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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대한제국 미합중국 특명전권공사 호러스 뉴턴 알렌 安連(안련) | Horace Newton Allen[1] | |
| | |
| 출생 | 1858년 4월 23일 |
|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 |
| 사망 | 1932년 12월 11일 (향년 74세) |
| 미국 오하이오주 털리도 | |
| 국적 | |
| 학력 |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신학과 (학사) 마이애미 의과대학 |
| 직업 | 선교사, 의사, 외교관 |
| 종교 | 개신교 (장로교회) |
| 주요 경력 | 장로회 의료 선교사 제중원 의사 겸 교수 조선 참찬관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 주한미국공사관 총영사 주한미국공사관 공사 |
1. 개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의사, 조선의 외교관. 주조선 미국 공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현대 외과 의학을 조선에 도입한 공로가 있지만 의료 선교보다 곧 고종에게 고용되거나 미국의 외교관으로 전업한 시간이 선교사로 일한 시간보다 더 많다. 한국 이름은 '안련(安連)'이다.현 연세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인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한 인물이다.[2][3] 1885년(고종 22년)에 조선 말 최초의 근대식 의료 기관인 광혜원(제중원)[4]을 세우고 의사와 의학 교수를 겸하면서 운영까지 담당했다.
1887년(고종 24년)에는 고종의 특명으로 주미조선공사관 고문으로 파견되어 설립에 관여했으며 1890년(고종 27년)에는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받아 의료 활동 대신 외교 업무를 시작했으며 최종적으로 전권 공사까지 올랐다.
2. 생애
2.1. 조선 최초 의사이자 선교사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했다. 북장로교 소속 의료 선교사로 청나라 상하이에서 의료 활동을 했지만 상하이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청나라 지방관과 싸우고 외국인들과도 마찰이 심했다.[5] 그러던 중에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한다는 소식을 듣고 알렌은 자신이 가겠다고 자청했다. 아니 요청 정도가 아니라 아예 조선에 안 보내주면 일을 그만둔다는 협박을 했다. 결국 조선 행을 허락 받아 한살 짜리 아들과 아내와 함께 셋이서 1884년에 조선으로 갔다. 아직 종교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지 않은 조선에서 선교사 신분으로 있는 것이 위험하다하여 당시 주조선 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는 그를 주한미국공사관 소속 무급 의사로 임명했다. 알렌은 조선에서 지내는 동안 개신교 선교 사업을 겸했는데, 알렌이 부임하자 그동안 타국에서 병에 걸릴까봐 불안해 했던 외국인들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10월 27일 조선에 입국했는데 38일 만인 그 해 12월 4일에 갑신정변이 터졌고, 개화파의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매는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수술해 목숨을 구해주면서 유명해졌다. 당시 정변으로 미국 공사까지 도망간 상태에서 알렌이 민영익 치료를 자원했는데 이는 민영익이 보빙사의 대표였던만큼 그를 개화파인줄 잘 못 알고 만약에 죽는다면 친미 개화 세력이 타격을 받을까봐였다. 그런데 민영익은 임오군란 때부터 청군을 등에 업은 친청사대파 민씨 척족의 유망주이자 차세대 리더로, 보빙사의 대표로서 미국을 갔다오긴 했지만 그런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얻었음에도 가져간 유교경전이나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고, 미국이 호의로 내준 군함에서는 멀미가 난다고 여객선으로 도망가려던 인물이었다.
어쨌든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은 일곱 군데에 치명적인 외상을 입었고 묄렌도르프[6]가 자신의 호위병과 함께 민영익을 자신의 가마에 숨겨 옮겼고 그리고 한국에 있던 유일한 서양 의사 알렌을 급히 불렀다. 알렌이 도착할 무렵 한의사 14명이 알렌의 치료를 결사 반대하며 막았으나 쫓아냈고, 밤새 지혈을 하고 봉합을 한 다음 일본인 군의관을 불러 함께 치료했다. 이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행한 외과 수술로 기록된다. 이 때 알렌은 민영익으로부터 치료비를 사양했다. 갑신정변과 진압이 완료되자 고종은 12월 26일에 최상품의 왕실 병풍과 고려자기 그리고 금일봉을 하사했다.
그후 알렌은 당시 주한미국공사관 총영사 대리로 사실상 공사로 재임하던 조지 포크 해군 소위의 추천장으로 1월 22일 조선왕립병원 설립 허가서를 제출했고, 알렌이 병원 설립을 요청하자 고종은 흔쾌히 광혜원 설립을 허가했다. 광혜원 부지는 갑신정변 때 대역죄인으로 참살당한 홍영식과 그의 아버지 영의정 홍순목의 집이었다. 병원 설립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닷새후 1월 27일 민영익은 두 살 많은 알렌을 앞으로 평생 형님으로 모신다며 10만 냥을 기부했다.[7]
알렌은 다음해 스크랜튼과 언더우드를 초청하여 의료진을 보강했는데 운영비는 선교단체에서 고종의 지원을 받아 충당했다. 이는 조카 민영익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 알렌에 대한 고종과 명성황후의 전폭적인 신임 덕분이었다.
민영익 치료 계기로 민씨척족과 가까워지고 고종의 신임도 얻어 수월하게 하와이의 노동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와이 이민자 모집을 공고했다. 당시 하와이 이민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힘들게 고생했으나, 일한 만큼 부지런히 하면 땅도 주고 돈도 벌고, 그곳 농장주들이 조선의 양반지주와 탐관오리들의 수탈보다는 훨씬 낫다는 소문에 이민 희망자들이 몰려서 제비뽑기에 뇌물까지 주고 밀항까지 하려고 했다.
| 돌(Sanford B. Dole) 하와이 주지사에게 보낸 알렌의 편지, 1902년 지금까지 한국인이 외국에 나가려는 허가를 얻기는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허가 없이 이민하면 귀국하는데 문제가 뒤따릅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의 혹독한 기근을 겪고 난 뒤 이들에게 이민은 한층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한편 한국 정부는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먹이려고 많은 양의 쌀을 들여와야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민이라는 것에 대하여 관리들이 호의적인 태도로 바뀌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아마 중국인이 쫓겨난 곳으로 자기 나라 백성들이 간다는 것을 아는 고종 황제의 긍지가 이에 많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중략) 조선인들은 참을성이 많고 근면하고 유순하고 오랜 복종의 습성으로 다루기 쉽습니다. 그들은 보통 외국 교육을 받는 데 대해 예민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미국으로 귀화했고, 그런 가운데 귀국한 이들은 잘 되었으며 그것은 미국 교육의 덕이었습니다. (중략) 만약 한국 사람들이 얼마든지 그곳에 가게 되면 신이 보낸 한국인들이 될 것이며 나는 그들이 별 탈이 없을 것이며 노동자로서 일을 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속의 한국인》 1882 - 1974, 김흥찬 ⋅ 웨인 패터슨 著, 1974. |
미국 의회에서는 1880년에 중국인 이민 배제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동양인이 미국으로 이주하기는 힘들었으나 이 과정에서 알렌이 개입하여 주 지사에게 편지를 보낸것이다. 하와이로 간 조선인들중에는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인천 내리교회에서 출신들이 많았고, 1902년에 하와이에 한인 교회를 열고 조국을 위해 독립 자금을 모금했다. 하와이 한인들의 이주는 1905년(광무 9년) 일제가 하와이의 반일거점화를 우려하여 이민금지법을 제정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들 하와이 한인 이주자와 후손들은 조선과 연락하고 미국내에서 한인 여론을 대표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2.2. 주미 한국 공사관 설립
1886년(고종 23년) 알렌은 고종의 밀명을 받는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청나라의 이홍장이 보낸 원세개에게 이리 저리 쥐어 짜이며[8] 강제로 외채를 빌리는 등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었는데, 청나라의 내정간섭 명분인 외채를 상환하기 위해 미국에 차관 200만 달러를 얻어낼 계획으로 주미 조선공사를 파견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대청속국이니 청나라에 보고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쟁이 오는데, 우유부단했던 고종은 결국 보고를 하기로 하고 베이징으로 사절을 보냈다. 청나라는 세 가지 조건을 내걸며 공사 파견을 허용하는데 이를 '영약삼단(另約三端)' 이라한다.- 조선 공사는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 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조선 공사는 청국 공사의 밑에 자리한다
- 조선 공사는 중대 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 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이 과정에서 알렌은 나가사키에서 무려 5달이나 기다렸는데, 고종의 편지를 받고 홍콩에 있던 '아우' 민영익을 만나러 갔다. 민영익은 고종의 비자금을 HSBC에 예금하고 홍콩의 빅토리아 호텔 스위트룸에 머물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형님' 알렌은 아우 민영익에게 "돈을 아껴쓰라"며 "자네 돈도 아니니 조금 싼 방으로 옮기라."고 권고했고, 고종의 명으로 공사관 부지와 건물 매입용 20,000달러를 인출해서 돌아갔다. 그 사이에 주미 조선국 특명 전권 공사로 임명받은 박정양을 나가사키에서 만났는데, 박정양은 이미 돈 다 받았다는데 바득바득 우겨서 홍콩으로 민영익을 만나러 또 간다고 하여 또 같이 따라갔고, 민영익이 돈이 너무 많으니 한 달마다 공사관 유지비를 부쳐준다느니 안된다느니 옥신각신 끝에 민영익 - 박정양 공동명의로만 기명날인이나 서명으로만 인출 가능하다는 조건으로 매듭짓고 다시 나가사키로 가서 미국 행에 오른다.
알렌은 여행 중인 조선인 외교단의 모습에 대해 기록을 남겼는데 꽤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나가사키에서 홍콩으로 갈 때, 외교단이 조선에서 싸온 조선 음식을 담은 항아리를 호텔 방에 굳이 넣어야 한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것을 말렸으나 실패했고,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에서는 1등석 표를 5장만 샀는데 다른 2명은 다른 표를 사고도 몰래 1등석 식사에 여러 번 끼다가 걸려 결국 차액을 지불했으며, 방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는 안내를 무시한 채 담배를 피웠고, 방 안에서 조선 음식 냄새, 씻지를 않아 나는 오줌 냄새와 땀 냄새가 담배 냄새랑 섞여서 더러워 같이 다니기 쪽팔렸다고 디스했다.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알렌은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박정양 일행이 알렌에게 영약삼단(另約三端) 내용을 알리지 않다가 그제서야 실토한 것이다. 알렌은 "조약은 대등한 나라끼리 맺는 것이고 조선과 미국의 조약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며 지키지 말라고 설득했으나 박정양은 청나라 공사관을 찾아가 미국 국무부에 안내 해달라고 요청 해버렸다. 기가 막힌 알렌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행을 데리고 나갔고 마침 비가 와서 청나라 일행이 늦게 오자 그대로 쌩까고 단독으로 일행을 끌고가 처리해버렸다. 항간에 알려진 박정양의 자주독립 외교 업적(?)은 실은 알렌이 주도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청나라와 이홍장과 원세개는 대노해서 공사관의 폐쇄와 외교관들의 송환을 요구했고 1년 뒤에 고종이 순순이 굴복하여 주미조선공사관은 폐쇄되고 말았다.
2.3. 고종과 미국 사이에서 외교관으로
알렌은 1890년(고종 27년)에 다시 조선으로 입국했다. 상술했듯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 이후 이홍장이 파견한 원세개를 비롯한 청의 영향력으로 인해 기존의 조공국 수준에서 청나라의 일개 성 수준으로 휘둘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거의 직접 통치를 받는 수준으로 국격이 나락으로 떨어졌단 것이다. 이러한 내정 간섭에 혐오감을 품었던 알렌은 '조선의 절대적 독립'을 지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알렌을 비롯한 서양인들은 속방 개념을 인정치 않았다.그래서 1882년(고종 19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당시 조선에서 '대청국의 속방'이라는 문구를 넣자고 하자 미국에서 강력하게 반대했고, 조선에서 미국 대통령에게 '조약에는 없지만 우리 조선은 대청국의 속방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타협했다. 명분상 조약은 대등한 국가끼리 맺는 것이므로 속방이라는 개념을 거부했다. 서구 입장에선 조선이 청나라를 핑계 대고 조약을 마음대로 파기하거나 조약을 이행치 않을 수도 있고, 또한 청나라가 조약에 간섭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조약을 맺은 서구국가들은 속방이고 아니고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특수한 문제이지, 타국과의 조약에 넣을 수 없다고 일관적으로 반대했다. 모든 서구열강들은 조선이 청나라에 매인 이상한 외교관계를 답답하게 생각하고, 이는 조선 발전에 큰 장애가 된다고 여겼다. 1894년(고종 31년)에 발발한 청일전쟁과 1895년(고종 32년)에 일어난 을미사변을 계기로 조선이 청나라와의 조공책봉 속국관계를 청산했다. 그러나 고종은 러시아로 기울면서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영국이 일본을 아시아에서 러시아 남하를 저지할 역할을 기대하고 동맹을 맺었다. 미국 역시 영국에 동조하는 입장이라 알렌의 구상과 달리 영국과 미국 등 서구열강들은 조선의 외교정책에 실망하고 있었다.
특히나 미국에서는 조선의 전략적 가치를 매우 낮게 보았다. 특히 경제적 가치에 대해 푸트 주조선 미국 공사는 본국에 '수출 가능 물품은 소가죽, 쌀, 사람 머리털, 전복 껍데기 정도'라고 보고하고, 조선의 경제적 가치를 '단물 빠진 껌 내지 계륵(鷄肋)'이라고 대폭 평가절하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갑신정변이 터지고 외국인 학살 우려 때문에 푸트 공사는 제물포로 도망쳐 출국하더니 사임해버렸고, 미국 공사는 당시 갑신정변에 낌새를 채고 연루되길 바라지 않아 지방여행 중이던 해군 무관 포크 소위[9]가 총영사 대리를 해야 했을 정도였다.
포크 소위의 연봉은 푸트 공사의 5분의 1 수준이라 한국산 우표를 미국에 팔아 공사관 운영비를 충당해야 할 정도로 쪼들렸다. 전임 푸트 공사가 사임한 이유 중에는 미국 의회에서 한국의 가치를 매우 낮게 보고 '납세자의 세금을 조선 공사관 같은 쓸데없는 곳에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운영비 지출을 거부하여 공사에서 총영사직으로 강등되었고, 푸트 공사가 사비로 구입한 공사관 비용을 정부에 돌려받지 못했던 점이 매우 컸다.
이후에도 기피직이라 공석으로 오래 있었고 재정난으로 사임한 푸트 공사가 받던 월급의 겨우 5분의 1을 받으며 사비로 공사관을 운영했다. 그러다 결국 포크 소위는 건강상 이유로 사임하고 일본으로 떠났는데, 공사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있자 다시 포크 소위를 데려다 공사 직을 수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포크 소위가 청나라와 원세개의 월권과 내정 간섭에 항의하자 원세개의 압력으로 해임되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도 공사 직을 맡으려고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조선 정부에 협판 벼슬로 정 2품 품계까지 받으며 고종 및 중전 민씨와 친한 알렌이 공사로 임명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알렌도 고종의 미국 의존을 매우 경계했다. 아관파천 이전에 고종은 일본, 프랑스 미국, 영국공사관 등에 총 13년간 파천 요청을 여덟 번이나 했으나 모든 국가에서 번번히 거부당했다. 1894년(고종 31년)에도 고종이 미국공사관으로 진입 요청을 했지만 알렌은 거절했다.
1905년(광무 9년) 러일전쟁 와중에 러시아의 패색이 짙어지자 고종은 또 다시 미국공사관으로 파천하기를 요청하는데 알렌은 즉각 거부했고, 아예 본국에 "고종이 허락받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온다 하더라도 쫓아내겠다"고 보고했다.
2.3.1. 광산 개발
광산 개발은 명성황후가 10년 간 알렌이 세운 공을 치하하며 하사한 큰 보수였다. 당시 미국은 조선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을 끌어들여 열강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한 고종의 전략으로 미국에 이권을 준 측면도 있었다. 알렌은 이러한 점을 잘 이용하여 한성의 전기, 전차, 경인철도, 광산 등의 산업 부문에 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아시아 최대의 금광인 평안북도의 운산 금광 채굴권을 미국의 모스(J. R. Morse)가 획득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이도 알렌이었다.알렌은 청일전쟁 이후 친미적 성향의 인물로 내각을 채우고자 했으며, 결국 자신과 함께 미국에 파견되었던 박정양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친미 내각의 성립을 이끌었다. 이러한 친미 내각성립과 더불어 운산금광 채굴권을 모스에게 넘겨주는 데에 있어서 알렌말고도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명성황후였다.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일본인이 살해하자, 알렌은 그 진상을 세계에 알리고 고종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왕비의 한마디에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하루 아침에 하사받게 된 알렌은 모스에게 3만 달러에 팔아버렸고 모스는 자본금 10만 달러를 들여 조선 개광 회사를 설립, 설비와 자재에 대한 무관세 통관은 물론 법인세, 소득세까지 일체의 세금을 면제받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운산 지역의 도로나 물류 상태가 미비했기 때문에 10만 달러로는 개발이 택도 없었다.
결국엔 동업자를 모집하여 1897년 헌트는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자본금 500만 달러를 들여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 OCMC)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일제가 중일전쟁으로 미국 자본의 자국 송금을 제한한 1937년까지 30여 년 동안 자본금 투자의 3배에 달하는 수익 당시 시세로 1500만 달러를 남겼다. 투자금 500만 달러는 2014년 기준 약 1.3억 달러에 해당하고#, 수익금 1500만 달러는 지금 가치로 2억~3억 달러 정도를 남겼다.#[10]
성공적인 투자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대비 50% ~ 170% 수익률이긴 하나 이것도 100여 년 전 달러 가치를 기반으로 한 추계치이다. 초기 투자 7년 동안은 전혀 배당이 없다가 이후 30여 년간 회수가 되었기에 수익성이 높았는지는 조선의 인프라나 정치적 리스크까지 고려하면 이득을 크게 봤다고 하기 애매하다. 그 후 1939년 OCMC는 중일전쟁 이후 수익이 급감하자 평안북도 창성 지역의 대유동 금광을 경영하던 일본 광업 주식회사에 800만 달러를 받고 운산 금광에 대한 권리 일체를 양도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1941년 이후였으면 적대국 자산이라 강제 몰수당할 것이었지만 매우 운이 좋은 편.
미국의 실(J. M. Sill) 공사는 이 계약에 대해 "미국은 차지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이권을 차지"했다고 했으며, 알렌은 "조선이 얻은 이익은 미국 정부와 미국인이 조선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했다. 자세한 기록은 링크를 참조. 이 때문에 알렌은 금광 회사로부터 일종의 두둑한 커미션을 받았고, 제물포에 근사한 별장까지 두었다. 자신의 친구인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렌은 "모스와 헌트는 그들의 이익이 확보되고 금광이 원활하게 운영되자 나에게 두 번에 걸쳐 현금과 선물을 주었다."라고 했다.
선교사와 미국 자체에 악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알렌을 두고 '친한이 아니며 철저히 이권을 빼앗아갔다.'고 비판하는데, 냉정한 시각에서 보면 적절하지 않은 비판이다. 이권을 퍼줄 때 열심으로 매달린 사람은 알렌이 아니라 고종과 민비였다. 고종은 광산 지분을 국가가 아닌 개인명의로 25% 챙겼다가 7년 동안 수익이 별로 나지 않자 헐값에 팔아버렸다. 이는 동대문에 미국에게 조선 최초 전력 회사를 허가했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지분 25%를 개인명의로 챙기고 전기는 밤마다 열리는 궁전 잔치와 푸닥거리에 낭비했다. 외교관은 자국 이익에 충실하며 상대국과 공통된 이득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고, 그것이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이다. 하지만 다른 선교사들은 당시 알렌을 손절하여 선교사로 취급하지 않았다.
"미국이 운산 금광에서 금 900만 톤을 캐냈다" 하는 뉴스 기고문 까지 여럿 있지만 이 역시 투철한 반미 운동권식 날조이다. 900만 톤 중에 899만 9900톤 이상은 가치는커녕 처리비와 환경파괴비용이 나오는 버럭에 불과하다. 운산 금광을 포함한 북한의 전체 금생산량은 정보기관에 따르면 한때 10톤까지 도달했으나, 현재는 사금까지 탈탈 털어도 연간 3~4톤에 불과하다. 북한의 전력난으로 낙후되었단 점을 감안하더라도, 900만과 최대 10톤의 차이는 굳이 금채굴량을 발표하지 않고 900만 톤이란 큰 숫자로 혼란을 일으키려는 허황된 선동이다.
영화 007 골드핑거와 다이하드3에서 털어보려는 미국 연방준비은행 금 보유고가 고작 6200톤이고, 지구상에 금은 고작 25만 톤 미만이며,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21세기까지 캐낸 금의 양은 19만 5천 톤 정도이다. 금광석 1톤에 금은 3g 미만이 나온다.[11] 이처럼 금광석과 금생산량에는 막대한 차이가 있다.
2.4. 러일전쟁 이후 행보
|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 이후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로 압축되었으며, 알렌은 1897년 주한 미국 대리공사 겸 총영사를 거쳐 1901년에는 주한 미국 전권공사가 되어 조선에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 정부와 알렌의 생각이 달랐다. 미국 정부의 대한정책(對韓政策) 기조는 불간섭정책이었다. 이는 한국을 포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점차 친일정책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즉 일본이 미국을 대신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 그 보상으로 한반도를 넘겨주고 아시아에서 우월권을 인정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구현하겠다는 것이었다. 알렌은 주한 미국의 공사로서 이러한 친일 정책은 현지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며 1903년 9월 미국으로 들어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와 논쟁을 벌였다. 여기서 알렌은 러시아가 만주를 평정하고 막대한 자본을 들여 항구와 철도, 도로 등을 건설했기 때문에 절대로 만주에서 철병하지 않을 것이며, 항구․철도․도로의 건설로 엄청난 상업시장이 발생했고 그 개방을 약속한 만큼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친러반일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렇지만 알렌의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알렌은 이에 불복하여 미국에 머무는 동안 언론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고 정부를 비판했다. 러일전쟁 이후에도 미국이 일본의 한국 침략을 묵인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한국에서 미국공사관 철수를 결정한 미국 정부는 본국의 대아시아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알렌을 해임했다. 1905년 6월 알렌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알렌은 다시 의사로서 활동하고 집필에도 전념하며 여생을 보냈으며, 1932년 12월 11일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국사 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1902년(광무 6년) 평양부를 제 2의 수도로 만들고 일제의 한성 무력 장악시 평양으로 이어하여 러시아와 함께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풍경궁(豐慶宮) 공사를 강행했는데 공사비 1000만 냥중에 고종이 내놓은 것은 150만 냥 뿐이었고 나머지 비용은 서북 지방에서 세금을 걷어 충당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은 민씨 척족과 탐관오리들의 뱃속으로 들아갔고, 세금의 고작 5분의 1만 공사비로 투입되었다. 더군다나 당시 평안도에는 흉년이 들었고 의정부의정 이근명이 공사현장을 보며 고종에게 “병정들이 소와 말을 빼앗고 재물을 노략질하며 부녀자들을 겁박하고 있다. 잡세가 번다해 100리도 안 되는데 세금을 거두는 곳은 열여덟 곳이나 된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고종은 이렇게 답했다. “여전히 그렇다고? 그중에는 반드시 올바른 세금(正稅·정세)도 있을 것이다.”라 했지만 이근명은 (잡세는 예전에 다 폐지 하라고 하교 하셨다.) 지금 세금중에 균역세(均役稅) 빼고 다 잡세인데요? 라며 반문 했으나 사뿐히 씹고 풍경궁 공사 관리들을 포상했다. [12]
풍경궁을 짓는 와중에 덕수궁 중화전도 완공했다. 당시 경기도의 백성들은 인조의 능 장릉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배를 채우고 있었다. 보다 못한 고종이 내탕금 50만 냥을 풀어서 구제하라고 했으나 궁궐짓는 것은 끝내 그만두지 않았다. 저렇게 혈세를 들인 풍경궁 공사는 러일전쟁의 발발로 인해 중단되었고 끝내 미완의 궁궐로 남고 말았다.[13]
알렌은 1904년 경에는 완전히 마음 속으로 고종을 손절하고 그를 이렇게 여기고 있었다.라며 네로급 암군으로 혹평했다. 돌아가면서는 "한국 백성들이 불쌍하다. 한국 황제같은 인종은 처음 봤다." 며 무지막지하게 비판했다.뿐만 아니라 고종이 자신의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稱慶禮式)으로 나라예산의 3분의 1을 흥청망청 쓰려고 하자 재정을 아껴 쓰라고 권고했으나 소용없었다. 또한 고종이 일본에서 30년이 지난 폐급 석탄운송선을 프랑스식 고급 가구로 내부를 치장하는 조건에 칭경식때 외국 공사들 앞에서 예포를 쓰려는 목적으로 군함이라는 이름을 붙여 국고로 구매하고, 가마를 타는건 폼이 안나서 캐딜락을 구매했으며 조선에는 운전수를 구할 수 없어 일본인 운전자를 고용하기까지 했다. 거기다 각국 사절을 걷게 할 수 없어 인력거 100대를 일본에서 수입했으며 잔치가 끝나면 공짜로 나눠줄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해 겨울 돌림병이 돌아 연회는 취소되었다. 이렇게 고종이 자신의 사치와 위신을 높이는 데에 엄청난 거금을 들이는 동안 재정은 파탄났고, 관리들은 월급을 지급받지 못했다.
순종도 고종 이상으로 낮게 평가했는데, 알렌의 일기에서는 순종이 지능이 낮았다는 등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순종이 지능이 낮았다는 것은 알렌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 조선에서 널리 퍼져있는 소문이었다. 순종의 지능은 알 수 없으나, 고종이 퇴위 전에도 순종은 서른이 넘었으나 어떠한 정치적 의견이나 입지도 없었고 아무도 순종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아무튼 알렌은 이렇게 말년의 고종이나 순종에 실망했기 때문에 조선의 망국이 확실시된 후에는 더 이상 크게 관여하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살았다. 오하이오주 털리도에서 의사로 살다가 1932년 12월 11일에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으로는 아내 프랜시스 앤 앨런(Frances Ann Allen)과 1남 1녀가 있다.
3. 기타
- 사람에 대해 평하기를 좋아했는지 직접 쓴 인물평들이 남아 있으며 알렌 개인의 인품과는 별개로 상당수의 사람들은 정확하게 평가하였다. 그 중 하나가 한때 "영민하다"며 높은 평가를 남겼던 이완용인데 "한마디로 기계(로봇) 같은 사람이다"라는 혹평을 남겼다. 후에 이완용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는 딱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알렌이 초대원장을 지낸 광혜원(제중원)[14]은 나중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되고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한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1957년 합쳐지면서 두 학교의 머리 글자를 따 연세대학교가 된다. 자세한 것은 연세대학교/역사 참조.
- 연세대학교 재단이 설립하고 현재 인터파크가 대주주인 의약품 물류회사 '안연케어'는 알렌의 한국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회사의 영문 사명 표기가 'Allen Care'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 과거 알렌의 별장이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우각로 134-9 소재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과거와 현재 모두 경인선 철도가 지나는 길목이며, 현재는 바로 인근에 도원역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위치해 있다. 알렌의 별장이 매각되고 철거된 후 인천 전도관이 들어서며, 기구한 땅의 운명을 유지해오다 현재는 재개발로 인해 주변지역이 모두 철거되었고 그 자리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아파트 건설 전 알렌별장에 대한 조사를 했지만 별다른 결과는 없었던듯 하다.
4. 대중매체에서
- 2010년 SBS 드라마 〈제중원〉에서는 션 리차드가 연기했다.
-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알렌 공사'라고 불린다. 등장 장면이 많지는 않지만 주인공인 유진 초이 대위 및 카일 무어 소령과는 사사건건 의견대립으로 부딪히며 사이도 좋지 않고 그리 좋은 취급은 못 받는다. 카일은 알렌을 명예도 없는 그저 의사양반이라고 비판하며 탐탁지 않아 한다.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대머리 알렌이라고 불리면서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그려진다. 한미관계를 조율하면서 그사이에서 발생하는 이익과 뇌물을 받아먹는 인물로 정작 본인도 미국정계에 거의 영향을 못끼치지만 약소국인 대한민국은 이 사람 제외하고는 미국에 연줄이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뇌물을 주고 이후에도 한국에 쭉 머물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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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 유기동 만주방면 | 1963 유상렬 임시정부 | 1963 유창순 국내항일 | 1963 유흥수 학생운동 | 1963 윤준희 만주방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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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 이민화 만주방면 | 1963 이상만 임시정부 | 1963 이상호 학생운동 | 1963 이서현 만주방면 | 1963 이설 계몽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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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 이원직 임시정부 | 1963 이유필 임시정부 | 1963 이인 문화운동 | 1963 이장녕 만주방면 | 1963 이재현 광복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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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 이화주 만주방면 | 1963 임국정 만주방면 | 1963 임봉주 국내항일 | 1963 임의탁 임시정부 | 1963 임창모 의병 | ||||||
| 1963 장관주 국내항일 | 1963 장기천 만주방면 | 1963 장덕준 문화운동 | 1963 장덕진 만주방면 | 1963 장두환 국내항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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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 정이형 만주방면 | 1963 정인복 만주방면 | 1963 정찬조 만주방면 | 1963 정태희 임시정부 | 1963 조경환 의병 | ||||||
| 1963 조길룡 학생운동 | 1963 조명하 중국방면 | 1963 조병준 만주방면 | 1963 조시원 광복군 | 1963 조원세 국내항일 | ||||||
| 1963 조인제 광복군 | 1963 조종대 국내항일 | 1963 조지 새넌 맥큔 | 1963 조지 쇼 | 1963 조진탁 3·1 운동 | ||||||
| 1963 조창호 의열투쟁 | 1963 주기철 문화운동 | 1963 주명우 3·1 운동 | 1963 주병웅 만주방면 | 1963 지달수 광복군 | ||||||
| 1963 차병제 만주방면 | 1963 채기중 국내항일 | 1963 최관용 만주방면 | 1963 최낙철 학생운동 | 1963 최능찬 3·1 운동 | ||||||
| 1963 최병선 중국방면 | 1963 최병수 3·1 운동 | 1963 최병호 만주방면 | 1963 최석준 만주방면 | 1963 최수봉 의열투쟁 | ||||||
| 1963 최은식 3·1 운동 | 1963 최지관 만주방면 | 1963 최진동 만주방면 | 1963 최천호 의열투쟁 | 1963 한봉수 의병 | ||||||
| 1963 한상렬 의병 | 1963 한상호 만주방면 | 1963 한흥근 의열투쟁 | 1963 함석은 만주방면 | 1963 허형 의열투쟁 | ||||||
| 1963 현순 임시정부 | 1963 현천묵 만주방면 | 1963 홍사구 의병 | 1963 홍성익 임시정부 | 1963 홍주 만주방면 | ||||||
| 1963 홍찬섭 3·1운동 | 1963 황덕환 만주방면 | 1963 황병길 만주방면 | 1963 황상규 중국방면 | 1963 황학봉 만주방면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65~1969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94명 | ||||
| 1965 체스터 니미츠 | 1966 천궈푸 | 1968 고이허 만주방면 | 1968 궈타이치 | 1968 권준 중국방면 | ||||||
| 1968 (취소) | 1968 김기형 임시정부 | 1968 김명권 만주방면 | 1968 김봉식 만주방면 | 1968 김상옥 만주방면 | ||||||
| 1968 김석 중국방면 | 1968 김성택 만주방면 | 1968 김시중 의병 | 1968 김용구 의병 | 1968 김원범 의병 | ||||||
| 1968 김원식 만주방면 | 1968 (취소) | 1968 김진성 만주방면 | 1968 김진준 만주방면 | 1968 김천성 광복군 | ||||||
| 1968 김태연 만주방면 | 1968 김학섭 만주방면 | 1968 김홍서 임시정부 | 1968 노병대 의병 | 1968 노태준 광복군 | ||||||
| 1968 다이리 | 1968 로버트 그리어슨 | 1968 류용야오 | 1968 마수례 | 1968 모더후이 | ||||||
| 1968 문창학 만주방면 | 1968 박도경 만주방면 | 1968 박인화 의병 | 1968 박태열 만주방면 | 1968 박희광 만주방면 | ||||||
| 1968 백삼규 만주방면 | 1968 서원준 만주방면 | 1968 서의배 국내항일 | 1968 손승억 만주방면 | 1968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 ||||||
| 1968 신정백 의병 | 1968 신태식 의병 | 1968 신현구 국내항일 | 1968 아치볼드 해리슨 바커 | 1968 양승우 만주방면 | ||||||
| 1968 양한규 의병 | 1968 여준 만주방면 | 1968 유득신 국내항일 | 1968 유상근 의열투쟁 | 1968 유택수 만주방면 | ||||||
| 1968 윤이병 계몽운동 | 1968 이규선 3·1 운동 | 1968 이규창 중국방면 | 1968 이기 의열투쟁 | 1968 이명균 국내항일 | ||||||
| 1968 이병묵 만주방면 | 1968 이병욱 만주방면 | 1968 이붕해 만주방면 | 1968 이성구 중국방면 | 1968 이성우 의열투쟁 | ||||||
| 1968 이양섭 3·1 운동 | 1968 이응서 만주방면 | 1968 이의준 만주방면 | 1968 이진택 만주방면 | 1968 이창덕 만주방면 | ||||||
| 1968 이현규 의병 | 1968 이희경 임시정부 | 1968 임치정 계몽운동 | 1968 장소진 3·1운동 | 1968 장윤덕 의병 | ||||||
| 1968 장쥐 | 1968 장진원 중국방면 | 1968 장췬 | 1968 전덕명 만주방면 | 1968 정서송 3·1 운동 | ||||||
| 1968 조지 애쉬모어 피치 | 1968 조창선 국내항일 | 1968 주석환 만주방면 | 1968 주칭란 | 1968 차병수 임시정부 | ||||||
| 1968 차희식 3·1 운동 | 1968 채세윤 만주방면 | 1968 채원개 광복군 | 1968 천리푸 | 1968 최규동 문화운동 | ||||||
| 1968 최도환 의병 | 1968 최세윤 의병 | 1968 최영걸 만주방면 | 1968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 1968 한훈 의열투쟁 | ||||||
| 1968 한흥 만주방면 | 1968 홍원식 의병 | 1968 황병학 의병 | 1968 황줴 | 1968 황창오 국내항일 | ||||||
| 1969 세바스티안 우가르테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77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84명 | ||||||||
| 1977 쉐웨 | 1977 강상모 만주방면 | 1977 강진원 의병 | 1977 권기옥 중국방면 | 1977 김교헌 만주방면 | ||||||
| 1977 김대규 의병 | 1977 김동신 의병 | 1977 김성수 중국방면 | 1977 김순애 임시정부 | 1977 김승곤 광복군 | ||||||
| 1977 김약연 만주방면 | 1977 김용재 광복군 | 1977 김이직 만주방면 | 1977 김중건 만주방면 | 1977 김진만 국내항일 | ||||||
| 1977 (취소) | 1977 나태섭 광복군 | 1977 남궁억 문화운동 | 1977 남석인 의병 | 1977 노원섭 의병 | ||||||
| 1977 노응규 의병 | 1977 노임수 의병 | 1977 문상익 3·1 운동 | 1977 문창숙 만주방면 | 1977 민용호 의병 | ||||||
| 1977 박승길 만주방면 | 1977 박영준 광복군 | 1977 박영희 만주방면 | 1977 박인항 국내항일 | 1977 박춘실 의병 | ||||||
| 1977 서상용 만주방면 | 1977 서영석 3·1운동 | 1977 손양윤 만주방면 | 1977 송병순 계몽운동 | 1977 송주면 계몽운동 | ||||||
| 1977 신건식 임시정부 | 1977 신언성 만주방면 | 1977 안경근 임시정부 | 1977 안병무 임시정부 | 1977 양진여 의병 | ||||||
| 1977 염온동 임시정부 | 1977 오광심 광복군 | 1977 오성술 의병 | 1977 왕광연 3·1 운동 | 1977 원심창 중국방면 | ||||||
| 1977 유민식 만주방면 | 1977 유병기 의병 | 1977 유석현 중국방면 | 1977 유장렬 국내항일 | 1977 유지명 의병 | ||||||
| 1977 유해준 광복군 | 1977 윤병구 미주방면 | 1977 이강산 의병 | 1977 이강훈 중국방면 | 1977 이관석 만주방면 | ||||||
| 1977 이기손 의병 | 1977 이병채 의병 | 1977 이상정 임시정부 | 1977 이승길 계몽운동 | 1977 이우식 문화운동 | ||||||
| 1977 이원대 중국방면 | 1977 이재윤 의병 | 1977 이종건 광복군 | 1977 이종희 광복군 | 1977 이진영 광복군 | ||||||
| 1977 이형우 만주방면 | 1977 이화일 만주방면 | 1977 임용상 의병 | 1977 장한성 만주방면 | 1977 정용대 의병 | ||||||
| 1977 정운경 의병 | 1977 정춘서 의병 | 1977 조용하 미주방면 | 1977 조정인 의병 | 1977 차천모 만주방면 | ||||||
| 1977 채광묵 의병 | 1977 최욱영 의병 | 1977 최익형 계몽운동 | 1977 최중호 중국방면 | 1977 최해 만주방면 | ||||||
| 1977 한성수 광복군 | 1977 허빈 만주방면 | 1977 홍준옥 3·1 운동 | 1977 홍충희 만주방면 | 1977 황재운 3·1운동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80~1990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101명 | ||||
| 1980 강원형 계몽운동 | 1980 강인수 중국방면 | 1980 권인규 의병 | 1980 금달연 의병 | 1980 기우만 의병 | ||||||
| 1980 김대지 임시정부 | 1980 김봉원 만주방면 | 1980 김인전 임시정부 | 1980 김일두 임시정부 | 1980 마진 만주방면 | ||||||
| 1980 박문용 임시정부 | 1980 사도덕 | 1980 서종채 의병 | 1980 손영각 의병 | 1980 안무 만주방면 | ||||||
| 1980 양근환 일본방면 | 1980 양윤숙 의병 | 1980 오의선 임시정부 | 1980 왕주이 | 1980 이구연 임시정부 | ||||||
| 1980 이능권 의병 | 1980 이봉우 만주방면 | 1980 이종혁 만주방면 | 1980 임이걸 3·1 운동 | 1980 장석영 3·1 운동 | ||||||
| 1980 조훈 만주방면 | 1980 진치언 의병 | 1980 진희창 임시정부 | 1980 한봉근 중국방면 | 1980 한정만 의병 | ||||||
| 1982 김석황 임시정부 | 1982 김성숙 임시정부 | 1982 김영백 의병 | 1982 류인식 문화운동 | 1982 윤세주 중국방면 | ||||||
| 1982 윤인순 의병 | 1983 정현섭 중국방면 | 1983 조윤하 만주방면 | 1982 최창식 임시정부 | 1986 권석도 의병 | ||||||
| 1986 김갑 임시정부 | 1986 김영현 만주방면 | 1986 이명순 만주방면 | 1986 정순만 만주방면 | 1986 황준성 의병 | ||||||
| 1987 신언준 중국방면 | 1987 안정근 임시정부 | 1988 유동하 의열투쟁 | 1989 고창일 노령방면 | 1989 엄항섭 임시정부 | ||||||
| 1989 원세훈 중국방면 | 1990 강기덕 국내항일 | 1990 박봉석 의병 | 1990 서병희 의병 | 1990 손덕오 의병 | ||||||
| 1990 염인서 의병 | 1990 이은영 의병 | 1990 이충응 의병 | 1990 이필봉 의병 | 1990 이현 3·1 운동 | ||||||
| 1990 이황룡 의병 | 1990 이희룡 3·1 운동 | 1990 임하중 의병 | 1990 장인초 의병 | 1990 정기찬 의병 | ||||||
| 1990 정철화 의병 | 1990 조병두 의병 | 1990 지석용 3·1 운동 | 1990 최산흥 의병 | 1990 추삼만 의병 | ||||||
| 1990 김상덕 임시정부 | 1990 김의한 임시정부 | 1990 김일곤 중국방면 | 1990 김형빈 만주방면 | 1990 명제세 임시정부 | ||||||
| 1990 박건웅 임시정부 | 1990 오영선 임시정부 | 1990 윤해 만주방면 | 1990 이관직 만주방면 | 1990 이광민 만주방면 | ||||||
| 1990 이병화 만주방면 | 1990 이종건 만주방면 | 1990 장도빈 국내항일 | 1990 장철호 만주방면 | 1990 정인보 문화운동 | ||||||
| 1990 조지영 임시정부 | 1990 최이붕 중국방면 | 1990 김춘배 만주방면 | 1990 김치홍 의병 | 1990 박여성 의병 | ||||||
| 1990 박인호 3·1운동 | 1990 양경학 의병 | 1990 윤동주 학생운동 | 1990 이대극 의병 | 1990 이명서 만주방면 | ||||||
| 1990 이봉희 만주방면 | 1990 장일환 국내항일 | 1990 정기선 의병 | 1990 최동오 임시정부 | 1990 태양욱 의병 | ||||||
| 1990 한이경 국내항일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92~1995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114명 | ||||||||
| 1992 곽중규 임시정부 | 1992 김철남 임시정부 | 1992 이달 중국방면 | 1992 고평 만주방면 | 1992 손기혁 의병 | ||||||
| 1992 현정건 중국방면 | 1992 현정경 만주방면 | 1993 이철형 의병 | 1993 강기운 만주방면 | 1993 김태원 의병 | ||||||
| 1993 문석봉 의병 | 1993 박건병 중국방면 | 1993 박치화 만주방면 | 1993 이필희 의병 | 1993 이흥관 임시정부 | ||||||
| 1993 장두량 만주방면 | 1994 장봉한 만주방면 | 1994 천병림 중국방면 | 1994 민효식 의병 | 1995 강경선 중국방면 | ||||||
| 1995 강이봉 의병 | 1995 강제하 만주방면 | 1995 강진해 만주방면 | 1995 계봉우 임시정부 | 1995 권순명 의병 | ||||||
| 1995 권준 의병 | 1995 금기철 의병 | 1995 김강 만주방면 | 1995 김경운 의병 | 1995 김난섭 만주방면 | ||||||
| 1995 김덕순 의병 | 1995 김덕흥 의병 | 1995 김동수 의병 | 1995 김문희 임시정부 | 1995 김범이 의병 | ||||||
| 1995 김법린 국내항일 | 1995 김병조 중국방면 | 1995 김병태 의열투쟁 | 1995 김봉규 의병 | 1995 김선여 의병 | ||||||
| 1995 김성범 만주방면 | 1995 김수곡 의병 | 1995 김영란 국내항일 | 1995 김영렬 만주방면 | 1995 김용대 만주방면 | ||||||
| 1995 김원국 만주방면 | 1995 김원식 의병 | 1995 김율 의병 | 1995 김응백 의병 | 1995 김이섭 만주방면 | ||||||
| 1995 김일봉 만주방면 | 1995 김일원 의병 | 1995 김정원 의병 | 1995 김종철 의병 | 1995 김준택 만주방면 | ||||||
| 1995 김창균 만주방면 | 1995 김태연 중국방면 | 1995 김훈 만주방면 | 1995 나병삼 만주방면 | 1995 나시운 의병 | ||||||
| 1995 나정구 만주방면 | 1995 노을룡 중국방면 | 1995 노종균 중국방면 | 1995 문양목 미주방면 | 1995 문일평 중국방면 | ||||||
| 1995 박경순 임시정부 | 1995 박차정 중국방면 | 1995 성익현 중국방면 | 1995 송종익 미주방면 | 1995 송헌주 미주방면 | ||||||
| 1995 신석우 임시정부 | 1995 신창룡 의병 | 1995 신창현 의병 | 1995 안공근 임시정부 | 1995 안국형 만주방면 | ||||||
| 1995 안원규 미주방면 | 1995 안현경 미주방면 | 1995 엄주필 노령방면 | 1995 오상원 의병 | 1995 유광흘 만주방면 | ||||||
| 1995 유성삼 만주방면 | 1995 유일한 미주방면 | 1995 윤덕보 만주방면 | 1995 윤흥곤 의병 | 1995 이광복 중국방면 | ||||||
| 1995 이교영 의병 | 1995 이대위 미주방면 | 1995 이덕삼 중국방면 | 1995 이범직 의병 | 1995 이병진 만주방면 | ||||||
| 1995 이석이 의병 | 1995 이영준 중국방면 | 1995 이인금 의병 | 1995 이중봉 의병 | 1995 이희삼 만주방면 | ||||||
| 1995 임병극 만주방면 | 1995 전학수 만주방면 | 1995 정봉준 의병 | 1995 정원집 의병 | 1995 조창룡 만주방면 | ||||||
| 1995 조화선 만주방면 | 1995 천세헌 미주방면 | 1995 최성천 의병 | 1995 최익룡 만주방면 | 1995 최일엽 만주방면 | ||||||
| 1995 최진하 미주방면 | 1995 최천유 의병 | 1995 한시대 미주방면 | 1995 허근 만주방면 | 1995 홍석호 만주방면 | ||||||
| 1995 홍언 미주방면 | 1995 홍학순 만주방면 | 1995 황봉신 의병 | 1995 황봉운 의병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96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73명 | |||||
| 1996 강윤희 의병 | 1996 김치보 노령방면 | 1996 이중집 만주방면 | 1996 장명도 만주방면 | 1996 추푸청 | ||||||
| 1996 남공선 만주방면 | 1996 안광조 의병 | 1996 엄해윤 의병 | 1996 윤상열 3·1 운동 | 1996 정인국 의병 | ||||||
| 1996 최봉준 노령방면 | 1996 최영호 만주방면 | 1997 김호 미주방면 | 1997 백일규 미주방면 | 1997 임성우 미주방면 | ||||||
| 1997 조병요 미주방면 | 1998 김용성 미주방면 | 1998 김찬수 만주방면 | 1998 박사화 의병 | 1998 심용준 만주방면 | ||||||
| 1998 차천리 만주방면 | 1999 신우여 노령방면 | 1999 후쭝난 | 2000 이호원 만주방면 | 2000 이성화 의병 | ||||||
| 2001 김학무 중국방면 | 2002 김규면 노령방면 | 2002 신현규 국내항일 | 2002 채영 노령방면 | 2003 이필상 의병 | ||||||
| 2004 윤자영 중국방면 | 2005 권오설 국내항일 | 2005 조동호 국내항일 | 2005 김철수 국내항일 | 2005 김태연 국내항일 | ||||||
| 2005 김한 중국방면 | 2005 정헌태 국내항일 | 2005 최윤구 만주방면 | 2005 한위건 중국방면 | 2006 고지형 3·1운동 | ||||||
| 2006 박영 만주방면 | 2006 이재유 국내항일 | 2006 이민환 노령방면 | 2006 한봉철 만주방면 | 2007 이자해 중국방면 | ||||||
| 2007 전일 노령방면 | 2008 유기석 중국방면 | 2008 이춘숙 임시정부 | 2009 장기초 만주방면 | 2009 길선주 3·1 운동 | ||||||
| 2009 이운혁 국내항일 | 2010 이경호 국내항일 | 2010 김창헌 만주방면 | 2010 김호 만주방면 | 2010 신광삼 만주방면 | ||||||
| 2010 유찬희 만주방면 | 2010 임기홍 만주방면 | 2010 이웅해 만주방면 | 2011 강영소 미주방면 | 2011 유상돈 노령방면 | ||||||
| 2012 임성섭 국내항일 | 2013 박창철 만주방면 | 2014 프레더릭 매켄지 | 2014 백남준 만주방면 | 2014 송중직 국내항일 | ||||||
| 2014 이진산 중국방면 | 2015 강익록 국내항일 | 2015 전병현 임시정부 | 2017 조응순 만주방면 | 2019 이봉구 3·1 운동 | ||||||
| 2020 이영쇠 3·1운동 | 2025 김창준 만주방면 | 2025 제랄딘 T. 피치 | }}}}}}}}}}}} | |||||||
| [A] 허위 공적으로 인해 서훈 취소 [B] 친일 행적으로 인해 서훈 취소 | }}}■ : 독립유공자 ■ : 기타 공훈}}}}}}}}}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rowcolor=#000,#fff> 성명 | 국적 | 훈격 |
| <colcolor=#000> 가네코 후미코 | 일본 | 애국장 | |
| 궈타이치 | 중국 | 독립장 | |
| 탕지야오 | 중국 | 대통령장 | |
| 다이리 | 중국 | 독립장 | |
| 더글라스 스토리 | 영국 | 애족장 | |
| 데이지 호킹 | 호주 | 건국포장 | |
| 두쥔훼이 | 중국 | 애족장 | |
| 로버트 그리어슨 | 캐나다 | 독립장 | |
| 롤랜드 클린턴 베이컨 | 캐나다 | 애족장 | |
| 루이 마랭 | 프랑스 | 애국장 | |
| 마가렛 센더먼 데이비스 | 호주 | 애족장 | |
| 마수례 | 중국 | 독립장 | |
| 모더후이 | 중국 | 독립장 | |
| 모리스 윌리엄 | 호주 | 독립장 | |
| 미네르바 루이즈 구타펠 | 미국 | 건국포장 | |
| 사도덕 | 중국 | 독립장 | |
| 쉐웨 | 중국 | 독립장 | |
| 셀던 파머 스펜서 | 미국 | 애족장 | |
| 쑤징허 | 중국 | 애족장 | |
| 쑨커 | 중국 | 대통령장 | |
| 쑨원 | 중국 | 대한민국장 | |
| 쑹자오런 | 중국 | 대통령장 | |
| 쑹메이링 | 중국 | 대한민국장 | |
|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 캐나다 | 독립장 | |
| 스티븐 앰브로즈 백 | 미국 | 애족장 | |
| 아치볼드 해리슨 바커 | 캐나다 | 독립장 | |
| 어거스틴 스위니 | 영국 | 애족장 | |
| 어니스트 배델 | 영국 | 대통령장 | |
| 여천민 | 중국 | 대통령장 | |
| 올리버 R. 애비슨 | 캐나다 | 독립장 | |
| 왕주이 | 중국 | 독립장 | |
| 위빈 | 중국 | 대통령장 | |
| 윌리엄 린튼 | 미국 | 애족장 | |
| 류용야오 | 중국 | 독립장 | |
| 이사벨라 멘지스 | 호주 | 건국포장 | |
| 리수전 | 중국 | 애족장 | |
| 일라이 밀러 모우리 | 미국 | 독립장 | |
| 린썬 | 중국 | 대통령장 | |
| 장제스 | 중국 | 대한민국장 | |
| 장쥐 | 중국 | 독립장 | |
| 장췬 | 중국 | 독립장 | |
| 추푸청 | 중국 | 독립장 | |
| 제랄딘 피치 | 미국 | 독립장 | |
| 제이 제롬 윌리엄스 | 미국 | 독립장 | |
| 제임스 헨리 로버츠 크롬웰 | 미국 | 건국포장 | |
| 조지 쇼 | 영국 | 독립장 | |
| 조지 새넌 맥큔 | 미국 | 독립장 | |
| 조지 애쉬모어 피치 | 미국 | 독립장 | |
| 조지 윌리엄 노리스 | 미국 | 애족장 | |
| 존 웨슬리 스태거즈 | 미국 | 독립장 | |
| 주자화 | 중국 | 대통령장 | |
| 주칭란 | 중국 | 독립장 | |
| 천궈푸 | 중국 | 대한민국장 | |
| 천치메이 | 중국 | 대한민국장 | |
| 천청 | 중국 | 대통령장 | |
| 천리푸 | 중국 | 독립장 | |
| 찰스 스폴딩 토마스 | 미국 | 건국포장 | |
| 찰스 에드워드 러셀 | 미국 | 독립장 | |
|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 아일랜드 | 애족장 | |
| 패트릭 도슨 | 아일랜드 | 애국장 | |
| 폴 프레드릭 더글라스 | 미국 | 독립장 | |
|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 | 미국 | 건국포장 | |
| 프랭크 스코필드 | 캐나다 | 독립장 | |
| 프레데릭 브라운 해리스 | 영국 | 독립장 | |
| 프레드 A. 돌프 | 미국 | 독립장 | |
| 프레더릭 매켄지 | 영국 | 독립장 | |
| 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 | 미국 | 애국장 | |
| 하상기 | 중국 | 건국포장 | |
| 해리 찰스 화이팅 | 미국 | 애족장 | |
| 허버트 아돌프스 밀러 | 미국 | 독립장 | |
| 호레이스 뉴튼 알렌 | 미국 | 독립장 | |
| 호머 헐버트 | 미국 | 독립장 | |
| 후쭝난 | 중국 | 독립장 | |
| 후한민 | 중국 | 대통령장 | |
| 황줴 | 중국 | 독립장 | |
| 황싱 | 중국 | 대통령장 | |
| 후세 다쓰지 | 일본 | 애족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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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렌 | 헤론 | 빈턴 | 에비슨父 | 허스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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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스필드 | 에비슨子 | 이영준 | 윤치왕 | 오한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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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남식 | 윤도흠 | 이병석 | 하종원 | 이강영 | |
[1] 철자로 인해 '호레이스'로도 알려져 있으나 해당 이름의 영어 발음은 /ˈhɒɹɪs~ˈhɔɹəs/로, '호러스'가 실제에 더 가깝다. Allen(/ˈæ.lən/)의 경우 관용에 따라 '앨런'이 아닌 '알렌'으로 표기한다.[2] 다른 하나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한 조선기독대학(경신학교 대학부)-연희전문학교.[3] 다만 이에 대해서는 연세의료원과 서울대학교병원 사이에 정통성 논란이 있기도 했다. 제중원 정통성 논란 문단 참조.[4] 現 연세 대학교 의과 대학 및 세브란스병원.[5] 일설에는 청나라에서 의료사고를 저질러 선교사역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사실 알렌은 의과대학을 졸업했지만 의술이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았다.[6] 뮐렌도르프는 독일인인데다가 청나라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공식 관리였기 때문에 건드리기가 어려웠다.[7] 다만 당시 조선은 1883년부터 발행된 당오전의 영향으로 1881년에 6.5냥이던 쌀1섬이 1884년이면 14냥으로 뛴다. 당연히 쌀 가격만 올라갔을리 없으니 갑신정변 이전에 고종과 민비가 매관매직하던 시절의 화폐가치로 이 10만냥을 가늠할 순 없다. 당장 알렌 본인이 1884년에 서울에 산 집의 집값을 기록한게 45만냥이다.[8] 원세개는 총영사 직위로 파견되었지만 스스로 총독 행세를 하며 다른 외교관들이 궁문에 내려 걸어가는데 비해 고종 앞에까지 가마를 타고 다니며 폐위협박까지 할 정도로 위세를 떨었다.[9] 해군 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어가 유창하고 한문을 독학으로 깨우친 데다가 조선어를 조금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보빙사 일행을 수행했고, 보빙사에서 포크 소위가 동행하길 요구했기에 해군 없는 조선에 해군무관으로 파견되었다.[10] 링크에선 1913년부터 가능한데 1913년 기준 3.6억 달러, 1920년 기준 1.8억 달러, 1930년 기준 2.1억 달러, 1936년 기준 2.6억 달러이다.[11] 지구상에 금은 한정적인데 수요가 많아서 19세기에는 1톤당 5그램 정도까지 가던 금광 채산성이 점점 낮아져 현재에는 톤당 2.5그램까지 채굴한다.[12] 1903년 12월 10일 《고종실록》 기사.[13] 지어놓은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는 자혜의원으로 재활용되었다. 6.25 전쟁 때 불탔고 현재 그 자리에는 평양의학대학이 들어섰다.[14] 인터넷 백과에도 보통 알렌이 설립했다고 나와 있는데 정작 제중원 문서에는 아니라고 적혀 있다. 일반적으로는 알렌이 고종에게 건의하여 광혜원을 설립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서울대학교병원 측에 따르면 제중원은 엄연히 국립(당시에는 왕립) 기관으로 선교회는 위탁 운영만 했지 소유권은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고로 설립자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단 고용되어 초대원장을 지낸 운영자인 것은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