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11 18:44:48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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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령 조선
日本領 朝鮮
일본 제국의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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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휘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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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
(34년 11개월 16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대한제국 소련군정 조선
미군정 조선
국가 기미가요
표어 내선일체 (內鮮一体)
위치 조선반도(朝鮮半道)
최대 도시 경기도 경성부
언어 일본어 ,(사실상 공용어),[2]
문자 가나 문자, 한글, 한자
종교 국가신토 ,(사실상 국교),[3]
민족 한민족, 일본인[4]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군사독재 · 익찬 체제,(천황제 파시즘),
국가원수 천황(天皇)
통치기관 조선총독부
정부수반 총독
이왕 덕수궁 이태왕 이희
창덕궁 이왕 이척이은
주요 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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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토 마코토
미나미 지로
고이소 구니아키
아베 노부유키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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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경술국치
1919년 3·1운동
1931년~1932년 만주사변
1937년~1945년 중일전쟁
1941년~1945년 태평양 전쟁대동아전쟁
1945년 광복
연호 메이지(1910-1912)다이쇼(1912-1926)쇼와(1926-1945)
통화 대한제국 원조선 엔
현재 국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 개요2. 명칭3. 역사
3.1. 시대구분3.2. 1910년대3.3. 1920년대3.4. 1930년대3.5. 1940년대
4. 평가
4.1. 식민지인이 된 조선인4.2. 다른 시각
4.2.1. 반론
4.3. 경제 분야4.4. 남북한에 끼친 악영향4.5. 배상문제
5. 관련 문서
5.1. 역대 조선총독5.2. 역대 이왕5.3. 사건 사고5.4. 미디어5.5. 기타

1. 개요

일제강점기 또는 일제시대는 한·일 병합조약 체결이 공포된 1910년 8월 29일부터, 또는 길게 잡으면 제2차 한·일 협약 체결로 일본대한제국을 피보호국으로 삼은 1905년 11월 17일부터, 일본 제국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항복한 1945년 8월 15일까지 국이 대한제국을 제로 령한 간을 의미한다.[5]

원 간섭기 이후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로, 현대까지 한국 사회에 많은 악습과 병폐를 남긴 흑역사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시기 동안 임시정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식민지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해외에 널리 알리려고 노력했지만 세계적 관점에선 미미했다는 평이 있다. 대표적으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사살한 것이나 이준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만국 평화 회의에 입장해 대한제국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알리려 시도한 사건 등이 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한일청구권협정/日韓請求権協定)에 따라 이에 관한 것은 현재로써 모두 원천 무효이다.(already null and void) 1910년의 병합조약은 여러 가지 면에서 법적 정당성을 결여하였기에 불법이라는 것이 한국에서의 통론. 다만 식민제국이 었던 국가의 친한파와 소장파들, 한국처럼 제국주의에 피해를 입었거나 식민지로 전락한 적이 있던 국가의 학자가 아닌 식민제국이었던 국가의 학계의 상당수는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것은 그 당시의 국제법상(?)으로 불법이 아니었고, 한일합방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루어진 데다가 다른 나라를 점령하여 식민지로 만드는 일이 국제법상 불법이 된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였으며,[6] 당시의 한반도는 유럽의 사례에 비유하면 아프리카아시아제3세계 식민지와 비슷한 지위에 있었고, 조선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된 경우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약 4년 전인 1910년 8월 29일에 있었던 사건이기 때문에, 당시 국제법상 합법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에서는 병합조약 자체는 합법이지만 식민 통치 과정에서 입힌 피해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 공식 견해다. 그래서 한일청구권협정 당시 조약 내용 해석 문제로 한일 양국이 마찰을 겪기도 했다. 다만 이후 간 담화에서 한일 병합의 강제성은 인정했다. 경술국치 때 이루어진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무효가 되게 된 까닭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 때문이 아니라, 연합국과 일본을 일방 당사자로 하는 관계에서 일본의 조선반도에 관한 모든 권리, 권원의 포기를 명시한 1948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때문이다. 이미 1952년 4월에 발효되어 유효하게 성립되고 있었던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사항을 다시 한일 간의 협정에서 한번 더 명시하자는 한국 측의 주장이 한일 협정 당시 받아들여져 이 조항이 성립된 것이다. 즉 한일기본조약의 해당 조항의 법적 성질은 단순 확인의 의미에 불과한 것으로,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의 대화록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한국의 입장에 일본 관료 측은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한국에선 일제시기의 기간을 36년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기간을 봐도 알겠지만 34년 11개월이었고 대강 계산해도 35년이라 함이 마땅한데 관용적으로 일제 36년 운운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참 괴이한 일이다. 네이버에도 관련 의문과 논란이 많다. 세는 나이를 계산으로 기산했다는데 없어져야할 습관이다. 네이버 검색글

2. 명칭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른 공식 명칭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이다. 보다 상세한 표현인 일본제국주의강제점령기(日本帝國主義强制占領期)로 표기하기도 하나 널리 쓰이는 표기는 아니다. 그 외에 이 시기를 가리키는 명칭으로는 일제시대(日帝時代)[7], 일제암흑기(日帝暗黑期)[8], 일본통치시대(日本統治時代)[9], 일정시대(日政時代), 일본식민지시대(日本植民地時代), 왜정시대(倭政時代), 왜정치하(倭政治下)[10], 대일항쟁기(對日抗爭期)(법률상으로는 이 명칭이 쓰이고 있다)[11], 국권피탈기(國權被奪期), 일제 침략기, 식민 시절 등이 있다.

도올 김용옥은 이를 두고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시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일각에서는 1910년 8월 29일의 사건만으로 역사를 규정하므로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또한, 일제시대(日帝時代)의 경우 문자 그대로 일제가 통치한 시대라는 뜻이나, 견해에 따라서는 식민지기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라 생각해 지양하고 일제강점기라 한다. 한편 일제강점기라는 명칭에 대해서도, 현대 대한민국을 '미제강점기'로 바라보는 민족사관(혹은 북한의 사관)의 영향이 작용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줄여서는 "일제"라고도 하는데 예를 들어 "일제 때" 또는 "일제 당시"라고 한다.

이 당시의 일제가 정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에 대한 공식 명칭은 그냥 '조선'(朝鮮)이었다. 경술국치 이후 옛 대한제국이 사용하던 '한국'(韓國)이라는 국명을 조선왕조가 사용하던 옛 국명인 조선으로 고친 뒤 일본의 일개 지방 이름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메이지 43년 칙령 제318호인 「한국의 국호를 고쳐 조선이라 칭하는 건(韓國ノ國號ヲ改メ朝鮮ト稱スルノ件)」의 공포 및 시행에 따라, 기존의 국호인 대한제국이 사라지고 당시 일본에서 한반도를 부르는 명칭이었던 "조선"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식민지에는 국가 성립 요건이 없기 때문에 국호의 의미가 전혀 없다. 일반적으로 괴뢰국도 아닌 외지에 국호를 두는 경우는 없다. 기존의 대만, 화태 등의 식민지에도 별도의 국호 제·개정의 법령이 없었다. 따라서 일본의 "조선" 국호 제정에는 대한제국의 말살 등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동 년도(1910년)의 메이지 제령 5호에서 그 의도를 더욱 노골적으로 알 수 있다.

현대 일본에서는 경술국치를 한국병합(韓国併合) 또는 일한병합(日韓併合)으로 일제강점기를 일본통치시대의 조선(日本統治時代の朝鮮) 또는 줄여서 일본통치시대(日本統治時代)로 부른다. 일본제국령 조선(日本帝國領朝鮮) 혹은 일본령 조선(日本領朝鮮)으로도 불린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내세운 조선의 영문명칭은 일본어 'ちょうせん'의 헵번식 표기인 Chosen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일제는 Korea, Korean이라는 영문명칭 또한 사용하였고, Korea라는 영문명이 광범위하게 통용되었다. 이 때문에 간혹 한국의 영문명칭이 Corea였다가 일제강점기 때 Korea로 바뀐 게 아니냐는 루머가 돈 적이 있다. 민족감정을 운운하며 일본 이 J보다 C가 앞에 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K로 바꿨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런 걸 바꿔봐야 당시 한반도를 지배하던 일본 제국에게는 돈만 더 들고 손해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전혀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 제국은 2차대전의 참전국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전쟁물자를 더 생산하는가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총동원법만 봐도 알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일본의 Korea 표기 조작설 참고.[12]
현재 영어로는 'Japanese Occupation of Korea(일본의 한국 점령)' 또는 'Japanese Colonial Period(일본식민시대)' 등으로 불린다.

중국에서는 조선일치시기(朝鮮日治時期)라 한다.

3. 역사

3.1. 시대구분

이 시기를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3분법을 사용한다.[13] 일반적으로 10년씩 끊어 1910년대~1920년대~1930년대 순으로 보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제1기(무단통치) 1910년~1919년 - 대개 경술국치부터 1919년까지 보는데, 민족자결주의 대두 및 3.1 운동의 영향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며 식민통치 이념이 달라진 것을 기점으로 한다. 경제적으론 토지조사사업회사령이 실시되었다. 조선인을 대상으로 태형을 실시하는 태형령이 공표되었고, 헌병 경찰제도가 운영되었으며, 교원(학교 선생님)들이 칼을 차고 다녔다.
  • 제3기(병참기지화정책/민족말살통치) 1931년~1937년/1938년~1945년 - 만주사변이 발발한 1931년부터 제3기 전기로 본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제3기 후기로 본다. 경제정책으론 전기의 남면북양, 후기는 국가총동원법이 발효된 병참기지화 정책이 있다.

3.2. 1910년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을 위해 대한제국의 대표로 참석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제국 측의 대표로 온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협상에 임했다. 이는 각국의 국왕이 마주보며 날인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어려웠고 일본 측에서 대리인을 보냈는데 대한제국은 황제가 직접 대면하는 것이 의전상으로도 맞지 않았다. 일제는 이 과정에서 성립된 한일합방조약을 공표하여 대한제국이 다스리던 모든 영토를 식민지로 편입하고, 옛 대한제국 황실은 왕공족인 이왕가(李王家)로 격하시켜 일본 황실에 편입시켰다.[14]

조선인들은 일본내지에 주거할 시에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15] 이 같은 참정권 행사 형태는 현재의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와 흡사하다.[16] 그러나 조선인들은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와 같은 정치활동,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같은 것은 보장받지 못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지배를 받는 한반도에서는 조선인 중 극소수의 지주들과 친일파들만 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에 들어가 정치적 의사를 피력할 수 있었다. 또한 구한말의 태형 규정을 폐지하지 않고 존속시킨 뒤, 재정의 30~40%를 헌병 경찰제도에 투입하고, 헌병과 경찰의 즉결처분권으로 이용하였으며 헌병과 경찰은 조선인들에게 고문을 일삼아대어 조선 민중의 삶을 폭압적으로 탄압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다.[17] 다만 특이하게도, 1920년대 하라 내각은 내지연장주의에 근거하여 조선총독부 관할 영토인 조선 내에서도 조선인에게 1등 신민과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내각이 2000~3000만이라는 적지 않은 수의 조선인들이 내각을 지지하도록 하여 군부와 조선총독부를 확실하게 견제할 수 있도록 하려던 시도로 엿보여진다.

당시 한반도는 일본 열도에 비해 천연자원이 상대적으로 풍부했고, 비록 구매력은 볼품 없었다고 하나 대신, 노동력 또한 값싸고 풍부했다. 일제가 이러한 특성에 주목해서 1900~1910년대에 쌀, 면화, 양잠, 소에 대한 품종 개량 및 육성과 SOC 건설을 통해, 조선일본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식량, 원료의 공급기지이자, 상품판매시장으로서 재편하고자 하였다[18]는 것이 정설이다. 그 밖의 이유로는 조선의 관세 자주권 박탈에 따른 이득, 경쟁자로 맞붙을 수 있는 조선으로부터 일본 국내 산업 보호(회사령, 광업령, 어업령 등), 러시아 등 대국에 대한 방어기제, 식민지화(이민정책) 등이 꼽힌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한 게, 허수열 교수의 <일제하 조선에 있어서 일본인 토지소유규모>(2012)에서는 1935 추계 기준 일본인 소유 논 면적은 조선 전체의 15%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할 것은 총독부가 가지고 있는 국유지는 상당한 규모였다. 또한 일본인의 조선 이민은 황수환 교수의 <근대기 일본인 이주농촌의 형성과 이주농촌가옥 - 강서구 대저지역을 중심으로>(2011)에 따르면 일본인의 조선 이민 수요는 1911년부터 시작되어 1927년까지 증가하고 있었다. 이는 대규모는 아닐지라도 총독부가 이민정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한편 조세수취를 정비하기 위해 1907년 조선통감부 시절부터 해오던 국유지 조사작업에 이어서 경술국치 이후인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민유지를 조사하는 토지조사사업(1912~1918)을 완료하고 한반도 내에서 근대적 토지 소유제도를 확립하였다.

그 밖에 삼림지역에 대해서는 산림법을 제정, 산림령을 반포하였다. 임목 및 산림지역을 소유형태에 따라 구분하고, 지속적으로 관리된 토지에 대해 사유권을 인정하되, 지적도 제출을 요구하였고, 산림의 채굴이나 임의 용도변경을 못하게 하는 보안림(保安林)을 설정하여 산림보호정책을 펼치는 동시에 보안림 설정으로 경제적 피해를 입었을 경우 청구제도를 이용케 보조하였다. 임야 및 산림토지 중 많은 수가 공유지거나 국유인 경우가 많아, 1925년 전 국토 대비 40%가 총독부의 관할이 되었다.
한반도의 경제성장률[19]
1911~1920 1차산업 2차산업 3차산업 전산업
4.4% 9.2% 2.9% 4.2%

한편 식민지 편입과 동시에 일본시장과의 연결을 위해 재정의 절반가량을 철도, 도로, 항만 건설에 투입하고 관개시설을 개·보수, 지역 특색에 맞는 일본의 벼, 양잠 등 우량종을 보급하는 등 일본의 2차산업과 연계하여 1차산업을 증산하고자 노력하였다.[20] 그러나 재정의 30~40%을 헌병 경찰 제도에 투입하는 등 통치 체제 확립이 최우선 목표였기 때문에 농업 정책에 온전히 집중하지는 못하였고, 이러한 모순적인 관계를 최대한 덮으면서 조선통감부의 업적을 날조하기 위해 조선물산공진회 같은 몇몇 교화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일본군 육군 대장 도이하라 켄지가 만주에 있는 러시아 여자들에게 아편을 중독시켜 매춘을 강요하고 대규모 매춘 집단을 만들었던 것처럼 일본군의 군자금은 아편이었고 조선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만들어 아편과 히로뽕(필로폰) 등으로 중독시켜 매춘을 강요했다.

3.3. 1920년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드로 윌슨의 발언에서 유래한 민족자결주의가 조선 민중들 사이에 퍼지고[21] 이로 인해 촉발된 3.1 운동이 격화되고, 일제다이쇼 데모크라시와도 맞물리면서, 무단통치 시기는 막을 내린다.

이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새로 부임하면서 문화 통치를 표방하기 시작한다. 3·1 운동에 크게 놀란 조선총독부가 그 동안 조선인들에 대해 시행했던 가혹한 정책들을 일부 해소하면서, 민심을 추스리는 데 노력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동안 무관만이 임직했던 조선총독에 문관(文官)도 오를 수 있음을 내걸고[22], 치안을 헌병이 아닌 경찰이 담당하게 되었으며, 회사령을 철폐하여 조선인의 사업에 대한 규제를 푸는 등의 유화책[23]이 사용되었다. 문화통시 시기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24] 등 조선인 언론사도 여럿 창간되었다.

문화통치의 본 목적은 회유정책을 바탕으로 조선인들의 사회문화적 기반을 일본으로 흡수하고 나아가서는 조선인을 일본인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조선인들의 언론과 사회 운동이 허용되었지만, 검열이나 요시찰 제도 등을 통해 언론과 사회활동을 제한하고 탄압했으며 조선인들의 사회 활동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었다. 또한, 무단 통치 시기에는 송병준이나 이완용 같은 지위와 권위에 의존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내세웠다면 이 시기에는 '자치론'이라는 떡밥을 내걸어 친일 지식인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기도 했다. 경성제국대학 등 대대적으로 교육 시설을 정비하고 극히 제한된 인원에게만 중고등교육을 제공하면서 광범위한 대중이 정규 교육 속에서 친일적 요소를 자연스럽게 습득하도록 했다.

다만, 이 시기의 교육 기회 확장은 철저히 일제가 통제 가능한 수준과 범위에서만 이루어졌다. 이 시기 전국적으로 수많은 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초등교육이 보편화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모든 면에 보통학교가 1개교씩 생긴다 해도 그 면 지역 전체의 교육을 관할할 수 없었다는 의미이고, 애초에 1면 1교 정책이 제대로 실현되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3면 1교였고, 나중에는 면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는데도 결국 1면1교는 완성되지 못했다. 최대로 늘었을 때도 2천개가 되지 못했는데, 2017년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갯수가 1만개가 넘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저 학교라는 것들이 얼마나 넘은 범위를 관장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덤으로 1차 조선교육령 기준으로 교육시간은 주당 10시간. 여기에 6년제마저 정착되지 않아서 대부분은 4년을 다녔고, 5,6학년은 개설되지 않은 학교가 태반이었다. 이 부분은 조선과 일본의 교육시스템에 차이가 생기게 만들어서 이 시기 조선에서 교육받은 것으로는 일본에서 진학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1920년대 말 보통학교 취학률은 18%에 불과했다는 조사까지 존재한다. 한편, 소학교가 설립을 하려는 시도라도 한 것에 비해 중등학교의 설립은 극단적으로 억제되어 있었다. 2개의 도마다 남자ㆍ여자 중등학교가 1개교씩이라도 설립되어 있으면[25] 형편이 그나마 괜찮은 것으로, 한 도 내에 중등학교가 아예 없는 시기도 있었다. 중등교육이 이런 데 고등교육 기관은 말할 것도 없다.

일제가 이처럼 교육기관을 철저히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 둔 것은 영국령 인도의 식민통치를 보고 느낀 점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식민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미개한 인도를 계몽하겠단 의도로 보편 교육 제도를 도입했다. 즉, 인도인들은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충분한 수준의 초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고, 그 중 인적 잠재력이 있는 인재는 고등교육 역시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교육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 영국은 이러한 교육제도를 통해 친영적 프로파간다를 내재시키려 했지만 보편 교육 제도가 도입되고 수십년이 지나자 역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회의 교육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서 본의 아니게 계몽이 이루어졌고 이는 반영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현상을 목도한 일본은 식민지 내에서 교육만큼은 철저히 억압하고 자신들의 통치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인력에게만 선택적으로 교육을 제공하기로 한다. 경성제국대학만 해도 식민 통치에 필요한 법학과 의학을 교육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고, 태평양 전쟁 이후 공업 기술 인력이 필요해져서야 이공학부를 개설한다.

이 시기는 3·1 운동의 직접적 영향으로 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펼쳐지던 시기였다. 김원봉 단장의 지휘로 결성된 의열단은 부산경찰서(박재혁, 1920년), 밀양경찰서(최수봉, 1920년), 조선총독부(김익상, 1921), 종로경찰서(김상옥, 1923), 도쿄 궁성 이중교(김지섭,1924년) , 동양척식주식회사(나석주, 1926) 등에 폭탄 투척을 하였고, 중국 관내에서는 상해임시정부가, 미국에서는 흥사단과 국민회가 일제의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민족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다만 이 시기에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을 제정하여[26] 공산주의자 등의 사상운동가와 총독부에 반대하는 인물을 탄압하는 것은 여전했으며 이 시기에 지방선거가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실상은 일본인 아니면 부유층들이나 투표할 수 있었기에 기득권층들로 채워졌고, 무관 출신이 아닌 문관 출신도 총독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공표하였으나 실제로 문관 출신이 총독 자리에 오른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27] 또한 치안을 경찰이 담당하게 되면서 경찰의 수와 경찰서, 경찰 예산을 이전 무단통치시기보다 약 3배 이상 증량, 증가시켰다. 또한 각종 친일파 양성 정책 등을 통해 실제로 이는 일본 입장에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의 민족개량과 자치를 내세우는 타협적 인사들을 지원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 및 사회주의자들과 갈등을 빚게 하였다. 이런 갈등 속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결집하여 신간회를 창립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폐쇄적이었던 조선인의 세계 인식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인들은 생각보다 많은 사상의 자유를 누렸다. 한반도가 비록 식민지 체제에 속해 있었지만 세계와의 교류는 활발하였으며 조선인들의 세계 여행도 비교적 자유로웠다.[28] 오히려 냉전 때에는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세계 여행이 통제되었고 사상의 자유가 더욱 억압되었다. 이 당시에 조선에 수입된 대표적인 사상이 사회주의이며, 반제국주의 사상으로서 한반도의 해방에 기여하였다. KAPF와 같은 사회주의 문학 단체도 활동하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생겨난 수많은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으나, 일제 관헌의 탄압과 내부 분파투쟁으로 와해와 재창당을 반복하였다.
한반도의 경제성장률[29]
1920~19301차산업2차산업3차산업전산업
1.1%4.5%4.3%2.3%

3.4. 1930년대

한반도의 경제성장률[30]
1930~19381차산업2차산업3차산업전산업
2.5%13.9%5.6%4.9%

1931년 만주사변으로 촉발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욕이 극대화되던 시기로, 일본군이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창설한 것이 1932년도이며 1932년에는 만주국이 수립되고, 37년에는 중일전쟁이 개시되었다. 대신 이러한 일본의 승승장구로 인해 국외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가장 가혹했던 시기이기도하다.

한편, 조선의 경우 군국주의 특수로 유일한 박사의 유한양행과 같은 민족자본의 토양이 마련되기도 하였고[31], 총독부에 의해 농촌진흥운동과 전시체제 준비기에 남면북양 정책이 실시되고 전국적으로 농업생산량과 일본으로의 이출량이 증가하는 등 농촌과 경제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주식투자와 회사설립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 중 하나다. 물론 빈부격차가 매우 커서 하루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이 많은 건 여전했고 그에 따라서 문맹률 또한 매우 높았기에 하층민들에게는 탄압이 다소 줄어든 것을 빼면 큰 변화가 없었기는 마찬가지이기는 했지만.

조선의 독립운동은 이제 한반도와 완전히 괴리되어 1919년 수립된 상해임시정부는 1932년 이봉창 의사 의거, 제1차 상하이 사변과 윤봉길 의사 의거 여파로 중국 내륙 깊숙한 곳인 항저우(1932)와 난징(1937)등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당시 조선인은 임시정부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32] 해외 무장투쟁의 상황은 더 열악했다. 1930년대 넘어오면서는 초반, 만주사변 시기 지청천, 양세봉 등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나, 만주 전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독립군은 만주에서 더이상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후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 건국 이후 무장투쟁 활동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33] 반면, 국내에서는 이재유를 비롯한 사회주의계열 인사들이 주축으로 독립운동 및 사회운동이 다양하게 벌어졌는데,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소작쟁의나[34], 노동근로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쟁의 등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하였다.
남북의 공업 생산규모(1940년기준)[35]
북한(55.9%)
서부공업지대6.1억 환
북부공업지대3.5억 환
기타
남한(44.1%)
경인공업지대3.5억 환
영남공업지대1.6억 환
호남공업지대1.4억 환
삼척공업지대1억 환
기타
6개 공업지대가 한반도 전체의 92.8%
1940년, 5인 이상의 공장 생산액[36]
남한(47%)북한(53%)
경공업(46%)70%30%
(요업)20%80%
(전기가스)36%64%
(식료품)65%35%
(목공업)65%35%
(기타)72%28%
(방직공업)85%15%
(인쇄제본)89%11%
중화학공업(54%)21%79%
(금속)10%90%
(화학)18%20%
(기계)72%28%

종업원 5인 이하의 가내공업을 모두 포함할 경우 1940년 공업 생산액의 55.9%는 북한에서 44.1%는 남한에서 생산되었으며, 1940년 일본 치하 대한민국의 산업비중은 서비스업을 제외할 때, 농업 42.8%, 공업 39.1%였다.[37]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무렵, 일본제국은 이듬해 4월, 국가총동원법을 공표하여 전시체제기에 들어간다.

3.5. 1940년대

전쟁이 한창에 이르러 40년대가 되어 일본군의 전력이 부족해지자[38] 일제는 외지와 내지를 완전히 통합하는 강압적인 흡수통합정책인 민족말살정책을 강제로 수행하였다.[39] 본래 일제의 통치목적은 점진적인 영구병합이었으나,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흡수정책이 더욱 가속화되어 일본 기업이 더 활발하게 진출함은 물론, 한국어를 사용하는 매체를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시행하였으며, 징병제까지 도입했다.[40] 그 직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지식인층과 지배계층의 상당수가 친일로 전향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어찌보면 한민족은 꾸준히 점진적으로 번져왔던 영구병합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당면하게 되었다.

문화통치의 상징이었던 조선일보동아일보1940년 물자부족 및 한국어 매체 금지로 인해 강제 폐간되었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일제의 물자와 인력 공출, 이른바 병참 기지화 정책은 조선민중을 이전에 겪지 못한 유례없는 고통에 빠지게 하였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던 조선인에 대한 강제징용이나 징병 계획[41]도 군부의 강력한 반대를 거스르고[42] 실시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전쟁의 성과가 나빠지자 일제는 전쟁물자 공급에 더욱 사력을 가하게 된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공출제를 실시한다. 부설된 철도 선로를 도로 뜯어가고[43], 금속으로 된 밥그릇과 숟가락, 젓가락은 물론, 징이나 꽹과리 같은 철제 악기를 비롯하여 낫이나 호미 또는 쟁기 같은 농기구, 심지어는 분뇨(糞尿)를 담는 요강까지 빼앗아갔다.[44] 그러나, 미군에게 제해권, 제공권을 빼앗기는 바람에 실제 공출된 물자가 일본 본토로 이송되지는 못하였고, 더 큰 문제는 물자를 거둬들인 후 다시 마구잡이로 분배하는 통에 시장과 유통체계가 완전히 마비되어 극심한 혼란상황이 빚어졌다.

태평양 전쟁 시기는 독립운동사의 암흑기 그 자체이다. 이미 1930년대를 경유하여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져 국내 독립운동은 완전히 씨가 말라버려 기껏해야 30년대 후반~40년대초까지 존재했던 박헌영경성콤그룹과 1944년에 결성되었던 여운형건국동맹 정도의 지하 비밀결사 형태로밖에 남지 않았다. 경성 부민관 폭파사건대구 학병 거부의거, 평양 학병거부의거도 매우 희귀한 사건에 속한다. 한국에서의 일제에 대한 인상은 주로 이 시기의 모습이 많다.

그러나 일본 제국 자체가 자체적인 모순과 한계로 인해 문제점을 맞이했듯 식민지 조선은 겉으로 보이는 독립 운동만이 총칼에 억눌려 잠잠했을뿐 조선인의 독립 요구와 저항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일제도 완벽하게 억누르지는 못했는데[45] 2차 대전에서 점점 패색이 짙어지면서 일본 제국의 과부하가 심해지기 시작하자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할 것이라는 소문[46]이 돌고 있었고 농촌, 도시 등 조선인 사회가 전시체제로 인한 징용과 물자 공출로 인해 피폐해져 가면서 붕괴 양상이 나타나는 등[47] 일제의 통치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으로서의 조선이 사라져도 프롤레타리아 조선과 부르주아 일본 대립으로 갈라설 판. 일본 제국도 이런 점을 알고 있었기에 1945년이 되어서야 조선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을 검토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한 내용에 그마저도 시행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무산되고 만다.

결국 원자폭탄2방 맞고 나서야 일본8월 15일 정오에 연합군 측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했다. 한국은 8.15 광복을 맞았고 이 무렵 동시에 일제치하 조선에서 비밀결사로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 조선건국동맹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해 자체적으로 치안, 행정 활동에 들어갔으나, 조선총독부는 본국의 지시로 건준에 내어주기로 되어있던 행정권, 치안권 등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았고 조선군을 동원해 행정 기관들을 봉쇄하여 이로 인해 당시 경성부에서는 행정의 공백 혹은 중첩이 생기기도 했으며[48], 결국 조선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그 해 9월초 전권을 미 군정에게 이양하였다. 조선총독부미군정38선 이남을 인수하는 1945년 9월 8일 전까지 공식적으로는 계속하여 업무를 수행했고, 존 하지 장군 휘하의 미군이 서울에 진공한 이후인 9월 9일이 되고 나서야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36년간 지속되었던 일제강점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때 일제의 수뇌부들은 이 시기에도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혼란 상태였던 조선에 위폐(가짜 화폐)를 뿌리며 인플레를 일으키는 등 조선의 경제를 막장으로 몰아넣었고, 일본에서 건너온 일반 일본인들을 반쯤 방기하고,[49] 미군에게는 여러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등 떠날 때까지도 끝까지 민폐를 끼치고 떠났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현재까지도 일제강점기 체제의 잔재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고있으며, 문화적, 사회적 악영향과 친일파에 얽힌 논란은 해소되기까지 갈길이 멀다.

여담이지만, 당시 일제는 황궁 이전을 포함해서, 제국의 수도를 경기도 용인시 근처로 옮기려 했다고 한다. 일본 본토지진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일본 제국의 영토였던 만주국, 조선, 일본 제국을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경기도 정도가 거리 관념으로 대략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수도를 용인시로 옮긴 다음, 대규모 인구 이동을 계획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지진에서 비교적 안전한 조선반도로 대거 이주시키고, 조선인들은 만주로 강제로 추방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도시 건설 계획을 위한 측량 작업까지 했지만, 모두 알다시피, 태평양전쟁에서 원자폭탄 2방을 맞고, 항복하면서 모든 계획은 당연히 백지화되었다. #

4. 평가

4.1. 식민지인이 된 조선인

일제의 지배를 받는 조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던가?[50]
- 호찌민

일제강점기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 예컨대 교육과 직업 선택의 불평등, 사회・법 제도의 불이익, 신민화 정책을 위한 민족 문화의 말살 및 왜곡,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된 강제 징용[51], 산미증식계획 등 병참기지로서의 착취, 민간인 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등 전쟁 범죄 문제 등이 얽혀 있는 데다가 그 이후의 남북한에 있어서 좋지 못한 유산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일제강점기가 대화의 주제가 되었을 때 분노하지 않는 한국인은 드물 것이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 또한 민족의 암흑기라는 입장이다. 일제의 만행에 대해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여론은 일본이 적극적인 사죄와 배상으로 과거사를 깨끗이 청산할 것을 일관되게 요구하고 있다.
천황의 치세를 노래하는 기미가요(君が代)는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의 영토로 치부된 식민지 조선에서도 국가로 지정되어 불려졌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별은 명문적으로는 '없었다.'[52] 제도적 구분은 단순히 일본인과 식민 통치 기관이 설립된 곳에 있는 사람들과 정식 영토가 되지 않은 곳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에겐 각각 다른 법률이 적용되었는데, 사할린, 조선, 대만처럼 식민 통치 기관이 설립된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는 신민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내선일체라는 허울 좋은 말이 있긴했지만 실상은 좋게 봐야 2등 국민, 대부분은 불령선인 신세였다.[53] 내선일체의 실체는 의무는 평등하지만 권리는 불평등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외형상 조선인을 일본인화 시킨다는 것이었기에 엉뚱하게도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까지도 반발이 많았다. 교육기회의 불평등을 보면 해방 때까지 조선인 출신으로 이공학 박사를 받은 인물은 우장춘, 리승기를 포함해 단 12명에 불과했으며, 일제에서 제국대학 박사를 딴 인물은 불과 2명뿐이었으니 당시 조선인들이 박사 학위를 딴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근대화 학습'이란 '매우 극소수'에게만 해당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실제로 1938년까지 일제는 식민지 조선과 일본 본토의 교육과정에 차등을 두어, 식민지 조선인들이 엘리트 계층으로 진출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틀어막았다. 학제가 달라, 구제중학교가 아닌 고등보통학교를 나온 조선인은 당시 일본 본토 기준으론 '구제중학교 졸업자 미만'이었던 게 엄연한 현실이다. 연희전문, 보성전문 역시 전문학교라기보다 '각급학교'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조선인은 일반대학에 설치된 '예과 과정'을 밟아야만 제대로 된 대학생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유독 일제강점기 시절 유학생들의 출신이 ㅇㅇ대학교 전문부·예과가 많은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또한 일제강점기는 한국북한에게 나쁜 유산을 많이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일본의 이지메 문화와 비슷한 왕따, 똥군기, 입시 위주 교육, 병영부조리, 한국 정치의 고질병 중 하나인 비민주적 정당정치 문화[54] 등이 있다. 또한, 이 유산들은 군사독재와 결부되어[55] 청산되기는커녕 더 좋지 못한 방향으로 발전하였고, 지금도 여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북한도 마찬가지로 일본의 안 좋은 유산이 꽤나 많이 남아 있다.[56]

만일 일제강점기가 계속된다고 할 때, 설령 비명을 찾아서처럼 일제 정부가 적당히 처세를 한뒤, 일본 본토는 물론 식민지까지 전시에 동원하는 태평양전쟁이라는 막장이 없는 상황에서 일제시대가 계속된다고 해도, 명목상 2등 시민일 뿐 조선인의 처우는 사실상 부라쿠민 수준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당장 지금 살펴봐도, 옛날부터 일본과 교류했으며 일본어와 비슷한 류큐어를 사용했고 훨씬 이전에 본토에 편입된 오키나와만 해도 아직까지 '비국민, 비천황, 반국가적이다.'는 차별과 증오가 많이 남아 있다. 만약 오늘날까지 한국인이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 외지 조선인'이었다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아파르트헤이트오스트레일리아백호주의처럼, 조선 출신에 대한 심각한 차별이 엄존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한반도가 과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노제강점기[57][58]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나오나 당시 러시아는 러일전쟁 시기에도 시베리아 철도로 병력을 실어나르는 데 허덕이고 있었고 조선을 먹고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는 방법 하나밖에 없는 일본과 달리 만주만 유지해도 되는 상황이었고[59] 설령 일본이 패배한다고 해도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기를 썼을 것이기 때문에[60]근데 러시아... 조선에 어떤 운명이 닥쳤을지 상상하기는 어렵다.[61] 굳이 일본이 아니었어도 당시 약소국에다가 극에 달한 부정부패로 몸살을 앓고 있었던 조선의 식민지화는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보는 이견이 많다.

또한 일본의 우파 사학계와 넷우익, 한국의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은 일제의 전시동원체제[62] 하에서 이루어진 폐해에 대해서는 일부는 어느정도 인정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63] 하지만, 이러한 시기를 제외하면 일제강점기 시기에 조선의 발전 자체가 이루어졌음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식민지 근대화론 참조. 물론 일제강점기 시절 경제성장의 수혜는 히키아게샤를 비롯한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들과 친일파에게 돌아갔으며, 일본 본토 또한 산미증식계획이나 동척회사, 식산은행 등을 통해 조선 경제성장의 수혜를 받았다. 그리고 한반도가 온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과 한반도 사이에 일본 본토가 있었기 때문인 동시에 소련이 한반도에 도달하기 전에 일제가 항복했기 때문이지 일제가 한반도를 애지중지해서가 아니다[64]. 비록 소고기를 얻기 전에 주인이 죽었다 해도, 좋은 소고기를 얻기 위해 축사를 개선한 것이 어떻게 소를 위한 일이겠는가? 때문에 한국이 일본에게 고마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일본이 비록 한반도에 공장을 짓고 철도를 까는 등 근대화를 하였으나, 그 수혜 대상은 한반도의 식민지인을 위해서가 아닌, 일본인들을 위한 근대화였다는 의미이다. 당연히 근대화의 혜택을 누릴 대상은 2등 국민 조선인들이 아니었다. 진짜 일본이 한국을 위해서 근대화를 해줬다면 일제 치하의 조선인들 중 절대 다수가 왜 그렇게 가난했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부터가 의문이 된다.

전후 본국 정부나 총독부가 지은 시설들과 재한 일본인들이 설립한 기업들을 비롯한 자산을 모두 몰수해 3년 후에 성립되는 한국정부에 주었고 돈이 없었던 정부는 민간에 팔아 자산가들이 헐값에 매입하였는데 이는 지금도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재벌그룹의 시초이다. GHQ는 이 자산의 규모를 당시 가치로 60억 불을 산정하였다. 당시 이러한 행위는 전후 민간인의 재산 약탈을 금지한 헤이그 육전조약 위반이었기에, GHQ는 자산 규모를 축소했으면 축소했지 과대평가할 여지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식민지 근대화론이 한국에서 평가절하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성장을 주도한 일제의 의도가 철저히 착취를 전제로 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점 그리고 6.25 전쟁으로 인해 산업 기반의 상당수가 폭격으로 파괴된 점에서 기인한다.

기실 다른 식민지 제국과의 식민 지배와 비교해도 일본 제국의 조선 통치는 상당히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랄하고 어정쩡한 수준이었다. 일반적으로 식민지 제국은 체급이 좀 작은 지역은 철저한 탄압 후 강제동화정책을 펼치거나[65] 덩치가 너무 큰 경우 현지 지배층 세력을 포섭하고 자치권을 주거나 권력을 주거나 하는데[66] 일본의 조선 통치는 이도저도 아니었다. 강압 통치로 조선인을 말살시키기에는 조선의 인구수가 2천만을 넘어가고 있었기에 사실상 불가능했음에도 강압적인 탄압 정책을 펼쳤고 그렇다고 문화 통치 이후 친일 성향의 지식인들을 모아 자치권을 주거나 처우개선을 하는 식의 포섭 노력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일본 제국 자체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군부와 정계를 아우를 거물 정치인이 부재하는 상황이 되면서 막장가도를 달려가고 있었기에 일제의 조선 통치는 다른 식민제국과 비교해서 본토민과 식민지 주민의 괴리가 심각하게 차이가 날 정도였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영국아일랜드 지배가 꼽히고 있다. 실제로도 아일랜드인들은 3.1 운동과 같은 한국인의 독립 운동을 자신들의 상황과 동일하게 바라보며 공감을 표했던 기록이 남아 있으며## 많은 학자들도 일본의 조선 식민지 통치를 영국의 아일랜드 통치와 유사점이 많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일제강점기/조선인 참정권 문제 참조.

4.2. 다른 시각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한국인은 일본군복을 입고 싱가포르를 함락시킨 침략의 협력자였다.
- 리콴유
주로 폐쇄적인 민족주의적인 시각과 편협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이다. (식민 수혜론 같은 극단적인 부분을 제외하자면.)

일제강점기를 단순히 선의 민족과 악의 민족의 대립으로 보는, 폐쇄적인 민족주의에서 기인하는 선민주의, 이분법적인 시각과 혈통주의에 의해 왜곡되거나 조명을 받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일본제국을 악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모든 당대 일본인들을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분명히 조선인들 중에서도 일제의 범죄행위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일제에 가담한 조선인은 反민족분자(우리민족이 아니고)이고 우리민족은 일제에 반대한 선량하고, 무조건 피해자라는 일반화가 팽배하다. 그리고 (일제시대와 관련없는) 그 후예인 한민족의 혈통들도 가엾고 무고한 피해자며 그에 대립되는 일본민족의 혈통은 사죄해야하는 극악무도한 범죄자이자 가해자라고 인식한다. 애초에 민족 단위의 세계관은 개인의 다양성이라는 변수들을 무시하고 민족이라는 단위로 일반화되는 것이 필연적이다.[67]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친일파도 한민족이기 때문에 한민족은 일제의 공범이자 부역자로 해석할 여지 또한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에서 일부는 한국이 2차대전 종전 후 추축국 또는 추축국의 부역자 취급을 받았다고 하나 한국은 2차대전 당시에 주권 국가도 아니었고 개개인이면 모를까 정부나 국가에 준하는 대우를 받은 집단(왕징웨이 중국이나 만주국 같은)이 자발적으로 협조한 것도 아니므로 근거가 없다. 또한 카이로 선언에도 나와있듯이, 친일파를 제외한 한반도의 식민지인들이 일본 제국에게 수탈당하고 있는 것도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위에 언급한 교육 또한 마찬가지다. 일제가 식민지 사람들과 본토 사람들을 교육 면에서 차별했음과 별개로 그나마도 일제 이전에 조선 국민들의 교육수준보다는 나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고려해보아야 한다. 조선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개인이 관료로서 출세할 수 있는 정상적인 방법은 무조건 과거에 합격하는데 있었다. 이때문에 교육 또한 자연히 과거의 준비와 합격에 중점을 둘 뿐이었다. 그리고 중앙 정부에 직속되는 교육기관은 성균관, 4개의 학당을 통칭하는 사학, 각 주현에서 관할하던 관학이 있었다. 하지만 세도정치 이후, 후대로 올수록 조선의 공교육 시스템은 쇠퇴하여 문과 대과에 응시할 자격 뿐만 아니라 여러 특전이 주어졌던 성균관을 제외한 사학 및 관학은 경술국치 시기 이미 유명무실해져 있었다. 즉 성균관 이외의 공교육 시스템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교육기관의 힘을 빌리지 않고 과거를 치르던 사람들 또한 생계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학업에 매진할 수 있는 소수의 양반가 자제들이 대다수였다.[68]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며 과거에 급제하는, 개천에서 용 나는 이야기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또한 전후에도 대한민국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이어지는 편제로 대표되는 교육 시스템을 구축함에 있어서 일제의 유산을 상당부분 반영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조사에서 한국의 문자식해율이 20%였던 처참한 상황임을 고려하면 정부 수립 이후 시스템은 일정 부분 반영했을지언정 실제로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조선인들이 식민지 이전보다 교육 상황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당위성을 가지기 어렵다. 또한 강제병합 직전인 1910년에는 이미 2천개가 넘는 학교가 세워져 있었고, 합병 초기 일제는 보통학교 설립을 억제하는 경향이었다는 점[출처]에서도 일제 교육정책의 효과를 긍정적으로 보기 힘들다.

또 민족주체적인 발상과 더불어 이를 정권유지를 위해 활용한 과거의 독재자들이 이용한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의 결속을 유도하는 것으로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잘 먹혀드는 프로파간다였지만 한일관계에는 당연히 악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군사독재정권이 물러난지 한참인 2010년대에조차 국정원에서 발행한 책자에서 반일감정을 정책적으로 조장해왔음을 시인했다. 특히 5.16 쿠데타로 등장한 군부 세력은 경제개발을 위해서 한일기본협정을 체결하고 일본과의 경제교류를 강화하면서도, 대내적으론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강조하여 반일정서를 부추기는 양면전략을 취했다. 또한 일본 대중문화의 수입을 철저히 막아 한국은 1998년에야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졌다. 당시 이 조치는 일제시기를 겪은 기성세대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으며, 실제로 일본에서 흘러들어운 문화 가운데서 포르노나 오락실 게임[70],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심한 TV 프로그램(예를 들면 11PM)같은 소위 말하는 "건전하지 못한 것"도 많이 흘러들어왔기 때문에 정권에서도 이를 이용해서 대중문화를 입맛에 맞게 통제했던 셈이라 할 수있다. 하지만 왜색풍을 규제한다는것은 공식적인 루트를 통한 수입을 금지한다는 점만 빼면 그냥 말뿐에 가까웠던것이었고, 왜색을 규제한다면서도 어린이 시간대에 일본 만화영화가 방송되는것을 그냥 방치하거나 당대 방영된 TV 프로그램 포맷이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것도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며[71], 왜색풍의 영향을 받지 않은 문화에 (예를 들면 락 음악이나 민중 문화, 굿)도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크게 탄압하는 등의 이리갔다 저리갔다 식의 정책을 반복했다.

조선인 경찰들만해도 일본인 경찰보다 한 급 낮은 취급을 받고 월급도 적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개개인이 조선인 탄압에 일본인 경찰들보다 더 악독하게 굴어 조선인들로부터 증오를 받았다. 물론 일본 제국 입장에서 의도적으로 조선 반도나 연변지역의 간도총영사처럼 조선인이 많은 지역에 조선인 경찰들을 다수 채용하여 이이제이를 시킨 측면도 있었지만 이들이 독립 운동만이 아니라 권리를 향상시키려는 정치적 운동까지 적극적으로 탄압해서 일본인들도 놀랄 정도였다. 이런 판국이니 평민인 일본인들보다도 높은 취급을 받기도 했던 친일파 양반들이나 일부 중인들은 더 심했다.[72] 일본인들보다 더 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일본제국 부심을 부리던 조선 왕족들을 제외하고도 권중현만 해도 충장공 권율의 9대손인 아버지 권홍섭(權弘燮)과 충무공 이순신의 9대손인 어머니 덕수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명문 집안의 후예였지만 나라를 팔아먹을 때 대일본제국이 조선의 백성들을 먹여살리고 입혀주신다면야 기꺼이 찬성할 것이라는 망언을 하며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고 잘먹고 잘살다 죽었다. 의외로 조선을 이끌던 핵심 지배층이던 친일파들도 생각보다 많고 세력도 만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들을 비난하던 사람들도 잘 때려잡았다. 그들이 남긴 망언들만 봐도 노답일 지경이다. 황실령 제 14호에 의하면 출생과 공로에 따라 귀족이 되어서 악질 친일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원래부터 높은 신분이었다. 그래도 공로를 세우면 귀족이 될 가능성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천한 신분 친일파 조선인 중에는 정말 악귀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독립운동가 학살이나 위안부 같은 일본 제국의 악행에 조선인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는 일본의 주장에 근거가 있는 것이다.

4.2.1. 반론

이런 논리대로면 중국조차도 중일전쟁 중 일본에 부역한 중국인도 있다는 이유로 아무소리도 못 하게 된다.(자세한건 만주국 참조). 독소전쟁 도중 독일에 부역한 러시아 해방군도 마찬가지. 어느 나라든간에 전쟁 도중 상대편에 부역한 자가 있는 건 다 마찬가지.

이러한 여러 의견들이 나오고 있으나 학계 이외에서의 반응은 싸늘하고 학계에서조차 쉽게 언급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 일단 소위 '객관적 시각'으로 나온 미국과 소련 측 기록이 아직 영향력이 남아 있던 일본의 흑색 선전과 인종주의적 편견에 의해 쓰여진 자료도 많아 정확한 분석을 어렵게 만드는 것도 있고[73] 반대로 한국 내에서 일제의 침략 행위에 가담하여 일제가 침공한 지역의 현지인이나 연합군 병사들을 앞장서서 착취하고 수탈한 행적을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라고 넘기며 민감한 화재를 덮으려 하기 급급한 상황이며[74][75] 뉴라이트 운동 등으로 인해 이러한 논의 자체가 친일파 출신 세력의 치부를 덮으려는 정치적 술수로 변질되는 사례가 나오면서 학계 내부에서도 정치적 논쟁을 무시하고 연구를 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수백 년은 지나야 논쟁이 좀 약해지려나.

자세한 내용은 한일관계 항목도 참조하자.

4.3. 경제 분야

일제에 의해 근대적 경제 시설·기구·제도가 들어서고, 농업 성장을 중심으로 무역 확대와 산업고도화가 이루어졌으나, 사회 전반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매우 컸고, 경제전반에 걸쳐 일본에 종속된, 불완전하고 기형적인 구조를 가져왔다.[76]
남북의 공업 및 광공업 연평균 성장률[77]1914~19271928~1940
남한(공업)4.89%9.7%
북한(공업)6.22%15.05%
남한(광공업)4.87%9.34%
북한(광공업)6.25%14.31%

동국대학교 김낙년 교수[78]의 추계를 참고하면 1920년대 초반[79], 생산가액과 부가가치의 각각 과반이었던 농업이었던 반면 이후 공업이 급속도로 발달해감에 따라 1940년도에는 절반 이하까지 떨어지고, 공업이 30~40%, 광업이 10%에 못 미치게 되는 등 공업의 성장에 눈에 띄인다.

또한 쿠즈네츠가 권고한 경제성장률 3%를 넘김으로써 유의미한 성장을 한 것으로 보이며, 개항이전 0.25%였던 것과 달리 인구증가율은 1%를 기록하여 적어도 사이먼 쿠즈네츠가 주장한 근대적 경제성장 요건까지는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나와 있듯이 수치적으로 보면 아주 틀렸다고는 할 수 없긴 하다. , 1940년 이후 일제의 전시경제정책과 해방 후 3년간의 혼란과 결정적으로 6.25 전쟁이 있었기에 '일제강점기의 경제유산'이 얼마나 이어졌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실제로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의 1인당 GDP는 태평양 전쟁 말기 때의 수탈로 인해 일제강점기 말에는 사실상 1910년 당시 1인당 GDP 수준에서 반토막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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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 관해선 식민지 근대화론 문서에 보다 심도 깊은 내용이 실려있다.

4.4. 남북한에 끼친 악영향

1945년,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되었으나 친일파 문제를 포함해 남북한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쳤으며 일본의 악습은 아직까지 잔재로 남아 있다. 공통적으로 군사문화가 뿌리 깊게 박혔다. 남한의 경우, 미국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했던 이승만[80]과는 달리,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군[81] 장교로 복무하던 박정희는 일본제국식으로 나라를 다스려 많은 병폐를 야기했다. 이는 1987년 민주화 이후로도 들어서고도 근절되지 않고 있으며 현재도 먼저 들어온 소위 '선배' 또는 '고참' 등이 윗사람이 되는 문화 역시 일제강점기의 영향이며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인해 조직에서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닌 먼저 가입한 사람이 더 높은 사람이 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4.5. 배상문제

한일기본조약, 아시아여성기금,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문서 참고.

5. 관련 문서

5.1. 역대 조선총독

이들에 대한 간략한 정보는 조선총독부 문서 참고.

5.2. 역대 이왕

이태왕(고종)과 이왕(순종->영친왕)은 덴노가 하사한 작위일 뿐 통치권은 전혀 없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지속된 이태왕과 이왕의 존재는 나라를 판 장본인은 고종과 순종이라는 논란[82]을 야기시켰고, 독립운동가 중 구 대한제국 황실의 복원을 꾀하는 근왕파를 절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83] 그리고 실제로 이왕가에서는 친일파도 제법 나왔을뿐더러 대다수는 순순히 일제에 순응했다. 극히 소수는 제법 반항하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극소수, 이것은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에 대해 사람들이 시큰둥해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5.3. 사건 사고

5.4. 미디어

5.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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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휘장은 공식이 아닌 일본어판 위키백과의 한 유저가 당시 자료를 참조하여 복원한 것이다. 해당 파일의 역사를 보면 초기판에 총독부의 '총' 자를 현대 일본어식 신자체로 쓰는 오류를 범하는 등 다소의 고증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휘장 가운데의 문장은 무로마치 막부 시대 이래로 사용된 오동나무 문장이다. 정확히는 고시치기리(五七桐). 도요토미 가문의 가몬으로도 사용되었고 이 문장은 이후 메이지 유신(대정봉환) 후 일본 정부를 상징하는 도안으로 그대로 사용했다. Chosen은 Choose의 과거 분사가 아니라 조선의 일본어 발음(ちょうせん)을 말한다.[2] 한국어1938년부터는 '국어(일본어)상용화정책' 또는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으로 조선어 교육을 일절 금지하고 본토에서 쓰는 일본어 사용을 법적으로 공용화하여 한국어(조선어)를 쓰는 경우 처벌(태형)당했다.[3] 유교, 불교, 기독교, 천도교[4] 1945년 8월 15일 무조건적인 항복 이후 대부분 일본으로 철수, 귀국[5] 물론 700여 년 전에도 한국이 다른 나라강한 영향력에 놓여져 있었던 적이 있었으나 나라 자체가 멸망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다.[6]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서구 열강의 입장에서 미개척지나 다른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경우는 해당사항이 없으며 당시 국제법상 합법이다.[7] 일상 대화에서 많이 사용.[8] 용례가 있다면 추가 바람.[9] 일본에서도 사용하는 명칭이다.[10] 고령층에서 '왜정 때~'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11]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다만, 이 법률 자체는 강제동원에 관한 것이므로 1938년 4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 사이의 시기만을 대상으로 한다.[12] 요점만 말하면, 일본은 Nippon이라는 이름을 인정받으려 했기 때문에, 조선이 CJK든 상관이 없었다. 또 C를 K로 바꾸려면 모든 문서를 갈아엎어야 했고.[13] 물론 다른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한국사 정규 교과 과정이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3분법을 정식 채택하면서 사실상 대세가 되었다.[14] 이 이왕가는 일제 패망 이후 GHQ에 의해 화족정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지속된다. 일본 황실로의 편입은 명목상이고, 실제로는 왕가로 격하되었을 뿐이다.[15] 기사[16] 푸에르토리코의 주민들은 미국 시민권이 있지만 대통령 선거권은 없다. 또 연방 의회에 하원의원 1명을 뽑아 선출해 파견하지만 표결권은 없다.[17] 조선총독부제령 제11호, 1912.3.18. "제42조 이 영 시행 후 효력을 가지는 구 한국법규의 형은 다음 예에 따라 이 영의 형명으로 변경한다. (중략) 태형 20일 이하의 구류 또는 과료" # 극소수의 국가를 제외하고 근대 형법 체제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신체형인 태형을 식민지 조선에서 유지한 게 문제인 이유는, 대한제국이 망하기 전까지는 재판소의 확정 판결이 나온 후 집행할 수 있던 형벌을 헌병과 경찰에게도 즉결처분권을 부여한 데 있다. 시간이 걸릴 게 뻔한 재판 과정을 극도로 축소시키거나 아예 거치지 않고도 이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언제든지 매타작을 벌일 수 있도록 했으니, 사실상 고을의 수령이 사법권을 전담했던 조선 시대로 돌려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18]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농업,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4[19] 溝口敏行(Mizoguchi Toshiyuki)&梅村又次(Umemura Mataj), 구일본식민지경제통계 제3부 표8[20] 대체로 식량은 조선, 상품성 작물은 대만.[21] 하지만 정작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의도는 패전국의 식민지를 독립시켜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승전국의 식민지는 건드리지 않을 의도였다.[22] 무단통치 시기에는 일본 육해군 대장 출신만이 총독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된 대만과는 달리 조선에서 문관 출신의 총독이 임명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나마 사이토 마코토가 유일하게 해군 대장 출신이다.[23] 실제로는 일본 기업의 조선진출을 쉽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회사 설립 조건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하였던 것이다.[24] 창간 당시에는 시대일보였다. 이후 중외일보-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로 신문사 명칭 바뀜.[25] 이를 테면, 충남과 충북을 통틀어 공주고보, 대전여자고보가 설립된 것.[26] 이 법은 조선을 강압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일본에서 '당근(보통선거권)과 채찍'을 내걸었던 것 중 '채찍'으로 일본 내의 사상범(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화주의자(천황제 반대) 등등) 탄압을 주목적으로 제정된 법으로, 시행시기도 한반도보다 일본 열도가 더 먼저 적용되었다.[27] 이는 조선 총독이라는 자리가 덴노 직속의 독립적 지위이기 때문에 문관들이 거머쥔 일본 본토 내의 권력구도에서 벗어나 총리가 되기 위한 '무관들의 출세 코스'로 여겨진 탓이기도 하다. 이것이 일본의 대만 통치와의 차이다.[28] 일반적인 편견처럼 단순 도망이 아닌 합법적으로 중국이나 만주 등 해외로 출국하는 조선인들이 꽤 되었다. 조선에서야 일본인 다음 2등 신민이었지만 해외에서는 일본인 신분이었고 일본영사관의 관할하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일본인 신분을 악용하여 중국인 등에게 패악질을 일삼는 악질적인 사람들 또한 생각보다 많았다. 중국의 반한감정이 시작된 유래. 그런 이유로 중국 국민당 정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든지 조선인들의 항일운동을 다소 미심쩍게 보는 성향 또한 있었는데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그런 의심이 상당히 희석되었다.[29] 溝口敏行(Mizoguchi Toshiyuki)&梅村又次(Umemura Mataj), 구일본식민지경제통계 제3부 표8[30] 溝口敏行(Mizoguchi Toshiyuki)&梅村又次(Umemura Mataj), 구일본식민지경제통계 제3부 표8[31] 이 시기는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의 시대로 소위 민족말살기와 겹친다.[32]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했던 김학철임시정부에 합류하고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는데,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없어 김원봉의열단에 합류했다.[33] 반면, 만주, 간도 일대 거주하던 조선인 출신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 중심으로 독립운동 전개가 되었으나, 민생단 사건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후 30년대 후반 가면서는 간도의 조선인 출신 사회주의자들과 중국인들이 연합해 동북항일연군 결성해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이마저도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반무렵 크게 타격받는다.[34] 당시 지주들의 소작인 착취가 악랄할 정도로 심했으며 일본 제국도 지주들의 편을 들어 소작인을 탄압했다.[35] 조선경제연감 1948[36] 조선경제연감, 1949[37] 조선은행 조사부와 조선경제통계요람 1949[38] 태평양 전쟁 항목 보면 알 수 있지만 일제는 중일전쟁을 하던 중 석유를 얻기 위해 했던 일련의 행동들이 당시 중립을 고수하던 미국의 심기(진주만에 똥을 쐈다)를 건드리면서 단일전선에서 이중전선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때문에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이 더 부족해지게 되면서 식민지와 본토를 가리지 않고 수탈이 극에 달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39] 사실 경술국치 이후 이미 조선인들의 국적은 일본이었다. 그러나 같은 국적일지라도 어느 정도 구분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는 아예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흡수해버리려고 하였다.[40] 2등 신민 대우나 강제 징용, 학병 제도, 뒤이어 이뤄진 강제 징병 등은 모두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일본인으로 완전히 바꿔놓기 위해 이뤄진 계획의 일환이었다. 최유리의 <일제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에 따르면 조선인을 일본인처럼 세뇌해야만 제대로 된 군인으로 징집하여 쓸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의무교육제도를 1946년부터 실시할 예정이었다고 한다.[41] 헌법의 법제상 징병령(徵兵令)을 실시하여 국방의 의무를 부과하게 될 대상은 시민이고, 이 시민에게는 참정의 권리도 따라온다. 의도치 않게 조선인의 참정권을 인정해줘야하는 상황에 직면한다.[42] 당시 일본 군부는 식민지 출신 장병들의 반란 가능성을 우려하여 내각의 조선인 징병 제안을 계속 거부하였으나, 전황 악화와 병력 부족에 따라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43] 이때 뜯긴 것이 안성선 안성역-장호원역 구간과 경북선 점촌역-안동역 구간. 해방 후 경북선은 점촌-영주역으로 노선이 바뀌면서 다시 안동까지 이어졌으나 안성선은 끝내 복구되지 못하고 80년대 후반 나머지 구간도 폐선된다.[44] 이 당시까지는 주로 변기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집안마다 요강을 썼다. 뒷간은 멀고[45] 특히 일본 제국이 조선인을 열등하게 여기고 차별했으며 처우개선을 하지않고 무자비한 탄압으로 나간터라 일본 제국에 대한 조선인들의 적개심은 매우 높았다.[46] 개중에는 실제 전쟁 진행 양상을 거의 정확하게 맞힌 내용도 존재했다.[47] 일본 본토도 이와 비슷한 문제로 피폐해져가고 있었다.[48] 지방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의 행정, 치안 활동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49] 일본인들에 대한 과격한 폭력과 사회혼란이 이어진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당시 광복의 사실을 몰랐거나 광복을 기뻐하거나 하는 국민보다 그 사실을 이용해서 득세한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자와 미군정 체제에서 목슴을 부지하기 위해 결탁한 친일파 그리고 귀국 전에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문제를 일으킨 일본인이 문제였다. 여러군데서 폭력적인 일이 벌어졌을 거라 예상되지만 민족반역자들이 각각의 체제를 신봉하며 재집권하고 일본인을 공격하려기보다는 광복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농민과 인부가 대다수였다.[50] 프랑스를 몰아낸 일본을 보고 좋아하던 베트남인들을 보며 한 말로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의 지배를 80년이나 받았고 프랑스인들은 베트남인들을 멸시했기에 베트남이 프랑스를 보는 눈은 일제를 보는 조선의 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이 말을 한 호찌민 자신부터가 베트남을 프랑스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 말대로 일제는 프랑스와 다를 바 없어서 1945년 무려 100만명의 베트남인들이 굶어죽는 대참사가 벌어졌고 베트남인들은 일제를 적대하게 된다.[51] 남한 대토벌, 관동대학살, 간도참변 등을 제외한 2차 세계대전 때 피해자만 48만 명이 넘는다. https://en.wikipedia.org/wiki/World_War_II_casualties[52] 물론 그래도 미즈호학살사건이나 간토 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 등을 보면 차별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53]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1386951 , https://www.mk.co.kr/news/world/view/2013/08/740238/ 일제 때 조선인 노무자의 미불금 피해 실태를 보면 심지어 돈도 덜 주는데, 거기서도 또 사기를 쳐서 3분의 2 정도를 빼돌리기도 했다.[54] 실제로 한국의 정치문화는 주로 일본에서 들여온 것들이 많다. 당 대표와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뭉치는 문화, 계파의 보스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문화, 그 계파의 보스가 사라지면 다른 보스를 섬기는 문화, 국회의원 하나하나의 소신과 상관없이 당론만을 강제하는 문화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실제로 이러한 정당정치 문화로 인해 한국의 정당정치는 매우 취약하기 짝이 없으며, 정당 민주화가 더디게 진행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국민들이 국회를 불신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55] 애초에 박정희가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서 근무하고 교사까지도 했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일본의 영향을 꽤 받았다고 생각할만한 점이 많은데다가, 집권기간 동안 당대 일본의 자금지원을 받기도 하는 등 이래저래 일본에게서 상당히 영향을 (좋은의미로든 좋지않은 의미로든) 많이 받기는 했다. 10월 유신을 강행했을 때 굳이 쓸 이유가 없었던 '유신(維新)'이라는 용어를 굳이 차용한 일도 있는데다가, 국민교육헌장도 교육칙어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이니.[56] 그나마 대한민국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민주화가 되고, 고도의 경제성장과 함께 국력이 상승되면서, 과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어느정도 성과를 보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당장 경제가 파탄나서 겨우 먹고살 정도로 생계가 힘든데다가, 노동당 지도부의 무능, 그리고 사실상 신정일치(神政一治)와 다름없는 전제군주제를 유지하기 위해 일제의 악습을 차용하고 있기에 과거 일제의 악습이 더더욱 안 좋은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반면에 나쁜 것은 죄다 일제의 잔재 탓으로 돌리는 것은 편협한 사고 방식이라는 주장도 새겨 들을 만하다.[57]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던 청나라은 이미 쇠퇴하였고, 조선을 노리던 또 다른 나라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해양 진출을 위해 부동항이 필요했고, 당시 패권국이던 영국은 이를 저지하고 있었다. 발트해흑해에서 영국의 저지에 막히자 동아시아에서 해양 진출을 시도하게된다. 일본 제국영국의 편에 서서 이를 저지하면서 일어난 것이 러일전쟁이다.[58] 조선에서 러시아를 부르던 명칭 중 하나가 노서아였다.[59] 실제 역사에서도 러시아는 당시 열강들 중 조선의 독립에 대해 우호적이었다.[60]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조선을 자국의 식민지로 삼거나 혹은 일본의 식민지로 넘어가는 일을 원하지 않았고, 그저 러시아와 일본의 완충 지대 정도로 놓아두기를 바랐다.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다고 해도 해군력이 약한 러시아가 일본을 점령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고, 러시아가 원했던 부동항인 원산과 부산과 인천 정도를 조선한테서 개항하고, 조선에 러시아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현재 미국이 한국에 대해 하고 있는 것처럼 조선으로부터 이권을 얻어내는 정도에서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61]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아직 만주도 먹어치우지 못한 상태였다. 즉 만주를 다 먹어야 조선을 노릴 수 있다는 건데 문제는 만주 그 자체부터가 땅덩어리가 너무나 커서 조선까지 먹어치우려면 안 그래도 열강들을 있는대로 자극한 마당에 그걸 폭발시키게 만들 수도 있다. 덤으로 일본은 해양에서만 놀아야 하게 되고 청나라 입장에서는 만주에 이어 조선까지 러시아에게 먹히면 동쪽으로 러시아에 거의 막혀버리는 꼴이니 좀 우습겠지만 청과 일본이 손을 잡고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라고 러시아를 독촉했을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만주도 먹을 정도면 이미 일본이 러시아 견제에 어느 정도는 실패했다는 것으로 일본 입장에서는 만주까지 다 먹은 러시아랑 정면으로 승부하기 위해 니네가 만주를 먹었으니 우리에게는 조선을 달라는 주장보다는 니네가 만주를 먹었지만 조선까진 넘어오지 마라 식의 주장을 할 가능성이 더 크다. 아니면 조선분할을 주장한다든가)[62] 징용, 징병, 정신대, 위안부.[63] 이후 한국이 한국인을 대표해 일본에 배상을 받는 과정이 또 상당한 논란거리였는데, 이는 한일기본조약 항목 참조.[64] 당초 조선도 약간이긴 하지만 미국의 폭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일본군의 행적으로 보면 조선에서라고 같은 짓을 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1억 총옥쇄라는 미친 소리를 한 자들에게 뭘 기대하겠냐마는[65] 아프리카 식민지 등.[66] 인도 식민지 등.[67] 일례로, 일본인임에도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를 담당해주고, 일제의 한국 병합을 침략행위라고 정의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했으며, 해방 후에 한국 제헌헌법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어 독립유공자로 대우받는 후세 타츠지 같은 분이 있다. 이 분은 일본인임에도 한국을 위해 조국인 일본에게 박해를 받아가면서까지 힘써주신 분이다. 또한, 현재 일본에도 일본 공산당 같은 양심세력이 남아있어 일제의 한국침략이 잘못된 것이며, 위안부 문제를 일본이 사죄해야한다고 주장하시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즉, 일본인이라고 모두 일제 강점기를 옹호한다든가, 당시 일제의 만행을 전부 부정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산이다.[68] 그 성균관마저 과거 제도가 폐지된 이후 쇠퇴해져 있었다.[출처]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2008)[70] 당대에는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오락실 게임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지 않았던 시절이었다.[71] 대표적인 것이 한국의 코미디 문화이다. 한국의 코미디 문화는 일본의 만자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이외에도 과거 부모님 세대 때 유행하던 만화인 우주소년 아톰, 베르사유의 장미, 마징가 등등도 모두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다.[72] TV와 사극에서는 조선의 양반들을 후빨하여 양반들이 열심히 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이미지를 만들고 왜곡했지만, 실제 조선 말기와 일제시대의 양반들은 조선 왕실과 함께 조선 멸망에 큰 책임이 있으며 오히려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의 요청에 협조하여 그전의 기득권을 변함없이 누리면서 민중을 억압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수탈이나 하였다. 당장에 식민지 조선의 고위직들만 양반 비율이 높았고, 정작 독립운동을 벌인 사람들은 대부분은 평민이나 천한 사람들이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3_0050_0040_0020_0020 일본군, 헌병, 경찰이 조사한 의병장 및 부장 430명 중 직업과 신분이 분명한 사람이 255명으로, 255명 중에서 유생·양반이 64명(25%), 농업이 49명(19%), 士兵이 35명(14%), 무직 및 火賊이 30명(12%)으로 되어 있으며, 기타 포군(13명), 광부(12명), 主事·서기(9명), 장교(7명), 군수·면장(6명), 상인의 순으로 되어 있다. 또한 1908년에 귀순하거나 투항한 의병장 및 부장 28명 중 8명(28%)이 양반 출신이고 나머지 21명(72%)이 평민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의병의 경우에는 2,198명 중 양반이 겨우 57명(2.7%)인데 비하여 평민이 2,141명(97.3%)이다. 한국에서 양반의 이미지가 나쁜것도 이때의 영향이 크다.[73] 일례로 6.25 전쟁 당시 미국은 일본 자위대를 전쟁에 동원하려 할 때 일본 자위대가 주둔하면 한국인들은 구 지배자들에 친숙하여 불만 없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승만이 이 사실을 알자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면 그 즉시 한국군이 총부리를 돌리는 꼴을 보고 싶냐!"고 쏘아붙였을 정도로 반대했고 미국은 한반도 정세에 무지했다. 사실 미국은 이때뿐만이 아니고 이후에도 현지의 사정 등에 무지했고 그로 인해 일을 그르친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74] 이 문제는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인들이 제국의 일부로서 가해를 가한 것이며 종주국이 식민지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 다른 식민지의 민족을 지배자로 만들어 간접관리를 하는 방식으로 이미 서구 열강에서 신나게 써 먹은 전례가 있는 전통적 방식의 종주국의 식민지 가해자 공범 만들기 작업으로 식민제국에서 독립한 이후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흔들리게 만드는 흔한 사례들 중의 하나이다. 분명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나 정치적, 역사적 이해관계 때문에 쉬쉬하는 것까지도 똑같다. 물론 이런 일로 인해서 르완다 내전 같은 불미스러운 일도 많이 발생했다.(정작 해당 국가의 국민들을 찾아가보면 그게 자기네들이 문제를 싸놓은 건지 잘 모른다. 예시로 든 사건 역시도 그거에 대해서 벨기에 인이 안타깝다는 얘기를 하자 미국인이 "그거 니네들이 저지른 일이 원인이었잖아" 라고 했는데 정작 벨기에인은 그걸 듣고도 뭔 소린지 몰랐다고(...)[75] 그나마 한국, 대만, 만주를 지배한 일본 제국이 영국, 프랑스 같은 식민지 경영 대국들과 비교하면 답이 안 나올 정도로 무능한 집단(...)이라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철저하게 한국의 피해자인 관계가 된 것이다. 덤으로 한국은 그런대로 단일민족에 오랫동안 통일국가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일본 입장에서도 어느 민족을 편애한다는 발상을 할 수도 없었다. 다른 식민지 출신 국가나 신생 독립국의 경우 종주국의 식민지 공범 만들기 문제 등에서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들과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문제들을 많이 안고 있다.[76] 연평균 공업성장률 8.9%, 서성철, Growth and Structure Changes in the korean Economy, 1910-1940. Havard University Press, 1978. 반면 농업성장률은 2.2%에 그침. 연평균 순생산(Net product) 성장률 3.7% 열강 중 선두였던 일본 본토보다 높다.참고로, 한국은행에 따르면 1960~2015 모든산업 총생산 연평균 성장률은 5.946%, 순생산 성장률은 4.896%. 쿠즈네츠의 권장 성장률은 연3%.[77] 溝口敏行(Mizoguchi Toshiyuki), 대만/조선의 경제성장, 1975[78] 참고로 김낙년 교수는 지난 100년간의 국민소득 추이를 통계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2014년도에는 그간 통계청의 가계동향 조사가 심각하게 왜곡돼 있으며 한국의 소득 불평등이 그동안 학계나 정치권이 추정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도 있다. 딱히 어떤 이념이나 노선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증주의적 방법론을 추구하는 인물이다.[79] 1910년대의 추계는 정확도가 다소 떨어진다는 사학계 등의 일반적 생각이나 식민지 조사가 이루어진 20년대 수치부터는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80] 다만 이승만 스스로 민주주의를 파괴하여 종신독재를 하다가 4.19 혁명으로 쫓겨났다는 점에서 마냥 미국식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의지는 없으면서 어설프게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의 겉모습을 모방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81] 당시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이였으므로 사실상 일본군이라 봐도 무방하다.[82] 이들이 일제로부터 받은 지위와 봉록은 경술국적보다 높고 많다.[83] 실제로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도 복벽을 원하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냥 좀 특별대우를 해 달라는 것뿐이었다. 그 정도로 근왕파가 소멸되어버렸다는 것[84] 사실상 이날을 망국일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도 경술국치보다는 을사조약이 맺어졌을 때에 자살하거나 반대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85] 1910년 8월 29일[86] 다만 김두한의 어린시절을 다루는 파트의 분량이 적기 때문에 광복 이전까지는 1부, 광복 이후부터 김두한의 사망까지는 2부로 나뉘어 지는 경우가 많다.[87]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한 한반도 진주와 미소간의 이해관계, 신탁통치 오보사건에 따른 결과이고 한국전쟁냉전, 남북 간의 이념 대립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분단 고착화로 현재진행형이 되어버린 사건으로 1920년대에 조선총독부에서 무단통치 대신 시행한 민족분열통치가 어느 정도 일조한 셈이다.[88] 비슷하게 식민지배 이후 한 나라가 분열된 사례로는 베트남이 있다.[89]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점이 군사독재정권의 통치와 한국인들의 보상심리로 고착화되고 현재까지 지속 중이지만 사실 일제강점기가 대한민국 사회의 병폐들이 생겨나는 데 기반을 깔아준 시기이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점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은 이를 해방 직후부터 청산하지 않고 계속 유지해온 한국인 자신들과 대한민국 사회, 정부의 책임이다.[A] 대한민국 병역의무와 대한민국 국군의 문제점이 지금까지 고착화 된 것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 당시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이 대거 유입됐을 뿐 만 아니라 이승만이 미군 물자 조금 더 얻을려는 한가지 이유 때문에 징병제를 도입하였고, 5·16 군사정변 이후 남·북의 적대적 대치하에 박정희-전두환(feat.노태우)의 군사독재의 지속으로 인한 결과이다.[A] [92] 일제강점기에 일본어 어휘·문법이 한국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각계의 노력으로 점차 제자리를 찾고 있지만 현재도 건설업계 등에서 변형된 형태의 일본어 낱말이 자주 쓰인다.(현장 용어)[93] 역사 갤러리와 후술된 두 커뮤니티는 구한말 친일단체 일진회의 정신적 후손들이자 현대판이며 한국 인터넷 환경판이라 할 수 있다.[94] 남북분단에 이어 발생한 사건으로, 일제강점기가 분단에 영향을 끼친 것에 대한 연장선인 셈. 베트남도 독립 이후 나라가 쪼개지고 전쟁까지 터졌다.[95] 실제 당시 한국을 조선이라고 많이 불렀고, 한민족 역사상 끔찍한 시대였기 때문에 헬조선이라는 말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 시기를 진짜 헬'조선'이라고 부르는게 적절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