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7 18:58:24

석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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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 초대 황제
석륵 | 石勒
파일:석륵묘.jpg
고평릉 전경.
출생 274년
서진 상당군 무양현
(現 산시성 창즈시 우샹현)
사망 333년 8월 17일 (향년 59세)
후조 광평군 양국현
(現 허베이성 싱타이시)
능묘 고평릉(高平陵)
재위기간 상당군공(上黨郡公)
312년 7월 ~ 320년 1월 8일
조왕(趙王)
320년 1월 8일 ~ 330년 2월
대조천왕(大趙天王)
330년 2월 ~ 330년 9월
초대 황제
330년 9월 ~ 333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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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성씨 석(石)
배(㔨) → 륵(勒)
부모 부왕 세종 원황제
모후 왕씨
배우자 유씨, 정씨
자녀 4남 (양자 1남)
아명 복륵(匐勒)
세룡(世龍)
작호 조왕(趙王)
묘호 고조(高祖)
시호 명황제(明皇帝)
연호 태화(太和, 328년 ~ 330년)
건평(建平, 330년 ~ 3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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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성장2.2. 급상의 난2.3. 광문제 유연 치세기2.4. 소무제 유총 치세기
2.4.1. 영가의 난2.4.2. 왕미 척살2.4.3. 양국에 자리잡다2.4.4. 유주의 왕준 정벌2.4.5. 소속의 항전2.4.6. 병주의 유곤 토벌2.4.7. 이어지는 대외 정벌
2.5. 후조를 세우다
2.5.1. 근준의 난2.5.2. 후조의 건국
2.6. 전조를 멸하다2.7. 칭제2.8. 말년
3. 평가4. 인물됨과 일화
4.1. 석륵의 비평4.2. 역사적 식견4.3. 기타 일화
5. 창작물에서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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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5호 16국시대 후조(後趙)의 창건자. 상당군의 갈족(羯族) 출신으로 소부락의 수령 석주갈주(石周曷硃)[1]의 아들이다. 원래 전조(前趙)의 장수로 활약하다가, 독립하여 후조를 건국했다. 는 세룡(世龍). 원래 이름은 배(㔨). 아명은 복륵(匐勒)이었다. 묘호는 고조(高祖)였고, 시호는 명제(明帝)이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태어날 때, 붉은 빛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하늘에서 백색 기운이 내려와 마당을 덮어,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특별하게 여겼다. 그리고 석륵이 14세가 되었을 때, 고향 사람들과 함께 상업을 하러 낙양으로 가, 동문(東門)에서 크게 외치며 물건을 팔았다. 이때 우연히 석륵을 목격한 왕연이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 아이의 목소리와 눈빛을 보아하니 비범한 자질을 가졌구나. 장차 천하에 우환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급히 사람을 보내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이미 석륵이 낙양을 떠난 후였다.

석륵은 자라면서 기골이 장대하고 건강하였으며, 담력과 용맹이 있었고, 기마와 사격을 좋아하였다. 그의 아버지 석주갈주는 성격이 흉폭하고 거칠어서 다른 갈족들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했으나, 석륵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갈족들을 통솔하자, 많은 갈족들이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였다.

석륵이 살던 무향의 북원산(北原山) 아래 집 주변에는 풀과 나무들이 모두 철기(鐵騎)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집 뜰의 정원에서는 인삼꽃이 사람의 형상으로 자라났다. 이를 본 마을의 장로와 점쟁이들이 석륵에 대해 말했다.
"저 오랑캐(胡)는 생김새도 기이하고, 다른 뜻을 품고 있어, 그 비상함을 헤아릴 수 없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를 듣고도 비웃었으나, 오직 오(鄔)사람 곽경과 양곡(陽曲)사람 이씨(李氏)만이 이를 믿고, 그에게 물자와 금전을 지원하였다. 석륵 또한 그들의 은혜에 감복하여 열심히 농사 지었다.

서진 태안 연간(302~303)에 기근이 들어 갈족 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니, 석륵도 안문(鴈門)으로 가 영구(寧驅)에게 의탁하였다. 그때 북택도위(北澤都尉) 유감(劉監)이 여러 이민족들을 잡아다 팔면서 석륵도 붙잡으려 하자, 영구가 그를 숨겨주어 겨우 잡혀가는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안문에 더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된 석륵은 가족들을 거느리고 납항도위(納降都尉) 이천(李川)에게로 향하던 중, 길에서 곽경을 우연히 만나 눈물을 흘리며 인사를 건넸다. 곽경은 놀라 이런 몰골이 된 연유를 물었고, 석륵의 처지에 공감하며 더불어 눈물을 흘렸다. 이후 석륵에게 수중에 있는 돈을 내어주고 의복과 식량을 지원하면서 석륵과 그 일족을 보살폈다. 석륵이 곽경에게 말했다.
"지금은 대기근이 들어, 여러 오랑캐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들을 유인해 기주(冀州)로 가서 양식을 구하러 가고, 기회를 틈타 그들을 사로잡은 뒤에 팔아버린다면 서로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곽경 또한 깊이 동의하였다.

이때 병주(幷州) 자사 동영공 사마등은 건위장군 염수(閻粹)의 제안에 따라, 장수 곽양(郭陽)과 장륭(張隆)을 보내 이민족들을 붙잡아 산동(山東) 지역에 노예로 팔고 군자금에 충당하였다. 당시 스무 살이 넘었던 석륵도 이들에게 사로잡혔고, 장륭이 그를 끌고 가면서 마구 폭행하며 모욕을 주었다. 이를 측은하게 여긴 곽경이 마침 그의 사촌인 곽양과 그 아들 곽시(郭時)에게 석륵을 돌봐달라 부탁하였다. 곽양과 곽시는 곽경의 부탁대로 장륭의 폭행으로부터 여러 차례 석륵을 보호하고, 그에게 약과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석륵은 제동(濟東)의 평원(平原)에 이르러 치평(荏平) 사람인 사환(師懽)에게 노예로 팔렸다. 사환을 따라서 치평으로 가던 석륵에게 한 노인이 다가와 말했다.
"그대의 이마 위에 물고기와 용이 네 갈래로 뻗어있는 걸 보아하니, 장차 귀해져 사람의 주인이 될 것이다. 갑술년(甲戌年)에는 왕팽조(彭祖: 왕준의 字)를 도모할 수 있으리라."
이에 왕준이 말했다.
"만약 그대의 말대로 이루어진다면, 감히 그 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홀연히 사라졌다. 이후 사환의 노예로 일하던 석륵은 인근에서 목장을 경영하던 급상과 친해져 그의 도움으로 노예에서 해방되었고, 급상의 목장에서 고용되어 일을 돕게 되었다. 다만, 석륵은 급상 밑에서 목장일뿐만 아니라 왕양(王陽), 기안(夔安), 지웅(支雄), 기보(冀保), 오예(吳豫), 유응(劉膺), 도표, 녹명(逯明) 8명을 만나 도적 무리를 이루어 약탈을 하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곽오(郭敖), 유정(劉征), 유보(劉寶), 장일복(張曀僕), 호연막(呼延莫), 곽흑략(郭黑畧), 장월, 공돈(孔豚), 조록(趙鹿), 지굴(支屈) 등도 석륵과 합류하여 그들 무리는 어느덧 18명이 되었다. 석륵은 동쪽으로 적룡(赤龍), 육기(騄驥) 등의 여러 목장에서 말을 얻어, 자신이 모은 동료들과 함께 멀리 나가서 비단과 보물을 약탈해 급상에게 바쳤다고 한다.

영흥 2년(305년) 5월, 성도왕 사마영이 폐출되자, 사마영의 부하였던 공사번(公師藩), 누기(樓機), 학창(郝昌) 등이 각기 장군을 자칭하며, 수현(鄃縣)에서 거병하여 업(鄴)을 공격하려 하였다. 공사번 등의 무리는 수만 명에 이르렀고, 석륵은 급상과 함께 기병 수백 기를 거느리고 이들에게 합류하였다. 이때 급상이 석륵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질 것을 제안하여 비로소 "석륵"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영흥 2년(305년) 7월, 공사번은 석륵을 전대독(前隊督)으로 삼았고, 기주 일대의 여러 군현을 공격해 2,000석 이하 관리들을 살해하고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목표인 업으로 진공하니, 업의 평창공 사마모는 장수 풍숭(馮嵩)을 보내 공사번을 막게 하였다. 이때 범양왕 사마효(司馬虓)가 파견한 장수 구희와 광평태수 정소도 모두 업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공사번을 협격하자, 공사번은 패하여 무리와 함께 남쪽으로 도주하였다.

광희 원년(306년) 9월, 공사번이 백마진(白馬津)에서 황하를 건너다가 연주자사 구희에게 대패하여 그 무리가 흩어졌다. 석륵은 급상을 따라 다시 목장으로 돌아갔고, 급상은 석륵을 복야아문(伏夜牙門)으로 삼아 기병들을 거느리고 인근 군현을 약탈케 하였다. 석륵은 약탈지에서 얻은 포로와 전란을 피해 산과 들에서 숨어다니는 유민들을 흡수하여 이내 많은 무리를 거느리게 되었다. 어느정도 세력을 키운 석륵은 이들을 이끌고 평석(平石)에 주둔하였다.

2.2. 급상의 난

영가 원년(307년) 3월, 급상이 대장군을 자칭하며 난을 일으키자, 석륵은 그의 선봉이 되어 여러 지역을 휩쓸고 다녔다. 급상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니, 급상은 자신감을 얻어 석륵을 토로장군•충명정후(忠明亭侯)로 삼아 업으로 진공하였다. 이때 장홍(張泓)의 옛 장수 이풍(李豐) 등도 급상과 합류하여 석륵을 도와 업을 공격하였다. 당시 업을 지키던 신채왕 사마등은 형인 동해왕 사마월로부터 많은 물자를 지원받았으나, 인색한 성품으로 인해 평소 장수와 병사들에게 베풀지 않았다. 그런데 급상의 반란군이 들이닥칠 위기에 놓이자, 그제서야 장병들에게 쌀과 비단을 뿌렸지만 이미 떠나간 인심을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가 원년(307년) 5월, 급상과 석륵은 사마등이 보낸 위군태수 풍숭을 격파하고 곧장 업성 인근까지 진격하였다. 그때까지도 사마등은
"내가 병주(并州)를 7년간 다스릴 때에도 오랑캐들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거늘, 어찌 급상 같은 작은 도적 따위를 두려워하겠는가?"
라며 호기롭게 급상과 맞서 싸울 것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사마등은 업을 지킬 수 없어 경기병을 거느리고 업성을 탈출하였으나, 급상이 보낸 이풍에게 따라잡혀 살해당했다. 사마등의 아들 사마우(司馬虞)는 용맹하였지만, 눈앞에서 아버지가 해를 입는 모습을 보고 흥분하여 이풍을 쫓다가 실수로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그 날, 업성은 급상과 석륵에 의해 함락되었고, 사마등의 아들이자 사마우의 동생인 사마교(司馬矯)와 사마소(司馬紹), 거록(巨鹿) 태수 최만(崔曼), 거기장군 장사 양환(羊桓), 종사중랑 채충(蔡充) 등도 모두 살해당했다. 전란을 피해 업성에 머물던 여러 이름있는 가문의 자제들도 거의 대부분이 급상의 반란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업궁(鄴宮)은 불타올라 열흘 동안 꺼지지 않았으며, 10,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영가 원년(307년) 6월, 업 함락으로 군사들의 사기를 한껏 끌어올린 급상은 다음 목표인 허창(許昌)의 사마월도 죽이기 위해 석륵에게 군대를 주어 연진(延津)에서 황하를 건너 연주를 침범하게 하였다. 사마월은 두려워 연주자사 구희와 진류(陳留) 내사 왕찬(王贊) 등에게 명하여 석륵을 토벌케 하였다. 석륵은 구희와 평원(平原)과 양평(陽平) 사이에서 여러 달 동안 대치하며 크고 작은 3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치열하게 승패를 주고 받았다. 이때 헌제의 증손자인 산양공 유추(劉秋)가 석륵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영가 원년(307년) 7월, 동해왕 사마월이 관도(官渡)로 이동해 구희를 지원하였다. 급상은 평소 구희를 두려워하여 성 밖에 울타리를 치고 지키며 방어하였는데, 구희가 군사를 쉬게 하고 기병을 보내 화복(禍福)을 알라니, 급상의 병사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영가 원년(307년) 8월, 급상과 석륵은 동무양(東武陽)에서 구희에게 크게 패하고, 북쪽으로 도주하여 청연(淸淵)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지켰다.

영가 원년(307년) 9월, 구희의 추격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고는 또 대패하여 10,000여 명이 전사하고, 급상이 세워둔 보루 8개가 모두 허물어졌다. 석륵은 급상과 함께 살아남은 패잔병을 수습해 흉노의 한왕(漢王) 유연에게로 귀순하려 했으나, 이번엔 적교(赤橋)에서 기주자사 정소에게 패하여 급상의 무리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급상은 치평의 말목장으로 잠시 돌아갔다가 낙릉으로 갔고, 석륵은 그와 헤어져 병주의 낙평(樂平)으로 갔다.

2.3. 광문제 유연 치세기

당시 병주에는 이민족의 부대(部大) 장배독(張背督)과 풍막돌(馮莫突) 등이 수천 명을 모아 상당(上黨)에서 보루를 쌓고 있었다. 평소 이들에게 신임받던 석륵은 장배독 등에게로 가, 그들을 설득하며 말했다.
"유 선우(劉單于)가 거병하여 진(晉)을 공격하면 부대(部大)가 거부하며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끝까지 홀로 할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그들이 답했다.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석륵이 다시 말했다.
"그럴 수 없다면 마땅히 병마(兵馬)를 이끌고 그곳에 소속되어야 하오. 지금 부락들이 모두 선우의 상모(賞募)를 듣고 이미 여러 번 모여서 의논하여, 부대를 배반하고 선우에게 귀순하고자 하니, 속히 계책을 정해야 하오."
장배독 등은 원래 지략이 부족하여, 석륵의 말만 듣고 무리가 배신할 것이 두려워 그가 말한대로 따랐다.

영가 원년(307년) 10월, 석륵이 유연에게 귀부하자, 장배독 등도 직접 말을 타고 와서 석륵의 뒤를 이었다. 유연은 장배독을 친한왕(親漢王), 풍막돌을 도독부대(都督部大)로 삼고, 석륵을 보한장군•평진왕(平晉王)으로 삼아 이들을 통솔케 하였다. 석륵은 장배독이 순순히 자신의 말에 따라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와 의형제를 맺고, 형님으로 삼아 석씨(石氏) 성을 하사하고, 휘를 "회(會)"라 하였다.

당시 오환족의 장복리도(張伏利度)라는 자가 무리 2,000명을 통솔하며 낙평에서 보루를 쌓고 있었는데, 유연이 그를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았다. 이에 석륵은 유연에게 죄를 범하여 쫓겨난 척하며 장복리도에게로 귀순하였다. 장복리도는 기뻐하며 그와 형제로 맺고, 석륵에게 여러 호인(胡人)들을 이끌고 지역을 약탈하도록 하였다. 석륵은 가는 곳마다 막힘이 없었고, 여러 호인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하였다. 석륵은 무리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알고, 회의가 열렸을 때 장복리도를 붙잡은 뒤에 여러 호인들에게 말했다.
"지금 큰일을 일으키려 하는데, 나와 장복리도 중 누가 주인이 되어야 하는가?"
그러자 여러 호인들은 전부 석륵을 추대하였다. 석륵은 장복리도를 풀어주고, 그 무리와 함께 유연에게로 돌아갔다. 유연은 석륵을 산동정토제군사(山東征討諸軍事)로 삼고, 장복리도의 무리를 거느리게 해주었다.

원희 5년(308년) 2월, 석륵이 군대를 이끌고 상산(常山)을 침공하였다. 하지만 진나라의 안북장군 왕준의 반격을 받고 격파당했다.

원희 5년(308년) 9월, 석륵과 진동대장군 왕미와 함께 업(鄴)을 공격하자, 진나라의 정북장군 화욱(和郁)이 업을 버리고 위국(衛國)으로 도망쳤다. 진나라 조정은 거기장군 왕감(王堪)을 동연(東燕)에 주둔케 하여 석륵의 진군을 막았다.

원희 5년(308년) 10월, 석륵이 평북장군 유령, 장수 염비(閻羆) 등 7명의 장수와 30,000 군사를 거느리고, 위군(魏郡)과 급군(汲郡), 돈구(頓丘)를 침략하였다. 백성들은 이들이 내는 바람 소리만 듣고도 항복하였고, 50여 곳의 보루가 석륵에게 투항하였다. 석륵은 루주(壘主)를 모두 장군이나 도위로 임명하고 인수를 내렸으며, 보루 내에 있는 자들 중 강건한 자 50,000명을 군사로 삼고, 나머지 노약자들은 그대로 평안하게 두었다. 그의 군사는 사사로이 약탈하지 않으니, 백성들은 이를 믿고 따랐다.

10월 3일[2], 한왕 유연이 마침내 칭제하자, 석륵은 지절•평동대장군•교위도독으로 임명하고, 왕작은 이전과 같게 하였다.

영봉 원년(308년) 11월 8일[3], 석륵이 업성을 함락시키고, 진나라의 위군태수 왕수(王粹)를 삼대(三臺)에서 붙잡아 죽였다. 이후 조군(趙郡)으로 진군하여 진나라의 서부도위 풍충(馮沖)을 죽이고, 중구(中丘)에서 걸활군을 격파하여 사정(赦亭)과 전인(田禋)을 모두 죽였다.

영봉 2년(309년) 3월, 광문제 유연이 석륵을 안동대장군으로 삼고, 휘하에 좌우 장사, 사마, 종사중랑 등의 직책을 두게 하였다.

영봉 2년(309년) 4월, 거록과 상산을 공격하여 두 군의 태수를 죽였다. 이어서 석륵이 기주의 군현과 보루 100여 개를 모두 함락시키니, 그 군세는 100,000명에 이르렀다. 석륵은 학식을 갖춘 인재들을 모아 군자영(君子營)을 별도로 설치하고, 조군 사람 장빈을 초빙하여 공조로 등용해 모사로 삼았다. 또, 조응(刁膺)과 장경(張敬)을 보좌관으로, 기안과 공장(孔萇)을 조아(爪牙)로 삼았으며, 지웅, 호연막, 왕양, 도표, 오예, 녹명 등을 장수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장수 장사(張斯)를 보내 병주 산북(山北)의 여러 군현으로 가서 그곳의 호걸들에게 석륵의 위엄을 알리도록 하였다. 이에 여러 호걸들이 석륵의 위명을 두려워하여 많이 항복하였다.

광문제 유연이 초왕 유총과 정동대장군 왕미에게 호관(壺闗)을 공격할 것을 명하면서 석륵과 그가 이끄는 7,000여 명의 군사를 선봉으로 삼게 하였다. 병주자사 유곤이 호군장군 황숙(黃肅)을 보내 호관을 구원케 하였으나, 석륵이 봉전(封田)에서 이를 격파하였고 황숙은 전사하였다. 이후 유총이 동해왕 사마월이 보낸 구원군까지 격파하자, 상당태수 방순(龐淳)은 호관을 들어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하서 원년(309년) 9월, 상산에서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파견해 중산(中山), 박릉(博陵), 고양(高陽)의 여러 군현을 공격하게 하니, 항복해오는 자들이 수만 명에 달하였다.이에 유주자사 왕준이 천수장군 기홍(祁弘)과 선비족 단부의 단무물진(叚務勿塵) 등 100,000여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석륵을 토벌하였고, 석륵은 비룡산(飛龍山)에서 왕준에게 대패하니 죽은 자가 10,000여 명에 이르렀다. 석륵은 후퇴하여 여양(黎陽)에 주둔하였고, 왕준은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아직 항복하지 않은 자들을 규합해 배반한 자들을 공격하여 석륵에게 투항했던 30여 보루를 함락시켰다.

하서 원년(309년) 11월, 신도(信都)를 침략해 장락(長樂)을 함락시키고, 진나라의 기주자사•안북장군 왕빈(王斌)을 죽인 뒤에 약탈을 자행하였다. 왕준은 스스로 기주를 관할하였고, 진나라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거기장군 왕감과 북중랑장 배헌으로 하여금 낙양의 군대로 석륵을 토벌케 하였다. 석륵이 진영과 군량을 불태우고, 그들을 막기 위해 회군하여 황우루(黃牛壘)에 주둔하니, 진나라의 위군태수 유거(劉矩)가 군을 들어 석륵에게 투항하였다. 이때 석륵은 함락시킨 기주의 군현 100여 보루의 군사들을 유거에게 주어 통솔토록 하였다. 석륵이 여양으로 돌아오자 배헌은 군을 버리고 회남(淮南)으로 도망갔고, 왕감은 창원(倉垣)으로 퇴각하여 주둔하였다.

하서 원년(309년) 12월, 광문제 유연이 석륵을 진동대장군•지절•도독으로 삼고, 급군공(汲郡公) 작위를 수여하자, 석륵은 공작은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이후 석륵은 장수 염비와 함께 도권(暏圈), 원시(苑市) 두 보루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나, 이 전투를 수행하던 중에 염비가 전사하여 석륵이 그의 군사까지 모두 통솔하게 되었다.

하서 2년(310년) 정월, 석교(石橋)에서 몰래 황하를 건너, 백마(白馬)를 공격해 뽑아버리고 진군 3,000여 명을 죽였다. 이후 정동대장군 왕미가 이끄는 30,000 군사와 합류하여, 그와 더불어 서주, 연주, 예주를 침공하였다.

하서 2년(310년) 2월, 동쪽으로 진격하여 견성(鄄城)을 습격하였다. 연주자사 원부(袁孚)는 석륵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석륵은 창원(倉垣)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거기장군 왕감을 죽였다. 이어서 북쪽으로 가, 황하를 건너서 기주의 광종(廣宗), 청하(清河), 평원(平原), 양평(陽平) 등의 군을 공격하니, 항복하는 백성이 90,000여 명에 달했다.

하서 2년(310년) 5월, 급군(汲郡)을 침략하여 급군태수 호총(胡寵)을 사로잡고 다시 남쪽으로 황하를 건넜다. 이에 형양(滎陽) 태수 배순(裴純)은 두려워 건강(建康)으로 도망쳤다.

하서 2년(310년) 7월, 초왕 유총이 하내태수 배정(裴整)을 포위하자, 석륵은 기병을 이끌고 그와 합류하여 무덕(武德)에서 진나라의 관군장군 양거(梁巨)를 공격하였다. 회제 사마치는 정로장군 송추(宋抽)를 보내 양거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석륵은 무덕에 여러 장수를 남겨두고, 평북대장군 왕상과 함께 장릉(長陵)에서 송추를 영격해 살해하였다. 양거는 두려워 항복을 청하였으나, 석륵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성을 넘어 도망치려다 병사들에게 붙잡혔다. 석륵은 무덕으로 달려가 항복한 병사 10,000여 명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양거의 죄를 물어 그를 죽였다. 인근의 여러 성채는 크게 동요하여 모두 항복을 청하고 인질을 보냈다. 배정 역시 하내의 백성 악앙(樂仰)에게 사로잡혀 석륵에게 진상되었다.

2.4. 소무제 유총 치세기

2.4.1. 영가의 난

광흥 원년(310년) 7월, 초왕 유총이 광문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황제 유화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였다. 소무제 유총은 석륵을 정동대장군•병주자사•지절•개부•도독교위•급군공으로 삼고, 왕작은 이전과 같이 하였다. 석륵은 이를 굳게 사양하였으나, 장군 직책은 그대로 임명받았다.

광흥 원년(310년) 10월, 하내왕 유찬, 시안왕 유요, 정동대장군 왕미가 40,000 군사를 이끌고 낙양을 공격하였다. 석륵은 장사 조응에게 보병 90,000명을 통솔케 하여 무거운 짐을 중문(重門)으로 옮기게 한 뒤, 가볍게 무장한 병력 20,000명으로 유찬 등과 대양(大陽)에서 합류하였다. 한군은 진격하여 진나라의 감군 배막(裴邈)을 면지(澠池)에서 격파하고, 낙천(洛川)으로 진입하였다가 환원(轘轅)으로 나와 양(梁), 진(陳), 여(汝), 영(潁) 일대를 약탈하였다.

10월 13일[4], 석륵이 성고관(成皋關)으로 나와 진나라의 진류태수 왕찬을 창원에서 포위하였다가 패하여 문석진(汶石津)으로 퇴각해 주둔하였다. 이후 진나라의 양성(襄城) 태수 최광(崔曠)을 번창(繁昌)에서 습격해 죽이고 양성으로 향하였다. 이때 유주자사 왕준이 단부의 단문앙을 보내 기병을 이끌고 양성을 구원케 하니, 석륵은 이 소식을 듣고 다시 문석진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왕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장수 왕갑(王甲)으로 하여금 요서(遼西)의 선비족 기병 10,000여 기를 거느리고 석륵을 공격하게 하였다. 석륵은 문석진에서 왕갑의 공격을 받고 패하여, 배를 태우고 진영을 버린 채 패잔병을 인솔해 백문(柏門)으로 달아났다.

석륵이 중문에 두었던 군량을 수거하고, 석문(石門)을 넘어서 진나라의 예주자사 풍숭을 진군(陳郡)에서 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남양(南陽)으로 향하였다. 당시 옹주(雍州)의 유민군을 이끌던 왕여가 대장군을 자칭하며 양성(襄城)을 점거하면서 한수(漢水)와 면수(沔水) 사이를 크게 약탈하고 있었고, 장안(長安) 사람 후탈(侯脫), 빙익(馮翊) 사람 엄억(嚴嶷), 남안(南安) 사람 방식(龎寔) 등도 각기 거병하여 강회(江淮) 지역의 성채를 점거하며 할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무제 유총으로부터 관직을 받아, 각각 무리를 이끌고 여러 성채를 공격하였는데, 그 수가 40,000 ~ 50,000명을 헤아렸다. 이때 왕여, 후탈 등은 석륵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10,000명의 군사를 양성으로 보내 석륵의 진격을 막으려 했으나, 석륵은 그들을 격파해 모두 사로잡은 후, 남양으로 진격하여 완(宛) 북쪽에 주둔하였다.

당시 후탈은 완, 왕여는 양성을 점거하고 있었는데, 이 둘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여는 석륵이 양성을 공격할까 두려워 사신을 보내 보물과 말 등을 바치고 석륵에게 의형제를 맺자 청하였다. 석륵은 그의 힘을 이용하고자 그 청을 수락하였다. 왕여가 석륵에게 말했다.
"후탈은 비록 명목상 한(漢)나라의 신하라 칭하나, 실제로는 한나라의 적입니다. 저는 항상 그가 습격할까 두려워 하였으니, 형님께서는 마땅히 대비토록 하십시오."
본디 석륵은 후탈 등이 자신의 진군을 막았다는 사실에 분노했지만, 왕여와 후탈이 이빨과 입술처럼 서로 의지하고 있는 형세를 꺼려 함부로 이들을 공격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여가 먼저 후탈과 대립하는 낌새를 보이자, 석륵은 무척 기뻐하며 3군을 배불리 먹인 뒤, 전 병력은 자지 말고 대기할 것을 명했다. 이윽고 새벽이 되자, 석륵은 제때 출발하지 않는 자는 참수하겠다는 군명을 내리고, 출전하여 완의 성문을 엄습하였다. 석륵의 매서운 공격에 완성은 12일만에 함락당하고, 후탈은 붙잡혀 참수당했다. 완을 구원하러 달려오던 엄억은 미처 이르기도 전에 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석륵에게 항복하여 한나라의 수도인 평양(平陽)으로 압송당했다. 석륵은 엄억의 군사를 온전히 흡수하여 군세를 더욱 강화하고, 남쪽으로 진격해 양양(襄陽)을 공격하였으며, 강서(江西)의 성채 30여 곳을 함락시켰다.

양양을 함락시킨 석륵은 조응을 양양에 남겨 지키게 하고, 자신은 경무장한 병사 30,000명을 이끌고 돌아와 왕여를 공격하였다. 왕여는 석륵의 강성한 세력을 보고 겁을 먹어 양성으로 도망쳤고, 동생 왕리(王璃)에게 기병 25,000여 기를 주어 석륵의 군대를 위로하는 척하다가 기회를 봐서 습격하게 하였다. 석륵은 이를 미리 눈치채고 왕리를 공격하여 전멸시키고, 다시 강서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광흥 원년(310년) 11월, 진나라에서 동해왕 사마월이 정권을 독점하고 권력을 남용하면서 회제 사미치와 갈등을 겪기 시작하였다. 회제 사마치는 사마월을 미워하여 청주자사 구희에게 6주의 군사를 통할하여 왕미와 석륵을 제거할 것을 명하는 조서를 친히 써서 보내니, 구희는 여러 제후와 주군(州郡)에 석륵을 토벌하자는 격문을 돌렸다. 구희의 격문을 입수한 석륵은 이를 읽고 대로하여 말했다.
"나는 이 도적과 하늘 아래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노라."

광흥 원년(310년) 12월, 석륵이 장수 조억(曹嶷)을 보내 낭야(琅邪)를 공격하였다. 조억이 낭야를 점령하고 북쪽으로 나아가 제군(齊郡)을 공격하니, 구희를 대신해 청주를 지키고 있던 구순(茍純)을 굳게 닫고 스스로를 지켰다. 조억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구희는 돌아와 조억과 맞서싸웠지만, 조억의 군세는 사그라들지 않고 점점 강해져 결국에는 청주의 여러 성채를 차지하였다.

광흥 2년(311년) 정월, 구희가 성에 올라 조억에게 넘어간 성채들을 둘러보고 두려움을 느끼며, 조억과 여러 번 전투를 벌였으나 모두 패하여 고평(高平)으로 도망쳤다. 한편, 석륵은 장강과 한수(漢水) 지역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는데, 우장사 장빈이 이에 반대하며 북쪽으로 돌아갈 것을 진언하였다. 하지만 석륵은 이를 따르지 않고 장빈을 참군도위로 삼아 기실(記室)을 맡겼다. 회제는 석륵이 곧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왕도에게 군사를 주어 석륵을 토벌하라 명하였다. 마침 석륵의 군대에 전염병이 퍼져 절반 이상이 죽은데다 식량까지 부족해지니, 석륵은 장빈의 계책에 따라 식량을 제외한 군수물자를 전부 불태웠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식량을 갑옷에 둘러서 짊어지게 한 채로 면수를 건너 강하(江夏)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광흥 2년(311년) 2월, 신채(新蔡)를 공격해 점령하고, 북쪽으로 나아가 남돈(南頓)에서 진나라의 신채왕 사마확(司馬確)을 살해하였다. 이후 계속 북으로 진격하여 허창(許昌)을 함락시키고, 진나라의 평동장군 왕강(王康)을 죽였다.

광흥 2년(311년) 4월 1일[5], 태부•동해왕 사마월이 낙양의 200,000 병력으로 허창의 석륵을 토벌하러 나섰다가 군중에서 병사하였다. 사마월 사후, 그 군대를 넘겨받아 지휘하게 된 왕연은 동해왕의 장례를 지낸다는 핑계로 동해(東海)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는데, 석륵이 경기병을 이끌고 이를 추격하여 동군(東郡) 고현(苦縣) 영평성(寧平城)에서 왕연의 군대를 따라잡았다. 왕연은 장수 전단(錢端)을 보내 석륵을 저지하려 했지만, 전단이 석륵과 싸우다 패하여 전사하였다. 석륵이 곧장 진격하여 왕연의 군대를 포위하고, 기병을 풀어 화살을 마구 쏴대니, 왕연의 군사들은 일제히 무너져내려 100,000명이 도망치다가 서로를 밟아 죽이는 바람에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영평성 전투)

왕연의 대군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로 석륵의 기병대에게 일방적인 학살을 당했으며, 왕, 공, 백성 할 것 없이 100,000명이 사로잡히거나 죽었다. 여기서 석륵은 양양왕 사마범(範), 임성왕 사마제(濟), 무릉왕 사마담(澹), 사마담의 아들 산기상시•애왕 사마철(喆), 서하왕 사마희(喜), 신야왕 사마소(劭), 양회왕 사마희(禧), 제왕 사마초(超), 이부상서 유망(劉望), 정위 제갈전(諸葛銓), 상서 정예(鄭豫), 예주자사 유교, 태부 장사 유개(庾凱) 등 사마씨 황족과 관료 48명을 사로잡아 장막 아래에 앉히고 진나라의 사정을 물었다. 이때 왕연은 실패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해명하였고, 아울러 자신은 애초에 관직 생활을 좋아하지 않아 세상일에 관심이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또, 그는 석륵에게 황제 칭호를 권유하며 목숨을 구하고자 했다. 이를 듣고있던 석륵이 왕연에게 말했다.
"그대는 젊어서 조정에 올라 그 명성이 사해(四海)에 떨쳤으며[6],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데 어찌 관직 생활에 관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천하를 파괴한 자가 그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그러고 좌우에 명하여 왕연을 끌어내게 하였다.

이를 본 다른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며 해명하는 가운데, 양양왕 사마범만이 엄숙하고 태연하여 그들을 돌아보고 꾸짖었다.
"오늘의 일에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석륵은 그를 매우 기특히 여겨 공장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를 다니면서 이런 인물을 본 적이 없다. 이 자는 살려두는 것이 어떠한가?"
공장이 답했다.
"이들은 모두 진(晉)나라의 왕공(王公)들이니, 결국에는 우리를 위해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석륵이 말했다.
"비록 그러하나, 반드시 창칼을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에 여러 왕공과 경사들을 밖으로 끌어내고, 밤에 사람을 시켜 담장을 무너뜨려 무더기로 묻어 죽였다. 그리고 왕미의 동생 왕장(王璋)은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불태워 먹어치웠다. 이후 석륵은 동해왕 사마월의 관을 파헤쳐 그의 시신을 불태우며 말하길,
"이 사람이 천하를 어지럽혔으니, 내가 천하를 대신해 그를 벌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뼈를 불태워 하늘과 땅에 이를 알린다."
한편, 낙양에 있던 좌위장군 하륜(何倫)과 우위장군 이혼(李惲)은 사마월의 죽음을 전해듣고도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고, 몰래 사마월의 왕비인 배씨와 왕세자 사마비(司馬毗)를 모시고 낙양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도망치던 중에 유창(洧倉)에서 석륵의 군사들과 조우하여 사마비는 사로잡히고, 하륜은 하비(下邳)로 도주하였으며, 이혼은 자신의 처자식을 죽이고 광종(廣宗)으로 달아났다. 배씨 또한 도망치다가 오씨(吳氏) 성을 가진 사람에게 사로잡혀 노비로 팔렸으나, 훗날 탈출하여 장강을 건넜다. 그녀는 낭야왕 사마예[7]를 만나 건업을 지키도록 권했으며 사마예도 그녀에게 은덕을 베풀었다. 결국 사마예는 자신의 3남 사마충을 동해왕 사마월의 양자로 삼아 동해왕으로 봉하고, 대를 잇도록 했다.

광흥 2년(311년) 6월, 정예 기병 30,000기를 이끌고 성고관으로 들어가, 유요, 왕미와 함께 낙양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한나라의 오랜 숙원이었던 낙양을 함락한 이후, 석륵은 환원으로 나가 다시 허창으로 돌아가 주둔하였다.(영가의 난)

가평 원년(311년) 7월, 평양(平陽)의 이홍(李洪)이 무리 수천을 모아 무양(舞陽)의 보루를 취하자, 진나라의 대장군 구희는 이홍을 옹주(雍州) 자사로 임명하였다. 석륵은 곡양(穀陽)을 침공하여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관군장군 왕자(王滋)를 살해하였다.

가평 원년(311년) 9월, 양하(陽夏)를 기습해 진류내사 왕찬을 사로잡고, 그를 종사중랑으로 삼았다.

9월 9일[8], 몽성(夢城)을 습격하여 대장군 구희, 하동(河東) 태수 등유와 예장왕 사마단(司馬端)을 사로잡았다. 석륵은 구희의 목에 쇠사슬을 채운 후에 좌사마로 삼았다. 이에 소무제 유총은 석륵에게 유주목 직책을 더하였다.

2.4.2. 왕미 척살

석륵과 왕미는 겉으로는 친한 척을 하였으나, 속으로는 늘 서로를 경계하였다. 왕미는 유둔(劉暾)의 말을 듣고 석륵을 먼저 제거하려고 했으나, 유둔이 석륵의 순찰 기병에게 발각되어 왕미가 조억에게 보내는 석륵을 도모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석륵에게 전달하였다. 석륵이 붙잡은 유둔을 죽이고 왕미에게 이를 알리지 않으니, 왕미는 유둔이 죽은 줄도 모르고 일이 계획대로 풀리고 있다 착각하였다. 그 후, 왕미는 장수 고량(髙梁)과 서막(徐邈)에게 군대를 주어 청주로 떠나보내자, 왕미의 군세는 점차 약해졌다.

이때 석륵이 구희를 사로잡았다는 소식을 들은 왕미는 속으로는 기뻐하지 않았으나, 거짓으로 겸손한 말을 섞어 석륵을 축하하며 말했다.
"공이 구희를 잡고 그를 용서하셨으니, 참으로 신묘하십니다. 구희를 공의 왼팔로 삼고, 저를 공의 오른팔로 삼으면 천하를 평정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석륵은 왕미의 서신을 읽고 장빈에게 말했다.
"왕미는 지위가 높으면서도 말을 겸손히 하니, 그가 곧 나를 배신할까 걱정되는구려."
장빈이 답했다.
"왕공(王公: 왕미)은 청주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인지상정이지요. 명공께서도 병주를 그리워하지 않으십니까? 왕공이 출발을 미루는 것은 명공이 뒤따라오는 것을 두려워해서입니다. 왕공은 이미 명공의 뜻을 알고 있으나, 다만 아직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입니다. 지금 왕미를 제거하지 않으면 조억이 와서 그의 우익(羽翼)이 될 것이니, 그때 가서 후회해도 이미 늦을 것입니다. 지금 서막(徐邈) 등이 떠나 군세가 약해졌으나, 왕미의 마음속 야망은 여전히 크니,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유인해 제거해야 합니다."
이에 석륵은 장빈의 말을 따랐다.

왕미를 유인할 기회를 엿보던 석륵은 어느 날, 걸활군의 진오(陳午)와 봉관(蓬闗)에서 대치하며 전투하였다. 왕미 역시 걸활군의 유서(劉瑞)와 싸우고 있었는데, 궁지에 몰려 석륵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석륵이 구원을 거절하려 하자, 장빈이 반대하며 말했다.
"명공은 항상 왕공을 제거할 기회를 찾고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 하늘이 왕공을 우리에게 맡겼습니다. 진오는 작고 아둔한 자인데 어찌 우리에게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 왕공은 호걸이라 우리에게 해를 끼칠 것이니, 조속히 제거해야 합니다."
석륵은 장빈의 말에 동의하여 진오와 싸우던 것을 그만두고, 군대를 돌려 유서의 걸활군을 격파하고 유서를 참수하였다. 왕미는 크게 기뻐하며 석륵을 깊이 신뢰하게 되었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석륵은 장빈에게 왕미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다시 의논하였으나, 장빈은
"영웅은 나란히 설 수 없습니다. 의당 속히 제거해야 합니다."
라며 왕미를 반드시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석륵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노구(魯口)에서 진오의 걸활군을 공격하였다. 이때 진오의 사마인 상당 사람 이두(李頭)가 석륵을 찾아가 말했다.
"공은 하늘의 신무(神武) 타고나서 마땅히 사해(四海)를 평정할 사람입니다. 사해의 사서(士庶)들이 모두 명공을 우러러보며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명공과 천하를 다툴 자가 따로 있거늘, 공께서는 이를 도모하지 않고 어찌하여 우리 유민 무리를 공격하십니까? 우리들은 언젠가 결국 공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왜 이리 급히 공격하십니까?"
석륵은 그의 말에 동의하고 다음날 철수하였다.

가평 원년(311년) 10월, 석륵이 계략을 꾸며 왕미에게 연회에 참석할 것을 청하자, 왕미는 석륵의 진영으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왕미의 장사 장숭(張嵩)이 간하며 말했다.
"석공(石公)의 말은 매우 비굴하고 달콤하여 믿을 수 없습니다. 원컨대 공께서 가지 않으시면 스스로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제(專諸)에게 암살당한 오왕 료나 손준에게 암살당한 제갈각과 같은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왕미는 이를 듣지 않고 말했다.
"석륵은 단지 일개 소인배에 불과하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나서 결국 연회에 참석하였다.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에 석륵은 직접 왕미를 참수하고, 그의 부하들을 병합하였다. 이후 석륵이 소무제 유총에게 왕미가 반역하였다 거짓으로 보고하니, 유총은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석륵을 꾸짖었다.
"공보(公輔)를 마음대로 해치우다니, 이는 임금를 무시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석륵이 배반할까 두려워, 진동대장군•병주자사•가절•정토도독교위(征討都督校尉)•개부•유주목 등의 직책을 유지시켰다. 그 후 구희와 왕찬이 몰래 석륵을 배반할 음모를 꾸몄으나, 이를 알아챈 석륵이 장수 좌복숙(左伏肅)을 전봉도위로 삼고, 양하를 다시 공격하여 왕찬을 주살하였다. 그리고 곧장 몽성으로 달려가 구희와 그의 동생 구순을 다시 사로잡고, 한 달 뒤에 그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2.4.3. 양국에 자리잡다

가평 원년(311년) 11월, 예주의 여러 군현을 공격하여 약탈한 후, 장강가까지 나아갔다가 갈파(葛陂)로 돌아가 주둔하였다.석륵은 많은 이들을 항복시키고, 이들 이민족과 초(楚) 지방의 장군들 중 2,000석 이하의 사람들을 따로 징발하여 군사들에게 군량미를 공급하게 하였다. 이후 진나라의 형양태수 이구를 공격하였으나, 이구의 반격을 받고 패하여 물러갔다.

초창기에 석륵이 노예가 되어 평원으로 팔려갈 때 어머니 왕씨와 헤어졌는데, 당시 병주자사 유곤이 왕씨를 거두어 보호하고 있었다. 유곤은 장사 장유(張儒)와 석륵의 사촌동생 석호를 석륵에게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전하였다.
장군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을 지니고, 용맹함과 지략을 자연스럽게 발휘하니, 난세 속에서도 우뚝 서서 힘을 떨치고 있소. 하삭(河朔)에서 시작하여 연예(兗豫)를 휩쓸고, 강회(江淮)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며, 한면(漢沔)에서 전투를 벌이니, 예로부터 이름난 장군들도 이에 비길 수 없을 것이오. 하나, 장군은 성을 공격하고도 그 백성을 가지지 못하였고, 땅을 점령하고도 그 토지를 차지하지 못하였으며, 백만의 군사를 모았으나 누구의 주인이 되지 못하였고, 단지 한데 모였다가 흩어지는 무리를 이루고 있을 따름이오. 장군이 어째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소? 이는 바로 주인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오. 주인을 잘 만나면 의로운 군사가 되고, 역적을 따르다 보면 도적 무리가 되는 법이오. 의로운 군사들은 비록 패배할지라도 결국 공을 세우게 되며, 도적 무리들은 비록 승리할지라도 결국 멸망하게 되오. 과거 적미황건적은 번성했지만 결국에는 몰락하였고, 장창과 이진(李辰)도 각각 형주, 예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지금은 모두 멸망하고 말았소. 이는 그들의 군대가 명분 없는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오.

지금 유총(劉聰) 부자는 용감한 재주도 없으면서 기회를 틈타 독을 퍼뜨리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소. 신(神)들이 이를 저주하고 있으며, 아버지를 죽이고 형제를 해치는 그들이 왕위를 훔쳐 차지하고 있으니, 예로부터 이보다 더한 불의가 어디 있겠소? 장군은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오. 유총을 따르는 폐단이 점점 드러나고 있어, 그 재산은 자신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명예와 지위도 지킬 수 없게 될 것이오. 이는 마치 아침 서리와 가을 이슬, 구름과 안개처럼 잠시 나타났다가 곧 사라지듯이 없어질 것이오. 지금 장군이 도적을 따르면서 백성의 주인이 되기를 바란다면 역시 어렵지 않겠소? 장군은 천성이 뛰어나고, 위세가 온 세상에 떨치고 있으니, 덕이 있는 이들로부터 추대를 받고, 시대의 요구에 맞추어 귀의한다면 공적과 의로움이 당당히 드러나고, 오래도록 높은 지위를 누리게 될 것이오. 따라서 유총을 배반하면 화가 사라지고, 임금을 따르면 복이 올 것이오.

지금 장군을 시중•지절•거기대장군•영 호흉노중랑장(領護匈奴中郎將)•양성군공(襄城郡公)으로 삼아 내외의 모든 직무를 총괄케 하고, 화융(華戎)의 호칭을 겸하게 하며, 큰 군(郡)을 봉지로 내려 장군의 특별한 재능을 드러내게 하겠소. 장군이 이를 받아들인다면,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 기대할 것이오. 예로부터 명신이 공을 세운 적은 있으나, 오랑캐가 제왕이 된 적은 없소. 하나, 지금의 혼란한 세상에서는 뛰어난 인재가 필요하오. 장군이 성채를 공격하고 들판에서 싸우면서 신묘한 기책을 펼친다면, 비록 병서를 보지 않았더라도 손자, 오자와 일치하는 것이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자'가 상위이고, '배워서 아는 자'가 차위인 것이니, 장군이 정예 기병 5,000기를 얻는다면, 그 재능으로 어느 곳을 향해 나아가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오. 나의 진심은 모두 장유를 통해 더 구체적으로 말하겠소.
유곤의 서신을 모두 읽은 석륵은 답신하여 말했다.
"공적은 서로 다른 길로 나아가니, 이는 부유(腐儒, 썩은 유학자)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오. 그대는 본조(本朝)를 위해 충성을 다하시오. 나는 스스로 역난을 평정하여 천하에 보답하리라."
그리고는 유곤에게 명마와 진귀한 보물을 보내고, 사자로 온 장유를 후히 대접하며 보낸 뒤에, 그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다. 이 해에 석륵은 옹주(雍州)를 설치하였다.

가평 2년(312년) 2월, 석륵이 갈파에 다시 거처를 마련해 군사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배를 건조하여 양주(揚州)의 건강을 공략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큰 비가 3월까지 계속 내렸고, 석륵의 군대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군사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 낭야왕 사마예는 여러 장군들을 호령하여 강남의 군대를 크게 모아 수춘에 집결시키고, 진동장군 장사 기첨을 양위장군•도독제군으로 삼아 석륵을 토벌케 하였다. 이때 석륵은 여음왕 사마희(熈)를 공격해 살해하였다.

가평 2년(312년) 3월, 낭야왕 사마예가 조정에 상소를 올리고, 사방에 석륵을 토벌하자는 격문을 뿌렸다. 석륵은 격문을 보고 장수들을 모아 의논할 때, 우장사 조응이 차라리 사마예에게 항복하여 허물을 씻고 하북을 평정하는 계획을 권하였으나, 그럴 마음이 전혀 없던 석륵은 속으로 근심하여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때 중견장군 기안이 석륵에게 높은 지대로 가서 물가를 피할 것을 권하자, 석륵이 마침내 입을 열어 말했다.
"장군은 왜이리 겁을 먹고 있는가?"
그러자 공장과 지웅 등 30여 명이 나서서 말했다.
"오(吳)의 군대가 아직 집결하기 전에, 저희가 각각 300명의 보병을 이끌고, 배 30여 척을 타고 밤에 수춘을 공격하여 오의 장수들의 머리를 베고 성을 점령하여 군량을 확보하겠습니다. 올해 안으로 단양(丹陽)을 정복하고 강남을 평정하여 사마씨 일족을 모두 생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석륵이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용맹한 장수의 계책이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각각 갑옷과 말 하나씩 하사한 뒤, 장빈을 돌아보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 이에 장빈이 답했다.
"장군께서는 이미 수도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천자를 사로잡았으며, 왕공들을 살해하고 비빈과 공주들을 유린했으니, 장군의 죄를 세는 데는 머리카락을 다 뽑아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진나라 조정에 귀순하여 몸을 바치라는 건 대체 무슨 말입니까? 작년에 왕미를 처단한 후로 이곳에서 주둔하고 있으나, 이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수백 리에 걸쳐 내린 장대비가 바로 장군이 이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신호입니다.

업성(鄴城)의 삼대(三臺)는 견고함을 갖추고 있으며, 서쪽으로 평양(平陽)과 접하고, 산과 강으로 사방이 막혀 있어 요새의 역할을 하니, 북쪽으로 이동하여 그곳을 점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반란을 진압하고 백성들을 안정시켜 하북을 경영하여 안정시킨다면 천하에 장군을 능가할 세력이 없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수춘(壽春)을 지키고 있는 것은 장군께서 그곳을 공격할까 두려워서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장군의 군대가 돌아가면 적이 떠난 것을 기뻐하며 자신들의 안전을 즐길 것입니다. 그들이 언제 우리를 뒤쫓아오리라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장군께서는 치중을 북쪽으로 먼저 보내고, 장군은 대군을 이끌고 수춘을 향하십시오. 그러다가 치중이 이미 멀어졌을 때, 대군도 천천히 돌아가면 됩니다. 진퇴의 땅이 없어지지 않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장빈의 계책을 들은 석륵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수염을 만지며 말했다.
"장군의 계책이 옳소."
그리고 조응을 돌아보며
"그대는 더불어 보좌하여 성공을 도모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이리도 졸속하게 나를 항복시키려 했느냐? 그대의 계책은 참형에 처해야 마땅하나, 평소 그대가 겁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특별히 용서하겠소."
라 하고, 조응을 장군직에서 파면시키고, 장빈을 우장사•중루장군 직책을 더하였다. 또, 이후로 장빈을 가리켜 "우후(右侯)"라 불렀다.

얼마 뒤, 석륵은 장빈의 계책을 그대로 시행하여 갈파에서 하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동시에 석호에게 2,000 기병을 주어 수춘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석호는 진격하던 도중에 진나라의 운송선을 만나 수십 석의 쌀과 수많은 비단을 노획하였다. 석호의 장수와 병졸들이 이를 다투어 차지하느라 적의 다음 공격을 대비하지 못했고, 이내 거령구(巨靈口)에서 기첨의 반격을 받아 패하였다. 물에 빠져 죽은 자가 500명에 달했고, 기첨은 패주하는 석호를 쫓아 100리를 나아갔다. 석륵의 군대는 기첨이 추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동요하였으나, 석륵이 침착하게 진영을 가지런히 세워 대기하자, 이를 본 기첨은 복병이 있을 것을 우려해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퇴각하여 수춘을 보위하였다.

가평 2년(312년) 6월, 석륵은 북쪽으로 이동하였으나, 길가는 곳곳마다 백성들이 견고한 방벽을 세우고, 식량을 철저히 숨겨두어 노획을 하지 못하였다. 결국 군대 내는 기아에 시달려 병사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석륵이 동연에 당도했을 때, 급군의 향빙(向冰)이 수천 명을 모아 방두에 보루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극진(棘津)에서 북쪽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향빙이 그 틈을 타고 습격할 것이 두려워 장수들을 모아 의논하였다. 장빈이 말했다.
"향빙의 배가 모두 도랑 안에 있고, 방두 안으로 올라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용맹한 병사 1,000명을 선발하여 비밀리에 건너가 그들의 배를 습격한 뒤에 대군을 건너게 해야 합니다. 대군이 건넌 후에는 향빙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석륵은 장빈의 계책을 채택하였다.

가평 2년(312년) 7월, 지웅과 공장이 문석진에서 뗏목을 묶고, 몰래 강을 건너가 향빙의 배를 탈취하였다. 석륵은 병력을 이끌고 산조(酸棗)로 달려가서 극진으로 이동해 강을 도하하였다. 향빙은 석륵의 군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제서야 배를 이동시키려 했으나, 지웅 등은 이미 건너가 그들의 군문 아래에 배 30여 척을 정박시켜 대군을 건너게 하였다. 석륵이 주부 선우풍(鮮于豐)에게 싸움을 걸도록 하고 복병을 두어 기다리니, 선우풍의 도발에 넘어가 분노한 향빙이 군대를 이끌고 뛰쳐나왔다. 이에 석륵은 일제히 복병을 일으켜 향빙을 덮쳤고, 크게 격파하여 그 물자를 탈취함으로써 다시 군세를 강화한 뒤, 이 여세를 몰아 업성까지 진격하였다.

당시 병주자사 유곤은 그의 조카인 북중랑장 유연(劉演)을 업구(鄴口)에 주둔시켜 지키게 하였는데, 석륵이 강을 건너는 것을 본 유연은 삼대로 이동해 굳게 방어하였다. 그러나 유연의 부장 임심(臨深)과 모목(牟穆) 등이 수만 명을 이끌고 석륵에게 투항하였다. 석륵이 장수들을 모아놓고 삼대를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에 대해 의논하니, 이번에도 장빈이 나서서 말했다.
"유연은 비록 나약하나, 그에게는 병력이 아직 수천 명이 있습니다. 또, 삼대는 험준하고 견고하여 급히 공격하더라도 쉽게 함락시키기 어렵지만, 놔두고 떠나면 그들은 자연히 자멸할 것입니다. 지금 왕팽조와 유월석(越石: 유곤의 字)만이 장군의 강력한 적입니다. 그들이 대비하기 전에 비밀리에 한성(罕城)을 점령하여 넓은 길로 식량을 운반하고, 서쪽으로 평양에 가서 병주와 기주를 평정한다면, 제환공과 진문공의 업적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천하는 혼란에 빠져 전쟁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장군께서 비록 정예 병력을 가지고 다니고 있으나, 정착하지 못하면 안정적으로 사방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땅을 얻는 자는 번영하고 땅을 잃는 자는 멸망하기 마련입니다. 한단(邯鄲)과 양국(襄國)은 조나라의 옛 수도로, 험준한 산맥에 의지할 수 있는 지형입니다. 이 두 읍 중 하나를 선택하여 수도로 삼은 후에 장수를 보내 사방으로 진격하고 계획을 펼쳐 나간다면, 흉악한 무리들을 제거하고 왕업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석륵은 또 장빈의 계책을 채택하고, 양국(襄國)을 점거하여 도읍으로 하였다. 이때 장빈이 다시 석륵에게 진언하였다.
"지금 우리가 여기를 도읍으로 정한 것을 왕팽조와 유월석이 매우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과 해자가 아직 견고하지 않고, 자원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두 적이 동시에 공격해 온다면 우리에게 큰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듣기로는 광평(廣平)의 여러 현에서 가을 수확이 크게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있으니, 여러 장수들을 보내 들판의 곡식을 수확하게 하고,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우리가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을 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륵은 동의하여 소무제 유총에게 표문을 올리고,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기주와 그 주변의 성읍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많은 성벽과 요새들이 항복하고, 곡물을 운반하여 양국으로 보냈다. 소무제 유총도 석륵을 사지절•산기상시•독기유병영4주잡이정토제군사(督冀幽并營四州雜夷征討諸軍事)•기주목으로 삼고, 상당군공(上黨郡公)으로 진봉시키니, 식읍이 50,000여 호에 달하였다. 또, 개부•유주목•동이교위 직책은 이전과 같게 하였다.

2.4.4. 유주의 왕준 정벌

가평 2년(312년) 12월, 광평의 유륜(游綸)과 장시(張豺)가 유주자사 왕준의 명령을 받아 수만 병력을 이끌고 원향(苑鄉)을 지켰다. 석륵은 기안, 지웅 등 7명의 장수를 보내 그 외성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왕준은 독호 왕창(王昌), 중산(中山) 태수 완표(阮豹), 단부의 요서공 단무물진의 세자 단질육권과 그 동생 단필제, 단문앙, 단문앙의 사촌동생 단말배로 하여금 50,000 군사로 석륵의 양국을 공격케 하였다.

당시 양국의 성벽이 아직 완벽히 수리되지 않았던지라, 석륵은 양국에 격성(隔城)을 축조하고, 이중 목책을 두어 방어하였다. 석륵은 저양(渚陽)에 주둔해있는 단질육권에게 여러 장수를 보내 공격하였으나, 모두 단질육권에게 패하고 돌아왔다. 석륵은 다시 남양으로 들어가서 군사를 모으고 양국으로 돌아왔으나, 이때 즈음에 단질육권이 공성 장비들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무척 두려워하여 장수들을 모아 의논하며 말했다.
"지금 성벽과 해자가 견고하지 않고, 양식이 충분하지 않으니 적이 오면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장수를 선발하여 대군을 지휘하게 하고, 야전에서 결판을 내야만 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장수들은 석륵의 제안에 반대하며, 농성으로 적을 지치게 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장빈과 공장만이 석륵의 의견에 동의하며 말했다.
"듣기로는 이번 달 초에 단질육권 북성(北城)을 공격한다 합니다. 적은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멀리서 와서 싸우려 하지만 우리 군의 병력이 약하여 제대로 출전하지 못하였으니, 적군의 의지는 반드시 해이해져 있을 것입니다. 지금 선비족의 단부가 가장 용맹하고 강하며, 단말부는 더욱 그러하여 모든 정예가 그의 휘하에 몰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출전하지 말고 약한 모습을 보이다가, 북쪽 성루에 20여 개의 돌파구를 빠르게 뚫으십시오. 적이 미처 진영을 정비하지 못했을 때 기습하여 적의 본진으로 돌격한다면, 적군은 반드시 당황하여 대처하지 못할 것이니, 이른바 번개와 같은 속도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말부가 도망가면 나머지 적군은 스스로 흩어질 것이니, 단말부를 잡은 후에는 왕팽조 역시 쉽게 평정할 수 있습니다."
석륵은 장빈과 공장의 말을 듣고 웃으면서 적과 전면전을 벌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공장을 공전도독(攻戰都督)으로 삼아 북성에서 돌파구를 뚫게 하였다.

단질육권이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석륵은 직접 성벽 위로 올라 적군의 진영을 내려다보았다. 이때 석륵은 몇몇 적의 장수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조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공장을 출격시켜 돌파구를 뚫고 나가도록 하였다. 석륵은 성 위에서 북을 울려 공장의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았고, 공장은 해이해져 있는 단부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단말배가 보루 문턱에서 공장의 병사들에게 붙들리자, 단질육권은 군대를 뒤로 물려 달아났다. 공장이 이를 추격하니, 단부군의 시체가 30리에 걸쳐서 드리웠고, 공장은 개마(鎧馬) 5,000여 필을 노획한 뒤 돌아왔다. 단질육권은 패잔병을 수습해 다시 저양에 주둔하였다.

석륵은 단말배를 인질로 잡고, 단질육권에게 사자를 보내 단부와 화친하기를 청하였다. 단질육권이 그 청을 수락하려 하자, 단문앙이 간하였다.
"지금 단말배 한 사람 때문에 거의 멸망할 위기에 처한 적을 풀어준다면, 왕팽조(王彭祖)의 원한을 사게 될 것이고, 후에 저들은 걱정거리가 될 것이니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단질육권은 이를 따르지 않고, 갑옷과 말 250필, 금과 은 각 한 상자와 단말배의 세 동생을 인질로 보내면서 단말배를 돌려달라고 간청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석륵에게 단말배를 죽여 적의 사기를 꺾자 주장하자, 석륵이 말했다.
"아니 된다. 요서(遼西)의 선비족은 강대한 국가이나, 우리와 원한이 없고 단지 왕준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지금 한 사람을 죽여 한 나라와 원한을 맺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또, 단말배를 돌려보내면 반드시 우리에게 깊은 은혜를 느껴 다시는 왕준의 부하로 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후에 단말배를 돌려보내기로 약속하고, 비단과 말을 답례품으로 선물하였다. 또, 석호를 보내 저양에서 단질육권과 의형제를 맹세케 하였다. 거래를 마친 단질육권이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자, 왕창 등은 그 군사만으로 석륵과 싸울 수 없어, 역시 군대를 이끌고 계(薊)로 돌아갔다. 이후 석륵은 단말배를 연회에 초대하여 회포를 풀고, 그와 더불어 부자(父子)의 맹세를 하였으며, 그를 안북장군•북평공(北平公)으로 삼은 뒤에 약속대로 요서로 돌려보냈다. 이로써 단부가 석륵에게 온 마음을 다해 귀부하니, 왕준의 세력은 크게 쇠퇴하였다.

석륵은 곧바로 유주를 공략하려 하다가, 당장은 장수들을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판단해 신도(信都)를 공격하고, 왕준이 멋대로 임명한 기주자사 왕상(王象)을 죽였다. 왕준은 다시 소거(邵舉)를 기주자사로 삼아 신도로 보내고, 일전에 한나라의 용장인 기주자사 유령을 격파하여 기세를 드높인 전적이 있던 천수장군 기홍을 보내 석륵을 토벌케 하였다. 그러나 기홍은 하필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에 광종(廣宗)을 지나다가 안개 속에서 갑자기 등장한 석륵의 군대의 습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석륵은 참군 염종(閻宗)을 평양으로 보내 소무제 유총에게 승리를 보고하고, 왕술(王述)을 각비성(角飛城)으로 보내 소금을 굽게 하였다.

가평 3년(313년) 4월, 석호를 보내 삼대를 공격하여 마침내 업성을 함락시키니, 삼대의 유민군 장수 사서(謝胥), 전청(田青), 낭목(郎牧)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석륵에게 항복하였고, 석륵은 도표를 위군태수로 삼아 이들을 안정시키게 하였다. 업을 지키던 북중랑장 유연은 늠구(廩丘)로 도망쳤고, 병주자사 유곤은 유연을 연주자사로 삼아 늠구를 그대로 지키게 하였다. 이후 석륵은 원향을 다시 공격해 유륜과 장시를 사로잡았고, 유륜의 투항을 받아주어 주부로 삼았다.

예전에 광종으로 도망쳤던 이혼이 왕준에 의해 용양장군•청주자사에 임명되어 상백(上白)에서 걸활군과 함꼐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석륵은 이혼을 공격해 패사시키고, 항복한 병사들을 구덩이에 묻으려 하였으나, 이들 중에 옛 은인인 곽경을 알아보고 그를 상장군으로 삼은 뒤, 항복한 병사들을 모두 사면하여 풀어주었다. 왕준은 다시 오환족 박성(薄盛)을 청주자사로 삼고, 조숭(棗嵩)으로 하여금 여러 군대를 감독하여 역수(易水)에 주둔케 하였다.

가평 3년(313년) 5월, 석륵이 정릉(定陵)을 공격하여 왕준이 임명한 연주자사 전휘(田徽)와 청주자사 박성을 죽이고, 발해(渤海) 태수 유기(劉既)를 사로잡았다. 이에 유기의 무리 5,000여 호가 석륵에게 투항하면서 산동의 군현들이 점차 석륵에게 넘어갔다. 소무제 유총은 석륵을 시중•정동대장군으로 삼고, 나머지 관작은 이전과 같게 하였다. 오환족들도 박성이 격파당하는 것을 보고 몰래 왕준을 배반해 석륵에게 붙었다. 어느정도 권세를 얻은 석륵은 어머니 왕씨를 상당국태부인(上黨國太夫人), 처 유씨(劉氏)를 상당국부인(上黨國夫人)으로 삼고, 문장과 장신구를 왕비와 같은 수준으로 꾸미게 하였다. 이때부터 석륵의 찬탈할 마음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인질로 잡혀있던 단말배의 동생 하나가 석륵으로부터 벗어나 요서로 돌아가자, 석륵은 크게 노하여 지나가는 곳마다 현령과 도위를 닥치는대로 살해함으로써 분풀이를 하였다. 이때 오환족의 심광(審廣), 점상(漸裳), 학습(郝襲) 등이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 왕준을 배신하고 석륵과 함께하기를 청하니, 석륵은 그들을 두터이 예우하고 위무하였다. 사주, 기주 일대에 거주하던 오환족 점녕(漸寧)의 사람들은 처음으로 조세를 내게 되었고, 태학(太學)에서 글공부를 배웠다. 또, 석륵은 경서에 밝고 글을 잘 쓰는 관리들을 문학연(文學掾)으로 삼아 장수와 관리들의 자제 300명을 선발해 가르치게 하였다.

가평 3년(313년) 11월, 사공•유주자사 왕준의 아버지가 자가 "처도(處道)"였기에, 왕준은 자신이 응당 도고(塗髙)의 참언에 부합하는 자라 자신하며 칭제할 계획을 세웠다. 전(前) 발해태수 유량(劉亮), 북해(北海) 태수 왕단(王摶), 사공 연 고유(髙柔)가 강력히 간하였으나, 왕준은 이들을 모두 숙청하였다. 또, 지조가 높고 청렴하기로 유명한 연국(燕國)의 은사 곽원이 부름에 응하지 않자, 그를 체포해 죽임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잃었다. 그럼에도 왕준은 더욱 교만해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그가 임명한 사람들은 모두 가혹하고 소인배들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조숭과 주석(朱碩)은 특히 탐욕스럽고 포악하였다. 왕준은 초기에 단부와 오환족의 힘을 빌어 북방에서 강력한 세력을 떨쳤지만, 이제 그들이 모두 배반한데다 가뭄과 황충이 연거푸 발생하여 군세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석륵은 왕준을 습격하려 했으나, 그 허실을 알지 못해 사자를 파견해 정탐하려 하였다. 그때 석륵의 참모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하길,
"양호육항의 고사를 본받아 편지를 보내 서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라 하였다. 석륵이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장빈을 찾아가 이에 대해 의논하니, 장빈이 답했다.
"왕준은 삼부(三部)의 힘을 빌려 남면(南面)하며 비록 진나라의 제후라 하지만, 실제로는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는 반드시 천하의 영웅들을 모아 대업을 이루려 할 것이나, 장군의 위엄과 명성이 해내(海內)를 떨치시니, 떠나는 것은 존망을 결정하고, 남는 것은 경중(輕重)을 좌우합니다. 왕준이 장군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한신을 초청하던 항우의 마음과 같습니다. 지금 장군의 위엄과 권세를 이용하여, 거짓으로 사자를 보내어 성의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만약의 의심이 생겼을 때 도모하는 바가 드러나게 되어 나중에 제아무리 기묘한 계략을 세워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큰일을 이루는 자는 반드시 먼저 자신을 낮추어야 법입니다. 설령 제후로 칭하고 받들어도 서신만 주고받는다면 양호와 육항의 일처럼 신뢰를 얻을 수 없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석륵은 장빈의 말에 동의하였다.

가평 3년(313년) 12월, 석륵은 시종 왕자춘(王子春), 동필(董筆) 등을 사신으로 보내, 많은 보배를 가지고 가 왕준에게 바치면서 거짓되고 겸손한 말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전달케 하였다.
이 석륵은 본래 작은 호(胡)로, 융(戎)의 후예에서 나왔습니다. 진나라의 기강이 느슨해지고, 해내(海內)가 기근과 혼란으로 고통받아 유랑하는 와중에 기주(冀州)로 피신하여 서로 모여 우연히 이름을 구하였습니다. 지금 진나라의 왕조는 멸망하여 오회(吳會)까지 멀리 퍼졌고, 중원(中原)에는 주인이 없으며,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오직 명공(明公)께서 제왕이 되는 것 뿐입니다. 제왕이 될 사람이 천하에 공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이 석륵이 몸과 목숨을 버리고 의병을 일으켜 폭란을 토벌한 것은 바로 오늘날의 명공을 위해서입니다. 원컨대 명공께서는 하늘의 뜻을 받들고 백성의 소망에 따라 황제로 등극하십시오. 이 석륵은 명공을 천지의 부모처럼 받들겠습니다. 명공께서 석륵의 미미한 마음을 살펴주시기를 바라며, 또 자식처럼 사랑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또, 상서 조숭에게도 많은 뇌물과 아부하는 서신을 보냈다. 왕준은 많은 백성들이 자신을 떠난 상황에서 그 석륵이 자신에게 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왕자춘에게 물었다.
"석공(石公)은 당대의 영웅으로 조나라의 옛 수도를 차지하여 삼각의 형세를 이루었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제후로 칭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믿어도 되겠는가?"
왕자춘이 답했다.
"석 장군(石將軍)은 출중한 영재로 병사와 말이 강성하며, 실로 성지(聖旨)와 같습니다. 명공은 중주(中州)에서 귀하게 여겨져 여러 세대를 거쳐 명성이 빛납니다. 출진(出鎮)하시어 변방을 다스리시면서 그 위엄을 팔표(八表)에 떨치시는 고로, 호월(胡越)도 그의 풍모를 존경하고, 융이(戎夷)도 그 덕을 찬양합니다. 이러할진대 어찌 작은 관청에서 감히 예를 갖추지 않겠습니까? 과거 진영(陳嬰)이 왕을 멸시하는 바람에 왕이 되지 못했고, 한신이 황제를 경시하는 바람에 황제가 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제왕은 지혜와 힘으로 다투어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석 장군을 명공과 비교하는 것은 마치 음정(陰精)이 태양(太陽)과 비교되는 것과 같고, 강과 하천이 큰 바다와 비교되는 것과 같습니다.

항우와 자양(子陽)이 뒤집힌 마차를 덮치지 않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는 석 장군의 명철함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명공은 어찌하여 이를 이상하게 여기십니까? 또한 세족(世族)으로 보좌하는 명신(名臣)은 있었어도, 아직까지 제왕이 된 자는 없습니다. 석 장군이 제왕이 되기를 싫어해서 명공께 양보한 것이 아니라, 제왕은 그 자체에 역사적인 순서가 있어서 지혜와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후를 칭한 것입니다. 비록 억지로 차지한다 해도 하늘과 백성이 이를 허락하지 않을 터이니, 명공께서는 석 장군의 의도를 의심치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에 왕준은 더욱 기뻐하며, 사자로 온 왕자춘 등을 모두 열후(列侯)로 봉하고, 석륵에게 사자를 보내어 방물(方物)을 선물함으로써 회답하였다. 이때 왕준의 사마 유통(游統)이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석륵에게 사자를 보내 은밀히 투항을 청하였는데, 석륵은 오히려 그 사자를 참수하여 왕준에게 보내 자신의 신실함을 보였다. 왕준은 비록 유통에게 죄를 묻지 않았으나, 석륵은 더욱 신뢰하여 경계하지 않았다.

가평 4년(314년) 정월 22일[9], 왕자춘 등이 왕준의 사자들과 함께 양국에 이르렀다. 석륵은 정예병을 숨기고, 허술한 장비와 약한 군사들로 그들을 맞이하여 북쪽을 향해 절하고 왕준의 편지를 받았다. 석륵은 겉으로 왕준이 보내준 진귀한 물건들을 함부로 손에 쥐지 못하는 척하면서 벽에 걸어두고, 그것들을 향해 아침저녁으로 절하며
"내가 왕공(王公)을 직접 뵙지 못하였으나, 왕공께서 보내주신 물건을 보는 것이 곧 왕공을 뵙는 것과 같습니다."
라는 말을 하였다. 이후 석륵은 왕준의 사자들을 돌려보낼 때, 다시 동필을 보내 왕준에게 3월 중순에 직접 찾아가 황제로 추대할 것을 기약하는 표문을 올리게 하였다. 또한, 조숭에게 편지를 보내 병주목과 광평공(廣平公) 관작을 구걸하며 자신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였다.

왕준의 사신들이 모두 떠나자, 석륵은 왕준을 도모할 마음을 품고, 왕자춘을 불러 정탐 결과를 물었다. 이에 왕자춘이 답했다.
"유주는 지난해 큰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먹을 식량이 없었습니다. 왕준은 창고에 100만 섬의 곡식을 쌓아두었지만 구제하지 않았으며, 형벌과 정치가 가혹하고, 세금과 부역이 번거롭습니다. 도적들은 어진 사람들을 해치고, 왕준은 간언하는 사람들을 죽였으며, 백성들은 명령을 견디지 못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선비족과 오환족은 외부로 이탈하였고, 조숭과 전교(田矯)는 내부에서 탐욕스럽고 포악하게 굴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동요하고, 갑옷을 입은 군사들은 모두 지쳐 있습니다. 그러나 왕준은 여전히 대궐을 세우고, 백관을 설치하며, 자신을 한 고조와 위 무왕과 비교하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주의 이상한 노래들이 널리 퍼졌는데, 매우 심각하여 듣는 자들을 모두 섬뜩하게 합니다. 왕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멸망이 머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이를 들은 석륵이 책상을 두드리며 크게 웃고는 말했다.
"왕팽조를 정말로 잡을 수 있겠구나!"
한편, 왕준의 사자들이 유주로 돌아가 석륵의 상황을 보고하면서 석륵의 병사들이 매우 약하다고만 설명하니, 왕준은 매우 기뻐하며 석륵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교만해져서 아예 대비조차 않았다.

가평 4년(314년) 2월, 석륵이 왕준을 습격할 기일을 정하였으나, 혹시나 오환족이나 선비족 단부가 다시 마음을 돌려 왕준을 도울까 걱정해 망설이며 출발하지 않았다. 이에 장빈이 나아가 말했다.
"대장부가 적국을 습격할 때는 상대방이 예상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군사가 이미 준비된 지 오래인데도 출발하지 않는 것은 세 가지 방면의 우환을 걱정해서입니까?"
석륵이 시인하고 어찌해야 할지에 대해 묻자, 장빈이 답했다.
"왕준이 유주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세 부대(선비족, 오환족, 왕준 자신의 군대)에 의지한 덕분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 모두 배반하여 적이 되었습니다. 이는 외부에 우리와 대항할 지원군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유주는 기근이 심하여 사람들이 모두 채소만 먹으며 살아갑니다. 백성들은 배반하고, 가까운 이들도 떠나고 있으며, 군사들은 매우 약해졌습니다. 이는 내부에도 강한 병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세 방면에서 용맹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장군보다 못합니다. 만약 장군의 대군이 교외에 도착하면 그들은 반드시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부서지듯이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세 방면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그들은 장군께서 군대를 이끌고 천 리를 가서 유주를 점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무장한 군사를 이용한다면 분명 왕복 20일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설령 세 방면에서 움직임이 있어도 발을 돌려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유곤과 왕준은 비록 같은 진나라의 번신(藩臣)이어도 실제로는 적대관계라, 유곤에게 편지를 보내 화평을 청하면 유곤은 기뻐하면서 받아들이는 동시에, 왕준이 망하는 것을 쾌히 여길 것입니다. 유곤은 결코 왕준을 구하지 않을 것이고, 아울러 우리를 습격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군사를 사용할 때는 신속함이 중요하니 시간을 지체하지 마십시오."
장빈의 답변에 석륵이 감탄하며 말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우후가 깨달았으니, 내 더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이리하여 석륵은 경기병을 이끌고 유주로 향하였다. 밤에는 불을 밝혀 밤낮으로 행군한 끝에 백인(柏人)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주부 유륜을 죽여 그가 범양에 있는 그의 형 유통에게 정보를 누설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그리고 장려(張慮)를 사신으로 유곤에게 보내어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왕준을 토벌하겠다고 하였다. 유곤은 본래 왕준을 미워했으므로, 석륵의 전언을 받고 크게 기뻐하며, 주와 군에 격문을 돌려 석륵이 왕준을 공격할 동안에 대공 탁발의로와 함께 한나라의 수도 평양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가평 4년(314년) 3월, 석륵의 군대가 역수에 이르렀다. 왕준의 도호 손위(孫緯)가 이를 보고 의심하여, 왕준에게 달려가 보고하면서 당장 군대를 이끌고 석륵을 막아야 한다 주장하였지만, 유통이 반대하였다. 왕준은 손위의 말을 듣지 않고, 석륵이 계성 바로 앞까지 오는 허하였다. 이에 왕준의 모든 장수들이 나아가 말했다.
"석륵은 탐욕스럽고 신의가 없으니, 반드시 속임수가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나가서 공격해야 합니다."
그러자 왕준은 도리어 화를 내며 장수들을 꾸짖었다.
"석공(石公)이 오는 것은 오로지 나를 추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감히 공격하자고 말하는 자는 참하겠다!"
그리고는 간언을 금지시킨 후, 석륵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3월 3일[10], 석륵이 아침에 계성에 도착하여 문지기에게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석륵은 혹시라도 왕준이 복병을 두었을 것을 우려하여 수천 마리의 소와 양을 앞장세워, 마치 의식을 올리는 것처럼 꾸미고 성 안으로 진입하였다. 이로 인해 성 내의 거리와 골목이 가축들로 가득 메워져 왕준의 병사들이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가축들의 뒤를 따라들어온 석륵은 이내 병사들을 풀어 계성을 대대적으로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왕준의 부하들은 석륵에게 그만두라는 명령을 내려줄 것을 왕준에게 청하였으나, 왕준은 그저 이 모든 것을 지켜만 볼 뿐 석륵을 막는 것을 불허하였다. 석륵이 마침내 관청으로 들어가 청사를 오르자, 그제서야 왕준은 무언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당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석륵의 병사들이 그를 붙잡아, 왕준의 부인과 나란히 석륵 앞에 대령하였다. 왕준은 분노하여 석륵을 바라보고 꾸짖었다.
"막되먹은 오랑캐놈이 여공(汝公)을 기만하다니, 어찌 이런 흉역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느냐!"
이에 서광이 석륵 대신 답했다.
"그대는 관직이 매우 높고, 작위는 상공(上公)에 이르렀으며, 유주라는 강대한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그 세력이 돌기병의 고장인 연(燕) 땅 전체에 미쳐 강건한 병사를 수중에 두고 있었다. 하나, 그대는 나라의 경사(京師)가 위태로울 때에도 천자를 구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존호를 올릴 음모를 꾸몄다. 또, 지역을 통치하면서 음란하고 포악한 짓을 마다하지 않아 충량한 이들을 살해하였고,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었으니, 그 독이 연 땅에 가득 메웠다. 그대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결코 하늘이 꾸며낸 우연이 아니다."
석륵은 장수 왕낙생에게 명해 왕준을 양국으로 호송케 하였는데, 도중에 왕준은 물에 투신하여 자살을 시도했지만, 곧 붙잡혀 끌려 나왔다. 석륵은 왕준의 정예병 10,000여 명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왕준이 세워둔 궁전을 불태운 후, 계에 이틀 가량 머무렀다.

석륵이 계성에 머무를 때, 주석, 조숭, 전교 등 왕준을 섬기던 참모와 장수들이 서로 앞다투어 석륵의 군문 앞으로 나아가, 각자 뇌물을 바치며 사죄를 올렸다. 하지만 석륵은 쓸만한 인재만 골라 배헌과 순작을 예우하고, 나머지 주석, 조숭, 전교 등은 정치를 어지럽혀 유주에 해악을 끼쳤다는 죄, 유통은 불충하다는 죄를 들어 모두 처형하였다. 이후 오환족 심광, 점상, 학습, 근시(靳市) 등을 양국으로 옮기게 하고, 서진의 전(前) 상서 유한(劉翰)을 녕삭장군•유주자사로 삼아 계를 진수케 하였다. 그러나 유한은 얼마 안 가, 오랑캐인 석륵을 따르길 싫어하여 단부의 단필제에게로 도망쳤고, 단부는 그대로 계성을 접수하였다.

석륵이 양국으로 돌아갈 때, 왕준의 독호 손위가 군대를 이끌고 역수에서 석륵을 습격하여 암살을 시도하였다. 석륵이 겨우 빠져나와 도망에 성공하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석륵은 양국에 도착한 후, 왕준을 시장에서 공개처형하였는데, 왕준은 죽기 직전까지 굴하지 않고 석륵을 향해 크게 욕하다가 참수당했다. 석륵은 왕준의 수급을 평양으로 보내 소무제 유총에게 바쳤고, 유총은 사자를 파견해 유주를 평정한 공로를 치하하며, 그를 대도독•독섬동제군사(督陜東諸軍事)•표기대장군•동선우(東單于)•사지절•개부•교위를 더하였다. 또, 금정(金鉦)과 황월(黃鉞), 전후고취(前後鼓吹) 2부를 하사하고, 봉지를 12군으로 늘려 책봉하였다. 석륵은 봉지는 두 군만 받고, 나머지는 사양하였다. 이후 석륵은 좌장사 장경 등 11명을 백작, 자작, 후작으로 봉하였고, 문무관원들의 직위를 승진시켰다.

가평 4년(314년) 4월, 양국에 대기근이 들어 곡식 두 섬이 은 한 근, 고기 한 근이 은 한 냥 값을 하였다.

가평 4년(314년) 9월, 지웅이 서진의 연주자사 유연을 습격하였다가 오히려 패주하였다. 유연은 그 기세를 몰아 장수 한홍(韓弘)과 반량(潘良)을 보내 돈구를 습격해 이기고, 석륵이 임명한 돈구태수 소반(邵攀)을 참수하였다. 지웅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하여, 회군하던 한홍 등을 습격해 늠구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한홍을 전사시켰다.

가평 4년(314년) 10월, 유곤이 낙평태수 초구(焦球)를 파견해 석륵이 임명한 상산태수 형태(邢泰)를 격파하고, 그를 붙잡아 참수하였다. 유곤의 사마 온교가 서쪽의 산호(山胡)를 토벌하러 출병하자, 석륵은 장수 녹명을 보내 이를 요격하고, 노성(潞城)에서 온교를 격퇴하였다. 석륵은 유주와 기주 대부분을 평정한 후, 주와 군에 명하여 인구를 조사케 하였고, 각 가구마다 비단 두 필과 곡식 두 섬을 내도록 하였다. 일전에 석륵에게 투항했던 걸활군의 진오가 배반하여 준의(浚儀)에서 거병하자, 마침 치평에서 군벌 영흑(寧黑)의 항복을 받아낸 녹명은 나아가 동연에서 진오와 싸워 그를 격파하였다. 진오는 패하여 도망치고, 녹명은 진오의 무리 20,000여 호를 인솔해 양국으로 귀환하였다.

건원 원년(315년) 3월, 당시 조억은 청주 장악에 성공하고 100,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석륵은 조억을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을 꺼려 소무제 유총에게 조억 토벌을 상주하였으나 유총이 불허하였다.

건원 원년(315년) 7월, 장수 갈박(葛薄)을 보내 복양(濮陽)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서진의 복양태수 한홍을 죽였다.

건원 원년(315년) 9월, 소무제 유총이 대홍려 범감(范龕)을 파견해 석륵에게 활과 화살을 하사하며 섬동백(陝東伯)으로 진봉시켜주고, 전쟁을 자주적으로 결정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또, 자사(刺史)와 장군, 수재(守宰), 열후(列侯) 등의 직위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도 주었고, 매년 말이 되면 이들을 모아 직위를 내리도록 하였다. 석륵은 장남 석흥(石興)을 상당국세자로 삼고, 익군장군으로 임명해 표기장군을 보좌케 하였다. 이때 석륵이 장수 왕단(王旦)을 보내 중산을 공격하고, 석륵이 임명한 태수 진고(秦固)를 쫓아내자, 석륵은 장수 유면(劉勔)을 보내 왕단을 격파하고 망도관(望都闗)에서 그를 사로잡았다.

2.4.5. 소속의 항전

건원 2년(316년) 4월, 과거 왕준이 임명한 기주자사•수절장군 소속을 습격해 낙릉을 포위하였다. 소속은 성 안에 있는 모든 군사를 이끌고 역으로 석륵의 진영을 쳤으나, 패하여 다시 성으로 도망치고 궁핍한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아들 소예(邵乂)를 인질로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석륵은 소속의 항복을 받아주고 소예를 도호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속이 발해태수 유윤의 말을 따라 강동에서 할거하고 있는 낭야왕 사마예에게 귀순하고, 반대하는 자들을 모두 죽인 뒤에 석륵에게 반기를 들었다. 석륙은 이 소식을 듣고 대로하여 소예를 죽이고, 친히 8,000 기병을 거느려 소속을 포위하였다. 소속은 두려워 단부의 단필제에게 구원을 청하였고, 단필제가 아우 단문앙을 보내 이를 구원하니, 석륵은 일단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후퇴하였다. 소속과 단문앙은 석륵을 추격해 안릉(安陵)까지 갔으나, 결국 따라잡지 못하고 석륵이 임명한 관리들을 포로로 잡아 3,000여 호와 더불어 끌고 갔다. 또, 소속은 석륵이 지배하는 영역의 북쪽 변경을 침구하여 상산의 2,000여호를 빼앗아 돌아갔고, 석륵은 크게 패하여 양국으로 귀환하였다.

석륵이 소속에게 패하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여러 세력들도 덩달아 석륵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장무(章武) 사람 왕권(王眷)은 거병하여 과두루(科斗壘)를 점거하고 하간(河間), 발해 등 여러 군을 교란하였으며, 남화현(南和縣)령 조령(趙領) 등도 광천(廣川), 발해의 1,000여 호를 들고 석륵을 배반하였다. 석륵은 하간태수 참군 임심(臨深)을 발해태수로 삼고, 그와 양무장군 장이(張夷)에게 각기 보•기 3,000명씩 주어 이를 진압하게 하였다. 또, 장락태수 정하(程遐)에게 명해 창정(昌亭)에 주둔토록 하고, 유사시에 토벌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평원의 오환족 전광(展廣), 유다(劉哆) 등의 부락 30,000여 호를 양국으로 이주시켜 관리하였다.

석륵이 석호를 보내 걸활군의 왕평(王平)을 공격했으나, 석호가 양성(梁城)에서 왕평에게 패하고 돌아왔다.

2.4.6. 병주의 유곤 토벌

건원 2년(316년) 5월, 연주자사 유연은 유곤의 명령에 따라 용사 1,000여 명으로 늠구에 주둔하고 있었다. 석륵은 군대를 이끌고 유연을 쳤으나, 유연이 이를 물리쳤고 석륵은 패하여 돌아갔다. 한편, 지웅과 녹명은 동무양에서 군벌 영흑을 대파하였고, 궁지에 몰린 영흑은 강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석륵은 영흑의 무리 10,000여 호를 거두어 양국으로 이주시켰다.

석륵이 다시 석호를 보내 늠구의 유연을 포위케 하였다. 소속이 유연의 구원 요청을 받고 단문앙을 보내 구원하니, 석호는 노관진(盧闗津)으로 퇴각하였다. 하지만 단문앙이 경정(景亭)에서 길이 막혀 늠구를 구원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연주, 예주 일대에서 장평(張平) 등의 호족들이 거병해 유연을 구원하자, 석호는 복병을 몰래 두고, 군영을 버린 채 황급히 도망치는 척하였다. 장평 등이 석호가 도망친 줄로만 알고 석호의 군영 안으로 진입하였을 때, 석호는 복병을 일으켜 장평 등을 덮쳐 전멸시켰다. 결국, 늠구는 얼마 안 가 석호에게 함락되었고, 유연은 경정에 있는 단문앙의 군대로 도망쳤다. 석호는 유연의 동생 유계(劉啟)와 그의 어머니를 사로잡아 양국으로 압송하였고, 석륵은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위무하여 저택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유계에게 명해 태학에서 관리들에게 유교를 가르치게 하였다.

건원 2년(316년) 6월, 거대한 무리의 메뚜기떼가 발생해 들판에 자란 풀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건원 2년(316년) 7월, 평양과 하동에서 또다시 엄청난 무리의 메뚜기떼가 발생하였고, 특히 중산과 상산의 피해가 심각하였다. 이 와중에 중산에서 정령족 적서(翟鼠)가 반란하여 상산을 공격하니, 석륵은 직접 기병을 거느리고 적서를 토벌한 뒤, 적서의 어머니와 아내를 사로잡고 돌아왔다. 적서는 자서관(子胥闗)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지키다가 대군(代郡)으로 달아났다.

당시 메뚜기떼로 인해 한나라의 수도 평양의 백성들 절반 이상이 굶어죽었고, 많은 수의 유민이 발생하였다. 이에 석륵이 장수 석월(石越)과 기병 20,000기를 병주에 주둔시켜 200,000여 호의 유민 무리를 거두어가니, 소무제 유총이 서신으로 석륵을 꾸짖었다. 그러나 석륵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억과 은밀히 손을 잡아 독립할 마음을 품었다.

건원 2년(316년) 10월, 석륵이 군대를 거느리고 서진의 낙평태수 한거(韓據)가 수비하고 있는 점성(坫城)을 공격하였다. 한거가 병주자사 유곤에게 구원을 청하자, 유곤은 마침 병사들이 집결한 참이라 곧바로 나아가 석륵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그때 유곤의 장수 희담(姬澹)과 위웅(衛雄)이 만류하며 말했다.
"이들은 비록 진(晉)나라 백성이지만 오랫동안 다른 지역에 속해 있어, 아직 명공(明公)의 위신(威信)에 익숙하지 않아 군법으로도 통솔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내부적으로 선비족으로부터 잉여 곡식을 받아서 모으고, 외부적으로는 호적(胡賊)의 소와 양을 약탈하며, 관문을 닫고 험한 지형을 지켜, 농사에 힘쓰고 군사를 쉬게 하여, 그들이 덕과 의리에 감화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 후에 무력을 사용하신다면 공을 세우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곤은 따르지 않고, 모든 병력을 동원해 석륵 토벌에 나섰다. 희담은 보•기 20,000명으로 선봉에 세우고, 자신은 광목(廣牧)에 주둔하여 희담을 성원하였다.

석륵이 희담이 오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바로 맞서려 하니, 한 측근이 말리며 말했다.
" 희담의 병사와 말은는 정예로, 그 기세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지금은 그 병사를 피하고, 깊은 해자를 파서 그들의 예기를 꺾어야 합니다. 공격과 수비의 상황은 다르므로 이 방법이 안전합니다."
이에 석륵이 반박했다.
"희담의 대군는 멀리서 와서 지친 상태이며,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한 번의 전투만으로도 그들을 잡을 수 있다. 적이 눈앞에 있는데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대군이 한번 움직이면 쉽게 중도에 돌아올 수 법이니, 만약 우리가 퇴각할 때 기담이 추격하면, 도망치느라 바빠 깊은 해자를 파는 건 불가능하다. 이는 곧 싸우지도 않고 자멸하는 길이니라."
그리고는 반대하는 자들을 모두 처형한 뒤, 공장을 선봉으로 삼아 3군 중 감히 후퇴하는 자는 즉결 처형하라 명하였다.

석륵은 요지를 선점하고, 산 위에 앞뒤로 두 갈래의 복병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경기병을 보내 희담과 싸우다가 짐짓 패한 척하며 군사를 북쪽으로 물리자, 희담은 군사들을 풀어 이를 추격하게 하였다. 희담이 매복 지대 안으로 들어왔을 때, 석륵은 모든 복병을 일으켜 희담의 군대 전후로 일제히 공격하였고, 희담은 대패하여 1,000여 기병만 이끌고 대군(代郡)으로 도주하였다. 석륵은 적군의 갑옷을 많이 빼앗았고, 말 10,000마리를 얻었다. 한거는 싸울 의지를 잃고 성을 버린 채 유곤에게로 달아났고, 이로 인해 병주가 크게 동요하였다.

인가 원년(316년) 11월, 사공 장사 이홍(李弘)이 병주를 들어 석륵에게 투항하였다. 진퇴양난에 빠진 유곤은 혼란스러워 하였는데, 단필제가 서신을 보내 유곤을 초청하였다. 이에 유곤은 병력을 이끌고 비호(飛狐)를 통해 단부의 영역인 계성으로 도망쳤다. 석륵은 양곡(陽曲)과 낙평의 가구들을 수도 양국으로 이주시키고 수재(守宰)를 두어 이들을 관리하였다. 대군으로 도망치던 희담은 상건(桑乾)에서 공장에게 붙잡혀 죽었다.

인가 원년(316년) 12월, 겸장사 장부(張敷)를 평양으로 보내 소무제 유총에게 승리를 보고하였다. 그리고 낙평과 남화를 공격해 조령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였고, 광천, 발해, 평원, 하간의 수천 호는 석륵을 피해 소속에게로 도망쳤다. 석륵은 승세를 이용해 기주의 여러 현들을 공략하고, 우사마 정하를 녕삭장군•감기주7군제군사(監冀州七郡諸軍事)로 삼아, 요서군에 있던 사주, 기주, 연주, 병주에서 발생한 유민 수만 호를 강제로 데려오게 하니,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없었다.

당시 공장은 유주와 기주 일대에서 활개치는 도적 마엄(馬嚴)과 풍도(馮睹)를 공격하였으나, 오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석륵이 장빈에게 계책을 물으니, 장빈이 답했다.
"풍도 등은 본래 명공(明公)의 깊은 원수가 아닙니다. 요서의 유민들은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군사를 철수시켜 쉬게 한 뒤, 좋은 관리들을 선발해 목이나 태수로 임명하고, 공자의 정책처럼 관례에 얽매이지 말고 은혜와 덕을 베풀어 위엄과 무력을 겸비하면, 요서의 적들은 곧 진정될 것이며, 유민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석륵은 "우후의 계책이 맞다."라며 동의하며 공장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무수현(武遂縣)령 이회(李回)를 역북독호(易北督護)•진위장군•고양(髙陽) 태수로 삼아 부임시켰다. 마엄은 부하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평소 이회의 위엄과 덕에 감복하고 있어 모두 마엄을 배반하고 이회에게 귀순하였다. 부하들이 이탈하자 마엄은 두려워 도망치다가 유주의 어느 물가에 빠져 익사하였고, 풍도는 무리를 이끌고 석륵에게 투항하였다. 이회가 역경(易京)으로 이주하여 유민 무리를 안정시키니, 유민들은 다시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석륵은 이회의 공을 치하하여 식읍 300호의 익양자(弋陽子)로 책봉하고, 전장군으로 승진시켰으나, 이회는 전장군 직책은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또, 석륵은 장빈에게 식읍 1,000호를 더하였다.

2.4.7. 이어지는 대외 정벌

인가 2년(317년) 6월, 석호를 파견해 조적을 초성(譙城)에서 포위하게 하였다. 동진의 남중랑장 왕함(王含)은 참군 환선을 보내 조적을 구원하게 하였지만, 환선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석호는 조적에게 패하여 물러났다. 이후 6월 8일[11]에 진왕(晉王) 사마예가 천하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띄웠다.
역적 석륵은 하북에서 폭정을 일삼아왔고, 오랜 세월 동안 처벌을 피해 떠돌며 악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석호와 그 흉악한 무리를 보내어 남하하여 감히 하남(河南)에 독을 퍼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평서장군 조적이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여 제때에 그들을 흩어지게 하였다. 이제 거기장군•낭야왕 사마부와 그 외 여덟 군의 정예병 30,000명을 수륙 네 방면으로 보내어 적의 소굴을 직접 공격하고, 조적의 지휘를 받게 하겠다. 석호의 머리를 가져오는 자에게는 비단 3000필과 금 50근, 그리고 3000호의 식읍을 수여한다. 또한, 적의 무리라도 석호의 머리를 가져오는 경우에도 똑같이 포상하겠다.

인가 2년(317년) 7월, 하북에서 거대한 메뚜기떼가 나타났다. 메뚜기들이 처음 땅에서 나올 때는 20여 일간 번데기 형태로 있다가, 일주일 정도 지나면 나비처럼 날개가 자라나서 사방 100리에 걸쳐 날아다녔다. 이 메뚜기들은 오로지 콩과 마를 먹지 않았으며, 병주, 기주, 청주, 옹주 등 네 주에서 특히 피해가 심하였다. 당시 석륵이 백성들의 곡식을 마구잡이로 거두어들이니,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오랑캐 메뚜기(胡蝗)'라고 불렀다. 이런 시기에도 대외 정벌을 멈추지 않아, 석호가 강을 건너 장수진(長壽津)을 함락시켰고, 동진의 양국(梁國) 내사 순합(荀闔)이 전사하였다.

한편, 단부로 도망친 유곤은 단필제와 더불어 석륵 토벌을 약조하였다. 단필제는 유곤을 대도독으로 추대하고, 혈서를 작성하여 그의 형 요서공 단질육권, 숙부 단섭복진(段涉復辰), 동생 단말배 등과 함께 모여 양국(襄國)으로 향하였다. 유곤과 단필제는 고안(固安)으로 향하였는데, 석륵이 참군 왕속(王續)을 단말배에게로 보내 금은보화로 그를 회유케 하였다. 과거에 석륵에게 입었던 은혜를 보답하고 싶었던 단말배는 후한 뇌물까지 받고 기뻐하며 단섭복진과 단질육권을 찾아가 말했다.
"아버지와 형이 그 아랫사람인 동생이나 아들의 말을 따르는 것은 수치입니다. 더욱이 설령 공을 세운다 해도 단필제가 홀로 그 공을 차지할 것이니,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병력을 이끌고 돌아갔다. 유곤과 단필제 또한 세력이 약해져 석륵을 상대할 수 없으리라 여기고 계로 돌아갔다.

소속이 조카 소제(邵濟)를 보내 발해를 공격하여 3,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인가 2년(317년) 8월, 낙양을 지키던 소무제 유총의 장수 조고가 동진으로 귀순한 뒤, 석륵이 공격해올 것이 두려워 참군 고소(髙少)를 보내 석륵을 찬양하는 서신을 그에게 전달하고, 함께 유총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석륵이 대의(大義)를 내세워 이를 사양하자, 조고는 깊이 원망하여 하내태수 곽묵과 손잡고 급군을 쳤다.

인가 2년(317년) 9월, 유요에게 패한 이후로 도망만 다니던 서진의 경조(京兆) 태수 화집(華輯)을 붙잡아 살해하였다.

인가 2년(317년) 10월, 석호를 보내 임회(臨淮)를 공격하자, 동진의 평원내사 유하가 임회군을 버리고 도망쳤다.

인가 3년(318년) 정월, 요서공 단질육권이 죽자, 그의 아들이 너무 어려 숙부 단섭복진이 스스로 선우에 올랐다.

인가 3년(318년) 4월 9일[12], 서평(西平)에서 지진이 발생해 천둥과 같은 소리가 났다. 이 달에 단말배가 숙부 단섭복진을 살해하고, 단물발린(段忽跋鄰)을 선우로 세워 유주의 단필제를 공격하였다.

단필제가 패하여 부하 수천 명과 함께 동진의 기주자사 소속에게로 도망치고, 유곤은 단말배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유곤의 장수들은 차례대로 석륵에게 귀순하였다. 석륵이 단필제가 도망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장수 석월을 보내 이를 습격하였으나, 단필제가 염산(鹽山)에서 석월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석월이 여기서 전사하자, 석륵은 석월의 죽음을 애도하며 3일간 음악 연주를 금하고, 석월을 평남장군으로 추증해주었다.

인가 3년(318년) 5월, 청주자사 조억이 동진으로 귀순하였다가, 건강이 멀리 떨어져있어 지원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석륵이 공격해올 것이 두려워 그에게 다시 화친을 청하였다. 석륵은 조억을 동주대장군•청주목으로 임명하고 낭야공(琅邪公)에 봉하였다.

2.5. 후조를 세우다

2.5.1. 근준의 난

인가 3년(318년) 7월, 소무제 유총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유총은 사신을 보내 석륵을 대장군•녹상서사로 삼고 유조를 남겨 보정을 부탁하였으나, 석륵이 이를 완강히 사양하였다. 얼마 뒤, 유총은 다시 사신을 보내 석륵을 대장군•지절•월도독(鉞都督)•시중•교위•유기2주목(幽冀二州牧)으로 삼고, 공작의 지위는 전과 같이 하면서 봉지를 10군으로 늘렸으나, 석륵이 또다시 이를 굳게 사양하였다.

한창 원년(318년) 8월, 소무제 유총 붕어 후,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은제 유찬은 석륵을 토벌하기 위해 상림원(上林園)에서 군사를 모아 훈련시킬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군권을 전부 대장군 근준에게 맡기고, 자신은 향락에 빠져 지내는 실책을 저질러, 근준의 반란으로 인해 시해당하고 말았다. 근준은 유씨 황족들을 대거 학살하고, 병주 중남부 일대를 점거하였다.

평양에서 일어난 변고를 들은 석륵은 장경에게 기병 5,000기를 주어 선봉으로 삼고, 근준을 토벌하라 명령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정예병 50,000명을 거느리고 그 뒤를 이었다. 석륵이 양릉(襄陵)의 북쪽 언덕에 보루를 세우자, 강족과 갈족 40,000여 호가 석륵에게 귀순해왔다. 근준은 여러 차례 석륵의 보루에 도전하였으나, 석륵이 굳게 방어하여 근준의 군사들의 사기를 꺾었다. 이때 기주, 서주, 청주에서 대규모의 메뚜기떼가 발생하였다.

광초 원년(318년) 10월, 유요가 장안에서 나와 포판(蒲阪)에 주둔하고 황제를 칭한 뒤, 석륵을 대사마•대장군으로 삼고, 구석을 더하였다. 또, 봉지에 10군을 더하여 기존의 13군을 포함해서 총 23군을 봉지로 책봉하였으며, 작위는 조공(趙公)으로 진봉시켰다.

석륵이 유주와 기주의 병력 100,000명을 모집해 공거(攻車)와 비제(飛梯)를 만들고 평양의 소성(小城)을 공격하였다. 석륵이 기병 15,000기로 나무를 끌고 먼지를 일으켜서 시야를 흐리게 한 뒤에 평양을 내외로 공격하니, 근준의 군대는 패하였고 평양의 대호(大戶) 주치(周置) 등은 잡호 5,000여 호를 거느리고 석륵에게 투항하였다. 이때 파족, 강족, 갈족 100,000여 호도 추가로 석륵에게 항복하였고, 석륵은 그들 각 부락을 여러 군현으로 흩뿌렸다.

광초 원년(318년) 11월, 근준은 시중 복태(卜泰)를 보내 석륵에게 승여어의를 바치고 화친을 청했으나, 석륵은 복태를 사로잡아 황제 유요에게 보냈다. 유요가 복태의 화친을 받아들이고 평양으로 돌려보내 도각의 여러 무리를 위로하게 하니, 석륵은 복태가 유요와 모의했다고 의심해 그를 죽여 항복을 재촉하려 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지금 복태를 죽이면 근준이 다시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태를 성내로 보내 한(漢)과의 동맹을 선언하게 하면 근준은 두려워하며 더 빨리 항복할 것입니다."
석륵은 장수들의 의견을 듣지 않으려다가 생각을 바꿔 복태를 죽이지 않았다.

광초 원년(318년) 12월, 좌거기장군 교태(喬泰), 우거기장군 왕등(王騰), 위장군 근강(靳康) 등이 근준을 살해하고 근준의 사촌동생인 상서령 근명(靳明)을 주군으로 옹립하였다. 근명이 복태와 복명(卜玄)을 보내 전국옥새를 가지고 유요에게 투항하자, 석륵은 옥새를 놓친 것에 크게 분노하여 영사 양승(羊升)을 평양성 안으로 보내 근명에게 근준을 죽인 연유를 따졌다. 그러나 근명도 화를 내며 양승을 참수하였고, 석륵은 더욱 분노하여 군대를 진격시켜 근명을 공격하였다. 근명은 출전하여 싸웠으나 패하여 시체가 2리에 걸쳐 쌓였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 문을 지켜 더 이상 출전하지 않았다.

석륵이 석호에게 명하여 기주와 유주의 병력으로 평양을 계속 공격하게 하였다. 근명이 여러 차례 패배하여 사자를 보내 황제 유요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유요는 정동장군 유창(劉暢), 정북장군 유아(劉雅), 진북장군 유책(劉策)을 보내 구원하였다. 석륵은 아직 유요와 싸우는 것은 시기상조라 생각해 포상(蒲上)으로 퇴각하였고, 근명은 포위가 풀린 틈을 타 평양의 남녀 15,000여 명을 인솔해 평양을 빠져나와 유창 등과 함께 유요에게로 갔다. 석륵은 빈 평양성을 점령하여 평양의 궁실을 불태우고, 배헌과 석회(장배독)에게 명해 근준이 파헤쳐놓은 영광릉과 선광릉을 보수하였다. 그리고 은제 유찬 이하 한나라의 관원 100여 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묘지에 안장하였다. 석륵은 평양에 수자리를 두고 돌아가면서 황실의 천문 관측 기구인 혼의(渾儀)와 황실의 여러 악기들을 가져가 양국으로 옮겼다.

당시 황제 유요는 속읍(粟邑)에 주둔하고 있었고, 평양 동쪽으로는 모두 석륵의 영역이 되었다. 석륵은 이석현(離石縣) 황폐한 곳을 떼어내 영석군(永石郡)을 설치하고 또, 별도로 무향군(武鄉郡)을 설치하였다.

2.5.2. 후조의 건국

광초 2년(319년) 2월, 좌장사 왕수(王修)와 주부 유무(劉茂)를 보내 황제 유요에게 승리를 보고하게 하였다. 유요는 겸사도 곽사를 보내 석륵을 태재•대장군으로 삼고, 작위를 조왕(趙王)으로 올렸으며, 봉지를 7군 더 늘리려 하였다. 또, 특별한 예우를 더하여 출입 시 경호병이 앞뒤로 호위케 하고, 면류관에 12개의 끈을 달게 하였으며, 6마리의 말이 끄는 금근차(金根車)를 타는 것을 허하여, 마치 위무제가 한나라를 보좌할 때처럼 하였다. 석륵의 부인은 왕후가 되고, 아들은 왕세자가 되었다. 그리고 사신으로 온 왕수와 유무 또한 장군으로 임명하고, 열후에 봉하였다.

왕수의 시종 조평락(曹平樂)은 왕수를 따라 속읍에 갔다가 한나라에 머물면서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황제 유요를 알현해 은밀히 말했다.
"대사마(석륵)가 왕수 등을 보내 외견상으로는 경건한 태도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대가(大駕: 유요)의 강약을 정탐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들이 돌아가 보고하면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폐하를 공격하려 할 것입니다."
당시 한나라의 군대는 매우 피폐해져 있었기에, 황제 유요는 조평락의 말에 넘어가 크게 화를 내며 양국으로 향하던 곽사 등을 돌아오게 하고, 속읍에서 왕수를 처형한 뒤, 태재 등의 직책과 작위를 모두 보류하였다.

광초 2년(319년) 3월, 석륵이 양국에 도착하자, 속읍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유무가 왕수의 억울한 죽음을 고하였다. 이에 석륵은 크게 화를 내며 조평락의 삼족을 멸하고, 왕수를 태상으로 추증하였다. 또한, 태재와 조왕의 직책이 취소된 것을 알고 더욱 분노하며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렸다.
"나와 형제들이 유씨(劉氏)를 섬긴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충성한 것이다. 유씨의 기초와 업적은 모두 나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거늘, 만약 나와 형제들이 없었다면 어찌 유씨가 남면하여 제왕이라고 칭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유씨가 뜻을 이루자마자 곧바로 나를 도모하려 하나, 하늘은 악(惡)을 돕지 않고 근준의 손을 빌려 그들을 처리하였다. 그럼에도 나는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순 임금이 아버지 고수(瞽瞍)를 섬긴 의리로 다시 받들어 왔다. 이제 주군을 처음과 같이 존경하겠다고 맹세하였으나, 유씨들은 오래된 악습을 버리지 않고 충성스러운 사신을 죽였다. 제왕이 일어나고 몰락하는 데는 일정한 법칙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건만, 조의 왕이든 조의 황제든 내가 스스로 취한 명호(名號)인데, 어찌 너희 따위가 제지할 수 있으랴!"
이후 석륵은 태의(太醫), 상방(尙方), 어부(御府) 등 여러 제왕의 영명(令命)과 참군을 멋대로 설치하고, 조찬(鼌贊)으로 하여금 정양문(正陽門)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갑자기 무너지자, 석륵은 크게 화를 내며 조찬을 처형하였다가, 이내 진정한 뒤에 후회하면서 관을 송환하고 의복을 제공하여 조찬을 대홍려로 추증하였다.

광초 2년(319년) 4월, 동진의 태산(太山) 태수 서감이 스스로 교주(交州) 자사라 자칭하면서 제대(濟岱)를 침략해 함락시키고 석륵에게 투항하였다. 동진의 용양장군 진천(陳川)도 준의를 들어 석륵에게 투항하자, 평북장군 조적이 봉관(蓬闗)에서 진천을 공격하였다. 석륵은 석호에게 군사 50,000명을 주어 진천을 구원하게 하였고, 준의에서 전투를 벌여 조적의 군대를 격파하니, 조적은 양국(梁國)으로 후퇴하였다. 석륵이 다시 도표를 보내어 후조군이 봉관에 이르자, 조적은 회남(淮南)으로 퇴각하였다. 석호는 양무장군 좌복숙을 보내어 조적을 공격하는 동시에, 진천의 부민 5,000여 호를 광종(廣宗)으로 옮기고 도표를 남겨 진천의 옛 성을 지키게 하였다.

석륵은 내치에 힘쓰면서 선문(宣文), 선교(宣敎), 숭유(崇儒), 숭훈(崇訓) 등 10여 개의 작은 학교를 양국(襄國) 사문(四門)에 세워 장사와 호족의 자제 100여 명을 가려 뽑아 교육하고, 성 밖에 격각(擊柝)을 쳐서 방어를 강화하였다. 또한 설호서(挈壺署)를 설치하였으며, 화폐로는 풍화전(豐貨錢)을 주조하였다.

광초 2년(319년) 9월, 평북장군 조적이 독호 진초(陳超)를 보내어 석륵의 장수 도표를 기습하였으나, 진초는 도리어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광초 2년(319년) 10월, 정로장군 석호가 좌장사 장경, 우장사 장빈, 좌사마 장굴육(張屈六), 우사마 정하 및 문무 관리 100여 명과 함께 석륵에게 존호를 올리라 권하였다. 이에 석륵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려 보였다.
나의 덕이 부족하나, 하늘의 큰 총애를 받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밤낮으로 전쟁에 전전긍긍하며 깊은 곳에 임하는 듯한 두려움을 항상 안고 있거늘, 어찌 감히 존호를 훔쳐 온 천하의 비웃음을 사겠는가? 예전에 주문(周文)은 천하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도 여전히 은나라를 섬겼고, 소백(小白)은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는 성세를 누리면서도 주(周) 왕실을 존숭하였다. 하물며 우리 국가는 은•주(殷周)보다 더 큰 도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내가 두 백(伯)의 덕을 비할 수 있겠는가? 이 논의를 속히 중단하라. 다시 논의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
그리고 복잡하고 번거로운 법령을 없애고, 중요한 법령만 모아서 새로운 법전을 만들게 하였다. 이에 법조령사(法曹令史) 관지(貫志)가 신해제도(辛亥制度) 5천 문을 만들었고, 이를 10여 년 동안 법령으로 시행하였다.

광초 2년(319년) 12월, 석륵의 문무 관리 129명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신들이 듣건대, 비상한 도덕을 가진 자는 반드시 비상한 공로를 세우고, 비상한 공로를 가진 자는 반드시 비상한 일을 이룬다고 합니다. 이에 삼대가 기울고 오백(五伯)이 번갈아 일어났습니다. 현재의 난세를 평정하고 옛날의 성군과 견줄 만한 능력을 가지신 전하께서는 하늘이 낸 성인으로, 우주를 다스리며 황업을 이루셨습니다. 천하가 모두 소생하며 좋은 징조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산천이 평온하고 별들이 이변을 일으키지 않으며, 바다 너머에서도 조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천인(天人)이 모두 전하를 바라보고 있으니, 마땅히 중단(中壇)에 올라 황제로 즉위하셔야 합니다. 일단 대장군•대선우(大單于)로서 기주목(冀州牧)•조왕(趙王)을 칭하셔서, 한(漢)나라의 소열제가 촉(蜀)에서 위왕(魏王)의 영역에 도읍을 둔 예를 따르십시오.
석륵은 처음에는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히 요청하여 마침내 동의하였다.

조왕 원년(319년) 12월 12일[13], 석륵이 조왕(趙王)에 올라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백성의 전세를 절반으로 줄여 주었다. 또한 효행과 우애, 농사에 힘쓴 자와 의를 위해 죽은 자의 유가족들에게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하고, 홀아비와 과부에게는 곡식 두 섬을 주었다. 축제를 7일간 크게 열고, 봄과 가을에는 전국시대와 전한 초기 제후왕처럼 매 해마다 원년을 새로 정하여 '조왕 원년'으로 개원하였다.

석륵은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건립하며 동쪽과 서쪽에 공서(公署)를 설치하였다. 종사중랑 배헌, 참군 부창, 두가(杜嘏)를 경학좨주, 상당 사람 이조참군 속함와 유경(庾景)을 율학좨주, 임파(任播)와 최준(崔濬)을 사학좨주, 중루장군 지웅과 유격장군 왕양을 문신좨주로 삼아 호인(胡人)의 소송을 전담하게 하였다. 장이(張離)와 장량(張良) 형제, 유곤의 아들 유군, 유모(劉謨) 등을 문생(門生), 주서(主書)로 삼아 호인 출입을 엄격히 관리하고, 한족이 갈족을 능멸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전장군 이한(李寒)을 사병훈교육국자(司兵勲敎國子)로 임명하여 전투 기술을 교육하게 하고, 기실좌(記室佐) 명해(明楷)와 정기(程機)에게 《상당국기(上黨國記)》를 편찬하게 하였다. 대중대부 부표(傅彪)와 가만(賈滿), 강궤(江軌)에게는 《대장군기거주(大將軍起居注)》를 편찬하게 하고, 참군 석태(石泰), 석동(石同), 석겸(石謙), 공융(孔隆)에게는 《대선우지(大單于志)》를 편찬하게 하였다.

석륵은 주군을 순행하며 농상(農桑)을 장려하고, 조회에서 천자의 예악을 사용하여 신하들을 대접하니, 관복과 의물(儀物)이 잘 정비되어 장관을 이루었다. 석륵은 장빈을 대집법(大執法)으로 삼아 조정을 총괄하게 하고, 석호를 선우원보(單于元輔)로 삼아 금위제군사(禁衛諸軍事)를 감독하게 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석호를 표기장군•시중•개부로 삼고, 중산공(中山公)으로 책봉하였으며, 나머지 신하들도 각각 관직과 작위를 받았다. 신하들은 논공행상에 대해 각자 논의하여 상주하자, 석륵은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과인이 군사를 일으킨 지 어언 16년이 되었다. 문무 관리들이 과인을 따라 전쟁에 참여하여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고초를 겪었는데, 특히 갈파의 전투에서는 그 공이 두드러졌으니, 이들을 우선적으로 포상해야 한다. 살아있는 자는 공로에 따라 작위를 주고, 전사한 자의 유가족에게는 한 등급 높은 포상을 주겠다."
이후 석륵은 선비족 탁발부의 대인 탁발울률에게 화친을 요청하며 형제로 지내자 제안하였으나, 탁발울률은 이를 거절하고 석륵의 사신을 처형하였다.

조왕 2년(320년) 정월, 석륵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려 풍속을 교정하였다.
1.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금지한다.
1. 상중(喪中)에 혼인하는 것을 금지한다.
1. 화장을 허용하되, 본래 풍속을 따르도록 한다.
이때 단말배를 격파하는 데 성공한 단필제, 단문왕 형제와 동진의 기주자사 소속이 계(薊)를 공격하여 탈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석륵은 소속의 세력이 고립된 것을 알고, 중산공 석호를 파견해 병력을 이끌고 기회를 틈타 소속의 본거지인 염차(厭次)를 포위하게 하였다. 공장은 다른 소속의 진영 11곳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조왕 2년(320년) 2월, 석호가 염차성 앞에 이르러 그곳의 백성들을 약탈하였다. 소속은 출전하여 싸웠으나, 석호가 배치해둔 복병에 의하여 소속의 후방을 차단당하였고 결국 소속은 사로잡혔다. 석호는 소속을 성 앞으로 보내 아직 성 안에 있는 소속의 조카 소축(邵竺) 등에게 투항을 권유하게 하였으나, 소속은 석호의 말을 따르지 않고 소축 등에게 단필제를 섬기며 끝까지 항전하라 말했다. 석호는 황급히 소속을 다시 진영으로 들이고 염차성에 공격을 퍼부었으나, 소축 등이 필사적으로 싸워 하는 수 없이 일단 물러났다. 석호는 소속이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양국으로 보내 석륵에게 처분을 맡겼다. 비록 소속은 투항하지 않았으나, 석륵은 소속을 죽이지 않고 종사중랑으로 삼은 다음, 석호에게 명령을 내려 염차에서 포로를 얻으면 반드시 생포하고 임의로 죽이지 말도록 하였다.

조왕 2년(320년) 3월, 전조의 장수 윤안(尹安), 송시(宋始), 송서(宋恕), 조신(趙慎) 네 군대가 각각 낙양에 주둔하였으나, 서로를 의심하여 아무도 굳건한 뜻을 가지지 못했다. 동진의 사주(司州) 자사 이구와 영천(潁川) 태수 곽묵은 각각 1,000여 기병을 낙양으로 보내 그곳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이에 윤안 등은 함께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켜 석륵에게 항복하였다. 석륵은 석생을 보내 5,000 기병을 이끌고 윤안을 지원하게 하였는데, 후조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구와 곽묵의 군대가 모두 퇴각하자, 윤안 등은 다시 반란을 일으켜 이구에게 투항하였다. 이구는 다시 곽묵에게 군사 500명을 이끌고 낙양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석생은 이처럼 네 장수들의 음모로 안심하지 못하게 되자, 송시 군대를 포로로 잡아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하남의 백성들은 서로 이구에게 귀순하였다.

조왕 2년(320년) 5월, 동진의 서주자사 채표가 단구(檀丘)에서 서감을 격퇴시키자, 서감은 후조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석륵은 장수 왕복도(王伏都)에게 300명의 기병을 주어 서감을 돕게 하고, 장경 등으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했다. 이때 석륵이 서감의 청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고, 구원하러 왔다는 장수 왕복도 또한 음란하고 포학하니, 서감은 앞으로의 일을 크게 근심하였다. 왕복도의 후발대인 장경 등의 군대가 동평(東平)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서감은 의심이 깊어져, 장경이 자신을 습격해오리라 판단하고, 먼저 왕복도를 공격해 후조군 300명을 몰살해버렸다. 왕복도의 구원병이 동진군이 아닌 서감의 배신으로 전멸했다는 소식에 석륵은 크게 노하여 장경에게 일단 진군하지 말고 요충지를 지키라 전하였다.

이 달, 큰비가 내려 중산과 상산 지역에 특히 심했으며, 호타하(滹沱河)가 범람하여 산이 무너지고 골짜기가 패였다. 거대한 소나무들이 뽑혀 호타하를 따라 동쪽의 발해까지 떠내려가 산처럼 쌓였다.

조왕 2년(320년) 6월, 공장이 10여 개의 서감의 진영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공장은 승리에 도취되어 대비하지 않았다가,단문앙의 야습에 크게 패배하고 돌아왔다.

조왕 2년(320년) 7월, 조적의 장수 한잠(韓潛)과 후조의 장수 도표가 옛 진천의 성을 각각 나누어 점거하였다. 도표는 서대(西臺)를, 한잠은 동대(東臺)를 점거하여 서로 지키며 40일 동안 대치하였다. 당시 도표의 군사들은 식량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었기에, 조적은 1,000여 명의 병사들에게 흙을 쌀처럼 자루에 담아 나르도록 하고, 몇 명은 실제 쌀을 지게에 지고 피곤한 척 길에 쉬게 하였다. 도표의 병사들이 그 쌀을 발견하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쫓아가 쌀을 가져가면서 조적의 병사들이 풍족하게 먹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도표의 병사들은 더욱 두려워하고 사기를 잃었다.

석륵이 장수 유야당(劉夜堂)에게 명해 나귀 1,000마리로 도표에게 양식을 보내려 했으나, 조적은 한잠과 별장 풍철(馮鐵), 위책(衛策) 등을 보내 변수(汴水)에서 이를 습격하여 모두 빼앗았다. 도표는 밤에 도망쳐 동연성(東燕城)으로 물러났다. 조적은 한잠에게 명하여 봉구(封丘)에 진을 치고 도표를 압박하게 하였다. 풍철은 두 대(臺)를 점거하고, 조타는 옹구(雍丘)에 주둔하며 후조를 자주 공격하였다. 후조의 주둔지에서 탈영하는 병사들이 많아졌고, 이 중에서 조적의 군영으로 귀순해온 병사들도 많았다.

조적이 중원을 평정하고 백성을 잘 다스리니, 하남 지역의 백성들은 후조를 배반하고 조적에게 귀순하였다. 석륵은 이를 우려하여 감히 하남에 군대를 보내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명하였다
“조적은 여러 번 변방을 침입해왔으나, 북주(北州)의 백성들은 조적을 선망하니, 그의 조부의 묘를 정비하고 두 가구의 지키는 사람을 두어, 조적은 조타(趙佗)의 고사를 본받아 은혜를 느끼고 변방의 침략을 멈추기를 바란다.”
조적은 이를 듣고 기뻐하였다. 석륵은 조적에게 서신을 보내 서로 사절을 교환하고, 상업을 통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조적은 답장하지 않고 상업만 허용하여 이익을 얻었다. 한번은 조적의 장수 동건(童建)이 신채(新蔡) 내사 주밀(周密)을 죽이고 후조에 항복하였으나, 석륵은 오히려 동건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조적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였다.
"천하의 악은 모두 같다. 배반한 신하와 도망친 관리들은 과인의 깊은 원수이자 장군의 원수이다."
조적은 깊이 감사하여 참군 왕유(王愉)를 보내 선물을 주고 화친을 맺었다. 석륵 또한 사신으로 온 왕유를 두텁게 대접하고 좌상시 동수(董樹)를 보내 말 100필과 금 50근을 답례로 보냈다. 이로 인해 후조의 병사들은 조적에게 투항하지 못하였고, 조적의 장수들도 후조의 백성을 침략하지 않았다. 이로써 연주, 예주 일대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조왕 2년(320년) 8월, 상산이 무너져 1,000여 호가 피해를 피었다. 석륵은 처음으로 헌원지악(軒轅之樂)과 팔일지무(八佾之舞)를 제정하고, 황금으로 만든 수레와 황제의 깃발을 제작하니, 비로소 황제의 예악이 갖추어졌다.

조왕 2년(320년) 9월, 중산공 석호에게 보•기 40,000명을 주어 서감을 토벌하게 하였다. 서감이 장사 유소(劉宵)를 보내 석륵에게 항복을 청하고, 아내와 자식을 인질로 보내니, 석륵이 이를 받아들였다.

조왕 2년(320년) 10월, 동진의 서주자사 채표가 초성(譙城)에 주둔하였다. 이때 석호가 초성을 습격하자, 채표는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밤에 도망쳐 하비(下邳)로 후퇴하였는데, 도중에 서감의 습격을 받아 패주하였다. 석호는 군대를 이끌고 봉구성(封丘城)으로 돌아왔다. 한편, 석륵은 조정의 관리와 그 가족 중 상류 가문 300호를 양국(襄國)으로 옮겨 숭인리(崇仁里)에 거주하게 하고, 공족대부(公族大夫)를 두어 이를 관리하게 하였다. 양국에서는 후조의 궁전과 여러 문들이 완성되었지만, 당분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아직 이용할 수 없었다. 아울러 법령을 이전보다 엄격하게 제정하면서 오랑캐를 뜻하는 글자 '호(胡)'의 사용을 엄금하였다.

조왕 2년(320년) 11월, 중산공 석호가 탁후부(託候部)의 굴돌나(掘咄哪)를 경북(岍北)에서 크게 격파하고, 소와 말 200,000여 마리를 노획하였다. 이때 석륵은 5품제를 깔끔하게 개정하고, 장빈으로 하여금 관리의 선발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후 9품제를 재정립하고, 장반(張班)을 좌집법랑(左執法郎), 맹탁을 우집법랑(右執法郎)으로 임명하여 사족의 품계와 천거를 관리하게 하였다. 공경(公卿)과 주군(州郡)에서는 매년 수재(秀才)와 효렴(孝廉)을 천거하여 청렴한 자, 현명한 자, 직언하는 자, 무용이 뛰어난 자 각 1인씩을 추천하게 하고, 각 주에 도부종사(都部從事)를 두어 1부에 1주씩 배치하였다. 이들의 직위는 2,000석에 상당하며, 직무는 승상사직(丞相司直)에 준하였다.

조왕 3년(321년) 정월, 석륵이 조서를 내려 말했다.
"작년에 호타하가 범람하여 강가에 거대한 목재가 산적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과인에게 궁전을 수리하라는 뜻이로다. 이에 낙양의 태극궁과 비슷하게 덕전(德殿)을 건축하고, 종사중랑 임왕(任汪)을 보내 공장(工匠) 5,000명을 이끌고 목재를 채취하게 하여 이를 가져오도록 하라."

조왕 3년(321년) 2월, 여양(黎陽) 사람 진무(陳武)의 아내가 한 번에 세 아들과 한 딸을 낳았다. 진무는 아내와 함께 갓 태어난 자녀들을 데리고 수도 양국(襄國)에 이르러 이를 자랑하는 상소를 올리니, 석륵은 명령을 내려 말했다.
"옛날 주(周)나라가 흥할 때, 네 개의 젖꼭지를 가진 부인이 여덟 명의 자녀를 출산한 일이 있었다. 오늘날 진무의 아내는 한 개의 젖꼭지로 네 명의 자녀를 출산하였으므로, 이는 축하할 만한 일이니 지난날의 길조보다 더 나은 것이다. 이는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고 기운이 화합한 결과이다. 따라서 젖먹이에게 각각 여종 한 명, 곡식 100석, 다양한 비단 40필을 하사하여 길조를 맞이하도록 하라."

조왕 3년(321년) 3월, 중산공 석호 등을 보내 동진의 유주자사 단필제를 정벌하였다. 공장은 단부의 여러 성읍들을 함락시켰고, 석호는 염차성을 함락시킨 후 단필제, 단문앙 등을 사로잡았다. 석륵은 항복한 단필제를 관군장군, 단문앙을 좌중랑장, 위린(衛麟)을 우중랑장으로 임명해 모두 금장자수(金章紫綬)를 하사하였다. 또, 30,000호의 유민을 돌려 보내어 본업에 종사하게 하고, 수재(守宰)을 배치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써 기주, 병주, 유주, 요서, 파서(巴西)의 여러 군이 모두 석륵에게 함락되었다.

단필제는 매번 석륵에게 예를 갖추지 않았고, 항상 진(晉)의 관과 절을 들고 조복을 입었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단문앙, 소속 등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다가 누설되어 처형되었다. 단문앙, 소속 역시 석륵이 내린 짐독을 받고 주살되었다.

조왕 3년(321년) 7월, 종사중랑 유오(劉奧)가 건덕전(建德殿)을 건립할 때, 나무를 잘못 세우는 바람에 기둥이 비틀어지는 일을 저질러 궁전에서 참형에 처해졌다. 석륵은 그가 죽은 뒤에 비로소 후회하고, 그를 태상•건덕교위로 추증하였다. 이후 낙양의 동마(銅馬)와 옹중(翁仲) 두 개를 수도 양국(襄國)으로 옮겨 영풍문(永豐門)에 세웠다.

왕화(王和)가 둥근 돌을 파내었는데, 그 위에 '률권석중사균동률도량형유신씨조(律權石重四鈞同律度量衡有新氏造)'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대신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어떤 이는 이를 상서로운 징조라 주장했으나, 참군 속함은 이를 왕망 시대의 물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전란으로 도량형 기준이 없어졌기에, 석륵은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이를 기준으로 삼아 정식으로 정하였다.

또, 큰 솥을 발견하였는데, 용량은 4두(斗)였고, 그 안에 큰 동전 30문(文)이 들어 있었다. 동전에는 '일당백백당천천당만(一當百百當千千當萬)'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13자의 전서(篆書)로 되어 있어 해독할 수 없었다. 석륵은 이를 영풍창(永豐倉)에 보관하게 하고, 공사(公私)에서 새로운 동전을 주조하여 사용하게 하였으나, 민심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공전(公絹)을 내어 새로운 돈을 사고 팔게 하고, 중견(中絹) 한 필에 1,200, 하견(下絹) 한 필에 800의 제한을 두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사사로이 중견 한 필에 4,000, 하견 한 필에 2,000에 거래하였다. 사리(私利)를 위해 돈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려다 처형된 사람도 수십 명이나 되었으나, 끝내 돈은 유통되지 않았다.

조왕 3년(321년) 10월, 고향인 무향의 노인들을 모두 양국으로 불러 모았다. 석륵은 과거에 친하게 지냈던 이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며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석륵은 무향을 한고조의 풍패(豐沛)에 비유하며, 만세 후에 혼령이 되어서도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무향의 백성들에게 3대 동안 세금을 면하게 하였다.

조왕 3년(321년) 11월, 석륵은 비로소 생업을 재개한 백성들의 재산이 아직 많이 부족함을 고려하여, 수년간 술을 빚는 것을 금하고, 교사(郊祀)와 종묘(宗廟)에는 모두 이주(醴酒)를 사용하였다.

중산공 석호를 거기장군으로 삼아 기병 30,000기를 거느리고 이석(離石)의 선비족 울죽(鬱粥)을 토벌케 하였다. 석호는 울죽을 격파하여 남녀 및 소와 말 100,000여 마리를 포획하였다. 울죽은 오환으로 달아났고, 모든 무리는 후조에게 투항하였다.

조왕 4년(322년) 2월, 석륵의 세자 석흥이 죽었다. 석륵은 차남 석홍을 새로 세자로 세우고, 그를 영 중령군(領中領軍)으로 임명하였다. 또, 중산공 석호를 보내 정예병 40,000명을 거느리고 또다시 배신한 태산의 서감을 공격하게 했다. 서감이 굳게 지키며 싸우지 않으니, 석호는 길게 포위망을 구축하고 둔전하였다.

조왕 4년(322년) 4월, 동진의 진북장군 유외왕돈의 난을 피해 후조로 망명하였다. 석륵은 그를 진남장군으로 삼고, 열후에 봉하였다. 이때 조적이 초성에서 병사하고, 그의 동생 조약이 형을 대신하여 예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조왕 4년(322년) 6월, 경내에 대기근이 들었다.

조왕 4년(322년) 7월, 석호가 마침내 태산을 함락시키고, 서감을 사로잡아 양국으로 보냈다. 거듭된 배신으로 단단히 화가 나있던 석륵은 서감을 자루에 넣은 후, 100척 누각 위에서 그 자루를 땅바닥으로 내리꽂았고 서감은 그대로 터져서 사망하였다. 석륵은 이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자루에서 서감의 시체를 꺼내고, 일찍이 서감에게 죽임당했던 왕복도 등의 유족들을 불러 그 시체를 베어내 먹게 하였다. 또, 항복한 서감군 3,000명을 전부 생매장하여 죽였다. 동진의 연주자사 치감은 후조군이 두려워 추산(鄒山)에서 물러나 하비에 주둔하였다.

조왕 4년(322년) 8월, 동진의 낭야내사 손묵(孫默)이 거병하고 후조에 투항하였다.

조왕 4년(322년) 10월, 석륵이 장수를 보내 하남을 침략하니, 후조의 기병대가 초성 동쪽에 이르렀다. 중전군 대양이 예주자사 조약에게 진언하였다.
"적은 반드시 성부(城父)로 갈 것이니, 기병을 보내 남쪽 물길을 따라 추격하고, 보병은 북쪽 물길을 막아 길목을 차단하면 적은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약은 이를 따르지 않았고, 후조군은 대양이 예측한대로 성부를 침공해 부녀자와 물자를 약탈하고 돌아갔다. 조약의 장수 노연(魯延)이 이를 추격하기를 청하자, 조약은 대양의 반대를 무시하고 조카 조지(祖智)를 붙여 추격을 허하였다. 후조의 장수가 부녀자와 물자를 버린 척하고 도망치니, 조지와 노연은 이를 다투다가 후조군의 역습을 받아 군대가 전멸하였다. 조지와 노연 모두 목숨을 겨우 건져서 도망쳤지만, 그들이 이끌고 온 병사들은 모두 전사하였다. 석륵은 다시 성부를 쳐 함락시켰고, 조약은 이를 막지 못해 수춘으로 물러났다. 조약이 맥없이 물러나자, 석륵은 기세를 타고 진군하여 진류를 점령하였고, 서주와 연주의 많은 성들이 후조에 항복하였다.

청하(清河) 사람 장피(張披)는 초기에 정하의 장사를 지내다가 장빈의 천거 덕에 별가로 임명되어 정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정하는 장피를 멀리하고, 장빈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세자 석홍은 정하의 조카로, 본인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어머니로 하여금 석륵에게 장피와 장빈이 어울려 유협(遊俠)으로 놀고 있다는 참소를 하게 하였다. 석홍의 어머니인 왕후 정씨는 석홍의 요구대로 장피와 장빈을 헐뜯으면서, 아울러 장피의 문객이 백여 명이나 되며, 사람들은 모두 그를 우러러보는데, 이는 국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니 장피를 제거하여 국가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석륵은 이에 동의하여 장피를 급히 소환했지만, 장피가 즉시 도착하지 않자 곧바로 그를 처형하였다. 장빈은 정하의 간계임을 알고도 감히 이를 따지지 못하였다.

조왕 4년(322년) 12월, 복양경후 장빈이 죽자, 석륵은 몹시 슬퍼하며 통곡하였다. 그 후 정하를 우장사로 임명하고, 조정을 총괄하게 했다. 이로 인해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정씨 가문으로 몰렸다.

정로장군 석타(石他)가 찬(酇) 서쪽에서 전조군을 격파하고, 전조의 장수 위영(衛榮)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그러나 그 해에 큰 전염병이 돌아 후조 사람 열 중 둘 셋이 죽으니, 석륵은 휘문전의 건설을 중단케 하고, 장군 왕양을 예주에 주둔시켜 동진의 영역인 예주를 노렸다. 이로 인해 동진과의 병란이 날마다 이어져 소란과 동요가 일어났다.

조왕 5년(323년) 3월, 석륵이 군대를 보내 동진의 팽성(彭城)을 공격하자, 동진의 서주자사 변돈(卞敦)과 정북장군 왕수(王邃)가 하비에서 우이(盱眙)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펼쳤다.

조왕 5년(323년) 4월, 모용외에게 사자를 보내 동맹을 청했지만, 모용외는 후조의 사신을 잡아 동진의 수도 건강으로 보냈다.

조왕 5년(323년) 8월, 중산공 석호에게 보•기 40,000명을 주어 청주자사 조억을 토벌하게 하였다. 조억은 근여산(根餘山)에서 후조군을 방어할 계획이었으나, 청주에 전염병이 덮쳐 시기가 미뤄졌다. 석호가 이 틈에 광고(廣固)를 포위하니, 조억이 임명한 동래태수 유파(劉巴)와 장광태수 여피(呂披)가 군을 들어 후조에 투항하였다. 이후 석륵이 석타를 정동장군으로 삼아 강호(羌胡)을 하서에서 공격하게 하고, 좌군장군 석정(石挺)을 보내 광고의 석호를 지원하게 하자, 조억은 결국 후조에 항복하였다. 조억은 석호에 의해 양국으로 압송되었고, 석륵이 그곳에서 그를 처형하였다. 청주는 청주자사 유징(劉徵)이 광고에 남아서 다스렸다.

후조의 사주자사 석생이 기병대를 보내 동진의 양무장군 곽송(郭誦)을 공격하였다. 곽송은 계략이 많아 석생의 기병을 매복으로 격파하였고,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하게 된 석생은 분노하여 직접 4,000 기병을 이끌며 여러 현들을 약탈하고, 곽송의 보루를 공격하였다. 잠시 후, 석생이 보루를 함락시킬 수 없다 여겨 병력을 퇴각시키니, 곽송은 용맹한 병사 500명을 이끌고 추격하여 석생을 격파했다. 석생은 패주하였고, 승세를 탄 곽송은 양성(襄城)에서 후조 사람 1,000여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조왕 5년(323년) 11월, 석륵이 청빈한 참군 번탄을 장무내사로 삼았다.

조왕 6년(324년) 정월, 병도위 석첨을 보내 하비를 침공하여 동진의 장수 유장(劉長)을 전사시켰다. 이어서 난릉(蘭陵)의 팽성내사 유속(劉續)을 공격해 격파하였으며, 유속은 패하여 동완(東莞)으로 달아났다. 이에 동해태수 소탄(蕭誕)이 후조에 투항하였다.

조왕 6년(324년) 2월, 석륵 친히 크고 작은 학교들을 순행하면서 학생들에게 경전의 뜻을 시험하고, 성적이 우수한 자들에게는 비단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석륵이 장차 동진의 서주와 양주(揚州)를 도모하고자 군대를 모으고, 병도위 석첨으로 하여금 하비를 다시 공격하게 하였다. 동진의 연주자사 유하가 두려워 하비에서 사구(泗口)로 후퇴하니, 이번에는 석생이 출격하여 하남태수 윤평(尹平)을 신안에서 격파해 그를 참수하고 여러 성읍을 함락시켰으며, 5,000여 호를 약탈하여 돌아갔다. 이로 인해 유하와 석씨 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동(河東)과 홍농(弘農) 일대의 백성들은 생업을 이어가기가 어려워졌다.

조왕 6년(324년) 4월, 우상시 곽호(霍皓)를 권과대부(勸課大夫)로 임명하여 전농사자(典農使者) 주표(朱表), 권과도위(勸課都尉) 육충(陸充) 등과 함께 주군(州郡)을 순행하게 하여 호적을 확인하고 백성들에게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게 하였다. 그리고 농업과 양잠이 가장 잘된 자에게는 오대부(五大夫) 작위를 내렸다.

석생이 연수관(延壽關)에서 출병하여 동진의 허(許)와 영(潁)을 습격하였고, 10,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고 20,000명이 항복하였다. 석생은 이어서 강성(康城)을 함락시키고, 다시 양무장군 곽송(郭誦)을 양적(陽翟)에서 공격하였다가,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1,000여 명이 사망하였고, 석생은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강성으로 퇴각해 스스로를 보위하였다. 석륵은 석생을 구원하기 위해 급히 급군내사 석총을 보냈고, 석총은 영천태수 곽묵을 공격하여 남녀 2,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계속 진격하여 곽송의 상관인 사주자사 이구를 공격하였다. 석총이 장수 석랑(石良)에게 5,000여 정예 기병을 주어 이구의 진영을 급습하게 하자, 이구는 맞서 싸웠으나 불리하여 결국 패하였고, 곽송의 동생 곽원(郭元)이 사로잡혔다. 석랑은 곽원에게 서신을 쓰게 강요하여 곽송을 설득하려 했지만, 곽송은 왕릉의 고사를 들어 냉정하게 거절하였다. 하지만 이미 이구가 격파당한 마당에 공세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어 강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조왕 6년(324년) 10월, 석생이 낙양에 주둔하자, 동진의 예주자사 조약이 수춘으로 퇴각하였다.

조왕 7년(325년) 정월, 석륵은 자주 사냥을 나갔는데, 사냥을 갈 때마다 빠르게 말을 몰고 달렸다. 어느 날 가까운 교외로 사냥을 나가려 하자, 주부 정랑(程琅)이 간했다.
"임금이 자주 사냥을 나가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암살자들이 구름처럼 흩어져 있는 이 시기에, 뜻밖의 변고가 생기면 임금이라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손책의 고사에서 보이듯이, 말라버린 나무나 썩은 그루터기도 해를 입힐 수 있는 법입니다. 고대부터 말을 몰고 달리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석륵이 답했다.
"과인의 힘은 좋고 판단력도 뛰어나다. 그대는 문서 업무나 잘 처리하라. 이런 말은 할 필요 없다."
그날 석륵은 여전히 사냥을 나갔고, 풀숲에서 달리던 중 나무에 부딪혀 크게 다쳤다. 궁으로 돌아온 석륵은 탄식하며 말했다.
"정랑은 충신이다. 그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
이후 정랑에게 조복(朝服)과 비단을 하사하고, 관내후(關內侯)로 책봉하였다. 이를 본 신하들이 충성스러운 직언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앞다투어 하기 시작하였다.

조왕 7년(325년) 2월, 선비족 우문부의 대인 우문걸득귀(宇文乞得歸)에게 관작을 주고 모용외를 치게 하였으나, 우문걸득귀는 모용외의 셋째 아들 모용인의 활약으로 크게 패하여 군대를 버리고 도망쳤다.

조왕 7년(325년) 3월, 북강왕(北羌王) 분구제(盆句除)가 전조로 귀부하자, 석타가 안문(雁門)에서 상군(上郡)으로 나가 이를 습격하여 3,000여 명을 포로로 잡고, 소, 말, 양 100만 마리를 노획하였다. 이에 전조의 황제 유요는 중산왕 유악(劉岳)을 보내 석타를 추격하여 대파하고, 석타와 후조군 6,000여 명을 참수하여 죽였으며, 포로와 노획물을 모두 되찾고 돌아갔다. 이때 동진의 도위 노잠(魯潛)이 허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후조로 사람을 보내 귀순하였다.

조왕 7년(325년) 4월, 장병장군 석첨이 동진의 연주자사 담빈(檀斌)을 추산(鄒山)에서 공격하자, 담빈은 힘껏 싸웠으나 역부족이라 후조군에 의해 전사하였다. 이때 서이중랑장 왕등(王騰)이 후조를 배반하여 병주자사 최곤(崔琨)을 습격해 죽이고, 상당내사 왕척(王脊)과 더불어 병주를 들고 전조에 투항해버렸다.

조왕 7년(325년) 5월, 낙양을 접수했던 석생이 낙양 거점으로 하남군을 서서히 공략해나가기 시작했다. 이구와 곽묵은 석생의 군대에 맞서 싸웠지만, 대부분 패하고 군량도 다하여 결국 전조에 사신을 보내 항복하면서 구원을 청했다. 전조의 황제 유요는 이구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중산왕 유악에게 군사 15,000명을 주어 맹진(孟津)으로 진격케 하고, 진동장군 호연모(呼延謨)로 하여금 형주병과 사주병을 거느려 효산(崤山)에서 이구의 무리와 합류해 낙양을 치게 하였다. 석생은 맹진에서 유악을 요격하였다가 역으로 패하였고, 석량수(石樑戍)로 물러나 다시 맞섰으나 또 패하여 후조군 5,000명이 전사하였다. 석생은 결국 전조군에게 쫓겨 낙양의 금용성(金墉城)으로 들어갔고, 유악은 낙양에 이르러 금용성을 포위하였다.

석륵은 중산공 석호에게 보•기 40,000명을 주어 궁지에 몰린 석생을 구원하게 하였다. 석호는 성고관(成皋關)으로 들어가 낙양 서쪽에서 유악의 군대와 치열하게 싸웠고, 유악이 전투 중 유시에 맞아 부상 입으면서 유악의 군대는 격파당해 석량수로 물러났다. 석호는 이를 추격하여 석량수 주변에 참호와 방책을 세워 포위망을 형성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였다.

유악의 군사들이 굶주려 군마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을 무렵, 석호가 호연모를 격파하여 죽이니, 전조의 황제 유요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유악을 구원하였다. 석호는 30,000 기병을 거느리고 유요의 군대를 역습하여, 두 군대는 치열하게 싸웠고, 이때 전조의 전군장군 유흑(劉黑)이 팔특판(八特阪)에서 석호의 장수 석총을 대파하면서 형세는 전조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유요가 망산(邙山) 아래 금곡(金谷)에 주둔하고 있을 때, 밤중에 아무 연고도 없이 군영 내에서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퍼짐에따라 유요의 군사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다. 유요는 간신히 수습해 민지(澠池)에 주둔하였는데, 여기서도 다시 이상한 분위기로 병사들이 놀라 흩어졌고, 유요는 어쩔 수 없이 장안으로 돌아갔다.

조왕 7년(325년) 6월, 석호가 석량수를 함락시키고, 유악과 그의 장수 80여 명, 저족, 강족 3,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양국(襄國)으로 보낸 뒤, 나머지 9,000여 명의 병사들은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이때 곽묵도 석총에게 패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건강으로 도망치니, 유악과 곽묵의 패배로 크게 두려워하던 이구는 부하 장수들이 석륵에게 돌아가려는 것을 알고, 형양(滎陽)에서 도망쳐 동진으로 향하였다. 이에 이구의 장사 최선(崔宣)은 2,000여 명을 이끌고 후조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석륵은 사주, 연주, 예주를 모두 장악하였고, 청주, 서주, 빈주(濱州), 회주(淮州) 등의 군현들이 모두 후조에 항복하였다. 석륵은 이어서 삭방(朔方)을 평정하고 삭주(朔州)를 설치하였으며, 낙양의 일영(日影)을 양국으로 옮겨 선우정(單于庭)에 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과 후조의 공신 39명을 석함에 새겨 건덕전(建德前殿)에 두고, 양국에 상재원(桑梓苑)을 세웠다.

조왕 8년(326년) 3월, 석륵이 야간에 친히 행차하여 군영을 감찰하면서 영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에게 금은보화와 비단을 뇌물로 주며 용창문(永昌門)을 나가려 할 때, 문후(門候) 왕가(王假)가 석륵을 체포하려 했으나 석륵의 수행자들이 도착하여 체포를 멈췄다. 다음 날, 석륵은 왕가를 진충도위로 삼고 관내후(關內侯)로 책봉하였다.

조왕 8년(326년) 4월, 석생이 여남(汝南)을 공격하자, 여남의 백성들이 이에 호응하여 동진의 여남내사 조제(祖濟)를 붙잡아 항복하였다.

조왕 8년(326년) 10월, 석륵이 예전에 자신이 급상과 함께 불태웠던 업궁(鄴宮)을 재건하고자, 세자 석홍을 먼저 업으로 보내 진수케 하고, 우장사 정하(程遐)와 비밀리에 협의하여 10,000명의 금병(禁兵)과 거기장군이 통솔하는 54개의 군영에 모두 석홍의 휘하로 배속시켰다. 그리고 효기장군•문신좨주 왕양(王陽)에게 육이(六夷)를 통솔하게 하여 석홍을 보좌하게 하였다. 중산공 석호는 공훈이 자못 크고, 업을 근거지로 삼고 싶어하여 떠날 생각이 없었던지라, 삼대(三臺)를 수리하고 그곳으로 가족들을 옮겼다. 또, 이 모든 일을 계획한 정하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밤에 사람을 시켜 정하의 집에 침입케 하여 그의 아내와 딸을 겁탈하고 옷과 물건을 약탈하였다.

조왕 8년(326년) 11월, 석총이 수춘을 공격하자, 예주자사 조약은 동진 조정에 구원을 청했지만, 조정은 오래도록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석총이 준구(逡遒)와 부릉(阜陵)을 침략하여 5,0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니, 그제서야 동진 조정은 동요하여 사도 왕도를 대사마로 삼고 강녕(江寧)에 주둔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석총은 한참 약탈하다가 동진의 역양내사 소준이 보낸 장수 한황(韓晃)에게 패하고 후조로 돌아갔다.

조왕 8년(326년) 12월, 동진의 제민(濟岷) 태수 유개(劉闓)와 장수 장합(張闔) 등이 반란을 일으켜 하비내사 하후가(夏侯嘉)를 죽이고, 하비를 들어 후조에 투항하였다. 석첨은 이참에 동진의 하남태수 왕선(王羨)을 공격해 주성(邾城)을 점령하였고, 팽성내사 유속이 후조군으로부터 잠시 탈환했던 난릉과 석성(石城)을 공격해 모두 다시 빼앗았다.

석륵이 주군(州郡)에 명령을 내려 무덤을 도굴하거나 방치하지 못하도록 하고, 해골이 드러난 자는 관과 수의를 입혀 다시 매장하도록 하였다. 또, 아문장 왕파(王波)를 기실참군으로 임명하여 구류(九流)를 세우고, 수재와 효렴 시험제를 도입하였다.

조왕 9년(327년) 12월, 중산공 석호가 탁발부의 대인 탁발흘나를 정벌하여 구주형(句注陘) 북쪽에서 전투를 벌였다. 탁발흘나는 패하고 대녕(大寧)으로 천도하여 후조군을 피해 달아났다.

2.6. 전조를 멸하다

태화 원년(328년) 2월, 치평(荏平)의 현령 사환(師懽)이 검은 토끼를 잡아 석륵에게 바치자, 석륵이 명령을 내려 물었다.
"기록에 따르면 흰 토끼가 상서로움을 나타낸다고 하였는데, 이 검은 토끼에는 어떤 상서로움이 있는가?"
이에 조정에서 옛 기록을 조사해본 결과, 정하 등은 토끼는 음정(陰精)의 짐승이고, 검은색은 수색(水色)이므로, 이 상서로움에 따라 천명(天命)을 받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석륵은 '태화(太和)'로 개원하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태화 원년(328년) 4월, 장수 석감이 완(宛)을 공격해 남양태수 왕국(王國)의 항복을 받아내고, 회수(淮水) 이북까지 나아가 예주자사 조약이 지키고 있는 수춘까지 압박하였다. 이때 조약의 장수 진광(陳光)과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조약을 공격하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조약은 큰 위기에 빠졌으나, 측근 염독(閻禿)이 조약으로 위장하고 진광에게 붙잡힌 덕에 조약은 담을 넘어 겨우 빠져나왔다. 진광과 그 부하들은 염독이 진짜 조약이라 생각해 그를 붙잡아 석륵에게 바치고 후조에 투항하였다. 석감은 석총과 함께 수춘으로 진공하였다.

태화 원년(328년) 7월, 조약의 군대는 무너져 역양(厯陽)으로 도망쳤고, 수춘의 백성 중 20,000여 호가 석감에게 항복하였다. 한편, 중산공 석호가 40,000 군사를 이끌고 자관(軹闗) 서쪽으로 들어가 전조를 공격하자, 하동의 50여 개의 현(縣)이 이에 호응하여 포판(蒲阪)을 공격하였다. 전조의 황제 유요는 하간왕 유술(劉述)을 보내 저족, 강족의 군사를 모아 진주(秦州)에 주둔시켜 전량의 장준구지양난적에 대비하고, 친히 포판을 구원하기 위해 정예병을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진격하였다.

태화 원년(328년) 8월, 석호는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퇴각하였으나, 유요는 이를 추격하여 고후(高候)에서 석호를 대파하였다. 석호는 도망에 성공하였으나, 장수 석첨이 전조군에게 붙잡혀 참수당하고, 후조군의 시체가 200여 리에 걸쳐 누웠으며, 약탈당한 병장기의 수는 억을 헤아렸다.(고후 전투) 유요가 승세를 몰아 낙양의 금용성을 포위하니, 수도 양국은 그 석호의 군대가 전멸했다는 급보에 크게 진동하였다.

태화 원년(328년) 11월, 석륵은 직접 출진하여 낙양을 구원하려 했으나, 사마 곽오와 정하가 전조군의 기세가 높아 나서면 안 된다며 굳게 간하였다. 이에 석륵은 분노하여 칼을 뽑아 정하와 곽오를 향해 겨누면서 당장 물러나라 소리쳤다. 그리고는 옥에 갇혀있던 서광을 사면해 자신의 앞으로 소환하고 그의 생각을 물으며 말했다.
"유요는 그저 고후에서의 승세를 몰아 낙양을 포위하였을 뿐임에도 범인들은 모두 그 예기를 꺾을 수 없다 말한다. 하나, 유요는 1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100일에 걸쳐 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 하여 그 병사들은 지금쯤 피로에 쩔어있을 것이니, 우리가 정예병을 이끌고 간다면 한 번의 전투로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낙양을 지키지 못 한다면 유요는 필시 기주로 뻗어나가 황하 이북을 석권한 뒤, 남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의 대업을 멸망시키고 마리라. 정하 등은 나의 친정을 반대하는데, 경의 생각도 이와 같은가?"
서광이 답했다.
"유요는 승세를 타고 있음에도 아직 양국에도 이르지 못 했고 금용성에서 진격이 막혔으니, 이로써 그의 무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원정군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공전(攻戰)의 이익을 잃는 것이므로, 만약 천자의 깃발을 내걸고 친히 당도한다면 적들은 분명 그것을 바라만 보아도 무너져 도망칠 것입니다. 천하의 평정은 오늘날의 일거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로, 이에 응하지 않을 시 오히려 화만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석륵이 웃으며 말했다.
"서광의 말이 옳다."
때마침 석륵이 신임하는 승려 불도징(佛圖澄)도
"대군을 이끌고 출정한다면 반드시 유요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라며 거들었다. 석륵은 마침내 친정을 결심하여 경내 안팎으로 계엄하고, 앞으로 이에 대해 간언하는 자는 참수하겠다 엄포를 놓았다. 서광은 금용성을 구원하러 가는 석륵과 종군하였다. 행군 중에 석륵은 뒤돌아 서광을 향해 말했다.
"유요가 군사를 성고관(成皋關)에 많이 배치해두었으면 상책이고, 낙수(洛水)를 지킨다면 차선책이나, 낙양에 눌러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능히 그를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태화 원년(328년) 12월 1일[14], 여러 군대가 석륵의 부름을 받고 성고관으로 집결하니, 보병이 60,000명이었고, 기병이 20,000기였다. 석륵은 유요가 성고관에 병력을 하나도 배치하지 않은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하늘을 가리키고 다시 자기 이마를 가리키며 외쳤다.
"하늘이시여!(天也)"
그런 후에 곧장 낙양으로의 진격을 재개하였고, 말에게 재갈을 물려 밤낮을 쉬지 않고 행군해 낙수(洛水)의 공현(鞏縣)과 자현(訾縣) 사이로 빠져나왔다. 석륵이 낙양 인근까지 왔다는 보고를 받은 유요는 황급히 금용성의 포위를 풀어 100,000여 병력을 전부 낙수 서쪽으로 배치하고, 남북으로 10여 리를 진쳤다. 석륵은 이를 보고 더욱 기뻐하며 좌우에게
"축하할 일이구나!"
라 이르고,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선양문(宣陽門)으로 진입해 옛 서진의 태극전전(太極前殿)에 올랐다.

12월 5일[15], 석호가 낙양성 북쪽에서 보병 3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내려와 전조군의 진영을 향해 돌격하여 그 중군을 쳤다. 석감과 석총 또한 각각 정예 기병 8,000기를 이끌고 성 서쪽에서 북쪽으로 돌며 전조군의 선봉를 공격하였다. 서양문(西陽門)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고, 석륵도 갑옷을 입고 창합문(閶闔門)에서 나와 협공하였다. 유요는 술에 취하여 제대로 군대를 지휘하지 못하고 전장을 이탈하려 하다가 빙판에서 낙마하여 석감에게 사로잡혔다. 유요가 사로잡히자, 석륵은 전군에 명령을 내려 말했다.
"내가 잡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뿐인데, 지금 그를 이미 잡았으니 장병들에게 적들의 귀순을 받아들여라 전하라."
결국 전조군은 대패하여 50,000여 명이 참수당해 죽었고, 그 시체가 금곡을 가득 메웠다. 후조군은 유요의 진영을 약탈하여 명마 200필과 붉은 방패, 금은보화, 활과 화살통 30구를 획득하였다. 석륵의 앞까지 끌려온 유요는 석륵을 바라보고 말했다.
"석왕(石王)이여! 중문(重門)에서의 맹약[16]을 기억하는가?"
석륵은 서광을 통해서 말을 전했다.
"오늘의 일은 하늘이 행한 것일진대, 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에 유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2월 11일[17], 석륵은 낙양에서 회군하였고, 정동장군 석수, 우위장군 석원(石逺) 등에게 명해 유요를 호위하면서 양국으로 압송하였다. 이윽고 무사히 양국에 도착한 유요는 영풍(永豐)의 소성(小城)에 유폐되었다.

이때 동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관군장군 조윤(趙胤)에게 패하고 후조로 도망친 예주자사 조약이 석륵에게 항복을 청하였는데, 석륵은 왕파를 보내 조약을 꾸짖으며 말했다.
"경은 반역을 일으켰다가 궁지에 몰려 이제서야 귀순하였다. 우리 조정이 어찌 도망자의 피난처가 되겠는가? 경은 감히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에게 이전의 격문을 보여주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냥 조약을 용서하고 항복을 받아주었다.

태화 2년(329년) 정월, 석륵이 예법과 음악을 갖추어 신하들을 조정에 소집하였다. 그러나 깃발을 잡은 시랑 소공(邵恭)이 제때 내리지 않았고, 상시 휴홍(眭洪)이 활을 잡고도 쏘지 않아, 모두 이 일로 처벌받았다.

태화 2년(329년) 2월, 전조의 태자 유희가 아버지 유요가 후조군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며 형인 남양왕 유윤의 말에 따라 장안을 버리고 상규(上邽)로 도망갔다. 이에 전조의 장수 장영(蔣英)과 신서(辛恕)는 수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장안을 점령하였고, 석륵이 석호를 보내 전조의 잔당을 토벌케 하자 곧바로 사자를 보내 후조에 항복하였다. 석륵은 석생에게 명해 낙양의 병력을 이끌고 장안을 접수하게 하였다.

석륵은 기주의 여러 군을 순행하며 노인, 효자, 농사와 학문에 힘쓴 이들을 불러 상을 내렸다. 또, 먼 곳에 있는 지방의 목수(牧守)들에게까지 명령을 내려 성내의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숨김없이 말할 수 있도록 하여 조정의 간절한 충고를 듣고자 하였다.

태화 2년(329년) 8월, 남양왕 유윤이 수만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공격해 탈환하려 하였다. 그러자 농동(隴東)의 여러 군의 이민족과 한족들이 모두 거병하여 그에게 호응하였다. 유윤의 군대는 중교(仲橋)에 주둔했고, 석생은 성을 굳게 지키며 방어하였다. 석호는 기병 20,000기를 이끌고 출격하여 석생을 구원하러 갔다.

태화 2년(329년) 9월, 석호가 의거(義渠)에서 유윤의 군대를 크게 격파했하였다.(의거 전투) 유윤은 상규로 도망갔고, 석호는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천 리에 걸쳐 전조군의 시체가 쌓였다. 상규는 이내 석호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고, 유요의 태자 유희, 남양왕 유윤 및 전조의 왕공귀족 3,000여 명이 사로잡혀 모두 처형되었다. 석호는 관동의 유민과 진, 옹 일대의 대호족 9,000여 명을 잡아 양국으로 이주시켰으며, 상규의 성벽을 완전히 파괴하고 유씨 일가를 멸족시켰다. 또, 석호는 낙양에 이르렀을 때, 다섯 군(郡)의 흉노 도각족 5,000여 명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그리고 주부 조봉(趙封)을 시켜 전국새(傳國璽), 금새(金璽), 태자옥새(太子玉璽)를 석륵에게 보냈다.

석호가 하서(河西)에서 강족을 공격하여 수만 명을 포로로 잡고, 진농(秦隴)을 평정하여 하서에 영석군(永石郡)을 설치하였다. 이때 저족의 수령 포홍과 강족의 족장 요익중이 후조에 항복하였다. 이에 석호는 표문을 올려 포홍을 육이제군사(六夷諸軍事), 요익중을 육이좌도독(六夷左都督)으로 임명할 것을 청하였고, 저족과 강족 150,000여 명을 사주와 기주로 이주시켰다.

이 해에 석륵은 다시 탁발부로 사자를 보내 그 대인 탁발예괴와 화친하였고, 탁발예괴는 동생 탁발십익건을 양국으로 보내 인질로 하였다.

2.7. 칭제

태화 3년(330년) 2월, 신하들은 석륵의 공업이 이미 높고 상서로운 기운이 모였으므로, 마땅한 때를 정하여 칭호를 바꿈으로써 천지의 바람에 응답해야 한다고 논의하였다. 이에 중산공 석호 등은 옥새의 인수를 바쳐 존호를 올릴 것을 청하였으나, 석륵이 처음에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하들이 거듭 청하자, 석륵은 마침내 허하여 대조천왕(大趙天王)•행황제사(行皇帝事)를 자칭하였다.

조상인 석사를 '선왕(宣王)', 아버지 석주갈주를 '원왕(元王)'로 추존하였고, 처 유씨를 왕후, 세자 석홍은 태자로 세웠다. 또, 아들 석굉(石宏)은 지절•산기상시•중외제군사도독•표기대장군•대선우로 삼고 진왕(秦王)에 봉하였고, 양아들 석빈은 좌위장군으로 삼고 태원왕(太原王)에 봉하였으며, 막내아들 석회(石恢)는 보국장군으로 삼고 남양왕(南陽王)에 봉하였다. 중산공 석호는 태위로 승진시키고, 상서령을 겸하게 하였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진봉시켰다. 이외에도 조카 석생은 하동왕(河東王), 석감은 팽성왕(彭城王)에 각각 봉하였다. 석호의 아들들의 관작도 올려주어, 장남 석수는 기주자사로 삼고 제왕(齊王)에 봉하였고, 차남 석선(石宣)은 좌장군으로 임명하였으며, 그 동생 석정(石挺)은 시중으로 삼고 양왕(梁王)에 봉하였다.

석륵의 친척들뿐만 아니라 이때까지 건국공신들도 모두 승진하였다. 좌장사 곽오는 상서좌복야, 우장사 정하는 상서우복야로 승진하여 이부상서를 겸하였다. 그리고 좌사마 기안, 우사마 곽은(郭殷), 종사중랑 이봉(李鳳), 전령중령 배헌을 모두 나란히 상서로 삼아 군사 문제를 함께 논의하게 하였다. 서광은 중서령으로 임명하고, 비서감을 겸하였다. 이들 외에도 공적을 논하여 각기 작위를 내려, 개국군공(開國郡公) 21명, 군후(郡侯) 24명, 현공(縣公) 26명, 현후(縣侯) 22명을 봉하고, 문무관원들에 차등을 두어 봉작을 내렸다. 시중 임반(任潘) 등은 조정에서 금(金)을 계승하여 수덕(水德)을 상징으로 삼고, 기치(旗幟)는 검은색을,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바칠 양의 색깔은 흰색을, 자사(子社)와 추랍(丑臘)도 모두 흰색을 사용하도록 제안하였으며, 석륵은 이를 따랐다.

천왕 석륵은 조서를 내려, 이제부터 의심스럽고 어려운 큰일은 팔좌(八座) 및 위승랑(委丞郎)들이 함께 동당(東堂)에 모여 상세히 논의하고 공평하게 결론을 내도록 하였다. 군사 및 국가의 긴급한 사무로 보고가 필요한 경우, 상서(尚書)는 관련 부서의 일을 보고하도록 하였고, 날씨나 시간에 관계없이 바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후 석륵은 이전에 항복했던 조약이 충성스럽지 못하다 여겨, 정하 등의 의견을 수용하여 건국한 김에 조약과 그 친족 100여 명을 숙청하였다. 그리고 조약 집안의 여성들과 기녀들은 분배하여 신하들에게 하사하였다.

태화 3년(330년) 5월, 후조의 장수 유정(劉征)이 병력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동진을 침구하여 동남쪽의 여러 현들을 노략질하고 남사도위 허유(許儒)를 전사시킨 뒤, 해우(海虞)를 공격하였다.

태화 3년(330년) 6월, 정령족의 젊은 수령 적빈(翟斌)이 후조로 들어와 입조하자, 천왕 석륵은 그를 구정왕(句町王)에 봉하였다.

태화 3년(330년) 8월, 신하들이 다시 천왕 석륵에게 가서 지금의 지위가 정당하지 않으니, 마땅히 존호를 올려야 한다고 거듭 청하였다.

건평 원년(330년) 9월, 천왕 석륵이 결국 황제로 즉위하였고, 대사면을 실시하여 중범죄자 이하의 죄를 사면하고, 연호를 '건평(建平)'으로 개원하였다.

고조부를 순황(順皇)으로, 증조부를 위황(威皇)으로, 조부를 선황(宣皇)으로, 부친을 세종 원황제로, 모친을 원소황태후로 추존하였거, 왕후 유씨(劉氏)를 황후, 천왕태자 석홍(石弘)을 황태자로 삼았다. 나머지 문무 관료들도 각각 봉작을 그에 알맞는 봉작을 받았다. 또한, 소의(昭儀)와 부인(夫人)의 지위를 상공(上公)과 같게 하고, 귀빈(貴嬪)과 귀인(貴人)의 지위를 열후(列侯)와 같게 하였으며, 삼영(三英)과 구화(九華)는 백(伯)과 같게, 숙원(淑媛)과 숙의(淑儀)는 자(子)와 같게, 용화(容華)와 미인(美人)은 남(男)과 같게 하였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을 채용하는 데에는 인원을 제한하지 않았다.

이 해에 명제 석륵은 자신이 황제로 즉위한 것을 기념하고자, 길이 3척 6촌인 보검을 제작하여 철 500근을 사용하였고, 작업에는 10,000여 명이 동원되었다. 이후 보검이 완성되자, 석륵은 이 검에 "건평(建平)"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명제 석륵이 형주감군 곽경과 남만교위 동유(董幼)를 보내 양양(襄陽)을 공격하였다. 동진의 남중랑장 주무(周撫)는 석륵이 곽경에게 전해준 꾀에 속아, 스스로 지킬 수 없다 판단해 병력을 이끌고 무창(武昌)으로 퇴각하였다. 이리하여 후조군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양양을 얻을 수 있었고, 평북장군 위해(魏該) 사후 그 무리를 통솔하던 동생 위하(魏遐) 등은 모두 후조에 투항하였다. 이에 동진 조정에서는 주무를 파면하였다. 곽경은 양양의 성벽을 파괴하고, 그 백성들을 면북(沔北)의 번성(樊城)으로 옮겨 수비하였으며, 석륵은 곽경을 형주자사로 삼았다.

이때 진주목•휴도왕 왕강(王羌)이 반란하자, 명제 석륵은 진주자사 임심과 사마 관광(管光)에게 명하여 진주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토벌군은 강족에게 패배하여 전멸하였다. 이로 인해 농우(隴右) 일대는 크게 혼란스러워졌고, 저족과 강족은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석륵은 하동왕 석생에게 병력을 주어 농성(隴城)으로 진공하게 하였다. 왕강의 조카 왕탁(王擢)은 강족에게 사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이를 파악한 석생은 그에게 뇌물을 주어 강족을 안에서 공격하게 하였고, 결국 왕탁의 배신으로 왕강은 석생에게 패하여 전량으로 도망쳤다. 석생은 진주에서 이민족과 호족 5,000여 호를 옹주로 옮겼다.

명제 석륵은 조서를 내려, 이제부터 법에 따라 처리할 것을 명하고, 과거처럼 자신의 분노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덕망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불필요한 형벌을 피하고, 충성을 다해 죽은 자의 유가족이 뜻하지 않게 벌을 받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하에 이를 상세히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당양(堂陽) 사람 진저(陳豬)의 아내가 한 번에 아들 셋을 출산하자, 명제 석륵은 이를 상서롭게 여겨 그의 집안에 옷과 비단을 하사하고, 아이의 양육을 도울 유모 한 명을 주며 3년간 면세하였다.

이 당시 후조의 위상은 대외적으로도 높아, 고구려숙신은 활과 화살을 바쳤고, 선비족 우문부의 대인 우문옥고(宇文屋孤)는 명마를 바쳤다. 전량의 군주인 양주목 장준도 장사 마순(馬詵)을 보내, 양주의 지도를 바치고 입조하여 신하로 칭하였다. 고창(高昌), 우전(于闐), 선선(鄯善), 대완(大宛)도 각기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쳤다. 동진의 형주목 도간 역시 장사 왕부(王敷)를 보내 강남의 진귀한 보물과 기이한 동물을 바쳤다.

이 해에 진주(秦州)에서 흰 호랑이와 흰 사슴을, 형주(荊州)에서 흰 꿩과 흰 토끼를 잡아 조정에 바쳤다. 제음(濟陰)에서는 나무가 연결되어 자랐고, 원향(苑鄉)에서는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명제 석륵은 황제 즉위 이후로 길조가 연이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이를 칭송하며 형벌을 경감하고, 지난 해에 미처 거두지 못한 세금을 전부 면제하였다. 양주(涼州)에서는 중범죄자 이하를 특별히 사면하고, 양주의 관리를 모두 낭중(郎中)에 임명하고 비단 10필과 솜 10근을 하사하였다.

건평 2년(331년) 정월 초하루, 유정이 다시 동진을 침략하여 누현(婁縣)을 공격하고, 무진(武進)에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틀 뒤에 동진의 사도 치감이 이르러 반격하였고, 유정은 패하여 퇴각하였다.

남교(南郊)에서 하얀 기운이 제단에서 하늘로 이어지자, 명제 석륵은 크게 기뻐하며 궁으로 돌아와 4년 동안의 형벌을 사면하였다. 그리고 전량으로 사자를 파견해 장준을 무위군공(武威郡公)에 봉하고, 양주(涼州)의 여러 군을 식읍으로 주었다. 이후 석륵은 친히 밭을 갈며 적전(耤田)을 시행하고, 환궁하여 다시 5년 형벌을 사면하고 공경 이하 신하들에게 금과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건평 2년(331년) 3월 1일, 일식이 발생하자 석륵은 일식 때문에 3일간 정전을 피하고, 군공경사(群公卿士)들에게 각기 상소문을 올리도록 명했다. 또한, 주군(州郡)에서 정체모를 수상한 사당을 모두 제거하도록 하였으며,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리게 하여 백성에게 이로운 사당은 군현에서 다시 세우도록 하였다. 또, 주변에 아름다운 나무를 심어 명산대천에 비길 만한 사당을 차등 있게 세우도록 하였다.

명제 석륵이 업으로 가서 새 궁궐을 짓고자 하니, 정위 속함이 상소를 올려 간하였다.
"신이 듣기로는 당요와 우순의 치세에서는 초가집을 짓고 흙 계단을 세 자 높이로 만들었고, 이는 시서(詩書)에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나라의 문제는 백금을 아껴 노대(露臺)를 짓지 않았으니 천고에 칭송되었습니다. 하나, 하(夏)와 상(商)의 구름다리와 옥계단, 초나라의 장화궁(章華宮), 진나라의 아방궁(阿房宮)과 같은 것은 국가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안팎으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석륵은 크게 노하여
"이 늙은이를 죽이지 않으면, 내 궁궐을 어찌 완성할 수 있겠는가?"
라며 어사(御史)에게 그를 체포하라 명하였다. 이에 중서령 서광이 나아가 간하였다.
"폐하께서는 천부적인 총명함으로 당요와 우순을 뛰어넘지만, 충신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십니까? 어찌하여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과 같은 군주가 되려 하십니까? 충신의 말이 가히 사용할 만하면 사용하시고, 사용할 수 없더라도 마땅히 참으셔야 합니다. 어찌하여 직언하는 공경을 하루아침에 참수하려 하십니까?"
석륵이 이를 듣고 탄식하며 말했다.
"군주가 이처럼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다면, 어찌 그 말을 충성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집이 100필이나 되는 재산을 가진 필부라도 다른 집을 사려 할 텐데, 천하의 부와 만승의 존귀를 가진 짐이 어찌 새로운 궁궐을 짓지 않겠는가? 하나, 이 궁궐은 어차피 결국 수리하게 될 것이므로, 당장은 짓는 것을 멈추어 직신(直臣)의 뜻을 펼치겠노라."
그리고 속함에게 비단 100필과 쌀 100섬을 하사하였다. 또, 조서를 내려 군공경사(群公卿士)들에게 모두 현량(賢良)하고 방정(方正)하며 직언하는 사람을 추천하도록 하였다. 우수한 자를 책문에 응시하게 하여 1등급은 의랑(議郎)으로, 2등급은 낭중(郎中)으로, 3등급은 낭(郎)으로 임명하였다. 추천 받은 사람은 서로 추천할 수 있게 하여 인재를 널리 모으도록 하였다. 명당(明堂), 벽옹(辟雍), 영대(靈臺)를 양국성(襄國城) 서쪽에 세웠다.

건평 2년(331년) 7월, 큰비가 내리자 중산(中山) 서북쪽에서 급류가 발생하여 거목 수백만 그루가 뽑혀 당양(堂陽)에 모이니, 명제 석륵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는 재앙이 아니라, 하늘이 짐에게 업도(鄴都)를 건설하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소부(少府) 임왕(任汪)과 도수사자(都水使者) 장점(張漸) 등을 보내어 업궁(鄴宮) 건축을 감독하게 하였고, 석륵이 친히 설계도를 전달하였다. 이때 촉(蜀)의 자통(梓潼), 건평(建平), 한고(漢固) 3군(郡)에서 파(巴)의 묘족들이 와서 항복하였다.

명제 석륵은 성주(成周)가 중원의 땅이자 한진(漢晉)의 옛 도읍임을 들어 천도를 시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낙양(洛陽)을 남도(南都)로 삼아 행대(行臺)를 설치하고,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를 낙양에 두었다. 그리고 태위•중산왕 석호(石虎)를 대사마, 정하를 개부의동삼사로 삼았다.

건평 3년(332년) 3월, 동진의 서중랑장 조윤과 사도 중랑 광술(匡術)이 마두오(馬頭塢)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에 팽성왕 석감은 장수 한옹(韓雍)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으나, 한옹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한옹은 남사(南沙)와 해우를 공격해 5,000여 명을 포로로 잡고 귀환하였다.

건평 3년(332년) 4월, 동진군이 이전에 양양성이 있었던 자리에 주둔하자, 곽경이 출격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수자리를 세운 뒤에 다시 번성으로 돌아갔다.

건평 3년(332년) 5월, 병주에서 우박이 내려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명제 석륵은 과거에 금지했던 한식을 다시 기념할 수 있게 하였다. 이때 석륵은 태자 석홍에게 상서(尚書)가 올리는 문서를 살피게 하고, 중상시 엄진(嚴震)에게 가부 결정을 맡기는 대신, 정벌이나 큰 사건에 대해서만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엄진의 권력이 왕과 비슷하게 강해지니, 중산왕 석호의 집에는 참새가 드나들 정도로 방문객이 적었고, 안그래도 석륵이 업을 탐내는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던 석호는 더욱 불만을 품게 되었다.

건평 3년(332년) 7월, 형주자사 곽경이 강서(江西)를 남쪽으로 공격하면서 동진을 침략하였다. 이에 태위 도간은 그의 아들 평서장군 참군 도빈(陶斌)과 남중랑장 환선을 파견해 틈을 타 곽경이 없는 번성을 기습해 함락시켰다. 본거지가 털린 곽경은 군대를 돌려 번성을 탈환하려 했지만, 환선이 영격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도간은 이어서 남양태수 도진(陶臻)과 경릉(竟陵) 태수 이양(李陽)을 보내 신야(新野)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곽경은 두려워 도망쳐버렸다.

2.8. 말년

건평 4년(333년) 정월, 명제 석륵이 동진으로 사신을 보내 비단을 선물하면서 화친을 청하였다. 하지만 동진 조정은 이를 거절하고, 비단을 불태워버렸다.

건평 4년(333년) 4월, 바람 없는 맑은 날에 갑자기 탑 위에서 종이 홀로 울렸다. 승려 불도징이 이를 듣고
"이 종소리는 나라에 큰 상(喪)이 있을 징조이니, 폐하께서 아마도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라며 탄식하였다.

건평 4년(333년) 5월, 큰 유성이 나타나 북극에서 서남쪽으로 약 50장(丈)이나 흘러갔으며, 빛이 땅을 밝히고 강에 떨어져 그 소리가 900여 리 바깥에서도 들렸다. 또, 검은 용이 업성(鄴城)의 우물에 나타나니, 명제 석륵이 이를 직접 보고는 무척 기뻐하였다. 석륵은 조서를 내려 각 군국에 학관을 설립하고, 각 군마다 박사와 좨주를 두어 학생 150명을 가르치게 하였다. 또한 태학생(太學生) 다섯 명을 뽑아 조정의 관리로 임명하였다.

건평 4년(333년) 6월, 가뭄이 심해지자, 명제 석륵은 직접 정위에게 명하여 죄수를 사면하고 가벼운 형벌로 대체하게 하였으며, 죄가 무거운 자들에게도 술과 음식을 제공하고 목욕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간신히 큰 비가 내렸고, 석륵은 이를 보고 기뻐하였다. 이 시기에 순고(淳觚)에서 백강족(白羌)의 여자가 큰 알을 낳았는데, 이를 깨니 큰 개미 같은 벌레가 나왔다고 한다.

건평 4년(333년) 7월, 서쪽 변방에서 시체가 일어나 행진하고, 뱀과 쥐가 싸우다 뱀이 죽는 등 괴이한 일이 발생하였다. 옹주자사 석생이 이를 조정에 보고하면서 "장안성에서 닭이 '기자안(基慈安)'이라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라고 첨언하였다. 또, 안정(安定)에서 귀신들이 내려와 경을 낭송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수색을 해보아도 어떠한 존재도 발견할 수 없었다. 7일 후 소리가 멈췄으며, 간혹 비슷한 소리가 다시 들린다 제보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모두 착각했거나 잘못 들은 것이었다.

비향현(肥鄉縣)에서는 운석이 떨어지자, 비향현령 한강(韓強)은 조사하던 중 장성현(長城縣) 서쪽 산 골짜기에서 사방으로 4촌, 두께 2촌의 검은 인장을 발견해 중산왕 석호에게 바쳤다.

어느 날, 명제 석륵은 병이 위독해져, 중산왕 석호와 태자 석홍, 중상시 엄진 등을 불러 병상에 시중들게 하였다. 석호는 석륵의 명령을 가짜로 만들어 석홍과 엄진은 물론, 내외 신하와 친척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후 석호는 다시 조서를 고쳐 업에 있던 진왕 석굉과 팽성왕 석감을 양국으로 소환하여 석륵의 병시중을 들게 하였다. 얼마 뒤, 병세가 나아진 석륵은 업에 있어야 할 석굉이 옆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말했다.
"누가 명령하여 진왕을 불러들였는가? 명령을 내린 자를 응당 참수하겠다!"
이에 석호는 매우 두려워하며 석륵 앞에서는
"진왕이 사모하여 잠시 온 것이니 지금 바로 보내겠습니다."
라 하였으나, 석굉을 돌려보내지 않고 그대로 머물게 하였다.

7월 21일[18], 명제 석륵은 다시 병이 깊어지자, 회생할 수 없음 알고
"사흘 후에 장례를 치르고, 내외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상복을 입지 말고 혼인, 제사, 음주, 육식을 금지하지 말라."
는 유언을 남긴 뒤에 붕어하였다. 향년 60세. 석호는 석륵의 시신을 산기슭에 몰래 파묻어 아무도 무덤을 찾을 수 없도록 하였다. 이전에 석륵은 모후인 왕씨를 산계곡에 몰래 묻은 다음 유목민의 장례인 '비장'으로 치렀으며, 대신들은 허묘(虛墓)인 고평릉(高平陵)에서 장사를 지냈고, 시호를 '명황제(明皇帝)', 묘호를 '고조(高祖)'로 추존하였다.

석륵의 뒤는 차남이자 태자 석홍이 이었으나 곧 석호에게 찬탈당하고 살해되었다. 석륵이 살아 있을 때 일부 신하들은 석호를 처리하도록 했지만 석륵은 망설이면서 미루다가 끝내 처리하지 못했다. 영명한 군주였던 석륵이 말년에 한 실수 때문에 그 아들 석홍은 폐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그 뒤 석륵의 자손들은 제 명에 살지 못하거나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3. 평가

노예로부터 몸을 일으켜 나라의 기틀을 잘 세워놓고 갔지만 후계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뒤를 이은 아들이 살해되고 폭군 석호가 다 망쳐놓아 진순신 등에게 꽤 비판받았다. 석륵의 정책을 유지했다면 5호 16국시대가 일찍 종결됐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석륵의 문치권장정책 자체는 일리가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호한융합이 어렵다는 걸 후대의 북위가 실증했으므로, 정말 그렇게 일찍 끝났을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석호에게 군사적인 재능은 있었어도 피지배계층을 기분 내키는 대로 수탈하고, 국가를 장기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비전은 없어 바로 그 다음 대에서 후조가 끝장나게 한 걸 보면, 적어도 후조가 그렇게까지 허망하게 멸망하진 않았을 거란 가정은 개연성이 높은 게 사실이다. 마지막 저지른 실수가 아깝긴 하지만 본인도 죽기 전에 그 실수를 깨닫고 나름 고치려 한 걸 보면 5호16국시대 초반기의 영웅이자 명군으로 평가하기에 모자람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4. 인물됨과 일화

4.1. 석륵의 비평

고구려의 사신 우문옥고를 대접하는 자리에서 신하인 서광과의 대화때 서광이 석륵에게
"폐하께서는 한고제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삼왕을 능가하니 가히 그 덕이 헌원에 버금가시옵니다!"
라고 칭송하자...
"짐이 만일 한고제와 같은 큰 인물을 만난다면 즉시 고개를 숙이고 절한 뒤 북면하여 신하의 자리에 서서 한신이나 팽월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오. 만약 광무제와 같은 인물과 한시대에서 만난다면 중원에서 함께 말을 달리며 천하를 한번 겨루어 볼 것이오. 하지만 그 중원의 사슴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오. 대장부가 일을 꾸미는 데 있어서는 마음이 호탕해서 일월과 같아야 하오. 짐은 조맹덕 부자사마중달 처럼 고아나 과부[19]를 속이며[20] 간교한 술책으로 천하를 빼앗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서진 치하에서 노예로 고달픈 인생을 보냈고, 서진이 병폐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서진의 판도를 무너뜨린 영웅 대열에 속한 자로서 내린 날카로운 당대의 평가이다. 석륵은 인간성과 도량을 종합해서 패자로서의 능력과 자세까지 평가한 것이며, 때문에 최소한 석륵 자신이 조조나 사마의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음엔 부정의 여지가 없다. 석륵은 이 일화에서 분명 한고조를 선두에, 스스로와 동급이라 인정하는 광무제는 다음에, 조조나 사마의는 좋지 못한 부분만 부각시켜 그 다음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을 보건대 석륵이 그 능력까지 포함해 평가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21]

여기에 난데없이 석륵의 발언을 민족주의적 사고를 투입해서 석륵이 마치 탄압받은 갈족 민족의 관점에서 조조나 사마의 등을 낮추어 평가했다는 해석이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석륵은 위대한 한족 영웅들인 한고조 유방과 광무제 유수도 폄하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여기서 석륵이 그렇게 하고 있는가? 또한 이걸 갈등 해소와 정치적 책략으로는 보기도 어려운데, 이런 인물평을 하게 되면 당연히 영웅으로서의 석륵은 과연 조조나 사마의 등보다 우월한가라는 평가의 문제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은 다름아닌 석륵이 먼저 제시했다. 석륵이 스스로에게 실질에서 비롯되는 큰 자신감이 있었다고 보면 간단하다. [22]

4.2. 역사적 식견

문맹이었지만 학자들이 역사책을 읽어주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 이야기는 거의 매일 들었다고.

이에 관한 일화로는 역이기가 6국을 부활시키자고 유방에게 간언하는 대목을 들을 때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석륵이 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며
"이렇게 하면 고제는 반드시 진다. 그런데 어떻게 한 고제가 이겼을까?"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 장량이 간언해서 철회하는 장면을 듣고
"한고제에게는 장량이 있어서 막을 수 있었구나."
라고 말했다고. 배운 것은 없지만 식견은 상당했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장면이다. 석륵은 당대의 혼란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 명분과 덕을 내세운 한고조 유방의 통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진심으로 존경했다.[23]

4.3. 기타 일화

  • 석륵이 거병하기 전, 그는 귀에서 종종 북소리와 나팔 소리를 들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석륵이 그의 어머니에게 이를 털어놓자, 어머니가 말했다.
    "일하다보면 귀가 울릴 수 있는 것이니, 불길한 징조가 아니다."

    이후 석륵은 경작 하던 중, 밭에서 칼 하나를 발견했는데, 칼에는 '석씨창(石氏昌: 석씨가 번창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석륵은 이 칼을 얻고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였다.
  • 석륵이 노예이던 시절, 무안(武安)의 임수(臨水)에서 일하다가 유민군에게 사로잡혔는데, 마침 사슴 무리가 지나가면서 군인들이 이를 쫓느라 경쟁하는 틈을 타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석륵은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노인이 석륵에게 말하길,
    "이전에 지나간 사슴 무리는 바로 나였소. 그대는 중원의 주인이 될 사람이니, 내가 그대를 구해준 것이오.

    석륵은 그 말에 감격하여 노인에게 절하였다고 한다.
  • 석륵이 왕미를 죽였을 당시, 부하 장수 곽흑략(郭黑畧)이 천축국의 승려 불도징(佛圖澄)을 포로로 잡아왔다. 곽흑략이 불도징의 도술을 매우 존중하여, 매번 전쟁에 나설 때마다 그의 조언을 받고 승부를 예측하니, 석륵은 이에 의심을 품고 곽흑략에게 물었다.
    "나는 그대가 특별히 뛰어난 지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어떻게 매번 군사의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냐?"

    곽흑략이 답했다.
    "장군께서는 천성이 신묘하고, 신령이 돕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한 승려가 있는데, 그 도술이 매우 특별하여 장군께서 반드시 대업을 이룰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제가 이전에 말씀드린 모든 것은 그의 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를 들은 석륵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준 사람이구나."

    그리고는 곧 불도징을 불러들여 물었다.
    "불교의 도(道)에는 어떤 영험이 있는가?"

    불도징은 석륵이 심오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 도술로써 증명하려 하였다. 불도징이 즉시 바리떼에 물을 담고 향을 피운 후 주문을 외우자, 잠시 후 바리떼 안에서 푸른 연꽃이 피어났고, 그 빛이 눈이 부실 정도로 났다. 이를 본 석륵은 불도징을 깊이 믿고 따르게 되었다. 불도징은 또한 말하길,
    "왕자의 덕이 온 우주에 가득하면 사령(四靈)이 상서로운 징조를 나타내고, 정치가 부패하고 도(道)가 쇠퇴하면 혜성과 같은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니, 이는 고금의 공통된 증거이자 천인(天人)의 명백한 경고입니다."

    라 하니, 석륵은 이 말을 듣고는 불도징을 더욱 깊이 믿고 존경하였다고 한다.
  • 석륵이 업을 점령했을 때, 이를 제대로 통치하고자 장빈에게 물었다.
    "업(鄴)은 위나라의 옛 수도로 내가 장차 이곳을 경영하고 건설하려 하나, 이미 풍속이 번잡하여 현명하고 존경받는 인물로 이를 안정시켜려 한다. 누가 이 임무에 적임자겠는가?"

    이에 장빈이 말했다.
    "진나라의 옛 동래(東萊) 태수 남양 사람 조팽(趙彭)은 충성스럽고 명민하여 가히 시대를 보좌할만한 훌륭한 인재입니다. 장군께서 그를 임명하신다면 반드시 기대에 부응할 것입니다."

    이에 석륵은 조팽을 위군태수로 삼으려 하니, 조팽이 석륵을 알현해 눈물을 흘리고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전에 진나라에서 벼슬하여 그 녹을 받았습니다. 개와 말이 그 주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처럼 이를 잊지 못하고 있으나, 진나라의 종묘가 이미 무성한 풀로 변하였고, 큰 강물이 동쪽으로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압니다. 명공께서 천명을 받아 사명을 수행하심이 마치 용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남의 영예를 받아 두 성씨를 섬기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닙니다. 이는 어리석은 신의 굳은 의지일 뿐만 아니라, 명공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직 죽을 뿐,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으나, 만약 신에게 여생을 주어 신의 작은 소망을 이루게 하신다면, 이는 명공의 큰 은혜입니다."

    석륵 이를 듣고도 묵묵히 있자, 장빈이 석륵에게 말했다.
    "장군의 군기가 지나가는 곳마다 변절하지 않은 진나라의 관리가 없었습니다. 대의를 지키며 진퇴하는 이는 이처럼 드뭅니다. 현명한 이는 장군을 한고조에 비유하고, 자신을 사공(四公)에 비유하니, 이는 군신 상호의 이해입니다. 장군은 그 드문 고귀함을 이루기에 충분하며, 마땅히 그를 관리로 삼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석륵이 크게 기뻐하며 "우후(右侯)의 말이 내 마음에 맞도다."라 하고, 조팽에게 안거(安車)와 수레를 끌 말을 하사하는 대신, 조팽의 아들 조명을 참군으로 삼았다고 한다.
  • 석륵이 막 조왕에 올랐을 때, 도중(塗中)에서 큰 돌이 스스로 섰는데, 그 높이가 2장(丈)이었다. 석륵이 이를 자르라고 명하니, 그 안에서 물고기와 양의 형상이 나타났다. 석륵은 이를 상서롭게 여겨 그대로 두고, '현양(玄羊)'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현존 여부는 불명.

5. 창작물에서

전설판타지(…)이자 명목상 《삼국지연의》의 후속작인 《후삼국지》에서 후반부 주인공으로 나온다.

조운의 후손이라는 설정으로 '조륵'이었다가 나중에 자기 성을 석씨로 고쳐서 '석륵'이 된다. 왜 석씨가 되는고 하니 조운의 후손들이 서진군을 피해 도망가다가 산적을 만나 싸우는 도중에 산적이 노자가 들어있는 보따리를 들고 튀었는데 아기인 조륵이 거기 있었던 것... 나중에 조씨 집안의 집사인 급상이 도적들을 뒤쫓아가서 잡기는 했는데[24] 이미 일행들을 놓쳐버리고 만 것. 미아 조륵이 막장 캐삭빵 사치 대결로 유명한 당대의 거부 석숭의 형뻘[25] 되는 사람의 양자가 되어 석륵이 되었다는 석륵을 능욕하는 설정이다. 이 석숭이 작중에서든, 실제로든 8왕의 난의 주역 중 하나인 조왕 사마륜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양아버지 동생의 원수를 갚고자 서진과 대립하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소열제 유비의 후손이며 촉한 멸망시 자결한 북지왕 유심의 아들로 설정된 유요[26]와 대결을 한다는 스토리이다. 물론 결과는 역사상대로 석륵이 유요를 제끼고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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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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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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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서기(序記)」 2권 「태조기(太祖紀)」 3권 「태종기(太宗紀)」
탁발부 · 대나라 탁발규 탁발사
4권 「세조·공종기(世祖恭宗紀)」 5권 「고종기(高宗紀)」 6권 「현조기(顯祖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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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고조기(高祖紀)」 8권 「세종기(世宗紀)」 9권 「숙종기(肅宗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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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13권 「황후전(皇后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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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권 「신원·평문제제자손전(神元平文諸帝子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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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숭 · 장손도생 장손비 · 울고진 목숭
28권 「화발등전(和跋等傳)」 29권 「해근등전(奚斤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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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율제 고호 · 최영 · 봉의
33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왕헌 ·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설제
34권 「왕낙아등전(王洛兒等傳)」 35권 「최호전(崔浩傳)」 36권 「이순전(李順傳)」
왕낙아 · 차노두 · 노노원 · 진건 · 만안국 최호 이순
37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38권 「조옹등전(刁雍等傳)」 39권 「이보전(李寶傳)」
사마휴지 · 사마초지 · 사마경지 · 사마숙번
사마천조
조옹(刁雍) · 왕혜룡 · 한연지 · 원식 이보
40권 「육사전(陸俟傳)」 41권 「원하전(源賀傳)」 42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육사 원하 설변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43권 「엄릉등전(嚴棱等傳)」 44권 「나결등전(羅結等傳)」
엄릉 · 모수지 · 당화 · 유휴빈 · 방법수 나결 · 이발 · 을괴 · 화기노 · 순퇴 · 설야저 · 우문복 · 비우 · 맹위
45권 「위랑등전(韋閬等傳)」 46권 「두근등전(竇瑾等傳)」 47권 「노현전(盧玄傳)」
위랑 · 두전 · 배준 · 신소선 · 유숭 두근 · 허언 · 이흔 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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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윤 이령 · 최감 울원 · 모용백요
51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52권 「조일등전(趙逸等傳)」
조일 · 호방회 · 호수 · 송요 · 장담 · 종흠 · 단승근 · 감인 · 유병 · 조유 · 색창 · 음중달
53권 「이효백등전(李孝伯等傳)」 5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55권 「유명근등전(游明根等傳)」
이효백 · 이형 유아 · 고려 유명근 · 유방
56권 「정희등전(鄭羲等傳)」 57권 「고우등전(高祐等傳)」 58권 「양파전(楊播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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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요 · 배경헌 · 노관 · 봉숙 · 형장 · 배백무 · 형흔 · 온자승
86권 「효감전(孝感傳)」
조염 · 장손려 · 걸복보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87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우제 · 마룡팔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88권 「양리전(良吏傳)」
장순 · 녹생 · 장응 · 송세경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배타 · 두원 · 양돈 · 소숙
89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이 · 이홍지 · 고준 · 장사제 · 양지 · 최섬 · 역도원 · 곡해
90권 「일사전(逸士傳)」
휴과 · 풍량 · 이밀 · 정수
91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연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강식 · 주담 · 이숙 · 서건 · 왕현 · 최욱 · 장소유
92권 「열녀전(列女傳)」
임성국태비
93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증흥 · 구맹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정엄 · 서흘
94권 「엄관전(閹官傳)」
종애 · 구락제 · 단패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진송 · 백정 · 유등 · 가찬 · 양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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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권 「유총등전(劉聰等傳)」
유총 · 석륵 · 유하 · 모용외 · 부건 · 요장 · 여광
96권 「사마예등전(司馬叡等傳)」 97권 「환현등전(桓玄等傳)」 98권 「소도성등전(蕭道成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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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족 · 토욕혼 · 탕창강 · 고창 · 등지 · 만족 · 요족
102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차말 · 우전 · 백정 · 차사국 · 언기 · 쿠처 · 소륵 · 속특 · 파사 · 남천축 · 읍달
103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104권 「자서전(自序傳)」
위수
※ 105권 ~ 114권은 志에 해당. 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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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성씨가 없었지만 아들이 석씨가 된 후, 석씨로 정해졌다. 그는 석륵이 황제가 된 후 세종 원황제로 추존되었다.[2] 무진년 계해월 갑술일. 음력으로 10월 3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일이다.[3] 무진년 갑자월 기유일. 음력으로 11월 8일이고, 양력으로 12월 7일이다.[4] 경오년 정해월 임인일. 음력으로 10월 13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0일이다.[5] 신미년 계사월 무자일. 음력으로 4월 1일이고, 양력으로 5월 5일이다.[6] 왕연은 당시 죽림칠현의 뒤를 이은 청담 세계의 영수였다.[7] 동진을 건국한 중종 원황제로 사마의의 6남 사마주의 장손이었다.[8] 신미년 무술월 계해일. 음력으로 9월 9일이고, 양력으로 10월 7일이다.[9] 갑술년 병인월 임진일. 음력으로 1월 22일이고, 양력으로 2월 22일이다.[10] 갑술년 무진월 임신일. 음력으로 3월 3일이고, 양력으로 4월 3일이다.[11] 정축년 정미월 기미일. 음력으로 6월 8일이고, 양력으로 7월 3일이다.[12] 무인년 정사월 을유일. 음력으로 4월 9일이고, 양력으로 5월 25일이다.[13] 기묘년 정축월 무인일. 음력으로 12월 12일이고, 양력으로 320년 1월 8일이다.[14] 무진년 을축월 을해일. 음력으로 12월 1일이고, 양력으로 329년 1월 17일이다.[15] 무진년 을축월 기묘일. 음력으로 12월 5일이고, 양력으로 329년 1월 21일이다.[16] 광문제 유연에 명령에 따라 배정(裴整)이 지키던 하내(河内)를 공략할 때 석륵과 유요가 맺은 맹약.[17] 무진년 을축월 을유일. 음력으로 12월 11일이고, 양력으로 329년 1월 27일이다.[18] 계사년 경신월 무진일. 음력으로 7월 21일이고, 양력으로 8월 17일이다.[19] 고아는 헌제 과부는 후한의 태후[20] 원문은 欺자를 썼는데, 이는 '속이다'는 뜻도 있지만 '업신여기다'는 뜻도 있으며, 후자로 해석해도 뜻이 통한다.[21] 역량이나 업적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고, 석륵 자신도 이 자리에선 그렇게 얘기했으나 내심 그러한 반론을 신경써서 훗날, 천하를 끝내 모두 제패하진 못한 스스로가 조조에게 비교당할 수 있는 사실에 대해 걱정했던 게 이를 입증한다.[22] 실제로 석륵의 비평은 엄청난 용인술로 천하의 걸물들을 수하로 두며 장악하며 천하를 재패한 한고제에 대해서 석륵 자신이 그 같은 이를 만났다면 걸물 중 선두로써 따랐을 것이라는 찬사이며 본인의 압도적인 기량으로 복벽에 성공하며 중국을 다시 일통한 광무제에 대해서 자신도 그와 대등하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낸 것에 가깝다. 실제로는 대륙일통을 하지 못한 본인이 조조, 사마의와 비교될 것을 알았기에 그들의 치부를 보이며 저런 짓은 안한다는 비평이지 민족 관점의 사관은 절대로 아니다.[23] 당장 여러 부족이나 군벌 집단들의 연합체였던 전조가 어떤 식으로 개판이 되었는지 뻔히 본 석륵의 입장에서는, 저게 먼 과거의 일이거나 생판 남의 일이 아니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 산하에 유요니 왕미니 조억이니 석륵이니 하는 군벌들이 반독립적인 세력들이 되어버리면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뻔히 본 산 증인이자 당사자였으니... 전조 뿐 아니라 서진에서 팔왕의 난 돌아가는 꼴도 딱 저러다 멸망한 케이스였다.[24] 설정상 급상은 엄청나게 발이 빠르고 도끼를 잘 쓰는 캐릭터이다. 이 소설에서 급상은 말을 안 타고 싸우는데도 기병들만큼 빠르다.[25] 작중의 이름은 '석현'으로 나온다. 급상이 석현의 목장에 취직이 되어서 일을 하는데, 애가 없던 늙은이인 석현이 어느 날 대단한 꿈을 꾸고 나서 꿈에 나온 장소에 갔더니 급상 옆에서 놀고 있던 석륵이 있었고, 그 석륵을 양자로 삼았다는 식... 석륵과 급상이 목장에서 만난 사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판타지치고는 쓸데없는 곳에서 정사에 나오는 사실이 갑툭튀하는 셈이다...[26] 물론 전조 황제 유요는 유비와 관련이 없으며 유선의 아들 유요는 유심의 아들이 아니다. 애초에 유심의 처자는 유심이 자결하기 전에 모두 유심이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