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30 15:19:17

대한민국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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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
大韓民國陸軍
Republic of Korea Army (RO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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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대한민국 육군기[1]
<colbgcolor=#2A5034><colcolor=#fff> 창설일 1946년 1월 15일 ([age(1946-01-15)]주년)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소속 대한민국 국군
군종 육군
지휘체계 대한민국 대통령 (통수권)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지휘·감독권)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군령권)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군정권)
본부 충청남도 계룡시 육군본부 (계룡대)
육군참모총장 대장 박안수 (육사 46기)[직무정지A]
육군참모차장 중장 고현석 (학군 29기)
육군주임원사 원사 강민수 (현임 6기)
병력[3] 365,200명(2022년 기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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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 대한제국 육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명목상)
미군정 남조선국방경비대 (사실상)
참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군사훈련 육군사관학교 (사관생도)
육군3사관학교 (사관생도)
국군간호사관학교 (사관생도)
육군학생군사학교 (사관후보생[5])
육군부사관학교 (부사관후보생)
특수전학교 (특수작전 교육 및 특전부사관후보생)
육군훈련소 (징집병[6], 모집병[7], 육사생도 일부[8])
사단신병교육대 (징집병[9], 모집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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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징
2.1. 모토2.2. 모표2.3. 육군가2.4. 마스코트
3. 대한민국 육군의 역사
3.1. 창군초기3.2. 5.16 군사정변과 육사 5기와 8기의 투쟁3.3. 알래스카 토벌작전3.4. 김종필과 충청도 인사 축출3.5. 하나회의 육성3.6. 1979년 12.12 군사반란3.7.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서 계엄군의 광주시민학살3.8.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3.9. 2024년 12.3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내란
4. 국군의 기원 논쟁5. 수뇌부6. 병과7. 편제8. 복제(服制)9. 육군력10. 미사일11. 기타 장비
11.1. 포병 장비11.2. 공병 장비11.3. 통신 장비11.4. 무인정찰기11.5. 수류탄 및 지뢰
12. 문제점
12.1. 수구적인 병영 문화
13. 구조조정14. 사건 사고15. 관련 문서1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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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군조직법
제2조(국군의 조직)국군은 육군, 해군공군(이하 "각군"이라 한다)으로 조직하며, 해군에 해병대를 둔다.
제3조(각군의 주임무 등) ① 육군은 지상 작전을 주 임무로 하고 이를 위하여 편성되고 장비를 갖추며 필요한 교육·훈련을 한다.

대한민국 육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지상 작전을 담당하는 군사 조직으로서 삼군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2. 상징

2.1. 모토

파일:강한 친구 대한민국 육군.svg
강한 친구, 대한민국 육군[10]

A Strong Friend, Republic of Korea Army
국가방위의 중심군

The Central Force for National Defence
자랑스러운 육군, 승리하는 육군

Proud Army, Victorious Army

2.2. 모표

파일:대한제국군_모표.png 파일:한국광복군 휘장.svg 파일:남조선국방경비대모표.png 파일:대한민국 육군 마크.svg
대한제국군 모표 광복군 모표 조선국방경비대 모표 대한민국 육군 모표

리본으로 결속한 월계수잎, 그리고 안에 나라를 상징하는 꽃이 있는 도안은 대한제국군 시절부터 있었다. 이를 광복군이 이어받고나서 이화문 대신 태극기의 태극문양을 도입하면서 광복군 모표가 되었고, 이후 국방경비대 시절에 현재와 유사한, 그러나 다른 형태의 패턴으로[11] 윤곽이 잡혔고 구 정부상징과 그 모습이 유사한 무궁화 모양이 들어갔으며, 이후 대한민국 육군 창군 이후로는 무궁화가 한반도 남부 내 정부수립 이후 관습상 정부상징으로 인정되며 현재에 이른다. 위 모표들의 디자인적 유사성에서 알 수 있듯 광복군과 대한제국군의 모표가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조선국방경비대와 현재 육군의 모표 디자인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이는 아직 확실한 문헌상 증거[12]은 없지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13]

광복 이후 미군정은 당시까지도 일본군 색채를 미처 빼지 못한 한국의 군사조직들[14]에게서 왜색을 지우기 위해[15] 대한제국군의 전통을 많이 되살리려 노력 했는데, 대한제국식 정부참 계급도 부활시키는 등[16]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광복군과 대한제국군의 전통을 많이 접목시켰는데, 이때 모표도 부활하게 된 것.

가운데에 있는 국장의 태극은 세계의 중앙에 있는 대한민국, 국장을 둘러싼 월계수(무궁화잎)는 군인으로서 쟁취할 승리와 영광, 월계수의 중앙 하단부 리본은 승리를 위한 기본 요소인 단결과 결속을 상징한다.[17]

2.3. 육군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육군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4. 마스코트

파일:대한민국 육군 마스코트(호국이).svg
마스코트 호국이[18]
대한민국 육군의 마스코트 캐릭터는 호국이로, 호랑이를 의인화한 캐릭터다. 육군에서 사용되는 교재나 책자에도 자주 사용되는 캐릭터이며 군부대의 위병소나 담벼락 벽화에도 자주 보이는 캐릭터이다.

대한민국의 병역의무를 수행하는 청년들이 가장 자주 보거나 보게 될 마스코트이지만 징집을 담당하는 병무청의 마스코트란 이유로 허구한 날 인터넷에서 징병제의 상징으로서 풍자와 모진 고문을 당하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있는 굳건이힘찬이와는 달리, 호국이는 징병제이든 모병제이든 그저 육군을 상징하는 캐릭터에 불과하기 때문에 인지도가 매우 낮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clearfix]

3. 대한민국 육군의 역사

3.1. 창군초기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후 국가 설립을 위한 기본요건의 하나로 군대 조직의 필요성이 객관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자, 이미 식민지 시대를 통하여 군사경력을 보유하고 있던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사설군사단체 또는 군사유사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19] 이리하여 같은 해 11월에는 무려 30여개의 군사유사단체가 난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한 요인이 되었을 뿐이다. 이에 당시 남한을 통치하던 미군정당국은 1945년 11월 13일 군정법령 제 28호를 공포하고 군정청내 국방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미군정당국은 1946년 1월 8일에는 사설군사단체의 해산을 명한 데 이어, 1월 14일에는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함으로써 군창설을 직접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초기 국군창설을 위하여 영입된 장교들을 출신군별로 나누어 보면 크게 일본군계, 만주군계, 중국군계로 대별할 수 있다.
일본군계 만주군계 중국군계
일본육사 봉천군관/신경군관학교 출신 황푸군관학교, 바오딩군관학교 등 국민당 정부군의 정규장교
지원병 출신 기성장교 무관학교/간부훈련소 수료하고 지방군벌에 속했던 장교
일본항공학교 출신 만주군관에서 예과 마치고 일본육사 장교 광복군 출신, 중국군에서 복무했던 한인 병사

광복 후, 국군 수뇌부는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원로들로 구성되어있었다. 광복군 계열에서는 중국군 소장으로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20] 장군이 초대 국방부장관이 되었고 일본 육사 15기로 광복군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 장군이 군정 때 초대 통위부장, 중국군 소장이었던 송호성 장군이 국방경비대 사령관[21]이 되었다.

일본군 계열에서는 일본육사 26기 출신인 이응준 장군이 군정청 군사고문을 거쳐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고 이어 채병덕, 신태영 장군이 참모총장, 국방장관을 맡았다. 만주군 계열에서는 원용덕 장군이 경비대 사령관을 역임하게 된다.

그러나 초대 국방부장관을 지냈던 이범석 장군은 자신이 광복군 출신이었고 국군의 육성에 있어 광복군의 정신을 계승토록 한다는 원칙을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일본육사 출신 장교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순수 군사적인 측면에서 군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22] 그리하여 초기 국군의 형성과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일본의 교육배경을 가진 일본군계 장교들이었다.
1. 인적 자원 측면에서 볼 때 일본군 출신 숫자가 가장 많음.[23]
2. 미군정(하지) 측에서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입장[24]을 취함에 따라 광복군과 거리가 소원해짐.
3. 주한미군사고문단은 가능하면 영어교육을 받은, 즉 진보적이고 서구적인 한국인들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나이가 많고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데다 현대적 전술이나 전투기술이 부족한 광복군 출신들은 자연 제외될 수 밖에 없었다.[25]
4. 광복군 출신들은 한국군의 정통성을 주장(달리 말하면 남북한 분열을 원치 않았음)하면서 남한만의 군 창설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됨으로써 더욱 소외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군 및 광복군 출신 중에 이범석, 유동열, 송호성 외에도 김홍일[26] 중장, 이준식[27]소장, 권준[28]준장, 안춘생소장, 최덕신중장, 유해준준장, 고시복준장, 박영준소장, 박시창준장, 장흥준장, 이성가소장, 이건국 대령, 최용덕중장, 김신중장,박기성준장, 김동수준장 장호강준장 등 적지 않은 사람들이 뒤늦게 참여하여 군 육성에 이바지를 하였으나 큰 빛을 보진 못하였다.[29]

결국, 한국군은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들의 주도하에 기틀을 다지게 된다. 그런데 만주군 출신이 숫적으로 소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출신과 겨룰 수 있었던 것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정권 유지를 위한 세력균형정책, 그리고 주한미군사고문단[30]과 우호적인 관계유지에 힘입은 바 컸기 때문이다. 만주군 출신들은 그들이 만주에서 근무할 때 일본 군사고문단의 자문을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고문제도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미군사고문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하여 유연성이 부족한 일본육사출신들은 지휘권에 집착하여 미군사고문단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두 계파는 자체분열 또는 지연(지역 연줄)을 통한 새로운 계파의 형성등을 시도하면서 5.16 쿠데타에 이르게 되는데, 이 파벌적 요소들은 미군에 의해 제도화된 교육과정을 통하여 더욱 복잡화하게 되었다. 1946년 미군정청에 의하여 국방경비사관학교[31]가 설립되어 군사경험자들 뿐만 아니라 민간인을 교육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층의 장교가 탄생하게 되고, 나아가 이들이 군내의 소장세력을 형성함으로서 5.16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한국전쟁을 거쳐 5.16쿠데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파벌은 대체로 3갈래였다.
일본 육사파 만주군관파 정군파
4년제 정규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만주군관학교 출신 1948년 육군사관학교 개편 이후 졸업생

나머지
송요찬파 : 일본군 하사관 출신이던 송요찬 장군 중심
충청도파 : 이형근 장군, 박병권 장군, 김종오 장군, 민기식 장군, 최경록 장군 등을 중심
함경도파 : 정일권 장군 중심으로 이한림, 강문봉
서북(평안, 황해)파 : 백선엽, 백인엽 형제 중심.

(1) 송요찬

일본군계는 일본육사출신, 학도병 출신, 2년제 간부양성소 출신, 하사관(지원병) 출신, 항공학교 출신들로 구성된다.

많은 조선 청년들이 하사관으로 일본군에 복무하게 된 것은 일본 육군성과 조선총독부가 태평양전쟁 3년 여 앞 군 1938년 4월 3일, 육군특별지원병령(1938년 2월 2일 칙령 제 95호 공포)을 조선에 시행한 뒤 1943년 8월 1일 징병제도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또한 학업에 종사하고 있던 많은 대학생, 전문학생들이 학병으로 끌려간 것은 1943년 10월 12일 선포된 학도동원령 때문이었다.

5.16을 전후하여 일본군계 안에는 뚜렸한 이유없이 이들 중 2개 파 즉, 일본육사출신들과 하사관 출신들 간의 반복이 조성되어 있었다. 갈등의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몇 가지 자료를 기초로 추측컨데, 한국군 편입 전 일본군에서의 상하관계가 한국군 편입 후 병동이 생김에 따라 발생한 사소한 감정적 갈등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광복 후, 혼란기에 창설된 한국군 내에서는 과거의 선배가 뒤늦게 군에 들어가 후배가 되는 등 서열이 뒤바뀐 경우가 적지 않은 데다 온갖 잡다한 성분들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군생활 함으로써 갈등이 심화되었다.

일본 육사 출신들은 당시 숫적으로는 단연 우세했지만, 일제시대 대부분 하급장교 또는 사병이었던 지원병 출신들이 한국군에 참여한 후에는 지원병 출신들이 숫적으로도 우세하게 되었고 계급적으로도 동등한 지위에 올라선 경우가 많았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들은 거의 지원병들이다. 전쟁 말기에 대부분 준위 계급을 달고 있던 이들은 일본군에서 일했다는 약점과 저학력 등의 자질상의 문제점을 갖고는 있었으나 현대전을 경험한 역전의 용사로들로서 특히 소부대 육성엔 필수적인 존재였다.

송요찬 장군은 일본군 하사관 출신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서 자유당 말기 그리고 허정 과도정권 하에서 단기간이나마 육군 참모총장직을 역임했다. 그는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임하던 기간(59~60년)을 전후하여 일본군 하사관 출신들을 중심으로 일단의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2) 일본육사

일본군계 출신들 중 가장 강력함 그룹을 형성하였던 것은 일본육사 출신들이었다.

​우리나라 청년들이 한일합방 이후 일본육사에 처음 입교한 것은 1912년(제 26기)이었으며 일제는 그 후 단속적으로 입교시키다가 중일전쟁 후 종전까지는 해마다 입교시켰다. 물론 합방 이전에 11기와 23기로 입교한 사람도 있었지만, 수적으로는 매우 미미하였다. 이들은 일본군 중위때 독립군에 가담한 지청천 장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본군으로 복무하다가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조선인의 일본육사 입교가 본격화 된 것은 1938년이었다. 합방 후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하여 조선인으로서 일본의 군문을 두드린 예는 적었다. 게다가 1930년대 초반 이전까지 조선인들의 5년제 고등보통학교에 교련과목이 없었기 때문에 입학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던 것이 만주사변 후부터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당시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식민지 조선의 농촌은 파탄에 직면하고 있었으며, 대학을 나온 사람들도 변변한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대량의 실업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안정된 직장이라면 일본군 장교라도 좋다는 풍조가 일기 시작하였다. 더욱기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점점 군국주의화 되어가던 일본은 드디어 조선인 학생들에게도 일본 육사의 문호를 개방하고 심지어 우수한 조선학생들을 포섭하기에 이르렀다. 정상적으로 일본 육사에 처음으로 진학한 사람은 1933년 채병덕, 이종찬에 이어 이용문 장군 등이었으며, 그들은 일본 육사에 진학한 후 계림회(雞林會)라는 친목조직을 만들었다. 계림회는 일본육사출신 조선인들의 친목단체이다. 일본육사 선배들은 후배들과 함께 학교 앞에 마련된 계림회 휴게소에서 어울리곤했다. 당시 도쿄에 있던 영친왕은 계림회를 위하여 방 하나를 얻어주고 휴일이면 과자와 과일도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 조직은 광복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일본육사출신들 중 태평양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대한민국 군문에 들어와 제 1공화국 시대 육군과 공군의 수뇌부를 장악하게 된다. 특히 일본군 출신들은 이승만과 김구의 권력투쟁에서 이승만이 김구의 세력을 거세하려는 의도에서 정규 중국군과 광복군 등 중국군계 출신들을 도태시키자 그 후임으로 충원되면서 본격적으로 부상하게 된다. 한국군 창설 당시 주요 직위를 확보한 중국군과 광복군 출신들은 중국에서 군사경력을 가진 인사들로 주로 정규 중국군 출신들이거나 광복군 출신들이었다. 그들 중 다수는 김구가 관계하였던 뤄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출신들로서 김구와 매우 밀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초기의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일본군 출신 또는 만주군 출신들에 의하여 교체되었다. 이렇게 퇴진하게 된 것은 김구의 피살로 인한 정치적 배경의 소멸과 미군에 의하여 형성된 서구적인 군사제도에서 적응, 미군정의 친일파 우대 정책으로 기인한 것이었다.

예컨대, 장흥은 초대 헌병사령관을 지냈으나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전봉덕에게 헌병사령관 직을 넘겼다. 이후 특무부대장인 김창룡에게 소환되 왜 안두희를 영창에 보내려 했는지와 한국독립당과의 관계를 추궁받았으며, 1960년 8월 김구 암살 사건 재조사 과정에서 이를 증언하였다.#[32]

일본 육사출신들은 일본 정규군 출신들로서 상당한 군사적 지식과 경험을 가진 숙달된 전문가들이었으며, 그 우수한 자질로 인하여 5.16이전까지는 이종찬 중심으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정군주의자들이 주요 정군대상 중의 하나였다. 그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만주군관학교에서 편입된 자 제외)
제 11기 윤치성, 노백린[33], 김관현 등 15명
제 15기 김웅성, 김기원, 유동열[34], 박영철, 박두영 등 8명
제 23기 김광서
제 26기 이응준, 김준원, 신태영, 유승열, 안병범, 홍사익, 이청천[35], 박승훈, 이대영 등 11명
제 27기 김석원, 백홍석, 장석륜, 장성환, 박창하, 정훈, 윤상필, 유관희, 원용국 등 20명
제 29기 이은(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조대호
제 30기 엄주명
제 42기 이건(고종 손자, 의친왕 장남)
제 45기 이우(고종 손자, 의친왕 차남), 이형석
제 49기 채병덕, 이종찬
제 50기 이용문, 지인태
제 52기 박범집, 최홍하
제 53기 박재흥, 신응균
제 54기 강석우, 김정렬, 노태순
제 55기 김창규, 유재흥, 전원상
제 56기 김종석, 이형근, 최정근, 최창식
제 57기 김영수, 김호양, 정상수
제 58기 박원석, 신상철, 안광수, 정래혁, 최복수, 한용현
제 59기 장창국, 홍승화, 김수순
제 60기 김태성, 이성구, 이연수, 이재일, 장지량, 조병건
제 61기 김은주, 김중환, 김차경, 오일균, 정만영, 조병화, 조철형, 최용기

(3) 만주군

이승만이 중국군 출신들은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육성하였던 일본군 출신들의 세력이 점차 비대하여 지자 그는 다시 이들을 견제세력으로 만주군 출신을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만군 출신 장교들을 1952년부터 1958년에 이르기까지 육군참모총장의 자리를 거의 독점하면서 이승만의 비호 아래 한국군부를 장악하였다.

<표> 역대 합참의장과 육군참모총장의 출신배경과 재임기간 (1948~1961)

합참의장
역대 성명 출신 교육 편입전 계급 재임기간
1 대장 이형근 일본육사 군영 대위 1954.2.17.~1956.6.26.
2 대장 정일권 봉천군관 군영 대위 1956.6.27.~1957.5.17.
3 중장 유재흥 일본육사 군영 대위 1957.5.18.~1959.2.22.
4 대장 백선엽 봉천군관 군영 중위 1959.2.23.~1960.5.31.
5 중장 최영희 학도병 군영 소위 1960.8.29.~1960.10.7.
6 중장 김종오 학도병 군영 소위 1960.10.8.~1961.5.31.
7 대장 김종오 학도병 군영 소위 1961.6.~1964.4.

육군참모총장
역대 성명 출신 교육 편입전 계급 재임기간
1 준장 이응준 일본육사 군영 대령 1948.12.15.~1949.5.8.
2 소장 채병덕 일본육사 군영 소령 1949.5.9.~1949.9.31.
3 소장 신태영 일본육사 특임 소령 1949.10.1.~1950.4.9.
4 소장 채병덕 일본육사 군영 소령 1950.4.10.~1950.6.29.
5 중장 정일권 봉천군관 군영 대위 1950.6.30.~1951.6.22.
6 중장 이종찬 일본육사 특임 소령 1951.6.23.~1952.7.22.
7 대장 백선엽 봉천군관 군영 중위 1952.7.22~1954.2.13.
8 대장 정일권 봉천군관 군영 대위 1954.2.14.~1956.6.26.
9 대장 이형근 일본육사 군영 대위 1956.6.27.~1957.5.17.
10 대장 백선엽[36] 봉천군관 군영 중위 1957.5.18.~1959.2.22.
11 중장 송요찬 지원병 군영 하사관 1959.2.23.~1960.8.22.
12 중장 최영희 학도병 군영 소위 1960.5.23.~1960.8.22.
13 중장 최경록 지원병 군영 하사관 1960.8.23.~1961.2.16.
14 중장 장도영 학도병 군영 소위 1961.2.17.~1961.6.5.

만주군은 1932년 일본이 만주에 세운 괴뢰정권인 푸이(溥儀)의 만주국 보조하기 위하여 일본 관동군이 만주, 조선, 일본에서 병력을 징발하여 조직한 군대이다. 일본은 만주군을 구성하면서 이를 지휘할 장교양성을 위하여 설립한 것이 만주군관학교였다. 만주군관학교의 정식 명칭은 만주제국육군군관학교였다.

그 당시 만주군은, 사병은 중국인이었지만, 장교는 일본인과 중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창설 초기 봉천에 2년제 군관학교를 세워 장교를 양성하였다. 이렇게 초기 충원이 끝나자 신경(장춘)에 4년제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만주제국육군군관학교라 칭하였다. 이 학교는 그 성격상 일본군과 동질성을 유지하게 하고 인간적인 유대를 조성시키기 위해서 일본인 후보생과 조선인 후보생 중 성적이 우수한 극히 일부 생도에 대해 예과를 마치면 본과는 일본육사에 입교토록했다. 따라서 만주군관학교의 학제나 교육내용은 일본육사의 그것을 본뜬 것이었고 심지어 입학과 졸업 날짜도 일본 육사와 비슷하였다.

만주군관학교(신경)[37]에는 한국인들이 1기부터 7기에 걸쳐 입교하였으며 단결력도 강하였다. 일본인으로 받아온 차별대우와 중국인으로부터 받은 망국인으로서 멸시 등이 그들을 강하게 뭉치도록 했다. 또한 한국인 학생들의 자질이 매우 우수하여 개교 이래 1기에서는 박임항, 2기에서는 박정희 4기에서는 장은상, 5기에서는 강문봉이 전체 수석을 차지하였다. 한국인 졸업생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봉천군관학교>
제 5기 김석범, 정일권, 김백일, 송석하, 신현준, 석희봉
제 7기 최남금
제 9기 백선엽
기타 윤춘근

<신경군관학교>
* 졸업 후, 일본 육사에 편입
제 1기 이주일*, 김동하, 윤태일, 박임항*, 최창언*, 이기건, 김영택, 방원철, 김민규, 강재순, 최창륜, 조영원, 이순
제 2기 박정희*, 이한림*[38], 김민규, 이재기, 이섭준, 이병위, 이상진, 안영길, 강창선, 김재풍, 김원기
제 3기 최주종*, 강태민*
제 4기 장은상
제 5기 강문봉*, 황택림*, 이용술, 김태종
제 6기 김동훈, 김윤근*, 김세현*, 정정순*, 김학림*, 김기준, 김석권, 이우춘, 최정순
제 7기 김광식, 정상혁, 김윤선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은 만주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광복이 되자 대부분 귀국하여 한국군의 창설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이 이승만에 의하여 일본군 출신들의 대체세력으로 발탁되게 된 것은 보다 젊고 경험도 부족하여 통제가 비교적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1952년 5월, 이승만은 자신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전시수도인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에게 1개 전투사단을 동원할 것을 명령하였다. 부산정치파동 내란 시도 행위였다. 그러나 이종찬은 전방 전투부대의 부족과 군의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이승만이 돌연 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당시의 국회의원과 야당을 탄압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으로 이종찬은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고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났다. 사실상 추방조치였다.

1950년대 후반기 주요 군부 지도자 (지역출신별)
서북 대장 백선엽, 중장 백인엽, 대장 최세인, 중장 장도영, 중장 채명신, 중장 강영훈, 중장 김상복, 중장 박현식, 중장 양국진, 소장 김석범(해군), 소장 김충남(해군)
남부, 중남부 중장 이종찬, 대장 박정희, 대장 민기식, 대장 김종오, 대장 장창국, 대장 김용배, 대장 이형근, 중장 김정렬(공군), 중장 박병권, 중장 유재흥, 중장 김형일, 중장 최영의, 대장 김계원, 대장 서종철, 중장 김성은(해병대), 중장 박원근, 소장 송석하. 중장 신현준(해병대)
동북 대장 정일권, 대장 이주일. 중장 강문봉, 중장 이한림, 중장 윤태일, 중장 박임항, 대장 한신, 중장 이병형, 중장 최창언, 중장 김동하(해병대), 소장 박기병, 소장 이용, 준장 공국진, 소장 최주종

이승만은 이종찬의 후임으로 만군출신인 백선엽을 임명하였으며, 그같은 군부 개편과 함께 정치적 목표인 대통령 재선 마무리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이승만은 이종찬 장군의 항명사건을 계기로 그 후엔 자신이 통제하기 어려운 인물을 정부 요직엔 절대로 앉히지 않았다.

​이승만은 이들 주요 군지도자 중에서도 만군출신의 서북파 백선엽과 동북파 정일권을 서로 견제시켜 가면서 이들을 번갈아가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는데, 이들은 요직에 있는 동안 강력한 세력을 확보하였다.

​즉, 그들은 고향인 평안도와 함경도를 기반으로 군부내의 서북평안파와 관북함경파를 형성한 것이다. 정일권이 그같은 세력을 구축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봉천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군 소위로 있던 정일권은 1937년 간도의 용정에 있는 그의 모교 광명중학교에 가서 졸업예정자들을 모아놓고 군관학교에 지망토록 졸업 후의 진학지도연설을 한 바 있다. 그 결과 많은 우수한 후배들이 신경 만주군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신경 만주군관학교 제 1기생을 모집할 때 13명의 한인이 입학하였는데 그 중 11명이 광명중학교 출신이었다. 이때 선후배 관계는 광복 후 한국군으로도 옮겨져 하나의 파벌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4) 정군파[39]

소위 정군파로 「혁명실기」에서 자칭된 쿠데타 주동 세력들은 크게 만주군출신 내의 비주류들과, 미군정하에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南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 교육을 받으며 후에 육사 5기로 명칭된 그룹들과, 육군사관학교로 개편된 이후 육사 8기생으로 구성된다. 물론 육사 5기와 육사 8기가 모두 「혁명주동세력」으로 참여한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쿠데타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서 주류가 육사 5기와 육사 8기라는 뜻이다.

만주군출신 장교들 중엔 출신 지역적으로 서북파와 동북파 중 어느 쪽에도 가입되지 못하는 부류가 있었다. 중남부 출신들이 바로 그들이었는데, 이들은 분파 투쟁에 적극적이지 못되어 파벌경쟁에 있어서 다소 애매한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파벌에서 소외되었던 중남부 출신의 만주군 출신들이 쿠데타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쿠테타 세력은 연고지에 따른 파벌에서도, 교육경력을 기초로 한 파벌에서도 모두 배제되어 있었다.

3.2. 5.16 군사정변과 육사 5기와 8기의 투쟁

육군사관학교 5기 졸업생들은 5.16 쿠데타 당시 해병대와 함께 실제로 병력동원을 담당하였다는 것과 육사 1~4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수한 민간출신이었다는 점에서 비중을 차지한다. 예컨데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 공수단장 박치옥, 제 5사단장 채명신, 제 12사단장 박춘식, 그리고 6관구 참모장 김재춘[40] 송찬호, 이원엽, 박기석, 최재명 등 5기생들이었다. 이들은 특히 박정희 대위가 육사 시절 제 1중대장을 맡아 지도한 인연이 있어 개인적인 친분도 두터웠던 편이었다.

이에 비하여 8기 졸업생들은 쿠데타를 주로 계획하고 또한 쿠데타 이후를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비중을 갖는다. 이들은 최영희 참모총장의 경질과 부패 장성의 퇴진 등을 요구함으로써 야기된 「16인 하극상 사건」 [41]등의 정군운동을 주도한 장본인들이었다. 이들의 집단적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로 배출된 장교라는 점이다. 조선경비사관학교가 1948년 9월 5일을 기하여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고 처음으로 모집한 것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 당시 경쟁률은 약 10대 1이었으며 총 합격자는 1,359명(도중 24명 탈락으로 1,335명이 졸업)이었다. 이 무렵 시기적으로 일본군이나 중국군 또는 만주군 출신들이며 이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현역으로 복무한 시기였으므로 지원자 중에서는 민간인 출신들이 많았다. 또 정부 수립 후 처음 뽑은 사관생도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에게는 순수 대한민국 장교라는[42] 자부심이 다른 기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했다.

2. 이들은 그 때까지의 다른 기수들에 비해 비교적 교육기간이 6개월이었고, 한국전쟁시 직접 야전소총 소대장 및 중대장으로 종군하였으므로 실전경험이 풍부하였으며 단합도 잘 된다는 평가를 듣고 있었다.

5.16 쿠데타에 참가하였던 육사 8기 졸업생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종필, 김형욱, 길재호, 석정선, 서상린, 류승원, 오학진, 이종근, 엄병길, 정문순, 김성용, 김동환, 안태갑, 임병주, 심의섭, 박배근, 박용기, 옥창호, 오치성, 이석제, 신윤창, 박원빈, 고동철, 임광섭, 장동운, 조창대, 김용건, 장수영, 윤필용, 최홍순, 이지찬, 홍종철

위에서 열거한 3부류의 집단들 중 가장 상대적 박탈감을 심하게 경험한 파벌은 정군파들 중에서도 8기 졸업생들과 영관급에 머물러 있던 5기생의 일부였다. 만주군관학교 출신들 중 김동하 장군을 제외하고는 해병대를 이끌었던 김윤근[43]장군이나 후방 조직을 담당하였던 제 2군 사령부 참모장 이주일 소장은 어떤 불만의 차원에서 가담하였다기 보다는 만주군관출신이라는 박정희와의 학연 및 개인적 친분에서 참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사관생도생 교육훈련 및 진급 개황
기별 교육기간 입교일 졸업생수 전사자 장성수 1960년대 당시계급
1 45일 1946.5.1. 40 9(23%) 19(48%) 소장 ~ 대장
2 80일 1946.9.24.196 40(20%) 79(40%) 소장 ~ 대장
3 3개월 1947.1.13. 296 88(30%) 63(21%) 준장 ~ 중장
4 4개월 1947.5.16. 107 38(36%) 16(15%) 대령 ~ 소장
5 3, 6개월 1947.7.1. 380 97(26%) 59(15%) 대령 ~ 소장
6 3개월 1948.5.5. 235 94(40%) 21(9%) 대령 ~ 소장
7 3, 6개월 1948.8.9. 561 137(24%) 41(7%) 대령 ~ 준장
7(특) 8주 1948.8.17. 190 42(22%) 41(22%) 중령 ~ 소장
7(후) 4주 1948.11.22. 345 75(21%) 16(5%) 대령 ~ 준장
8 6개월 1948.12.7. 1335 402(32%) 111(9%) 중령 ~ 대령
8(특1) 3주 1948.12.7. 11 2(18%) 9(82%) 중령 ~ 중장
8(특2) 5주 1948.12.7. 145 32(22%) 9(6%) 중령 ~ 소장
8(특3) 12주 1948.12.7. 181 45(25%) 11(6%) 중령 ~ 소장
8(특4) 5주(1차) 1948.12.7. 148 53(21%) 17(7%) 중령 ~ 준장

쿠데타 주동세력 당시 계급(8기 제외)
이름 계급 육사기별
박임항 중장 특임
박정희 소장 2기
이주일 소장 7특
김동하 소장 해병대
김윤근 준장 해병대
한웅진 준장 2기
김진위 준장 3기
최주종 준장 8특
손창규 준장 3기
문재준 대령 5기
박창암 대령 특임
원충연 대령 정훈1
김인화 중령 9기
정치갑 중령 9기

그런데 대부분 영관급 장교들로서 대령 및 장군 진급을 목표로 하였던 육군사관학교 5기생들과 8기생 중 중령으로남아있는 사람들은 인사정책에 심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육군은 당시 매우 심각한 인사정체현상을 겪고 있었다. 합참의장직의 경우 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까지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이 모두 차지하였고, 육군참모총장직의 경우도 두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러했다. 더우기 요직을 연임 내지 중임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될 수 밖에 없었다.

예컨대 채병덕, 정일권, 백선엽은 참모총장을 각각 두 번씩 연임하였고 합창의장의 경우 김종오는 3대를 역임하였으며 이형근, 정일권, 백선엽, 최영희, 김종오는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각각 역임하였고 특히 백선엽정일권을 총장 2회, 의장 1회를 김종오는 총장 1회, 의장 3회를 각각 역임하였다.

이와같이 군부 수뇌가 장기간 소수에 의해 독점되었기 때문에 후진들은 성장할 수 없게 되어 사관학교 1기생의 경우 전쟁 말기에 장성으로 승진하여 1960년대 초에 대거 퇴역해야만 했으며, 5기생은 대령을 7~8년간 달아야했다. 특히 8기생은 소위에서 소령까지 승진하는데 4년이 걸린 반면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데 극단적인 경우 그 2배인 8년이 소요되었다. 장성의 승진비율도 군영출신이 71%인데 반해 1기48%, 2기 40%, 3기 21%, 4기와 5기 15%, 6기 9%, 7기 7%였다. 당시의 이러한 인사정체의 원인은 당시 군수뇌부 장성들의 나이가 젊었던 관계로 군에 더 오래 머무르려 했으며 미 군사고문단이 자신들에게 협조하여 온 장성들이 퇴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특히 8기 졸업생들은 숫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승진정체에 대한 불만이 더욱 클 수 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전사자 402명, 실종 45명, 부상 502명 등 전 동기생의 2/3가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16 쿠데타 전 대령 진급자 몇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령급이거나 그 이하였다. 불과 4개월 먼저 입교하였던 78기만 경우에도 소장진급자를 내고 있었으나 8기의 경우 장성진급자는 1명도 없고 그 전망마저 매우 비관적이었다. 확실히 계급사회인 군에 있어 승진 정체는 불만을 유발하는 원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자유당 시절 여야간의 격렬한 정쟁, 정치인들과 고급장교들의 결탁, 그리고 여기에 야기되는 부정부패도 이들 소장장교들을 자극시키는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하겠다. 당시 장교들의 심리상태를 「한국군사혁명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충실한 장병이 진지를 묘지로 보며 군무에 희생과 봉사로써 피를 쏟는 반면, 일부 부패층은 부대의 사기업으로 보고 군무를 영업행위로 악용하여 사병은 무임으로 구사되는 노예에 불과한 취급을 하여왔다.

이같은 진급의 정체는 8기생을 비롯한 쿠데타 주동 세력들에게 현실에 대한 불만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하고 있었다. 특히 정군파 소장장교들은 일본 육사파의 보상에 깊은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육군대학에 몸 담았던 이종찬이 일본육사파와 육군대학 내의 조선민족청년단계를 연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1960년 5월, 송요찬 장군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육군참모총장 자리를 놓고 위의 세 집단이 극명한 대립의 양상을 빚게 된다. 과도정부의 국방장관직을 맡고 있던 이종찬은 육군참모총장으로는 같은 일본육사출신인 유재흥 중장을 추천하였고, 송요찬파에서는 송요찬 장군의 유임을 주장하였다. 결국 두 파는 송요찬파가 제안한대로 최영희 중장 임명안으로 타협을 하고 이 문제를 일단락 짓기로 하였다. 당시 군내에서 최영희 장군을 비판하는 장교도 있었으나 비교적 후덕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정군파의 입장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그 후 정군 주장으로 시련을 겪던 최영희 총장이 박정희 소장의 인사참모 영입을 시도하였으나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이와같은 군내 사정과 더불어 당시 민간정부가 취한 군감축조치도 군의 승진정체를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1957~58년에 걸쳐 단행된 군 감축결과 군 병력은 70만에서 60만으로 줄어들게 되었는데, 이는 하급장교들의 승진기회를 더욱 위축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그런데도 장면 정부가 병력을 40만으로 감축하겠다고 선거공약을 내걸자 위기감은 더욱 가중되게 되었다. 그 뒤 20만 감축계획은 10만 감축으로 축소되었지만, 이 역시 하급장교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장면이 총리로 취임한 2일 후인 8월 21일 김종필과 석정선이 총리공관을 방문하여 새로 기용될 국방장관의 자격요건을 건의하려다 실패하게 된다. 그 후 현속호 국방장관과 면담 또한 실패하고 이른바 「16인 항명사건」으로 정군파 장교들이 실질적인 피해를 입게 되자 이들의 혁명계획은 가속화되기 시작하였다. 즉 민주당 정권의 정군 외면 그리고 군 감축이라는 위협요소는 이들로 하여금 쿠데타라는 최후의 방안으로 모색토록 재촉한 꼴이 된 것이다.

​당시 민주당 정권이 군 내부의 사정에 관하여 무지하였던 점은 장면 정부의 가장 결정적인 허점 중 하나였다. 과도내각수반 허정장면에 정권을 이양하면서 "민주당은 군부에 무지하니 정권이 뿌리내릴 때까지 군을 통제하고 지도할 수 있는 이종찬 장군을 국방부장관으로 임명해야한다."고 권유하였다고 한다. 장면 총리도 이에 동의하였으나 신구파의 각료 안배 싸움으로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군을 잘 모르는 권중돈(구파)이 임명된 때문이었다. 허정은 그의 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에서 "만일 이종찬 장군이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면 5.16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군과 경찰관계가 원만치 않았던 당시 사정으로 보아 경찰출신 박병배가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고 박차관의 군과 장성에 대한 험구적 비난이 공사석에서 자주 있었던 것도 군을 자극하였다는 일부 장교들의 주장도 있다.

그러나 5.16쿠데타는 민-군간의 갈등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라 군부내의 갈등과 주체세력의 개인적인 불만이 복합되는 등의 이유로 유발되는 것이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5.16쿠데타가 성공하자 쿠데타 주체 세력들 간의 권력투쟁이 점차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쿠데타 후, 성립된 군사정부는 인적 구성에 있어서 여러가지 색깔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단편적으로 분류해본다면 육사 5기, 육사 8기, 김동하 장군의 해병대 세력과 동북파(함경도), 그리고 쿠데타 직후 장도영와 서북파(평안도, 황해도)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들 중 쿠데타 정부에서 가장 치밀한 계획 하에 헤게모니를 장악해간 것은 김종필씨를 중심으로한 육사 8기생들이었다. 그들은 나머지 세력들을 3차에 걸쳐 반혁명세력으로 몰아 쿠데타 정부로부터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1961년 7월 9일, 혁명정부는 장도영을 비롯한 반혁명세력 44명을 구금하였다는 발표를 하였다. 당시의 명단을 살펴보면, 장도영, 송찬호, 박치옥, 문재준, 방자면, 이희영씨 등인데 이들 중에는 비 5기생들도 간혹 포함이 되어 있었지만 거의 전부가 8기생들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5기생들이었다. 8기생들은 쿠데타 당시 실제로 병력을 동원할 능력이 없었던 반면, 5기생들은 쿠데타에 동원되었던 실제 병력의 지휘관들이었다.

장도영박정희, 김종필과의 불화관계에 있었고 5기생들도 김종필의 견제에 의하여 군사정부 내에서 실권을 잠식당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도영과 反김종필계의 5기생들은 몇 차례 회동끝에 1961년 7월 1일을 거사일로 잡고 병력을 동원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지역별로 이야기한다면 황해도, 평안도 출신의 서북파이며 육사 5기생은 대부분 거세되었다.

3.3. 알래스카 토벌작전

1963년 5월 11일, 소위 반혁명음모가 적발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전 해병대 예비역 중장인 김동하박창암, 방원철, 이종민 등이 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 사건 역시 쿠데타 세력 중 한 줄기가 육사 8기생에 의해 제거되는 과정이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은 대부분 김동하와 같은 만주/함경도 출신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쿠데타에 참여했던 해병대 주류와 동북파의 상당부분이 제거 되었다.

1965년 5월 16일에는 소위 원충연(정훈 1기) 대령, 박인도(8기 특) 대령, 이인수(육사 10기) 중령의 원충연 반혁명 사건 발표되었다. 이들은 모의에 가담했든 이모대령의 밀고에 의해 육군방첩부대에 체포되고 육군군법회의에서 무기 또는 징역 15년 장기형을 선고받았다.

3.4. 김종필과 충청도 인사 축출

5.16 군사정변이 성공하자 이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김종필[44]이 군정기간은 물론 민정이양 정부팀은 있었지만,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이에 따라 김종필씨는 그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출신지인 충청 출신 장성들을 군 요직에 상당수 앉혔다. 그러나 공화당의 일부 반김종필 세력과 박정희 대통령의 견제로 김종필씨가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지게 되자 군부 내에 충청도 출신의 인맥은 형성할 수 없었다.

육사 8기 출신의 김종필씨가 수년 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 것도 이른바 혁명 주체 가운데 숫적으로 가장 많은 동기생들의 음양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5.16 주체인 육사 5기와 대결 끝에 승리한 8기생들 특히 김종필이 구축해 놓은 기반을 그대로 둘 경우 자신의 군통수권에도 지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한 박정희 대통령은 육사 8기를 견제하는 한 편 자신의 인맥을 형성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몇 차례의 파벌 투쟁을 통해 한국군 내의 파벌이 일단 정리상태에 들어간 63년 민정이양 무렵부터 자신의 출신지인 영남 출신 인사들을 정부나 국회요직에 기용하기 시작한 박정희 대통령은, 군 인사에 있어서도 영남출신들을 가 일층 선호하기 시작했으며, 이같은 경향은 그의 집권기간이 장기화 될 수록 더욱 짙어지게 되었다.

3.5. 하나회의 육성

1. 하나회의 모체, 칠성회

박정희 장군이 육사 8기를 견제하기 위한 자신의 영남인맥 형성과정에서 11기생[45]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것이 이른바 칠성회[46]이다. 박정희 장군이 미국 방문을 서둘렀던 1961년 말,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정호용, 권익현, 최성택, 백운택 소령 등 영남출신 11기생들이 외견 상은 권력과 무관한 친목모임인 칠성회를 조직하게 된다. 이 모임은 구 육군사관학교[47] 세력들과는 어느 정도 단절되어 있 더욱이 구성 면면들이 모두 영남출신들이어서 박정희 대통령 자신의 권력보호를 위한 친위대적 인맥형성엔 안성마춤인 그룹이었다. 11기인 김복동 소령도 칠성회의 멤버였지만 이 모임이 하나회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전두환과 불편한 관계로 탈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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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재학 당시 오성회[48] 동료들과 기념촬영하는 전두환(가운데 위), 노태우(좌측 아래)

권력의 비호 아래 발족한 칠성회는 계속 정규육사출신들을 비밀리에 포섭, 그 조직이 크게 확대되자 명칭도 하나회(일심회 一心會)로 바뀌어졌고 군내의 유일한 사조직으로 탈바꿈해갔다.

정규육사 장교그룹과 주로 경상도 출신 장교들로 구성된 하나회 장교 그룹을 동일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하나회가 정규육사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 인원에 있어 1979년 말, 한 기수당 약 5%, 전 장교의 1%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회에 가입한 기수도 11기에서 20이까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나회는 1973년 초, 이른바 윤필용 사건 때 그 일부가 법적 제재를 받아 군에서 제거되었지만, 1979년 「10.26」 사건까지 암묵리에 성장을 지속, 제 5공화국을 창출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11기생 중의 일부가 중심인물인 하나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규육사 설립 경위와 첫 졸업생인 11기생의 특징을 천착해 봄으로써 보다 분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2. 정규육사 설립경위 및 11기생의 특징

4년제 정규육사가 설립된 것은 1951년 10월의 일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두 차례 시도가 있었다. 첫번째 시도는 1949년에 있었다. 육군본부에는 1949년 5월 7일, 6개월 과정으로는 최종기인 제 9기 모집과 함께 2년제인 제 1기 육군사관학교 생도의 모집을 공고하였다. 당초 4년제로 계획되었던 생도 제 1기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2년제로 조정되었다가 입교 무렵에 1년제로 단축되었다. 그 이유는 보병학교 설치 중이던 갑종간부후보생 과정이 계획보다 지연되어 9기생 이후에 장교보완에 차질이 예상되었고, 아직도 2년제 교육을 감당할만한 준비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2차에 걸친 시험을 통과한 황규만 등 257명이 1949년 7월 13일 입학하였고, 그 후 특명에 의하여 81명이 추가로 입학, 결국 1기생 총원은 338명이 되었다. 그러나 생도 1기는 1950년 졸업을 20일 앞두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임관하지 못하다가 동년 7월 10일 전투중 전사자, 부상자, 실종자를 제외한 134명만이 임관되었다. 1950년 생도 제 1기는 똑같이 2년제로 계획되어 같은 날짜에 시험을 치르고 입학한 제 1기 육군경리학교 생도 24명과, 병참생도 26명도 함께 육사 제 10기로 호칭되었다.

한 편, 생도 제 1기생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준비와 경험을 보완한 육군 수뇌부와 학교당국에서는 1949년 11월 마침내 4년 과정의 생도 제 2기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도 입학 24일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교육을 받지 못한 채 1950년 8월 15일 부산에 설립된 육군종합학교 종합 1기 혹은 2기로 편입되어 그곳에서 6주간 교육을 마치고 임관하였다.#[49]

결국 정규 육군사관학교 설립은 3번째 시도에서 결실을 본 셈이었다. 1951년 10월 30일에 재개교하여 1952년 1월 20일, 제 11기생[50]의 입교식을 가진 육군사관학교는 동란중이었던 남한 전역을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주요 교수진은 서울대 교수들로 구성되었으며, 미국 육사제도를 거의 본 뜬 관계로 학사관리가 철저하였다.

11기부터 13기까지는 피난지였던 진해와 부산에서 교육을 받았고 14기부터는 서울에서 모집되었다. 11기가 첫 이학사를 받은 것은 1955년이었다. 그러나 육사 11기생들은 몇가지 점에서 이전의 사관학교 졸업생들과 다른 면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이들은 강한 동료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과거 어느 기수보다도 긴 4년간의 학창생활에서 고락을 함께 한 데 기인한 것이었다.

둘째, 강한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유익의 서구식 대학교육을 받았다는 자부심, 그리고 육사가 사실상 육군의 최고 교육기관이라는데 이유였다. 1955년 4월 27일자 육군본부 통첩에 의하여 육사 11기로 변경되기 전까지는 육사 11기는 육사 1기로 지칭되었다. 그들은 융통성이 없는 「원칙장교」로 불리었으며, 후배들로부터도 실질적인 최고 선배로 인식되었는데, 이런 엘리트 의식은 임관 후까지 이어져 기성 장교들과 위화감 내지 긴장관계를 자주 빚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셋째, 이들은 정치화되는 계기를 비교적 일찍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성향은 위로부터의 관심이 기인한 바 크다. 일찍이 이승만 대통령은 육사 11기생들의 재학 중 6차례나 방문하여 관심을 보인 바 있다. 또한 일선에 배치된 후에는 일부 사단장, 군단장 및 군사령관 등으로부터 지나친 우대를 받았으며, 후원자들로부터는 "선배는 무능하며 도둑놈이고, 너희들은 군의 참신한 등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도 군 재직 시절부터 이들을 중용했으며, 5.16 쿠데타 후에는 전두환, 손영길 등 영남출신 장교들을 중심으로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조직토록해서 육성했음은 이미 쓴 바와 같다.

3. 하나회 회원에 대한 특전

1973년 3월 초,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윤필용 사건을 조사하던 중 하나회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자 윤 장군 사건보다는 하나회 문제에 더 비중을 두고 수사를 벌이게 된다.

윤필용 사건이란 1973년 3월 윤필용 장군을 중심으로 박 대통령 측근과 각료출신들이 박정희 대통령 퇴진 관련 문제를 의논하는 자리에 동석했던 신범식 당시 서울신문사장[51]이 그 사실을 박종규 경호실장을 통해 박대통령에게 보고함으로써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령부에서 조사처리한 모반기도 사건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당시 보안사가 입수했던 첩보와 최근의 관계자 증언등을 토대로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973년 초, 이른바 10월 유신 작업이 마무리 될 무렵 궁정동의 한 식당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윤필용 장군이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시국담 끝에 윤장군이 "각하가 노쇠하니 건강이 약해지기 전에 물러나시게 해 우리가 모시고 후계자를 내세워야 한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하자, 이후락 부장이 "각하가 물러나면 다음엔 누가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윤필용 장군은 "형님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한 뒤 이후락 부장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온 사실을 은근히 추켜 세우며 "삼국시대에서 신라의 김춘추가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나라와 고구려를 다녀온 일이 있으며 그 후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 형님도 비슷하죠."라고 말했다. 당시 첩보로는 이 엄청난 말에 대해 이후락 부장은 사뭇 흐뭇해하면서 "윤장군도 만년 수경사령관만 하라는 법이 있소? 총리도 할 수 있는 것 아니오?"라고 맞장구 쳤다는 것이다.

이후락 부장에게 진술은 "그 때 윤필용 장군이 각하 노쇠 운운해서 말같지도 않은 이야기라고 일축했다."고 딱 잡아 떼었다. 이렇게 말한 뒤 이후락 부장은 "윤장군 그 새끼, 세상에서도 이야기가 많지 않느냐? 당장 잡아넣어야 한다."고 선수를 쳤다고 한다.

윤필용 장군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10인 중 한 사람은 1990년 12월 21일자 중앙일보에 연재 중인 시리즈 「청와대 비서실」을 쓰고 있는 김진 기자와의 대담에서 당시 이부장과 윤장군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했다.
10월 유신 이후 HR(이후락)과 윤장군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특히 참모들의 교량 역할이 컸어요 이후락 부장 고향 후배인 이재걸 정보부 감찰실장과 역시 울산 출신인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손영길 준장이 두 보스를 밀착시키려고 노력했죠. 더군다나 이후락 부장이 손영길 준장을 데려다 정보부 차장보로 쓰겠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가 퇴짜 맞은 일이 있는데, 이것이 박대통령으로 하여금 HR-윤 관계를 더욱 의심케 했을 것입니다.
나는 원래 HR(이후락)와 관계가 가깝지 않았어요.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입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경계하던 JP(김종필)나 HR(이후락) 중 어느 쪽으로 기울어서는 안되었거든요. 게다가 저 자신이 HR의 행동거지를 좋게 보지 않았어요. 처음엔 나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박대통령에게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부장은 각하를 해칠 인물이라는 등 세평이 좋지 않습니다. 그를 잘라야 합니다."라고 건의를 하곤 했지요. 그런데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박대통령은 고소란히 HR에게 해주는 거에요. 그러면 HR이 나한테 꺼구로 전화를 걸어 "왜 각하에게 나를 자르라고 하느냐? 내가 그렇게 못마땅하냐?"고 항의하곤 했죠. 1972년 5월 HR가 평양에 가서 김일성이를 만나고 이어 7.4남북공동성명이란 걸 내놓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보통 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을 고쳤죠. 내가 그렇게 건의했는데도 박대통령이 HR를 신임하는 이유를 알 거 같았어요. "박대통령은 부하의 장단점을 잘 파악해서 쓰고 있구나. 박대통령이 필요해서 쓰는 사람은 방해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죠. 사실 한편으로 HR을 견제하는데 역부족이란 생각도 들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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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윤필용 장군

이 사건에 대한 박대통령의 관심은 지대한 것이었으며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도 "믿었던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며 분개하기도 했다.

당시 보안사령부에서 밝혀진 수사결과에 따르면 하나회 가입을 원하는 장교는 입회시 반드시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하고, 입회한 후에는 목숨을 걸고 조직의 명령을 지상으로 받들며 절대 비밀을 지킬 것을 서약했다. 육사 선후배 관계에 입각한 위계질서에 따라 조직된 하나회는 특정인의 인위적으로 접근, 포섭하되 일정 정원을 유지하는 충원 방식을 택했으며 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정원제를 유지하였던 이 조작의 충원은 국가관, 국토방위에 대한 사명감이나 개인적 역량보다는 지연, 학연 등이 크게 감안하여 이루어졌다. 특히 지연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여 영남지역출신들이 절대 다수를 점했고, 상징적으로 여타 지역 출신 장교들이 가입되었지만, 그 수는 미미하였다.

​이들은 정상 군조직보다 이 사조직에 신명의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일단 하나회에 가입이 되면 이들은 육군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여러가지 혜택과 특전을 받았다. 이들 중 일부는 고위층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일정한 활동비까지 지급받기도 했다. 또 이들은 일부 재벌들로부터 자금을 받아내기도 했지만, 일부 기업인은 자진해서 하나회에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일반 장교들보다 생활형편이 나았다. 하나회 회원들은 또 박대통령으로부터 직급에 따라 승용차, 지휘봉 등이 수여되기도 했고 일부는 「一心」이란 휘호와 함께 지휘봉을 수여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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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코로나(CORONA) 자동차 : 신진이 도요타 크라운 자동차 모델을 기술제휴를 통해 한국에서 조립, 생산했었다. 엔진은 4기통, 배기량은 1490cc로 소형 세단, 1972년 국내 시장에 판매된 코로나 자동차 한 대 값은 83만7000원(1970년 기준)

1973년 1월 육사 11기생으로는 처음으로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 최성택 등 4명이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되었다.[52].4명이 모두 경상도 출신이지만, 전두환 장군과 손영길[53] 장군은 하나회 출신이었다. 이들 2명은 같은 해 2월 초 박정희 대통령의 만찬 초대를 받아 청와대에서 축하연을 받은 후 승용차 및 금일봉을 선물로 받았다. 승용차는 당시로서는 값비싼 크라운 4기통짜리 세단이었다.

하나회원 중 일부는 위관장교 시절부터 재벌들이 베푸는 주석에 동석할 수 있는 기회를 적지 않게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회원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무엇보다도 진급과 보직상의 「특혜」 그것이었다. 군과 같은 전형적 계급사회에서 진급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회 간부들은 군의 요직을 장악, 그 회원들을 정실에 치우친 인사정책을 통해 보직에 특전을 주었다. 이에 따라 하나회 회원들은 주로 수경사, 보안사, 특전사, 대통령경호실, 중앙정보부 등에 배치되어 근무했다. 이처럼 후방과 본부 근무를 하면서 일선에서의 보직경력이 필요할 때는 서울 근방의 9사단이나 1사단에서 단기간 복무한다 다시 후방으로 복귀하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급은 비회원 누구보다도 우선적으로 되었다.

이들은 「우리 편」의식이 심하게 배양 되어 있었는데 이는 파벌의식을 조장하는 큰 요인으로서 작용하고 있었다. 더욱이 대통령의 비호를 받았던 이들 간부들은 자신의 직속상관에 대하여 결례를 범하는 경우도 더러는 있었다. 이같은 불공정한 진급과 군의 위계질서를 문란케 하는 행위 등은 군 장교 간 불평, 불만의 유발, 위화감을 심화시켰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켰으며, 나아가 군 사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박정희 대통령은 하나회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이 사조직을 전혀 모르는 체 했다.

6년 후인 1979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10.26 사건을 일으킨 것도 차지철 경호실장과 불화, 경북과 경남 군 출신간 갈등, 외부의 간접적인 사주 등 직접적인 동기 이외에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한가지 든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누적된 파벌적 군인사정책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장군을 중신으로 정치군인들은 「12.12」쿠데타를 일으켜 군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뒤 10.26 사건이후의 혼란을 구실로 「5.17」쿠데타를 일으켜 문민정치의 기회를 무산시키고 또 다시 군사정권을 세운 결과 군에 있어서 파벌적인 문제점은 더욱 심화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전 정권의 중심세력이 많은 하나회 회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박정권과 전정권 시절의 군의 편파적 인사정책에 관한 데이터를 이승만 정권 시대와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경상도 출신 장교(육군)의 공화국별 우대현황
경상도 인구/ 전국 인구 경상도 출신/총 육군 대령 수 경상도 출신/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된 평균 수
제 1공화국(이승만 정권) 28% 26% 25%
제 3, 4공화국(박정희 정권) 29% 27.5% 38%
제 5공화국(전두환 정권) 29% 29.5% 44%
중앙일보는 1988년 12월 7일자 「군 장성」 제하 기획물에서 당시의 군 장성 중 영남출신이 43%로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1988년 12월 6일 현재 한국군의 장성들의 출신지역별 분포는 대구 경북이 23.1%, 부산 경남 20%, 서울 13.2%, 충남 8.99%, 인천 경기 8.3% 광주 전남이 7.5%로 영남출신이 인구구성 대비, 많이 웃돌고 있으나 인천 경기 호남 지역출신은 인구 구성비의 절반 수준이고, 1980년 이후 3군 참모총장 16명 중 경남출신이 14명으로서 압도적으로 편중되어 있다고 이 신문은 분석했다.

4. 월남전과 전두환 대령

전두환 장군이 중심이 된 하나회 회원들은 공화당 중반부터 20여년간 일본군을 분열시키고 일본을 패망시킨 일본군의 죠슈(長州)군벌에 비견될 정도로 편파적인 인사정책의 혜택을 받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이 전방 근무를 기피하고 후방에서 근무하면서 정치와 권력의 주변을 맴돈 끝에 실전지휘능력이 저하된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물론 하나회에 참여한 정치지향적 장교 가운데서도 손색없는 군의 엘리트요 지휘관이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러나 군 일부에서 요정파 장교라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본연의 군복무 자세와는 거리가 먼, 방만한 생활을 추구했던 이들의 월남전에서 실전지휘능력이 후방과 일선을 두루 근무했던 일반장교들보다 뒤떨어졌다는 사실 또는 부인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태평양 전쟁에서 파벌을 조성하여 개인적인 이익에만 급급했던 일본군벌의 일부 지휘관들이 야전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었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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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당시 9사단 백마부대 29연대장 전두환 대령과 부대를 시찰 중인 김종필 국무총리

전두환의 경우, 그가 대령으로 주월 제 9사단 제 29연대장[54]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고위 장성들과 민간인 등 외부 손님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 이들을 응대하느라 본연의 임무인 작전지휘권을 종종 참모에게 위임한 바 있다고 당시 9사단 참모였던 모씨가 밝힌 적이 있다. 전두환은 월남에서 재임 중 "가뭄이 극심하여 장병들은 식수난을 겪고 있는데도 자신은 식수로 샤워를 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는데, 수년전 타임지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그는 또 "전과를 올리기 위해 월남 양민의 귀를 잘라 오도록 했는가 하면, 베트콩의 무기를 암시장에서 구입해 놓고는 이를 노획한 것처럼 허위전과보고를 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70년 전 후 월남에 파견된 연대장과 사단장은 큰 사고 없이 복무를 마치고 귀국하면 충무무공훈장을 받았지만, 전두환 대령은 훈장수여에 대하여 다른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 지휘능력의 결함은 물론이고 전공도 적었지만, 연대장 부임 얼마 후부터 너무 빈번하게 파티를 벌인 것이 문제점으로 제기되었다는 후문이다. 이리하여 당시 9사단장 조천성 장군과 주월사령관 이세호 장군은 전두환 대령에게 훈장을 수여하는데 반대 입장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특히 조천성 장군은 함께 근무할 때 부하인 전두환 대령을 잘 잘못을 가려 자주 직선적인 어조로 주의를 주었던 유명한 장군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전두환 대령은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전두환 장군이 「12.12」 로 권력을 잡자 이세호 장군은 부정축재자로 조사를 받았고, 강직하고 성실하다는 평판을 받았던 조천성 장군은 울산공업단지관리공단 총무이사직을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당시 군 내부에서 거액의 부정축재자로 알려진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3군 사령관, 2군 사령관, 국방차관보, 육사교장 출신인 S, R, K, J, C, Y장군 등이 전두환 정권 초기부터 좋은 직책을 얻어 취임한 것과 비교해본다면 매우 편파적이고 다분이 보복적인 색채가 풍기는 인사조치라고 하겠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하나회를 뒷받침해준 장군들이며 K, C장군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상도 출신들이다.

5. 파벌인사하다 퇴진한 장군들

1969년 10월 개헌을 통해 3선의 길을 연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유신을 단행, 권력을 더욱 강화하면서부터 군 인사에 있어서의 지역적 파벌성은 1960년대보다 더욱 심화되어 갔다. 권력의 정통성이 결여되는 유신체제를 무리하게 끌고 가나가기 위해서는 주된 권력기관이 필요했고 그 기반을 자신의 출신지인 영남의 군 인맥 강화에 두었다. 1974년 말, 준장 진급 예정자들을 출신지 별로 보면 경상도 14명, 충청도 3명, 경기 2명, 전라, 강원, 이북이 각각 1명이었던 것 같다. 70년대 들어서 해가갈 수록 군 인사의 편파성이 짙어진 대해 많은 장군과 장교들이 개탄을 금치 못하는 형편이었으며, 이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인사도 없지도 않았다.

이 무렵에 군 인사를 비판하다 예편된 대표적인 인사로는 당시 1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있던 최세인 대장을 꼽을 수 있다. 육군의 장군 진급자 명단이 발표된 얼마 후인 1974년 말 경, 황해도 해주출신인 최장군은 예하 군단장인 김모 중장(경남 출신, 수산청장 역임) 및 정모 중장(경북 출신, 육참총장 역임)과의 술자리에서 인사문제가 화제가 되자 "이번 진급은 경상도 위주로 선발되었다. 당신네들끼리 잘들 하시오."라고 쏘아붙이듯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술기운에 농담반 진담반으로 한 말이었지만 평소의 군 인사에 대해 자신의 불만을 은연 중 표출된 뼈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해짐으로써 제 1군 사령관을 끝으로 군복을 벗지 않을 수 없었다. 통상적으로 군사령관 역임 후에는 잘되면 참모총장이나 그렇지 않으면 합참의장의 보직을 받았다. 그의 능력이나 군에 기여한 공로로 보아도 제 1군사령관만 무사히 마치면 합참의장이나 참모총장까지도 한 번 기대할 수 있는 장군이었는데, 주석에서의 한마디 불평이 박정희 대통령 귀에 들어가 예편되고 만 것이었다. 후일 들리는 이야기로는 문제의 술좌석에 동석했던 한 군단장이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S장군을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1972년 4월, 제 5군단장 이병형 중장은 예하 5사단장 Y소장과 군단장실에서 호남출신 군 인사의 푸대접에 관해 불평하는 가운데 "나는 군에서 박정희 장군을 존경하였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후의 군 인사정책에는 불만이었다. 박대통령은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공평무사해야만 되는데도 경상도 편중의 인사를 하고 있다. 이는 좋은 일이 못된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는 이유로 보안사령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병형 장군은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육사 4기를 졸업한 후 한국전쟁 당시 최전방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며, 그 후엔 야전군작전참모, 육본작전참모부장, 제 1사단장 등의 요직을 거친 장군이었다. 그는 식견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청렴결백한 생활태도를 견지해 온 관계로 동료와 부하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최세인 장군과 함께 육군참모총장 또는 합참의장으로 촉망되는 인물로 평가받아 왔었다.

3.6. 1979년 12.12 군사반란

3.7.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서 계엄군의 광주시민학살

3.8.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3.9. 2024년 12.3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내란

4. 국군의 기원 논쟁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부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는 분위기[55]에서 군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로 대한민국재향군인회[56]에서는 1993년에 광복군전사를 출간한 적이 있다.기사링크 저자는 공군사관학교 제 4기 이상준[57] 예비역 준장이다.

군의 정통성 시비에 대한 사전대비책으로 발매된 책으로 대한민국 육군을 대변할 정도로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독립군 전쟁사에 관련된 서적들은 사회에 많이 출판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서적들에서 저명한 학자 및 전문가들에 의해서 밝혀진 역사적 사실들을 발구하여 본 연구의 설계도인 장절에 맞춰서 집대성 하는데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동안 광복군전사를 연구하면서 많은 고통도 따라왔지만 그때마다 왜곡 날조된 김일성의 항일투쟁사를 바로 잡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한마디로 의병, 독립군, 광복군에 대해서는 분량을 채우기 위해서 쓰다가 말았고 김일성을 까기 위한 책이다.

박정희 군부 시절엔 1963년 독립운동가들에게 대통령표창으로 형식적으로 수여했었는데, 이는 1961년 군부가 쿠데타라는 부정한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하다보니 생존해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함으로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쓰고 실제 독립운동가의 처우개선이나 지원금은 존재하지 않았다.[58]

전두한 정권은 12.12 군사반란광주 5.18 학살로 권력을 잡다보니 과거 박정희 시절때 탄압받았던 독립운동가 출신을 영입[59]해서 천안에 독립기념관 설립을 추진한다.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응하며, 국민모금을 통하여 1987년 8월 15일 개관했다.[60]

대한민국 육군이 내란을 저지를때마다 국민 여론을 의식과 국군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 독립운동가 출신의 포상을 해왔던 것이지기 독립군이나 한국광복군에 대한 이해도나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2010년대부터 황원섭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는 국군의 기원을 기존의 조선경비대보다 더 오래된 독립군과 광복군에서 찾고, 계승하여 정통성과 정체성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1 #2

이런 의견이 제기되자 2017년 8월 28일 문재인 대통령 국방부의 업무보고 중 "독립군을 우리 국군의 역사에 정식으로 편입하는 것을 검토하라"는 지시로 관련연구가 시작되었으며,# 대한민국 국군이 독립군과 광복군을 계승하는 내용으로 편찬하였다.#

이는 북한1932년 김일성의 항일유격대로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며 정통성을 내세우는 것에 대항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광복군과 독립군, 혹은 대한제국까지 계승하여 국군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려는 정통성 경쟁의 성격이 존재한다.

앞서 상기하다시피 실제 역사는 대한민국 육군에 일본육사와 만주군 출신들이 많이 차지했었고 광복 이후의 대한민국 역사를 보면 제 1공화국때부터 임시정부와 광복군 출신에 대한 탄압, 배척이 되어왔던 흑역사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흥 장군은 초대 헌병사령관을 지냈으나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전봉덕에게 헌병사령관 직을 넘겼다. 이후 특무부대장인 김창룡에게 소환되 왜 안두희를 영창에 보내려 했는지와 한국독립당과의 관계를 추궁받았으며, 1960년 8월 김구 암살 사건 재조사 과정에서 이를 증언하였다.# 이종찬 광복회장의 말에 의하면 장흥 장군은 백범 김구파라고 신성모 장군을 통해서 이승만에게 알려졌고 예편까지 가면 안되니까 군내에 한직에 있으면서 전역한 것으로 보인다. # 이는 현재도 이어져 오는 것이 2023년 8월, 윤석열 정부에 들어서 국방부의 역사관 입장은 홍범도 장군 등 독립군과 광복군에 다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승만의 심복 특무대장[61] 김창룡에 의해 1949년 백범 김구 암살 사건1951년 대남간첩단 사건[62], 1955년 개천절 이승만 대통령 암살사건[63] 군과 경찰 그리고 정치권에서 한국독립당 세력을 축출해서 숙청하는데 성공한다. 남한의 정치상황이 이러다보니 무정부주의 계열 유기석유자명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었고, 생존을 위해 북한으로 망명한 안우생도 대표적이었다.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 며느리이자 비서이자 김인[64]의 아내 안미생도 홍콩을 경유하여 정화암[65]과 같이 있다가 미국으로 이민 가버린다. 사실상 망명이나 다름없었다.# [66]

거기다가 한국광복군조선의용대[67]중 일부분은 북한군으로 복무했던 만큼 정통성이 북한으로 갈 수 있는 요소도 상당히 많다. 이런 이유때문에
"대한민국 국군은 (일본 제국 육군이나 만주군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 없기에..) 광복군을 계승한다."
라는 숙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상기 언급된 대한민국 육군 역사에서 1952년 부산정치파동, 1961년 5.16 군사정변,(자잘한 거까지 포함하면 알래스카 토벌작전, 원충연 반혁명 사건) 1979년 12.12 군사반란,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68], 2024년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69] 큰 것만 잡아도 4~7번의 내란이 일어난 셈인데, 대한민국 육군에 과감한 개혁이 불가피하게 보인다.

5. 수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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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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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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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참모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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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윤석열[직무정지B] 공석[71] 대장 박안수[직무정지A]
(육사 46기)
대장 강호필
(육사 47기)
대장 고창준
(3사 26기)

6. 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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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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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해체된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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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복제(服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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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육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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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대한민국 국군 / 경찰 보병장비




돌격​소총 <colbgcolor=white,#191919>M16A1, K2, K2C1, K11
저격​소총 K14, M107A1-CQ
기관단총 K1A
산탄총 M4 슈퍼 90EOD, 스트라이커EOD, M3 슈퍼 90BAT, M1200BAT, 베레타 686BAT, M1897, M1912, USAS-12

자동​권총 M1911A1, K5, KP-52P, DH-380P
리볼버 콜트 디텍티브 스페셜, CAL-38, M10P, M64P, M15P/M67P, M19P/M66P, M60P, M36P, STRV9P
총검 KM7, M9P





경​기관총 K3, K15
다목적 기관총 M60, K16, M134, PKT
중​기관총 M2, K6, NSVT
유탄발사기 M79, M203, K201, K4
대전차화기 M72 LAW, 판처파우스트 3, 90mm 무반동총, 106mm 무반동총, BGM-71, 메티스-M, 현궁, 스파이크
박격포 KM181, KM187, KMS114, KM30
견인포 M101A1, M101A2, KH179
맨패즈 재블린, 스팅어, 이글라, 미스트랄, 신궁
수류탄 K75/K400, K413, MK3A2
지뢰 M14, M15, M16, M18A1, M19




소​총 돌격​소총 HK416, HK416A5, SCAR-L, SIG516, CAR816, M4A1P, DD Mk.18P, SR-16, KS-3, M6P, ARADP, K2C, AK-47C, 56식 자동소총C, AK-74C
저격​소총 SSG 69, SSG 3000, M700 AICS, AW, AWSM, AW50, APR308, TRG M10, LRT-3, PSG1, MSG90, Mk.11 SWS, M110 SASS, G28E, DD5V1, MRAD, M107A1, PSLC
기관단총 K7, K13, MP5A5, MP5SD6, MP5K, MP7A1P, UMP45P, MP9, APC9K PRO, DSMG9P, X95 9mm SMG, DSAR-15PC, Vz.61C
산탄총 M870P, M870 MCS, KSG, UTS-15, M590P, M4 슈퍼 90P
권총 G17, G19, G26, 베레타 92(SB/F), P7M13P, USP9T, P2000P, P226, CZ75 P01Ω, 제리코 941FL, Px4 스톰P, M&P9P, SFP9P, TT-33C
특수화기 APS, KSPW, M32 MGL
총검 KCB-77, 6X5C
의장 M1 개런드, M16A1, K2C1, M14US
※ 윗첨자P: 경찰/해양경찰/대통령경호처에서만 운용
※ 윗첨자BAT: 공군에서 조류퇴치용으로 일부 사용
※윗첨자EOD: 군 폭발물처리반에서 제한적으로 사용
취소선: 테스트만 치른 후 제식 채용되지 않음
※ 윗첨자US: 한미연합사 의장대에서 무상대여로 운용
※ 윗첨자C: 적성화기
K1A, DSAR-15PC는 국방규격 상 기관단총으로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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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A5034> 대한민국 국군 (1991~현재)
Republic of Korea Armed Forces
大韓民國 國軍
MBT <colbgcolor=#2A5034> 1세대 M47 패튼R | M48(A1/A2C/A3K)R
2세대 M48A5(K1/K2/KW) | Tiran-6X | T-72M1X | M60X
3세대 K-1 | K-1A1 | T-80U
3.5세대 K-1(E1/{E2}) | K-1(A2/{A3}) | K-2 흑표
장갑차 차륜형 KM900R | RG-31 Mk.3 니알라L | 바라쿠다R | K806/808 백호 | KMPVX | M1224 MaxxPro Dash
궤도형 LVTP-7R | K200(A1) | K277(A1) | KAFV | BMP-3 | K-21({PIP}) | AS-21 레드백X | KAAVP-7A1 | {KAAV-II}
차량 소형 K-100R | K111 | K131 | K151 현마 | 전역차륜차량 | 샌드캣
트럭 K300/K301R | K800R | M37R | M602R | M35R | K311(A1/A2) | K511(A1) | K711(A1) | K911 | {K351} | {중형표준차량} | 민수용트럭 | FOX RRV | HEMTT(M977, M984A1, M985A2, M1142) | MTVR
자주포 자주곡사포 M107R | M110R | K-55(A1) | K-9(A1/{A2}/{A3}) | K105A1 풍익
자주박격포 M106R | M125R | K242(A1) | K281(A1) | K532 | KSM-120 비격
포병지원차량 탄약보급 K-10 | K-56
사격지휘 K-311 포사격지휘차 | K-514 | K-77
대포병 레이더 AN/TPQ-(36/37) | 아서-K | TPQ-74K 천경-II
다연장로켓 M270(A1) MLRS | K-136 구룡 | K-239 천무
TEL K409 TEL | K501 TEL | K-91X TEL
야전방공무기 자주대공포 K263(A1/A3) | K-30 비호 | K-30W 천호
대공 미사일 K-30 SAM 비호복합 | K-31 천마
지원 차량 구난차량 K288(A1) | K1 구난전차 | K-912 | 경구난차량 | KAAVR7A1 | M88(A1) 구난전차R | M578 경구난차량
AEV KM9 ACE | K-600 코뿔소
교량차량 K-1 AVLB 교량전차 | K-719 | 부교 운반차 | KM3 수룡
통신차량 K533/534
화생방차량 K-316 | K-332 | KM9
기타 K-313 | K-512
대테러부대용차량 TM-170 | S5 장갑차 | 렌코 베어캣 | 숄랜드 S600 | 포드 익스커션 | 포드 F-350 | 로셸 세네터 ARV
※ 윗첨자R: 퇴역 차량
※ 윗첨자C: 노획 차량
※ 윗첨자X: 시범운용, 연구 목적 도입 차량
취소선: 계획되었으나 취소된 차량
※ {중괄호}: 도입 예정 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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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國軍 | Republic of Korea Armed Fo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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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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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H-1 미르온 | Bo 105CBS | 500MD 디펜더 | OH-58B 카이오와 | OH-23G 레이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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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헬기 CH-47(D/NE/{F}) 치누크 | HH-47D
공격헬기 AH-64E 아파치 | AH-1(J/S) 코브라 | {M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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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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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롭 F-51D 머스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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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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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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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5(E/F) 제공호 | F-5(E/F) 타이거 II | F-4(D/E) 팬텀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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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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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R RC-800G 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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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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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량 CN-235(-100M/-220M) | C-123K 프로바이더 | C-47 스카이트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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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기 KN-1 해취호 | SX-1 서해호 | SX-2 | SX-3 제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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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경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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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737 피스 아이
'''[[공중급유기|
공중급유기
]]'''
KC-330 시그너스
전자전기 EC-47Q | {한국형 SOJ 전자전기}
'''
연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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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5 센티넬 | L-4 그래스호퍼 | SX-5 통해호
'''[[UAV|
무인기
]]'''
'''
SUAV
'''
클래스 1 - 초소형
티로터 | RQ-103K | {WB 워메이트} | 천뢰-2
클래스 1 - 소형
넵튠 V270
'''
UAV
'''
클래스 2 - 전술형
RQ-102K 참매 | RQ-101 송골매 | 서쳐 II | 캠콥터 S-100 | {캠콥터 S-300} | KUS-7 | 솔개
클래스 3 - MALE급
{RQ-105K} | 헤론
클래스 3 - HALE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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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CA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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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S-X} | {UCCR}
'''[[훈련기|
훈련기
]]'''
프롭 KT-1 웅비 | KT-100 | T-103 |CAP-10B | T-41D 메스칼레로 | T-28A 트로젼 | T-6 텍산 | TF-51D | 부활호 | 새매호
제트 T-50 · TA-50 골든이글 | T-59 호크 | T-38 탈론L | T-37C 트윗 | T-33A 슈팅스타
헬기 벨 505
표적예인 CARV-II 캐러밴
가상적기 MQM-107 | MiG-29 | L-2 | J-7 | MiG-19 | Il-28
VIP 탑승기 B747-8B5L | {B737 MAX 8}L | B737-3Z8 | VCN-235 | HS.748 | 보잉 747-4B5L | VC-118 | VC-54 | L-26
VH-60P | VH-92 | AS332 L2 | 벨 412SP | 벨 212 | UH-1(B/H/N) | UH-19D | H-13
갈색 글자: 퇴역 기종
※ 윗첨자L: 임차 기종
※ {중괄호}: 도입 예정 기종
※ 윗첨자: 해당 군 운용 (육군/해군/공군/해병대), 표기 없을 시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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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 표준차량
소형 중형 대형
"¼톤 트럭" 1¼톤 트럭 2½톤 트럭(K-511) 5톤 트럭(K-711)
차륜/궤도형 장갑차
이름 개발 국가 종류 보유수량 추가 기타
K-21 대한민국 IFV 466대(+120대)[73] 한화 디펜스/(2009년 ~ 현재)
K200/A1 대한민국 APC 1,700여 대 한화 디펜스/(1985년 ~ 현재)[74]
K806/808 장갑차 대한민국 APC 600여 대 현대로템/2016년 ~ 현재[75]
대한민국 육군의 전차
이름 종류 보유수량 기타
K-2 MBT 260대(+150대)[76] 3.5세대 전차, 2014년~, 현대로템
K-1A2 MBT 484대[77] 3.5세대 전차, ~2022년, 현대로템 / K-1A1[78] 전차 전량을 3.5세대 전차 K-1A2로 개량
K-1 MBT 1,027대[79] 3세대 전차, 1985년~1998년, 현대로템 / 2026년까지 전량 3.5세대 전차 K-1E1으로 개량 예정
M48A5K / KW MBT 485대 1세대 전차[80], 1952년~1959년, 크라이슬러 / 포드
야포
이름 종류 보유수량 추가 기타
K-9(A1)자주곡사포 1,178 문[81] 각주 참고[82]
K-55A1자주곡사포 1,180문[83] K-55는 1980년대 M109A2를 면허생산, 2010년대의 개량은 각주 참고.[84]
KH179 155mm 견인곡사포 견인포 1,500여 문 각주 참고[85]
M114 155mm 곡사포 견인포 1,200여 문 각주 참고[86]
M101 105mm 곡사포 견인포 2,000여 문 각주 참고[87]
K105A1 차륜형 자주포 850문 각주 참고[88]
다연장로켓
이름 종류 보유수량 기타
천무 다연장로켓다련장로켓218문(+150여 문) 2014년부터 양산 중[89]이며 기존의 구룡 다련장에 쓰이던 탄약도 사용 가능
M270 MLRS 다련장로켓 58문 군단 포병여단 48문(M270), 화력여단 10문 운용(M270A1, ATACMS 미사일 운용도 가능)
헬기
이름 종류 보유수량 기타
AH-64E 공격헬기 36기(+36기)2027년까지 성능개량 예정[90], 2028년까지 36기 추가 도입
AH-1S/F 공격헬기 69기 2031년까지 도태 예정 / LAH 사업으로 대체
CH-47D 수송헬기 32기 신형 생산분으로 교체 예정
UH-60P 수송헬기 110여 기 차기 기동헬기 사업으로 교체 예정
KUH-1 수리온 수송헬기 220기
자주대공포
이름 종류 보유수량 기타
K-30 비호 자주대공포 167 문 .
천마 미사일 자주대공포 100 문 2011년 12월 19일 기준
박격포
이름 보유수량 기타
4.2인치 박격포 1,800문 .
81mm 박격포 6,700문 .
60mm 박격포 6,400문 .
120mm 자주 박격포 ? .
((위키피디아 영어판) List of equip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rmy, 2016년 국방백서(PDF 기준 43P))

대한민국의 육군 전력은 세계 군사력을 통틀어 한손에 꼽힐 정도로 강하다. 2024년 기준 대한민국의 종합 군사력 순위는 세계 5위이며, 그 한국군의 전력 중 반 이상이 육군 전력이다. 한국군이 이처럼 과도한 군사력에 투자하게 된 것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난다면 냉전기의 유럽처럼 대규모 화력전과 기갑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었기 때문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있다고는 하나, 미국의 지원은 해공군 쪽이 우선이고 지상군을 파병하는 데는 재정 적자로 인한 비용 부담과 물리적인 시간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즉, 미국 육군의 지원이 올 때까지 1차적인 저지는 한국 육군이 담당할 수밖에 없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북한군을 넘어 거대한 중국군이나 러시아군을 상대하는 것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91]

이러한 한반도 전장의 특성으로 인해 보병의 장비나 복지에 대한 투자는 아무래도 전차와 포병 등의 화력 자산에 대한 투자에 비해 우선 순위에서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국가들은 이러한 대규모 총력전을 치를 상대도 별로 없어 국방비의 상당 부분을 보병 장구류나 장병의 복지, 임금에 투자할 여유가 있는 것과는 사정이 다른 것. 비록 시대가 지나며 많이 좋아졌다곤 해도 아직까지 병을 최저임금도 제대로 안 주며 이들을 굴리는 국가 특성상 육군이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든 환경이다. 현재 육군의 최우선 투자 순위는 병력의 고기동화, 정예화 쪽이다.

그나마 2010년대 들어서 이 부분이 언론에 집중적으로 노출되고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고, 국방부 차원에서 보병의 장구류와 의무/수송분야 등 지원 분야에 대한 투자가 진행되며 조금씩이나마 개선의 기미는 보이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인구 감소로 인해 병력이 감소하면서 보병 개개인의 강화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고, 이에 따라 2018년부터 워리어 플랫폼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김용우 전 참모총장의 지시로 시작된 이 사업은 2023년까지 특전사와 육군 특공, 수색 그리고 일반 보병에게 미군과 유사한 수준의 보병 장비를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10. 미사일

국산 미사일 및 국산 어뢰 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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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white> 대공 미사일 <colbgcolor=#fffefc,#303030>신궁 맨패즈 | 천마 단거리 미사일 | 해궁 대공 미사일 | 천궁 Block-I 중거리 미사일 | 천궁 Block-II 중거리 미사일 | L-SAM | LAMD | 한국형 중거리 공대공 유도탄 | 한국형 단거리 공대공 유도탄 | 함대공 유도탄-II
대지 미사일 현궁 대전차 미사일 | 천검 공대지 미사일 | 239mm 유도로켓 | 우레(KTSSM) | 현무-II(2021년 개량형[HP]) | 현무-III | 해성-II | 해룡 전술함대지 유도탄 | 천룡 공대지 미사일 | 현무-IV[HP] | 현무-IV-4 SLBM | 현무-V[HP] | 한국형 극초음속 미사일
[HP]: 통칭 (초)고위력 현무 탄도 미사일
대함 미사일 비궁 유도 로켓 | 비룡 유도로켓 | 해성 아음속 대함 미사일 | 한국형 초음속 대함미사일 | 공대함-II 유도탄
어뢰 청상어 어뢰 | 백상어 어뢰 | 범상어 어뢰 | 홍상어 대잠 로켓 | 경어뢰-II
퇴역 및
시제품
KT-75 상어 경어뢰 | K-744 경어뢰 | 해룡 단거리 대함 미사일 | 현무-I 전술 탄도 미사일 | 백곰 탄도 미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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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타 장비

11.1. 포병 장비

  • TAS-1K - 포병관측장비
  • GAS-1K - 레이저 거리측정기
  • PYK-80 - 사격제원계산기
  • KW12AF - 이동형 기상관측장비

11.2. 공병 장비

11.3. 통신 장비


(이 외의 문서가 생성되지 않는 통신장비(중복되는 문서가 있다.)의 경우 링크를 참고하고 통신장비를 운용하는 보직은 통신병 항목 참조.)

11.4. 무인정찰기

  • RQ-101 송골매 군단급 무인정찰기
  • 서쳐 군단급 무인정찰기
  • RQ-103K 리모아이 대대급 무인정찰기
  • RQ-102K 참매 사단급 무인정찰기
  • 헤론-1 군단급 무인정찰기
  • 차기 군단급 무인정찰기[92]

11.5. 수류탄 및 지뢰

12. 문제점

여기 참조. 애초에 한국군의 문제점 대부분이 육군에 집중되어 있다.

후술하겠지만 한국 육군 자체가 대한민국 정부 시작부터 의도적으로 육군을 매우 집중적으로 육성[93]하였기에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체급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으며, 서방권 육군 중에서는 미국 육군을 제외하면 최대 규모의 육군이다.[94]

2022년 12월 기준, 총 병력 50만여 명 중 거의 36만 5천 명(총 병력의 약 73%)에 가까운 지상군 병력, 3세대 전차가 주축이 된 기갑전력, 2,500문에 달하는 자주포를 중심으로 하는 포병 전력 등 종합적인 육군력에서 미국 외의 다른 서방 국가들을 압도한다. 특히 포병 및 장거리 타격 무기에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데, 이는 비록 매우 노후화되긴 했어도 대규모를 유지하는 북한군의 기갑 전력, 나아가 중국 인민해방군의 북부 전구와 중부 전구, 러시아군 동부 군구까지 대비하기 위해서다. 특히, 포병에 막대한 투자를 하다 보니 구 소련군식 운용을 한다는 소리를 듣는데, 한반도 전장이 전면전이 벌어지면 냉전기 서유럽의 전장처럼 대규모 화력전과 기동전이 벌어지는 것을 상정하고 있기에 예산이 부족한 한국군에게는 화력 투사를 항공 지원에 의지하는 미군식 교리를 한국 사정에 맞춰 포병에 투자하게 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화력에 대한 투자가 우선되고 종심이 짧다 보니 지원 전력 및 의무 분야, 보병에 대한 투자가 부족한 것도 소련군을 닮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슷하단 거지, 사정이 다른 두 군대를 1대 1로 직접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 전략, 한반도 군사 전략에 있어서 미군은 해공군을 지원하고 지상군 전력은 한국 육군이 맡고 있기 때문에 국가 규모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비대화된 육군을 운용하는 측면이 크다.

이것은 공군과 해군이 고비용, 고기술력을 요구하는 첨단 기술군이라는 이유와 함께 건군 당시 북한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지상군 병력에 치중하고, 공군 및 해군 군사력을 미군에 크게 의존하는 형태로 출발한 데서 기인한다. 미군에 대한 안보 의존도를 줄이고 군을 현대화하려는 장기 계획에 따라 군 병력 자체를 단계적으로 줄여 나가고 특히 보병 규모를 줄이고 포병과 기갑, 공중 기동 부대 위주로 개편하는 방안이 추진 중이다. 미국 육군이 감축되긴 했어도 1세계 국가 군대들 중에서는 미국 육군 다음 2번째로 많은 인력을 지닌 육군이다.[95] 문제는 한국은 모두가 알다시피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미 2020년 기준으로 남아 출생아 수는 14만명도 되지 못하고, 2035년이면 병사 수를 30만명으로 유지한다고 가정해도 현역 판정률이 101%가 된다.[96]

육군의 힘이 3군 중 가장 강하며 특히 국방 정책 및 투자에서 육군이 독식하는 현상이 매우 심하다.[97] 일례로 역대 국군 최고 지휘관인 합동참모의장은 이양호, 최윤희, 정경두, 원인철, 김명수 다섯 명을 제외하고 모두 육군이 차지했고, 국방부 장관은 퇴임한 육군참모총장이나 합동참모의장 등이 차지하는 경향이 크다.

당장 군인 대통령만 봐도 모두 육군 출신이었다. 그리고 병력이 많다 보니 정부와 정치권, 국민의 관심[98]도 가장 큰 편이다. 방산 비리나 내무 부조리 경직된 의사 결정 체계, 육해공군 중에서 가장 낙후된 장병 복지 등의 문제도 크게 부각된다. 무기 체계의 국산화율은 육군이 가장 앞서고 여러 부분에서 군의 부패나 무능력에 대한 여론의 감시 역시 가장 크다.

문제점으로는 육군 중심으로 군이 운용되면서 해군력과 공군력에 대한 투자가 상대적으로 뒤쳐졌다는 점이 우선 손꼽힌다.[99] 전술 교리 등이 낙후되며 경직된 지휘 체계와 장병에 대한 복지 의식이 미약해[100] 포상 휴가, 월급 체계, 생활관 복지, 보병 장구류 등이 빈약하다는 것도 문제이다. 특히 징병제를 운영하면서 전역자에 대한 대우가 부족한 것, 예비군에 대한 대우가 부족한 것, 구타나 똥군기 등의 악습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도 비판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2005년에 터진 논산 육군훈련소 인분 사건530GP 사건 등이 발생한 이후 본격적으로 개선하기 시작했고 특히 2014년에는 임병장 사건윤일병 사건이라는 역대급 병크가 터지면서 그동안 은폐 및 축소해왔던 과거의 수많은 구타, 가혹 행위, 똥군기, 기수 열외 등의 사건이 언론 등을 통해 서서히 드러났고 이로 인해 이미지 개선을 위해 병영 문화를 상당히 개선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해군과 공군 등에 비하면 아직도 갈 길이 먼 건 사실이다. 2008년 군 복무 기간 단축을 이유로 외박 횟수 등을 해군과 공군에게 자신들에 맞춰 줄이라고 강요했다가 이들에게 욕을 먹는 등 타군에서 배울 생각은 않고 되려 타군까지 퇴보시키려고 했던 흑역사가 있었다.

또한 부하들의 복지에는 신경쓰지 않고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여 사적인 이윤(진급) 만을 추구하는 이른바 똥별들의 문제도 심각하다. 병사들과 하급 간부들은 점차 신세대화 되는데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지휘관들의 사고방식은 빈축을 사고 있다. 또 보신과 진급을 중시하여 사건이 터지면 덮으려고 쉬쉬하다가 역풍을 맞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군대 내에서 사고가 터지면 말을 바꾸고 사건을 은폐하려 시도하며, 가해자를 옹호하는 게 그 예다.[101]이는 한국군이 가지고 있는 휘하 부대 병사가 사고친 걸로 소대장, 중대장은 100퍼센트 보직 해임 + 진급 누락 세트, 대대장까지는 100퍼센트 진급 누락, 그 위로 연대장, 사단장 등은 경고장이나 구두 경고를 받는 징계 방식 때문에, 군에 오래 남으려는 간부들이 자기가 관련됨이 없음에도 대대장 등의 은폐 지시에 무조건 따르게 되어있기 때문이며, 이 문제는 병영의 선진화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지속되고 부각되면서 국민의 직접적으로 방위를 책임지는 군에 대한 신뢰[102]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수십만의 병력을 운용하는 조직에서 문제가 안 터지기는 힘드나, 육군은 도를 넘었다.[103]

최전선에 가까워서인지 전투 병력에 비해 그에 대한 지원 체계가 미흡한 면이 강하다. 공군을 예로 들자면 보유하고 있는 전투기는 많은데 조기경보기, 공중급유기, 수송기 등의 비전투체계가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이 낙후되어 있는 셈이다. 이는 그동안 미군에게 기대어온 부작용 탓인 것도 크다. 전투 장비 이외의 지원 장비는 유사시 미군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는 논리로 도입을 취소하거나 연기하거나 축소하는 사례가 여전히 빈번하며 현재도 지원 장비 도입 사업보단 전투 장비 도입에 더 집중하고 있다.

전쟁이 나면 당연히 미국은 자동으로 군사지원[104]을 해주게 되어 있다.[105] 한국은 미국이 버릴 시에 현재로서는 이익보다는 손해가 더 많은 국가이며[106]중국을 바로 위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하다. 문제는 이러한 지원장비의 부재 및 부족으로 전면전이 아닌 북한의 국지도발에는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면전이라면 화력으로 동원해서 공격하면 그만이지만 국지전에서는 화력 지원 자체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냉전이 끝난 직후 주적이 북한군이라는 구식 군대로 국한된 데다가 무엇보다 한국군의 보병은 미군식 교리를 저예산에 맞춰 적용한 덕택에(미군이 포병과 항공지원으로 적의 주 전력을 궤멸시킨다면 한국군은 포병만 사용한다.) 포병이 1차로 적의 대부분을 살상하거나 전투력을 상실하게 한 다음에 나머지를 정리하는 용도로만 쓰이는 게 현실(아니면 전선의 진지 방어 보병이다. 이 경우 장구류가 신식이라도 적의 공격으로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제대로 된 장구류를 갖추지 못한 보병에 비해 크게 낮아지지 않는다.)이기 때문에 높으신 분들 입장은 장병 개개인에 대한 투자의 우선 순위를 매우 낮게 생각하고 있다.

단, 알아두어야 할 점은 현대전에서 소총에 맞아서 사망하는 인원보다는 포격과 포탄의 파편으로 사망하는 인원이 대다수이고, 한반도는 대규모 포병, 기갑전 등의 화력전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기에 한정된 예산 안에서 기갑과 자주포 등에 예산이 배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수색대 외에도 후방침투한 게릴라와 보병 간의 교전을 벌일 기동대, 특공대 등에게도 방탄조끼 등의 장구류 등이 부실하다는 지적은 유효할 수 있다.

그 외에, 누가 뭘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육군의 본질상 격오지가 많다는 단점이 있다. 용사의 경우 차라리 휴가 나갈 때마다 시간과 돈을 날리는 정도로 끝나지만, 간부의 경우 결혼이 어려워지는 건 물론이고 결혼 후에도 자녀교육 및 배우자의 직장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107] 때문에 육군 간부를 지원할 때는 이런 특성을 이해하고, 격오지 문제에 대해 어느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여, 만약 죽어도 격오지만큼은 가기 싫다면 본인을 위해서도 조국을 위해서도 당장 다른 직업을 알아보는 게 좋다.

12.1. 수구적인 병영 문화

육군은 해군과 공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부 사건/사고가 많아서 문제가 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육해공 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큰 탓도 있겠지만 이는 육군과 해군, 공군의 선발방식 차이에서 알 수 있는데 해군과 해병대, 공군은 기본적으로 지원제이며, 이로 인해 장병들이 개나소나 유입되는 경향이 덜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비교적 적으며 이 때문에 육군보다 수평적인 분위기를 갖추기가 쉽다. 그러나 해병대는 개나소나 유입되는 경향[108]이 짙어 수평적인 분위기가 제대로 갖춰지기 힘들다. 그나마 동기생활관을 시행하면서 병사들의 서열을 뭉텅이로 묶는 제도가 생겼고, 수평적인 분위기도 많이 갖춰졌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많은 게, 분기 단위로 동기라고 묶어버리기 때문에 6개월 동기제 하에서는 1월 1일 입대자와 6월 1일 입대자가 동기이지만 6월 1일 입대자와 7월 1일 입대자는 선후임이 되는, 병사들의 서열을 완전히 뭉개버리는 사태가 났다. ‘하루라도 빨리 오면 선임’이었던 과거의 그 얘기는 이제 육군에서는 통하지 않게 됐다.

반면, 육군은 기술행정병, 어학병 등 모집병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전국에서 다양한 인원들이 징집(오겠다는 자발적인 의사 없이 강제로)으로 끌려오는 일반병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의 낮은 자질과 이로 말미암은 수직적인 분위기가 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육군 장병의 인원 수가 해공군 장병 수를 합친 것보다 몇 배나 많은 점도 한몫한다.

또한 해군은 기군단에서 실무배치시 1지망/2지망/3지망으로 실무 부대를 갈수있는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며, 공군은 자대배치를 할 때 특기학교 성적에 따라 1지망/2지망/3지망으로 선택이 가능한 반면 육군은 뺑뺑이로 무작위 배치되기 때문에 운이 정말 나빠서 병영부조리가 심한 부대로 배치를 받을 경우 정말로 답이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개선되긴 했지만 여전히 육군은 해군, 공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필요한 수준의 군기가 심하며 그렇다고 제대로 된 군기가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군기 문란에 가깝다. 이는 군대 내에서 상관들이 관심병사를 챙겨주는 사례에서 알 수 있는데 사실 상관들이 관심 병사를 챙겨주는 이유는 더 높은 상관에게 좋은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서이다. 문제는 한국 국방부는 허세는 잘 부리지만, 정작 내부 부조리에는 깜깜하다는 것이다. 진짜 제대로 된 군인의 자세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 입대할 경우(국가에 대한 충성>상관에 대한 충성) 즉시 관심병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109]

또한 한국 육군은 해군, 공군, 주한미군(KATUSA)과 비교하면 병영문화가 훨씬 더 보수적이다.[110]

휴가나 외박, 특히 외박에 대해 굉장히 보수적인 풍토를 갖고 있다. 공군과 해군은 오래전부터 정기 외박 제도를 시행해왔지만 육군은 최근까지도 정기 외박이 아닌 성과제 외박제도를 시행해왔고 외박이나 포상 휴가를 간부 재량에 따라 잘라버리는 일이 타군보다 흔하게 일어난다.[111] 육군이 최근까지도 성과제 외박을 고집하는 이유 중 하나로 한국 전쟁 개전 초기에 농번기 휴가 등으로 지나치게 출타자가 많아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는 전훈(戰勳)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당시 정보 자산이 전무하고 부대에 군량이 부족해 건빵 먹고 농업이 주산업이라 휴가 가서 농사일 하던 게 당연하던 시절의 전훈을 한국군 전력이 과거보다 훨씬 강해지고 주한미군까지 등에 업고 있는 지금까지 적용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정신 나간 짓이다.

특히 미군의 영향을 받아 출퇴근의 개념이 육군보다 강한 공군과 해군 육상부대[112]는 육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일과 시간 이후 장병의 개인 시간 및 휴식 시간을 보장해주려 하는 반면[113], 육군은 평일 개인 시간이나 주말에도 작업 지시가 내려지는 경우가 상당하다.[114] 이는 간부가 본인의 진급 성과를 내려는 목적으로 장병들이 내무반에서 TV 보며 뒹굴고 있는 것을 봐주지 않는 것도 있지만 전투 상황이 터지면 당장 생활관에서 군장싸고 연병장으로 튀어나와야 하는 일선 육군 야전 부대의 특성상 공군과 다르게 장병들의 출퇴근의 개념이 희박하거나 없는 점도 있다. 단, 계룡대 육군본부, 계룡대 근무지원단, 국방부 근무지원단, 육직/국직부대의 사령부[115]나 단본부, 지상작전사령부, 제2작전사령부, 군단 사령부, 사단 본부 등과 같은 상급 행정 부대의 경우에는 공군처럼 생활관과 근무하는 사무실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출퇴근 개념[116]이 일선 야전 부대보단 상대적으로 있는 편이다. 사령부/생활 참조. 또한 여군 장교의 경우 유격훈련을 가더라도 BOQ(간부 독신자숙소)에서 숙영을 해결하는 괴이한 문화도 09년도까지 분명히 존재했다.

이와 같은 육군의 구식 병영문화는 구 일본군의 잔재인 면도 있다. 육군은 구 일본군 문화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반면, 해군의 경우 민간 상선사관 출신들이 창군을 주도했으며, 여기에 이들의 요청으로 미 해안경비대 장교들이 창군에 깊숙히 관여하였다 게다가 해군에 남아 있던 일본군/만주군 출신의 육전 경험 보유자들이 해병대로 갔기 때문에 해군은 일본색이 거의 빠져 일부 용어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일본 출신이라는 오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117] 공군의 경우 일본군 출신자들도 있지만, 중화민국 공군, 민간 비행사들 출신이 골고루 분포한 데다 조종사 훈련, 장비 공급 전반이 미 공군의 지원 아래에 이루어졌기에 타 군과 달리 상대적으로 미 공군의 영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육군은 해·공군은 기술행정병과 위주로 자신의 주특기를 수행하는 데 집중하지만, 전방 주둔 비율이 높은 육군은 적과 직접 대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변명거리로 삼으려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당연히 반론의 여지가 많은데 당장 적들과 교전을 하는 이스라엘 육군의 경우 한국 육군의 병영 문화와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 이스라엘 육군은 프래깅이 당장의 문제지만 한국군은 병사한테 총알도 지급 못할 정도의 개막장 노예병단이기에 죽창을 맞을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단, 이스라엘 육군은 수시로 교전을 하므로 병력에게 복지를 평시 이상으로 보장해줘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군이 노예 신세인 것에 강한 불만을 드러내는 시점은 주로 교전이 있는 시점이고, 반대로 말해 군대는 가지만 직접적인 교전에 의한 사상을 당할 확률 자체는 낮다는 것 하나로 불만을 참는 것이다. 국군의 복지 역시 연평도 해전, 천안함 피격 사건 등과 같은 인명 살상을 계기로 향상되는 것을 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그런데 사실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단절되지 않고 있는 악폐습의 대부분 원인을 전부 '황군의 후예'인 탓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건군기 장교단은 만주군, 일본군, 중국군, 광복군 등 다양한 출신이 혼재되었고, 이 과정에서 한국 육군의 주류가 된 것은 주로 일본군보단 만주군 출신들이었으며, 일본군 출신은 빠르게 주류에서 밀려났다. 또한 만주군 출신들은 미군 고문단의 교육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위관급 미군 앞에 장성급 한국군이 쩔쩔매야 했을 정도. 도긴개긴이라지만 한두 단계 필터링은 된 것. 영향을 받았다 정도면 모를까 "황군의 후예"라고 할 역사는 못 된다. 이마저도 장교단 이야기고, 병사들 대부분은 그런 경력도 없어 일본 군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창군한 지 반세기가 넘은 마당에 아직도 육군의 극도로 후진적인 문화를 온전히 일본군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수며, 그건 더 이상 일본군 탓이 아니라 한국 육군의 탓이라고 봐야 한다. 특히 부대 분위기는 선임의 인성이 어떤지에 따라 상당부분 결정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2014년에 발생한 윤 일병 폭행 사건만 봐도 어떤 특별한 병영 문화로 인해 발생한 게 아니라 선임병이 또라이였다. 문제는 간부들 상당수가 제대로 장병 관리를 하지 않고 오히려 분대장이나 심지어는 최선임병들에게 장병 관리를 맡기고 거의 직무유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사실상 선임병들이 부대 분위기를 형성하게 된다. 이 선임병들이 일본식 병영 문화를 어디서 배워서 그렇기보단 본인이 고참이고 계급과 짬이 높다는 점을 앞세워서 치약 한 통 먹이기 등 온갖 가혹행위 및 괴롭힘으로 시간을 때우다가 사람 잡은 것이다.[118]

초, 중, 고등학교 시절에 일진들처럼 자신보다 신체적, 혹은 세력적으로 약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힘과 권력을 휘두르면서 괴롭히기 좋아하는 부류가 있기 마련인데 이들도 몇 년 뒤에 군복무를 하게 된다. 이들은 복무 기간이 짧은데다 대개 양아치라 해군이나 공군 등에 지원할만한 자격증 및 스펙 등이 딸리며 사고친 경우도 많고 무엇보다 해군, 공군 등 모집병 자체에 지원하고 서류 내고 면접 보고 하는 것 자체를 귀찮아해서 "아 몰라 언젠간 육군 영장 나오겠지" 하는 경우가 많아서 해군, 공군으로 빠질 확률은 상대적으로 적고[119], 거의 육군으로 갈 텐데 이러한 부류들도 고참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들이 고참이 되어 후임을 사랑으로 감쌀 확률이 높을까, 아니면 괴롭힐 확률이 높을까? 특히 군대는 폐쇄적인 곳이고 고참이 되면 딱히 할 일도 없으며 더군다나 보상이 열악하다는 점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에 인성이 안 좋은 부류들은 괴상한 악습을 만들어서 후임 괴롭히며 시간을 때우는 등 부대 분위기를 개판으로 만들어놓고 전역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해군, 공군은 면접과 가입소기간의 심사를 통해 걸러내기 때문에 덜한 편이지만 육군은 해당 부류가 그대로 흘러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서 부대 분위기를 망치는 경우가 많다.(후임 땐 반항, 선임 땐 괴롭힘)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또한 4개월 동안 배를 타면[120] 육상부대로 2차 발령이 가능한 해군은 문제아가 떠나건 내가 떠나건 해서 안 볼 수 있는 반면에 육군은 그것도 안 된다. 게다가 공군은 군사경찰이나 방공포병 등 일부 특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특기는 생활관과 사무실이 아예 분리되어 있어서 내무 생활과 일과 자체가 분리될 수밖에 없으며, 사무실 근무 보직의 경우 말년 직전이 되어서야 업무 맞후임을 받는 경우도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럴 여지도 적다.

한국군의 일반적인 문화로는 병장쯤 되면 일병은 경력(짬)이 차이나기에 쪽팔려서 안 건드리는 경우가 많은데, 윤 일병 사건의 가해자인 이 병장은 본인 아버지가 조폭이라고 허세를 부리며 후임들을 협박, 조롱하거나 별의별 고문으로 괴롭히는 등 또라이 고참 한 명으로 부대 분위기가 막장된 윤 일병 사례만 봐도 병사들의 개인적인 자질과 인성이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 군부대에서는 좋은 고참 한 명이 부대 분위기를 이전보다 좋게 개선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착한 고참이 악습을 기껏 고치고 전역한 뒤에, 후임인 막장 고참이 다시 이상한 악습을 만들어 놓고 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을 고려해보면 일진, 사이코패스 등이 무차별로 오는 육군의 근본적인 태생적 한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군대에 와서 조용히 있다 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또한 무차별로 끌어모은 자원들을 관리하려면 아무래도 해군, 공군 등에 비해 더 엄격하고 보수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요약하자면 군대에 별의별 애들이 오는데다가 훈련의 강도 외 생활여건이 좋기도 어렵고 게다가 최근 개선안도 무조건 고참의 탓으로 돌리고 있어서 계급의 해체로 가기에 불안정한 상태다. 개인 인성 문제가 조직에 미치는 영향을 제어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증명하는 곳이다.

그러나 2014년에 발생한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이나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등 육군에서 대형 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하자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병영부조리에 이골이 난 육군이 대대적으로 선진 병영 개혁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당시에 육군에서 터진 역대급 사건 이후로 육군, 해군, 해병대, 공군, 경찰청 의무경찰, 해양경찰청 의무경찰, 의무소방 등도 주의하고 있는 추세로 가고 있으며 이들 역시도 선진 병영 개선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고 현재에도 군대 악습을 뿌리뽑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마음의 편지의 위력을 극대화하고 비리 간부를 해고하고 악질 병사들을 처벌하고 전출한 결과 병영 부조리가 상당 부분 없어지게 된다.[121] 그리고 근본적으로 병사가 병사끼리 훈계를 하거나 하는 행위가 웃기는 행동이다. 군법상으로도 분대장을 제외하면 병사끼리의 명령권은 인정되지 않고 겨우 몇 달 군생활 더했다고 병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사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행동의 근본 원인은 장병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열악하다는 점과 병사의 위에서 명령을 내리는 부사관 이상의 간부들이 직접 장병들을 관리하기 보단 오히려 자기들이 직무유기를 저지르면서 분대장 및 최선임 병사들에게 병사 관리를 맡긴 점에 있다. 단, 위계에 의한 명령은 아니더라도, 한국군처럼 복무 기간이 짧은 상황에서도 계급과 군번을 너무 파편화 시켜서 서열을 잡는 게 문제다 뿐이지 이등병상병의 직무 능력 차이는 존재하며, 최근 육군에서는 사건 사고를 피하기 위해 육군에 부사관 말석에 준하는 대우를 하는 병사 분대장을 위주로 명령 체계가 전달된다.

2014년 이후에는 육군 전방 사단의 거의 대부분의 부대들은 22사단, 28사단 같은 특이 케이스를 제외하면 병영 문화 청정 지역이 되었다. 또한 대형 사건이 발생한 지금은 22사단과 28사단조차도 선임이 조그마한 장난을 쳐도 징계하여 부조리가 등장하지도 못하게 하는 경지에 이른다. 수직적 구조의 특성상 장난과 부조리의 구분이 다분히 자의적일 수 있는 상황에서는 처벌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여론이 많아진 것은 병영 부조리가 사라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계급 끝판왕급 부조리가 터졌다. 박찬주 육군 대장 부부 갑질 사건을 참조.[122]

사실, 특성상 공개된 장소에 서술되지는 않았지만 부조리의 끝판왕은 간부 간 부조리이다. 이건 한국 육군만의 문제라 보기는 힘들지만. 이 역시 마음만 먹는다면 국가 차원에서 제재가 이루어지기는 하나, 병사와 간부가 아예 별개의 조직으로 돌아가고 본인의 생계가 걸린 작은 사회에서의 내부고발이 난이도와 본인의 생계 위협에서 난이도 차이가 극심한 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덧붙어, 간부 간 부조리도 정부가 국군을 전문가집단이 아닌 버러지로 방임한 결과이다. 정부 스스로도 공무원에 대한 최소한적 예우는 커녕, 노예만도 못한 취급은 기본이고, 민자영 찬양이나 외치는 걸 대놓고 지원하고 있어, 적어도 10년은 서로 접촉항 간부 간의 부조리에 대한 대응은 생각조차 못 할 것이다.

생각을 한다면, 부품 호환성을 올리는 공용 표준 차대로 일원화하여, 인원의 피로도를 줄이고, 전문성으로 서로 교류된 전문가로 육군을 비롯한 국군을 키워냈을 것이다.

13. 구조조정

2026년까지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계획되어 있다.[123]
  • 각 계급별 정원이 대대적으로 조정되어, 전체적으로 195,300 명[124]이 감축되며 장교와 병은 축소되는 반면 부사관은 확대된다.
  • 제1야전군사령부와 제3야전군사령부가 지상작전사령부로 통합됐다. 지상작전사령관의 계급은 대장이고 부사령관과 참모장은 각각 중장[125]이며 각 참모처/부/실장들은 소장과 준장이 대부분이다.[126]
  • 군단은 10개에서 6개로 감소하여 중장 보직 4개가 줄어들고, 사단은 48개에서 33개로 감소하여 소장(상비사단장)+준장(동원사단장) 보직 15개가 줄어들고, 여단도 18개에서 16개로 감소하여 준장 보직 2개가 줄어든다. 구조조정에 따라 장성 보직은 310여 명에서 250여 명으로 줄어든다.[127]
  • 사단은 기계화보병사단 3개[128], 보병사단 13개[129]가 해체되었고 2021년 1월에 제2신속대응사단이 제2작전사령부 예하 제201특공여단제203특공여단을 예속받아 창설되었다.
  • 그 결과 총 육군 병력은 2022년 기준 56만 5백 명에서 36만 5천 2백 명으로 감소되었고 그에 따라 전투 부대 편제도 미래형으로 대체된다.

병 복무기간 단축으로 인한 짧은 복무기간[130]으로 인하여 주요 보직(특히 기갑,포병)의 전문성 결여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간부의 비율을 높이며, 신설되는 간부들은 대부분 보병 분대장, 포병 포반장, 기갑 전차장 이하 전 구성원 등 많은 분야에서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참고로 이조차도 부족한 개혁 방안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는데, 생각보다 가용 징집 인력의 감소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도 북한 정도는 쳐발라버리는 절대 우세 상황에서도 서울공화국이라는 문제 때문에 지연공간이 극단적으로 협소한, 적의 공세 능력을 정면에서 받아내야 하는 한국군 입장상 현재의 병력도 부족한 상황이라서 되려 복무기간 단축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북한의 재래식 전면전 전략은 '어차피 남조선의 군을 격멸할 능력은 없는 거 뻔하니, 가용 전력을 한 순간에 쏟아내어 서울만 인질로 잡자'이다.

2015년 이른바 입영대란이라 불린 전문가들의 견해를 비웃듯 입영 희망자들을 소화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 일시적으로 1만 명 가량을 추가 입영시키고 신체검사 기준을 높이는 방안을 채택하면서 또 다른 사회적 논쟁의 불씨와 일부 예비역들에게 허탈감을 남기기도 했다. 이는 전문가들이 틀린 게 아니라 입영 자원 줄어든답시고 설레발에 넘어간 국방부가 신검 기준을 쓸데없이 낮춰 현역 입영 대상자 조절을 제대로 못한 탓이다. 되려, 이런 무분별한 신검 기준 완화로 인해 부적격 자원들이 현역 입영하며 각종 사건 사고가 속출하게 되어 버렸다. 다만 이는 당시 한창 입영 대상자에 속했던 에코붐 세대의 단기적 인구 급증 현상을 간과하여 발생한 참사로 약 2년간의 입영대란 사태 이후로는 급속도로 완화되었으며, 점차 징집 가능 인원의 부족이 심화되는 중이다.[131]

14.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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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5년 개정 이전에는 바탕색이 파란색 단색이었다. 그런데 육군기의 규격이 명확하지 않은 것인지 색이 다른 경우모양이 다른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직무정지A] 직무대리 제2작전사령관 고창준 대장[3] 정원 기준[4] 장교 48,700명, 부사관 85,500명, 병 231,000명[5] 학군, 학사, 간부사관, 전문사관[6] 군사교육 소집 제외대상 외의 사회복무요원 처분을 받은 자 포함.[7] 서류상 모집병의 자원입대는 징집대상자의 병역의무 이행으로 분류된다.[8] 하계훈련을 위탁해 진행한다.[9] 군사교육 소집 제외대상 외의 사회복무요원 처분을 받은 자 포함.[10] 2006년 8월부터 쓰이기 시작하여 [age(2006-08-01)]년 간 사용 중인 슬로건이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정예육군! 하나로 미래로!'였으나, 군 내부에서 호감도가 매우 낮았기에 교체하였다고 한다. #[11] 무궁화의 가지와 그 잎이다.[12] 즉 문양을 제정할 당시 이 문양은 광복군에서 비롯되었다 라고 서술되어있는 서류나 관련 증언[13] 김정민, 홍나영. (2019). 한국광복군의 군모와 모표에 관한 연구. 한복문화, 22(1), 5-16.[14] 만주군은 물론이고 국부군도 일본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군벌들의 영향을 받다 보니 한중일 막론하고 일본군과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았다.[15] 일설에 의하면 태평양 전쟁 당시의 PTSD 때문에 미군이 일본식 군대문화에 기겁했다는 썰이 있다...[16] 정부참 계급은 결국 다시 일본식 대중소 계급으로 회귀하지만 건군기에 잠시나마 부활했던 대한제국식 계급은 영관급 장교 계급에서 그 잔영이 남아 있게 된다. (이쪽은 광복군의 영향이라 보는 관점도 있다.)[17] 링크 지금은 장교와 부사관의 모표가 동일하지만 1980년대까지는 현재의 해군처럼 부사관은 모표가 달랐다. 모양은 현재의 모표에서 태극이 빠진 모습이다.[18] 군복과 방탄모가 원래는 얼룩무늬였는데 신형 디지털무늬 전투복이 도입되면서 바뀌었다.[19] 조선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이 대표적이고 포함해서 50개 민간군사단체가 있었다. 실제로 대동청년단은 미군 G-2문서에 따르면 38선에 있던 초소를 파괴하는 공작도 했었다.[20] 이승만과 친했으며 이승만과 같은 전주 이씨로서 왕족의식이 있었다.[21] 지금의 육군참모총장[22] 반면 광복군쪽에서는 배신을 한 셈이었다.[23] 광복군 출신이 1이면 일본군과 만주군 합쳐서 10이상되었었다.[24] 1945년 9월부터 트루먼 행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을 정식정부와 정식 무장조직으로 인정하지 않아 개인자격으로 귀국했었다.[25] 사실상 조선인들을 통치해본 친일파들을 등용했었다.[26] 귀주강무당학교 출신 중국 중앙군 참모[27] 윈난강무당 출신, 중국 중앙군 참모[28] 중국 중앙군 참모[29] 유동열, 송호성은 6.25 전쟁때 납북이 되었으며 군에 남은 분들은 장군예편했지만, 권력의 정점에 서진 못하였다. 숫자로 보면 일본육사출신과 만주군관학교 출신이 상당히 많았었다.[30] 미군정 철수, 남한 정부 수립 후, 미 군사고문단이 남아 있었다[31] 육군사관학교의 전신[32] 장흥 저자, 한홍구 해제, 장흥자서전, 한울출판사, 2025[33] 광복군 출신, 광복군 노태준의 친부, 중국에서 사망[34] 광복군 출신[35] 광복군 출신[36] 30대의 나이에 육군참모총장을 2번 해먹는다.[37] 장춘을 신경이라고 불렀다.[38] 박정희의 동기이자 절친이었으나 5.16군사쿠데타에 진압군이 되서 박정희와 사이가 안좋아졌다가 백선엽등 장군들의 노력으로 화해시킨다.[39] 박정희 5.16쿠데타 파벌이다.[40] 경기 김포 출신, 중정부장,국회의원 역임[41] 1960년 9월 24일 육사 8기생 중령 등 16명이 최영희 연합참모총장을 찾아가 자진사퇴를 요구한 사건[42] 과거 친일 반민족행위를 세탁할 수 있었다.[43] 황해도 은률출신, 해사1기, 해병여단장 역임[44] 당시 예비역 중령[45] 부산피란임시정부때 만들어진 4년제 육사 1기를 말하며 육사 기수 파동으로 인하여 11기가 되었다.[46] 2명이 탈락되서 나중에 오성회가 된다.[47] 6.25이전 태릉에 있었던 육사[48] 원래는 칠성회지만 2명이 탈락된다.[49] 육사생도1기와 2기는 6.25전쟁 초기 불암산, 수락산 일대에서 북한군과 교전해서 참전경력이 있었다.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육사생도 1기와 2기의 존재가 잊혀지게 된다.[50] 4년제 정규육사 1기로 육사 11기생들끼리는 1기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51] 청와대 대변인 및 문공부 장관 역임[52] 법무감이 된 고등고시 출신 김영균 준장까지 합하면 5명[53] 연대장도 동기 중 가장 먼저 되어 제9보병사단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도 다녀왔다. 같은 연대로 동기인 전두환이 후임으로 간다.[54] 하나회 손영길 후임으로 전두환이 연대장이 되고 12.12 군사쿠데타때 노태우 9사단장 명령을 받은 구창회 9사단 참모장이 서울로 출동하는 내란전통의 부대이다.[55] 광의적으로 노태우 정부때부터 제 6공화국의 시작이며 김영삼 문민정부때 친일청산을 시작했었다.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개칭하고 일본식 언어 표현 습관을 고치기 위해 순 우리말 사업도 이때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56]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 진압 당시 전투병과 교육사령관으로 시위대 진압 임무를 맡았던 소준열 회장 재임기간[57] 공군본부 방공처장, 공군 제 30방공관제단 부단장, 국방부 군사연구위원,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홍보위원[58] 독립운동유족 연금이 생기게 된 것은 1990년대되어서 생긴다.[59] 군쪽에서는 안춘생 장군, KBS이사장을 역임했던 우인 송지영 선생이 대표적인데 박정희 쿠데타 전에는 민족일보 사건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던 진보인사였다.[60] 전두환12.12 군사반란으로 11대・12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오르는데, 전두환은 기본적으로 전임자 박정희 대통령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따라 하는 행적을 보였다. 당연히 박정희가 한일기본조약으로 일본이 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장기저리 정부차관 및 3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교환공문)을 공여하기로 합의를 본 사실을 그냥 넘길 리 없었던 전두환은 1981년 4월 23일부터 노신영 외무장관을 통해 일본에 물밑작업을 해 '북한의 남침을 우리 남한이 막아주고 있는데, 방위비 명목으로 일본이 돈을 내는 게 당연하다'라며 일본에 100억 달러를 요구했다. 이는 소위 아프리카 독재국가의 전임 독재자가 쫓겨나거나, 제거되어 다음으로 권력을 잡은 독재자가 과거 식민지배했던 국가를 찾아가 '예전에 맺은 계약이나 조약 따위는 전임자와 맺은 것으로 새 관리자 격인 자신은 모르는 일이니 자신과 새로 조약, 계약을 맺어야 한다'라며 독재를 답습하는 전형적인 억지다. 이런 전두환의 궤변에 일본은 1982년 7월, 자국의 역사 교과서 왜곡으로 보복했고,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몰랐던 한국인들은 일본에 거세게 항의하자 처음엔 100억 달러짜리 교섭 날아가나 싶어 침묵으로 일관하던 전두환은 국민 여론이 까딱했단 자신도 찍혀나갈 판으로 바뀌자, 전두환이 극일을 주장하며 건립한 건물이 바로 독립기념관이다.영상[61] 지금의 방첩사령관[62] 독립운동가 이영근은 1956년 1월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된 후 3월 병보석으로 나와 종로 신용균(申龍均) 내과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1958년 1월 진보당 사건이 발생하자 4월 10일 일본으로 망명했고 당시 내무부 치안국 경무관이일범, 김용도 덩달아 체포가 되어 고초를 당하고 경찰에서 한독당 인사를 축출해버린다.[63] 남의사 출신 나재하, 한독당 충칭 임시정부 특파원 출신 김병호 등 한독당 주요 간부들이 일망타진된다.[64] 백범 김구의 장남으로 충칭에서 폐병으로 사망[65] 정화암 회고록에서 확인가능[66] 김원봉은 남한 사회에서 못살게구니까 북한에 어쩔 수 없이 간게 아니냐는 추정을 해볼 수 있겠다.[67] 대한민국에 정착해서 한국전쟁 참전한 조선의용대 출신들도 있다.[68] 내란죄는 예비, 음모도 처벌가능하다.[69] 미수 : 실행했으나 실패한 경우를 말함.[직무정지B] 권한대행 부총리기획재정부장관 최상목[71] 직무대행 국방부차관 김선호[직무정지A] [73] 기사[74] K200 장갑차 중에서 심각하게 노후화된 일부 분량은 K806/808로 대체 예정[75] 16대는 야전시험평가로 생산한 초도 생산분으로 2017년 말까지 16대를 생산했다.# 이후 2017년 12월에 야전시험평가가 통과해서 양산 중이다.[76] 4차 양산 수량은 150대[77] 기사[78] 3세대 전차, 1999년~2010년[79] 기사[80] M48A5K: 1세대 전차를 기반으로 했지만 전차포를 M68 105mm 강선포로 장착과 열영상장치 및 디지털사격통제장치 등의 많은 개수를 거쳐 2세대급의 전차로 평가 받는다. M48A5KW : 주한미군이 M-1 에이브람스 전차로 교체하면서 1990년대 초반 한국군에 WRSA로 저가에 판매라는 이름으로 공여된 전차로 M48A5K와 마찬가지로 개량 작업을 거쳐 2세대급 전차로 평가 받는다.[81] 출저[82] 2018년 8월 22일부터 K-9A1으로 개량되어 2030년까지 개량이 완료될 예정이며 추후 K-9A2로 개량할 예정이다. 출처[83] 기사[84] 육군은 K-55 PIP계획을 수립하여 1200여 문의 K-55를 전량 K-55A1으로 개량을 실시했으며 K-55A1에는 K-9 자주곡사포와 마찬가지로 현대화된 전자장비가 탑재되어 M109A6급의 성능을 갖추고 있다. K-9 자주포보다 최신의 기술도 일부 적용을 하여 APU 등을 탑재했고 게다가 K-10 탄약수송장갑차를 본받아서 K-55 차체 기반 탄약수송장갑차 K-56도 개발했다.[85] 1983년부터 기아기공(현재의 위아)에서 생산했다. 참고로 K-9 자주포가 개발되기 이전에는 유일하게 30km의 사거리를 달성하던 야포였으며 차륜형 자주포화(K105HT와 유사하게 개조)를 검토 중이다. K-55는 개량 이전에 장약과 차체 등의 문제 때문에 사거리 24km로 제한되었다가 K-9 기술로 개량된 K-55A1이 등장하면서 30km의 사거리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86] 6.25 전쟁 중에 도입, 이후 1983년부터 생산된 KH-179 155mm 곡사포로 대체된 분량이 상당하지만 여전히 후방사단 및 예비군용으로 사용 중이고 일부는 치장물자로 전환되어 있다.[87] 6.25 전쟁 중에 미군으로부터 공여받는 것으로 시작해서 1970년대에는 실측계산으로 역설계해서 생산했을 정도이며 2018년에도 여전히 사용 중이다. 게다가 2018년부터는 곡사포 포신을 신규로 생산한 것을 자주포화시킨 K105HT 차륜형자주포로 앞으로도 더 사용할 예정이며 기존에 사용하던 노후화된 곡사포는 치장물자 혹은 훈련용으로 전환될 예정.[88] 2018년부터 850문이 양산되는 K105A1 자주포는 보병 사단의 연대급 지원화기가 될 예정이며 2019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하는 120mm 자주박격포는 기계화보병사단의 대대급 지원 화력이 될 예정.[89] #[90] 전술데이터링크 장착 및 사격통제레이더 추가 도입.[91] 러시아군이 극동지역에 대규모 전력을 투사할 가능성은 일단은 낮긴 하다. 러시아의 주된 관심 지역은 유럽흑해이다. 그렇지만 중국군의 한반도 침공에 미군이 개입하면 극동 지역 존재했던 옛 군관구들을 부활시키고 제2편성제도와 전시계급 제도, 각종 치장물자나 동류전환 등을 통해 32개 전차 사단과 32개 차량화 소총병사단을 갖춘 전차 2만 대, 장갑차 3만 대가량의 전략방면군을 동원할 수 있다.[92] 2016년 7월 테스트 비행 중 연구원들의 실수로 프로토타입이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방위사업감독관실이 해당 연구원들에게 1인당 평균 13억 4천만 원을 물어 논란이 되었다. 기사1, 기사2[93] 제1공화국 당시에는 북한의 남침 대비를 해야했다. 그 후 공화국들은 중,러의 개입을 고려해 북한이 선침공 하지 않는 이상 선제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분위기였으며 산 지형이 많은 한반도 특성상 북한군을 괴롭힐 수 있는 병종은 육군이었다.[94] 비서방권에서는 2022년 기준으로 96만의 중국 육군(257 페이지)과 123만의 인도 육군(267 페이지)이 있어서 무조건 최강이라고 100% 확언은 못 한다. # 둘 다 인구가 워낙 많고, 섬국가가 아니라면 육군이 군대의 기초인 건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다 보니 둘 다 규모가 매우 거대하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 문서의 각주에도 나와있듯이 2016년 남아 신생아 수가 마지막으로 20만명 이상이었고 그 이후인 2017년부터 남아 신생아 수가 계속 준 결과 2020년생, 2021년생 남아 신생아 수가 약 13만 명에 불과하기에 아무리 길어도 대략 20년 안에 육군의 대규모 감축이 불가피하다. 군복무 기간을 도로 늘리거나 여성을 징병하는 것은 쉽지 않다.[95] 더 자세한 것은 육방부 문서 참조.[96] 한 술 더 떠서 20년 뒤면 병력이 33만명으로 감소한다고 한다. 물론 기사에 나오듯이 군복무를 도로 늘릴 수도 있겠지만 남성들의 반발도 심할 것이고, 그런 식으로 계속 남성의 군복무를 도로 늘리면 남성들의 사회 진출이 늦어지고, 결국 결혼을 더 늦게 하거나 할 사람도 안 하게 되어서 군대 갈 남아가 계속해서 더 줄어드는 악순환만 발생한다.[97] 당장 나무위키에 군대 관련 문서들만 봐도 상당수가 육군 기준으로 작성되어 있고, 해군이나 공군 내용은 반드시 "해/공군의 경우,~" 식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98] 이는 징병제에서 비롯된 점이 한 몫한다. 성인 남성 대부분이 군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99] 이는 해군의 산하 전력인 해병대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100] 해군과 공군에 비해 가장 장병들에 대한 복지에 대해 보수적이다. 심지어는 전환 복무인 의무경찰, 해양경찰, 의무소방원 등과 비교해도 이러한 문제점은 잘 드러난다.[101] 이는 해군, 해병, 공군 등 타군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문제다.[102] 해군과 공군도 국군에 속하지만, 아무래도 육군이 수가 많고 비율적으로도 사고가 더 많다 보니 이런 문제점이 주로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103] 더욱이 육군의 문제들 대부분이 사회에서도 군대 버릇 못 버리고 오히려 계급놀이하는 상당수의 꼰대들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 즉 군대가 사회의 부조리를 없애기는커녕 직접 양산했으며 그 속에서 그 짓 하던 것들이 사회 나와서도 그 짓을 계속 하다 보니 사회 꼬라지가 아주 개판 난 것이다. 어찌 보면 민간 사회 꼬라지가 도를 넘게 된 요인 중 일부는 육군이 한 셈이다. 요즘 육군이 군기가 빠졌다며 무슨 캠프 취급하는 몰상식한 일부 고령층조차 육군이 사고치는 것을 보면 비난할 정도다. 그런데 정작 군대도 사회도 싹 다 이런 식으로 된 것은 본인들이 상당수 기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자기들은 그걸 또 모르거나 부정하는 등 현실도피를 시전하기도 한다. 그런 인간들이 자기가 만든 작품을 보고 비난하는 꼴들을 보이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다.[104] 전쟁 후 맺은 한미상호방위조약 때문에 전쟁이 나면 조약에 따라 지원된다.[105] 한국이 먼저 단독으로 공격을 하지 않는 경우, 미군과의 합의를 통한 선제공격 상황에서는 미군의 지원이 사전에 이뤄진다.[106] 단순히 한국의 지리점 이점과 미국의 전쟁수행비용을 비교하는 것뿐 아니라, 미국이 약속해온 핵우산 및 상호방위조약의 실효성, 나토의 의의 등의 신뢰저하가 이어지면 미국의 안보위기가 훨씬 커질 수 있다.[107] 때문에 대대 이하 단위로 찢어진 육군 주둔지를 통폐합하여 미군 기지(캠프) 같은 환경을 만들자는 소위 '캠프화'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108] 학창시절 행실에 문제가 많던 사람들이 많이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없이 지낸 사람들은 해군으로 가지 해병대로는 잘 안 간다.[109] 물론 이 문제는 해군, 해병대, 공군 등 타군도 어느정도 갖고 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은 사실 전시에만 유효하고 평시인 현재로썬 하루 일과가 업무가 끝나면 사실상 내무 생활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상관에 대한 충성을 더 요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110] 이는 전환복무였던 과거 의무경찰, 의무소방, 해양경찰 등과 비교해도 잘 드러나던 부분이었다.[111] 물론 부대마다 케바케이긴 하지만 보통 상급 행정 부대보다는 야전 부대(군단, 사단, 독립여단)에서 종종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해군, 공군도 서류상으로는 성과제 외박으로 되어있지만 별 다른 사유가 없으면 최대한 보장하게 되어 있어서 사실상 정기 외박이라 봐도 무방하다. 잘리는 경우는 징계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아니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징계받지 않는 것이 성과인 셈. 만일 부대 사정으로 못 나가는 경우는 미뤄지거나 당겨서 나가게 한다.[112] 그러나 함정의 경우 장기간의 함정 근무와 출동 대기 태세 때문에 육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출퇴근 개념이 약하다. 또한 공군 내에서 군사 경찰, 방공 특기의 경우는 타 특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출퇴근 개념이 약하다.[113] 만약 이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초과 근무로 인한 가점 제도를 통해 이게 쌓이면 포상 휴가로 내보내려 한다. 해/공군에서는 거의 전원이 적어도 10일, 군사 경찰·급양·정비 특기는 무조건 20일 꽉 채워서 포상 휴가를 나간다고 봐도 무방한데 (이 중 군사경찰과 급양은 주 5일 근무 미적용 특기라 기본 정기 외박 일수도 다른 병사에 비해 많다.), 포상 휴가 나가는 제1의 원인이 초과 근무이다. 거기에 당직 근무도 가점을 준다. 육군에서는 포상 휴가를 받으면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지만, 해군, 공군에서는 일종의 초과 근무에 대한 수당 내지 보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 대단한 건 아니라고 취급한다.[114] 단, 공군과 해군의 육상부대처럼 출퇴근 개념이 어느 정도 정착되어 있는 상급 행정 부대에서는 일선 야전 부대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덜한 편이다.[115] 육군군수사령부, 육군교육사령부, 수도방위사령부, 국군수송사령부 등[116] 막사에서 나와 사무실로 가는 것을 출근, 사무실에서 나와 막사로 복귀하는 것을 퇴근[117] 이는 일본제국 해군이 기본적으로 자국민(일본인)만을 징집했다가 전쟁 말기 상황이 급박해지자 식민지인들도 해군에 집어넣은 경우이다. 거기에 해군의 군함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사관-부사관의 경우 해군사관학교 같은 전문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인원들이기 때문에 식민지인들은 거의 100% 육상기지나 해군 내부의 육전대로 배치되었다. 해병대 주요 창설 멤버들이 이쪽 육전대를 포함해 육군처럼 만주군 출신들이 주축이 되었다.[118] 할짓 없어서 가혹행위를 하는 사람이 좀 있었던 것으로 보임. 실제로 군에 스마트폰이 도입되었을 때 가혹행위가 급감했음.[119] 물론 전문학교 항공정비과에 진학한 후 공군으로 오는 경우는 더러 있다. 해군, 공군도 군대이기 때문에 육군보다 상대적으로 적긴 해도 또라이는 있다.[120] 원래는 6개월이었다가 2023년 6월 입대자부터 4개월로 단축되었다.[121] 일부 예비역은 선임이 후임한테 고발당할까 후임이 엉망으로 굴어도 지적하지 못하는 역부조리가 생긴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왜냐하면 군대에서 병영 문화를 개선할 때마다 예비역들이 떠드는 낭설에 불과할 뿐이다. 2000년대 초반에도 이등별이라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정작 군내에서는 후임병이 구타를 못 이겨 자살하는 등 군 내 부조리는 항상 있었다. 이는 부조리에 대한 척결 의지가 한국군보다 매우 강한 미군에서도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이다. 더 웃긴 것은 처음 군복무를 하게 되는 1년 안 되는 장교들을 짬이 부족하다며, 은언중에 대놓고 무시하는 것은 침묵으로 일관한다.[122] 가해자는 육군 제2작전사령부 대장의 아내이다. 다른 기사에 따르면 공관병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집안일을 떠넘긴 것도 모자라 베란다에 가두는 등의 폭력을 가했다고 한다.[123] 2014년에 나온 기사이므로, 2024년 현재는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계획이 수정되어 병력이 2만 2천명 더 감축되었다.[124] 2000년 정원 대비 2022년 정원 감축분[125] 가끔씩 소장이 임명되기도 하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중장(진)일 것으로 추정된다.[126] 야전군 사령부 군종실이나 이로 인해 대장 보직 1개, 중장 보직 최소 4개, 소장 및 준장 보직이 수십개 줄어들었다.[127] 2000년 대비, 군단은 2007년 11월 30일에 제9군단&제11군단이 해체되었고, 2022년 11월 30일에 제6군단이 해체되었으며, 2023년 6월 30일에 제8군단이 해체되었다.[128] 20, 26, 30(제30기갑여단으로 감편)[129] 2, 23(제23경비여단으로 감편), 27, 28(* 2025년 말 해체 예정), 57, 61, 62, 65, 67, 69, 70, 71, 76[130] 26개월에서 18개월로 단축[131]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남아 출생아 수는 13만이 안 된다. 따라서 2022년 출생 남아들이 보통 현역으로 입대하는 20살이 되는 해인 2042년이 되면 남자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현역으로 입대시킨다고 쳐도 입대 인원이 1년에 13만도 안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도 저 인원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군복무에 적합할 때의 희망적인 이야기일 뿐이라서 현실은 13만은커녕 10만 남짓이 최대다. 따라서 2040년대가 되면 부적격인 인력들을 제외하면 매년 징병대상이 수만 명대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132] 약사 건군 초창기 국군의 계급은 각 군마다 타국군처럼 독자적인 고유의 체계가 존재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부를 거쳐오며 지금의 형태로 서서히 일원화되었다. 초창기 한국 육군은 미국 육군의 계급 체계과 유사한 계급 체계를 적용했으나, 언제부턴가 만주군의 계급과 특징이 유사해졌다.