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2-08 12:41:40

호러스 뉴턴 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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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스 뉴턴 알렌
安連(안련) | Horace Newton Allen
[1]
파일:attachment/호러스 뉴턴 알렌/Allen_O_Neil.jpg
출생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사망 1932년 12월 11일 (향년 74세)
미국 오하이오주 털리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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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신학과 (학사)
마이애미 의과대학
직업 선교사, 의사, 외교관
종교 개신교 (장로교회)
주요 경력 장로회 의료 선교사
제중원 의사 겸 교수
조선 참찬관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
주한미국공사관 총영사
주한미국공사관 공사

1. 개요2. 생애
2.1. 조선 최초 의사이자 선교사2.2. 주미 한국 공사관 설립2.3. 고종과 미국 사이에서 외교관으로
2.3.1. 광산 개발
2.4. 러일전쟁 이후 행보
3. 기타4. 대중매체에서5. 둘러보기

1. 개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의사, 조선외교관. 주조선 미국 공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현대 외과 의학을 조선에 도입한 공로가 있지만 의료 선교보다 곧 고종에게 고용되거나 미국의 외교관으로 전업한 시간이 선교사로 일한 시간보다 더 많다. 한국 이름은 '안련(安連)'이다.

연세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인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한 인물이다.[2][3] 1885년(고종 22년)에 조선 말 최초의 근대식 의료 기관인 광혜원(제중원)[4]을 세우고 의사와 의학 교수를 겸하면서 운영까지 담당했다.

1887년(고종 24년)에는 고종의 특명으로 주미조선공사관 고문으로 파견되어 설립에 관여했으며 1890년(고종 27년)에는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받아 의료 활동 대신 외교 업무를 시작했으며 최종적으로 전권 공사까지 올랐다.

2. 생애

2.1. 조선 최초 의사이자 선교사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했다. 북장로교 소속 의료 선교사로 청나라 상하이에서 의료 활동을 했지만 상하이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청나라 지방관과 싸우고 외국인들과도 마찰이 심했다.[5] 그러던 중에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한다는 소식을 듣고 알렌은 자신이 가겠다고 자청했다. 아니 요청 정도가 아니라 아예 조선에 안 보내주면 일을 그만둔다는 협박을 했다. 결국 조선 행을 허락 받아 한살 짜리 아들과 아내와 함께 셋이서 1884년에 조선으로 갔다. 아직 종교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지 않은 조선에서 선교사 신분으로 있는 것이 위험하다하여 당시 주조선 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는 그를 주한미국공사관 소속 무급 의사로 임명했다. 알렌은 조선에서 지내는 동안 개신교 선교 사업을 겸했는데, 알렌이 부임하자 그동안 타국에서 병에 걸릴까봐 불안해 했던 외국인들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10월 27일 조선에 입국했는데 38일 만인 그 해 12월 4일에 갑신정변이 터졌고, 개화파의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매는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수술해 목숨을 구해주면서 유명해졌다. 당시 정변으로 미국 공사까지 도망간 상태에서 알렌이 민영익 치료를 자원했는데 이는 민영익이 보빙사의 대표였던만큼 그를 개화파인줄 잘 못 알고 만약에 죽는다면 친미 개화 세력이 타격을 받을까봐였다. 그런데 민영익은 임오군란 때부터 청군을 등에 업은 친청사대파 민씨 척족의 유망주이자 차세대 리더로, 보빙사의 대표로서 미국을 갔다오긴 했지만 그런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얻었음에도 가져간 유교경전이나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고, 미국이 호의로 내준 군함에서는 멀미가 난다고 여객선으로 도망가려던 인물이었다.

어쨌든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은 일곱 군데에 치명적인 외상을 입었고 묄렌도르프[6]가 자신의 호위병과 함께 민영익을 자신의 가마에 숨겨 옮겼고 그리고 한국에 있던 유일한 서양 의사 알렌을 급히 불렀다. 알렌이 도착할 무렵 한의사 14명이 알렌의 치료를 결사 반대하며 막았으나 쫓아냈고, 밤새 지혈을 하고 봉합을 한 다음 일본인 군의관을 불러 함께 치료했다. 이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행한 외과 수술로 기록된다. 이 때 알렌은 민영익으로부터 치료비를 사양했다. 갑신정변과 진압이 완료되자 고종은 12월 26일에 최상품의 왕실 병풍과 고려자기 그리고 금일봉을 하사했다.

그후 알렌은 당시 주한미국공사관 총영사 대리로 사실상 공사로 재임하던 조지 포크 해군 소위의 추천장으로 1월 22일 조선왕립병원 설립 허가서를 제출했고, 알렌이 병원 설립을 요청하자 고종은 흔쾌히 광혜원 설립을 허가했다. 광혜원 부지는 갑신정변 때 대역죄인으로 참살당한 홍영식과 그의 아버지 영의정 홍순목의 집이었다. 병원 설립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닷새후 1월 27일 민영익은 두 살 많은 알렌을 앞으로 평생 형님으로 모신다며 10만 냥을 기부했다.[7]
알렌은 다음해 스크랜튼언더우드를 초청하여 의료진을 보강했는데 운영비는 선교단체에서 고종의 지원을 받아 충당했다. 이는 조카 민영익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 알렌에 대한 고종과 명성황후의 전폭적인 신임 덕분이었다.

민영익 치료 계기로 민씨척족과 가까워지고 고종의 신임도 얻어 수월하게 하와이의 노동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와이 이민자 모집을 공고했다. 당시 하와이 이민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힘들게 고생했으나, 일한 만큼 부지런히 하면 땅도 주고 돈도 벌고, 그곳 농장주들이 조선의 양반지주와 탐관오리들의 수탈보다는 훨씬 낫다는 소문에 이민 희망자들이 몰려서 제비뽑기뇌물까지 주고 밀항까지 하려고 했다.
(Sanford B. Dole) 하와이 주지사에게 보낸 알렌의 편지, 1902년
지금까지 한국인이 외국에 나가려는 허가를 얻기는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허가 없이 이민하면 귀국하는데 문제가 뒤따릅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의 혹독한 기근을 겪고 난 뒤 이들에게 이민은 한층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한편 한국 정부는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먹이려고 많은 양의 쌀을 들여와야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민이라는 것에 대하여 관리들이 호의적인 태도로 바뀌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아마 중국인이 쫓겨난 곳으로 자기 나라 백성들이 간다는 것을 아는 고종 황제의 긍지가 이에 많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중략)

조선인들은 참을성이 많고 근면하고 유순하고 오랜 복종의 습성으로 다루기 쉽습니다. 그들은 보통 외국 교육을 받는 데 대해 예민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미국으로 귀화했고, 그런 가운데 귀국한 이들은 잘 되었으며 그것은 미국 교육의 덕이었습니다.

(중략)

만약 한국 사람들이 얼마든지 그곳에 가게 되면 신이 보낸 한국인들이 될 것이며 나는 그들이 별 탈이 없을 것이며 노동자로서 일을 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속의 한국인》 1882 - 1974, 김흥찬 ⋅ 웨인 패터슨 著, 1974.

미국 의회에서는 1880년에 중국인 이민 배제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동양인이 미국으로 이주하기는 힘들었으나 이 과정에서 알렌이 개입하여 주 지사에게 편지를 보낸것이다. 하와이로 간 조선인들중에는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인천 내리교회에서 출신들이 많았고, 1902년에 하와이에 한인 교회를 열고 조국을 위해 독립 자금을 모금했다. 하와이 한인들의 이주는 1905년(광무 9년) 일제가 하와이의 반일거점화를 우려하여 이민금지법을 제정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들 하와이 한인 이주자와 후손들은 조선과 연락하고 미국내에서 한인 여론을 대표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2.2. 주미 한국 공사관 설립

1886년(고종 23년) 알렌은 고종의 밀명을 받는다. 임오군란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청나라이홍장이 보낸 원세개에게 이리 저리 쥐어 짜이며[8] 강제로 외채를 빌리는 등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었는데, 청나라의 내정간섭 명분인 외채를 상환하기 위해 미국에 차관 200만 달러를 얻어낼 계획으로 주미 조선공사를 파견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대청속국이니 청나라에 보고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쟁이 오는데, 우유부단했던 고종은 결국 보고를 하기로 하고 베이징으로 사절을 보냈다. 청나라는 세 가지 조건을 내걸며 공사 파견을 허용하는데 이를 '영약삼단(另約三端)' 이라한다.
  • 조선 공사는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 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조선 공사는 청국 공사의 밑에 자리한다
  • 조선 공사는 중대 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 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이 과정에서 알렌은 나가사키에서 무려 5달이나 기다렸는데, 고종편지를 받고 홍콩에 있던 '아우' 민영익을 만나러 갔다. 민영익은 고종의 비자금을 HSBC에 예금하고 홍콩의 빅토리아 호텔 스위트룸에 머물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형님' 알렌은 아우 민영익에게 "돈을 아껴쓰라"며 "자네 돈도 아니니 조금 싼 방으로 옮기라."고 권고했고, 고종의 명으로 공사관 부지와 건물 매입용 20,000달러를 인출해서 돌아갔다. 그 사이에 주미 조선국 특명 전권 공사로 임명받은 박정양을 나가사키에서 만났는데, 박정양은 이미 돈 다 받았다는데 바득바득 우겨서 홍콩으로 민영익을 만나러 또 간다고 하여 또 같이 따라갔고, 민영익이 돈이 너무 많으니 한 달마다 공사관 유지비를 부쳐준다느니 안된다느니 옥신각신 끝에 민영익 - 박정양 공동명의로만 기명날인이나 서명으로만 인출 가능하다는 조건으로 매듭짓고 다시 나가사키로 가서 미국 행에 오른다.

알렌은 여행 중인 조선인 외교단의 모습에 대해 기록을 남겼는데 꽤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나가사키에서 홍콩으로 갈 때, 외교단이 조선에서 싸온 조선 음식을 담은 항아리를 호텔 방에 굳이 넣어야 한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것을 말렸으나 실패했고,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에서는 1등석 표를 5장만 샀는데 다른 2명은 다른 표를 사고도 몰래 1등석 식사에 여러 번 끼다가 걸려 결국 차액을 지불했으며, 방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는 안내를 무시한 채 담배를 피웠고, 방 안에서 조선 음식 냄새, 씻지를 않아 나는 오줌 냄새와 땀 냄새가 담배 냄새랑 섞여서 더러워 같이 다니기 쪽팔렸다고 디스했다.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알렌은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박정양 일행이 알렌에게 영약삼단(另約三端) 내용을 알리지 않다가 그제서야 실토한 것이다. 알렌은 "조약은 대등한 나라끼리 맺는 것이고 조선과 미국의 조약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며 지키지 말라고 설득했으나 박정양은 청나라 공사관을 찾아가 미국 국무부에 안내 해달라고 요청 해버렸다. 기가 막힌 알렌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행을 데리고 나갔고 마침 비가 와서 청나라 일행이 늦게 오자 그대로 쌩까고 단독으로 일행을 끌고가 처리해버렸다. 항간에 알려진 박정양의 자주독립 외교 업적(?)은 실은 알렌이 주도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청나라이홍장원세개는 대노해서 공사관의 폐쇄와 외교관들의 송환을 요구했고 1년 뒤에 고종이 순순이 굴복하여 주미조선공사관은 폐쇄되고 말았다.

2.3. 고종과 미국 사이에서 외교관으로

알렌은 1890년(고종 27년)에 다시 조선으로 입국했다. 상술했듯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 이후 이홍장이 파견한 원세개를 비롯한 청의 영향력으로 인해 기존의 조공국 수준에서 청나라의 일개 성 수준으로 휘둘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거의 직접 통치를 받는 수준으로 국격이 나락으로 떨어졌단 것이다. 이러한 내정 간섭에 혐오감을 품었던 알렌은 '조선의 절대적 독립'을 지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알렌을 비롯한 서양인들은 속방 개념을 인정치 않았다.

그래서 1882년(고종 19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당시 조선에서 '대청국의 속방'이라는 문구를 넣자고 하자 미국에서 강력하게 반대했고, 조선에서 미국 대통령에게 '조약에는 없지만 우리 조선은 대청국의 속방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타협했다. 명분상 조약은 대등한 국가끼리 맺는 것이므로 속방이라는 개념을 거부했다. 서구 입장에선 조선이 청나라를 핑계 대고 조약을 마음대로 파기하거나 조약을 이행치 않을 수도 있고, 또한 청나라가 조약에 간섭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조약을 맺은 서구국가들은 속방이고 아니고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특수한 문제이지, 타국과의 조약에 넣을 수 없다고 일관적으로 반대했다. 모든 서구열강들은 조선이 청나라에 매인 이상한 외교관계를 답답하게 생각하고, 이는 조선 발전에 큰 장애가 된다고 여겼다. 1894년(고종 31년)에 발발한 청일전쟁과 1895년(고종 32년)에 일어난 을미사변을 계기로 조선이 청나라와의 조공책봉 속국관계를 청산했다. 그러나 고종은 러시아로 기울면서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영국이 일본을 아시아에서 러시아 남하를 저지할 역할을 기대하고 동맹을 맺었다. 미국 역시 영국에 동조하는 입장이라 알렌의 구상과 달리 영국과 미국 등 서구열강들은 조선의 외교정책에 실망하고 있었다.

특히나 미국에서는 조선의 전략적 가치를 매우 낮게 보았다. 특히 경제적 가치에 대해 푸트 주조선 미국 공사는 본국에 '수출 가능 물품은 소가죽, 쌀, 사람 머리털, 전복 껍데기 정도'라고 보고하고, 조선의 경제적 가치를 '단물 빠진 껌 내지 계륵(鷄肋)'이라고 대폭 평가절하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갑신정변이 터지고 외국인 학살 우려 때문에 푸트 공사는 제물포로 도망쳐 출국하더니 사임해버렸고, 미국 공사는 당시 갑신정변에 낌새를 채고 연루되길 바라지 않아 지방여행 중이던 해군 무관 포크 소위[9]가 총영사 대리를 해야 했을 정도였다.

포크 소위의 연봉은 푸트 공사의 5분의 1 수준이라 한국산 우표를 미국에 팔아 공사관 운영비를 충당해야 할 정도로 쪼들렸다. 전임 푸트 공사가 사임한 이유 중에는 미국 의회에서 한국의 가치를 매우 낮게 보고 '납세자의 세금을 조선 공사관 같은 쓸데없는 곳에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운영비 지출을 거부하여 공사에서 총영사직으로 강등되었고, 푸트 공사가 사비로 구입한 공사관 비용을 정부에 돌려받지 못했던 점이 매우 컸다.

이후에도 기피직이라 공석으로 오래 있었고 재정난으로 사임한 푸트 공사가 받던 월급의 겨우 5분의 1을 받으며 사비로 공사관을 운영했다. 그러다 결국 포크 소위는 건강상 이유로 사임하고 일본으로 떠났는데, 공사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있자 다시 포크 소위를 데려다 공사 직을 수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포크 소위가 청나라와 원세개의 월권과 내정 간섭에 항의하자 원세개의 압력으로 해임되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도 공사 직을 맡으려고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조선 정부에 협판 벼슬로 정 2품 품계까지 받으며 고종 및 중전 민씨와 친한 알렌이 공사로 임명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알렌도 고종의 미국 의존을 매우 경계했다. 아관파천 이전에 고종은 일본, 프랑스 미국, 영국공사관 등에 총 13년간 파천 요청을 여덟 번이나 했으나 모든 국가에서 번번히 거부당했다. 1894년(고종 31년)에도 고종이 미국공사관으로 진입 요청을 했지만 알렌은 거절했다.

1905년(광무 9년) 러일전쟁 와중에 러시아의 패색이 짙어지자 고종은 또 다시 미국공사관으로 파천하기를 요청하는데 알렌은 즉각 거부했고, 아예 본국에 "고종이 허락받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온다 하더라도 쫓아내겠다"고 보고했다.

2.3.1. 광산 개발

광산 개발은 명성황후가 10년 간 알렌이 세운 공을 치하하며 하사한 큰 보수였다. 당시 미국조선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을 끌어들여 열강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한 고종의 전략으로 미국에 이권을 준 측면도 있었다. 알렌은 이러한 점을 잘 이용하여 한성전기, 전차, 경인철도, 광산 등의 산업 부문에 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아시아 최대의 금광평안북도운산 금광 채굴권을 미국의 모스(J. R. Morse)가 획득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이도 알렌이었다.

알렌은 청일전쟁 이후 친미적 성향의 인물로 내각을 채우고자 했으며, 결국 자신과 함께 미국에 파견되었던 박정양총리대신으로 하는 친미 내각의 성립을 이끌었다. 이러한 친미 내각성립과 더불어 운산금광 채굴권을 모스에게 넘겨주는 데에 있어서 알렌말고도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명성황후였다.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일본인이 살해하자, 알렌은 그 진상을 세계에 알리고 고종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왕비의 한마디에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하루 아침에 하사받게 된 알렌은 모스에게 3만 달러에 팔아버렸고 모스는 자본금 10만 달러를 들여 조선 개광 회사를 설립, 설비와 자재에 대한 무관세 통관은 물론 법인세, 소득세까지 일체의 세금을 면제받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운산 지역의 도로나 물류 상태가 미비했기 때문에 10만 달러로는 개발이 택도 없었다.

결국엔 동업자를 모집하여 1897년 헌트는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자본금 500만 달러를 들여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 OCMC)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일제중일전쟁으로 미국 자본의 자국 송금을 제한한 1937년까지 30여 년 동안 자본금 투자의 3배에 달하는 수익 당시 시세로 1500만 달러를 남겼다. 투자금 500만 달러는 2014년 기준 약 1.3억 달러에 해당하고#, 수익금 1500만 달러는 지금 가치로 2억~3억 달러 정도를 남겼다.#[10]

성공적인 투자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대비 50% ~ 170% 수익률이긴 하나 이것도 100여 년 전 달러 가치를 기반으로 한 추계치이다. 초기 투자 7년 동안은 전혀 배당이 없다가 이후 30여 년간 회수가 되었기에 수익성이 높았는지는 조선의 인프라나 정치적 리스크까지 고려하면 이득을 크게 봤다고 하기 애매하다. 그 후 1939년 OCMC는 중일전쟁 이후 수익이 급감하자 평안북도 창성 지역의 대유동 금광을 경영하던 일본 광업 주식회사에 800만 달러를 받고 운산 금광에 대한 권리 일체를 양도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1941년 이후였으면 적대국 자산이라 강제 몰수당할 것이었지만 매우 운이 좋은 편.

미국의 실(J. M. Sill) 공사는 이 계약에 대해 "미국은 차지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이권을 차지"했다고 했으며, 알렌은 "조선이 얻은 이익은 미국 정부와 미국인이 조선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했다. 자세한 기록은 링크를 참조. 이 때문에 알렌은 금광 회사로부터 일종의 두둑한 커미션을 받았고, 제물포에 근사한 별장까지 두었다. 자신의 친구인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렌은 "모스와 헌트는 그들의 이익이 확보되고 금광이 원활하게 운영되자 나에게 두 번에 걸쳐 현금과 선물을 주었다."라고 했다.

선교사미국 자체에 악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알렌을 두고 '친한이 아니며 철저히 이권을 빼앗아갔다.'고 비판하는데, 냉정한 시각에서 보면 적절하지 않은 비판이다. 이권을 퍼줄 때 열심으로 매달린 사람은 알렌이 아니라 고종과 민비였다. 고종은 광산 지분을 국가가 아닌 개인명의로 25% 챙겼다가 7년 동안 수익이 별로 나지 않자 헐값에 팔아버렸다. 이는 동대문에 미국에게 조선 최초 전력 회사를 허가했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지분 25%를 개인명의로 챙기고 전기는 밤마다 열리는 궁전 잔치와 푸닥거리에 낭비했다. 외교관은 자국 이익에 충실하며 상대국과 공통된 이득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고, 그것이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이다. 하지만 다른 선교사들은 당시 알렌을 손절하여 선교사로 취급하지 않았다.

"미국이 운산 금광에서 금 900만 톤을 캐냈다" 하는 뉴스 기고문 까지 여럿 있지만 이 역시 투철한 반미 운동권식 날조이다. 900만 톤 중에 899만 9900톤 이상은 가치는커녕 처리비와 환경파괴비용이 나오는 버럭에 불과하다. 운산 금광을 포함한 북한의 전체 금생산량은 정보기관에 따르면 한때 10톤까지 도달했으나, 현재는 사금까지 탈탈 털어도 연간 3~4톤에 불과하다. 북한의 전력난으로 낙후되었단 점을 감안하더라도, 900만과 최대 10톤의 차이는 굳이 금채굴량을 발표하지 않고 900만 톤이란 큰 숫자로 혼란을 일으키려는 허황된 선동이다.

영화 007 골드핑거와 다이하드3에서 털어보려는 미국 연방준비은행 금 보유고가 고작 6200톤이고, 지구상에 금은 고작 25만 톤 미만이며,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21세기까지 캐낸 금의 양은 19만 5천 톤 정도이다. 금광석 1톤에 금은 3g 미만이 나온다.[11] 이처럼 금광석과 금생산량에는 막대한 차이가 있다.

2.4. 러일전쟁 이후 행보

고종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 이후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러시아일본의 대결로 압축되었으며, 알렌은 1897년 주한 미국 대리공사 겸 총영사를 거쳐 1901년에는 주한 미국 전권공사가 되어 조선에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 정부와 알렌의 생각이 달랐다.

미국 정부의 대한정책(對韓政策) 기조는 불간섭정책이었다. 이는 한국을 포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점차 친일정책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즉 일본이 미국을 대신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 그 보상으로 한반도를 넘겨주고 아시아에서 우월권을 인정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구현하겠다는 것이었다.

알렌은 주한 미국의 공사로서 이러한 친일 정책은 현지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며 1903년 9월 미국으로 들어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와 논쟁을 벌였다. 여기서 알렌은 러시아가 만주를 평정하고 막대한 자본을 들여 항구철도, 도로 등을 건설했기 때문에 절대로 만주에서 철병하지 않을 것이며, 항구․철도․도로의 건설로 엄청난 상업시장이 발생했고 그 개방을 약속한 만큼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친러반일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렇지만 알렌의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알렌은 이에 불복하여 미국에 머무는 동안 언론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고 정부를 비판했다.

러일전쟁 이후에도 미국일본의 한국 침략을 묵인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한국에서 미국공사관 철수를 결정한 미국 정부는 본국의 대아시아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알렌을 해임했다. 1905년 6월 알렌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알렌은 다시 의사로서 활동하고 집필에도 전념하며 여생을 보냈으며, 1932년 12월 11일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국사 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하지만 알렌은, 비록 미국의 친일 기조 정책은 반대했어도 고종에 대한 비판은 점점 심해졌다.

1902년(광무 6년) 평양부제 2의 수도로 만들고 일제의 한성 무력 장악시 평양으로 이어하여 러시아와 함께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풍경궁(豐慶宮) 공사를 강행했는데 공사비 1000만 냥중에 고종이 내놓은 것은 150만 냥 뿐이었고 나머지 비용은 서북 지방에서 세금을 걷어 충당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은 민씨 척족과 탐관오리들의 뱃속으로 들아갔고, 세금의 고작 5분의 1만 공사비로 투입되었다. 더군다나 당시 평안도에는 흉년이 들었고 의정부의정 이근명이 공사현장을 보며 고종에게 “병정들이 소와 말을 빼앗고 재물을 노략질하며 부녀자들을 겁박하고 있다. 잡세가 번다해 100리도 안 되는데 세금을 거두는 곳은 열여덟 곳이나 된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고종은 이렇게 답했다. “여전히 그렇다고? 그중에는 반드시 올바른 세금(正稅·정세)도 있을 것이다.”라 했지만 이근명은 (잡세는 예전에 다 폐지 하라고 하교 하셨다.) 지금 세금중에 균역세(均役稅) 빼고 다 잡세인데요? 라며 반문 했으나 사뿐히 씹고 풍경궁 공사 관리들을 포상했다. [12]

풍경궁을 짓는 와중에 덕수궁 중화전도 완공했다. 당시 경기도의 백성들은 인조의 능 장릉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배를 채우고 있었다. 보다 못한 고종이 내탕금 50만 냥을 풀어서 구제하라고 했으나 궁궐짓는 것은 끝내 그만두지 않았다. 저렇게 혈세를 들인 풍경궁 공사는 러일전쟁의 발발로 인해 중단되었고 끝내 미완의 궁궐로 남고 말았다.[13]

알렌은 1904년 경에는 완전히 마음 속으로 고종을 손절하고 그를 이렇게 여기고 있었다.
'이 나라의 거대한 해충이 되어있고, 저주의 대상이 되어있다. ... 로마 제국이 불타고 있는 동안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던 네로 황제처럼 무희들과 노닥거리고 있다.'
라며 네로급 암군으로 혹평했다. 돌아가면서는 "한국 백성들이 불쌍하다. 한국 황제같은 인종은 처음 봤다." 며 무지막지하게 비판했다.뿐만 아니라 고종이 자신의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稱慶禮式)으로 나라예산의 3분의 1을 흥청망청 쓰려고 하자 재정을 아껴 쓰라고 권고했으나 소용없었다. 또한 고종이 일본에서 30년이 지난 폐급 석탄운송선을 프랑스식 고급 가구로 내부를 치장하는 조건에 칭경식때 외국 공사들 앞에서 예포를 쓰려는 목적으로 군함이라는 이름을 붙여 국고로 구매하고, 가마를 타는건 폼이 안나서 캐딜락을 구매했으며 조선에는 운전수를 구할 수 없어 일본인 운전자를 고용하기까지 했다. 거기다 각국 사절을 걷게 할 수 없어 인력거 100대를 일본에서 수입했으며 잔치가 끝나면 공짜로 나눠줄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해 겨울 돌림병이 돌아 연회는 취소되었다. 이렇게 고종이 자신의 사치와 위신을 높이는 데에 엄청난 거금을 들이는 동안 재정은 파탄났고, 관리들은 월급을 지급받지 못했다.

순종도 고종 이상으로 낮게 평가했는데, 알렌의 일기에서는 순종이 지능이 낮았다는 등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순종이 지능이 낮았다는 것은 알렌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 조선에서 널리 퍼져있는 소문이었다. 순종의 지능은 알 수 없으나, 고종이 퇴위 전에도 순종은 서른이 넘었으나 어떠한 정치적 의견이나 입지도 없었고 아무도 순종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아무튼 알렌은 이렇게 말년의 고종이나 순종에 실망했기 때문에 조선의 망국이 확실시된 후에는 더 이상 크게 관여하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살았다. 오하이오주 털리도에서 의사로 살다가 1932년 12월 11일에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으로는 아내 프랜시스 앤 앨런(Frances Ann Allen)과 1남 1녀가 있다.

3. 기타

  • 사람에 대해 평하기를 좋아했는지 직접 쓴 인물평들이 남아 있으며 알렌 개인의 인품과는 별개로 상당수의 사람들은 정확하게 평가하였다. 그 중 하나가 한때 "영민하다"며 높은 평가를 남겼던 이완용인데 "한마디로 기계(로봇) 같은 사람이다"라는 혹평을 남겼다. 후에 이완용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는 딱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연세대학교 재단이 설립하고 현재 인터파크가 대주주인 의약품 물류회사 '안연케어'는 알렌의 한국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회사의 영문 사명 표기가 'Allen Care'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 과거 알렌의 별장이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우각로 134-9 소재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과거와 현재 모두 경인선 철도가 지나는 길목이며, 현재는 바로 인근에 도원역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위치해 있다. 알렌의 별장이 매각되고 철거된 후 인천 전도관이 들어서며, 기구한 땅의 운명을 유지해오다 현재는 재개발로 인해 주변지역이 모두 철거되었고 그 자리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아파트 건설 전 알렌별장에 대한 조사를 했지만 별다른 결과는 없었던듯 하다.

4. 대중매체에서

  • 2010년 SBS 드라마 〈제중원〉에서는 션 리차드가 연기했다.
  •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알렌 공사'라고 불린다. 등장 장면이 많지는 않지만 주인공인 유진 초이 대위 및 카일 무어 소령과는 사사건건 의견대립으로 부딪히며 사이도 좋지 않고 그리 좋은 취급은 못 받는다. 카일은 알렌을 명예도 없는 그저 의사양반이라고 비판하며 탐탁지 않아 한다.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대머리 알렌이라고 불리면서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그려진다. 한미관계를 조율하면서 그사이에서 발생하는 이익과 뇌물을 받아먹는 인물로 정작 본인도 미국정계에 거의 영향을 못끼치지만 약소국인 대한민국은 이 사람 제외하고는 미국에 연줄이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뇌물을 주고 이후에도 한국에 쭉 머물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한다.

5. 둘러보기

갑신정변
甲申政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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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명
1950
모리스 윌리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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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어니스트 베델
파일:영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50·1968
일라이 M. 모우리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50
제이 제롬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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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존 W. 스태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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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찰스 에드워드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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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폴 프레드릭 더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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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프레데릭 브라운 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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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프레드 A. 돌프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50
허버트 아돌프스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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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호러스 뉴턴 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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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윌리엄 L. 로버츠
파일:미국 국기.svg 군인
1952
리처드 J. H. 존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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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올리버 R. 에이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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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에템 멘데레스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정치인, 국방부장관
1959
김병조[A]
(취소)
1961
아이작 D. 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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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카터 매그루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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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1962년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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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명
1962
강무경
의병
1962
고광순
의병
1962
고두환
만주방면
1962
기삼연
의병
1962
김덕제
의병
1962
김도원
국내항일
1962
김도현
의병
1962
김동식
국내항일
1962
김마리아
국내항일
1962
김봉학
계몽운동
1962
김석진
계몽운동
1962
김수민
의병
1962
김승학
임시정부
1962
김예진
중국방면
1962
김원벽
3·1 운동
1962
김정련
중국방면
1962
김정익
의열투쟁
1962
김진묵
의병
1962
김철
임시정부
1962
김태원
의병
1962
김학규
광복군
1962
김혁
만주방면
1962
김홍일
광복군
1962
나철
의열투쟁
1962
문일민
임시정부
1962
민양기
만주방면
1962
박세화
의병
1962
박장호
만주방면
1962
박재혁
중국방면
1962
박치의
만주방면
1962
반하경
계몽운동
1962
변학기
의병
1962
서일
만주방면
1962
선우혁
임시정부
1962
손정도
임시정부
1962
송계백
일본방면
1962
송병선
계몽운동
1962
송학선
의열투쟁
1962
심남일
의병
1962
안경신
만주방면
1962
안명근
계몽운동
1962
안승우
의병
1962
안태국
계몽운동
1962
안희제
계몽운동
1962
양세봉
만주방면
1962
여순근
만주방면
1962
오강표
계몽운동
1962
오광선
만주방면
1962
오기호
의열투쟁
1962
왕회종
의병
1962
우덕순
의열투쟁
1962
우동선
의병
1962
유관순
3·1 운동
1962
유근
계몽운동
1962
유도발
계몽운동
1962
유림
임시정부
1962
유명규
의병
1962
유시연
의병
1962
윤병구
중국방면
1962
윤세복
만주방면
1962
윤세용
만주방면
1962
윤익선[B]
(취소)
1962
윤현진
임시정부
1962
이갑
계몽운동
1962
이강
계몽운동
1962
이경섭
3·1 운동
1962
이광호
국내항일
1962
이규갑
임시정부
1962
이남규
의병
1962
이만도
계몽운동
1962
이면주
계몽운동
1962
이상룡
임시정부
1962
이상철
계몽운동
1962
이석
의병
1962
이석용
의병
1962
이소응
의병
1962
이수흥
만주방면
1962
이애라
만주방면
1962
이윤재
문화운동
1962
이인식
3·1 운동
1962
이종암
중국방면
1962
이종호
만주방면
1962
이준식
광복군
1962
이중언
계몽운동
1962
이진룡
의병
1962
이진무
만주방면
1962
이학순
계몽운동
1962
이한응
계몽운동
1962
이현섭
계몽운동
1962
이회영
만주방면
1962
이희승
문화운동
1962
임병찬
의병
1962
장지연[B]
(취소)
1962
장진홍
의열투쟁
1962
장태수
계몽운동
1962
전덕기
계몽운동
1962
전덕원
만주방면
1962
정동식
계몽운동
1962
정용기
의병
1962
정인승
문화운동
1962
정태진
문화운동
1962
정한경
미주방면
1962
조경한
임시정부
1962
조도선
의열투쟁
1962
조맹선
만주방면
1962
조병옥
국내항일
1962
조인환
의병
1962
지용기
의병
1962
차도선
의병
1962
차병혁
3·1 운동
1962
차이석
임시정부
1962
채응언
의병
1962
채찬
만주방면
1962
최시흥
만주방면
1962
최양옥
만주방면
1962
최용덕
광복군
1962
최재형
임시정부
1962
최팔용
일본방면
1962
최현배
문화운동
1962
표영준
의열투쟁
1962
한징
문화운동
1962
함태영
3·1 운동
1962
현익철
만주방면
1962
홍만식
계몽운동
1962
홍범식
계몽운동
1962
홍진
임시정부
1962
황학수
임시정부
1962
황현
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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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명
1963
강명규
만주방면
1963
강순필
국내항일
1963
강창제
임시정부
1963
강철구
만주방면
1963
계화
만주방면
1963
고운기
광복군
1963
고인덕
의열투쟁
1963
고제량
의병
1963
곽재기
의열투쟁
1963
곽종석
3·1 운동
1963
구연영
국내항일
1963
권영만
국내항일
1963
권용일
의병
1963
권쾌복
학생운동
1963
기산도
의열투쟁
1963
김경태
국내항일
1963
김관오
광복군
1963
김광진
만주방면
1963
김규식
만주방면
1963
김기한
만주방면
1963
김낙용[A]
(취소)
1963
김동수
광복군
1963
김두만
임시정부
1963
김만수
만주방면
1963
김병로
문화운동
1963
김병록
의열투쟁
1963
김보형
만주방면
1963
김복한
의병
1963
김봉수
만주방면
1963
김상길
학생운동
1963
김상태
의병
1963
김석창
만주방면
1963
김성근
임시정부
1963
김성엽
만주방면
1963
김성호
만주방면
1963
김세환
3·1운동
1963
김승만
만주방면
1963
김영숙
만주방면
1963
김영철
만주방면
1963
김우근
만주방면
1963
김원국
의병
1963
김원조
국내항일
1963
김재근
국내항일
1963
김준승
만주방면
1963
김지환
3·1 운동
1963
김창곤
만주방면
1963
김창근
중국방면
1963
김창환
만주방면
1963
김천익
만주방면
1963
김최명
만주방면
1963
김태오
3·1 운동
1963
김태원
만주방면
1963
김평식
만주방면
1963
김한종
국내항일
1963
나월환
광복군
1963
나중소
만주방면
1963
나창헌
임시정부
1963
남정각
중국방면
1963
노기용
국내항일
1963
노복선
광복군
1963
민강
국내항일
1963
민영구
광복군
1963
민필호
임시정부
1963
박기성
광복군
1963
박기제
만주방면
1963
박기한
만주방면
1963
박민항
만주방면
1963
박상진
국내항일
1963
박세건
만주방면
1963
박시창
광복군
1963
박연백
의병
1963
박응백
만주방면
1963
박중서
만주방면
1963
박찬익
임시정부
1963
방순희
임시정부
1963
백기준
임시정부
1963
백기환
의열투쟁
1963
백낙주
만주방면
1963
백남규
의병
1963
백시찬
만주방면
1963
백운한
만주방면
1963
백정기
중국방면
1963
변춘식
만주방면
1963
서상교
학생운동
1963
서상렬
의병
1963
서상한
일본방면
1963
손기업
만주방면
1963
손창준
만주방면
1963
송병조
임시정부
1963
송진우
문화운동
1963
신공제
임시정부
1963
신덕영
만주방면
1963
신송식
광복군
1963
신숙
만주방면
1963
신영삼
임시정부
1963
신우현
만주방면
1963
신팔균
만주방면
1963
안규홍
의병
1963
안병찬
계몽운동
1963
안상익
3·1 운동
1963
안세환
3·1 운동
1963
안재환
중국방면
1963
안지호
3·1 운동
1963
안춘생
광복군
1963
양기하
만주방면
1963
양우조
임시정부
1963
엄순봉
중국방면
1963
여행렬
의열투쟁
1963
연병호
임시정부
1963
오면직
중국방면
1963
오복원
의열투쟁
1963
오상서
만주방면
1963
오운흥
국내항일
1963
우승창
만주방면
1963
우재룡
국내항일
1963
유기동
만주방면
1963
유상렬
임시정부
1963
유창순
국내항일
1963
유흥수
학생운동
1963
윤준희
만주방면
1963
윤창하
학생운동
1963
이건석
의열투쟁
1963
이광
임시정부
1963
이광세
국내항일
1963
이교재
임시정부
1963
이규채
임시정부
1963
이기송
3·1운동
1963
이동수
의열투쟁
1963
이명상
의병
1963
이명하
만주방면
1963
이민화
만주방면
1963
이상만
임시정부
1963
이상호
학생운동
1963
이서현
만주방면
1963
이설
계몽운동
1963
이세영
임시정부
1963
이순모
3·1 운동
1963
이신애
국내항일
1963
이용담
만주방면
1963
이우영
만주방면
1963
이원직
임시정부
1963
이유필
임시정부
1963
이인
문화운동
1963
이장녕
만주방면
1963
이재현
광복군
1963
이정
만주방면
1963
이정렬
국내항일
1963
이준용
만주방면
1963
이창용
만주방면
1963
이춘영
의병
1963
이치모
국내항일
1963
이탁
임시정부
1963
이한구
의병
1963
이홍래
만주방면
1963
이화익
중국방면
1963
이화주
만주방면
1963
임국정
만주방면
1963
임봉주
국내항일
1963
임의탁
임시정부
1963
임창모
의병
1963
장관주
국내항일
1963
장기천
만주방면
1963
장덕준
문화운동
1963
장덕진
만주방면
1963
장두환
국내항일
1963
장해평
중국방면
1963
장형
국내항일
1963
전좌한
중국방면
1963
전태선
의열투쟁
1963
전홍섭
만주방면
1963
정남용
국내항일
1963
정봉화
만주방면
1963
정순경
만주방면
1963
정신
만주방면
1963
정의도
임시정부
1963
정이형
만주방면
1963
정인복
만주방면
1963
정찬조
만주방면
1963
정태희
임시정부
1963
조경환
의병
1963
조길룡
학생운동
1963
조명하
중국방면
1963
조병준
만주방면
1963
조시원
광복군
1963
조원세
국내항일
1963
조인제
광복군
1963
조종대
국내항일
1963
조지 새넌 맥큔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3
조지 쇼
파일:영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3
조진탁
3·1 운동
1963
조창호
의열투쟁
1963
주기철
문화운동
1963
주명우
3·1 운동
1963
주병웅
만주방면
1963
지달수
광복군
1963
차병제
만주방면
1963
채기중
국내항일
1963
최관용
만주방면
1963
최낙철
학생운동
1963
최능찬
3·1 운동
1963
최병선
중국방면
1963
최병수
3·1 운동
1963
최병호
만주방면
1963
최석준
만주방면
1963
최수봉
의열투쟁
1963
최은식
3·1 운동
1963
최지관
만주방면
1963
최진동
만주방면
1963
최천호
의열투쟁
1963
한봉수
의병
1963
한상렬
의병
1963
한상호
만주방면
1963
한흥근
의열투쟁
1963
함석은
만주방면
1963
허형
의열투쟁
1963
현순
임시정부
1963
현천묵
만주방면
1963
홍사구
의병
1963
홍성익
임시정부
1963
홍주
만주방면
1963
홍찬섭
3·1운동
1963
황덕환
만주방면
1963
황병길
만주방면
1963
황상규
중국방면
1963
황학봉
만주방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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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1965~1969년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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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명
1965
체스터 니미츠
파일:미국 국기.svg 군인
1966
천궈푸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고이허
만주방면
1968
궈타이치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권준
중국방면
1968
김관보[A]
(취소)
1968
김기형
임시정부
1968
김명권
만주방면
1968
김봉식
만주방면
1968
김상옥
만주방면
1968
김석
중국방면
1968
김성택
만주방면
1968
김시중
의병
1968
김용구
의병
1968
김원범
의병
1968
김원식
만주방면
1968
김정수[A]
(취소)
1968
김진성
만주방면
1968
김진준
만주방면
1968
김천성
광복군
1968
김태연
만주방면
1968
김학섭
만주방면
1968
김홍서
임시정부
1968
노병대
의병
1968
노태준
광복군
1968
다이리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로버트 그리어슨
파일:캐나다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류용야오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마수례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모더후이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문창학
만주방면
1968
박도경
만주방면
1968
박인화
의병
1968
박태열
만주방면
1968
박희광
만주방면
1968
백삼규
만주방면
1968
서원준
만주방면
1968
서의배
국내항일
1968
손승억
만주방면
1968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신정백
의병
1968
신태식
의병
1968
신현구
국내항일
1968
아치볼드 해리슨 바커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양승우
만주방면
1968
양한규
의병
1968
여준
만주방면
1968
유득신
국내항일
1968
유상근
의열투쟁
1968
유택수
만주방면
1968
윤이병
계몽운동
1968
이규선
3·1 운동
1968
이규창
중국방면
1968
이기
의열투쟁
1968
이명균
국내항일
1968
이병묵
만주방면
1968
이병욱
만주방면
1968
이붕해
만주방면
1968
이성구
중국방면
1968
이성우
의열투쟁
1968
이양섭
3·1 운동
1968
이응서
만주방면
1968
이의준
만주방면
1968
이진택
만주방면
1968
이창덕
만주방면
1968
이현규
의병
1968
이희경
임시정부
1968
임치정
계몽운동
1968
장소진
3·1운동
1968
장윤덕
의병
1968
장쥐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장진원
중국방면
1968
장췬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전덕명
만주방면
1968
정서송
3·1 운동
1968
조지 애쉬모어 피치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조창선
국내항일
1968
주석환
만주방면
1968
주칭란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차병수
임시정부
1968
차희식
3·1 운동
1968
채세윤
만주방면
1968
채원개
광복군
1968
천리푸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최규동
문화운동
1968
최도환
의병
1968
최세윤
의병
1968
최영걸
만주방면
1968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파일:캐나다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한훈
의열투쟁
1968
한흥
만주방면
1968
홍원식
의병
1968
황병학
의병
1968
황줴
파일:중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황창오
국내항일
1969
세바스티안 우가르테
파일:필리핀 국기.svg 언론인, 체육인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77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84명
1977
쉐웨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77
강상모
만주방면
1977
강진원
의병
1977
권기옥
중국방면
1977
김교헌
만주방면
1977
김대규
의병
1977
김동신
의병
1977
김성수
중국방면
1977
김순애
임시정부
1977
김승곤
광복군
1977
김약연
만주방면
1977
김용재
광복군
1977
김이직
만주방면
1977
김중건
만주방면
1977
김진만
국내항일
1977
김홍량[B]
(취소)
1977
나태섭
광복군
1977
남궁억
문화운동
1977
남석인
의병
1977
노원섭
의병
1977
노응규
의병
1977
노임수
의병
1977
문상익
3·1 운동
1977
문창숙
만주방면
1977
민용호
의병
1977
박승길
만주방면
1977
박영준
광복군
1977
박영희
만주방면
1977
박인항
국내항일
1977
박춘실
의병
1977
서상용
만주방면
1977
서영석
3·1운동
1977
손양윤
만주방면
1977
송병순
계몽운동
1977
송주면
계몽운동
1977
신건식
임시정부
1977
신언성
만주방면
1977
안경근
임시정부
1977
안병무
임시정부
1977
양진여
의병
1977
염온동
임시정부
1977
오광심
광복군
1977
오성술
의병
1977
왕광연
3·1 운동
1977
원심창
중국방면
1977
유민식
만주방면
1977
유병기
의병
1977
유석현
중국방면
1977
유장렬
국내항일
1977
유지명
의병
1977
유해준
광복군
1977
윤병구
미주방면
1977
이강산
의병
1977
이강훈
중국방면
1977
이관석
만주방면
1977
이기손
의병
1977
이병채
의병
1977
이상정
임시정부
1977
이승길
계몽운동
1977
이우식
문화운동
1977
이원대
중국방면
1977
이재윤
의병
1977
이종건
광복군
1977
이종희
광복군
1977
이진영
광복군
1977
이형우
만주방면
1977
이화일
만주방면
1977
임용상
의병
1977
장한성
만주방면
1977
정용대
의병
1977
정운경
의병
1977
정춘서
의병
1977
조용하
미주방면
1977
조정인
의병
1977
차천모
만주방면
1977
채광묵
의병
1977
최욱영
의병
1977
최익형
계몽운동
1977
최중호
중국방면
1977
최해
만주방면
1977
한성수
광복군
1977
허빈
만주방면
1977
홍준옥
3·1 운동
1977
홍충희
만주방면
1977
황재운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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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1980~1990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101명
1980
강원형
계몽운동
1980
강인수
중국방면
1980
권인규
의병
1980
금달연
의병
1980
기우만
의병
1980
김대지
임시정부
1980
김봉원
만주방면
1980
김인전
임시정부
1980
김일두
임시정부
1980
마진
만주방면
1980
박문용
임시정부
1980
사도덕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80
서종채
의병
1980
손영각
의병
1980
안무
만주방면
1980
양근환
일본방면
1980
양윤숙
의병
1980
오의선
임시정부
1980
왕주이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80
이구연
임시정부
1980
이능권
의병
1980
이봉우
만주방면
1980
이종혁
만주방면
1980
임이걸
3·1 운동
1980
장석영
3·1 운동
1980
조훈
만주방면
1980
진치언
의병
1980
진희창
임시정부
1980
한봉근
중국방면
1980
한정만
의병
1982
김석황
임시정부
1982
김성숙
임시정부
1982
김영백
의병
1982
류인식
문화운동
1982
윤세주
중국방면
1982
윤인순
의병
1983
정현섭
중국방면
1983
조윤하
만주방면
1982
최창식
임시정부
1986
권석도
의병
1986
김갑
임시정부
1986
김영현
만주방면
1986
이명순
만주방면
1986
정순만
만주방면
1986
황준성
의병
1987
신언준
중국방면
1987
안정근
임시정부
1988
유동하
의열투쟁
1989
고창일
노령방면
1989
엄항섭
임시정부
1989
원세훈
중국방면
1990
강기덕
국내항일
1990
박봉석
의병
1990
서병희
의병
1990
손덕오
의병
1990
염인서
의병
1990
이은영
의병
1990
이충응
의병
1990
이필봉
의병
1990
이현
3·1 운동
1990
이황룡
의병
1990
이희룡
3·1 운동
1990
임하중
의병
1990
장인초
의병
1990
정기찬
의병
1990
정철화
의병
1990
조병두
의병
1990
지석용
3·1 운동
1990
최산흥
의병
1990
추삼만
의병
1990
김상덕
임시정부
1990
김의한
임시정부
1990
김일곤
중국방면
1990
김형빈
만주방면
1990
명제세
임시정부
1990
박건웅
임시정부
1990
오영선
임시정부
1990
윤해
만주방면
1990
이관직
만주방면
1990
이광민
만주방면
1990
이병화
만주방면
1990
이종건
만주방면
1990
장도빈
국내항일
1990
장철호
만주방면
1990
정인보
문화운동
1990
조지영
임시정부
1990
최이붕
중국방면
1990
김춘배
만주방면
1990
김치홍
의병
1990
박여성
의병
1990
박인호
3·1운동
1990
양경학
의병
1990
윤동주
학생운동
1990
이대극
의병
1990
이명서
만주방면
1990
이봉희
만주방면
1990
장일환
국내항일
1990
정기선
의병
1990
최동오
임시정부
1990
태양욱
의병
1990
한이경
국내항일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92~1995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114명
1992
곽중규
임시정부
1992
김철남
임시정부
1992
이달
중국방면
1992
고평
만주방면
1992
손기혁
의병
1992
현정건
중국방면
1992
현정경
만주방면
1993
이철형
의병
1993
강기운
만주방면
1993
김태원
의병
1993
문석봉
의병
1993
박건병
중국방면
1993
박치화
만주방면
1993
이필희
의병
1993
이흥관
임시정부
1993
장두량
만주방면
1994
장봉한
만주방면
1994
천병림
중국방면
1994
민효식
의병
1995
강경선
중국방면
1995
강이봉
의병
1995
강제하
만주방면
1995
강진해
만주방면
1995
계봉우
임시정부
1995
권순명
의병
1995
권준
의병
1995
금기철
의병
1995
김강
만주방면
1995
김경운
의병
1995
김난섭
만주방면
1995
김덕순
의병
1995
김덕흥
의병
1995
김동수
의병
1995
김문희
임시정부
1995
김범이
의병
1995
김법린
국내항일
1995
김병조
중국방면
1995
김병태
의열투쟁
1995
김봉규
의병
1995
김선여
의병
1995
김성범
만주방면
1995
김수곡
의병
1995
김영란
국내항일
1995
김영렬
만주방면
1995
김용대
만주방면
1995
김원국
만주방면
1995
김원식
의병
1995
김율
의병
1995
김응백
의병
1995
김이섭
만주방면
1995
김일봉
만주방면
1995
김일원
의병
1995
김정원
의병
1995
김종철
의병
1995
김준택
만주방면
1995
김창균
만주방면
1995
김태연
중국방면
1995
김훈
만주방면
1995
나병삼
만주방면
1995
나시운
의병
1995
나정구
만주방면
1995
노을룡
중국방면
1995
노종균
중국방면
1995
문양목
미주방면
1995
문일평
중국방면
1995
박경순
임시정부
1995
박차정
중국방면
1995
성익현
중국방면
1995
송종익
미주방면
1995
송헌주
미주방면
1995
신석우
임시정부
1995
신창룡
의병
1995
신창현
의병
1995
안공근
임시정부
1995
안국형
만주방면
1995
안원규
미주방면
1995
안현경
미주방면
1995
엄주필
노령방면
1995
오상원
의병
1995
유광흘
만주방면
1995
유성삼
만주방면
1995
유일한
미주방면
1995
윤덕보
만주방면
1995
윤흥곤
의병
1995
이광복
중국방면
1995
이교영
의병
1995
이대위
미주방면
1995
이덕삼
중국방면
1995
이범직
의병
1995
이병진
만주방면
1995
이석이
의병
1995
이영준
중국방면
1995
이인금
의병
1995
이중봉
의병
1995
이희삼
만주방면
1995
임병극
만주방면
1995
전학수
만주방면
1995
정봉준
의병
1995
정원집
의병
1995
조창룡
만주방면
1995
조화선
만주방면
1995
천세헌
미주방면
1995
최성천
의병
1995
최익룡
만주방면
1995
최일엽
만주방면
1995
최진하
미주방면
1995
최천유
의병
1995
한시대
미주방면
1995
허근
만주방면
1995
홍석호
만주방면
1995
홍언
미주방면
1995
홍학순
만주방면
1995
황봉신
의병
1995
황봉운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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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1996년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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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명
1996
강윤희
의병
1996
김치보
노령방면
1996
이중집
만주방면
1996
장명도
만주방면
1996
추푸청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96
남공선
만주방면
1996
안광조
의병
1996
엄해윤
의병
1996
윤상열
3·1 운동
1996
정인국
의병
1996
최봉준
노령방면
1996
최영호
만주방면
1997
김호
미주방면
1997
백일규
미주방면
1997
임성우
미주방면
1997
조병요
미주방면
1998
김용성
미주방면
1998
김찬수
만주방면
1998
박사화
의병
1998
심용준
만주방면
1998
차천리
만주방면
1999
신우여
노령방면
1999
후쭝난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2000
이호원
만주방면
2000
이성화
의병
2001
김학무
중국방면
2002
김규면
노령방면
2002
신현규
국내항일
2002
채영
노령방면
2003
이필상
의병
2004
윤자영
중국방면
2005
권오설
국내항일
2005
조동호
국내항일
2005
김철수
국내항일
2005
김태연
국내항일
2005
김한
중국방면
2005
정헌태
국내항일
2005
최윤구
만주방면
2005
한위건
중국방면
2006
고지형
3·1운동
2006
박영
만주방면
2006
이재유
국내항일
2006
이민환
노령방면
2006
한봉철
만주방면
2007
이자해
중국방면
2007
전일
노령방면
2008
유기석
중국방면
2008
이춘숙
임시정부
2009
장기초
만주방면
2009
길선주
3·1 운동
2009
이운혁
국내항일
2010
이경호
국내항일
2010
김창헌
만주방면
2010
김호
만주방면
2010
신광삼
만주방면
2010
유찬희
만주방면
2010
임기홍
만주방면
2010
이웅해
만주방면
2011
강영소
미주방면
2011
유상돈
노령방면
2012
임성섭
국내항일
2013
박창철
만주방면
2014
프레더릭 매켄지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2014
백남준
만주방면
2014
송중직
국내항일
2014
이진산
중국방면
2015
강익록
국내항일
2015
전병현
임시정부
2017
조응순
만주방면
2019
이봉구
3·1 운동
2020
이영쇠
3·1운동
2025
김창준
만주방면
2025
제랄딘 T. 피치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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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허위 공적으로 인해 서훈 취소
[B] 친일 행적으로 인해 서훈 취소
}}} : 독립유공자 : 기타 공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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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fff> 성명 국적 훈격
<colcolor=#000> 가네코 후미코 일본 애국장
궈타이치 중국 독립장
탕지야오 중국 대통령장
다이리 중국 독립장
더글라스 스토리 영국 애족장
데이지 호킹 호주 건국포장
두쥔훼이 중국 애족장
로버트 그리어슨 캐나다 독립장
롤랜드 클린턴 베이컨 캐나다 애족장
루이 마랭 프랑스 애국장
마가렛 센더먼 데이비스 호주 애족장
마수례 중국 독립장
모더후이 중국 독립장
모리스 윌리엄 호주 독립장
미네르바 루이즈 구타펠 미국 건국포장
사도덕 중국 독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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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던 파머 스펜서 미국 애족장
쑤징허 중국 애족장
쑨커 중국 대통령장
쑨원 중국 대한민국장
쑹자오런 중국 대통령장
쑹메이링 중국 대한민국장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캐나다 독립장
스티븐 앰브로즈 백 미국 애족장
아치볼드 해리슨 바커 캐나다 독립장
어거스틴 스위니 영국 애족장
어니스트 배델 영국 대통령장
여천민 중국 대통령장
올리버 R. 애비슨 캐나다 독립장
왕주이 중국 독립장
위빈 중국 대통령장
윌리엄 린튼 미국 애족장
류용야오 중국 독립장
이사벨라 멘지스 호주 건국포장
리수전 중국 애족장
일라이 밀러 모우리 미국 독립장
린썬 중국 대통령장
장제스 중국 대한민국장
장쥐 중국 독립장
장췬 중국 독립장
추푸청 중국 독립장
제랄딘 피치 미국 독립장
제이 제롬 윌리엄스 미국 독립장
제임스 헨리 로버츠 크롬웰 미국 건국포장
조지 쇼 영국 독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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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애쉬모어 피치 미국 독립장
조지 윌리엄 노리스 미국 애족장
존 웨슬리 스태거즈 미국 독립장
주자화 중국 대통령장
주칭란 중국 독립장
천궈푸 중국 대한민국장
천치메이 중국 대한민국장
천청 중국 대통령장
천리푸 중국 독립장
찰스 스폴딩 토마스 미국 건국포장
찰스 에드워드 러셀 미국 독립장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아일랜드 애족장
패트릭 도슨 아일랜드 애국장
폴 프레드릭 더글라스 미국 독립장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 미국 건국포장
프랭크 스코필드 캐나다 독립장
프레데릭 브라운 해리스 영국 독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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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찰스 화이팅 미국 애족장
허버트 아돌프스 밀러 미국 독립장
호레이스 뉴튼 알렌 미국 독립장
호머 헐버트 미국 독립장
후쭝난 중국 독립장
후한민 중국 대통령장
황줴 중국 독립장
황싱 중국 대통령장
후세 다쓰지 일본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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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연세대학교 문장.svg
세브란스병원
역대 병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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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병원장
<rowcolor=#fffff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알렌 헤론 빈턴 에비슨 허스트
<rowcolor=#ffffff>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맨스필드 에비슨 이영준 윤치왕 오한영
<rowcolor=#ffffff>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이학송 최재유 정기섭 문창모 이용설
<rowcolor=#ffffff>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고병간 임의선 김효규 진동식 김춘규
<rowcolor=#ffffff>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유재덕 신정순 박인용 이경식 강진경
<rowcolor=#ffffff>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조범구 김성규 박창일 이철 박용원
<rowcolor=#ffffff>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정남식 윤도흠 이병석 하종원 이강영
}}}}}}}}} ||


[1] 철자로 인해 '호레이스'로도 알려져 있으나 해당 이름의 영어 발음은 /ˈhɒɹɪs~ˈhɔɹəs/로, '호러스'가 실제에 더 가깝다. Allen(/ˈæ.lən/)의 경우 관용에 따라 '앨런'이 아닌 '알렌'으로 표기한다.[2] 다른 하나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한 조선기독대학(경신학교 대학부)-연희전문학교.[3] 다만 이에 대해서는 연세의료원서울대학교병원 사이에 정통성 논란이 있기도 했다. 제중원 정통성 논란 문단 참조.[4]연세 대학교 의과 대학세브란스병원.[5] 일설에는 청나라에서 의료사고를 저질러 선교사역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사실 알렌은 의과대학을 졸업했지만 의술이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았다.[6] 뮐렌도르프는 독일인인데다가 청나라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공식 관리였기 때문에 건드리기가 어려웠다.[7] 다만 당시 조선은 1883년부터 발행된 당오전의 영향으로 1881년에 6.5냥이던 쌀1섬이 1884년이면 14냥으로 뛴다. 당연히 쌀 가격만 올라갔을리 없으니 갑신정변 이전에 고종과 민비가 매관매직하던 시절의 화폐가치로 이 10만냥을 가늠할 순 없다. 당장 알렌 본인이 1884년에 서울에 산 집의 집값을 기록한게 45만냥이다.[8] 원세개는 총영사 직위로 파견되었지만 스스로 총독 행세를 하며 다른 외교관들이 궁문에 내려 걸어가는데 비해 고종 앞에까지 가마를 타고 다니며 폐위협박까지 할 정도로 위세를 떨었다.[9] 해군 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어가 유창하고 한문을 독학으로 깨우친 데다가 조선어를 조금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보빙사 일행을 수행했고, 보빙사에서 포크 소위가 동행하길 요구했기에 해군 없는 조선에 해군무관으로 파견되었다.[10] 링크에선 1913년부터 가능한데 1913년 기준 3.6억 달러, 1920년 기준 1.8억 달러, 1930년 기준 2.1억 달러, 1936년 기준 2.6억 달러이다.[11] 지구상에 금은 한정적인데 수요가 많아서 19세기에는 1톤당 5그램 정도까지 가던 금광 채산성이 점점 낮아져 현재에는 톤당 2.5그램까지 채굴한다.[12] 1903년 12월 10일 《고종실록》 기사.[13] 지어놓은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는 자혜의원으로 재활용되었다. 6.25 전쟁 때 불탔고 현재 그 자리에는 평양의학대학이 들어섰다.[14] 인터넷 백과에도 보통 알렌이 설립했다고 나와 있는데 정작 제중원 문서에는 아니라고 적혀 있다. 일반적으로는 알렌이 고종에게 건의하여 광혜원을 설립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서울대학교병원 측에 따르면 제중원은 엄연히 국립(당시에는 왕립) 기관으로 선교회는 위탁 운영만 했지 소유권은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고로 설립자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단 고용되어 초대원장을 지낸 운영자인 것은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