 함과 동시에 한중일 패권 경쟁이 똑같이 진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국제적 초점이 일본의 과거사가 아니라 동아시아에서의 세력 다툼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그에 따라 일본의 과거사 문제도 순전히 역사와 도덕의 관점보다는 다분히 정치적인 관점에서 조명되고 있다. 이런 국제 사회의 관성적인 인식을 뒤집는건 근미래에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일본의 외교적 딜레마는 다시 아시아주의 대 탈아입구의 문제로 돌아간다. 일단, 대한민국, 대만[18] 등 같은 동아시아에 속한 국가들과의 과거사를 청산함으로써 독일 휘하의 EU처럼 북미, 동구권, 아랍권 등에 버금가는 강한 역내 파트너쉽 창설을 추구하는 길이 있다. 이는 과거 일본 제국의 아시아주의자들이 한국과 중국의 개화를 지원하고 독립을 보장하여 서구 열강들의 도전에 맞서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을 현대적으로 실현한 것이다. 실제로 일본 내 좌파들이나 황실의 평화주의자 세력이 추구하는 방향성이 결국 이것이다. 궁극적인 연대의 대상은 문화적 동질감이 있는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은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 제국이 걸었던 길이다. 그 당시의 일본은 '원숭이 놀음'이라는 굴욕적인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필사적으로 근대화했다. 그리고 대영제국의 지원을 받아 대국을 쓰러트리고 마침내 열강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러나 그 힘과 지위는 주변 영토를 강탈하고 침략 전쟁에 남용되었다.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이 길은 현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일본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선택지는 탈아입구의 연장선상에 있는 길이다. 현재 일본은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적과 지금도 항상 사사건건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적과의 대결에 맞닥트린 상황이다. 그래서 보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충돌할 여지는 적으면서 안보적인 이해관계도 일치하는 인도, 호주, 동남아시아와의 연대를 강화하여 역내 균형을 추구하는 것 또한 합리적인 선택지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계에 자국의 '합리성'과 '선진성'에 대조되는 한국·중국 등의 '불합리성'을 어필하여 주변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압도적인 국제적 지지로 꺾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을 정확히 판단하고,[19] 일본 정계가 스스로 그 방향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국내외적으로 유도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3. 국제사회의 인식
이스라엘과 구 동구권 국가들을 제외한 세계인의 독일에 대한 인식과 마찬가지로 한국, 중국 등 국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가 일본에 대체로 우호적이다. 반면 한국과 중국 등의 국가들은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철면피로 외교 무대에 나서는 일본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다. 그나마 한국은 신냉전 시대에 접어든 이후 반일감정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일본은 아시아 유일의 G7 국가이고 미국, 중국 다음으로 명목상 GDP가 높은 3위의 경제대국이며 역사적으로도 아시아 유일의 근대화 국가이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좋든 나쁘든 세계적으로도 인지도가 높은 대국이다.
국제적으로 선진국으로 분류되며 미국을 축으로 하는 서방진영에 속한 국가 중 하나이다. 서방에서 일본은 중요한 파트너로 인식된다. 일본 역시 서방과의 공조를 중시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특히 일본이 가장 신경쓰는 나라는 동맹국이자 초강대국인 미국이다. 자세한 것은 하단 및 미일관계 참조.
유럽의 주요 국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 특히 영국, 독일과 유사성이 많은데 영국과는 섬나라라는 지리적 특성과 입헌군주제라는 점, 그리고 독일과는 오랫동안 봉건제 국가였고 파시즘과 2차 대전이라는 흑역사를 공유한다는 점, 내각제를 기본으로 총리가 국가의 수장인 점,[20] 비상임이사국이자 강대국이라는 점, 그리고 제조업 강국이라는 점이 여러모로 닮았다.[21] 그리고 프랑스와도 사이가 매우 좋은데 양국의 문화 교류도 활발하다. 19세기부터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 사이에서 일본 화풍이 유행한 바 있다.[22] 이외 기타 유럽 국가들 역시 같은 서방진영에 속한 일본과 대체로 좋은 편이다.
남아메리카 국가들과도 관계가 우호적인데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많은 일본인들이 남미로 이주한 바 있다. 현대에도 남미에서 일본인 공동체는 꽤나 큰 이주자 세력이며 마찬가지로 20세기 후반 이후 많은 남미 외노자들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이러한 인적교류로 인해 남미 국가들과도 나름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 분포한 개발도상국 사이에서도 일본의 이미지는 좋은데 이들에 대한 UN 분담금을 미국 다음으로 많이 내는 나라가 다름 아닌 일본이다. 특히 동남아의 경우 반세기 이상 일본으로부터 원조를 받았고 일본 기업들의 생산 공장들이 다수 진출했기 때문에 일본과 매우 우호적이다.
현대 일본은 북한을 제외한 모든 UN 회원국들과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상태이다. 또한 비회원국인 니우에, 바티칸, 코소보, 쿡 제도와도 국교를 맺었다.
4. 비판
자세한 내용은 일본/외교/비판 문서 참고하십시오.5. 국가별 관계
5.1. 아시아
자세한 내용은 일본-다른 아시아 국가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5.2. 유럽
자세한 내용은 일본-유럽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5.3. 아메리카
자세한 내용은 일본-아메리카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5.4. 아프리카 · 북아프리카
자세한 내용은 일본-아프리카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5.5. 오세아니아
자세한 내용은 일본-오세아니아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5.6. 기타
6. 관련 문서
- 일본/외교/옛 식민지 국가들과의 관계 / 일본/외교/비판
- 아베 신조/외교 정책
- 한중일관계
- 한미일관계
- 한국-대만-일본 관계
- 미중일관계
- 미영일관계
- 일본-아프리카 관계
- G4
- TPP
- IPEF
- CHIP4
- 푸른태평양동반자
- 인도-태평양
- 미일동맹
- 주일미군
- 주요 7개국 정상회담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동아시아 국가
[1] 일본은 흔히 선진국의 지표로 쓰이는 OECD는 물론 G7의 회원국이기도 하다.[2]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UN 상임이사 5개국과 일본, 독일[3] 일본은 유럽과 미주를 제외한 지역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었으며, 그만큼 국제 외교무대에 데뷔한 역사도 길다.[4] 한국, 중국 등 지역을 제외하면 일본의 대외적 이미지는 세계적으로 상당히 좋다. 심지어 한국과 중국에서도 외교적인 갈등과 별개로 일본 문화의 인기와 활발한 민간 교류로 인해 과거 대비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으며 맹목적인 반감만이 존재하진 않는다. 당장 한국과 중국의 유명 매체들이 일본의 매체들을 모방하거나 참고해서 만든게 대다수이며 블루 아카이브나 벽람항로처럼 일본 시장을 노린 게임도 만들었다.[5] 다만 세계 3위라는 경제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교적 영향력을 잘 행사하지 못한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보다 인구와 경제력은 적어도 상임이사국이자 핵무기 보유국이자 각각 영연방과 불어권을 이끄는 수장국으로서 세계 각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서 일본보다 외교적 영향력이 훨씬 크다. 게다가 같은 추축국 출신인 독일 역시 유럽연합 내에서는 경제력을 발판으로 상당한 외교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비유럽권에서도 유럽연합을 통해 간접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반면 일본은 기껏해야 동남아와 대만 등지에서 경제력을 통한 간접적인 영향력을 유지하며 그외의 지역에서는 경제 이외 분야에서 존재감이 적다. 이는 동북아에 반서방 진영이 포진된 국제 정세 및 일본이 이웃 국가들의 신뢰를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다는 결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현안에서 단 한번의 반대 없이 예스맨으로 일관하는 일본의 외교적 자세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일본은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거수기 역할만 할 뿐 자신들이 안건을 주도하는 경우가 전무하다. 반면 프랑스와 독일은 맹목적인 친미 스탠스가 아니고 한때 ‘부시의 푸들’이라 조롱받던 영국조차도 일본에 비해서는 미국에 할 말을 하는 편이다.[6] 심지어 일본인 하층민들조차도 그러했으니 조선인, 중국인 등 식민지의 사정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중화민국 지역의 중국인들에 비하면야 내지의 일본인들이 나은 편이긴 했지만, 당대 중국은 내전 때문에 정말로 민생을 돌볼 여력이 없었던 반면 일본은 제국주의에 눈이 멀어 내부 모순을 방치한 것에 가깝다.[7]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남아시아 등[8] 물론 군사적인 팽창보다는 경제적인 종속의 의미이다. 최근 대한민국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서 비슷한 방향으로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9] 대표적으로 미국의 TPP 가입 철회가 있다. 사실상 미국의 보증으로 역내 친서방 국가들을 통합하여 중국에 맞서겠다는 복안이었는데, 미국이 떠나면서 형식적인 연대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게 되었다. 관세를 포함한 각종 경제적 압박은 덤이다. 물론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본적인 일본의 국력이 있고 미일관계가 있으니 정도 이상으로 돌아설 리는 없지만, 플라자 합의 이후 미일관계에서 지금처럼 경제적인 대립이 심한 적도 없었다.[10] 일본은 공산권의 위협을 일차적으로 막아 줄 강력한 반공 동맹이 필요했으며, 한국은 경제 발전의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의 차관이 필요했다. 게다가 박정희와 전두환 모두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 주류 정계와의 커넥션이 많았으며, 한일 간 가장 민감한 이슈인 과거사나 독도 이슈 역시 서로 꺼내들기보다는 덮고 가자는 쪽이었다. 비록 한국은 독재 정권인 반면 일본은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 정부였다는 차이는 있지만, 추구하는 이념이나 정책 역시 비슷했다.[11] 비슷하게 추축국이자 패전국의 멍에를 뒤집어썼던 독일과 비교해보면 이 문제점이 두드러진다. 독일은 심지어 기존의 국가 체제가 완전히 엎어지면서 분단까지 되었고, 대륙국가의 지정학적 요건 상 안보 위협도 훨씬 큰 데다, 경제력 역시 일본에 미치지 못하지만, EU를 통해 오늘날 일본에 비해 훨씬 우호적인 외교구도를 조성하고 있다. 독일에 인접한 프랑스, 폴란드, 오스트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체코, 스위스 모두 독일을 공격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외부에서 독일을 침략하면 대신 방파제가 되어 줄 위치의 국가이다. 게다가 주적이라는 러시아도 미국보다 유럽 연합과 그 수장국인 독일을 더 말이 통하는 파트너로 판단하고 있고. 반면 지리적으로 일본에 가까운 대한민국, 북한, 중국, 대만, 호주, 동남아 중에서 일본에 우호적인 나라는 대만, 호주, 동남아 정도에 불과하며, 개중에서도 동남아와 호주는 위치 상 방파제가 되어줄 수 없다. 적성국인 북중러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동맹 체제에 같이 묶여있는 한국조차도 북중러의 편을 들리야 없겠지만 동아시아에서 미국만을 유의미한 대화 파트너로 평가하며 대일외교는 미국의 기대치에 최소한으로 부합하는 정도로 유지한다. 이것만 봐도 전후 일본의 외교적 실패는 명확하다.[12] 경술국치로 인한 한반도 식민지화.[13] 청일전쟁, 불평등 조약의 강요, 만주 사변과 중일전쟁.[14] 러일전쟁의 앙금, 적백내전 당시 간섭군, 할힌골 전투 등의 국경분쟁, 소일전쟁.[15] 장제스의 중화민국이 1940년대 초 모든 불평등 조약을 해지하고 중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전까지는 서구 외교가에서 자대등한 열강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던 것과 비교된다.[16] 사실 독일도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식민지나 동구권 소수민족들에게 제대로 사죄하지 않았다. 허나 어쨌든 독일은 적어도 양 옆에 있는 필요한 프랑스나 폴란드, 적국이었던 소련, 그리고 유대인의 이스라엘과의 과거사 청산은 철저하게 했다. 반면 일본은 적대든 우호든 대전략의 일부를 필연적으로 차지할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는 물론, 같은 진영에 속한 일부 유럽 국가들에게도 전쟁범죄를 부인한다.[17] 실제 일본은 경제적으로 부강하던 1960~1990년대에 상대적으로 과거사에 전향적이었다. 일본 사회가 우경화된 시점은 일본 경제가 어려워지는 잃어버린 30년의 시작 시기와 상당히 맞물려 있다.[18] 추가로 중국과 북한까지 같이 포함한다.[19] 대한민국의 외교 전략에서 일본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되느냐에 따라 일본이 어느 방향을 추구하는 편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지도 달라질 수 있다. 겉보기에는 아시아주의가 좋아 보일 수 있지만, 예컨대 과거 아시아주의의 최대 지지 세력이 일본 내 공산주의자들이었음을 감안하면 그 당시 북한과 중국에 연대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의미만은 아니었을 수 있다. 반대로 일본이 탈아입구에 기초한 전략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만일 모종의 이유로 인해 한일관계가 6~80년대 수준으로 다시 급격히 진전된다면 (일본 입장에서) 탈아의 대상에 대한민국까지 포함되어 중국을 포위 견제하는 개념이 될 수도 있고. 인간사에서도 대인관계가 손뼉이 맞아야 소리가 나듯, 외교도 결국 국가간의 합이 맞아야 하는 거다.[20] 단 독일은 군주가 없는 공화정이다.[21] 일본의 경우 식민지배를 겪은 한국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제에 의해 피해를 입었던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몇몇 국가들, 그리고 쿠릴 열도 분쟁의 당사자인 러시아가 반대하고, 독일의 경우에도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피해를 입은 동구권 및 서유럽 국가들이 반대한다. 또한 20세기 초반 독일 제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유럽 국가들과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 역시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에 반대한다.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나치와 일제의 피해를 모두 겪은 네덜란드는 독일과 일본 양국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모두 반대한다.[22] 원체 프랑스는 동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은 국가로 한국과도 문화교류가 활발하며 유럽에서 케이팝 열풍이 큰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