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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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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
國共內戰 / 国共内战
Chinese Civil War
파일:Three_Campaigns_of_Chinese_Civil_War.png
기간
제1차: 1927년 8월 1일 ~ 1936년 12월 26일
제2차: 1945년 8월 15일 ~ 1949년 12월 7일 (사실상)[1][2]
1945년 8월 15일 ~ 현재 (명목상)[3]
장소
중국 대륙 전체 및 부속 도서(티베트 제외)
원인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공산당 탄압
중국공산당의 무력을 통한 국가 전복 야욕
교전 국가 및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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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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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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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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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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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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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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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혁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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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국군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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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국군
]][[대만군|
대만군
중화민국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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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만명(1946년)
365만명(1948년)
149만명(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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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농홍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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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해방군|]]
120만명(1946년)
280만명(1948년)
400만명(1949년)
피해
민간인 포함 약 5,000,000여명
결과
중국공산당의 승리
영향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중화민국중국 본토 주권 상실, 국부천대 단행
중국 군벌들의 완전한 몰락
중국의 분단, 양안관계의 성립
중국 대륙의 공산화

1. 개요2. 배경
2.1. 국공합작과 제1차 국공내전2.2. 중일전쟁과 제2차 국공합작
3. 전개
3.1. 제2차 국공내전 발발3.2. 인민해방군편제3.3. 요심 전역3.4. 회해 전역3.5. 평진 전역3.6. 옌시산의 몰락3.7. 양쯔강 도하3.8. 상하이 함락
4. 결과
4.1. 중국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4.2. 중화민국의 국부천대와 이후 계속된 교전
5. 중화민국의 패배 원인
5.1. 중일전쟁으로 인한 피해5.2. 미국의 중재5.3. 전략적 실책5.4. 공산당의 농촌 토지개혁5.5. 심리전의 실패5.6. 내부의 부정부패5.7. 외부지원의 차이
6. 영향
6.1. 아시아 공산 블록의 대확대6.2. 구 체제의 청산과 현대 동아시아 체제의 완성6.3. 공산권 세력 판도의 변화6.4. 지속된 체제 경쟁
7. 논란
7.1. 북한군 참전 논란
8. 여담
8.1. 고궁박물원 유물수송8.2. 치하 전차의 대활약
9. 어록10. 대중 문화
10.1. 드라마10.2. 영화10.3. 소설
11. 참고 문헌12. 관련 문서13.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제2차 국공내전의 전개[7]

국공내전(/国共内战)은 1927년 8월부터 1950년 5월까지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국민혁명군인민해방군 간의 전쟁이다.

중화민국(대만)에서는 동원감란시기() 또는 항공위국감란전쟁()이라고 부르며, 반란 세력인 중국공산당이 당시 중국의 중앙정부인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상대로 일으킨 내란으로 정의한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국인민해방전쟁() 또는 간단히 해방 전쟁(解放战争)이라고 부르며, 중국국민당중국공산당이 중국의 재건과 패권을 두고 벌인 내전으로 정의한다.

2. 배경

2.1. 국공합작과 제1차 국공내전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1912년에 중화민국이 건국되고 청나라는 멸망했으나, 초대 대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는 중앙 정부를 장악하여 쑹자오런 암살 사건 등 정적을 암살하고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국회를 무시하고 차관을 빌려오는 등 독재 정치를 폈고, 이에 반발하던 국민당은 계축전쟁을 일으켜 2차 혁명에 나섰으나 2달 만에 진압당하고 말았다. 위안스카이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감행하고 초급 총통제 실시로 황제적 지위를 누렸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단행함으로 중화제국을 세워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차이어, 량치차오 등이 호국전쟁을 일으켜 맞섰고 전국 각지에서 이에 호응하면서 열강들도 지지를 철회하자, 위안스카이는 궁지에 몰려 제제를 취소하고 3달 만에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후임 대총통 리위안훙이 국회와 약법 회복을 선포하고 8월 1일 국회가 다시 열리면서 상황이 좀 진정되나 싶었는데 돤치루이독재호법전쟁이 발발하고 결국 중국은 군벌들의 군웅할거의 난세에 돌입했다. 쑨원은 이런 군벌 세력들을 정리하여 진정한 통일 공화국을 세우려고 하였다.

한편 갓 건국되었고, 당시 서방 국가들에 의해 고립되어 있던 소련은 중국에 영향력을 확대하여 자신의 우방을 늘리려고 했다. 그래서 코민테른의 명령에 따라 공산당이 국민당에 협력하는 방침을 채택했고, 공산당원들은 당적을 가진 채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식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합작하게 되었다. 이것을 1차 국공합작이라고 한다. 국민당은 광둥성을 세력 기반으로 하고 있었지만, 당시 중국 대륙은 여전히 군벌들이 난립하던 상태였다.

국민당은 소련의 원조로 군대를 양성하여 국민혁명에 나섰고, 중국공산당도 이에 협력하여 중국은 중국국민당의 주도 하에 통일되는 듯 했다. 하지만 쑨원 생전부터 공산당과 국민당의 사이는 상당히 삐걱거렸다. 쑨원 본인부터 미하일 보로딘의 볼셰비키적 개혁에 대해서 중국엔 맞지 않는다고 거부했고 소련도 쑨원이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등, 국공 합작은 중국의 공산화라는 목표를 볼 때는 잠시 거치는 중간 단계에 불과했다. 그리고 국민당 내부에서 우파들은 숫자도 얼마 안 되는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을 잡아먹고 있다고 크게 불만스러워했으며 향신,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 군관이나 중산층 당원들도 공산당이 자신들의 사유 재산을 건드릴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쑨원 사후에 국민당이 후한민을 중심으로 한 동맹회 중심의 노동지파, 쑨원의 아들 쑨커를 중심으로 한 태자파,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 직계의 당권파로 갈라졌을 때도 가장 세력이 센 당권파 내부에서도 후한민의 우파와 왕징웨이의 좌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왕징웨이1925년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이후 장제스, 미하일 보로딘과 힘을 합쳐 후한민, 쉬충즈 등을 숙청했고 장제스와 함께 국민당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1926년 중산함 사건이 터지면서 장제스가 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키산카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적대적인 소련 고문들을 강제 귀국시킨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때까지 친소 용공파로 인식되던 장제스는 차차 우익으로 변해갔다.

중산함 사건에 충격을 받은 왕징웨이는 프랑스로 외유를 떠났고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는 1926년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군벌이 장악한 북양 정부를 토벌하기 위한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감행한다. 이후 국공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영왕운동, 천도논쟁 등이 잇달아 발생했다. 공산당은 왕징웨이 등의 국민당 좌파와 연합, 장제스를 군사 독재자로 비판하면서 북벌을 계기로 강성해진 장제스를 실각시키려고 했다. 특히 미하일 보로딘은 장제스의 국민당 상무 위원회 주석 자리를 폐지하고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의 권한을 축소시켰으며 급기야 4월에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면직시켰다. 이에 우파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결국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난징 정부를 수립하고 공산당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게 되었다.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와 공산당의 관계는 여전히 유지되었으나, 이후 소련의 방침이 바뀌어서 갑자기 공산당에게 자체적인 무장 세력을 조직할 것이며 국민당 중앙 집행 위원회를 장악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코민테른은 왕징웨이에게 새로운 공산당 방침을 통보하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국민당을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통보했다. 그제서야 공산당의 목표가 국민당 장악이라는 걸 알아차린 왕징웨이도 국공합작의 파기를 선언했다. 중국공산당은 우한 국민정부가 합작을 파기하기 3일 전 선제적으로 합작 파기 선언을 하였다.

이때 공산당은 8.7 긴급회의천두슈를 몰아내고 취추바이, 리리싼 등의 지도를 받아 난창 폭동,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 창사 폭동을 일으켜 중요 도시를 장악하려고 반격 작전을 펼쳤으나 모두 실패했고, 마오쩌둥, 주더, 장궈타오를 비롯한 유격대 지휘관들이 지휘하는 홍군정강산 해방구를 비롯하여 양쯔강 이남의 15군데에 달하는 소규모 해방구를 설립한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국민정부초공작전을 벌여가며 토벌을 감행하였다. 이후 상하이에 있던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이끌던 강서성 중앙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토지 개혁으로 농민들을 징집하면서 내전을 지속해나갔다. 하지만 제3차 초공작전 이후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주석 마오쩌둥과 보구를 비롯한 상하이 임시 당 중앙의 노선 갈등이 심각해졌고 제4차 초공작전에 즈음하여서는 마오쩌둥이 결국 실각했다.

이후 오토 브라운과 소련 유학파가 혁명을 지휘했지만 1933년 시작된 장제스의 제5차 초공작전에서 공산당은 궤멸 위기에 몰렸다. 이에 중국공산당은 잔존 병력과 당원들을 재편하여 부대별로 해방구를 탈출하여 서부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국민혁명군과 각 지역 군벌과의 끊임없는 전투 속에서도 핵심 당원을 보존한 채 중국 북서부의 산시성 옌안에 도착하였는데 이것을 대장정이라고 부른다.

2.2. 중일전쟁과 제2차 국공합작

홍군이 괴멸되지 않고 서북부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자, 장제스는 만주사변 이후 본거지를 잃고 산시성에 주둔 중인 장쉐량봉천군벌 잔당 세력에게 토벌을 명하게 된다.[8] 장쉐량의 군대는 홍군을 공격했지만 참패했고, 중국인끼리 싸우기보다는 일본과 싸우자는 공산당 측의 선전에 설득되면서 비밀리에 홍군은 휴전 협정을 맺고 전투를 중단한다. 이것에 열받은 장제스가 장쉐량을 닥달하기 위해서 산시성으로 오자, 오히려 장쉐량은 장제스를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 중단 및 전면적인 항일 전쟁을 강요하는 이른바 '시안 사건'을 일으켰다. 결국 시안 사건의 여파로 "제국주의자 일본에 맞서 싸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공산당의 홍군이 국민당의 국민혁명군의 지휘를 받는다는 형식으로 2차 국공 합작이 성립되었다.

1937년 일본 제국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장제스는 루산회의를 소집, 국민당의 모든 인물들은 물론 주더, 저우언라이, 펑더화이를 비롯한 공산당의 여러 주요 인물들까지 초청하여 루산성명을 발표함으로 항일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홍군을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편성하여 옌시산 휘하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도록 지시했다. 이후 홍군은 전쟁 초반에 옌시산과 협력하여 핑싱관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수차례 격퇴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옌시산의 영지인 산시성을 공격하여 타이위안을 점령하고 옌시산도 산시 남방으로 밀려나자 공산당은 옌시산과의 협력을 중단하고 독자적인 활동에 나섰는데, 이 독자적인 활동이란 다름아닌 세력 확장이었다. 마오쩌둥은 일본군과의 교전을 극도로 회피하는 것을 명령하는 한편, 해방구를 건설하여 홍군 지배 영역을 늘리는데 치중했고 한 때 화북의 일본군 점령지 중에 일본군이 통제할 수 있는 지역이 10%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신멸작전으로 팔로군은 화북에서 약화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들은 국민당과의 협정 위반이었으며 엄연히 자신들이 상관으로 모시겠다고 자처한 국민당 상부의 모든 명령들을 무시한 처사였다. 이렇게 확장된 홍군 영역들은 대부분 국민당이 홍군에게 할당해줬던 영역 바깥이었다. 거기다가, 홍군은 국민당 유격대나 국민당 부대들을 필요에 따라 닥치는 대로 습격하기도 서슴지 않았고 국민당의 지방 정부를 소멸시키며 확장했다.

이 때문에 명목상 홍군의 상관인 옌시산은 물론이고 국민당 전체가 굉장히 열받았었고, 국민당 상부에서 수차례 "하라는 항일은 안하고 도대체 뭐하냐!" 라고 항의 전문을 보내기도 했지만 공산당은 그냥 무시해버렸다. 결국, 어그로가 오를 대로 오른 국민당과 공산당이 환남사변으로 대충돌하고 만다. 이 이후로 국민당은 공산당에 대한 모든 원조를 중단하고 공산당은 국민 참정회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는 등 실질적으로 국공합작이 깨지게 된다.

물론, 공산당 내부에서도 왕밍 등은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국민당과 계속 협력하여 항일 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공산당도 중국인이니만큼 조국을 침략한 일본군을 보고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펑더화이가 백단대전을 계획했을 때는 홍군 지휘관들이 앞을 다퉈서 자청했고 작전에 원래 포함되지 않은 부대들도 자발적으로 참가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백단대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피해는 미미했고 중국군의 피해는 컸기에 마오쩌둥은 백단대전이 전투를 회피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자신의 방침에 어긋난다고 심히 못마땅해했으며 자칫 패배하기라도 했으면 기껏 모아놓은 세력이 모두 다 날아갈 판이었다고 버럭대는 바람에 그 이후론 공산당은 변변한 전투 기록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3. 전개

3.1. 제2차 국공내전 발발

제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후, 공산당과 국민당 정부간의 회담이 열리는데, 1945년 8월 화평교섭회담(和平交涉會談)이 개최되고 같은 해 10월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발표, 정치의 민주화와 함께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부강한 중국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뜻을 같이하고 의견을 도출해내었다. 참고로 쌍십협정이란 十월(10월) 十일(10일)에 협정이 발표되었다고 해서 쌍십 협정이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러한 협정을 이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국민당 역시 공산당이 복종하는 형식을 고집했기에 협상은 실질적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중원의 진정한 주인은 단 한 명만이 될 수 있었고, 이제는 그 최강자를 가려내야만 했다. 쌍십 협정이 벌어지고 있던 그 순간에서도 산시성 상당 지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그 밖에도 허베이, 만주 일대에서 일본군이 물러나고 무주공산이 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게다가, 이 쌍십협정에서도 양자 모두 상대방을 거꾸러뜨릴 궁리만 하고 있느라 국공합작이 이뤄진다면 필요한 실무적 협상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채 뜬구름이나 잡는 소리에만 합의가 이뤄졌고, 공산당은 화북 5개의 성과 독자적 군대 보유를 끝까지 고집함으로서 공산당 자신들의 세력이 국민당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장제스는 1946년 3월 미국 국무장관 마셜이 방문하여 정전협정을 주선하고 귀국하기가 무섭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국민당 지배 영역 내부의 철로와 각종 요충지를 장악한 공산당을 완전히 몰아내지도 않고 무리한 공격이 가해짐으로써 안정되지 않은 후방을 짊어지고 싸우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만주에서 대패하고 난 뒤 항복투항 릴레이를 통해서 보인다. 당시 홍군은 숫자는 100여만으로 크게 불어나긴 했지만 중화기가 부족해 장제스가 작정하고 공격하면 불리한 상황이었는데 이때 소련의 협조로 만주의 일본군 무기들을 대량으로 공여받아 무장을 몇 배로 강화했다. 게다가 일본에게 산업지구를 초토화당한 중국의 산업생산은 일본이 개발한 만주보다 못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중공이 우세해진다.

결국 1946년 6월 장제스가 허베이 지역의 해방구에 공세를 명령하면서 내전이 재개된다. 초반에 국민혁명군은 상당히 선전하면서 사평 전투에서 홍군을 섬멸하였고 후쭝난은 산시의 옌안을, 바이충시는 만주를 맹공하여 창춘, 지린을 잇따라 점령하고 하얼빈까지 치고 올라갔다. 이에 6월 6일, 린뱌오가 하얼빈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상부에 건의하고 있었을 정도로 공산당에게 초기 상황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공산당은 미국의 로비와 국민당이 정전협정을 어겼다고 하소연을 했고 이에 미국은 이 이상의 진격을 하면 5억 달러치의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경고[9]를 내렸고 물주인 미국의 말을 어길 수가 없었던 장제스는 깨갱하면서 바이충시에게 휴전을 명령했다. 동북초비사령관 바이충시는 난징까지 날아와서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했지만 장제스는 바이충시를 군정부장에 임명하여 내전에서 발을 빼도록 했다. 그리고, 미국이 벌어다준 이 소중한 시간 동안 공산당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정비하면서 대책없이 자신의 영역 내부 깊숙히 들어온 국민당을 타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사실 여기까지 보면 공산당이 밀리는 것 같지만, 이러한 교전 대부분은 홍군의 주력부대와의 교전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때문에 국민혁명군의 병력 밀도는 느슨해진 반면 홍군의 밀도는 오히려 높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의 정치, 군사적인 도움[10]으로 인해서 전열을 가다듬은 공산당은 만주, 허베이, 그리고 양쯔강 중류에서 대규모의 군사 행동을 벌인다. 이러한 행동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만주에서 완전히 철수하거나[11] 만주에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야 했지만 둘 다 국민당의 역량을 완전히 벗어난 일이었다. 결국 국민당은 화중의 해방구를 토벌함과 동시에 공산당을 협상에 나오도록 독촉하기 위해 1947년 3월 옌안을 공격하지만 공산당 핵심 당세포와 군대는 이미 첩보를 입수하고 탈출한 뒤였다. 국민당은 이것을 대규모로 홍보했지만 공허한 승리였고, 이것은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거둔 최후의 대규모 승리였다.

3.2. 인민해방군편제

1947년 팔로군신사군중국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여 다음과 같은 편제를 갖추었다. 각 야전군 사령관들은 1955년 계급이 도입되었을 때 모두 원수 계급으로 진급한다.
  • 제2야전군(第二野战军). 이전 중원야전군(中原野战军)
    변구(晋冀鲁豫边区)의 팔로군을 중심으로 편성.
    사령관: 류보청, 정치위원: 덩샤오핑
    • 제3병단(第三兵团)
      • 제10군(第十军)
      • 제11군(第十一军) - 정치부주임: 류화칭
      • 제12군(第十二军)
    • 제4병단(第四兵团)
      • 제13군(第十三军)
      • 제14군(第十四军)
      • 제15군(第十五军) - 사령관: 친지웨이
    • 제5병단(第五兵团)
      • 제16군(第十六军)
      • 제17군(第十七军)
      • 제18군(第十八军)
    • 직속부대(直属部队)
      • 제19군(第十九军)
      • 제58군(第五十八军)
      • 특종병종대(特种兵纵队)
    • 후근사령부(后勤司令部)
  • 제3야전군(第三野战军). 이전 화동야전군(华东野战军)
    신사군(新四军)을 중심으로 편성된 산동야전군(山东野战军)과 화중야전군(华中野战军)을 합쳐 편성.
    사령관 겸 정치위원: 천이, 부사령관 겸 제2정치위원 쑤위
    • 제7병단(第七兵团)
      • 제21군(第二十一军)
      • 제22군(第二十二军)
      • 제23군(第二十三军)
      • 제35군(第三十五军)
    • 제8병단(第八兵团)
      • 제24군(第二十四军)
      • 제25군(第二十五军)
      • 제26군(第二十六军)
      • 제34군(第三十四军)
    • 제9병단(第九兵团) - 사령관: 쑹스룬
      • 제20군(第二十军)
      • 제27군(第二十七军)
      • 제30군(第三十军)
      • 제33군(第三十三军)
    • 제10병단(第十兵团) - 사령관: 예페이
      • 제28군(第二十八军)
      • 제29군(第二十九军)
      • 제31군(第三十一军)
    • 직할(直辖)
      • 제32군(第三十二军)
    • 특종병종대(特种兵纵队)
    • 종대(两广纵队) - 1947년 3월부터 1949년 3월까지.
  • 제4야전군(第四野战军). 이전 동북야전군(东北野战军)
    만주 방면의 팔로군, 신사군, 동북항일연군으로 결성된 동북인민해방군(东北人民解放军)을 바탕으로 편성.
    사령관: 린뱌오, 정치위원: 뤄룽환
    • 제12병단(第十二兵团): 사령관: 샤오징광
      • 제40군(第四十军)
      • 제45군(第四十五军)
      • 제46군(第四十六军)
    • 제13병단(第十三兵团)
      • 제38군(第三十八军)
      • 제47군(第四十七军)
      • 제49군(第四十九军)
    • 제14병단(第十四兵团)
      • 제39군(第三十九军)
      • 제41군(第四十一军)
      • 제42군(第四十二军)
    • 제15병단(第十五兵团)
      • 제43군(第四十三军)
      • 제44군(第四十四军)
      • 제48군(第四十八军)
    • 제21병단(第二十一兵团)
      • 제52군(第五十二军)
      • 제53군(第五十三军)
    • 직속부대(直属部队)
      • 제50군(第五十军)
      • 제51군(第五十一军)
      • 제54군(第五十四军)
      • 제55군(第五十五军)
      • 제58군(第五十八军)
      • 양광종대(两广纵队) - 1949년 3월부터 1950년 1월까지.
    • 제4야전군후근부(第四野战军后勤部)
    • 제4야전군특종병사령부(第四野战军特种兵司令部)
      • 전차사(战车师)
      • 기병제5사(骑兵第5师)
      • 포병제8사(炮兵第8师)
  • 화북야전군(华北野战军)
    변구(晋察冀边区)의 팔로군을 중심으로 편성.
    후일 제18병단과 제19병단이 제1야전군으로 전출되었고, 제20병단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직할로 베이징-톈진 지역에 주둔했다.
    사령관: 녜룽전, 정치위원: 보이보[13]
    • 제18병단(第十八兵团)
      • 제60군(第六十军)
      • 제61군(第六十一军)
      • 제62군(第六十二军)
    • 제19병단(第十九兵团)
      • 제63군(第六十三军)
      • 제64군(第六十四军)
      • 제65군(第六十五军)
    • 제20병단(第二十兵团)
      • 제66군(第六十六军)
      • 제67군(第六十七军)
      • 제68군(第六十八军)

3.3. 요심 전역

결국 공산당을 섬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국민당이 진격을 멈추고 딱 먹기 좋은 표적으로 전환되자 처음엔 정신없이 밀리던 인민해방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보급에 애로사항이 꽃피던 국민혁명군에 대한 총반격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1947년 하반기부터 전략적으로 공세로 전환한 공산당은 1948년 초에 이르어 만주의 99%와 허베이의 대부분을 장악한다.[14] 린뱌오는 1948년 봄부터 공세로 전환, 2월에 요양영구를 함락시켰고 3월 14일에 사평가, 3월 19일에 영길을 점령했다. 이 시점에서 만주에서 군대를 대규모로 철수할 방법은 사라진 상황이었고 결국 장제스는 해당 구역을 요새화하여 싸운다는 방침을 내렸다. 하지만 빈곤한 보급과 내부 공산분자들의 공작으로 50만이 넘는 군대가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 병력들은 미군이 훈련시키고 미제 무기로 무장한 장제스의 최신식 정예 부대와 중앙군 부대들이 섞인, 장제스의 핵심 전력들이었다. 장제스는 10월 8일 직접 선양시로 날아와서 전투를 독려하고 관내의 병력을 빼내어 증원을 시도했지만 중공군은 보급 부족에 시달리는 국민혁명군을 어김없이 격파했다.

국민당이 위처럼 공산당에 몰리는 과정에서 국민당 계열 중국인들이 조선족들을 많이 학살했는데 만주 조선인들의 친일 행적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으로 일부 조선인들은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고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국에서 중국인들의 영토를 분배받는 등 일본군의 침공행위와 관련이 있던 탓에 중국인과 국민당의 증오가 상당했다. 이런 친일 부역에 대한 분노가 국공내전을 통해 표출됐다.[윤휘탁,2012] 국민당이 조선인을 학살한 건 비판거리지만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 제국에 부역한 게 사실이라 한국에서도 제대로 문제 삼지는 못한다. 그리고 한국에선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무조건 피해자라고 가르쳤는데 만주국 시절 부역행위 때문에 중국인들이 증오해서 보복 학살했다고 하면 국민들에게 혼란을 주는 점도 있을 것이다.[16]

1948년 10월 9일 중공군 둥베이야전군이 린뱌오의 지휘 하에 25만 명의 병력으로 1948년 9월 7일 진저우를 공격해 점령했고 창춘도 완전히 포위되었다. 린뱌오는 창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 것을 지시, 창춘을 포위하여 굶겨 죽인다는 작전을 강구했고 10만 명의 국민혁명군과 50만 창춘 시민들은 쫄쫄 굶다 16만 명이 아사하는 참혹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결국 장제스는 창춘을 포기하고 포위망을 뚫어 선양으로 철수하란 지시를 내렸으나 창춘을 사수하던 국민혁명군 60군 사령관 증택생이 반란을 일으켜서 무산되었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그럴 역량이 있었는지는 별개로 치더라도 말이다. 1948년 10월 17일 증택생의 반란에 이어 둥베이 지역의 소공 작전의 총책임자인 정동국 중장마저도 10월 21일에 공산당에 투항하면서 창춘은 완전히 공산당에 넘어갔고 인민해방군은 의기양양하게 창춘에 입성했다. 곧이어 선양까지 함락됨에 따라 11월 즈음에 국민당은 만주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린뱌오는 관내로 진출, 녜룽전, 허룽과 합세하여 화베이 공격에 가담했는데 요심 전역이라 불리는 5개월 간의 전투 끝에 장제스는 만주는 물론 수십만의 정예 병력과 막대한 물자를 잃었다. 이 와중에 장징궈가 야심차게 시도한 화폐개혁마저 실패하면서 국민당은 더욱 나락으로 몰렸다.

하지만 중공군이 민심을 바탕으로 이겼다는 공산당 선전과 달리 공산당은 창춘에서 국민당을 이기기 위해 수십만의 무고한 민간인의 죽음을 야기했고 창춘을 탈출하는 민간인들을 대대적으로 사살했다. 린뱌오조차도 그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마오쩌둥에게 전략의 수정을 요청하였으며 마오쩌둥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9월 11일 마오쩌둥의 허가 없이 창춘의 민간인들을 석방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마오쩌둥은 이 명령을 취소시켰다. 또한 16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강제로 징용되었고 80만 명의 전투원 또한 징병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강압적이었음은 당연했고 공산당은 협조하지 않는 민간인들에 대해 잔혹하게 보복했다.

요심 전역의 참혹한 패배와 경제개혁의 대실패가 겹쳐서 민심 이반이 심각해지자, 11월 26일 중화민국의 첫 헌정 내각이었던 웡원하오 내각이 총사퇴하였고 장제스의 리더십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3.4. 회해 전역

다음은 제남 전역에서 승리한 중공군의 서주 공략이었다. 중공군은 화둥 야전군과 중원 야전군 소속 32개군 등 도합 60만 대군으로 공세에 돌입했다. 이에 맞선 중화민국 국민혁명군도 60만이었지만 이들은 제남 전역의 패배와 사기 낮은 군벌군들의 혼재로 인하여 불안정했다. 사령관 유치는 수세적인 전략을 추구했으나 59군과 77군의 반란으로 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중공군은 서주의 핵심 교통로인 농해 철도를 장악하고 황백도가 지휘하는 제7병단을 포위했다. 구정천의 2병단과 이미의 11병단이 구원하려 했으나 중공군에게 제지되었고 구정천은 황백도랑 사이도 나빴던지라 11월 22일에 있었던 7병단의 전멸과 황백도의 전사를 수수방관했다. 상황이 이런 모양이니 일사불란한 중공군의 공세에 국민군이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7병단의 패배로 국민혁명군 18개 사단이 전멸했고 서주의 국민혁명군은 남북으로 갈려 고립되었다. 이 상황에서 장제스는 서주의 요충지 숙현을 탈환하여 진포 철로를 다시 개통한 다음에 서주의 병력을 철수시켜 난징의 방어를 강화하려 했으나 중공군의 손바닥 위에 있었던 국민혁명군 12병단이 또 중공군의 공세에 포위되었다.[17] 결국 장제스는 두위밍에게 서주 포기를 명령했으나 마오쩌둥은 즉각 퇴각하는 두위밍을 습격, 두위밍 휘하 30만 병력을 포위해버렸다. 12월 15일 12병단이 전멸했고 17병단도 역시 전멸했다. 1949년 1월 6일 총공세로 두위밍 역시 패배, 30만 병력이 증발했으며 두위밍은 1월 10일에 포로로 사로잡혀 전향하게 된다. 국민혁명군은 이 전투에서 또 55만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다. 회해 전역의 패배는 정면 대결에서조차 국민당이 공산당에 밀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국민당 내의 분열로 총통직에서 물러나고 리쭝런이 총통 대리에 취임한다.

이 시점에 이르러 장제스의 비서 천부레이가 1948년 11월 난징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결하고 장제스의 맹우인 다이지타오도 1949년 2월에 광저우에서 자결했다.

3.5. 평진 전역

파일:attachment/PLA_Enters_Peking.jpg
베이징에 입성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당연하지만 승기를 잡은 마오쩌둥은 만주에서 만족하지 않고 즉각 남진을 개시했다. 이미 요심 전역이 끝나기 전부터 산둥반도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어 9월 23일 성도 제남시가 중공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1948년 11월부터 중원 야전군이 회해 전역에 돌입, 두위밍에 맞섰다. 두위밍은 중공군을 이기지 못하고 참패했고 이러한 패배의 배경엔 장제스의 무리한 간섭과 병크들이 있었다. 이어 평진 전역에서 국민혁명군은 참패했고 압도적인 병력으로 베이징을 포위한 린뱌오의 부대는 국민혁명군 수비 사령관 푸쭤이를 설득하여 무혈 입성했다. (평진 전역) 장제스는 푸줘이에게 독전 편지를 보내는 등, 사수할 것을 권했으나, 푸줘이는 공산당원이었던 딸의 설득으로 시를 공산당에 무혈로 넘겼다. 장제스는 중앙군이라도 빼려 했으나 푸줘이의 비협조로 인해 그것도 실패했다. 다만, 무혈로 넘기는 항복 조건으로 공산당은 베이핑을 수비하던 국민혁명군이 철수할 수 있도록 포위망을 열어주었다. 이 덕분에 베이징 시내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항복 회담장에서 푸쭤이가 한 말은 한마디, "나에겐 죄가 있습니다(我有罪)."였다고 한다. 항복을 결정한 뒤, 참으로 복잡한 심경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공산당도 이를 감안해서인지 이후 푸쭤이는 중국의 수리부(水利部) 장관을 20년간 역임하는 등 편히 지낼 수 있었다.

여하튼 베이징의 함락으로 중공군은 화베이 일대를 확실하게 장악하게 된다. 어차피 푸쭤이가 베이핑에서 농성을 했다고 한들, 보급이 단절되고 완전히 포위된 국민혁명군 수비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으며, 베이징의 수많은 문화재들만 작살내고. 중공군의 진격을 몇 주 늦췄을 뿐이며, 어차피 결과는 국민당이 완전히 참패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민정부는 150만이 넘는 병력을 상실했다.

3.6. 옌시산의 몰락

한편 40여년 간 산시성을 지배하며 사실상의 왕으로 군림하여 온 옌시산은, 군벌들 중에서는 예외적으로 강한 전투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의지와 전투 능력이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서 이미 1947년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 과정에서 옌시산은 인민해방군에 참패했고 베이핑이 함락되자 인민해방군의 정면 공격에 노출되어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48년 9월 28일 녜룽전이 산시성 침공을 개시했고 옌시산은 8만 명의 병력으로 맞섰지만 잇달아 참패하고 포위되기에 이르렀다. 옌시산은 투항한 일본군과 후쭝난이 공수해준 지원군을 동원하여 치열하게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고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옌시산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기에, 공산당 간첩들과 변절한 부하들을 모조리 색출해 목을 매달아버린 다음에 타이위안 전체를 폭파시킬 준비까지 하는 악독한 각오로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 옌시산의 처절한 저항에 녜룽전은 타이위안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인민해방군의 초점이 베이핑 함락에 집중되면서 옌시산은 잠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베이핑이 함락되자 옌시산은 엄청난 대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물자도 병력도 부족했던 옌시산은 1949년 2월 난징으로 가서 리쭝런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리쭝런도 당장 제 코가 석 자라 딱히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편 인민해방군의 공세로 인해 옌시산은 다시는 산시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옌시산의 부하 왕징궈는 공산당의 전향 제안을 거부하고 끝까지 맞섰으나 인민해방군의 공세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고 4월 24일 타이위안이 함락됨에 따라서 산시성도 무너졌다. 이제 후쭝난, 바이충시 정도를 제외하면 국민당이 믿을 수 있는 병력은 없다시피 했다. 한편 난징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옌시산은 행정원장 겸 국방장관에 임명되지만 결국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달아나는 처지가 된다.

3.7. 양쯔강 도하

Red Sweep China
공산군이 중국을 휩쓸다
1948년, 난징으로 가는 길목을 장악하고 남쪽으로 쇄도하는 인민해방군. 고립된 국민혁명군은 미약한 항공 보급으로 버티려 하나 점차 밀리고 있다.

이후 인민해방군은 계속 남진하면서 양쯔강에 이르게 되었다. 양쯔강은 천연의 장벽이었기 때문에, 국민당은 이를 경계로 재기를 하려고 했다. 리쭝런이 공산당과 협상을 벌였지만, 공산당은 자신들이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협상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당시 국민당은 한반도를 예로 들면서 양쯔강을 경계로 한 남북 분할을 제안했다고 한다. 영화 건국대업에서 이러한 장면이 나오는데, 저우언라이가 "중국은 조선이 아니오. 장강삼팔선이 아니고요."라고 대답한다.
Nanking Waits For The End
최후를 기다리는 난징
1949년, 함락 직전의 난징. 중화민국 정부의 주요 각료들은 이미 피난했고, 총통부에는 리쭝런과 그의 참모만이 남았다. 중화민국 해군 함대가 인민해방군의 도하를 막기 위해 양쯔강을 순찰하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바꿀 순 없었다.

공산당은 내전을 일으킨 전범으로서 장제스 외 48명을 체포할 것, 헌법을 폐기할 것 등의 8가지 조건을 내걸었지만 말이 좋아서 조건이지 사실상의 무조건 항복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조건에 반발한 국민당 정부는 협상을 거부하고 국민당 협상단은 결국 아예 공산당 측으로 전향한다. 인민해방군의 도하 작전이 시작되자 국민혁명군 일부가 배신하여 인민해방군으로 넘어가 역으로 아군에게 총을 돌리는 상황이 일어났고, 결국, 양쯔강 방어선이 뚫리자 4월 23일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되고 난징의 총통부에는 홍기가 내걸렸다. (양쯔강 도하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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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부 점령(占领总统府)》[18]
Shanghai: Exodus Continues As Reds Are Executed
공산주의자들이 처형되고 탈출 행렬이 이어지는 상하이
1949년, 인민해방군이 진격해오자 패닉에 빠진 상하이의 모습. 외국인들은 본국에서 급파한 함선들을 통해 빠져나가고 있으며, 수많은 중국인 시민들 또한 배편을 구해 달아나고 있다. 남은 시민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한편 국민혁명군 병사들은 공산당 스파이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고 있다.

3.8. 상하이 함락

Shanghai Under Red Control
중국공산당 지배 하의 상하이
1949년, 상하이를 점령한 인민해방군

이후 인민해방군은 상하이로 진격했고, 장제스는 당시 중국의 최대도시이자 중국 경제의 중심지인 상하이를 사수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으나, 5월 27일 간단히 함락되었다. 난징에서 참패하고 패주한 국민정부는 광저우로 퇴각했다가, 10월 14일 광저우마저 함락되자 중일전쟁 당시 임시 수도였던 충칭시로 다시 퇴각한다.

4. 결과

4.1. 중국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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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1949년 10월 1일, 공산당의 마오쩌둥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10월 14일 광저우시를 점령하고, 11월 30일 중화민국의 임시 수도 충칭시를 함락시켰다. 국민당이 새로 피신한 청두시까지 12월 27일에 점령 당하고, 공산당이 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4.2. 중화민국의 국부천대와 이후 계속된 교전

대륙을 빼앗긴 중화민국타이완섬으로 거점을 이동하고 지금의 대만이 된다. 자세한 것은 국부천대 참조.

중화민국의 마지막 대륙 수도였던 청두시까지 함락시킨 이후 중국공산당은 아직까지 내륙 곳곳에서 저항중인 국민혁명군 잔당과 해안의 섬들을 점거하여 해상 봉쇄 중인 국민혁명군 소탕 작전에 나선다. 그 결과 쓰촨성, 후난성, 구이저우성, 윈난성, 광시성, 광둥성 일대에서 저항중이던 국민혁명군 잔당을 1952년까지 완전 소탕하였다. 또한 어선징발한 대규모 상륙전을 여러 차례 감행해 1955년까지 타이완 섬을 제외한 국민혁명군 최대 거점이던 하이난 섬을 비롯해 저우산 군도, 완산 군도, 난아오 섬, 둥산 섬, 난펑 섬, 다천 군도 등 아직까지 국민당이 점거 중이던 대륙 근해의 여러 도서 지역 거점들을 진먼섬마쭈 제도를 제외하고 대부분 수중에 넣었다. 한편 공산당은 신장칭하이성 등 서북 지역에서 저항을 이어나가는 국민당계 회족, 위구르족 군벌, 티베트에 대해서도 소탕 작전에 나서 1958년까지 완전 소탕하였다.

대륙에서 중화인민공화국(현재의 중국)이 새롭게 건국되고 중화민국의 잔당들이 대륙에서 대부분 정리된 이후 중국은 마지막으로 중화민국 최후의 거점인 타이완 섬 공격을 몇 차례 검토하지만 이후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을 지원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게 되었다. 북한이냐 대만이냐에서, 미 해군 함대를 뚫을 방법이 없어 북한을 택한 것이다. 그래도 대만 공격에 대해 미련을 못 버린 중국은 1958년 진먼 포격전으로 한 번 시도를 해보았으나 대만의 강력한 저항에 결국 포기한다. 이후 양안의 형세가 교전 없이 안정화되면서 내전은 이로서 사실상 종결된다.

5. 중화민국의 패배 원인

그 어디에도 오늘날 우리 당처럼 노후하고 퇴폐한 정당이 없다. 얼이 빠졌고, 기율도 없으며, 옳고 그른 기준조차 없다. 이 따위 당은 이미 오래전에 부수어 쓸어버려야 했다.
1948년 1월, 장제스 #

국공내전의 흥미로운 점은 승리한 공산당은 물론이고 패배한 중화민국 내에서조차도 참패의 원인과 문제점을 국민당 내부에서 찾는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즉, 중화민국은 처음부터 내부의 문제점을 해결하지도 못했고 무리한 내전을 벌였기에 참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5.1. 중일전쟁으로 인한 피해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라 봐도 무방하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을 지배하며 일본 제국에게 맞서 싸우다 300만 ~ 1,000만[19]의 사상자와 132만의 사망자를 낸 국민당과 달리 50만의 사상자도 내지 않은 인민해방군의 피해는 당연히 체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국민당군은 중일전쟁 초반에 쓸만한 병력이 죄다 증발해버렸고 이치고 작전으로 쐐기가 박혀버렸다. 반면 공산군은 일본군과의 교전을 피해다니며 열심히 몸집을 불렸다. 물론 일본 제국의 항복 이후에도 국민혁명군이 우위였던 건 변함 없지만 일본 제국과 피터지게 싸워 승리를 얻어낸 국민당과 달리 세력 확장을 한 인민해방군과의 간격은 많이 좁혀진 상태였다. 당장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된다. 당시 국민당에게 인민해방군은 언제든지 쓸어버릴 수 있는 상대였고 실제로 일본 제국도 국민당을 강대한 적으로 인식하고 대적했지 공산당은 비적 취급을 했고, 전쟁중에도 국민당과 싸웠다는 보고서는 많지만 공산당은 '그게 뭐더라?' 정도의 존재감을 보인다. 실제로 중일전쟁으로 국민혁명군이 본 피해는 공산당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1933년 폐량개원 개혁으로 화폐를 은화로 통일한 후 각 지방마다 군벌들이 마구 남발하는 화폐를 1935년 법폐개혁을 통해 법정 화폐로 통일하고, 은본위제를 폐지했으며, 농촌 진흥 운동과 공업화 정책을 통해 강소, 절강, 안휘성 일대에서 빠른 경제 성장이란 업적을 남겼다. 이는 십년 건설, 황금 10년이라 부를 정도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과실들은 중일전쟁을 통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수운, 철도, 도로를 비롯한 국내 수송망이 거의 다 붕괴되었고 해외와 교류할 창구도 잃어버렸으며 주 수입원인 농장, 세관 등도 상당수 상실하여 재정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거기에 전면전은 여전히 진행 중인 상태여서 막대한 양의 물자가 필요했고 수입은 터무니없이 줄어버린 상태인 데 반해서 일본군 점령지에서 5,000만 ~ 9,000만에 달하는 피난민이 내륙으로 몰려오면서 물자 수요는 훨씬 올라갔는데 공급은 바닥을 치는 상황에 치달았다. 그러니 인플레이션의 발생은 어찌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중일전쟁이 끝난 뒤에 국민당 정권은 경제 재건을 추진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고 민심이반이 나타나고 있었다. 거기에 2차 국공내전이 터지면서 사회 혼란과 경제 붕괴는 더욱 가속화되었고, 인플레이션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웡원하오 내각은 1948년 8월,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을 결정하였고 장징궈를 경제중심지 상하이로 파견, 물가통제와 화폐개혁을 포함한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소련 유학파 출신인 장징궈는 절강 재벌들의 매점매석을 초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가혹한 자본가 탄압에 들어갔지만, 상하이 시장 우궈전 등 친미 자유주의자들의 반발만 사면서 경제 개혁은 참혹하게 실패했다.

사실 1940년대 후반의 화폐 개혁은 국공내전 전비로 인한 재정 적자와 초인플레이션을 만회해보려고 단행한 것인데, 이것이 실패하면서 오히려 인플레이션이 더욱 심화된다. 그리고 이것이 국민당의 지지 기반인 양쯔강 삼각주중산층들의 재산을 모조리 날려버리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다.

5.2. 미국의 중재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전쟁을 일으킨 국민당을 두고볼 수 없었던 미국은 법조인 출신의 패트릭 헐리를 보내 내전을 중재했다. 이로 인해 1945년 10월 10일에 휴전조약이 체결되었으나 곧바로 이어진 국경분쟁으로 다시금 전투가 시작되어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미국은 조지 마셜을 보내 둘을 강제로 휴전시켰다. 이 기간 동안 만주를 점령한 소련은 일본군이 두고 간 엄청난 물자들을 모조리 중국 공산당에 넘겨주었는데, 이것이 대략 소총 70만 정, 기관포 1만 4,000정, 탱크 700대에 달한다. 당연히 이 군수품들은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국민당에 맞서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에게 별 볼일 없던 치하 중전차가 도로가 잘 발달되지 않았던 샛길을 통해 기동력으로 국민혁명군을 기습하는 등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20]

물론 태평양 전쟁이 끝난 이후 남겨진 미군의 잉여 장비들 대부분이 국민혁명군에게 지원되었고 이 무기들의 질과 양은 소련이 공산당에 지원해준 일본제 무기들 따위보다 우월했기 때문에 국민혁명군의 장성들조차도 무기의 부족이 국공내전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다.[21]

5.3. 전략적 실책

전쟁 초기 국민정부는 43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에 비해서 중국공산당은 127만 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에 비해 대략 3.3배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내전 초기에는 국민정부가 우세를 점했지만 국민정부는 합법 정부라는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령지, 특히 중요 도시를 무리하게 고수하는 정책을 펼쳤고 유격전을 벌이는 인민해방군의 주력을 섬멸하는 데도 실패하였다. 이에 인민해방군은 국민혁명군의 수비가 취약한 만주, 허베이 지역의 주요 교통로를 확보한 뒤에 반격에 나섰다.

국민혁명군은 주요 대도시에서 보급이 차단된 채 중장비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창춘에 고립돼서 정예병력을 허무하게 잃은 게 대표적이다.[22]

거기다 국민혁명군은 말이 정부군이지 장제스 직할의 중앙군과 군벌군이 혼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일적인 작전이 힘들었다.[23] 군벌들은 개개인의 이해타산에 따라 행동하는 사적인 면이 강했기 때문에 자기들 멋대로 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장제스의 명령도 거부하는 등 막장 행태를 보여주었다. 국공내전 후기로 가면 총통 장제스와 부총통 리쭝런의 갈등이 극에 달하여, 장제스의 중앙군은 사천을, 리쭝런의 군벌군은 광서, 광동성을 지키려고 하였고 결국 어느 한쪽도 지키지 못하고 대만으로 도망가는 상황에 달하게 된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두 군대가 가진 전략의 차이였다. 공산당군은 영토를 지키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전황이 불리하면 재빨리 철수하여 전력을 보존하는 전략을 썼던 것에 반해, 국민혁명군은 영토 방어에 너무 집착을 해서 전황이 불리해도 후퇴하지 않고 무리한 사수전을 고집하다가 전멸당하는 일이 잦았다.[24]

5.4. 공산당의 농촌 토지개혁

중국공산당은 소작농, 빈농이나 이주민, 부랑자들를 향해 지주들에게 모든 분노가 쏠리도록 선동한 뒤 폭력적인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를 살해하거나 토지를 강제로 배분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렇기에 국민정부가 해당 지역을 재장악할 경우에 살아남은 지주, 향신, 부농들 또는 그 유가족이 보복할 것이 분명했으며,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공산당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농지가 어쨌든 늘긴 늘었기 때문에 큰 저항은 하지 않았다. 지역상황마다 다른 대응을 한 것이다.

다만 중국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자신들이 승리한 원인 중 하나를 토지 개혁에서 찾는 것과 달리 일본 지배를 거쳐 지주체제가 된 한국처럼 소작농이 대다수는 아니었던지라 중국에서는 한국만큼 공산당이나 사회주의가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애초에 이 논리대로라면 1949년 하반기부터 국민정부가 통제한 서남지역에서 토지개혁이 시작되었음에도 국민정부가 해당 지역을 상실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25]

5.5. 심리전의 실패

국민혁명군의 대부분은 서남 지역에서 강제로 징병된 군대였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국공내전이 공산당을 토벌하는 작전이 아니라 같은 민족끼리의 분쟁이 되었기 때문에, 전투에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공산당은 그들을 통한 심리전을 통해 수많은 부대를 회유, 투항시키는 데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에 비해서 중국공산당은 내전이 시작하기 전부터 공산군답게 정치장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원년 멤버들이야 당연히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하니 들어온 것이고, 신병들 역시 정치 장교들의 정훈교육으로 정신 무장을 배양할 수 있어 전투 부대들에게 이런 사기 저하를 방지할 수 있었다.

5.6. 내부의 부정부패

미국은 국공내전 기간동안 19억 달러[26]에 달하는 지원금을 지원했지만 국민당은 40% ~ 50% 이상을 부패로 상실하였고 그중 절대 다수가 공산당에게 흘러갔다. 그 결과 미국에 있는 국민정부 인사의 일부는 장제스를 향한 미국의 지원을 끊어야 한다고 요구할 정도였다.

미 고문단의 보고에 따르면 부패한 국민당 장군들이 물자와 군자금을 횡령하여 최전선에 싸우는 병사들에게는 색소를 탄 가짜 약과 개돼지도 못 먹는 썩은 쌀이나 모래를 섞은 군량미만 지급되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거나 아사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고 굶주림과 질병에 지친 정부군 병사들이 약탈을 일삼아 민심이반을 가져오는 등 최악의 사태를 가져왔고 이는 공산당에 대한 지지만 강화되게 만들었단다. 심지어 미국이 지원해준 군사장비를 공산세력에 팔아넘겨 중공군의 무장을 강화시켰다. 오죽하면 6.25 전쟁 당시 미군이 미국 장비로 무장한 중공군을 한국군으로 착각했다가 크게 피를 보는 사태까지도 초래했을 정도.

장제스도 국민당 내부의 부정부패를 알고 있었으나 당시 군벌 연합체였던 국민혁명군 내부 분열을 막기 위해 이를 일부러 방치하였다. 그러나 장제스가 이들 부정부패를 방치하면서까지 국민당 분열을 막으려 했지만 국공내전 와중에도 군벌들이 서로를 견제하는라 제대로 된 협력을 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중국 공산군이 양쯔강을 도하할 때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양쯔강을 건널 수 있던 것도 군벌간의 갈등이 주 원인이었다. 국민당 작전은 공산군이 양쯔강을 건널 때 공군이 폭격을 하고 육군도 포격과 사격으로 공산군을 격퇴한다는 작전이었으나 공군을 가진 군벌은 공군을 출동시키지 않았고 육군을 가지고 있던 군벌은 아예 양쯔강을 건너는 공산군을 공격하지 않고 후퇴하여 공산군은 그 어떤 피해도 입지 않고 양쯔강을 건너서 남진하기 시작한다. 즉, 단결이 약하던 군벌들은 서로를 견제하고자 헙력하지 않았고 이는 공산군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중국 대륙을 가벼히 장악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극우 단체에서 활동하는 장경순도 본인이 학도병으로 끌려갔을 때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부잣집을 약탈했는데 마오쩌둥의 팔로군은 그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

5.7. 외부지원의 차이

소련몽골은 만주를 통해 중국공산당에 대규모의 군수물자를 후원하고 있었고, 국민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만주로 진공했으나, 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전략적 차원에서의 실패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또한 북한김일성 정권과 소련군정 또한 물자 지원, 부상자 치료, 무역 등을 통해 중국공산당을 도왔다.[27]

반면 미국은 중일전쟁 기간 동안의 국민정부의 무능함에 실망해 추가 지원에 회의적이었고, 그리스 내전, 이란 위기[28], 베를린 위기 등 소련과 동유럽, 발칸, 중동 등지에서 이런저런 갈등을 빚게 되면서 중국에만 관심을 쏟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이는 소련도 마찬가지였는데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아시아에 대한 두 진영에 대한 관심은 유럽보다 뒷전이 되었고 이는 상대적으로 장비지원에 대한 의존성이 높았던 국민당에게 더 큰 타격이 되었다.

6. 영향

6.1. 아시아 공산 블록의 대확대

한국사에도 국공내전의 의의는 크다. 국민당이 승리했었다면 김일성의 이북정권이 6.25 전쟁을 일으킬 국력을 갖출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장제스중화민국이승만대한민국에 의해 남북으로 포위되며 북한 정권은 자멸했을 가능성이 크다.[29]

설령 국민당이 대륙에서 패망하지 않고 남북으로 대륙을 반분했다면 예를 들어 금나라/남송처럼 대치하는 상황 구도로 흘러갔어도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좋은 시나리오였다. 6.25 전쟁 시기에 국민당과 대치함에 따라 공산당이 함부로 중국 인민해방군을 한반도로 파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이 분열하는 혼란기에는 언제나 한반도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으며, 장제스의 국민당이 중일전쟁 종결 후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행사하려고 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중국이 분열되는 것은 분명 대한민국에게는 유리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금나라와 남송이 대치하고 있을때 고려에서 무신정변이 일어났는데, 금나라는 개입을 하지 못하고 무신정변으로 세워진 새로운 고려 정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이후 조위총이 금나라에 자신들이 지배하는 40여개성을 바칠테니 원병을 보내달라고 하자 개입을 거부했다. 이는 구한말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바로 개입해서 진압하고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둔 청나라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청나라는 금나라하고 달리 남송 포지션이었던 남명을 단기간에 멸망시키고 대륙을 하나로 통일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며, 이후 남경에서 할거한 태평천국마저 대륙을 반분하지 못하고 진압했기에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2차 국공내전 재개 이전부터 한반도는 분할되어 삼팔선이 그어진 상태였고, 김일성은 그 때부터 이미 무력통일을 꿈꾸고 있었는데, 그 배후에는 중공보다 소련이 더욱 큰 영향력 행사를 했기 때문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김일성은 매번 남침을 주장하며 징징거렸으나, 스탈린은 국공내전이 끝날 때까지 그 주장을 묵살했다. 한편, 북한은 소련이 기획했던 대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간도와 동만주 ~ 남만주 일대를 흡수하려고 했다. 이 사건 역시 북한에게는 체제 대립에서 정통성을 과시하려고 무력 통일을 기도할 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2차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이런 균형은 무너지게 되었다. 북한의 건국 주역들은 보천보 전투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중국공산당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으며 북한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국공내전 기간 중 대놓고 중국공산당을 지원한 바가 있다. 그래서 국공내전을 통해서 조선인민군의 전투 경험은 더욱 풍부해졌고, 국공내전이 종식된 이후 인민해방군 출신의 164 ~ 166 3개 사단이 입북하게 되면서 1949년 5만에 불과했던 북한군의 숫자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

결국, 국공내전의 승리는 김일성이 애치슨 라인 뒷편에 있는 한국을 침공하는 것에 전혀 두려울 것이 없는 무소불위의 상황처럼 인식하게 되었고 김일성이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나도 조선인민군을 이끌고 이승만이랑 한판 붙으면 충분히 적화통일 가능할 것 같은데?"라고 오판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스탈린이 배후에서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한 것도 역시 문제가 심각해질 경우 꿩먹고 알먹고 격으로 한반도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국공내전은 베트남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사실 베트남 공산당이 북베트남 전역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베트남 국민당이 사이공으로 망명한 1955년이나 되어서라고 봐야 한다. 국민당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중국 국민당과 굉장히 밀접한 동맹이었는데, 옌바이 봉기라는 1930년의 대규모 반프랑스 봉기가 실패하자 중국 국민당 정권이 프랑스와의 관계 악화를 무릅쓰고 이들을 받아주었으며, 베트남 비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의 거의 전부가 일본의 도움을 받을 때에도 오로지 중국 국민당의 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과 적대할 정도로 두 국민당은 친밀했다. 아무리 베트남 공산당이 1947년의 배신 행위와 기습으로 승기를 잡았다곤 해도, 현실 역사에서 이미 국공내전이 1949년에 끝났음에도 국민당의 사이공 망명까지 6년이나 걸린 걸 보면 국민당도 결코 만만한 세력이라고 볼 수 없었기에, 국공내전의 결과가 달랐다면 사실 북베트남 내전은 공산주의자들이 패배했을 확률도 대단히 높았다고 봐야 한다.[30] 도미노 이론이니 뭐니 하면서 미국이 유난을 떨 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 중화인민공화국도 중국 국민당과 이렇게 친밀한 베트남 국민당이 꽤나 불편했던지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이후인 1950년 1월에 소련보다도 먼저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승인하였고, 중국공산당 지도부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호찌민 덕분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베트민은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호찌민은 류사오치와 긴밀한 관계였는데, 이 관계는 1969년 두 사람이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 이에 프랑스도 중국 공산당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국공내전 시기에 국민당을 적극 후원하지 않았다. 1949년 12월 인민해방군이 중월 국경 지역까지 장악하자 국민혁명군이 후퇴해서 베트남으로 들어왔는데, 프랑스는 인민해방군의 베트남 진입을 우려해서 이들을 무장 해제시켰다. # # 이처럼 중국의 지원 덕분에 베트남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6.2. 구 체제의 청산과 현대 동아시아 체제의 완성

한국과 중국 양국에서 모두 전쟁 이후로 구 체제가 완전히 청산되고, 현대의 국민 국가를 건국하게 되었다. 전쟁 초반 내전의 성격을 어느 정도 가미하고 있었던 6.25 전쟁과 국공내전이 최후에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두 국가(남북한,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의 국민을 확실하게 구분지었고, 따라서 분단과 국민 국가를 완성했다.

또한 전쟁 이후 중국과 북한의 국경이 "조중변계조약" 등으로 확립되면서 당시의 국경선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은 한때 소련의 지지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부의 영유권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었다. 한편 백두산을 둘러싼 국경 문제는 중국이 주장한 석을수가 아닌 과거 대한제국의 토문 감계사 이중하가 주장했던 홍토수를 따르게 되면서 기존의 국경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의 경우, 상술한 아시아 공산블록 확대의 우려로 인해 이른바 역코스로 불리는 트루먼 독트린의 일부가 시행되어서 2차대전연간의 도덕적인 문제(+한국의 친일파 문제도 덤으로)에 관한 청산에서는 유럽보다도 더 지지부진해졌다. 상세는 항목 참조.

6.3. 공산권 세력 판도의 변화

공산화 초기의 중국은 일단 소련사회주의 혁명의 선배로서 존중을 해주긴 했지만, 스탈린 사후 1950년대 말에 들면 점차 양국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에 이른다. 사실, 국력만 놓고 봐도 중국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아있기에 너무나도 큰 나라였는데, 일단 국토 면적으로 따지면 소련이 다른 공산국가들의 국토를 합친 것보다 훨씬 컸지만, 인구로 따지면 중국은 다른 공산국가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31]

더욱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탄생된 공산정권 대부분이 소련에 의해 세워진 데 반해, 중국은 비록 소련의 지원이 있긴 했지만 시종일관 중국공산당의 주도로 혁명을 이루었기 때문에 크렘린의 노선을 일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고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할 수 있었다. 결국, 중국은 스스로 공산 국가로 건국, 재탄생하고 중소결렬 이후 중 - 소 갈등이 본격화가 되면서 공산권의 세력 판도는 기존의 소련 1강 체제에서 중 - 소 양강 구도의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나아가 중국은 미국과 '데탕트'하며 소련의 뒷통수를 후려 갈기기도 했다.

6.4. 지속된 체제 경쟁

UN 5개 상임이사국 중 하나이자 아시아 주요국으로서 중화민국의 국제적 위상은 당분간 유지되었다.[32] 6.25 전쟁으로 미국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기 때문이다. 진먼 포격전(금문도 포격전)이 이 때의 일이다. 1971년 UN 총회에서 그동안 중화민국이 갖고 있던 중국의 대표권을 중화인민공화국이 얻고 중화민국이 자진탈퇴 형식으로 사실상 쫓겨나기 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은 제1세계에서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미중수교, 중일수교가 성사되면서 데탕트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일본의 국제 사회 복귀가 달성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어느 쪽을 중국의 정부로 인정할지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였다. 미국은 당연히 UN 상임이사국인 중화민국을 초청하자고 주장했으나, 영국은 홍콩이 위협받을 가능성을 염려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초청하자고 주장하여 깔끔하게 양쪽 다 초대하지 않는 걸로 합의했다.[33]

여담으로 1940년대에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배려로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하여 일본 본토의 공장 설비를 철거하는 방식으로 광둥성타이완성에 이전하여 경공업을 재건한 중화민국은[34] 1950년대를 맞이하면서 외교 무대에서 매우 불리했고, 중화민국과 일본의 전쟁배상금 협상은 결렬을 거듭했으니,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일본과 우호적 관계를 쌓는 것이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정책에 유리하기 때문에 1952년의 중일화평조약(中日和平條約)에서 일본에 대하여 손해배상 청구권을 마지못해 포기했다. 1972년의 중일공동성명(中日共同聲明)에서 손해배상 청구권을 포기한 중화인민공화국은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신중국'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수단으로 활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정책(사유재산 몰수협동조합 소유)의 관점에서 손해배상(현금자연인)을 거부하는 대신에 ODA(법인)를 노렸다.[35]

중화민국은 헌법 제1조로 내세우는 국시가 삼민주의이며 삼민주의에는 민주주의가 명시되어 있어, 중화민국 체제에서 민주주의는 지극히 합당한 명분을 가지고 있고, 그 구체적인 시행 방법까지도 삼민주의에서 제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민주주의를 시행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대만 계엄령은 장제스의 사후에도 유지되었고 메이리다오 사건처럼 대만에서 민주화를 주장하면 반란을 선동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투옥할 정도였다. 또한, 국민대회입법위원 선거도 보궐선거 또는 증원선거로 진행되었고 국민당 후보와 위성정당 2중대 후보, 무소속 후보만 출마했고 당외 세력은 출마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장징궈가 집권하던 시대의 말기부터 시민세력의 반발로 인해 점차 민주화 논의가 진척되더니, 리덩후이에 의해 국민대회와 입법원의 총선이 진행되었고, 대만의 중국국민당 1당 독재 체제에서 다당제를 인정하고 민주 체제를 완전히 확립하게 된 건 1996년으로 오래 걸렸다. 민주진보당의 정권 교체와 뒤이어서 다시 중국국민당의 정권 교체로 인해 제도상으로는 완전한 민주 국가가 되었다.

물론, 정치 체제를 고찰해보자면, 소모적인 정쟁이 그치지 않으며 고위층의 고질적인 부패나 정치 보복, 권력 남용도 상당히 일어나고 있는데, 제도는 정착되었지만 민주적 마인드가 완전히 갖추어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건국초기부터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서구식 민주주의 개념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조금씩 민주화 운동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시진핑 집권 이후 갈수록 독재와 여론감시, 언론통제, 인권탄압이 강화되고 있기에 민주주의와의 거리는 중화민국보다 더 멀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체제 경쟁에서는 대만이 확실히 우세한 것으로 보였다. 인구가 50배 넘게 차이나는데도 문화대혁명 등의 삽질로 지지부진했고, 마오쩌중 사후 대륙을 이끌 통치자는 미지수였다. 사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2년까지 대만의 명목 GDP는 중국 대륙의 40% 수준으로, 어마어마한 경제적 격차가 이후에도 지속됐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UN 상임이사국 등극, 덩샤오핑 시대의 성공적 도래 등 중국은 급격히 성장했다. 따라서 체제 경쟁에서의 우위는 옛말인 셈. 물론 2022년 현재까지도 대만의 1인당 GDP는 중국의 1인당 GDP의 2~3배에 달하지만, 중국 내 각 행정구역별로 비교하면 베이징과 상하이같은 지역은 대만을 턱밑까지 쫓아온 상황이다.[36][37] 더군다나 군사력, 대학 서열 등 각종 분야에서 중국은 대만을 압도하고 있다.[38] 현재 양쪽의 상호 방문 인원은 현재 각각 수백만 명에 달하며 대만인이 중국으로 가는 것은 1980년대 말부터 이미 별 문제가 없었다.

또한, 중국인들의 대만 방문이나 관광도 2000년대부터 별 문제가 없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한국인평양에 가는 것이 베이징이나 도쿄에 가는 것과 별 차이도 없고, 북한인도 자유롭게 서울을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아니, 방문이나 관광을 넘어서 체류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2013년 기준으로 대만에 체류하는 중국인(홍콩, 마카오 제외) 일시 거주자는 241,455명, 영구 거주자는 128,744명이다. 출처[39]

중국은 자유가 제한된 1당독재 국가이고, 대만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인이 딱히 자유를 찾아서 대만으로 망명할만한 메리트도 예전에 비해선 많이 없어졌다. 대만에서도 중국인의 망명은 예전만큼은 잘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대만은 한국에서 탈북자에 주는 포상금 같은 것을 1980년대 말에 모두 없애버렸다.

즉, 20세기까지는 중화민국이 어느정도 우위인 면이 있었지만, 21세기 들어서 그나마 남은 우위마저도 중화인민공화국에 완벽히 추월당하기 시작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은 거의 모든 면에서 이제 중화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대도 되지 않는 상황이다. 현재 대만이 중국보다 확실히 우위에 있는 것은 개인의 자유 및 1인당 GDP.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대만으로 도망쳐 간신히 살아남긴 했지만 이후 1971년 유엔에서 쫓겨나다시피 탈퇴하면서 국가 취급도 받지 못하기 시작했으니 이 내전의 승패는 사실상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마저도 공산당이 국공내전을 완전히 종결하겠다고 중화민국의 대만섬을 계속 위협하는 암울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물론 서방 세력, 특히 미국이 대만 섬을 예의주시하고 있어서 중국이 무작정 쳐들어가지는 못하지만.

7. 논란

7.1. 북한군 참전 논란

근래에 당시 북한군이 국공내전에 대거 참전하였다는 주장을 불확실한 근거들을 들어 강변하다가 전공자에게 반박된 일이 있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연구자들마저 현혹시키는 감이 있는데 북한 전문가인 이종석이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반박한 바 있다. 관련 블로거가 강변한 이유는 이종석을 좌파라고 몰아붙이면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이종석은 국내에서는 최초로 북한을 진지하게 연구한 학자이며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다. 특히, 논쟁 중에 이종석의 의견을 들고 온 유저들에 대해서 인신공격을 좀 심하게 했다. 비슷한 사례로 이런 것도 존재한다. http://panzerbear.blogspot.kr/2010/11/blog-post_21.html?m=1
  • 북한군 병력이 만주에 대거 파견되었다고 하는 1946 ~ 1947년은 소련군정기였는데, 당시 소련은 중국공산당 지원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 대규모의 병력 지원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를 놓고 국민당 / 미국과 북한 / 소련 간의 갈등 양상이 빚어졌을 텐데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국공내전에 관한 중국 내의 어떠한 저작물이나 증언에도 북한군의 대거 참전을 암시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 북한 측에서도 공식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 바 없다. (이종석, 《북한-중국 관계 : 1945년 ~ 2000년》(중심, 2000년), 69쪽 ~ 74쪽.)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는데 그토록 흔적이 남지 않는다거나 북한이나 중국 측에서 꼭꼭 숨겨야 할 이유가 없으니, 그저 이러한 설은 떡밥 정도로 생각하고 넘기는 것이 현명하다.

북한측이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지원한 것으로 밝혀진 것은 병력 제공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간부의 가족들을 피난 시켜준 것과 만주 지역에서 국민혁명군에 쫓기던 인민해방군이 북한 지역을 통과하여 안전히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국공내전의 전세 역전이 만주 전역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중국공산당 측으로서는 북한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런 고마움은 후에 6.25 전쟁에 개입한 것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 # # #

물론 브루스 커밍스 교수에 의하면 실제로 8.15 광복 직후 북한에 들어오려던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40]이 소련군에 의해 설득되어 국공내전에 참전한 사례는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 시점에서는 절대 조선 인민군이 아니었으며 당시의 남한 지역에서는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나온 것과 같이 마치 중국계 군사력을 소련계가 막은 공산당의 주도권 다툼으로 선전되었으나 실제로는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측이 이들을 설득시켜 참전하도록 한 것이다. 이들은 인민해방군 내에서도 정예 부대였으며 어려운 임무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었다. #

그리고 국공내전이 끝나자 1949년 말에서 1950년 한국전쟁 직전까지 조선인들로 구성돼서 국공내전에서 싸웠던 인민해방군 사단들이 조선인민군에 편입된다. 당시 소속 부대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상부에서 부대가 이동한다고 해서 기차에 탔는데, 내려보니 북한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리자마자 바로 조선인민군 군복으로 갈아입으라는 명령을 들었다.

6.25 전쟁에서 남침의 선봉이었던 조선인민군 4사단과 6사단이 바로 그런 식으로 전환된 사단이다. 그 외의 사단에도 일정수의 전직 인민해방군이 있었다. 이들은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6.25 전쟁 초기에 맹활약을 했다. 대전에서 미군 24사단을 패퇴시키고 딘 소장을 포로로 잡은 부대가 바로 이들 부대였다. 제4사단장 리권무와 제6사단장 방호산은 모두 인민해방군 출신이다.

간단히 말하면 인민해방군 → 조선인민군 테크를 탄 것이지, 조선인민군 → 인민해방군 테크가 아니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위의 모 블로거가 한 주장은 앞뒤를 착각한 주장이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코민테른의 1국 1당 원칙, 즉 "한 나라에는 국적과 민족 불문하고 1개의 공산당만을 인정한다"라는 원칙에 따라 1930년대 중국에서 활동하던 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중국공산당에 입당해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41] 비록, 소속은 중국공산당이었지만 항일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활약한 이후, 중국과 북한 수뇌부의 합의에 따라 1945년 8.15 해방 이후 순차적으로 북한으로 귀국해서 조선인민군의 주축이 된다. 그리고, 2군단장 김무정을 위시한 이들 인민해방군 출신들은 풍부한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6.25 전쟁에서 맹활약한다.

그러나, 전후 김무정을 위시한 리권무, 방호산 등의 인민해방군 출신 장교들은 김일성에 의해 대부분 숙청당하고, 주소 대사를 지내던 리상조는 소련으로, 리필규, 서휘, 윤공흠, 김강 등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홍순관 등이 추가로 망명하여 총 11명이 중국으로 넘어간다.

8. 여담

드물게 몇몇 사람들에게 중국사의 정권 교체기를 부르는 식으로 초라고 불리기는 하나 공인된 표현도 아니며 다른 정권교체 사례와는 다르게 당사국인 중화민국이 현재도 명백히 존속 중이기 때문에 맞는 표현도 아니다.

8.1. 고궁박물원 유물수송

국민당 정부가 대만 섬으로 패주할 때 미국으로부터 군인들의 가족을 수송한다는 명분으로 수송선을 지원받아 그중 5척에 베이징 고궁 박물원의 유물들을 '왕창' 털어서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으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국민당 정부의 국립고궁박물원 유물 이전은 1933년 열하사변 시기부터 중일전쟁 때 내내 이어진 중요 국가사업이었으며 대만으로 옮겨간 유물도 일본의 폭격을 피해서 사천성으로 옮겼던 유물의 일부이며 1947년 고궁박물원 난징분원에 모아놓았다가 그중에서도 25%에 해당하는 3,000상자만 챙겨간 것이다. 국내 인터넷에서 떠도는 수송선 지원 야사는 출처를 알 수도 없고 사실관계도 부합되지 않는 내용뿐이다. 여하튼 그 뒤 대륙에서 문화대혁명이라는 시기에 홍위병이 중국 전역의 문화재를 훼손할 동안, 다행히 중국국민당이 가지고 있었던 문화재만큼은 그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또한 유물은 아니지만, 공자의 종손으로서 대대로 대접을 받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인 쿵더청을 이 때 대만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그래서 공자 가문의 종가는 대만에서 이어지고 있다. 대륙에는 정강의 변 당시 강남(중국)으로 피난갔다가 원나라송나라 정복 이후 여지껏 고향을 지킨 아우 집안에 연성공 작위를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며 제2의 종가로 존경받아온 남종 가문과, 쿵더청의 누이인 쿵더마오(孔德懋 공덕무)의 후손만이 남아 있다.

8.2. 치하 전차의 대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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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로 이루어진 기갑부대를 사열하는 마오쩌둥

일본 제국의 중형 전차인 97식 전차 치하는 2차대전 당시 전차로써 활약을 못 하였으나 국공내전에서는 공산당군의 주력 전차로서 제대로 대활약(!) 했던 전쟁이기도 하다.

중일전쟁이 종결된 후 상당수의 일본군 전차가 중국 공산당에게 노획 및 소련으로부터 공여받은 상태에서 국민당군이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아 사용한 셔먼은 고사하고 스튜어트 경전차들은 당시 중국의 열악하고 정비되지 않았거나 지나가지 못하는 도로로 인해 기동성이 저하된 반면 치하는 체급이 스튜어트 경전차보다 적어 이러한 길을 아무런 문제없이 잘만 이용하여 기동전을 수행했다.

그 당시 중국의 열악했던 도로망 때문에 벌어진 일. 이 때문에 94식 경장갑차 같은 경장갑 차량이 활약할 정도였고 아무리 치하가 경전차급 스펙의 중형 전차라 해도 그래도 전차였기에 보병들과 장갑차를 상대로는 훌륭히 상대가 가능하였다. 덕분에 희한하게도 일부 중국 밀덕들은 치하에 대해서 국공내전 한정이라는 전제하에서 "치하 전차는 의외로 쓸 만했다."라고 평가한다.

원래 치하는 보병 지원용의 컨셉으로 제작되어서 국공내전과 같이 화력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드럼통으로 만들어낸 조잡한 박격포비뢰포 정도였던 보병 전쟁에서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셈이었다. 이에 자극받은 국민당도 치하를 꽤나 사용했다고 하나 주로 셔먼을 이용하였다.

9. 어록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의 노예(亡國奴)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장제스
모든 반동파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오쩌둥
게릴라는 민중이라는 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다.
마오쩌둥
두율명 부대가 오늘 아침 태반이 공산군에게 격멸된 모양이다. 보고에 따르면 그래도 3만 명이 진관장 서남에서 포위망을 뚫고 있다는데 무사히 탈출했는지 말할 수 없이 불안하기만 하다. 내가 여태 남들의 강압 때문에 인퇴를 할 수 없다고 버텨 온 것도 실은 이 두율명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는데, 내 책임을 다할 수 없게 되었다. ‘부끄러울 것도 창피할 것도 없어야 하고 근심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야 한다’는 교훈을 생각하면, 한편 마음이 태연해 지기도 한다.
장징궈, 휘문출판사, 풍운 80년의 나의 아버지 장제스 184 페이지.

10. 대중 문화

10.1. 드라마

  • CCTV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0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30부작 드라마인 <중국명운적결전(中国命运的决战)>이 있다. 국공내전을 소재로 하였다.

10.2. 영화

  • 중국공산당의 창업 과정이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굉장히 많은 영화가 제작되었다.
  • 집결호 - 국공내전, 한국전쟁등을 다룬 영화.
  • 1990년에 만들어진 대결전(大決戰)이라는 3부작 영화가 있는데, 이것은 위에 제4기를 다루고 있다.
  • 건국대업(建國大業) - 2009년작. 이 작품은 1945년 - 1949년의 국공내전을 묘사하고 있는데 보다보면 중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건국 60주년을 기념해서 중국 정부가 그야말로 연예계 스타들을 총동원해서 만든 선전 영화다.
  • 개국대전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40주년 기념 영화
  • 인생(영화) - 영화의 주인공 푸궤이가 국민혁명군에 의해 징집당하다가 중간에 중국 인민해방군에 투항, 종군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영화에서 전투씬은 잘 안나온다.
  • 영화 '닉슨'에서 잠깐 언급되는데 닉슨이 1949년 중국 본토를 공산권에게 넘어간것에 대해 트루먼과 민주당을 맹렬히 비난하는 방송이 나온다.
  • 태평륜(2014) 이 작품은 황효명, 송혜교, 금성무 등이 출연한 영화로, 국공내전 말기의 중화민국을 묘사하고있다. 황효명이 레이이팡 장군역(국군 사단장)으로 산둥성 전역에서 인민해방군과 끝까지 맞서 싸우다 전사하고 그의 아내인 옌펜(송혜교)를 그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레이이팡 장군의 모티브는 중화민국 육군 74사단장 장링푸 장군을 모티브로 하였다. 장링푸는 미국의 훈련을 받고 미군의 무기로 장비차량으로 무장한 국군을 이끌고 산둥성의 명량구에서 인민해방군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포위섬멸하기위해 명량구에 진지를 구축하고 그들이 미끼가 되어 해방군을 유인하려 하였으나 국군의 내부의 분열과 리톈사등은 장링푸가 죽기를 바라는등 심각한 중앙군과 군벌갈등으로 국군은 74사단을 구원하지못하고 장링푸등 고급장령들은 장제스에게 마지막 전보를 올리고 사령부가 함락되기 직전 집단자살을 한다.전투 장면

10.3. 소설

왕람(王藍)이라는 작가가 1958년에 발표한 <람여흑(藍與黑)>이라는 장편 소설이 있다. 해당 소설은 1966년 홍콩 쇼브라더스에서 영화화를 하였고, 홍콩과 대만에서 여러 차례 드라마화가 진행되기도 해서 더욱 유명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중일 전쟁에서 부터 국공내전을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애국 청년인 주인공 장성아가 중일 전쟁과 국공내전이라는 난세의 풍운 속에 겪었던 여러가지 일들과 모험, 그리고 주인공 장성아가 열렬히 사랑했었던 두 여인 당기와 정미장과의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작가이자 화가인 왕람은 중일전쟁에 직접 참전했었으며, 그와 같이 참전하였던 그의 친구는 전쟁 도중에 전사 했다고 한다. 전쟁 이후 왕람은 자신이 겪은 전쟁을 소재로 여러 편의 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 <람여흑>은 그의 소설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걸작이며[42], 대만과 홍콩에서 드라마화,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도 1967년 삼일각에서 상 하, 두 권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번역 수준은 대체적으로 우수한 편이지만, 세로본이라 가독성이 떨어진다는게 옥의 티. 그리고 출판년도가 오래된 만큼 절판 되었고, 헌책방에서 구하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자료실에서 열람이 가능하긴 하다.# 다만, 영화는 데일리모션이나 유쿠 등 잘 찾아 보면 나오고 영어 자막도 있어서 중국어를 몰라도 대충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도중 2023년 12월부터 2024년 2월까지 CTS 방송사의 공식 유튜브채널중 하나인 華視懷舊頻道[43]1983년 대만 드라마판 전편이 업로드되면서 유튜브에서도 비교적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영화의 경우 1965년 홍콩 쇼브라더스사에서 개봉한 버전이 가장 유명한데 한국배우 신영균과도 인연이 있었고 훗날 자살로 생을 마감한 배우 임대(林黛)가 여주인공 당기 역을, 배우 관지림의 아버지로 더 유명한 관산(關山)이 남주인공 장성아 역을 맡았다. 영화뿐만 아니라 대만홍콩 TVB에서는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1983년 대만 드라마판에서는 첼리스트 구양나나의 아버지이자 지금은 시의원이 된 구양룡(歐陽龍)이 장성아 역을 맡았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극 중 장성아는 팔로군 때문에 죽을뻔한 적이 있어 극심한 반공주의자 청년으로 설정되어서 나오는데, 대만 드라마판에서 장성아 역을 연기한 구양룡은 2022년을 기점으로 본인의 딸 구양나나와 함께 친중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대만에서는 드라마 <람여흑>에서 극 중 구양룡이 연기한 장성아가 반공주의 성향을 드러내는 장면이 재발굴되면서 "이 때는 반공이더니 지금은 친중이냐"는 식으로 네티즌들 사이에서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자세히 표현되었는데, 이 시기의 정세가 매우 상세히 몰입감 있게 자세히 잘 설명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 중국에 대한 아무런 사전 배경 지식이 없이도 충분히 몰입하면서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시대 여러 계층의 중국인들의 생활상에 대해서도 고증이 잘 된 편이다. 소설에 표현된 공산당의 악행들, 예를 들어 중일전쟁 당시의 팔로군의 만행이라든지, 이런 내용들은 대부분이 거의가 다 실제 사실에 기반한 내용들.

11. 참고 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 출판사
  • 장개석 vs 모택동, 이건일, 도서 출판 삼화
  • 중국지 하 대란대치편, 현이섭, 인카운터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 아카데미
  •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상, 장융, 존 핼리데이, 까치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로이드 이스트만, 지식 산업사
  • 마오쩌둥 평전, 로스 테릴, 이룸
  •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열린 책들
  • 중국백서, 미 국무부

12. 관련 문서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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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분쟁 교전국
<colbgcolor=#000096> 신해혁명
,1911 ~ 1912,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계축전쟁
,1913,
파일:중국 국민당기.svg 국민당
호국전쟁
,1915 ~ 1916,
파일:중화제국 국기.svg 중화제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북양군벌
호법전쟁
,1917 ~ 1918,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북양군벌 파일:봉천군벌 기.svg 봉천군벌
제1차 세계 대전
,1917 ~ 1918,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왕국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러시아 내전
,1918 ~ 1920,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소비에트 러시아
외몽골 출병
,1919,
파일:복드 칸국 국기.svg 복드 칸국
국민혁명
,1926 ~ 1928,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북양군벌 파일:봉천군벌 기.svg 봉천군벌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직예군벌
제1차 국공내전
,1927 ~ 1936,
<colbgcolor=#000096> 초공작전
,1930 ~ 1934,
파일:중국 공산당 당기.svg 중국공산당
반장전쟁
,1929 ~ 1930,
파일:대만 국기.svg 서산회의파 파일:대만 국기.svg 개조파 파일:대만 국기.svg 계계군벌 파일:대만 국기.svg 서북군벌 파일:대만 국기.svg 염계군벌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북양군벌
중국-티베트 전쟁
,1930 ~ 1932,
파일:티베트 국기.svg 티베트
만주사변
,1931 ~ 1932,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영릉가 전투
,1932,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제1차 상하이 사변
,1932,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쌍성보 전투
,1932,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열하사변
,1933,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경박호 전투
,1933,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사도하자 전투
,1933,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흥경성 전투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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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성 전투
,1933,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대전자령 전투
,1933,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복건사변
,1934,
파일:중화공화국 국기.png 중화공화국
쿠물반란
,1931~1934,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파일:신강군벌 기.svg 신강군벌
신강 침공
,1934,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1937년 신강 전쟁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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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1937 ~ 1945,
중일전쟁
,1937 ~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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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1941 ~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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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저사변
,1944 ~ 1946,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파일: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국기.svg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제2차 국공내전
,1946 ~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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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대만 해협 위기
,1954 ~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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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먼 포격전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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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버마 국경작전
,1960 ~ 1961,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버마 연방 국기.svg 버마 연방
베트남 전쟁
,1965 ~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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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공산반란
,1965 ~ 1967,
태국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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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1975,
파일:민주 캄푸치아 국기.svg 크메르 루주
대막계획
,1979 ~ 1990,
파일:남예멘 국기.svg 남예멘 파일:쿠바 국기.svg 쿠바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제3차 대만 해협 위기
,1995 ~ 1996,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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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분쟁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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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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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950 ~ 1953,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파일:UN기.svg 유엔군
티베트 침공
,1950,
파일:티베트 국기.svg 티베트
하이난 상륙작전
,1950,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제1차 대만 해협 위기
,1954 ~ 1955,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이장산 전투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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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먼 포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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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버마 국경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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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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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중국-인도 국경 분쟁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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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중국-인도 국경 분쟁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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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 및 대만이 주장하는 두 개의 중국 원칙을 따를 시[2] 양안의 영역이 지금의 형태로 고정된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제1차 대만 해협 위기 중 일어난 다천 군도 철수로 양안의 형세가 지금의 형태와 같아진 1955년을, 진먼 포격전을 국공내전의 연장선으로 본다면 1958년을 국공내전의 사실상 종결로 볼 수도 있다.[3] 대만에서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따를 시. 국공내전은 공식적인 정전 협정이 맺어지지 않고 단순히 전투만 벌어지지 않는 상태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국공내전은 6.25 전쟁처럼 지금도 계속되는 것이다.[4] 1948년 5월 20일 중화민국 헌법의 시행으로 총통제를 실시하고 정부 조직을 개편하면서 기존의 국민정부가 폐지되고 중화민국 정부가 새로이 수립되었다.[5] 내전 도중인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했으나 대륙 전역을 석권한 뒤에도 1971년까지는 미승인국 취급이었다.[6] 전쟁 도중 국민당에서 제명.[7] 정확히는 제2차 세계 대전중일전쟁 종전 직전부터 진먼 포격전, 그리고 제3차 대만 해협 위기까지의 전개를 나타낸 영상이다.[8] 장쉐량의 동북 군벌은 동북역치 이후 형식적으로는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의 통치에 들어갔지만, 하지만 실제적으론 독자적인 행정 체계와 군사력을 보유하고 만주와 베이징 일대를 지배하던 독립 군벌로, 한마디로 장쉐량은 만주의 왕이었다. 하지만 만주 사변으로 본거지를 모두 잃고 잔존 병력 일부만 데리고 산시성으로 도망와서 눈칫밥만 먹는 신세로 전락했다. 예전 같으면 장제스의 명령 따위는 씹어버렸겠지만, 이제는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는 상황.[9] 당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정리를 하고 있었으며 급격히 세를 불린 소련과 대립구도가 형성되었으며 미국은 겨우 전쟁이 끝났는데 소련이 여기에 개입해버리면 다시 3차대전이 벌어질 확률이 컸기에 미국은 국공내전이 멈추기를 바랐다.[10] 미국 정부는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으나 중국 공산당의 정치, 군사적인 행동이 소련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11] 이 경우 만주국 시절에 일본이 열심히 개발해놓은 만주가 공산당의 영토가 될 것이 뻔했고, 장제스는 당연히 이것을 원하지 않았다.[12] 시진핑 현 주석의 아버지다.[13] 보시라이의 아버지다.[14] 또한 병력에서도 변화를 겪게 되는데 6월경에 인민해방군은 병력이 120만 명이나 증가해 280만 명으로 늘어났고 중화민국 국군은 430만 명에서 365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중 전선에 투입된 병력은 170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윤휘탁,2012] 윤휘탁, 논문(論文) : "복합민족국가(複合民族國家)"의 파탄; 만주국의 붕괴와 "만주국인(滿洲國人)"의 충돌,수난, 中國史硏究(Journal of Chinese historical researches Vol.78, 2012[16] 이러한 국민당에 의한 가혹한 친일청산은 한간들이 대부분 공산당을 선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대중동원을 통해서 그들을 제거했다. 공산당은 장정 이후 생존을 위해 몸집 불리기용으로 견지한 신민주주의 정책을 폐기하고 과도기 총노선을 발표하면서 그동안 협력해왔으나 공산주의에 맞지 않는 민족주의적 기업인(민족 부르주아지), 협력 지주 등을 쳐냈고 이 과정에서 한간들도 버림받게 된 것이다. 즉 공산당은 한간들을 단순 도구로 써먹은 토사구팽에 불과했다. 또한 여기서도 살아남은 한간들은 문화대혁명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 당하는 운명에 처해지게 된다. 반면 장개석은 대만으로 가서는 국민당을 지원한 대만의 한간들을 처벌하지 않는다. 대표적 사례로는 구셴중 일가를 들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구셴중의 장남 구천푸를 1946년 감옥 보냈으나 곧 풀려나고 구천푸는 홍콩으로 망명간다. 그리고 1949년 다시 대만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는 감옥에 집어넣지 않았다.[17] 중공군을 추격하다가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해 퇴각하려는 순간 습격을 당했다.[18] 천이페이(陈逸飞), 웨이징산(魏景山)의 유화. 1977년작. 왼쪽 하단 찢겨나간 청천백일만지홍기에 주목.[19] 장성급 전사자만 200명을 넘었다.[20] 다만 소련 측에서는 이 무기의 대부분을 국민정부에 양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예 틀린 말이라고 할 순 없는게, 신사군이나 팔로군 등 공산당 소속 부대들이 국공합작을 통해 국부군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소련 입장에서는 국민당 부대와 공산당 부대를 구분하기 어려웠을수도 있다.[21] 출처: 로이드 이스트만 "장제스는 왜 패하였는가"[22]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도시는 식량의 블랙홀로, 농어촌에서의 식품공급이 끊기는 순간 거대한 공동묘지가 된다. 국민혁명군이 대도시 사수에 집착하자, 인민해방군은 초기에는 특기인 농촌지대의 유격전으로 식량공급을 방해했고, 전열을 갖춘 뒤엔 대도시 포위전략으로 국민혁명군을 말려죽인다. 국민혁명군은 먹여살려야 할 사람은 많은데, 도시에 갇혀서 식량을 조달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중앙군과 군벌 사이의 갈등으로 내부 단합도 안 돼서 포위망을 뚫지도 못했다.[23] 장제스 직할의 중앙군은 훈련도 충실했고 미국의 원조로 물자도 풍부한 데다가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실전경험도 풍부했다. 초기에 군벌들이 중앙군의 지휘에 일사불란하게 따라주었다면, 내전의 전개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24] 공교롭게도 이러한 점은 2차 세계 대전 무렵의 일본군과도 비슷했는데, 일본군도 전황이 불리하면 후퇴하여 전력을 보존한다는 전략을 좀처럼 쓰지 않았고 그저 후퇴하면 치욕이니 무조건 그 자리를 지키며 싸우다 죽으라고 병사들한테 강요하다가 헛되이 전력을 상실하는 일이 많았다.[25] 사실 이 부분에서 공산당 측이 할 말은 간단한데, 그 때는 이미 전세가 완전히 공산당에게 넘어온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공산당에서도 토지개혁'만'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이유라고 말하진 않으며, 무엇보다 국민당이 뒤늦게 토지개혁을 시행했던 이유도 그에 대한 필요성을 뒤늦게 느꼈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26] 55억 달러라고 하는 문헌들이 많은데 그것은 UN의 전후 복구 기금이었다.[27] 국공내전 초기 만주 지역에서 국민혁명군에 밀린 홍군 병력과 당간부 수만여 명이 압록강을 넘어서 북한으로 피신했다. 모든 물자를 버리고 맨몸으로 넘어왔던 이들은 휴식을 취한 뒤에 김일성 정권과 소련군정이 제공한 물자로 완전무장하고 다시 만주로 진격했다. 또한 내전기간 내내 북한은 홍군 부상자들을 수용해서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치료해주었다. 이런 관계가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한국 전쟁 참전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친다.[28] 페르시아 침공으로 이란이 연합국의 손에 들어오자 테헤란, 타브리즈 등 이란 북부 지방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는데. 종전 이후 소련이 이란에서 철수하기를 거부했다.[29] 당장 오늘날의 북한이 미국서유럽경제제재를 버틸 수 있는 것은, 김씨왕조 특유의 강력한 지배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중국공산당이 국제적인 대북제재를 무시하고 대북원조 및 북중무역을 벌이고 있는 탓이 크다.[30] 그런데 베트남 국민당의 패배 원인에는 중국 국민당의 패배 이외에도,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삽질 때문에 당시의 남베트남, 즉 베트남국 정국이 대단히 혼란스러워서 베트남 국민당을 지원해줄 여력이 전혀 없었던 탓도 있긴 하다. 베트남국 설립 당시 프랑스가 욕심을 못 버리고 베트남국의 주권을 제약해서 보호국화하는 바람에 남베트남 지역에서 무력과 명성을 움켜쥐고 있던 반공 독립운동가들이 하나같이 체제 합류 요청을 완강히 거부하고 베트남국 정규군과 대치하기까지 했고, 남부 베트민들은 제 코가 석자였던 북부의 지원 미비로 대부분 반공 군벌들에게 일부 잔당만 남고 토벌당하긴 했지만 초기 몇개월 정도는 세력이 나름 있었으며, 국가원수였던 바오다이는 이런 상황 때문에 자기 입지가 너무 불안해서 정규군 대신 조폭 기반 군벌에게 충성맹세를 받고 친위대로 삼아 사이공 지하경제 장악을 묵인해줬다. 프랑스가 이런 개판을 쳐 놨는데 베트남 국민당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있을 리가 없다.[31] 같은 이유로 국민당이 승리했다해도 상당한 미래에는 미국과 중국이 갈라졌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32] 국제연맹(LoN) 당시에는 일본이 상임이사국이었다.[33] 한국 또한 초대받지 못했는데, 한국은 전쟁 피해국이 아니라 식민지 피지배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이 오랫동안 식민지로서 일제의 탄압, 수탈, 학살에 시달려왔기는 했으나 그것은 제국주의의 피해자로서의 사정이고, 국토가 직접적으로 전장이 되거나 자국 군대가 저항군으로서 연합군에 가담해야 하는 전쟁 피해국과는 별개의 사안이었던 것.[34] 일본 정부는 한일기본조약에서 한국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전면부정했지만,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반공 교두보로 한일공동전선의 성립을 강요하는 미국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은행증권보험, 연금예금송금, 주식저축국채에 대하여 손실보상 청구권만 인정했다. 그런데 손해배상(reparation)과 손실보상(compensation)은 알맹이가 비슷하나 법학의 관점에서는 다른 개념이다.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현금으로 지불한 서독의 연방정부가 징발징용에 대하여 손실보상을 현금으로 지불한 이유를 생각해 보라.[35] 실제로 소비에트 연방은 1940년대에 독일 본토의 공장 설비를 철거하여 국유기업에 인도하는 방식으로 전쟁배상을 실행했다.[36] 아시아의 4마리 용과 중국 행정구역들의 인당 GDP 추이[37] 물론 한 국가 내부의 특정 행정구역과 다른 국가 전체의 인당 GDP을 비교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보기 힘들다.[38] 딱히 대만이 크게 실패했다기보다는, 두 나라의 인구와 영토 차이로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다. 과거 중국 공산당의 심각한 무능으로 이 차이의 발현이 늦춰졌을 뿐.[39] 만일 서울에서 인공기를 펼쳐들고 비슷한 시위를 한다고 하면 무슨 취급을 받을까. 그러나 대만에선 경찰들이 대륙 출신자들을 지켜주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40] 원래는 수백명 단위였으나, 만주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가담하여 수가 사단급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한참 진행될 때 일본군으로 강제징병되었다가 학병들 중에서도 이 팔로군에 가담한 이들이 꽤 되었다. 대표적인 이가 신상초.[41] 그 이전에는 조선공산당 만주위원회가 존재했으나, 1930년대에 코민테른이 1국 1당 원칙에 따라서 "중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라"는 결정을 내린다.[42] 대만에서는 왕람의 람여흑, 반인목(潘人木)의 련의표매(蓮漪表妹), 기강(紀剛)의 곤곤료하(滾滾遼河), 서종패(徐鍾珮)의 여음(餘音) 1950년대 - 1960년대 출판되었고, 중일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 네 작품들을 사대 항일 소설로 꼽는다.[43] 한국 KBS의 KBS 같이삽시다 채널처럼 주로 80-90년대에 방영되었던 드라마나 프로그램 영상들을 대거 업로드하는 채널이라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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